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록펠러, 뉴욕에서 JP모건, 밴더필트, 제임스 스틸먼과 인연을 맺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1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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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0-4 :윌리엄 록펠러, 뉴욕에서 JP모건, 밴더필트, 제임스 스틸먼과 인연을 맺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6 

   

미국사에서 1860년대는 한국 1960년대처럼 격동의 시대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1861년 JP모건이 뉴욕에서 피바디회사 뉴욕지부격인 모건회사 설립

1863년 카네기 키스톤 교량 회사 공동 설립

1864년 록펠러 1세 결혼

1864년 피바디회사, JS모건회사로 변경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났다.

1865년 링컨이 암살당한다.

1865년 클라크 앤드 록펠러사 해체

1865년 록펠러 정유회사 장악

1865년 윌리엄 록펠러 입사

1865년 록펠러 두 번째 정유회사 스탠더드 위크스 설립

1866년 대서양휭단 해저전신 완성

1866년 윌리엄 록펠러 뉴욕 파견 록펠러상회 설립

1867년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뉴욕센트럴철도 인수

1867년 카네기 유니온 제철소 설립

1869년 피바디 사망

1869년 대륙횡단철도 최초 완성

   

   

1. 피바디와 JP모건

   

피바디는 영국 섬유업자들과 직물로 무역하던 미국 대표 상인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여섯 형제를 먹여 살리느라 피바디가 수전노처럼 일하다 로스차일드를 모시게 되었다. 1838년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미국사업을 대행하는 회사를 차려 미국 채권 등을 매입했다. 캘리포니아 금광이 발견되며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헐값에 매입한 채권이 급등하여 큰 돈을 벌었다. 피바디는 독신이었다. 1854년 후계자로 JS모건을 영입한다.

   

헌데, 피바디와 JS모건 사이에는 피바디와 로스차일드만큼 끈끈한 정이 없다. 피바디는 회사를 넘긴 후에도 로스차일드 가문과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반면, 1864년 피바디가 회사를 떠나면서 자본금을 몽땅 챙긴 것이다. 하고, 피바디는 5년간 자본금을 몽땅 자선사업에 투자한 뒤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로스차일드 미국 파트너가 피바디에서 JS모건으로 바뀐 것은, 로스차일드 의지이기보다는 로스차일드와 영국 귀족 가문간 타협책이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당시 로스차일드 런던 가주는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영국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하고자 노력하던 시기였다. 하원의원직 조건으로 JS모건을 추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피바디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던 반면 JS모건은 영국적인 보스턴에서 사업기반을 구축하는 등 영국인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웨일즈에서 이주한 JP모건 가문은 JP모건 할아버지가 애트나 생명 사업 등 고리대금업으로 큰 부를 획득하여 JP모건 아버지 JS모건에게 백만 달러, 500억 원(천억 원)을 유산으로 남긴다. JS모건은 이를 종자돈으로 보스턴 최대 무역회사를 만들어 영국, 유럽에 직물을 판다. 이 과정에서 JS모건이 엄청난 자금력으로 영국 섬유업자들을 구워삶았을 정황이 포착된다.

   

JP모건은 록펠러 1세보다 두 살이 많은 1837년생이다. 또한, 카네기나 록펠러 1세와 달리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JP모건은 상인 본능을 발휘하여 17세에 동인도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고자 했다. 허나, JS모건은 독자인 아들을 만류하고 국제적 금융인을 만들기 위해 스위스 귀족학교에 보내 불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게 했다. 또한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수학하게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JP모건은 1861년 피바디사 뉴욕지부격인 회사를 설립한다. 헌데, JP모건은 이 당시 수출 무역보다 남북전쟁을 통한 암거래시장 돈벌이에 열을 올린다. JP모건은 영국, 코자무는 링컨 정부를 담당하여 JP모건과 코자무는 정보를 이용한 금거래로 떼돈을 번다. JP모건이 코자무로부터 받은 링컨 정부 동향을 영국에 있는 피바디와 JS모건에게 보내면, 피바디와 JS모건은 영국 정부 동향을 JP모건에게 보내는 것이다. 당시 영국과 로스차일드는 남부군과 북부군 양쪽을 오가며 큰 돈을 벌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JP모건 다음 관심사는 철도와 전신이었다.

   

   

2. 록펠러 1세, 행운이 겹치다

   

1865년 2월 1일, 하루에 원유 500배렬을 처리할 수 있는 클리블랜드 최대 규모이자 세계적인 정유소 경영권을 놓고 록펠러 1세와 클라크는 최고가 입찰자에게 회사를 파는 경매 방식으로 대결한다.

   

승자는 록펠러 1세. 록펠러 1세는 과감한 배팅으로 클라크를 이긴다. 록펠러 1세는 7만 2500달러, 약 36억 원(72억 원)과 함께 도매상 지분 절반을 클라크에게 넘긴다. 이때, 록펠러는 무슨 돈으로 경매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교회 인맥이다. 핸디는 은행장인 동시에 주일학교 교장이었다. 록펠러 1세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여 투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생애 첫 대출인 이천달러, 일억 원(이억 원)을 저리로 록펠러 1세에게 제공했다.

   

행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록펠러 1세 교회 인맥은 은행가 인맥으로 확장했다. 은행 이사였던 스틸먼 위트는 록펠러 1세 대출에 대해 자기 재산을 담보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하며 여러 번 록펄레 1세를 도왔다. 실탄이 두둑한 록펠러 1세는 자금 걱정 없이 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상인은 하늘이 정한다더니 록펠러 1세를 두고 한 말 같다.

      

   

3. 윌리엄 록펠러, 뉴욕에서 JP모건, 밴더필트, 제임스 스틸먼과 인연을 맺다

   

 1792년 5월 17일 24명 상인들이 미국 정부 '독립전쟁'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뉴욕 증권 거래소를 설립하였다. 전쟁중인 1863년 뉴욕증권거래소로 명명되었다. 헌데, 1866년 대서양횡단 해저전신이 완성된다. 이는 뉴욕증권거래소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전과 달리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 전신을 통해 정보가 즉각 교환되니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한 영국 유럽자본이 '바이 미국'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거래가 별로 없던 뉴욕증권거래소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 등 국유본은 철도에 집중 투자하니 이를 대행한 JP모건 영향력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록펠러 1세는 상황을 파악하고 동생 윌리엄 록펠러를 1866년 뉴욕으로 보낸다. 윌리엄 록펠러는 JP모건처럼 뉴욕에 록펠러상회를 차린다. 공식적으로는 록펠러 정유회사 수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허나, 윌리엄 록펠러는 록펠러 1세와 달리 금융 부문에 탁월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전 직장에서 21살 나이에 연봉 천 달러, 오천만 원(일억 원), 월 사백여만 원(팔백여만 원)을 받았을 정도였다. 해서, 윌리엄 록펠러 은밀한 임무는 정유회사에 융자나 투자를 할 투자자를 찾는 것이었다.

   

하여, 윌리엄 록펠러는 뉴욕에서 철도왕 벤더필트, 금융왕 JP모건, 후일 시티은행이 되는 뉴욕내셔널시티은행 은행장 제임스 스틸먼을 만난다. 화려한 저택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면서 이들의 우정은 자식 대까지 이어져 결혼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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