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4 : 1달러 지폐의 비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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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4 : 1달러 지폐의 비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05
"세계의 금융업자들이 모두 전쟁의 배후에 있다. 그들은 국제 유대인, 즉 독일 유대인, 프랑스 유대인, 영국 유대인, 미국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이 모든 나라에서 유대인 금융업자는 최고다. 이곳에서 유대인은 위협적인 존재이다." - 1920년 헨리 포드의 발언
헨리 포드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에 손꼽히는 유명인이다. 포드는 자동차에 조립라인 제조기법을 도입하여 대량생산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후 자동차는 일반인도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 되어 세계의 교통문화 전체가 바뀌게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포드가 열광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거나 유대인의 세계지배를 두려워해서 자신의 자산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까지 대중들에게 선전했다거나 히틀러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내용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학교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헨리 포드가 저술한 책 <국제 유대인,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
포드는 열렬한 반유대주의자로서 1919년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라는 신문사를 세워서 자신의 이름으로 악의에 찬 반유대주의 기사를 게재했다. 미국 전역의 포드 자동차 판매 대리점에 무료로 이 신문 70만 부가 배포되었다. 또 포드는 자신이 쓴 기사를 모아 네 권 분량의 책 <국제 유대인,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출판하여 주요 서점에 무료로 배포했다.
1919년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헨리 포드가 세운 신문사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
포드는 사람들의 압력을 받자 1927년 신문을 폐간하고 비방반대연맹(미국의 친유대인 민권단체)에 사과했지만 여전히 히틀러를 찬양했다. 사실 포드는 히틀러가 1920년대에 독일에서 정권을 잡던 때 이미 재정지원을 했다. 포드는 7만 5000달러를 나치 선거 비용에 투자했다.
헨리 포드의 75회 생일에 축하 편지와 함께 히틀러가 전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독일 최고 훈장인 독일독수리훈장을 헨리 포드의 옷에 달아주는 독일 외교관
포드 사와 히틀러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가까운 관계였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는 포드의 75회 생일에 축하 편지와 함께,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독일 최고 훈장인 독일독수리훈장을 보냈다.
New York Times에 실린 히틀러의 훈장을 받는 헨리 포드
히틀러는 포드의 초상화를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어 두고 있었다. 포드는 전쟁 기간에도 이 훈장 반환을 거부했으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부사항이 밝혀진 이후에도 여전히 이 훈장을 1947년 4월 7일,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실제로 헨리 포드가 히틀러로부터 받은 독일독수리훈장
"유대민족은 다른 모든 국가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지상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세상에서 오늘의 미국정부처럼 국제유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국이 이런일을 했다', '독일이 저런 일을 했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 모두는 유대인들이 한 일이었다... 요즘 미국인은 전 세계에 타락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로 알려져있다. 왜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금권(金權)이 이 나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천재성은 그들은 땅 대신 사람을 벗겨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처럼 땅을 일구거나 천연자원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삶을 꾸려가는 대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들판과 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둔체 유대인은 이들이 거둔 결실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생적인 천재성이다.... 내가 국제유대 권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건 간에 돈의 권력은 항상 승리한다. 그 어떤 전쟁도 이들 없이는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전쟁도 이들의 허락없이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이들에 맞서는 이유는 이들은 조국도 없으면서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때문이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평화주의를 내건 단체들은 그저 표면 위에서 목청을 돋울 뿐이다. 국제자본이 모든 국가위에 군림하는 누상정부로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국제자본은 평화적인 산업이 아니라 전쟁으로 돈을 번다. 이러한 근원을 파헤쳐 이들을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국제적 돈의 권력은 유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Wall Street Journal, January 26, 1926)
출처 -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프리메이슨 헨리 포드는 히틀러와 죽을 때까지 친구였던 것이다.
하면, 헨리 포드만 히틀러를 지지했을까.
6. 루스벨트조차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지지했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써 전체주의를 후반에는 증오했을지 몰라도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잊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뮌헨 협약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1933년 말에 히틀러가 총통 자리에 오르자 주미 독일대사에게 히틀러가 독일을 이끌 적임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또한 1935년에는 옛 직장 동료인 새뮤얼 풀러에게 독일인이 평화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지 탐문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1937년에는 섬너 웰레스를 유럽에 보내 영국이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반환할 용의가 있는지 조사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1938년에는 주독 미국대사 윌리엄 도드가 나치당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자 그를 해임했으며, 그 해에 독일이 평화에 대한 대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지역인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요구하자 지지를 표명했다. 이렇게 해서 뮌헨 협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1930년대에 유럽 독재자들의 전제정치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그는 또한 유럽인이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은 그들의 관심사이지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라고 연설도 했다.
또한 미국 대사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새롭고 멋진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위험은 없다. 열정과 생기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모두 열광하고 있다." 1924년, 이탈리아의 유력 인사인 사회주의자 자코모 마테오티의 납치 살해의 배후로 무솔리니가 지목받고 있다고 뉴스에 보도되었을 때, 미국은 그 사실을 간과했다. 미국 관리들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무솔리니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공산화를 저지했으며, 국민들의 지지도도 높았다. 1931년, 미국 국무장관인 헨리 스팀슨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무솔리니가 질서를 확립했다."고 치켜세웠으며, "파시즘이야말로 이탈리아인에게 필요한 이념일지도 모른다."고 연설했다. 스팀슨은 "미국인은 서부 개척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법 시대에는 자경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33년, 루스벨트는 측근에게 "무솔리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 그가 "훌륭한 이탈리아 신사"라고 언급했다. 미국 장군이 독재자 무솔리니가 어린 소녀를 차로 치고도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한 뒤에도 루스벨트는 여전히 무솔리니를 신뢰하며 믿었다. 그렇지만 전쟁 후에 유대인들과 과장으로 인해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7.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 8세와 그의 아내는 히틀러를 지지했다.
1937년,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에드워드 8세와 그의 아내인 심프슨 부인
"세계 역사상 히틀러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를 갖고 있는 독일은 축복 받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히틀러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하기 때문에 영국이 히틀러와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장차 영국의 국왕이 될지도 모르는 에드워드 8세가 공식 석상에서 한 말이다. 에드워드 8세는 영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중에도 히틀러의 독일을 좋아하고 존경스러워 했다. 에드워드 8세(윈저공)는 양위 직후인 1937년, 부인과 함께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공식적인 만남을 가졌었고, 그의 아내인 심프슨 부인 역시, 히틀러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8.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미국 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대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두 기업이 전쟁 비용을 댔고, 독일은 화벤(interssen Gemeinschaft Faben)이라는 대기업이 자금을 대주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화벤은 미국 자본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화벤이라는 화학회사는 막강한 자금력, 조직, 연구팀, 생산시설 등을 지원했는데 이 회사의 주인은 독일인이 아니라 뉴욕에 있는 'J. P. 모건' 등의 국제 금융가였다. 화벤은 2차대전 이후에 세 개의 회사로 나뉘었는데, 그 유명한 바이에르(Bayer), 헥스트(Hoechst), 바스프(BASF)가 그것이다. 이들은 제약과 화학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으며, 생명공학과 UFO 연구, 개발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들이다. 이들은 1924년 미국의 은행가 '찰스 도드'의 이름으로 독일의 화벤에 8억 달러를 투자했고, 1928년에는 미국의 '헨리 포드'가 포드자동차회사의 독일 공장을 화벤과 병합했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은 적국을 원조함으로써 힘을 키워준 다음에 다시 싸웠다는 말이다. 화벤은 1차 대전 때에도 염소가스를 개발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도구로 알려져 있는 '지클론 B' 가스를 생산한 기업이다. (실제로 '지클론 B'는 그 당시 유행이던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의 예방 살균제였다.)
2차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군의 공습이 그렇게 치열했는데도 이 회사의 시설만은 유난히 거의 파손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폭격 대상에서 원래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폭격 제외 대상이 된 이유는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인을 물자 부족으로 판단하여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그에 대비를 하였다. 화벤 사에서는 석탄에서 휘발유룰 추출하는 기술을 마침내 완성했고, 1927년 록펠러(미국의 석유부호, 프리메이슨)의 '스탠다드 오일'사가 화벤과 합자하여 대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전쟁을 치루기에 충분했고, 히틀러는 기름 걱정을 하지 않고, 전쟁에 임할 수가 있었다.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이 대용품으로 전체 휘발유 소비량의 75%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노라하는 첩보원과 공작원들이 있던 연합군 측에서 그 사실을 몰랐을까? 공장의 위치를 몰라서 폭격을 못했을까? 그 치열했던 전쟁과 폭격 속에서 화벤 공장 시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연합군이 공격을 피했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록펠러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또 스탠다드 오일 회사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2천만 달러의 항공기용 휘발유를 공급해주었고, 독일의 탱크 제작사인 오펠 사는 제너를 모터스의 계열사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100개 이상의 미국 회사들이 사업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 나치는 전 인종을 차별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베를린 올림픽 육상최다관왕인 제시 오웬스와 나치 국가대표 선수인 루츠 롱
이는 유대 언론에 의해서 그 당시에 왜곡된 것임이 틀림없다. 멀리뛰기 결승전에서 오웬스의 라이벌이었던 나치 선수 루츠 롱은 멀리뛰기의 비결을 흑인인 오웬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결국 오웬스가 멀리뛰기도 우승해 4관왕이 됐다.
사람들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단지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육상 5관왕이었던 제시 오웬스와 악수하기를 거부했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달랐다. 히틀러는 1936년 8월 2일 메인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육상종목 첫째날 경기를 직접 관람했고 이 날 1896년 올림픽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독일 육상선수 한스 볼케를 로열박스로 초대해 격려했다. 그 날 히틀러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계속 그의 좌석으로 초대해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다음 날인 8월 3일 IOC위원장 베일르-라투어 백작(Comte Baillet-Latour)은 이른 아침 히틀러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일개국가의 원수가 선수들을 자신의 좌석에 초대하여 축하해주는 것은 올림픽 의정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와 같은 일을 삼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히틀러는 자신의 무지를 사과하며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따라서 바로 이 날 첫번째 금메달을 획득한 제시 오웬스를 포함하여 로열박스에 초대되어 독일 총통과 악수를 나눈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히틀러가 의도적으로 흑인 오웬스를 무시했다는 얘기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한편 오웬스는 1970년에 출간된 자서전 The Jesse Owens Story 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VIP석 아래를 지날 때 나를 본 총통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나 역시 손을 흔들어 그에게 화답했다. 독일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총통을 그런 식으로 모략함으로서 일부 언론인들은 그들의 고약한 심성을 드러냈다." 우습게도 미국 언론이 퍼뜨렸던 낭설과 똑같이 행동했던 인물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당시 재선 선거전을 치르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남부 표를 의식하여 올림픽 5관왕으로 금위환향한 오웬스를 백악관에서 맞기를 거부했다. 후일 오웬스는 대중에게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그를 냉대한 사람은 히틀러가 아니라 루즈벨트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오웬스 에피소드는 제3제국의 공개적인 반유태주의 때문에 생겨난 수 많은 흑색선전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적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었던 사실들을 어떻게 보아야만 할 것인가. 이런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국유본론이 유일할 것이다.
인드라는 이 문제를 1달러 지폐로부터 풀어간다.
프리메이슨 혐의 1달러 지폐는 프리메이슨 단원인 루즈벨트와 헨리 월리스의 작품이다. 헌데, 루즈벨트와 헬리 월레스는 차이가 있다.
"수반아님이 인월리에 영향을 받아 작성한 러셀 공사에 관한 글을 우선
Russell & Co
인월리 :
"이버지가 귀족 유태인 계열인 루즈벨트는 어머니 역시 귀족 가문인 델라노 가문인데, 이 델라노 가문 역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이룬 300인 그룹 멤버였다."
1757년 인도에서의 아편 "재배"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가고, .
1773년 중국으로의 아편 "무역"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갑니다.
이전까지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1820~1830년대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파는 아편무역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딘 매더슨 회사>에 중국 아편무역을 프랜차이즈합니다.
여기에 봄베이의 <사순 회사>가 뛰어들어, 두 회사는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 회사는 아편무역 프랜차이즈로 번 돈의 일부를 영국왕실에 바쳤습니다.
이 시기에 <사순 회사>의 하청을 받아 아편무역을 시작한 것이 미국의 <러슬 회사>이고,
<러슬 회사>의 파트너였던 '워런 델라노 2세'가 바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러슬 회사>는 1842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편무역회사로 성장합니다.
<러슬 회사>는 워런 델라노 2세 외에도 파트너가 3명 더 있었습니다.
(1) 설립자 새뮤얼 러슬의 삼촌은 <Skull & Bones>를 설립한 사람이고,
(2) 파트너 조시프 쿨리쥐는 토머스 제퍼슨의 사위이고,
(3) 파트너 워런 델라노 2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이고,
(4) 파트너 애비얼 로우는 컬럼비아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이고,
(5) 파트너 존 클리브 그린은 프린스턴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입니다.
<러슬 회사>와 관련된 인물들만 잘 조사해도 미국의 아편무역 유명인사(?)들이 총출연합니다."
루즈벨트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결된 네덜란드계 유태인이다.
Frederic Adrian Delano (1863 – 1953) was an American railroad president born in Hong Kong, China of the Delano family. He was the uncle of U.S. President Franklin Delano Roosevelt. Frederic Adrian Delano was Chairman of the Committee on the Regional Plan for New York and Its Environs, which released the regional plan for New York on May 27, 1929. He was also a member of the Commercial Club of Chicago which impacted the development of Chicago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He was the first vice-chairman of the Federal Reserve and the National Resources Planning Board.
미국 연방은행의 초대 이사 중 한 명이 루즈벨트의 삼촌, 프레데릭 델라노였다. 예서, 보듯 루즈벨트는 집안 내력이 외가로는 경쟁자인 프리메이슨 계열 회사를 물리친 유태인 사순 가문과 로스차일드로 연결되어 있고, 친가는 유태인이었다는 점이다.
"광기의 산맥과 니콜라스 로에리치
몽환적인 색채로 물든 거대한 산맥. 그 아득한 능선 너머 미지의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은 오싹한 신비로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는 많은 화가들이 언급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거대한 자연을 환상적 색채로 적셔놓은 이 화가의 그림에는 절로 매료될 수 밖에 없더군요.
초자연의 환상을 그려볼까 한때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상상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까마득히 모자라는 것을 깨닫고 접어버렸습니다. 그 뒤로 이 그림을 만나게 되었지요. 작은 사진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음에도 그 색채와 풍광은 바로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 속에 그렸던 장면 바로 그대로였으니 실지로 눈앞에 큰 캔버스를 대면한 이의 감동은 대체 얼마만큼일지 짐작이 되더이다. 러브크래프트가 홀딱 반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다음은 로에리치 미술관에 수록된 그의 작품으로서 러브크래프트의 글과 함께 몇 점만 소개해 올립니다.
Himalayas. 1933
"항해의 마지막 여정은 여러가지 공상을 일으킬 만큼 생생하고도 짜릿했다. 신비를 간직한 거대한 봉우리들이 북쪽에 낮에 걸린 정오의 태양을 배경으로 장관을 이루더니, 자정이 되어도 여전히 남쪽 수평선 위로 낮게 드리워진 태양이 새하얀 눈과 푸르스름한 얼음, 깊은 계곡과 능선에 드문드문 검게 드러난 화강암 위로 아스라한 붉은 빛을 뿜었다. 황량한 산맥 정상에는 간혹 혹독한 남극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요란한 바람소리는 때론 거칠면서도 음역이 대단히 넓은 신비의 피리소리를 연상시겼는데. 인간의 잠재의식을 일깨우는 듯한 섬뜩한 화음을 들으며 나는 왠지 마음이 불안해져 막연한 공포에 떨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언젠가 본 니콜라스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아시아를 기이하게 표현한 그 그림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불안해졌었다. 광인으로 불리는 압둘 알하즈레드의 '네크로노미콘' 에 악마의 전설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 렝 고원의 소름끼치는 장면도 떠올랐다. 나는 공연히 대학 도서관에서 그 끔찍한 책을 들여다보았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 광기의 산맥 P18-19
Star of the Morning. 1932
"가장 높은 산의 능선에는 이상한 형태가 보임. 양쪽 끝면을 정확하게 수직으로 깎은 거대한 벽돌 모양의 돌들이 낮은 성벽처럼 산을 감싸고 있음. 마치 로에리치의 그림에서 깎아지른 산의 능선에 매달린 아시아의 옛 성곽유적같은 모습이라, 멀리서도 대단히 인상적임. 좀 더 가까이 접근 중. 캐롤 생각은 더 작은 벽돌들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것 같다는데 어쩌면 날씨 탓으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음. 수백만년동안 폭풍과 기후에 노출된 때문인 듯, 모서리는 대부분 부서져 둥글게 깎여 있음. 성벽을 이루고 있는 부분 암석들은 특히 윗부분은 능선 자체의 지층보다 색이 흐려보임. 크리스탈 계통의 성분으로 판단됨. 가까이 비행한 결과 수많은 동굴 입구들이 드러났음. 사각형이거나 반원형의 동굴 입구는 이상할 정도로 규칙적임."
- 광기의 산맥 P34-35
Tibetan Stronghold (Basgo). 1932
"산맥 주봉들이 이상한 규칙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은 댄포스였다. 레이크 교수가 전문에서 언급했던 대로 완벽한 입방체 모양이 규칙적으로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시아의 어느 산 정상에 있다는 고대사원의 폐허를 음산하게 그린 로에리치의 그림과 비교했던 그의 설명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상의 세계와는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비로운 산맥의 모양이 정말로 자꾸만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10월에 처음 빅토리아 랜드를 보았을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을, 나는 지금 또 다시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 광기의 산맥 P66
Mount of Five Treasures (Two Worlds).From "Holy Mountains" series. 1933
"그러나 우리는 이미 거대한 별 모양의 폐허를 지나쳐 비행기에 도착해 있었고 공포의 대상도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산맥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었다. 구릉 지대에서 바라본 검은 산등성이는 동쪽 하늘을 배경으로 험악하게만 보였고 또 한번 니콜라스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형체없이 흐물거리는 소름끼치는 존재들이 어쩌면 지독한 악취를 내뿜으며 산맥 지하로 뚫린 수많은 동굴을 통해 제일 꼭대기의 뾰족탑까지 올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악마의 피리소리를 닮은 바람소리가 휘몰아치는 산 정상의 동굴들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몸서리가 쳐졌다. 설상가상으로 산 정상에서 심상치 않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레이크 교수는 그것을 화산활동으로 오인했었지만 어쩌면 우리가 탈출해온 불길한 어둠의 심연에서 뿜어나온 수증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광기의 산맥 P218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Konstantinovich Roerich, 1874-1947)
1874년 러시아 세인트 페테스부르그에서 출생한 니콜라스 콘스타노비치 로에리치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학자이며 사상가입니다. 예술 문화계의 적십자와도 같은 Pax Cultura를 창설하여 활동한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티벳과 히말라야 인디아 등지의 아시아의 풍속과 문화, 풍광에 심취하여 그곳에서 긴 기간 머무르며 글과 풍경을 남겼던 인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화가의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아 소설 광기의 산맥 속에 수 차례 언급합니다. 거대한 산맥 너머 미지의 비밀을 목도한 인물일지도 모르며 그 경이로움을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편지에서 밝히기도 했더군요. 특히 이 작가의 티벳과 히말라야 풍경 연작들로부터 받은 영감이 러브크래프트의 남극 광기의 산맥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Kanchenjunga. 1936
http://blog.yahoo.com/_5COMUCYOEZ3YP6QENETKEAZDM4/articles/523601
다만, 당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혹은 루즈벨트 역시 니콜라이 로에리치 영향을 받아서인지 루즈벨트가 대통령 별장 이름을 '샹그릴라'로 불렀다는 것이다.
예서, 샹그릴라는 1933년 제임스 힐튼은 장편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멀리 동양의 뭇산들속에 영원히 평화롭고 고요하게 있는 신비의 땅을 샹그릴라로 묘사했었다.
중국 윈난성 디칭티베트족자치주에 있는 현(縣)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서 지상에 있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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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윈난성[雲南省] 디칭티베트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에 있는 현(縣)이다. 쿤룬산맥[崑崙山脈] 서쪽 끝에 있다. 원래 지명은 중뎬[中甸]이었으나, 2001년 샹그릴라라고 개명하였다. 샹그릴라는 티베트어(語)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다. 티베트족·후이족·먀오족 등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중 티베트족이 43%이다.
평균 해발고도 3,459m의 고산지대로, 산악지형이 전체 면적의 약 93%이며, 여름 평균 기온이 15℃ 정도이다. 눈 덮인 산, 계곡, 호수, 울창한 숲 등이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고, 동식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에 나오는 지명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로 묘사되었다. 1997년 중국 정부에서 중뎬이 샹그릴라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출처] 샹그릴라 [香格裏拉(향격리랍), 香格里拉, Shangri-La ] | 네이버 백과사전
아라라트산, 수미산처럼 샹그릴라 역시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하늘을 떠도는 움직이는 섬처럼. 이러한 상상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프리메이슨적 종교관이 개입한 것으로 본다.
같은 프리메이슨 단원이라도 루즈벨트와 헨리 월레스 정치관이 달랐다. 헨리 월리스 역시 유태인이었는데, 니콜리아 로에이치를 구루로 여겼으며, 무엇보다 소문난 친소련파였다.
"헨리 A. 월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헨리 어거드 월리스 Henry Agard Wallace 헨리 어거드 월리스(Henry Agard Wallace, 1888년 10월 7일 ~ 1965년 11월 18일)은 미국의 제33대 부통령(1941~1945)이다. 그의 부인은 일로 월리스이다. 그는 또한 농무 장관(1933~1940), 상무 장관(1945~1946)을 지낸 바있다. 아이오와 주 애데어 카운티에서 태어나,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C. 월리스가 농무부 장관이 되었던 1921년에 어린 월리스는 잡지 월리스의 농부(Wallace's Farmer)의 편집자로 근무하였다. 그는 뉴딜 정책과 공정 정책 시기에 가장 논쟁적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농장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설계한 뉴딜 정책의 농업조정법(AAA)의 채택을 주장하였다. 월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전쟁노력에 대한 활동적 행정관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에 그를 우선적 공급, 배당 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핵무기 개발을 이끄는 의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은 민주당 원들이 그의 사회 관념론과 국제론을 싫어했던 이유로 1944년 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되지 못하였다. 1946년에는 소련에 향한 미국의 강경책에 비평한 연설로 트루먼 대통령이 그에게 상무부 장관직을 사임하도록 시켰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반대한 세번째 정당 진보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원예 전문가인 그는 1920년대에 교배종 옥수수를 개발하였고, 대기업 씨앗 회사 파이오니어 하이브레드(Pioneer Hi-bred)사를 설립하였다. 1965년 11월 8일 코네티컷 주 댄버리에서 사망하였다."
지난 인월리에서 이차대전 당시의 국유본 정세에 잠시 설명한 것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와 헨리 윌리스 관계를 짧게 정리하면, 루즈벨트가 헨리 윌리스를 부통령으로 삼은 것은 소련과의 연합 때문이다. 친소파 헨리 윌리스를 부통령으로 삼도록 국유본에서 지시한 것이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헨리 윌리스가 용도폐기되고, 역시 국유본이 지시하여 반소련파 트로먼이 부통령이 된 것이다. 짧게 설명하다보니 당대 노예민주당 권력 구도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달라.
하여간 중요한 건 헨리 윌리스는 부통령에서 물러난 뒤 노예민주당을 나와 진보당으로 대선에 나섰다는 것이다.
"1948년의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당수로 출마하였다. 그 결과 일반투표에서는 115만 표를 얻었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1표도 얻지 못하였다. 그후 진보당과도 결별하고 정치에서 물러났다." [출처] 월리스 [Henry Agard Wallace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때, 노예민주당 트루먼 등 정적들이 헨리 윌리스를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했다. 이때, 헨리 윌리스는 다른 프리메이슨과 달리 당당하게 자신은 프리메이슨이라고 하고, 오히려 프리메이슨을 선거 주요 이슈로 삼기까지 하면서 나갔는데, 결과는 참패였다.
헨리 윌리스는 진보당과도 결별하였는데 이유는?
"처음에 먼슬리 리뷰는 좌파들을 정확한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깃대였다. 이 잡지는, 대중전선(the Popular Front)이라는 정치적 경험을 함께 나누며 살았으며 어려운 때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실천과 이론의 다양한 면을 고요히 숙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사회주의 신념을 계속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이들의 관심과 정치적 신념을 반영했다. 이 독립된 사회주의 무리는 독자, 지지자, 글쓴이의 고갱이를 제공했다. 물론 이들은 이 잡지 성공의 전제조건이었다.
직접적인 배경은, 단지 6개월 전에 불행한 결론을 맺은 헨리 윌리스의 1948년 대통령 선거유세였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밑에서 부통령을 지난 뒤 월리스는 1944년 상무장관으로 지명됐다. 루즈벨트가 숨진 뒤에 해리 트루먼 정부에서도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 갈수록 심해지는 워싱턴의 반공 대외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48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것은 노동과 좌파와 새로운 진보당(Progressive Party) 자유주의자들의 뉴딜 제휴를 되살리는 시도를 뜻했다.
그는 별로 급진적이지도 않았고 특별히 예리한 정치 사상가도 아니지만, 인권 문제에 관해서 단호히 트루먼의 왼쪽으로 갔고 냉전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초기에 대중의 지지는 상대적으로 실질적이었는데, 이는 노동계의 전투적인 좌파와 뉴딜 지지자가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 이들은 루즈벨트의 개혁을 지지하며 그 개혁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부류다. 대신 대통령선거 유세는 "진보주의"의 분열을 특징지었다. 트루먼은 월리스의 국내 관련 공약을 빼앗아가면서도 훨씬 더 분명하게 냉전시대 전사가 됐다. 이는 20세기 중반 주류 자유주의가 주도한 빨갱이 딱지 붙이기를 감싸안는 것의 전형이다. 결국 월리스는 몇몇이 예상한 5백만 내지 1천만표가 아니라 단 100만표를 얻었다.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무리는 월리스가 무소속 단독 후보로 나선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당 진영의 통탄할 표류는 이들에게 양당체제의 대안을 찾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만을 확인시켜줬다. 후버만은 심지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독자정당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9) 편집자들은, 진짜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한 대중전선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강화된 십자군이 대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십자군은 종종 자유주의자들이 고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대공황기와 2차 대전 기간 좌파-자유주의 연합은 냉전 분위기 속에 깨어졌다. 월리스의 참패는 먼슬리 리뷰의 설립자들에게 두겹으로 비극적이었는데,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정치적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지와 후버만은 진보당의 전국 강령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다. 그들은 월리스가 진짜 급진적 공약을 멀리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루먼이 자신의 국내 정책을 전용하게 놔뒀으며 진보당 지지자들이 사회 체제의 변화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지 못했다. 월리스는 단순히 3번째 후보, 좀더 나은 후보였다.(10)
좌파에서는 많은 이가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이 변화를 기대한 것은 1930년대 위대한 운동 덕분에 불붙었으며 2차 대전 이후 파시스트 권력의 종말과 미국 국내의 위대한 파업 물결과 함께 다시 불붙었다.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은 반동이 그렇게 강하고 빠르게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저항을 중단했으나, 많은 이들은 그 망령을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실업자들의 거리 행진,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파업,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 파시즘과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1948년 선거에 대해 비슷한 실망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었다. 1948년에 창간된 내셔널 가디언(The National Guardian)은 이런 환경을 언론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런 분위기는 먼슬리 리뷰에서 더 지적이며 분석적으로 가지쳤다. "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1656427
먼슬리 리뷰나 진보당 구성원 상당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트로츠키주의자였다. 당대 미국 좌파에서 트로츠키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노조를 중심으로 절대적이었다. 해서, 루즈벨트는 2차 대전 전에 스탈린에게 보내는 선물로 트로츠키 암살을 선사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죽였다고 하는데, 인드라는 루즈벨트가 스탈린을 죽였다고 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트로츠키 측에서 부통령이란 대중성 때문에 헨리 윌리스를 지지했을 뿐, 내부적으로 지지한 것이 아니어서 선거가 끝난 후에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헨리 윌리스는 프리메이슨이었고, 친소련파였지만, 좌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헨리 윌리스는 프리메이슨 이상에 심취한 이상주의적 면모가 강했고, 소련의 실상을 외면하면서 소련이 이상주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여겨 높이 평가했으며, 예수가 인도 수행을 했다고 믿었으며, 그 연장선에서 동방 티벳 쯤에서 고대의 비밀을 간직한 '지식'이 있을 것이라 여겨 동경했던 것이다.
반면, 국유본 덕에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 국유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현실주의자였다. 그가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었던 것도 그 이상에 심취한 것이라기보다는 당대 유행을 쫓았을 뿐일 것이다. 당시에는 프리메이슨 풍조를 믿는 척해주어야 지식인 대접을 받던 때이니까. 더군다나 그 자신이 유태인이기에 반유대주의 풍조에서 비켜가기 위해서도 프리메이슨 자격증이 필요했던 셈이다.
하여, 루즈벨트와 헨리 윌리스 간의 관계를 통해 인드라는 당대 국유본의 전략을 유추하는 것이다.
하나, 국유본은 세계대전을 원했다. 전쟁을 하여 이익을 취해 더 큰 경제 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세계경제체제를 만들고, 둘째, 이를 기반으로 각국에 친국유본 정부를 세우고, 셋째, 이들 정부들을 내세워 세계연방정부의 모델인 국제연합을 조직한다.
이를 위해 한 편에서는 유대주의, 시온주의를 부추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 죽어가던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부흥시킨 것이다. 이때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네스터 웹스터였다.
"20세기에 이르러서 네스터 웹스터에 와서야 다시 일루미나티가 거론되기 시작한다. 일루미나티 음모론에서 주목할 인물은 존 로비슨과 네스터 웹스터 두 명이다. 다른 자들 주장이란 대체로 이 둘의 자료에 근거하여 당대의 현안을 엮어서 일루미나티의 특정 부분을 과장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인드라 시각이다. 예외적으로 짐 마스는 현대 음모론을 총정리를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Perhaps her most influental book was Secret societies and subversive movements published in 1921 and reprinted in 1924, 1966, 1970, 1980 and 1989."
네스터 웹스터의 'Secret societies and subversive movements'이 출판되고, 재출판이 된 시기가 흥미롭지 않은가. 인드라는 줄곧 음모론은 국제유태자본에서 기원하고, 국제유태자본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온 바 있다. 화페전쟁, 빌더버그클럽이 랜덤하우스에서 나왔다. '시대정신'모임이 뉴욕에서 성황리에 개최된다^^!
네스터 웹스터 여사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역사학자가 된 것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명을 받았다는 게다. 여사는 전생을 믿는다. 프랑스혁명 때 길로틴에 희생되었다고 믿는다. 여사는 인도, 미얀마, 싱가포르, 일본 등의 지역을 여행하면서 힌두교를 비롯한 동양 컬트 종교에 큰 흥미를 지니게 된다. 그녀에 관한 전기를 쓰는 작가 말에 따르면, 이때 그녀는 기독교 신앙를 버렸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네스터 웹스터 여사는 그때부터 열정적인 글쓰기에 들어간다. 해서, 그녀의 저서가 등장하자 윈스턴 처칠과 같은 이가 특별히 언급을 할 정도였다. 당대 영미권의 화두는 시온의정서다. 이 시기 미국과 영국에서 시온의정서가 소개되었고, 포드가 시온의정서를 언급하기도 했다. 네스터 웹스터의 주장은 시온의정서를 오픈마인드로 보라는 것이다. 하고, 시온의정서와 일루미나티의 관련성을 넌지시 암시하였다. 여사는 또한 한동안 영국 파시즘 정당 멤버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인드라는 여사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면, 페타의 잉그리드 뉴커크가 연상되고는 한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http://en.wikipedia.org/wiki/British_Fascists
모슬리를 중심으로 한 영국 파시즘 연구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og&logNo=40010050538
이전에 인드라가 영국 파시즘의 특징을 언급한 바 있는데, 한 번 더 짧게 요약한다. 영국 파시즘은 대륙 파시즘과 달리 인종적이지 않다. 안티세미티즘, 반유태주의가 아니라는 게다. 해서, 같은 음모론자임에도 영국 출신 존 콜먼도 자신의 저서에 안티세미티즘 색채가 없다.
영국 파시즘이 왜 태동했는가. 정치적으로는 보수당(지주)과 양당체제를 이루던 자유당(금융자본)이 붕괴함에 기인하는 바 크다. 자유당 시절에도 제국주의 시대서부터는 국제유태자본의 세계전략에 따라 금융자본 위주였고, 산업자본이 내놓은 자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해도, 그나마 간신히 정치적 통로를 마련했었는데, 자유당이 무너짐에 따라 산업자본이 갈 길을 잃은 셈이다. 노동당으로 갈 수는 없고, 보수당으로도 가지 못한 이들이 영국 파시즘의 주요 구성원이 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국제유태자본의 세계전략에 의거하여 영국이 금융부문 중심으로 돌아가고 산업부문을 공동화시키자 산업 부문이 침체되기 시작한다. 해서, 19세기 초반의 미국처럼 영국 민족주의가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은 국제유태자본이 영국을 왕따 시켰다고 간주한 것이다. 다만, 그 이름이 국제유태자본이 아니라 일루미나티였던 게다. 그들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가설이다. 이제까지 국제유태자본이 영국을 숙주로 삼아 대영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제 국제유태자본이 러시아혁명을 명예혁명, 청교도혁명처럼 성공시키면서 러시아를 제 2의 영국으로 삼고자 한다. 하여, 이 음모를 막아내어야 한다. 국제유태자본을 영국에 계속 묶어두어야 한다. 이런 시나리오가 되겠다.
지금까지 국제유태자본론은 이차대전 양측을 모두 조종했다고 주장해왔다. 양측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자금 지원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무기도 동원되어야 한다. 네스타 웹스터의 이론은 영국에서 반유태주의를 피하면서 대륙 파시즘을 옹호하는데 유효한 수단을 제공했다. 영국 왕실에서도 파시즘 옹호하는 이가 등장하기도 했다. 역할 분담은 끝났다. 오른손은 우파, 왼손은 좌파. 이제 버블경제 이후 대공황, 대공황에 이은 전쟁 시작!
해서, 잠시 수면 위로 부상했던 지상 최고의 비밀조직인'일루미나티'는 1966년까지 재차 잠수한다. 백 년을 잠수했는데, 오십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때의 화두는 무엇인가.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되었고, 국제유태자본과 카톨릭의 동맹(?)이 이루어져서 로마올림픽이 개최된다. 이때는 예수회와 일루미나티를 겹쳐서 보기가 유행이었던 듯싶다. 또한 국제유태자본이 유포한 반문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목표는 청소년들을 마약으로 찌들게 해서 전쟁도 반대, 노동자운동도 반대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교양서적으로 다시 등장한 네스타 웹스터 여사의 저서. 바이스하우프트의 동양적 신비주의, 어쌔씬, 약물을 강조한다. 또 십년을 잠수했다가 레이건 시대에 한 번 더 등장~! 그리고 부시 시대에 등장^!^ 이때 집중 조명된 것은 시나키즘이며, 해골종단이다. 하고, 근래 '천사와 악마'로 재조명을 받는다? 이유가 있다?" |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83206305
시온의정서로 상징되는 세계유태인협회와 프리메이슨은 상호대립, 상호발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인드라는 이를 당대 국유본 핵심 조직인 300인 위원회의 기획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여, 크롤리의 동방기사단 역시 국유본의 전략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되, 국유본의 끄나풀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독자적인 흐름을 만든 셈이다. 해서, 크롤리는 히틀러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던 것이고.
여기서 당대 프리메이슨이 얼마나 유행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지표 하나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는다.
헨리 루스가 공덕을 많이 쌓은 모양이다.
글을 쓸려고 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 미루어진다.
해서, 이번에 못 쓰면 영영 못 쓸 것이라는 각오로 글을 쓰고 있다.
헨리 루스는 누구인가.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줄 수 있다
http://dovan125.com/140139130950
모두가 국내 정치에만 몰두할 때 헨리 루스는 해외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 보도, 논평하는 '타임지'를 창간했다.
포춘을 만들 때에는 고급스런 디자인과 탐미적인 가격 책정으로 명품 경제지를 만들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읽어낸 것이다.
세계 최초의 사진 잡지, 라이프를 만들어냈다. 문화란 스타일임을 웅변하는 것일까.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 1898년 4월 3일 ~ 1967년 2월 28일)는 미국의 잡지 발행인이자 출판업자이다.
1898년 4월 3일 중국 산둥 성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1912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일 대학교에 재직할 당시 1923년 그의 동창이던 브리턴 헤이든과 함께 당시 미국 주요 신문들과 잡지들이 해외 뉴스를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을 착안해 세계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 보도, 논평하는 뉴스 잡지 《타임》을 창간했다.
《타임》은 창간 5년 만에 흑자를 내고 기존 미국 사회의 신문과 잡지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미국의 격주간 종합 경제지 《포춘》과 1936년 사진 중심의 미국의 대표적 주간 그래프지 《라이프》를 창간했다.
특히 《라이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보도로 큰 빛을 발했고 이후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52년 주부용 잡지 《하우스 앤드 홈》과 195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을 발행했다.
하지만 그는 장로교파에 속하는 공화당원이라 자주 스태프들과 충돌하였고 이후 1972년에 폐간된 《라이프》를 제외하고는 그의 잡지 왕국은 건재했고 타임 워너가 그 뒤를 잇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_%EB%A3%A8%EC%8A%A4
"《포춘》(Fortune)은 미국의 최장수 비즈니스 잡지이다. 1930년 헨리 루스에 의해 세워진 《포춘》은 현재 타임 워너가 소유하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내 놓는 기업 이익 순위표로 유명하다. 《포춘》은 《타임》지의 공동 설립자인 헨리 루스가 1929년 월가 붕괴가 있은 지 4개월 후인, 1930년 2월 설립했다. 원래 루스의 파트너였던 브리턴 헤이든 《포춘》지 설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스는 1929년 10월 15일 헤이든이 숨진 후에 《포춘》지 설립을 추진했다. 루스는 1929년 11월, 타임 주식회사에 "우리는 무작정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경기 침체는 1년씩이나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1] 《포춘》의 첫 번째 판은 1달러로 발매되었는데, 당시 주간 《뉴욕 타임즈》가 5센트에 판매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파격적인 것이었다.[1] 가격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남달랐다. 당시 여러 비즈니스 관련 출판물들은 흑백으로 통계 된 통계 자료정도만 제공했었는데 《포춘》은 11인치 x 14인치에 크림 색 두꺼운 종이, 특수 처리를 통해 인쇄된 멋진 커버로 무장했다.[2] 근거 없는 소문에 따르면, 당시 커버 디자이너였던 T M 클랜드가 가격을 1달러로 정하고 첫 번째 판의 커버 디자인을 한 것은, 아무도 이 잡지의 가격을 얼마로 할지 몰라서였다고 한다. 딱히 가격을 정하기도 전에 1달러로 된 것이 찍혀나갔고, 이는 잘 팔려나갔다. 그래서 《포춘》지 직원들은 이 잡지가 1달러의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처음 판을 받기 위해 구독한 사람은 이미 3만 명이나 되었었다. [2] 1937년에는 구독자의 수가 46만명으로 늘어났다. 경제 대공황동안, 《포춘》 지는 사회적으로 큰 공신력을 얻었다. 이를 통해 후에 타임 워너가 된 루스의 타임/라이프 미디어 그룹에서 주축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포춘》지는 원래 월간지로 발간되었으나 2005년 9월부터는 격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포춘》지는 넓은 분야의 사업, 사업가, 경향, 회사, 현대 비즈니스계를 이끌어 가는 사상등을 다루고 있다. 《포춘》지의 주요 경쟁사는 《포브스》지와 《비즈니스위크》이다. 2000년부터 비즈니스 잡지들의 구독량이 현저하게 줄고 있지만[3], 《포춘》지의 구독자는 83만 3천여 명에서[4] 85만 7천명으로 증가했다.[5] 《포춘》지의 가장 큰 특색은 포춘 미국 500대 기업, 포춘 미국 1000대 기업, 포춘 세계 500대 기업 등의 기업 순위이다. 이같은 순위는 기업의 전체 수익과 사업 성격을 고려해서 매겨진다.
[편집] 한국판
발행사는 한국일보 이며 명칭은 '포춘 코리아'다. 2009년 4월에 창간했으며 월간으로 발행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D%8F%AC%EC%B6%98_(%EC%9E%A1%EC%A7%80)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 1898년 4월 3일 ~ 1967년 2월 28일)는 미국의 잡지 발행인이자 출판업자이다.
1898년 4월 3일 중국 산둥 성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1912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일 대학교에 재직할 당시 1923년 그의 동창이던 브리턴 헤이든과 함께 당시 미국 주요 신문들과 잡지들이 해외 뉴스를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을 착안해 세계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 보도, 논평하는 뉴스 잡지 《타임》을 창간했다.
《타임》은 창간 5년 만에 흑자를 내고 기존 미국 사회의 신문과 잡지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미국의 격주간 종합 경제지 《포춘》과 1936년 사진 중심의 미국의 대표적 주간 그래프지 《라이프》를 창간했다.
특히 《라이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보도로 큰 빛을 발했고 이후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52년 주부용 잡지 《하우스 앤드 홈》과 195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을 발행했다.
하지만 그는 장로교파에 속하는 공화당원이라 자주 스태프들과 충돌하였고 이후 1972년에 폐간된 《라이프》를 제외하고는 그의 잡지 왕국은 건재했고 타임 워너가 그 뒤를 잇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_%EB%A3%A8%EC%8A%A4
"공화당 내 근본보수파 중에는 반공우익단체인 '존 버치 협회'(Jhon Birch Society)가 있습니다. 존 버치는 미군 정보장교로 1930년대에 중국으로 건너가 장개석의 국민당과 함께 활동하던 중에 중국 공산당에게 암살당한 인물로 존 버치 협회는 그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초기 지도자는 반공주의자인 '래리 맥도널드'(Larry Mcdonald)였고, 현재 지도자는 '존 맥매너스'(Jhon Mcmanus)입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존 버치 협회 회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에 의해 공산주의자 색출 광풍인 매카시즘(McCathyism)이 휘몰아 쳤습니다. 그는 언론인과 문화인 뿐 아니라 소련과 중국에 대해 공감을 품고 있던 국무성 및 국방성 내의 진보파와 자유파, 뉴딜주의자인 공무원 및 군인들을 상원 국가안전보장위원회(The Senate Internal Security Committee) 내 소위원회 공청회에 출두시켜 신문을 가했습니다. 또한 하원 비(非)미활동조사위원회(The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y, HUAC) 조사를 통해 자유파 공무원들을 '공산주의자 숙청'(red purge)란 명목 아래 공직에서 추방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존 서비스'(John Service)와 '앨저 히스'(Alger Hiss) 등 국무성 관료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매카시즘은 중국의 문화혁명처럼 비이성적인 정치선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대외강경론이 주류를 이루어 소련과의 불필요한 극한대립과 무한 군비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존 버치 협회의 애국우익들은 유대인들이 세계지배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을 신봉합니다. 이들은 원래 공화당 내 강경 보수세력이자 고립주의자였는데 공화당마저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다며 공화당을 탈당합니다. 1983년 대한항공 KAL 007 편이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는데 이 배행기에 존 버치 협회 지도자인 래리 맥도널드가 탑승했기 때문에 회원들은 글로벌리스트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TIME(타임)과 LIFE(라이프) 지의 창설자 헨리 루스는 1930년대에 일본 군대가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을 열렬히 지원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차이나 로비파'(반공, 타이완 독립지지파)의 주요 인물이 되는데 매파 상원의원 중 일부가 차이나 로비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추천으로 하원의원이 된 헨리의 부인 클레어 부스 루스도 차이나 로비파인데 그녀는 보수파의 여걸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타임워너 CNN도 공화당 내 강경보수세력의 하나인 차이나 로비파인데 이들은 글로벌리스트 언론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그의 주장은 마녀사냥이라고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허나, 조지프 매카시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쪽발찌라시는 물론 조중동 역시 국유본 지시를 받아서인지 이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모두 사실이다. 베노나 프로젝트로 사실인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조지프 매카시가 국제유태자본이 한국전쟁을 기획하고, 십년 뒤에 베트남 전쟁을 기획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도 역사적으로 사실로 입증되었다.
헨리 루스. 타임지를 만들었다. 헨리 루스 역시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목사인 동시에 건축가였던 데서 짐작할 일이다.
무엇보다 숨겨진 인맥이 중요하다.
"http://blog.daum.net/worldonepercent/157
하치키스와 태프트는 거의 같은 시기인 1890년과 1891년에 코네티컷 서부와 중부에 예일대학의 학생들을 공급하는 고등기숙학교로 세워졌다. 두 학교는 엑시터와 앤도버와 같이 치열한 라이벌 관계이며 매년 번갈아가며 운동대회를 치루고 있다. 하치키스에는 자동차 왕 포드가문, 태프트에는 미국 정치에서 케네디와 부시가문에 버금가는 태프트 가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두 학교 모두 아래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아름답고 어마어마한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다.
하치키스 Hotchkiss School
1891년에 총기, 화약, 군사용 자동차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벤저민 하치키스의 미망인 마리아 하치키스Maria Hotchkiss에 의해 설립되었다. "배운 뒤 더 높은 것들을 추구하자. After instruction, let us move on to pursue higher things.'가 교훈이다. 예일대학 총장인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설립을 권유한 인연으로, 초기 졸업생들은 주로 예일대학에 진학했다. 코네티컷 주 서부 레이크빌 시의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 산과 호수를 끼고 있는 수려한 경관 덕분에, 내셔널 콘서반시National Conservancy로부터 '마지막 위대한 지역Last Great Places' 200곳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캠퍼스에는 9홀 골프 코스도 있다.
하치키스는 창립자가 자동차 사업을 했던 연유에서인지 미국의 자동차 왕 포드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에드젤 포드Edsel Ford,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 포드자동차 회장인 클레이 윌리엄 포드Clay Willaim Ford, Jr.가 이곳을 졸업했다. 에드젤은 포드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 1세의 외아들 이었으며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냈다.
<타임>매거진의 공동 창설자 헨리 루스Henry Luce와 브리튼 해든Briton Hadden, 다우 케미컬 창설자인 허버트 다우Herbert Dow, IBM 사장이었던 아서 왓슨Arthur Watson, 모건 스탠리의 창설자인 해롤드 스탠리Harold Stanley가 졸업했다. 헨리 루스는 중국 선교사였던 아버지 헨리 루스Henry Winters Luce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연세대학에 루스 채플을 기증했다. 노벨상 수상자로는 의학상(1935)의 디킨슨 리처드슨Dickinson W. Richardson이 있다.
정계 인물로는 로렌스 저드Lawrence Judd 전 하와이 주지사, 토머스 에디슨의 아들이며 뉴저지 주지사이었던 찰스 에디슨Charles Edison, 알래스카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어니스트 그루닝Ernest Gruening,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이었던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Warren Scranton이 있다. 역대 상무장관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존경을 받았던 말콤 발드리지Malcom Baldridge와 해군장관을 지낸 폴 니체Paul Nitze가 있다.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 홉킨스 국제정치대학원SAIS의 정식 명칭은 폴 니체 국제정치대학원이다. 연방대법원 판사를 지낸 포터 스튜어트Porter Stewart와 1980년대에 법무장관 대행을 했고 연방대법원 판사 인준에서 큰 논쟁을 일으키고 탈락한 로버트 복Robert Bork이 알려진 법조인이다.
하치키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3eZV4MQMif4
하치키스 동영상http://www.hotchkiss.org/admission/video.aspx "
하면, 헨리 루스의 타임지, 헨리 포드의 포드자동차 등의 미래는 어떨까? 과연 누가 지금 장악하고 있을까?
하여, 사이언톨로지와 함께 전개되는 이차대전 이후의 미국 생활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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