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3 : 일루미나티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2/29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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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3 : 일루미나티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2/29

 

지난 인월리를 읽으니 일루미나티 배경에 치중하다 보니 산만하게 서술한 듯싶다.

 

해서, 이번에 짤막하게 요약본만 제시한다.

 

일루미나티 관련 글들을 최소한 몇 개 정도 읽었다고 보고 구구한 설명을 생략하겠다. 

 

반론, 비판 환영한다.

 

 

 

 

1. 일루미나티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유태인이 아니다.

 

2.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예수회 시스템을 응용해서 조직을 키우려 했을 뿐, 예수회와 관계가 없다.

 

3.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1774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으나, 이내 프리메이슨에 실망하여 1776년 일루미나티를 만든다.

 

4. 일루미나티는 교황파 대 국왕파로 갈리는 유럽 대륙 정세 속에서 러시아 황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조차도 프리메이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몽 군주였기에 은근한 묵인 속에서 급속히 세를 확대하여 회원 수 삼사 천 명에 이르렀다.

 

5. 귀족 크니게의 활약으로 일루미나티는 불과 수 년만에 영국을 제외한  프리메이슨 - 일루미나티 유럽 통합 체제를 만들어낸다. 허나, 크니게의 지분 요구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거절하는 바람에 크니게는 당국에 몽땅 분다. 때마침 독일에서 파리로 가던 배달원이 벼락 맞아 뒈지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조직이 와해되었다.

 

6.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고타 영주의 보호 속에 고타로 망명하여 이후 고타에서 쭉 살다 1830년 뒈진다. 다른 회원들은 프랑스와 러시아 등 유럽 각지로 흩어진다.

 

7. 프랑스에서는 1730년대부터 스코틀랜드에서 프리메이슨이 수입된 뒤, 수많은 프리메이슨 로지가 만들어진다. 그러다가 1773년에 위대한 동방(Grand Orient, 대동사, 大東社)이 등장한다. 기존 프리메이슨 파가 비정치적이었던 반면, 위대한 동방파는 정치적이어서 프랑스 프리메이슨은 둘로 분열한다. 이때, 위대한 동방파와 일루미나티가 결합한다.

 

8. 프랑스 혁명을 움직였던 쟈코뱅파는 일루미나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미라보가 초기 역할을 맡았다. 허나, 이후 쟈코뱅파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프리메이슨끼리, 일루미나티끼리 서로 죽이고, 죽였다. 이 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한다.

 

9. 로베르피에르가 집권했던 1795년까지 바이스하우프트는 적극적인 집필 활동을 하였으며, 바이스하우프트의 서신은 프랑스 쟈코뱅파들 사이에서 회람되었다.

 

10. 프랑스 왕 처형은 일루미나티 역사와 논리와는 무관하다. 프랑스 왕 처형은 위그노파 역사와 논리에 따른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 왕 처형으로 유럽 민심이 흉흉해지고, 프랑스 혁명 배후에 프리메이슨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일루미나티 정권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프리메이슨이었던 평등공 오를레앙을 처형한다. 평등공 오를레앙은 프리메이슨이었지만, 위대한 동방파나 일루미나티가 아니었다. 희생양으로 죽은 셈이다.

 

11.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일루미나티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에서 박애 대신 형제애로 바꾸어야 한다. 형제애란 중세 길드를 뿌리로 둔 조합 이기주의이다.

 

12. 로베스피에르 독재에 위협을 느낀 시예에스(Sieyes)가 주동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로베스피에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총재 체제로 전환한다. 이때, 시예에스도 일루미나티였지만, 이 시기에 이르르면 시예에스는 프랑스 권력투쟁 과정에서 일루미나티 이념을 버리고 현실주의자가 된다.

 

13. 시예에스가 주도하던 총재 정부 시절에는 이념과 현실이 따로 움직이는 따로국밥 시절이었다. 이 시기 프랑스 혁명파들은 더 이상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서신을 읽지 않았다. 읽을 필요를 못 느꼈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절망하여 절필을 선언한다.

 

14. 총재 정부 시기, 시예에스 등 프랑스 혁명파들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의 일루미나티를 버리는 반면, 일루미나티 선동 방식, 조직 방식 등 실무에 필요한 기술적인 것만을 받아들였다. 이는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의 작품이 아니라 일루미나티를 유럽 최고의 조직으로 만들었지만,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의 견제로 일루미나티에서 축출당하자 이에 반발하여 당국에 고발한 마당발, 크니게의 작품이다.

 

15. 시예에스보다 더욱 뛰어난 인물이 출현하였다. 역시 쟈코뱅이었던 나폴레옹과 푸셰이다. 한국으로 치면, 나폴레옹과 푸셰는 박정희와 김종필이다.

 

16. 나폴레옹은 시예에스를 숙청하는 대신 돈을 쥐어주고 권력에서 축출한다.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일루미나티 조직 수장으로 자신의 인척을 임명한다. 이는 마치 유럽 각국 왕을 자신의 친인척으로 임명하는 것과 같다. 이정희 같은 애를 민주노동당 당수시켜주면 민주노동당이 망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17. 프랑스 혁명 당시 누구보다 일루미나티적인 이념과 실무에 충실했던 푸셰는 누구보다 일루미나티 방식을 잘 알았기에 프랑스 일루미나티와 전 유럽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을 밑바닥부터 와해시켰다.

 

18. 나폴레옹 집권 기간과 왕정 복고 기간인 1800년대부터 1820년대 기간 동안 전 유럽에서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가 자취를 감추었다. 누군가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쟈코뱅? 하면 바보 아냐 하는 분위기였다.

 

19.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자신의 삶을 통렬하게 후회하면서 교회에서 참회하고 회개하다가 1830년에 뒈졌다.

 

20. 국유본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죽자마자 1830년 프랑스 혁명을 재차 일으킨다. 이번 주동자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아니라 로스차일드였다. 로스차일드는 이념보다는 철저한 장사 잇속으로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21. 그간 유태인이 공직에 나설 수 없었기에 정치, 사회, 외교 부분을 프리메이슨이 맡아왔었다. 허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유럽 경제 권력을 장악한 로스차일드는 프리메이슨 대신 유태인을 키우기 시작했다. 유태인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하고, 유태인이 각 부문에서 사업을 장악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22. 로스차일드 기획하에 미국에서 반프리메이슨 운동이 일어나 미국에서 프리메이슨 세력이 궤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23. 로스차일드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프리메이슨을 탄압했지만, 아시아 중국 공략에는 프리메이슨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아 아시아 중국 공략에서 만큼은 프리메이슨과의 연합을 취했다.

 

24. 나폴레옹 3세도 프리메이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로스차일드, 국유본이 나폴레옹 3세를 황제로 만들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국유본이 이제는 영국왕 대신 자신을 지지한다고 착각하다가 국유본 로스차일드가 지원하는 비스마르크에게 당해 생을 마감한다.

 

25. 1848년, 1871년 파리콤뮨에서 보듯 국유본의 지원이 없다면, 혁명은 비참하게 끝난다. 맑스가 1871년 파리콤뮨에서 보여주었던 이중성은 바로 이런 점을 간파했었던 셈이다.

 

26. 맑스는 일루미나티가 아니다. 국유본 로스차일드가 맑스에게 판을 깔아주었다. 출판업자들은 맑스 글에 매혹당했다기 보다는 맑스 집안 배경에 눈독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맑스 가문은 오늘날 네덜란드 필립스와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국유본 로스차일드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대체하는 조직을 필요로 했다. 왜? 당대 로스차일드와 경쟁하던 세력이 누구인가. 베어링 가문인데, 베어링 가문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인맥이 있었기에 이 인맥을 파괴시켜야 했다. 

 

맑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맑스 친인척의 권유를 물리치고 독자성을 지켰다. 물론, 어느 정도 로스차일드 국유본과 타협한 대목들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로스차일드 국유본의 개는 아니었다.

27. 1850년대 영국에서 로스차일드가 정치에 입문하고 1880년대 로스차일드가 영국 작위를 받을 때까지는 과도기였다. 이 시기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는 후원 세력이었던 영국 귀족이나 베어링 가문이 힘을 잃어가자 멸종 위기로까지 내몰렸다. 반면, 유태인 조직은 로스차일드 후원하에 각 지역에서 전유럽적으로, 전세계적인 규모로 뭉치기 시작했다.

 

 

 

28. 이중, 삼중의 기획 속에서 만든 시온의정서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교리들을 연구한 작품인데, 이만한 작품을 만들 조직은 유럽 당대에 오직 페이비언 협회외에는 없다.

 

국유본이 시온의정서를 만든 이유는 일타삼피이다.

 

하나, 페이비언 협회와 300인 위원회는 정치적 기획력을 통해 로스차일드 자금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로스차일드가 300인 위원회 최상층인 라운드테이블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오히려 페이비언 협회 정치적 기획력을 흡수하여 더 강력한 권력으로 진화하였다.

 

둘, 로스차일드는 300인 위원회가 시온의정서를 고의로 유럽 각국으로 누출시키면 유럽 각국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일어난다는 기획에 대항하여 권력의 일부를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전시켰다. 공황을 이용하여 로스차일드는 미국에서 로스차일드 대리인인 모건 권력을 창출하였고, 모건 권력을 통하여 미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그 핵심은 바로 미국 연방준비은행과 루즈벨트 정권이다.

 

셋, 로스차일드는 물론 뉴욕은행가인 록펠러까지 위기가 기회임을 간파했다. 위기의 해결책은 전쟁이다. 시온의정서를 이용하여 각국에 반유태인 정서를 파급시킨다. 동시에 독일 히틀러, 일본 쪽발왕, 이태리 뭇솔리니를 지원한다. 마치 오늘날 국유본이 남몰래 북한 핵개발 자금과 기술을 다 대주는 것과 같다.

 

29. 19세기 초반에 다 죽었던 일루미나티를 20세기에 부활시킨 것은 웹스터 여사이다. 일루미나티 역사적 기록은 존 로비슨이면 족하다. 허나, 웹스터 여사는 국유본이 배경인지 황당한 저술로 일루미나티가 20세기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30. 일루미나티 음모론은 이차대전이 끝난 뒤에 사라졌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대체하였기 때문이다.

 

31. 일루미나티 음모론이 재부각한 것은, 부시 정권 때부터이다. 정확히 말하면, 911 때문이다.

 

32. 911과 일루미나티가 만나는 지점이 1995년에 나온 일루미나티 카드와 1999년에 등장한 각종 일루미나티 카드 게임 증보판 때문이다.

 

33. 일루미나티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에 나온 조직과 흡사하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일루미나티를 만들어야겠다고 하면 일루미나티는 실재하게 되는 셈이다. 국유본은 여러분이 일루미나티 조직을 만들기를 염원하고 있다.

 

34. 국유본은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싶어한다. 일루미나티 음모론이 확산할수록 국유본은 슬쩍 뒤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루미나티 음모론이 확산하여 알 카에다 같은 조직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헌데, 알 카에다도 국유본 산하 조직이다. 무엇보다 국유본은 국유본에 저항하는 자들마저도 궁극적으로 포섭하려는 시스템을 갖추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틈만 나면 미디어를 통해 확산시킨다.

 

35. 일루미나티 자체는 허구다. 허나, 국유본이 원하면, 언제든지 일루미나티는 실체로 둔갑할 수 있다.

 

36. 일루미나티 카드는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에 훈련을 받은 젊은 세대들을 위한 실험이다.

 

 

예까지.

 

일루미나티 카드와 런던 올림픽, 일본 침몰에 관해서는 이후 인월리에서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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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37. 러시아혁명과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는 관련이 없다.

 

38. 1973년 데이비드 록펠러가 국유본 권력을 장악한 시기 데이비드 록펠러가 후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프리메이슨 동방파 재건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동방파가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해방신학, 남미와 아프리카 등에서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이론적 지도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39. 외계인 파충류 일루미나티 음모론은 국유본이 유포한 음모론이다. 그 자체 허구다. 국유본 권력에 대한 물타기인 동시에 외계인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자신들 배후에 있음을 알려 국유본 권력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40. 국유본은 헐리웃 등 대중매체를 통해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전파할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5 : 남북전쟁, 링컨, 호레이스 그릴리, 맑스, 로스차일드, 모건, 샐리그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7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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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5 : 남북전쟁, 링컨, 호레이스 그릴리, 맑스, 로스차일드, 모건, 샐리그먼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7

   

"미국사에서 1860년대는 한국 1960년대처럼 격동의 시대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1861년 JP모건이 뉴욕에서 피바디회사 뉴욕지부격인 모건회사 설립

1863년 카네기 키스톤 교량 회사 공동 설립

1864년 남북전쟁이 끝났다.

1864년 록펠러 1세 결혼

1864년 피바디회사, JS모건회사로 변경

1865년 링컨이 암살당한다.

1865년 클라크 앤드 록펠러사 해체

1865년 록펠러 정유회사 장악

1865년 윌리엄 록펠러 입사

1865년 록펠러 두 번째 정유회사 스탠더드 위크스 설립

1866년 대서양휭단 해저전신 완성

1866년 윌리엄 록펠러 뉴욕 파견 록펠러상회 설립

1867년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뉴욕센트럴철도 인수

1867년 카네기 유니온 제철소 설립

1869년 피바디 사망

1869년 대륙횡단철도 최초 완성" 

   

오타가 있군요^^! 남북전쟁은 1864년이 아니라 1865년에 끝납니다. 헌데, 인드라는 1864년에 남북전쟁이 끝났다고 하는군요. 이것도 역시 전략적 글쓰기인가요? 모르는 일이죠. 인드라가 실수해놓고 전략적 글쓰기입네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남북전쟁 

   

   

1861년 2월, 남부는 흑인을 더 수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흑인 노예를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미국남부연합(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으로 분리독립을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이에 대해 대통령 링컨이 "합중국에서의 분리는 반란이며 혁명이다." 라고 분리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이에 남부가 4월 12일 포문을 열면서 남북전쟁이 시작했습니다.

   

보통 남북전쟁 원인으로 흑인 노예해방을 말합니다. 해서, 인터넷 음모론으로 링컨이 흑인 노예해방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링컨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도합니다? 진실은? 

   

링컨이 우선적으로 반대한 것은 남부 분리 독립입니다. 흑인 노예해방이 아닙니다. 링컨은 통합주의자였습니다. 이는 초기 미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은 초기 13개주가 연합하여 독립하였습니다. 이때, 부자 동네가 남부 버지니아 주였습니다. 버지니아주는 국유본이 프리메이슨 회사를 통해 가장 먼저 식민지화한 곳이고, 국유본이 재정 절감과 새로운 식민지 전략에 따라 미국 독립을 결정하면서 가장 많은 8명의 대통령을 임명한 지역인데, 워싱턴, 제퍼슨 등이 있습니다.  

   

이때, 제퍼슨이 주축이 되어 명분으로 중앙집권 구조에 반발하여 지방권력 강화를 내세웁니다. 허나, 실은 버지니아주가 잘 살고 세금을 많이 내니 다른 주와 똑같이 취급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인권선언도 손을 댄 만큼 제퍼슨이 글빨이 끝내주니까 폼나게 썰을 풀 따름인 겁니다. 결론은 강남 3구가 잘 사니 특권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분리독립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재정 위기에 대해 조지 소로스가 그리스가 탈퇴하지 않겠다면, 독일더러 유로 탈퇴하라는 주장과 통합니다. 이태리 북부나 벨기에 북부가 분리 독립을 추진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땀 흘려 번 돈을 놀고 먹는 남부 게으름뱅이들 먹여살리려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해서, 미국은 분리 문제를 봉합하느냐, 터뜨리느냐 화약고를 안고 건국한 것입니다.

   

   

   

   

상기한 미국 동부 지도를 봅시다. 빨간색이 청교도 잉글랜드인 북부를 대표하는 지역입니다. 하고, 노란색이 네덜란드인 지역입니다. 네덜란드 지역에는 루즈벨트 가문 등 유태인 가문이 절대적입니다. 하고, 녹색인 버지니아주가 남부를 대표하는 성공회 잉글랜드인 지역입니다.

   

하면, 펜실베이니아는 뭐냐. 중립 지역이었습니다. 해서, 미국 건국 초기에 워싱턴 DC가 건설되기 전까지 수도가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였습니다. 헌데, 그후 의회에서 제퍼슨류가 수도가 버지니아주에서 멀리 있다고 해서 천도론을 주장하니까 워싱턴 시절 통합을 위해 영토 남북단의 중간지점인 포토맥 강변, 오늘날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 경계에 이 새 수도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헌데, 흥미롭지 않습니까. 미국 북부와 남부가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뉴욕을 포함한 네덜란드 지역이 캐스팅보드를 쥐고 조율하는 양상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미국 정치사는 네덜란드 지역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변화해왔던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8824550

     

   

   

국유본이 영국 홀로 제국주의 시대에서 혼자 해먹기 힘드니까 미국, 독일, 일본도 같이 제국주의 하자고 본격적으로 나온 시대가 1870년대입니다. 해서, 인드라가 1870년대 이전까지 중앙은행 음모론이란 다 헛것이라고 간단하게 씹었지요? 당대 중앙은행이란 제국주의 보증수표입니다. 중앙은행이란 돈 찍어내는 발권력이 가장 중요한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권력에서 어느 정도 독립하여 상업거래를 지급보증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한국과 쪽발 사이에 무역 거래가 있습니다. 헌데, 인드라가 혁명을 성공시킨 후 쪽발과의 이전 무역 거래를 모두 무효화합니다. 한국이 유리한 건 유효화시키고, 불리한 건 모조리 무효화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돈 떼먹는 것입니다~! 이런 걸 예방하자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능력도 안 되는 나라에 중앙은행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요즘 대체역사가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선조/광해군/영정조 시대에 중앙은행이 들어선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상거래 및 국가간 무역 규모가 얼마나 된다고? 중앙은행 음모론이란 경제에 무식한 분들을 위해서 국유본이 유포한 음모론인 겁니다. 화폐전쟁을 쓴 쑹훙빙이나 그림자 정부를 쓴 이리유카바 최가 경제 부문에서 무식한 주장 많이 하잖아요?

   

음모론조차 제대로 이해하려면 경제를 열심히 공부해서 어디 가서 병쉰 소리 듣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하면, 남북전쟁 경제적 요인이 무엇이냐구요? 1850년대 미국 경제구조가 바뀝니다. 그 이전까지 미국 경제는 남부 농산물을 영국과 유럽에 수출하고 영국과 유럽 공산품을 수입하는 구조였습니다. 허나, 1830년대부터 건설한 운하와 철도에 힘입어 1850년대 미국 경제구조가 농산물 위주에서 공산품 위주로 역전합니다. 사정이 이러니 남부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향후 미국 정치가 산업화가 진행된 동북부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니 분리 독립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예서, 중앙은행 음모론 비판을 이 정도로 합니다.

   

헌데, 국유본이 '다함께 제국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인드라는 그 시기를 1830년 혁명, 1848년 혁명, 1871년 파리콤뮨으로 봅니다. 또한, 이러한 유럽혁명 배후에는 1840년대 아편전쟁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국제유태자본론인 것입니다. 19세기 초반에 국유본 권력 장악에 성공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섬세하게 세계 지배를 기획하고 실천합니다.

   

해서, 인드라는 1851년, 반메이슨 신문 뉴욕 데일리 트리뷴 유럽 통신원이 된 칼 맑스를 내세웁니다. 뉴욕 트리뷴지는 주간지인 경우에는 이십 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발행부수가 오천 부였던 맑스의 신라인신문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인 셈입니다. 물론 뉴욕시민만 읽은 것이 아니라 뉴욕 북부에 위치한 뉴잉글랜드에서도 읽었다고 합니다.

   

   

영화팬이라면,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에서 초반부에 등장하는 뉴욕트리뷴을 기억할 것입니다. 헌데, 호레이스 그릴리가 출세한 배경에는 반메이슨 운동 지도자이자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링컨을 대통령으로 만든 킹메이커인 정계 실력자 위드가 있습니다.

   

호레이스 그릴리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링컨을 맹공격합니다. 링컨은 북군이 승리하였음에도 남부에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남부에서 노예 해방이 오래도록 지지부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호레이스 그릴리는 남부에 대한 철저한 처벌을 요구하는 강경파가 됩니다. 링컨 암살 이후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하나 참패합니다.

   

링컨 암살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린백? 아닙니다. 링컨 재정고문을 맡았던 샐리그먼 유태인 은행가는 그린백 채권을 영국, 유럽에 적극 판매해서 유통시켰을 뿐만 아니라 북군 제복을 만들면서 적극 링컨을 지지했습니다.

   

로스차일드 미국 대리인이라 소문이 나서 남북전쟁 때 피바디처럼 운신이 어려웠던 모건조차 그린백 채권을 보유하기도 했습니다.

   

국유본, 하고 로스차일드가 남북전쟁에서 원했던 것은, 북군의 승리도, 남군의 승리도 아닙니다. 단지 남북전쟁이 오 년, 십 년 계속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마치, 한국전쟁처럼!

   

이에 대해 맑스는 통신원을 맡다가 로스차일드적인 정책에 비판적이니까 호레이스 그릴리가 맑스와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고, 맑스와 편집자로서 교류하던 데이나는 링컨과 함께 합니다.

   

인드라 국유본론은 다른 음모론과 다릅니다. 중앙은행 공격했다는 앤드류 잭슨도 그 배경을 따지면 국유본이 임명한 대통령이요, 링컨도 국유본이 임명한 대통령이란 것입니다. 하고, 때가 되면, 버리는 패인 것입니다.

   

피바디가 물러난 해가 1864년입니다. 왜 하필 이 시기 물러났을까요. 인드라는 남북전쟁과 연관이 있다 봅니다.  

 

1863년 7월, 펜실바니아 게티스버그에서 북군이 승리합니다. 전쟁은 사실상 이때 끝난 것입니다. 전쟁상인은 1863년말까지 돈을 벌었다고 보면 됩니다. 하고, 1864년에 그랜트 장군이 남부 수도인 리치몬드를 함락시켰습니다. 확실히 전쟁이 끝난 것입니다. 이후는 지루한 외교전이었습니다. 1865년 4월 9일, 리 장군은 그랜트에게 항복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인드라가 남북전쟁 종료 시점을 1965년이 아니라 1964년으로 삼은 것은, 로스차일드의 의지를 중시했기 때문입니까^^?

   

로스차일드 가문은 남북전쟁이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허나, 아무도 믿지 않겠지요. 하지만 노력을 해야 합니다. 미국 대리인 피바디가 물러나서 화를 푸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날 금융위기가 일어났는데, 책임있는 금융기관과 금융인이 무사하다면 곤란하지요? 희생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니 피바디가 물러나서 자선사업 열심히 한 겁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모건이 남북전쟁 끝나고 곧바로 철도 사업에 눈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상처를 회복하려면 최소한 십 년입니다. 그 십 년까지 모건은 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근신은 어디까지나 미국에서 있을 때인 것입니다. 해서, 모건은 로스차일드 지시를 받아 프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전쟁인 보불전쟁에서 큰 몫을 챙깁니다. 전쟁이 있기 전, JP모건이 프랑스 제휴사인 드렉셀과 함께 1869년에 로스차일드를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전합니다. 보불전쟁 직후, 모건 가문은 로스차일드 가문, 베어링 가문과 함께 세계 금융계를 지배하는 3대 가문으로 부상합니다.

   

헌데, 영국인 JP모건은 20세기에 모건하우스를 건설하고 유대인과 흑인 출입금지를 내세웠으나, 실은 뻥카였던 것입니다.

   

로스차일드의 충직한 개였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추신 :

   

어제 인드라 블로그에  팔레스타인에서 접속했네요^^!

   

   

윌리엄 록펠러, 뉴욕에서 JP모건, 밴더필트, 제임스 스틸먼과 인연을 맺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6 08:41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189834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4 :윌리엄 록펠러, 뉴욕에서 JP모건, 밴더필트, 제임스 스틸먼과 인연을 맺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6 

   

미국사에서 1860년대는 한국 1960년대처럼 격동의 시대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1861년 JP모건이 뉴욕에서 피바디회사 뉴욕지부격인 모건회사 설립

1863년 카네기 키스톤 교량 회사 공동 설립

1864년 록펠러 1세 결혼

1864년 피바디회사, JS모건회사로 변경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났다.

1865년 링컨이 암살당한다.

1865년 클라크 앤드 록펠러사 해체

1865년 록펠러 정유회사 장악

1865년 윌리엄 록펠러 입사

1865년 록펠러 두 번째 정유회사 스탠더드 위크스 설립

1866년 대서양휭단 해저전신 완성

1866년 윌리엄 록펠러 뉴욕 파견 록펠러상회 설립

1867년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뉴욕센트럴철도 인수

1867년 카네기 유니온 제철소 설립

1869년 피바디 사망

1869년 대륙횡단철도 최초 완성

   

   

1. 피바디와 JP모건

   

피바디는 영국 섬유업자들과 직물로 무역하던 미국 대표 상인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여섯 형제를 먹여 살리느라 피바디가 수전노처럼 일하다 로스차일드를 모시게 되었다. 1838년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미국사업을 대행하는 회사를 차려 미국 채권 등을 매입했다. 캘리포니아 금광이 발견되며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헐값에 매입한 채권이 급등하여 큰 돈을 벌었다. 피바디는 독신이었다. 1854년 후계자로 JS모건을 영입한다.

   

헌데, 피바디와 JS모건 사이에는 피바디와 로스차일드만큼 끈끈한 정이 없다. 피바디는 회사를 넘긴 후에도 로스차일드 가문과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반면, 1864년 피바디가 회사를 떠나면서 자본금을 몽땅 챙긴 것이다. 하고, 피바디는 5년간 자본금을 몽땅 자선사업에 투자한 뒤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로스차일드 미국 파트너가 피바디에서 JS모건으로 바뀐 것은, 로스차일드 의지이기보다는 로스차일드와 영국 귀족 가문간 타협책이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당시 로스차일드 런던 가주는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영국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하고자 노력하던 시기였다. 하원의원직 조건으로 JS모건을 추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피바디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던 반면 JS모건은 영국적인 보스턴에서 사업기반을 구축하는 등 영국인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웨일즈에서 이주한 JP모건 가문은 JP모건 할아버지가 애트나 생명 사업 등 고리대금업으로 큰 부를 획득하여 JP모건 아버지 JS모건에게 백만 달러, 500억 원(천억 원)을 유산으로 남긴다. JS모건은 이를 종자돈으로 보스턴 최대 무역회사를 만들어 영국, 유럽에 직물을 판다. 이 과정에서 JS모건이 엄청난 자금력으로 영국 섬유업자들을 구워삶았을 정황이 포착된다.

   

JP모건은 록펠러 1세보다 두 살이 많은 1837년생이다. 또한, 카네기나 록펠러 1세와 달리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JP모건은 상인 본능을 발휘하여 17세에 동인도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고자 했다. 허나, JS모건은 독자인 아들을 만류하고 국제적 금융인을 만들기 위해 스위스 귀족학교에 보내 불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게 했다. 또한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수학하게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JP모건은 1861년 피바디사 뉴욕지부격인 회사를 설립한다. 헌데, JP모건은 이 당시 수출 무역보다 남북전쟁을 통한 암거래시장 돈벌이에 열을 올린다. JP모건은 영국, 코자무는 링컨 정부를 담당하여 JP모건과 코자무는 정보를 이용한 금거래로 떼돈을 번다. JP모건이 코자무로부터 받은 링컨 정부 동향을 영국에 있는 피바디와 JS모건에게 보내면, 피바디와 JS모건은 영국 정부 동향을 JP모건에게 보내는 것이다. 당시 영국과 로스차일드는 남부군과 북부군 양쪽을 오가며 큰 돈을 벌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JP모건 다음 관심사는 철도와 전신이었다.

   

   

2. 록펠러 1세, 행운이 겹치다

   

1865년 2월 1일, 하루에 원유 500배렬을 처리할 수 있는 클리블랜드 최대 규모이자 세계적인 정유소 경영권을 놓고 록펠러 1세와 클라크는 최고가 입찰자에게 회사를 파는 경매 방식으로 대결한다.

   

승자는 록펠러 1세. 록펠러 1세는 과감한 배팅으로 클라크를 이긴다. 록펠러 1세는 7만 2500달러, 약 36억 원(72억 원)과 함께 도매상 지분 절반을 클라크에게 넘긴다. 이때, 록펠러는 무슨 돈으로 경매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교회 인맥이다. 핸디는 은행장인 동시에 주일학교 교장이었다. 록펠러 1세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여 투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생애 첫 대출인 이천달러, 일억 원(이억 원)을 저리로 록펠러 1세에게 제공했다.

   

행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록펠러 1세 교회 인맥은 은행가 인맥으로 확장했다. 은행 이사였던 스틸먼 위트는 록펠러 1세 대출에 대해 자기 재산을 담보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하며 여러 번 록펄레 1세를 도왔다. 실탄이 두둑한 록펠러 1세는 자금 걱정 없이 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상인은 하늘이 정한다더니 록펠러 1세를 두고 한 말 같다.

      

   

3. 윌리엄 록펠러, 뉴욕에서 JP모건, 밴더필트, 제임스 스틸먼과 인연을 맺다

   

 1792년 5월 17일 24명 상인들이 미국 정부 '독립전쟁'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뉴욕 증권 거래소를 설립하였다. 전쟁중인 1863년 뉴욕증권거래소로 명명되었다. 헌데, 1866년 대서양횡단 해저전신이 완성된다. 이는 뉴욕증권거래소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전과 달리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 전신을 통해 정보가 즉각 교환되니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한 영국 유럽자본이 '바이 미국'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거래가 별로 없던 뉴욕증권거래소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 등 국유본은 철도에 집중 투자하니 이를 대행한 JP모건 영향력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록펠러 1세는 상황을 파악하고 동생 윌리엄 록펠러를 1866년 뉴욕으로 보낸다. 윌리엄 록펠러는 JP모건처럼 뉴욕에 록펠러상회를 차린다. 공식적으로는 록펠러 정유회사 수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허나, 윌리엄 록펠러는 록펠러 1세와 달리 금융 부문에 탁월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전 직장에서 21살 나이에 연봉 천 달러, 오천만 원(일억 원), 월 사백여만 원(팔백여만 원)을 받았을 정도였다. 해서, 윌리엄 록펠러 은밀한 임무는 정유회사에 융자나 투자를 할 투자자를 찾는 것이었다.

   

하여, 윌리엄 록펠러는 뉴욕에서 철도왕 벤더필트, 금융왕 JP모건, 후일 시티은행이 되는 뉴욕내셔널시티은행 은행장 제임스 스틸먼을 만난다. 화려한 저택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면서 이들의 우정은 자식 대까지 이어져 결혼으로 이어졌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3 : 록펠러 1세 종잣돈은 천육백만 원인가, 사천만 원인가, 팔천만 원인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5 18:31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152673

   

   

   

지난 글에서 인드라는 돈 계산을 다음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 당대 돈 계산은 편의상 오늘날 달러 가치와 비교하여 20배로 하고, 환율을 달러당 1,000원으로 한다. 가령 록펠러가 활동하던 19세기 중후반 40달러이면 오늘날 팔십만 원으로 환산한다. > 

   

달러 가치 계산법에 이의를 제기할 이웃분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네요.

인드라 전략적 글쓰기라는 것을 눈치챈 것인가요^^?

   

이 글 핵심은 록펠러 1세 종잣돈입니다. 해서, 록펠러 1세 종잣돈 800불을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800불이 급여로 번 돈이면, 1955년 9월에서 1958년 3월까지 록펠러 1세는 월 평균 27달러를 저축하였습니다. 이십배와 환율 1000원 적용하면 월 54만원입니다.

   

한국에서 직장인 자영업자 대상으로 나오는 적금 상품을 보면 삼십만 원, 오십만 원이 보통입니다. 인드라도 삼십만 원, 오십만 원 적금 들었습니다. 최근에도 삼개월마다 백만 원 납입하는 적금들었다가 돈 들어갈 일이 많아 해약했습니다만.

   

사회초년병 록펠러 1세 30개월 적금든 액수 천육백만 원이면 적당하지 않습니까.

   

또한 회사 차리는데 자본금이 4,000불, 팔천만 원 정도라면 이해되지 않나요? 한국 벤처기업 중 자본금 규모가 1억 미만인 기업이 44%라고 합니다. 5억 미만이 30%대이구요.

   

향후 록펠러 1세가 투자를 받거나 대출을 받거나 후일 기업을 세울 때 기준을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기는 하죠. 그러면 임금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이죠^^! 의도한 바이구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가 나오잖아요. 그외 또다른 뭔가가 있나요???

   

하면, 다른 버전이 있나요. 그 다른 버전이 이번 글입니다.

   

20배가 아닌 50배를 적용한다고 합시다.

   

한국과 미국 고시원비, 하숙비, 월세집, 홈스테이 비용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십만원에서 사십만원대이더군요. 미국은 도시별로 편차가 있지만, 400불에서 1200불 사이로군요. 예서, 록펠러 1세가 묵은 클리블랜드 하숙집은 한국으로 치면 강릉이나 속초쯤되고, 당시 록펠러 1세 경제 사정상 가장 저렴한 집을 구했다고 봐야 하니 저가로 잡으면, 이십만원과 400불입니다. 헌데, 400불이라 하면 미국 유학생을 위한 것이니, 미국에는 하층민을 위해 이보다 저렴한 200불짜리 월세집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하면, 록펠러 1세 한달 하숙비가 4불이니 50배 적용하면 이십만원 나옵니다.

   

또 다른 계산법은 20배가 아닌 100배 적용입니다.

   

오늘날 달러는 석유 기반 기축통화이니 석유가를 기준으로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당대에는 원유가가 1달러이거나 그보다 낮았는데, 오늘날에는 배럴당 100달러 언저리로군요. 백배네요^^!

   

해서, 이번 글에서는 50배 적용하고 괄호 안에는 100배 적용하여 글을 올립니다. 어느 버전이 합리적이다라고 여기나요^^?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3 : 록펠러 1세 종잣돈은 천육백만 원인가, 사천만 원인가, 팔천만 원인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5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사업에!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1974년 11월에 발표된 '록펠러 가문의 부(富)에 관한 미국 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내의 록펠러 일족이 관리하고 있는 재산만도 당시의 추정으로 6,400억 달러였다. 당시 록펠러 재산 추정액이 60억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백 배인 게다. 허나, 그 보고서조차 록펠러 가문 전부를 파악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가문이 쌓은 부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헌데, 록펠러 가문 부의 출발은 주급 4달러,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이십만 원(사십만 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누구나 부의 축적 비밀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록펠러는 졸업시험을 한 달 남기고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십대 여성과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 빌이 생활 보조를 줄였기 때문이다. 하여, 장남인 록펠러 1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록펠러 1세는 소년가장이어서 군대도 면제되었다. 록펠러 1세는 바람둥이 빌 제안에 따라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40달러, 이백만 원(사백만 원)을 내고 3개월 과정을 이수한다. 록펠러 1세는 상업학교에서 회계 기초를 배웠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휴잇 앤드 터틀 회사는 위탁판매 및 선적회사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도매상이다.

   

록펠러 1세는 당대 관례에 따라 무급사원, 오늘날로 치면 인턴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록펠러 1세는 얼마나 기뻤으면 9월 26일 입사일을 생일보다 중시했다.

   

록펠러 1세는 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는 록펠러 1세만 부당한 대접을 받아서도 아니고, 사장이 악덕사장이어서도 아닌 당대 관행이었던 듯싶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는 이들이 있는데, 대체로 한 달 이내에 결판이 나는 편이다. 헌데, 노동시장에 인력이 넘치니 3개월까지 기간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

   

해서, 사장은 록펠러 1세 역량을 인정하여 1855년 연말에 3개월치 임금 50달러, 이백오십만 원(오백만 원)을 지급했다. 하고, 사장은 록펠러 1세에게 월 25달러, 백이십오만(이백오십만 원) 지급을 약속했다. 이는 주급 4달러, 월 16달러, 팔십만 원(백육십만 원)보다 상향한 급여였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1858년, 록펠러 1세는 퇴직한다. 록펠러 1세는 그간 급여로 번 돈 팔백 달러, 사천만 원(팔천만 원)에 바람둥이 빌이 유산을 선불로 지급한 천 달러, 오천만 원(일억 원), 하고, 여기저기서 융통해서 이천 달러, 일 억(이 억)을 모았다. 이웃이자 같은 상업학교에서 공부한 클라크가 록펠러 1세에게 제안하여 출자금 각각 이천 달러, 일 억(이 억), 총 4,000불, 이억(사억)짜리 위탁판매업, 도매상 회사가 출범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사업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하나, 록펠러 1세 사업 기반인 클리블랜드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827년 이리운하 개통으로 클리블랜드는 대서양과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으로 연결되는 물길이 사통팔달인 천혜의 도시였다.

   

둘, 록펠러 1세는 교회 인맥을 적극 활용했다. 영업은 인맥이니까.

   

록펠러 1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선교교회에 다녔다. 그뿐 아니라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회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명예 서기직을 맡아 위원회 의사록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록펠러 1세는 십일조를 거르지 않았다. '록펠러 가의 사람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한 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입과 지출금,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의 내역을 작성해 나갔다. 매주 그는 싸구려 하숙집 집세로 1달러, 오만 원(십만 원)을 지불하는 것 외에도 소액기부 모임에 75센트, 37500원(75000원)을, 그리고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 5센트, 2500원(5000원), 빈민구제 활동에 10센트, 오천 원(만 원), 해외선교 활동에 10센트, 오천 원(만 원)을 헌금했다."

   

록펠러 1세는 십일조가 아니라 수입의 25%를 기부한 셈이다. 록펠러 1세에 대한 교회 평판, 지역 평판이 좋았다. 영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면, 록펠러 1세가 자선을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전 인월리는 무엇이냐. 전략적 글쓰기다. 사실 그 문제는 록펠러 1세보다 카네기에게 할 말이지만, 당시 국유본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셋, 록펠러 가문 특유의 화술

   

여기에 록펠러 가문 특유 화술이 빠질 수 없다. 록펠러 1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여자 꼬시는 데에만 힘쓰던 가문의 능력을 오직 비즈니스에만 투자했다. 그래서일까. 록펠러 1세 영업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데까지 이른다.

   

록펠러 1세가 다니던 선교 교회가 한 집사로부터 2000달러, 일억 원(이억 원) 담보대출을 받았는데 , 제 날짜에 이자를 지불하지 못했다. 이에 집사가 교회를 처분할 것이라 목사가 설교하자, 록펠러 1세가 나서서 교인을 설득하여 일억 원(이억 원)을 모금할 정도다.

   

허나, 사업은 자잘한 백 방보다 큰 것 한 방이다.

   

록펠러 1세가 저인망으로 끌어 모은 교회 인맥 장사가 한계를 보인다. 1859년 4월 1일, 사업 시작한 지 일 년 후,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에 공동경영인으로 조지 가드너가 합류한다. 조지 가드너는 클리블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훗날 클리블랜드 시장과 클리블랜드 요트 클럽 회장을 역임한다. 클라크 가드너 상사로 바뀌었다.

   

왜 이러한가. 당연한 일이다. 큰손을 통해야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다. 영업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찌라시 뿌리는 영업이요, 다른 하나는 골프와 룸살롱에서 접대하는 영업이다. 어느 것이 더 회사에 보탬이 되나?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후자이다.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시대는 록펠러 1세라는 영웅을 요구한다.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교통의 요충지, 클리블랜드는 보급기지로 변신한다.

 

전쟁 보급기지. 돈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전쟁이 나면 공장이란 공장은 평소 가동률 80%에서 100% 가동하기 마련이다. 경제가 살아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니 농산물을 주로 하는 생필품 취급 도매회사가 돈을 버는 건 불문가지.

   

1862년, 록펠러 회사 연간 수익이 일만칠천 달러, 팔억오천만 원(17억 원)이었다. 이는 전쟁 전과 비교하여 연간 수익이 네 배에 달한다. 하면, 전쟁 전 연간 수익이 사천이백오십 달러, 이억이천오백만 원(사억이천오백만 원)이다. 하면, 한 달 수입이 약 360 달러, 천팔백만 원(삼천육백만 원)이다.

   

한 달 수입이 약 360 달러이면, 세 명의 공동창업자가 균등분할로 나눠가지면 120 달러, 육백만 원(천이백만 원) 정도?

   

헌데, 수입이 육백여만 원(천이백만 원)이면 한국 중산층 중층을 구별하는 평균 수입 육백여만 원인 게다. 참고로 인드라가 파악하는 한국 중산층 하층 수입 기준은 월 삼백만 원, 중층 수입 기준은 육백만 원, 상층 수입 기준은 천만 원이다. 만일 월 수입 삼백 이하면 중산층이 아닌 심리적 중산층인 게다.

   

돈이 돈을 부른다. 경기 활황기, 거품 시대에는 누구나 야망을 품기 마련이다. 록펠러 1세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 수입이 중산층도 아닌 하층급 삼백만 원 이하로 벌 때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 1세는 중동 특수가 불던 때처럼, 코스닥 광풍이 일던 시기처럼 미친 듯이 돈 되는 일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때, 정유업을 만난 것이다. 하여,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허나, 수입이 이천사백만 원(사천팔백만 원)으로 늘어나니 눈 뒤집힐만했다. 록펠러 1세는 당대 보험료 150달러, 칠백오십만 원(천오백만 원)을 아끼려고 할 정도였다. 해서, 활황이 되니 우선 가드너를 축출했다. 평소라면 모르되, 전시였다. 전시라면 빈익빈부익부가 극대화된다. 전시에도 골프 룸살롱 영업이 가능하다. 허나,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전시여서 일감이 널려 있는데, 가드너처럼 평시에만 골프 룸살롱 출입이 가능한 자는 아웃일 수밖에 없다.

   

   

"전투준비태세·방어준비태세라고도 한다. 모두 5단계로 나뉘며, 숫자가 낮아질수록 전쟁발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Watch Condition) 상태의 분석 결과에 따라 전군(全軍)에 내려지는데, 데프콘 5는 적의 위협이 없는 안전한 상태를 말하고, 데프콘 4는 대립하고 있으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에는 1953년 정전 이래 데프콘 4가 상시적으로 발령되어 있다.

   

데프콘 3은 중대하고 불리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긴장상태가 전개되거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있을 때, 데프콘 2는 적이 공격 준비태세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발령된다. 데프콘 1은 중요 전략이나 전술적 적대행위 징후가 있고, 또 전쟁이 임박해 전쟁계획 시행을 위한 준비가 요구되는 최고준비태세 때 발령된다.

   

한국의 경우 데프콘 3이 발령되면,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작전권이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가고, 전후방 부대의 움직임이 달라지며, 전군의 휴가·외출이 금지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되면 전군에 탄약이 지급되고, 부대 편제 인원이 100% 충원된다. 데프콘 1이 발령되면 동원령이 선포되고, 전시체제로 돌입된다. 1999년 6월 15일 서해상에서 남북함정 교전사태가 발생했을 때, 데프콘 3에 준하는 전투준비태세강화 지시가 발령되기도 하였다. - 네이버 검색 백과사전 중"

   

해서,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그 기준은 간단하다. 어떠한 상황에도 골프, 룸살롱 출입이 가능한 부자는 데프콘 1, 데프콘 1이란 언제든 고급정보를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하고, 데프콘 순위가 하락할수록 골프, 룸살롱 출입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급정보가 차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부자인가. 하면, 어느 단계인가. 한국에서 어떤 자가 정권을 잡든 골프, 룸살롱 출입하며 고급정보를 입수하면서도 절대로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수준인가. 이 대목에서 이 글을 혹 읽으면 깜봉님이 한 말씀할 수도^^!

   

   

록펠러 1세와 새뮤얼 앤드루스의 운명적 만남

   

새뮤얼 앤드루스는 영국인 클라크 고향 사람인 동시에 록펠러 1세 교회 사람이었다. 앤드루스는 1850년대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여 돼지기름 정제소에서 일을 했다. 앤드루스는 정제소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은 뒤, 1860년에 원유 10배럴을 받아 클리블랜드 최초로 등유를 정제해내었다. 당시 석유 정제 공정이 오늘날 특허 기술이었으므로 1862년, 앤드루스는 회사를 차린다.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사업에!

   

남북전쟁 시기가 아니었다면, 투자에 신중한 록펠러 1세는 결코 헛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1862년은 길가에 널려 있는 돌맹이도 돈이 될 듯싶었던 남북전쟁 중. 록펠러 회사는 앤드루스 클라크사 정유회사에 사천 달러, 이억 원(사억 원)을 투자한다. 하여,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업에!

   

록펠러 1세가 사업 안목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다. 사람 운이 있었다. 사람 운이면 연애결혼 운이거나 사업 운이다. 운도 실력이다. 인드라는 이를 운동 신경처럼 상인 신경이라 말한다. 그 아무리 혹독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악독한 쪽발정은 정권에서도, 멍청한 쪽발돼중/쪽발놈현 치하에서도 장사를 하여 성공하는 이가 존재한다. 그들이 상인 신경을 보유한 이들이다.

   

록펠러 1세 생각은 도매업이 주였고, 정유업이 보조였다. 남북전쟁 호시절에 옵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정유업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 록펠러 1세 정유업을 두고 한 말인양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도매업 수입보다 정유업 수입이 압도했다. 록펠러 1세가 정유업을 시작한 1863년에 클리블랜드에만 정유소가 20개에 달했다. 이 시기 정유업이란 땅 짚고 헤엄치기여서 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박이었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남북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활황기도 끝임을 의미한다. 이 시기, 록펠러 1세는 중대 결단을 내려야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이는 한 달 수입 육백여만 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계가 뚜렷하여 도매업 시장이 제 2의 가드너를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록펠러 1세 자신의 지위는 추락하고, 수입도 줄어들 것이다.

   

반면, 정유업에 올인을 한다면? 오늘날로 치면, 시장에 경쟁자가 없는 블루오션 시장이나 다를 바 없는 노다지 시장.

   

록펠러 1세는 결행한다. 회사는 로마 삼두체제였는데, 록펠러 1세는 카이사르였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록펠러 1세 전술은 간단했다. 삼두체제 중 일인인 앤드루스더러 고향 친구를 택할 것인가, 종교를 택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앤드루스 같은 인물은 실리적이고 속세적인 것보다 이상적이고 명분적인 것을 중시한다. 앤드루스는 클라크를 버리고 록펠러 1세를 택한다.

   

   

*** 이 글은 이웃인 마리아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허나, 여러 사정상 이 정도로 표현함을 양해바랍니다. 인드라는 마리아님 글을 중심으로 여러 참고자료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작성했습니다.

인드라 글쓰기는 분석적 글쓰기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입니다. 이 글에는 전략적 목표가 있습니다.

   

가급적 인드라가 요구하는 대로 세상이 재편성되기를 바랍니다.

   

#################

   

세상은 불공평, 불평등이다.

록펠러 1세처럼 

긍정적 이해를 통해 지양하자.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2 :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5 04:49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11327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2 :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5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사업에!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1974년 11월에 발표된 '록펠러 가문의 부(富)에 관한 미국 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내의 록펠러 일족이 관리하고 있는 재산만도 당시의 추정으로 6,400억 달러였다. 당시 록펠러 재산 추정액이 60억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백 배인 게다. 허나, 그 보고서조차 록펠러 가문 전부를 파악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가문이 쌓은 부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헌데, 록펠러 가문 부의 출발은 주급 4달러,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팔만 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누구나 부의 축적 비밀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록펠러는 졸업시험을 한 달 남기고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십대 여성과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 빌이 생활 보조를 줄였기 때문이다. 하여, 장남인 록펠러 1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록펠러 1세는 소년가장이어서 군대도 면제되었다. 록펠러 1세는 바람둥이 빌 제안에 따라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40달러를 내고 3개월 과정을 이수한다. 록펠러 1세는 상업학교에서 회계 기초를 배웠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휴잇 앤드 터틀 회사는 위탁판매 및 선적회사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도매상이다.

   

록펠러 1세는 당대 관례에 따라 무급사원, 오늘날로 치면 인턴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록펠러 1세는 얼마나 기뻤으면 9월 26일 입사일을 생일보다 중시했다.

   

록펠러 1세는 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는 록펠러 1세만 부당한 대접을 받아서도 아니고, 사장이 악덕사장이어서도 아닌 당대 관행이었던 듯싶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는 이들이 있는데, 대체로 한 달 이내에 결판이 나는 편이다. 헌데, 노동시장에 인력이 넘치니 3개월까지 기간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

   

해서, 사장은 록펠러 1세 역량을 인정하여 1855년 연말에 3개월치 임금 50달러, 백만 원을 지급했다. 하고, 사장은 록펠러 1세에게 월 25달러, 오십만 원 지급을 약속했다. 이는 주급 4달러, 월 16달러, 삼십이만 원보다 상향한 급여였다.

   

$$$ 당대 돈 계산은 편의상 오늘날 달러 가치와 비교하여 20배로 하고, 환율을 달러당 1,000원으로 한다. 가령 록펠러가 활동하던 19세기 중후반 40달러이면 오늘날 팔십만 원으로 환산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1858년, 록펠러 1세는 퇴직한다. 록펠러 1세는 그간 급여로 번 돈 팔백 달러, 천육백만 원에 바람둥이 빌이 유산을 선불로 지급한 천 달러, 이천만 원, 하고, 여기저기서 융통해서 이천 달러, 사천만 원을 모았다. 이웃이자 같은 상업학교에서 공부한 클라크가 록펠러 1세에게 제안하여 출자금 각각 이천 달러, 사천만 원, 총 팔천만 원짜리 위탁판매업, 도매상 회사가 출범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사업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하나, 록펠러 1세 사업 기반인 클리블랜드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827년 이리운하 개통으로 클리블랜드는 대서양과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으로 연결되는 물길이 사통팔달인 천혜의 도시였다.

   

둘, 록펠러 1세는 교회 인맥을 적극 활용했다. 영업은 인맥이니까.

   

록펠러 1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선교교회에 다녔다. 그뿐 아니라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회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명예 서기직을 맡아 위원회 의사록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록펠러 1세는 십일조를 거르지 않았다. '록펠러 가의 사람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한 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입과 지출금,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의 내역을 작성해 나갔다. 매주 그는 싸구려 하숙집 집세로 1달러, 이만 원을 지불하는 것 외에도 소액기부 모임에 75센트, 만오천 원을, 그리고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 5센트, 천 원, 빈민구제 활동에 10센트, 이천 원, 해외선교 활동에 10센트, 이천 원을 헌금했다."

   

록펠러 1세는 십일조가 아니라 수입의 25%를 기부한 셈이다. 록펠러 1세에 대한 교회 평판, 지역 평판이 좋았다. 영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면, 록펠러 1세가 자선을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전 인월리는 무엇이냐. 전략적 글쓰기다. 사실 그 문제는 록펠러 1세보다 카네기에게 할 말이지만, 당시 국유본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셋, 록펠러 가문 특유의 화술

   

여기에 록펠러 가문 특유 화술이 빠질 수 없다. 록펠러 1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여자 꼬시는 데에만 힘쓰던 가문의 능력을 오직 비즈니스에만 투자했다. 그래서일까. 록펠러 1세 영업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데까지 이른다.

   

록펠러 1세가 다니던 선교 교회가 한 집사로부터 2000달러, 사천만원 담보대출을 받았는데 , 제 날짜에 이자를 지불하지 못했다. 이에 집사가 교회를 처분할 것이라 목사가 설교하자, 록펠러 1세가 나서서 교인을 설득하여 사천만 원을 모금할 정도다.

   

허나, 사업은 자잘한 백 방보다 큰 것 한 방이다.

   

록펠러 1세가 저인망으로 끌어 모은 교회 인맥 장사가 한계를 보인다. 1859년 4월 1일, 사업 시작한 지 일 년 후,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에 공동경영인으로 조지 가드너가 합류한다. 조지 가드너는 클리블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훗날 클리블랜드 시장과 클리블랜드 요트 클럽 회장을 역임한다. 클라크 가드너 상사로 바뀌었다.

   

왜 이러한가. 당연한 일이다. 큰손을 통해야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다. 영업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찌라시 뿌리는 영업이요, 다른 하나는 골프와 룸살롱에서 접대하는 영업이다. 어느 것이 더 회사에 보탬이 되나?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후자이다.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시대는 록펠러 1세라는 영웅을 요구한다.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교통의 요충지, 클리블랜드는 보급기지로 변신한다.

 

전쟁 보급기지. 돈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전쟁이 나면 공장이란 공장은 평소 가동률 80%에서 100% 가동하기 마련이다. 경제가 살아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니 농산물을 주로 하는 생필품 취급 도매회사가 돈을 버는 건 불문가지.

   

1862년, 록펠러 회사 연간 수익이 일만칠천 달러, 삼억사천만 원이었다. 이는 전쟁 전과 비교하여 연간 수익이 네 배에 달한다. 하면, 전쟁 전 연간 수익이 사천이백오십 달러, 팔천오백만 원이다. 하면, 한 달 수입이 약 360 달러, 칠백여만 원이다.

   

한 달 수입이 약 360 달러, 칠백여만 원인데, 세 명의 공동창업자가 균등분할로 나눠가지면 120 달러, 이백사십만 원 정도?

   

요즘 한국 영세 상인이 가게하면 가져가는 빠듯한 수입인 게다. 헌데, 수입이 네 배로 올라 칠백여만 원이면 한국 중산층 중층을 구별하는 평균 수입 육백여만 원을 약간 상회한다. 참고로 인드라가 파악하는 한국 중산층 하층 수입 기준은 월 삼백만 원, 중층 수입 기준은 육백만 원, 상층 수입 기준은 천만 원이다. 만일 월 수입 삼백 이하면 중산층이 아닌 심리적 중산층인 게다.

   

돈이 돈을 부른다. 경기 활황기, 거품 시대에는 누구나 야망을 품기 마련이다. 록펠러 1세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 수입이 중산층도 아닌 하층급 이백여만 원 벌 때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 1세는 중동 특수가 불던 때처럼, 코스닥 광풍이 일던 시기처럼 미친 듯이 돈 되는 일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때, 정유업을 만난 것이다. 하여,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허나, 수입이 천만 원 가까이 늘어나니 눈 뒤집힐만했다. 록펠러 1세는 당대 보험료 150달러, 삼백만 원을 아끼려고 할 정도였다. 해서, 활황이 되니 우선 가드너를 축출했다. 평소라면 모르되, 전시였다. 전시라면 빈익빈부익부가 극대화된다. 전시에도 골프 룸살롱 영업이 가능하다. 허나,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전시여서 일감이 널려 있는데, 가드너처럼 평시에만 골프 룸살롱 출입이 가능한 자는 아웃일 수밖에 없다.

   

   

"전투준비태세·방어준비태세라고도 한다. 모두 5단계로 나뉘며, 숫자가 낮아질수록 전쟁발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Watch Condition) 상태의 분석 결과에 따라 전군(全軍)에 내려지는데, 데프콘 5는 적의 위협이 없는 안전한 상태를 말하고, 데프콘 4는 대립하고 있으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에는 1953년 정전 이래 데프콘 4가 상시적으로 발령되어 있다.

   

데프콘 3은 중대하고 불리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긴장상태가 전개되거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있을 때, 데프콘 2는 적이 공격 준비태세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발령된다. 데프콘 1은 중요 전략이나 전술적 적대행위 징후가 있고, 또 전쟁이 임박해 전쟁계획 시행을 위한 준비가 요구되는 최고준비태세 때 발령된다.

   

한국의 경우 데프콘 3이 발령되면,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작전권이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가고, 전후방 부대의 움직임이 달라지며, 전군의 휴가·외출이 금지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되면 전군에 탄약이 지급되고, 부대 편제 인원이 100% 충원된다. 데프콘 1이 발령되면 동원령이 선포되고, 전시체제로 돌입된다. 1999년 6월 15일 서해상에서 남북함정 교전사태가 발생했을 때, 데프콘 3에 준하는 전투준비태세강화 지시가 발령되기도 하였다. - 네이버 검색 백과사전 중"

   

해서,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그 기준은 간단하다. 어떠한 상황에도 골프, 룸살롱 출입이 가능한 부자는 데프콘 1, 데프콘 1이란 언제든 고급정보를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하고, 데프콘 순위가 하락할수록 골프, 룸살롱 출입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급정보가 차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부자인가. 하면, 어느 단계인가. 한국에서 어떤 자가 정권을 잡든 골프, 룸살롱 출입하며 고급정보를 입수하면서도 절대로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수준인가. 이 대목에서 이 글을 혹 읽으면 깜봉님이 한 말씀할 수도^^!

   

   

록펠러 1세와 새뮤얼 앤드루스의 운명적 만남

   

새뮤얼 앤드루스는 영국인 클라크 고향 사람인 동시에 록펠러 1세 교회 사람이었다. 앤드루스는 1850년대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여 돼지기름 정제소에서 일을 했다. 앤드루스는 정제소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은 뒤, 1860년에 원유 10배럴을 받아 클리블랜드 최초로 등유를 정제해내었다. 당시 석유 정제 공정이 오늘날 특허 기술이었으므로 1862년, 앤드루스는 회사를 차린다.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사업에!

   

남북전쟁 시기가 아니었다면, 투자에 신중한 록펠러 1세는 결코 헛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1862년은 길가에 널려 있는 돌맹이도 돈이 될 듯싶었던 남북전쟁 중. 록펠러 회사는 앤드루스 클라크사 정유회사에 사천 달러, 팔천만 원을 투자한다. 하여,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업에!

   

록펠러 1세가 사업 안목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다. 사람 운이 있었다. 사람 운이면 연애결혼 운이거나 사업 운이다. 운도 실력이다. 인드라는 이를 운동 신경처럼 상인 신경이라 말한다. 그 아무리 혹독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악독한 쪽발정은 정권에서도, 멍청한 쪽발돼중/쪽발놈현 치하에서도 장사를 하여 성공하는 이가 존재한다. 그들이 상인 신경을 보유한 이들이다.

   

록펠러 1세 생각은 도매업이 주였고, 정유업이 보조였다. 남북전쟁 호시절에 옵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정유업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 록펠러 1세 정유업을 두고 한 말인양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도매업 수입보다 정유업 수입이 압도했다. 록펠러 1세가 정유업을 시작한 1863년에 클리블랜드에만 정유소가 20개에 달했다. 이 시기 정유업이란 땅 짚고 헤엄치기여서 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박이었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남북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활황기도 끝임을 의미한다. 이 시기, 록펠러 1세는 중대 결단을 내려야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이는 한 달 수입 이백여만 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계가 뚜렷하여 도매업 시장이 제 2의 가드너를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록펠러 1세 자신의 지위는 추락하고, 수입도 줄어들 것이다.

   

반면, 정유업에 올인을 한다면? 오늘날로 치면, 시장에 경쟁자가 없는 블루오션 시장이나 다를 바 없는 노다지 시장.

   

록펠러 1세는 결행한다. 회사는 로마 삼두체제였는데, 록펠러 1세는 카이사르였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록펠러 1세 전술은 간단했다. 삼두체제 중 일인인 앤드루스더러 고향 친구를 택할 것인가, 종교를 택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앤드루스 같은 인물은 실리적이고 속세적인 것보다 이상적이고 명분적인 것을 중시한다. 앤드루스는 클라크를 버리고 록펠러 1세를 택한다.

   

   

*** 이 글은 이웃인 마리아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허나, 여러 사정상 이 정도로 표현함을 양해바랍니다. 인드라는 마리아님 글을 중심으로 여러 참고자료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작성했습니다.

인드라 글쓰기는 분석적 글쓰기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입니다. 이 글에는 전략적 목표가 있습니다.

   

가급적 인드라가 요구하는 대로 세상이 재편성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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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 불평등이다.

록펠러 1세처럼 

긍정적 이해를 통해 지양하자.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1 : 록펠러 1세는 침례교도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4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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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1 : 록펠러 1세는 침례교도이다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3

   

록펠러 1세는 1839년 7월 8일, 뉴욕 북부 리치포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빌은 빌 클린턴 대통령처럼 바람둥이였다. 비교적 부유한 침례교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는 떠돌이 약장수 빌의 현란한 말빨에 홀딱 넘어가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였다. 허나, 그 결혼이 비극의 출발이었다.  

   

그 비극의 끝에 록펠러 1세가 있다.

삶을 비극적으로 직시하되, 낙관적으로 살라는 것인가.

   

록펠러 1세 아버지 빌 뿌리는 위그노파에 기원한다. 프랑스 남부에 거주한 위그노파였는데, 위그노파 탄압으로 독일 라인강변으로 이주하였다가 미국으로 이민했다.

      

   

"위그노의 해외 이주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는 야만국 영국에 엄청난 보물을 안겨다 주었다. 잠사 의류산업, 야채과일 가꾸는 법, 가구 제조술 등을 영국인에게 전수했다. 매뉴펙처 방식 등을 전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모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는 유태인과 함께 네덜란드 상권을 장악했다.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는 독일 기계공업의 아버지가 되었다. 록펠러 가문은 위그노 탄압으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 가문이었다. 이 당시 미국으로 간 위그노도 많았는데, 미국에서도 위그노는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령 미국 초기 재무장관 해밀튼 어머니가 위그노였다. 워렌 버핏 가문도 위그노이다.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 워렌 델라노는 300인 위원회 회원이며, 중국 광동성에서 러셀 공사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마약 거래를 담당했다. 무엇보다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는 오늘날 스위스 시계공업(정밀기계)과 스위스 은행이 되었다.

   

   

   

루이14세는 자금을 빌리기 위해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와 거래를 해야 했기에 비밀 엄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스위스 은행의 고객 비밀주의가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루이 14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귀족이나 중산층이 있다면, 상당수는 위그노이거나 위그노에 심정적 동조인 자들이다. 스위스인 네케르가 재정총감이 된 것도 위그노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당수 입헌군주제파도 위그노와 연관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 당시 우파라고 부르던 이들 상당수가 위그노와 직간접적인 관계였다.

   

   

   

이것이 위그노의 빛이라면 그림자는 없을까.

   

   

프랑스 해적이란 위그노 해적이었다. 위그노는 사략선을 가지고 있어 에스파냐 선박을 효과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가톨릭 이교도 무리의 재산 약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위그노 해적이 어찌나 위력이 있던지 1685년 무렵까지 프랑스는 콜베르의 해상 무역 강화 정책으로 영국, 네덜란드 못지 않게 해상에서 위력을 떨칠 수 있었다. 허나, 낭트 칙령 폐기 이후 프랑스는 바다를 영국에 영원히 내어주어야 했다. 물론 영국이 해상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는 시기는 1740년대이지만, 그 단초는 낭트 칙령 이후부터인 게다.

   

   

   

헌데, 이 시기 해상 무역 주수입원이란 노예 무역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짐짝처럼 창고에 쑤셔박고 유럽이나 중동, 아메리카에 팔아먹었다.

   

   

   

밀무역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국가로 돌아가야 할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세금을 대납해주고 고리의 이자를 뜯는다는가 하는 다기다양한 악랄한 방식으로 대부업을 하며,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특히 소금은 국가 산업이었는데, 각 영지마다의 관세가 다른 점을 이용해서 위그노 소금업자들이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영지간 관세를 철폐하자 자코뱅 혁명의 고향, 브르타뉴에서 오히려 반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관세 철폐하지 말라고~! 금주법 시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미국 마피아의 원조격이었던 게다.

   

   

정리하면, 지난 오백여년간 유태인과 위그노는 유대교와 프로테스탄트 관계처럼 사이가 좋았다. 유태인과 위그노 가문끼리 심심찮게 결합하는 예가 많았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의 국유본 권력 교체 이후인 게다.

   

   

국유본 뉴라이트파는 위그노를 중심으로 브레진스키, 요한 바오로 2세로 이어지는 폴란드 커넥션을 통해서 가톨릭을 중립화시켜 국유본 노비네파 유태계를 압박해왔다. 오백년간의 동맹 체제가 깨진 셈인가? 아니면, 이 역시 짜고 고스톱인가?"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752590

   

허나, 록펠러 1세에게 영향을 준 종교는 침례교였다. 록펠러 1세 할아버지는 사업적 능력을 결여한 알콜중독자였다. 록펠러 1세 아버지는 떠돌이 약장수 바람둥이였다. 하여, 록펠러 1세 할머니 루시는 손자 록펠러 1세에게 술의 해악을 이야기했고, 록펠러 1세 어머니 엘리자는 아들 록펠러 1세에게 가정을 중시하도록 가르쳤다. 하여, 록펠러 1세는 생애 술도, 담배도, 음악도, 미술도 모르고, 연애도 모르고, 오직 성경과 사업으로 살았다.

   

할머니 루시와 어머니 엘리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하였다. 루시는 당대 미국에서 명문 집안 출신이었고, 엘리자 역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록펠러가는 뿌리가 프랑스여서인지 후손들이 불어를 하지 않아도 참한 여자를 꼬시는 데에 190000이었다. 행복 끝 불행 시작. 루시와 엘리자의 결혼 생활이었다.

   

안주인들은 침례교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다. 아이를 많이 낳았고, 강한 생활력으로 아이들을 키워낸 똑순이었다. '저수지의 개들' 타란티노가 똑순이를 기억할 만큼 침례교인 어머니, 유대교인 어머니, 한국인 어머니는 특별하다.

   

록펠러 1세는 침례교인이다. 헌데, 록펠러 1세가 유태교도라고 소문이 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 록펠러 1세가 부를 획득한 과정이 신비롭기 때문이다. 둘, 록펠러 1세가 부를 획득한 과정에서 유태인이 탄복할 정도로 무자비한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셋, 침례교와 유태교가 다른 기독교 유파에 비해 통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사는 동네에 유태 회당이 없으면 찾는 교회가 침례교회라고 한다. 이유는 구약해석에서 유태교와 침례교가 유사하기 때문이란다. 침례교는 구약 해석에 대해 다른 유파에 비해 신본주의적이면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한다고 한다. 예서, '자유'와 '다양'의 차이가 있다. '자유'는 신본주의에 대한 인본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반면, '다양'이라 함은 신본주의 속에서 다양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가령 언젠가 카톨릭인 착한마녀님이 구약을 재테크 교과서로 해석한 적이 있는데, 유태교나 침례교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유파라면 착한마녀님 해석이란 이단인 게다. 예서, 침례교가 다양한 해석을 용인한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정반대이다.

   

침례교는 1. 전통적인 침례교의 정신 1) 민주적인 회중청치 2) 반신조주의 3) 신앙의 자유 4) 정교의 분리 5) 전신자 제사장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이때, 반신조주의라 하여 성경 이외에는 어떤 신앙 고백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가 특정 사제단을 동원하여 특정 종교와 유파를 강요하는 데에는 신앙의 자유를 내세워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는 침례교나 유태교가 장로교회처럼 수직적 통합보다 개별 교회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하여, 교회 내부에서도 교인이 어떤 신앙 해석을 하든 존중하나, 성경보다 우선이지 않다는 것이다. 전신자 제사장 원리도 신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기에 신자라면 누구나 제사장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지난 남북전쟁 당시 남침례교에 실망한 흑인 교회가 탈퇴하는 일이 있었고, 오바마 집권 이후, 카터가 그 때문에 탈퇴하는 쇼를 하기도 했는데, 남침례교가 사상 최초로 흑인 수장을 내세우면서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17세기 미국에 전래된 침례교회는 중앙조직을 구성하지 않은 채 매사추세츠주(州), 버지니아주(州), 뉴잉글랜드 등지에 개체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1814년에 비로소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미얀마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있던 A.저드슨을 지원하기 위해 침례회총연맹이 결성되었다. 이곳에서 출판사와 국내선교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남부침례교회가 별도의 연맹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남침례회연맹이다. 북부침례교회는 명칭을 미국침례회선교연합회로 변경하였고, 1950년에 미국침례회연맹으로 변경하였다.

   

1814년 남침례회는 남북전쟁 후 흑인 침례교회들의 탈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국의 선교에 주력하여 교세가 급성장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영향력 있는 교파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선교에 착수한 것은 1950년 중국 주재 J.A.애버나티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면서부터이다. 그때 이미 한국에는 침례교계 독립 선교사인 펜윅이 와서 동아기독교의 기반을 닦아놓은 상태였다. 동아기독교회와 남침례회 선교부가 제휴되었다.

   

그후 1954년 남침례회 한국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어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대전광역시 등에 선교부별로 선교사가 주재하였다. 처음에는 6·25전쟁으로 인한 구호사업과 사회복지시설에 치중하였지만, 점차 개체교회 지원, 순수전도사업 등에 관심을 가졌다. - 네이버 백과사전"

   

미국에서 남침례교 영향력이 상당한데, 카터, 빌 클린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남침례교도이다.

   

최근 골드만파 빌 클린턴이 유대교 사위를 맞이한 것은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인드라는 골드만노비네파연합 상징으로 보고 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9 : 국유본 뉴라이트 분파 분석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04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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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9 : 국유본 뉴라이트 분파 분석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03

   

   

1. 뉴라이트는 누구인가

   

뉴라이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몇몇 국가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보수·우익 성향 또는 반체제적 저항운동 단체나 운동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신우익'으로 표현하며, 신우파 이념에 속하는 신자유주의(new freedom)와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크로아티아·프랑스·독일·네덜란드·뉴질랜드·루마니아·영국·미국과 2000년대 중반 일어난 한국에서의 발생이나 양상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등장하여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기조를 이룬 사상을 말한다. 케인스주의의 복지국가론을 비판하면서 공공정책을 위한 시장기구의 부활과 시민권의 제한이라는 두 가지의 뚜렷한 주장을 담고 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된 이 사상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제한적인 정부·자유시장이라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가치로 구성되어 있고, 보수주의는 사회적·종교적·도덕적 보수주의에 기초한 사회적 질서와 권위의 확립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 사상이 합쳐져 등장한 신보수주의는 국가개입의 축소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시장기구를 옹호하고 지나치게 인위적인 평등지향을 배제하고 재산권을 다른 시민권보다 우위에 둔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진보 세력 독주 견제와 안정적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결성하여 펼쳐가고 있다."

   

   

   

헌데, 인드라가 분류하는 국유본 뉴라이트는 다른 이들이 분석하는 뉴라이트와 다르다.

   

해서, 인드라가 국유본론적 관점에서 국유본 뉴라이트 분파를 소개한다.

   

국내 정치종교계 :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쪽발놈현, 이명박, 손학규, 문재인, 쪽발동영, 정세균, 김두관, 안(쪽발)철수, 정몽준, 홍준표, 이재오, 김문수, 김태호, 쪽발두언, 골룸빡, 노회찬, 원불교, 소망교회, 사노맹, 참여연대, 경실련, 평화연대, 김진홍, 법륜, 쪽발영환 등...

   

국제 정치종교계 : 데이비드 록펠러, 카터, 레이건, 대처, 브레진스키, 스칼라피노, 콘돌리사 라이스, 콜린 파월, 롬니, 바이든, 리쿠드당과 네타냐후, 시진핑, 장쩌민과 상하이방, 옐친, 사르코지, 올랑드, 바웬사, 쪽발정일, 호메이니, 이슬람형제단, 일본 부패민주당과 노다 병쉰색희, 피노체트, 요한 바오로 2세 등...

   

국내 경제언론계 : 현대차, 현대중공업, 포스코, 금호석유화학, 웅진, JYP엔터테인먼트, 안랩, 보광그룹, 중앙일보, 동아일보, 쪽발찌라시 경향, 쪽발동영찌라시 MBC, SBS, 우리금융, 하나은행, 산업은행, KB은행...

   

국제 경제언론계 : 모건스탠리, 블랙록,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 블룸버그, 애플, 스티브 잡스, 무디스, 워싱턴포스트, 타임, 포브스, CNN, AP, 르몽드, 르피가로, 카길, 미국 식약청, RBS, 미쓰비시...

   

   

   

2. 뉴라이트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수장, 브레진스키가 책사인 삼각위원회를 모태로 한다

   

삼각위원회는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교체하던 해인 1973년 미국, 유럽, 일본 엘리트들이 세계 지배를 위해 만든 조직이다. 이때, 데이비드 록펠러가 일본을 키운 이유는 유럽과 아시아를 양날개로 하여 미국 뉴욕 중심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빅터 로스차일드가 미국과 소련을 양날개로 해서 영국 런던 중심 권력을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데에 대한 대안 전략이었다. 하고, 삼각위원회에서 나온 것이 G3 미국, 독일, 일본이다. 이 역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체하려는 데이비드 록펠러 1973년의 산물이다.

   

1968년 이후 국유본 권력이 차기 미국 권력을 누구로 할 것인가와 베트남 전쟁 문제로 분열하였다. 20세기 초반 300위원회 영국이 남아공 보어전쟁 인권 유린 폭로를 통해 자유당이 무너지고 노동당을 보수당 파트너로 삼은 것처럼 이 시기 빅터 로스차일드는 베트남 전쟁을 활용하여 미국 노예민주당을 붕괴시키고 미국에 진보당을 공화당 파트너로 삼는 구상을 하였다. 이는 노예민주당에 기반했던 데이비드 록펠러 권력을 약화시키는 등 일타삼피 전략이었다.

   

이에 국유본 귀족들이 데이비드 록펠러를 중심으로 반대하여 국유본 권력투쟁이 본격화했던 것이다. 해서, 지금은 아니지만, 당대 국유본 최고기구였던 빌더버그에서 미국 외교협회(CFR)에 이르기까지 권력투쟁 양상이었다.

   

삼각위원회를 최초로 제안했던 조직은 당대까지만 해도 국유본 최고 의결기관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였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이차대전 종료 후 이전 영국 위주의 300인위원회를 확대하여 유럽/미국으로 인사 개혁시켜 빌더버그를 만들었다.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신흥 국유본 귀족 진입, 기존 300인위원회 권력 약화, 빅터 로스차일드 권한 강화를 노린 일타삼피였다.

   

빌더버그는 정치계와 경제계로 구성하는데, 빅터 로스차일드가 남자의 로망, 로마 카이사르 장군처럼 경제계를 핍박하자 국유본 귀족 경제계 일부가 반발한다. 이에 빌더버그 국유본 경제 부문에서 삼각위원회 조직화가 제안되는 것이다. 최초 제안 취지는 국제 원유 가격이 현재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는 것과 달리 당대에는 겨우 1달러 수준이어서 이에 대한 국제 석유업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허나,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를 안심시키는 위장조직이든,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국유본 귀족들의 반발로 위상이 변화했든, 빌더버그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빅터 로스차일드 황권파에 대립하는 국유본 귀족파 조직으로 변신하고, 1973년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예서, 폴란드 출신 유태인 브레진스키가 삼각위원회 책사를 맡아 맹활약한다. 석유 파동, 카터 집권, 호메이니로의 이란쿠테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유도, 박정희 암살 등을 수행했다. 하면, 브레진스키 이후 삼각위원회를 맡은 유태인 헨리 키신저도 뉴라이트일까. 아니다. 후일 노비네파 분석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헨리 키신저는 노비네파이다. 헨리 키신저는 노비네파이지만, 노비네파 소그룹 중에 빅터 로스차일드와 대립하고 1973년 국유본 권력교체 당시 데이비드 록펠러 편에 선 국유본 귀족파이다.

   

   

   

3. 록펠러 가문은 육십여년을 인내하여 로스차일드 가문을 국유본 권력에서 축출했다

   

   

국유본이 미국 정치계를 확실히 장악한 시기는 루즈벨트 정권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차대전을 일으킨 이후이다. 당시 국유본은 미국연방준비은행을 만들었어도, 루즈벨트 삼선과 뉴딜을 지렛대로 삼았어도 여전히 미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할 수 없었다. 허나, 이차대전으로 전시체제로 만든 뒤 미국을 점령했다. 

   

록펠러 가문은 석유산업을 일으키면서 로스차일드와 모건 가문에 줄을 대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을 누르고 세계 최고자본으로 우뚝 서려는 야망을 지녔다. 해서, 록펠러 가문은 베니스의 상인, 유태인 장삿꾼이란 오명을 감수할 만큼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면서 미국 경제계를 장악해갔다. 자회사를 통해 록펠러를 반대하는 안티 록펠러 카르텔을 만들어서 안티세력까지 흡수하는 전략은 로스차일드를 뛰어넘는 전략전술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로스차일드가 탄복하여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인드라는 보고 있다.

   

허나, 록펠러 가문은 시련에 봉착한다. 국유본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경제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미국 경제권력, 그중에서도 록펠러 가문 주도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국유본은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하여 독점자본주의체제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전환시킨다.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차이란 로스차일드 가문이 자신의 강점인 금융자본 힘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록펠러 산업자본을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것이다. 오늘날 말하자면, 사다리 치우기인 셈이다. 대표적인 정책이 금산분리 정책이다. 이는 순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설립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인 변호사를 동원하여 독점법으로 록펠러 가문을 핍박했다. 이 시기 록펠러 가문은 망할 뻔했다.

   

이에 대해 록펠러 가문은 평소 자선이란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다가 자선사업을 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넙쭉 엎드린다. 이후 러시아혁명에서 보듯 적극 협력한다. 항복선언이다. 허나, 이 항복선언은 록펠러 가문의 진심이 아니었다.

   

하면,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왜 록펠러 가문을 관용하였을까. 이는 록펠러 가문이 당대 미국 경제계에서 미국 토종 경제인을 상징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국유본이 필요에 의해 미국을 독립시켰지만, 진실을 제대로 아는 미국 경제인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해서, 미국 경제인 사이에서는 영국적인 것과 대립하는 미국적인 것을 중시했다. 모건이 영국적이라면 록펠러는 미국적이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록펠러 가문이 위협적임을 인지하면서도 그 뿌리까지 제거할 수는 없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록펠러 가문에게 자결 보다 충성 서약을 요구했고, 록펠러 가문은 충성을 맹세했다.

   

하여, 이차대전과 삼차대전인 한국전쟁 이후 국유본은 공화당을 모건, 노예민주당을 록펠러에게 맡기는 구도를 만들었다. 당대 아이젠하워는 스웨덴계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확히는 모건 정권이었다. 신기한 건 이 시기부터 스웨덴이 삼류국가에서 복지국가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북유럽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국유본없이 북유럽 복지도 없다. 물론 국유본은 견제를 견제하는 78 : 22 법칙에 충실하여 공화당에도 모건 주류를 감시하는 비주류로 록펠러 세력을 허용하였는데, 이 록펠러 세력이 후일 노비네파로 성장하는 넬슨 록펠러 세력이다.  

   

가령 닉슨이 케네디에게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국유본 때문이었다. 당대 닉슨은 유태인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면서 욕이란 욕을 다 하고 다녔다. 해서, 닉슨은 정치 낭인이 되어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오죽하면 박정희조차 닉슨을 냉대했다. 허나, 닉슨은 빅터 로스차일드에 반발하는 국유본 귀족파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대목에서는 헨리 키신저의 활약이 돋보인다. 헨리 키신저는 대선에서 공화당 닉슨은 물론 노예민주당 대선후보에게도 정보를 제공한다고 설레발을 친다. 이래놓고 최종적으로는 닉슨 편을 들었으니 헨리 키신저야말로 삼국지적 책략의 달인이 아닌가. 게다가 닉슨 정부에서 맹활약하던 헨리 키신저가 데이비드 록펠러와 손잡고 닉슨 도청게이트 사건을 일으키고 이후 삼각위원회 책사로 활동하니 흥미롭지 않은가? 허나, 배후에 국유본 귀족이 힘을 실어주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본디 군 운전병에 불과했던 유태인 헨리 키신저를 국유본이 미소 데탕트 전문가로 훈련시켜 키운 것이다. 해서, 헨리 키신저는 닉슨 시절에 유태인을 비난했다. 자신도 유태인인데 어찌된 일인가 하면 이는 당대 빅터 로스차일드 구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닉슨과 헨리 키신저는 집권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베트남 전쟁을 조기 종료하기 위해 베트남과 협상한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헨리 키신저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 중국과도 핑퐁외교를 한다.

   

닉슨은 록펠러 가문 눈치를 보았다. 허나, 속으로는 늘 어딜 가나 록펠러 록펠러냐 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욕을 하고 다녔다. 이에 불안을 느낀 록펠러 가문은 국유본 귀족 협력을 받아 닉슨 재선을 우려하여 닉슨을 도청 게이트 사건으로 퇴출한 것이다.

   

   

   

4. 뉴라이트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넬슨 록펠러 복상사 직후 데이비드 록펠러와 레이건과 미국 노예민주당원이 공화당으로 당적 이전하면서 본격화한다

   

카터가 병쉰짓을 지속하니 넬슨 록펠러가 대통령이라는 야망을 꿈꾼다. 록펠러 가문에서 넬슨 록펠러란 공화당 연락책이었다. 넬슨 록펠러는 헨리 키신저와 CIA를 통해 칠레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예서, 아옌데는 유대인이며, 빅터 로스차일드 지원을 받고 있었다. 헌데, 록펠러 가문은 아프리카, 아시아를 로스차일드 영역이라면 내심 중남미를 록펠러 가문 영역으로 여겼다. 해서, 충돌한 것이 칠레 전쟁이다. 칠레 전쟁 이후 칠레의 전두환, 뉴라이트 피노체트가 칠레의 박정희, 아옌데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헌데, 이 과정에서 닉슨이 한 일이 거의 없다. 

   

이처럼 주요 역할을 한 넬슨 록펠러는 닉슨을 제외하고 이십여년 노예민주당이 집권하는 상황에서 공화당 정권이 다시 들어설 수밖에 없는 동시에 공화당에는 넬슨 록펠러 이외에 인물이 없다고 여겨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고자 결심했다.

   

이에 대해 공화당 주류는 물론 노예민주당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하여, 록펠러 청문회까지 간 것이다. 문제는 록펠러 가문에서도 록펠러 가문이 타켓이 되어 자칫 자멸할 수 있는 넬슨 록펠러 대통령 시나리오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허나,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가문, 공화당 주류, 노예민주당 반발에도 대통령 출마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하여, 청문회에서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가문 실상을 폭로한다. 이전까지 록펠러 가문 재산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소문에 그쳤다. 허나, 넬슨 록펠러는 청문회에서 록펠러 가문 재산이 알려진 것보다 열배, 백배 이상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넬슨 록펠러의 고백은 공식적이어서 이에 대한 수습이 정말 어려웠던 것이다. 하여, 록펠러 가문, 공화당 주류, 노예민주당은 넬슨 록펠러 제거에 합의한다. 그것이 넬슨 록펠러 복상사 사건이다.

   

넬슨 록펠러 사후 공화당에 큰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위해 데이비드 록펠러가 공화당 지지를 표명한다. 록펠러 가문은 국유본 기획으로 본디 영국적인 모건 가문에 대응한 미국적인 록펠러 가문으로 이미지화하였기에 록펠러 가문은 그간 케네디, 카터를 지원하며 노예민주당파였던 것이다.

   

당적 이전이 아니지만, 충격적인 사건이 분명하므로, 이에 대한 완충장치가 필요했다. 정치적 격변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사건이 필요하다. 그것이 볼커다. 카터 정부 말기 연방준비제도 의장 볼커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복지정책에 대립하는 물가정책, 즉 그 어떤 경제정책 고려보다 물가관리가 중요하는 경제정책을 내세워 당대 초고금리 정책을 펼쳤다.

   

하고, 록펠러 가문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맞서 우선 미국을 일통하는 전략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터처럼 미국 반쪼가리만 차지하고서는 로스차일드 가문 견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록펠러 가문은 역공세를 취했다. 영국에는 뉴라이트 대처를 발굴하여 빅터 로스차일드에 맞섰다. 동시에 레이건을 내세워 미국을 일통했다. 이 시기 대선에서 레이건은 미국 거의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레이건은 본디 루즈벨트 추종자였으며, 노예민주당 지지자였다. 허나, 1960년대 이후 케네디와 노예민주당이 미국을 타락시킨다고 보아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네오콘 뿌리 역시 노예민주당이었으나 레이건과 네오콘 차이는 레이건이 온건 비둘기파인 반면, 네오콘은 강경 매파였다. 네오콘은 레이건보다 더 오랜 기간 노예민주당을 지지했었다. 한국으로 치면, 1970년대 미국 네오콘이란 쪽발돼중과 쪽발놈현을 거세게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쪽발민주당을 지지하는 당내 비주류 세력, 혹은 꼬마민주당 세력이었다. 반면, 레이건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쪽발돼중과 쪽발놈현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과 다를 바 없다고 보고,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이전한 정몽준, 이재오, 김문수 같은 인물이었다.

   

   

추신 : 술에 취해서 여기까지. 계속 이어서 쓰겠습니다.

VER 3.0 국제유태자본과 삼성 : 국유본이 반도체 가격 안정화를 위해 한국 반도체산업을 삼성에게 허가했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8/30 04:09

http://blog.naver.com/miavenus/70145792211

   

   

   

글을 읽기 전에 손가락에 클릭하면 쪽발민주당 해체, 골룸빡 처단,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이 앞당겨집니다.

여러분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말길 바랍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9 : 국제유태자본과 삼성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2012 8~9)

   

1. 자본은 단지 돈이 아니라 돈과 인맥과 정보 삼위일체 종합의 산물이다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권은 정권 초기에 레닌과 모택동, 카스트로처럼 경제에 관해 잘 몰랐다. 박정희 정권 초기 경제 프로그램은 김종필과 유원식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만들었다. 허나, 이들 개혁작업은 연이어 실패를 거듭했다. 증권시장을 만들고, 화폐개혁을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 발전 투자 자금 마련이다. 허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드라는 김종필을 박정희를 감시하기 위한 체게바라와 동급의 국유본 간첩이라고 본다. 해서,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박정희나 쪽발일성이 아니라 김종필일 수 있다.

   

예서, 인드라가 단언한다. 자력갱생론과 같은 경제론은 철저한 허구다. 국유본 지원받아 잘 나가던 쪽발 경제가 1920년대에 국유본 기획으로 왕따를 당하자 그때 자력갱생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쪽발왕을 중심으로 신념을 지니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일으켜서 자금을 마련하여 공업화에 나서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헛소리인 게다. 이를 기초로 나온 게 쪽발주체론이고, 이를 카피한 것이 쪽발일성의 주체사상론이다. 쪽발일성은 쪽발 경제의 부활을 위해 625전쟁을 일으킨 악질 쪽발이다. 쪽발일성 애비색희가 마약을 팔아 부를 축적하던 쪽바리 색희로서 악질 쪽바리 처단을 중시하던 당대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질 정도이니 천한 근본이 어디 가겠냐? 오늘날 주사파 병쉰색희들이 무식해서 자본주의 핵심을 모르니 이런 헛것에 혹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요구한다.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초기에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또한, 대규모 시설투자한 공장이 계속 돌아가려면 안정적인 대량 소비가 필요하다. 즉, 시장이다. 마지막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외교력이든, 군사력이든.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본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서, 대체 역사물을 보면, 대부분 선진 과학기술로 비교우위설에 입각하여 생산력 중심으로 가되, 정치적으로 개혁하여 대체 역사를 집필하는데, 인드라가 보기에는 설정에서부터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선진적이고, 정치체제가 진일보했어도 자본이 없으면 말짱 꽝인 것이 국유본 세상인 게다. 

   

영국 과학기술이 선진적이었던가. 선진적이었지만,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비슷했다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17세기 루이 14세 시기만 봐도 프랑스 과학기술력이 매우 우수했다. 정치체제를 문제삼을 수 있다. 허나, 영국이나 프랑스나 이 시기 절대왕정제이긴 마찬가지였고, 절대왕정제에 대항한 금융자본가들의 투쟁이 있었다.  

   

인드라가 보건대, 영국과 프랑스 차이는 절대왕정제의 문제가 아니라 귀족의 문제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왕의 차이는 없었다. 다만, 영국은 장미전쟁으로 귀족들이 궤멸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죽었다. 이들 귀족을 보완한 것이 젠트리였다. 헨리 8세를 도와 명성을 얻었다는 버트란트 러셀 세습백작 조상을 생각하면 된다.   

   

반면, 프랑스는 귀족들이 온존한 상태로 절대왕정이 등장했다.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해서, 경제사 책에 독일 경제 발전이 왜 지지부진한가에 대해서 독일 지방귀족인 융커를 지적하곤 하는 것이다. 허나,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왜? 근대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중국에서 귀족들이 숙청되었다. 헌데도 왜 러시아와 중국은 가난했을까?  오히려 귀족을 유지시킨 일본은 왜 경제 발전, 부국강병에 성공했을까?  다시 말해, 왕을 죽이고, 귀족을 몰아낸다 하여 경제가 발전하던가? 답은 단 하나다.

   

국제유태자본이다. 왕과 귀족들 죽이고 그 몰수자금을 자본으로 한들 새발의 피다. 또한, 그 자금이 자본으로 할 만큼 설령 크더라도 시장이 없다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자본이 있고, 시장이 있더라도,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가하면 방도가 없는 것이다. 

   

쪽발이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해서 재정이 안정적이었나? 그 반대였다. 중국 전성시대였던 수당시대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전비로 인해 재정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국유본 돈으로 국유본 배와 총기와 탄알을 준비하고, 국유본 돈으로 쪽발 경제를 유지하고, 국유본 돈으로 식민지 비용을 감당하려니. 이 빚을 고스란히 국유본이 보증하지 않았다면 쪽발은 전쟁에 이기고도 파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서, 인드라가 한마디 더 한다. 자본이라 해서 단지 스위스 계좌에 있는 돈을 자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국유본 세상에서 자본이란 단지 돈이 많다, 아니다가 아니다. 만일 단지 돈이 많다해서 자본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쪽발과 스위스, 독일은 왜 자신들의 통화를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 돈 많은데, 왜 통화 관리를 한국 만큼, 혹은 한국보다 기대 이하로 하나? 단순한 예로, 쪽발은 엔고가 지속하면 경제가 어려운 것이 분명한 데도, 왜 엔고 하나 해결할 수 없을까? 쪽발만 그러한가. 독일도, 영국도, 미국도, 그 어느 나라도 예외없이 통화를 국가 스스로 관리할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북한마저도. 

   

국유본 세상에서 자본이란 돈과 인맥과 정보가 삼위일체로 결합한 종잣돈이다. 

   

해서, 돈만 있어도, 인맥만 있어도, 정보만 있어도 자본이 되지만 충분한 자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 대 자본이라는 경쟁에서 돈과 인맥, 정보를 모두 갖춘 자본과 셋 중 어느 하나를 결여한 자본의 대결 승부는 예측 가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관점을 확장시키면, 겉보기에는 자금력이 딸린 기업이 사업권을 따내는 것은 돈과 인맥과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자금력에서 우위였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자금력이란 단지 자금을 보유한 것만을 의미하지만, 돈과 인맥과 정보를 종합한 자금력이란 한마디로 신용으로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신용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국유본이다.   

   

   

2.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데에는 베트남 전쟁과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권이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이 오늘날 이차대전 이전 식민지 국가 중에 유일하게 OECD 선진국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경제사적으로 논의되는 바는, 어차피 되는 것이었는데, 일제가 막아서 하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에 되었다라든가, 토지조사계획 등 비록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할 방편으로 행한 것이긴 하더라도 근대화라는 부수적인 효과로 인해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든가, 마지막으로 이전 경제교과서와 달리 이승만이 쪽발일성보다 나은 토지개혁을 추진해서 온국민이 토지 소유한 결과 경제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는 식이다.

   

모두 아니다, 라는 게 인드라 경제론이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 초기 사회주의 경제계획론도 오늘날 경제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 예서, 쪽발민주당 병쉰색희들이 쪽바리한테 설설 기던 장면 때 기획했다느니 하는데, 그걸로 따지면 이승만 때 입안된 걸 왜 장면 때 우려먹냐? 대체 장면 병쉰색희가 몇 개월이나 집권했는데? 더 나아가 공과가 있지만, 인드라는 김종필이나 유원식 공도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 한국 경제는 형편없었다.  

   

인드라 식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이승만 때와 다를 바 없이, 혹은 오늘날 쪽발정일, 쪽발정은이 무엇을 하더라도 그 이상의 실패를 맛볼 것이다, 라는 것처럼, 1980년 이전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무엇을 해도 무조건 실패했다.  

   

이러던 한국경제가 어느 순간부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던가. 

   

인드라는 1968년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테트 공세 시작

연도
1968년 1월 31일

저자
존 스위프트

남베트남에서 테트 공세가 미군을 쇼크에 빠뜨린다.

베트콩 게릴라들은 남베트남의 모든 도시를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폭발적인 공격으로 베트남의 설날인 테트를 자축했다. 미군은 싸움의 규모나 격렬함에 넋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부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져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테트 공세는 남베트남을 완전히 붕괴시키려는 의도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다. 이때까지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으며, 지방은 몰라도 도시에서라면 자신이 있다고 확신했다. 북베트남의 보 구엔 지아프 장군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최상의 경우 이번 공세로 민중 봉기에 불을 붙여 미국인들을 베트남에서 몰아낼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적어도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군사적인 면만 보자면 미국은 테트 공세에서 승리했다. 베트콩은 대규모 피해를 입었고, 그 때문에 북베트남군은 싸움에서 큰 부담을 져야만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결과는 달랐다. 미국에서 테트 공세는 패배로 여겨졌고, 미국의 여론은 오늘날 가망 없는 대의로 간주되는 이 전쟁에 등을 돌렸다. 미군의 희생 역시 1973년 평화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사실 누가 보아도 미국이 테트 공세 이후 체면을 구기지 않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날이 갈수록…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이성적인 방법은… 협상뿐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보인다."

월터 크론카이트, 미국 방송인"

   

   

국유본은 이차대전 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십년 주기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일타삼피이지만, 그중 핵심은 자본주의 특성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안정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해서, 국유본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일으키면서 목표한 바는, 특정한 세력의 빠른 승리가 아닌, 그 반대로 오래도록 전쟁하면서 설사 특정세력이 승리하더라도 내전 양상으로 해서 전쟁배상금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1968년에 종결되어서는 안 되었다. 허나, 위기가 왔다. 한국군이다. 귀신잡는 해병을 비롯한 일당백 한국군의 용맹은 자타가 공인했다. 지난 유럽에서 스위스나 독일 용병보다 우수했다. 해서, 한국군이 베트남에 만 명만 추가 투입해도 일당백이어서 백만 명 투입하는 효과와 같았다.

   

국유본은 깜짝 놀란다. 자칫 한국군 파병으로 베트남 전쟁이 조기 종결되면 엄청난 손실이 따른다. 이에 국유본은 쪽발일성에게 지시한다. 이것이 김신조 121 청와대 침투 사태요, 푸에블로호 사태인 것이다. 모두 1968년 1월에 일어난 일이다. 

   

쪽발일성은 당시 좌절과 절망의 나날이었다. 1950년대까지 국유본이 쪽발일성 정권을 지원해서 모택동 중국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국유본이 쪽발일성 대신 박정희를 지지하니까 막나갔던 것이다. 사실 북한 경제가 망쪼가 든 게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이다. 그러다가 국유본 오더가 내려오니까 쪽발일성이 신이 나서 한 일이 우선 쪽발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이 첫째요, 잔가지라 해서 숙청했던 남로당 인맥을 발굴해서 간첩 훈련시키는 게 둘째요, 세번째로 본격적으로 군비 확장에 나선 것이 세번째이다. 그 결과가 121 청와대 침투 사건이요, 푸에블로호 사건이다. 이를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면 안 된다. 가령 푸에블로호 사건은 국유본이 미국에 지시하여 일부러 쪽발일성에 져주기 게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결과가 무엇인가.

   

박정희 정권은 놀라서 첫째, 이 시기부터 유신정권을 준비한다. 둘째, 국유본 침탈에 맞서 사실상 친위조직인 하나회 같은 군내 조직을 키운다. 이는 쪽발정일이 박정희 따라서 군사위원장 맡아서 한 바 있다. 셋째, 국유본이 원하는 대로 일당백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취소한다.

   

국유본은 박정희 정권 대응이 흡족했다. 이 시기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시기다. 하여, 국유본은 남한을 이전까지 그저 엔블록권의 하청, 소비시장으로만 봤다가 쪽발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 3세계의 전시장으로 키워보자, 하는 결정을 내린다. 

   

헌데, 여기서 변수가 생기는데, 1973년, 국유본 권력투쟁 결과,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국유본 권력이 국유본 귀족 쿠테타로 인해 데이비드 록펠러가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이 결과로 한국 경제 발전이 보다 미묘하게 전개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국유본 기획대로 경제 발전을 시켜 긍정성을 드러내되, 정치적으로는 빅터 로스차일드 업적이니 데이비드 록펠러 입장에서는 억압 체제라고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체제나 당시 쪽발체제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쪽발체제 정치성에는 호의적으로 다루고, 한국체제 정치성에는 부정적으로 다루었다. 이 기조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하면, 왜 국유본은 쪽발 정치체제에는 긍정적이고, 한국 정치체제에는 부정적이었나. 이는 오늘날 중국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국유본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중국 정치체제란 한편에선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정치시스템이란 평가를 받는 반면, 현 시점 남한 언론에서 보자면, 심하다 할 정도로 매일 비판당하고 있다. 왜 이러한가. 국유본의 전략인 게다.  

   

다시 말해, 국유본이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쪽발이든, 한국이든, 쪽발정은이든, 중국이든 비판을 당할 수밖에 없고, 체제 위협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9.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과 에베르트 재단

경술국치 이후로 한국과 독일의 인연이 끊겼다가 1955년 재개된다. 허나, 본격적인 교류는 1963년 파독 광부 파견 때부터이다. 1963년 12월 21일 4만 6천명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 123명이 서독 루르와 아헨 지역의 석탄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후 1977년까지 서독에 파견한 광부는 7936명이나 됐다. 1960 년대 실업자가 250만 명이나 되고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3년 계약으로 독일 탄광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광부들은 한 달에 1400-1600 마르크(당시 28만원-32만원)를 받아 방값, 식대를 빼고 1000마르크쯤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의 16일간 서독 방문 당시 전담 통역사 겸 경제 고문 자격으로 수행했다. 그는 58년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흔치 않은 '서독 유학파'였다. 귀국해 중앙대 교수를 하다 발탁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으로만 15년을 지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를 만난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며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하니 나를 믿고 돈 좀 빌려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일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모양새였다."

http://blog.daum.net/wcm001/16498591

    

   

인월리는 그간 박정희 정권을 중도좌파 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나, 산별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등 오늘날 민주노총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중도좌파 노동자 복지 정책을 전향적으로 취했다. 둘, 식목일 제정, 그린벨트 실시 등으로 역대 그 어떤 대통령도 안 하고, 후퇴시킨 녹색성장 정책을 실시했다. 셋, 의료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여 오늘날 전 세계인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했다. 넷,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교 교육평준화 정책을 실시했다. 다섯, 예술영화를 만드는 이에게 수입쿼터를 주는 방식으로 문화역량을 높였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 축소시킨 스크린쿼터제의 기초를 닦았다.

   

   

허나, 오늘날 어떠한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으로 인해 중도좌파 박정희 선생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국유본의 사주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독립군 고문한 일제 헌병 자식들 주제에 탈레반 행세하는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무덤에서 운다. 김구선생 이름 팔지 마라. 천벌을 받을 것이다.

   

   

냉정하자. 인월리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초반 한국의 트로츠키, 유원식의 경제계획을 구상했지만, 계속 실패했다고 밝힌 바 있다.

   

   

"516 직후 진시황으로까지 불린 8기생 유원식 대령은 당대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한국의 트로츠키였습니다. 유원식의 아버지는 유림으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는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도 다니는 등 이론적인 면에서도 많은 공부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해서, 오늘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가령 이승만 때 이미 기획했다, 장면 때에 있던 것을 박정희 정권이 베낀 것이다 등등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무능했던 민주당 정권을 옹호하고, 박정희를 무조건 까대기 위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입니다. 그보다는 유원식 작품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해 유원식은 "나는 완전 고용의 꿈을 꾸었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와의 대담에서 스칼라피노가 후진국이 경제성장을 하려면 불균형성장이 불가피하다고 한 데에 대하여 뜻밖에도 균형발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해서, 당시 "한국의 군사정부에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더라"라고 스칼라피노 박사가 미 정부에 보고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439320

    

   

문제는 돈이었다. 1962년 실패한 화폐개혁을 한 것도 자금 마련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나 북한처럼 화폐개혁이 성공하려면 결국 외자 도입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게다. 하면, 왜 이때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을까. 이것이 국유본의 교묘한 수순인 게다.

    

   

국유본은 러시아 혁명 때나 중국 혁명, 쿠바 혁명 때에도 유사한 방식을 썼다.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도와주다가 막상 권력을 잡고 나서는 압력을 가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유럽 국가들의 포위와 백군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말할 나위없이 이 시기에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여, 레닌은 혁명보다 경제 건설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쿠바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국유본이 정권을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막상 혁명이 성공하자, 국유본은 미국 정권에 지시하여 중국, 쿠바 정권을 다방면으로 압박했다. 국유본의 의도는 단순명료했다. 돈의 힘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은밀히 지원하던 국유본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니 도움을 주기는 커녕 미국 정권과 국유본 언론을 통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내몰 수만도 없으므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정권이 박정희 정권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 허나, 중요한 건 돈이었다.

    

   

국유본의 목표는 한일수교였다. 이를 위해 빌헬름 2세 망명사태와 같은 CIA를 통한 이승만 하야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를 양쪽으로 압박한다. 즉, 한편으로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지원한다. 해서, 강원룡 같은 이는 국유본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축출할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을 대주지 않는다. 완전고용 구상을 하면 무엇하는가. 돈이 없으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처럼 참패가 자명하다. 돈줄 끊기면 1960년대 김일성처럼 광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폐개혁 실패를 목도한 박정희 정권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다. 서독이다. 서독은 대한민국 정부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요청을 한다. 한푼의 외화가 아쉬운 박정희 정권은 이내 승낙한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앞다투어 지원하는 것과 같다. 미국 병사들이 기피하는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지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존이다.

    

   

예서, 의문을 가져보자. 왜 하필 서독이었을까. 당대 영국,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가 있음에도 대한민국에 차관을 빌려줄 나라는 미국, 서독, 일본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는 오늘날 국유본의 인수합병 시장과 무관할까. 아무나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닌 게다. 기획이 있는 게다.

    

   

하고, 왜 미국은 자금을 대주지 않았는가. 당대 미국 정권은 노예민주당 정권이다. 노예민주당이 박정희 정권을 도와주어서는 그림이 안 나온다. 속으로는 도와주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노예민주당이다. 이렇게 되면, 박정희 정권은 정권대로 더더욱 노예민주당에 의존하게 되고, 야당은 야당대로 노예민주당 노예를 자청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국유본은 미국과 일본 대신 서독을 택한 것이다. 왜? 오늘날 FTA와 비교하면 된다. 미국과의 최종적인 FTA 체결 이전에 유럽과 먼저 FTA를 체결하는 것이다. 이때 FTA 반대단체에서 반대하나? 전혀 안 한다. 혹자는 한국과 유럽간의 FTA는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과 미국간의 FTA도 별 영향이 없다. 인월리는 간단히 말한다. 기획된 것이다. 시나리오인 게다.

    

   

서독광부를 파견하게 하고, 이를 담보로 돈을 꾸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시설, 인프라를 짓는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자들을 내세워 맹렬하게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하게 한다.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이 중도좌파 박정희더러 빨갱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유본은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한일수교를 하게끔 다그치는 것이다. 한편 인월리는 역대 중앙정보부장들에 대해서 체게바라와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한 바 있다. 즉, 체게바라는 쿠바와 무관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런 그가 쿠바혁명에 참가한 것은 국유본과 관계가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김재규 등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이들은 중도좌파 박정희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중도좌파 박정희의 우군이 아니라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박정희를 감시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도좌파 박정희를 훈련시킨 국유본은 60년대말 에베르트 재단을 동아시아에 투입시킨다. 1967년 우선적으로 일본에 에베르트 재단을 파견시킨다. 직후 대한민국에도 지부를 만든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승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오늘날 여의도연구소 안병직이 후진국경제학회를 서울대에서 결성했다는 점이다.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이 박정희에 비판적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인드라는 친일매국수구 민주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http://nahdoo.nayes.net/zb4pl5/view.php?id=pphl&no=6481

    

   

에베르트 재단은 1960년대 말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한국 사무소를 설치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http://www.fes.or.kr/index_kor/kact/kactivities.htm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에 독일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우파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중도좌파 에베르트 재단이다. 세계 최초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승인한 것도 이스라엘 중도좌파 정당 마파이당 정권이었다. 김일성 정권도 박정희 정권의 516사태 소식에 맨 먼저 반응한 것은 남한에 진보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독일에서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좌파 성향의 에베르트 재단이다. 이러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것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친일매국무능 민주당이었던 게다. 이에 대해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재산 환수법 등을 통해 악질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의 재산을 환수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인 쾌거를 보인다. 허나, 이후 국유본은 이를 무효로 하여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승소 결정을 내린다. 이에 고무된 악질 친일매국노 세력이 연달아 반환소송을 내게하는 동인이 되었던 게다. 이에 국유본은 자칫 자신들의 기획이 들통날까 싶어 다른 친일매국노 소송에 대해서는 패소시킨 게다. 아,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과 그 장학생들. 천벌을 받으라. 지옥에 가리라. 독립군들이 용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가 네 놈들 사지를 갈기갈기 사분오열시킬 것이다.

   

     

예서, 인월리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에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왜인가. 이는 당대 국제정세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 역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한 성동격서 작전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전쟁 때와 같다. 당시 국유본은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그처럼 이 시기 베트남 전쟁 역시 한국군이 일당백이었기에 미군 이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 이만명만 동원한다면 베트남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다. 허나, 국유본 목적은 베트남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을 장기화시켜서 무기도 팔아먹고, 냉전체제도 지속하고, 미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게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9324465

    

   

미국은 국유본의 지시로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에도 어떤 논평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푸에블로호에 과민하게 대응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남한은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할 수 없었다. 이 결과로 미국은 보다 오래도록 베트남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국유본 관심사는 베트남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유본이 모두 일으킨 일이차 세계대전보다 한국 전쟁보다 베트남 전쟁을 더 오래도록 끄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하면, 왜 이때 국유본은 독일 재단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상륙시켰던 것일까.

   

   

하나, 대일청구권은 화폐로 지불된 것이 아니다. 기술과 시설투자로 된 것이다. 예서, 왜 국유본은 한일수교를 강제한 것일까. 달러 부족 사태로 야기된 동아시아 방위비 분담 때문이다. 일본은 자력으로 동아시아 방위를 전담할 수 있어야 했다. 국유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일본은 오늘날 필리핀과 같은 경제상황이었을 게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해야 했다. 엔 블록권이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성장을 할수록 한국이 혜택을 입는 것처럼 당시 싸구려 상품 따위나 팔던 일본의 입장도 비슷했다. 하여, 한국은 외자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갖추어야 했다. 독일 재단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둘, 왜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인가. 이전까지 국유본은 남한을 방치했다. 대신 북한을 키웠다. 허나, 박정희 정권 이후로 남한을 유럽의 서독으로 여기게 되었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혁명에 성공한 후 일갈이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반공은 반공이 아니었다? 왜일까. 이에 대해서는 인월리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처음 시나리오는 이렇다. 국유본은 당대 정보통신의 미비로 각국 정치에 대한 자율권을 두었다. 그런 이유로 중도좌파 박정희도 반발할 수 있었다. 그처럼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스탈린 격하가 이루어지자 재빨리 박헌영 등을 숙청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국유본 입장에는 괘씸죄인 게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를 키워서 북한보다 잘 사는 남한을 만들었던 게다. 두 번째 시나리오다. 국유본은 전전 독일과 일본의 예처럼 달러 위기 해소와 베트남 전쟁을 위해 의도적으로 김일성 정권을 고립시켰다. 평양 정권의 박헌영 숙청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이미 기획한 것이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의 아젠다, 선의의 경쟁 역시 박정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 작품이다.

    

   

셋, 한국을 키웠다가 다시 왕따를 시키는 국유본의 전략인가. 지금까지 보았듯 국유본은 키우면 죽인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는 승승장구한 한국경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침체기로 접어든다. 이는 명백히 국유본 전략인 게다. 하면, 인드라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니다. 국유본과 투쟁할 것이다. 국유본의 앞잡이, 친일매국수구세력과 싸울 것이다. 하여, 국유본의 기획을 수정하거나 폐기토록 할 것이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105235670

   

   

   

   

   

3. 이병철의 동경선언이 있기 전까지의 한국 반도체 역사 

   

   

보통 한국 반도체 역사, 삼성 반도체 역사를 일본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인드라는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한다.  

   

   

"[이재구코너]왜 우리는 반도체산업을 해야하는가?

1983년 3월15일 이병철 삼성회장 반도체사업 선언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jklee@zdnet.co.kr 2011.03.28 / PM 00:06 

 

한국에 반도체 씨앗을 뿌린 사나이

    

   

"그렇다 한국으로 이 기술을 갖고 가서 전세계를 놀라게 하는 거다. 나 혼자 할수 있다. 한국에서 알아줄 사람이 없는 게 문제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1972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서니베일의 한 작은 모텔.  

38세의 한 한국인이 서울에서 온 인사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최고의 반도체 생산회사 모토로라에서 생산책임자를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모두 169만달러가 필요하지만 우선 해 봅시다." 

 

강기동박사는 60년대말 세계최고의 반도체 기술력을 갖고 있었던 모토로라반도체사업부의 생산부장이었다. 오하이오대 반도체연구소장시절.

그는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반도체로 학위를 딴 강기동박사였다. 그리고 그의 손님은 17년 전 서울에서 함께 한국아마추어연맹(KARL)을 창설한 멤버이자 서울에서 켐코(KEMKO)란 대규모 통신장비수입상을 하던 김규한사장이었다.  

강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NPN시리즈,PNP시리즈 반도체를 미 반도체 업계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실력자였다.

사막도시 피닉스에 있는 모토로라는 일본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반도체기술회사였다. 강박사는 최고책임자 레스터 호간, 연구소장 I.A. 레스크과 함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공대(MIT)물리학과교수 출신인 레스터 호간은 10년간 정들었던 모토로라 총 책임자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가 이른 바 8인의 핵심 엔지니어를 끌고 실리콘밸리의 꽃 페어차일드로 떠난데 이어 강기동도 독립을 결심하게 된다.  

호간박사의 페어차일드행은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떠들썩했다. 모토로라는 페어차일드를 영업비밀 유출 등의 혐의로 제소했다.  

이런 과정에서 강기동의 한국행 결심도 굳어졌다. 그는 서니베일 스튜어트 드라이브 1010번지에 ICII(Integrated Circuit International Inc.)를 세웠다. 여기서 기술 및 지분 투자 50%를, 나머지는 김규한사장이 투자하기로 했다.  

세계최고를 이식하려 했던 개척자의 불운

   

"내가 근무하던 모토로라 공장하고 똑같이 설계해 달라구."

강기동박사는 자신이 다녔던 오하이오대 건축과의 한국인 동문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여기서 손목시계용 IC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는 당시 최고기술인 이른바 C-MOS(상보성 금속산화물 반도체)라는 기술로 손목시계용 칩을 만들기로 했다. MOS는 저 유명한 IC의 아버진 잭 킬비와 밥 노이스가 개발한 집적회로(IC)의 전력소모를 크게 줄인 첨단기술이었다. 이를 개발한 사람역시 오하이오주립대 출신인 그의 선배인 강대원 박사였다.  

하지만 그는 표면상으로는 '기술지원' 책임자로만 활약해야 했다. 반도체 기술은 냉전시절 미국의 최첨단 기술이었고 모토로라 출신인 그가 대외로 유출하면 안됐다. 1974년 1월26일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내리(현재의 부천시)에서 한국반도체란 회사가 문을 열었다. 김규한켐코사장과 강기동박사가 총 100만달러로 설립했다.  

그가 설계한 공장은 3인치웨이퍼를 가공해 칩을 만들고 테스트하는 진짜 반도체 공장이었다. 당시 한국에 진출한 외국반도체업체들은 반도체제작의 마지막 공정인 금속 캔을 씌우는 임가공 공장에 그쳤다.  

강박사가 만들려는 LSI칩을 사용하면 디지털 전자시계에 숫자로 시간이 표시됐다. 일반인들도 좋아했다. 그는 빨간불로 숫자를 표시하는 디지털 손목시계용 CMOS회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74년 한국최초의 반도체 한국반도체 부천공장.

   

하지만 빠듯하게 100만달러로 창업한 것이 무리였다. 당시 미,일 반도체 팹공정 설립비용의 10%에 불과했다. 게다가 1973년 발발한 중동전과 제 1차 석유파동으로 모든 장비, 자재값은 치솟았다. 

자금부족으로 쪼들리던 시달리던 한국반도체는 10월 4일 간신히 준공을 하지만 모든 일정이 당초계획과 어긋나기만 했다. 

제품 생산 때까지 자금을 지원키로 했던 후원자의 약속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해 12월 4일 한국반도체가 부도났다.이틀 후 이건희 동양방송이사가 한국지분을 50만달러(4억원)에 인수했다. 강박사가 기술을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하이테크산업의 매운맛을 보다.

   

강기동 박사는 어떻게든 자신이 시작한 반도체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1975년 9월 1일 그는 6기능 LED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인 KS-5001 개발에 성공했다. 후일 삼성이 1메가D램을 만들때 고심하던 CMOS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6~8달러선인 이 칩 가격은 수요확대에 따른 공급부족으로 24시간 풀가동에도 주문이 쇄도했다. 양산개시 3개월 만에 월간 손익에서 흑자전환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전자시계는 전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었다. 칩은 성공했다. 정부는 삼성시계와 관련업계로 하여금 시계산업을 스위스 수준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도체의 개발과 생산, 그리고 판매 가격 사이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강박사는 걱정스러웠다.  

 

74년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내부의 작업 모습. 오늘날의 반도체공장을 보는 듯 하다.

   

"새로 나오는 하이테크 제품은 반짝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또 장래가 좋은 경우는 후발업체가 시장장악을 위해 가격 덤핑을 할 수 있어 예측할 수 없는 게 하이테크시장이다. 하이테크 실력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주위환경에 대처해서 제품을 선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파견 일부 경영진과 강박사 간에 견해차가 발생했고 강박사는 1976년 여름 한국반도체를 떠났다. 이 해 CMOS 시계칩은 수출실적 418만4989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반도체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TR과 TV용 IC 양산에 눈을 돌렸다. 결과는 참패였다. 일본반도체업체들이 값싼 제품을 쏟아냈다. 국산화가 무색해졌다. 강박사의 걱정은 불행히도 맞아 떨어졌다.  

"앞으로는 김광호 이사가 책임을 맡는다. 김이사로도 살리지 못하면 더 이상 반도체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

1979년 9월. 강진구사장은 컬러TV 담당인 김광호이사에게 특명을 내렸다.  

그의 선택은 디지털 시계용 칩이었다. 일본 오키가 가격을 치고 나왔지만 단순형 시계칩으로 경쟁을 따돌렸다. 2년후 김이사는 컬러TV용 색신호IC를 국산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으론 뭔가 부족했다. 

일본경제의 대부가 들려준 '경박단소화'산업

   

1980년 이른 봄. 삼성물산 가스미가세키(霞ケ)빌딩 사무실. 도쿄를 방문중인 이병철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 아래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73년과 79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리는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의 위기가 주제였다. 이병철회장이 이나바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우주 해양공학 등 성(省)자원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지요. 일본 정부도 이를 적극 뒷받침해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외화수입은 급증했습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있습니다." 

이나바 박사가 들려준 당시 일본 산업의 일대 방향전환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이회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2년 5월. 72세의 노기업가는 미일 전문가를 비롯한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는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반도체시장 조사를 해 오시오

   

"기존 반도체사업에 대한 전면 검토와 반도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 철저한 시장 조사 및 사업성 분석작업 결과를 가져 오시오." 

1982년 9월. 이병철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따라 반도체사업부는 삼성그룹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바쁜 사업부가 되었다. 추진팀장은 당시 반도체사업본부장이었던 김광호 상무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해외지사를 통해 최신 반도체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경영성과를 되짚어 나갔다. 

1982년 10월 반도체사업추진팀은 이회장에게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냈다. 그는 이 회장은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보고서를 읽던 이 회장은 메모리란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메모리를 중심으로 사업계획서를 다시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이 회장은 첨단 반도체 중에서 일본이 미국보다 유일하게 앞선 분야가 메모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D램, S램, EP,EEP롬 등 다양한 메모리를 수출하고 있었다. 메모리반도체는 당시 세계 시장규모가 30억1천800만달러로 전체반도체 시장의 20.8%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모리중에서도 어떤 제품을 주력으로 삼을지가 과제였다.  

반도체사업추진팀은 국내외에서 입수한 자료, 전문가 자문결과를 바탕으로 시장규모, 경쟁력, 생산효과, 향후 전망 등을 종합검토한 끝에 S램과 EEP롬으로 결정했다. 

D램은 시장규모가 가장 크지만 미국 일본 업체들간의 경쟁이 어느 제품보다 치열하고 공급과잉에 따른 급속한 가력하락이 예상돼 처음엔 검토 대상에서 빠졌다. 후발 시장진입자인 삼성이 미국 ,일본과 가격경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회장과 반도체사업팀은 결국 D램위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치열한 경쟁이 있을지라도 생산 효과가 뛰어나고 시장규모가 가장 큰 D램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일본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까

   

"과연 D램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병철 회장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음에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사업은 최소한 1억달러(1천억원)부터 시작해서 10억달러까지 퍼부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너무나도 위험한 모험이었다. 정부의 한해 예산이 22억달러 아닌가.

또 자금을 조달한다 해도 이 첨단산업을 이끌어 성공시킬 전문인력도 없지 않은가? 

이 회장과 삼성전자 경영진은 고심끝에 아이디어를 짜냈다.

"미국에는 숨어있는 한인 과학자들이 많을 것이다.한국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발휘한 만한 곳을 찾지 못해 미국에 주저앉아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 고급 브레인을 한곳에 모아 반도체를 연구시켜 개발된 것을 국내에 들여와 양산하도록 하자." 

삼성은 GE와 IBM을 거쳐 샤프사의 고문으로 있던 스탠포드대 전자공학과 출신 이임성 박사, 인텔을 거쳐 내셔널세미컨덕터에서 64KD램 개발담당 부장을 거친 이일복박사, 자일로그에서 반도체 공정개발을 맡던 미네소타대 출신 이상준 박사, 인터실과 사이너텍에서 C-MOS 제조수율 개선에 성공한 이종길 박사 등 32명을 이듬해까지 확보했다.  

1983년 1월 9일. 이회장은 마지막으로 6명의 출장팀을 실리콘밸리 서니베일로 파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급변하는 반도체 본고장의 현황과 정보를 바탕으로 최첨단 반도체 신규사업계획이 만들어졌다.  

'1983년 초부터 VLSI(초거대집적회로)대량생산 공장 건설 착수. 향후 5년간 시설투자 4천400억원, 연구개발비 1천억원을 투입해 첨단기억소자와 마이크로 프로세서개발....2미크론의 미세가공기술 및 5인치 웨이퍼처리 설비로 256KD램을 생산...VLSI의 경우 미국 현지법인을 통해 미국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유럽시장까지 확대한다....' 

이로써 이 회장이 구상하는 삼성반도체의 투자계획과 밑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과연 미국, 일본과 싸워 이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극도로 짧은 제품 사이클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도쿄의 밤

   

83년 2월 7일 밤.도쿄 오쿠라(大倉)호텔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회장은 그동안의 구상을 정리하며 최종적으로 반도체 신규투자에 대한 결심을 굳히려 하고 있었다.  

 

사운을 건 반도체산업에의 도전으로 한국의 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단숨에 끌어올린 고 이병철 회장.

며칠 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피곤해진 그의 얼굴에서 평소 단아하던 삼성제국 총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호텔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햄릿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삼성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사안이었다.  

"과연 D램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나바 박사와의 대화에서 나온 '경박단소''첨단' 같은 말들이 맴돌았다.

이회장은 1년간에 걸친 철저한 기초조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연구와 검토를 거치고도 고민하던 삼성제국의 운명을 가늠할 결단을 내렸다.  

"반도체 사업에 투자한다." 

이날 밤도 꼬박 세운 이 노사업가는 날이 밝아오자 마침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2월 8일 아침.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은 마침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네 회장님..."

국제전화 내용은 반도체와 관련한 것이었다.  

"호암(이병철의 호)께서 말씀하시길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를 할 테니 이 사실을 내외에 공포해 달라시네."

전화를 마친 홍진기 중앙일보 동양방송회장이 강진구 삼성전자사장에게 말했다.  

"다음 번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마침내 반도체 사업이 선정되었구나..." 

강사장은 이병철 회장이 다음 번 신규사업을 심각하게 물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통화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우리는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 아래서 삼성은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도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그것만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제2의 도약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여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반도체산업을 그 자체로서도 성장성이 클 뿐아니라 타 산업으로의 파급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 집약적인 고부가 산업이다. 이러한 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1983년 3월15일 삼성그룹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그룹 발표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병철회장의 결단에 대해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을 비롯한 국내외 산업계의 반발은 거셌다.  

그 중에서도 일본 미쯔비시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가지 이유가 가장 그럴 듯 했다.  

"반도체사업은 기본적인 내수가 있어야 하는데 고작 GNP 600달러정도인 한국에 기본적 수요가 생길 리 없다. 그런 만큼 전량 수출에 의존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나라가 (가전품도 제대로 못만드는 후진국)한국의 반도체를 사겠는가?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훨씬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데 이들의 기술이전도 받지 못한 삼성이 이를 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또 총매출액이 1억달러도 안되는 삼성이 투자비만 10억달러가 넘는 반도체사업 투자비를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전기와 물이 1년 내내 단 1초도 끊기지 않아야 하는데 한국의 산업기반은 반도체사업을 시작하기엔 너무 취약하다."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삼성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계반도체역사의 기적을 연출했다.삼성창업자 이병철회장이 반도체선언 이래 8년만에 메모리정상에 올랐고 1위 인텔을 맹렬히 추격중이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반도체 선언 1년 째가 되는 84년 3월말까지 64KD램의 양산 제1라인을 완성키로 하고 완성시한에서 역산해 모든 일의 진행계획을 짜 놓았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 진척상황은 확인한다. 그는 모든 장애를 돌파할 준비를 끝내 놓았다.  

6개월만에 성공한 64KD램 개발  

반도체선언으로부터 6개월 여가 지난 83년 12월1일.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상공부와 과학기술처기자들이 모였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D램을 개발했습니다....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습니다. 미국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반도체 기술격차를 4년 정도로 좁히는데 성공했습니다." 

강사장의 발표를 들은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6개월만에 미,일 첨단반도체 회사들의 주력제품을 개발해 냈다니..."  

 

삼성은 반도체 선언 6개월만인 1983년 12월 선진국들이 당시 한창 생산하고 있던 64KD램 개발 성공을 발표했다. 세계 반도체 업계를 경악시킨 대사건이었다.

64KD램은 칩속에 6만4천개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손톱만한 칩 속에 약 8천자를 저장할 수 있었다. 미국,일본에서도 6년 이상 걸린 칩이었다. 일본의 6개 반도체 회사가 80년 이전부터 개발, 80년부터 이 칩을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외신을 접한 미일반도체업체들도 경악했다.  

하지만 이들은 삼성이 보내온 샘플을 시험해 보고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반도체였다.  

성공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 회장의 결단력과 추진력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74년 이래 부천공장에서 축적해 온 조립기술에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미 아이다호주에 소재한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삼성의 기술제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저가 반도체공세에 재정압박을 받던 마이크론이 삼성의 로열티제안에 마음을 움직였다.  

삼성은 이 해 6월17일 마이크론과 정식계약을 하고 64KD램 설계도와 3500개의 칩을 받았다. 개발팀은 부천 한국반도체 시절부터 닦아온 개발역량을 바탕으로 설계도를 바탕으로 조립 시험생산에 들어갔다. 40일만에 생산수율을 일본수준인 92%까지 끌어 올렸다. 309가지에 이르는 공정기술과 검사조립기술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듬해 5월 "6개월 안에 완공하라"는 이회장의 엄명을 받은 성평건 공장장은 2년 이상 걸리는 반도체 생산라인을 기한 안에 완공했다. 이 또한 말그대로 기적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개발,생산된 64KD램은 오늘날 세계적 반도체 회사 삼성전자의 성장 초석이 됐다.  

세계 D램 반도체시장을 제패하다

   

 

삼성은 1992년 일본을 제치고세계 D램 1위에 오른다. 이후 단 한 차례도 1위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삼성의 반도체선언 10년 만인 1993년 5월 미국 데이터퀘스트사가 반갑고도 놀라운 소식을 전해 왔다.  

'1992년 반도체시장 분석 결과 D램 분야에서 삼성이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 메이커로 올라섰다.' 

우리나라의 메모리반도체 산업이 드디어 일본을 제친 것이다. 이미 92년 9월25일에 세계최초의 64메가D램을 개발해 내 전세계를 또한번 놀라게 한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삼성의 64메가D램 개발은 곧바로 반도체 업계의 순위 변동으로 이어졌다. 삼성의 매출액은 11억9200만달러, 세계시장 점유율은 13.5%였다. 도시바의 11억2300만달러, 12.8%를 넘어서는 실적이었다.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놓고 간 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가 그의 타계 5년 만에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64KD램 개발이후 한때 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후계 이건희회장의 일관된 투자결단과 리더십 아래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기술적으로는 진대제박사의 16메가D램, 권오현박사의 64MD램. 이후 황창규박사가 256메가D램이후 세계최초로 이어가면서 반도체코리아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시장도 도왔다. 84~85년 반도체 불황이 86년 246KD램 호황,88년 1MD램호황으로 이어졌고 95년 윈도OS 특수로 이어졌다. IMF쇼크라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4년 이래 플래시메모리, 2009,2010년 애플호황 등으로 메모리왕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92년 이후 삼성은 D램 시장에서 단한차례도 1등자리를 내주지 않고 독주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업계 점유율 30~4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반도체선언 이래 30년 가까운 지금 삼성은 기술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정상 자리를 확보하는 한편 고 이병철 회장이 예견했던 '천문학적 수익'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다.

   

기흥캠퍼스 16라인 기공...세계 반도체 1위 노리다

   

2010년 5월 17일. 이건희 삼성전자회장이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의 첫삽을 떴다. 세계최대 반도체 단지를 만들기 위한 웅대한 그림이다.

"지금 세계 경제가 불확실하고 경영 여건 변화도 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런 시기에 투자를 더 늘리고 인력도 많이 뽑아 글로벌 사업기회를 선점해야 그룹 성장 기회가 오고 경제가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치사가 이어졌다.  

사실 이 날은 꼭 27년 전인 1984년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64KD램 1라인 생산공장 준공식을 가진 바로 그날이었다. 이건희회장의 치사는 마치 83년 3월 15일 발표된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하는가'라는 반도체선언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2010년 5월17일 삼성 나노시티 16라인 기공식이 열렸다. 이날은 지난1984년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선언 6개월만에 기적적 공기단축으로 반도체1라인(64KD램)을 준공한 날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사상 최대 액수인 26조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고 성장동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그 석달 후인 8월 25일 미국의시장조사 업체인 IC인사이츠의 보고서는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화제를 몰고 왔다.

지난 1999년부터 10년간 반도체 산업분석에 근거해 내놓은 예측 보고서 내용은 이랬다.  

'2014년, 삼성전자가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설 것이다.' 

그 근거는 매출액 성장률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가 연평균 13.5%의 고속 성장세를 구가한 반면에 인텔은 3.4%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 활황을 발판 삼아 D램 시장에서 높은 성장세를 보였으나 인텔은 모바일로 변하는 최근 컴퓨팅 시장의 움직임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해 성장세가 늦어졌다"는 게 IC인사이츠의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24년 간 삼성을 지휘해 오면서 변화,위기,혁신을 강조해 온 이건희회장과 삼성전자반도체사업부의 당초 계획보다도 늦은 것이다. 이미 지난 2005년 세계 1위를 결의했을 때 2012년 인텔을 뛰어넘는 것으로 되어있었기에. 따라서 아직도 배고픈 반도체 강자 삼성은 더 박차를 가할지 모른다.  

2010년 결산 결과 삼성전자 매출은 154조원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사업부 매출은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단연 돋보였다. 삼성전자 총 영업이익의 58%인 10조원이 반도체에서 나왔다.  

그룹의 운명을 건 도전과 결단으로 산업 보국을 내세운 기업가의 뜻은 변함없이 이어져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결정은 위대했다.

"

http://www.zdnet.co.kr/column/column_view.asp?artice_id=20110328005714

   

   

기사 내용 핵심을 정리한다.

   

하나,  한국에서 반도체는 노비네파(역사적으로 이 시기에는 노비네파가 존재하지 않았던 빅터 로스차일드 시기지만, 편의상 노비네파로 한다) 모토롤라에서 일한 강기동 박사로부터 시작한다. 모토로라는 일본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반도체기술회사였다. 예서, 강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NPN시리즈,PNP시리즈 반도체를 미 반도체 업계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실력자였다.

   

둘, 강박사는 함께 일하던 레스터 호간이 독립하자 자신도 통신장비 수입상 김규한과 손잡고 독립할 생각으로 한국행을 한다. 

   

셋, 레스터 호간이 영업 비밀 유출 혐의로 모토롤라에 제소당했다. 해서, 겉으로 기술 지원만 하는 식으로 투자했다. 디지털 시계 칩부터 만들었는데, 당시 세계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금난에 봉착하자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흡수했다. 

   

예서, 국유본론적 접근으로 상기한 기사를 분석한다. 

   

일본 전자산업이나 한국 전자산업이나 갑자기 큰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은 한국에 기생하는 쪽발민주당과 같은 쪽바리 색희들 때문에 일본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무엇이든지 일본이 다 만든 것으로 안다. 허나, 일본 역시 미국을 카피해서 오늘날 이른 것이다.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일본의 전자산업이 없다. 트랜지스터 등을 누가 만들었나? 일본이 만들었나? 아니다.  

   

   

일본의 9대 전자산업 기업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4&dirId=409&docId=404054&qb=7IOk7ZSEIOyCsOyalCDsgrzshLEg67CY64+E7LK0&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ZZpf35Y7tlssak7fYGssc--092215&sid=UEEpS3LRQFAAAFbLGr0

   

일본 전자산업 역시 삼성전자처럼 국유본 기획과 필요에 따라 국유본이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고 키운 것이다. 예서, 강기동 박사가 뜨는데, 국유본이 당대 매우 중요한 과학기술인 반도체 기술을 허투르게 관리했을 것 같은가? 강기동 박사의 동선을 모두 읽었으나 묵인한 것이다. 기술 지원만 했다고 국유본과 미국이 모른다고? 훗! 전자제품 만들면 그 이력 다 나오는데? 물론 필요하면, 나중에 특허 소송 같은 걸 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하고, 이 시기가 1972년에서 1974년이다. 1974년 1월26일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내리(현재의 부천시)에서 한국반도체란 회사가 문을 열었다. 김규한켐코사장과 강기동박사가 총 100만달러로 설립했다.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넘어간 것이 1973년이다. 이 시기 전후로 해서 세계사에 중요한 일이 상당히 일어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소련 모스크바와 미국 워싱턴을 양날개로 하는 세계체제였다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유럽 런던과 일본 동경을 좌우 날개로 하는 세계체제를 지향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지위가 상승하였고, 일본 지위 향상 만큼 토대가 될 일본 경제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를 시켜야 했다. 일본 지위가 상승하자 그만큼 엔블록권에 있던 하청회사 격이었던 한국도 일부 산업에서 독립을 허가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베트남 파병 취소 결정을 포함한 박정희 정권의 열성적인 경제개발 의지가 촉매 역할을 했다. 

 

헌데, 삼성은 박정희 정권의 역할을 축소하고, 이병철의 의지로만 설명한다. 이는 오늘날 국유본이 박정희를 많이 비판하니 이해할만한 일이지만, 속으로까지 박정희 은혜를 부정하면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삼성 설명으로는 1970년대 시기 디지탈 시계 산업에서 많은 곤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 정부관계자도 어렵다고 말렸다는 것이다. 그걸 이병철이 뚝심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사실인가? 

   

   

"1979년 9월, 수원공장에 있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강진구 사장이 호출을 하셨어요. 서둘러 사장실로 갔더니 비서 말이 이병철 회장님을 만나러 급히 나가셨다는 거예요. 마냥 기다리는데 한참 뒤 강 사장이 돌아와서 '이건희 부회장께서 인수한 한국반도체로 가야겠다. 회장님의 지시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는 1964년 동양방송(TBC)에 입사, 탁월한 엔지니어 감각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1969년 삼성전자 TV생산부장으로 발탁되었다. 1978년에는 TV 사업부 이사를 맡았다. 그는 반도체 사업을 처음 맡았던 그때를 회고하며 "아주 당혹스러웠죠"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 사업부문(한국반도체)은 삼성 내에서도 "아오지 탄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험지 중의 험지로 꼽혔다. 

   

-임원들이 가길 꺼리는 이유는 뭡니까

   

"그때만 해도 '반도체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라는 인식이 팽배했어요. 기술·인력·자금 등 사업을 할 만한 토대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성과가 나오겠어요."

당시 이 회장은 매주 목요일 열리던 삼성 사장단 회의에 수시로 그를 불러 반도체 사업의 진행 과정을 하나하나 챙겼다.

NEC는 커졌는데 우리는 왜?

   

-이 회장께서 주로 무엇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일본 NEC와의 비교였습니다. 회장님은 'NEC도 삼성과 똑같이 1974년에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서 크게 성장했는데, 우리는 왜 이 모양이냐'며 언성을 높이시곤 했어요. 어느 날 회장님이 또다시 NEC와 삼성을 비교하면서 야단을 치시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가면 반도체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회장님께서 1974년에 지금처럼 반도체에 관심을 가지셨더라면 우리는 NEC보다 더 커졌을 겁니다.' 그랬더니 회장님이 '알았다'고 짧게 대답하시곤 화제를 돌리셨어요. 그 뒤로 다시는 삼성과 NEC를 비교하지 않으셨어요."

http://blog.daum.net/haj4062/15726146

   

김광호는 삼성반도체를 키운 핵심 인물이다. 김광호에 따르면, 이병철이 반도체에 본격 관심을 가진 것은 1970년대가 아니라 1980년대부터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 관심을 가진 것은 이건희였다. 이건희가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을 사들였다 하니까.  

   

이러한 결정이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후계자를 물려줄 결심을 하게 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한국반도체는 매우 전도유명한 기업이었으나, 석유파동으로 자금난에 빠진다. 알짜 우량기업이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빠질 때, 혜안으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사업가적 안목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해서 늘 적자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허나, 이는 한 순간이어서 자본, 인맥, 정보 모든 면에서 딸리는 삼성이 경쟁업체들에 밀리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이 시기 데이비드 록펠러와 박정희 정권의 갈등이었다. 박정희 유신정권 후반은 뉴라이트와 빅터 로스차일드 대결이 한반도에서 대리전 양상으로 치루어지는 형국이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박정희더러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박정희는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인연을 더 중시했다. 이 결과로 이 시기 한국 산업들이 상당히 어려웠다. 해서, 1970년대 후반 과잉생산 논의도 나오는 것이다. 허나, 이를 국내적,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오류인 게다. 인드라의 국유본론은 사태를 정치경제적, 특히 국제적으로 고찰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고 말한다. 해서, 석유 파동 영향도 있지만, 데이비드 록펠러가 암묵적으로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 진출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훼방놓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시기 힘겹게 데이비드 록펠러와 투쟁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삼성 반도체 사업을 지원했다. 디지털 시계가 세계 일등 상품이 되도록 모든 지원과 혜택을 주었던 것이다. 

   

허나, 박정희 정권의 노력에도 이 시기 삼성 반도체 사업은 지지부진하여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예서, 삼성 이병철이 사업을 접을 수도 있었는데, 왜 접지 않았을까?  박정희 정권이 그만큼 뒷받침해서인 게다. 이 시기 박정희 정권은 외환과 금융을 통제한 사회주의 정권이었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해서, 삼성이 망할 정도로 위기가 와도 박정희 정권이 결심하면 그 뒷감당 정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삼성의 박정희 인맥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분명한 것은 이 시기 이병철은 그다지 반도체 산업에 큰 열의가 없었다는 것이고, 반면 후계자 이건희는 이병철을 끊임없이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박정희가 기간산업을 키운다는 야망으로 이건희에게 명령했을 것이다. 

   

- 임자, 하면 된다. 죽어도 거기서 죽어!

   

강박사가 삼성을 떠났다. 이는 공학기술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이더라도 빠른 과학기술 속도로 말미암아 이전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해서, 황의 법칙, 이런 것도 나오는 게 아닌가. 기계공학과 출신 인드라로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인문계열은 고전이 최고다, 하면서 옛날 성현 말씀만 반복해서 외우고, 또 외우면 되지만, 공학은 다르다.  

   

해서, 인드라가 기계공학 출신이어서 국유본 관심을 받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단지 기계공학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인문과 공학을 경제적 관점에서 균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요즘 뉴욕 금융업의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삼성과 산요의 관계다. 혹자는 반도체 역사에서 산요를 말하나, 삼성과 산요는 반도체에서 별 관계가 없다. 삼성과 산요의 관계는 일시적이었다. 삼성은 삼성과 마찬가지로 노비네파인 동시에 당시 가전산업을 주도하던 엘지와 상대하기 위해 산요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허나, 산요는 잔가지였다. 훗날 이병철이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에 투자할 때도 손잡은 건 산요의 경쟁사인 샤프였다. 또한, 산요는 훗날 골드만삭스, 다이와, 미쓰이 그룹 등 노비네골드만연합에게 인수되었다가 파나소닉(구 마쓰시다)에 최종 인수되었다.

   

이 시기 흥미로운 것은 골드만파 골드만삭스가 삼성이 산요 인수할 것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삼성이나 GE나 모두 노비네파이다. 산요나 파나소닉, 미쓰이 모두 노비네파이다.

   

   

산요 품에 안은 파나소닉, 한국서 ´신고식´

4월 1일 본사 및 각 해외법인 통합 출범

박영국 기자 (24pyk@ebn.co.kr) l 2011-03-08 13:35:48

   

산요 인수를 통해 일본 최대 전자기업으로 등극한 파나소닉이 오는 4월 1일 통합 법인으로 공식 출범한다. 일본 본사 합병과 함께 양측의 해외 법인도 이날 통합 법인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파나소닉의 한국 법인인 파나소닉코리아는 오는 9일 한국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산요코리아 흡수합병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파나소닉의 산요 흡수합병은 ´일본 전자기업의 전성시대´ 마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80~90년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등을 앞세워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전자제품 시장을 주름잡던 소니, 아이와, 파나소닉, 산요 등 일본의 주요 전자기업들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된 것.

   

특히, 산요의 대주주였던 골드만삭스와 다이와증권이 한때 인수 기업으로 한국의 삼성전자 등을 거론했던 점을 감안하면 산요의 몰락은 ´일본 전자산업의 굴욕´으로 기록될 뻔했다.

   

산요, 60년만에 파나소닉 품으로

산요를 품에 안게 된 파나소닉은 역사적으로 산요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기업이다. 파나소닉과 산요는 같은 뿌리에서 태동된 기업이기 때문이다.

   

   

1947년 마쯔시타전공(현 파나소닉전공) 창업자인 마쯔시타 고우노스케(松下幸之助)의 처남 이우에 토시오(井植歲男)가 마쓰시타전공으로부터 공장을 양도받아 설립한 기업이 바로 산요전기다. 이 회사는 3년 뒤인 1950년 산요전기주식회사로 출범했다.

   

이후 두 회사는 각자의 길을 걸어오다 마쯔시다는 지난 2008년 10월 파나소닉으로 사명을 바꿨고, 같은 해 11월 파나소닉이 산요전기 인수를 발표하면서 두 기업의 합병 추진이 시작됐다. 60여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 배경으로는 2008년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경영환경 악화´가 거론되고 있지만 사실 산요의 경영 악화는 지난 2004년부터 문제시됐었다.

   

다수의 일본 전자기업들이 제각기 세계 시장에서 ´선전´했던 전성기가 지나고,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후발 기업들에 시장을 잠식당하면서 합종연횡을 통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일본 전자기업들을 정리할 상황이 오게 된 것.

   

경영 악화를 견디지 못한 산요는 지난 2006년 3월 미쯔이스미토모(三井住友)은행, 골드만삭스, 다이와(大和)증권SMBC 등 금융 3사를 인수처로 총 3천억엔의 우선주를 발행했다.

   

당시 산요 관계자는 "사업 확장으로 경영위기에 빠졌고, 증자하지 않으면 회사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해 위기 상황임을 시사했다.

   

우선주 발행 직전, 20여년간에 걸쳐 사장과 회장직을 역임한 최고고문 이우에 사토시(井植敏)는 다른 증권회사 한 곳을 인수처로 삼고 3천억엔의 전환사채를 발행을 계획, 2월 열린 임시 이사회에서 제안했지만, 산요는 이미 우선주 발행을 결정한 상태였다.

   

이후 대주주 3사를 중심으로 구조조정 등 경영 정상화를 추진해 왔고, 지난 3월말 결산에서는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나, 2008년 전세계를 휩쓴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결국 파나소닉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파나소닉으로의 피인수 움직임이 감지된 것은 지난 2008년 7월부터였다.

   

후지산케이에 따르면, 산요전기 창업자의 손자이자 전 사장인 이우에 토시마사(井植敏雅, 현 특별고문)는 당시 주위 인물들에게 "은행과 마쯔시타(파나소닉)가 무언가 하고 있다"면서 "빠르면 가을에 움직일 것"이라는 언질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07년 4월 1일부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경영진으로부터 상담이나 보고를 받을 일은 없었으나, 보통주 환산 발행 주식의 약 70%에 해당하는 우선주를 보유한 대주주인 금융 3사의 양도 제한 만료 시한이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조만간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임을 직감한 것.

   

실제, 대주주 3사는 ´미국발 금융위기´이후 산요에 안면을 바꿨다.

   

골드만삭스나 다이와증권이 이익을 내다볼 수 있을 때 산요주를 팔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치면서 산요와 주주간의 의사소통은 차단되기 시작됐다.

   

매각처로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삼성전자 등이 거론됐지만, 기술의 해외 유출을 우려한 일본 경제산업성이 난색을 표명, 보류됐다.

   

결국, 산요의 ´아버지´ 격인 파나소닉이 다시 산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밑그림이 그려졌다.

   

인수금액, 리튬이온전지 독점문제 ´난관´

물론, 인수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장 대주주들과의 인수 금액 조율이 큰 문제였고, 각국 정부의 독점금지 조항도 피해가야 했다.

   

산요의 대주주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과 골드만삭스, 다이와증권SMBC 등 금융 3사는 우선주 49.78%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보통주로 전환하면 의결권의 70%에 달했다.

   

파나소닉은 이들의 보유 지분을 주식공개매수(TOB) 방식으로 인수할 방침이었으나 파나소닉이 제안한 매수가격은 주당 120엔(약1천600원), 금융 3사의 매각 의향 금액은 주당 250엔으로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3천789억6천만엔의 적자를 낸 파나소닉으로서는 총액 6천만엔에 육박하는 인수 금액 마련은 무리였다.

   

한달여 간의 협상 끝에 파나소닉은 산요의 자산사정과 양사의 사업이 조화를 이루며 발생할 상승효과 등을 감안, 기존 제시액보다 10엔가량 높은 주당 130엔 전후의 매입가격을 제시했고, 대주주들 중 파나소닉과의 협상에 가장 부정적이던 골드만삭스 역시 금융위기로 인한 자금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당 131엔으로 합의했다.

   

인수 금액 합의 시점은 2008년 12월이었으나,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미국과 EU, 중국 등 주요 국가에서의 독점금지 조항과 관련된 것으로, 양사가 보유한 리튬이온전지 사업의 높은 점유율이 문제였다. 이 시장에서 산요는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었고, 파나소닉 역시 5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파나소닉은 배터리 공장 한 곳을 처분하는 조건으로 미국과 EU, 중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인수 합의가 이뤄진 지 1년 만인 2009년 12월 산요 지분 50.2%의 공개 매수를 완료했다.

   

지난해에는 산요와 함께 지난 2004년 자회사로 편입한 파나소닉전공의 지분 100%를 인수하며 완전 자회사화했다.

   

난립된 日전자기업 합종연횡 신호탄?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는 단순히 ´경영악화로 흔들리던 기업의 피인수´라기보다는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계 재편´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이 보유한 전기전자관련 대기업은 9사에 달하며, 이들 대부분이 TV나 냉장고 등 범용화된 가전제품을 일률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내수시장이 포화상태가 되고 있는데다 해외시장도 삼성전자 등에게 점차 점유율을 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해외 매출 비중이 5%에도 못 미치는 파나소닉으로서는 포화된 내수시장을 벗어나 해외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 확보와 주력 사업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이 필수였다.

   

이번 완전 자회사화를 통해 파나소닉은 산요의 최고 강점인 2차전지분야와 파나소닉전공의 주택설비기기를 사업의 핵심으로 삼고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우선 산요의 백색가전(냉장고, 세탁기 등) 사업 등 채산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매각하거나 중단하고, 리튬이온배터리나 태양전지사업을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한때 가전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으나, 지금은 한국과 중국 업체들에 밀려 사양길을 걷고 있는 가전 분야를 축소하고 경영통합을 통해 신성장사업에 경영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것.

   

이같은 파나소닉의 움직임은 앞으로 일본 전자업계 재편의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해외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간 합병을 통해 성장성이 있는 사업은 규모를 확대하고 부실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8년 일본 빅터(Victor)와 KENWOOD가 경영통합을 단행한 바 있으며, LCD 패널과 반도체 사업에 대한 사업 제휴가 추진되는 등 일본 전자기업 내 구조조정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 최초의 대형 전자기업간 합병으로 기록된 파나소닉의 산요 인수는 구조조정을 망설이고 있는 일본 내 다른 전자기업들에게 좋은 참고사례가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http://www.ebn.co.kr/news/n_view.html?id=483918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삼성에 있어 핵심적 기업은 미쓰이다. 삼성과 미쓰이는 노비네파이다. 미쓰이는 미쯔비시와 더불어 일본 양대 재벌이다. 예서, 삼성이 단지 일본과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이다. 아니다. 국유본 기획인 게다.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니, 쪽발민주당 정신병자 색희들이 멘붕이 오는 것이다. 쪽발놈현 병쉰색희가 김영삼에게 쪼르르 달려가 쪽발 세이코 시계 내밀면서 쪽발지태 장학생임을 자랑한 게 대표적이다. 

   

결국, 당시 국유본 권력을 쥐고 있던 데이비드 록펠러는 한국을 어느 정도 발전시키고 싶었다. 해서, 1970년대 초중반에는 한국 경제를 키웠다. 허나, 후반에 들어서서 박정희 정권이 빅터 로스차일드 인연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자 한국 경제에 대해 은근한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권이며, 뉴라이트 정권인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삼성의 반도체 산업이 본격화한 것이다. 

   

   

4. 국유본이 반도체 가격 안정화를 위해 한국 반도체산업을 삼성에게 허가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3년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엄청나게 몰입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반도체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회의에는 과장급 직원까지 참석했다. 전사적인 총력전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도 수시로 내려가 현황을 점검했다. 기업가 생애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해 12월12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반도체 기술 수준을 2~3년 차이로 좁힐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적 쾌거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삼성의 엄청난 반도체 개발 속도에 충격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의 낡은 부천공장 생산라인을 활용해 VLSI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불과 10개월 만인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어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개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메가 시대'에 진입시켰다. 마침내 1987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톱 10(9위)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이처럼 반도체 사업은 빛나는 성과를 이어갔지만 적자에서는 좀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0위 안에 우뚝 선 1987년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13년 연속 적자였다. 적자 규모도 상당히 컸다. 이러다 보니 세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에 매달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삼성 이병철은 1983년 동경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올인하다시피 한다. 헌데, 1987년까지 무려 13년 적자였다. 적자가 이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데, 삼성 이병철은 대체 무엇을 믿고 반도체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을까. 공식적인 계기는 1980년 봄 일본 이나바 슈조와의 만남인 듯싶다.

   

"1980년 이른 봄. 삼성물산 가스미가세키(霞ケ)빌딩 사무실. 도쿄를 방문중인 이병철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 아래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73년과 79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리는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의 위기가 주제였다. 이병철회장이 이나바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우주 해양공학 등 성(省)자원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지요. 일본 정부도 이를 적극 뒷받침해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외화수입은 급증했습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있습니다." 

   

하면, 이나바 슈조는 누구인가? 요시다 시게루 밑에서 일본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혼자서 일본경제정책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는가. 국유본이다. 국유본 없이 함부로 경제정책 수립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건, 그가 후지화학 회장이라는 것이다. 후지화학하면 어떤 회사인가. 미쓰이 계열이자 노비네파 회사이다. 

   

"한국 재벌의 기원 - 일본의 미쓰이와 삼성일본 Upgrade

2010/03/14 16:28

http://umseungpyo.com/140103125138

1. 한국의 재벌 중심 구조

최근 한국 기업은 세계 불황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는 전자 산업과 자동차 산업은 일본의 주력 분야이기도 하다. 20 전의 삼성은 소니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며 10년전만 하더라도 현대가 도요타와 경쟁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성공 요인이 신속하고 과감하게 의사 결정을 내릴 있는 Top down(하향식 의사 결정) 체계에 있다고 분석한다. 모든 영역의 권한을 지닌 재벌 총수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유망한 사업 부문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특히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와 같이 시황에 영향을 받는 장치 산업의 경우 경영진의 결단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갈리기도 한다.

한국 기업은 재벌 구조로 소유와 경영이 일치하기 때문에 책임있는 경영이 가능하기도 하다. 재벌(財閥) 통상적으로 일본이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함께 성장한 가족 경영의 기업 집단을 의미한다. 일본의 재벌은 해제되어 계열(系列) 방식으로 변하였지만 한국의 경제는 지금도 재벌이 중심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 재벌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 재벌의 형성 과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2. 한국 재벌과 일본 재벌의 비교

저명한 일본의 경제 평론가 다카하시 카메키치(高橋亀吉) 1938 출판한 <일본 재벌론(日本財閥論)>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 재벌의 발전과 현세 그리고 전환기의 거대 재벌과 동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일본 재벌의 성장 과정은 전쟁 물자의 조달이 배경이 되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군수품의 보급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업화를 국가가 주도하기 위해서 재벌은 정부 특혜로 자본을 축적할 있었다. 재벌은 국가 경제를 좌우할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지만 금융 부문의 자금력 집중과 주요 산업의 독점으로 재벌 감정도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재벌 비판에는 당시의 사회주의 풍조와도 관련이 있었다.

구미와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과 일본의 재벌의 주요한 특징은 사업 다각화에 있다. 특정 분야가 아니라 관련성이 없는 여러 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재벌이 정부 주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재벌론>에서 언급한 주요 재벌인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가와사키(川崎), 오오쿠라(大倉), 후루카와(古川) 정부와의 유착으로 여러 사업 분야에 진출하였다.

   

재벌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는 주요 계열사

미쓰이

미쓰이 물산,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생명/화재 해상, 미쓰이 화학, 도요타, 도시바(東芝), 후지(富士) 필름, 미쓰코시 백화점

미쓰비시

미쓰비시 상사, 미쓰비시 UFJ 은행,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화학, 메이지 야스다(明治安田) 생명, 도쿄 화재 해상

스미토모

스미토모 상사,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생명/화재 해상, 스미토모 금속

한국과 다른 일본 재벌의 특징으로는 상사와 은행 기능이 있다. 일본의 재벌은 상사와 은행을 핵심으로 한다. 원료 구매와 상품 판매를 통해 시장을 지배할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투자를 위한 자금력까지 보유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재벌 중에서 은행과 상사 기능이 미약한 가와사키, 오오쿠라, 후루카와는 현재 몇몇 핵심 기업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한편 군수 산업을 위한 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신흥 콘체른이 탄생한다. 닛산(日産 - 중공업: 닛산 자동차, 히타치(日立), 손보 재팬), 닛치스(日窒 - 화학: 칫소(窒素), 세키스이(積水) 화학, 아사히() 화성), 닛소(日曹 - 화학: 닛소), 리켄( - 화학: 리코) 같은 재벌은 은행과 상사를 보유하지 않고 특정 분야의 산업에 집중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다음과 같이 점에서 일본의 주요 재벌보다는 신흥 콘체른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은행과 상사의 역할이 제한적이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의 규제로 은행을 보유할 없었으며 상사가 지주 회사 역할을 하고 있지도 있다. 특히 한국의 5 재벌(삼성, 현대, LG, SK, 롯데) 상사는 건설, 패션, 유통(백화점) 부문을 겸하고 있으며 수출입 업무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상사는 현대 종합 상사 밖에 없다. 또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상사는 일본과는 달리 내수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둘째 일본의 신흥 콘체른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성장하였다. 따라서 조선 칫소나 닛산의 만주 중공업과 같이 현지 투자도 이루어졌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 코오롱과 효성은 섬유 산업을 주력으로 재벌이 되었으며 한진(대한 항공) 베트남 특수와 같은 해외 건설 사업으로 재벌이 되었다. 한편 한일 조약 이후 차관이 POSCO 투입되어 철강 산업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셋째 한국의 재벌과 일본의 신흥 콘체른은 전문 사업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재벌도 당초에는 일본의 주요 재벌처럼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였으나 정부의 재편 압력에 따라 특정 부문에 집중하였다. 특히 아시아 통화 위기 이후에는 주력 사업 분야가 어느 정도 정립되어 현대는 자동차, 삼성은 전자 금융, LG 전자 화학, SK 에너지와 정보 통신, 롯데는 식품과 레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3. 한국의 삼성과 일본의 미쓰이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재벌은 일본의 신흥 콘체른과 유사한 형태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 재벌의 창업자들은 일본의 주요 재벌의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일본의 영향으로 한국 기업의 근대 자본주의는 일본에서 유래하였다. 삼성의 초대 회장 병철과 POSCO 설립자 태준 그리고 롯데의 격호는 모두 일본의 와세다(稲田)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특히 병철 회장의 아들인 2 회장 건희와 차세대 유력자 재용 부사장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특히 창업자인 병철 회장이 일본 유학 시대의 경험과 지식은 삼성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재벌은 미쓰이였기 때문에 삼성 재벌의 형성 과정에는 다음과 같이 미쓰이 참고하였다고 추측할 있다.

먼저 기업의 성격과 문화이다. 한국에서 현대의 주요 사업 분야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상징되며 조직이 강조되는 반면, 삼성은 <경박단소(輕薄短小)> 요약할 있고 개인을 중시한다. 당초 현대는 건설을 기반으로 조선과 자동차에 진출하였지만 삼성은 식품(제일 제당) 의류(제일 모직)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 창업자 주영 회장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도전 정신의 인물이라면 삼성은 < 명의 인재가 명을 구한다> 능력 중시를 표방한다.

일본의 재벌에도 유사한 비교가 있다. 조직의 미쓰비시, 인간의 미쓰이, 결속의 스미토모는 유명한 표현이다. 공통 영역인 은행과 상사 그리고 유대 관계가 희박한 도요타 자동차를 제외하면 미쓰비시가 자동차와 중공업이지만 미쓰이 경공업인 도레() 도멘(トーメン) 방직이 기원이었다. 조직이라는 단체의 힘보다는 개인의 창의력을 중시하는 문화는 삼성과 미쓰이 유사점이다.

기업의 명칭에서 비슷한 점이 나타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재벌의 중핵이 되는 상사(商社) 이름이 삼성과 미쓰이 모두 물산(物産)이다. 상사는 상품 거래의 대행 회사라는 의미로 상사(商事) 회사의 약자이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미쓰비시, 스미토모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종합 상사가 상사(商事)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현대 종합 상사, LG 상사, SK Networks(SK 상사) 같이 상사가 일반적인 표현이다. 삼성과 미쓰이 곳만이 물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주요 종합 상사이다.

한편 삼성은 섬유 산업을 영위하는 계열사의 명칭을 제일 모직과 제일 합섬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삼성 이외의 사명을 사용하는 제일 제당과 제일 기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쓰이 도레(동양 레이온) 도멘(동양 면화) 동양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점은 우연만을 아닐 것이다. 참고로 한국과 일본의 어느 재벌도 섬유 산업에 자사명이 아닌 독자적인 이름을 붙이는 곳은 없다.

또한 삼성과 미쓰이 재벌 형성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현재 주요 사업 분야인 기업들이 상당 부분 중복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현재는 삼성 전자가 대표적이지만 기업의 모태는 삼성 상회에서 출발한 물산이었으며 섬유와 식품으로 성장하였고 금융과 전자로 한국에서 독보적인 재벌이 되었다. 미쓰이 재벌은 은행과 상사가 핵심이며 방직 공업으로 재벌이 되었으며 나중에 도시바와 도요타도 합류하게 되었다.

   

사업

삼성

미쓰이

상사

은행

보험

섬유

백화점

전자

자동차

화학

삼성 물산

삼성 생명, 삼성 화재

제일 모직, 웅진 케미칼(제일 합섬)

신세계

삼성 전자, SDI

르노 삼성 자동차

삼성 Total

미쓰이 물산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생명/화재 해상

도멘, 도레이

미쓰코시 백화점

도시바

도요타 자동차

미쓰이 화학

4. 한국 재벌의 미래

일본 재벌은 군국주의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연합군이 전범으로 지목하여 해체되었다. 현재는 그룹이라는 형태의 계열 체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의 재벌과 같은 단일 집단으로의 결속력은 거의 없으며 사장단의 친목 모임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일본의 재벌의 역사는 에도() 시대부터이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가족 중심의 족벌 경영 체제도 남아있지 않다. 일본 특유의 양자를 받아들이는 문화 또한 집안의 독식을 견제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까지는 소유와 경영이 일치한 총수 중심의 기업 지배가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앞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것이 틀림 없기 때문에 한국 재벌의 과제는 우수한 전문 경영인 체제를 어떻게 확립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집안의 혈통이 우수하고 경영 수업이 충실하다고 해도 계속 유지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어느 왕조의 예에도 나타나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쟁 뿐만 아니라 상속의 위법성도 문제가 되고 있다. 회사 실적이 우수하다면 재벌 일가의 범죄를 용서하는 정부의 입장과 국민의 의식도 개선해야 한다. 300년에 달하는 일본 재벌의 역사에 평가하는 인물은 창업주가 아니라 근대적 기업의 기반을 구축한 경영진이다. 이제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는 한국의 재벌도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 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이 바람직하다.

[출처] 한국 재벌의 기원 - 일본의 미쓰이와 삼성|작성자 마의 태자"

   

인드라가 강조한 바 있다. 로스차일드 - 미쓰이 - 삼성 - 노비네파, 록펠러 - 미쯔비시 - 현대 - 뉴라이트파라고 말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쪽바리 색희가 경쟁상대가 될 수 있는 삼성 이병철에게 길을 그냥 알려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안 되는 것이다. 해서, 대개는 삼성 이병철이 쪽바리 색희한테 뭔가 대가를 주었겠거니 여길 것이다. 물론 사례금 같은 걸 줄 수는 있겠다. 허나, 대가를 준다고 해서 이런 것 그냥 알려주는 것 아니다.  

   

국유본이다. 일본이 전자산업하는 것도 국유본이 허가해서 가능한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삼성에게 반도체 산업하라고 지시한 것일까. 

   

하나, 국유본 세계전략 때문이다. 1973년 이후 데이비드 록펠러는 삼각위원회 등을 통해 아시아 강화, 즉 일본 강화 전략을 구사했다. 일본을 키워서 유럽과 얼추 비슷한 경쟁력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해서,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 시기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여 일본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웠다. 물론 전자산업 뿐이겠는가.  

   

하면, 왜 미국은 국유본 본부인 셈인데, 기술 이전하지 않고 독점하는 것이 이익인데, 국유본이 왜 미국에 손실을 끼치면서까지 전자산업 기술 이전을 단행하였을까.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금융, 에너지 부문을 장악하고 있기에 그외의 부문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금융, 에너지 부문 이외에 다른 부문도 여전히 세계 제일로 나간다면, 세계 무역이 어찌 되겠는가. 일제나 독일제 대신에 여전히 미제가 세계 최고라고 한다면 세계 경제체제 존립이 위태롭게 된다. 단지 반도체가 공해산업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이해를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어줍잖은 반미론에서 벗어나 국유본론으로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국유본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둘, 전자산업을 키우려면 부품산업도 필요하다. 이때, 반도체가 문제였다. 국유본은 일본을 키우려고 반도체 산업을 일본, 대만에 집중 배치하였는데, 문제는 이들 지역이 지진 지역이라는 점이다. 전자산업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데, 만일 지진이 발생하여 반도체 공장에서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면 반도체 가격이 폭등할 우려가 있다. 반도체 가격이 폭등하면 전자산업에 연쇄적인 타격을 주어 세계 경제가 순식간에 휘청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만과 일본이 아닌 제 3 지역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삼성 반도체이다.  

   

지진 무풍지대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한, 세계 반도체 가격이 안정화할 수밖에 없다. 

   

   

셋, 하면, 국유본은 왜 현대가 아닌 삼성에 반도체 사업을 주었을까. 경박단소는 삼성, 중후장대는 현대로 이미 정한 듯싶다. 해서, 국유본 간첩, 이나바 쇼지를 통해 이병철과 접선시켜 국유본 지시사항을 전달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런 국유본 보증이 있었기에 삼성 이병철이 안심하고 13년 적자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인드라가 삼성자동차다 뭐다 해서 삼성을 많이 비판하고 있었다. 인드라는 1990년대 후반 하이텔 통신에 삼성전자 주가 만원갈 수도 있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반도체 산업이 초기 시설투자가 엄청나게 들기에 잘 못 되면 순식간에 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헌데, 이 글을 올린 후에 관악구 고시학원을 다니는 이가 인드라를 고소했다. 애국기업 삼성을 비판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나? 삼성도 아니고 삼성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왜 인드라를 고소했는지~! 

   

하여간 관악경찰서에 가니 경찰도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재발 방지(?) 약속을 하면 취하 뭐 이렇게 하자고 나왔다. 해서, 고소한 상대방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안 보여주더라.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애국시민은 아닌 듯싶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인드라는 이병철의 의지, 이런 건 별로 안 믿는 편이라는 것이다. 쪽발놈현, 쪽발돼중의 의지 이런 것 안 믿는다. 인드라는 그 의지 이면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 이면에는 국유본이 있고, 국유본은 자신이 한 일을 이병철이 한 것인양 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병철이 국유본 마음에 들 만큼 여타 다른 기업인보다 현명하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허나, 이병철 머리에서 삼성 반도체가 나왔다는 건 이 글을 읽는 순간부터 구라다, 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싶다는 것이다.  

   

   

5

   

"계기  

   

80년대 당시 재계에는 반도체가 트렁크 하나분량으로 백만달러의 가격을 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도체는 모든 경영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였습니다. 저는 이 반도체를 더 잘 알아보기 위해 반도체 연구의 1인자인 산켄전기의 회장 오타니다이묘 박사와 기술부장 덴다쇼이치 박사 두 사람에게 많은 조언을 얻습니다. 그 뒤 반도체에 대한 확신을 얻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한 말들입니다.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등이 그것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 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호암자전, 이병철]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1)

   

초창기의 어려움

83년 동경 선언 후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는 사실에 비판적 여론이 강했습니다. 삼성 내부에서조차 '반도체 망국론'이라는 비판적 의견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미국, 일본이 이미 절대강자로 부상한 때에 삼성이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기술 격차와 막대한 자금 마련, 기술 인력 확보, 짧은 라이프 사이클로 인한 높은 위험성 등이 해결해야만 하는 난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그러나 누군가가 만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2)

   

성공 요인

   

1.고급 인력의 확보와 연구비용에 대한 과감한 투자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진출할 당시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을 두고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그러한 연유로 기술보호주의가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메모리 사업이란 첨단 기술의 도입 없이는 불가능 했기 때문에 고급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 속담이 떠오른 저는 곧 바로 미국으로 가서 한국인 과학자들을 설득, 그렇게 해서 32명의 고급인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반도체 사업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반도체 연구개발센터를 미국과 국내에 두 개를 설립하였습니다. 보통 막대한 연구비용으로 하나만 설립하는게 주류였으나 저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회사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 두 개 모두 설립하였고 그 전략은 결국 성공했습니다.

   

반도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3)

   

2. 시간 절약, 과감한 투자

경기도 기흥에 VLSI공장을 설립할 때 저는 "6개월 만에 공장건설을 완료하라"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반도체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발주자인 삼성은 준비기간을 없앨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또 반도체는 짧은 라이프 사이클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선발주자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개발할 수 있게 개발자들 간의 경쟁을 유도했습니다.

초창기의 반도체 사업의 경영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1984년부터의 적자가 1987년까지 누적되면서 무려 1,159억이나 되었습니다.(그 때 당시 1159억은 매우 큰 거액) 그러나 저는 시장 도입 때의 손해는 예상했었고 막대한 연구비를 꾸준히 투자하는 것은 나중에 앞서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투자를 했고 결국 4메가D램을 생산할 때부터 삼성은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3.굳은 의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반도체를 고수한 이유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기어이 성공시켜야겠다는 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성공을 부르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bitmania/30   

   

삼성 이병철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까지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자. 

   

 http://blog.chosun.com/jh3164/6308928

   

   

"삼성이 반도체 사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삼성은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한국반도체는 당시 국내 유수의 오퍼상이었던 켐코(KEMCO)가 기술집약적인 웨이퍼 가공생산을 위해 세운 업체였다. 한국반도체 지분 인수 과정에는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가 개인자금을 들일 만큼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반도체 사업에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그룹의 중추인 비서실에서도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내린 터였다.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 등 경제 관련 부처들도 "투자 과잉에다 기술자가 없다"며 말렸다. 더욱이 삼성전기·삼성전관 등 여타 전자 사업이 고전하고 있을 때여서 그룹 차원의 투자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희 당시 이사는 왜 반도체에 집착했을까.

   

그 무렵 삼성물산 도쿄지점장이었던 이길현 전 신라호텔 사장은 <삼성 60년사>에서 "당시 이건희 이사는 이미 '반도체 공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마쓰시타·도시바·NEC 등 일본 전자업체 기술자들을 자주 만났고, 단독 세계여행을 통해 반도체 관련 인사들을 만나며 자료를 모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삼성은 전자손목시계용 칩, 전자오븐용 칩, 트랜지스터 등의 개발에 잇달아 성공했지만 사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계속 적자를 내다가 결국 자본금 잠식 상태에 이른다. 삼성은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했다. 회사 이름도 삼성반도체로 바꿨다. 1978년 3월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당시 국내 반도체조립 업계 선두업체였던 페어차일드가 노사분규 때문에 부천 공장을 매물로 내놓자 이를 인수했다. 웨이퍼 가공에서 조립생산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일관생산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사업의 경영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79년 9월 어느 날 당시 삼성전자 김광호 이사(전 삼성전자 부회장)는 강진구 사장(전 삼성전자 회장)의 전화 호출을 받았다. 사장실로 갔더니 정작 강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이병철 회장을 만나러 급히 나갔다는 게 비서의 설명이었다. 그 시각 강진구 사장은 이병철 회장에게 "김광호 이사를 반도체로 보내겠다"는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일전에 이 회장으로부터 "삼성전자에서 가장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반도체로 보내라"는 특별지시를 받은 데 따른 후속 인사였다. 정작 김광호 이사는 강진구 사장에게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터였다.

70년대까지 반도체 사업은 '아오지 탄광'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삼성반도체 반도체사업부장으로 발령이 나서 갔더니 직원 천여 명이 할 일이 없어 풀을 뽑고 있더군요.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요. 당시 반도체는 삼성 내에서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회사였습니다. '아오지 탄광'으로 불릴 정도였지요. 어쨌든 제가 간 이후에도 적자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보고를 올렸지요. 그래서 결국 삼성반도체는 1980년 삼성전자로 합병됐다가 1982년 또 다시 한국전자통신으로 합병돼 삼성반도체통신으로 거듭났습니다."

   

삼성반도체통신 출범 과정에는 사명(社名)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김광호 당시 상무(1980년 7월1일 상무 승진. 정기인사 시즌이 아닌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다)는 신설 합병법인의 상호를 '삼성통신반도체주식회사'로 기안해 보고했다. 그랬더니 이병철 회장은 대뜸 "택도 없는 소리 마라. 삼성반도체통신으로 해라!"는 것이 아닌가. 잠깐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해가 됐다.

   

김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 "저는 삼성반도체가 적자 기업인 데다 흡수당하는 형편임을 감안해 의당 회사 이름을 그렇게 기안했던 것인데 회장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지요. 그때 이미 회장님의 향후 반도체 사업 구상은 상당히 깊이 진척돼 있었던 겁니다."

   

그랬다. 이병철 회장은 그 무렵을 전후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화두로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봄 어느 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인 이나바 박사가 도쿄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회장을 방문했다. 이나바 박사는 과거 일본 정부에서 경제 정책을 다룬 경력이 있는 경제 전문가였다. 그는 일본 산업계의 거대한 방향 전환을 들려주었다.

   

요지는 이러했다. "제철·조선·석유화학·섬유 등 일본 기간산업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과 품질을 향상시켰지만 과당경쟁·과잉생산 때문에 도산이 속출해 그 부담이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갔다. 대외적으로는 덤핑 수출로 무역마찰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기간산업의 생산 규모를 20~50%가량 대폭 억제하기로 했다. 대신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 등 고부가가치의 첨단기술 분야로 전환을 도모하고 있으며, 특히 반도체와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 수입도 급증했다. 일본의 살 길은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이나바 박사와의 만남에서 감명을 받았다. 자원이 없어 무역입국 외에는 달리 국가의 활로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도 하루빨리 첨단기술산업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왔음을 직감했다.

   

이 회장은 당시 심경을 <호암자전>에 이렇게 남겼다.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利害)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당시로선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을 추격할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 리스크는 감당해낼 수 있을까, 또 고도의 전문 기술 인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난제가 수두룩했다.

   

이병철 회장은 특유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폭넓은 정세 판단에 나섰다. 미국·일본은 물론 국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반도체에 관한 한 최고의 자료들을 섭렵해 나갔다. 물론 만류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 도호쿠대학의 덴다 박사는 "메모리 반도체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삼성이 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그는 당시 파워 트랜지스터 분야의 손꼽히는 석학이었다.

몇 년의 장고 끝에 마침내 '도쿄선언'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생애 내내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 남들이 말리는 사업에 도전해 결실을 맺어온 기업가였다. 칠순을 훌쩍 넘긴 고령이었지만 그 도전정신은 전혀 퇴색함이 없었다. 오랜 숙고 끝에 반도체 사업이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가 1982년 5월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10월 반도체·컴퓨터 사업팀이 꾸려졌다. 이 팀은 당시까지 개발된 반도체들의 성능·원가·시장동향 등을 조사하는 한편 장·단기 사업계획을 세워 이 회장에게 수시로 보고했다.

   

1983년 3월15일 아침 일본 도쿄. 이병철 회장은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을 기해 삼성은 VLSI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오랜 고뇌 끝에 나온 그의 한마디는 곧바로 세상에 공표됐다. 반도체 입국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뗐을 뿐, 갈 길은 너무 멀었다. 속도를 내야만 했다. 가장 큰 과제는 기술 확보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 반도체 업계가 매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기술보호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른 업체에 대한 기술제공을 매우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성은 어렵사리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일본의 샤프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샤프의 기술제공은 일본 업계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샤프는 심지어 "국익을 해치는 나라의 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일단 기술도입이 성사됐지만, 마냥 외국 업체에 기술을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술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일류업체로 나아가는 것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재미 한국인 과학자들에게 선이 닿았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말이다. "당시 미국 반도체 업계에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제법 많았어요. 반도체 연구개발이 워낙 힘든 일인지라 미국인들은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말하자면 의대생들이 '외과'를 기피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그 틈새를 바로 한국인이나 중국인 등 유학파 학자들이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당시 반도체 인재들을 '꼬시러' 수없이 미국 출장을 다녔습니다. 한꺼번에 모아 놓고 면담할 수 없어 어떤 때는 한 사람을 만나러 비행기를 탔다가 다음날 귀국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삼성 반도체 사업을 짊어질 역사적인 '선발대'가 조직된다. 처음 삼성이 접촉한 유학파 과학자는 이임성·이상준·이일복 박사 3인이었다. 이들 모두는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조국의 첨단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은 몇몇 인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꽤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이임성 박사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다. 미국에 현지법인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영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최신기술 입수와 수출 전진기지 확보에도 이점이 있었다.

   

198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 SSTI4(Samsung Semiconductor & Telecommunications International Inc.)가 문을 열었다. SSTI는 국내의 미숙련 인력들이 파견돼 교육·훈련을 받고 전문가로 거듭나는 인재사관학교 구실도 했다. 1기 연수생 중에서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의 리더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조수인 메모리담당 사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SSTI는 1985년 SSI로 이름을 바꿨다. SSI는 이후에도 기술인력 양성과 첨단기술 개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생애 마지막 도전에 남은 열정 '올인'

이병철 회장은 1983년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엄청나게 몰입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반도체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회의에는 과장급 직원까지 참석했다. 전사적인 총력전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도 수시로 내려가 현황을 점검했다. 기업가 생애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해 12월12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반도체 기술 수준을 2~3년 차이로 좁힐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적 쾌거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삼성의 엄청난 반도체 개발 속도에 충격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의 낡은 부천공장 생산라인을 활용해 VLSI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불과 10개월 만인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어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개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메가 시대'에 진입시켰다. 마침내 1987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톱 10(9위)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이처럼 반도체 사업은 빛나는 성과를 이어갔지만 적자에서는 좀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0위 안에 우뚝 선 1987년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13년 연속 적자였다. 적자 규모도 상당히 컸다. 이러다 보니 세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에 매달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실적이 부진하면 임직원들을 닦달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독려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회장님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도체사업본부장 아이가! 김군, 니는 적자 걱정 말고 기술자 양성과 신기술·신제품 개발에만 매진해라. 내가 책임질 테니.' 저는 그 말씀 한마디가 오늘의 반도체 신화를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두가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됐으니까요. 평소 회장님은 적자에 대해 엄격했지만 유독 반도체 사업만큼은 달랐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7년 8월 기흥 반도체 공장 3라인 기공식이 마지막이었다. 기흥 3라인은 이듬해 준공식을 갖자마자 바로 풀가동에 들어갔다. 1988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첫 흑자를 냈다. 흑자 규모는 그 동안의 누적 적자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았다.

   

이병철 회장은 생애 마지막 사업에서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단기적인 이익을 욕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삼성의 미래, 나아가 국가 경제의 앞날을 열어갈 든든한 열쇠 꾸러미를 남기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출처]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반도체 결단' 비화|작성자 얕은 물

   

"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80년 초로 알려졌다. 이때 도쿄를 방문 중인 이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 박사가 찾아왔다고 한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아래에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로 알려진 그는 당시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이나바 박사는 그 자리에서 "일본이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렸다"'반도체와 컴퓨터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나바 박사는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 때에도 이 회장과 세계 경제와 일본 경제를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었다. 당시부터 이 회장은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8327일 밤,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사활을 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이 회장은 그동안 미국과 일본의 수많은 반도체 전문가를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었고 사업성 검토에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이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고 결심했다. 시계 칩 사업에서 드디어 흑자를 냈다는 소식도 이 회장의 결심에 힘을 보태주었음은 물론이다.

이 회장이 큰 결단을 하고 나서자 삼성 내부뿐 아니라 우리 정부도 발칵 뒤집혔다. "삼성이 망하려고 한다. 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하겠나?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데, 삼성이 그만한 자금이 있는가?" 이런 식이었다.

삼성과 이 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설명하는 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983315일 삼성그룹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그룹 발표문을 내놓게 된다.

64K D램 개발 발표 한 달 늦춰

그 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기술 도입처로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일본의 샤프와 손잡았다. 이 회장은 19837월 이윤우 개발실장과 7명의 직원을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보내 기술 연수를 받게 했다. 샤프와는 이 회장과 친분이 있는 사사키 다다시(佐佐木正) 사장을 통해 협력관계를 맺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한 과정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듯합니다.

"아무도 그 부분을 상세히 이야기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국익과 관계된 일이에요. 제가 회고록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갑시다."

-그러면 64K D램 개발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기술적인 부분은 아직도 공개하기가 힘듭니다. 대신 64K D램 개발을 마치고 난 후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1983121일 강진구 사장이 64K D램 개발을 발표했습니다. 아주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했으니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사실 64K D램은 발표 한 달 전에 개발됐어요."

-그럼 발표를 미뤘다는 얘긴데 왜 그랬습니까?

"일본 업체가 견제하면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죠."

-정부도 몰랐나요?

"물론 알았습니다. 대통령에게도 보고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맞습니다. 198311월 전두환 대통령이 아웅산 사태 이후 처음으로 사업시찰에 나섰는데, 인천시청을 거쳐 부천공장을 방문했어요. 그때 제가 브리핑하면서 64K D램을 개발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업체에서 견제가 들어올까 봐 아직 발표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요?

"전 대통령은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러면 절대 발표하지 마라. 발표하려면 나한테 꼭 허가 맡고 해라'고 말했어요.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64K D램 개발을 정부에 공식적으로 보고하면서도 발표는 늦추게 됐어요. 그사이 일본의 견제에 대비할 시간도 벌었습니다. 전 대통령을 여러모로 평하지만 반도체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도움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반도체 업계에 어떤 기여를 했나요?

"대통령 재임 중에 반도체 업계에 두 가지 선물을 줬습니다. 첫째 선물은 정확한 시기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980년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전 대통령이 부천공장을 방문했을 때 '애로사항이 있으면 얘기하시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반도체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설비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되는데, 이 중 일본에서 수입하는 프로젝션 얼라이너(Projection Aligner)의 관세가 50%나 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전 대통령이 '세금? 당연히 내야지'라며 제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관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군요.

"아닙니다. 전 대통령이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저는 '사실 대일무역 적자 때문에 이런 관세가 붙었습니다. 대일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면 우리가 사업을 잘해서 일본에 수출을 많이 해야 되는데, 이런 관세 부담 때문에 반도체 사업에서 이익을 내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며 자세한 설명을 보탰습니다."

-이해하시던가요?

". 전 대통령은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일본을 이겨야지. 내가 없애주겠소'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프로젝션 얼라이너에 붙던 관세가 사라졌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전 대통령이 관세를 없애준다고 약속했지만 실현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부가 프로젝션 얼라이너에만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면 다른 업계에서 반발하리라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선물은요?

"두 번째 선물은 19882월 퇴임하기 두 달 전에 이뤄졌습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대통령께서 청와대에서 4메가 D램을 개발한 반도체 3사 주역들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 대통령은 애로사항부터 묻더군요. 저는 업계의 현안이던 '외화대부(外貨貸付)를 완화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대일무역 적자 때문에 외화대부를 완화해달라는 부탁은 쉽게 들어주기 힘들었을 텐데요.

"맞습니다. 여전히 대일 무역적자가 심각했어요. 일본 설비를 수입하려면 100% 자기자본으로 해야 하지만 미국에서 수입은 50%를 대출해주었거든요. 그런데 반도체 생산 장비는 미국보다는 보통 일본 장비가 좋아서 업체들은 일산(日産)을 선호했어요."

-대통령의 반응은요?

"제가 이런 사정을 설명하자 김윤환 비서실장에게 대번에 '사공일 오라고 해' 하더군요. 15분쯤 지나서 사공일 재무장관이 불려왔어요. 전 대통령은 '반도체 설비를 일본에서 수입하려는데, 왜 대출을 안 해주느냐'고 따져물었어요."

-재무장관의 입장은 어땠습니까?

"사공일 장관은 외화대부 완화에 반대했어요. 그는 '각하, 대일 무역적자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반도체산업을 육성하려고 외화 대출을 허용해주면 다른 업계에서 반발하고, 대일 무역적자 감축도 불가능합니다'라고 답변했어요."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받아들였나요?

"아니에요. 전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죠. 그는 '시끄러워. 해줘. 당신, 내가 두어 달 후면 퇴임한다고 우물쭈물하면서 미루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어. 무조건 일주일 안에 해줘'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일주일 안에 외화대부가 완화되었나요?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의 일주일 안에 전 대통령의 지시가 이행된 것은 분명해요. 그 덕분에 삼성은 물론이고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와 금성사(LG전자)가 한결 수월하게 반도체 장비를 수입해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었어요."

   

"[아시아경제 전필수 기자]매출액 165조원에 영업이익 16조원.

   

삼성전자

   

 지난해 매출액은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절반에 육박한다. 올해 예상매출액은 200조원에 육박한다. 증권사들이 예상하는 매출액 평균치가 198조원이다. 영업이익 추정치는 27조원을 넘는다. 이미 상반기까지 영업이익만 12조원을 훌쩍 넘었다. 3분기는 사상 최고치 기록을 다시 갈아치울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1조2000억원짜리 손해배상금 지불 평결에도 영업이익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삼성전자의 역사는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1970년대 건설 중심의 고도성장기 이후 기술중심의 전자산업을 이끌어 온 게 삼성전자다. 1990년대 처음으로 순이익 1조원 시대를 연 것도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가 2005년 처음으로 개척한 영업이익 10조원은 아직 삼성전자를 제외하곤 아직 다른 기업들이 넘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최대 강점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분야에서 모두 세계 1등을 다툰다는 것이다. DRAM으로 대표되는 반도체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 1등이다. 삼성전자를 처음 순익 1조클럽으로 가입시킨 1등 공신이 반도체였다.  

   

휴대폰은 2000년대 이후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더니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면서 1등 기업으로 올라섰다.

   

스마트폰을 두고 애플과 치열하게 소송전을 하고 있는 것도 삼성전자의 빠른 성장때문이다. 휴대폰과 반도체에 비해 최근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LCD 등 디스플레이 부분과 디지털가전 등 다른 분야들의 경쟁력 역시 세계 최고수준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대표적인 경기민감업종에 있으면서도 삼성전자가 국내외에서 부동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같은 다양한 포트폴리오다. 남들은 한 분야에서도 하기 힘든 1등, 그것도 세계 1등을 여러 분야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압도적인 실적으로 2000년 이후 삼성전자는 증시에서 부동의 대장주다. 단 한차례도 1등을 뺏기지 않은 것은 물론 대다수 기간동안 2위보다 배 이상 시총이 많았다. 최근 몇달간 조정으로 주춤했지만 시가총액은 우선주를 포함하면 200조원이 넘는다. 지난 4월에는 보통주 시총만 200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현대차와 포스코, LG화학 등 시총 2~6위 기업 다섯개를 합쳐야 삼성전자 시총과 맞먹는다. 보통주만 따져도 전체 시총의 18%를 차지하고, 우선주를 포함하면 20%를 훌쩍 넘는다. 시야를 세계로 넓혀도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소니 등 글로벌 IT업체들을 제친지 오래다.

   

10년전부터 '호수속의 공룡' 얘기를 들을 정도로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삼성전자의 미래는 여전히 장밋빛이다. 삼성전자 분석보고서를 내고 있는 국내 27개 증권사의 투자의견은 100% '매수'다. 200만원대 목표가를 제시하는 곳도 여럿이다. 증권사들의 목표가 평균도 176만원을 넘는다.

   

전필수 기자 philsu@"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2713490075539

   

   

"삼성전자는 창업 이후 40여년간 비약적인 성장사를 써 왔으며 오늘날 세계적인 전자 업체로 도약하였다.

   

1938년 설립된 삼성물산을 모태로 삼성은 식품과 의복을 주력으로 해 오다가 1969년 삼성전자를 창립하면서 전자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이듬해인 1970년 삼성 NEC가 설립되어 백색가전 및 AV 기기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고 1980년에는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그리고 1983년 2 월에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DRAM 사업에 진출한다는 '동경 선언'을 발표했다.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64K DRAM을 개발했다. 1990년대, 2000년대에도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최초' 행진은 계속되며 지금의 삼성전자 발전기틀을 잡았다.

   

삼성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재계 상위권에 속하는 한국 내 여러 대기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7년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삼성은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당시의 위기로 인해 한국 내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중 16곳이 부도를 맞아 해체된 반면, 삼성은 광범위한 구조조정의 실천과 효율적인 경영계획의 수립으로 내실을 확고히 하였다. 현재 삼성은 한국에서 재계서열 1위의 대기업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해외에서도 반도체, TV, 휴대폰 등의 1위 자리를 굳힘으로서 글로벌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6]

   

삼성전자가 융성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의 목표는 경쟁사인 일본 기업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0년 삼성의 세계 점유율은 평면 TV와 반도체 메모리에서 1위를 차지하며 모두 일본 업체들을 앞서고 있다.

   

삼성은 2007년에는 휴대폰 부문에서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2위의 핸드폰 제조업체에 등재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새 성장동력을 모색해오던 삼성은 지난 12월에 메디슨을 인수함으로써 헬스케어사업부문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2009년 스마트폰 시장에도 뛰어들어 Galaxy 라인업을 발표했으며,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지 2년만인 2011년 3/4분기 스마트폰 세계 1위에 오른다. 삼성은 2012년 노키아와 애플을 제치고 전체 핸드폰 점유율 1위을 기록했다.

창업기

1969~1971년

  •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 1969년 12월 삼성 산요(SANYO) 전기 설립
  • 1970년 1월 삼성 NEC 설립
  • 1970년 11월 흑백 텔레비전 생산 시작

    성장기반 구축기

    1972~1974년

  • 1972년 11월 내수용 흑백 텔레비전 생산 시작
  • 1973년 8월 수원으로 본사 이전, 생산과 관리업무의 합리화 추진
  • 1973년 12월 가전제품 생산공장 준공
  • 1974년 3월 냉장고 생산 시작
  • 1974년 12월 세탁기 생산 시작

    사세확장기

    1975~1976년

  • 1975년 11월 모니터 생산공장 준공
  • 1976년 2월 절전형 하이콜드 냉장고 생산 시작
  • 1976년 4월 컬러 텔레비전 자체 개발

    고도성장기

    1977~1979년

  • 1978년 7월 미국 현지 판매법인 설립
  • 1978년 12월 수출 1억 달러 돌파
  • 1979년 6월 전자렌지 생산 시작

    불황극복 기술개발기

    1980~1982년

  • 1980년 2월 CIP 시행
  • 1980년 5월 에어컨 생산 시작
  • 1982년 9월 포르투갈 최초의 현지 생산법인 준공
  • 1982년 12월 "한국 전자통신(주)"에서 "삼성반도체통신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수출주도 성장기

    1983~1985년

  • 1983년 3월 개인용 컴퓨터 생산 시작
  • 1983년 4월 64K디램 개발.
  • 1984년 2월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 1985년 11월 영국 현지 판매법인 설립
  • 1985년 12월 미국 현지 생산법인 설립

    해외지향 변신기

    1986~1990년

  • 1986년 7월 1메가디램 개발
  • 1987년 5월 미국 산타클라라, 일본 동경에 연구분소 설립
  • 1987년 10월 영국 현지 생산법인 준공, 생산 개시
  • 1988년 10월 프랑스 합작 판매회사와 태국 현지 생산법인 설립, 멕시코 현지 생산법인 준공, 생산 개시
  • 1989년 5월 4메가 마스크롬 개발

    2000년대를 향한 전진기

    1991~1998년

  • 1991년 세계 최초로 문자표시 카세트 생산 시판
  •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디램 완전 동작 시제품 개발
  • 1993년 제2창업 5주년을 기념해 현재의 CI로 변경
  • 1994년 세계 최초로 256M 디램 개발
  • 1996년 세계 최초 1기가 디램 개발
  • 1998년 세계 최초로 고선명 디지털 VCR, 256M 디램(2세대), 4기가 반도체 전공정기술, 64M 램버스 D램 모듈 개발

    디지털컨버전스혁명 주도기

    1999~2003년

  • 1999년 세계 최초로 256M 디램 양산과 텔레비전 폰 개발
  • 2000년 9월 정보통신 전제품 세계 최초 TL 9000 인증 획득
  • 2002년 7월 고급 백색가전 브랜드 "하우젠" 발표
  • 2003년 12월 플래시메모리 전체, 첫 세계 1위 달성

    초일류기업의 기반 구축기

    2004년~현재

  • 2004년소니와 공동출자하여 액정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회사 에스 엘시디를 설립. 2004년 결산 결과 순이익 100억 달러 클럽에 처음으로 가입했다. 2006년, TV 사업에 진출하여 처음으로 세계 TV 시장 1위를 달성하였다. 평판 TV에 관한 한 한국이나 일본이나 기술의 우위를 가리기 힘들다. 이러한 시장에서 무엇보다 깨기 힘든 브랜드 이미지를 깨고 와인잔을 형상화한 디자인을 내세워 보르도 TV는 단기간에 세계 최고의 상품이 된 것이다. 최지성 사장은 이 보르도 TV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7]
  • 2007년에 세계 최초 30나노 64기가 낸드 플래시 개발 성공, [8] 2007년초 정보통신총괄 이기태 사장의 후임에 최지성 사장이 임명되었다.
  • 2009년, 삼성전자는 1,174억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계속했다. [9] 회사 설립 40주년을 맞은 2009년에 'Inspire the World, Create the Future'라는 비전을 내세우며 10년 뒤인 2020년에는 매출 4,000억 달러를 달성해 IT업계 압도 1위, 글로벌 10대 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삼성전자는 기존의 세트와 부품 위주의 정보, 통신, AV 중심의 사업(Infotainment)구조에 소프트웨어와 솔루션 위주로 의료/바이오, 환경/에너지, 편의/안락 등 '삶의 질 향상' 부문(Lifecare)을 새로운 사업영역으로 추가했다. '21세기형 사업구조'로 변신하겠다는 것이 회사측 설명이다. [10] 가전부문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가전계열사인 삼성광주전자를 2011년 1월 흡수합병했다. [11]
  • 2011년에 세계 최초 20나노 SSD 830시리즈 개발.
  • 2011년에 전 세계 히트작 삼성 갤럭시 S2갤럭시 넥서스, 갤럭시 노트 출시.
  • 2012년에 쿼드코어 탑재인 삼성 갤럭시 S3 출시.

       

       

       

    추신 : 오늘은 여기까지 씁니다. 완결할 때까지 따로 포스팅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쓰겠습니다.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블로그는

    무인도에서의

    처세술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주이슈는 국제유태자본론

       

    안녕! 트리에!

    기념하는 모든 것들이여!

    이제는 안녕!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위해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후원계좌 :

    524902 96 101910

    국민은행 김종화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8 : 국제유태자본과 올림픽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29 05:15

http://blog.naver.com/miavenus/70143368983

   

   

   

손가락에 클릭하면 조국 통일이 앞당겨집니다.

쪽발민주당 해체, 몽준 아웃, 쪽발정은 척살로 2012년을 통일의 해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인드라가 네이버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글을 썼습니다.

이웃분들은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인월리와 함께 했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말하면서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전세계에서 인드라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8 : 국제유태자본과 올림픽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29

   

   

   

"경제학자들이 2012 런던 올림픽의 참가국 메달 순위를 예측한 결과 한국이 29개의 메달로 8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다.

   

3일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즈(Finantial Times)는 저명한 경제학자들과 금융 회사들의 예측을 토대로 이번 올림픽 최종 메달 획득 예상 순위를 보도했다. 4종류의 예측 모델을 종합해 나온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29개의 메달을 따 8위가 예상됐다.

   

이 예상 순위는 인구, 1인당 국내 총생산, 과거 실적, 그리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 얻은 결과다. 통계를 위해 경제전문가로 참가한 에밀리 윌리엄스(Emily Williams, )와 대니얼 존슨(Daniel John), 미국 최대규모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그리고 세계 최대 컨설팅펌인 PWC이 각각 참가해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4종류의 예측 모델에서 일부 나라가 제외됐기 때문에 그 평균값으로 '종합판'을 추가했다.

   

메달 예측 종합 순위를 살펴보면 106개의 메달을 획득한 미국이 1위를 차지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각 86개 메달과 73개 메달로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예측됐다. 개최국인 영국은 2008년에 비해 9개가 오른 56개 메달로 4위, 그 다음은 독일은 45개 메달로 5위다. 6위는 호주, 7위는 프랑스다. 한국 다음으로는 이탈리아가 9위, 일본이 10위에 올랐다.

   

"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3885471

   

   

골드만삭스 예상 8위

   

" 골드만삭스 예상 '2012년 런던 올림픽' 메달 순위

   

(순위-국가-금메달-전체 메달수)

   

1위 - 미국 - 37 - 108

   

2위 - 중국 - 33 - 98

   

3위 - 영국 - 30 - 65

   

4위 - 러시아 - 25 - 74

   

5위 - 호주 - 15 - 46

   

6위 - 프랑스 - 14 - 41

   

7위 - 독일 - 14 - 41

   

8위 - 한국 - 10 - 31

   

9위 - 이탈리아 - 10 - 30

   

10위 - 우크라이나 - 9 - 27

   

11위 - 일본 - 8 - 26 "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71309413040394&outlink=1

   

1. 고대 그리스 올림픽은 식민지 관리를 위한 제국주의 문화 정책이었다  

   

"

고전 그리스에서 로마 시대까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디아스포라

   

고대에 발칸 반도소아시아에서 내려온 그리스 부족들이 바깥 세계로 무역과 식민지 건설을 확대하면서 그리스의 문화, 종교, 언어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지중해흑해 연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시칠리아, 이탈리아 남부, 리비아 북부, 에스파냐 동부, 프랑스 남부, 흑해 연안에 그리스식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그리스인들은 400개 이상의 식민시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아케메네스 왕조를 정복하면서 헬레니즘 시대가 개막되는데, 이 시대에 그리스의 새 식민화 물결이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퍼져나갔으며, 이집트, 서남 아시아, 인도 북서부에서 그리스인들이 지배 계급을 이루게 된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새로운 헬레니즘 도시들로 이주했는데, 그 범위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인도, 쿠웨이트까지 이르렀다. 셀레우키아,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같은 헬레니즘 도시는 로마 시대까지 세계적으로 큰 규모의 도시였다. 로마 제국 지배하에서 그리스어는 제국 전역에서, 특히 동부 지역에서 라틴어 대신 링구아 프랑카의 지위를 누렸다. 기원후 4세기경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화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정교회가 뿌리내리면서, 정교회는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특징이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C%8A%A4_%EB%94%94%EC%95%84%EC%8A%A4%ED%8F%AC%EB%9D%BC

   

디아스포라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전치사 dia와 동사 '뿌리다'라는 의미의 spero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은 뒤 그곳으로 자국민을 강제 이주시켜 세력을 확장했다.

   

헌데, 상기한 도시 국가 건설 최초의 모형은 수메르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인드라 주장이다. 해서, 인드라는 최초의 디아스포라를 수메르로 보고, 그 계보가 수메르 - 페니키아 - 그리스 - 카르타고 - 유태인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예서, 페니키아가 그리스에 패퇴하고 나서 후일 식민지 정책을 바꾸지만, 초기에는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경제적 이유이다. 한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상설 군대가 필요하고, 상설 군대 유지 관리비가 있어야 한다. 헌데, 페니키아는 자력으로 도시를 방어하는 대신 용병을 구했다. 쌈질이란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금이 만만찮게 들어가서 페니키아에서는 식민지 도시 건설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해당 도시에 임대료 등 수수료를 지불하고 무역을 택했던 것이다. 이 방식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하여, 이것이 모범이 되어 해군만 강해 세계 해상권을 지배하는 대신 육군이 비할 바 없이 형편없던 영국이 19세기 전반까지 채택하는 제국주의 모델이 되었다. 저비용 고효율로 내세운 방식이 영국의 통치가 아닌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치이다. 영국이 직접 통치하면 뭐가 문제인가. 미국이 예다. 영국이 미국을 식민통치할 때 미국인이 매우 저렴한 세금을 부담한 반면 대부분의 세금을 영국이 부담해야 했다. 러시아가 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겠는가. 관리 비용이 많이 드니까 그렇다. 인도는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헌데, 발칸반도 야만인이 주축인 그리스가 페니키아 등 수메르에서 비롯한 중동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자 중동 정세가 변화한 것이다. 페니키아는 용병을 써야 했지만, 그리스는 용병을 쓸 필요가 없다. 먹을 것과 떡만 쳐주면 되는 발칸 야만인이 무한정 있기에 식민지 도시 건설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것이다.

   

해서, 그리스가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는데, 해외로 진출한 헬라인(그리스인)이 자발적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스 농민 중에 그리스 귀족들에게 박해를 받아 추방령이 떨어지거나 그리스 귀족이 농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 타의에 의해 떠밀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원주민과 싸울 수밖에 없었기에 본국과의 유대 관계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근대 영연방 국가 건설 방식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영국은 뉴질랜드에는 영국에 비판적이었던 정치범을 내보냈고, 호주에는 강간, 폭력 범죄자들을 보냈다. 영국은 근대화로 인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 과잉을 해소시켰던 것이다.

   

하고, 이들 지역간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과거에서 찾다보니 발견한 것이 그리스 올림픽이었던 것이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 국가의 식민지 영토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스포츠 제전이다.

   

   

2. 근대 올림픽 : 대중을 스포츠에 미치게 하라

   

근대 올림픽

http://blog.naver.com/miavenus/70034068364

    

하나, 시온의정서의 충고 : 대중을 스포츠에 미치게 하라

   

흔히 운동권에서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3S정책이라는 것이 있다. 대중을 스포츠, 영화, 섹스로 세뇌시켜 현실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헌데 이런 주장의 원조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시온의정서'에 있다. 여전히 위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위서 여부를 떠나 그 주장만큼은 오늘날의 현실을 매우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령 대중을 스포츠, 연예 사업에 미치게 해서 바보로 만들라는 대목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둘, 쿠베르탱 이전의 근대 올림픽 역사

   

보통 프랑스 쿠베르탱 남작에서부터 근대 올림픽 운동을 기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허나, 쿠베르탱 이전에 이미 각국에서 고대 그리스 올림픽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이미 올림피아라는 이름으로 스포츠 제전이 있었다.

   

헌데 히틀러는 근대올림픽 운동에 대해 유태인과 프리메이슨의 음모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하고 그와 같은 생각은 과연 사실일까? 나는 이전 글에서 프리메이슨이란 허구에 불과하며, 국제유태자본의 자기 방어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여, 프리메이슨을 제거하고, 유태인이란 일반을 제거하면, 남은 것은 국제유태자본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히틀러가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였나 추론해보기로 한다.

   

물론 현재 자료는 매우 빈궁하다. 해서, 이 글은 완결이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돌발적인 의제 제기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의견들이 오가고,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긍정되어 보다 실체에 접근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2차 대전 중 로스차일드는 알려진 것과 달리 히틀러에게 탄압받은 사례가 전혀 없다. 있다면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가 딱 하루 구금되었을 뿐인데 곧 풀려났을 뿐이다. 오히려 국유본과 히틀러는 매우 좋은 사이였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히틀러와 유태인 일반과는 안 좋은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셋, 그리스 독립전쟁과 올림피아

   

그리스 독립전쟁

http://100.naver.com/100.nhn?docid=25835

   

그리스인들은 1820년대에 당시 오스만투르크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는데, 당대 국유본의 중핵인 로스차일드가 최초로 발칸반도에서 돈놀이를 떠올리며 그리스를 주목하게 된다. 15세기 이후로 지중해 무역이 퇴조하여 이태리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몰락한 상황에서 그리스를 노릴만한 이유가 없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로스차일드는 누구보다 수에즈운하와 같은 구상을 했다. 수에즈 운하가 건설된다면 지중해 해상권이 다시금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이후 그리스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현재의 한반도만큼.

   

이차대전 종료 직후 미국 정보부 CIA가 출범하면서 영국 정보부가 미국 정보부를 승인하면서 최초로 넘긴 사안이 그리스 문제 개입이었다. 하여, 그리스 국가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해도 그리스 해운업자들만은 부자가 되었다. 국유본과 긴밀히 협조한 유대인 오나시스가 대표적이다. (오나시스는 625전쟁으로 선박왕이 되었고, 이후 현대 조선소 건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국유본이 관심을 기울인다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한 예이다. 오나시스와 같은 이들만 부자가 될 따름이다. 오히려 대다수는 더 가난해진다. 이것이 국유본의 충견, 쪽발돼중, 쪽발놈현 때의 한국 현주소였다.

   

로스차일드가 뒷돈을 대서 영국은 오스만투르크를 물리치고, 런던회의에서 그리스를 독립시킨다. 허나 그리스인의 공화국 바램과는 달리 군주국이 되었다. 왜냐하면, 로스차일드가 뒷돈을 대면 본전을 뽑아야 하였는데,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패전국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국이 그리스를 해방시킨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에게 돈을 내라고 하게 된다. 해서, 그리스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빨아서 로스차일드에게 갖다 바칠 쪽발돼중, 쪽발놈현 같은 충견을 구하다 보니 그리스와 아무 상관이 없는 독일 귀족 오토를 그리스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다. 오토는 그리스 왕이 되기 전까지 그리스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여, 오토는 왕에 오른 뒤, 그리스인에게 인기가 없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오토왕은 국유본에게 임명받아 근본적으로 충견일 수밖에 없었기에 그리스인들의 밑으로부터의 독립의식이 워낙 강고하므로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계속 국유본에게 돈을 갖다 바치려면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려 착취해야 하는데 반발이 일어나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족 의식을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표출하는 것이었다. 마치 쪽발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쓸 데 없이 민족주의자인양 하는 것이고, 대표적인 사례가 쪽발민주당 대표 몽준의 개, 세균이가 김구묘역에 참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한국역사에 대한 모독이요, 지하에 있는 김구가 쪽발민주당 대표에게 침을 뱉을 일이다. 이처럼 별 것 없는 분야에서는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척하면서 실제로 오토는 오직 국유본의 충견으로 그리스인들을 착취하는 식민기관이었을 뿐이다.

   

하여, 상기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영국과 오토왕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영광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올림피아 대회를 적극 고려했던 것이다. 물론 고유한 스포츠 제전이 아니라 산업박람회 형식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해서, 꾸준히 열린다.

   

넷, 쿠베르탱의 야심 : 나폴레옹 시대의 재림?

   

허나, 상기한 그리스의 노력은 그리스 민족주의를 자칫 고양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이는 국유본의 이해를 훼손시키는 일이 틀림없었다.

   

해서, 국유본에게 저항하는 그리스 민족주의를 죽이면서 스포츠로 대중을 미혹케 하는 국제적 이벤트를 고려한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쿠베르탱 남작은 이십대에 수차례 영국을 다녀와서 얻은 교훈이 영국 국력의 원인은 체력에 있으며, 그 체력을 키우는 스포츠에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허나, 오늘날에 영국 국력의 상승에는 국유본이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아울러 국유본이 영국을 택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다.

   

일, 장미전쟁과 헨리 7세 덕분으로 젠트리라는 신흥 지방 지주들의 부상. 이들의 결합 하에 영국은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왕정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이, 그 덕분에 로마 카톨릭에서 이탈하여 국교회가 탄생하게 되며, 이후 국교회보다 더 과격한 각종 신교가 범람하게 된다. 칼뱅은 여타 다른 종교개혁가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상업, 특히 고리대금업을 용인하였다.  

   

삼, 영국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여 이긴다. 해군 전투력을 인정받게 된다.    

   

해서, 쿠베르탱이 주목한 것은 해군 전투력이란 것이다. 헌데, 당대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영국 해군의 실상이 어떠했나?

   

나폴레옹 당시의 영국 해군의 생활

http://blog.daum.net/nasica/5512965

   

사정이 이렇더라도, 당대 보불전쟁 등에서 참패한 프랑스 귀족으로서는 위대한 나폴레옹 시대의 재개를 바라며 이웃 세계제국 영국의 장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당대 프랑스가 허약한 것은 지배계급이 향락에 빠져 몸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쿠베르탱 남작이 주목한 것은 영국 지배계급인 젠트리를 본받아 평화시기에도 귀족적인 스포츠로 신체 단련을 거듭하여 전쟁할 때 지휘력을 발휘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을 꾀했던 목적이었다. 

   

평화? 힘이 없다면 가장 저주스러운 말.

   

   

다섯, 올림픽의 임무 : 유럽을 로마 카톨릭에서 해방시켜라?

   

흥미롭게도 쿠베르탱은 1896년 최초 올림픽을 아테네, 1900년 파리,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 이어 1908년을 런던에서 한다. 헌데 세계 대전 이전까지 개최된 도시들을 살펴보면, 파리, 베를린, 앤트워프를 제외한 대부분 도시들이 신교 지역이다.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정교회 지역이다.

   

파리야 쿠베르탱이 애초에 염두한 곳이고, 앤트워프는 1차 세계대전 영향이 크다. 벨기에가 제1차 대전으로 그 어느 곳보다 피해가 많아 재건 의욕을 북돋게 한다는 뜻에서 제7회 대회를 앤트워프에서 열기로 했다. 허나 워털루 전투에 이어 2차 대전에도 발지전투가 벌어졌다. 한반도를 떠올리면 된다. 러일 전쟁과 청일 전쟁, 국유본이 치밀한 각본을 짠 3차 대전으로서의 한국전쟁...

   

문제는 베를린이다. 쿠베르탱과 독일 스포츠지도자들과는 사이가 안 좋았던 듯하다. 독일은 영국 스포츠와 달리 독일 체조에 상당한 관심을 표하다 이후 참여했지만, 독일인이 지금도 그러하듯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었다. 지난 시기 란츠크네이크 용병을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독일은 지난 역사에서 쉴 사이 없이 전쟁터가 되어 질병과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엄청나다. 국유본이 형성되기 전에는 왕족들의 용병전쟁으로 인해, 국유본이 형성된 이후에는 돈벌이를 위해 전쟁이 2차 대전까지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독일 특유의 민족주의는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외교력도 상당하여 베를린 개최를 미룰 수가 없었다.

   

헌데 1차 대전이 일어나서 1916년 베를린 올림픽이 무산된다. 1차 세계대전은 국유본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은 이제 거의 상식화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이는 국유본이 베를린 올림픽을 바라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하면, 국유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왜 승인하였을까. 초기 올림픽을 제외하고 궤도에 올라선 1908년 런던 올림픽 이후 당대 올림픽 개최지 결정 등이 당대 외교력의 잣대로 평가받던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나는 강조한 바 있다. 국유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히틀러의 독일 재건사업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말이다. 나아가 별 볼 일이 없던 히틀러를 일약 독일 스타 정치인으로 만든 것도 국유본이다. 국유본은 1929년 대공황을 일으켜 미국 경제를 완전히 장악한다. 똘마니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협조가 컸다. 국유본 자본 상당액을 독일에 투자한다. 독일이 그냥 갑자기 1차 대전 패전국과 공황에서 단지 몇 년 만에 경제성장을 구가한 것은 히틀러의 덕분이 아니다. 국유본의 은밀한 지원 때문이다. 왜? 독일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함이다.

   

스포츠 프로모션들은 잘 안다. 홀로 챔피언은 고독하다. 상대가 있어야 재미있다. 오늘날 국유본이 이라크, 이란 등을 상대로 정하기 전에 일단 그들 힘을 키우는 것을 잘 지켜보아야 한다. 돼지새끼를 배가 통통하게 나오도록 키운 다음에 잡아먹기인 것이다.

   

대부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대해 히틀러의 독일 민족주의만을 비판한다. 허나, 이는 일면적인 고찰이다. 왜 당대 국유본은 히틀러의 올림픽을 승인하였을까? 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 2008년 올림픽이 북경에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지진이 자주 일어날까? 왜 1988년에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을까?

   

     

쿠베르탱에게는 이상한 지점이 있다.

   

<각 지방별로 행해진 '올림픽 경기' 중에서 알려진 것으로는 그레노블(Grenoble)의 행사를 들 수 있다.1832년에 그레노블에 소재한 한 가톨릭계통의 학교에서는 역사교사의 제안에 따라서 매 윤년마다 올림픽축제를 열기로 결정하고, 동년 2월 2일을 '새 올림픽 시대의 첫 해 첫 날'로 선언하게 되었다. 이 행사는 개막 및 폐막축하행사, 각종 경기, 시상식 그리고 문학 발표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무려 12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론도 올림픽 경기'(Jeux Olympiques au Rondeau)라는 명칭을 가졌던 이 행사는 1832년부터 1905년까지는 론도에서, 1906년부터는 몽플뢰리(Montfleury) 소재의 도미니카 계열의 학교에서 행해지다가 1954년에 그 막을 내렸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이 그가 작성한 여러 글에서 프랑스혁명 기념행사는 언급을 하면서도 정작 이 '론도올림픽경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쿠베르탱이 이 행사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와 아주 절친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며 나중에 현대올림픽의 구호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던 앙리 디동(Henri Didon)이 바로 론도올림픽경기에서 수차례 우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올림픽 경기

http://ysu.ac.kr/Gboard/bodo/board.asp?seq=2139&page=8#

   

왜 그는 론도올림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을까? 오늘날에야 국유본이 1977년 카터정권을 만들어서 로마교황청을 장악했지만, 과거에는 그러하지 못했다. 해서,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부터 로마교황청 접수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해서, 이를 유추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준으로 보자면, 10년 만에 외환위기를 통해 국유본은 한국경제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국유본이 중국 경제를 장악하는데 십년 정도를 잡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울러 이웃 중에 진지한 분들이 국유본의 중국 장악 시나리오에 많은 자료를 내게 제시하고 있다.

   

여섯,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왜 올림픽은 개최지를 도시로만 받는가. 그 이유에 대해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도시간 대항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헌데, 그리스 도시들은 도시 대 식민도시들로 이루어졌다. 간단히 설명하면, 오늘날 영국 연방 국가들과 흡사하다. 본토 도시는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에게서 농토를 빼앗긴 자들이(노예가 아님) 도시 바깥으로 나가 토착민을 몰아내고 이주민의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해서, 상기한 설명에서 낭만적인 성격을 제거하면,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조차도 그리스 제국이 원주민의 땅을 강탈하고 착취한 것을 기념하는 제국 잔치에 불과하였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대다수의 유태인은 대도시나 대도시 인근에서만 산다. 그런 의미에서 유태인에게 도시란 곧 국가나 다름없습니다. 허나, 이는 추상적이다. 대다수 유태인이란 역사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도시 주변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대다수 유태인들과 철저하게 구분되는 자들, 즉 국유본은 어디에 살까. 국유본은 도시 안의 도시에서 산다. 가령 런던에서는 시티지구, 뉴욕에서는 월스트리트, 서울에서는 여의도와 테헤란로? 그 상징적 형태는 게토이다.

   

국유본이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요구했던 것은 그리스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당대 유럽에서 장사하는데 방해가 되는 로마 카톨릭 (중세 시대에 끔찍하게 저질렀던 모든 만행에도 불구하고 고리대금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유일한 장점이 있었다.) 세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개신교 일부 광신도들처럼 로마 카톨릭을 제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냉전 시기 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올림픽 메달에 집착하였을까. 나는 군비경쟁처럼 이 역시 국유본이 만든 게임의 룰에 지배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즉, 2차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구도는 국유본이 기획한 산물인데, 체제가 매우 불안정하여 한편으로는 삼차대전인 한국전쟁을 일으켜 양극화를 촉진시키는 한편 군비경쟁에 함께 올림픽을 통해서 체제경쟁을 유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서, 20세기는 흥미로운 시대가 된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당대 계몽되었던 자들은 19세기까지는 거의 대부분 일부 귀족과 지식분자들뿐이었다. 19세기에 수많은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민중은 여전히 중세시대에서 살고 있었다. 허나, 올림픽 운동을 비롯한 각종 대중운동을 통해 민중은 서서히 중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고, 자신의 몸이 다른 이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허나 그로 인해 인류는 영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가장 오래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해서, 나의 주장은 명확하다. 비록 선수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것이 금메달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허나 바로 금메달에서 현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과연 금메달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말인가. 국유본이 인간을 금,은,동과 그밖의 인간들로 분류하여 가축처럼 만들어도 좋다는 말인가.

   

하면, 마지막으로 내게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왜 그대는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3. 모스크바 올림픽, LA 올림픽, 서울 올림픽 그 이면에는 국유본 권력투쟁이 있었다

   

국제유태자본과 하수인인 IOC는 현재 IOC체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다. 국제유태자본뉴라이트 분파가 IOC로 침투한 것은 사마란치 이후이다. 이는 IOC를 장악한 국유본 노비네파를 충분히 긴장시켰다.  

   

1977년 미국에서 카터정권이 성립하면서 전반적인 세계체제에 대한 재검토가 행해졌다. 일각에서는 이 시점에서 국제유태자본이 둘로 나뉘어졌으며, 이로 인해 교황 암살 시도, 레이건 암살 시도, 로버트 록펠러 암살, 박정희 암살 등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허나, 현재까지 내 관점은 이 시기 국유본 세력이 둘로 나눠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세력 내에서의 권력투쟁을 확대한 것으로 본다. 사마란치는 IOC에 재정적 위기를 통해 IOC 타락을 부추겼다. 이는 마치 국제유태자본이 공황, 전쟁을 통해 국가의 경제주권을 장악하는 과정과 같다.

   

나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에서의 동서방 국가의 참가 거부라는 현상적인 이면에는 또 다른 이면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다. 주지하다시피, 올림픽위원회는 당대 국제정치 판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해서, 나는 IOC의 1988년 서울올림픽 결정이란, 혹은 1980년대의 정치적 진통은 새로운 체제를 위한 국제유태자본의 내부적 분란 끝에 등장한 합의물이라 규정하는 편이다.

   

오늘날 IOC체제는 사마란치의 수렴청정 체제이다. 쿠베르탱의 후임인 라뚜르처럼 사마란치의 후임, 자크 로케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사마란치는 스페인 귀족 출신으로 프랑코 정권 때 IOC 위원이 되었고, 체육장관이 되었을 만큼 프랑코로부터 신임을 받는 자였다. 허나, 프랑코가 죽자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소대사로 간다.

   

신기하지 않은가. 스페인에서는 극우 파시스트파였는데, 소련 주소대사로 가서 극좌 소련파가 된다. 허나, 국유본론을 이해하면 신기하지 않다. 프랑코나 소련 공산당파나 모두 빅터 로스차일드 지배하에 있던 노비네파이기 때문이다.

   

사마란치는 1980년 IOC 위원장이 되는데,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의 막후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다.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이 사마란치를 지지한 것은 사마란치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를 거부하는 서방 측을 비판한 데서 비롯된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의문은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이 어떻게 프랑코의 충직한 신하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해서, 나는 제안하는 것이다. 이념의 틀을 벗고서 현실을 마주하면 답이 나온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내분

http://brainstem.egloos.com/4326805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코트의 원인은 소련의 아프칸 침공이다. 헌데, 뉴라이트 브레진스키는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자신이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지원하면서 소련 아프칸 침공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냉전이 어제 오늘 일인가? 왜 하필 1980년대에 유난을 떨었는가 하면 서방과 소련의 문제가 아니라 빅터 로스차일드 노비네파 대 데이비드 록펠러 뉴라이트 대결이었던 것이다.

   

   

하면, 왜 국제유태자본은 IOC의 효과를 인정하였는가. 현실적으로 소련과 연방체제는 오래갈 수 없었다. 소련 자체마저 유지하기 버거운 체제에서 동유럽과 중국까지 관리한다는 것은, 국제유태자본의 은밀한 지원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겠다. 허나, 은밀한 지원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정신적으로 자족할 수 없다면 체제 유지는 어렵기 때문이다. 해서, 동구 정권은 올림픽이야말로 전쟁이 아닌 평화 시에 체제 유지에 보탬이 되는 장치임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픽에서 자국 선수의 우수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손기정처럼 피압박민족에게는 해방정서로 다가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할 수 있었다.

   

나는 이후에 언급할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뉴라이트 전두환 정권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거의 없음을 입증할 것이다. 해서,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역시 전두환 정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국제유태자본의 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마란치는 많은 일을 했다. 비록 그가 집권하기 직전인 1980년 IOC 총회가 올림픽 헌장에서 출전 자격에서 아마추어를 삭제하여 프로도 참가를 용인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지만, 이를 노골적으로 실행한 것은 사마란치다. 사마란치가 노비네파였지만, 이 점에서 만큼은 뉴라이트 투사요, 신자유주의 전사였다.

   

그의 시대부터 각국별 메달집계가 공식적이지는 않아도 IOC로부터 묵인되어 대회조직위원회가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공적이 인정되어 사마란치는 종신 명예위원장이 되었다. 아울러 선수위원 역시도 1999년 개혁 조치의 일환이다. 그 이전 뇌물 파동으로 발생한 것이다.

   

해서, 이러저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문대성이 압도적인 표차로 선수위원이 된 것은, 사마란치의 덕이며, 국제유태자본의 힘이 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IOC 위원은 해당 국가를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IOC의 대사이다. 해서, 한국의 입장을 IOC에 설득하는 입장이 아니라 IOC 입장을 한국에 설명하는 역할이다. 이는 삼각위원회나 혹은 중국 중앙은행을 제외한 각국 중앙은행장 입지와 유사하다.

   

해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왜 이 시점에서 문대성이 IOC위원으로 당선되었는가. 하고, 왜 이전의 도전은 실패하였는가.

   

나는 강조한다. 국제유태자본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전략적으로 가장 바보 같은 짓임을 말이다. 그보다 나는 국제유태자본만큼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존재임을 드러내는 진지한 저항 전략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싸워라. 투쟁하지 않고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 메달 많이 딴다고 선진국이 되나?

   

하나, 메달 많이 딴다고 선진국이 되나?

   

메달을 많이 딴다고 선진국이 된다면 나부터 열심히 메달을 독려할 것이다. 허나, 메달 순위는 선진국 순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중국이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 순위 1위를 차지한다고 해서, 혹은 미국을 제친다고 해서 전 세계인 그 어느 누구도 중국이 미국보다 국력이 앞서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한국이 중국을 제치고 메달 수위를 기록한다 해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국과 한국에 대한 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둘, 금메달보다 때로는 은메달이 값지다

   

금메달이 은메달보다 값진 것은 분명하다. 허나, 때로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 동메달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아마추어 수영대회 때다. 모두가 다 골인한 상황에서 꼴찌 한 명이 완주를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갑자기 장내 사람들이 모두 박수치며 힘내라고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녀는 숨이 차서 도중에 멈추었다가 환호에 힘입어 마침내 완주를 해냈다. 사람들이 농을 했다. 허. 어째 일등보다 더 큰 박수가 나오나? 일등이 아니면 차라리 꼴찌를 하는 것도 좋겠네.

   

사람들이 금메달에 환호하는 것은 금메달리스트가 그 분야에서 현재 시점으로 세계 최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가 되기까지의 인간 역정에 감동하는 것이다. 해서, 금메달리스트만 인간 역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은메달리스트도, 동메달리스트도 있다. 때로는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감동적일 수도 있다.

   

하여, 금메달을 못 땄다고 국민에게 미안할 이유는 추호도 없다. 금메달을 따면 연금 혜택이 있으므로 가족에게 미안할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성보다 감성에 많이 치우치는 단점이 있다. 쪽발놈현 탄핵 때도 그렇고, 근래도 그렇고, 이성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저 누군가가 의도한 대로 휩쓸리는 쥐떼일 때가 있는 듯싶어 서글프다.

   

셋, 3사 방송국 똑같이 방송 프로 방영하면 전파 낭비

   

어느 방송사가 하루 종일 태권도 방송만 해준다고 생각해보자. 한국 선수만 출전하는 경기만 방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모든 태권도 경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편성 하나만으로도 국민의 태권도 이해는 매우 깊어질 것이다.

   

또 어느 방송사는 삼일 내내 육상 경기만 보여준다고 하자. 한국 선수들이 매번 예선 탈락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 선수들이 얼마나 육상 분야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지를 방영한다. 시청율이 다소 낮더라도 공영 방송을 자임하는 방송사 하나쯤은 소신을 가지고 임한다면 혁신적 방송 운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허나 한국의 방송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모두 똑같이 같은 프로를 방송한다. 전파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시청자에 대한 정신적 테러 행위다.

   

넷, 올림픽 정신을 되살리자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은 말한다.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

   

수많은 세계인이 올림픽에 감동하는 것은 단지 선수들의 기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깨끗하고 멋진 승부, 결과가 난 이후 승복하고 축하하는 자세, 동메달을 땄다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좋아하는 태도, 그 나라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종목에서 꼴찌에 개의치 않고 출전하는 도전 정신, 무엇보다 돈을 우선으로 매기는 프로 정신이 아닌 돈보다 인간의 궁극을 추구하는 아마추어리즘 정신이 올림픽 정신이 아니던가.

   

오늘날 올림픽은 올림픽 정신에서 많이 이탈한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는 올림픽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왜 이 세상은 전쟁이 끊이질 않는가. 왜 빈익빈 부익부는 날로 심화되는가. 왜 인간은 빚을 지면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혁명은 작은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대부터 올림픽 기간 동안만이라도 올림픽 정신을 되새긴다면 우리의 혁명은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한다. 

   

   

5. 메달 집계는 공식적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잘 못 알고 있는 상식 중 하나가 메달 집계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이다. 비록 조직위원회 웹진에서 다룰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이며, 묵인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올림픽 주관 단체인 IOC에서는 메달 집계를 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각 나라 언론사나 조직위원회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비공식적으로 메달 집계를 할 따름인 것이다.

   

또한 각 나라 언론사의 메달 집계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현재 한국 언론사가 채택한 방식이며, 이 방식은 미국 등 소수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 언론사가 활용하고 있다. 이 방식의 특징은 금메달의 가치를 보다 높이 평가하는 데에 있다. 반면 다른 하나는 미국 등의 방식인데 금, 은, 동을 가리지 않고 전체 메달수를 합한 것을 메달 순위로 한다. 해서, 집계 방식이 다르므로, 순위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등의 방식이 언뜻 보면 진보적인 듯싶은데, 과연 어떤 이유로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일까. 이유는 너무나 간단해서 허탈할 지경이다. 미국의 금메달 밭이 주로 기초 종목들이고, 이 종목들에서 미국이 금, 은, 동을 모두 가져갈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어떤 숭고한 이상이 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라스베가스 도박사가 어느 방식을 택하는 것이 유리한가 결정한 것이라 보면 된다.

   

나는 여기에 약간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과거 한때 금본위제에 맞서서 금과 은을 동시에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채택하자고 하는 은화자유주조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은화자유주조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1873년 공황 탓이다. 서부 개척하는 이들에게 땅을 준다, 저리로 대출한다 해놓고 어느 날 갑자기 대출 회수에 금융권이 나선 탓이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에게서 약탈한 땅을 무상으로 서부 이주민에게 주었는데, 이 조치로 대부분의 땅들을 고스란히 금융권 손아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해서, 통화량이 급격히 줄어든 데에 분노한 서부 농민들은 통화량 증가를 목표로 은화자유주조운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허나, 이 운동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금이나 은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핵심은 누가 금융을 쥐고 있는가, 누가 가격 결정권이 있는가였다. 연방은행이 없어도, 그로 인해 상당히 불편하였음에도, 국제유태자본은 얼마든지 주도를 할 수 있었다. 당대 철도란 곧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유태자본이 국제유태자본의 얼굴마담, 프랭클린 루즈벨트 집권 때 결정적인 일을 했다. 이전까지 1달러 화폐는 금과 교환할 수 있었다. 허나, 1933년 이후는 1달러 지폐란 만약의 사태 때 단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해서, 만일 국제유태자본 입장에서라면 어떨까. 국유본은 욕망의 천재다. 국제유태자본은 단체로 금을 따건, 개인이 금을 따건 금메달 하나라는 점에서 같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유태자본은 단체가 합심하여 작품을 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국유본은 모든 집단 이데올로기가 파산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는 허약한 개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자발적으로 국유본에게 노예화하기를 요청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여, 욕망의 천재인 국유본은 축구와 같은 종목에서 공동체 의식을 크게 높인 스페인 같은 족속을 그대로 방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질투심을 한껏 이용하여 스페인 경제 위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국유본 왈, 질투는 나의 힘인 게다.

   

더 나아가 올림픽을 모든 선수들이 땀을 열심히 흘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잔치에서 금은동 잔치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도전을 획일적인 가치로 평가해야 안심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메달을 땄다고 각국에서는 잔치를 벌이고 좋아한다. 마치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눈물을 흘린다. 허나, 이것이 끝인가.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는 금메달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종목이 우대를 받을 것이며, 적은 종목이 외면을 받을 공산이 크다. 또한 각국에서는 잘 하는 종목을 집중 육성하고, 못 하는 종목을 푸대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과거 자유무역론 이치와 같다. 그런데 눈여겨보면, 동양인에게 익숙한 족구 같은 종목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기에는 매우 어렵지만, 오직 서양인들만 아는 종목은 올림픽 종목으로 선정되는 것이 매우 쉽고, 금메달 수도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올림픽 메달 집계를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IOC는 공식적으로 메달 집계를 하지 않는다. 단지 각 언론사에서 할 따름이다. 민간이 하는 일인 만큼 관여할 수 없다. 마치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 민간 소유이듯 개입할 수 없다.

   

또한 설사 올림픽 메달 집계를 바꾼다고 달라질 것은 무엇일까. 이는 최종 결과물일 따름이다. 그 원인이 되는 세계 체제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올림픽 시스템도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현재 UN이 UN 이전의 국제연맹처럼 그루지아 사태에 무용지물이 되었듯이 말이다. 

   

해서, 그대가 얄팍한 속셈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한국이 좀 더 메달을 많이 땄으면 하는 바램에서, 한국의 메달 순위가 지금보다 더 많이 올라갔으면 하는 바램에서 올림픽 메달 집계 방식 교체를 원한다면, 분명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허나, 그대가 올림픽 정신을 되새기면서 그 뜻을 궁극으로 이끄는 보편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여 진정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올림픽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대의 시도는 올림픽의 위선을 통렬히 배반할 것이므로.

   

   

6. 베이징 올림픽 때의 금메달 논쟁 : 중앙일보 오보를 중심으로

   

만년 백수 :

IOC는 안해도, 올림픽 조직위는 공식적으로 순위를 매기고 있습니다. 전권이 조직위에 있는 이상 공식이라고 봐야죠,,, 이번 북경올림픽 조직위도 금메달을 기준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_-;; 

   

인드라:

좋은 지적입니다. 올림픽 조직위는 그때 그때마다 다릅니다. 이번 올림픽조직위는 북경 주관입니다. 올림픽 조직위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더라도 IOC가 하지 않는 이상 공식적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관례적으로 공식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만년백수 :

ioc가 하지 않는 이상 공식적이지 않다 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어차피 전권은 올림픽조직위가 가지고 있고, 만에 하나 올림픽 정신과 무관하다면 ioc에서 제재를 가하겠죠, 하지만 전혀 그런 일은 없고, 올림픽에 관한 모든 진행사항을 조직위에 넘겨준 것이기에 ioc는 관여할 필요가 없으며,ioc는 진행사항을 감독하는 일이 더 합당한 일이죠,,

   

올림픽 메달집계도 올림픽 조직위가 해야 할 일이고, 더군다나 그간 조직위도 공식적인 메달집계를 해왔기 때문에 공식집계가 맞지요,,, 이건 동계도 물론이거니와 하계도 같습니다..

올림픽조직위가 북경 주관인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공식이 아니다는 말 (IOC가 하지 않기에 공식적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결국 같은 말이지요)은 지금 북경올림픽 공식 싸이트에 올라온 모든 내용이 공식이 아니라는 말과 같을 수밖에 없지요,,,

   

"올림픽경기대회의 정기적인 개최를 총괄·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가 IOC의 존재이유 입니다.대회'운영'에 관한 모든 사항은 조직위원회가 가지고 있으며, ioc가 공식집계를 한다는 말이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요,, 비교가 될런지 모르지만 행정에 관한 실제적 '집행 및 운영'관한 권한은 국무총리가 하지요,, 대통령이 일임을 했기에, 국무총리가 하는 일이 비공식이 될 수는 없지요.

   

인드라 :

좋은 말씀입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비유는 재미있는 비유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조직위 홈페이지에는 님이 말씀하신 '운영'에 속할 수 있는 각종 올림픽 기록 자료가 있는 반면 금메달을 얼마나 땄다는 결과는 전혀 없습니다. 즉, 기록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정기적인 개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나, 메달 순위는 그저 주관 단체의 흥행 이벤트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굳이 막을 이유는 없겠습니다. 곁가지이니까요. 다시 말해, 이후 런던올림픽에서는 런던 주관이 메달집계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따라서 공식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관례적으로 준공식 대우를 받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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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메달 집계에 대해 공식적이 아님을 강조하는 이유는 규정에 집착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공식적인 것이라면 IOC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기존의 룰을 변경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것이라면 IOC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룰을 만들 필요를 요구받게 된다.

   

올림픽은 월드컵과 달리 대회조직위원회에 전권을 부여하는 편이다. 문제는 북경올림픽 때의 메달집계 방식과 애틀란타올림픽 때의 메달집계 방식이 각 나라 사정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해서, IOC가 이런 문제를 회피하면서 장기적인 대회 개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메달 집계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IOC는 올림픽 정신을 늘 우선시해야 하는데 국가별 메달 집계 방식이 주는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올림픽은 월드컵과 달리 이 점을 의식하여 중국 올림픽이라 하지 않고 북경 올림픽이라고 한다. 축구 경기가 상해에서도 열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즉, 국가간 경쟁에 상당한 이념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앞장서서 부추긴다는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게다. 올림픽 재정 문제를 고려하여 묵인을 할 수 있지만, 승인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하여, IOC는 관례적으로 메달 집계를 대회조직위원회가 하는 것을 재정 면에서 보탬이 된다 여겨 묵인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IOC가 인정하는 것은 올림픽 기록뿐이다.

   

하면, 변화의 여지가 없는가. 아니다. 있다.

   

첫째, 올림픽 정신이 잊혀져가고 있다. 이는 전 세계인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보다 더 큰 재미를 위해 올림픽 정신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IOC는 장기적인 대회 개최라는 목표에 입각하여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IOC 위원은 종래 국제유태자본의 300인 위원회처럼 종신이었지만, 99년부터 70세로 제한을 두었으며, 또한 국제경기단체(IF)대표 가운데 15명과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중 15명을 선수위원으로 선출한다. 이처럼 IOC 위원 구성이 소폭이라도 달라졌음은 향후 올림픽 규정에도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셋째, 올림픽은 현재 단일 종목 행사인 축구 월드컵 인기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올림픽 재정에 지속적인 타격을 주며, 장기적인 대회 지속을 방해한다. 해서, 월드컵보다 인기를 높일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위와 같은 이유가 있으므로 현행 묵인된 메달 집계 순위 방식이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 메달 집계 순위 방식이 비록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고 있고, 특정 종목 협회에 금메달이 편중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어 늘 말썽소지가 발생하고, 금은동만 우대하여 나머지 선수들이 소외되는데도 불구하고, 메달 집계 방식을 고수하면 세계인이 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시청률이 올라가서 재정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면, 이 난관을 풀 대안은 없을까.

   

하나의 대안이 있다. 종합 점수제인 게다. 그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금은동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한다. 다만 메달 집계 순위 방식을 하지 않는다.

   

둘째, 모든 본선 참가 선수에 대해 1점을 부여한다. 올림픽 출전 자격을 따내려면 예선을 통과해야 한다.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가령 이번 올림픽에도 예외 없이 꼴찌가 아름다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라크 조정팀이다. 여러 시련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단지 미담으로만 남을 것인가. 실질적인 반영을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예선 없이 통과한 개최국 선수들이다. 안 그래도 개최국 이점이 있는 만큼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누리 없이 점수를 인정하자는 게다. 흥행을 위해 예선 없이 통과를 인정한 게다. 하여, 보다 더 흥행 효과를 누린다면 점수제에도 반영을 해주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무엇보다 참가한 선수 모두에게 평등한 점수가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개인과 단체의 문제다. 팀을 하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나눠서 볼 것인가이다. 취지가 참가 선수에 대한 예우이므로 나눠서 볼 수밖에 없다. 단, 단체에서 그 수는 후보 선수를 제외한다. 즉, 축구 경기에서 뛰는 선수가 11명이면 11명만 인정하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실제 뛰는 선수는 늘 11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육상, 수영에서처럼 한 선수가 여러 종목에 동시에 뛰는 경우 판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참가 선수에 대한 예우이기 때문에 한 선수가 여러 종목에 뛰어도 1점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금은동 시스템을 유지하되, 8위까지의 입선자에까지 점수를 부여한다. 현행 제도에서도 4위에서 8위까지는 상장을 수여한다. 한국도 이에 기준하여 연금 점수를 매기고 있다. 가령 금메달: 90점, 은메달: 30점, 동메달:20점, 4위:8점, 5위:4점, 6위:2점이다. 역도 김광훈이 4위를 하여 아무런 보상을 못 받을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규정에 따르면, 연금 점수 8점을 받고, 올림픽 규정 하에 상장도 받는다.

   

허나, 현행 메달 집계 방식에서는 4위부터 8위까지의 입상이 유명무실한 셈이다. 해서 종합 점수제로 평가한다면 보다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 연금 점수는 현행 메달 집계 방식에 따른 것이므로 종합점수제가 된다면 금은동과 4~8위 점수를 적절한 선에서 조정 가능할 것이다.

   

넷째, 각 종목간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종목은 협회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면, 종합점수제는 각 종목간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우선해야 한다. 이는 미국 상하원 의원 산정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즉, 모든 종목은 종목간 불평등 없이 모두 똑같은 점수를 부여받는다. 가령 육상 종목에서 40개 금메달이 있더라도 종합 점수제에서는 총점이 핸드볼 종목 총점과 같은 것이다. 해서, 육상 종목은 상대적으로 금메달이 많지만, 금메달 하나 따도 단체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것과 다르게 나타난다. 즉, 육상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야 핸드볼  종목 남녀를 석권한 점수와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인구 비례로 점수를 산정하는 것이다. 이 점수 산정은 협회 선수등록수를 기준으로 한다. 등록된 선수가 많은 협회일수록 그만큼 더 가중치 총점을 추가로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합점수제, 일명 인드라 룰로 시행하면 현행 메달집계 방식을 어느 정도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면 이 인드라 룰이 받아들여질 확률은? 극히 미미한 것이 사실이며,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 금메달리스트에로만 쏠리는 과중한 부담감은 금메달리스트 자신들조차 문제로 인식할 것이며, 이는 선수 위원들에게 의견이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메달 수뿐만 아니라 종합 점수제로 인해 메달 수가 몇 안 되는 종목에서도 역할론을 각국에 호소할 수 있고, 그러한 종목 협회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셋째, 참가만 하더라도 점수를 부여하는 제도는 올림픽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동시에 보다 많은 세계인이 올림픽에 관심을 지니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대안을 내놓았지만, 대안이란 어디까지나 현실과 이상간의 부단한 타협인 게다. 해서 보다 먼 미래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많고, 때로는 오히려 종전보다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올림픽 정신이 끝없이 훼손된 것은 외부적인 요인이 우선이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올림픽 제도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닌지 의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이트에 따르면 13일(오후 11시30분 현재) 1위는 금메달 17개를 딴 중국이다. 미국은 금메달 10개로 2위다. "  "정해진 규칙은 없다. IOC는 지나친 경쟁이 올림픽 정신을 위배한다고 보고 메달 집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국가가 비공식적으로 국가 순위를 매기자 IOC도 1992년부터 메달 집계를 시작했고,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고 있다."

IOC는 중국이 1위 CNN선 미국이 1위 … 헷갈리는 메달 순위

 http://news.joins.com/article/3259783.html?ctg=14

   

나는 지난 8월 13일 새벽에 올림픽 유감 2라는 글에서 올림픽 메달 집계는 공식적이지 않음을 주장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월스트리트저널지도 내 주제와 흡사한 기사를 같은 날 8월 13일에 올렸는데, 이 기사 올린 시각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어떤 경우라도 내가 월스트리트저널지를 보고 인용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즉, 나와 월스트리트저널 기자가 우연히 동일한 날에 같은 주제를 쓴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재 올바른 판단이다.

   

나는 올림픽 2라는 글에 이어 다음 날 올림픽 유감 3이란 글에서 상기한 중앙일보의 오보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상기한 기사에 따르면, IOC가 마치 공식적으로 국가별 메달 순위를 매기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보도는 흥미롭게도 내 글에 댓글을 달은 '만년백수'란 분과 견해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는 댓글에서 "ioc가 하지 않는 이상 공식적이지 않다 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어차피 전권은 올림픽조직위가 가지고 있고, 만에 하나 올림픽 정신과 무관하다면 ioc에서 제재를 가하겠죠, 하지만 전혀 그런 일은 없고, 올림픽에 관한 모든 진행사항을 조직위에 넘겨준 것이기에 ioc는 관여할 필요가 없으며, ioc는 진행사항을 감독하는 일이 더 합당한 일이죠,,  올림픽 메달집계도 올림픽 조직위가 해야 할 일이고, 더군다나 그간 조직위도 공식적인 메달집계를 해왔기 때문에 공식집계가 맞지요,,, "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해서, 중앙일보 기사와 만년백수 입장에 대한 반론 성격으로 올림픽 유감 3이란 글을 쓴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와 관련된 기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 현재 IOC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다면서, 두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전하고 있다."

   

[취재파일] 올림픽, 금메달이 최고??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458221

   

헌데 SBS 보도는 중앙일보 보도처럼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에 따른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인용하면서  IOC의 공식적인 입장이없음을 말한다. 같은 출처를 보고 기사화하였음에도 왜 중앙일보와 SBS보도가 다른 것일까.

   

하여, 월스트리트저널지의 기사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언론이 외국 언론의 기사를 인용할 때는 소상히 밝힐 필요는 없지만, 출처를 찾아보는 이들을 위해 기사 제목이나 기자 정도는 말해주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기사의 정확성을 위해서다. 중앙일보가 13일자 월스트리트저널지라고 했으니 아랫 기사일 확율이 99.9999%일 것이다.

   

Who's on First in Medals Race?

http://online.wsj.com/article/SB121856271893833843.html

   

 IAN JOHNSON이란 이가 8월 13일에 쓴 기사인데 제목이 <워떤 넘이 대체 일등인겨?> 되겠다. 기사를 짧은 영어 실력으로 대략 봤다. 쌀국아해랑 떼국아해가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누가 일등을 하고 있는가 하는 논쟁을 하고 있는데 두 입장 모두 맞다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그래서 어느 입장이 더 옳다, 뭐 이런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므로 논란이 되는 대목만 인용을 하겠다.

   

"Strictly speaking, medal tables aren't supposed to exist. According to the Olympic Charter, "The IOC and the OCOG (the local Organizing Committee of the Olympic Games) shall not draw up any global ranking per country."

   

번역하면, '아가리 묵념하고 잘 들어라, 국가별 메달 순위 집계 따위는 없거든? 올림픽 헌장에 따르면, IOC는 어떤 순위도 매기지 않으니까 지좆대로 상상하지 말거래이.'되시겠다.

   

그 다음이 중앙일보 기사가 근거로 삼는 대목이 나온다.

   

"Starting in 1992, however, the IOC began to accommodate medals tables, according to Australian IOC member Kevan Gosper. It began to tally medals by countries and issue final lists, although these aren't considered official rankings, he said.He said he talked to various media organizations about how to rank countries, "and they said not to mess with it."

   

'찌라시들이 올림픽 때만 되면 개념없이 지랄을 해싸니 IOC도 1992년부터 메달 순위 집계를 하기 시작했다. 다만, 랭킹 매기는 방식에 대해 찌라시들이 뜻을 모을 수 없어 계속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하면 나는 무엇이라고 주장했나. IOC는 공식적으로 메달 집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회 조직위원회가 메달 집계하는 것을 관례적으로 '묵인'해오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메달 집계 방식이 쌀국 찌라시가 맞든, 떼국 찌라시가 옳든, 그 이전에 메달 집계 방식 자체가 여전히 공식적이지 않다는 게다. 다만, 찌라시들이 하도 떠들어대니 방송 중계료 등을 의식한 IOC가 대회 조직위원회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메달 집계 방식을 하면서 여론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게다. 해서, 메달 집계 방식에 공식적인 입장이 없다고 하는 게다. 만일 IOC가 공식적으로 메달 집계를 한다면, 그 방식도 정해져야 하는데, 정하지 않고, 현재까지 각 대회 조직위원회에게 슬쩍 책임을 미루고서는 중계료 등 재정적인 이권만 챙기자는 수작인 게다. 공식적으로 집계했다가는 올림픽 헌장을 수정해야 하는 큰일을 치루어야 하니까.

   

비유삼아 이야기하면, 대회 조직위원회가 현재 하고 있는 메달 집계는 일국의 헌법과 같은 IOC 헌장 입장에서는 위헌인 게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7 : 세계의 기후, 조작되는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16 18:37

http://blog.naver.com/miavenus/70142456769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7 : 세계의 기후, 조작되는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16

   

현재까지 기후 조작 문제에 대한 국유본론 입장을 정리한다.

   

1. 기후 조작 문제는 각 부문 기술을 융합할 수 있는 2025년 이후로 본격화할 것이다.

현재는 각 기술들이 이미 개발한 상태이거나 개발중이다. 

2. 기후 무기는 전쟁없이 일부 지역을 황폐화, 몰살시킬 수 있다.

전쟁 비용을 줄일 수 있고, 파괴에 따른 책임을 따질 수 없이 재건하여 경기활성화에 보탬이 된다.

3.  지구 온난화 문제에 관해 노비네파가 비판적인 반면 뉴라이트파/골드만파가 적극적이다.

노비네파가 비판적인 건 무기 수출 문제도 있지만, 세계 곡물 주도권이 뉴라이트파에 있기 때문이다.

기후를 조작할 수 있다면 국제 곡물가 조작은 누워서 떡먹기이다.

   

"中 연구진, 레이저 이용 인공강설 기술 개발

| 기사입력 2012-07-15 12:11

(홍콩=연합뉴스) 황희경 특파원 = 중국 연구팀이 최근 군사 연구 실험 도중 우연히 레이저를 이용해 인공으로 눈을 내리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15일 보도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상하이 광기소(光机所)의 류젠성(劉建勝) 박사팀은 레이저빔을 실험하던 중 실험실 내 안개상자(방사선을 가시화해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에 작은 눈발이 날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강력한 레이저빔을 이용해 공기의 성질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10여 년 전부터 알려졌지만 그동안은 육안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공기를 응축하는데 그쳤다.

   

레이저를 안개상자에 쏘아 에너지를 순간 폭발하게 하는 방법은 다른 과학자들과 유사했지만 류 박사팀은 순간 폭발 수를 대폭 늘려 차별화에 성공했다.

   

연구진은 두 시간 동안 레이저 빔을 쏘아 13㎍(100만분의 1g)의 눈을 만들어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연구진은 레이저빔과 가까운 지역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넓은 주변 지역까지 눈이 내렸다는데 고무됐다.

   

류 박사는 "이는 아주 미세한 레이저빔으로 두꺼운 눈의 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면서 "공기 중으로 많은 레이저빔을 쏜다면 상당한 규모와 범위의 강설지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인공강설 기술은 대부분 응결핵 역할을 하는 요오드화은(AgI)이나 액체질소(LiquidN2)를 구름 속에 뿌리는 방식으로, 값비싼 비용과 환경오염 문제가 제기돼 왔다.

   

이번 실험 결과는 지난 4월 광학 분야 국제 저널인 '옵틱스 레터스'(Optics Letters)에 게재됐다.

   

zitrone@yna.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5697839&sid1=001

   

중국에서 인공강설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인드라는 중국 기술 개발 능력에 편견이 없다. 다만, 주요 무기, 에너지, IT, 생명 관련 사업은 국유본 허가가 있어야 한다. 이는 중국이든, 한국이든, 북한이든, 일본이든 예외가 없다.

   

하면, 국유본이 중국 같은 나라에 기술 이전하는 방식은 어떤 방식이 있는가. 국유본이 과거 소련에 원자폭탄 기술 전수하듯 스파이를 통해 보내는 방식이다. 중국의 핵무장도 이 방식이었다. 북한도 예외가 없다. 다른 하나는 민간을 통한 방법이다. 가령 중국에 기술을 전수할 때 한국 기업을 통한 기술 유출이 그것이다. 한국도 국유본이 허가해주어서 기술 유출을 통해 국산화를 많이 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국산화, 기술개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랬다가는 쪽발정은도 48시간 이내에 살인 똥침을 맞고 뒈진다.

   

중국이 핵무장도 하고, 우주선도 만들고, 평소에도 기후 조작에 관심이 있었기에 자체 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중국 주요 기술 개발에는 국유본 허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레이저를 통한 인공강설도 국유본이 전수해주었을 것으로 인드라는 본다.

   

해서, 중국이 인공강설을 만들 정도면, 국유본의 기술 수준은 이보다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국유본의 기술 수준이 레이저를 통한 방식보다 한 차원 높은 저비용 고효율의 기술 수준이기에 일타삼피를 노리고 중국에 기술 전수를 해주었을 것이란 점이다.

   

하면, 기후 조작은 어떤 효과가 있으며, 어디까지 가능할까.  

   

"[북경]중기상국,올림픽개막식에 인공기상조절가능

| 기사입력 2008-07-15 18:25

앵커멘트]중국은 베이징올림픽개막식의 성공이 하늘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날씨가 문제라는 얘기인데 중국기상국이 개막식 당일 날씨를 조절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리포트}만약 베이징올림픽개막식이 악천후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기상학자들은 날씨를 바꿀 지도 모른다고 중국 기상국 관리가 밝혔습니다.천즈린 중국 기상국 부국장은 15일 올림픽 국제미디어 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올림픽개막식이 열리는 8월8일, 날씨가 좋지 못할 경우 기상국은 베이징의 날씨를 바꿀지 여부에 대해 베이징시 정부와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2003년부터 인공적으로 날씨를 변경하는 방법, 특히 강우를 줄이기 위해 준비해왔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러한 기술에는 아직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인공적인 기상 변경기술은 이슬비가 내리는 경우에 유용할 수 있으나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중국당국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당일 맑은 날씨를 만들기 위해 인공강우를 통해 기온을 낮추는 한편 구름을 분산시켜 비가오는 것을 막는 방법등을 정기적으로 시험해온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기상국은 올림픽이 개막하기 일주일 전인 8월1일까지 사전일기예보는 유효하지 않을 거라면서도 과거 통계에 따르면 1951년과 2007년사이 8월8일에 이슬비가 내린경우가 47%나 되지만 폭우가 내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고 공식예보가 아님을 전제로 발표했습니다.

   

또 통계를 인용해 우박,폭서등 극단적인 기상조건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 올림픽기간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3일에 한번 꼴로 비가 올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중국 기상국은 올림픽기간 경기장 31곳을 대상으로 텔레비전 ,핫라인 전화와 인터넷을 통해 72시간 사전예보를 서비스한다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베이징에서 라디오 코리아 뉴스 황성호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146&aid=0000023405

   

태풍 경로 조절, 인공 강우, 인공 강설 등. 이 정도가 현재 공식적으로 기후 조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물폭탄 정도는 현 기술 수준으로도 무리가 없다. 태풍을 일으킬 수는 없어도 태풍 경로를 변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공식적인 것이 이 정도이니 비공식적인 기후 조작이란 이보다 기술 수준이 높을 것이다. 인공 지진이 예다. 다만, 인드라는 다른 음모론자들과 달리 지진 문제를 신중하게 보고 있다. 하프를 통한 지진에는 회의적이다. 현 수준으로도 인공 지진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규모와 시공간을 정확하게 하는 기술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경 올림픽 때 일타 삼피 인공 강우 효과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효과란 개막식 때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그것뿐일까. 개막하기 전에 인공 강우를 하면 미리 공기 중의 수증기를 사용하므로 올림픽 기간 동안 비가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비로 인해 오염물질이나 미세먼지가 씻겨나가 공기가 맑아 숲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 살수차 동원해서 미세먼지 제거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이들은 확연히 느낄 것이다. 보통 비라면 모르되,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지나간 날씨가 정말 좋다는 것을 말이다. 그뿐 아니다. 거리의 오물도 씻겨내려 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기가 매우 맑다는 것이다. 민이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다. "아빠, 우리 강원도에 온 것 같아. 공기가 너무 좋아." 앞으로 한두 차례 더 게릴라성 폭우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세훈 시장은 그간 미세먼지 제거에 주력하여 각 구청들이 수시로 길거리에 물을 뿌려댄 바 있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도 공기가 좋아지는데, 이렇듯 폭우가 몇 번 내린다면 서울 공기가 굉장히 착해질 듯싶다~! 하고, 11월 11일에 G20 회의를 하게 된다? 지난 코펜하겐 회의에서 이명박은 룰라와 함께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뉴스위크는 존경받는 세계적인 지도자로 이명박을 거론하고 있다. G20 지도자들은 아름다운 서울의 가을을 노래할 듯싶다. 아름다운 서울, 존경받는 대통령 이명박, 그리고 국유본."

   

한국의 인공강우 기술 수준이란 매우 열악하다. 예산도 매우 적다고 한다. 그럼에도 몇 차례 실험했다고 하는데, 그 수준이란 G20 회의를 준비할 수준이 못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면? 그렇다. 북경이든, 서울이든, 런던이든 국유본이 준비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나?

   

   

    

"英 '더 타임스' 14일자 사설 제목 '비야 제발 좀 그쳐다오'

| 기사입력 2012-07-15 13:57

【런던=AP/뉴시스】유세진 기자 = "제발 비야 좀 그쳐다오."(Just. Stop. Raining.)

   

영국의 더 타임스지 14일자 사설 제목이다. 이는 수 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축축한 날씨에 대한 영국인들의 좌절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설은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다. 지금과 같은 날씨는 더이상 지속돼서는 안 된다. 비는 그쳐야 하며 그것도 매우 빠른 시일 내에 그쳐야만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영국에는 근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14일 하루 동안에만 영국 전역 75곳에서 홍수주의보가 내려질 만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나기든 이슬비든 비가 내리고 있다.

   

슈롭셔의 지역행정 책임자 마틴 미키스는 "문제는 이러한 많은 비가 일상적인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비는 계속 쏟아지면서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리즈에서 열릴 예정이던 여름 음악 페스티벌이 많은 비로 취소됐고 스포츠 행사들도 비 때문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번주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릴 예정이던 카일 미노그의 히트 팩토리 라이브 공연도 하이드 파크가 진흙창으로 변하면서 취소됐다. 지난주 윔블던 테니스 남자 단식 결승 경기로 폭우로 하루 지연됐다.

   

기상청은 편서풍인 제트 기류가 동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영국 상공에 계속 머무는 것이 이처럼 습한 날씨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지난 6월 영국의 강우량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타임스에 따르면 수영복 등 여름용품 판매가 부진을 계속하고 있으며 바베큐 등 정원용 물품 역시 판매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감자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이 치솟고 있다.

   

타임스는 영국의 날씨는 점점 더 예측할 수 없게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대변인 사라 홀랜드는 "불행하게도 날씨와 관련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dbtpwls@newsis.com"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715_0011276083&cID=10105&pID=10100

   

영국 더타임즈지는 노비네파 머독 소유의 언론이다. 인드라는 런던 날씨를 수개월째 기후 조작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하프를 이용해서 제트 기류에 변동을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를 전제하고, 런던 올림픽을 며칠 앞두고서 큰 폭우가 며칠 온다면, 그것은 기후 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폭우를 통해 오염 물질, 미세 물질을 제거하면, 올림픽 기간 중 쾌청한 날씨를 유지시킬 수 있을 뿐더러 상대적으로 맑은 날씨 탓에 기록 경신이 원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식 올림픽 기록은 국가간 메달 수가 아니라 신기록이다. 여기에 쾌청한 날씨로 인한 관광으로 흑자 올림픽을 기대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노비네파 머독이 사설까지 내보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뭔가 껀수를 잡고 생색을 내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구는…' 과학계 발칵 뒤집은 연구결과

23면2단| 기사입력 2012-07-15 20:12 | 최종수정 2012-07-16 10:06

   

빗나간 지구 온난화? "평균기온 0.6도 하락"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가 높은 가운데 지구의 평균기온이 2000년 전보다 오히려 낮아졌으며, 하락세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독일 요하네스쿠텐베르크대 연구진은 기원전 136년부터 최근까지 약 2000여년 간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주(州)에서 발견한 소나무 화석의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이 기간 지구의 기온이 0.6도 떨어졌다고 밝혔다. 나무의 나이테와 기온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온이 높아 나무가 빨리 자라는 시기에 나이테의 간격은 넓지만 기온이 낮으면 성장이 느려 간격이 좁다.

   

연구진은 2000여년 동안 지구는 '고온기'를 두 번 겪었다고 설명했다. 기원후 21~50년 사이 로마시대와 730~750년경 중세시대 때 지구의 기온은 1951~1980년 여름 평균기온과 비교했을 때 1도 가량 높았다. 반면 조선시대 초반이던 1451~1480년 때 기온은 그때보다 1.19도, 대공황이 한창이던 1920~1950년엔 0.52도 낮은 '저온기'를 겪었다.

   

이들은 "기후변화는 한 순간 일어나는 고온기라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며 "지구의 기온이 하락세라는 사실은 향후 기후 정책을 수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결과는 이달 8일 과학학술지 <네이처>의 자매지 <네이처 기후변화(Nature Climate Change)> 온라인판에 소개됐다.

   

이에 대해 권영한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지구온난화는 학계와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문제"라며 "나이테만 갖고 통계분석을 한 게 얼마나 신뢰를 갖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 기상학지(BAMS)에 실린 '기후상황 보고서'는 지난해 아프리카에선 극심한 가뭄이 일고, 유럽은 폭염이, 태국엔 대홍수가 발생하는 등 기후변화가 갈수록 심각해질 것으로 분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OECD 환경전망 2050' 보고서도 이번 세기 말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3~6도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기온이 오르면 이상기후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8&aid=0002278228&sid1=001"

   

 네이처는 사이언스와 함께 세계 과학계를 양분하는 과학 전문 주간지다. 이때, 네이처는 노비네파가 확실한 반면, 사이언스는 뉴라이트인지 골드만파인지 애매한 면이 있다. 이들 잡지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황우석 사건 때문일 것이다. 황우석 논문을 게재한 것이 사이언스이고, 이를 비판적으로 본 것이 네이처이니.

   

여기서 황우석 음모론자들이 유태인 음모론을 내세운 것이 완전히 엇나간 음모론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네이처는 노비네파이고, 사이언스는 뉴라이트 혹은 골드만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의미있느냐면, 같은 영국이어도 영국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본산이라 부르는 로슬린성당 인근에 유명한 로슬린 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에서 발표한 것이 복제양 돌리이다. 이처럼 프리메이슨 경향, 즉 뉴라이트적 경향은 인공 복제 기술이나 기후 조작 기술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 반면, 노비네파는 부시 정권 때 부시 정책을 보듯 인공 복제 기술, 기후 조작, 지구 온난화 이런 문제에 매우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것이다. 이런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헌데, 같은 노비네파라도 정통과 변두리가 차이가 있었던 듯싶다. 가령 사우디왕가나 쪽발왕가는 부시 정권처럼 정통 노비네파이지만, 리비아나 시리아 정권은 변두리 노비네파이다. 그처럼 쪽발돼중이 변두리 노비네파인 데다가 쪽발돼중이 오래살 욕심에 황우석 때에 가능하였는데, 쪽발놈현으로 오면서 쪽발놈현이 뉴라이트이고, 후기 부시정권을 뉴라이트파가 지배하다보니 변두리 노비네파 대 뉴라이트파 간의 이권 다툼이 있었던 듯싶다. 이에 황우석이 재빨리 눈치까고 대세에 순응하여 뉴라이트파에 붙었지만, 그간 같이 했던 노비네파가 황우석에게 괘씸죄를 적용해서 물을 먹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역으로 뉴라이트파가 황우석 이권을 완전 장악하기 위해 황우석을 내쳤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 되었건, 황우석 말년에 변두리 노비네파 카다피와 놀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 만큼 후자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높은 것으로 보인다. 즉, 황우석이 뉴라이트파에게 팽당한 것이다. 이때, 뉴라이트파는 황우석 비판을 위해 한국 카톨릭 뉴라이트파와 운동권을 지배하는 뉴라이트파를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중요한 건, 생명 복제, 기후 조작에 적극적인 분파는 뉴라이트/골드만파이다. 반면 생명 복제, 기후 조작에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국유본 분파는 노비네파이다.

   

"미 국민들, 강경한 대중국 무역정책 원해

| 기사입력 2012-07-16 14:01

   

【 뉴욕=정지원 특파원】 미국 국민들 중 대다수가 중국에 대한 미 정부의 강경한 무역정책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 국민들은 미국의 일자리가 중국으로 빼앗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민주당 성향의 멜만 그룹과 공화당 성향의 노스스타오피니언리서치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62%가 중국과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 개선을 위한 미 정부의 강경 정책을 원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조치가 무역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한 응답자는 29%에 그쳤다.

   

미국제조업연맹의 스콧 폴 사무총장은 "우리 정부가 중국과의 무역관계에 대해 너무 약하게 대처하고 있는데 대해 국민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응답자 중 무려 94%가 "미국의 일자리를 외국으로 빼앗기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으며 56%는 "미국이 세계 최강국 지위를 상실했다"고 대답했다. jjung72@fnnews.com" 

http://www.fnnews.com/view?ra=Sent1101m_View&corp=fnnews&arcid=201207160100138600008671&cDateYear=2012&cDateMonth=07&cDateDay=16

   

   

콧대 낮춘 中 … 외국기업 세금 내린다

| 기사입력 2012-07-16 18:33

본국 송금 배당세율 105%

   

해외직접투자 회복 안간힘

   

중국이 외국기업의 본국 송금액(배당금)에 대한 세율을 절반 깎아주기로 했다. 중국의 올해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8% 밑으로 떨어진 데다 외국인의 대(對) 중국 직접투자(FDI)도 감소하는 추세여서 이를 만회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16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외국기업 현지법인이 본국으로 배당금을 송금할 경우 원천징수 세율을 기존의 10%에서 최대 5%로 낮춰주기로 했다. 이 조치는 외국인 주주가 중국 기업에 투자해 받는 배당금에도 적용된다.

   

FT는 "이 조치는 중국과 이중과세방지협정을 맺은 영국 싱가포르 등 일부 국가에 적용된다"며 "그러나 미국 기업은 자체 세금규정에 따라 이번 세금감면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전했다. 한국은 1994년 중국과 이중과세방지 등을 규정한 조세협정을 체결, 이익금의 본국 송금 등에 대해 원천징수세율 5%를 적용받아왔다.

   

지난해 중국에 있는 외국기업들이 본국으로 보낸 배당금은 약 650억달러에 달한다. 이에 대한 원천징수 세금은 86억달러였다. 외국기업이 중국에서 낸 법인세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다. 글로벌 회계법인인 KPMG의 한 관계자는 "이번 조치로 중국에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세금을 감면받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더 많은 해외 기업들이 더 많은 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하게 되면 결국 중국에 대한 투자도 늘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이징=김태완 특파원 twkim@hankyung.com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71600881

   

   

   

끝으로 상기한 기후 기술 개발 뉴스가 앞으로도 꾸준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국유본은 갑자기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는 편이다. 익숙해져야 하니까. 또한, 중국에서 기술 개발했다는 뉴스가 중요한 이유는, 미국에서 기후 관련 기술 개발을 촉진시키기 위함이다. G2라는 중국에서 기후 무기를 만든다는데, 안보 차원에서 미국이 기후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여론 조성에서 유리한 셈이다. 사실 이미 미국은 국유본 허락하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후 무기를 만들고 있다. 미국 공군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이면 완성단계라고 한다.

   

아래 글은 이전에 인드라가 쓴 인월리이니 참고하길 바란다.

   

   

기후 조작에 의한 인공 폭우인가, 게릴라성 호우인가 

http://blog.naver.com/miavenus/70094409250

    

    

기후 조작에 의한 인공 폭우인가, 게릴라성 폭우인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0/09/25

   

폭포처럼 쏟아졌다. 인드라 출근 시간 전후로 집중호우가 쏟아져서 시간당 백 미리 가까이 되는 비가 내렸다. 어느 정도일까. 인드라가 사는 동네 사진을 확인하자^^!

   

   

   

   

   

"시간당 강수량이 1~3㎜ 정도면 우산을 쓰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정도다. 시간당 10㎜가 내릴 때는 약간 물이 고인 곳이 생기고 양철지붕에 빗발치는 소리가 들리게 된다. 시간당 20㎜ 정도면 빗소리가 심하고 온통 땅바닥에 물이 고이게 된다. 30㎜가 내리면 억수같이 쏟아져서 밭이나 하수가 넘치는 정도. 시간당 50㎜ 정도면 양동이로 퍼붓듯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상태다. 시간당 100㎜ 이상이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진다고 느껴질 정도다... 호우주의보는 앞으로 12시간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이 80㎜ 이상, 호우경보는 강우량이 150㎜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한다... 집중호우의 증가 원인은 무엇인가 지금으로선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기온이 상승하면 증발되는 수증기의 양도 증가하게 되며 이는 대기 중 에너지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각종 기상현상의 강도가 커지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온난화의 속도는 지구 전체의 평균보다 훨씬 빠르다. 기상 전문가들은 앞으로 집중호우가 더 자주 내릴 것이며 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4900wb?Redirect=Log&logNo=60041190378

   

하면, 낙뢰를 동반한 이런 폭우가 왜 일어났던 것인가. 원인은? 기상청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추석 연휴 첫날인 21일 서울 화곡동에 287.5㎜ 가량 비가 내리는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시간당 100㎜이상의 기습 폭우가 내렸다. 서울 화곡동은 이날 오후 8시 현재 287.5㎜를 기록한 반면, 방학동은 86.5㎜ 가량 비가 내렸다. 이밖에도 경기북부는 40~260㎜의 비가 내렸지만 경기남부는 1~100㎜를 기록하는 등 지역적으로 강수량의 편차가 최고 200mm 이상을 나타나는 전형적인 국지성 집중호우 형태를 보였다. 국지성 기습 폭우의 원인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서 형성된 찬 대륙고기압과 남쪽의 따뜻한 북태평양고기압이 서로 충돌하며 정체전선을 형성, 비구름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기상청은 21일"정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서는 찬 공기가, 남쪽에서는 따뜻한 수증기를 포함한 강한 남서풍이 올라오면서 서울ㆍ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강하게 부딪치는 수렴대가 형성되었다"집중 호우의 원인을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 상공의 상층부에서 기압골이 지나며 하층의 수증기를 끌어올려 비 구름대를 더욱 크게 발달시킨 탓에 중부지방에 예상보다 많은 비가 내린 것으로 기상청은 분석했다. "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921000076

   

상기한 데서 몇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장마전선이란?

http://100.naver.com/100.nhn?docid=132777

   

하나, 이번 비는 장마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장마 전선이란 오호츠크해고기압과 북태평양고기압이 한반도 상공에 정체되면서 그 사이로 뚜렷한 전선이 생기고, 북태평양고기압으로부터 만들어진 수렴대를 장마전선이라 한다. 허나, 이번 폭우는 오호츠크해 고기압과 북태평양 고기압이 만난 것이 아니라 대륙 고기압과 북태평양 고기압이 만난 결과다.

   

둘, 대륙 고기압과 북태평양 고기압이 만났다 해서 일이 나는 것이 아니다. 각 고기압들이 이동하면 된다. 허나, 한반도를 둘러싸고 마치 장마전선처럼 정체되어 서로 힘겨루기를 했던 것이다. 하면, 왜 이들 고기압은 제 자리에 머물렀나. 기상청 설명으로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일본 쪽으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태평양에서 태풍이 몰려와 북태평양 고기압의 후퇴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셋, 하면, 북태평양 고기압이 태풍 때문이라면 대륙 고기압은 평소 하던 대로 하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제트 기류이다.

   

   

   

"기상청은 "지구 온난화로 북반구 중위도의 제트기류가 기류의 이동을 저지하는 '블로킹' 현상이 발생하면서 기압계가 한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공기 흐름이 섞이지 않으면서 고립된 고기압과 저기압이 형성된다. 특히 최근 2주 이상 계속된 블로킹 현상은 제트기류가 서유럽과 러시아 한복판 사이를 뱀이 지그재그로 기어가는 형태의 '사행현상'을 나타내면서 그 북쪽의 찬 기단과 남쪽의 따뜻한 기단이 섞이는 것을 막았다. 이런 까닭에 러시아에선 아조레스 고기압이 정체된 가운데 중동지역에서 따뜻한 공기가 강하게 유입돼 130년 만의 폭염이 나타났다. 사행하는 제트기류의 깊은 기압골 지역에 위치한 파키스탄에서는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기압골로 계속 유입되는 와중에 남쪽 인도양 해수면 온도 상승으로 인한 강한 수분 유입으로 최악의 물난리를 겪었다. 기상청은 "아직 제트기류의 이상발달 원인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00822002041&subctg1=&subctg2

   

"영국 기상청의 피터 스콧 박사와 미국 국가대기연구센터의 켈빈 트렌버스 박사는 최근 러시아 폭염과 파키스탄의 홍수가 연관돼 있다는 주장을 펴 주목받고 있다. 파키스탄 인근에서 저기압이 강해지면서 생긴 상승 기류가 하강하는 지점이 러시아 부근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폭염이 발생했다는 가설이다. 가설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고기압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는 정체현상이 일어났다. 고기압이 정체되면 일사량이 급증한다. 이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대기 흐름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242149295&code=940701

   

제트 기류? 일단 제트 기류 탓이라고 하자. 해서, 기상청이 제시한 가설대로 원인을 설명하자. 제트 기류가 이상 현상을 보여 기단들이 이동하지 않고 고립되어 정체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기단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폭염이 있는 지역은 더더욱 더워지고 가물며, 반대로 비가 오는 지역은 계속 비가 오게 된다. 여기에 라니냐 현상이 발생하여 한반도로 더 많은 수증기가 유입된다는 것이다.

   

   

   

   

   

   

   

   

   

   

   

   

예서, 인드라 생각은 무엇인가.

   

하나, 라니냐 현상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지구온난화와 엘니뇨, 흑점 현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월리를 참고하기 바란다. 간단히 말한다면, 현재까지는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 효과는 있는 반면, 흑점 현상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다. 예서,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 효과에서 상당수 차지하는 것이 인간이 방귀를 뀐다는 것이다^^! 그 외에 인간이 저지르는 환경 파괴가 지구 온난화에 미치는 효과란 미미한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환경 파괴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한다. 다만, 지구 온난화와는 별 관계가 없을 뿐이다. 하고, 이 흑점 현상에서 엘니뇨와 라니냐 등 지구적인 해류 현상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다만, 이 메카니즘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불쌍한 진실 : 국제유태자본과 지구 온난화 1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70584863

   

불쌍한 진실 : 국제유태자본과 지구 온난화 2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70787053

   

불쌍한 진실 : 국제유태자본과 지구 온난화 3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70902016

   

불쌍한 진실 : 국제유태자본과 지구 온난화 4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71270845

   

불쌍한 진실 : 국제유태자본과 지구 온난화 5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71955822

   

지구 온난화는 축복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73766812

   

둘, 제트 기류란 간단히 말해 하늘 고속도로이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어떤 나비가 한국에서 미국까지 날아가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만일 제트 기류를 타게 된다면 순식간에 택배 배달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제트 기류가 늘 안정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유체 흐름이란 비선형적이어서 복잡 미묘하기 때문이다.

   

예서, 눈치를 챈 분들도 있을 것이다. 초기 조건에 따라 기후가 급속히 바뀐다는 나비 효과.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가 1961년 기상관측을 하다가 생각해낸 이 원리는 훗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토대가 되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예측이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처음에 이 현상을 설명할 때는 나비가 아닌 갈매기가 사용되었지만, 이후에는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갈매기를 나비로 바꾸었다. 이 가상의 현상은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초기 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 곧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68277

   

   

셋, 인드라는 의문이다. 게릴라성 호우, 국지성 호우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지형적 산물이다. 이는 비구름이 동으로 이동하다 태백산맥에 막혀서 영서지역에 비를 뿌리는 현상이라든가 지리산에 막혀 인근에 비를 뿌리는 현상을 생각하면 쉽다. 허나, 이번 비는 지역적 특징과는 무관한 듯이 보였다. 다른 하나는 강한 일조량에 따른 대기 불안정에 의한 강한 상승기류 탓인데, 과연 이전 수도권 날씨가 더웠다고는 해도 그 정도였는지 의문이다. 해서, 기상청 예상은 틀렸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오겠지만, 태풍의 소멸로 30미리 정도 뿌려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하면, 이러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만일 기후 초기 조건에 인공 강우처럼 인위적인 어떤 요소를 투입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키 어려운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다시 말해, 하루 30미리가 아니라 하루 300미리로 열배 뻥튀기할 수 있지 않을까? 

   

http://blog.naver.com/zzara12?Redirect=Log&logNo=130020141172

   

만일 제트기류에 모종의 실험을 할 수 있다면?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기후무기 하프에 대해서는 과장된 것이 많다고 보고 있다. 현재 인드라가 보기에는 기후무기 하프가 인공 지진의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매우 뒤떨어진다. 해서, 회의적이다. 허나, 폭우가 제트기류와 연관이 되서는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에서는 하프가 나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인드라가 보기에, 현 기술 수준은 원래 없던 현상을 만들지는 못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허나, 이슬비를 폭우로 바뀌게 하거나, 태풍의 경로를 바꾸게 하거나, 제트기류의 움직임을 더욱 증폭을 시킬 수는 있지 않겠나 보고 있는 것이다.

   

하면, 과연 제트기류를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인가?

   

   

   

   

   

영화 '트루먼쇼'에 등장하는 기후 조절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올림픽 때 탁한 공기를 정화시키고자 일주일 내내 인공 비를 내리게 했다. 러시아 역시도 전승기념일을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인공 비를 사용한 바 있다. 비록 중국과 러시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만, 한국에서도 올해 서울에서 인공 비를 실험을 한 바 있다.

   

   

   

인공 비 원리는 간단하다. 공기 중에 있는 구름 대에 드라이아이스와 같은 응결핵을 뿌려대면 된다. 하면, 인공 비에서 인공 폭우로 응용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만일 시간당 20~30미리 정도 비가 내릴 것이 예상되는 지역에 드라이아이스를 왕창 뿌려댄다면, 비용이 문제일 뿐, 시간당 100미리 이상 비를 내리게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이때, 인공비의 특징은 무엇인가. 인공 비를 사용하게 되면, 주위로부터 수증기를 모두 빨아들었기에 인근에서는 가물게 된다. 가령 작년에 한반도가 가물었던 것은 중국에서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고, 올해 한국에서는 비가 많이 내리는 반면 일본은 가물다고 한다. 또한 비가 내린 이후에는 공기 중에 있던 수증기를 원 없이 사용했기에 해당 지역은 한동안 맑은 날씨가 계속 된다. 게릴라성 폭우, 혹은 국지성 호우의 특징과 유사하다.

   

   

   

"적군이 이동하는 경로에 폭설을 내리게 한다면? 적의 폭격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늘에 짙은 구름을 만든다면? 기상조절기술이 핵무기를 능가하는 차세대 전략무기로 개발되고 있다. 그동안의 전쟁에서는 예상되는 기상변화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형태였으나, 21세기에는 능동적으로 기상현상을 조절·활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리라는 전망이다. 예를 들어 인위적으로 폭우를 유발함으로써 적군의 시야를 가리고, 통신 장애를 일으키며, 진군 속도를 둔화시킴으로써 전투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군사위성 등 첨단장비의 작동을 방해할 수도 있다. 적군을 감싸고 있는 안개를 걷히게 하면 적군에 대한 공격이 훨씬 수월해진다. 반면 인위적으로 강수량을 감소시킴으로써 아군의 시야를 넓히고 기동력을 향상시키는 등 작전지역에서 아군에 유리한 기상여건을 만들 수도 있다. 특히 태풍이 몰려올 때 이를 적국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5&aid=0000140835

   

   

   

'Air Force 2025 - 2025년 기후를 소유하다: 획기적 군사력 수단으로서의 기후'에 의하면, 현재 개발 중인 과학기술을 총망라해 군사적 전투 목적으로 전환시키는 연구개발에 매진한다면 2025년 미국 공군은 기후를 명실 공히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적 기후현상에 미 공군의 기술을 약간 첨가해 일반이 납득할 수 있는 좋은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이고, 적의 수단을 방해하면서 지구 전체의 통신체계를 조종하고 우주항공기술을 장악한다면, 기후조작기술은 전쟁터에서 매우 다양한 방면으로 적을 압박하고 승리로 이끄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다. 'Air Force 2025'에 필요한 기술은 이미 개별적으로 모두 개발되어 있는 상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것뿐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2025년 명실 공히 세계의 기후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현재 태풍을 일으킬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반면 태풍 이동경로를 조절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 상륙하는 태풍 통과 지역을 남해안으로 할 것인지, 중부권으로 할 것인지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지난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기대만큼 지지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면, 국제유태자본이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를 태풍으로 쑥밭을 만들 기획이 있었으나, 오바마가 국유본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인기가 있어 이 계획이 취소된 것이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반면 인공 지진 가설에 대해서는 인드라가 여러 정보를 종합한 결과,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아 유보적일 뿐, 인공 지진 가설에는 아직 회의적이다.

   

대기과학 분야는 굉장히 어려운 분야이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이 기후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 프로젝트에 써먹기 위함이지만, 지구 온난화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미국 상공 위로 수많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수시로 데이터를 받아서 에너지, 곡물 시장에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최근 천리안 위성을 통해 세계에서 7번째로 독자 기상위성을 운영하는 나라가 됐다.

   

기상위성 `천리안`의 정체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0070102011357650001

   

그간 한국은 현재 일본 등으로부터 30분 간격으로 기상위성자료를 받아쓰고 있는데 앞으로는 천리안 위성을 통해 평상시 15분 간격, 태풍 같은 위험 기상 시에는 최대 8분 간격으로 관측할 수 있게 돼 기상이변 사전대응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등 기상감시체계를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이전보다 훨씬 기상 예보가 정확해질 것이다. 해서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다 하여 기상청에서 수고하는 이들에게 뭐라 하지 않았으면 싶다. 기상예보라는 것이 원래 어려운 분야인데다 그간 장비가 좋지 않았고, 예산이 부족했었던 것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해서, 중요한 것은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아니다. 인공 폭우이든, 국지성 호우이든, 이로 인해 일타삼피 세 가지 효과가 발생한다.

   

   

   

   

   

   

   

   

하나, 북극곰 가지고서 홍보하는 데에도 점차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런 때에 새로운 이슈를 개발해야 지구 온난화를 홍보할 수 있다. 세계적인 국제도시 서울에서 국지성 폭우로 수해가 난다면 국제적인 뉴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아열대 지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아열대에서 일어나는 스콜과는 다른 게릴라성 폭우이지만, 요즘처럼 서울에 집중 호우가 자주 내려서 피해를 발생시켜야 지구 온난화 프로젝트가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오세훈의 서울은 CGI 클린턴이 주도하는 G20과 유사한 구조의 C40 세계도시 기후 정상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전 세계 40개 도시와 기후 '도시의 기후변화 대응 성과와 과제'를 의제로 하는 제3차 C40 세계도시 기후 정상회의가 19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개회식에는 한승수 국무총리, 오세훈 서울시장, 안나 티바이주카 유엔 해비탯 사무총장 등 국내외 시장 및 대표단 430여 명이 참석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7년 교토의정서 당시 170개 국가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낮춘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를 달성한 곳은 20개 국가가 채 되지 않는다"며 "이제 우리는 어떻게 온실가스 문제를 해결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10억 달러를 화력발전소에 투자하면 870개의 일자리가 생기지만 대체에너지인 풍력발전에 투자하면 3300개의 일자리가, 건물에너지합리화 사업에 투자하면 60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며 그린 이코노미를 통한 경제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5200090

   

"국가탄소배출권거래소 유치를 추진중인 서울시가 유엔 기후변화협약기구(UNFCC) '청정개발체제(CDM)' 제도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권 판매를 추진한다. 시는 온실가스 배출권 판매를 통해 10년간 모두 20억여원의 수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60901031343318004

   

   

   

   

   

   

   

   

   

   

   

둘, 4대강과 같은 물 이슈를 지속시킬 수 있다. 이로 인해 민주노동당 같은 데서 열심히 4대강 반대 투쟁을 핵심 이슈로 내세우게 되면 이정희는 한국의 랄프 네이더가 될 것이다. 하고, 친일매국수구부패민주당에서 이회창 같이 낄낄한 놈 하나 허수아비로 세우면, 박근혜가 당선되는 데에 최적의 조건이 성립이 된다. 친환경은 시민 모두가 공감하는 이슈이기는 하나, 정치적 편가르기에 써먹기는 지율스님 경우에서 보듯 상대방에게 가장 유리하고, 자신에게 가장 불리한 정치적 지형을 선사한다. 해서, 이런 이유로 국유본은 한편으로 유엔을 동원해서 4대강을 모범적인 녹색성장 프로그램이라 상찬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 4대강 비판을 고무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병주고 약주고~ 국유본의 기본 전술이다.

물폭탄 이슈가 뜨자 오세훈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놀랍다.

   

광화문 사태

http://blog.naver.com/jun8239?Redirect=Log&logNo=30094240897

   

이건 예상한 반응이다. 투쟁! 4대강! 이런 것이 계속 이슈가 되는 것이 국유본에게 이롭다. 사대강 투쟁은 박근혜 당선에 결정적이다. 아직도 유시민빠들이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고 개드립을 친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허나, 병주고 약을 준다.

   

"서울시 대책의 주된 내용은 하수관거 및 펌프시설 설계빈도를 현재 10년(시간당 75mm)에서 30년(시간당 95mm)까지 중장기적으로 높이고, 빗물펌프장 41개소를 내년까지 완료하고 40개소의 저지대 빗물펌프장과 8개의 저류조를 추가 조성하겠다는 것. 서울환경연합은 이와 관련, "2007년 수방능력향상 계획에 다 포함돼 있는 내용들인데, 실제로는 2006년 이후 서울에 빗물펌프장이 단 하나도 건설되지 않았으며 하수관로 등에 투자된 예산도 없었다"며 "지난 4년간 홍수 관리를 위한 정책과 예산은 실종상태였다"고 비판했다. 연합은 또 "이번 중장기 대책의 관련 예산은 2007년 계획의 절반 이하이고, 하수관거 등을 위한 구체적 계획이 없어 졸속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연합은 또한 이번 홍수에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한 강서구 화곡동과 양천구 신월동에 대해서도 "대부분 저지대고(범람원도 아니라 수로였던 곳들), 그나마 하천이 복개되면서 극단적으로 좁혀졌고(3.5m×2.5m), 토지이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하(또는 반지하) 개발이 의무화됐던 곳"이라며 서울시에 의한 인재임을 강조하며 반지하 개발 중단 등을 촉구했다... 서울시는 이날 반지하주택의 신규 공급을 억제할 계획이라며 서울환경연합의 지적 중 일부를 수용했다. 서울시는 이날 발표를 통해 반지하 다세대주택을 매입해 임대주택으로 활용하다 적절한 시기에 가폐쇄하겠다며, 반지하주택의 건축허가를 제한할 수 있도록 건축법 개정을 추진하고 장기적으로는 반지하주택 공급을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내 주택 326만가구 중 약 35만가구(10.7%)가 반지하주택이며, 이번 폭우로 피해를 본 9천419가구 중 대부분이 반지하주택이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7623

   

환경 시민단체의 주장을 서울시가 빛보다 빠르게 재빨리 수용하는 이러한 상황. 이러한 반지하주택 건축허가 신규 불허 조치가 부동산 시장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는 망아지님이나 안시우님에게 질문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직감으로 든 것이란 이러한 뉴스는 최근 양천구 비 목동 지역 일대 재개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셋, 서울에 사는 이들은 확연히 느낄 것이다. 보통 비라면 모르되,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지나간 날씨가 정말 좋다는 것을 말이다. 그뿐 아니다. 거리의 오물도 씻겨내려 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기가 매우 맑다는 것이다. 민이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다. "아빠, 우리 강원도에 온 것 같아. 공기가 너무 좋아." 앞으로 한두 차례 더 게릴라성 폭우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세훈 시장은 그간 미세먼지 제거에 주력하여 각 구청들이 수시로 길거리에 물을 뿌려댄 바 있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도 공기가 좋아지는데, 이렇듯 폭우가 몇 번 내린다면 서울 공기가 굉장히 착해질 듯싶다~! 하고, 11월 11일에 G20 회의를 하게 된다? 지난 코펜하겐 회의에서 이명박은 룰라와 함께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뉴스위크는 존경받는 세계적인 지도자로 이명박을 거론하고 있다. G20 지도자들은 아름다운 서울의 가을을 노래할 듯싶다. 아름다운 서울, 존경받는 대통령 이명박, 그리고 국유본.

   

끝으로 지나가는 말로, 만일 인공 폭우라면 국유본은 특히 인드라가 사는 지역에 인드라의 출근 시간에 맞춰서 번개를 동반하면서 가장 많은 비를 뿌리게 했는데 대체 왜 이래야 하나?

   

   

카페 글에 이어 블로그 글도 게시 통제가 되었다. 

   

게시 중단 글에는 별 이야기가 없다. 다만 글 말미에 이런 대목이 있을 뿐이다.

   

"국유본이란 그저 한국의 어떤  유명 블로거의 실체 없는 환상일 뿐인 게야~! 헌데, 저 놈을 어떻게 해서든 장삿꾼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좀처럼 안 걸리네. 저 자식이 국유본론으로 장사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하는데... 아, 시바, 고민이당..."

   

* 종전 인월리처럼 다양한 주제로 인월리를 쓰려고 했는데, 몇 달 쉬니 아직 감각이 오르지 않고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대신 인월리 올리는 기간을 짧게 가져가겠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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