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9 : 국유본 뉴라이트 분파 분석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10/04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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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9 : 국유본 뉴라이트 분파 분석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03
1. 뉴라이트는 누구인가
뉴라이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몇몇 국가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보수·우익 성향 또는 반체제적 저항운동 단체나 운동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신우익'으로 표현하며, 신우파 이념에 속하는 신자유주의(new freedom)와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크로아티아·프랑스·독일·네덜란드·뉴질랜드·루마니아·영국·미국과 2000년대 중반 일어난 한국에서의 발생이나 양상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등장하여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기조를 이룬 사상을 말한다. 케인스주의의 복지국가론을 비판하면서 공공정책을 위한 시장기구의 부활과 시민권의 제한이라는 두 가지의 뚜렷한 주장을 담고 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된 이 사상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제한적인 정부·자유시장이라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가치로 구성되어 있고, 보수주의는 사회적·종교적·도덕적 보수주의에 기초한 사회적 질서와 권위의 확립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 사상이 합쳐져 등장한 신보수주의는 국가개입의 축소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시장기구를 옹호하고 지나치게 인위적인 평등지향을 배제하고 재산권을 다른 시민권보다 우위에 둔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진보 세력 독주 견제와 안정적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결성하여 펼쳐가고 있다."
헌데, 인드라가 분류하는 국유본 뉴라이트는 다른 이들이 분석하는 뉴라이트와 다르다.
해서, 인드라가 국유본론적 관점에서 국유본 뉴라이트 분파를 소개한다.
국내 정치종교계 :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쪽발놈현, 이명박, 손학규, 문재인, 쪽발동영, 정세균, 김두관, 안(쪽발)철수, 정몽준, 홍준표, 이재오, 김문수, 김태호, 쪽발두언, 골룸빡, 노회찬, 원불교, 소망교회, 사노맹, 참여연대, 경실련, 평화연대, 김진홍, 법륜, 쪽발영환 등...
국제 정치종교계 : 데이비드 록펠러, 카터, 레이건, 대처, 브레진스키, 스칼라피노, 콘돌리사 라이스, 콜린 파월, 롬니, 바이든, 리쿠드당과 네타냐후, 시진핑, 장쩌민과 상하이방, 옐친, 사르코지, 올랑드, 바웬사, 쪽발정일, 호메이니, 이슬람형제단, 일본 부패민주당과 노다 병쉰색희, 피노체트, 요한 바오로 2세 등...
국내 경제언론계 : 현대차, 현대중공업, 포스코, 금호석유화학, 웅진, JYP엔터테인먼트, 안랩, 보광그룹, 중앙일보, 동아일보, 쪽발찌라시 경향, 쪽발동영찌라시 MBC, SBS, 우리금융, 하나은행, 산업은행, KB은행...
국제 경제언론계 : 모건스탠리, 블랙록,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 블룸버그, 애플, 스티브 잡스, 무디스, 워싱턴포스트, 타임, 포브스, CNN, AP, 르몽드, 르피가로, 카길, 미국 식약청, RBS, 미쓰비시...
2. 뉴라이트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수장, 브레진스키가 책사인 삼각위원회를 모태로 한다
삼각위원회는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교체하던 해인 1973년 미국, 유럽, 일본 엘리트들이 세계 지배를 위해 만든 조직이다. 이때, 데이비드 록펠러가 일본을 키운 이유는 유럽과 아시아를 양날개로 하여 미국 뉴욕 중심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빅터 로스차일드가 미국과 소련을 양날개로 해서 영국 런던 중심 권력을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데에 대한 대안 전략이었다. 하고, 삼각위원회에서 나온 것이 G3 미국, 독일, 일본이다. 이 역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체하려는 데이비드 록펠러 1973년의 산물이다.
1968년 이후 국유본 권력이 차기 미국 권력을 누구로 할 것인가와 베트남 전쟁 문제로 분열하였다. 20세기 초반 300위원회 영국이 남아공 보어전쟁 인권 유린 폭로를 통해 자유당이 무너지고 노동당을 보수당 파트너로 삼은 것처럼 이 시기 빅터 로스차일드는 베트남 전쟁을 활용하여 미국 노예민주당을 붕괴시키고 미국에 진보당을 공화당 파트너로 삼는 구상을 하였다. 이는 노예민주당에 기반했던 데이비드 록펠러 권력을 약화시키는 등 일타삼피 전략이었다.
이에 국유본 귀족들이 데이비드 록펠러를 중심으로 반대하여 국유본 권력투쟁이 본격화했던 것이다. 해서, 지금은 아니지만, 당대 국유본 최고기구였던 빌더버그에서 미국 외교협회(CFR)에 이르기까지 권력투쟁 양상이었다.
삼각위원회를 최초로 제안했던 조직은 당대까지만 해도 국유본 최고 의결기관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였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이차대전 종료 후 이전 영국 위주의 300인위원회를 확대하여 유럽/미국으로 인사 개혁시켜 빌더버그를 만들었다.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신흥 국유본 귀족 진입, 기존 300인위원회 권력 약화, 빅터 로스차일드 권한 강화를 노린 일타삼피였다.
빌더버그는 정치계와 경제계로 구성하는데, 빅터 로스차일드가 남자의 로망, 로마 카이사르 장군처럼 경제계를 핍박하자 국유본 귀족 경제계 일부가 반발한다. 이에 빌더버그 국유본 경제 부문에서 삼각위원회 조직화가 제안되는 것이다. 최초 제안 취지는 국제 원유 가격이 현재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는 것과 달리 당대에는 겨우 1달러 수준이어서 이에 대한 국제 석유업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허나,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를 안심시키는 위장조직이든,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국유본 귀족들의 반발로 위상이 변화했든, 빌더버그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빅터 로스차일드 황권파에 대립하는 국유본 귀족파 조직으로 변신하고, 1973년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예서, 폴란드 출신 유태인 브레진스키가 삼각위원회 책사를 맡아 맹활약한다. 석유 파동, 카터 집권, 호메이니로의 이란쿠테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유도, 박정희 암살 등을 수행했다. 하면, 브레진스키 이후 삼각위원회를 맡은 유태인 헨리 키신저도 뉴라이트일까. 아니다. 후일 노비네파 분석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헨리 키신저는 노비네파이다. 헨리 키신저는 노비네파이지만, 노비네파 소그룹 중에 빅터 로스차일드와 대립하고 1973년 국유본 권력교체 당시 데이비드 록펠러 편에 선 국유본 귀족파이다.
3. 록펠러 가문은 육십여년을 인내하여 로스차일드 가문을 국유본 권력에서 축출했다
국유본이 미국 정치계를 확실히 장악한 시기는 루즈벨트 정권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차대전을 일으킨 이후이다. 당시 국유본은 미국연방준비은행을 만들었어도, 루즈벨트 삼선과 뉴딜을 지렛대로 삼았어도 여전히 미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할 수 없었다. 허나, 이차대전으로 전시체제로 만든 뒤 미국을 점령했다.
록펠러 가문은 석유산업을 일으키면서 로스차일드와 모건 가문에 줄을 대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을 누르고 세계 최고자본으로 우뚝 서려는 야망을 지녔다. 해서, 록펠러 가문은 베니스의 상인, 유태인 장삿꾼이란 오명을 감수할 만큼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면서 미국 경제계를 장악해갔다. 자회사를 통해 록펠러를 반대하는 안티 록펠러 카르텔을 만들어서 안티세력까지 흡수하는 전략은 로스차일드를 뛰어넘는 전략전술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로스차일드가 탄복하여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인드라는 보고 있다.
허나, 록펠러 가문은 시련에 봉착한다. 국유본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경제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미국 경제권력, 그중에서도 록펠러 가문 주도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국유본은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하여 독점자본주의체제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전환시킨다.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차이란 로스차일드 가문이 자신의 강점인 금융자본 힘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록펠러 산업자본을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것이다. 오늘날 말하자면, 사다리 치우기인 셈이다. 대표적인 정책이 금산분리 정책이다. 이는 순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설립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인 변호사를 동원하여 독점법으로 록펠러 가문을 핍박했다. 이 시기 록펠러 가문은 망할 뻔했다.
이에 대해 록펠러 가문은 평소 자선이란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다가 자선사업을 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넙쭉 엎드린다. 이후 러시아혁명에서 보듯 적극 협력한다. 항복선언이다. 허나, 이 항복선언은 록펠러 가문의 진심이 아니었다.
하면,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왜 록펠러 가문을 관용하였을까. 이는 록펠러 가문이 당대 미국 경제계에서 미국 토종 경제인을 상징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국유본이 필요에 의해 미국을 독립시켰지만, 진실을 제대로 아는 미국 경제인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해서, 미국 경제인 사이에서는 영국적인 것과 대립하는 미국적인 것을 중시했다. 모건이 영국적이라면 록펠러는 미국적이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록펠러 가문이 위협적임을 인지하면서도 그 뿌리까지 제거할 수는 없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록펠러 가문에게 자결 보다 충성 서약을 요구했고, 록펠러 가문은 충성을 맹세했다.
하여, 이차대전과 삼차대전인 한국전쟁 이후 국유본은 공화당을 모건, 노예민주당을 록펠러에게 맡기는 구도를 만들었다. 당대 아이젠하워는 스웨덴계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확히는 모건 정권이었다. 신기한 건 이 시기부터 스웨덴이 삼류국가에서 복지국가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북유럽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국유본없이 북유럽 복지도 없다. 물론 국유본은 견제를 견제하는 78 : 22 법칙에 충실하여 공화당에도 모건 주류를 감시하는 비주류로 록펠러 세력을 허용하였는데, 이 록펠러 세력이 후일 노비네파로 성장하는 넬슨 록펠러 세력이다.
가령 닉슨이 케네디에게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국유본 때문이었다. 당대 닉슨은 유태인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면서 욕이란 욕을 다 하고 다녔다. 해서, 닉슨은 정치 낭인이 되어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오죽하면 박정희조차 닉슨을 냉대했다. 허나, 닉슨은 빅터 로스차일드에 반발하는 국유본 귀족파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대목에서는 헨리 키신저의 활약이 돋보인다. 헨리 키신저는 대선에서 공화당 닉슨은 물론 노예민주당 대선후보에게도 정보를 제공한다고 설레발을 친다. 이래놓고 최종적으로는 닉슨 편을 들었으니 헨리 키신저야말로 삼국지적 책략의 달인이 아닌가. 게다가 닉슨 정부에서 맹활약하던 헨리 키신저가 데이비드 록펠러와 손잡고 닉슨 도청게이트 사건을 일으키고 이후 삼각위원회 책사로 활동하니 흥미롭지 않은가? 허나, 배후에 국유본 귀족이 힘을 실어주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본디 군 운전병에 불과했던 유태인 헨리 키신저를 국유본이 미소 데탕트 전문가로 훈련시켜 키운 것이다. 해서, 헨리 키신저는 닉슨 시절에 유태인을 비난했다. 자신도 유태인인데 어찌된 일인가 하면 이는 당대 빅터 로스차일드 구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닉슨과 헨리 키신저는 집권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베트남 전쟁을 조기 종료하기 위해 베트남과 협상한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헨리 키신저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 중국과도 핑퐁외교를 한다.
닉슨은 록펠러 가문 눈치를 보았다. 허나, 속으로는 늘 어딜 가나 록펠러 록펠러냐 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욕을 하고 다녔다. 이에 불안을 느낀 록펠러 가문은 국유본 귀족 협력을 받아 닉슨 재선을 우려하여 닉슨을 도청 게이트 사건으로 퇴출한 것이다.
4. 뉴라이트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넬슨 록펠러 복상사 직후 데이비드 록펠러와 레이건과 미국 노예민주당원이 공화당으로 당적 이전하면서 본격화한다
카터가 병쉰짓을 지속하니 넬슨 록펠러가 대통령이라는 야망을 꿈꾼다. 록펠러 가문에서 넬슨 록펠러란 공화당 연락책이었다. 넬슨 록펠러는 헨리 키신저와 CIA를 통해 칠레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예서, 아옌데는 유대인이며, 빅터 로스차일드 지원을 받고 있었다. 헌데, 록펠러 가문은 아프리카, 아시아를 로스차일드 영역이라면 내심 중남미를 록펠러 가문 영역으로 여겼다. 해서, 충돌한 것이 칠레 전쟁이다. 칠레 전쟁 이후 칠레의 전두환, 뉴라이트 피노체트가 칠레의 박정희, 아옌데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헌데, 이 과정에서 닉슨이 한 일이 거의 없다.
이처럼 주요 역할을 한 넬슨 록펠러는 닉슨을 제외하고 이십여년 노예민주당이 집권하는 상황에서 공화당 정권이 다시 들어설 수밖에 없는 동시에 공화당에는 넬슨 록펠러 이외에 인물이 없다고 여겨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고자 결심했다.
이에 대해 공화당 주류는 물론 노예민주당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하여, 록펠러 청문회까지 간 것이다. 문제는 록펠러 가문에서도 록펠러 가문이 타켓이 되어 자칫 자멸할 수 있는 넬슨 록펠러 대통령 시나리오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허나,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가문, 공화당 주류, 노예민주당 반발에도 대통령 출마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하여, 청문회에서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가문 실상을 폭로한다. 이전까지 록펠러 가문 재산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소문에 그쳤다. 허나, 넬슨 록펠러는 청문회에서 록펠러 가문 재산이 알려진 것보다 열배, 백배 이상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넬슨 록펠러의 고백은 공식적이어서 이에 대한 수습이 정말 어려웠던 것이다. 하여, 록펠러 가문, 공화당 주류, 노예민주당은 넬슨 록펠러 제거에 합의한다. 그것이 넬슨 록펠러 복상사 사건이다.
넬슨 록펠러 사후 공화당에 큰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위해 데이비드 록펠러가 공화당 지지를 표명한다. 록펠러 가문은 국유본 기획으로 본디 영국적인 모건 가문에 대응한 미국적인 록펠러 가문으로 이미지화하였기에 록펠러 가문은 그간 케네디, 카터를 지원하며 노예민주당파였던 것이다.
당적 이전이 아니지만, 충격적인 사건이 분명하므로, 이에 대한 완충장치가 필요했다. 정치적 격변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사건이 필요하다. 그것이 볼커다. 카터 정부 말기 연방준비제도 의장 볼커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복지정책에 대립하는 물가정책, 즉 그 어떤 경제정책 고려보다 물가관리가 중요하는 경제정책을 내세워 당대 초고금리 정책을 펼쳤다.
하고, 록펠러 가문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맞서 우선 미국을 일통하는 전략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터처럼 미국 반쪼가리만 차지하고서는 로스차일드 가문 견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록펠러 가문은 역공세를 취했다. 영국에는 뉴라이트 대처를 발굴하여 빅터 로스차일드에 맞섰다. 동시에 레이건을 내세워 미국을 일통했다. 이 시기 대선에서 레이건은 미국 거의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레이건은 본디 루즈벨트 추종자였으며, 노예민주당 지지자였다. 허나, 1960년대 이후 케네디와 노예민주당이 미국을 타락시킨다고 보아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네오콘 뿌리 역시 노예민주당이었으나 레이건과 네오콘 차이는 레이건이 온건 비둘기파인 반면, 네오콘은 강경 매파였다. 네오콘은 레이건보다 더 오랜 기간 노예민주당을 지지했었다. 한국으로 치면, 1970년대 미국 네오콘이란 쪽발돼중과 쪽발놈현을 거세게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쪽발민주당을 지지하는 당내 비주류 세력, 혹은 꼬마민주당 세력이었다. 반면, 레이건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쪽발돼중과 쪽발놈현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과 다를 바 없다고 보고,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이전한 정몽준, 이재오, 김문수 같은 인물이었다.
추신 : 술에 취해서 여기까지. 계속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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