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1 : 해골종단과 러셀회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24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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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1 : 해골 종단과 러셀 회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24
1. 해골 종단 (Skull and Bones)
졸업반 학부생 4학년생이 3학년생 중 15명을 선발하여 일년간 활동한다는 해골종단. 오늘날 해골종단이 인기가 있는 것은 순전히 부시 가문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일 부시 가문이 없다면 해골종단도 의미가 없지 않을까?
18세기,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문학 토론 모임은 프리메이슨으로의 연결고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스와 자웅을 겨뤘던 러시아 아나키스트 귀족 바쿠닌도 문학 토론 모임에서 프리메이슨을 만났던 것이다. 이 점에서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나는 그가 김일성을 말할 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내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데모하는 대학생들은 다 빨갱이고 북한으로 보낼 놈들이거나 아니면 무인도에 다 빠뜨려 다 죽여야 할 놈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솔한 판단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곤란했다. 내가 민주, 민중, 민족이라는 삼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이것이 왜 논쟁거리인지 모르기에 당연했다. 게다가 어느 날 제헌의회 깃발을 내리고 반미구국의 전위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니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헌의회는 무엇이고 반미구국은 무엇이냐 차이가 뭐냐 물어보면 그는 자세히 가르쳐 주었지만 뭐가 뭔지 몰랐다. 내가 그럼 제헌의회는 민중 편이고 반미구국은 민족 편이야 그러면 그는 쓴웃음만 지었다. 내가 에이, 모르겠다, 전두환이랑 싸우면 그만이지 라고 말하면 그는 마구 웃으면서 네 말이 맞다, 그것이 바로 애국애족의 순결한 정신이야, 지금은 우유부단함보다 단순한 정열이 필요해,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파스테르나크란 러시아 작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인용문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그런 귀족적, 부르주아적 태도야말로 반민중적이지. 수많은 혁명가들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에 몸을 바칠 때 그런 자식이 살아서 한다는 게 기껏 닥터 지바고 따위나 내놓는 것이니. 내용을 읽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말로는 나 같은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다고 하였다. 철의 규율로 단련된 동지를 모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쳬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꼭 읽어보라 하였다. 레닌도 매우 칭찬한 소설이라면서 말이다. 아, 그는 레닌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레닌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만큼 레닌을 아는 사람도 드문 듯 싶었다. 내가 레닌을 알 지 못 했고 책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지만 그가 레닌과 관련하여 토론을 할 때이면 누구도 그에게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김일성을 말했으니 깜짝 놀랄 일이다. 레닌은 훌륭한 혁명가지만 김일성은? 그는 전위는 적들의 수많은 이념적 공세를 받기 때문에 대중에게 오해될 여지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일 북에서 북한군이 내려오면 우리는 환영해야 할 것이며, 만일 북한군이 우리를 처형한다면 기꺼이 죽어야 할 것이라 말했다.
- 그래도 억울하잖아. 우리는 싸웠는데. 상 받지는 못 할 망정.
- 우리는 자본주의에 오염된 족속이야. 특히 우리는 전위로서 제대로 해내지 못 하는 일도 많았어. 과오가 많아. 나는 김일성 수령을 존경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지. 그의 명령이라면 죽을 각오가 언제든지 되어 있어.
- 그럼, 넌 김일성주의자야?
- 하하. 아니야. 냉정히 말하면. 아니야. 나는 나야. 전위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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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the British invasion of Virginia forced the temporary closure of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and disbandment of the Phi Beta Kappa there early in 1781, Elisha Parmelee, an alumnus of Yale College and Harvard College, passed through Williamsburg and took charters from the Phi Beta Kappa to establish branches of the society at these schools. A second chapter was founded at Yale College in late 1780; a third, at Harvard College in 1781; and a fourth, at Dartmouth College in 1787. From these new chapters, the Phi Beta Kappa evolved from a fraternity with principally academic and some social purposes to an entirely honorary organization recognizing scholastic achievement. While the Phi Beta Kappa developed some of the characteristics which still distinguish Greek-letter fraternities, it was left to other students to fill the natural human need for fellowship with kindred students by extension of fraternity to a purely social context. Further chapters appeared at Union College in 1817, Bowdoin College in 1825, and Brown University in 1830. The original chapter at William and Mary was re-established. In 1831, the Harvard chapter publicly disclosed the fraternity's secrets during a period of strong anti-Masonic sentiment.
(이하 영문자료 출처는 위키피디아)
파이베타카파는 1776년 5월, 버지니아주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서 시작하여 1780년 예일대학에서 두번째, 1781년 하버드대학에서 세번째 조직을 만들었다.
파이베타카파는 다트머스, 스탠퍼드 등 미국 270여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 너희가 중앙은행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프리메이슨을 공격하겠다.
1826년에 이르면, 미국 메이슨은 오만 명에 달했다. 당대 프리메이슨이 일당 백 실력이었던 만큼 수천 명 수준도 미국을 장악할 수준인데, 오만 명이면 대단한 것이다.
이 시기 메이슨이었던 윌리엄 모건 대위가 프리메이슨의 해악을 담은 책을 출판하려 하다 죽는다. 그는 죽은 후 1827년 그가 쓴 "30년 동안 헌신했던 한 형제가 쓴 메이슨의 실상"이란 책이 유작으로 출간한다. 1829년 여론의 압력을 받은 뉴욕 주 상원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조사를 단행해 "프리메이슨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고, 언론도 프리메이슨의 위세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프리메이슨이었던 잭슨 대통령에 대항해 위드가 중심이 되어 반메이슨 정당이 들어선다. 이들은 1832년 선거에서 반 메이슨 정당의 후보들은 각 주와 지방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잭슨을 물러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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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미국 사회에서 프리메이슨 폭로는 꽤 충격적이었다.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의 대통령 당선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1830년대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프리메이슨 조직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시기 카톨릭 로마교황청에 맞서기 위해 기독교회와 프리메이슨에 동시에 몸담은 이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반메이슨 운동이 한창이던 1831년, 하버드 파이베타카파 비밀조직이 노출되면서 논란은 미국 대학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Skull and Bones was founded in 1832 after a dispute among Yale's debating societies, Linonia, Brothers in Unity, and the Calliopean Society, over that season's Phi Beta Kappa awards; its original name was "the Order of Skull and Bones."[1][3]
해골종단은 당대 시대정신 속에서 탄생한 셈이다.
"역대 43명의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학부를 기준으로 할 때 하버드대 출신이 5명으로 가장 많았다. 존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 테오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하버드대 출신이다. 예일대는 윌리엄 태프트, 조지 H 부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등 3명을 배출했다. 윌리엄 앤드 매리대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타일러 전 대통령 등 3명을 배출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2&aid=0002173463&sid1=001
당시 예일대학에는 Linonia, Brothers in Unity, Calliopean Society 등의 문학 토론 모임들이 있었다. 이들 문학 토론 모임들이 파이베타카파 선정 발표 후 논쟁을 거듭한 끝에 해골종단을 탄생시켰다. 파이베타카파가 논란이 되니 PBK와 구별되는 독립된 조직을 만들자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문학 토론 모임들이 해골종단이 만들어진 이후에 즉시 해산한 것이 아니다.
By the 1830s the campus literary societies, Linonia, Brothers in Unity, and Calliope, were losing prominence. Calliope folded in 1853 and the others shut down after the American Civil War.[10] Calliope, Linonia, and Brothers in Unity existed respectively: 1819-1853, 1768–1878, and 1735-1868.[11]
Phi Beta Kappa was inactive 1871 to 1884 at Yale.[12] In the 1820s Anti-Masonic agitation acros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rompted PBK to examine the role of secrecy in its proceedings. Secrecy was soon shelved at the Yale chapter.[13] Associated with PBK's national reorganization in 1881, secrecy disappeared as a signature among all chapters, quelling rivalry with collegiate fraternities, clubs and societies.[14] PBK exists today, without any secrecy, as an academic honor society.
해골종단이 성립한 이후에도 친메이슨적 문학토론 조직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허나, 이후 위드를 중심으로 한 반메이슨 세력이 정권을 잡자 친메이슨류 문학토론 조직들이 문을 닫았으며, 특히 남북전쟁 이후 대부분의 조직들이 폐관한다.
The only chapter of Skull and Bones created outside Yale was a chapter at Wesleyan University in 1870. That chapter, the Beta of Skull & Bones, became independent in 1872 in a dispute over control over creating additional chapters; the Beta Chapter reconstituted itself as Theta Nu Epsilon.[4][5][6]
하면, 해골종단이 파이베타카파를 대체할 수 있었나? 그렇지는 않다. 해골종단이 예일대학을 제외하고 분회를 만든 것이 기껏해야 Wesleyan University 이다. 허나, 이 분회조차 나중에는 독립하고 만다.
결국 PBK이든, 해골종단이든 1870년대~1880년대를 통과하면서 비밀조직 성향을 버리고, '가십걸'이나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등에서 볼 수 있는 돈질 좀 자랑하는 학내 사교 조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 러셀 트러스트 (Russell Trust)
William Huntington Russell (12 August 1809 – 19 May 1885) was an American businessman, educator, and politician. He was the founder of the Yale University secret society Skull and Bones.[1]:82 He was a descendant of several old New England families, including those of Pierpont, Hooker, Willett, Bingham, and Russell. His ancestor Rev. Noadiah Russell was a founder and original trustee of Yale College.[2]
The Russell Trust Association is the business name for the New Haven, Connecticut, based Skull and Bones society, incorporated in 1856.[1] The Russell Trust was incorporated by William Huntington Russell as its president, and Daniel Coit Gilman as its first treasurer. Gilman later went on to becom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and Johns Hopkins University before leaving to become the first president of the Carnegie Foundation. Gilman also served as one of the first board members of the Russell Sage Foundation.
" Russell & Co
인월리 :
"이버지가 귀족 유태인 계열인 루즈벨트는 어머니 역시 귀족 가문인 델라노 가문인데, 이 델라노 가문 역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이룬 300인 그룹 멤버였다."
1757년 인도에서의 아편 "재배"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가고, .
1773년 중국으로의 아편 "무역"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갑니다.
이전까지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1820~1830년대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파는 아편무역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딘 매더슨 회사>에 중국 아편무역을 프랜차이즈합니다.
여기에 봄베이의 <사순 회사>가 뛰어들어, 두 회사는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 회사는 아편무역 프랜차이즈로 번 돈의 일부를 영국왕실에 바쳤습니다.
이 시기에 <사순 회사>의 하청을 받아 아편무역을 시작한 것이 미국의 <러슬 회사>이고,
<러슬 회사>의 파트너였던 '워런 델라노 2세'가 바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러슬 회사>는 1842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편무역회사로 성장합니다.
<러슬 회사>는 워런 델라노 2세 외에도 파트너가 3명 더 있었습니다.
(1) 설립자 새뮤얼 러슬의 삼촌은 <Skull & Bones>를 설립한 사람이고,
(2) 파트너 조시프 쿨리쥐는 토머스 제퍼슨의 사위이고,
(3) 파트너 워런 델라노 2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이고,
(4) 파트너 애비얼 로우는 컬럼비아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이고,
(5) 파트너 존 클리브 그린은 프린스턴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입니다.
<러슬 회사>와 관련된 인물들만 잘 조사해도 미국의 아편무역 유명인사(?)들이 총출연합니다.
- 수반아님 글 중에서 "
위키피디아 등에서는 해골종단과 러셀회사와의 관련을 애매하게 소개하고 있다. 반면, 수반아님의 소개는 일목요연하다.
음모론에서는 러셀회사 배후에 해골종단이 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허나, 수반아님 글에 따르면, 새뮤얼 러셀은 해골종단이 탄생하던 1832년 이전인 1824년에 중국 광동에서 러셀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러셀 회사는 1839년부터 로스차일드 계열 사순을 위해 일하며, 1842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편회사로 성장한다. 예서, 인드라가 강조한 바 있다.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등이 아편농장을 경영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의 아편 재배 및 무역 거래는 담배 농사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다. 국유본 지시로 쪽발 정일이 씹쌕희가 북한에서 담배공장을 만들었었다? 이러면, 아편공장이 생겼다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쪽발 일성, 쪽발 정일, 쪽발 정은의 피를 이어받은 쪽바리색희들을 몰살시켜 독립운동가들의 원혼을 달래자! 칠천만 인민의 혁명투쟁으로 인민의 원쑤, 개씨발색희 쪽발정은과 그 일족을 똥침으로 똥구녕을 허벌나게 만든 뒤에 모조리 총살시키자. 천백배로 복수하자. 지하에서 조만식 선생, 김구 선생, 김두봉 선생 등이 미소짓는 모습이 선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러셀 가문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이주한 최초 가문 중 하나로 미국에서 유서깊은 가문이다. 허나, 이들이 청교도로 아무리 독실하면 무엇하나. 중요한 건 '먹고사니즘'이다. 뉴잉글랜드 지역은 남부 버지니아주와 달리 무역에 의존해야 했는데, 당대 무역에서 가장 돈되는 사업은 역시 노예무역과 아편무역이었다.
영국에서 출항한 배가 영국산 사치품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판 뒤 대금으로 흑인 노예를 잔뜩 사서 카리브해로 와서 쿠바나 남부 미국에 판다. 그 대금으로 미국 농산물을 잔뜩 산 뒤 영국으로 돌아간다. 남부 버지니아주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뉴잉글랜드 업자들이 중계하는 시스템이었던 게다.
예서, 아편 무역이 추가한 것이다. 1837년 영국의 중국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자 미국 상인의 아편 밀수 및 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로스차일드의 사순과 러셀회사가 손을 잡은 셈이다.
"넷,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안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57년 세포이항쟁 결과로 문을 닫게 된다. 헌데, 신묘하게도 1857년 공황이 발생한다. 이뿐만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본격적으로 수에즈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이 모든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74년에 가서야 문을 닫지만, 그 이전까지 지리한 청산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두 가지 대안을 마련했다. 투자은행 격인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와 상업은행 격인 'HSBC 은행'의 출범. 1870년대말에 이 모든 기획을 주도했던 영국 하원의원이자 전쟁의 신, 라이오넬 로스차일드가 숨을 거둔다. 하고, 1880년대부터 상원의원 내티 로스차일드의 시대가 시작한다. 내티 로스차일드하면 타이타닉이 유명하다. 타이타닉이 가라앉자 보험회사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이때, 로스차일드 은행만 무사했다. 내티가 보험 사업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내티에게 비결을 묻자 내티는 말했다. "그렇게 큰 배가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았다."
"잠세트지 타타가 1868년 봄베이(現뭄바이)에 설립한 무역회사에서 출발하여, 印度가영국領이 된 1877년 엠프레스밀(Empress Mill)이라는 綿방적공장을 세우면서 印度산업화의 시발점이 된 상징적인 기업. 1914년 G.D. 비를라(Birla)가 창업한 아디티야비를라그룹, 1958년 디루바니 암바니(Dhirubhai Ambani)가 창업한 릴라이언스그룹과 함께 인도의 3大그룹에 속하며,3大그룹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 ."
http://www.kmobile.co.kr/k_mnews/news/news_view.asp?tableid=IT&idx=250325
하면, 왜 국유본은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가 필요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는 당대 로스차일드의 치밀한 각본 하에서 흑자 부도한 셈이다. 해서, 부를 축적한 주주들을 위한 대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안은 세포이 항쟁이 끝난 후 십년 동안 세밀하게 시나리오가 짜여졌고, 그후에야 비로소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에즈 운하가 영국 소유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 회사가 최초로 투자한 국가가 다름 아닌 일본이다. 일본 근대화는 국유본 덕분이다. 99% 국유본 덕분에 근대화가 되었다. 1% 정도만이 일본인의 야동(AV) 덕분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94744015
"상당수 음모론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수에즈이다. 한마디로 유태인 영국 총리 디즈데일리 총리와 로스차일드간의 밀담을 통해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접수한다는 내용이다. 허나, 앞뒤 생략하고, 이런 대목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음모론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하고, 이런 이야기는 다른 음모론에서 듣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벤자민 디스데일리(Benjamin Disraeli). 그의 성, 디스데일리에서 앞의 D와 뒤의 I를 빼면 이스라엘이다^^!
1820년대이면 이미 유럽에서는 로스차일드 형제들이 귀족 지위를 취득할 때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전과 달리 유태인들도 이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단지 로스차일드 가문의 경사가 아니었다. 반면 영국 혁명에서 보듯 그 누구보다 유태인 덕을 보았던 영국에서는 오히려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치 입문이 1850년대에야 이루어졌고, 귀족 작위는 1870년대에 가야 이루어진다.
예서, 프리메이슨이니 일루미나티이니 하는 것이 유용했던 이유를 짚어본다. 하나, 귀족 작위는 장자나 그에 합당한 이들에게만 세습되었다. 그외의 자손들은 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로 인해 당대 교황 대 국왕의 권력투쟁 와중에서 국왕 편을 들어 출세를 도모한 귀족들이 많았다. 둘, 로만 카톨릭에 대항하는 개신교 종교세력은 유태인 만큼이나 정치 세력을 원했던 바,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프리메이슨이다. 다른 한편, 영국과 달리 역사적 조건이 상이한 독일에서 프리메이슨의 변형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일루미나티이다. 셋, 허나, 이들은 모두 유태인들이 공직 진출을 제한하고 있을 때의 산물이다. 해서, 유태인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다시 말해, 유태인들이 더 이상 얼굴마담을 필요치 않자 이들 조직은 급속도로 쇠퇴했다. 두 조직이 사실상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을 때, 유태인들이 세를 확장하고, 이 세를 바탕으로 당대 영국 귀족들과의 합작 형태로 만든 것이 19세기 말엽 300인위원회이다. 하고, 이를 완벽하게 국유본적 조직으로 만든 것이 빅터 로스차일드이며, 빌더버그가 그 실체이다.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패한 이후 실질 권력은 빌더버그에서 삼각위원회로 넘어갔다. 오늘날에는 CGI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면,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왜 수에즈는 결국 로스차일드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일까. 국유본은 처음부터 수에즈에 개입할 수 없었다. 수에즈 이권은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자본과 프랑스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국유본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는 수법을 잠깐 소개하자. 수에즈 운하는 공사가 계속 지체되었는데 이유는 뻔했다. 국유본의 사주를 받아 국유본 언론이 운하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한다 어쩐다 하고 비판을 해대었다. 공사가 지지부진하니 이를 통해서 수에즈 운하에 투자한 프랑스 자본을 크게 취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유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임을 잘 간파해야 한다. 또한 영국에서는 수에즈에 관심을 지니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영국이 잘 나가는 이유는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수에즈에 관심을 기울인다 함은 대서양 루트 대신 이전의 인도양 루트로 되돌아가니 세계 패권이 영국에서 다시 이태리, 혹은 프랑스로 되돌아가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이다. 헌데, 이는 국유본이 기획적으로 인도에서 사건을 일으키면서 해소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인도에서 국유본 기획의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카드로 수에즈가 부각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집트 현지 통치 세력을 장악하는 일이다. 이는 사이드 파샤 때에 이루어졌다. 하면, 왜 사이드 파샤는 수에즈 운하를 찬성하였을까. 여기에는 크림전쟁을 비롯한 이해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국유본이 사태를 국지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 문제를 해소하고, 정치 문제를 완결한 뒤에야 디즈데일리와 로스차일드가 만났던 것이다. 헌데, 대체적인 음모론은 이러한 과정을 무시한다. 그저 특정 사건에만 매몰되어 있고, 이를 역사적인 흐름으로 펼치지 못하는 것이 그간 음모론의 결정적인 약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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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러셀에 힘을 실어준 이는 대니얼 길먼이다.
http://blog.naver.com/maria1483/90122429283
특히 음모론자 멀린스가 주목하는 이는 대니얼 길먼이다. 이유는 대니얼 길먼이 미국 교육계를 지배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허나, 인드라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음모론자 멀린스는 국유본 간첩이다. 음모론으로 책낸 넘들은 모조리 국유본 간첩이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기 때문이다.
국유본이 유포한 것으로 보이는 인터넷 음모론에 따르면, 윌리엄 러셀이 1850년대에 독일을 여행할 때, 독일 프리메이슨 조직을 본따 러셀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인드라가 분석했을 때, 대니얼 길먼 때문인 듯싶다.
"미국의 교육가. 1852년 예일대학교 졸업, 주(駐)러시아 대사관 직원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였다. 1854∼1855년 베를린에 유학, 귀국 후 17년 간 예일대학교에서 있었고, 1872∼1875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분교의 학장, 1875∼1901년 존스홉킨스대학교 총장직에 있었다. 그 후 1904년까지 카네기재단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출처] 대니얼 길먼 [Daniel Coit Gilman ] | 네이버 백과사전
대니얼 길먼은 약 2년간 베를린에서 유학했다. 이때, 대니얼 길먼은 독일 교육체제에 큰 감명을 받는다. 해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 미국에 독일식 교육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아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하면, 대니언 길먼은 구체적으로 독일 교육 어디에 감명을 받았나. 당시 독일 대학 체제는 학술연구 중심이었다. 해서, 학부 중심이 아니라 대학원 중심, 일반 교양 교육이 아니라 전문 학술 교육 체제였던 것이다.
해서, 대니얼 길먼은 미국 교육체제를 혁신적으로 뒤바꿀 기획을 했던 것이다. 문제는 자금. 이 자금을 러셀 회사에서 구했던 것이다. 해서, 회사 이름은 당근 물주 이름으로 했던 것이다. 이건 상식이지 않는가. 무릇 회사 이름이란 물주 이름으로 해야 탈이 안 난다.
여기에 그 어떤 음모론이 개입할 수 있는가. 없다. 있다면, 니 애비가 을사오적급 쪽발이 색희일 가능성이 크다.
인드라는 애초에 멀린스 같은 병쉰색희를 불신했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해골종단도 다른 비밀 사교클럽처럼 맛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일대 해골종단 출신 대니얼 길먼이 활약하니 해골종단 명맥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인 것이다.
예서, 여러분은 조직과 리더라는 조직의 생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99.9%의 조직은 리더에 의해 좌우된다. 해서, 대우 김우중이 말했지 않던가. 사회주의 체제란 지도자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나뉜다고 말이다.
그 나머지 0.1%만이 시스템에 의해 좌우되는데, 이런 이유로 조선과 일본이 국유본의 연구대상인 것이다. 중국만 해도 왕조가 평균 삼십년마다 바뀌고, 이는 유럽도 예외가 아닌데, 조선과 일본 왕조는 수백년 이상 권력을 유지하니까 관심인 게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19세기 후반, 예일대학의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해골종단 역시 점차 별 볼 일이 없게 되었다. 초기에는 세상을 열정적으로 바꿀 기획으로 넘쳐났지만 현실에서 막히자 관념과 실천이 분리되면서 해골종단은 오로지 전통적인 의미 이외에는 없는 조직으로 쇠퇴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80년대에 접어들어 새롭게 열정을 가져보자고 제 3의 그룹이 출범했지만, 스타 부재, 리더십 부재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일대는 완전한 기숙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학부생간 유대를 꾀하였으나 효과는 지지부진이었다.
1950년대까지 유지되던 예일대 신화는 이후 무너졌다. 오늘날 부시 가문으로 발생한 해골종단 예일대 신화란 흡사 프리메이슨 노이즈 마케팅과 같다고 할 것이다. 별 볼 일이 없는데, 볼 일이 있는 것인양 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단언한다.
해골종단?
실체는 없다.
오늘날 해골종단 믿고 예일대 가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한다.
조직에 의존하지 마라.
진정한 리더란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만든다.
인물이 없으면
로스차일드이든, 록펠러이든
조직은 멸문하기 마련이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만일 부시 가문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해골종단에 대해 단 1그램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가?
추신 :
증산도 사이비 쉬발넘들 각을 떠서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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