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11 12:37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781675
15.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16. 엘람왕국이 중요한 이유 세 가지
17. 수메르 문화에 심취한 아리안은 히타이트와 미탄니를 통해 수메르 신화를 현지화한다.
18. 베다의 초기 경전, 리그 베다에서 바루나와 인드라
19. 페르시아 키루스 2세는 모세신화와 조로아스터를 융합한 신화를 창조한다.
오른쪽 인물이 엔릴
이슈타르
바루나
15.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원주지(原住地)는 아르메니아였으나 인류학상의 계통은 불명(不明)하며, BC 3000년대부터 북(北)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였다. BC 15세기에는 미탄니왕국(王國)을 세워, 동쪽은 자그로스산맥에서 서쪽은 시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최성기에는 아시리아를 지배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으며, 왕녀(王女)를 투트모세 4세의 후궁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히타이트제국(帝國)과의 싸움에 지자, 이에 편승해서 독립한 아시리아에 의해서 BC 13세기에 멸망하였다. 후르리인의 문화는 그 후에도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후르리인 [─人, Hurrian ] | 네이버 백과사전
미탄니 제국은 후르리인, 후리인(오늘날 국가없는 민족으로서는 가장 많은 삼천만 명인 쿠르트족)과 아리안이 함께 만든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예서, 아리안이 최상층 지배계급을 형성했다고 한다. 해서, 그들의 언어나 문화는 산크리스트어와 많은 관련이 있고, 그들 자신도 인도 아리안족과 같은 족속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동시에 선진 수메르 문명을 아리안족에게 알리는 택배 기사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신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국가간 조약에서 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보증인 게다. 오늘날보다 보증 관계가 더 확실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근대 인디언 문화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당대 신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으므로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미인 게다.
이때, 일각의 해석에서는 미트라를 해의 신, 바루나를 달의 신으로 여기는데, 아니다. 굳이 해의 신을 말한다면 바루나가 해의 신이다.
오늘날의 관념으로 생각하니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수메르만 보더라도 해와 달과 별의 신은 그저 그런 신이었다. 즉, 엔릴과 엔키보다 하위의 낮은 지위의 신이었을 뿐이다. 단지 밤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으니 그에 맞는 신을 지정했을 뿐인 게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달의 신, 해의 신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수메르가 최초로 달의 신을 최고신으로 만든다. 또한, 이집트가 최초로 해의 신을 최고신으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아예 유일신으로 만들었다.
하면, 인드라는 충분히 설명하였고, 쌍둥이신은 논외로 하고, 바루나와 미트라를 설명하도록 하자.
"바루나는 베다(Veda) 신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신. 언제나 미트라(Mithra) 신과 함께 불린다. 천공(天空)의 신이라 하며 그들의 눈이 태양이라고 한다. 그는 신들의 지배자요, 우주 질서의 수호자로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아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조물주이면서 도의신(道義神)이다. 그러나 브라흐마나(Brahmana) 시대에 와서는 창조주의 성격이 프라자파티(Prajapati)에게 옮겨지고 그는 물(水)의 신(神)으로 격하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1026
http://blog.naver.com/sukhh/20139842486
사법신, 혹은 율법신이자 계약의 신인 바루나는 전쟁 시에는 원반을 던져 상대를 죽이곤 했다. 원반은 태양을 의미하는 동시에 무기였다.
이 바루나 신이 후일 페르시아에서 변형을 거쳐 아후라 마즈다 신이 되는 것이다.
http://cafe.naver.com/grace119/1262
충성의 신, 미트라는 신들의 왕이요, 마법사 격인 바루나를 호위하는 신이었던 듯싶다. 게임하는 이들은 잘 알 것이다. 마법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 동안 몸빵이 되어줄 전사가 필요하다. 그것이 미트라다.
다시 말해, 미트라는 호위 무사, 호위 대장인 게다. 오늘날로 치면, 수도경비사령관이나 경호실장인 게다. 해서, 낮이건, 밤이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고, 항상 왕 또는 마법사 옆을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인드라는?
인드라는 전쟁신이다. 물론 처음부터 전쟁신이 아니었다.
"인드라(Indra)는 처음부터 전쟁의 신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폭풍의 신으로 간주되다가 후에 아리안 족이 들어와 기존 종교와 통합되면서 인드라는 전쟁신의 경향을 가지게 된다."
"영웅들이 자신의 가장 좋은 말을 타고 서로 싸우다가 포위되었을 때, 불러 도움을 구하는 존재가 바로 나이다. 아주 관대한 나 인드라는 전쟁터를 뒤흔든다. 나 인드라는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그 어느 누구도 나의 힘을 막아내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을 내가 하였다. 어떤 신도 나를 막지는 못한다. 나는 무적이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카스트의 네 가지 계급 중에 두 번째인 크샤트리아 계급의 신격화다. 후에는 하늘의 신인 드야우스(Dyaus)를 대신하여 하늘 신[천신(天神)] 역을 떠맡았기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의미를 반영한 제석천(帝釋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인드라는 자신의 아버지를 밟아 가루로 만들었다. 이런 패륜아적 파렴치한 행위는 낡고 쇠약해지는 우주의 질서를 재편한다는 의미이며, 이런 과정에서는 (설혹 자신의 부모라 할지라도) 예외란 없음을 상징한다. 아래로는 자신의 늙은 부모를 추방하고 패권을 잡는 동물 세계를 포함하여, 위로는 우주에서 별들의 파괴처럼 진화하며 발전하는 존재들의 세대교체의 제식(祭式)인 셈이다. 인드라에게는 막강한 무기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지상에 내리꽂히는 천둥번개로 바지람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금강저, 바즈라(Vajra)라고 하며, 티베트 불교 문화권에서는 도르제(Dorje)라는 이름을 갖는다."
http://www.himal.kr/1-himal/2004Garhwal/garhwal-015.htm
전쟁하면 최일선에서 싸우는 야전사령관이다. 아두를 구하기 위해 조조 진영으로 들어가 대군과 맞싸우며 적 장수 50명을 베고 돌아오는 조자룡이다.
"힘은 산을 뽑을 정도이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정도로 기력이 雄大(웅대)함.
유래 및 용례
≪史記(사기)≫ 項羽紀(항우기)에 나오는 말이다. 楚(초)나라 項羽(항우)가 漢(한)나라 沛公(패공) 劉邦(유방)을 맞아 垓下(해하)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던 날 군대는 적고 먹을 것마저 떨어져 四面楚歌(사면초가)에 몰렸는데 자신의 여자 虞美人(우미인)과 술을 한 잔 마시며 감개가 무량해서 시를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세상을 덮었다는데 때가 불리하니 騅(추)마저 가지 않누나. 추마저 가지 않으니 난들 어찌하리 虞(우)야, 우야 너를 어찌하리. 노래를 마치고 우미인과 눈물을 흘리다가 우미인에게, "너는 얼굴이 아름다우니 잘만 하면 沛公(패공)의 사랑을 받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미인은 자살을 하고 만다. 위의 시를 '虞兮歌(우혜가)'라고 한다. 騅(추)는 항우의 말인 오추마이다."
역발산기개세 항우이다.
알렉산더요, 한니발이요, 시저(카이사르)요, 징기스칸이요, 광개토대왕이요, 이순신이다.
해서, 인드라와 미트라는 은근히 경쟁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는 돌격대장이요, 다른 하나는 수비대장이니까.
이는 역사적으로도 구도가 잡힌다. 인드라는 아리안이 인도로 진입했을 때 부각된 신이다. 반면, 미트라는?
아케네메네스 왕조에서 미트라가 부각되었다고 하나 실제로 미트라가 뜬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다음이다.
즉, 알렉산더 통치기에는 조로아스터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이후 파르티아 왕국 초기에 미트라 신앙이 크게 퍼진다.
왜이겠는가?
미트라가 수비대장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보다 자세하게 후술하겠다. 로마 군인이 왜 미트라에 푹 빠졌는지를 설명하겠다.
중요한 건, 아케네메네스 왕조에서 미트라는 별 볼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왜인가?
많은 이들이 아리안이 이란의 토착민으로 잘 못 알고 있다. 아니다. 아리안은 인도를 침략했듯 이란 역시 침략했던 것이다.
하면, 이곳에는 원래 누가 살았나?
엘람인이 살았다.
16. 엘람왕국이 중요한 이유 세 가지
"엘람을 이란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짙지만 엘람시대의 언어와 이란의 언어는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두 언어가 엘라모-드라비디안(Elamo-dravidian)에 속한다. BC 4000년대 말부터 3000년대 초까지 이란 고원에는 메소포타미아식의 도시문명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저지대인 쿠제스탄에서는 엘람이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다. 엘람에는 다양한 지역을 통합시킬 수 있는 일원화된 정치권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본 권력구조는 1명의 군주가 여러 공국의 통치자들을 지배하는 형태를 취했다. 군주의 바로 아래 동생이 부왕이 되었고, 아들은 수사(Susa) 지역의 통치자가 되어 3명이 함께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엘람이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던 BC 2000년대에 만들어진 사원 유적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독자적인 구조의 지구라트가 수사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 시기 엘람의 조각품 가운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수사의 나피라수 왕후의 실물크기 청동상은 놀랄 만한 걸작품으로 여겨진다. "
[출처] 엘람왕국 [Elamite Dynasty ] | 네이버 백과사전
엘람인은 페르시아의 드라비다인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 왕조사 연표입니다
주요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
메디아 제국(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
파르티아 제국 (250 BC–AD 226)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226년–651년)
이슬람 제국 (650–1037)
셀주크 제국(투르크) (1037–1219)
몽골 제국(티무르제국) 점령 시대(1219–1500)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팔레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그래서일까. 어떤 연표에서는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허나, 이란땅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워 오래도록 통치했던 족속인 게다. 어찌하여, 알렉산더 점령시대를 기록하면서도 엘람왕국 시대를 쏙 빼놓을까.
이는 오늘날 이란인들이 자신들은 마치 한번도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개쑈를 벌이고자 하는 것일까.
인드라는 강조한다. 이란인이 오늘날 이란인인 건 엘람왕국을 침략해서 식민지화했기 때문이다.
엘람왕국은 세 가지 이유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일. 엘람인은 이웃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끊임없이 교류한 덕분에 일찌기 문명화한 족속이다.
이. 엘람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인도, 이란을 잇는 교통로였다.
"엘람 시대는 이란 고원에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만나이 왕국(Mannaeans kingdom)과 자볼의 샤르에 소흐타(Shahr-i Sokhta), "불타버린 도시") 및 최근에 발견한 지로프트 문명과 같은 더 오래된 문명이 있음에도 이란 역사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엘람어는 이란어와 그다지 관련이 없으나, 크게 보아 두 언어는 모두 엘람드라비다어(Elamo-dravidian)에 속한다. 오늘날 이란의 주 가운데 하나인 "일람(Ilam)"의 이름이 "엘람"에서 유래하였다…
신 엘람 2기(신 엘람 후기)는 이란인이 이란 고원으로 옮겨간 대이주로 특징지어진다. 기원전 800년 무렵에 시작한 아시리아의 근원은 "강한 메디아인" 곧 활동적인 메디아인이고, 그들을 가리키는 적당한 이름(파르티아인, 사가르티아인(Sagartian), 마르지아인(Margian), 박트리아인, 소그디아나인 들)으로 뒷날 역사에 등장하는 "멀리 떨어진 메디아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압박하는 부족 가운데 하나가 파르수(Parsu)이다. 파르수는 기원전 844년에 처음 기록에 보이는데, 우르미아 호 남동쪽 바닷가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파르수는 이 시기의 끝에 엘람인의 원래 살던 곳인 이란 고원의 이름이 페르시아 본래의 이름으로 바뀌는 원인이 되다."
삼. 성경에서는 고레스왕인, 후일 아케네메네스 왕조를 여는 키로스 2세, 혹은 키로스 대왕이 엘람을 다스리던 총독 출신인 게다.
투란인 영역
17. 수메르 문화에 심취한 아리안은 히타이트와 미탄니를 통해 수메르 신화를 현지화한다.
"아리아라는 말은 '고귀한'이란 뜻으로 그들이 자칭하는 말이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은 펀자브 지방에 들어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혼혈을 장려하였다. 이 무렵은 청동기문화의 단계로, 가부장적(家父長的) 대가족의 집합으로서의 부족이 정치경제의 단위였다. 신앙은 다신적으로,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여러 가지 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BC 1000년 무렵부터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상류 각지에 작은 촌락을 형성하고 농경을 주로 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철기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며 바라문을 정점으로 하는 사성제도(四姓制度:카스트)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BC 1000년에서 BC 700년 사이에 《리그 베다》로 이어지는 3개의 성전이 성립되었는데 이들 성전은 지금도 브라만의 근본 성전으로서 존중되고 있다. "
[출처] 아리아인 [─人, Aryan ] | 네이버 백과사전
아리안계의 시원은 의견이 분분하나 유력한 가설은 박트리아이다.
박트리아는 현재까지 조로아스터 발생 지역으로 유력한 지역으로, 오늘날 아프카니스탄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박트리안인이 인도, 이란, 터키, 유럽 방면으로 왜 이동하였는가는 투란인 때문으로 보인다.
투란인은 돌궐, 투르크, 흉노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란인은 아리안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자신을 고귀한 자로 부르는 의미가 있다. 즉, 중국인이 변방인을 야만족으로 보는 명칭처럼 이란인 역시 투란인을 야만족으로 보고, 자신을 문명인으로 보는 의도가 깔려 있다.
아리안인이 인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 2,000년경부터 기원 전 1,000년에 이르른다. 하고, 또 다른 일부가 오늘날의 이란인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터키에 도달하여 히타이트 제국과 미탄니 제국을 건설한다.
18. 베다의 초기 경전, 리그 베다에서 바루나와 인드라
펀잡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신은 바루나 대신 인드라였다.
"인도의 곡창지대, 펀잡으로 들어선 아리안족은 최고신 인드라를 잊는다. 대신, 농경신으로 삼위일체화한다.
그것이 브라흐만 종교, 브라흐만 체제이다.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하고 일체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하는 에너지인 동시에 우주를 창조하는 근본 원리이다. 모든 것이 다 브라흐만에 의해서 형체를 입고 태어나 다시 형체를 잃고 브라흐만으로 돌아간다.
이를 성경 기자들이 구약을 재구성할 때 참고했다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이전에는 각각의 신이었다. 헌데, 유목에서 농경으로 전환하자 신을 통일해야 했다. 이전 유목 부족에게는 불필요했던 신의 통일이, 농경 부족화하자 신의 통일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왜? 대규모 농경은 소규모 수렵에 비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였기에 이 많은 사람들을 묶을 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20067080
펀잡에 이르기까지 아리안의 이주 여정은 온갖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해서, 전쟁신 인드라가 찬양받을 수밖에 없었다. 펀잡 이전까지는 인드라가 최고신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펀잡에 도착하여 농경사회로 접어들자 전쟁신 인드라에게 의존할 일이 크게 줄었다. 전쟁이 끝났으니까. 반면 원주민을 지배하며 농경사회를 이끌어야해서 카스트 제도를 만든 직후라 아리안은 새로운 질서에 걸맞는 신적 체제가 요구되었다.
인도 이주 과정에서 바루나에서 인드라로 이동한 신의 권력은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브라만, 우주의 창조자인 시바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비수뉴로 옮겨갔다.
기원전 13세기, 인도 펀잡에 정착한 아리안과 여전히 박트리아와 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아리안 차이는 사제계급 사이에서 사법신, 바루나와 전쟁신, 인드라에 대한 평가에서 갈렸을 것이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을 건너 펀잡에 도달한 아리안인은 여기까지 올 때 수고로운 신이 사법신 바루나가 아니라 전쟁신 인드라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
사법신 바루나를 믿는 사제계급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 때, 전쟁신 인드라를 믿는 전사계급이 정복사업을 계속한 것이다.
이에 리그베다 찬가는 초기 바루나 찬가 대신 인드라 중심 찬가가 되는 것이다.
허나, 바로 이 대목에서 신학적 반발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겠다.
펀잡 지역에서 아리안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배가 아플 족속이란 여전히 고향에 남아 있던 부족일 터. 이에 대해 박트리아에 남아 있던 제사장들은 답변할 필요가 있었던 게다. 그것이 최초의 조로아스터적 의문인 게다.
- 그들 인드라 족속은 떠나 잘 먹고 잘 산다. 우리는 남아 있는데, 배고프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루나 일족은 말한다. 바루나도 인드라 업적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조로아스터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거의 없고, 신화의 형태로만 조금씩 전한다. 후기의 경전에 따르면, 그는 천상적인 선존재(先存在)로서 역사의 한중간에 세계의 중심이 되는 곳을 골라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출생과정은 좀 특이하다. 하늘에서 만들어진 그의 육신의 재료는 먼저 비를 타고 내려 식물에 흡수되고, 다시 그 식물은 암소에게 먹히어 우유속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그 우유를 하오마와 섞어 마신 그의 양친이 마침내 조로아스터를 임신하게 된다는 게 후기의 경전이 말하는 그의 출생 경로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로아스터는 웃으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출생하기 사흘전부터 신성한 빛이 그 마을을 감싸 그것을 불길이라고 생각한 악마들은 그를 죽일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온몸으로 빛을 뿜는 어린아이들 보게되었는데 그가 바로 갓 태어난 조로아스터였다. 악마들은 그를 불타는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늑대의 굴에 던져 놓는 등 네가지의 혹독한 시험을 했으나, 그는 가까스로 그걸 이겨내고 악마들을 물리쳤다. <초자연적 빛>에 대한 믿음과 <악에 대한 투쟁>의 의무를 상징하는 신화인 성싶다.
그의 성장시기에 관해서는 그가 열다섯 살에 성인임을 나타내는 띠를 두르게 되었다는 것과, 세 아내의 남편이요, 여섯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게 없다. 그가 무엇으로 생업을 삼았는지, 어떤 학습과 연마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사건이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은 커녕 구전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러던 그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은 서른이 되던 해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신앙적인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그는 어떤 강가의 언덕에서 천사 '보후 마나'-Vohu mana. 선한 사상의 상징-를 만났다. 사람의 형상으로 아홉 번이나 조로아스터 앞에 나타난 보후 마나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신은 아후라 마즈다밖에 없다는 것과 조로아스터는 그 아후라 마즈다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뒤 10년에 걸쳐 각기 다른 천사장(天使長)들이 나타나 아후라 마즈다의 가르침을 일러주었는데, 그들은 '아샤 바이슈타'-Asha Vaishta. 참 또는 완전한 正義-와 '크샤트라 바이리야'-Kshatra Vairya. 권세 또는 완전한 왕국의 기대-, '하우르바타트'-Haurvatat. 온전함 또는 인간의 구원-, '아메레타트'-Ameretat. 불멸, 특히 영혼의 불멸-, '스펜타 아르마이티'-Spenta Armaiti. 헌신 또는 조화와 대지-였다.
그들로부터 깨달음과 믿음을 얻게 된 조로아스터는 곧 그 새로운 교의를 전하려고 나섰다. 처음 10년 간은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할 만큼 그의 포교활동은 참담한 실패였다.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자신의 사촌 하나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어 비슈타시파 왕(王)의 궁정을 찾아듦으로써 그의 종교적 생애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비슈타시파 왕은 보통 아케메네스 왕조 키루스 대왕의 아버지로 추측되는데, 그 역시도 처음에는 조로아스터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파 승려들의 모함을 믿어 그를 감옥에 던져넣기까지 했다가 어떤 계기로 그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가 왕의 병든 애마를 고쳐주고 그 환심을 샀다는 말도 있고, 또 달리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비슈타시파 왕의 총신 자마스프에게 시집 보내 왕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고도 하나, 그 극적인 개종의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왕이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자 오래잖아 그의 궁정과 왕국 전체가 조로아스터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 그 새로운 가르침은 다른 아리안족의 나라에까지 번졌으며 나중에는 종교전쟁으로 개종을 강요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로아스터의 죽음은 그런 종교 전쟁의 와중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튜란족과의 싸움에서 져 그가 살던 도시가 점령되자 그 도시로 난입한 적병은 별 생각없이 한 사원에서 신성한 불을 지키고 있는 늙은이를 죽여버렸는데 그게 바로 일흔일곱살의 조로아스터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또다른 얘기로는 브라만교를 고집한 교적(敎敵) 아레자도오스빠에게 피살되었다는 것과 도시가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그의 최후인지는 판정하기 어렵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19. 페르시아 키루스 2세는 모세신화와 조로아스터를 융합한 신화를 창조한다.
"캄비세스 1세의 아들로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BC 559년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켰고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나보니도스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출처] 키루스 2세 [Cyrus II ] | 네이버 백과사전
키루스 2세는 과연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의 아들인가.
"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 제1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뒤이어 키악사레스(Cyaxares)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왕위를 계
승했다. 아스티아게스에게 만다네(Mandane)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이 딸의 방뇨(放尿)로 전 도시가 물에 잠기고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
까지 범람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해몽가인 마고스들에게 이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로부터 꿈의 의미를
자세히 듣고 대단히 놀랐다. 그리하여 아스티아게스는 딸이 결혼할 만큼
나이가 차자 그 꿈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메디아(Media,
Medes)인 중에서 사위를 고르지 않고 캄비세스(Cambyses)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인에게 딸을 주었다. 이 남자는 가문도 좋고 성격도 조용했다.
아스티아게스는 그 청년이 메디아의 중류층보다 훨씬 낮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다네가 캄비세스에게 시집간 그 해 아스티아게스는 다시 꿈을 꾸
었다. 이번에는 이 딸의 음부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이것이 아
시아 전역을 뒤덮는 꿈이었다.
그는 이 꿈을 꾸고 해몽가들로부터 이 꿈의 의미를 전해 들은 후, 이미 임
신 중인 딸을 페르시아로부터 불러들여 딸을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 그는
딸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를 죽여 없애려 했다. 왜냐하면 해몽가인 마
고스들이 이 꿈으로 판단하기를, 딸의 소생이 마침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예서, 볼 수 있듯, 키루스 2세 출생 신분이 불확실하다. 승자의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 2세는 캄비네스 2세와 메디안 공주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나 장차 왕이 된다는 예언에 따라 메디안왕이 단속함에 따라 아기 때에 버려지고 이리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반박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런 신화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리우스 1세 당시에 페르시아 곳곳에서 키루스 후예를 내세운 이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전하는 키루스 2세 족보는 날조되었을 확율이 높은 것이다.
예서, 누가 키루스 2세 족보 날조를 도왔던 것일까.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다니엘이 키루스 2세의 외삼촌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전승을 신뢰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키루스가 정치적 발판을 삼았던 지역이 엘람 지역이고, 엘람 지역이 바빌로니아 지역과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키루스 2세와 유태인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를 공격할 때, 성문을 열어줘서 바빌론 공략을 용이하게 한 족속이 유태인이기도 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쪽발 석현 각을 떠서 한일연방공화국 제물로!
한일연방공화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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