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 태머니파, 아론 버
국제유태자본, 태머니파, 아론 버 국유본론 2008
2008/07/19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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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이슈 연구
10-27. 국제유태자본, 태머니파, 애런 버(Aaron Burr)
6. 1789년에 결성된 태머니파가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런 바의 지도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태머니파=민주공화당 중심기구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애런 버(Aaron Burr) VS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806년 뉴저지에서 전직 미국 부통령인 애런 버와 미국 전직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세기의 대결을 합니다. 실전 승부! 현피! 해밀턴은 쓰러지고, 살아남은 애런 버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워싱턴으로 도피합니다.
지금 와서 보자면, 다소 부끄럽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리운 면도 있는 일이지만, 1990년대 초기 피씨 통신을 하던 시절에는 나 역시 혈기왕성했던 때여서 논쟁하다 말다툼이 나서 가끔 현피 뜨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말장난에 그쳤지만, 나 역시 실제로 한 번 현피를 뜬 적이 있습니다. 어린이대공원에서 만나서... 어떠했냐구요? 목숨을 걸고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은 유치찬란함이랄까. 그러나 끝나고 나서는 마치 자위행위 뒤의 허탈감처럼 자신에 대한 모멸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해서,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젊은 날에 한 번 경험하고 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19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결투는 보기 드문 장면이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1850년 아우구스트 빌리히는 맑스를 '반동'이라 비난하였으며, 그해 9월 1일에 열린 '동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빌리히는 맑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맑스는 결투 신청을 거절하는 '비겁함(?)'을 보였지만, 대신 결투를 받아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으니 콘라트 슈람입니다. 그는 명사수 빌리히와 대담하게 맞서지만, 쓰러지고 맙니다. 해서, 다들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총알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서 기절한 것을 빌리히 측이 죽은 줄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콘라트 슈람은 맑스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맑스가 신라인신문 정치경제평론지 발간을 위해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해서, 바다를 건너서 미국 자금을 끌어올 궁리를 했다고 합니다. 맑스가 찰스 앤더슨 데이나를 생각하였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찰스 앤더슨 데이나 뉴욕트리뷴지 편집장이 1948년 독일혁명 당시 독일에 머물렀고, 맑스가 트리에 못지않게 휘젓고 다녔던 퀼른을 주목하였다면, 맑스를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콘라트 슈람이 정확히 언제 갔는지는 모릅니다만 미국에 가긴 갔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연후에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옵니다. 혹 그 기간이 맑스가 뉴욕 트리뷴지에 연재하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이 왜 결투를 해야만 했습니까. 그 사연이란?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은 태어난 해가 비슷한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해밀턴은 서인도제도 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프랑스 위그노파였다고 합니다. 홀어머니 곁에서 컸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도 죽습니다. 에런 버는 장로교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2살 때 부모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됩니다.
해밀턴이 동네 유지의 힘으로 뉴욕 대학생활을 시작하는데 마침 그때 미국 독립전쟁이 터집니다. 기회를 엿보던 해밀턴에게는 전쟁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해밀턴이 초기에는 전쟁 물자 및 인원 관리를 맡다가 이내 워싱턴 부관이 된 데에는 두 가지, 하나 뉴욕이 전략 요충지로 부각되고 있었는데, 이런 뉴욕 사정을 잘 아는 이였다는 점(해밀턴 대학생활 고작 2년^^! 1770년대 뉴욕 인구가 3만여 명, 1790년대에 가면 17만여 명이었다고 합니다.)과 둘, 당시 미국 편을 들었던 프랑스와 공동작전이 빈번한 탓에 프랑스어 구사 능력(어머니 프랑스 위그노파^^!)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에런 버는 부모가 남겨준 일만 파운드 덕분에 프린스턴 대학생활을 합니다. 역시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출세를 위해 워싱턴에게 찾아가지만 자리를 얻지 못해 퀘벡전투에 갔다가 훗날 워싱턴 참모로 합류합니다.
이들이 악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둘 다 정치적 기반을 뉴욕으로 하였다는 점입니다.
해서, 악연의 첫 번째 시작은 해밀턴의 장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이들이 상류사회로 급속히 진출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유력 집안 딸과의 혼인이었습니다. 해밀턴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명문 스카일러(Schuyler)의 딸과 결혼합니다.
필립 존 스카일러는 워싱턴과 같은 야망이 있었지만, 독립전쟁 때 활약은 둘째 치고 무능력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데에 급급합니다. 해서, 잘 나가는 사위 덕에 말년을 '우아하게' 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뉴욕 주에서 처음으로 뽑힌 2명의 미국 연방 상원의원(1789~91) 가운데 한 명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순탄하였지만, 1791년에 그는 다시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다가 아론 버에게 패배하고만 것입니다. 사위가 워싱턴정권 재무부장관이라는 막강 권력 자리에 있었음에도 낙선하였으니 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사위가 도와주어도 장인이 인물이 못나서 떨어졌다는 비난을 뒷담화로 듣다 보면 울화가 치미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 깊어 에런 버에게 1797년에 자리를 빼앗아오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사임하고 맙니다.
해밀턴도 분했을 것입니다. 장인의 낙선은 재무부장관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해밀턴의 권력이 고작 그 정도이냐, 하는 풍문을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대 언론이란 것이 대체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돈을 퍼부어 자기 신문을 만들어 자신에 대한 홍보와 정적에 대한 인신비방에 전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기까지 해밀턴이 손대어서 실패한 사례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서 해밀턴은 서서히 지는 해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밀턴에게 에런 버가 또 다시 불을 지릅니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이번에는 실패한 에런 버가 해밀턴의 영역인 금융업에 진출했던 것입니다. 근래 한국 코스닥에서 유행했던 우회상장방식으로 말입니다. 당시 뉴욕민이 황열병에 시달려 깨끗한 수돗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1799년에 맨해튼 상수도회사가 설립이 됩니다. 이때 에런 버가 '주식투자나 차용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자본잉여금으로 삼을 수 있다'는 조항 하나를 슬쩍 집어넣습니다. 은행업 진출을 위한 꼼수를 써서 해밀턴을 엿을 먹인 것입니다.
오, 마이 김삿갓! 에런 버가 뉴욕시를 무대로 공공의 이익을 내세워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 이것이 훗날 태머니파의 지도적 '강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에런 버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해밀턴의 지위는 날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애덤스 정권 하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애덤스와 불화합니다. 이유는 대 프랑스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해밀턴은 대 프랑스 정책에서는 대영국 정책과는 달리 강력하게 전쟁을 주문하였는데, 해서 선전포고 없이 미국은 프랑스와 전쟁상태로 돌변합니다. 독립전쟁 때 맺은 동맹관계가 휴지조각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외국인법과 선동금지법이 고작이었습니다. 본래 외교란 강경하게 나가야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이조약에 이어 프랑스에게까지 굴욕외교를 펼쳐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갈등이 발생하는데, 애덤스가 실제로 이 법을 거의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해서, 뉴잉글랜드 급진파와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동중부파 해밀턴이 애덤스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쟁점 하나. 과연 외국인법과 선동금지법이 문제였을까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이 징병을 위해 이민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반 미국 이민 수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해서, 이 법은 당대에서 사실 유명무실했습니다. (이런 법이 시행된 근본적인 배경은 후일 말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선동금지법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이조차도 오늘날 사정에 비추어보자면, 매우 사소할 지경입니다.
오히려 당대 유권자가 애덤스 정권에 등을 돌린 것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 당시 선거권이 유산계급 남성에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1997년 애덤스 정권이 노예, 토지, 교역에 대해 과세를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미국 유산계급을 분노하게 한 것입니다.
- 야! 애덤스! 니가 영국이랑 뭐가 달라?
그러나 냉정하게 봅시다. 이것이 당대 국제유태자본의 진정한 책략이 아니었을까요. 영국은 당시 미국 식민지 관리비용으로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은 거의 완벽한 자치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 미국을 독립시킨다면 그간 엄청나게 지출했던 미국 식민지 관리비용을 0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 이를 보다 동인도회사에 역점을 둔다면?
실제로 영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도 식민지화를 강화하고, 프랑스 혁명정부의 네덜란드 정복으로 네덜란드 왕이 런던으로 망명하자, 네덜란드 국왕에게서 동남아 권리를 따냅니다. 또한 영국은 보다 더 영국 해군력을 강화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서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이미 세계 최강 영국 해군 전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태양이 지지 않는 영국을 만든 동인은 미국 독립에 있었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조지3세는 왜 미국과의 왕과 신하 관계를 먼저 끊어서 미국인이 불가피하게 독립하는 도리 외에 없게 만들었을까요^^!
문제는 그만큼 미국 독립정부가 부담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간 매우 미미한 세금만 내고서 생색을 내던, 우리의 버지니아 대농장 노예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저 영국 젠트리의 짝퉁처럼 영국 젠트리보다 더 돈을 들이되, 더욱 우스꽝스럽게 살던,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이 진실을 접하자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명료한 사태 전개에 조지 워싱턴은 외국의 음모에 치를 떨면서 재산 보호에 나서 삼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온통 책임을 떠맡은 애덤스는 할 수 없이 과세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조치는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인법이나 선동금지법이나 그저 소수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과세는 당대 투표권이 있는 유산계급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해서, 1800년 선거는 민주공화파에 개를 후보로 내세워도 당선이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미 이전에 실시한 의회선거에서도 민주공화파가 압승을 거둡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뉴욕주였습니다. 왜냐하면 당대 뉴욕주는 연방파의 아성이었으며, 해밀턴의 근거지였기 때문입니다. 선거의 초점은 뉴욕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뉴잉글랜드,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메릴랜드 삼파 구도였기 때문입니다.
1800년 선거에서 에런 버의 활약으로 민주공화파 후보 토머스 제퍼슨과 에런 버는 동수로 공동 1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기록하게 됩니다. 동중부의 활약 없이, 특히 뉴욕주의 활동 없이 민주공화파가 우세를 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대 투표 방식이었습니다. 따로 부통령 선거를 하지 않고, 차점자가 부통령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인 이표였습니다. 따라서 각 파벌은 자파 후보 둘을 택하는, 요즘 식으로 보면, 한나라당 당대표 선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에런 버가 동수를 기록한 것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에 비한다면, 에런 버란 새파란 정치 초보에 불과하였는데 말입니다.
당대 규정에 따르면, 동수인 경우, 연방 하원에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당대 하원은 연방파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직전 선거에서 민주공화파가 압승을 하였지만, 그들은 아직 임기 전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재미있게도 지난 한국 대선처럼 적대하는 파벌이 자파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사태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하여, 연방파들은 고심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만만하냐.
흔히 하는 연방파 대 공화파 대립과 달리 실상은 개그 한마당이었습니다. 35차까지 가는 표대결에서 연방 소수파이자 핀크니를 지지했던 알렉산더 해밀턴파는 줄기차게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했던 반면 애덤스파는 해밀턴이 싫어서 에런 버를 은근히 지지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애덤스 대 제퍼슨 구도는 허구였던 것입니다. 이는 훗날 애덤스의 아들, 퀸시 애덤스가 민주공화당 대통령이 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해법을 찾습니다. 뉴잉글랜드 급진파가 그간 해밀턴과 함께 하였는데, 제퍼슨이 귀염둥이 모드로 돌변하여 마음을 바꿉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애걸합니다. "나 말이죠? 알고 보면 연방파라니까요. 우리에게 연방파, 공화파가 어디 있답니까. 우리는 하나입니다. 위 아 더 월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 오늘부터 난 버지니아 사람이 아니라 연방 사람~! 뉴잉글랜드인 파이팅~!"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 연방파의 급진파인 뉴잉글랜드 지도자들이 연이어 토머스 제퍼슨을 칭송합니다. 토머스 제퍼슨도 뉴잉글랜드 덕에 대통령이 되다 보니 쏠립니다, 오늘날 이명박처럼. 하지만 이내 깨집니다. 버지니아 의원들이 뿔이 난 것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공화파 대통령인가, 아니면 연방파 대통령인가.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파의 트로이목마였던 말인가, 연방파 스파이, 가짜 민주공화당 대통령.
해서, 당황한 토머스 제퍼슨은 집토끼 챙기려고 그 좋은 머리를 오직 술수에만 적용시켜 좌충우돌을 거듭합니다. 그러자 이에 뉴잉글랜드 급진파가 실망하고 맙니다. 해서, 그들이 구상한 것은 북부동맹이었습니다. 문제는 북부동맹이 성공하려면 동중부, 즉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가 동조해야하므로 이들의 리더격인 뉴욕이 승부처였습니다. 북부동맹 측은 처음 해밀턴에게 제안합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자신이 만든 연방을 자신이 파괴할 수 없다는 '나약함'을 드러냅니다. 역시 그는 대통령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뻔뻔함이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한다, 나의 목표는 인류 평화, 인민 번영이 아니라 출세일 뿐이다,라는 목적!
반면 에런 버는 수락합니다. 문제는 그가 뉴욕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숙명처럼 피할 수 없이 전개된 연방국가, 미국에 대한 미래가 불확실하였기에, 미국 유산계급이 에런 버의 혁명적 실험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후일 미국 정치인들이나 일부 여론이 토머스 제퍼슨보다 에런 버를 더 높이 평가하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에런 버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캐나다-멕시코 연방이 탄생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에런 버의 구상은 천재적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동시에 천재적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독생자는 하나일 뿐이니!
애덤스와 제퍼슨의 대결은 예고편이었을 뿐입니다. 본편은 에런 버 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던 것입니다.
결투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9/2008050900819.html
알렉산더 해밀턴
http://en.wikipedia.org/wiki/Alexander_Hamilton
알렉산더 해밀턴
http://blog.naver.com/moguwa?Redirect=Log&logNo=140011812051
스카일러[Philip John Schuyler]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B&i=160496&v=43
풍운아 아론 버
http://blog.naver.com/just2all?Redirect=Log&logNo=4530804
아론 버
http://en.wikipedia.org/wiki/Aaron_Burr
애런 버의 은행업 진출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804/e2008041617544497490.htm
시티즌 즈네, XYZ 사건
역겨운 토머스 제퍼슨
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5-05/2005-05-20-voa16.c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