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 3.0 국제유태자본과 삼성 : 국유본이 반도체 가격 안정화를 위해 한국 반도체산업을 삼성에게 허가했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8/30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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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에 손가락에 클릭하면 쪽발민주당 해체, 골룸빡 처단,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이 앞당겨집니다.
여러분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말길 바랍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9 : 국제유태자본과 삼성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2012 8~9)
1. 자본은 단지 돈이 아니라 돈과 인맥과 정보 삼위일체 종합의 산물이다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권은 정권 초기에 레닌과 모택동, 카스트로처럼 경제에 관해 잘 몰랐다. 박정희 정권 초기 경제 프로그램은 김종필과 유원식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만들었다. 허나, 이들 개혁작업은 연이어 실패를 거듭했다. 증권시장을 만들고, 화폐개혁을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 발전 투자 자금 마련이다. 허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드라는 김종필을 박정희를 감시하기 위한 체게바라와 동급의 국유본 간첩이라고 본다. 해서,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박정희나 쪽발일성이 아니라 김종필일 수 있다.
예서, 인드라가 단언한다. 자력갱생론과 같은 경제론은 철저한 허구다. 국유본 지원받아 잘 나가던 쪽발 경제가 1920년대에 국유본 기획으로 왕따를 당하자 그때 자력갱생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쪽발왕을 중심으로 신념을 지니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일으켜서 자금을 마련하여 공업화에 나서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헛소리인 게다. 이를 기초로 나온 게 쪽발주체론이고, 이를 카피한 것이 쪽발일성의 주체사상론이다. 쪽발일성은 쪽발 경제의 부활을 위해 625전쟁을 일으킨 악질 쪽발이다. 쪽발일성 애비색희가 마약을 팔아 부를 축적하던 쪽바리 색희로서 악질 쪽바리 처단을 중시하던 당대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질 정도이니 천한 근본이 어디 가겠냐? 오늘날 주사파 병쉰색희들이 무식해서 자본주의 핵심을 모르니 이런 헛것에 혹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요구한다.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초기에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또한, 대규모 시설투자한 공장이 계속 돌아가려면 안정적인 대량 소비가 필요하다. 즉, 시장이다. 마지막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외교력이든, 군사력이든.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본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서, 대체 역사물을 보면, 대부분 선진 과학기술로 비교우위설에 입각하여 생산력 중심으로 가되, 정치적으로 개혁하여 대체 역사를 집필하는데, 인드라가 보기에는 설정에서부터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선진적이고, 정치체제가 진일보했어도 자본이 없으면 말짱 꽝인 것이 국유본 세상인 게다.
영국 과학기술이 선진적이었던가. 선진적이었지만,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비슷했다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17세기 루이 14세 시기만 봐도 프랑스 과학기술력이 매우 우수했다. 정치체제를 문제삼을 수 있다. 허나, 영국이나 프랑스나 이 시기 절대왕정제이긴 마찬가지였고, 절대왕정제에 대항한 금융자본가들의 투쟁이 있었다.
인드라가 보건대, 영국과 프랑스 차이는 절대왕정제의 문제가 아니라 귀족의 문제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왕의 차이는 없었다. 다만, 영국은 장미전쟁으로 귀족들이 궤멸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죽었다. 이들 귀족을 보완한 것이 젠트리였다. 헨리 8세를 도와 명성을 얻었다는 버트란트 러셀 세습백작 조상을 생각하면 된다.
반면, 프랑스는 귀족들이 온존한 상태로 절대왕정이 등장했다.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해서, 경제사 책에 독일 경제 발전이 왜 지지부진한가에 대해서 독일 지방귀족인 융커를 지적하곤 하는 것이다. 허나,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왜? 근대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중국에서 귀족들이 숙청되었다. 헌데도 왜 러시아와 중국은 가난했을까? 오히려 귀족을 유지시킨 일본은 왜 경제 발전, 부국강병에 성공했을까? 다시 말해, 왕을 죽이고, 귀족을 몰아낸다 하여 경제가 발전하던가? 답은 단 하나다.
국제유태자본이다. 왕과 귀족들 죽이고 그 몰수자금을 자본으로 한들 새발의 피다. 또한, 그 자금이 자본으로 할 만큼 설령 크더라도 시장이 없다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자본이 있고, 시장이 있더라도,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가하면 방도가 없는 것이다.
쪽발이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해서 재정이 안정적이었나? 그 반대였다. 중국 전성시대였던 수당시대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전비로 인해 재정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국유본 돈으로 국유본 배와 총기와 탄알을 준비하고, 국유본 돈으로 쪽발 경제를 유지하고, 국유본 돈으로 식민지 비용을 감당하려니. 이 빚을 고스란히 국유본이 보증하지 않았다면 쪽발은 전쟁에 이기고도 파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서, 인드라가 한마디 더 한다. 자본이라 해서 단지 스위스 계좌에 있는 돈을 자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국유본 세상에서 자본이란 단지 돈이 많다, 아니다가 아니다. 만일 단지 돈이 많다해서 자본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쪽발과 스위스, 독일은 왜 자신들의 통화를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 돈 많은데, 왜 통화 관리를 한국 만큼, 혹은 한국보다 기대 이하로 하나? 단순한 예로, 쪽발은 엔고가 지속하면 경제가 어려운 것이 분명한 데도, 왜 엔고 하나 해결할 수 없을까? 쪽발만 그러한가. 독일도, 영국도, 미국도, 그 어느 나라도 예외없이 통화를 국가 스스로 관리할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북한마저도.
국유본 세상에서 자본이란 돈과 인맥과 정보가 삼위일체로 결합한 종잣돈이다.
해서, 돈만 있어도, 인맥만 있어도, 정보만 있어도 자본이 되지만 충분한 자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 대 자본이라는 경쟁에서 돈과 인맥, 정보를 모두 갖춘 자본과 셋 중 어느 하나를 결여한 자본의 대결 승부는 예측 가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관점을 확장시키면, 겉보기에는 자금력이 딸린 기업이 사업권을 따내는 것은 돈과 인맥과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자금력에서 우위였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자금력이란 단지 자금을 보유한 것만을 의미하지만, 돈과 인맥과 정보를 종합한 자금력이란 한마디로 신용으로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신용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국유본이다.
2.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데에는 베트남 전쟁과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권이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이 오늘날 이차대전 이전 식민지 국가 중에 유일하게 OECD 선진국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경제사적으로 논의되는 바는, 어차피 되는 것이었는데, 일제가 막아서 하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에 되었다라든가, 토지조사계획 등 비록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할 방편으로 행한 것이긴 하더라도 근대화라는 부수적인 효과로 인해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든가, 마지막으로 이전 경제교과서와 달리 이승만이 쪽발일성보다 나은 토지개혁을 추진해서 온국민이 토지 소유한 결과 경제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는 식이다.
모두 아니다, 라는 게 인드라 경제론이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 초기 사회주의 경제계획론도 오늘날 경제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 예서, 쪽발민주당 병쉰색희들이 쪽바리한테 설설 기던 장면 때 기획했다느니 하는데, 그걸로 따지면 이승만 때 입안된 걸 왜 장면 때 우려먹냐? 대체 장면 병쉰색희가 몇 개월이나 집권했는데? 더 나아가 공과가 있지만, 인드라는 김종필이나 유원식 공도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 한국 경제는 형편없었다.
인드라 식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이승만 때와 다를 바 없이, 혹은 오늘날 쪽발정일, 쪽발정은이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이상의 실패를 맛볼 것이다, 라는 것처럼, 1980년 이전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무엇을 해도 무조건 실패했다.
이러던 한국경제가 어느 순간부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던가.
인드라는 1968년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테트 공세 시작
연도
1968년 1월 31일
저자
존 스위프트
남베트남에서 테트 공세가 미군을 쇼크에 빠뜨린다.
베트콩 게릴라들은 남베트남의 모든 도시를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폭발적인 공격으로 베트남의 설날인 테트를 자축했다. 미군은 싸움의 규모나 격렬함에 넋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부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져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테트 공세는 남베트남을 완전히 붕괴시키려는 의도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다. 이때까지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으며, 지방은 몰라도 도시에서라면 자신이 있다고 확신했다. 북베트남의 보 구엔 지아프 장군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최상의 경우 이번 공세로 민중 봉기에 불을 붙여 미국인들을 베트남에서 몰아낼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적어도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군사적인 면만 보자면 미국은 테트 공세에서 승리했다. 베트콩은 대규모 피해를 입었고, 그 때문에 북베트남군은 싸움에서 큰 부담을 져야만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결과는 달랐다. 미국에서 테트 공세는 패배로 여겨졌고, 미국의 여론은 오늘날 가망 없는 대의로 간주되는 이 전쟁에 등을 돌렸다. 미군의 희생 역시 1973년 평화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사실 누가 보아도 미국이 테트 공세 이후 체면을 구기지 않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날이 갈수록…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이성적인 방법은… 협상뿐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보인다."
월터 크론카이트, 미국 방송인"
국유본은 이차대전 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십년 주기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일타삼피이지만, 그중 핵심은 자본주의 특성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안정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해서, 국유본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일으키면서 목표한 바는, 특정한 세력의 빠른 승리가 아닌, 그 반대로 오래도록 전쟁하면서 설사 특정세력이 승리하더라도 내전 양상으로 해서 전쟁배상금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1968년에 종결되어서는 안 되었다. 허나, 위기가 왔다. 한국군이다. 귀신잡는 해병을 비롯한 일당백 한국군의 용맹은 자타가 공인했다. 지난 유럽에서 스위스나 독일 용병보다 우수했다. 해서, 한국군이 베트남에 만 명만 추가 투입해도 일당백이어서 백만 명 투입하는 효과와 같았다.
국유본은 깜짝 놀란다. 자칫 한국군 파병으로 베트남 전쟁이 조기 종결되면 엄청난 손실이 따른다. 이에 국유본은 쪽발일성에게 지시한다. 이것이 김신조 121 청와대 침투 사태요, 푸에블로호 사태인 것이다. 모두 1968년 1월에 일어난 일이다.
쪽발일성은 당시 좌절과 절망의 나날이었다. 1950년대까지 국유본이 쪽발일성 정권을 지원해서 모택동 중국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국유본이 쪽발일성 대신 박정희를 지지하니까 막나갔던 것이다. 사실 북한 경제가 망쪼가 든 게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이다. 그러다가 국유본 오더가 내려오니까 쪽발일성이 신이 나서 한 일이 우선 쪽발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이 첫째요, 잔가지라 해서 숙청했던 남로당 인맥을 발굴해서 간첩 훈련시키는 게 둘째요, 세번째로 본격적으로 군비 확장에 나선 것이 세번째이다. 그 결과가 121 청와대 침투 사건이요, 푸에블로호 사건이다. 이를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면 안 된다. 가령 푸에블로호 사건은 국유본이 미국에 지시하여 일부러 쪽발일성에 져주기 게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결과가 무엇인가.
박정희 정권은 놀라서 첫째, 이 시기부터 유신정권을 준비한다. 둘째, 국유본 침탈에 맞서 사실상 친위조직인 하나회 같은 군내 조직을 키운다. 이는 쪽발정일이 박정희 따라서 군사위원장 맡아서 한 바 있다. 셋째, 국유본이 원하는 대로 일당백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취소한다.
국유본은 박정희 정권 대응이 흡족했다. 이 시기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시기다. 하여, 국유본은 남한을 이전까지 그저 엔블록권의 하청, 소비시장으로만 봤다가 쪽발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 3세계의 전시장으로 키워보자, 하는 결정을 내린다.
헌데, 여기서 변수가 생기는데, 1973년, 국유본 권력투쟁 결과,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국유본 권력이 국유본 귀족 쿠테타로 인해 데이비드 록펠러가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이 결과로 한국 경제 발전이 보다 미묘하게 전개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국유본 기획대로 경제 발전을 시켜 긍정성을 드러내되, 정치적으로는 빅터 로스차일드 업적이니 데이비드 록펠러 입장에서는 억압 체제라고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체제나 당시 쪽발체제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쪽발체제 정치성에는 호의적으로 다루고, 한국체제 정치성에는 부정적으로 다루었다. 이 기조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하면, 왜 국유본은 쪽발 정치체제에는 긍정적이고, 한국 정치체제에는 부정적이었나. 이는 오늘날 중국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국유본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중국 정치체제란 한편에선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정치시스템이란 평가를 받는 반면, 현 시점 남한 언론에서 보자면, 심하다 할 정도로 매일 비판당하고 있다. 왜 이러한가. 국유본의 전략인 게다.
다시 말해, 국유본이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쪽발이든, 한국이든, 쪽발정은이든, 중국이든 비판을 당할 수밖에 없고, 체제 위협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9.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과 에베르트 재단
경술국치 이후로 한국과 독일의 인연이 끊겼다가 1955년 재개된다. 허나, 본격적인 교류는 1963년 파독 광부 파견 때부터이다. 1963년 12월 21일 4만 6천명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 123명이 서독 루르와 아헨 지역의 석탄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후 1977년까지 서독에 파견한 광부는 7936명이나 됐다. 1960 년대 실업자가 250만 명이나 되고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3년 계약으로 독일 탄광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광부들은 한 달에 1400-1600 마르크(당시 28만원-32만원)를 받아 방값, 식대를 빼고 1000마르크쯤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의 16일간 서독 방문 당시 전담 통역사 겸 경제 고문 자격으로 수행했다. 그는 58년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흔치 않은 '서독 유학파'였다. 귀국해 중앙대 교수를 하다 발탁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으로만 15년을 지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를 만난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며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하니 나를 믿고 돈 좀 빌려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일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모양새였다."
http://blog.daum.net/wcm001/16498591
인월리는 그간 박정희 정권을 중도좌파 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나, 산별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등 오늘날 민주노총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중도좌파 노동자 복지 정책을 전향적으로 취했다. 둘, 식목일 제정, 그린벨트 실시 등으로 역대 그 어떤 대통령도 안 하고, 후퇴시킨 녹색성장 정책을 실시했다. 셋, 의료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여 오늘날 전 세계인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했다. 넷,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교 교육평준화 정책을 실시했다. 다섯, 예술영화를 만드는 이에게 수입쿼터를 주는 방식으로 문화역량을 높였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 축소시킨 스크린쿼터제의 기초를 닦았다.
허나, 오늘날 어떠한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으로 인해 중도좌파 박정희 선생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국유본의 사주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독립군 고문한 일제 헌병 자식들 주제에 탈레반 행세하는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무덤에서 운다. 김구선생 이름 팔지 마라. 천벌을 받을 것이다.
냉정하자. 인월리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초반 한국의 트로츠키, 유원식의 경제계획을 구상했지만, 계속 실패했다고 밝힌 바 있다.
"516 직후 진시황으로까지 불린 8기생 유원식 대령은 당대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한국의 트로츠키였습니다. 유원식의 아버지는 유림으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는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도 다니는 등 이론적인 면에서도 많은 공부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해서, 오늘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가령 이승만 때 이미 기획했다, 장면 때에 있던 것을 박정희 정권이 베낀 것이다 등등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무능했던 민주당 정권을 옹호하고, 박정희를 무조건 까대기 위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입니다. 그보다는 유원식 작품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해 유원식은 "나는 완전 고용의 꿈을 꾸었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와의 대담에서 스칼라피노가 후진국이 경제성장을 하려면 불균형성장이 불가피하다고 한 데에 대하여 뜻밖에도 균형발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해서, 당시 "한국의 군사정부에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더라"라고 스칼라피노 박사가 미 정부에 보고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439320
문제는 돈이었다. 1962년 실패한 화폐개혁을 한 것도 자금 마련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나 북한처럼 화폐개혁이 성공하려면 결국 외자 도입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게다. 하면, 왜 이때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을까. 이것이 국유본의 교묘한 수순인 게다.
국유본은 러시아 혁명 때나 중국 혁명, 쿠바 혁명 때에도 유사한 방식을 썼다.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도와주다가 막상 권력을 잡고 나서는 압력을 가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유럽 국가들의 포위와 백군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말할 나위없이 이 시기에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여, 레닌은 혁명보다 경제 건설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쿠바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국유본이 정권을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막상 혁명이 성공하자, 국유본은 미국 정권에 지시하여 중국, 쿠바 정권을 다방면으로 압박했다. 국유본의 의도는 단순명료했다. 돈의 힘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은밀히 지원하던 국유본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니 도움을 주기는 커녕 미국 정권과 국유본 언론을 통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내몰 수만도 없으므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정권이 박정희 정권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 허나, 중요한 건 돈이었다.
국유본의 목표는 한일수교였다. 이를 위해 빌헬름 2세 망명사태와 같은 CIA를 통한 이승만 하야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를 양쪽으로 압박한다. 즉, 한편으로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지원한다. 해서, 강원룡 같은 이는 국유본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축출할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을 대주지 않는다. 완전고용 구상을 하면 무엇하는가. 돈이 없으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처럼 참패가 자명하다. 돈줄 끊기면 1960년대 김일성처럼 광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폐개혁 실패를 목도한 박정희 정권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다. 서독이다. 서독은 대한민국 정부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요청을 한다. 한푼의 외화가 아쉬운 박정희 정권은 이내 승낙한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앞다투어 지원하는 것과 같다. 미국 병사들이 기피하는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지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존이다.
예서, 의문을 가져보자. 왜 하필 서독이었을까. 당대 영국,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가 있음에도 대한민국에 차관을 빌려줄 나라는 미국, 서독, 일본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는 오늘날 국유본의 인수합병 시장과 무관할까. 아무나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닌 게다. 기획이 있는 게다.
하고, 왜 미국은 자금을 대주지 않았는가. 당대 미국 정권은 노예민주당 정권이다. 노예민주당이 박정희 정권을 도와주어서는 그림이 안 나온다. 속으로는 도와주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노예민주당이다. 이렇게 되면, 박정희 정권은 정권대로 더더욱 노예민주당에 의존하게 되고, 야당은 야당대로 노예민주당 노예를 자청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국유본은 미국과 일본 대신 서독을 택한 것이다. 왜? 오늘날 FTA와 비교하면 된다. 미국과의 최종적인 FTA 체결 이전에 유럽과 먼저 FTA를 체결하는 것이다. 이때 FTA 반대단체에서 반대하나? 전혀 안 한다. 혹자는 한국과 유럽간의 FTA는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과 미국간의 FTA도 별 영향이 없다. 인월리는 간단히 말한다. 기획된 것이다. 시나리오인 게다.
서독광부를 파견하게 하고, 이를 담보로 돈을 꾸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시설, 인프라를 짓는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자들을 내세워 맹렬하게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하게 한다.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이 중도좌파 박정희더러 빨갱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유본은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한일수교를 하게끔 다그치는 것이다. 한편 인월리는 역대 중앙정보부장들에 대해서 체게바라와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한 바 있다. 즉, 체게바라는 쿠바와 무관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런 그가 쿠바혁명에 참가한 것은 국유본과 관계가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김재규 등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이들은 중도좌파 박정희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중도좌파 박정희의 우군이 아니라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박정희를 감시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도좌파 박정희를 훈련시킨 국유본은 60년대말 에베르트 재단을 동아시아에 투입시킨다. 1967년 우선적으로 일본에 에베르트 재단을 파견시킨다. 직후 대한민국에도 지부를 만든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승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오늘날 여의도연구소 안병직이 후진국경제학회를 서울대에서 결성했다는 점이다.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이 박정희에 비판적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인드라는 친일매국수구 민주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http://nahdoo.nayes.net/zb4pl5/view.php?id=pphl&no=6481
에베르트 재단은 1960년대 말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한국 사무소를 설치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http://www.fes.or.kr/index_kor/kact/kactivities.htm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에 독일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우파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중도좌파 에베르트 재단이다. 세계 최초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승인한 것도 이스라엘 중도좌파 정당 마파이당 정권이었다. 김일성 정권도 박정희 정권의 516사태 소식에 맨 먼저 반응한 것은 남한에 진보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독일에서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좌파 성향의 에베르트 재단이다. 이러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것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친일매국무능 민주당이었던 게다. 이에 대해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재산 환수법 등을 통해 악질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의 재산을 환수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인 쾌거를 보인다. 허나, 이후 국유본은 이를 무효로 하여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승소 결정을 내린다. 이에 고무된 악질 친일매국노 세력이 연달아 반환소송을 내게하는 동인이 되었던 게다. 이에 국유본은 자칫 자신들의 기획이 들통날까 싶어 다른 친일매국노 소송에 대해서는 패소시킨 게다. 아,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과 그 장학생들. 천벌을 받으라. 지옥에 가리라. 독립군들이 용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가 네 놈들 사지를 갈기갈기 사분오열시킬 것이다.
예서, 인월리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에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왜인가. 이는 당대 국제정세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 역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한 성동격서 작전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전쟁 때와 같다. 당시 국유본은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그처럼 이 시기 베트남 전쟁 역시 한국군이 일당백이었기에 미군 이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 이만명만 동원한다면 베트남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다. 허나, 국유본 목적은 베트남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을 장기화시켜서 무기도 팔아먹고, 냉전체제도 지속하고, 미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게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9324465
미국은 국유본의 지시로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에도 어떤 논평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푸에블로호에 과민하게 대응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남한은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할 수 없었다. 이 결과로 미국은 보다 오래도록 베트남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국유본 관심사는 베트남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유본이 모두 일으킨 일이차 세계대전보다 한국 전쟁보다 베트남 전쟁을 더 오래도록 끄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하면, 왜 이때 국유본은 독일 재단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상륙시켰던 것일까.
하나, 대일청구권은 화폐로 지불된 것이 아니다. 기술과 시설투자로 된 것이다. 예서, 왜 국유본은 한일수교를 강제한 것일까. 달러 부족 사태로 야기된 동아시아 방위비 분담 때문이다. 일본은 자력으로 동아시아 방위를 전담할 수 있어야 했다. 국유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일본은 오늘날 필리핀과 같은 경제상황이었을 게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해야 했다. 엔 블록권이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성장을 할수록 한국이 혜택을 입는 것처럼 당시 싸구려 상품 따위나 팔던 일본의 입장도 비슷했다. 하여, 한국은 외자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갖추어야 했다. 독일 재단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둘, 왜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인가. 이전까지 국유본은 남한을 방치했다. 대신 북한을 키웠다. 허나, 박정희 정권 이후로 남한을 유럽의 서독으로 여기게 되었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혁명에 성공한 후 일갈이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반공은 반공이 아니었다? 왜일까. 이에 대해서는 인월리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처음 시나리오는 이렇다. 국유본은 당대 정보통신의 미비로 각국 정치에 대한 자율권을 두었다. 그런 이유로 중도좌파 박정희도 반발할 수 있었다. 그처럼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스탈린 격하가 이루어지자 재빨리 박헌영 등을 숙청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국유본 입장에는 괘씸죄인 게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를 키워서 북한보다 잘 사는 남한을 만들었던 게다. 두 번째 시나리오다. 국유본은 전전 독일과 일본의 예처럼 달러 위기 해소와 베트남 전쟁을 위해 의도적으로 김일성 정권을 고립시켰다. 평양 정권의 박헌영 숙청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이미 기획한 것이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의 아젠다, 선의의 경쟁 역시 박정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 작품이다.
셋, 한국을 키웠다가 다시 왕따를 시키는 국유본의 전략인가. 지금까지 보았듯 국유본은 키우면 죽인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는 승승장구한 한국경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침체기로 접어든다. 이는 명백히 국유본 전략인 게다. 하면, 인드라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니다. 국유본과 투쟁할 것이다. 국유본의 앞잡이, 친일매국수구세력과 싸울 것이다. 하여, 국유본의 기획을 수정하거나 폐기토록 할 것이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105235670
3. 이병철의 동경선언이 있기 전까지의 한국 반도체 역사
보통 한국 반도체 역사, 삼성 반도체 역사를 일본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인드라는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한다.
"[이재구코너]왜 우리는 반도체산업을 해야하는가?
1983년 3월15일 이병철 삼성회장 반도체사업 선언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jklee@zdnet.co.kr 2011.03.28 / PM 00:06
■한국에 반도체 씨앗을 뿌린 사나이
"그렇다 한국으로 이 기술을 갖고 가서 전세계를 놀라게 하는 거다. 나 혼자 할수 있다. 한국에서 알아줄 사람이 없는 게 문제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1972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서니베일의 한 작은 모텔.
38세의 한 한국인이 서울에서 온 인사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최고의 반도체 생산회사 모토로라에서 생산책임자를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모두 169만달러가 필요하지만 우선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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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기동박사는 60년대말 세계최고의 반도체 기술력을 갖고 있었던 모토로라반도체사업부의 생산부장이었다. 오하이오대 반도체연구소장시절. | |
그는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반도체로 학위를 딴 강기동박사였다. 그리고 그의 손님은 17년 전 서울에서 함께 한국아마추어연맹(KARL)을 창설한 멤버이자 서울에서 켐코(KEMKO)란 대규모 통신장비수입상을 하던 김규한사장이었다.
강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NPN시리즈,PNP시리즈 반도체를 미 반도체 업계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실력자였다.
사막도시 피닉스에 있는 모토로라는 일본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반도체기술회사였다. 강박사는 최고책임자 레스터 호간, 연구소장 I.A. 레스크과 함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공대(MIT)물리학과교수 출신인 레스터 호간은 10년간 정들었던 모토로라 총 책임자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가 이른 바 8인의 핵심 엔지니어를 끌고 실리콘밸리의 꽃 페어차일드로 떠난데 이어 강기동도 독립을 결심하게 된다.
호간박사의 페어차일드행은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떠들썩했다. 모토로라는 페어차일드를 영업비밀 유출 등의 혐의로 제소했다.
이런 과정에서 강기동의 한국행 결심도 굳어졌다. 그는 서니베일 스튜어트 드라이브 1010번지에 ICII(Integrated Circuit International Inc.)를 세웠다. 여기서 기술 및 지분 투자 50%를, 나머지는 김규한사장이 투자하기로 했다.
■세계최고를 이식하려 했던 개척자의 불운
"내가 근무하던 모토로라 공장하고 똑같이 설계해 달라구."
강기동박사는 자신이 다녔던 오하이오대 건축과의 한국인 동문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여기서 손목시계용 IC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는 당시 최고기술인 이른바 C-MOS(상보성 금속산화물 반도체)라는 기술로 손목시계용 칩을 만들기로 했다. MOS는 저 유명한 IC의 아버진 잭 킬비와 밥 노이스가 개발한 집적회로(IC)의 전력소모를 크게 줄인 첨단기술이었다. 이를 개발한 사람역시 오하이오주립대 출신인 그의 선배인 강대원 박사였다.
하지만 그는 표면상으로는 '기술지원' 책임자로만 활약해야 했다. 반도체 기술은 냉전시절 미국의 최첨단 기술이었고 모토로라 출신인 그가 대외로 유출하면 안됐다. 1974년 1월26일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내리(현재의 부천시)에서 한국반도체란 회사가 문을 열었다. 김규한켐코사장과 강기동박사가 총 100만달러로 설립했다.
그가 설계한 공장은 3인치웨이퍼를 가공해 칩을 만들고 테스트하는 진짜 반도체 공장이었다. 당시 한국에 진출한 외국반도체업체들은 반도체제작의 마지막 공정인 금속 캔을 씌우는 임가공 공장에 그쳤다.
강박사가 만들려는 LSI칩을 사용하면 디지털 전자시계에 숫자로 시간이 표시됐다. 일반인들도 좋아했다. 그는 빨간불로 숫자를 표시하는 디지털 손목시계용 CMOS회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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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한국최초의 반도체 한국반도체 부천공장. | |
하지만 빠듯하게 100만달러로 창업한 것이 무리였다. 당시 미,일 반도체 팹공정 설립비용의 10%에 불과했다. 게다가 1973년 발발한 중동전과 제 1차 석유파동으로 모든 장비, 자재값은 치솟았다.
자금부족으로 쪼들리던 시달리던 한국반도체는 10월 4일 간신히 준공을 하지만 모든 일정이 당초계획과 어긋나기만 했다.
제품 생산 때까지 자금을 지원키로 했던 후원자의 약속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해 12월 4일 한국반도체가 부도났다.이틀 후 이건희 동양방송이사가 한국지분을 50만달러(4억원)에 인수했다. 강박사가 기술을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하이테크산업의 매운맛을 보다.
강기동 박사는 어떻게든 자신이 시작한 반도체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1975년 9월 1일 그는 6기능 LED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인 KS-5001 개발에 성공했다. 후일 삼성이 1메가D램을 만들때 고심하던 CMOS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6~8달러선인 이 칩 가격은 수요확대에 따른 공급부족으로 24시간 풀가동에도 주문이 쇄도했다. 양산개시 3개월 만에 월간 손익에서 흑자전환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전자시계는 전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었다. 칩은 성공했다. 정부는 삼성시계와 관련업계로 하여금 시계산업을 스위스 수준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도체의 개발과 생산, 그리고 판매 가격 사이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강박사는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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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내부의 작업 모습. 오늘날의 반도체공장을 보는 듯 하다. | |
"새로 나오는 하이테크 제품은 반짝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또 장래가 좋은 경우는 후발업체가 시장장악을 위해 가격 덤핑을 할 수 있어 예측할 수 없는 게 하이테크시장이다. 하이테크 실력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주위환경에 대처해서 제품을 선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파견 일부 경영진과 강박사 간에 견해차가 발생했고 강박사는 1976년 여름 한국반도체를 떠났다. 이 해 CMOS 시계칩은 수출실적 418만4989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반도체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TR과 TV용 IC 양산에 눈을 돌렸다. 결과는 참패였다. 일본반도체업체들이 값싼 제품을 쏟아냈다. 국산화가 무색해졌다. 강박사의 걱정은 불행히도 맞아 떨어졌다.
"앞으로는 김광호 이사가 책임을 맡는다. 김이사로도 살리지 못하면 더 이상 반도체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
1979년 9월. 강진구사장은 컬러TV 담당인 김광호이사에게 특명을 내렸다.
그의 선택은 디지털 시계용 칩이었다. 일본 오키가 가격을 치고 나왔지만 단순형 시계칩으로 경쟁을 따돌렸다. 2년후 김이사는 컬러TV용 색신호IC를 국산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으론 뭔가 부족했다.
■일본경제의 대부가 들려준 '경박단소화'산업
1980년 이른 봄. 삼성물산 가스미가세키(霞ケ関)빌딩 사무실. 도쿄를 방문중인 이병철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 아래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73년과 79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리는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의 위기가 주제였다. 이병철회장이 이나바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우주 해양공학 등 성(省)자원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지요. 일본 정부도 이를 적극 뒷받침해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외화수입은 급증했습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있습니다."
이나바 박사가 들려준 당시 일본 산업의 일대 방향전환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이회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2년 5월. 72세의 노기업가는 미일 전문가를 비롯한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는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반도체시장 조사를 해 오시오
"기존 반도체사업에 대한 전면 검토와 반도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 철저한 시장 조사 및 사업성 분석작업 결과를 가져 오시오."
1982년 9월. 이병철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따라 반도체사업부는 삼성그룹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바쁜 사업부가 되었다. 추진팀장은 당시 반도체사업본부장이었던 김광호 상무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해외지사를 통해 최신 반도체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경영성과를 되짚어 나갔다.
1982년 10월 반도체사업추진팀은 이회장에게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냈다. 그는 이 회장은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보고서를 읽던 이 회장은 메모리란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메모리를 중심으로 사업계획서를 다시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이 회장은 첨단 반도체 중에서 일본이 미국보다 유일하게 앞선 분야가 메모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D램, S램, EP,EEP롬 등 다양한 메모리를 수출하고 있었다. 메모리반도체는 당시 세계 시장규모가 30억1천800만달러로 전체반도체 시장의 20.8%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모리중에서도 어떤 제품을 주력으로 삼을지가 과제였다.
반도체사업추진팀은 국내외에서 입수한 자료, 전문가 자문결과를 바탕으로 시장규모, 경쟁력, 생산효과, 향후 전망 등을 종합검토한 끝에 S램과 EEP롬으로 결정했다.
D램은 시장규모가 가장 크지만 미국 일본 업체들간의 경쟁이 어느 제품보다 치열하고 공급과잉에 따른 급속한 가력하락이 예상돼 처음엔 검토 대상에서 빠졌다. 후발 시장진입자인 삼성이 미국 ,일본과 가격경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회장과 반도체사업팀은 결국 D램위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치열한 경쟁이 있을지라도 생산 효과가 뛰어나고 시장규모가 가장 큰 D램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일본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까
"과연 D램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병철 회장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음에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사업은 최소한 1억달러(1천억원)부터 시작해서 10억달러까지 퍼부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너무나도 위험한 모험이었다. 정부의 한해 예산이 22억달러 아닌가.
또 자금을 조달한다 해도 이 첨단산업을 이끌어 성공시킬 전문인력도 없지 않은가?
이 회장과 삼성전자 경영진은 고심끝에 아이디어를 짜냈다.
"미국에는 숨어있는 한인 과학자들이 많을 것이다.한국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발휘한 만한 곳을 찾지 못해 미국에 주저앉아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 고급 브레인을 한곳에 모아 반도체를 연구시켜 개발된 것을 국내에 들여와 양산하도록 하자."
삼성은 GE와 IBM을 거쳐 샤프사의 고문으로 있던 스탠포드대 전자공학과 출신 이임성 박사, 인텔을 거쳐 내셔널세미컨덕터에서 64KD램 개발담당 부장을 거친 이일복박사, 자일로그에서 반도체 공정개발을 맡던 미네소타대 출신 이상준 박사, 인터실과 사이너텍에서 C-MOS 제조수율 개선에 성공한 이종길 박사 등 32명을 이듬해까지 확보했다.
1983년 1월 9일. 이회장은 마지막으로 6명의 출장팀을 실리콘밸리 서니베일로 파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급변하는 반도체 본고장의 현황과 정보를 바탕으로 최첨단 반도체 신규사업계획이 만들어졌다.
'1983년 초부터 VLSI(초거대집적회로)대량생산 공장 건설 착수. 향후 5년간 시설투자 4천400억원, 연구개발비 1천억원을 투입해 첨단기억소자와 마이크로 프로세서개발....2미크론의 미세가공기술 및 5인치 웨이퍼처리 설비로 256KD램을 생산...VLSI의 경우 미국 현지법인을 통해 미국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유럽시장까지 확대한다....'
이로써 이 회장이 구상하는 삼성반도체의 투자계획과 밑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과연 미국, 일본과 싸워 이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극도로 짧은 제품 사이클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도쿄의 밤
83년 2월 7일 밤.도쿄 오쿠라(大倉)호텔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회장은 그동안의 구상을 정리하며 최종적으로 반도체 신규투자에 대한 결심을 굳히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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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운을 건 반도체산업에의 도전으로 한국의 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단숨에 끌어올린 고 이병철 회장. | |
며칠 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피곤해진 그의 얼굴에서 평소 단아하던 삼성제국 총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호텔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햄릿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삼성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사안이었다.
"과연 D램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나바 박사와의 대화에서 나온 '경박단소''첨단' 같은 말들이 맴돌았다.
이회장은 1년간에 걸친 철저한 기초조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연구와 검토를 거치고도 고민하던 삼성제국의 운명을 가늠할 결단을 내렸다.
"반도체 사업에 투자한다."
이날 밤도 꼬박 세운 이 노사업가는 날이 밝아오자 마침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2월 8일 아침.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은 마침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네 회장님..."
국제전화 내용은 반도체와 관련한 것이었다.
"호암(이병철의 호)께서 말씀하시길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를 할 테니 이 사실을 내외에 공포해 달라시네."
전화를 마친 홍진기 중앙일보 동양방송회장이 강진구 삼성전자사장에게 말했다.
"다음 번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마침내 반도체 사업이 선정되었구나..."
강사장은 이병철 회장이 다음 번 신규사업을 심각하게 물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통화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우리는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 아래서 삼성은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도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그것만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제2의 도약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여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반도체산업을 그 자체로서도 성장성이 클 뿐아니라 타 산업으로의 파급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 집약적인 고부가 산업이다. 이러한 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1983년 3월15일 삼성그룹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그룹 발표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병철회장의 결단에 대해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을 비롯한 국내외 산업계의 반발은 거셌다.
그 중에서도 일본 미쯔비시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가지 이유가 가장 그럴 듯 했다.
"반도체사업은 기본적인 내수가 있어야 하는데 고작 GNP 600달러정도인 한국에 기본적 수요가 생길 리 없다. 그런 만큼 전량 수출에 의존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나라가 (가전품도 제대로 못만드는 후진국)한국의 반도체를 사겠는가?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훨씬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데 이들의 기술이전도 받지 못한 삼성이 이를 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또 총매출액이 1억달러도 안되는 삼성이 투자비만 10억달러가 넘는 반도체사업 투자비를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전기와 물이 1년 내내 단 1초도 끊기지 않아야 하는데 한국의 산업기반은 반도체사업을 시작하기엔 너무 취약하다."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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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계반도체역사의 기적을 연출했다.삼성창업자 이병철회장이 반도체선언 이래 8년만에 메모리정상에 올랐고 1위 인텔을 맹렬히 추격중이다. | |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반도체 선언 1년 째가 되는 84년 3월말까지 64KD램의 양산 제1라인을 완성키로 하고 완성시한에서 역산해 모든 일의 진행계획을 짜 놓았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 진척상황은 확인한다. 그는 모든 장애를 돌파할 준비를 끝내 놓았다.
■6개월만에 성공한 64KD램 개발
반도체선언으로부터 6개월 여가 지난 83년 12월1일.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상공부와 과학기술처기자들이 모였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D램을 개발했습니다....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습니다. 미국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반도체 기술격차를 4년 정도로 좁히는데 성공했습니다."
강사장의 발표를 들은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6개월만에 미,일 첨단반도체 회사들의 주력제품을 개발해 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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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은 반도체 선언 6개월만인 1983년 12월 선진국들이 당시 한창 생산하고 있던 64KD램 개발 성공을 발표했다. 세계 반도체 업계를 경악시킨 대사건이었다. | |
64KD램은 칩속에 6만4천개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손톱만한 칩 속에 약 8천자를 저장할 수 있었다. 미국,일본에서도 6년 이상 걸린 칩이었다. 일본의 6개 반도체 회사가 80년 이전부터 개발, 80년부터 이 칩을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외신을 접한 미일반도체업체들도 경악했다.
하지만 이들은 삼성이 보내온 샘플을 시험해 보고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반도체였다.
성공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 회장의 결단력과 추진력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74년 이래 부천공장에서 축적해 온 조립기술에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미 아이다호주에 소재한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삼성의 기술제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저가 반도체공세에 재정압박을 받던 마이크론이 삼성의 로열티제안에 마음을 움직였다.
삼성은 이 해 6월17일 마이크론과 정식계약을 하고 64KD램 설계도와 3500개의 칩을 받았다. 개발팀은 부천 한국반도체 시절부터 닦아온 개발역량을 바탕으로 설계도를 바탕으로 조립 시험생산에 들어갔다. 40일만에 생산수율을 일본수준인 92%까지 끌어 올렸다. 309가지에 이르는 공정기술과 검사조립기술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듬해 5월 "6개월 안에 완공하라"는 이회장의 엄명을 받은 성평건 공장장은 2년 이상 걸리는 반도체 생산라인을 기한 안에 완공했다. 이 또한 말그대로 기적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개발,생산된 64KD램은 오늘날 세계적 반도체 회사 삼성전자의 성장 초석이 됐다.
■세계 D램 반도체시장을 제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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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은 1992년 일본을 제치고세계 D램 1위에 오른다. 이후 단 한 차례도 1위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 |
삼성의 반도체선언 10년 만인 1993년 5월 미국 데이터퀘스트사가 반갑고도 놀라운 소식을 전해 왔다.
'1992년 반도체시장 분석 결과 D램 분야에서 삼성이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 메이커로 올라섰다.'
우리나라의 메모리반도체 산업이 드디어 일본을 제친 것이다. 이미 92년 9월25일에 세계최초의 64메가D램을 개발해 내 전세계를 또한번 놀라게 한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삼성의 64메가D램 개발은 곧바로 반도체 업계의 순위 변동으로 이어졌다. 삼성의 매출액은 11억9200만달러, 세계시장 점유율은 13.5%였다. 도시바의 11억2300만달러, 12.8%를 넘어서는 실적이었다.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놓고 간 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가 그의 타계 5년 만에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64KD램 개발이후 한때 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후계 이건희회장의 일관된 투자결단과 리더십 아래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기술적으로는 진대제박사의 16메가D램, 권오현박사의 64MD램. 이후 황창규박사가 256메가D램이후 세계최초로 이어가면서 반도체코리아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시장도 도왔다. 84~85년 반도체 불황이 86년 246KD램 호황,88년 1MD램호황으로 이어졌고 95년 윈도OS 특수로 이어졌다. IMF쇼크라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4년 이래 플래시메모리, 2009,2010년 애플호황 등으로 메모리왕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92년 이후 삼성은 D램 시장에서 단한차례도 1등자리를 내주지 않고 독주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업계 점유율 30~4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반도체선언 이래 30년 가까운 지금 삼성은 기술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정상 자리를 확보하는 한편 고 이병철 회장이 예견했던 '천문학적 수익'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다.
■기흥캠퍼스 16라인 기공...세계 반도체 1위 노리다
2010년 5월 17일. 이건희 삼성전자회장이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의 첫삽을 떴다. 세계최대 반도체 단지를 만들기 위한 웅대한 그림이다.
"지금 세계 경제가 불확실하고 경영 여건 변화도 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런 시기에 투자를 더 늘리고 인력도 많이 뽑아 글로벌 사업기회를 선점해야 그룹 성장 기회가 오고 경제가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치사가 이어졌다.
사실 이 날은 꼭 27년 전인 1984년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64KD램 1라인 생산공장 준공식을 가진 바로 그날이었다. 이건희회장의 치사는 마치 83년 3월 15일 발표된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하는가'라는 반도체선언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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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5월17일 삼성 나노시티 16라인 기공식이 열렸다. 이날은 지난1984년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선언 6개월만에 기적적 공기단축으로 반도체1라인(64KD램)을 준공한 날이다. | |
삼성전자는 이날 사상 최대 액수인 26조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고 성장동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그 석달 후인 8월 25일 미국의시장조사 업체인 IC인사이츠의 보고서는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화제를 몰고 왔다.
지난 1999년부터 10년간 반도체 산업분석에 근거해 내놓은 예측 보고서 내용은 이랬다.
'2014년, 삼성전자가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설 것이다.'
그 근거는 매출액 성장률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가 연평균 13.5%의 고속 성장세를 구가한 반면에 인텔은 3.4%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 활황을 발판 삼아 D램 시장에서 높은 성장세를 보였으나 인텔은 모바일로 변하는 최근 컴퓨팅 시장의 움직임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해 성장세가 늦어졌다"는 게 IC인사이츠의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24년 간 삼성을 지휘해 오면서 변화,위기,혁신을 강조해 온 이건희회장과 삼성전자반도체사업부의 당초 계획보다도 늦은 것이다. 이미 지난 2005년 세계 1위를 결의했을 때 2012년 인텔을 뛰어넘는 것으로 되어있었기에. 따라서 아직도 배고픈 반도체 강자 삼성은 더 박차를 가할지 모른다.
2010년 결산 결과 삼성전자 매출은 154조원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사업부 매출은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단연 돋보였다. 삼성전자 총 영업이익의 58%인 10조원이 반도체에서 나왔다.
그룹의 운명을 건 도전과 결단으로 산업 보국을 내세운 기업가의 뜻은 변함없이 이어져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결정은 위대했다.
"
http://www.zdnet.co.kr/column/column_view.asp?artice_id=20110328005714
기사 내용 핵심을 정리한다.
하나, 한국에서 반도체는 노비네파(역사적으로 이 시기에는 노비네파가 존재하지 않았던 빅터 로스차일드 시기지만, 편의상 노비네파로 한다) 모토롤라에서 일한 강기동 박사로부터 시작한다. 모토로라는 일본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반도체기술회사였다. 예서, 강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NPN시리즈,PNP시리즈 반도체를 미 반도체 업계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실력자였다.
둘, 강박사는 함께 일하던 레스터 호간이 독립하자 자신도 통신장비 수입상 김규한과 손잡고 독립할 생각으로 한국행을 한다.
셋, 레스터 호간이 영업 비밀 유출 혐의로 모토롤라에 제소당했다. 해서, 겉으로 기술 지원만 하는 식으로 투자했다. 디지털 시계 칩부터 만들었는데, 당시 세계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금난에 봉착하자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흡수했다.
예서, 국유본론적 접근으로 상기한 기사를 분석한다.
일본 전자산업이나 한국 전자산업이나 갑자기 큰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은 한국에 기생하는 쪽발민주당과 같은 쪽바리 색희들 때문에 일본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무엇이든지 일본이 다 만든 것으로 안다. 허나, 일본 역시 미국을 카피해서 오늘날 이른 것이다.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일본의 전자산업이 없다. 트랜지스터 등을 누가 만들었나? 일본이 만들었나? 아니다.
일본의 9대 전자산업 기업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4&dirId=409&docId=404054&qb=7IOk7ZSEIOyCsOyalCDsgrzshLEg67CY64+E7LK0&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ZZpf35Y7tlssak7fYGssc--092215&sid=UEEpS3LRQFAAAFbLGr0
일본 전자산업 역시 삼성전자처럼 국유본 기획과 필요에 따라 국유본이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고 키운 것이다. 예서, 강기동 박사가 뜨는데, 국유본이 당대 매우 중요한 과학기술인 반도체 기술을 허투르게 관리했을 것 같은가? 강기동 박사의 동선을 모두 읽었으나 묵인한 것이다. 기술 지원만 했다고 국유본과 미국이 모른다고? 훗! 전자제품 만들면 그 이력 다 나오는데? 물론 필요하면, 나중에 특허 소송 같은 걸 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하고, 이 시기가 1972년에서 1974년이다. 1974년 1월26일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내리(현재의 부천시)에서 한국반도체란 회사가 문을 열었다. 김규한켐코사장과 강기동박사가 총 100만달러로 설립했다.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넘어간 것이 1973년이다. 이 시기 전후로 해서 세계사에 중요한 일이 상당히 일어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소련 모스크바와 미국 워싱턴을 양날개로 하는 세계체제였다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유럽 런던과 일본 동경을 좌우 날개로 하는 세계체제를 지향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지위가 상승하였고, 일본 지위 향상 만큼 토대가 될 일본 경제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를 시켜야 했다. 일본 지위가 상승하자 그만큼 엔블록권에 있던 하청회사 격이었던 한국도 일부 산업에서 독립을 허가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베트남 파병 취소 결정을 포함한 박정희 정권의 열성적인 경제개발 의지가 촉매 역할을 했다.
헌데, 삼성은 박정희 정권의 역할을 축소하고, 이병철의 의지로만 설명한다. 이는 오늘날 국유본이 박정희를 많이 비판하니 이해할만한 일이지만, 속으로까지 박정희 은혜를 부정하면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삼성 설명으로는 1970년대 시기 디지탈 시계 산업에서 많은 곤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 정부관계자도 어렵다고 말렸다는 것이다. 그걸 이병철이 뚝심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사실인가?
"1979년 9월, 수원공장에 있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강진구 사장이 호출을 하셨어요. 서둘러 사장실로 갔더니 비서 말이 이병철 회장님을 만나러 급히 나가셨다는 거예요. 마냥 기다리는데 한참 뒤 강 사장이 돌아와서 '이건희 부회장께서 인수한 한국반도체로 가야겠다. 회장님의 지시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는 1964년 동양방송(TBC)에 입사, 탁월한 엔지니어 감각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1969년 삼성전자 TV생산부장으로 발탁되었다. 1978년에는 TV 사업부 이사를 맡았다. 그는 반도체 사업을 처음 맡았던 그때를 회고하며 "아주 당혹스러웠죠"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 사업부문(한국반도체)은 삼성 내에서도 "아오지 탄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험지 중의 험지로 꼽혔다.
-임원들이 가길 꺼리는 이유는 뭡니까?
"그때만 해도 '반도체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라는 인식이 팽배했어요. 기술·인력·자금 등 사업을 할 만한 토대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성과가 나오겠어요."
당시 이 회장은 매주 목요일 열리던 삼성 사장단 회의에 수시로 그를 불러 반도체 사업의 진행 과정을 하나하나 챙겼다.
NEC는 커졌는데 우리는 왜?
-이 회장께서 주로 무엇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일본 NEC와의 비교였습니다. 회장님은 'NEC도 삼성과 똑같이 1974년에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서 크게 성장했는데, 우리는 왜 이 모양이냐'며 언성을 높이시곤 했어요. 어느 날 회장님이 또다시 NEC와 삼성을 비교하면서 야단을 치시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가면 반도체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회장님께서 1974년에 지금처럼 반도체에 관심을 가지셨더라면 우리는 NEC보다 더 커졌을 겁니다.' 그랬더니 회장님이 '알았다'고 짧게 대답하시곤 화제를 돌리셨어요. 그 뒤로 다시는 삼성과 NEC를 비교하지 않으셨어요."
http://blog.daum.net/haj4062/15726146
김광호는 삼성반도체를 키운 핵심 인물이다. 김광호에 따르면, 이병철이 반도체에 본격 관심을 가진 것은 1970년대가 아니라 1980년대부터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 관심을 가진 것은 이건희였다. 이건희가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을 사들였다 하니까.
이러한 결정이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후계자를 물려줄 결심을 하게 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한국반도체는 매우 전도유명한 기업이었으나, 석유파동으로 자금난에 빠진다. 알짜 우량기업이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빠질 때, 혜안으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사업가적 안목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해서 늘 적자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허나, 이는 한 순간이어서 자본, 인맥, 정보 모든 면에서 딸리는 삼성이 경쟁업체들에 밀리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이 시기 데이비드 록펠러와 박정희 정권의 갈등이었다. 박정희 유신정권 후반은 뉴라이트와 빅터 로스차일드 대결이 한반도에서 대리전 양상으로 치루어지는 형국이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박정희더러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박정희는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인연을 더 중시했다. 이 결과로 이 시기 한국 산업들이 상당히 어려웠다. 해서, 1970년대 후반 과잉생산 논의도 나오는 것이다. 허나, 이를 국내적,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오류인 게다. 인드라의 국유본론은 사태를 정치경제적, 특히 국제적으로 고찰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고 말한다. 해서, 석유 파동 영향도 있지만, 데이비드 록펠러가 암묵적으로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 진출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훼방놓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시기 힘겹게 데이비드 록펠러와 투쟁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삼성 반도체 사업을 지원했다. 디지털 시계가 세계 일등 상품이 되도록 모든 지원과 혜택을 주었던 것이다.
허나, 박정희 정권의 노력에도 이 시기 삼성 반도체 사업은 지지부진하여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예서, 삼성 이병철이 사업을 접을 수도 있었는데, 왜 접지 않았을까? 박정희 정권이 그만큼 뒷받침해서인 게다. 이 시기 박정희 정권은 외환과 금융을 통제한 사회주의 정권이었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해서, 삼성이 망할 정도로 위기가 와도 박정희 정권이 결심하면 그 뒷감당 정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삼성의 박정희 인맥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분명한 것은 이 시기 이병철은 그다지 반도체 산업에 큰 열의가 없었다는 것이고, 반면 후계자 이건희는 이병철을 끊임없이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박정희가 기간산업을 키운다는 야망으로 이건희에게 명령했을 것이다.
- 임자, 하면 된다. 죽어도 거기서 죽어!
강박사가 삼성을 떠났다. 이는 공학기술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이더라도 빠른 과학기술 속도로 말미암아 이전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해서, 황의 법칙, 이런 것도 나오는 게 아닌가. 기계공학과 출신 인드라로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인문계열은 고전이 최고다, 하면서 옛날 성현 말씀만 반복해서 외우고, 또 외우면 되지만, 공학은 다르다.
해서, 인드라가 기계공학 출신이어서 국유본 관심을 받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단지 기계공학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인문과 공학을 경제적 관점에서 균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요즘 뉴욕 금융업의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삼성과 산요의 관계다. 혹자는 반도체 역사에서 산요를 말하나, 삼성과 산요는 반도체에서 별 관계가 없다. 삼성과 산요의 관계는 일시적이었다. 삼성은 삼성과 마찬가지로 노비네파인 동시에 당시 가전산업을 주도하던 엘지와 상대하기 위해 산요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허나, 산요는 잔가지였다. 훗날 이병철이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에 투자할 때도 손잡은 건 산요의 경쟁사인 샤프였다. 또한, 산요는 훗날 골드만삭스, 다이와, 미쓰이 그룹 등 노비네골드만연합에게 인수되었다가 파나소닉(구 마쓰시다)에 최종 인수되었다.
이 시기 흥미로운 것은 골드만파 골드만삭스가 삼성이 산요 인수할 것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삼성이나 GE나 모두 노비네파이다. 산요나 파나소닉, 미쓰이 모두 노비네파이다.
산요 품에 안은 파나소닉, 한국서 ´신고식´
4월 1일 본사 및 각 해외법인 통합 출범
박영국 기자 (24pyk@ebn.co.kr) l 2011-03-08 13:35:48
산요 인수를 통해 일본 최대 전자기업으로 등극한 파나소닉이 오는 4월 1일 통합 법인으로 공식 출범한다. 일본 본사 합병과 함께 양측의 해외 법인도 이날 통합 법인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파나소닉의 한국 법인인 파나소닉코리아는 오는 9일 한국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산요코리아 흡수합병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파나소닉의 산요 흡수합병은 ´일본 전자기업의 전성시대´ 마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80~90년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등을 앞세워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전자제품 시장을 주름잡던 소니, 아이와, 파나소닉, 산요 등 일본의 주요 전자기업들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된 것.
특히, 산요의 대주주였던 골드만삭스와 다이와증권이 한때 인수 기업으로 한국의 삼성전자 등을 거론했던 점을 감안하면 산요의 몰락은 ´일본 전자산업의 굴욕´으로 기록될 뻔했다.
산요, 60년만에 파나소닉 품으로
산요를 품에 안게 된 파나소닉은 역사적으로 산요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기업이다. 파나소닉과 산요는 같은 뿌리에서 태동된 기업이기 때문이다.
1947년 마쯔시타전공(현 파나소닉전공) 창업자인 마쯔시타 고우노스케(松下幸之助)의 처남 이우에 토시오(井植歲男)가 마쓰시타전공으로부터 공장을 양도받아 설립한 기업이 바로 산요전기다. 이 회사는 3년 뒤인 1950년 산요전기주식회사로 출범했다.
이후 두 회사는 각자의 길을 걸어오다 마쯔시다는 지난 2008년 10월 파나소닉으로 사명을 바꿨고, 같은 해 11월 파나소닉이 산요전기 인수를 발표하면서 두 기업의 합병 추진이 시작됐다. 60여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 배경으로는 2008년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경영환경 악화´가 거론되고 있지만 사실 산요의 경영 악화는 지난 2004년부터 문제시됐었다.
다수의 일본 전자기업들이 제각기 세계 시장에서 ´선전´했던 전성기가 지나고,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후발 기업들에 시장을 잠식당하면서 합종연횡을 통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일본 전자기업들을 정리할 상황이 오게 된 것.
경영 악화를 견디지 못한 산요는 지난 2006년 3월 미쯔이스미토모(三井住友)은행, 골드만삭스, 다이와(大和)증권SMBC 등 금융 3사를 인수처로 총 3천억엔의 우선주를 발행했다.
당시 산요 관계자는 "사업 확장으로 경영위기에 빠졌고, 증자하지 않으면 회사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해 위기 상황임을 시사했다.
우선주 발행 직전, 20여년간에 걸쳐 사장과 회장직을 역임한 최고고문 이우에 사토시(井植敏)는 다른 증권회사 한 곳을 인수처로 삼고 3천억엔의 전환사채를 발행을 계획, 2월 열린 임시 이사회에서 제안했지만, 산요는 이미 우선주 발행을 결정한 상태였다.
이후 대주주 3사를 중심으로 구조조정 등 경영 정상화를 추진해 왔고, 지난 3월말 결산에서는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나, 2008년 전세계를 휩쓴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결국 파나소닉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파나소닉으로의 피인수 움직임이 감지된 것은 지난 2008년 7월부터였다.
후지산케이에 따르면, 산요전기 창업자의 손자이자 전 사장인 이우에 토시마사(井植敏雅, 현 특별고문)는 당시 주위 인물들에게 "은행과 마쯔시타(파나소닉)가 무언가 하고 있다"면서 "빠르면 가을에 움직일 것"이라는 언질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07년 4월 1일부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경영진으로부터 상담이나 보고를 받을 일은 없었으나, 보통주 환산 발행 주식의 약 70%에 해당하는 우선주를 보유한 대주주인 금융 3사의 양도 제한 만료 시한이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조만간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임을 직감한 것.
실제, 대주주 3사는 ´미국발 금융위기´이후 산요에 안면을 바꿨다.
골드만삭스나 다이와증권이 이익을 내다볼 수 있을 때 산요주를 팔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치면서 산요와 주주간의 의사소통은 차단되기 시작됐다.
매각처로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삼성전자 등이 거론됐지만, 기술의 해외 유출을 우려한 일본 경제산업성이 난색을 표명, 보류됐다.
결국, 산요의 ´아버지´ 격인 파나소닉이 다시 산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밑그림이 그려졌다.
인수금액, 리튬이온전지 독점문제 ´난관´
물론, 인수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장 대주주들과의 인수 금액 조율이 큰 문제였고, 각국 정부의 독점금지 조항도 피해가야 했다.
산요의 대주주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과 골드만삭스, 다이와증권SMBC 등 금융 3사는 우선주 49.78%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보통주로 전환하면 의결권의 70%에 달했다.
파나소닉은 이들의 보유 지분을 주식공개매수(TOB) 방식으로 인수할 방침이었으나 파나소닉이 제안한 매수가격은 주당 120엔(약1천600원), 금융 3사의 매각 의향 금액은 주당 250엔으로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3천789억6천만엔의 적자를 낸 파나소닉으로서는 총액 6천만엔에 육박하는 인수 금액 마련은 무리였다.
한달여 간의 협상 끝에 파나소닉은 산요의 자산사정과 양사의 사업이 조화를 이루며 발생할 상승효과 등을 감안, 기존 제시액보다 10엔가량 높은 주당 130엔 전후의 매입가격을 제시했고, 대주주들 중 파나소닉과의 협상에 가장 부정적이던 골드만삭스 역시 금융위기로 인한 자금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당 131엔으로 합의했다.
인수 금액 합의 시점은 2008년 12월이었으나,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미국과 EU, 중국 등 주요 국가에서의 독점금지 조항과 관련된 것으로, 양사가 보유한 리튬이온전지 사업의 높은 점유율이 문제였다. 이 시장에서 산요는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었고, 파나소닉 역시 5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파나소닉은 배터리 공장 한 곳을 처분하는 조건으로 미국과 EU, 중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인수 합의가 이뤄진 지 1년 만인 2009년 12월 산요 지분 50.2%의 공개 매수를 완료했다.
지난해에는 산요와 함께 지난 2004년 자회사로 편입한 파나소닉전공의 지분 100%를 인수하며 완전 자회사화했다.
난립된 日전자기업 합종연횡 신호탄?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는 단순히 ´경영악화로 흔들리던 기업의 피인수´라기보다는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계 재편´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이 보유한 전기전자관련 대기업은 9사에 달하며, 이들 대부분이 TV나 냉장고 등 범용화된 가전제품을 일률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내수시장이 포화상태가 되고 있는데다 해외시장도 삼성전자 등에게 점차 점유율을 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해외 매출 비중이 5%에도 못 미치는 파나소닉으로서는 포화된 내수시장을 벗어나 해외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 확보와 주력 사업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이 필수였다.
이번 완전 자회사화를 통해 파나소닉은 산요의 최고 강점인 2차전지분야와 파나소닉전공의 주택설비기기를 사업의 핵심으로 삼고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우선 산요의 백색가전(냉장고, 세탁기 등) 사업 등 채산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매각하거나 중단하고, 리튬이온배터리나 태양전지사업을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한때 가전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으나, 지금은 한국과 중국 업체들에 밀려 사양길을 걷고 있는 가전 분야를 축소하고 경영통합을 통해 신성장사업에 경영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것.
이같은 파나소닉의 움직임은 앞으로 일본 전자업계 재편의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해외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간 합병을 통해 성장성이 있는 사업은 규모를 확대하고 부실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8년 일본 빅터(Victor)와 KENWOOD가 경영통합을 단행한 바 있으며, LCD 패널과 반도체 사업에 대한 사업 제휴가 추진되는 등 일본 전자기업 내 구조조정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 최초의 대형 전자기업간 합병으로 기록된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는 구조조정을 망설이고 있는 일본 내 다른 전자기업들에게 좋은 참고사례가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http://www.ebn.co.kr/news/n_view.html?id=483918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삼성에 있어 핵심적 기업은 미쓰이다. 삼성과 미쓰이는 노비네파이다. 미쓰이는 미쯔비시와 더불어 일본 양대 재벌이다. 예서, 삼성이 단지 일본과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이다. 아니다. 국유본 기획인 게다.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니, 쪽발민주당 정신병자 색희들이 멘붕이 오는 것이다. 쪽발놈현 병쉰색희가 김영삼에게 쪼르르 달려가 쪽발 세이코 시계 내밀면서 쪽발지태 장학생임을 자랑한 게 대표적이다.
결국, 당시 국유본 권력을 쥐고 있던 데이비드 록펠러는 한국을 어느 정도 발전시키고 싶었다. 해서, 1970년대 초중반에는 한국 경제를 키웠다. 허나, 후반에 들어서서 박정희 정권이 빅터 로스차일드 인연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자 한국 경제에 대해 은근한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권이며, 뉴라이트 정권인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삼성의 반도체 산업이 본격화한 것이다.
4. 국유본이 반도체 가격 안정화를 위해 한국 반도체산업을 삼성에게 허가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3년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엄청나게 몰입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반도체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회의에는 과장급 직원까지 참석했다. 전사적인 총력전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도 수시로 내려가 현황을 점검했다. 기업가 생애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해 12월12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2~3년 차이로 좁힐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적 쾌거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삼성의 엄청난 반도체 개발 속도에 충격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의 낡은 부천공장 생산라인을 활용해 VLSI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불과 10개월 만인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어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개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메가 시대'에 진입시켰다. 마침내 1987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톱 10(9위)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이처럼 반도체 사업은 빛나는 성과를 이어갔지만 적자에서는 좀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0위 안에 우뚝 선 1987년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13년 연속 적자였다. 적자 규모도 상당히 컸다. 이러다 보니 세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에 매달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삼성 이병철은 1983년 동경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올인하다시피 한다. 헌데, 1987년까지 무려 13년 적자였다. 적자가 이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데, 삼성 이병철은 대체 무엇을 믿고 반도체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을까. 공식적인 계기는 1980년 봄 일본 이나바 슈조와의 만남인 듯싶다.
"1980년 이른 봄. 삼성물산 가스미가세키(霞ケ関)빌딩 사무실. 도쿄를 방문중인 이병철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 아래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73년과 79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리는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의 위기가 주제였다. 이병철회장이 이나바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우주 해양공학 등 성(省)자원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지요. 일본 정부도 이를 적극 뒷받침해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외화수입은 급증했습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있습니다."
하면, 이나바 슈조는 누구인가? 요시다 시게루 밑에서 일본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혼자서 일본경제정책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는가. 국유본이다. 국유본 없이 함부로 경제정책 수립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건, 그가 후지화학 회장이라는 것이다. 후지화학하면 어떤 회사인가. 미쓰이 계열이자 노비네파 회사이다.
"한국 재벌의 기원 - 일본의 미쓰이와 삼성일본 Upgrade
2010/03/14 16:28
http://umseungpyo.com/140103125138
1. 한국의 재벌 중심 구조
최근 한국 기업은 세계 불황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는 전자 산업과 자동차 산업은 일본의 주력 분야이기도 하다. 20년 전의 삼성은 소니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며 10년전만 하더라도 현대가 도요타와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성공 요인이 신속하고 과감하게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Top down(하향식 의사 결정) 체계에 있다고 분석한다. 모든 영역의 권한을 지닌 재벌 총수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유망한 사업 부문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특히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와 같이 시황에 영향을 받는 장치 산업의 경우 경영진의 결단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갈리기도 한다.
한국 기업은 재벌 구조로 소유와 경영이 일치하기 때문에 책임있는 경영이 가능하기도 하다. 재벌(財閥)은 통상적으로 일본이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함께 성장한 가족 경영의 기업 집단을 의미한다. 일본의 재벌은 해제되어 계열(系列) 방식으로 변하였지만 한국의 경제는 지금도 재벌이 중심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 재벌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 재벌의 형성 과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2. 한국 재벌과 일본 재벌의 비교
저명한 일본의 경제 평론가 다카하시 카메키치(高橋亀吉)는 1938년 출판한 <일본 재벌론(日本財閥論)>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 재벌의 발전과 현세 그리고 전환기의 거대 재벌과 그 동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일본 재벌의 성장 과정은 전쟁 물자의 조달이 배경이 되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군수품의 보급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업화를 국가가 주도하기 위해서 재벌은 정부 특혜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재벌은 국가 경제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지만 금융 부문의 자금력 집중과 주요 산업의 독점으로 반 재벌 감정도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재벌 비판에는 당시의 사회주의 풍조와도 관련이 있었다.
구미와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과 일본의 재벌의 주요한 특징은 사업 다각화에 있다. 특정 분야가 아니라 관련성이 없는 여러 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재벌이 정부 주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재벌론>에서 언급한 주요 재벌인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가와사키(川崎), 오오쿠라(大倉), 후루카와(古川)가 정부와의 유착으로 여러 사업 분야에 진출하였다.
재벌 |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는 주요 계열사 |
미쓰이 |
미쓰이 물산,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생명/화재 해상, 미쓰이 화학, 도요타, 도시바(東芝), 후지(富士) 필름, 미쓰코시 백화점 |
미쓰비시 |
미쓰비시 상사, 미쓰비시 UFJ 은행,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화학, 메이지 야스다(明治安田) 생명, 도쿄 화재 해상 |
스미토모 |
스미토모 상사,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생명/화재 해상, 스미토모 금속 |
한국과 다른 일본 재벌의 특징으로는 상사와 은행 기능이 있다. 일본의 재벌은 상사와 은행을 핵심으로 한다. 원료 구매와 상품 판매를 통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투자를 위한 자금력까지 보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재벌 중에서 은행과 상사 기능이 미약한 가와사키, 오오쿠라, 후루카와는 현재 몇몇 핵심 기업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한편 군수 산업을 위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신흥 콘체른이 탄생한다. 닛산(日産 - 중공업: 닛산 자동차, 히타치(日立), 손보 재팬), 닛치스(日窒 - 화학: 칫소(窒素), 세키스이(積水) 화학, 아사히(旭) 화성), 닛소(日曹 - 화학: 닛소), 리켄(理研 - 화학: 리코)과 같은 재벌은 은행과 상사를 보유하지 않고 특정 분야의 산업에 집중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다음과 같이 점에서 일본의 주요 재벌보다는 신흥 콘체른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은행과 상사의 역할이 제한적이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의 규제로 은행을 보유할 수 없었으며 상사가 지주 회사 역할을 하고 있지도 있다. 특히 한국의 5대 재벌(삼성, 현대, LG, SK, 롯데)의 상사는 건설, 패션, 유통(백화점) 부문을 겸하고 있으며 수출입 업무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상사는 현대 종합 상사 밖에 없다. 또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상사는 일본과는 달리 내수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둘째 일본의 신흥 콘체른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성장하였다. 따라서 조선 칫소나 닛산의 만주 중공업과 같이 현지 투자도 이루어졌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 코오롱과 효성은 섬유 산업을 주력으로 재벌이 되었으며 한진(대한 항공)은 베트남 특수와 같은 해외 건설 사업으로 재벌이 되었다. 한편 한일 조약 이후 엔 차관이 POSCO에 투입되어 철강 산업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셋째 한국의 재벌과 일본의 신흥 콘체른은 전문 사업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재벌도 당초에는 일본의 주요 재벌처럼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였으나 정부의 재편 압력에 따라 특정 부문에 집중하였다. 특히 아시아 통화 위기 이후에는 주력 사업 분야가 어느 정도 정립되어 현대는 자동차, 삼성은 전자 및 금융, LG는 전자 및 화학, SK는 에너지와 정보 통신, 롯데는 식품과 레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3. 한국의 삼성과 일본의 미쓰이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재벌은 일본의 신흥 콘체른과 유사한 형태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 재벌의 창업자들은 일본의 주요 재벌의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일본의 영향으로 한국 기업의 근대 자본주의는 일본에서 유래하였다. 삼성의 초대 회장 이 병철과 POSCO의 설립자 박 태준 그리고 롯데의 신 격호는 모두 일본의 와세다(早稲田)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특히 이 병철 회장의 아들인 2대 회장 이 건희와 차세대 유력자 이 재용 부사장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특히 창업자인 이 병철 회장이 일본 유학 시대의 경험과 지식은 삼성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재벌은 미쓰이였기 때문에 삼성 재벌의 형성 과정에는 다음과 같이 미쓰이를 참고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먼저 기업의 성격과 문화이다. 한국에서 현대의 주요 사업 분야는 <중후장대(重厚長大)>로 상징되며 조직이 강조되는 반면, 삼성은 <경박단소(輕薄短小)>로 요약할 수 있고 개인을 중시한다. 당초 현대는 건설을 기반으로 조선과 자동차에 진출하였지만 삼성은 식품(제일 제당)과 의류(제일 모직)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 창업자 정 주영 회장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도전 정신의 인물이라면 삼성은 <한 명의 인재가 만 명을 구한다>는 능력 중시를 표방한다.
일본의 재벌에도 유사한 비교가 있다. 조직의 미쓰비시, 인간의 미쓰이, 결속의 스미토모는 유명한 표현이다. 공통 영역인 은행과 상사 그리고 유대 관계가 희박한 도요타 자동차를 제외하면 미쓰비시가 자동차와 중공업이지만 미쓰이는 경공업인 도레(東レ)와 도멘(トーメン)의 방직이 기원이었다. 조직이라는 단체의 힘보다는 개인의 창의력을 중시하는 문화는 삼성과 미쓰이의 유사점이다.
기업의 명칭에서 비슷한 점이 나타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재벌의 중핵이 되는 상사(商社)의 이름이 삼성과 미쓰이 모두 물산(物産)이다. 상사는 상품 거래의 대행 회사라는 의미로 상사(商事) 회사의 약자이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미쓰비시, 스미토모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종합 상사가 상사(商事)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현대 종합 상사, LG 상사, SK Networks(SK 상사)와 같이 상사가 일반적인 표현이다. 삼성과 미쓰이가 단 두 곳만이 물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주요 종합 상사이다.
한편 삼성은 섬유 산업을 영위하는 계열사의 명칭을 제일 모직과 제일 합섬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삼성 이외의 사명을 사용하는 제일 제당과 제일 기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쓰이도 도레(동양 레이온)와 도멘(동양 면화)에 동양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점은 우연만을 아닐 것이다. 참고로 한국과 일본의 어느 재벌도 섬유 산업에 자사명이 아닌 독자적인 이름을 붙이는 곳은 없다.
또한 삼성과 미쓰이의 재벌 형성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현재 주요 사업 분야인 기업들이 상당 부분 중복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현재는 삼성 전자가 대표적이지만 기업의 모태는 삼성 상회에서 출발한 물산이었으며 섬유와 식품으로 성장하였고 금융과 전자로 한국에서 독보적인 재벌이 되었다. 미쓰이 재벌은 은행과 상사가 핵심이며 방직 공업으로 재벌이 되었으며 나중에 도시바와 도요타도 합류하게 되었다.
사업 |
삼성 |
미쓰이 |
상사
은행
보험
섬유
백화점
전자
자동차
화학 |
삼성 물산
삼성 생명, 삼성 화재
제일 모직, 웅진 케미칼(제일 합섬)
신세계
삼성 전자, SDI
르노 삼성 자동차
삼성 Total |
미쓰이 물산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생명/화재 해상
도멘, 도레이
미쓰코시 백화점
도시바
도요타 자동차
미쓰이 화학 |
4. 한국 재벌의 미래
일본 재벌은 군국주의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연합군이 전범으로 지목하여 해체되었다. 현재는 그룹이라는 형태의 계열 체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의 재벌과 같은 단일 집단으로의 결속력은 거의 없으며 사장단의 친목 모임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일본의 재벌의 역사는 에도(江戸) 시대부터이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가족 중심의 족벌 경영 체제도 남아있지 않다. 일본 특유의 양자를 받아들이는 문화 또한 한 집안의 독식을 견제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까지는 소유와 경영이 일치한 총수 중심의 기업 지배가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앞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것이 틀림 없기 때문에 한국 재벌의 과제는 우수한 전문 경영인 체제를 어떻게 확립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집안의 혈통이 우수하고 경영 수업이 충실하다고 해도 계속 유지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어느 왕조의 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쟁 뿐만 아니라 상속의 위법성도 문제가 되고 있다. 회사 실적이 우수하다면 재벌 일가의 범죄를 용서하는 정부의 입장과 국민의 의식도 개선해야 한다. 300년에 달하는 일본 재벌의 역사에 평가하는 인물은 창업주가 아니라 근대적 기업의 기반을 구축한 경영진이다. 이제 막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는 한국의 재벌도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이 바람직하다.
[출처] 한국 재벌의 기원 - 일본의 미쓰이와 삼성|작성자 마의 태자"
인드라가 강조한 바 있다. 로스차일드 - 미쓰이 - 삼성 - 노비네파, 록펠러 - 미쯔비시 - 현대 - 뉴라이트파라고 말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쪽바리 색희가 경쟁상대가 될 수 있는 삼성 이병철에게 길을 그냥 알려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안 되는 것이다. 해서, 대개는 삼성 이병철이 쪽바리 색희한테 뭔가 대가를 주었겠거니 여길 것이다. 물론 사례금 같은 걸 줄 수는 있겠다. 허나, 대가를 준다고 해서 이런 것 그냥 알려주는 것 아니다.
국유본이다. 일본이 전자산업하는 것도 국유본이 허가해서 가능한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삼성에게 반도체 산업하라고 지시한 것일까.
하나, 국유본 세계전략 때문이다. 1973년 이후 데이비드 록펠러는 삼각위원회 등을 통해 아시아 강화, 즉 일본 강화 전략을 구사했다. 일본을 키워서 유럽과 얼추 비슷한 경쟁력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해서,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 시기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여 일본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웠다. 물론 전자산업 뿐이겠는가.
하면, 왜 미국은 국유본 본부인 셈인데, 기술 이전하지 않고 독점하는 것이 이익인데, 국유본이 왜 미국에 손실을 끼치면서까지 전자산업 기술 이전을 단행하였을까.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금융, 에너지 부문을 장악하고 있기에 그외의 부문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금융, 에너지 부문 이외에 다른 부문도 여전히 세계 제일로 나간다면, 세계 무역이 어찌 되겠는가. 일제나 독일제 대신에 여전히 미제가 세계 최고라고 한다면 세계 경제체제 존립이 위태롭게 된다. 단지 반도체가 공해산업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이해를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어줍잖은 반미론에서 벗어나 국유본론으로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국유본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둘, 전자산업을 키우려면 부품산업도 필요하다. 이때, 반도체가 문제였다. 국유본은 일본을 키우려고 반도체 산업을 일본, 대만에 집중 배치하였는데, 문제는 이들 지역이 지진 지역이라는 점이다. 전자산업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데, 만일 지진이 발생하여 반도체 공장에서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면 반도체 가격이 폭등할 우려가 있다. 반도체 가격이 폭등하면 전자산업에 연쇄적인 타격을 주어 세계 경제가 순식간에 휘청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만과 일본이 아닌 제 3 지역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삼성 반도체이다.
지진 무풍지대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한, 세계 반도체 가격이 안정화할 수밖에 없다.
셋, 하면, 국유본은 왜 현대가 아닌 삼성에 반도체 사업을 주었을까. 경박단소는 삼성, 중후장대는 현대로 이미 정한 듯싶다. 해서, 국유본 간첩, 이나바 쇼지를 통해 이병철과 접선시켜 국유본 지시사항을 전달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런 국유본 보증이 있었기에 삼성 이병철이 안심하고 13년 적자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인드라가 삼성자동차다 뭐다 해서 삼성을 많이 비판하고 있었다. 인드라는 1990년대 후반 하이텔 통신에 삼성전자 주가 만원갈 수도 있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반도체 산업이 초기 시설투자가 엄청나게 들기에 잘 못 되면 순식간에 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헌데, 이 글을 올린 후에 관악구 고시학원을 다니는 이가 인드라를 고소했다. 애국기업 삼성을 비판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나? 삼성도 아니고 삼성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왜 인드라를 고소했는지~!
하여간 관악경찰서에 가니 경찰도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재발 방지(?) 약속을 하면 취하 뭐 이렇게 하자고 나왔다. 해서, 고소한 상대방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안 보여주더라.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애국시민은 아닌 듯싶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인드라는 이병철의 의지, 이런 건 별로 안 믿는 편이라는 것이다. 쪽발놈현, 쪽발돼중의 의지 이런 것 안 믿는다. 인드라는 그 의지 이면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 이면에는 국유본이 있고, 국유본은 자신이 한 일을 이병철이 한 것인양 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병철이 국유본 마음에 들 만큼 여타 다른 기업인보다 현명하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허나, 이병철 머리에서 삼성 반도체가 나왔다는 건 이 글을 읽는 순간부터 구라다, 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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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
80년대 당시 재계에는 반도체가 트렁크 하나분량으로 백만달러의 가격을 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도체는 모든 경영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였습니다. 저는 이 반도체를 더 잘 알아보기 위해 반도체 연구의 1인자인 산켄전기의 회장 오타니다이묘 박사와 기술부장 덴다쇼이치 박사 두 사람에게 많은 조언을 얻습니다. 그 뒤 반도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한 말들입니다.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등이 그것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 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호암자전, 이병철]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1)
초창기의 어려움
83년 동경 선언 후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는 사실에 비판적 여론이 강했습니다. 삼성 내부에서조차 '반도체 망국론'이라는 비판적 의견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미국, 일본이 이미 절대강자로 부상한 때에 삼성이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기술 격차와 막대한 자금 마련, 기술 인력 확보, 짧은 라이프 사이클로 인한 높은 위험성 등이 해결해야만 하는 난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그러나 누군가가 만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2)
성공 요인
1.고급 인력의 확보와 연구비용에 대한 과감한 투자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진출할 당시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을 두고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그러한 연유로 기술보호주의가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메모리 사업이란 첨단 기술의 도입 없이는 불가능 했기 때문에 고급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 속담이 떠오른 저는 곧 바로 미국으로 가서 한국인 과학자들을 설득, 그렇게 해서 32명의 고급인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반도체 사업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반도체 연구개발센터를 미국과 국내에 두 개를 설립하였습니다. 보통 막대한 연구비용으로 하나만 설립하는게 주류였으나 저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회사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 두 개 모두 설립하였고 그 전략은 결국 성공했습니다.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3)
2. 시간 절약, 과감한 투자
경기도 기흥에 VLSI공장을 설립할 때 저는 "6개월 만에 공장건설을 완료하라"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반도체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발주자인 삼성은 준비기간을 없앨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또 반도체는 짧은 라이프 사이클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선발주자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개발할 수 있게 개발자들 간의 경쟁을 유도했습니다.
초창기의 반도체 사업의 경영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1984년부터의 적자가 1987년까지 누적되면서 무려 1,159억이나 되었습니다.(그 때 당시 1159억은 매우 큰 거액) 그러나 저는 시장 도입 때의 손해는 예상했었고 막대한 연구비를 꾸준히 투자하는 것은 나중에 앞서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투자를 했고 결국 4메가D램을 생산할 때부터 삼성은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3.굳은 의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반도체를 고수한 이유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기어이 성공시켜야겠다는 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성공을 부르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bitmania/30
삼성 이병철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까지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자.
http://blog.chosun.com/jh3164/6308928
"삼성이 반도체 사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삼성은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한국반도체는 당시 국내 유수의 오퍼상이었던 켐코(KEMCO)가 기술집약적인 웨이퍼 가공생산을 위해 세운 업체였다. 한국반도체 지분 인수 과정에는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가 개인자금을 들일 만큼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반도체 사업에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그룹의 중추인 비서실에서도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내린 터였다.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 등 경제 관련 부처들도 "투자 과잉에다 기술자가 없다"며 말렸다. 더욱이 삼성전기·삼성전관 등 여타 전자 사업이 고전하고 있을 때여서 그룹 차원의 투자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희 당시 이사는 왜 반도체에 집착했을까.
그 무렵 삼성물산 도쿄지점장이었던 이길현 전 신라호텔 사장은 <삼성 60년사>에서 "당시 이건희 이사는 이미 '반도체 공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마쓰시타·도시바·NEC 등 일본 전자업체 기술자들을 자주 만났고, 단독 세계여행을 통해 반도체 관련 인사들을 만나며 자료를 모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삼성은 전자손목시계용 칩, 전자오븐용 칩, 트랜지스터 등의 개발에 잇달아 성공했지만 사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계속 적자를 내다가 결국 자본금 잠식 상태에 이른다. 삼성은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했다. 회사 이름도 삼성반도체로 바꿨다. 1978년 3월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당시 국내 반도체조립 업계 선두업체였던 페어차일드가 노사분규 때문에 부천 공장을 매물로 내놓자 이를 인수했다. 웨이퍼 가공에서 조립생산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일관생산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사업의 경영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79년 9월 어느 날 당시 삼성전자 김광호 이사(전 삼성전자 부회장)는 강진구 사장(전 삼성전자 회장)의 전화 호출을 받았다. 사장실로 갔더니 정작 강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이병철 회장을 만나러 급히 나갔다는 게 비서의 설명이었다. 그 시각 강진구 사장은 이병철 회장에게 "김광호 이사를 반도체로 보내겠다"는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일전에 이 회장으로부터 "삼성전자에서 가장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반도체로 보내라"는 특별지시를 받은 데 따른 후속 인사였다. 정작 김광호 이사는 강진구 사장에게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터였다.
70년대까지 반도체 사업은 '아오지 탄광'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삼성반도체 반도체사업부장으로 발령이 나서 갔더니 직원 천여 명이 할 일이 없어 풀을 뽑고 있더군요.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요. 당시 반도체는 삼성 내에서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회사였습니다. '아오지 탄광'으로 불릴 정도였지요. 어쨌든 제가 간 이후에도 적자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보고를 올렸지요. 그래서 결국 삼성반도체는 1980년 삼성전자로 합병됐다가 1982년 또 다시 한국전자통신으로 합병돼 삼성반도체통신으로 거듭났습니다."
삼성반도체통신 출범 과정에는 사명(社名)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김광호 당시 상무(1980년 7월1일 상무 승진. 정기인사 시즌이 아닌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다)는 신설 합병법인의 상호를 '삼성통신반도체주식회사'로 기안해 보고했다. 그랬더니 이병철 회장은 대뜸 "택도 없는 소리 마라. 삼성반도체통신으로 해라!"는 것이 아닌가. 잠깐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해가 됐다.
김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 "저는 삼성반도체가 적자 기업인 데다 흡수당하는 형편임을 감안해 의당 회사 이름을 그렇게 기안했던 것인데 회장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지요. 그때 이미 회장님의 향후 반도체 사업 구상은 상당히 깊이 진척돼 있었던 겁니다."
그랬다. 이병철 회장은 그 무렵을 전후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화두로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봄 어느 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인 이나바 박사가 도쿄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회장을 방문했다. 이나바 박사는 과거 일본 정부에서 경제 정책을 다룬 경력이 있는 경제 전문가였다. 그는 일본 산업계의 거대한 방향 전환을 들려주었다.
요지는 이러했다. "제철·조선·석유화학·섬유 등 일본 기간산업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과 품질을 향상시켰지만 과당경쟁·과잉생산 때문에 도산이 속출해 그 부담이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갔다. 대외적으로는 덤핑 수출로 무역마찰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기간산업의 생산 규모를 20~50%가량 대폭 억제하기로 했다. 대신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 등 고부가가치의 첨단기술 분야로 전환을 도모하고 있으며, 특히 반도체와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 수입도 급증했다. 일본의 살 길은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이나바 박사와의 만남에서 감명을 받았다. 자원이 없어 무역입국 외에는 달리 국가의 활로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도 하루빨리 첨단기술산업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왔음을 직감했다.
이 회장은 당시 심경을 <호암자전>에 이렇게 남겼다.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利害)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당시로선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을 추격할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 리스크는 감당해낼 수 있을까, 또 고도의 전문 기술 인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난제가 수두룩했다.
이병철 회장은 특유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폭넓은 정세 판단에 나섰다. 미국·일본은 물론 국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반도체에 관한 한 최고의 자료들을 섭렵해 나갔다. 물론 만류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 도호쿠대학의 덴다 박사는 "메모리 반도체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삼성이 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그는 당시 파워 트랜지스터 분야의 손꼽히는 석학이었다.
몇 년의 장고 끝에 마침내 '도쿄선언'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생애 내내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 남들이 말리는 사업에 도전해 결실을 맺어온 기업가였다. 칠순을 훌쩍 넘긴 고령이었지만 그 도전정신은 전혀 퇴색함이 없었다. 오랜 숙고 끝에 반도체 사업이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가 1982년 5월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10월 반도체·컴퓨터 사업팀이 꾸려졌다. 이 팀은 당시까지 개발된 반도체들의 성능·원가·시장동향 등을 조사하는 한편 장·단기 사업계획을 세워 이 회장에게 수시로 보고했다.
1983년 3월15일 아침 일본 도쿄. 이병철 회장은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을 기해 삼성은 VLSI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오랜 고뇌 끝에 나온 그의 한마디는 곧바로 세상에 공표됐다. 반도체 입국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뗐을 뿐, 갈 길은 너무 멀었다. 속도를 내야만 했다. 가장 큰 과제는 기술 확보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 반도체 업계가 매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기술보호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른 업체에 대한 기술제공을 매우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성은 어렵사리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일본의 샤프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샤프의 기술제공은 일본 업계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샤프는 심지어 "국익을 해치는 나라의 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일단 기술도입이 성사됐지만, 마냥 외국 업체에 기술을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술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일류업체로 나아가는 것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재미 한국인 과학자들에게 선이 닿았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말이다. "당시 미국 반도체 업계에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제법 많았어요. 반도체 연구개발이 워낙 힘든 일인지라 미국인들은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말하자면 의대생들이 '외과'를 기피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그 틈새를 바로 한국인이나 중국인 등 유학파 학자들이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당시 반도체 인재들을 '꼬시러' 수없이 미국 출장을 다녔습니다. 한꺼번에 모아 놓고 면담할 수 없어 어떤 때는 한 사람을 만나러 비행기를 탔다가 다음날 귀국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삼성 반도체 사업을 짊어질 역사적인 '선발대'가 조직된다. 처음 삼성이 접촉한 유학파 과학자는 이임성·이상준·이일복 박사 3인이었다. 이들 모두는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조국의 첨단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은 몇몇 인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꽤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이임성 박사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다. 미국에 현지법인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영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최신기술 입수와 수출 전진기지 확보에도 이점이 있었다.
198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 SSTI4(Samsung Semiconductor & Telecommunications International Inc.)가 문을 열었다. SSTI는 국내의 미숙련 인력들이 파견돼 교육·훈련을 받고 전문가로 거듭나는 인재사관학교 구실도 했다. 1기 연수생 중에서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의 리더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조수인 메모리담당 사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SSTI는 1985년 SSI로 이름을 바꿨다. SSI는 이후에도 기술인력 양성과 첨단기술 개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생애 마지막 도전에 남은 열정 '올인'
이병철 회장은 1983년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엄청나게 몰입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반도체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회의에는 과장급 직원까지 참석했다. 전사적인 총력전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도 수시로 내려가 현황을 점검했다. 기업가 생애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해 12월12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2~3년 차이로 좁힐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적 쾌거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삼성의 엄청난 반도체 개발 속도에 충격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의 낡은 부천공장 생산라인을 활용해 VLSI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불과 10개월 만인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어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개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메가 시대'에 진입시켰다. 마침내 1987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톱 10(9위)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이처럼 반도체 사업은 빛나는 성과를 이어갔지만 적자에서는 좀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0위 안에 우뚝 선 1987년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13년 연속 적자였다. 적자 규모도 상당히 컸다. 이러다 보니 세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에 매달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실적이 부진하면 임직원들을 닦달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독려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회장님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도체사업본부장 아이가! 김군, 니는 적자 걱정 말고 기술자 양성과 신기술·신제품 개발에만 매진해라. 내가 책임질 테니.' 저는 그 말씀 한마디가 오늘의 반도체 신화를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두가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됐으니까요. 평소 회장님은 적자에 대해 엄격했지만 유독 반도체 사업만큼은 달랐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7년 8월 기흥 반도체 공장 3라인 기공식이 마지막이었다. 기흥 3라인은 이듬해 준공식을 갖자마자 바로 풀가동에 들어갔다. 1988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첫 흑자를 냈다. 흑자 규모는 그 동안의 누적 적자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았다.
이병철 회장은 생애 마지막 사업에서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단기적인 이익을 욕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삼성의 미래, 나아가 국가 경제의 앞날을 열어갈 든든한 열쇠 꾸러미를 남기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출처]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반도체 결단' 비화|작성자 얕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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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80년 초로 알려졌다. 이때 도쿄를 방문 중인 이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 박사가 찾아왔다고 한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아래에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로 알려진 그는 당시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이나바 박사는 그 자리에서 "일본이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렸다"며 '반도체와 컴퓨터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나바 박사는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 때에도 이 회장과 세계 경제와 일본 경제를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었다. 당시부터 이 회장은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83년 2월 7일 밤,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사활을 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이 회장은 그동안 미국과 일본의 수많은 반도체 전문가를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었고 사업성 검토에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이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고 결심했다. 시계 칩 사업에서 드디어 흑자를 냈다는 소식도 이 회장의 결심에 힘을 보태주었음은 물론이다.
이 회장이 큰 결단을 하고 나서자 삼성 내부뿐 아니라 우리 정부도 발칵 뒤집혔다. "삼성이 망하려고 한다. 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하겠나?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데, 삼성이 그만한 자금이 있는가?" 이런 식이었다.
삼성과 이 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설명하는 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983년 3월 15일 삼성그룹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그룹 발표문을 내놓게 된다.
64K D램 개발 발표 한 달 늦춰
그 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기술 도입처로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일본의 샤프와 손잡았다. 이 회장은 1983년 7월 이윤우 개발실장과 7명의 직원을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보내 기술 연수를 받게 했다. 샤프와는 이 회장과 친분이 있는 사사키 다다시(佐佐木正) 사장을 통해 협력관계를 맺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한 과정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듯합니다.
"아무도 그 부분을 상세히 이야기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국익과 관계된 일이에요. 제가 회고록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갑시다."
-그러면 64K D램 개발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기술적인 부분은 아직도 공개하기가 힘듭니다. 대신 64K D램 개발을 마치고 난 후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1983년 12월 1일 강진구 사장이 64K D램 개발을 발표했습니다. 아주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했으니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사실 64K D램은 발표 한 달 전에 개발됐어요."
-그럼 발표를 미뤘다는 얘긴데 왜 그랬습니까?
"일본 업체가 견제하면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죠."
-정부도 몰랐나요?
"물론 알았습니다. 대통령에게도 보고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맞습니다. 1983년 11월 전두환 대통령이 아웅산 사태 이후 처음으로 사업시찰에 나섰는데, 인천시청을 거쳐 부천공장을 방문했어요. 그때 제가 브리핑하면서 64K D램을 개발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업체에서 견제가 들어올까 봐 아직 발표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요?
"전 대통령은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러면 절대 발표하지 마라. 발표하려면 나한테 꼭 허가 맡고 해라'고 말했어요.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64K D램 개발을 정부에 공식적으로 보고하면서도 발표는 늦추게 됐어요. 그사이 일본의 견제에 대비할 시간도 벌었습니다. 전 대통령을 여러모로 평하지만 반도체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도움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반도체 업계에 어떤 기여를 했나요?
"대통령 재임 중에 반도체 업계에 두 가지 선물을 줬습니다. 첫째 선물은 정확한 시기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980년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전 대통령이 부천공장을 방문했을 때 '애로사항이 있으면 얘기하시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반도체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설비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되는데, 이 중 일본에서 수입하는 프로젝션 얼라이너(Projection Aligner)의 관세가 50%나 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전 대통령이 '세금? 당연히 내야지'라며 제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관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군요.
"아닙니다. 전 대통령이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저는 '사실 대일무역 적자 때문에 이런 관세가 붙었습니다. 대일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면 우리가 사업을 잘해서 일본에 수출을 많이 해야 되는데, 이런 관세 부담 때문에 반도체 사업에서 이익을 내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며 자세한 설명을 보탰습니다."
-이해하시던가요?
"네. 전 대통령은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일본을 이겨야지. 내가 없애주겠소'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프로젝션 얼라이너에 붙던 관세가 사라졌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전 대통령이 관세를 없애준다고 약속했지만 실현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부가 프로젝션 얼라이너에만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면 다른 업계에서 반발하리라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선물은요?
"두 번째 선물은 1988년 2월 퇴임하기 두 달 전에 이뤄졌습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대통령께서 청와대에서 4메가 D램을 개발한 반도체 3사 주역들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 대통령은 애로사항부터 묻더군요. 저는 업계의 현안이던 '외화대부(外貨貸付)를 완화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대일무역 적자 때문에 외화대부를 완화해달라는 부탁은 쉽게 들어주기 힘들었을 텐데요.
"맞습니다. 여전히 대일 무역적자가 심각했어요. 일본 설비를 수입하려면 100% 자기자본으로 해야 하지만 미국에서 수입은 50%를 대출해주었거든요. 그런데 반도체 생산 장비는 미국보다는 보통 일본 장비가 좋아서 업체들은 일산(日産)을 선호했어요."
-대통령의 반응은요?
"제가 이런 사정을 설명하자 김윤환 비서실장에게 대번에 '사공일 오라고 해' 하더군요. 15분쯤 지나서 사공일 재무장관이 불려왔어요. 전 대통령은 '반도체 설비를 일본에서 수입하려는데, 왜 대출을 안 해주느냐'고 따져물었어요."
-재무장관의 입장은 어땠습니까?
"사공일 장관은 외화대부 완화에 반대했어요. 그는 '각하, 대일 무역적자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반도체산업을 육성하려고 외화 대출을 허용해주면 다른 업계에서 반발하고, 대일 무역적자 감축도 불가능합니다'라고 답변했어요."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받아들였나요?
"아니에요. 전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죠. 그는 '시끄러워. 해줘. 당신, 내가 두어 달 후면 퇴임한다고 우물쭈물하면서 미루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어. 무조건 일주일 안에 해줘'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일주일 안에 외화대부가 완화되었나요?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의 일주일 안에 전 대통령의 지시가 이행된 것은 분명해요. 그 덕분에 삼성은 물론이고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와 금성사(현 LG전자)가 한결 수월하게 반도체 장비를 수입해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었어요."
"[아시아경제 전필수 기자]매출액 165조원에 영업이익 16조원.
삼성전자
지난해 매출액은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절반에 육박한다. 올해 예상매출액은 200조원에 육박한다. 증권사들이 예상하는 매출액 평균치가 198조원이다. 영업이익 추정치는 27조원을 넘는다. 이미 상반기까지 영업이익만 12조원을 훌쩍 넘었다. 3분기는 사상 최고치 기록을 다시 갈아치울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1조2000억원짜리 손해배상금 지불 평결에도 영업이익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삼성전자의 역사는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1970년대 건설 중심의 고도성장기 이후 기술중심의 전자산업을 이끌어 온 게 삼성전자다. 1990년대 처음으로 순이익 1조원 시대를 연 것도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가 2005년 처음으로 개척한 영업이익 10조원은 아직 삼성전자를 제외하곤 아직 다른 기업들이 넘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최대 강점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분야에서 모두 세계 1등을 다툰다는 것이다. DRAM으로 대표되는 반도체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 1등이다. 삼성전자를 처음 순익 1조클럽으로 가입시킨 1등 공신이 반도체였다.
휴대폰은 2000년대 이후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더니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면서 1등 기업으로 올라섰다.
스마트폰을 두고 애플과 치열하게 소송전을 하고 있는 것도 삼성전자의 빠른 성장때문이다. 휴대폰과 반도체에 비해 최근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LCD 등 디스플레이 부분과 디지털가전 등 다른 분야들의 경쟁력 역시 세계 최고수준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대표적인 경기민감업종에 있으면서도 삼성전자가 국내외에서 부동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같은 다양한 포트폴리오다. 남들은 한 분야에서도 하기 힘든 1등, 그것도 세계 1등을 여러 분야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압도적인 실적으로 2000년 이후 삼성전자는 증시에서 부동의 대장주다. 단 한차례도 1등을 뺏기지 않은 것은 물론 대다수 기간동안 2위보다 배 이상 시총이 많았다. 최근 몇달간 조정으로 주춤했지만 시가총액은 우선주를 포함하면 200조원이 넘는다. 지난 4월에는 보통주 시총만 200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현대차와 포스코, LG화학 등 시총 2~6위 기업 다섯개를 합쳐야 삼성전자 시총과 맞먹는다. 보통주만 따져도 전체 시총의 18%를 차지하고, 우선주를 포함하면 20%를 훌쩍 넘는다. 시야를 세계로 넓혀도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소니 등 글로벌 IT업체들을 제친지 오래다.
10년전부터 '호수속의 공룡'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삼성전자의 미래는 여전히 장밋빛이다. 삼성전자 분석보고서를 내고 있는 국내 27개 증권사의 투자의견은 100% '매수'다. 200만원대 목표가를 제시하는 곳도 여럿이다. 증권사들의 목표가 평균도 176만원을 넘는다.
전필수 기자 philsu@"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2713490075539
"삼성전자는 창업 이후 40여년간 비약적인 성장사를 써 왔으며 오늘날 세계적인 전자 업체로 도약하였다.
1938년 설립된 삼성물산을 모태로 삼성은 식품과 의복을 주력으로 해 오다가 1969년 삼성전자를 창립하면서 전자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이듬해인 1970년 삼성 NEC가 설립되어 백색가전 및 AV 기기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고 1980년에는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그리고 1983년 2 월에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DRAM 사업에 진출한다는 '동경 선언'을 발표했다.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64K DRAM을 개발했다. 1990년대, 2000년대에도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최초' 행진은 계속되며 지금의 삼성전자 발전기틀을 잡았다.
삼성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재계 상위권에 속하는 한국 내 여러 대기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7년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삼성은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당시의 위기로 인해 한국 내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중 16곳이 부도를 맞아 해체된 반면, 삼성은 광범위한 구조조정의 실천과 효율적인 경영계획의 수립으로 내실을 확고히 하였다. 현재 삼성은 한국에서 재계서열 1위의 대기업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해외에서도 반도체, TV, 휴대폰 등의 1위 자리를 굳힘으로서 글로벌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6]
삼성전자가 융성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의 목표는 경쟁사인 일본 기업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0년 삼성의 세계 점유율은 평면 TV와 반도체 메모리에서 1위를 차지하며 모두 일본 업체들을 앞서고 있다.
삼성은 2007년에는 휴대폰 부문에서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2위의 핸드폰 제조업체에 등재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새 성장동력을 모색해오던 삼성은 지난 12월에 메디슨을 인수함으로써 헬스케어사업부문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2009년 스마트폰 시장에도 뛰어들어 Galaxy 라인업을 발표했으며,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지 2년만인 2011년 3/4분기 스마트폰 세계 1위에 오른다. 삼성은 2012년 노키아와 애플을 제치고 전체 핸드폰 점유율 1위을 기록했다.
창업기
1969~197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