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2 :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5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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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2 :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5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사업에!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1974년 11월에 발표된 '록펠러 가문의 부(富)에 관한 미국 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내의 록펠러 일족이 관리하고 있는 재산만도 당시의 추정으로 6,400억 달러였다. 당시 록펠러 재산 추정액이 60억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백 배인 게다. 허나, 그 보고서조차 록펠러 가문 전부를 파악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가문이 쌓은 부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헌데, 록펠러 가문 부의 출발은 주급 4달러,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팔만 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누구나 부의 축적 비밀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855년, 만 15세인 록펠러 1세는 고졸 중퇴생이자 사실상 소년 가장이었다. 록펠러는 졸업시험을 한 달 남기고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십대 여성과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 빌이 생활 보조를 줄였기 때문이다. 하여, 장남인 록펠러 1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록펠러 1세는 소년가장이어서 군대도 면제되었다. 록펠러 1세는 바람둥이 빌 제안에 따라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40달러를 내고 3개월 과정을 이수한다. 록펠러 1세는 상업학교에서 회계 기초를 배웠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록펠러 1세는 1855년 9월 26일, 만 16세에 휴잇 앤드 터틀 회사에 취직한다. 휴잇 앤드 터틀 회사는 위탁판매 및 선적회사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도매상이다.

   

록펠러 1세는 당대 관례에 따라 무급사원, 오늘날로 치면 인턴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록펠러 1세는 얼마나 기뻤으면 9월 26일 입사일을 생일보다 중시했다.

   

록펠러 1세는 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는 록펠러 1세만 부당한 대접을 받아서도 아니고, 사장이 악덕사장이어서도 아닌 당대 관행이었던 듯싶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는 이들이 있는데, 대체로 한 달 이내에 결판이 나는 편이다. 헌데, 노동시장에 인력이 넘치니 3개월까지 기간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

   

해서, 사장은 록펠러 1세 역량을 인정하여 1855년 연말에 3개월치 임금 50달러, 백만 원을 지급했다. 하고, 사장은 록펠러 1세에게 월 25달러, 오십만 원 지급을 약속했다. 이는 주급 4달러, 월 16달러, 삼십이만 원보다 상향한 급여였다.

   

$$$ 당대 돈 계산은 편의상 오늘날 달러 가치와 비교하여 20배로 하고, 환율을 달러당 1,000원으로 한다. 가령 록펠러가 활동하던 19세기 중후반 40달러이면 오늘날 팔십만 원으로 환산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1858년, 록펠러 1세는 퇴직한다. 록펠러 1세는 그간 급여로 번 돈 팔백 달러, 천육백만 원에 바람둥이 빌이 유산을 선불로 지급한 천 달러, 이천만 원, 하고, 여기저기서 융통해서 이천 달러, 사천만 원을 모았다. 이웃이자 같은 상업학교에서 공부한 클라크가 록펠러 1세에게 제안하여 출자금 각각 이천 달러, 사천만 원, 총 팔천만 원짜리 위탁판매업, 도매상 회사가 출범한다. 1858년 4월 1일, 18세인 록펠러 1세는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 공동경영인이 되었다.

   

사업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하나, 록펠러 1세 사업 기반인 클리블랜드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827년 이리운하 개통으로 클리블랜드는 대서양과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으로 연결되는 물길이 사통팔달인 천혜의 도시였다.

   

둘, 록펠러 1세는 교회 인맥을 적극 활용했다. 영업은 인맥이니까.

   

록펠러 1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선교교회에 다녔다. 그뿐 아니라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회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명예 서기직을 맡아 위원회 의사록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록펠러 1세는 십일조를 거르지 않았다. '록펠러 가의 사람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한 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입과 지출금,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의 내역을 작성해 나갔다. 매주 그는 싸구려 하숙집 집세로 1달러, 이만 원을 지불하는 것 외에도 소액기부 모임에 75센트, 만오천 원을, 그리고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 5센트, 천 원, 빈민구제 활동에 10센트, 이천 원, 해외선교 활동에 10센트, 이천 원을 헌금했다."

   

록펠러 1세는 십일조가 아니라 수입의 25%를 기부한 셈이다. 록펠러 1세에 대한 교회 평판, 지역 평판이 좋았다. 영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면, 록펠러 1세가 자선을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전 인월리는 무엇이냐. 전략적 글쓰기다. 사실 그 문제는 록펠러 1세보다 카네기에게 할 말이지만, 당시 국유본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셋, 록펠러 가문 특유의 화술

   

여기에 록펠러 가문 특유 화술이 빠질 수 없다. 록펠러 1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여자 꼬시는 데에만 힘쓰던 가문의 능력을 오직 비즈니스에만 투자했다. 그래서일까. 록펠러 1세 영업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데까지 이른다.

   

록펠러 1세가 다니던 선교 교회가 한 집사로부터 2000달러, 사천만원 담보대출을 받았는데 , 제 날짜에 이자를 지불하지 못했다. 이에 집사가 교회를 처분할 것이라 목사가 설교하자, 록펠러 1세가 나서서 교인을 설득하여 사천만 원을 모금할 정도다.

   

허나, 사업은 자잘한 백 방보다 큰 것 한 방이다.

   

록펠러 1세가 저인망으로 끌어 모은 교회 인맥 장사가 한계를 보인다. 1859년 4월 1일, 사업 시작한 지 일 년 후, 클라크 엔드 록펠러사에 공동경영인으로 조지 가드너가 합류한다. 조지 가드너는 클리블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훗날 클리블랜드 시장과 클리블랜드 요트 클럽 회장을 역임한다. 클라크 가드너 상사로 바뀌었다.

   

왜 이러한가. 당연한 일이다. 큰손을 통해야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다. 영업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찌라시 뿌리는 영업이요, 다른 하나는 골프와 룸살롱에서 접대하는 영업이다. 어느 것이 더 회사에 보탬이 되나?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후자이다.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시대는 록펠러 1세라는 영웅을 요구한다.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교통의 요충지, 클리블랜드는 보급기지로 변신한다.

 

전쟁 보급기지. 돈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전쟁이 나면 공장이란 공장은 평소 가동률 80%에서 100% 가동하기 마련이다. 경제가 살아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니 농산물을 주로 하는 생필품 취급 도매회사가 돈을 버는 건 불문가지.

   

1862년, 록펠러 회사 연간 수익이 일만칠천 달러, 삼억사천만 원이었다. 이는 전쟁 전과 비교하여 연간 수익이 네 배에 달한다. 하면, 전쟁 전 연간 수익이 사천이백오십 달러, 팔천오백만 원이다. 하면, 한 달 수입이 약 360 달러, 칠백여만 원이다.

   

한 달 수입이 약 360 달러, 칠백여만 원인데, 세 명의 공동창업자가 균등분할로 나눠가지면 120 달러, 이백사십만 원 정도?

   

요즘 한국 영세 상인이 가게하면 가져가는 빠듯한 수입인 게다. 헌데, 수입이 네 배로 올라 칠백여만 원이면 한국 중산층 중층을 구별하는 평균 수입 육백여만 원을 약간 상회한다. 참고로 인드라가 파악하는 한국 중산층 하층 수입 기준은 월 삼백만 원, 중층 수입 기준은 육백만 원, 상층 수입 기준은 천만 원이다. 만일 월 수입 삼백 이하면 중산층이 아닌 심리적 중산층인 게다.

   

돈이 돈을 부른다. 경기 활황기, 거품 시대에는 누구나 야망을 품기 마련이다. 록펠러 1세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 수입이 중산층도 아닌 하층급 이백여만 원 벌 때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 1세는 중동 특수가 불던 때처럼, 코스닥 광풍이 일던 시기처럼 미친 듯이 돈 되는 일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때, 정유업을 만난 것이다. 하여, 만일 남북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록펠러 1세는 없다.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허나, 수입이 천만 원 가까이 늘어나니 눈 뒤집힐만했다. 록펠러 1세는 당대 보험료 150달러, 삼백만 원을 아끼려고 할 정도였다. 해서, 활황이 되니 우선 가드너를 축출했다. 평소라면 모르되, 전시였다. 전시라면 빈익빈부익부가 극대화된다. 전시에도 골프 룸살롱 영업이 가능하다. 허나,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전시여서 일감이 널려 있는데, 가드너처럼 평시에만 골프 룸살롱 출입이 가능한 자는 아웃일 수밖에 없다.

   

   

"전투준비태세·방어준비태세라고도 한다. 모두 5단계로 나뉘며, 숫자가 낮아질수록 전쟁발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Watch Condition) 상태의 분석 결과에 따라 전군(全軍)에 내려지는데, 데프콘 5는 적의 위협이 없는 안전한 상태를 말하고, 데프콘 4는 대립하고 있으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에는 1953년 정전 이래 데프콘 4가 상시적으로 발령되어 있다.

   

데프콘 3은 중대하고 불리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긴장상태가 전개되거나 군사개입 가능성이 있을 때, 데프콘 2는 적이 공격 준비태세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발령된다. 데프콘 1은 중요 전략이나 전술적 적대행위 징후가 있고, 또 전쟁이 임박해 전쟁계획 시행을 위한 준비가 요구되는 최고준비태세 때 발령된다.

   

한국의 경우 데프콘 3이 발령되면,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작전권이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가고, 전후방 부대의 움직임이 달라지며, 전군의 휴가·외출이 금지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되면 전군에 탄약이 지급되고, 부대 편제 인원이 100% 충원된다. 데프콘 1이 발령되면 동원령이 선포되고, 전시체제로 돌입된다. 1999년 6월 15일 서해상에서 남북함정 교전사태가 발생했을 때, 데프콘 3에 준하는 전투준비태세강화 지시가 발령되기도 하였다. - 네이버 검색 백과사전 중"

   

해서, 인드라는 데프콘식으로 부자를 오등분한다. 그 기준은 간단하다. 어떠한 상황에도 골프, 룸살롱 출입이 가능한 부자는 데프콘 1, 데프콘 1이란 언제든 고급정보를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하고, 데프콘 순위가 하락할수록 골프, 룸살롱 출입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급정보가 차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부자인가. 하면, 어느 단계인가. 한국에서 어떤 자가 정권을 잡든 골프, 룸살롱 출입하며 고급정보를 입수하면서도 절대로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수준인가. 이 대목에서 이 글을 혹 읽으면 깜봉님이 한 말씀할 수도^^!

   

   

록펠러 1세와 새뮤얼 앤드루스의 운명적 만남

   

새뮤얼 앤드루스는 영국인 클라크 고향 사람인 동시에 록펠러 1세 교회 사람이었다. 앤드루스는 1850년대 클리블랜드로 이주하여 돼지기름 정제소에서 일을 했다. 앤드루스는 정제소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은 뒤, 1860년에 원유 10배럴을 받아 클리블랜드 최초로 등유를 정제해내었다. 당시 석유 정제 공정이 오늘날 특허 기술이었으므로 1862년, 앤드루스는 회사를 차린다.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사업에!

   

남북전쟁 시기가 아니었다면, 투자에 신중한 록펠러 1세는 결코 헛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1862년은 길가에 널려 있는 돌맹이도 돈이 될 듯싶었던 남북전쟁 중. 록펠러 회사는 앤드루스 클라크사 정유회사에 사천 달러, 팔천만 원을 투자한다. 하여, 1863년, 24세의 록펠러 1세는 주사위를 던졌다, 평생의 역작, 정유업에!

   

록펠러 1세가 사업 안목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다. 사람 운이 있었다. 사람 운이면 연애결혼 운이거나 사업 운이다. 운도 실력이다. 인드라는 이를 운동 신경처럼 상인 신경이라 말한다. 그 아무리 혹독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악독한 쪽발정은 정권에서도, 멍청한 쪽발돼중/쪽발놈현 치하에서도 장사를 하여 성공하는 이가 존재한다. 그들이 상인 신경을 보유한 이들이다.

   

록펠러 1세 생각은 도매업이 주였고, 정유업이 보조였다. 남북전쟁 호시절에 옵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정유업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 록펠러 1세 정유업을 두고 한 말인양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도매업 수입보다 정유업 수입이 압도했다. 록펠러 1세가 정유업을 시작한 1863년에 클리블랜드에만 정유소가 20개에 달했다. 이 시기 정유업이란 땅 짚고 헤엄치기여서 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박이었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남북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활황기도 끝임을 의미한다. 이 시기, 록펠러 1세는 중대 결단을 내려야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이는 한 달 수입 이백여만 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계가 뚜렷하여 도매업 시장이 제 2의 가드너를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록펠러 1세 자신의 지위는 추락하고, 수입도 줄어들 것이다.

   

반면, 정유업에 올인을 한다면? 오늘날로 치면, 시장에 경쟁자가 없는 블루오션 시장이나 다를 바 없는 노다지 시장.

   

록펠러 1세는 결행한다. 회사는 로마 삼두체제였는데, 록펠러 1세는 카이사르였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시점에서 미국의 카이사르, 록펠러 1세는 클라크와 결별한다.

   

록펠러 1세 전술은 간단했다. 삼두체제 중 일인인 앤드루스더러 고향 친구를 택할 것인가, 종교를 택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앤드루스 같은 인물은 실리적이고 속세적인 것보다 이상적이고 명분적인 것을 중시한다. 앤드루스는 클라크를 버리고 록펠러 1세를 택한다.

   

   

*** 이 글은 이웃인 마리아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허나, 여러 사정상 이 정도로 표현함을 양해바랍니다. 인드라는 마리아님 글을 중심으로 여러 참고자료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작성했습니다.

인드라 글쓰기는 분석적 글쓰기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입니다. 이 글에는 전략적 목표가 있습니다.

   

가급적 인드라가 요구하는 대로 세상이 재편성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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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 불평등이다.

록펠러 1세처럼 

긍정적 이해를 통해 지양하자.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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