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는 뉴라이트파인가, 노비네파인가, 골드만파인가? 국유본론 2011

2011/10/24 02:55

http://blog.naver.com/miavenus/70122065055

   

   

   

   

   

   

   

하와이는 뉴라이트파인가, 노비네파인가, 골드만파인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0/24

   

   

"-카메하메하 4세

   

1854년에 카메하메하 3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 알렉산더 리홀리호(Alexander Liholiho, 카메하메하 3세의 이복 누이인 Kinau의 아들이자, 카메하메하 1세의 손자, 재위 1855~1863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카메하메하 4세는 산업을 주도하면서 하와이에 경제적인 붐을 가져왔다. 하와이 섬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무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카메하메하 4세는 미국 방문 때 받은 인종적인 모욕에 대한 분노와 갈수록 깊숙이 파고드는 미국의 강력한 힘에 두려움을 느낀 반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좋은 인상으로, 하와이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점점 키워 주었다.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퀸스 병원의 설립이다. 세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하와이인들이 외국인과의 접촉으로 여러 가지 병원균에 전염되어 사망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왕실은 항상 염려해 왔던 것이다.

1863년 카메하메하 4세는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계자로 그의 맏형 로트(Lot)를 지명하였다.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9&dirId=9020201&docId=74396904&qb=7ZWY7JmA7J20IOyYgeq1rQ==&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p9KyU5Y7udssvoOjsossc--005318&sid=Tp8lufLlnk4AACIPF4M

   

졸라 웃긴 역사 해석이라고 본다. 지금부터 인드라가 관련 자료를 보지 않고 눈앞에 상상하는 대로 소설을 써보겠다. 하고, 이 소설이 과연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1943년 사태 핵심은 누가 봐도 카메하메하 3세의 토지 개혁 정책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근대화를 말할 때, 해당 정권이 개혁을 하지 않아서, 개방을 하지 않아서 근대화에 실패했다고들 한다. 전혀 아니다. 짜르 황제부터 시작해서 이슬람 군주 등 상당수 군주들이 개혁 개방 조치를 취했다. 근래에는 누가 있었나. 이란 팔레비 국왕이다. 팔레비 국왕이 쫓겨난 이유는 백색 개혁 때문이다. 국유본은 정권이 국유본이 끼어들 틈없이 개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유본이 허락하는 개혁이나 혁명이란 국유본에게 이권을 준 뒤 그 대가로 얼마간의 개혁, 혁명 정책을 허용하는 것이다. 

   

하면, 이 시기 하와이에 들어온 백인들은 미국에서 온 이들인데, 왜 영국 영사가 총대를 매었나. 당대 국유본 세력 중에 가장 끗발이 있으니까. 당대 세계 최강은 영국이었고, 미국이야 영국으로 독립한 지 불과 70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오늘날로 치면, 영국은 일본이고, 미국이 한국인 셈이다. 이런 판에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땅을 매입해서 농장을 차렸다가 마다가스카르 정권이 어느날 토지개혁을 주창하면서 외국인 토지 국유화 선언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똥밟은 거지, 뭘!@! 해서, 한국 정부가 나서는 게 압력이 클까. 일본 정부가 나서는 게 압력이 강할까. 후자인 게다. 해서, 영국 영사가 나서고, 영국 함대가 나선 게다. 이때까지 영국 함대가 킹왕짱이었지, 미국 함대는 X도 아니었다~!

   

 예서, 초점은 하와이인의 별다른 저항이 없었음에도 왜 영국 함대는 점령을 풀었느냐 하는 점이다. 왜 하와이 왕조를 복원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때, 영국이 지금부터 하와이는 영국령이다, 하고 선언하면 그만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어떤 해석을 보면, 먼로주의의 영향이라고 한다. 하와이가 비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첫사례라고 말한다. 미국 외교의 승리라나? 헌데, 힘없이 외교가 이루어지나? 힘없이 외교가 이루어지는 사례는 딱 하나밖에 없다. 봐주는 것. 지금 미국이 북한을 봐주는 것과 같다. 국유본은 결심만 하면 48시간 이내에 뽀그리를 뒈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안 하는 이유는 뽀그리가 아직 쓸만한 개색희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국유본은, 로스차일드는 하와이 왕조를 아직 무너뜨릴 때가 아니라고 본 것같다.

   

일타 삼피로 접근하자.

   

하나,  1840년에 시작한 아편 전쟁이다. 아편 전쟁으로 국유본은 육군, 정확히는 용병을 필요로 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인구 대국. 중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유럽은 물론 러시아, 일본, 미국을 총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계산법에 따라 장차 미국 로스차일드 지부가 되는 모건 은행을 탄생시킨 피바디를 런던에서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왜? 제국주의 시대 개막을 위하여! 1843년 이전까지는 각 국가는 로스차일드 눈치만 보았다. 허나, 1943년 이후에는 국유본이 허락했다. 영국처럼 마음껏 세계를 약탈하라! 예서, 만일 하와이에 다이아몬드나 금 광산이 있었다면, 국유본이 다른 지역을 대안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둘,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 중국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교두보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이 하와이이다. 하와이에 왜 차후에 미군기지를 건설했겠는가. 대 아시아 공략인 게다.

   

셋, 분명 왕권을 주는 대신 토지개혁에서 예외적인 조항들을 만들어서 외인 토지 취득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런 뒤에 국유본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기획하고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뒤로 빠진다. 이제 미국인이 나서서 욕을 바가지로 먹는 셈이다. 독박이다. 허나, 그 대가로 미국은 하와이를 삼킨다. 영일동맹과 같은 것은 그나마 역사적으로 드러난 밀약이지, 당대 전 세계에서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밀약이 있으리라.

   

인종 문제도 관련이 없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왕권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영국인이야 겉으로는 사람 좋은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개고기 타령을 너놈 집에 화염병으로 불타오를 때까지 할 만큼 상대를 아주 우습게 보는 전형적인 족속이어서 인종 문제를 속으로 더 따졌을 것이고, 미국인이야 아직 귀족 수업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평민 출신이어서 꾸밈없는 태도로 인종 멸시를 했다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외교 관계를 좌지우지할 만큼은 아닌 게다.

   

해서, 카메하메하 4세 입장에서는 국유본 속셈을 모른 채 하와이를 삼킬 수 있음에도 삼키지 않고 왕권을 보존시킨 영국 태도에 감읍하였을 것이며, 반대로 그 이후 꾸준하게 권력을 강화시킨 미국 태도에 크게 경계하였을 것이다.

   

   

"-카메하메하 5세와 왕조의 종말

로트(Lot Kamehameha, 카메하메하 5세, 재위 1863~1872년)는 그의 할아버지 카메하메하 1세 때의 찬란했던 왕권을 다시 복원하는 데 힘썼다. 동시에 주민들에게 세심한 정책을 펼쳤던 그는 주법(酒法)의 폐기를 반대하고,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또한 사탕수수 산업의 증진을 위해 노동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이민 부서를 설치하여 외국으로부터 많은 노동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1864년에 헌법을 작성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이 헌법은 하와이 역사상 어느 헌법보다도 가장 긴,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왕정을 무너뜨리게 된 반대파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던 카메하메하 5세는 그의 누이인 빅토리아 카마말루(Victoria Kamamalu)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녀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다시 파우아히 비숍(카메하메하 1세의 증손녀)에게 왕관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그녀는 사양하였다. 결국 카메하메하 5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카메하메하 직계의 대는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는 곧 그 왕조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거로 뽑은 왕, 루날릴로

   

새로운 왕조가 왕과 귀족에 의해 선출되었다. 카메하메하 1세의 이복 동생의 후손인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William Charles Lunalilo, 재위 1873~1874년)는 왕실 의회의 선거에 의해 6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를 투표에서 가볍게 누르고 당선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왕이 된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지방 하와이안 세력들과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반면 왕조정치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경제면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발달하여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을 계속하였다. 파우아히 공주의 부군인 찰스 비숍을 포함하여 세 명의 미국인을 내각에 기용하고 있던 왕의 정부는 사탕수수의 이익을 늘리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미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미국측의 진주만 양도 요구와 맞물리자 원주민들은 분노하였고, 결국 루날릴로 왕은 그 조약을 철회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술을 많이 마셔, 왕위에 오른 지 1년 25일 만인 그의 39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라카우아 왕

   

루날릴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전의 왕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그에게 패한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 재위 1874~1891년)였다. 칼라카우아는 단 한 사람의 적수였던 엠마(Emma) 여왕을 쉽게 물리치고 입법회의에 의해 왕으로 당선되었다. 매우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재능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폐지되었던 훌라 댄스를 부활시키는 등 사라져 가는 하와이 전통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또 미국을 방문하여 상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하와이의 설탕을 관세 없이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상품 또한 관세 없이 수입해야만 하였다. 이를 기회로 미국의 자본가들은 점차 하와이에서 그들의 세력을 넓혀 갔으며, 그 힘은 정치에까지 미쳐 진주만을 미국 해군의 보급기지로 한다는 조항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1881년에 그는 8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했다. 첫목적지는 일본이었으며, 중국을 거쳐 빅토리아 여왕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영국 왕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관식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하와이에서도 대관식을 열겠다고 마음먹었다. 1879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던 이올라니 궁전(Iolani Palace)은 1882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가 왕위에 오른 9주년을 기념하여 1883년 2월 12일, 스스로 거대한 대관식을 열어 왕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낭비였으며, 너무 사치스러웠다. 이로 인한 많은 정치적인 문제들이 하와이 왕국을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많은 하와이의 땅이 백인들에게 팔려 넘어갔다. 그는 하와이 왕국의 위신을 높여 세계에 알리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인들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유혈혁명으로도 정세를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1887년, 결국 그는 백인들이 강요하는, 왕권을 제한하는 신헌법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헌법에 따라 각료의 파면권까지 의회가 갖게 되었고, 왕권은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정치분쟁이 심해지자, 그는 요양을 위해 1890년 11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으며, 거기에서 1891년 1월 20일 사망하였다."

   

이 시기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데미안 신부이다.

   

데미안

http://blog.chosun.com/cheonhabubu/4066734

   

"2005년 기준 하와이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교(Christianity): 351,000 (28.9%),로마 가톨릭이 대부분.
  • 불교(Buddhism): 110,000 (9%)
  • 유대교(Judaism): 10,000 (0.8%)
  • 기타종교(Other): 100,000 (10%)*"

    http://ko.wikipedia.org/wiki/%ED%95%98%EC%99%80%EC%9D%B4_%EC%A3%BC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2005년 기준 하와이 주요 종교가 로마 가톨릭이다. 왜? 데미안 신부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예서, 왜 데미안 신부가 중요한가. 데미안 신부를 성인으로 인정한 것이 뉴라이트 요한 바오로 2세이기 때문이다.

       

    http://cafe.naver.com/holyvatica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514&

       

    http://www.kccosd.org/book/export/html/7427

       

       

       

    뉴라이트 시대에 한국 가톨릭이 크게 부흥한 것처럼 전 세계적으로도 천주교가 크게 부흥했다. 모두 데이비드 록펠러 덕분이다. 가톨릭에서 왜 데이비드 록펠러를 살아 있는 시성으로 만들지 않을까. 인드라 생각으로는 데이비드 록펠러 만큼 가톨릭 신자를 확장시킨 역사적인 인물은 전무후무하다고 본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어렵다면 브레진스키만이라도^^!

       

    하여간, 인드라가 보기에 로마 가톨릭이 뉴라이트 요한 바호로 2세에 들어와서 성인 칭호를 남발한 경향이 없지 않는 것 같다. 그 덕에 가톨릭 교세가 크게 신장한 것 같기는 하지만, 외형만 키운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ㅎㅎㅎ.

       

    이 사건 외에 중요한 사건은 노동력 부족 때문에 아시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중국인이 왔다. 헌데, 중국인이 누군가. 세계 3대 상인. 중국인은 일을 하다가 이내 장사를 하기 시작한다. 수완이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위협을 느낀 미국인이 중국인 이민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해서, 그 다음에 수입한 것이 쪽발이랑 필리핀인인 것이다. 쪽발이랑 필리핀인은 장사란 걸 잘 몰랐다. 열심히 일했는데, 섬 종족 특징이 하나 있었다. 폐쇄적이라는 것.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 뭉쳐서 노동 쟁의, 소작 쟁의를 시작한 게다. 임금 올려줘라, 생활 개선하라~! 똥자루만한 넘들 때문에 백인들이 골치 아프기 시작한 게다.

       

       

    하여, 나온 대안이 무엇이었나. 한국인 수입이었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허나, 한국인 하와이 이주도 20세기 들어서서 중단하고야 말았다. 하와이 이민을 가야하는데 멕시코 이민으로 행선지가 바뀐 사태로 인해 중단되었다는데, 인드라 생각으로는 이것은 핑계이고, 실제로는 백인이 일정 수 이상의 민족을 제한하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들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해야 하는데, 이때 인구 비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해서, 영연방 국가나 이런 나라에서는 초기 백호주의 정책을 펼쳤고, 백인 숫자를 늘이기 위해 영국에서 십대 청소년 백인들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간 일이 많았다고 한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칼라카우아 왕이 죽은 후, 그의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재위 1891~1893년)가 뒤를 이어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칼라카우아 왕이 외유 중일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던 여왕은 의지가 강하고 정치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는 소수 백인들로부터 하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되찾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들은 합병을 지지하는 연맹을 결성하여 왕권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미국 해군 함대의 선원과 해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헌법을 공표하려고 했다.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춘 합병파는 여왕이 만든 신헌법 초안에 대하여 일종의 쿠데타라 칭하며,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여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이렇게 하여 하와이 100년 왕국은 비운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퇴위로 막을 내렸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노래한 알로하오에(Alohaoe)는 그녀가 작사, 작곡한 것이다.

       

    신하와이,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퇴위로부터 1년 반 후인 1894년 7월 4일, 임시정부는 하와이 공화국을 선언하고, 돌(Sanford B. Dole)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와이 합병 문제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논란이 많았으나, 당시 스페인과 미국과의 전쟁으로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했던 미국 의회는 1898년 7월 7일, 드디어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을 승인해, 하와이는 미국땅이 되었다.

    미국의 속령이 된 하와이의 도지사로 취임한 사람은 공화국 시대의 대통령이던 돌이었다. 그의 사촌 제임스 돌이 파인애플 통조림 제조와 수출에 성공하면서부터 파인애플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여 설탕과 함께 하와이의 주요 산업이 되었으며, 이로써 하와이는 백인 자본가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영국을 방문해서 영국 여왕을 만난 릴우오칼라니 여왕 왈, 자기 몸에는 영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했단다. 깜짝 놀란 영국 여왕이 물으니, 자기 조상이 영국인을 잡아먹어서 영국인 피가 흐른다고 했다나~!

       

    이처럼 기가 강했다는 점에서 명성왕후와 같았던 여왕이었으니 백인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왕권을 물려줄 리가 없었다. 막판에 외군 군대의 힘을 빌려서 저항해보려는 책략은 고려왕국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아무튼 여왕은 강력 저항하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게다.

       

    예서, 샌포드 돌이 대통령이 된다. 여기가 또 다른 포인트인 셈이다. 샌포드 돌. 돌? 어디서 들어본 사람이 있을 듯. 그렇다. 그 후예 중에 밥 돌이 있다.

       

    하면, 밥 돌은 노비네파일까, 뉴라이트파일까. 공화당 의원이니 골드만파는 아니다.

       

    "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선거전에 나섰으나, 민주당카터-먼데일 조에 패했다. 상원의원 선거에 1974년, 1980년, 1986년, 1992년 연속으로 당선되며 상원의 대표적인 거물이 되었고, 1985년부터 상원의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대표 겸 상원 다수당 대표로 큰 권한을 행사했다. 1986년 선거에서 다수당 지위를 민주당에 빼았겨, 다수당 대표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계속 공화당 대표로 활동했으며, 1994년 선거에서 전보다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며 다수당 지위를 되찾아 다시 다수당 대표가 되어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대립하였다. 공화당에서는 온건파에 속하여 당시 하원의 대표가 된 뉴트 깅그리치에 비하면 심한 대립을 조장하지는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 여러 차례 도전하여, 1980년 공화당 예비선거에 나섰으나, 저조한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고, 1988년에는 유력한 후보로 예비선거에서 중북부 몇몇 주에서 승리했으나, 조지 H. W. 부시에 밀려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다. 1996년 선거에서는 상원 다수당 대표로 공화당 온건파의 지지를 얻어 예비선거에서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하며 마침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그는 그 해 6월 11일, 자신의 상원의원직까지 사퇴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집중하며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을 공격했다. 당시 만73세로 미국의 역대 양대 정당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지금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73세의 고령의 그는 23세나 젊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패기를 꺾지 못하고 낙선했다. 대통령 선거 후 바로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듬해 초 그에게 2차 세계 대전에서의 공적과 그동안의 정치 활동을 기려 미국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A5_%EB%8F%8C

       

    데이비드 록펠러는 로스차일드파 닉슨을 물러나게 한 뒤 뉴라이트 제럴드 포드를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이런 제럴드 포드와 함께 밥 돌이 패전처리 포수로 나섰으니 뉴라이트인 게다. 하고, 공화당에서 온건파로 활동한다지 않은가. 노예민주당이나 공화당에서 온건파다, 라는 말은 다른 말로 뉴라이트파다, 라고 보면 90%이상 맞는 말이다. 뉴라이트파의 정치 노선이란 보수우파정당에서는 진보좌파로, 진보좌파당에서는 보수우파로 움직여라! 이니까.

       

    게다가 밥 돌은 공화당에서 대선 때마다 노비네파인 부시 부자와 대립한다. 이는 밥 돌이 뉴라이트파임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클린턴 재선 가도에서 희생양을 자처한 뒤 정계은퇴하여 클린턴에게 최고 훈장을 받는 그림은 더더욱 그가 뉴라이트임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한국과의 일화도 있다.

       

    밥 돌이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타이거 펀드 때문이다.

       

    헤지펀드의 모든 것

    http://cafe.naver.com/usstock.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33&

       

    타이거 펀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3100

       

    줄리언 로버트슨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2281

       

    타이거 펀드는 소로스 펀드와 함께 세계 헤지펀드 계를 양분하던 헤지펀드였다.  헤지펀드 장점이 무엇이었나. 유럽은행에서는 투자와 상업은행이 분리되지 않아 그다지 헤지펀드 필요성이 없었지만, SEC의 규정 때문에 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미국 금융계는 규제를 덜 받는 헤지펀드로의 유혹이 강렬했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헤지펀드 열기가 이상과열 기미까지 보이는 것과 맥락이 같다.

       

    허나, 이것이 연이은 주가 폭락으로 헤지펀드가 외면을 받기 시작하여 1971년 140개였는데, 1974년이면 헤지펀드 수가 30개까지 줄어든다. 이러한 결과로 위협을 느낀 국유본 귀족들은 모건스탠리의 로버트 볼드윈처럼 왕정 쿠테타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월가 시위와 당시의 궁정 쿠테타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교체했지만, 상당 기간은 이중 권력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뉴라이트 카터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나 당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그런 시기였던 셈이다. 이러던 것이 넬슨 록펠러가 죽고, 데이비드 록펠러가 민주당에서 뉴라이트를 이끌고 공화당으로 가서 뉴라이트 레이건을 당선시키자 상황이 달라진 셈이다.

       

    타이거 펀드 줄리언 로버트슨은 기적과도 같은 수익으로 헤지펀드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것이 1980년이다. 뉴라이트 투자자들은 대개 뉴라이트 레이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던 타이거 펀드가 언제 망하나. 1998년이다. 하고, 결국에는 파산했다. 언제? 노비네 정권 시절에~! 같은 뉴라이트라도 소로스는 안 망했는데? 소로스는 노예민주당 계열 뉴라이트이고, 줄리언 로버트슨은 공화당 계열 뉴라이트인 게다.

       

    해서, 줄리언 로버트슨은 클린턴한테 패해서 정계은퇴 직전인 밥 돌을 움직여서 한국에 가서 로비 좀 하라고 부탁하는 게다. 왜, 둘 다 공화당계 뉴라이트였기에.

       

    하면, 당시 타이거펀드는 한국에 무슨 볼 일이 있었나?

       

    http://mrcoree.blog.me/14353636

       

    간단히 말하면, 타이거 펀드가 SK텔레콤을 경영권 장악을 위한 적대적 인수 작전을 펼쳤고, SK 측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SK 계열사 지분을 투자하여 SK 계열사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소버린이 나서서 역시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면,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색희는 누구냐.

       

    누구긴 누구야. 친일 조선일보에 칼럼을 내시며, 뉴라이트 고려대 경영대 학장이며, 전 쪽발민주당 의원 사위이며, 뉴라이트 참여연대 인사인 동시에, 그 유명한 라자드 펀드 얼굴마담 장하성이다.

       

    이때, 장하성이 열심히 타이거 펀드를 옹호하는 꼴이라니. ㅋㅎㅎ.

       

    바로 이런 대목에서 국유본이 장하성 같은 넘 충성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잘 모른다. 배울 만큼 배운 넘들이 왜 저리들 바보 같은 논리로 아부를 떨고 있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단순히 정치하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도 있다. 아니다. 코가 꿰어서 그런 게다. 병쉰 짓을 하라고 국유본이 지시했기 때문에 병쉰 짓을 하는 것이다. 그걸 잘 이해해야 한다. 동네에서 천재 소리 듣던 이가 왜 여의도나 청와대에 가면 한결같이 병쉰되나? 국유본 지시 때문이다.

       

    국유본이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지록위마

    http://100.naver.com/100.nhn?docid=701683

       

    밥 돌로 돌아가자. 대통령에서 탈락한 밥 돌 로비를 누가 받아주겠는가.

       

    "-태평양 전쟁과 하와이 주의 승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하와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태평양 지역의 전초기지가 된 하와이는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경제의 기반도 자리잡혀 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하와이는 미국 연방에 편입되었다. 1959년,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의해 하와이는 주(州)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해 8월 21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의 포고로,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 경제의 주역이던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재배는 인건비가 높아져 점차 사양화되고 있으며, 대체 산업으로 관광이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여객기의 발달은 관광산업의 발전에 박차를 가해 1978년부터는 하와이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연방정부의 군사비 지출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주(州)로 승격되어 4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날, 인종 차별은 자취를 감추고, 각국에서 온 이민들끼리의 결혼으로 인종적 의식조차 엷어지고 있다. 하와이로의 한국인 이민은 1903년에 시작되어, 현재 약 3만 4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다양한 지위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

       

    외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해당 지역은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다. 독도 주민 편입과 같은 열기가 일어나는 셈이다. 하와이가 50번째 주로 승격한다. 주로 승격시켜 안보를 튼튼히 하겠다는 게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로 인해 하와이 주산업이었던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 하와이 주로 승격하자 하와이 주민은 미국 시민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만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임금 인상와 복지 개선이 이루어져서 원가가 크게 늘어나니 다른 지역 농산물과 경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대안이 관광 산업이다. 해서, 이 시기 1960년대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가 하와이 공연을 하는 등 각종 아이디어가 쏟아진 셈이다.  

    http://kmw1203.tistory.com/116

       

       

    http://www.youtube.com/watch?v=kbyqC1Rl2vk&feature=player_embedded

       

       

    http://youtu.be/GzYEi8h0Y5M

       

       

    이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그 유명한 마우나케어골프장(Maunakea Golf Course)에 도착한다. 1964년 당대 최고의 재벌 록펠러의 요청으로 로버트 트렌트 존스가 디자인했다. 1959년 하와이가 미국 영토로 편입됐을 때 하와이 주정부는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록펠러 총수를 이곳으로 초청했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골프장과 호텔을 건축하기로 결정했고 코할라코스트(Kohala Coast) 해변가 용암밭 위에 18홀 규모로 파72( 6552야드)의 걸작품을 완성시켜 놓았다. "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83107404132720

       

    뉴라이트 쪽발 놈현, 이 븅쉰 색희가 지역균형발전이란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전국에 골프장 건설하고, 쪽발 놈현 색희랑 뉴라이트 이해찬 씹색희가 나라가 난리나도 골프치던 것 생각나냐? 이거 다 어디서 배운 솜씨냐. 이 무뇌아 색희들이 지들 머리에서 이런 것 생각했겠냐고. 머리에 똥만 든 쪽발이 색희들이 말이야. 하긴, 홍수나도 골프치는 건 쪽발 뽀그리도 마찬가지더라, ㅎㅎㅎ.

       

    하고, 쪽발 놈현이나 이명박이나 뉴라이트가 내세우는 게 뭐야. 관광이잖아. 관광 한국, 관광 서울.

       

    역사만 보면, 하와이는 뉴라이트가 아니겠는가?

       

    허나, 역사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링글은 여러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하와이 최초의 유대인 주지사이자 최초의 여성 주지사이며, 하와이에서 40년 만에 배출된 공화당 출신 주지사다. 지난 2004년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회장을 맡을 정도로 거물급 인사로 성장한 그에게 '민주당' 출신 오바마 당선자의 하와이 행은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쌍수 들고 환영하자니 다른 당 출신 대통령과의 밀월이 부담스럽고, 모르는 척 하자니 '속이 좁다'는 비판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둘의 접촉은 이 서신교환이 전부였다. 지난 8월 이후 3번이나 하와이를 찾은 오바마와 링글은 아직 직접 대면한 적이 없다. 예정된 회동도 없다. 그러나 '오바마 특수'를 누리고 있는 관광업계처럼 하와이 발전을 위해서라도 오바마와 친분을 쌓아두라는 현지 여론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는 게 뉴욕타임스 지적이다.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224010336320470010

       

    헌데, 왜 이런 기사 끝에는 꼭 골드만파 뉴욕타임즈 인용이 있을까^^!

       

       

    전임 린다 링글은 하와이 최초 유대인 주지사였다. 매주 월요일마다 유대교 랍비를 모시고 예배를 본 뒤 공식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다. 그녀는 두 번 이혼한 이혼녀이고, 낙태 찬성자이다. (음~ 그러고 보니 오늘 친구 민이 낙태 찬성파 급우들이랑 토론 모임을 하던데~!) 낙태 찬반 여부는 미국 정계에서 총기 소유 문제나 의료보험 문제처럼 주된 이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낙태 찬성이라는 것은, 린다 링글이 뉴라이트 성향임을 웅변한다 하겠다. 

       

       

    또한 린다 링글이 노비네 정권 때 하와이 주지사였다지만, 정치적 인맥을 보면, 매케인과 훨씬 가까운데, 매케인 역시 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린다 링글은 40여년간 집권하지 못한 하와이 집권을 위해 노예민주당 성향의 공화당 인물로 뽑힌 셈이다. 해서, 린다 링글은 뉴라이트인 게다.

       

    하고, 지난 사십년간 노예민주당이 독점한 것이 하와이 주지사였다. 노예민주당이라면 뉴라이트파 아니면 골드만파일 터. 여기에, 골드만파는 아들 부시 정권 때 생긴 국유본 분파라고 했을 때, 1973년 이후로는 하와이 주지사는 뉴라이트파가 독점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 하와이 주지사는 네일 아베크롬비, 혹은 닐 아베크롬비이다. 노예민주당 의원 소속으로 오바마의 대학친구이자 하와이의 국회의원이었다. 골드만파라는 이야기다.

       

    오바마가 명색이 하와이 출신인데, 린다 링글이 오바마를 불편하게 하니 바꿀 수밖에!!!

       

    여기서 잠깐~!!!

       

    오바마 출생의 비밀은~!!

       

       

       

    욕망의 하와이 : 오바마의 실제 아빠는 누구?

    http://www.cyworld.com/cutesun21c/3707622

       

       

    자, 여기까지 인드라 분석법 둘을 활용했다.

       

    하나는 주도 인물이나 조직의 이력과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 하와이 중심 세력을 조사하여 파악하는 것. 이러면, EH 카아 식,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 이해다, 라는 셈인가.

       

    여기서 끝인가?

       

    ㅎㅎㅎ.

       

    아니다. 인드라가 지금은 좌파가 아니지만, 과거에는 좌파였다. 해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물적 토대, 혹은 물리력, 아니면, 자금 흐름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해서, 이 문제는 개인이나 조직보다 지역이므로 이외로 문제가 쉽게 풀린다.

       

    오늘날 하와이 수입은 대체로 어디서 오나? 이것만 알자.

       

    관광에서 달라진 바 있나? 없다.

       

    뉴라이트이다.

       

    예서, 하와이 관광이 활성화하려면?

       

    달러 약세.

       

    달러 약세일 때, 한국인들이 하와이 관광 많이 갔을 때, 한국인들이 많이 실망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보던 하와이는 어디에? 하와이 관광. 대대적인 시설 보수와 서비스 개선이 필요하다.

       

    허나, 이것이 하와이 문제일까.

       

    하와이 주민 문제도 있다. 하와이 물가가 장난이 아니다. 이는 관광지 물가가 천정부지인 것과 같다. 제주 이런 데 가면 물가 굉장히 높다. 하와이도 예외는 아니다. 해서, 관광 산업으로 인해 하와이 주민은 투잡으로 고생해야 한다. 이런 데에 실망해서, 린다 링글이 혹 이집트에 간 욥처럼 하와이 문제를 잘 풀어줄 수 있을까 싶어 뽑은 것인데, 하와이 주민 삶은 여전하다. 하면, 노예민주당, 오바마 친구를 뽑았으니 이제 살 길이 트였는가.

       

    알 수 없다.

       

    혹 모르지. 인드라가 요구한 대로 국유본이 한반도를 2015년 이내로 통일을 시켜주면 인드라가 엄청난 썰을 풀어서 뉴라이트 하와이 산업에 일대 혁명을 가져올 이야기를 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http://cafe.munhwa.com/literarture/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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