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은 뉴라이트파인가, 노비네파인가 : 김일성대, 사노맹, 백태웅, 박경애, 박근혜 국유본론 2011
2011/10/14 02:02
http://blog.naver.com/miavenus/70121216160
가톨릭은 뉴라이트파인가, 노비네파인가 : 김일성대, 사노맹, 백태웅, 박경애, 박근혜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0/16
1999년 빌더버그 회의에 참석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뉴라이트파이다.
현 독일 교황은 노비네파이다.
CIA :
김일성대학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북한 대학교수 6명이 올해 들어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로스차일드계)에서 6개월 간 장기체류하며 경제공부를 하고 있음. 이 프로그램을 기획․주관한 것은 박경애 브리티시컬럼비아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정치학 교수). 같은 대학에 옛 사노맹의 백태웅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음. (북한 교수들이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 머무는 기간 동안 백태웅은 하와이대에 잠깐 교환교수로 가 있는 상태.) 백태웅의 최근 인터뷰를 보니 아시아공동체 기구가 구성되면 그때 거기서 자기역할을 할 것이라 말함. 백태웅은 필히 다시 등장할 것 같음. 의견 부탁.
인드라 :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은 노비네파인가.
"약칭은 'UBC'이다. 1908년 3월 7일 대학 설립 허가가 났으며 이후 캠퍼스 위치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1914년부터 밴쿠버 서쪽의 포인트그레이(Point Grey)에 캠퍼스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사이에 1915년 9월 일시적으로 밴쿠버 인근의 맥길대학교칼리지(McGill University College)를 합병하면서 인문·응용과학·농학부에 입학한 379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 경제적 사정으로 건설이 연기되었던 지금의 캠퍼스가 1925년 완공되자 이전하였다. 연구 중심의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2010년 기준으로 예술, 응용과학, 교육, 의학, 약학, 치의학, 간호, 삼림, 보건·사회개발, 땅·식품체계, 법과, 경영, 과학, 건축, 휴먼키네틱스, 언론, 음악, 사회사업·가정 등 24개 학부와 다양한 대학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의학, 약학, 경제학, 심리학, 경영학부의 명성이 높다. 캠퍼스는 밴쿠버의 중심가에서 10km 떨어진 포인트그레이의 밴쿠버 캠퍼스와 켈로나(Kelowna)의 오카나간 캠퍼스로 나누어지고 위성 캠퍼스인 로브슨스퀘어(Robson Square) 캠퍼스, 밴쿠버 종합병원 캠퍼스, 그레이트 노던웨이(Great Northern Way) 캠퍼스가 있다. 밴쿠버 캠퍼스 부근에 누드해변을 포함한 몇 개의 해변과 노스쇼산맥, 태평양스피릿지역공원이 있다. 부설시설로 대학병원, 출판부, 아시안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 모리스헬렌벨킨미술관, 자연사박물관, 인류학박물관,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 공연예술센터, 식물원, 니토베기념가든, 식물연구센터 등이 있다. 1999년 졸업생 로버트 먼델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캐나다 총리 존 터너, 킴 캠벨(Kim Campbell) 등이 수학했다."
[출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 | 네이버 백과사전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이 로스차일드파 혹은 노비네파일 수 있다. 허나, 왜 그리 생각하는지 언급을 하는 것이 좋겠다.
졸업생 정치인 성공회 킴 캠벨과 가톨릭 존 터너 때문에 노비네파로 보는가.
"킴 캠벨(Avril Phaedra "Kim" Campbell, 1947년 3월 10일 -)은 캐나다의 여성 정치인이다. 에이브릴 패이드러 캠벨의 본명으로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포트 앨버니에서 태어났다. 12세때 킴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알려졌고, 음악과 춤을 배웠다. 그녀는 시를 잘 썼고, 기타와 피아노 연주에 뛰어났다. 1969년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에서 정치학 학위를 받았다. 1972년에는 영국 런던에 유학하여 철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하여 공부하던 중, 그곳에서 모교의 수학 교수 네이던 J. 디빈스키와 결혼하였다. 학위 공부를 포기하고 1973년 남편과 귀국하였다. 1975년부터 6년동안 모교에서 정치학을 강의하였다가, 1983년 법학위를 받았다. 1988년 밴쿠버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법무장관을 지냈다. 1993년 1월 9일에 국방부 장관으로 있다가, 같은 해 6월 25일 멀로니 총리가 사임하자, 그녀는 진보보수당 당권에 도전하여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캐나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진보보수당의 인기는 매우 낮았기 때문에 곧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큰 차이로 패하여 불과 4개월여 만에 물러나고 정권을 자유당에 넘겨주었으며, 그 자신의 지역구에서도 낙선하여 국회의원직도 상실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총리로 재직했으나,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캐나다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3년에 도쿄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의에서 캐나다 총리로 참석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D%82%B4_%EC%BA%A0%EB%B2%A8
"존 네이피어 터너(John Napier Turner, 1929년 6월 7일~)는 캐나다의 정치인이며, 1984년 6월 30일부터 2달 반간 총리였다. 영국 서리 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나, 2살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오타와에서 학교를 다녔고,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나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 로즈 장학금 수련자로 법학을 공부하러 갔다. 변호사로 지낸 후, 자유당 당수로 1962년 캐나다 하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피어슨 총리의 내각 아래에서 근무하였다. 트뤼도 총리 내각에서 법무 차관 및 장관을 지냈고, 그 말기에 재무 장관이 되었다. 1984년에 트뤼도 총리가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총선을 실시하였으나 진보보수당의 멀로니에게 패하였다. 1988년 총선에서도 패하여 정계에서 물러났다."
http://ko.wikipedia.org/wiki/%EC%A1%B4_%ED%84%B0%EB%84%88
킴 캠벨이나 존 터너로 볼 때,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이 노비네파처럼 보인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와 워싱턴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5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존스홉킨스대학교 강단에 섰다. 1974년 이래 30년 가까이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학계에만 안주하지 않고,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국제통화기금(IMF) 조사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40년 가까이 IMF 고문역을 맡았다. 또 세계은행(IBRD) , 국제연합, 유럽공동체, 중남미 및 유럽 각국 정부, 캐나다정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와 재무부 등의 고문역 또는 자문관으로 활동하는 등 현실 정책분야에도 깊숙이 간여하여 왔다. 특히 1970년에 유럽공동체의 통화위원회 컨설턴트, 1972년에서 1973년에 걸쳐서는 유럽통화연합(EURO)의 산파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영역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1970년대에는 미국의 저명한 시사경제지 '정치경제 저널(Journal of Political Economy)'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 조형예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어 1998년 10월 미국 예술과학원 회원이 되었다. 그는 1960∼1970년대에 지금은 국제경제학의 고전으로 통하는 그의 경제이론 '먼델-플레밍의 법칙'을 고안하여, 서로 다른 환율체제 아래에서 각국의 통화 및 재정정책이 다른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명쾌하게 규명하였다. 그는 또 "자본이동이 자유화되면 설령 무역장벽이 존재하더라도 무역자유화의 효과를 낸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 중의 하나인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면 상품가치를 평준화시켜 결국 국제교역 자체를 증진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논리는 자본자유화, 교역자유화를 지향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현 국제경제질서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되어, 그를 국제경제학의 흐름에 있어 주류에 속하게 하였다. 그의 연구 업적은 환율변동폭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단일통화 도입, 경제성장 및 국제수지의 대내 ·외 균형달성 연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가 정립한 '먼델-플레밍의법칙'과 '요소비용 균등이론'등은 개방경제 옹호론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1999년 10월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1999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먼델이 상이한 환율정책 분석과 최적 통화지역 분석으로 1999년도에 출범한 유럽연합(EU) 단일통화 분석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그 선정 이유를 밝혔다. 스웨덴 한림원은 특히 "먼델의 이론은 노동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으로 일상용품의 가격이 평준화하는 과정을 규명하였으며, 약 40년 전에 고안된 먼델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매우 타당하다."고 평가하였다. "
[출처] 로버트 먼델 [Robert A. Mundel ] | 네이버 백과사전
"로버트 알렉산더 먼델(Robert Alexander Mundell, 1932년 10월 24일 ~)은 콜럼비아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이다. 캐나다 출신이며 밴쿠버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졸업생이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도 학위를 1956년에 취득했다. 계속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며 199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74년 이래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1년 이래로 학술적으로도 최고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맥길 대학교와 존홉킨스 대학교의 교수이기도 하다. 2002년 캐나다의 국립훈장인 오더 오브 캐나다를 수상했다. 그는 워털루대학 의장이던 시절 유로에 관련한 통화 체계에 대해 설계하면서 공로를 인정받아 경제학상을 수여받게 됐다.
그의 이름을 딴 먼델 국제기업대학교가 베이징 중관춘에 있다.
[편집] 국제 통화 유입
먼델은 감세 정책과 공급의 경제학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주력 분야는 통화와 환율에 관한 것이다. 1960년대 캐나다가 변동 환율로 바뀌면서 변동환율제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 1930년대 이후 경제현상에 대한 지적으로 스웨덴 정부에 금본위 정책을 채택하도록 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1962년 마르퀴스 플레밍과 함께 먼델-플레밍 모델에 대해 고안했다. 그는 플레밍과 함께 발표한 이론에서 변동환율제하 경기 부양책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가격안정성과 자유자본 유입에 대해서도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 브레튼우즈 체제의 제약은 금본위제보다 미 연방재정체계에 맞춰진 것이다.
- 수요를 촉진하는 재정정책은 변동환율제 하에서 비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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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통화의 유통지역은 반경 내에서 화폐유동성을 갖는다.
그의 분석은 결과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물가상승률 관련 정책이 불합치였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브레튼우즈체제는 금본위 체제를 오히려 깎아내리는 것이며 경제정책의 실패로 통합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1] 후에 유로화 도입에 관해서 브레튼우즈 체제를 깨는 것이 소득세율을 계속적으로 높게 유지하는 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날 소지가 높다고 예측했다. 1974년 세금 철폐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혔다. 일부 보수주의자가 그를 추켜세우곤 하지만 보수진영의 공격을 많이 받은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금본위제 경제체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의구심을 제기한 적이 있다. 그는 대개 재정정책과 세금에 대해서 등가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집] 텔레비전
로버트 먼델은 CBS의 데이빗 레터맨 쇼에 2002년 10월 처음으로 출연했다.[2] 그는 노벨상 수상 이후 자신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준 10가지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외에도 많은 쇼에 등장했으며 중국중앙방송의 토크쇼인 百家讲坛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_%EB%A8%BC%EB%8D%B8
로버트 먼델은 빅터 로스차일드 시절에 IMF 등에서 활약을 하였으니 로스차일드파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허나, 클린턴 정권 막바지에 199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으니 노비네파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 인드라는 재선한 대통령 후반기를 뉴라이트파 집권 시기라고 보고 있다. 해서, 1998~1999년이 뉴라이트파 집권 시기였고, 2007~2008년 역시 뉴라이트파 집권 시기라고 보고 있다. 만일 대통령이 단임한다면, 단임 후반기가 뉴라이트 집권 시기라고 본다. 해서, 인드라는 로버트 먼델을 노비네파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로버트 먼델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은 그가 시카고 대학 재직 때 연구 업적 때문이다. 시카고 대학하면? 그렇다. 시카고 학파의 산실이다. 시카고 학파하면 신자유주의~!
"@먼델·플레밍 이론
시카고대학 시절 먼델의 이론과 국제통화기금에 근무하던 플레밍의 이론이 합쳐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이론은 고정환율제에서는 재정정책, 변동환율제에서는 통화정책이 국민소득 향상에 효율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변동환율제에서는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확대정책 보다 통화정책이 효과적이라는 것.경기부양을 위한 재정확대는 총수요 증가→이자율 상승→국제자금 유입→통화가치 상승의 결과를 낳는다. 이 때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통화가치 상승이 없기 때문에 계속적인 자본수지 개선효과가 나타나고 국민소득이 증가해 수입은 늘지만 자본수지 개선효과가 이를 압도해 결과적으로 국제수지는 흑자가 된다. 하지만 변동환율제에서는 자본유입으로 통화가치가 계속 높아지면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증가로 경상수지도 악화돼 결국 경기상승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재정확대정책의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통화정책의 경우 변동환율제에서 이자율하락→자금 유출→통화가치 하락→수출경쟁력 강화→국제수지 개선으로 이어진다. 통화확대로 경기부양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정환율제는 이와 반대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지난 60년대초 캐나다가 경기부양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배경이 됐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0000051
먼델이 시카고대학에서 연구했다지만, 시카고학파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변동환율제에서는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이 효율적이라는 주장은 묘하게 시카고학파의 통화정책과 만날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케인즈주의 = 재정정책, 시카고학파 = 통화정책이니까.
해서, 노벨경제학상 수상 시점이나 먼델 플레밍 이론 쓰임새로 볼 때 먼델은 뉴라이트파에 적합하다.
예서, 백번양보하여 만일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출신 주요 인물들이 모두 노비네파라고 해도 대학을 노비네파라고 하면 무리가 있는 가설이라고 본다.
인드라가 학교를 가늠하는 세 기준은 이렇다. 첫째, 학교의 역사적 기원. 둘째, 현재 총장과 이사진. 셋째, 주요 졸업생들의 행적. 이런 점에서 인드라는 고려대를 뉴라이트 대학이라고 보고 있다. 허나, 그외 다른 대학이 어떻다 하는 것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설사 유명 졸업생들 행적이 모두 노비네파라고 해도 노비네파라고 부르기에는 심사숙고해야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하여, 주요 졸업생들만 가지고서 노비네파라고 보고 있지는 않을 터. 다른 근거 자료를 제시한다면 인드라 역시 노비네파에 비중을 둘 것이다. 허나, 지금 나온 것만 가지고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과 한국은 무슨 관계인가.
http://blog.naver.com/birdonyou/10116449662
대학이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데다 유학생 수도 미국, 중국 다음으로 많으니 한국학 연구소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로 이민, 유학가는 이들이 오죽 많나?
캐나다에 직접 가본 적이 없어 뭐라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나, 그간 지인들이 전하는 말을 종합한 것과 비교하면, 왜 캐나다냐? 라고 물어보면, 대체로 미국과 다른 문화가 있는 영어권 나라이고, 치안이 안전하면서 풍광이 좋은 나라인데다, 가톨릭이나 가톨릭과 유사한 성공회가 주류인 나라라는 것이다. 여기에 지금은 호주나 뉴질랜드다 필리핀이다 영국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미국 아니면 캐나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캐나다도 온통 한국인이야, 라는 말이 퍼지면서 다른 대체지를 찾다 보니 호주다 뉴질랜드 필리핀이 등장한 것이라고 본다. 해서, 상기한 글이 캐나다를 잘 드러내지 않는가 싶다. 캐나다 주류는 영국 성공회파이거나 프랑스 가톨릭파이지만, 벤쿠버 지역이 다른 캐나다 지역과 달리 개신교 문화도 많이 발달해 있다는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본다.
예서, 인드라는 브리티시컬럼비아 명예박사 출신 기독교장로파 김재준을 떠올린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3304
중도좌파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빅터 로스차일드파였던 박정희 정권은 동학, 천도교, 가톨릭, 불교에는 친화적이었으나, 기독교와는 불화하였다. 하여, 박정희 정권 때 줄기차게 싸웠던 세력은 기독교 세력이 주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기독교는 박정희 정권 덕분에 박해받는 이미지 덕에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지금 김정일 정권과 맞싸우는 북한 기독교와 흡사하다 할 수 있다.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도 기독교 세력이 한국 기독교와 비슷하다 들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인드라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놓는다. 중국과 일본 정치 지도자는 물론 김일성, 박정희 모두 빅터 로스차일드가 임명한 자들이다. 예서, 이들을 견제하고, 감시할 세력을 키우는 데에 있어 빅터 로스차일드가 기독교 세력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집권자들은 알파요, 기독교 세력이 오메가인 셈이다. 허나, 다른 나라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기독교 세력이 크게 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때문이다. 한국 전쟁. 전쟁 공포로 인해 한국인은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유본이 일으킨 광주항쟁 삼십년간 공포에 쩔은 호남인이 맹목적으로 쪽발민주당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처럼 역시 국유본이 일으킨 한국전쟁 삼십년간 공포에 사로잡힌 한국인은 무조건 여당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 사정이라 할 수 있다. 일제와 맞싸우고, 북한 공산주의와도 대결할 수 있는 사상이 무엇이냐. 기독교이다. 가톨릭은 쪽발이 종교다. 불교는 산 속에서 혼자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처럼 지난 삼십년간 국유본은 쪽발 돼중교를 시민에게 세뇌 강제시켜왔던 것이다.
도널드 베이커는 누구인가.
캐나다 한국학 지존, 도널드 베이커는 누구인가.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http://blog.naver.com/yonghablue/48520526
도널드 베이커는 《조선 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서울: 일조각, 1997)에서 보듯 조선 말기 가톨릭 교회사 연구 전문가이며, 다산 정약용 연구가이기도 하다. 1976년부터 미국인이면서 캐나다 한국학연구소 센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드라는 도널드 베이커란 자가 뉴라이트라고 보고 있다. 즉, 국유본 권력을 쥔 데이비드 록펠러는 브레진스키에 명하여 가톨릭 점령을 위해 요한 바오로 2세를 포섭했다. 왜인가.
이후 권력을 잡을 이들을 알파라고 할 때, 가톨릭이 오메가여야 했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기독교였지만, 이제는 가톨릭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종교사적으로 대격변인 셈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집권했던 근 이백년간 서양사는 물론 세계사는 국유본이 지원하는 유태인 권력자들이 알파요, 국유본이 역시 지원하는 '양심세력' 기독교가 오메가를 이루어서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국유본이 총칼을 들고 점령한 땅에는 예외없이 '양심세력' 기독교 전도사들이 국유본에 맞서며 문화 사업을 펼쳤다.
헌데,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제 이 역할을 일시적으로 기독교에서 가톨릭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기독교 세력으로서는 배신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전 세계적에서는 갑자기 가톨릭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1986년에 나온 뉴라이트 영화 '미션'이다. 이 영화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도 한둘이 아닐 것으로 본다. 허나, 단지 영화 한 편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뉴라이트파는 박정희를 암살하고 광주항쟁을 일으켜서 한편으로는 전두환을 옹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을 저항의 상징으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 역할을 담당한 이 중 하나가 도널드 베이커라고 본다. 인드라가 볼 때, 도널드 베이커는 국유본 간첩이 본 직업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1980년 이후 풍경이 달라졌다. 한국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성당이 나타나고, 신부 수녀가 어김없이 착한 사람들로 오버랩한다. 반면, 그 이전까지 양심세력이었던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이름으로 난도질당하기 시작한다. 목사들 비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오고, 언론에서는 기독교 비판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한국 가톨릭 세력이 갑자기 민주화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반미투쟁의 선봉으로??? 197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이란 어디까지나 한국도 미국처럼 민주주의 국가가 되자는 것이 목표였다. 반면 국유본은 광주항쟁을 통해 의도적으로 반미 의식을 고취시켰다. 중동에서는 이란이라면, 동북아에서는 한국이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근본주의와 지역주의를 좋아하니까. 한국 지역주의는 데이비드 록펠러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범인을 가톨릭 교회가 보호한다? 갑자기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된다? 이 모든 건 국유본이 의도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흘러갔다. 물론 1970년대에도 가톨릭이 전혀 투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학순이 있었다. 허나, 기독교 세력에 비한다면 가톨릭은 지학순 혼자 싸운 것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아무튼 이 흐름도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가톨릭에도 변화가 오긴 했지만. 이런 흐름에는 젊은 층들이 가장 먼저 움직이는 법이다. 이제까지 기독교 학생회에 비해 뭐 하나 내놓을 것이 없어 초라했던 가톨릭 학생회가 호응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사노맹을 보자.
사노맹에는 왜 가톨릭 종교 조직이 주가 되었나?
"노동,종교등 1천6백여명규모의 반국가단체
| 기사입력 1990-10-30 07:00
=安企部의 사노맹 수사결과 발표문 요지= 무장봉기통한 사회주의 국가건설 추구목표
음어.암호.무인포스트이용등 간첩조직 방불
무장봉기시 무기고탈취,폭발물제조계획 수립
(서울=聯合)국가안전기획부가 30일 명백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힌'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에 대한 수사결과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노맹 결성경위=88.10월께 직업적 사회주의 혁명가로 자처하는 백태웅(수배중),박기평(가명 박노해.수배중)남진현(구속) 김형기(가명.수배중)및 박기평의 처 김진주(여.35.이대약대졸.수배중)등 5명은 자신들이 주도해온'제헌의회그룹'(86.5 결성)'해방투쟁동맹'(87.4결성)등 지하혁명조직이 와해되자 89.2 제헌의회그룹 당시의 간부와 대학가,노동계등의 추종세력 1백40여명을 규합해「사노맹 출범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1년여간의 준비기간을 두고 중앙및 지방조직 체제를 갖추는 한편 활동자금을 확보한 후 89.11.12 서울대에서 열린'전국노동자대회'에서'출범선언문'을 발표,공식출범했다.
◇사노맹 조직의 실체=사노맹은 우리사회를 현정부와 매판자본가 계급이 미국.일본에 종속돼 노동자등 민중을 지배 착취하는「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레닌의 2단계 혁명전략에 따라 1천만 노동자를 주축으로,反정부세력 규합-노동자계급의 전위당 결성-무장봉기로 임시민주정부 구성-민중공화국수립(이상 1단 계)-반동관료 숙청-완전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이상 2단계)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혁명 투쟁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노맹은 이같은 목표를 달성키 위한 전술로서▲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을 결합시키기 위한 선전활동 전개▲他정파와의 비타협적 사상투쟁 전개등 임무 수행을 통해 92년이내에 혁명전위당인「노동자黨」을 기필코 건설하라고 조직원인「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시하고있다.
◇조직체계및 세력규모=사노맹은 레닌의'당조직 전술원칙'을 모방,중앙위원회를 최고지도부로 해「조직위」「편집위」「각 市道 지방위원회」와「노동문학사」「남한사회주의 과학원」「사회주의 학생운동연구소」「민주주의 학생연맹」「各정파 파견망 그루빠」로 조직체계를 구성하고,각 단위조직을「지방위원회」와 「소조지도책」으로 구분,단선 점조직화 돼있다.
「조직위」구성요소인 연락국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 개발및 무기탈취계획과 독극물개발,조직보위를 위한 수사동향 정보수집등 특수임무를 수행하고있다.
사회주의 혁명선전 선동사업을 위한 사상적 지도부인「편집위」산하에는'지하인쇄소' '노동문학사'및 이념정립기구인'남한사회주의 과학원'학생운동기관지'새벽바람'편집부인'사회주의 학생운동연구소'등이 있다.
노동자혁명투쟁을 선도할 학원투쟁조직으로는「사회주의 학생운동연구소」지도로 전국 40여개대학에 '민주주의 학생연맹'(DSL)이 조직됐거나 조직중에 있다.
사노맹은 이같은 조직체계에 따라 노동계 2백30여명,학원 1천30명,종교계 청년운동단체 90여명,민중당 30명,기타 노동 청년운동그룹 2백30여명등 모두 1천6백여명에 달하는 전국규모를 가진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조직 관리및 비밀활동=사노맹은 각 분야에 침투,활동중인 조직원들이 1차적으로 혁명인자를 물색,'자기소개서'를 제출케하고 신원성향을 조사한 후'사상성''비밀활동능력'등 50여가지 기준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한 후 1개월-1년간 체력훈련등 지옥훈련을 거쳐 직업적 혁명전위투사로 양성해 왔다.
이들은 조직관리를 위해 '일상용어 음어화''철저한 안가관리''조직 기밀유지'등 「10대 보위수칙」을 제정했으며 충성도등의 평가를 위해 각 조직 단위별로'활동보고서'를 작성,보고케 했다.
이에따라 결혼이 조직 보위에 위해롭다고 판단되면 상부의 허락을 받도록 강요한 사례도 있다.
사노맹은 조직 부서의 명칭을 서울지역은'한불종합금융'부산지역은'오양수산'대구지역은 '대신증권'등과 같이 널리 알려진 기업체명을 위장사용하고 조직원 전원이 가명으로 행세했으며,접선장소 시간약정등 일체의 사항을 암호.음어.약어화해 철저한 비밀통신연락 접선체계를 약정,운영하는등 간첩조직을 무색케할 정도의 비밀활동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따라 조직원 각자는 상부에서 하달한 암호해독표를 소지하고 있다가,상부선에서 임무에 필요한 암호부호를 하달하면 하부선은 해독표에 따라 연락 접선했다.
예를들어 상부선에서 김.종.민이란 이름의 음어와 함께"자.모음수"를 이용하라는 지시를 하게되면 하달받은 조직원은 김의 자.모음수(3)+종의 자.모음수(3)+민의 자.모음수(3)을 합한 9의 숫자인 상오 9시에 접선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인천지방 단위조직이 중앙위원회에 보고한 약정사례의 경우"H"일간지 광고란에"기석-꽃가게 내실분!상담해드립니다.T 977-5577 미미화원"이라는 광고를 내면"조직원 박기석의 신변에 위험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뜻으로 통했다.
이와함께 유인물전달시에는 지하철역 구내 물품보관함,대학도서관,공중전화박스 등 특정장소를 무인포스트로 설정,활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또 조직원 은신처등 조직의 안전성확보를 위해 강남구 포이동 오피스텔,동대문구 장안동 상가빌딩내 사무실등 10여개의 비밀安家를 구입,컴퓨터.유인물.생활도구등을 갖추어 놓고 운영해왔다.
이들은 안가보호수단으로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가스총.도검류.쇠파이프.신나.염산등을 안가내에 항상 비치했으며 문고리에 머리카락을 끼우거나 책상서랍 사이에 종이 조각을 끼워 출입자를 점검하고 노출에 대비,탈출로를 사전에 설정해놓는등 철저히 대비해 왔다.
안가내 비밀물건을 1급은'사노맹'조직원 신원등 조직내부 관련문건,2급은 조직내에서 발간된 문건 이나 유인물,3급은 타조직 명의 지하유인물등으로 분류,위급사고 발생시 신나를 뿌려 일시에 소각,증거를 없애도록 하고 문건배포등 조직원접촉을 위한 이동시에는 택시 시내버스 지하철등 대중 교통수단을 5-6회 바꾸어 타고 약속장소에 도착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중앙위원 남진현은 89년11월 조직총책 백태웅으로부터 조직원이 검거될 때는 조직보위를 위해 자살할 수 있도록 청산가리등 독극물을 마이신과 같은 형태로 제조,소지하는 방안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고,KAL기 폭파사건시 북한공작원이 액화 청산가리 앰플을 소지했던 사실에 착안,특수임무를 담당하고있는 연락국장 현정덕에게 독극물 앰플을 개발하라고 지시,하부 조직원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었다.
◇사노맹의 조직활동자금=사노맹은 빨치산들의 사례를 본받아 조직활동 자금확보를 위한'보급투쟁'을 모방키로하고,88년12월 인쇄소 시설,아지트 확보를 위해 1차조직결성 자금을 2억7천만원으로 책정, 조직원 1인당 3백만원-1천만원씩을 할당,책임제로 자금을 모금했다.
이들은 조직결성당시의 '보급투쟁'을 새로운 조직결성 비용을 마련한다는 뜻에서 '신혼비작전'으로 명명하고 친지중 '반동적인 가정의 재산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착취한 돈이므로 특공대를 투입,강절도'하여 혁명투쟁자금으로 강제귀속시키고 조직원간 위장 결혼식을 거행,결혼및 신접 살림자금과 축의금을 확보토록 하는등 反사회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사노맹은 이같은 방식으로 88.12-90.8월간▲중앙위원 남진현의 경우,37명으로 구성된 후원회로부터 1천3백40만원을▲조직원 권종길(25.고대영문 휴학)등 3명은 운전기사등으로 취업해 5백여만원을▲모 남자조직원은 집에서 금괴4개,금반지 11개,목걸이 1개등을 훔치는 방법으로 모두 1억원이상을 확보했다.
사노맹은 이 돈을 인쇄소 시설비 5천만원,유인물 제작비 1천만원,활동비 3천만원,비밀안가 운영비 1천여만원등으로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노맹은 또 '신혼비 작전'과는 별도로 안정적인 조직활동 자금의 확보를 위해 사노맹후원자 그룹 3개팀 12명으로부터 사업자금 3천만원을 확보후 이른바'인삼사업'계획을 수립,경기도 이천및 발안지역 인삼밭에 1천4백만원을 투자 입도선매하는 한편 강원소재 인삼밭에 대한 대규모 투자여건을 검토중이었다.
성대운동권 출신 이금재(29.수배중)를 통해 1천1백만원을 투자,모 유명 유통업체를 이용한 인삼도매 유통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주요투쟁사례=사노맹은 선전선동체제를 합법,비합법 2원 구조화해 합법적인 대중선전 잡지로 89.1 노동문학사출간의'노동해방문학'을 문공부에 정식등록하고 89.4-89.12월간 15만여부를 발간했는데 그동안'이정로'라는 가명을 사용한 백태웅,'박노해'라는 가명의 박기평등이 기고문형식으로 그들의 혁명이념인 민족민주혁명론(NDR론)을 확산시켜왔다.
비합법적으로는 지하기관지인「한걸음 더」「새벽바람」등과 지하유인물「출범선언문」「긴급전술 결의」등 40여종 20만부가량을 제작,비밀배포조직을 통해 자체구입한 봉고등을 이용해 전국 대학가및 노동현장에 배포해왔다.
사노맹은 한편 92년까지'노동자계급 전위당'건설을 위해 서울 부산 경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마창 울산등 9개 시도의 공장사업부 산하 공장소조책을 각 공장프랙션(세포인자)으로 침투시켜 불만노동자를 물색한 후 의식화학습그룹을 결성,세포분열식으로 조직을 확대했으며 특히 공단 밀집지역인 성남 안산 창원 포항 울산 태백등지의 노조와 인쇄 금속 피복 광산등 업종별 노조등에 정예 조직원을 침투시켜 경제투쟁을 폭력 정치투쟁으로 이끌기 위한 배후선동에 힘써왔다.
사노맹은 현재 포항제철,지하철공사,선경화학,서광,해태등 전국 50여개공장및 노동단체에 2백30여명의 소조원을 침투시켜 배후 조종하고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소조구성 활동 예를 보면 경기지역(국제종합금융)공장소조 지도책 김영식(가명)은 공장소조책을 양성,공장밀집지역인 성남을 중심으로 광주 여주 안산지역 공단의 중소규모 공자에 침투시켰고,대구지역(대신증권)공장소조 지도책 이주명(가명)은 공장소조책을 양성,포항제철 풍산금속 삼풍 구미세라믹등에 침투시켜 근로자를 의식화시켰다.
사노맹은 민중통일전선을 구축하기위해 각 운동권단체의 투쟁이념,조직역량등을 면밀히 분석 군소조직을 흡수장악하고 거대조직은 표면상 연대하면서 점진적으로 자파 세력화하는 한편 분열된 혁명노선을 자신들의 NDR노선으로 통일시키기위해 소위 '정파운동'을 전개하는등 전형적인 공산당식 수법의 통일전선 전술을 구사하고있다.
사노맹에서 추진중인 정파투쟁사례를 보면 민중당을 장차 결성될 혁명전위당 산하의 합법투쟁체로 삼기위해 중앙집행부에 조직원 김원태(가명.서울대 82학번)를 침투시켜 민중당 실세인 장기표(정강정책위원장)정태윤(기획조정실장)등을 견제토록 하고 조직총책 백태웅은 대학원에서 급진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이론가 8명을 포섭,「남한사회주의 과학원」을 개설,합법이론지 발간사업등을 추진하는 한편 대학신문에 특집기획물을 기고하는등 NDR이념전파및 타정파 비판에 주력하고있다.
또 전노협에는 조직원 주호(가명) 진경(가명)등을 핵심부에 침투시켜 사랑방간담회등을 통해 사노맹 혁명이념을 확산시키고있으며 노동자대학을 장차 黨정치학교의 모태로 삼기위해 조직원 미숙(가명)등 2명을 침투시켜 강의내용등을 사노맹이념으로 유도했다.
종교계 청년조직인'가톨릭대학생연합회' '가톨릭민주청년회'에 핵심조직원 전인현(24.숭실대4.가명 김재석등 4개.구속)등 5명을 침투시켜 현재 65명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등 거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노맹 중앙위원 남진현은 89.12 연락국장 현정덕에게"광주사태가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민중이 무장력을 갖추지 못한 데 있었으므로 자체적으로 폭발물을 개발,무장력을 확보하고 무장봉기시 무기고 탈취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으며 이에따라 현정덕은 남산중앙도서관에서 화약관련 서적등 자료를 입수,폭발물제조계획을 검토하다가 화공학을 전공한 신하송(22.광운공대출신.가명 양태규.수배중)에게 구체적인 개발에 착수토록 지시하는등 무장봉기를 준비해 왔다.
신하송은 질산칼륨,유황,탄소등을 이용한 폭발물을 6개월-1년 기간내에 제조하겠다는 연구보고서를 중앙위원회에 제출 한 바 있다.
한편 현정덕은 경남 창원공단 침투조직원을 통해 무기생산 방위업체인 창원공단내 (주)통일,(주)한국중공업을 무장봉기시 무기탈취 대상으로 선정,지역적 조건등을 예시한 계획서를 작성하는등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각 지방위원회 단위로 이른바 민중무장력 확보계획을 수립 추진중이었으며 특히 인천지방위원회의 경우 전담부서인 기획부에서 사제폭탄 제조방법,총기제작법,무기탈취방법등 무장투쟁계획을 수립,중앙위원회에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18699
예서, "종교계 청년조직인'가톨릭대학생연합회' '가톨릭민주청년회'에 핵심조직원 전인현(24.숭실대4.가명 김재석등 4개.구속)등 5명을 침투시켜 현재 65명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등 거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에 주목해야 한다. 왜 가톨릭 종교조직만 있는 것일까^^?
게다가 사노맹하면 대표적인 인물이 박기평(박노해)이다. 그런 박기평 집안만 봐도 가톨릭 집안이다. 형과 여동생이 신부와 수녀다. 박기평 어머니가 가톨릭 수녀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백태웅과 남진현 종교는 모르겠다.
다만, 인드라가 사석에서 들은 정보로는, 백태웅을 비롯한 사노맹 주요 멤버들이 쪽발 돼중처럼 캐나다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 교회의 힘이라는 것이다. 예서, 인드라는 전기에 데인 것과 같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종교 세력이란 그저 사회의 양심 세력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국제 사회를 움직이는 실세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여간, 백태웅이 차후 아시아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간접적으로 향후 한국 정권이 박근혜 정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국유본은 한반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그때마다 한 명씩 해외에서 훈련시킨 요원을 한국으로 보낸다.
하면, 백태웅이 한국에 온다면? 뉴라이트로 올 것이다.
진.. 유.. 조.. 앞의 애들 보다야 제대로 공부한 백..이 난 듯 보인다. 수혈이라고 해야 하나? 앞의 애들이 이제 진부하니까~!
박경애는 누구인가.
"<연합인터뷰> 캐나다 UBC大 박경애 교수
| 기사입력 2011-08-18 07:09 | 최종수정 2011-08-18 09:51
박경애 교수-브리티시컬럼비아대 장기체류프로그램 관장 (서울=연합뉴스) 임상수 기자 = 김일성대학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북한 대학교수 6명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장기체류프로그램을 관장하고 있는 이 대학의 박경애 교수(정치학, 한국학연구소 소장). 2011.8.18 nadoo1@yna.co.kr |
北 대학교수 6개월 장기 체류 프로그램 관장
"북-캐나다 양국 이해 증진에 교육계 교류 중요"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임상수 특파원 = "북핵 문제로 인해 별다른 교류관계가 없는 북한과 캐나다 양국이 서로 이해하는데 교육계 간 교류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북한 대학교수 6명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장기체류프로그램을 관장하는 이 대학의 박경애 교수(정치학, 한국학연구소 소장)는 17일 프로그램 설립 취지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북한 교수들은 국제경영과 국제경제, 재정, 무역 등 4개 과목을 대학 내 정규 학생들과 똑같이 이수하게 된다"면서 "북한의 대학교수들이 외국에서 이처럼 장기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북미 다른 대학들도 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은 박 교수와의 문답.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내 설치된 지식교류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지난 2001년 캐나다와 북한이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북핵문제로 인해 별다른 교류가 없는 상태였다. 양국이 서로 이해하는 데는 교육계 간 교류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작년 6월 대학 내에 북한 교수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 이번에 오신 대학교수들이 이 프로그램의 첫 참가자들이다.
이분들은 지난 7월 이곳에 온 후 현재 어학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으며, 오는 9월 가을학기에 국제경영과 국제경제, 재정, 무역분야 등 4개 코스를 공부하게 된다. 이들 코스는 대학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것으로 이곳의 정규학생들과 똑같이 이들 과목을 이수한다고 보면 된다.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국가 간 교류는 여러 분야가 다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적자원 개발과 관련이 있는 교육계 간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체제가 다를 경우 정치 등 민감한 분야보다는 교육과 문화 등 분야에서 우선 교류를 함으로써 서로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게 필요한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육분야만큼 좋은 분야가 없다고 생각한다.
--참가 대학교수들의 반응은.
▲기본적으로 학자분들이기 때문에 학문에 상당한 열의를 보이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모두 영어도 잘하기 때문에 생활하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번 프로그램을 관장하고 있는데 북한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온 지 18년 됐다. 처음 이 대학에 왔을 때 캐나다는 북한하고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여서 90년대 중반부터 비정부차원의 국가 간 교류과정에 참여해 캐나다 교수들과 학술적인 목적으로 함께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해 양국관계를 논의했었다. 물론 북한학자들도 UBC를 방문한 적이 있다.
또 1999년에는 캐나다 외교관들과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등 오랫동안 캐나다-북한 양국 관계에 관여해 왔다. 참고로 북한과 캐나다는 2000년 외교관계 수립을 공식발표하고 이듬해인 2001년 정식수교를 맺었다.
--이번 프로그램이 가진 의미를 말씀하신다면.
▲북한의 대학교수들이 장기체류하면서 연구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은 극히 이례적이고, 그만큼 선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북미 지역의 다른 대학들도 이 프로그램을 주시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을 계기로 대학당국자 간 교류도 추진할 계획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217008
박경애 UBC 한국학연구소 소장 이력은 다음과 같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ㆍ미국 조지아대 정치학박사ㆍ미국 프랭클린마샬 (Franklin and Marshall) 대학과 멀서 (Mercer)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역임ㆍ1995 UBC 정치학과 교수로 취임ㆍ현재 UBC Korea Foundation 석좌 교수 (정치학)ㆍ북미한국 정치학회 회장 역임ㆍ1995년이래 2002년 한-카 국교 수립 이전 수차례 북한의 초청과 카나다 대표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며 카나다-북한 교류 추진ㆍ1990년대 북한 학자들의 UBC방문과 UBC-북한 교류 주선.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이 1995년이다. 1995년은 뉴라이트파가 아직 뉴라이트파와 제이파로 나눠지기 이전인 뉴라이트 클린턴 정권 때이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북한의 비전통적 안보' 주제 국제학술회의
| 기사입력 2010-07-12 19:47
【마산=뉴시스】공봉식기자 =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 교수)는 오는 14일 오전부터 서울 삼청동 연구소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북한의 비전통적 안보'라는 주제로 독일 프리드리히 나우만재단 한국사무소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한국학센터와 공동으로 진행된다.
이번 학술회의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전쟁이나 무력도발 등과 같은 전통적인 안보 위협뿐만 아니라 환경, 식량, 에너지, 인신매매, 불법이민 등과 같은 비전통적인 안보 위협이 새롭게 주목받는 상황에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토론을 하기 위해 열린다.
오전 10시 개회식에는 이수훈 소장을 비롯해 발터 클리츠 나우만재단 한국사무소 대표와 박경애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소장 대행의 인사말에 이어 세계 석학들의 발표가 이어진다.
먼저 '북한의 전통적, 비전통적 안보 문제 재고'라는 주제로 서재정 교수(존스홉킨스대)와 브랜든 하우 교수(이화여대)가, '초국가적 조직범죄의 안보 문제화와 북한의 비전통적 안보'를 주제로 데이비드 강 교수(서던캘리포니아대)가 각각 발표한다.
이어 오후 2시부터는 이우영 교수(북한대학원대학교)가 '인간 안보의 시각에서 본 탈북자 문제'라는 주제로, 피터 벡 교수(스탠포드대)가 '해외 언론과 북한의 비전통적 안보'를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오후 4시부터 열리는 제3회의에서는 '북한의 비전통적 안보를 위한 국제협력'이라는 주제로 츠네오 아카하 교수(몬트레이국제대학원)가, '북한 난민과 국제협력'이라는 주제로 이신화 교수(고려대)가 각각 발표하게 된다.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총 3개 회의가 열리는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는 11개 주제로 20여 명의 석학들이 발표한 뒤 10여명의 토론자와 함께 의견을 나누는 순서로 진행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336415
스탠퍼드 대학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다. 나우만 독일 재단에 대해서는 지난 인월리에서 말씀드린 바 있다.
"기독교민주당(CDU)은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을, 기독교사회당(CSU)은 한스 자이델 재단을, 사회민주당(SPD)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을, 자유민주당(FDP)은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을, 녹색연합(Gruene)은 하인리히 뵐 재단을, 마지막으로 민주사회당(PDS)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갖고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05235670
이때, 프리드리히 나우만은 누구인가.
http://blog.naver.com/kyc27/100018646754
현재 나우만 재단은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 내에 사무소를 두고 있어 한국 정치에서 한양대 출신 정치인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나우만 재단과 극동문제연구소가 연관 관계가 있는 듯싶다. 이런 흐름에 박경애가 있고, 박경애와 박한식이 조지아대로 묶을 수 있다면.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 볼 때, 인드라가 추정하는 그림은 다음과 같다.
이번 북한 교수 초빙 사건 배후 조종 세력은 물론 국유본이다. 국유본 분파 중 노비네파가 아니라 뉴라이트파이다. 주요 배후 인물은 도널드 베이커이다. 얼굴마담은 박경애이다.
인드라가 추정하는 바로는 박경애는 종교가 기독교일 가능성이 크다. 해서, 박경애가 기독교계를 맡는다. 도널드 베이커는 가톨릭을 맡는다.
하면, 국유본은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가.
남북 통일 때문이다. 갑자기 통일을 시키면 문제가 많다. 김일성 대학 교수들을 데려다가 공부시켜야 한다. 하면, 김정일은 이런 것도 모르고 허용했다는 말인가. 오히려 잘 알기에 허용한 것이다. 국유본이 결심만 하면 김정일은 48시간 이내에 뒈진다. 지금 살려두는 건 김정일이 아직까지 쓸모가 있는 넘이기 때문이다. 해서, 통일을 절실히 바란다면, 김정일 없이 한반도도 이익이고, 국유본도 이익인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국유본이 움직인다. 그런 시나리오가 없다면, 국유본은 느린 속도로 무리하지 않으면서 한반도 통일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드라가 볼 때, 현재 백태웅은 뉴라이트파이다. 또한 박경애부터 UBC 한국학은 뉴라이트파로 보인다. 인드라가 알기로는 백태웅이 민주화운동 인사로 인정받은 것이 2008년 12월 22일이다. 뉴라이트 이명박 정부 때인 게다^^! 참고로 뉴라이트 이명박 주변 인사들은 죄다 운동권이다~!
http://www.ytn.co.kr/_ln/0103_200812272147557611
어윤대라고 있다. 현 국민은행장이다. 고려대 총장이었다. 이명박과 더불어 대표적인 한국 뉴라이트이다. 그 이력에 보면, 하와이대 객원 교수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초청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예서, 하나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박근혜는 가톨릭이면서 왜 노비네파인가
박근령의 회고에 따르면, 박근혜가 성심학교와 서강대학교를 간 것은 박근혜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박근혜가 세례를 받아 율리아나라는 세례명도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네덜란드 여왕 이름이 율리아나이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빌헬미나, 율리아나, 베아트릭스가 3대에 걸쳐 왕위가 모계 전승하고 있다. 박근혜는 유럽 특사로 베아트릭스 여왕과 조우한 적이 있다.
http://blog.naver.com/friderike/18484701
불교 법명도 있다 들었다.
"박 전 대표는 아예 '기불천교인'으로 불린다. 기독교(개신교), 불교, 천주교와 골고루 인연을 갖고 있다. 박 전 대표는 가톨릭 학교인 성심여고와 서강대를 다녔다. 세례도 받았다.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다. 법명도 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2005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의 당시 주지였던 지성 스님으로부터 신라 27대 선덕여왕과 같은 '선덕화(善德華)'라는 법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불교 신자인 어머니 고(故)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전언이다. 신학대에 입학한 기록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608#
허나, 박근혜 신앙의 중심은 여전히 가톨릭이다. 이런 까닭에 이명박이 박근혜를 이기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가톨릭 교회를 찾아간 것이다.
"성심학교의 기원은 프랑스의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M.S.바라:1779~1865)가 1800년 3명의 동료 수녀들과 수도서원을 하면서 1801년 설립한 프랑스 아미앵 성심학교이다. 오늘날 전세계 42개 국가 200여 개 학교로 확대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60년 여자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한국성심동창회(KASH)가 세계 33개국의 성심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세계성심동창회(AMASC)에 소속되어 국내외적인 활동을 벌인다." [출처] 성심여자고등학교 [聖心女子高等學校, Sacred Heart Girls'High School ] | 네이버 백과사전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gdalena Sophia Barat, 또는 마들렌 소피 바라)는 술통 제조업자인 아버지 자크 바라(Jacques Barat)와 어머니 마들렌 푸페(Madeleine Foute)의 막내딸로서 1779년 12월 12일에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즈와니(Joigny) 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한 살 위의 큰 오빠 루이(Louis)로부터 라틴어와 고전문학, 신학과 철학 등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루이는 나중에 예수회 사제가 되었고 동생에게 항상 엄격한 규율과 벌을 주었다고 한다. 루이는 동생의 교육을 위해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6세 된 성녀 막달레나를 파리(Paris)로 데리고 가서 여러 젊은 여성들과의 만남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대혁명의 여파로 전통적인 가치와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부르심의 징표로 감지한 성녀 막달레나는 21세 되던 때에 오빠의 소개로 예수회의 조제프 바랭(Joseph Varin) 신부를 만나 장차 성심 수녀회(Society of the Sacred Heart)를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바랭 신부는 성녀 막달레나를 '예수 성심' 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녀회의 초석이 될 적임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1800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에 성녀 막달레나와 세 명의 동료들이 예수 성심께 서원함으로써 성심 수녀회의 설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심 수녀회는 예수 성심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고 그 사랑을 널리 알리는 것을 근본 정신으로 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을 통하여 설립 목적을 구현해가고자 했다. 그래서 설립 이듬해인 1801년 파리 북쪽의 아미앵(Amiens)에 그들의 첫 수녀원과 성심학교를 세웠고, 1802년에 성녀 막달레나는 비록 회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당시 23세)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1806년 성심 수녀회 1차 총회에서 초대 총원장으로 선출된 성녀 막달레나는 일생 동안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성심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04년에는 그르노블(Grenoble)의 성모 방문 수녀회 공동체를 흡수하였다. 그들 가운데 에는 1818년 미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성심 수녀회의 교육 사업을 활발히 전개한 성녀 로사 필리피나 뒤센(Rosa-Philippine Duchesne, 11월 17일)도 끼어 있었다. 이 수녀회는 1826년에 교황 레오 12세(Leo XII)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심 수녀회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유럽 각국 주교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나라에 성심학교를 설립되었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으로 인해 푸아티에(Poitiers)의 수련소가 폐쇄를 당하자 성녀 막달레나는 스위스에 새로운 수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865년 5월 25일 주님 승천 대축일에 그녀가 파리(Paris)에서 선종할 즈음에 성심 수녀회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중남미 등 16개 나라에 122개의 수녀원과 많은 학교가 있었다. 그녀는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녀 막달레나의 특성은 예수 성심에 대한 돈독한 신심과 사랑과 겸손의 실천이었다.
http://blog.daum.net/kws6953/8925678
성심이나 서강이나 예수회 학교이다. 중앙고 육사의 박지만과 경기여고 서울대 박근령과는 다른 행보이다. 박근혜가 간 학교 역시 명문이라지만, 한국에서는 비주류이다. 반면, 후자는 한국에서 주류이다. 물론 육사가 이젠 주류가 아니지만. 박근혜가 이런 주류적 삶을 거부하고 신앙의 길로 갔다.
예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가 정말 자발적으로 이 길을 갔는가. 갔다면, 평가해야 한다. 종교를 떠나서 말이다. 허나, 만일 이것 역시 국유본 안배라면 잘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성심과 서강대를 다닐 때는 아직 빅터 로스차일드 시대였다. 이 시기는 빅터 로스차일드와 가톨릭이 손잡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하나, 교회 일치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세계교회운동·교회합동운동이라고도 한다. 원어인 에큐메니칼은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umene에 유래한 것으로, 온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다는 '세계교회'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상은 신약성서 이래 그리스도교의 일관된 주장이거니와, 오늘날 에큐메니칼 무브먼트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재일치(再一致)를 첫째 목표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리스 정교회(正敎會)나 로마가톨릭교회와의 협력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운동의 구체적인 발단은 1910년 J.R.모트와 J.H.올담의 지도 아래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회의이다. 이 에든버러 회의 이후 3개의 세계회의가 생겨나 이 운동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 하나가 국제선교협의회(IMC)인데, 선교에 있어서 일치협력을 목표로 하여 제1회 회의가 1925년 예루살렘에서, 제2회는 1938년 마드라스에서, 제3회는 1952년 빌링겐에서 열렸다. 또 하나는 '생활과 실천(life and work)'에 관한 세계회의이다. 이것은 현대의 현실적 여러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양심적으로 책임을 지기로 할 때 필요하게 되는 협력을 목표로 한 회의이다. 제1회 회의는 1925년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신학문제의 논의를 피해 왔으나 신학문제를 실천문제에서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차차 인정하게 되어 마침내 세계교회회의를 조직할 필요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 들 수 있는 것은,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에 관한 세계회의이다. 이것은 위의 두 세계회의가 회피해 온 신학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회일치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회의는 1927년 처음 로잔에서, 제2회는 1937년 에든버러에서 열려 교회관(敎會觀)·교의·예배·제도·공동성찬(共同聖餐) 등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단계를 거쳐,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세계교회회의가 열리게 되면서 세계교회협의회(世界敎會協議會:WCC)가 발족하였다. 이것은 위의 '생활과 실천' 회의와 '신앙과 직제' 회의가 통합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제1회 및 1954년 에반스턴에서의 제2회 WCC 대회에는 로마가톨릭 교회·러시아 정교회 등이 참가하지 않았으나,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3회 대회에는 소련이나 동유럽 정교회가 참가하였고,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도 옵서버를 보냈으며, 또한 국제선교협의회도 세계교회협의회와 합동하여 교회합동운동의 획기적 진전을 보였다. 한편, 그 해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주요 교파들이 모여 그리스도교 평화회의(平和會議)가 열렸다. 이같은 진전은 인류의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핵무기 반대와 군축문제, 평화공존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힘입은 바가 컸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다른 교파에 대하여 융통성을 보임으로써 성공회의 대주교가 분리된 이래 처음으로 교황과 회견하였고, 1962년의 역사적인 바티칸 공의회에는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하여 미국·소련의 교회대표도 옵서버로서 초청받았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구성되어 있고, 장로교·감리교 연합협의회 때부터 따지면 80년 가까운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연합사업 실태로 보아 교회일치의 꿈이 이루어질 날은 요원한 것만 같다.
[출처] 교회일치운동 [敎會一致運動, ecumenical movement ]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운동 배후에는 물론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둘, 로마 올림픽이다. 이를 통해 국유본과 가톨릭의 화해를 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이전까지 올림픽은 주로 기독교 지역에서만 개최하였다. 베를린 올림픽은 국유본이 의도적으로 히틀러를 엿먹이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셋, 해방신학은 빅터 로스차일드 작품이다. 허나, 시작한 건 빅터 로스차일드인데, 그 열매를 데이비드 록펠러가 다 따먹었다~!
정리하면, 가톨릭도 분열하여 노비네파와 뉴라이트파가 있는 것이다. 오세훈과 김문수과 정동영은 가톨릭이면서도 뉴라이트파인 게다. 반면, 이회창은 노비네파로 보인다. 쪽발 돼중도 노비네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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