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1 : 록펠러 1세는 침례교도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4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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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1 : 록펠러 1세는 침례교도이다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3

   

록펠러 1세는 1839년 7월 8일, 뉴욕 북부 리치포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빌은 빌 클린턴 대통령처럼 바람둥이였다. 비교적 부유한 침례교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는 떠돌이 약장수 빌의 현란한 말빨에 홀딱 넘어가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였다. 허나, 그 결혼이 비극의 출발이었다.  

   

그 비극의 끝에 록펠러 1세가 있다.

삶을 비극적으로 직시하되, 낙관적으로 살라는 것인가.

   

록펠러 1세 아버지 빌 뿌리는 위그노파에 기원한다. 프랑스 남부에 거주한 위그노파였는데, 위그노파 탄압으로 독일 라인강변으로 이주하였다가 미국으로 이민했다.

      

   

"위그노의 해외 이주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는 야만국 영국에 엄청난 보물을 안겨다 주었다. 잠사 의류산업, 야채과일 가꾸는 법, 가구 제조술 등을 영국인에게 전수했다. 매뉴펙처 방식 등을 전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모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는 유태인과 함께 네덜란드 상권을 장악했다.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는 독일 기계공업의 아버지가 되었다. 록펠러 가문은 위그노 탄압으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 가문이었다. 이 당시 미국으로 간 위그노도 많았는데, 미국에서도 위그노는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령 미국 초기 재무장관 해밀튼 어머니가 위그노였다. 워렌 버핏 가문도 위그노이다.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 워렌 델라노는 300인 위원회 회원이며, 중국 광동성에서 러셀 공사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마약 거래를 담당했다. 무엇보다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는 오늘날 스위스 시계공업(정밀기계)과 스위스 은행이 되었다.

   

   

   

루이14세는 자금을 빌리기 위해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와 거래를 해야 했기에 비밀 엄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스위스 은행의 고객 비밀주의가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루이 14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귀족이나 중산층이 있다면, 상당수는 위그노이거나 위그노에 심정적 동조인 자들이다. 스위스인 네케르가 재정총감이 된 것도 위그노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당수 입헌군주제파도 위그노와 연관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 당시 우파라고 부르던 이들 상당수가 위그노와 직간접적인 관계였다.

   

   

   

이것이 위그노의 빛이라면 그림자는 없을까.

   

   

프랑스 해적이란 위그노 해적이었다. 위그노는 사략선을 가지고 있어 에스파냐 선박을 효과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가톨릭 이교도 무리의 재산 약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위그노 해적이 어찌나 위력이 있던지 1685년 무렵까지 프랑스는 콜베르의 해상 무역 강화 정책으로 영국, 네덜란드 못지 않게 해상에서 위력을 떨칠 수 있었다. 허나, 낭트 칙령 폐기 이후 프랑스는 바다를 영국에 영원히 내어주어야 했다. 물론 영국이 해상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는 시기는 1740년대이지만, 그 단초는 낭트 칙령 이후부터인 게다.

   

   

   

헌데, 이 시기 해상 무역 주수입원이란 노예 무역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짐짝처럼 창고에 쑤셔박고 유럽이나 중동, 아메리카에 팔아먹었다.

   

   

   

밀무역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국가로 돌아가야 할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세금을 대납해주고 고리의 이자를 뜯는다는가 하는 다기다양한 악랄한 방식으로 대부업을 하며,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특히 소금은 국가 산업이었는데, 각 영지마다의 관세가 다른 점을 이용해서 위그노 소금업자들이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영지간 관세를 철폐하자 자코뱅 혁명의 고향, 브르타뉴에서 오히려 반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관세 철폐하지 말라고~! 금주법 시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미국 마피아의 원조격이었던 게다.

   

   

정리하면, 지난 오백여년간 유태인과 위그노는 유대교와 프로테스탄트 관계처럼 사이가 좋았다. 유태인과 위그노 가문끼리 심심찮게 결합하는 예가 많았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의 국유본 권력 교체 이후인 게다.

   

   

국유본 뉴라이트파는 위그노를 중심으로 브레진스키, 요한 바오로 2세로 이어지는 폴란드 커넥션을 통해서 가톨릭을 중립화시켜 국유본 노비네파 유태계를 압박해왔다. 오백년간의 동맹 체제가 깨진 셈인가? 아니면, 이 역시 짜고 고스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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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록펠러 1세에게 영향을 준 종교는 침례교였다. 록펠러 1세 할아버지는 사업적 능력을 결여한 알콜중독자였다. 록펠러 1세 아버지는 떠돌이 약장수 바람둥이였다. 하여, 록펠러 1세 할머니 루시는 손자 록펠러 1세에게 술의 해악을 이야기했고, 록펠러 1세 어머니 엘리자는 아들 록펠러 1세에게 가정을 중시하도록 가르쳤다. 하여, 록펠러 1세는 생애 술도, 담배도, 음악도, 미술도 모르고, 연애도 모르고, 오직 성경과 사업으로 살았다.

   

할머니 루시와 어머니 엘리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하였다. 루시는 당대 미국에서 명문 집안 출신이었고, 엘리자 역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록펠러가는 뿌리가 프랑스여서인지 후손들이 불어를 하지 않아도 참한 여자를 꼬시는 데에 190000이었다. 행복 끝 불행 시작. 루시와 엘리자의 결혼 생활이었다.

   

안주인들은 침례교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다. 아이를 많이 낳았고, 강한 생활력으로 아이들을 키워낸 똑순이었다. '저수지의 개들' 타란티노가 똑순이를 기억할 만큼 침례교인 어머니, 유대교인 어머니, 한국인 어머니는 특별하다.

   

록펠러 1세는 침례교인이다. 헌데, 록펠러 1세가 유태교도라고 소문이 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 록펠러 1세가 부를 획득한 과정이 신비롭기 때문이다. 둘, 록펠러 1세가 부를 획득한 과정에서 유태인이 탄복할 정도로 무자비한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셋, 침례교와 유태교가 다른 기독교 유파에 비해 통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사는 동네에 유태 회당이 없으면 찾는 교회가 침례교회라고 한다. 이유는 구약해석에서 유태교와 침례교가 유사하기 때문이란다. 침례교는 구약 해석에 대해 다른 유파에 비해 신본주의적이면서 다양한 해석을 용인한다고 한다. 예서, '자유'와 '다양'의 차이가 있다. '자유'는 신본주의에 대한 인본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반면, '다양'이라 함은 신본주의 속에서 다양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가령 언젠가 카톨릭인 착한마녀님이 구약을 재테크 교과서로 해석한 적이 있는데, 유태교나 침례교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유파라면 착한마녀님 해석이란 이단인 게다. 예서, 침례교가 다양한 해석을 용인한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정반대이다.

   

침례교는 1. 전통적인 침례교의 정신 1) 민주적인 회중청치 2) 반신조주의 3) 신앙의 자유 4) 정교의 분리 5) 전신자 제사장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이때, 반신조주의라 하여 성경 이외에는 어떤 신앙 고백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가 특정 사제단을 동원하여 특정 종교와 유파를 강요하는 데에는 신앙의 자유를 내세워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는 침례교나 유태교가 장로교회처럼 수직적 통합보다 개별 교회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하여, 교회 내부에서도 교인이 어떤 신앙 해석을 하든 존중하나, 성경보다 우선이지 않다는 것이다. 전신자 제사장 원리도 신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기에 신자라면 누구나 제사장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지난 남북전쟁 당시 남침례교에 실망한 흑인 교회가 탈퇴하는 일이 있었고, 오바마 집권 이후, 카터가 그 때문에 탈퇴하는 쇼를 하기도 했는데, 남침례교가 사상 최초로 흑인 수장을 내세우면서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17세기 미국에 전래된 침례교회는 중앙조직을 구성하지 않은 채 매사추세츠주(州), 버지니아주(州), 뉴잉글랜드 등지에 개체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1814년에 비로소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미얀마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있던 A.저드슨을 지원하기 위해 침례회총연맹이 결성되었다. 이곳에서 출판사와 국내선교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남부침례교회가 별도의 연맹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남침례회연맹이다. 북부침례교회는 명칭을 미국침례회선교연합회로 변경하였고, 1950년에 미국침례회연맹으로 변경하였다.

   

1814년 남침례회는 남북전쟁 후 흑인 침례교회들의 탈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국의 선교에 주력하여 교세가 급성장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영향력 있는 교파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선교에 착수한 것은 1950년 중국 주재 J.A.애버나티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면서부터이다. 그때 이미 한국에는 침례교계 독립 선교사인 펜윅이 와서 동아기독교의 기반을 닦아놓은 상태였다. 동아기독교회와 남침례회 선교부가 제휴되었다.

   

그후 1954년 남침례회 한국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어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대전광역시 등에 선교부별로 선교사가 주재하였다. 처음에는 6·25전쟁으로 인한 구호사업과 사회복지시설에 치중하였지만, 점차 개체교회 지원, 순수전도사업 등에 관심을 가졌다. - 네이버 백과사전"

   

미국에서 남침례교 영향력이 상당한데, 카터, 빌 클린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남침례교도이다.

   

최근 골드만파 빌 클린턴이 유대교 사위를 맞이한 것은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인드라는 골드만노비네파연합 상징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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