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시, 사순, 국유본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8 03:27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54476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8 : 빠르시, 사순, 국유본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8

   

1. 조로아스터교 후손 빠르시를 아세요?

2. 인도 타타 그룹은 로스차일드 국유본 재벌이다.

3. 국유본이 비주류 종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1. 조로아스터교 후손 빠르시를 아세요?

   

 "빠르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인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으로 이들은 현재 인도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시크교도들이 인도의 정치ㆍ군사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면 빠르시는 인도 경제를 주름잡는 '인도의 유태인'이다. 중국에 객가인이 있다면 인도에는 빠르시가 있는 셈이다. 인도 최대 재벌 타타그룹은 지금의 구자라트주 출신의 빠르시교 승려 가문이었으며 세계적인 락그룹 퀸의 리더인 프레디 머큐리와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도 빠르시다. 세계 시장에서 친디아가 약진하면서 인도 경제ㆍ사회의 최상위계층으로 떠오른 빠르시의 가장 큰 과제는 '양적' 열세.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SJ)은 인구 증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빠르시를 6일 집중보도했다.

   

6세 미만 빠르시는 3500명도 안 돼

   

전세계적으로 조로아스터교 인구는 약 20만 명. 대부분이 종교 발생지인 인도와 이란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 조로아스터교 인구는 감소 추세여서 2001년 자료에 따르면 인도 빠르시는 10년 전 7만6382명에서 6만9601명으로 줄었다. 특히 60세 이상 인구는 31%를 차지하는 반면 6세 미만 인구는 5%를 밑돈다.

   

결혼배우자 조건, "무조건 빠르시!"

   

빠르시의 급격한 인구 감소는 젊은 세대들이 유학 및 취업으로 해외로 나서면서 연애와 결혼, 출산이 늦어진 데 따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빠르시들이 빠르시만 배우자로 선호하기 때문이다. 회교도의 박해로 8세기에 인도로 피신한 조로아스터 교도의 자손인 이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과의 결혼을 피하고 있다. 불을 숭상하고 사자(死者)의 육체를 풍장(風葬) ·조장(鳥葬)으로 독수리 밥으로 내어놓는 빠르시 특유의 풍습과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고 공유하기 위해선 같은 빠르시여야 한다는 것. 타종교인과 결혼했을 경우엔 아버지가 빠르시일 때만 자녀가 빠르시로 인정되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할 수 밖에 없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8&aid=0000626605&sid1=001

   

인드라는 신화 이야기를 현재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가 유태인 이야기를 흥미있게 읽는 까닭은 현 세계를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유태인이 집시처럼 계속 세계를 구걸하며 다닌다면, 컬트적 취미가 있지 않고서는 그 누가 유태인에게 관심을 보일 것인가. 없다.

   

하면, 오늘날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관심을 지닐 필요가 있느냐 하면 대부분은 왜 그딴 것까지 신경써야 하지? 혹은 기껏해야 안티 기독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이 글은 인터넷에 범람하는 안티 기독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인드라는 지난 시대정신 다큐 비판 글에서 안티 기독교 역시 국유본의 오메가알파 전술의 한 부분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해서, 종교에만 국한한 문제가 아니므로 읽어보고 각자 필요한지, 아니면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볼 것인지를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본다.

   

프레디 머큐리, 주빈 메타, 타타그룹.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오늘은 타타그룹에 집중하자. 

   

   

2. 인도 타타 그룹은 로스차일드 국유본 재벌이다.

   

"인도의 기업가 가문으로 인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제철소, 면직물 공장, 수력 발전소 등을 세웠다. 타타 가문은 원래 이전의 바로다주(州)(지금의 구자라트주) 출신의 파시교 승려 가문이었다. 이들 가문의 부를 일으킨 사람은 잠셋지 나사르완지 타타(Jamsetji Nasarwanji Tata:18391904)였다.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있던 엘핀스턴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858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수출 회사에 참여하여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등지에 지점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1872년에는 면직공업에 전념하여 1877년 나그푸르에 이어 봄베이와 쿠를라(Coorla)에도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의 사업체는 효율, 근로자들의 복지 후생, 품질 좋은 직물 생산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는 또 생사를 인도에 처음 소개하였고 봄베이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은 그의 사후에 타타전력이라는 이름의 여러 회사들이 되었다. 1901년 인도 최초의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제철소들은 1907년 타타철강회사로 통합되었다. 그의 아들인 도라브지 잠셋지 타타(Dorabji Jamsetji Tata:18591932)와 라탄지 타타(Ratanji Tata:18711932)의 통솔 아래 타타제철회사는 인도 최대의 민간 제철회사가 되었으며 이들이 경영하는 일군의 회사들은 섬유, 철강, 전력뿐 아니라 화학제품, 농기구, 트럭, 기관차, 시멘트까지도 생산하였다. 이들 가문의 산업 시설은 비하르주에 새로 건설된 도시 잠셰드푸르에 집중되어 있었다. 1898년 타타는 연구소 설립을 위한 토지를 기부하였고 이 연구소는 나중에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벵갈루루(Bangalore)의 인도 과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타타 가문은 그후 꾸준히 민간인으로서는 가장 활발하게 인도의 기술교육과 과학연구를 위하여 자금을 제공하였다. 1932년 도라브지가 세상을 떠나자 창립자의 조카인 나오로지 사클랏발라(Naoroji Saklatvala)가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그리고 1938년 그가 사망하자 창립자의 사촌이자 동업자였던 R.D. 타타의 아들 제한지르 라탄지 다다보이 타타(Jehangir Ratanji Dadabhoy Tata:19041993)가 회장이 되었다. J.R.D. 타타는 1932년 타타항공(Tata Airlines)을 설립하였는데, 이 항공사는 1953년 국유화되면서 국내 항공사인 인디언항공(Indian Airlines Corporation)과 국제선 항공사인 에어인디아(Air-India)로 양분되었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타타그룹은 인도 최대의 기업 집단을 거느렸고, 1971년에는 가족계획재단을 설립하였다. J.R.D. 타타는 1991년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인도 최고의 상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1992년에는 국제연합 인구상을 수상하였다. 모두 82개의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0년 현재 26만 2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은 90억 달러에 이른다. 참여 분야는 정보 기술에서부터 니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무려 25개 이상의 산업에 걸쳐 있다. 2000년 현재 그룹 창립자의 종손자인 라탄 나발 타타(Ratan Naval Tata)가 그룹을 이끌고 있다.

[출처] 타타그룹 [財閥, Tata Group ] | 네이버 백과사전

   

   

타타 그룹

http://theme.etoday.co.kr/luxury/view.php?ARTICLEID=384927&category=878&page=2

   

   

타타 그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 경제의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 인도 경제는 비즈니스 페밀리가 지배한다.

   

인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기업인 미탈 스틸이나 타타 그룹. 이들의 공통점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둔 상인 카스트 그룹이며, 각기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는 인도의 비즈니스 페밀리라는 것이다. 즉, 인도 경제는 자신들 스스로는 커뮤니티, 공동체라고 부르는 비즈니스 페밀리가 지배한다.

   

이들 경영 방식은 개인보다 가문을 내세우는 '마피아 경영학'이다. 해서, 만일 뭄바이(봄베이)에 10만의 상인이 있는데 1명이 실패하면 99,999명의 같은 커뮤니티 상인들이 1루피 씩 모아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한다. 

   

지역별로 보면 인도서부 라자스탄주에 뿌리를 둔 마르와리 상인(marwari), 자이나교를 신봉하는 제인 상인(jains), 중서부 구자라트 주의 구자라티 바니아(banias) 와 보라 상인(vohras), 파키스탄 접경 펀잡주의 펀자비 힌두 카트리(khattris),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체띠아(chettiars), 남인도 안드라쁘라데시 주의 코마티(komatis), 뭄바이(봄베이) 지역의 파시(parsee) 등이다.

   

"인도는 지방분권과 자율성이 더 센 편이다. 과거 네루 정권이 집권했던 1964년까지만 해도 중앙정부의 파워가 지방정부를 압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네루 사후 제정파는 이합집산을 거듭, 1970~1980년대 들어 종교, 인종, 카스트(계급) 등에 기반한 다당제 지역 기반 세력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지금은 지방정부의 권한이 크게 신장됐다. 세제(稅制)에서 그 단면이 드러난다. 중앙이 조세항목의 세율을 정해 국가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하는 중국과 달리 인도 지방정부는 조례를 통해 적용세율에 차등을 둘 수 있다. 지방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도의 외자기업들에게는 큰 불편 사항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인도 지방정부의 자율성은 재정 면에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인도는 정부 수입 중 중앙정부 수입 비중이 30%대에 그치고, 지방교부금에서도 15~2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정 파워가 약한 중앙정부가 지방권력에 대해 강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도의 지역성은 중국보다 더욱 심하다. 지방 언어도 수십 개에 이르고, 인종별 거주 분포도 뚜렷하게 구별된다. 인도 대륙 전역에 권력을 행사했던 마지막 왕조가 이슬람 왕조였기에, 전통 힌두교 사회와 이슬람 사회의 갈등은 심각하다. 두 종교사회의 점유율은 현재 각각 80%, 13%대에 이른다. 인종, 언어, 종교가 한데 융합되지 못한 채 갈리면서 인도의 지역성은 모자이크 스타일처럼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다. 이 같은 지역성은 외자기업에게도 인도를 단일 시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역별로 세분화(Segmentation)하고 개별적 최적화 시장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2636682&sid1=001

   

   

인도는 중앙권력 체제이기 보다는 지방분권 체제라고 할 수 있어서 각 지역마다 비즈니스 페밀리가 한 자리를 해먹는 체제인 게다. 인도 정치경제체제가 처음부터 중앙집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 직후 잠시만 그러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 식민정책 때문이다.

   

분리해서 지배하라.

   

영국이 인도를 분리 지배하면서 키웠던 그룹은 인도 소수민족 그룹이다. 이이제이. 해서, 빠르시, 마르와리 상인 그룹이 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인도는 여전히 '허가 경제 체제'이다.

   

"인도가 독립 초기 식민지 유산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소위 '허가경제(License Raj)' 체제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식민지 수탈에 기여했던 자본가 세력에 대한 반동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초대 수상 네루(Jawaharlal Nehru)와 집권 국민의회당의 정치경제적 성향과 관련이 깊다. 명문가 출신의 영국 유학파였지만, 네루는 부농, 산업자본가 등 식민지 기득권 세력과 궤를 달리했다. 인도 정부의 경제에 대한 계획과 통제는 IMF 구제금융을 받고 개혁·개방 노선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1991년까지 지속됐다. 1991년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을 표명한 이래 인도의 허가경제는 서서히 완화돼 점차 자유시장경제체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2636682&sid1=001

간디나 네루가 영국에 반대했다고 한다. 허나, 정말로 영국에 반대하고, 국유본에 반대했는지 의심스럽다. 인도를 독립시킬 필요가 발생하여 국유본이 적당한 인물을 고르고 키운 것이 간디요, 네루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다.

   

가령 1957년 타타스틸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네루 총리가 잠세트지 타타를 '1인 경제기획원'이라고 부를 만큼 둘 관계는 오랫동안 친구일 만큼 특별한 관계였다.

   

네루 국민의회당의 허가경제체제란 국유본 - 타타그룹이라는 식민지 경제체제를 몸통을 그대로 둔 채 껍데기만 약간 변용시킨 국유본 - 네루 - 타타그룹 신식민지 경제체제였을 뿐이다. 다만, 이 몸통을 비켜가기 위해서 조무래기 몇몇을 전시용으로 조졌을 뿐인 게다.

   

하면, 암에푸 위기 이후 변화한 인도 경제체제는 무엇인가.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비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교체가 되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신자유주의를 주창하였다. 신자유주의란 중국, 인도도 이제는 경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가 경제 성장하면 경제 규모가 커진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간 인도 경제 규모란 영국 혼자 해처먹을 정도였다. 허나, 이제 인도 경제 규모가 엄청 커진 것이다. 영국 혼자 처먹으면 탈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해서, 이제 나눠서 같이 해처먹자는 것이다. 신제국주의인 셈이다.

   

이때, 중요한 건, 여전히 허가경제라는 것이다.

   

뭔 말이냐.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고 그 지역으로 아무나 들어가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국유본 허가가 있어야 한다. 인드라가 강조했다. 아무나 적대적 인수합병 시장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이다. 감히 멋모르고 국유본 허가없이 들어오면 반드시 대가를 치룬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인도도 그렇다. 아무나 들어가면 작살난다. 겉으로는 개방했는데, 속으로는 아니다~!

   

잘 생각해봐라. 인도가 한국 기업을 일부 인수하지 않았나. 타타그룹이 대우 상용차 부문 인수했다. 타타나 대우가 모두 노비네파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마힌드라가 쌍용차 인수전에서 노비네파 삼성 - 로스차일드를 인수 주간사로 선정하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더 무서운 법이다.

   

   

삼. 인도 재벌을 키운 건 로스차일드, 사순, 국유본이다.

   

   

"(7) 아편무역 승자는 세파르딤 유대인 <사순 회사>

   

맨 위에서 언급했던 <사순 회사>에 대해서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사쑨(沙遜)으로 발음한다고 합니다.

   

사순 가문의 아편무역 역사는 데이비드 사순(1792~1846)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데이비드 사순은 바그다드로 이주한 스페인 세파르딤 유대인의 후손으로,

바그다드 총독의 재정담당이자 바그다드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였습니다.

   

바그다드는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1829년에 새로 들어선 바그다드 총독이 유대인을 학대하자

데이비드 사순은 일가를 이끌고 인도 봄베이로 갔습니다.

   

   

   

데이비드 사순

   

   

데이비드 사순은 봄베이에서 직물과 아편 제조 사업을 일으켜

곧 영국정부가 데이비드 사순에게 면, 실크, 아편 제조의 독점권을 부여했고

1830~1831년 사이 데이비드 사순은 중국 아편무역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수익의 일부는 당연히 빅토리아 여왕과 영국정부에 - 

   

1833년 데이비드 사순은 봄베이에 <사순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해보자"

   

1839년 청나라 황제가 아편금지 명령을 내리고

광둥 총독을 시켜 <사순 회사> 소유의 아편 2,000 상자를 압수, 폐기하자

화가 난 데이비드 사순이 영국정부에 요구하여 1차 아편전쟁(1839~1842)이 발발합니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1812년 전쟁이 생각나네요.

   

1842년 청왕조가 난징조약에 사인하여 1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중국이 강제개항합니다.

난징조약은 아래 항목을 포함합니다 :

   

(1) 중국에서의 아편무역을 전적으로 합법화한다

(2) 광둥 총독이 압수한 아편 2백만 파운드를 보상한다

(3) 영국왕실이 중국 해안섬 2백개에 주권을 행사한다

   

1845년 봄베이의 데이비드 사순은 둘째 아들 엘리어스 데이비드 사순을 광둥으로 보냈습니다.

광둥에 도착한 첫번째 유대인입니다.

   

1850년 데이비드 사순이 직접 상하이로 와서 와이탄 지역에 <사순 회사>의 상하이 브랜치를 설립했습니다,

상하이의 와이탄은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과 마찬가지로 내국인 접근금지 지역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사순 회사>는 경쟁자인 선발주자 <자딘 매더슨 회사>와 동등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사순 일가가 상하이에서 막대한 부를 쌓자, 동족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몰려 왔습니다.

데이비드 사순은 상하이 브랜치에 유대인만 고용했고 그들의 정착을 지원했습니다.

바그다드 -> 봄베이 -> 상하이의 유대인 공동체 리더가 된 것이네요.

   

데이비드 사순은 곧 중국 항구지역 뿐 아니라 대륙 전체의 아편판매권을 요구했습니다.

만주 청왕조가 이에 저항하자, 영국은 다시 2차 아편전쟁(1856~1860)을 일으켰습니다.

   

* 2차 아편전쟁이 마무리되던 1859년에 새뮤얼 로빈스 브라운이 귀도 페어벡을 데리고 나가사키에 왔네요.  

중국사업이 마무리 되었으니 일본으로 눈을 돌리자?

(* 새뮤얼 로빈스 브라운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 쓰겠습니다.)

   

1860년 10월에 북경이 함락되어 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아편수입이 합법화 되었습니다. 

1860년 10월 25일에 맺어진 새로운 "평화조약"에서,

<사순 회사>는 중국 지역의 8분의 7을 점하는 아편무역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유대인 가문이 되었습니다.

   

1864년 데이비드 사순은 인도 푸나의 시골집에서 사망합니다.

"다 이루었다"

   

1880년 무렵 <사순 회사>는 중국 아편무역의 70 퍼센트를 점했고,

<사순 회사>를 쫒아 여러 유대인 회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자딘 매더슨 회사>를 비롯한 다른 영국 회사들은 경쟁에서 나가 떨어져

1900년 무렵 중국 아편무역은 완전히 유대인들이 독점하게 됩니다.

   

   

   

알버트 데이비드 사순

   

   

데이비드 사순은 8 아들을 중국 아편무역에 적절히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사순 가문을 <중국의 로스차일드>라고 부릅니다.

   

데이비드 사순의 첫째 아들 알버트 데이비드 사순은 1887년에

첫째 아들 에드워드 알버트 사순을 로스차일드 가문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중국의 로스차일드> 사순 가문은 진짜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친척이 되었습니다.

   

   

- 수반아님의 글 중에서 "

   

   

   

   

스페인계 유태 가문, 사순(Sassoon) 가(家). 사순 가문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동아시아 시장을 장악하라는 특명을 받고 19세기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인드라 분석은 이렇다. 기존 아편무역 구조는 베어링 - 동인도회사 - 프리메이슨이었다. 베어링이 자금을 대고, 동인도회사를 통해 영국 왕실과 귀족이 이익을 차지하고, 아시아 현지에서는 프리메이슨이 일하는 구조. 로스차일드는 이를 바꾸었던 것이다.

   

베어링 - 동인도회사 - 프리메이슨에서 로스차일드 - HSBC - 유태인으로 말이다.

   

해서, 인드라는 인도 세포이 항쟁 배후에는 일타삼피 목적의 로스차일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포이 항쟁 이후 동인도 회사가 해체 수순을 밟았다.

   

본론으로 다시 가자. 

   

아편 루트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사순 가문의 보호 아래  봄베이 - 싱가포르 - 광둥, 홍콩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계절풍을 타고 케냐 잔지바르을 갔다 오면 동인도회사 루트가 완성되는 셈이다.

   

이때, 사문 가문만 들어왔겠느냐. 아니다. 오늘날에도 활약중인 스페인계 유태인들이 같이 들어왔던 것이다. 하면, 이들로 되겠느냐. 아니다.

   

사순 가문은 뭄바이(봄베이)에 직물회사를 차린다. 허나, 이는 명분이었을 뿐이다. 산업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국 의류제품이 인도 의류제품보다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낫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아편 무역이 주업무였다.

   

이를 위해서는 현지 파트너가 필요했다. 현지 파트너, 그들이 빠르시고, 마르와리인 게다. 타타그룹 등 이들 상인 카스트들이 한 것은 대부분 옷장사였는데, 무역업으로 커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타그룹이건, 미탈스틸이건 아편으로 돈을 번 것이었던 게다.

   

일본도? 그렇다. 미쓰이가 그렇다. 옷장사하던 넘들을 국유본이 교육시켜서 일본 최대의 재벌로 만들어준 것이다. 한국도? 그렇다. 삼성이 그렇다.

   

경박단소! 시작은 아편!

   

   

3. 국유본이 비주류 종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국유본은 라엘리안, UFO 종교, 뉴에이지 종교, 유니테리언, 통일교, 원불교, 증산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비주류 종교를 선호한다. 왜일까?

   

   

일. 국유본은 자신보다 소수파인 종교롤 선호한다.

   

전 세계 유태인은 세계 인구의 0.2% 천 사백만 명 정도 된다. 이들은 능히 일당 백, 일당 만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이때, 소수의 인원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은?

   

자신보다 소수파를 활용하는 것이다.

   

가령 여러분이 한일연방공화국을 만들 기획을 한다고 하자. 일본 공략을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 일본 소수민족을 파고들어갈 것이다. 재일교포, 아이누인, 오키나와인, 재일중국인이 대상일 것이다.

   

이들에게 자금을 주고, 이들을 교육시키고, 이들이 정재계를 장악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유신 때 국유본이 한 방식이다. 죠슈-사츠마번은 임진왜란 이후에 소외된 번이었는데, 국유본이 이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서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기술을 전수시켜서 일본 기업을 일으킨 것이다. 국유본이 없었다면, 일본은 스스로 근대화에 나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애들 머리가 원래 빠가야로이니까.

   

이제 국유본은 준비하고 있다. 재일교포, 아이누인, 오키나와인, 재일중국인, 하고, 메이지유신 이후 칼을 갈고 있는 막부 후손들, 동경대 사태 이후 취업을 박탈당한 운동권들. 가깝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에 걸친 한을 풀 때가 왔다.

   

한일연방공화국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서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쪽발 석현의 각을 떠서 한일연방공화국의 제물로!

동아시아 혁명 만세!

   

문제는 자신보다 쪽수가 크면 언제나 경계 대상인 게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자신보다 십분지 일이어야 안심이다.

   

백만 명 남짓해야 한다.

해서, 명심하라.

교세 확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님을 말이다.

교세 확장보다 내실을 다져야 한다.

문선명이나 조다윗이 실수한 것은 규모를 더 키우기 보다 내실을 다져야 했던 것이다.

쪽발 라희가 물주인 원불교 따위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이. 종교는 친자본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뜨는 마이너 종교 대부분이 친자본적이다. 교회는 마치 마트 같은 데 놀러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불교를 하더라도 생활 불교요, 기독교를 하더라도 민생 기독교요, 민족종교를 하더라도 먹고사니즘 종교여야 하는 것이다.

   

인민은 먹고살아야 믿는다.

   

   

삼. 종교는 교회일치, 종교일치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오늘날 칠대종단이니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이스라엘 같은 데 가서 랍비랑 썰을 풀고, 이를 국유본 언론이 대서특필한다.

   

1960년대 국유본 지시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대세인 게다. 지지하면 키우고, 반대하면 죽인다.

   

이를 전제하고, 국유본이 종교 공동체를 고려하는 건, 일부 종교에서 보듯 일상적인 착취가 가능하면서도 착취 대상이 자신이 착취당하면서도 착취당하는지 모르고 오히려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쪽발 주사파 사상이 대표적이다.

   

또한 국유본이 이들 종교를 지원하는 것은 종교의 일반적 속성인 돈을 멀리하는 성향 탓이다. 국유본이 이들을 후원해도 이들은 결코 국유본의 적수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돈을 멀리하는 성향 때문이다. 돈을 모을 수가 없다.

   

해서, 국유본은 이런 종교를 그간 지지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다수파에 밀린 비주류이기에 주류가 되고픈 열망이 있고, 국유본은 이들을 주류로 키울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쪽발 돼중아, 나라를 팔아먹을래?

넵! 죽어도 충성하겠습니다.

   

쪽발 놈현아, 나라를 팔아먹을래?

넵! 대를 이어 충성하겠습니다.

   

쪽발 석현아, 나라를 팔아먹을래?

넵! 좀비가 되어도 충성하겠습니다.

   

허나, 무조건 충성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닌 게다.

   

국유본이 이들을 지지해왔던 건 나름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인드라 같은 이가 이 관계를 폭로한다면! 말짱 꽝인 게다.

   

영화 봤지?

국유본은 역할이 끝난 넘에겐 아무런 미련이 없어.

즉결 처분인 게다.

   

쪽발 정은이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보면

국유본은 48시간 이내에 쪽발 정은을 미사일로 총살시켜 시체 흔적조차 없이 만들고

평양 정권을 붕괴시킬 것이다.

   

   

추신 :

이제 본격적으로 조로아스터와 미트라교에 대해 쓸려고 하니까 솔솔 잠이 오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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