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은 왜 이란이라크전을 일으켰나 국유본론 2008
2008/05/2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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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이슈 연구
6-30. 한반도 프로세스는 신장 석유이다 3 : 국제유태자본은 왜 이란이라크전쟁을 일으켰는가
나는 독자분들께 강조합니다. 만일 한반도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같은 고대국가 탄생이 내재적인 이유로 진행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이라면 읽기를 중단하시길 바랍니다. 그보다는 당대 토착민에게는 억울하겠지만, 앞선 문명인이 침입해서 발전했다는 외부 주입론이 타당할 것입니다. 해서, 나는 말씀드립니다. 내 글을 읽을 때는, 박현채 따위의 민족경제론을 깡그리 잊기 바랍니다. 주사파 따위, 종속이론 따위 경제 이론을 남김없이 포기하길 바랍니다.
국제유태자본은 석유 국유화를 선언한 모사데크를 쫓아낸 바 있습니다. 또한 모사데크에 이어 권좌를 차지한 팔레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국제유태자본에 의해 역시 축출을 당합니다.
1978년부터 반정부운동은 주로 이슬람 종교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전의 계몽적 운동과 다른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1977년에 당선된 지미 카터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인권 외교로 팔레비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전 글쓰기에서 밝힌 대로 이는 국제유태자본의 세계전략에 따른 것입니다.
특히 큰 계기를 이룬 사건은 화재 사건입니다. 이는 혁명 후 조사에 따르면 광신도에 의한 방화라고 발표되었습니다만 - 남대문 방화, 박정희 생가 관리인 암살... 나는 이를 국제유태자본의 소행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모순을 격화시키기 위해 국제유태자본이 상용하는 수법입니다. - 이 사건으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극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400여명이 죽는 참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란 국민은 이 사건이 팔레비가 저지른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서 대중이란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검은 금요일이라 부르는 참사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팔레비의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아니면 국제유태자본이 팔레비를 버린 것을 알고 김재규처럼 내부에서 지시를 받고 저지른 것이든, 그 어떤 것이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팔레비가 결국 축출되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대체로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이란 혁명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인 세계사를 정면으로 뒤집은 사람이 있으니 존 콜먼과 윌리엄 엥달입니다.
윌리엄 엥달은 비주류 경제학자입니다. 그는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이라는 저서를 통해 팔레비의 축출은 국제유태자본의 음모임을 설득력이 있게 폭로합니다.
윌리엄 엥달의 '석유 지정학'이 강조한 흥미 있는 구도는 오늘날의 이라크전과 당시의 중동 상황을 결부시키는 탁월함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약간의 창의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권외교 주창자 카터가 미국 영국 석유·금융 카르텔의 세계지배를 위한 비밀조직 '3각위원회' 멤버였음을 보여주는 문건을 공개합니다. 이들은 1973년 5월 스웨덴에 모여 음모를 계획했다고 합니다. 시나리오 작성은 안보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주도했다고 합니다.
망명중인 호메이니를 지원하고 매스컴을 동원해 호메이니를 선전한 것은 국제유태자본이었다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 모사데크 정권을 뒤엎고 팔레비 왕조를 부활시킨 것도 국제유태자본이었습니다. 국제유태자본이 모사데크를 쫓아낸 것은 석유 때문이었고, 팔레비를 쫓아낸 것은 팔레비가 독일과 프랑스와 손잡고 의욕적으로 추진한 핵발전소 건설 계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사데크와 손잡고 미·영 석유카르텔에 도전했던 이탈리아의 엔리코 마테이도 소련과 합작한 석유개발계획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암살당했습니다. 또한 과도한 전쟁배상 요구에 시달리며 소련산 석유에서 돌파구를 찾던 발터 라테나우 독일 외무장관도 암살당했고, 1977년엔 아프리카와 제휴해 미·영의 패권에 불안을 안긴 위르겐 폰토 드레스드너은행 회장도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존 콜먼에도 비판적인 구석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고, 엥달에 관해서만 비판합니다.
그는 석유 때문이라고 하며, 핵발전소 건설 때문에 팔레비가 축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모순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근래 북핵 문제 만큼이나 세계 이슈가 되는 이란 핵문제 때문에 등장한 주장입니다. 포드 행정부가 당시 이란의 에너지 공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규모 핵에너지 산업을 적극 후원하면서, 이란에 핵무기 제조로 직결될 수 있는 다량의 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을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포드 행정부의 국가안보팀은 당시 "15년 후면 이란의 석유 생산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 이란 정부의 주장과 똑같은 논리로 팔레비 국왕 시절 이란의 대규모 핵에너지 산업 추진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 1975년 서명, 회람시킨 '국가안보결정메모 292호'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모순인 것입니다.
첫째,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원자력은 결코 석유의 대체 자원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성 때문입니다. 오일쇼크로 인해 지금처럼 유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다보니 브라질, 파키스탄은 물론 중동국가마저 석유를 대부분 수출하기에 에너지 확보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비용 문제로 어디까지나 보완재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브라질, 파키스탄, 이란과 같은 국가들이 보다 원자력에 힘을 쓴 것은 지역 맹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핵개발이 최종 목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원자력은 여타 대체에너지 중에 현재 가장 경제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현재 유가 가격 추이로 보자면, 십 년에서 십오 년 정도 더 흘러야 석유와 대등한 가격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 년에서 십오 년 후라면 유가 최소한 삼백달러 정도를 예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만일 상기한 사례라면, 핵 발전을 시도한 모든 국가에서 쿠테타 내지는 혁명이 발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팔레비가 축출을 당한 것은, 핵 발전이 아닌, 핵무기 개발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제유태자본은 박정희에게 하듯 팔레비를 유도했다는 점입니다. 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자에 대해서는 국제유태자본의 응징이 있다는 점을 중동국가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일벌백계. 일반인들은 팔레비가 민중봉기로 축출 당했다고 알고 있을 것이며, 정치 지도자들은 국제유태자본이 팔레비가 핵개발을 해서 축출을 당했다고 여기도록 한 데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오늘날 이라크 침공에 앞장 서는 부시마저도 원자력 발전에 관한 역설을 한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체르노빌 이후 중단되었다가 현재 원자력 발전에 다들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칠십 년대 팔레비 정권과 박정희 정권 때나 지금이나 주로 미국 회사를 이용하라는 엄청난 압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이는 부차적인 요인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유가 급등과 맞물려 지금처럼 원자력 운운을 하게 되면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발생하여 유가 급등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환경운동가들은 유가 급등을 환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대체에너지 사용 시기가 앞당겨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초창기 환경운동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퇴행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서, 독자들은 부시의 전술을 통한 국제유태자본의 의중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왜 현재 이란의 핵 발전 계획에는 반대하면서 이집트의 핵 발전 계획에는 찬성합니까. 이에 대해 핵무기 확산 가능성이 없는 평화적 이용만 찬성한다는 원론적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만, 나는 이보다 더 핵심적인 사안을 지적합니다. 핵 발전과 핵무기 개발은 국제유태자본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해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윌리엄 엥달이 국제유태자본이 석유 이권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로 여겨서 발생하는 오류인 것입니다. 하여, 윌리엄 엥달의 시각보다는 존 콜먼의 시각이 보다 현실에 부합하다는 것이 나의 평가입니다. 세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석유본위 달러체제가 요구되기는 하지만, 이는 전략의 일부분일 뿐이란 점입니다. 세계체제 유지 방편으로서의 석유이기에 필요하다면 석유도 언제든지 포기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대안이 발생한다면.
그럼에도 윌리엄 엥달의 주장이 타당한 면이 더 많을 것입니다. 가령 중동 원유가 기준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텍사스 중질유 생산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북해 브랜트유나 중동 외의 지역에서의 석유 채굴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가 급등을 시켰으며, 최대 수혜자는 국제유태자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시해야 할 점은, 왜 팔레비 이후 호메이니여야 했던가 하는 점입니다. 비록 팔레비가 개혁을 위해서 친미노선을 걸었지만, 개혁 효과가 상당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내재적 관점을 강조하다 보니 팔레비의 백색혁명을 무시하지만, 호메이니 집권 후에 나타난 사회상에 비추어보자면, 팔레비가 보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민주적이며, 경제민주화에 이바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호메이니가 팔레비 정권에 반대한 이유가 이슬람 성직자들의 기득권 재산을 지키기 위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에 대한 판단 역시 일국적 관점보다 지역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분석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당시 중동 정세에서 국제유태자본의 과제는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오일 머니를 쏟아 부을 전쟁이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유가 급등으로 인해 발생한 오일 머니를 국제유태자본 은행에 예치하고, 이 돈 상당 부분을 국제유태자본의 군수품을 사는데 할애하고, 무기들은 중동에서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마구 찍어냈던 달러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달러가, 빈 몸이었던 달러가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오일쇼크로 인해 급등한 유가로 인해 오일머니를 움켜진 중동국가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1975년부터 석유 결제를 달러로 했습니다만, 이에 대한 강제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수틀리면 팔레비처럼 친미정권이라도 당한다는 교훈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예고된 전쟁이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도 그렇습니다. 후일 말할 기회가 있다면, 자세하게 말하고 싶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합니다. 보통 사담 후세인이 미국과 중동국가 지원을 받아서 우세한 전력을 지녔음에도 이란과 팽팽하게 맞서서 결국 휴전협상을 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상적인 분석입니다. 이란이 버틸 수 있었던 동인은 반미정서였습니다. 이 반미정서는 79년 11월 4일 주 테헤란 미 대사관에 난입한 회교 과격파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인질극은 미국이 이란 측이 제시한 4개 요구조건의 단계적 이행에 최종 동의함으로써 실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호메이니와 국제유태자본의 비밀 내약에 의한 것이 아니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호메이니는 집권 직후 자신의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내어 팔레비보다 더한 정적에 대한 탄압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해 군사력 손실을 감당해야 했으며, 혁명 연합세력마저 분열할 정도로 성직자만을 우대하였고, 경제는 파탄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미 인질 사태만 없었더라면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의 손쉬운 승리로 귀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 인질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중동 여론은 이란에 호의적으로 돌아갔기에,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조차 형세가 이란이 다소 불리해 보이는 듯싶으니, 국제유태자본이 이란에 무기를 팔다 발각한 것이 이란콘트라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국제유태자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란-이라크 전쟁의 장기화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이 회교 근본주의로 물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목표는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소련 영향력 감소, 혹은 소련연방에서의 탈퇴였던 것입니다.
물론 초창기에는 오히려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소련이 아프카니스탄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게 하여 소련 경제를 매우 악화시킵니다. 실제로 소련이 아프카니스탄 침공한 이후에는 국제유태자본은 유가를 급격히 약화시킵니다. 전두환 때 물가는 잡았지 않느냐, 라면서 칭찬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빙긋 웃습니다. 아래 자료만 확인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가가 안정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연도별 두바이유 유가
http://blog.naver.com/jihoonj21/50002664830
침공 직전과 직후에는 유가를 급등시켜 브레즈네프 정권으로 하여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부추긴 후 침공을 장기화시킨 연후에는 유가를 하락시켜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해서, 소련 붕괴의 주요 경제적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소련이 아프카니스탄 철군을 한 직후에, 소련 붕괴가 가시화된 연후에 다시 유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왜 국제유태자본이 팔레비 대안으로 호메이니를 택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동아시아에서도 관철되었던 것입니다.
왜 박정희 암살 이후 국제유태자본은 김영삼이나 김대중 대신 전두환을 택했던 것입니까. 그것은 전두환이나 호메이니가 당대에 보다 쓸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김영삼이나 김대중을 쓰기에는 시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광주항쟁에 관해 한편에서는 미국의 책임과 전두환의 책임, 다른 한 편에서는 김대중의 책임과 북한 정권의 책임을 거론합니다. 나는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제유태자본의 책임입니다. 그들은 전두환에게도, 김대중에게도 동시에 접근하였을 것입니다. 다만 최종 승리는 전두환에게 손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1978년 1월 팔레비 정권은 호메이니가 영국의 간첩이며 동성연애자라는 음해기사를 친정부지에 게재하였습니다. 이런 논란은 정치권에서 흔히 보는 논란입니다. 왜냐하면 중동 지역에서는 일부다처제 영향으로 가난한 남성들이 동성애자도 아니면서 동성애를 일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말레이시아 마하티르가 국제유태자본과 싸울 때 정적을 향해 구사한 전술이 동성애자입니다. 그런 만큼 회교권에서는 상당한 정치적 무기가 되는 듯 보입니다. 이처럼 하도 마하티르가 강력하게 투쟁하다 보니, 국제유태자본도 싸움을 적당히 해야 싶었던지 꼬리를 내렸습니다. 나는 이를 보고서 와, 이것은 제 2의 호치민이로구나. 아니, 경제적으로 마하티르가 이겼다는 점에서 호치민보다 낫다는 평가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의 과장된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 분들, 이해합니까^^! 다만,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 데서 보다 큰 원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아우르는 지역은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못지않게 엄청난 자원의 보고이자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후 발생한 한국전쟁 이후로 최초로 발생한 반미감정 역시 나는 국제유태자본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말씀을 드립니다. 반미감정이 가져다주는 국제유태자본의 이익은 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글쓰기에서는 폴란드 출신 교황 선출, 자유연대노조 결성 등과 관련한 브레진스키의 활약과 왜 브레즈네프는 유럽안보협력회의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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