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기사단
노동기사단
2012/05/02 00:49
http://blog.naver.com/miavenus/70137220382
노동자계급과 그 동맹자들(자본주의에 의해서 억압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즈음이 견디기 힘든 시대라고 하는 데에는 어떤 논란도 없다. 노동자계급은 정당을 못 가지고 있고, 불가피한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를 도울 사회복지사업은 쇠퇴했으며, 우리의 극소수 귀중한 조직들조차, 특히 노동조합들조차 무자비한 공격에 완전히 찌부러진 것 같다.
다음 두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5달러 15센트라는 연방최저임금은 7년 동안이나 변함이 없어서 이제는 빈곤선(貧困線)의 61%에 불과하다. 4천5백만 명이 건강보험이 없으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보험료가 33%, 현금지불이 49%나 올라서, 대부분 임금 인상분 이상을 집어 삼키고 있다. 31개의 '적색 주들'(red states, 2004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를 지지했던 주들) 가운데 22개 주가 유니온샵(union shop) 금지법을 가지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제조업의 일자리가 12% 줄어들었는데, 그러나 같은 기간에 제조업의 노동조합원 수는 66%나 줄어들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겨우 13%다. 사기업 부문에서의 조직률은 으레 최악의 상태로 간주되었던 1920년대보다도 낮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들끓고 있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어떻게 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엘라 베이커(Ella Baker)가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어디에 있었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고, 당신들 역시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많은 노동운동 분석가들이 위기의 시작을 1970년대 초로 잡고 있다. 베트남 전쟁 후에 정말로 매사가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합의'(consensus)가 해체되었던 때다. 그러한 합의의 중심에는, 노동자계급이 만일 냉전 제국 건설(冷戰帝國建設) 사업에 협조한다면, 자본가들은 공격하지 않겠다는 묵계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합의는 비(非)백인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70년대가 되자, 제2차 대전 후에 누구보다도 많은 소득을 올리던 백인노동자들의 삶이 공격을 받았다. 단지 유색인종들, 특히 제조업에서 일하고 노조에 속해 있던 아프리카계의 흑인들만이 그 합의에서 득을 보았다.
그러나 위기가 그 합의의 붕괴에 있다고 보는 것은 역사를 오도하는 것이고, 너무나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일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위기에 처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위기와 곤란에 처했을 때에는 언제나 노동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이들 서로 다른 선택들이, 더 중요하게는 선택하지 않은 노선들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를 여기에 이르게 했는가를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이들 선택은 세 개의 중대하고 상호 연관된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논의를 위해서 그것들을 분리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각각의 문제가 다른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상호 작용을 하고 있고, 그 때문에 그 결과는 단순히 그 부분들의 합(合)과는 다르다.
예컨대, 첫 번째 문제, 백인패권주의를 보자. 이 나라에서 그것은 가부장제라는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다. 나아가서, 백인패권주의에 관한 어떤 논의도 계급이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백인패권주의에 대해서 얘기하더라도, 그 형세와 동학(動學)은 가부장제와 계급 간의 추가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가인 로빈 켈리(Robin Kelly)가 말하듯이, "인종차별은 성별에 따라 다르고, 성차별은 인종에 따라 다르며, 계급적 차별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이들 문제와 억압들 간의 상호 연관성을 밝히는 보다 깊은 분석을 요하는 보다 복잡한 상황의 몇 가지 주요 표징(表徵)일 뿐이다.
문제 1: 백인패권주의와의 대결 부재
내전[남북전쟁: 역자] 후 근대 노동운동이 시작되던 때, 그러니까 처음으로 전국적인 노동조합들, 특히 전미국노동조합(National Labor Union: NLU)이 결성되던 때에는, 누가 노조원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선택이 이루어졌다. 다소 격렬한 논쟁 끝에 NLU는 이전의 노예들을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실로, NLU 내부의 다수 세력은 '독사들'(Copperheads), 즉 친(親)남부연방적인 북부 출신의 민주당원들이었는데, 공화당이 지배하던 의회가 통과시킨 1863년 병역법 때문에 그들이 북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병역법은 부자들로 하여금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1870년대에는 많은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는데, 일부는 그 영향력이 국지적 혹은 지역적이었고, 다른 일부는 전국적인 규모의 것이었다. 이들 조합의 대부분은 ―인쇄공, 제철공 등처럼― 숙련이나 직종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들 조합 가운데에는 그 조합원이나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적 혹은 반자본주의적 정당의 당원들인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 조합이나 정당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인종주의적이었고 성차별적이었다. 동부와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주요 표적이었고, 서부에는 악의적인 반(反)중국인 인종주의가 있었다. 대부분의 이 나라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조합 차원에서의 인종주의의 기원―자신들의 제품이 자신들이 조합 가입을 금지했던 중국인 이민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려 한 연초공노조(煙草工勞組)의 책략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연초공노조는 사회주의적이었던 노동자당(Working―men's Party)의 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1870년대 초에서 1890년대 초까지의 주역이었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이나 1905년에서 1918년까지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었던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는 양자 모두 백인패권주의(및 가부장제)와 싸웠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노동총동맹(AFL)이 노동운동의 조종석을 차지할 시기에는 이미 보다 포괄적인 노동운동을 건설하려는 노력들은 모두 물에 빠져 익사했다. AFL은 흑인과 아시아인들을 배제하는 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간간히 얘기되는 예는, 20세기 초에 캘리포니아의 사탕수수 밭에서 태어난 일본․멕시코인노조(Japanese Mexican Labor Union)의 경우다. 애초 사탕농장주들은 멕시코인 및 중국인 계약노동자들을 사용했지만, '1902년 중국인 배제법'으로 인해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러자 일본인 노동자들이 인종적인 도급제도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모집되었다. '사탕수수협회'(Sugar Beet Association)는, 임금 및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도급업자의 힘이 증대하는 것을 염려하여, 도급업자들을 통해서 고용하는 것을 거절하고 임금을 삭감했으며, 회사 매점을 통한 구매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단단히 장악했다.
예기치 않게, 일본 및 멕시코 노동자들과 도급업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 파업에 나서 그 산업을 무력화시켰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요구를 획득했다. 곧이어 일본․멕시코인노조(Japanese Mexican Labor Association: JMLA)는 AFL에 지부 자격을 신청했다. 당시 AFL의 의장이던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는 아시아인들은 조합원이 될 수 없다는 조건 하에 지부 자격을 부여했다. JMLA는 분노하여 지부 자격을 거절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만일 그들[아시아인들: 역자]에게 부여되지 않는 특권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들도, 우리 자신도,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대의(大義)도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법(그 유명한 와그너법: Wagner Act)이 통과되었던 1930년대까지는 노동조합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하는 노동자들은 재판에 부쳐질 수도 있었다. 의회에서 필요한 표를 확보하기 위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상당히 많은 수의 남부 민주당원들인 남부이반파들(Dixiecrats)와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들의 다수는 노예 소유 대농장주의 후손인 부유한 농장 소유자들이었다(그 때문에 그들은 '농장귀족'<plantocracy>이라고도 불렸다).
남부이반파들은 농업노동자들 및 가내노동자들을 배제한다면 노동조합을 합법화하는 데 투표하기로 동의했다. 이러한 타협 때문에 남부의 흑인 노동자계급 대부분이 조직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이 타협은 애초에는 예전의 노예 및 그 후손들을 계속 빈곤 및 예속 상태에 묶어두려는 것이었고, 오늘날에는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및 아이티에서 온 이민농장노동자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고 물론, 제2차 대전 후에 남부를 조직하기 위해서 산업별조합회의(CIO)가 기울였던 노력인 남부작전(Operation Dixie)도 실패했다. 남부작전은 세 가지 본질적인 오류 때문에 실패했다.
1. 자동차 공장 및 제철소를 성공적으로 조직했던 북부의 전략의, 남부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그리고 대체로 북부 조직 활동가들에 의한 남부 이식.
2. 백인패권주의와의 대결 거부. 이는 그것이 너무나 어렵고 또 어떤 백인도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백인패권주의를 공공연히 청산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것은, 남부의 작가 릴리안 스미스(Lillian Smith)가 적절히 표현했듯이, "백인패권주의라는 마약"의 기반이었던 계급, 성, 그리고 종교의 혼합물과 씨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에, CIO는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인종이나 백인의식, 혹은 조합 내에서 비백인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
남부작전이 섬유공장들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핵심문제와의 대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의 노동력은 거의 전적으로 백인들이었다. [바로 그렇게 그 노동력이 거의 백인이었기 때문에] 1934년 파업 물결이 일 때의 쓰라린 탄압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고 또 남부 [섬유] 공장주들의 철의 장악력이 미시건 주 플린트에서의 제네럴모터스(GM)의 역할을 오히려 무색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섬유공장들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CIO가 그 문제를 얼마나 회피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은, 1940년대 초반에는 조직운동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담배 산업―남부의 또 하나의 주요 산업―에서의 조직의 실패였다. 담배 노동자들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6년 12월까지 식품, 연초, 농업 및 미 CIO 연합노조(Food, Tobacco, Agricultural and Allied Workers of America-CIO: FTA)을 상대로 62개의 남부작전이 벌어졌고, 52개의 작전에서 12,5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3. '좌익' 혹은 '빨갱이' 조직 활동가 및 현장 활동가의 숙청 혹은 추방. 첫번째 대상은 FTA[식품, 연초, 농업 및 미 CIO 연합노조]였는데, 남부에서는 여성과 유색인종이 그 지도부와 조직부서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의 다수가 공산당에 가입해 있었다. 이 때문에 남부작전은 인종적으로 보수적이고 반공적인 백인 남성들의 차지가 되었는데, 그들의 다수는 남부에서의 조직활동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민주당 남부이반파가 통제하는 백인패권주의 체제의 헤게모니나 그것의 바탕이 된 가부장제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문제 2. 지역사회에 기초한 조합주의의 패배
노동기사단은 부문별로뿐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조직되어 있었다. 전국적으로 여러 도시에서 기사단은, 직종에 관계없이, 그리고 직업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그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이 참가하는 '집회소'였다. 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멕시코인들도 기사단의 구성원이었고, 지도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열린 1886년의 전국대회에서 기사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표들이 모든 호텔과 극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구하여 성공하였다. 기사단은 하지만 중국인들은 배제했다.
기사단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토지개혁과 교육, 그리고 상조회(相助會)를 강조하고, 사회적 회합을 개최했으며, 노동자들에게 협동조합을 결성하도록 촉구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곳에서 그들은 모든 노동자계급 및 진보적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예를 들어, 뉴멕시코주 기사단은, 멕시코인의 지도력 하에서, 인민당(People's Party) 창당을 도왔고, 이 당은 수년 동안 지역 정치를 지배했다.
기사단이 해체됨으로서 AFL(전미노동총동맹)은 '정통의' 노동조합운동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특정 작업장에서의 임금 및 노동조건에 한정된 그들의 '빵과 버터'[=생계, 경제주의적] 조합주의 정책이 주요 패러다임이 되었다.
CIO[산업별노동조합회의]의 결성은 절실히 요구되던 대항세력이었다. 대부분의 CIO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뿐 아니라 많은 이민노동자(주로 동유럽)으로 구성되어 있던 대량생산산업이 그 조직 중심지였기 때문에, CIO 조직 활동가들은 사회클럽이나 장례계(葬禮契), 교회 등과 같은 종족적 공동체 조직에 크게 의존했다. 많은 CIO 조직 활동가들이 이러한 조직들에서 충원되었다.
남부작전 이전에 CIO가 남부에서 벌린 조직노력들도 이와 비슷하게 지역사회와 공장 양쪽을 조직하는 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 방식이 공장과 지역사회 양쪽에서의 운동을 어떻게 강화했는가를 보여주는 뛰어난 예는 노스 켈로리나주 윈스톤쌀렘의 FTA[식품, 연초, 농업 및 미 CIO 연합노조] 22지역지부였다. 1947년 초에 이 지역지부는 3명의 시의회 의원 후보를 지지하는 운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했다. 세 사람 모두 당선되었고, 최다득표 당선자인 케니스 윌리엄스(Kenneth Williams)는 윈스톤쌀렘 역사상 어떤 시의원보다도 많은 표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남북 재통합 후 최초의 흑인 시의원이었다.
1946년에는 CIO의 계획이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 물결을 수반한 그들의 계급적 요구는 다음과 같이 조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주당 30시간 노동에 40시간분의 임금―기왕에 일자리를 가지고 있던 여성과 소수민족 노동자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조직노동자로서의) 높은 임금을 받는 고용을 유지하면서도 수만 명의 제대군인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계획. 국립의료보험. 모든 노동자에 대한 시간당 25센트의 임금인상, 즉 오늘날 시간당 약 3.25달러의 임금인상. CIO의 그러한 전선은 1946년 가을에 미국자동차노조의 월터 로이써(Walter Reuther)가 제네럴 모터스와의 협약에 서명함으로써 깨졌는데, 그로 인해 회사 지원 의료보험이라는 우리사회의 모형이 고착화되고, 수십 년간에 걸친 국립의료보험에 관한 논의가 종언을 고했다.
문제 3. 자본주의 및 제국에 대한 도전의 부재
이미 언급한 것처럼, 제2차 산업혁명의 성숙―과 1870년대의 금융 붕괴―은 노동기사단의 발흥을 가져왔다. 그들은 지역사회에 기초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반(反)자본주의적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램의 일부는 악덕자본가의 산업주의 시대 이전의 보다 단순한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1) 그들은 '협동조합적 공동사회'를 원했다. 사파티스타의 협동조합 및 생태적 경제(niche economics) 프로그램이 노동기사단의 협동조합적 공동사회와 아주 유사하다.
노동기사단이 격파되자 두 개의 다른 노동조합 연맹이 두드러졌다. 하나는 AFL이었고, 다른 하나는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였다. IWW는 공공연히 반자본주의적이었다. IWW 창립총회 [선언문의] 전문(前文)은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고용계급은 어떤 공통점도 없다....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이다." 이는 단지 수사(修辭)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그들은 노조의 단체협약을 자본과의 타협이라고 하여 반대했다.
숙원을 푸는 길은, 공장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라고 IWW는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바로, 전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이 패배하게 되는 자본가들의 전쟁으로서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었다. 그들은 ―투옥, 구타, 추방 및 끝없는 재판 등― 정부의 철저한 탄압에 직면했다. AFL은 드러내놓고 전쟁을 지지했고, IWW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방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또 다른 중대한 기로에 섰다. 노동조합운동에서는 자본주의에 도전했던 사람들에 대한 대량의 냉전의 숙청이 벌어졌다. 이들의 대부분이 백인 패권주의에 도전했던 (그리고 여성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발전시키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던) 바로 그 세력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숙청은 남부작전과 동시에 벌어졌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들 숙청은 CIO와 AFL의 통합을 앞당겼고, 냉전의 시대를 알렸다.
오랫동안 AFL-CIO의 국제관계는 지배계급의 냉전정책과 정확히 일치했다. 쿠바 혁명에 대응하여 1962년에 설립된 [AFL-CIO의] 자유노동발전연구소(American Institute for Free Labor Development: AIFLD)는 그 국제사업부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오직 '자유노조'(free trade unions)만을 진흥시켰고, 다수가 반자본주의적이었던 자생적인 노동조합운동을 분쇄했다.
존 스위니(John Sweeney)2) 지도부 체제의 AFL-CIO가 다수의 이들 악습으로부터 손을 뗐지만, 그 실적은 아직 미미하다. 예컨대, 차베스(Hugo Chávez)3)를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위협이라고 선언한 베네수엘라의 석유노동조합4)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AFL-CIO가 지원하는 조합이 자본가들과 감시자들의 조합일 뿐, 실제로 현장의 석유시설에 배치된 노동자들의 조합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계급의 공식적인 '국제관계'는 미국 중심의 오만에 빠져서 상호원조와 지원, 혹은 '노동자계급 연대'라는 수사로 시종하고 있다. 현재의 대화에는 반신자유주의의 틀에 기초한 세력과 맥락, 조건에 대한 실질적인 분석이 없다.
마지막으로는, 노동운동 내부에는 민주당에 대한 부동의 충성이라는 지배적 조류가 존재하고 있고, 지난 몇 년 동안에 걸쳐서 민주당이 친신자유주의적․반노동자적 정책들을 수행해 왔음에도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단지 대외관계나 정치, 경제와만 관련된 게 아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문화, 따라서 사회적 통제와 관련된 것이다. 지배적인 체제,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가 더욱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그 문화는 더욱 지배적이고, 사회적 통제를 위해서 폭력에 의존할 필요가 그만큼 적어진다. 문화란 '좋은' 그림이나 음악 혹은 대중문화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 세상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는가, 무엇이 '상식'이나 '정상적인 것', '도덕적 가치', 옳고 그른 것으로 통하는가 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문화가 '민주주의'니,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관념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무엇이 노동운동 내부의 현 논쟁에 중심적인 좋은 조직인가 하는 관념으로까지 확장된다.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노동조합과 같은 우리의 제도들까지 포함해서, 미국의 자본주의적 문화에 구속되어 있다. 예컨대, 현 노동조합의 논쟁의 많은 부분은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조직과 관련한 제안들은 ―효율을 위한 합병과 통합, 책임을 위해 권력의 정상(頂上)으로의 이동, 전국적 수준의 카리스마적 인물들(이 경우 모두가 백인이다!)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프로그램을 구현하고 최고지도부가 작성한 프로그램의 주위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 등― 자본가적 기업 관행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어느 주요한 제안도 이러한 자본가적인 문화 헤게모니의 맥락 속에 있는 지도자 중심의 하향식 집단이라는 지배적 조직 모델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는 시대에는 대항문화적 관념들이,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성격상 상향식이고, 계발(啓發)된 대중지도자들(grassroots leaders)이 집단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덧붙여서, 그들은 지역사회와, 그리고 보다 거대한 사회적․정치적 이슈 및 운동과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대항문화적 모델이 문제(issues)와 억압의 상호관계를 다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위한 조직이라는 문제(issue)가 계급(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이라는 축의 주위를 돌고 있다면, 그 해결은 백인패권주의와 가부장제를 둘러싼 문제를 동시에 포함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내가 시종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인종과 계급, 그리고 성별의 문제는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뒤엉켜 있다. 어느 것이 다른 것들을 푸는 열쇠인가는 정세가 결정한다.
아무튼, 이들 모든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고 상호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조직에,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계획하고 통제하는 규율 있는 행동과, 개인들이 비판적인 사색가로서의 그리고 균형 잡힌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완전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을 결합시킬 가망성이 있다. 이들 조직을 나는 '해방가적 조직'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그것들은 채택되지 않은 노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이 노동운동의 일부가 되었을 때에는 그 결과는 언제나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었다.
IWW의 가장 유명한 투쟁 중의 하나는 1912년 1월에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의 아메리카양모회사(American Woolen Company)에 대항하여 23,000명의 노동자들이 벌인 10주(週) 파업이었다. 로렌스는 전형적인 공장 도시였다. 그 파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조사는 85,000명의 주민 가운데 60,000명이 섬유산업에 의존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고, 아메리카양모회사가 가장 거대한 고용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파업을 기억하는 것은 여성 파업자들이 수행한 주도적인 역할 때문이다. 폴란드 출신 여성들이 파업을 주도했다. 경찰이 여자들은 구타하거나 투옥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규찰대를 조직했다. 여성 파업자들은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역시 원한다"5)는 유명한 파업 슬로건도 만들어냈다. 그들이 파업 파괴자들을 다루던 독특한 ―일반적으로 남성 지도자들에게는 없던― 방법들은 덜 알려져 있다. 역시 돋보이는 것은, 22개의 상이한 언어를 가진 24개의 민족 집단 사이에 단결을 성공시키기 위한 혁신적인 조직적 해결책―각 언어 및 민족 집단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거의 300명의 교섭위원회이다.
또 다른 예는, 지역지부를 창건하고 유지하는 데에서 인종, 계급, 성별의 문제가 서로 충돌하는 "대지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영화 속에서 영상으로서 재연(再演)되었다. 여기에서는 광산․제련노동자 국제노조(International Union of Mine, Mill and Smelter Workers)의 멕시코계 광부들이 제국아연회사(Empire Zinc)에 대항하여 1950년 10월부터 1952년 1월까지 파업을 벌였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파업은 매카시즘과 소수 영국계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지배되고 있는 기업도시라는 맥락에 맞추어져 있다. 파업이 진행됨에 따라서 그것은 지역사회 파업으로 고양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을 대량으로 쫓아냈고, 또 회사와 경찰(law)이 백인패권주의와 성차별에 가득 찬 악행들을 강제로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참가하여 자신들의 역할과 의식을 바꿨다. 그리고 주변의 여러 광산에서 노동자들이 와서 지원했다.
파업자들 사이에 놓여 있는 내부모순이 영화에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펼쳐진다. 인터내셔날에서 파견한 백인 조직 활동가에게는, 그가 비록 (당시의 표현을 빌면) '공산당이 지배하는' 노조의 조합원이었지만, 인종주의가 있다. 멕시코계 및 영국계 사람들의 가부장제의 문제가 전면에 그리고 중심에 있다. 데비 로젠펠트(Debby Rosenfeld)의 뛰어난 1976년 평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지배계급의 자의적 권력에 대항한― 이들 투쟁은 서로 합쳐져 하나가 된다. 때때로 그것들은 서로 부딪친다(혹은 부딪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이 부딪치는 곳에서는 광산 지역사회는 서로 분열된다. 그것들이 합쳐지는 곳에는 단결이 있다."
다행히 이들 해방자적 조직은 오늘날에도, 노동운동의 내부에도 살아 존재하고 있다. 몇몇 지역 노조들은 정말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고, ―매사추세츠주 린의, 국제전공(電工)노조(IUE, 지금은 미국통신노조와 통합되었다) GE 항공기엔진 지부처럼―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GE 항공기엔진 지부는 반공주의적이었던 과거를 초월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공평한 일자리를 위한 동맹(Jobs with Justice)의 많은 지부들도 이러한 종류의 조직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노동기사단이나 IWW가 당시에 그랬던 것과 같은 지배적인 모델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다른 부문들―특히 노동자 센터들―에서는 이 모델이 강력한 지반을 확보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노동운동의 위기에 관한 대화에 참가해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해답이 조직된 13%에게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기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논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는 또한 우리에게 해결책으로서 주어진 일부의 계획들이나 전략들을 평가할 때에 우리가 답해야 할 다섯 개의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1.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그 전략은 어떻게 일반조합원들, 특히 여성과 유색인들의 힘과 지도력을 끌어들이고 있고, 또 그에 기초하고 있는가?
2.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그 전략은 온갖 형태의 제국주의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3.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그 전략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단결을 성취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장애물(백인패권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동성애차별주의)과 어떻게 대결하고 있는가?
4.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그 전략은 장기적으로 어떻게 해방자적 조직을 건설하고 있는가?
5. 노동운동의 쇄신을 위한 그 전략은 어떻게 노동자계급과 지역사회를 매끄럽고 강력하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번역: 편집부) ≪노사과연≫
번역
미국 노동운동의 위기와 채택되지 않은 노선들
엘리 리어리(Elly Leary)*6)
[편집자 주: 지난 호에 이어서 Monthly Review, Vol. 57 No. 2 (2005년 6월)에서 Elly Leary의 "Crisis in the U.S. Labor Movement: The Roads Not Taken"을 번역하여 싣는다. 이 글은 미국 노동운동의 뿌리 깊은 경제주의, 반공주의, 노자협조주의, 백인패권주의, 가부장제 등을 뼈아프게 지적하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재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1) [역자 주] 그러한 한에서 그들의 지향은, ꡔ공산당 선언ꡕ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의 '반동적 사회주의'로서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였다.
2) [역자 주] 노골적으로 노자협조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레인 커클랜드(Lane Kirkland) 지도부를 중도 사퇴시키고 1995년 8월에 AFL-CIO의 새로운 의장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인물.
3) [역자 주] 1992년에 쿠데타에 실패했다가 1998년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9년에 헌법을 혁명적으로 고치고, 이후 토지개혁․석유산업 국유화 등 반제국주의적․사회주의적 혁명노선을 걷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4) [역자 주] 제국주의 및 부르주아지와 합작하여 2002년 12월부터 반(反) 차베스 석유노동자 총파업 및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이끌었던 타락한 노동조합.
5) [역자 주] 여기에서 '장미'는 안락한 생활을 의미한다.
* 자동차노동자였으나 공장이 폐쇄되었고, 보스턴 대학의 전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2324지부에서 부지부장 및 수석 교섭위원으로 은퇴하였다. 그녀는 폴 맥레넌(Paul McLennan)에게 특별히 감사하고 있다. 이 글은 2004년 11월 11일에 '매사추세츠 공정한 직장 연대학교'(Massachusetts Jobs with Justice Solidarity School)에서의 연설을 보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