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유본론2008

국제유태자본과 빌더버그

카리스만 2013. 11. 29. 02:28

국제유태자본과 빌더버그 국유본론 2008

2008/08/02 16:51

http://blog.naver.com/miavenus/70033647523

   

   

   

국제유태자본과 빌더버그

   

* 아직 나는 다니엘 에스툴린의 빌더버그 그룹을 읽지 않았다. 해서, 이 글은 그간 빌더버그에 대한 나의 잠정적인 자료 조사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나는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류에 대해서는 별로 신뢰하지 않으므로 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글 읽기를 포기하기 바란다. 언젠가 프리메이슨류 음모론이 허구적임을 밝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 빌더버그는 무엇인가

   

나는 국제유태자본 기본 계통도를 동인도회사 - 로스차일드 - 300인위원회 - 빌더버그 - 삼각위원회로 보고 있다. 동인도회사란 마약 장사로 초과이윤을 낸 국제유태자본의 자금줄이었다.

   

1810년 베어링이 사망한 이후 로스차일드가가 시티지구에서 베어링 가문과의 전투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즉, 1814년 동인도회사 인도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자 이를 대부분 흡수하고,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 증권가를 석권하고, 이후 1820년 최초의 공황이 일어나는데, 이처럼 베어링 사망한 해인 1810년부터 최초의 공황 발생 해인 1820년까지를 나는 국제유태자본 태동기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해서, 로스차일드 이전 시기를 국제유태자본의 이전 역사로 간주한다. 내가 이렇게 간주하는 까닭은, 국제유태자본의 속성이랄 수 있는 전쟁과 금융을 용병을 매개로 결합시킨 최초의 사례가 로스차일드가로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전쟁이란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로스차일드 이후로는 전쟁 그 자체가 돈벌이가 되는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빌더버그 그룹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간, 영국 왕실과 네덜란드 왕실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서양 연대회의체이며, 금융-에너지-산업 지배를 강화시키는 현대판 동인도회사 주주총회이며, 회의체의 형식은 로스차일드 가문 5형제가 유럽에 산재하면서 국제적 동맹 체제를 형성했던 데서 온 것이며, 내용적으로는 마셜플랜으로 보호받은 유럽대륙, 특히 독일에 투자된 국제유태자본의 안정과 발전을 꾀하여, 유럽중심주의를 통한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미주 지역에 좀 더 방점을 찍는 록펠러의 삼각위원회와 미세하게 구분된다.

   

다만, 1990년 빅터 로스차일드 사망 이후 이전과 달리 곳곳에서 공공연하게 빌더버그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조직의 변화 양상이 엿보인다. 그간 국제유태자본이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조직을 태동시키고, 조직 위의 조직, 조직 뒤의 조직 양식의 비밀주의를 채택했던 것에서 볼 때, 오늘날에 이르러 어쩌면 빌더버그는 껍데기만 남은 채, 새로운 조직의 보안을 위해 형식적으로만 열리는 회의체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1991년 데이비드 록펠러가 빌더버그에서 행했다는 연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경우로서 데이비드 록펠러의 사망 이후삼각위원회도 같은 절차를 밟아나갈 수도 있다.

   

빌더버그 그룹은 폴란드 사회주의자 조셉 레링거(Joseph Retinger)의 제안과 나치(Nazi) 비밀경찰(SS) 출신의 베른하르트 네덜란드 왕자의 주도, 빅터 로스차일드의 후원 속에서 1953년 첫 회의가 빌더버그에서 열렸다고 하여 이후 빌더버그 그룹으로 통칭된다.

   

이미 나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이력을 소개하였고, 이후에도 한 번 더 빅터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쓰기에는 빌더버그 그룹 주도자인 베른하르트 네덜란드 왕자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여러분은 궁금할 것이다.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은 이차대전 전쟁으로 양국간 국민감정이 안 좋아 축구할 때도 공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네덜란드 왕실이 어째서 나찌 친위대였던가 하는 의혹 말이다.

   

이는 네덜란드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하면 된다. 네덜란드 왕가는 독일공국 귀족가문에 그 뿌리를 두는데, 이는 영국 하노버왕가와 작센왕가(이차대전 영향으로 윈저왕가로 바꾸었다.) 모두가 독일 왕가에 뿌리를 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해서, 독일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영국 왕실 일각에서도 친밀감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2. 베른하르트 왕자는 누구?

   

베른하르트 왕자는 1937년 율리아나(빌헬미나) 여왕과 결혼한 독일 귀족이자, 현 네덜란드 여왕인 베아트릭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이차 대전 때 나찌와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죽기 전까지 받았는데 그 자신은 부정한 바 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 여왕조차 1966년에 외교관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Claus von Amsberg)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클라우스가 독일의 태생이며 나치 소년단을 가입했던 전적이 있다는 이유로 전 국민적인 심한 반발과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율리아나 여왕은 윌리엄(빌럼)3세의 딸이다. 명예혁명으로 부인과 함께 영국 공동왕으로 추대되었던 윌리엄(빌럼)3세가 죽자 독일 출신 윌리엄4세가 네덜란드왕이 된다. 나폴레옹전쟁이 벌어진 1792년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네덜란드왕은 영국 런던에 피신한다. 그리고 도피생활 중 1795년 네덜란드왕은 영국왕실에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권리를 넘긴다. 해서, 네덜란드왕실이 권리를 양도하는 대신 영국 동인도회사에서의 일정 지분을 확보하였을 것이란 추정은 자연스럽다. 이후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1815년 독일 귀족 정치가 가게른의 활약으로 윌리엄6세가 윌리엄1세로서 즉위했다.

   

이를 통해서 보듯, 비록 율리아나 여왕이 이차대전 중 독일군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선대처럼 영국 런던으로 피신하지만, 네덜란드 왕실 역사에서 친독일풍과 영국 왕실와의 유대, 국제유태자본과의 협력은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다.

   

3. 네덜란드 왕실의 이력

   

나사우는 1866년까지는 독립된 독일동맹의 공국이었으며, 그 이후로 1944년까지는 프로이센령 헤센나사우와 비스바덴에서 주요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라인란트팔츠주와 헤센주에 속한다.

   

1100년 무렵 라우렌부르크백작이 나사우성을 축조한 사실에서 이 이름이 붙여졌고, 1160년 이후 이 집안은 나사우백작 집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255년 이 집안은 발람 가계와 오토 가계로 나뉘고, 주류인 발람 가계는 독일 국왕 아돌프(재위 129298)를 배출하였고 영토의 분할 통합이 되풀이된 뒤 18021806년에 재통합되었고, 1806년에 후작위가 인정되었다. 오토 가계는 1514년 당시 나사우(Nassau) 백작 '조용한 윌리엄'이 '오런지공'의 지위를 상속받아 오런지 나사우(Orange-Nassau)가문이 되었다.

   

오런지공 윌리엄(오란여 빌럼)은 1515년부터 에스파냐왕 겸 독일 황제 카를 5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 총독이 된다. 그러다가 1566년 에스파냐에서 파견한 네덜란드 총독 알바공과 그의 군대에 반란을 일으켜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 북부 7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오런지공 윌리엄의 지휘로 에스파냐군을 몰아냈고, 오런지-나사우 가문 혈통의 오런지공이 1579년 성립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초대 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581년 북부지역 신교국가로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1588년에는 영국과 함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6세기 해상 패권을 장악하며, 1618~1648년 30년 전쟁 끝에 완전한 독립이 승인되었다.

   

이 당시 오런지 윌리엄 군대는 헤센-카셀의 란츠크네이트 용병에 대해 처우개선을 내걸어 신분 보장을 함으로써 강력한 군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여기에 나사우 백작 가문의 독특한 군대 전술이 결합되어 강군이 된다.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무장해선은 세계 최강이었다. 당대 비교할만한 영국보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막강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해상무역의 4/5을 독점하였고, 여기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각국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4차례에 걸친 영란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크롬웰이 혁명을 성공시키자마자 유태인 입국을 허가한 것은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의 자금력 때문이다. 영국에서 명예혁명 후 윌리엄 3세와 함께 호프가문 등 네덜란드 유태 금융 자본가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했다. 또한 영란은행이 화폐발행권을 따낸 것도 네덜란드의 예를 따른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시티지구를 석권하기 이전에 패권을 쥐었던 베어링 가문 역시 네덜란드에서 양모 사업을 하던 상인 출신이다.

   

네덜란드선박의 활발한 해외 진출이 성행하였고,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과 주식시장이 개장되었고,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본금이 영국 동인도회사 자본금의 열 배로 동양무역독점권, 조약체결권, 군대 편성, 관리 임명, 전쟁 선포, 화폐 발행 등 거의 무제한적인 권리를 보장받아 하나의 국가로서 움직였다. 또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1612년에는 현재 뉴욕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였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점거하였으며, 타이완도 점령하였다. 일본에서는 1600년의 접촉을 시작으로 1641~1855년까지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를 기지로 한 양국 간의 무역이 지속되었다. 해서, 일본에는 네덜란드학이 발달하였다.

   

4. 베른하르트와 빅터 로스차일드의 만남

   

19세기까지 국제유태자본은 영국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를 오가면서 부의 축적과 정치력 확대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자유당이 몰락하고 노동당이 집권하자 국제유태자본은 종래의 자유당 노선에서 보수당 노선으로 통일하면서 노동당 정치를 견제하였다. 해서, 1970년대까지 국제유태자본은 보수당 노선을 유지하며 노동당이 정권만 잡으면 경제위기가 닥치는 등의 악재를 터뜨리다가 블레어 정권에 이르러 마침내 노동당마저 수중에 넣게 되었다. 블레어 정권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현 브라운이 노동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맨 먼저 영란은행의 완전한 독립을 부여한 것이 사실상의 투항이었던 셈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이차대전 중에 영국 정보부에서 일했다. 그의 직무는 국제유태자본이 독일에 투자한 기업, 공장, 재산에 대한 보호 관리였다. 그가 보호한 재산은 연합군 폭격에서 제외되었다. 전후 마셜플랜으로 독일에 소재한 국제유태자본은 기사회생하였으며, 빌더버그 우산 속에서 독일 경제의 기적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다.

블레어와 클린턴은 빌더버그에서 키워낸 장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을 설계한 실체였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국제유태자본과 빅터 로스차일드 1

http://blog.naver.com/miavenus/70032208487

   

국제유태자본과 빅터 로스차일드 2

http://blog.naver.com/miavenus/70032238645

   

독도는 국제유태자본의 땅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3476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