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하와이 국유본론 2011
2011/10/21 07:11
http://blog.naver.com/miavenus/70121814355
국제유태자본과 하와이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0/21
CIA :
하와이는 전반적으로 로스차일드계의 세가 강한 것으로 보임. 의견 부탁.
인드라 :
아마도 백태웅 하와이 건 때문인 듯싶다. 국유본이 백태웅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크게 써먹으려고 준비중인데, 김일성대학 교수와 한 지역에서 같이 있으면 괜한 오해거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해서, 뉴라이트 백태웅을 하와이로 보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울러 하와이대학에는 서대숙이 있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연결할 수 있으니 박경애까지 두루 연결하는 셈이다. 서대숙은 누구인가. 한국 학자로는 처음으로 기존 정통론자 입장인 북 정권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이 아니라 만주 여러 김일성들 업적을 가로챈 것이 있을 지라도 김일성 중의 하나라는 수정론자 입장을 내놓은 뉴라이트 학자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서대숙이 노비네파가 아니라 뉴라이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은 스탈린 지시를 받은 김일성이 오판한 침략 전쟁이다, 라고 보는 것이 전통론자 관점이자 노비네파 관점이라면, 서대숙은 브루스 커밍스처럼 내재적 관점에서 내전이다, 이런 식으로 수정론적 입장이자 뉴라이트파 관점인 게다. 실제로 이런 수정주의 학자들이 삼각위원회에 있고, 내한도 많이 했다.
하면, 뉴라이트파는 왜 수정론적 입장을 갑자기 내놓았는가. 좌우 이념 구도를 근본주의/지역주의 구도로 전환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자, 이런 점을 뒤로 하고. 하와이.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한 하와이이기도 하다. 우선 근대 이후 한국 최초 집단 이민 지역이라는 점만 생각한다면, 한국과 남다른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 이야기
http://cafe.naver.com/forstudy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79&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2&docId=47613572&qb=MTgyMOuFhCDrs7TsiqTthLQg7ZWY7JmA7J20&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1&pid=gqu68F5Y7uRssa7jUXNssc--439301&sid=TqBmunI3oE4AAEWkGkU
해서, 하와이가 국유본 분파 중 어느 분파가 지배적인가를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왜 한국인이 최초로 하와이에 이민을 가야 했는지, 또 하와이가 오늘날 한국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면 여러 모로 유익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시작하겠다.
인드라가 인물이나 조직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하와이를 분석한다면, 하와이의 역사, 하와이와 주변국들간의 관계, 하와이 경제 이 세 가지 기준으로 본다는 것이다.
첫번째, 하와이 역사이다.
"최초의 하와이인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이들은 솔로몬과 피지, 그리고 마침내는 뉴질랜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 제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3각형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 문화권 안에는 사모아, 통가, 타히티, 마르케사스 등의 제도들이 포함되며, 이들 섬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와이 비숍 박물관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마르케사스 섬(타히티의 북동 지역)에서 쌍둥이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서기 750년경에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후 서기 1000년경에는 타히티와 소시에테 제도의 다른 부족들이 하와이로 이주해 와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이미 살고 있던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대 하와이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하 하와이 역사 인용은 네이버 지식인 검색 결과임.)"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9&dirId=9020201&docId=74396904&qb=7ZWY7JmA7J20IOyYgeq1rQ==&enc=utf8§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p9KyU5Y7udssvoOjsossc--005318&sid=Tp8lufLlnk4AACIPF4M
인드라가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 가본 박물관 중 하나가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이다. 인근 박물관들을 합쳐 달렘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소장 규모가 큰 박물관 중 하나여서 대영박물관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베를린을 여행지로 택했다면 한번쯤 가볼 만한 곳으로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대영박물관보다 더 인상적인 유물이 있었으니 폴리네시아 유물이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8800
대영박물관이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을 둘러 보면, 한편으로 식민지에서 정말 많이 유물을 빼앗아왔구나, 하며 절로 한숨이 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 후손들도 보존하지 않았을 유물들을 정성껏 관리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 말로 제국의 향기인가?하고 아무나 제국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해주기도 하여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때, 폴리네시아 진열관을 보면서, 왜 폴리네시아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독일과 폴리네시아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폴리네시아가 그리 중요한 지역인가? 하고 말이다.
그런 의문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풀 수 있었다.
왜 폴리네시아인가.
"육지 총면적 약 2만 6000 km2. 폴리네시아란 '많은 섬들'이라는 뜻이다. 육지면적은 작으나 섬들이 분포하는 해역은태평양의 거의 반을 차지하며, 서부의 엘리스 ·통가 ·사모아 ·토켈라우 ·피닉스 제도(諸島), 중부의 쿡 ·라인 제도, 남동부의 투부아이 ·소시에테 ·투아모투 ·마르키즈 제도, 북부의 하와이 제도 및 남동쪽 끝의 이스터섬 ·살라이고메스 제도, 남서단의 뉴질랜드섬 등이 포함된다.
폴리네시아의 낮은 섬들은 대부분 산호초이고 높은 섬들은 거의가 새로운 현무암 화산이다. 폴리네시아는 전체가 대체로 균일한 기후를 나타내는데, 대부분의 섬들이 남동 무역풍의 영향권에 속하여 높은 섬들의 바람받이에는 강수량이 많아 삼림이 무성하고 바람그늘에는 강수량이 적다. 또 바람그늘 쪽에는 강수가 없는 경우가 꽤 많아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섬도 적지 않다.
광대한 해역에 섬들이 산재하지만 주민은 폴리네시아인(人)으로서의 현저한 동질성을 보여, 남서단의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族)의 언어가 오늘날에도 최북단 하와이의 카나카족에게 통한다.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북부(하와이)는 미국, 서부(사모아 ·통가 ·피닉스 ·쿡 등)는 영연방 제국, 동부(소시에테 ·투부아이 ·투아모투 등)는 프랑스, 그 동쪽(이스터 등)은 칠레에 의해 관할되어 왔으나, 근래에는 사모아(1962.1) ·통가(70.6) ·투발루(엘리스 제도, 78.10) 등의 독립국도 생겨났다.
폴리네시아인은 형질적으로 꽤 명확한 단일 인종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남녀 모두 큰 키(167.5∼174.8 cm)에 당당한 체구를 지니며, 피부는 밝은 갈색이고 모발은 직모(直毛) 또는 파상모(波狀毛)이다. 지적 수준은 오세아니아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폴리네시아 서부, 즉 통가 ·사모아에서는 멜라네시아인(人)과의 혼혈이 꽤 두드러지나 동부로 옮아가면서 폴리네시아인으로서의 순수성이 높아진다. 폴리네시아인이 아시아에서 옮겨간 것은 기원전 수세기 때이며 그 후 10여 세기 사이에 폴리네시아 전역에 분포되게 되었다.
카본데이팅(방사성탄소에 의한 연대측정)에 의한 폴리네시아인의 거주증거는 가장 오래된 것이 르키즈의 BC 150년경으로 추정되고, 이스터섬이 4세기경, 하와이가 9세기, 뉴질랜드가 14세기경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수세기경에 동남아시아의 해안지대에서는 일부 벼농사가 영위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역시 타로감자 재배와 어로가 생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문화사적으로는 하크경(耕:Hackbau)의 문화단계인데, 폴리네시아인은 그와 같은 문화를 가지고 바다를 건넜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아우트리거의 배나 더블카누로 널리 태평양을 항행하고, 하늘을 32등분한 해도를 사용한 해상민족이었다.
사회적으로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에 비해 한층 엄중한 신분제도가 실시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부계(父系)를 원칙으로 하며 토지의 상속은 모두 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점에서 멜라네시아(특히 뉴기니와 폴리네시아의 중간)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토지소유 형태를 예로 들면 일반적으로 말단의 경우 가족의 장(長)이 토지를 소유하나, 다시 씨족이나 부족의 장(長)이 중층적(重層的)으로 토지지배의 권한을 가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족의 장이 토지를 소유하되 그것은 근대적인 토지 소유의 개념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큰 친족집단(부족)에 속하는 토지의 일부를 일정한 관습적 상속권에 의해서 관리하는 데 불과하며, 따라서 토지 사용권을 소유하는 데 불과하였다.
식민정책의 결과로, 또는 세계경제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는 데 따라 가족 중 평민 남자로서 자신의 명의로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각처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자유로이 토지를 처분할 수는 없다. 결국 공동체적 토지소유에서 개인적 토지소유로의 발전도 근대적인 의미의 법적 근거에 따른 자유로운 개인소유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법적인 근거에 의해 개인적 토지소유제로 전면 개편된 하와이나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의 토지가 거의 외래 플랜터(농원주)의 수중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본래 폴리네시아의 토지소유는 부족장으로부터 씨족장에게, 다시 씨족장으로부터 가족장에게 할당된 것이어서 부족장, 씨족장, 그리고 가족장은 각각 대추장(大酋長), 고위 추장, 보통 추장이라는 신분에 해당되어 사회적 신분관계가 엄격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왕조나 타히티의 포마레 왕조와 같이 근세 유럽인이나 유럽 무기의 힘을 빌려 다른 부족을 정복해서 일종의 봉건국가를 형성하기까지에는 초(超)부족적인 통일국가의 형성이 불가능했다.
통가에서는 10세기경 투이통가라고 일컬어진 성스러운 왕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그 정치적 영역은 통가타푸섬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통가 제도 전체를 초부족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사모아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몇 개의 왕가(부족장의 가계)에 의해 각자의 영역이 통치되어 오는 동안에 부족간의 싸움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으나,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외국 세력의 간섭에 의해서 비로소 명목상의 통일국가가 성립되었다.
폴리네시아에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주민의 사회적 지위가 대추장 ·고위 추장 ·보통 추장 ·평민이라는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밖에 추장에게는 반드시 몇 사람의 대판추장(代辦酋長)이 딸려 있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대판추장은 추장을 대신하여 지방이나 읍 ·면을 다스리거나 추장을 보좌하는 일을 맡는데, 대판추장도 계층구별이 있다.
일반적으로 추장의 지위에 있는 자는 대단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그 대변인의 역할을 대판추장이 맡았다. 또 추장에게 부수된 권위는 자연히 추장으로 하여금 아랫사람들에 대해 여러 가지 금령(禁令)을 발하게 하여 행동을 제약하여 왔다. 이것이 이른바 '타부(tabu/tapu)'로, 추장의 보이지 않는 마력(魔力), 즉 '마나'의 발현이다. 터부(taboo)란 말은 타부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폴리네시아인의 종족국가는 마나적 ·신권적(神權的) ·터부적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
[출처] 폴리네시아 [Polynesia ] | 네이버 백과사전
아프리카 기원설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전 세계로 퍼졌는데, 인류가 가장 늦게 도착한 지역이 폴리네시아 지역인 게다. 인류가 가장 늦게 도착한 아메리카 대륙도 그 시기가 최소한 13,000년 전이다. 반면, 폴리네시아에서 발견한 최초의 사회는 아무리 많이 잡아야 고작 3,200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나, 인류 중 가장 멀리 간 인류가 폴리네시아인이다. 또한 도망쳐 달아난 것이든, 모험한 것이든, 인류 중 가장 먼저 세계의 끝에 도달한 이들이다. 이는 유럽인들이 근대 이후 두번째로 폴리네시아에 도달하였기에 유럽인들에게는 남다른 것이다. 즉, 이들 폴리네시아인과 유럽인들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대표적인 저작이다. 소극적으로는 유럽인들의 폴리네시아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을 것이다. 능동적으로는 폴리네시아인과 유럽인의 공통 분모를 발견하여 진취적인 인류상을 찾아서 이를 퇴보하지 않고 발전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다.
둘, 폴리네시아인은 태평양과 섬이라는 지형 덕에 유라시아 대륙과 교류없이 격리한 채로 살아왔기에 인류학적인 분석 자료로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다. 민족학 = 인류학.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천년 전 유라시아 대륙인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주는 셈이다.
셋, 인도네시아나 파푸아 뉴기니 같은 지역에서 보듯 이 지역은 향신료를 비롯한 자원 보고이다. 앞으로는 해상 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에서 자원 쟁탈 싸움이 치열할 전망이다. 한편으로 이 지역에 사는 폴리네시아인을 연구한다는 측면도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은 환경에 상당히 좌우하므로 유럽인도 폴리네시아에 오래 살면, 풍토로 인해 현지화하므로 이 지역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일인 게다.
이를 전제하고, 폴리네시아인은 왜 태평양 폴리네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였는가.
이에 인드라는 이 방면 연구가들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최초에는 아프리카를 건너 아시아로 간 이들 중에 일부는 인도를 거쳐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루트를 통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허나, 이들은 한꺼번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천 년 전까지 주기적으로 이 지역에 도달하였다. 왜인가. 북방 민족과 북방 민족에 내쫓긴 중국인 혹은 화인 덕분이다.
인류 중 보통 남방계라 불리는 부류는 해안가를 따라 인도 - 동남아 - 중국 남부로 해서 한반도와 일본, 알래스카까지 올라갔었다. 다른 한편, 인류 중 북방계라 불리는 부류가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통과하여 몽골과 중국, 한반도와 일본, 알래스카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충돌하였는데, 상대적으로 문화 전파가 잘 이루어진 초원지대 북방계가 앞선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서 왕족과 귀족계급인 북방계와 노예 신분인 남방계 계급사회를 만들었다. 해서, 일부 남방계는 북방계를 피해 남하하였다.
허나, 바로 이것이 훈족의 이동으로 게르만족이 이동하여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처럼 동남아 지역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딱히 없다. 다만, 삼국지연의를 통해 추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촉오 삼국시대 때 촉은 삼국 중 가장 세력이 약했다. 약한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제갈공명이 남진정책을 썼다는 구라를 펼치는 것이 삼국지연의이다. 허나, 이는 정말 구라다. (프라다가 아니라 구라다. 제갈공명은 프라다를 입지 않는다^^? 인드라 식 썰렁한 개그임.) 역사적 현실은 제갈공명이 남진했다해도 아무리 뻥튀기해봐야 그것은 오늘날 운남성이나 귀주성 정도라는 것이다.
http://blog.daum.net/yoont3/11300855
예서, 인드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런 일이 당나라 때도 그랬듯이 중국사에서 수시로 있었다면, 또한 '객가'에서 보듯 북방계를 피해 숱하게 남방계들이 강남으로 쫓겨 내려왔다면, 이들 남방으로 쫓겨온 '객가'가 낯선 땅에서는 어떤 존재였겠느냐이겠다.
이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집트에서는 노예 생활하던 유태인들이 가나안에 이르러서는 가나안에 살던 이들을 어떻게 했나. 신의 이름으로 학살했다. 인종 청소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이는 동남아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이다. 국유본이 마약 생산하랴, 향신료 생산하랴, 대거 중국 콜리들을 동남아로 끌어왔다. 헌데, 이들 중국인들이 비록 국유본 허락이 있었지만, 세계 3대 상인답게 동남아 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해서, 결과는? 말레이지아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원주민이 화교에 매우 적대적이다.
바로 이것이다. 중국과 만주, 한반도에서 북방계에게 내쫓긴 일부 북방계와 남방계는 일본과 대만, 필리핀, 동남아시아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고, 이들은 도망친 지역에서 무엇을 했겠나. 북방계처럼 똑같이 학살을 저지르고, 계급사회를 만들었을 것이다.
예외적인 것은 홍익인간을 주창한 한반도 만주 지역인데, 이들 지역에서는 북방계 남방계 신화가 공존하는 만큼 홍익인간 재세이화 공생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세계를 주도하는 국유본으로서는 세계적으로 매우 특이한 사례로 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남방계가 인류가 왔던 족적을 되돌리며 동남아시아로 유턴을 하면, 동남아시아에 있던 족속들이 갈 곳이 어디이겠는가. 동남아시아에 남아 노예로 살든가, 아니면 인도로 가던가, 폴리네시아인 게다.
예서, 특기할 사안은 식인 문화이다. 풍랑을 견디는 등 악조건 속에서 카누에 의존하여 섬으로 탈출한 폴리네시아인이다. 이들은 조상을 따지면 다 같은 한 조상이다. 언어로 따지면, 폴리네시안 언어가 대만이나 중국 동남 해안 출신 언어와 유사하단다. 헌데, 이들은 백 년만 떨어지면, 심한 방언 탓에 다른 족속으로 여긴다는 게다. 즉, 같은 족속이라도 먼저 섬에 도착한 폴리네시안이 섬에 적응하여 야만화하면, 백 년 뒤 쯤에 나중에 섬에 도달한 폴리네시아인이 한계 상황에서 식량 부족 해결과 난관을 헤쳐가는 영성을 획득하기 위해 먼저 도착한 폴리네시아인을 동물로 간주하여 사냥하고 식인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먹어치운다는 것. 잔인하고, 끔찍하다. 다만, 같은 족속에서 출발한 인간이 포유류나 생선류를 섭취하는 것을 볼 때, 진화론적 사슬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신이 예비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벤처기업이 많은 고생을 하며 기술을 개발하여 성취를 맛보지만, 이내 이는 재벌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 허나, 그 재벌 역시 국제유태자본이 요리하는 것이다.
예서, 국제유태자본의 음모를 파헤치는 음모론이 국제유태자본을 깨부순다?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프리메이슨론, 일루미나티론, 예수회론, 엘리트론, 외계인론 등 숱한 음모론들을 죽이고서야 생존 길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 인드라요, 국제유태자본론이다.
" 선장의 하와이 제도 발견
이러한 하와이 제도의 잠을 깨운 것이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다. 쿡 선장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소시에테 섬의 북쪽에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리졸루션(Resolution), 디스커버리(Discovery)라는 두 척의 영국배를 가지고 항해를 시작했다. 1778년 1월 18일, 그는 멀리서 오아후 섬을 발견했으나, 역풍이 부는 바람에 배가 서쪽으로 밀려가, 이틀 후인 1월 20일에 카우아이(Kauai) 섬의 와이메아(Waimea) 부근에 상륙하였다. 영국 해군의 샌드위치 공작 밑에서 복무했던 쿡 선장은 공작을 기리기 위해 그가 발견한 섬들에 대해 샌드위치 섬이라고 이름을 붙여 세계에 소개했다. 샌드위치라는 말은 공작이 샌드위치를 즐겨 먹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1850년대까지 하와이 제도는 샌드위치 섬이라고 불렸다. 선원들은 섬의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여 멜론, 호박, 양파와 같은 야채들이 섬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임질과 매독 같은 무서운 전염병도 함께 전해져 하와이인들을 파괴시켜 갔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는데, 80년 후에는 6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쿡 선장의 죽음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있는 북서 항로를 찾아 항해를 계속하던 쿡 선장은 1778년 11월에 다시 샌드위치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여러 섬들을 순항하다가 1779년 1월 16일에 하와이(Hawaii) 섬의 케알라케쿠아(Kealakekua) 만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배를 수선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은 후, 2월 4일에 북쪽으로 떠났다. 그가 떠나자, 그 동안 많은 식량을 빼앗겼고 두려움을 느꼈던 섬 원주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3일 후, 쿡 선장의 배는 큰 폭풍우를 만나 앞돛대가 망가진 채 수리를 위해 다시 하와이 섬으로 되돌아왔다. 섬 주민들은 쿡 선장 일행을 더 이상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고, 선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디스커버리(Discovery) 호의 가장 큰 보트가 없어져 버린 어느 날 밤, 쿡 선장은 부하 선원들과 함께 마을의 추장을 붙잡아 사라진 보트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마을의 원주민들은 힘을 합쳐 추장을 구출해 내고, 그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러던 중에 다른 부족의 추장이 영국군의 대포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여든 군중의 공격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쿡 선장은 급히 철수를 지시하였으나,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원주민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 그의 배도 불타 버렸다. 하와이 섬의 원주민들은 싸움에서 숨진 많은 부족민들의 시신을 거두고 부상자들을 돌보았으며, 쿡 선장과 부하 네 명의 시신도 거두었다. 클라크 선장이 쿡 선장의 시신 일부를 케알라케쿠아의 만에 붙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싸움에 참가했던 다른 부족의 추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영국의 선박들은 2월 22일, 케알라케쿠아 만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100년의 하와이 왕조
-카메하메하 대왕의 하와이 통일
카메하메하(하와이어로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 재위 1795~1819년) 왕은 하와이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때에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그의 출생은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하늘이 크게 갈라지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멎자, 서쪽 하늘에서 꼬리를 길게 단 유성이 떨어졌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파에아라고 이름 붙여진 이 남자아이는 쑥쑥 자라 건강하고 힘도 세며,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청년이 되었다고 한다. 쿡 선장이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각지에 사는 부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하와이 섬의 왕 칼라니오푸우(Kalaniopuu)였다. 카메하메하는 이 왕의 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궁전에서 자랐다. 젊은 날의 카메하메하는 1778년과 1779년에 왕과 함께 쿡 선장의 배를 견학하였다. 카메하메하는 거기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고, 현대적인 총포의 위력 앞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배웠다. 1782년 칼라니오푸우 왕이 죽자, 카메하메하는 하와이 섬의 경쟁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790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카메하메하는 케오우아(Keoua) 족을 제외한 전 부족을 통일하였다.
1790년, 그는 현대적인 무기와 두 명의 전 영국 선원의 도움으로 마우이와 몰로카이 섬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오아후 섬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케오우아 족의 침략 소식을 듣고 다시 하와이 섬으로 돌아왔다. 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카메하메하는 전쟁의 신을 위해 카와이하에(Kawaihae)에 거대한 돌사원을 세웠다. 그후 마우이와 카우아이의 추장들이 큰 배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카메하메하는 이들을 물리쳤다. 카메하메하가 이보다 더 큰 신의 도움을 받은 사건은, 불의 여신 펠레가 킬라우에아 화산을 폭발시켜 케오우아의 세번째 부대를 전멸시킨 것이다. 이후 케오우아는 카메하메하로부터 카와이하에 대사원의 봉헌식에 초청을 받아 왔다가 한 추장에게 살해되었다. 1794년 카메하메하는 마우이와 몰로카이를 탈환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오아후를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카우아이를 제외한 하와이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1795년, 그는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를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를 카메하메하 대왕이라고 칭하며 왕국을 수립하였다. 1810년에는 그 세력이 대단해져, 카우아이의 추장, 카우무알리가 싸우지 않고도 충성을 맹세해 왔다. 이렇게 해서 하와이 제도 전체를 제패한 카메하메하는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서구 문명의 영향 속에서도 그는 조상들이 섬겨 왔던 하와이 신을 숭배하고 풍습을 중요시하여, 섬 원주민들을 당혹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현명하게 식민지를 통솔하였다. 그리하여 1819년 5월 8일, 그가 죽을 때까지 하와이는 그의 탁월한 통치력 덕분으로 태평양의 많은 섬들 중 유일하게 독립된, 평화로운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국유본 덕분에 성공한 일본 메이지유신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 메이지유신은 국유본이 치밀하게 계획한 것인 반면, 하와이는 자연발생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이하메하는 영국 선원 덕분에 하와이를 재통일할 수 있었고, 왕이 되었다. 예서, 또 일본과 차이가 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인은 쪽바리왕을 몰랐다. 즉, 쪽바리왕이란 국유본이 지시해서 유신정권이 만든 가짜인 게다. 어디서 근본이 없는 천박한 색희를 지금부터 쪽바리왕이다, 하고 임명한 것이다. 이것이 국유본 특유의 수법인 게다. 아편장사를 하다가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진 쪽바리 집안인 근본없는 천박한 색희, 김일성을 북조선 왕조로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튼 1800년대 초반 하와이 왕국 현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으니 하와이 국기인 게다.
"하와이 주기를 보면 참 재미나다. 바탕은 미국 국기인데 50개 별이 들어갈 자리는 영국 국기 모양이다. 1812년 하와이에 온 영국인 조지 밴쿠버 선장이 영국 여왕이 보낸 영국 국기를 카메하메하 대왕에게 선물하니 카메하메대왕은 영국국기로 다른 부락 정복을 표시했다. 그때로부터 하와이는 영국 국기를 국기로 삼았다. 그 후 1820년 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미국인들이 힘을 키웠다. 미국인들은 거센 항의를 들이댔다. 하와이 정부는 영국이나 미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고 고안해 낸 것이 하루씩 미국 국기와 영국 국기를 번갈아 내걸다가 나중엔 아예 미국 국기와 영국 국기를 나란히 내걸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미국 국기와 영국 국기를 반반씩 넣어 국기로 삼았다."
http://kr.blog.yahoo.com/kinxun518/533
예서, 미국인이라고 나오는데, 이들은 누구였을까?
"1820년 3월 30일에 New England의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 선교사가 처음 하와이에 오게 됨으로써 기독교가 구체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839년까지 총인구 13만 가운데 약 15,000명의 조합교회 교인이 늘어났다. 1835년에 Ladd and Co.라는 회사가 Koloa 사탕수수 농장을 Kauai 섬에 설립함으로 많은 농장들이 세워졌다. 그래서 1843년에는 미국인들이 실질적으로 하와이를 장악하게 된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2&docId=47613572&qb=MTgyMOuFhCDrs7TsiqTthLQg7ZWY7JmA7J20&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1&pid=gqu68F5Y7uRssa7jUXNssc--439301&sid=TqBmunI3oE4AAEWkGkU
"이들은 미국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새로운 가나안이라고 믿었으며,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뜻으로 통치되는 새로운 나라를 미국에 만들고자 주력하였다. 그 결과 미국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의 기반을 만들게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A%8C%EC%A4%91_%EA%B5%90%ED%9A%8C
회중파 전도사 동향은 정치권을 앞선다. 1820년대이면 미국이 캘리포니아 주는 커녕 동부에서 텍사스 같은 지역으로 확장하던 시기여서 캘리포니아 주 편입을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 회중파는 하와이까지 진격한다.
헌데, 회중파 생각이란? 미국이 가나안이라고? 그렇다. 그 논리를 확장하면, 하와이도 가나안인 셈이다. 구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이란? 낙원 이미지도 있지만, 선민이 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인종 청소 이미지도 있는 것이다.
헌데, 회중파 전도사들은 앞장 서서 하와이까지 건너간 셈이다.
"-카메하메하 2세와 선교사의 영향
위대한 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남인 리홀리호(Liholiho, 카메하메하 2세, 재위 1819~1824년)가 왕위에 올랐다. 카메하메하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카아후마누(Kaahumanu)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스스로를 섭정여왕이라 칭하며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하와이 역사에 그녀가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1820년 미국의 보스턴으로부터 선교사단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고, 영어로 교육을 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영어를 학습 문자로 갖게 되었다. 기독교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카아후마누는 전통적인 관습이나 카푸(Kapu)라고 불리던 인습적인 계급제도를 비판하며, 마침내 카메하메하 2세로 하여금 이 제도를 폐지하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종교개혁운동을 펼쳤고, 일부 과격파에 의해서 성전과 많은 우상물들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하와이 문화는 종교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은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혼란을 가져왔다. 외래인들로 인하여 서구 사상이 하와이에 들어오기 전까지 카푸 제도는 하와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이나 전해져 오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또한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와 그의 부인 카마말루(Kamamalu)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했는데, 홍역에 걸려 그해 7월에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바이런 경이 진두지휘한 영국 군함에 실려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카메하메하 3세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의 뒤를 이어 나이가 10살이나 어린 동생 카우이케아오울리(Kauikeaouli)가 9살의 나이로 카메하메하 3세(재위 1824~1854년)가 되었다. 카메하메하 3세가 통치하던 30년간은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였다. 그는 1840년에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하와이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기강을 확립해 나갈 수 있게 했으며, 토지제도개혁(1842년) 등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였다. 1850년에 그는 수도를 마우이의 라하이나에서 오아후의 호놀룰루로 옮겼다. 경제의 중심은 백단향 채취와 고래잡이에서 온난한 기후를 이용한 사탕수수의 재배로 옮겨갔다."
"UA MAU KE EA O KA AINA I KA PONO(우아 마우 케 에아 오 아이나 이카 포노; The life of the land is perpetuated in righteousness; 대지의 생명은 정의 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유래: 1843년 카메하메하 3세 때 호놀룰루 주재 영국 영사와의 사이에 토지문제와 부채문제로 분쟁이 있었음 당시 영국의 조지 포레트(George Paulet) 경이 군함으로 내항하여 카메하메하 3세를 굴복시키고 하와이 왕조국기를 내리게 한 후 영국기를 게양하여 하와이를 영국령이라고 선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843년 2월) 그 후 5개월 후인 1843년 7월에 영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리처드 토마스(Richard Thomas)경이 와서 카메하메하 3세의 복위를 인정할 때까지 5개월간 하와이는 비공식적이었지만 영국령이 되어 영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1843년 7월 31일 하와이 왕조가 복원되었을 때 카메하메하 3세가 "대지의 생명은 정의에 의해 보존된다"는 말을 했고 이 말이 바로 하와이 왕국, 하와이 공화국, 하와이주(州)의 표어로서 계승되어 온 것입니다."
http://www.callupcard.co.kr/cummunity/bbs_view.html?BCode=cummu_board_4&page=1&uid=4&type=1&viewtype=2&sm=4
1840년대 유럽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대변하는 혁명의 시대였다. 예서, 참고해야 할 것은, 1830년 7월 혁명이나 1848년 2월 혁명이나 혁명 주체 세력이 모두 로스차일드 가문, 즉, 국유본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개입하지 않는다. 만일 개입하였다면, 1848년 2월 혁명은 성공했을 것이다. 이처럼 로스차일드 가문이 혁명만 있으면 다 지원한 것이 아니다.
1843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영국 군대가 하와이를 점령함에도 불구하고 영국 군대가 물러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1843년은 로스차일드의 미국 지부인 조지 피바디 상회(런던) 설립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하와이를 둘러싸고 영국, 프랑스, 미국이 영토 분쟁을 한다면, 로스차일드 가문 의중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인드라가 볼 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하와이를 미국으로 넘긴 것으로 보인다. 왜일까? 당대 영국 해군이 세계 최강이었지만, 반면 영국 육군이 매우 허약했다. 해서, 영국 군대는 일시적으로 특정 지역을 장악할 수 있지만, 반대로 해당 지역을 오래도록 통치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영국 해군은 중국에 집중해야 했다.
해서, 이 모양새는 일부 반발하는 국유본 귀족들을 잠재우고, 미국에 관해서는 훗날을 기약한 셈인 게다.
-- 술을 많이 먹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오늘은 여기까지.
덧글 달지 않아 미안합니다만, 이 시리즈가 끝나고, 선거가 마칠 때까지
덧글놀이를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