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이 한국의 박정희라면 미테랑은 한국의 쪽발돼중이다 국유본론 2011
2011/10/19 06:2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1647764
드골이 한국의 박정희라면 미테랑은 한국의 쪽발돼중이다
대안이고자 한다면 물타기를 하지 말란 말이야~!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0/20
드골이 한국의 박정희라면 미테랑은 한국의 쪽발돼중이다
중도좌파 박정희 집안은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반골 집안이다.
http://blog.daum.net/jnhojn/13
http://blog.chosun.com/hansu0001/2152667
국내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인드라한테 가장 많이 까인 정치인을 들라면 프랑스의 쪽발돼중, 사회당 대통령 미테랑이다. 미테랑은 2차례(1982~95)에 걸쳐 대통령을 지냈다. 미테랑이 대통령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데이비드 록펠러 힘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하면, 왜 데이비드 록펠러는 미테랑을 대통령에 임명하였을까. 미테랑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유럽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는 독일과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국유본이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아시아 연합을 주장했던 쪽발 돼중을 필요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여, 1991년 12월 유럽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주요 내용으로 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수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간 한국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던 자들이 대체로 쪽발 돼중 지지자들이 많은데, 그들이 모델로 삼은 국가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친독파 청산을 잘 해서 선진국이 되었으니, 한국도 그리 하자는 게다.
헌데, 그리도 친독파 청산을 잘 한 프랑스가 미테랑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테랑 이야기하면 쪽발 돼중 추종자들은 척하니 알고 왜 그딴 이야기를 하느냐, 좋은 일도 많이 했는데, 왜 미테랑 나쁜 점만 지적하느냐, 누구누구는? 하면서 물타기를 엄청나게 시도한다. ㅋㅋㅋ. 이처럼 프랑스나 한국이나 사정을 알면 복잡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드라는 한 넘만 패는 게다. 이것이 인드라가 강준만한테 배운 것이다~! 해서, 그대들은 물타기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것이 인드라가 의도하는 바이기도 하니까^^!
미테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후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권의 관리를 지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944년 8월 파리가 해방된 뒤 샤를 드골의 임시정부에서 일했다. 1971년 사회당 총재가 되었고, 1981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헌데, 미테랑 친독 행위에 대해서는 독일군 점령으로 인해 어쩔 수 없던 부역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인 게다~! 허나, 정말 그럴까?
근래 '호모 파시스투스'란 책이 출간했다. 이 책은 필리프 페탱의 비시정부에서 장마리 르펜의 민족전선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파시즘적 전통이 이탈리아산 수입품이 아니라 자생적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대중독재론자인 김용우는 그 증거로 1925년 창설된 '페소'와 1927년 창설돼 1936년 '프랑스사회당'으로 변신한 보수적 민족주의 단체 '불의 십자가'를 제시한다.
예서, 흥미로운 대목이 미테랑이다. 1934년 17세의 학생이었던 미테랑은 당시 최대의 급진적 보수주의 세력이자 인민전선 정부의 강력한 경쟁 세력이었던 라 로크의'불의 십자가' 에 가담했고, 그 다음 해에는 이민 반대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1941년 겨울 독일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미테랑은 비시 정권에 투신하여 페탱의' 민족혁명' 노선의 첨병 노릇을 한' 전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미테랑은 비시 정권에서 최고 훈장을 받았다. 또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비시정권 패탱에게 계속 꽃다발을 바쳤으며, 비시 정권이 저지른 유태인 박해에 대해 프랑스 국가 책임으로 인정하는 것을 계속 거부했다.
하면, 인드라가 그간 줄곧 미테랑을 깐 이유는 무엇인가.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 사건이었다. 미테랑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에 나선다.
"1979년 은행 회장 직에서 은퇴한 그는 1981년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의 은행을 국영기업으로 바꾸자 또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그는 "페탱(비시 정부의 지도자) 아래에선 유대인, 미테랑 아래에선 최하층민"이라며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큰아들 다비드와 사촌 에릭은 1984년 사회당 정부로부터 새로운 은행 설립 허가를 받았다. 단 로스차일드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파리 오를레앙 은행'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http://news.donga.com/3//20070616/8455011/1
하면, 인드라가 왜 이 사건에 주목하는 것일까.
"인월리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패배한 후 세계 로스차일드 가문 주도권을 프랑스 로스차일드에게 넘겼다고 한 바 있다. 해서, 프랑스 대통령을 살펴보기로 하자. 프랑스 대통령하면 뭐니뭐니 해도 프랑스의 박정희, 드골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로스차일드에게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행동했던 드골이었다. 허나, 프랑스의 박정희, 드골은 막상 대통령이 되자 영국에 대항한 유럽대륙 자주노선을 천명하며, 그 유럽의 중심에 프랑스를 내세우는 나폴레옹 노선으로 간다. 하여, 유럽연합을 추진하던 빅터 로스차일드는 드골을 제거하는 공작에 착수했다. 하여, 프랑스 유일의 진정한 대통령, 드골은 로스차일드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이후 1970년대 ~ 1980년대 당시 프랑스 정치권은 영국 로스차일드 (미테랑) 대 프랑스 로스차일드 (퐁피두, 지스카르데스탱) 대결 구도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미테랑이 집권하자 미테랑이 프랑스 로스차일드 은행을 폐쇄했다가 결국 나중에 개망신 당하게 되어서 두고두고 인드라에게 까이게 되는 신세가 된 게다.
국유본은 국유본에 반기를 든 드골을 하야 공작을 통해 물러나게 한 후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 밑에서 일하던 퐁피두를 대통령으로 임명한다. 헌데, 퐁피두는 갑작스레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지스카르데스탱이 대통령이 된다. 지스카르데스탱은 대통령 드골에 의하여 재무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1966년 사임하여 드골파와 결별하였다. 이후 지르카르데스탱은 퐁피두 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으로 활약하다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인월리는 퐁피두 사망에 데이비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가 관여한 것으로 본다. 데이비드 록펠러 측으로서는 1973년의 세계사적인 국유본 정권교체 이후 프랑스 권력 재조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하여, 퐁피두가 비록 프랑스 로스차일드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로스차일드 사람 대신 록펠러 사람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해서, 발탁된 인물이 지스카르데스탱이다. 하여, 프랑스의 박정희, 드골 이후 오늘날까지 프랑스 대통령들은 모두 국유본의 허수아비일 뿐이다.
지스카르데스탱은 사파리클럽을 주도하던 마렌쉐를 정보기관 총수로 임명한다. 프랑스 정보기관 총수 마렌쉐 백작은 1981년 초에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CIA 책임자 케이시에게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마약을 사용하라고 지시한다. 허나, 마렌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근원을 찾아가면 데이비드 록펠러가 나타나고, 실무 책임자가 브레진스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당시 미국 카터의 국가안보 보좌관이자 데이비드 록펠러의 삼각위원회를 주도하던 브레진스키는 무자헤딘을 지원할 것을 카터에게 지시했다. 친미 국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이야말로 '히틀러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낡은 소련제 무기를 무자헤딘 반군에게 보내주었다. 그뿐 아니라 사다트는 국유본이 지시해서 중국과 북한에도 미사일 시스템을 수출한다. 김정일이 이 덕분에 오늘날 핵무기 운운하고 있는 게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 의회는 이집트에 15억 달러의 신용 차관을 제공했고, 사다트는 이 돈으로 미국의 첨단 무기들을 구입했다."
북핵 배후는 국유본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80706283
쪽발돼중이나 미테랑은 처음에는 드골과 박정희, 김일성처럼 빅터 로스차일드파였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계속 집권하였다면 중도좌파 박정희 다음에는 쪽발돼중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교체하면서 프랑스나 한국 정치권에서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빅터 로스차일드 국유본 권력이 지속했다면, 프랑스에서는 드골 - 퐁피두 - 지스카르데스탱 - 미테랑이 아니라 드골 - 미테랑으로 이어졌을 공산이 크고, 한국에서는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쪽발돼중이 아니라 박정희 - 쪽발돼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서, 생각해보자. 비록 권력을 잃었다손 치더라도 빅터 로스차일드가 여전히 살아 있는데, 미테랑이 무엇을 믿고, 감히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을 했을까? 영국 로스차일드와 프랑스 로스차일드 갈등이 아무리 크다 한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내려준 화살 묶음 교훈이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하면?
그렇다. 위기는 기회라 했다. 종교처럼,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드러내놓고 퇴출을 당하니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프랑스 가문이 돋보인 게다. 이에 비해 빅터 로스차일드는 놀고 있는 듯이 보인 것이다. 해서, 터뜨린 것이 명운을 건 영국 탄광노조 파업 투쟁이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폴란드 연대노조 파업 투쟁을 벌이고, 빅터 로스차일드는 영국 탄광노조 파업 투쟁을 일으킨다~!
허나, 이는 데이비드 록펠러의 수읽기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걸려든 모양새. 미테랑의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은 빅터 로스차일드를 끌어내리려는 책사 브레진스키의 떡밥이었다는 것이 인드라 분석인 게다.
정리하면, 미테랑은 쪽발돼중처럼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에서 데이비드 록펠러파로 말을 갈아탄 노비네파인 게다.
해서,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 사건은 데이비드 록펠러의 일타 삼피인 게다.
하나,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 사건은 그간 신성불가침이던 로스차일드 가문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왜냐하면,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 사건을 주도한 것이 사회당 미테랑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사 이백년간 로스차일드 가문은 보수우파에서만 비판을 받았을 뿐, 진보좌파에서 비판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둘,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 사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책임지던 빅터 로스차일드와 빅터 로스차일드가 속한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다. 가령 왜적 떼들이 해안지방에 와서 노략질을 하는데, 중앙정부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해안지역 사람들이 중앙정부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처럼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에 원망이 없겠는가?
셋, 로스차일드 은행 퇴출 사건은 그간 은인자중하며 기회를 엿보던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이중 치욕을 감수하게 만들어 천재 빅터 로스차일드가 전략적인 이유보다 자존심을 내건 이유로 영국 탄광노조 투쟁에 나서도록 데이비드 록펠러 책사 브레진스키가 떡밥을 던진 것이다. 이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미끼를 덥썩 물어 결국 빅터 로스차일드가 대패한다.
대안이고자 한다면 물타기를 하지 말란 말이야~!
1976년 22차 프랑스 공산당 당대회에서 알튀세르의 입장
프랑스 공산당은 1976년 제22차 전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포기했다. 1977년에는 프랑스 사회당과 연합해 지방 선거에서 52%의 득표율을 기록해 정계에서 압승했다. 1978년 공산당은 일시적으로 동맹을 해체시켰지만, 1981년 사회당과 연합하여 사회당 연립정권에서 각료 4개를 따낸다. 허나, 이로 인해 지지율이 더욱 하락하고, 의석수도 격감한다.
헌데, 1976년 22차 당대회 때 알튀세르 입장은 프랑스 공산당 주류와 같은 입장이었나. 아니었다.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 고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예서, 독재가 무조건 나쁜 말로 사용하는 것이 요즘 시대이지만, 그 어원을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싶다.
"독재관(딕타토르)는 오늘날에는 나쁜 의미로만 쓰이게 된 딕테이터(독재자)라는 낱말의 어원이지만, 공화정 로마에서는 국가 비상사태에 임명되는 관직으로, 임시 독재 집정관을 의미했습니다. 다른 관직이 선거로 선출되는 반면, 독재관만은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이 지명하기만 하면 성립되었습니다. 독재관은 정치체계를 바꾸는 것 외에는 모든 문제에 결정권을 가졌고, 독재관이 결정한 일에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임기는 불과 6개월이었고 정원은 물론 한 명이었습니다. 공화정 체제에서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그런 이유가 없을 경우에 독재관을 지명하여 그에게 즉결권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독재관은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집정관급 인물이 지명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럼 왜 독재관이라는 직위가 공화정인 로마에 필요했을까요? 과두정치는 민주정치보다 덜하지만 선장이 많은 체제입니다. 이런 정치체제의 결함은 긴급사태가 일어나 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때 결여하기 쉽다는 점이죠. 이 결함을 보충하는 것이 바로 독재관 제도였습니다. 공화정 로마의 위기관리 체제였다 해도 좋겠군요. 마키아 벨리는 "어떤 정치체제를 지키고 싶으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정치체계의 이념에 어긋나는 일도 과감히 해치울 만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게을리 하면, 그 정치체계 자체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독재관은 로마가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고안된 관직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재관은 위기관리 체제의 임시관직인 이상, 로마는 독재관을 남발하지 않았습니다. 공화정으로 이행한 기원전 509년부터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119년 동안, 독재관은 일곱 번밖에 지명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지낸 카밀루스의 사례는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듯이 기원전 390년 직후에 로마를 덮친 위기와 혼미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독재관은 집정관 두 명이 나누어 갖고 있는 최고 권력을 비록 6개월이나마 혼자 독점하는 것입니다. 집정관이 '선도자'를 12명 앞세운 반면, 공화정 로마의 독재관은 그 두 배인 24명을 앞세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독재관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카이사르가 삼두정치 끝에 모든 경쟁자를 격파하고 종신독재관에 임명되었을 때, 그 시점에서 이미 독재관이 아니라 독재자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록 시오노 나나미가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사상이 의심스러운, 국유본의 '똥걸레'인, 쪽발이왕 학습원 출신이지만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더더욱 시오노 나나미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알튀세르 입장은 무엇이었나.
하나, 철학적/인간적 맑시즘은 얼라 초딩 맑시즘, 과학적 맑시즘은 알튀세르 정통 맑시즘이라는 입장을 더욱 강화한 시기였다. 알튀세르 전성기는 65년부터 68년이다. 왜 이 시기인가는 전적으로 베트남 전쟁 때문이다. 1965년 국유본 귀족이었던 러셀 백작이 영국 노동당증을 찢어버리는 생쇼를 연출했다. (영국 백작 작위를 받은 넘이 영국 노동당원^^? 니미, 이재용아, 오늘부로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렴~!!! 아니면, 이명박 아들이니 박지만 아들이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는 것도 재미있을 듯.) 바로 이때, 프랑스에서도 뭔가를 보여주는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가 바로 알튀세르였던 셈이다.
헌데, 알튀세르는 막상 68혁명이 본격화할 때는, 얼라 초딩 맑시즘 비판을 삼가는 편이었다~! 왜? 그야 뻔하지~! 68혁명 주체가 얼라들이거든~! 코코코입~!
그러다가 68혁명이 잠잠해지니 다시 얼라 초딩 맑시즘은 역시 잠깐이야, 하고 나선 형국인 게다. 뭐, 그리 어려운 것 없다. 부동산 투자전문가 노엄 촘스키가 무식한 데다 뉴라이트파로 데이비드 록펠러 삼각위원회 추종한 데다 책 파는데 광분해서 이런 걸 잘 모르는 것일 뿐^^! 노엄 촘스키 씹새야.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더러운 입 닥쳐. 알았니? 다른 건 뭐라 해도 인드라가 괜찮아. 허나, 한반도 문제 함부로 거론하면 너놈 천벌을 받는다? 알았냐? 이 유태인 개새야.
해서, 알튀세르 정통 맑시즘 입장에서는 1976년 22차 프랑스 당 대회 결정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왜? 얼라 초딩을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프로 선수, 혹은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관료가 아니라 혁명가가 되어야 하는데, 혁명가가 관료가 되니 문제라는 것이 알튀세르 인식인 게다. 요거이,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롱~! 그래용~! 북한에서 소련이 붕괴하니 이런 주장하더만. 병쉰색희들~ ㅋㅋㅋ
이게 문제다. 상황이 위기면, 이넘 저넘을 모두 단죄하는 것, 좋지 않은 버릇이다. 어려운 시기, 영웅은 오히려 이넘 저넘을 단죄를 하기보다 용서하면서 탄생한다. 왜? 영웅은 힘이 있거든? 반면, 간웅은 힘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한다. 해서, 간웅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록 부패했지만, 십분지 일만큼 부패했다고 말한다. 이런 색희가 더 나쁜 넘이다~ ㅋㅋㅋ
이거, 인드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 잡지 못한 넘들은 분명 무뇌아 노빠 색희이다~!
인드라 생각을 간단히 정리한다. 알튀세르가 과학적 맑시즘 운운한 것은 토마스 쿤이 1962년에 발표한 '과학혁명의 구조'에 반정립한 것이 아닌가 싶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3229
예서, 토마스 쿤 철학을 자세히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알튀세르가 맑스주의 교황이라고 불린다는 것이 긍정적인 표현만이 아니라는 것.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웃음을 거부하는 베네틱트 교파 호르헤를 떠올리게 한다.
시민은 엄숙주의 호르헤보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주세뻬 뻬뽀네를 좋아하는데?
둘, 월가를 점령하라! 국유본 귀족을 점령하라!
알튀세르는 1973년부터 미쳤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73년 이후부터 자기 파괴에 이르고 있다고 봤다. 이는 <프로이드 박사의 발견>이라는 글이었는데,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라깡이 프로이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정당화하려 했다"며 비판했었다. 그런가하면 74년에 알튀세르는 왜 자신이 그렇게 이론에 빠졌었는가"라며 회의한다. 그런 알튀세르를 보면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는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기를 본다"고 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가진 자기 파괴의 욕망이 자신의 이론에서도 작동되고 있다고 봤다."
[출처] 진태원선생 강의 (호모부커스) |작성자 어디냐
제자 발리바르는 스승 알튀세르의 '최종 심급'을 제대로 읽지 못한 듯싶다.
모택동과 알튀세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국유본을 까자!!! 허나, 예서, 공격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다. 국유본 황제인가, 아니면 국유본 귀족인가. 국유본 귀족을 타도하자는 것이 모택동과 알튀세르 입장이었다.
빅터 로스차일드와 알튀세르는 일치한 견해가 있었다. 신세계 질서로의 급속한 이행이다. 그것이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을 이야기한 핵심이다.
최종심급? 최종 심금? 물리력을 지닌 관념적인 존재. 누구냐. 국유본 황제이지? 누군 누구야~! 우하하. 프랑스 철학, 존나 쉽네~! 누가 어렵다 하는겨~! 좆밥들이 무식해서 그랴~! 심금을 누가 울리는 것이냐.
하.여.간!
1973년에 국유본 권력 교체가 있었다. 병쉰스런 발리바르야 모르지만, 스승인 알튀세르는 알아두어야 하는 것이지. 이런 시기에 정신이 헤까닭튀김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니겠어?
허나, 해가 지나자 알튀세르가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것이겠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되는 것이겠다. 알튀세르가 심리치료라도 받았나~!
해서, 1976년 프랑스 공산당 당 대회 때 알튀세르 입장이 무엇이겠냐. 황제는 바뀌었어! 알튀세르가 개혁 대상이라고 여기던 국유본 귀족들이 옹립한 황제가 국유본 황제가 된 것이야. 이런 상황에서 알튀세르가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니? 프랑스 공산당이야 빅터 로스차일드파였지만, 대세에 따르는 족속들이니 만큼 이제 데이비드 록펠러파가 될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알튀세르 골이 아프겠지?
백이숙제나 정몽주처럼 不事二君[불사이군]하는 것이어야 할까? 아니면, 누구를 지지한들 무슨 상관이냐는 추상화된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여야 할까? 알튀세르는 후자를 택한 것이겠다.
이런들 어떠하라, 저런들 어떠하리~! 알튀세르~!
헌데, 최종심급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프랑스 공산당 관료를 비롯한 국유본 귀족들을 배격하고 있으니 알튀세르 앞날이 뻔하지 않겠는가? 자, 폼나는 것도 러셀 백작처럼 권력이 있어야 모양이 있는 것이다. 알겠니?
셋, 알튀세르 부활이 가능한가?
"그렇다.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 혹은 "독점자본주의" (레닌)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독점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새로운 형태의 금융집 중이― 따라서 착취도― 일어나며, 국가는 콘체른의 편에 서서 필요한 정치적 및 이념적 무기를 마련해주면서 가공할만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른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이러한 과정의 본질적인 측면(생산에서의 국가부문의 확대, 콘체른을 위한 국가의 신용대부, 모든 수준에서의 민주적 표현의 억압)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모든 것을 "자본의 탈가치화"라는 모호한 해석으로 환원하고 국민국가를 중심에 두기 때문에 금융자본 집적의 세계적인 형태를 분석하지 못한다. 또한 이 이론은 금융자본의 능력, 즉 세계 계급투쟁 상황에 따라 착취와 투기를 강화하고, 자본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전시키며, 위기 자체의 도움으로 자신에 고유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왜 통화위기와 인플레가 미제국주의와 그 지역 "대리인"이 지배하는 모든 제국주의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인 현상인가를 설명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가 개개의 제국주의 국가와 그 계급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제금융자본, 그 시장 및 그것의 작동 사이의 변증법은 일국적 독점체의 존재에 한정되지 않는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기가 "세계적"이며 "구조적"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위기의 결과는 전 세계적이라는 점, 그리고 위기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자체와 그것의 존재형태 자체(착취, 정치, 이데올로기)를 의문시하며 국내 부르조아지의 지배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또한 이 위기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으며 그 결과가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만일 좌파가 승리를 거둔다면 이 위기―그것의 일국적 근원뿐만 아니라 결코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국제적인 영향―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
위의 내용은 옛날에 새길 출판사에서 출간된 '당내에서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이라는 책의 29-30쪽에 있는 내용을 발췌한 것임. '프랑스공산당 제22차 당대회의 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임. 당의 공식 이론가인 보카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비판하면서 미국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실상 이 내용은 미국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공식 지지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음. 윤소영도 본인의 이론적 선회(세계체제론 수용)의 배경을 설명할 때 알튀세르의 이 언급을 거론한 바 있음. 프랑스공산당 22차 당대회는 1976년에 있었고, 이진경이 번역한 저 글의 번역대본은 1978년 독일에서 출간된 책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음. 알튀세르가 사망한 것은 90년이니 '말년의 저작'이라기보다는 '후기 저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음. 실제 이 글의 주장이 알튀세르 본인에 의해 76년 상황 당시에 개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70년대 중반 알튀세르 본인의 입장인 것은 확실.
FACT정리 - 데이비드 록펠러와 빅터 로스차일드 간의 전쟁이 한참이던 70년대 중반에 알튀세르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해체시키기 위한 데이비드 록펠러 계열의 이론인 세계체제론을 공식적으로 지지한 일이 있었음.
의문 -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어느 파벌의 인간이었나. 혹 로스차일드계의 세가 강한 프랑스에서 록펠러 지지를 공표했다가 고립된 것은 아닌지."
- CIA
그리 볼 수도 있다. 허나, 사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쪽발돼중을 비판해도 어느 입장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가령 골룸빡을 비판해도 어느 입장이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하긴, 인드라가 지난날 쪽발돼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을 섰을 때, 러시아 유학까지 갔다와서 정치학 전공하는 분이 말씀하시더라. 다른 사람들 주장은 알겠는데, 인드라가 도대체 쪽발 돼중 지지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뭐, 이렇게 어려워?
물론 결과적으로 같을 수 있다. 흔히 이런 대목은 정치공학으로 희화화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건 옳은 것이요, 그른 건 그른 것이다. 이런 대목을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이런 사안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보면 곤란한 것이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 반성하겠다. 바로 이것이 프랑스 좌파의 편법이었던 게다.
프랑스 좌파가 미테랑 같은 넘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하니 골이 아프지 않았겠는가. ㅠㅠㅠ 인드라처럼 쪽발돼중이 쪽발돼중이라고 아는 넘이 쪽발돼중을 지지하다보니 생기는 문제가 얼마나 골치가 아픈가. 해서, 누구도 모르게, 아니, 아무도 모르게 최대한 현학적으로 썰을 푼 게다. 이것이 프랑스 철학의 장점이요, 단점인 게다.
프랑스 철학 장점은 뭐냐. 인드라 같은 사람만 안다는 게다. 프랑스 철학 단점은 뭐냐. 인드라 같은 사람을 도매급으로 넘기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전제하고, 월러스틴, 월러스타인, 왈라스타인((Immanuel Maurice Wallerstein) 세계체제론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다. 인드라가 월러스틴 책을 두 권 정도 읽은 수준에서 말씀을 드린다. (참고로 십 년 전에 어떤 여성 뉴욕 유학생이 인드라더러 사석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월러스틴 욕을 많이 했는데, 인드라가 언급하면 곤란해서 언급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괜찮을 것 같아 언급한다.)
월러스틴 주장 특징은, 서구 자유주의,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프랑스 스타일이나 스웨덴 스타일, 북유럽 스타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존속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허나,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함에 따라 서구 자유주의도 동시에 몰락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자유주의자일지라도 월러스틴 주장은, 알튀세르 입장과 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해서, 이 대목에서 세계체제론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바로 세계체제론을 받아들이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부정했다는 식은, 정반합 헤겔 방식 없이 오직 정과 반만 있다는 아도르노 변증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허나, 사정은 이렇더라도, 알튀세르가 실제 인식을 어떻게 했더라도, 중요한 건, 행동이요, 실천이 아니겠는가.
1980년대 알튀세르는 아내를 목 졸라 죽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알튀세르가 정반합의 헤겔 변증법을 그토록 거부한 결과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 미국 노예민주당에서 미국 공화당으로 권력을 이동시키는 데이비드 록펠러 권능에 대응한 태도로 아내를 죽였을 수 있는 것이다. 이건희가 말했지 않은가? 아내 빼고 다 바꾸어라! 그에 대응하여 알튀세르는 아내도 바꾸려고 했던 것일까. 인드라 경험을 잠시 말하겠다. 이성적인 인간은 토대를 중시한다. 해서, 자신이 주장해왔던 것이 현실과 다르다면, 가장 밑바닥부터 자신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한때, 인드라는 인드라 취향을 모조리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혁명적인 인간이 되고자 그 반대 것만을 취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기까지 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미친 짓이다. 마지막으로 완벽한 아빠, 완벽한 어른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신화일 뿐. 알튀세르 역시 기득권 신화에 한 줄을 쓴 셈이다. 우리가 박정희 정권 때 투쟁한 덕분에 한국 사회가 발전했다. 그에 비한다면, 내 비리 정도야 조족지혈이 아니겠니? 그래, 씨발아, 잘 처먹고 잘 살아. 개씨발색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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