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미국 독립의 불쌍한 진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3 01:26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17421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6 : 국제유태자본과 미국 독립의 불쌍한 진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3
1. 1776년에 무슨 일이?
2. 1789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 영국왕 조지 3세는 왜 정신착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나?
4. 노스규제법은 오히려 동인도회사를 위한 법이었다
5. 국제유태자본은 미국 독립(아웃소싱)이 이익이었다
6. 영국의 미국 독자화폐 발행 저지설?
7. 전쟁을 통한 용병장사가 미국혁명을 태동시켰다?
8. 미국은 본디 자치를 원했을 뿐이다
9. 미국 혁명 지도부는 프리메이슨이었다
10. 상품이냐, 노예냐
1897년 일본 군사용 지리교과서는 `독도는 조선땅'이라고 표기했다.
"영월 호야지리박물관은 1897년 일본 문부성(우리나라의 교육과학기술부)이 검정을 마친 일본지지(地誌, 지리교과서)를 소장 중이다. 이 교과서에 수록된 당시 지도를 보면 일본열도와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 등 일본의 영토는 모두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다. 반면 당시 대한제국을 선포한 우리나라의 영토는 모두 흰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지만 울릉도는 죽도, 독도는 송도로 써놓고 우리 영토인 흰색 점으로 표시했다."
http://www.kwnews.co.kr/nview.asp?s=501&aid=211081100095
1. 1776년에 무슨 일이?
인드라는 한국사든, 국사든, 무엇이든 세계사와 함께 이해하자고 강조한 바 있다. 지금이야 말할 나위없지만, 과거에도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사교과서 71쪽 통일신라를 보면 북한의 남포에서 동쪽으로 원산까지로 되어 있다. 필자가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정역한 신라본기(新羅本紀)와 원전(原典)에 따르면 통일신라강역은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AD 742년) 때부터 제55대 경애왕(景哀王·AD 926년)까지 신라의 대통일 시대였다.
교과서 '신라의 발전' 편 36쪽과 53쪽에 보면 경상도 경주(慶州)에 금성(金城)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첫번째 연재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자 지명이 한반도 전국 곳곳에 완전히 옮겨진 것은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AD 1332∼1356년) 때다. 고로 한반도에 신라 금성의 한자 지명은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제1권 거서간(居西干) 21년에 기록된 금성(金城)은 경성(京城)을 쌓은 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이십오사(二十五史) 신라편에 금성(金城)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청(淸)나라 건융(乾隆) 때인 1736년부터 1776년까지 40년간 60명의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를 쓸 당시 이십오사를 고증본으로 했기에 신라의 금성(金城)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장여화가 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43쪽의 금성군(金城郡), 금성현(金城縣)에는 대륙의 서쪽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가 금성(金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성(城)의 흔적도 없이 도시화가 되었다. 바로 이곳이 옛 신라 도읍지인 금성(金城)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알고 두 번이나 답사했다.
그런데 중학교 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통일의 강역은 3·8의 약간 북쪽까지로 되어있다. 이런 기록은 모든 역사 원전을 다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타난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를 보면 대륙에 구주(九州)를 두고 경(京)을 다섯 군데를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상고사학회서 신라본기 정역의 책자에 수록되어 있다.(각 대학과 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에 소장)
중학교 국사 7쪽에 있는 통일신라강역은 한반도 허리 부분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따라서 경북에 있는 지금의 경주에 금성(金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필자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수만권의 역사원전을 뒤지고 찾아보아도 한반도에서 신라가 통일한 사실이 없고 금성(金城)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중학교 국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신라의 대통일은 당(唐)나라가 망한 후에 이루어졌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부터 제55대 경애왕까지 약 216년간 신라는 대통일의 시대였다. 지금도 대륙 남부인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 지방에 신라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인민위원회(新羅人民委員會)가 있는 간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 책에 실었다. 한국의 학계와 신문, 방송 등에서 도저히 믿지 못할 사실들이 정사(正史)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금성(金城)의 이름이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중재 사단법인 상고사학회장"
- 청(淸)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 41년
- 조선(朝鮮) 영조(英祖) 52년
- 3월 - 조선 정조가 조선의 제 22대왕으로 왕위에 오름.
- 5월 10일 - 루이 16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다.
- 7월 4일 - 미국이 정식으로 독립선언을 함.
- 3월 9일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출간.
-
규장각 설치.
1776년 영국에서 출판된 윌리엄 섹스피어의 작품 36편을 총 8권으로 집대성하다.
1776년 첫 상업용 볼턴 & 와트 증기기관이 만들어졌다.
1776년 러시아 볼쇼이극장 건립.
1776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바이에른 일루미나티를 조직하다.
1776년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임진왜란 개념을 처음 사용되었다.
2. 1789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청(淸)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 54년
- 조선(朝鮮) 정조(正祖) 13년
- 4월 4일 -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당선
- 5월 5일 - 프랑스에서 175년 만에 삼부회가 소집됨.
- 6월 17일 - 프랑스 제 3 신분의 대표자들이 삼부회에서 국민의회 구성 선언.
- 6월 20일 - 테니스 코트의 조약이 베르사유에서 열림.
- 6월 23일 - 루이 16세가 세 신분의 만남을 주선함.
- 7월 13일 -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생.
- 7월 14일 - 프랑스 혁명: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7명의 죄수들을 풀어주다.
- 8월 4일 - 프랑스 혁명: 국민의회 의원들이 봉건 제도와 특권 폐지를 서약함.
- 8월 26일 - 프랑스 혁명: 프랑스 인권선언이 제헌 의회에서 채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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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 노스 캐롤라이나 주가 12번째 미국의 주가 됨.
1789년과 1897년은 독도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한 해이다.
1789년과 1897년 독도 관련 지도가 각각 등장하니 더욱 흥미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1789년 수원화성의 꽃인 화성행궁은 정조가 팔달산의 동쪽 기슭에 세운 행궁으로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 행궁이란 임금이 궁을 떠나 지역에 갔을 때 일도 하고 잠도 자던 시설을 말한다.
1789년 다산 정약용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그해 겨울 한강 에 설치하는 배다리(빠橋)를 설계해 그대로 배다리가 놓였다. 배다리란 교량을 가설하기 어려운 큰 강에 배를 나란히 붙여 띄운 위에 임시로 놓는 다리를 말한다.
1789년 베트남 응웬 왕조는 하노이까지 침략한 청 군대를 격퇴하였다.
1789년 북부 이란 투르만계 카자르 부족 출신 아가 무함마드가 이란을 통일시키며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던 테헤란을 수도로 정했다. 카자르 왕조는 백여년간 유지하며 근대화에 힘을 쓰나 무너지고 팔레비 왕조가 들어선다.
1789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 풍선을 이용하여 최초로 인간비행을 했다.
1789년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의회에서 인간을 농장의 짐승처럼 매매하지 못하게 하는 날이 오기를 강력히 주장하며 외쳤다.
1789년 미국 연방재판소가 설립하였다.
1789년 미국 정부는 전쟁부를 창설했다.
1789년 미국에서 태머니협회가 출범했다.
3. 영국왕 조지 3세는 왜 정신착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나?
미국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해 유력한 설은 우선 동인도회사 경영난이다.
동인도회사 경영난이 미국혁명을 일으켰다?
1773년 영국수상 F.노스는 미국 식민지의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성립시켜 그간 영국 행태에 실망하던 미국인들을 분노시켜 보스턴 차사건을 일으킨 데서 찾는 설이다.
보스턴 차사건과 미국혁명의 진실
이 가설에 따르면, 노스 내각이 동인도회사에 독점권을 부여한 것은 동인도회사가 경영난에 빠져 이를 보완하고자 미국 식민지에 이전보다 더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해서, 이에 따르면, 동인도회사의 경영난이 미국혁명을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1773년 동인도회사는 경영난이 발생함에 따라 정부에 원조 요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지 3세하의 노스 총리 내각이 노스 규제법을 시행하여 정부의 감독 권한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헌데, 노스 규제법을 보면, 그 핵심 중 하나가 동인도회사가 그간 영국 국왕이 수여하는 특허장에 의하여 특권을 인정받던 것을, 본국의회의 소관 사항으로 종속하게 변경한 것이다.
이때, 영국 국왕은 조지 3세였다. 하면, 왜 노스 내각은 동인도회사 관리 권한을 조지 3세에서 의회로 변경했는가.
명예혁명 이후로 영국 경제는 왕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온 국제유태자본이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영란은행을 만들면서 영속적인 지배 틀을 다진다. 이 시기는 로스차일드 이전 시기이며, 국유본 역사에서 태동기이다. 이 시기 국유본 권력을 잡았던 세력은 정치의 영국 왕실과 귀족, 종교의 신교와 프리메이슨, 자본의 한자 상인/ 유태인 상인 삼자 동맹체제였다.
허나, 명예혁명 초기에는 영국 왕실의 위엄은 전혀 없었다. 명예혁명으로 윌리엄 메리 공동왕이 추대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제유태자본 동맹체제의 힘이었다.
유태인 추방령 이후 영국 경제를 장악했던 것은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이었다. 허나, 영국에서 교황 권력이 약화하는 동시에 대서양 교역로가 뚫리면서 메디치 가문처럼 지중해 교역권과 교황권에 의존했던 롬바드 상인 역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리장전은 윌리엄과 메리 사이에 후손이 없을 경우 메리의 여동생 앤에게 왕위가 계승되도록 규정했으며, 가톨릭교도에게는 왕위계승을 봉쇄했다. 왕위계승법이 뭐 이따위냐 하겠지만, 이미 왕을 처형한 국제유태자본이었다. 당신이 윌리엄과 메리라면 후손을 남기고 싶을까? 또한 앤 역시 후손을 남기고 싶었을까.
"독일의 하노버 선거후의 아들로 태어나, 1698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외가(外家) 계통으로는 영국의 제임스 1세의 증손에 해당되기 때문에, 1714년 앤 여왕의 사망과 함께 왕위계승법(1701년 제정)의 규정에 따라 영국 왕위에 올라, 하노버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성장하여 영어를 모르는데다가, 고향 하노버에 칩거하는 일이 많아 국정이 내각과 의회에 맡겨짐로써,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이 확립되고, 내각책임제가 발달하였다."
[출처] 조지 1세 [George I ] | 네이버 백과사전
국제유태자본은 영어를 하지 못하고 독일에 칩거하는 왕을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벨기에에서 실험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나 수상없이, 정부없이 국가 운영이 가능한가 하는 실험 말이다.
그렇듯 조지 1세, 조지 2세를 보내고 조지 3세를 맞이했다. 헌데, 영어 좀 하는 조지 3세는 조지1세, 2세와 달리 정치에 개입하려 애를 썼던 왕이었다.
"조지 2세의 손자로, 1760년에 즉위하여 앞의 2대의 왕과는 달리 왕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래서 왕실비용을 줄인 돈으로 의원을 매수하여 어용당을 만들어, 이를 조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정의 지도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뼈아픈 실패를 초래하였다. 이따금 정신에 이상을 보였고, 특히 1811년 이후에는 폐인 같은 만년을 보냈다. 더욱이 그의 치세는 초기의 토리당(黨) 어용화 시대 등, 전후 수년간을 제하고는 소(小)피트가 주도하는 토리당의 지배 시대가 되었다. "
[출처] 조지 3세 [George III ] | 네이버 백과사전
하면, 실제로 조지 3세에게 없던 권한이 발생한 것일까. 인드라는 아니다, 라고 본다.
영국 정당은 토리당과 휘그당이 있는데, 카톨릭 왕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로 갈렸다. 카톨릭 왕을 인정하면 토리당, 안 하면 휘그당이었다. 헌데, 권리장전에서 카톨릭 왕은 안 된다, 라는 조항에서 보듯 실권은 휘그당이 잡고 있었다. 하고, 휘그당이 국제유태자본 알파 정당이었던 것이다. 하면, 토리당은? 오메가 정당이었다.
조지 1세, 조지 2세 약 오십여 년간은 휘그당이 정권을 잡고 국정 운영을 하였고, 토리당은 대부분 시골영주 귀족들이어서 국제유태자본이 주는 떡고물을 조금만 더 주면 신나게 재롱떨지롱, 하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다.
허나, 오십여 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가장 큰 불만은 살림살이였다. 영국 국부는 날로 늘어나는데, 특히 동인도회사가 떼돈을 번다는데, 왜 대다수 영국 백성은 여전히 가난한가하는 것이었다.
해서, 영국이 백성을 소홀히 하는 것은 나라가 지나치게 귀족과 장삿꾼 손에 놀아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여, 영국 백성이 영어도 못 하는 무능한 왕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조지 3세에게 역할놀이를 제안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힘이 하나도 없지만, 힘이 있는 것처럼 연기해달라는 설정 주문이었다. 가령 노스는 조지 3세의 소꿉친구이다. 조지 3세가 노스를 발탁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미국 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 회장 선출 방안을 떠올려보자. 공공정책위원회는 당대 대통령과 가장 친한 사람을 회장으로 선출한다고 한다.
조지 3세는 영어를 했다. 왕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는 언론플레이에 영국민이 환호했다. 때로는 영국 귀족과 자본가에 겉으로만 맞서는 모양새도 보여주니 인기가 날로 치솟았다. 쪽발놈현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연예인도 아닌데, 조지 3세는 열심히 노력했다. 허나, 실제와 설정이 너무나 다르다 보니 종종 정신착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대항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누구보다 노예였던 조지 3세는 자아 상실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지 3세는 위기 때마다 퇴위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자살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말년에는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당대 국유본의 신출귀몰한 기획 전모를 안다면, 그 누가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지만, 국유본은 주도면밀했다. 혹시나 조지 3세가 역할놀이를 거부할까 싶어 노스규제법을 만든 것이다. 혹시나 있을 조지 3세의 변덕에 대비하여 국왕 권한을 의회로 돌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나 언급하고 지나간다.
영국 의회주의, 대의제 뿌리는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로마 식민총독부에서 기원을 찾아야 하며, 더 올라가면 카르타고 정치체제에 기반한다, 즉 영국 의회주의는 영국 자체를 혐오하는 정복왕과 야만 켈트족을 두려워하는 지방주의 귀족이 만들어낸 '사기' 합작품이다, 그 이후 권리장전이니 뭐니 하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은 죄다 훗날의 역사가들이 윤색한 조작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인드라의 '독특한' 주장이다. 찾아보면, 이런 주장을 한 이들도 없지 않겠지만, 하여간 국내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인드라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카르타고인은 상인 권력을 억누르는 정치 권력을 늘 억압하였다.
4. 노스규제법은 오히려 동인도회사를 위한 법이었다
노스규제법
http://100.naver.com/100.nhn?docid=38770
노스규제법의 배경이 이뿐인가.
아니다.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 직원을 공무원 격으로 지위를 격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동인도회사 직원이 하는 업무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중국이 1729년에 아편밀무역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1757년 인도 아편 전매권을 따낸다.
하고, 1773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전반까지 유효한 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따낸다.
경쟁자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8세기에 망한 것은 향신료 무역이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영국의 해적 무역에 당할 도리가 없었으며, 영국이 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따냈기에 더 이상 아편무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영국은 1729년에는 아편을 연 이백상자 수출하던 것을 1776년에는 1000상자, 1790년에는 5000상자, 1820년에는 10,000상자를 중국으로 보낸다.
아편전쟁
http://blog.naver.com/gemengi/42308873
차무역 결제대금으로 불가피하게 마약 장사를 했다는 것은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존 콜먼이 획기적인 제안을 하므로 그의 주장을 깊이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약 프로그램의 성공
주력 상품인 마약 수출 여건이 호전되고, 마약이 보다 많이 수출되었다는 점에서 동인도회사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것은 의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동인도회사는 주주 대부분이 영국 왕실과 영국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주변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국이 노골적으로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도 엄청난 수익과 이해 때문이다.
헌데, 이러한 동인도회사가 비난을 받는다. 영국인은 분노한다. 전 세계를 영국이 장악해나간다는데, 왜 영국인들은 보다 더 가난해지는가. 이 분노는 동인도회사에 집중된다. 왜냐하면 동인도회사가 일반회사에 비해 각종 특혜를 받아 온갖 수익을 낼 동안 소상공인들은 동인도회사의 횡포에 분노를 삼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면, 동인도회사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란? 다 죽어가는 척해야 하는 것이다.
조지3세는 7년 전쟁으로 재정이 파산상태라고 말한다. 해서, 조지 3세는 영국인들이 싫어하는 시티지구 금융가들과도 불화하고, 정권 잡았던 휘그당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 영국 왕실 비용을 줄인다고 발표한다. 줄인 비용으로 왕실 우호세력을 키운다 어쩐다 한다. 이러하니, 조지 3세는 오히려 영국인에게 인기가 있었다.
헌데, 이상하다. 당대 영국은 오늘날 미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신민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신민이 영란은행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막말로 돈 찍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세한 사정은 극소수의 전문가들만 알 따름이다.
5. 국제유태자본은 미국 독립(아웃소싱)이 이익이었다
게다가 미국 사정은 어떠한가. 당시 미국 식민지 유지비용은 영국 본토에서 더 많이 부담하였다. 이에 비해 미국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지극히 미미하였다. 이는 17세기 정착과정에서 워낙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정착민 이주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행해진 정책이 이어져온 것이다. 해서, 소수야 피해를 겪을 지라도 대다수 미국인들은 의외로 세금 부담을 감당할 수도 있었다.
프리메이슨, 벤자민 프랭클린은 1789년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에서 분명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것은 죽음과 세금이다"라고 주장했다. 세금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헌데, 흉악한 프리메이슨, 벤자민 프랭클린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미국혁명 시기에 관한 미묘한 발언을 한다.
"만일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 미국의 자체 화폐 발행권을 앗아가지 않았다면 식민 정부는 차(茶)등 다른 품종에 대한 세금 정도는 기꺼이 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화폐법에 의거한 영국의 조치 때문에 식민지에서는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어 그들의 높은 원성을 샀다. 이처럼 조지 3세와 국제 금융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돈을 만들 수 없게 된 일이 미국 독립전쟁의 주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뭔 말이냐. 견디기 힘들다는 세금을 얼마든지 낸다는 말이 아니냐. 이 무슨 개같은 수작이냐~!
영국은 미국이 독립하면서 오히려 재정이 안정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독립 초기부터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증세 대책을 찾다 보니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웃소싱이 뭐냐.
대기업의 비용 절감이다. 고정 비용이 발생하는 부문을 약간의 이익을 주어 외부에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때, 대부분 대기업에 일하다 퇴직한 이들, 혹은 프리랜서를 자임한 이들에게 일감을 주기 마련이다. 이들은 처음에 사장이 된 기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한, 일한 만큼 번다는 데에 매력을 느낀다. 허나, 처음과 달리 차츰 옥죄는 경영 환경. 그 모든 경우의 수에 책임을 다 져야 한다는 것. 생각하지 못했던,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여 차라리 대기업에 남아 있을 걸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마련이다. 중소기업 사장보다, 자영업자보다 대기업 말단 사원, 말단 대리가 낫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6. 영국의 미국 독자화폐 발행 저지설?
미국혁명의 배경으로 거론되는 가설이 1764년 영국 화폐법으로 상징되는 영국의 미국 독자 화폐 발행 저지설이다.
미국은 벤자민 플랭클린을 중심으로 '식민지 유가증권(Colonial script)' 형식의 신용 중심 지폐를 유통시켜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당시 금본위 화폐제도로 식민지 조세를 강력 금은으로 뽑아 가려 했던 영국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허나, 영국에서는 1764년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서의 자체적인 화폐 발행을 금지하는 "화폐법"을 통과를 시키고, 식민지 세금을 금과 은으로 뽑아가 버렸다.
국제유태자본이 식민지에서 멋대로 화폐 발행을 하도록 허용한다면, 보다 많은 이들이 화폐 발행의 손익을 헤아리게 되어 독점적 권한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해서, 이 가설론자들은 국제유태자본이 로버트 모리스, 알렉산더 해밀턴, 좀 애덤스, 제퍼슨과 접촉하여 이들을 포섭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언뜻 보면 일리가 있다 할 수 있다.
흑인노예 여성 강간 아편농장주 제퍼슨이 연방 중앙은행에 비판하였다고 하나, 단지 정적에 대한 비판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인드라가 그간 지속적으로 강조한 사안이다. 제퍼슨 - 앤드류 잭슨 라인은 겉으로만 영국을 강하게 비판하였지만, 실은 대통령만 되면 똥마린 강아지가 되었던 자들이라고.
그처럼 해밀턴이나 애덤스, 제퍼슨, 메디슨 등은 다만 주인공이고 싶어 정적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와 자신이 대통령일 때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듯 다른 정책을 펼치면서 비난을 위한 비난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떡고물이겠다. 실제로 조지 워싱턴부터 해밀턴, 제퍼슨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정치 활동 이면에 열심히 땅 투기에 열중했다. 흥미로운 점은, 로버트 모리스를 비롯하여 해밀턴, 제퍼슨 등이 말년에 파산하였다는 점이다. 로버트 모리스 경우에는, 그는 재무부장관 직도 마다하고 땅 투기에 적극 나섰다. 이유는 유럽 자금, 국유본 자금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허나, 기다리던 유럽 자금, 국유본 자금은 오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프랑스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알거지가 되어 심지어 채무자로서 감방 신세까지 졌다.
주식 투자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냉철하게 알다시피, 그 어떤 멋진 말도 주식투자자들 앞에서는 오히려 믿지 못할 언행으로 간주되지 않는가. 유일한 증거는 자신의 계좌를 까서 결과를 확인시켜주는 것뿐이다. 그만큼 시장은 힘에 의한 결과를 신뢰할 뿐이다. 그 힘이 어디에서 오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기, 협박, 내부거래 등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윤리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하여, 보스턴 차사건보다 화폐법이 더 식민지 부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확인될 뿐, 미국 혁명을 낳게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게다가 이 당시에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재계에서 지배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면, 베어링인가.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단지 중앙은행만 장악하거나, 화폐발행권을 획득한다고 해서 금융 권력을 유지, 발전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즉, 금융 권력을 영구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평균 이윤율 이상의 초과 이윤을 어디에선가 반드시 획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해적질을 이용한 군사력이 계기였다면, 결정적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동인도회사에서의 인도에서의 아편 전매권과 중국에서의 아편 독점판매권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윤 원천을 지니고 있으니 그만큼 중앙은행에 대한 권위와 신용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간단히 개념화하면 '안전자산'이다.
농노제를 폐지하면, 농노제에 의존하여 영지 경영을 하던 시골 귀족들이 큰 타격을 입는다. 하면, 왜 유럽 제국은 제국 권력 한 축을 담당하던 시골 귀족들 반발이 뻔함에도 농노제 폐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교과서적 설명은 이렇다.
부국강병이다. 제국 권력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은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 강력한 군대를 키워야 하고, 이 군대를 먹여살릴 재원이 필요하다. 근대화, 공업화, 자본주의화, 제국주의화해야 한다.
이전까지 유럽 각국은 농업 경제와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 가령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 헌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유럽 각국은 영국처럼 제조업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국유본론적 관점은 이렇다.
유럽 제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제조업을 키웠다. 허나, 그 배후에는 국유본이 있다. 제조업 이전에 금융업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몰락한 것은 약탈 경제체제를 무계획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반면, 국유본은 약탈 경제체제를 계획적으로 했다. 또한, 유럽 제국이 제조업을 무시했다고 볼 수 없다. 루이 14세도 프랑스 상공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으니까. 문제는 금융업이다.
유럽 금융시장이 네덜란드와 영국 런던, 특히 영국 런던에 집중했다. 용병장사로 유럽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독일 헤센 가문이 주식투자를 영국 런던에서 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만일 독일 금융시장이 영국 런던시장처럼 되었다면 독일 헤센가문이 영국 런던시장에 투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면, 프랑스도 금융시장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결투로 살인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쳐 은행경영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1710년 후 영국으로 돌아와 은행개혁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이 1716년 루이 15세로부터 받아들여져 프랑스 총은행(總銀行)과 서방회사(西方會社:루이지애나회사)의 설립 허가를 얻었다. 1717년 루이지애나회사를 서(西)인도회사로 발전시켜, 북아메리카 미시시피강(江) 유역의 광대한 프랑스령(領)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로의 재정체계는 프랑스에서 일대 붐을 일으켰다. 조폐권(造幣權)과 무역독점권을 둘러싸고 '로 체제'를 확립하였다. 1720년 재정총감(財政總監)이 되어 프랑스 재정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나, 지폐의 남발과 투기확대의 결과 경제공황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직하여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출처] 존 로 [John Law ] | 네이버 백과사전
프랑스는 존 로라는 스코틀랜드인을 재무총감으로 임명한 비극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후 금융업을 상당히 제한했다.
반면, 영국은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 등 끊이질 않는 금융사고에도 불구하고 금융업에 대해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했다.
이 차이가 영국과 그밖의 나라를 구분시킨 것이다.
하면, 영국은 뭘 믿고 금융업에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영국이 금융업을 믿은 것이 아니다. 금융업이 영국더러 말 들을래? 아니면 떠난다? 하니 말 들으마! 한 것이다. 금융업이 떠나면 영국이 망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이다. 적국인 프랑스 왕도, 러시아 왕도, 오스트리아 왕도, 독일 왕도 로스차일드에게 돈을 맡긴다. 이자를 기대하는 돈도 아니다. 맡기면 오히려 보관료를 받기까지 한다. 그래도 맡기는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인드라가 강조하고, 또 강조했지만, 진짜 부자들의 관심사는 돈 불리기가 아니라 보전이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쪽발놈현, 쪽발돼중, 전두환, 김영삼, 그밖의 회장님들의 재산관리인 역할은 위험한 베팅이 아니라 원금 보전인 게다.
반면 미국 중앙은행의 신뢰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가. 없지 않는가.
더 나아가 중앙은행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자신이 중심이 된 식민지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영국이 일찌기 영란은행이라는 중앙은행을 만들고, 1816년에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전세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서, 간단히 생각해보자. 중앙은행이 왜 필요한가.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은행처럼 기축통화화폐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금본위제가 왜 필요한가. 본국 기축통화와 식민지국 통화의 원활한 거래를 위해서이다.
해서, 제국주의 자체가 불가능했던 유럽 각국은 금본위제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국유본이 결정하니까 그제서야 1870년대부터 독일,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에서 금본위제를 한 것이다.
정리하자. 당시 미국이 중앙은행 만들고, 자신들만의 화폐를 만든다고 해서 누가 신경쓰겠느냐. 냉정하자. 내일이라도 당장 망할 것 같은 미국 화폐로 거래하겠느냐, 아니면 영국 파운드로 거래하겠냐. 당신이 캐러비안의 해적, 조니 뎁이라면 배를 약탈했는데, 미국 화폐만 나온다면, 그 돈을 그냥 보관하겠느냐, 아니면 영국 파운드화로 바꾸거나 금으로 바꾸어서 보관하겠느냐.
경제의 쌩기초도 모르고, 음모론 떠드는 씹색희들 뺨을 절라리 때리고 싶고나. 애비가 쪽발이냐, 무식한 넘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오늘날 달러 체제가 위기라고 금본위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헛소리맨 쑹훙빙 같은 병쉰 색희들은 들어라.
좆밥들아! 혁명전사, 인드라의 말을 들어라.
냉수 먹고 속 차려, 씨밸럼들아.
- 핫핫핫. 전 세계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드라가 유일한 사람^^? 이래서, 국유본이 인드라를 주시하는 것이겠지만.
쪽발 일성은 쪽발 경제 부흥을 위해 대를 이어 충성한 쪽발이다
7. 전쟁을 통한 용병장사가 미국혁명을 태동시켰다?
헤센 카셀 왕은 당대 유럽 최고의 부자였다. 비결은 역대 선조들이 대대로 용병 장사를 해온 탓이다. 당대 독일은 삼십년 전쟁이다, 뭐다 하여 농토가 황폐화하고, 인구는 1/3로 격감하였지만, 그럴수록 헤센 카셀 왕의 용병장사는 날로 수지가 맞았던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헤센 카셀 왕의 재무담당 궁정신하와의 친분으로 궁정신하로부터 영국 주식투자와 용병장사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제자였던 로스차일드는 스승 궁정신하로부터 청출어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적인 신뢰를 받아 헤센 카셀 왕의 도피 자금을 관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부대와의 유명한 일화는 흡사 이명박이 태국 건설현장에서 금고를 사수했다는 다소 의혹이 있는 신화와 맞물린다.)
영국 왕실은 금융유태자본에 의해서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정부가 사설 은행에 1억 4천만 파운드의 빚을 지자 이에 대한 해결로서 식민지 목을 쪼였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 되고 있다. 허나, 인드라는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다.
왜? 이는 영국 왕실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돈이란 돈을 버는 사람들 관점에서 바라봐야, 폼이 나는 말로 생산자 입장에서 봐야 되는 것이다. 해서, 영국 왕실이 아니라 헤센 카셀 왕 입장, 더 핵심적인 것은 헤센 카셀 왕이 독일의 이름난 여성들과 떡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때, 열심히 일만 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재무담당 궁정신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무엇이 과연 보였겠는가. 용병 장사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 전쟁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허나, 계속된 전쟁은 가령 담배농사로 특화한 미국 버지니아주가 19세기 후반에 가면 이미 더 이상 담배농사를 지을 수 없을 지경에 도달한 땅들이 등장할 정도로 작황이 좋다고 마구잡이로 땅을 혹사시면 땅이 거부를 하듯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 하여, 전쟁이란 화전민 농법처럼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 지르고 떠나자! 하여, 전쟁을 발생시키기 위한 온갖 수단을 연구해야 한다. 역사, 종교, 이념, 문화, 이해관계 그 어떤 것이든!
둘, 용병의 부단한 충당이다. 잉여다. 산업예비군이다. 실업자이다. 이농이다.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어 아무 것도 살 수가 없는, 그로 인해 생계가 불가능한 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용병이 탄생한다. 만일 그조차 어렵다면, 납치를 해서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셋, 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용병을 부단하게 충당하려면 용병에게 고향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스위스 용병은 고향이 존재한다. 스위스 용병이 자존심이 높은 이유가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고용주가 아무리 호조건을 걸어도 스위스 용병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는 이유가 스위스 용병에게는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주 입장에서는 고향이 없는 용병이 필요하다. 스위스 용병의 민족주의는 파괴되어야 한다. 오직 떠돌이 용병만이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의 강간, 강도, 폭력을 위해 기도하자. 혹은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시청하자. 근대 법적 이성은 오직 그들의 인권과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
8. 미국은 본디 자치를 원했을 뿐이다
미국 혁명세력 다수는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상당수는 식민지 자치를 원했다. 허나, 영국 왕 조지 3세가 대륙회의의 요구를 전면 무시했다.
이것이 뭔 말이냐.
미국 혁명세력은 체면을 살리는 항복을 원했던 것이다. 허나, 조지 3세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거부한 것이다.
본국 대 식민지간 대립구도를 보면, 오늘날 중국처럼 본국이 자치권을 보장하고, 티벳과 같은 식민지가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잖은가. 헌데, 상황이 이따위이니 희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9. 미국 혁명 지도부는 프리메이슨이었다
http://blog.naver.com/maria1483/90125072848
보스턴 티파티 사건에 프리메이슨이 개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독립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라파예트가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1830년대에 이르면, 미국 프리메이슨이 5만 여명에 달한다 했다.
프리메이슨. 고대적 신비주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근대에서는 국제유태자본의 도구였다. 국제유태자본이 미국 식민지화를 위해 최초로 미대륙에 보낸 이주민도 프리메이슨을 통해서였다.
내부적으로 복잡한 의도를 지녔겠지만, 간단 정리하면, 프리메이슨 상부, 즉 국제유태자본은 미국 독립을 결정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를 책임질 자들로 프리메이슨을 선정한 것이다라고 보면 무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미국 초대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민의 의사가 아니라 국유본의 의도였다는 게다. 초대 대통령이 프리메이슨이였으니까.
10. 상품이냐, 노예냐
인드라는 말한다.
맑스의 화폐론을 극복한 상품론 이전에 노예론이 있다. 최초의 상품은 노예였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같은 논의가 근대에 진행된 까닭이 무엇인가.
상품론은 물신화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 비판으로 향한다.
반면, 노예론은 물신화 이전에 주목한다.
왜 인간은 화폐나 상품을 주인 모시듯 하는가.
인간은 두 부류이기 때문이다.
그 화폐나 상품을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존재와 실체로 여기는 존재로 나뉘기 때문이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면 돈을 번다는 것쯤은 다 안다.
허나, 왜 대다수 인간은 실천이 어려운가.
오직 극소수만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나.
이렇듯 인류가 나눠지는 조건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물신화 비판이란 허망한 것이다.
지난 사회주의 실험 실패가 이를 입증한다.
여러분은 왜 인드라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여기면서도 오히려 인드라 이야기 반대로 행하는 게 이익이라고 지금 당장 판단하는가?
물신화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허나, 노예론은 설명가능하다. 인드라가 아직 노예를 극복한 자인지를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드라가 그 아무리 지금 진실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노예의 진실일 뿐이다. 만일 인드라가 노예를 극복한 자라면, 여러분은 인드라 이야기에 적극 찬성할 것이다.
우리가 비판을 관망하는 것이 결코 물신화, 우상숭배 때문이 아니다. 그 가능성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란 우리 삶이 노예냐, 상품이냐에 달린 것이다.
노예라면 들고 일어난다. 허나, 상품이라면 조금 더 꾸밀 따름이다,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인양 하는 것이 오히려 폼이 나는 것처럼.
상품이냐, 노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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