국유본론2014

[본문스크랩] 인드라 국제유태자본론 : 루터는 교황에게 사도로서의 특권을 부여한 신을 부정해야 했다

카리스만 2014. 9. 1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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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국제유태자본론 : 루터는 교황에게 사도로서의 특권을 부여한 신을 부정해야 했다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4/09/10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본주의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렵다. 어떤 이는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철학자들과 역사가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들을 하였다. 자본주의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가장 현명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이 남긴 책들을 다시 읽어 보는 일이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30502.22024195343


-> 우리는 신앙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음에도 신앙을 믿는 수많은 이들에게 신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신앙자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어렵다. 어떤 이는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것이 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수세기 동안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였다. 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가장 현명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남긴 책들을 다시 읽어 보는 일이다.


수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신에 관해 말해왔으나, 여전히 신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있느냐 없느나는 유신/무신 논쟁부터 시작해서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신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다.


병 속 파리 신세인 게다. 하면, 병 속 파리 신세를 면할 방도는 없을까. 그 방법 중 하나가 부정 신학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 신학을 모조리 부정하다 보면 진정한 신에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당대 가톨릭은 왜 도미니크 수도회를 필요로 했나.

 

카타리파 때문이다.

 

"청정무구()를 의미하며,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 해서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과 육식 ·결혼생활, 재산의 사유 등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특징이다. 11세기 후반 불가리아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종파()가 남유럽에 나타나, 특히 1140년부터 30년간에 걸쳐 그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여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북이탈리아에까지 퍼지는 등, 12세기 말까지 11주교구()가 개설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여러 차례 개종토록 했으나 효과가 없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이 십자군은 그 잔혹성으로 후세에 오명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카타리파는 이때부터 붕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




 

카타리파란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 이란 종교 유파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혼합하여 아르메니아에서 유래한 종교 유파이다. 동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주원장의 명나라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명교를 의미하고, 혹은 환타지 무협지에서는 마교를 말한다.

 

카타리파가 왜 문제였나. 교회 바깥에서 교회를 맹렬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악의 무리요, 자신들이 진정한 신의 사도이기에 교회는 자신들 교회로 대체해야 한다 주장했다. 옷 하나만 달랑 걸치고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고 둘셋이서 함께 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이 카타리파였다. 카타리파는 극단적인 이원론자들이었다. 물질적인 것은 악이요, 정신적인 것만을 선으로 보았다. 해서, 결혼, 사적 소유, 육식을 금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다. 

 

가톨릭 교회는 카타리파를 사탄의 무리로 몰아서 카타리파를 강간한 뒤 죽이거나 화형에 처한 뒤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허나, 카타리파를 통해 민심의 동요가 있는 것은 자명한 일. 가톨릭 교회는 당근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나온 것이 도미니크회인 게다. 민심 수습용인 게다.

 

하면, 다른 수도회에 대해 도미니크회 특징은 무엇인가. 교리에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드라처럼 썰 푸는 데에 강점이 있다는 게다. ㅋㅋㅋ.  그런 까닭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왔고, 에크하르트가 나온 것이다.

 

특히, 에크하르트가 중요하다. 왜인가. 서양이든, 동양이든, 보통 시조로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신비주의자이다. 뉴튼도 마지막 연금술사로 불리지 않던가^^? 인드라 역시 신비주의자이고~!

 

인드라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 중, 혹은 인드라 번개에 참여하는 이들 중 대체적으로 20%는 영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하면, 왜 에크하르트인가. 루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luther1?Redirect=Log&logNo=10053959987

 

루터 사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의인'이 아니라 '성화'이다. 이 대목에서 루터는 에크하르트에게 크게 의존한 것이다.

 

"셋째로 루터는 신비주의자들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특별히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타울러는 1361년 사망 할 때까지 라인강가의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승이며 신부였다. 당시 루터는 신비주의적인 합일과 금욕주의적인 생활에 매료되었다. 타울러의 사상은 그의 설교집에 잘 드러나 있다. 타울러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위해서는 인간 자신의 어떤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의를 얻는 길은 자기 포기와 자기 멸절를 통해서 참된 복종을 통해서 가능하다.[1]) 자신의 모든 욕망, 의지,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자신에게서부터도 분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소멸 될 때에 하나님과의 결합이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울러의 가르침은 루터에게 크나큰 관심을 끌었다. 루터가 그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세 신비주의가 실제로 어떤 중요성을 지니면서 영향을 주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1516-18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을 형성하던 중요한 시기에 루터는 독일의 신비 전통에 최고의 찬사를 표했다. 그의 친구 죠지 스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는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의 설교들은 “순수하고 확고부동한 신학”으로 그리고 복음서들과 밀접한 합의들을 보여 주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그가 1518년 95개 테제들에 관해서 변호를 할 때 스콜라 신학보다는 타울러에게서 훨씬 훌륭한 신학을 발견했노라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학자들이 엑크하르트와 타울러를 종교개혁의 진정한 선구자들로 간주하면서 독일의 신비 전통을 개신교 신학의 중세적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된다. 루터가 중세 수도원주의나 고행을 통한 선행-의인화 신학을 공격할 때 그의 공격의 자원은 독일의 신비전통이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13&docId=465483&qb=66Oo7YSwIOyLoOu5hOyjvOydm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XPllU5Y7bRssuMKnfRssc--432244&sid=TudzuXJo504AAEmMCW8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래서인지, 루터는 종교 개혁을 단지 교회 부패를 일소하는 데에만 두지 않았다. 당대 루터까지의 교회사를 철저하게 공부한 루터인 만큼 교황을 비롯한 목자들의 행태만을 비판한다 해서 달라지지 않은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가 행하는 비판은 보다 근본적이어야 했다.

 

해서, 그 비판은 필연적으로 교황을 뛰어넘어야 했다. 교황에게 사도로서의 특권을 부여한 신을 부정해야 했다. 즉, 예수다. 예수를 넘어서 신과 직접 통한다. 이것이 '성화'이다. 중세라면 이단이라고 정죄할 대목이다.

 

허나, 루터는 정치적이기도 했다. 루터는 라틴 신비주의인 베르나르두스의 신과의 사랑을 매개체로 활용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통한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나르두스 초기 시토파가 주장했던 성경을 통하여 신과 소통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고전학파 스코틀랜드 유대인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 중농학파 케네에게서 '생산' 개념과 '자유무역' 개념을 차용해서 대박을 터트리더니 독일인 루터는 프랑스 시토파 베르나르두스의 '성경'과 '노동'과 '사랑'을 차용하여 왕대박 축포를 쏘아올린다. 이 모두가 감성적인 실천에 유난히 강한 켈트적 프랑스인의 전통에서 비롯하였으니 아이리쉬적 음악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하면, 루터 사상은 프랑스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나. 호평이었다. 이유는 루터가 시토회 베르나르두스 사상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긴, 예수회 로욜라도 시토회 수사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루터 이후로 헤겔이 등장하고, 문제의 일루미나티 바이샤우트가 등장한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434902


마찬가지 방식으로 수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해왔으나, 여전히 혼란스럽다면, 그간 말해왔던 이야기들을 맑스도 예외없이 포함해서 죄다 비판한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아울러 이러한 길없는 길은 에크하르트나 루터처럼 당대 기득권 세력에게 탄압받아 이단 혐의나 반역 혐의를 받기 마련이다. 인드라 자본주의 이야기도 국유본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날 쪽발히, 쪽바리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