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1947년 국유본론 2011
2011/10/18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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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과 1947년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0/18
이 글을 읽기 전에 필독할 글이 있으니 '국제유태자본과 냉전의 기원 http://blog.naver.com/miavenus/70032100543
'이다.
20세기 근대사를 이해할 때 일국적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국제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국유본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에. 국유본이 세계 전략에 따라 각국을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기에. 예서, 국유본론과 반미론이 유사하지 않느냐 하는 이들이 있다. 차이가 매우 크다. 이래서 1947년이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1947년 이전에 미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세계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 명백한 증거가 CIA가 1947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47년은 국유본 역사에서 국유본 권력 교체가 있었던 1973년 만큼은 아니나 기념비적인 해이다. 왜 1947년인가.
- 1월 15일 - 미국에서 엘리자베스 쇼트 사건 발생.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 블랙 다알리아에 등장.
- 2월 -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
- 2월 23일 - 국제 표준화 기구 출범.
- 2월 25일 - 프로이센의 해체.
- 2월 28일 - 중화민국 관할하의 타이완 정치불안, 2·28 사태 발생.
- 3월 1일 - 대한민국 서울 남대문에서 좌,우익 세력 집회도중 충돌. 38여명의 사상자 발생.
- 5월 21일 - 서울 덕수궁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 6월 21일 - 대한민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
- 8월 5일 - 고려레코드, 최초로 한국 기술진에 의한 음반제작 성공
- 8월 8일 - 파키스탄 국기 채택.
- 8월 14일 - 파키스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
- 8월 15일 - 인도,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해 독립
- 8월 28일 - 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
- 9월 9일 - 첫 번째 버그(사진) 발견: 하버드 대학교가 만든 마크 II 컴퓨터의 계전기에서 나방이 발견되다.
- 9월 17일 - 국제연합 총회 한국문제 정식 상정
- 9월 18일 - 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 9월 21일 - 군정기: 반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 결성(단장 지청천)
- 9월 26일 - 소비에트 연방,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군 동시 철수 제의
- 9월 30일 - 예멘, 파키스탄 국제연합 가입
- 10월 5일 - 소비에트 연방 등 동구 9개 공산국, 공산당 정보기관인 코민포름 결성
- 10월 14일 - 시험비행사 척 예거가 벨 X-1 기로 초음속 비행에 성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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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1947%EB%85%84
1947년 9월 18일에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출범했다. 미 공군도 같은 날 탄생했다. 그 이전에 미국에서 정보부라고 할만한 것이 없던 것이 아니다. 허나, 국유본에게 허락받지 못했기에 CIA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빅터 로스차일드와 영국 정보부는 1947년 그리스 문제를 CIA에게 권리를 양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국 정보부가 미국 정보부에게 세계 정보 권력을 넘겨주는 형식이었다. 허나, 이는 절반의 독립이었다. 실질적인 독립은 국유본 권력이 교체하는 1973년인 게다. 하면, 왜 빅터 로스차일드와 영국 정보부는 겉으로나마 권력을 양도하고자 했던가.
이것이 국유본 전략인 게다. 당대에는 온갖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하나, 이차대전이 예상보다 너무 일찍 끝났다. 국유본은 이차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독일과 소련,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다. 허나, 국유본이 판단하기에 쪽발이 색희들이 적어도 일 년 이상을 버틸 것이라 보았는데 원자폭탄 두 방에 항복을 선언해버렸다. 예서, 차질을 빚은 것이다. 케인즈주의란 현대판 맬더스주의인 게다. 지주를 국가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그 해결책이란 내건 명분과 달리 전쟁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헌데, 공장이 더 돌아가야 하는데, 예상보다 전쟁이 일찍 끝나니 큰 문제였다. 해서, 빅터 로스차일드가 일타삼피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국제정치 ·경제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날카로운 분석을 가한 수준 높은 잡지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다. 집필진도 국내외의 저명한 기고가들이며 충실한 편집으로도 유명하다. 1947년 7월 'X'라는 익명으로 발표된 '소비에트 행동의 원천'은 후에 구소련 주재 대사가 된 G.케넌이 기고한 것이며 이 논문에서 제창된 '소련봉쇄정책'은 H.S.트루먼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이 되었다."
[출처] 포린어페어스 [Foreign Affairs ] | 네이버 백과사전
둘, 일타삼피 두번째는 무엇인가. 냉전체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차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이었다. 이를 미소 양국 적대 관계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전쟁만큼 좋은 재료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예상치 못한 요인이 있었는데, 소련이 어느 정도 국력을 갖추어야 미소 냉전체제로 갈 수 있는데,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하기에는 지나치게 허약했다는 점이다. 해서, 한반도에서 이념 전쟁이 일어나니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빅터 로스차일드도 마샬 플랜으로 독일 국유본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독일 경제를 발전시켜서 오늘날 독일 경제대국을 만들어냈다.
셋,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수백만 노동자들이 생활 개선을 목표로 시위를 했다.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루즈벨트에게 명한 결과이다. 즉, 국유본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 체제라는 대결 구도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1930년대 후반 이차대전 직전에 한편으로는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즈벨트더러 다양한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게 했다. 헌데, 미국 노동자들이 전쟁으로 유보한 그 약속을 지키라고 데모했던 것이다. 허나, 어차피 공수표~! 상당 부분을 되돌린다~!
이외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독립 문제와 1947년 로즈웰 문제, 각국 정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 다양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한국전쟁을 통해서 풀어갔던 것이 국유본이요, 빅터 로스차일드였던 것이다. 이때, 중요한 사안이 있으니 각국 정치 상황이다.
가령 해방정국 문제를 남한만의 문제로 좁혀서 이해하는 것이 그간의 시각이었다면, 국유본론은 해방정국 문제가 국제적으로 동시에 진행한 국제유태자본의 세계 전략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한다. 이때, 소련은 코민포름을 결성하고, 독일에서는 아데나워가 등장하고 일본에서는 평화헌법이 나온다. 프랑스와 이태리에서는 전후 직후와 달리 영향력이 상당했던 공산당을 배제한 내각이 출범한다.
프랑스와 이태리, 남한, 일본에서 어떻게 똑같이 공산당 세력이 푸대접을 받을까. 동시에 소련과 중국과 북한에서는 오히려 공산당 세력이 크게 강화되는가. 바로 이것이 한국 전쟁과 냉전체제를 만들려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세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하여, 삼 개월 안에 끝날 한국전쟁을 삼 년씩이나 질질 끌어 목적을 달성한 국유본은 십 년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허나, 십 년이 흐르자, 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다시 전쟁이다. 처음에는 한국전쟁, 십 년 뒤에는 베트남 전쟁을 국유본이 기획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둘, 여전히 허약한 체제가 소련 체제였다. 1956년 헝가리 시위가 발생했다. 소련은 무력으로 탱크 진압했다.
셋, 국유본은 알파 오메가 작전을 통해 각국 정권을 통제했다. 한 편으로는 각국 정권을 지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을 지원하였다. 또한 국유본은 신세계 질서를 위해 각종 사회 실험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민주화 요구가 등장했다.
이러한 문제를 프랑스 공산당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하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프랑스 공산당에 유리한 지형을 선사했다.
둘, 프랑스 공산당은 당수가 소련 공산당의 개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줄기차게 소련 공산당을 지지했다. 문제는 스탈린 격하운동이나 쿠바 핵위기 사태, 헝가리 봉기에서 당원들과 프랑스인에게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셋, 국유본이 준비한 68혁명운동을 위해 미디어를 통한 다양한 정치 실험들이 있었다. 이 실험에는 노동자계급에서 일탈하여 마약, 히피, 성소수자 정치, 인종차별 폐지 정치 등등 신좌파적인 각종 기획들이 있었다. 이런 기획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돌려세울 이념이 부재했다.
이에 대해 답변을 준비한 것이 알튀세르였다.
하나, 프랑스 공산당은 서유럽에서 이탈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었다. 그런 만큼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집권을 하지 않았으나 백 만 명 규모 당원을 보유하고 총선에서 평균 22%를 획득한 거대 정당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국유본 덕분이다. 빅터 로스차일드의 세계 전략이다. 유럽 대륙 주요 국가란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이다. 이들 4개국을 통제할 수 있는 유효 수단 중 하나가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을 통한 프랑스 정권 견제인 게다.
알튀세르는 이를 미소 냉전체제에서의 완충지대이자 미소를 중재하는 역할로서의 프랑스를 기본 전제로 본 것이다. 물론 이는 알튀세르만 아니라 프랑스 정치인들 대부분 생각이다. 예서, 드골과 차이가 있다면, 드골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뜻을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언제나 나폴레옹이 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독립을 하겠다는 꿈을 꾼 반면, 알튀세르는 소련 공산당의 뜻에 따르면서도 프랑스적인 독자성을 지키겠다는 꿈을 꾸었다는 차이일 것이다.
둘, 헌데, 프랑스 공산당과 공산당수는 무식했다. 1962년 프랑스 공산당 논쟁이 있었다. 요점만 간략하게 말한다면, 프랑스 공산당 주류는 소련 공산당의 허실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인간적 맑시즘, 혹은 철학적 맑시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게다. 쉽게 말해, 초심으로 돌아가자, 뭐 이런 이야기가 되시겠다. 오늘날로 치면, 고르바초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쯤 되겠다. 다시 말해, 소련 공산당을 여전히 지지하면서도 소련 공산당은 물론 프랑스 공산당도 민주화, 자유화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고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여건이 되면 가야 하지 않느냐 한 것이다.
반면 비주류 알튀세르는 프랑스 공산당 주류와 정반대 견해를 내놓았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너희는 철부지 맑스이고, 알튀세르, 나는 어른 맑스다. 어른 맑스 말이 맞다. 철부지들은 까불지 말고 어른 말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알튀세르의 과학적 맑시즘이다. 허나, 알튀세르는 이때 패배하고 만다.
알튀세르는 패했다. 알튀세르는 노동자계급을 설득하지 못했다. 허나, 지식인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셋, 패했던 알튀세르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있었으니 68혁명인 게다. 마침 중소 분쟁이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에 대해 수정주의라고 비판했었다. 이때, 중국 공산당, 정확히 모택동 문화혁명 노선과 알튀세르 노선이 일치했던 것이다.
- 공산당 내부에 자산사령부(국유본)가 있다. 자산사령부(국유본)를 제거해라.
1968년에 번졌던 이 운동이 1970년대초에 이르자 언제 그랬냐 싶게 가라앉는다. 더 큰 문제는 1973년 국유본 권력이 바뀐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르면 오일 가격 폭등으로 전세계에 물가 폭등이 닥치는데, 서유럽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국 경제가 망가졌다. 이때, 노동자혁명론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데, 현상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보수가 되었다. 서유럽 공산당 규모가 날로 줄어들어갔다.
해서, 1975년에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로코뮤니즘, 민족공산주의 등을 제안할 정도로 상황이 위급해진 것이다. 규모가 가장 큰 이탈리아가 그 정도이니 프랑스 공산당도 예외가 아니겠다. 하여, 1976년 22차 전당대회가 있었다.
예서, 프랑스 공산당 주류와 알튀세르가 다시 한 번 대결을 펼친 것이다.
이때, 알튀세르 고민이 무엇인가.
왜 혁명이 쇠퇴하는가.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마침내 마주친 아포리아이며, 여기서 그는 '최종심급'의 개념을 하나의 "한계 개념"으로서 제안하는 듯 하다.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인터뷰(1984-87년)에서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이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지배할 수 있습니다. 맑스는 지배의 전위에 대한 암시적인 이론에서 아테네의 정치와 로마의 종교에 관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이것이 발리바르와 내가 『자본을 읽자』에서 이론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부구조 그 자체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역시 그것의 물질성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상부구조와 모든 이데올로기의 사실상의 물질성을 강조하는데 그토록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ISA)에 관련하여 그것을 보여주었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각각의 구체적인 정세 안에서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최종심급에서 항상 결정적인 물질성의 전위를 말입니다. (Althusser 1994: 44, 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최종심급' 개념은 하나의 '한계 개념'인데, 왜냐하면 각각의 구체적인 정세 안에서 '최종심급'에서의 물질성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한계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정치이고 정치적 실천들이고 정치적 조직들이며 그 조직들의 이데올로기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역사와 미래를 향해 완전히 열려있다. 한 유물론자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용감하게 걸어온 이 훌륭한 길, 즉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이 길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긴 미래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Althusser 1992)"
루카치는 사물화에,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고민했다면, 알튀세르는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에 주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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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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