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협찬 에스티 로더는 뉴라이트파 국유본론 2011

2011/10/28 02:46

http://blog.naver.com/miavenus/70122421562

   

   

   

나꼼수 협찬 에스티 로더는 뉴라이트파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0/28

   

예수의 돌 :

   

인드라님, 안녕하신지요. 요즈음 나꼼수가 인기인데, 유일하게 협찬한 - 직접은 아니고 '쪽발찌라시' 시사IN에 협찬 - 회사가 Origins라는 스킨케어회사더군요. 알아보니 유명한 에스티 로더 화장품의 자회사(브랜드)인데, 이건 어느파 소속일까요? 결과적으로 나꼼수는 어느 쪽 파벌에서 미는 오메가(or 알파)프로젝트인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인드라 :

   

에스티 로더는 뉴라이트파이다.

   

"에스티로더 기업은 1946년 조셉 로더(Joseph Lauder)와 그의 아내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가 뉴욕에서 화장품을 생산하면서 설립되었다. 처음 초기에는 슈퍼리치 크림, 크림팩, 클린징오일과 스킨로션의 4종 만을 생산하였고, 2년 후에는 뉴욕의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백화점에 매장을 오픈 하였다. 이후 15년간 사업영역을 확대해가며 미국에서 제품을 꾸준히 판매하였다.  

   

1960년 전세계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하였으며, 런던 해롯백화점에 처음으로 매장을 오픈하였다. 그 다음해는 홍콩에 사무실을 열었으며, 1964년 남성을 위한 향수와 그루밍(grooming)제품을 생산하는 아라미스회사(Aramis Inc)를 설립하였다. 1967년에는 경영재무분야 편집장들이 지정한 최우수 여성기업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1968년 클리니크(Clinique) 연구소를 설립하고, 피부과적인 가이드를 제시하고, 알러지 테스트 및 무향의 화장품 브랜드를 출시하였다. 또한, 에스티로더의 클리니크 브랜드는 남성을 위한 '세컨드라인(second line )을 소개한 최초 여성화장품으로, 1976년에 "남성을 위한 스킨서플라이즈(Skin Supplies)"라는 독립라인을 오픈 하였다.

   

1981년 구소련에서까지 제품이 판매되면서 세계적으로 약진하였다. 현재에도 꾸준히 개별 소매점 뿐만 아니라 전세계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2003년에는 직원수가 2만 여명에 달했고, 판매액은 50억 달러에 이르렀다. 2004년 2월 십대를 타켓으로 출시되었던 '제인(Jane)'이 매각되었고, 2006년 4월 1999년에 매입했던 스틸라(Stila) 브랜드를 매각했다. 로더가(家)가 주식의 70%를 보유할 정도로 로더가에 의해 기업이 경영되고 있으며, 현재 CEO는 로더의 손자인 윌리엄 P.로더(William P. Lauder)이다. 매년 유방암 의식향상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

[출처] 에스티 로더 [Estée Lauder Companies ] | 네이버 백과사전

   

에스티 로더 [Estee Lauder, 1908.7.1~2004.4.24]

  

요약

미국의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의 창업주로 '세계 화장품 업계의 거장', '세일즈의 귀재'로 불린다.

본명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

별칭

세계 화장품 업계의 거장

국적

미국

활동분야

경제(화장품업)

출생지

뉴욕 퀸스지구

 

   

본문

본명은 조지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이다. 1908년 8월 1일 뉴욕 퀸스지구에서 이민자 부모인 체코계(系) 아버지와 헝가리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았던 로더는 일찍이 화학자인 삼촌 쇼츠(John Shotz)가 만든 미용크림을 미용실 등에 팔러 다니면서 화장품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자신이 직접 만든 화장품을 미용실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며 고객을 확보한 뒤, 화장품이 인기를 끌자 1946년 남편 조지프(Joseph) 로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를 창업하였다. 1948년부터는 뉴욕의 백화점에 제품을 납품해 고급 브랜드의 이미지를 굳혔고, 업계 최초로 무료 샘플과 고급 매장 전략으로 고객을 확보하면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성장시켰다.

   

에스티 로더사(社)는 2004년 현재 종업원 2만 명에 10여 개의 화장품·향수 회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화장품 그룹으로, 매년 120여 개국에 1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만도 47억 달러에 이른다.

   

1982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다가 199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천재 경영인 2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에스터 로더사는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 Fortune》이 2003년 선정한 "500대 기업" 가운데 349위에 올랐다. '세계 화장품 업계의 거장', '세일즈의 귀재'로 불린다.

[출처] 에스티 로더 [Estee Lauder ] | 네이버 백과사전

   

에스티 로더는 조지 소로스처럼 헝가리계 유태인이다. 유태인의 미국 집단 이주는 다섯 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건국 이전 시기로 이때  루즈벨트 가문이 입성하여 뉴욕주에서 영주가 된다. 이 시기 이주한 유태인은 페니키아/카르타고 유태인들로만 구성되어 오늘날 국유본 핵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정착한 유태인은 그 인구 규모가 매우 적다.

   

두 번째는 1830년대부터 남북전쟁까지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서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하고 경제난이 가중되던 시기여서 서유럽인이 많이 이주하였는데, 이때 유태인도 일부 들어왔다.  이 시기에도 유태인 유입이 크지 않았다.

   

세 번째는 1880년대부터 일차대전 전까지이다. 이 시기에 오늘날 미국 유태인 대다수를 차지하는 동유럽 유태인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흔히 말하는, 카자르/하자르 유태인이 이들이다. 오늘날 뉴욕에서 유태인 명성에 걸맞지 않게 택시 운전을 하며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유태인이 있다면 십중팔구 카자르/하자르 유태인, 혹은 동유럽계 유태인이다.

   

네 번째는 히틀러 정권 시기부터 이스라엘 독립 때까지이다. 다섯 번째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소련 붕괴로 인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에스티 로더는 세 번째 시기에 이민을 온 유태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면, 에스티 로더는 왜 뉴라이트파인가.

   

http://piafpiaf.blog.me/120002791692

   

에스티 로더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레너드 로더와 로널드 로더이다.

   

이중 중요 인물이 둘째 로널드 로더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3322049

   

http://blog.naver.com/pandacho/15002794904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339545

   

로널드 로더가 크림트 그림을 샀다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헌데, 재벌이 그림을 사는 건, 상속과 관련이 있다. 미술시장 인플레가 극심한 비밀은 바로 국제유태자본 귀족 가문들의 비밀스런 재산 상속에 있다. 이외에도 쪽발 놈현 재단처럼 재단 기부를 통한  상속 등이 있다. 한국의 더럽고, 추잡한,  쪽발 돼중, 쪽발 놈현, 재벌이 독창적으로 재산 상속 아이디어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국유본에게 배운 것이다.

   

이런 로널드 로더와 수십년 지기가 있다. 누구?

   

베냐민 네타냐후 (Benjamin Netanyahu) 이다. 그는 누구인가?

   

"베냐민 "비비" 네타냐후(히브리어: בִּנְיָמִין "ביבי" נְתַנְיָהוּ‎, 1949년 10월 21일 ~ )는 이스라엘의 정치인이다. 리쿠드 당 소속으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제9대 총리를 지냈으며 2009년에 다시 총리에 임명되어 현직 총리로 재직중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인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대학 교수인 부친을 따라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6년간 군복무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1980년대 후반 이스라엘 정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근무하였다. 1982년에는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84년 ~ 1988년UN 대사를 지냈다. 198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츠하크 샤미르 정권에서 각료로 재직하였다. 1993년 리쿠드 당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1996년 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총선에서는 동시에 총리를 별도로 직선으로 뽑도록 되어 있었다. 총선 직전 팔레스타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초강경 정책을 실시할 것을 내비치며, 온건파인 시몬 페레스 당시 총리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는 페레스를 1% 포인트 차로 제치고 총리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였고, 또한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태어난 최초의 총리였다. 총리로 재직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야세르 아라파트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미국과 요르단의 중재로 와이리버 협정을 체결하여 영토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 체결은 그를 지지하던 우파의 신임을 잃게 된 결과를 초래했고, 개인적인 문제와 부패 스캔들 등으로 구설수에 올라 1999년 총리 선거에서 노동당에후드 바라크에게 패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그는 리쿠드 당의 당수직도 내놓고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아리엘 샤론 정권의 각료로 참여하게 되어, 2002년 ~ 2003년 외무장관으로 재직하였고, 2003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아리엘 샤론이 맡고 있던 리쿠드 당 당수직도 다시 노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5년 8월 9일 샤론 총리의 가자 지구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에 반대하며 재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샤론 총리가 리쿠드 당을 탈당하고 카디마 당을 창당하자 그 해 12월 리쿠드 당 당수직 선거에서 다시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2006년 총선에 출마하였다. 총선 결과 리쿠드 당은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카디마 당에 빼앗겼으며, 총리는 카디마 당의 에후드 올메르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자신이 다시 총리가 되면 이란 핵시설에 선제 공격을 하겠다고 발언하는 등[1] 초강경 우파의 행보를 이어갔다. 그 후 이스라엘 정국은 경제위기, 집권당인 카디마 당의 부패 스캔들, 가자 지구 문제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비리에 연루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이후 새 정부 구성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2009년 2월,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 가자 사태가 쟁점이 된 총선 기간 중에도 강경 우파 행보를 이어갔으며, 이에 호응하는 유권자들의 반응에 카디마 당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작용하여 그와 리쿠드 당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총선 결과 그가 이끄는 리쿠드 당은 카디마 당에 1석 차로 패했으나, 그는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등과 연정을 구성하여 3월 31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http://ko.wikipedia.org/wiki/%EB%B2%A0%EB%83%90%EB%AF%BC_%EB%84%A4%ED%83%80%EB%83%90%ED%9B%84

   

"리쿠르당은 데이비드 록펠러 뉴라이트 카터레이건 정당입니다. 카디마당은 제이 록펠러 CGI 오바마 정당입니다. 노동당은 로스차일드 빌더버그 네오콘부시 정당입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16061510

   

네타냐후는 현 이스라엘 총리이다. 동시에 로널드 로더의 수십년 지기이기도 하다. 로널드 로더는 세계 유대인 회의 의장이자  세계유태인회의 산하 미술품 회수위원회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클림트도 유태인, 클림트 그림 속에 있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은 유태인 제당업자의 부인. 해서, 로널드 로더가 유태인 미술품 회수 차원에서 나선 것이다. 속으로는 재산 상속이겠지만.

   

로널드 로더는 오바마 정부 때 혼란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오바마 이스라엘 조치에 격분하여 당장 철회하라고 요구한 것이 로널드 로더였다. 허나, 어느 순간 오바마 정부를 옹호하고 나선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전형적 모습이다.

   

나꼼수나 쪽발 찌라시 시사인이 뉴라이트파인지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 허나, 뉴라이트 네이버가 나꼼수를 여러 각도에서 키우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주부나 싱글 검색에서 자주 나꼼수를 노출시키는 것은 뉴라이트 네이버의 꼼수가 아닐까 의심할 이유가 충분하다. 또한 쪽발 찌라시 시사인이 삼류 찌라시임에도 뉴라이트 네이버에 배치한 것만 봐도 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뉴라이트 네이버는 보수우파라고 해도 뉴라이트 계열인 데일리안이나 뉴데일리를 취급하지, 독립신문이나 빅뉴스를 취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보좌파라고 해도 뉴라이트 네이버는 뉴라이트 언론만 주로 취급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잘 나가는 언론이면 뉴라이트가 아니라도 배치하지만^^!

   

무엇보다 나꼼수를 키우기 위해 뉴라이트 홍준표가 나선 것을 유념해야 한다. 처음에는 박원순 까는 듯싶다 이내 본색 드러내서 일억 원 피부샵 터뜨린 것만 봐도, 또한 골드만파 유시민을 비판했던 무뇌아 쪽발노빠 정봉주가 나꼼수 뒷배경이라는 데에도 고려해야 한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위한 일회용 뉴라이트 온라인 조직이었지 않나 싶다. 일억 피부샵 허위사실 유포로 주부층들 상당수가 어지간하면 나경원 찍으려고 했는데 깬다 싶어 기권하거나 박원순 찍었다는 이야기를 나타샤에게 직접 들었다.  나타샤 말로는 동네 아줌마들이 죄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란 이야기다 ㅋㅋㅋ. 이거 주장한 의사가 거짓이 모두 탄로나자 깨갱했는데, 그럼 뭐하냐? 선거 끝났는데~!

   

사실 인드라는 고기준에 딱히 반감이 없다. 고기준이가 인드라 글 많이 참고하고 읽으면서 딴지하고 그랬다. 그러다가 디시갤에게 물먹으면서 권토중래한다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좀 들었는데, 많이 타락한 것 같다. 돈 맛을 알면 인간이란 타락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인드라는 고기준을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없다. 인드라는 고기준처럼 돈 벌 생각이 없기에. 고기준이 경쟁자는 쭝권이인데. 둘 다 많이 타락해서 둘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것 같다. 고기준이 쪽발 놈현 시장을 독점하자 이에 불만을 느낀 기득권자, 쭝권이가 지랄하는 양상인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인간 말종들 싸움이어서 관심이 없다.

   

쪽발 놈현파 애들은 하나같이 다 인간성이 쓰레기인지, 오프라인에서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뉴라이트가 일처리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사냥개들을 처리하는 시간인 것 같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