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정현의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를 아세요?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30 04:33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88043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3 : 가수 박정현의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를 아세요?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30

   

오늘은 인드라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모아서 인월리를 내놓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다. 인드라는 인터넷 자료를 통해 인월리를 쓴다. 왜 여러분은 인드라처럼 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하나. 정보를 어디 가면 볼 수 있지? 정보가 어디에 있는 지를 모른다. 어떻게 검색해야 하는지 모른다.

   

둘, 보물섬 지도라도 해독할 줄 모르면 말짱 꽝이다.

   

셋,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분석 판단해야 한다. 일단 모은 정보라도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고 난감해 한다. 

   

   

   

   

1. 박정현과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

    

가수 박정현이 파이베타카파 출신이라 해서 한국에서 화제이다. 헌데, 박정현만 파이베타카파일까. 

   

한국인으로는 1999년에 파이베타카파 명예회원이 된 사람이 김성복 교수이다. 미국사 연구로 정식회원이 아니라 명예회원이 되었다. 

   

국유본이 한국인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때부터라고 보고 있다. 시작은 클린턴의 사돈, 메즈빈스키 여사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골드만파 힐러리 클린턴의 사돈이자 첼시 클린턴의 시어머니는 마저리 마골리스 메즈빈스키이다. NBC방송 기자 출신으로  필라델피아 지역방송과 NBC 방송 등에서 24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다섯 차례나 에미상을 받았다. 1993~95년 필라델피아주 하원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예서, 마저리의 특기 사항은 한국과 관련한 문제이다. 마저리는 28살이었던 1970년 한국에 와 고아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한국 소녀 리혜(Lee Heh)를 입양했다. 당시 미혼이었던 마저리는 미국 역사상 미혼 여성이 외국 어린이를 입양한 최초의 인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리혜 입양 후에도 마저리는 한국과의 인연을 지속했다.  마저리는 리혜 외에도 미혼시절 베트남 소년을 한 명 더 입양했으며 에드워드 메즈빈스키를 만나 결혼하면서 총 11명의 자녀를 보살폈다. 메즈빈스키 부부는 첼시의 남편 마크를 비롯해 2명의 아들을 낳았다. 또 3명의 베트남 소년을 더 입양했으며 메즈빈스키가 이전 결혼생활에서 4명의 자녀를 둬 11명 자녀를 둔 것이다.

   

마저리가 입양 할 당시 리혜는 6살이었다. 1979년 15살이었던 이혜는 워싱턴국립가톨릭스쿨에 다니면서 수 백 명의 지원자들 중 미 의회 '사환'으로 뽑혀 화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TV출연을 비롯해 언론 매체 인터뷰를 통해 입양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고 아동잡지를 위해 유명인을 인터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 당시 '정치와 연예계' 중 어디에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연예계"를 선택하며 "나는 유명해지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현재는 뉴저지에서 변호사 남편 케네스 메이맨과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파 클린턴 가문은 침례교이고, 메즈빈스키 가문은 유대교이다. 첼시 클린턴과 마크 메즈빈스키는 스탠퍼드 대학 동기동창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22677927

결정적인 계기는, 밤의 미국 대통령, 우디 앨런이 미아 패로우와의 사이에서 한국으로부터 20여년 전에 입양한 양녀 순이와 1997년 결혼한 사건이라고 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정부의 새 CTO로 한국계 미국인인 토드 박을 임명했다. 2003년부터 미 연방보건국(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의 CTO를 역임했던 박은 1997년 의료 전문 IT업체인 아테나헬스(Athenahealth)를 공동으로 설립했으며 그 전에는 부즈알랜&해밀턴(Booz Allen & Hamilton)에서 의료와 IT를 담당하는 경영 컨설턴트였다. 또한 의료 IT 및 보험 제도 개혁을 위한 미 진보정책연구소(Center for American Progress)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자원해 참여하기도 했다.

   

연방보건국 웹사이트(HHS.gov)에 실린 그에 대한 소개 자료에 따르면, 박은 사회적 기업을 발굴에 후원하는 글로벌 인큐베이터인 아쇼카(Ashoka)에서 수석 의료 고문으로도 활동하며 인도의 시골 마을에 저렴한 의료서비스와 맑은 물을 제공하는 벤처의 창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HHS에서 박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상당히 활기찬 힘을 보여줬다고 백악관 과학기술정책 실장 존 홀드런이 지난 금요일 블로그에 글을 남겼다. 또한 홀드런은 "미국 최초의 공공 및 민간 의료 보험 제도 개선에 대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웹사이트인 HealthCare.gov 개발을 주도했다"라고 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정부의 기술 현대화에 주력하고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IT를 활용하기 위해 CTO를 만들었다. 박은 지난 달 사임한 아니시 초프라를 대신해 CTO를 맡게 된다.

   

박은 하버드대학교 경제학을 전공하고 우등생(magna cum laude)으로 졸업했으며 엘리트들의 사교 모임(Phi Beta Kappa)에 가입된 인물이다. 박의 아버지는 한국인으로 1960년대 말 유타대학교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다우케미칼에서 30년 이상 근무했다." 

 http://www.ciokorea.com/news/11895

   

"한국 교포 대학생이 의과대학으로서 세계최고 명문인 존스 홉킨스大에서 3년동안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최우수 학생들에게 수여되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상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존스 홉킨스대 의대 생화학과 3년생인 姜榮珉군(21)은 1학년 2학기때 한과목에서 B플러스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A학점을 받아 만점 4점에 3년간 평균학점 3.96을 기록했다.

   

姜군은 이에따라 지난 5월3일 3학년 전체 학생의 2%에 수여되는 `파이 베타 카파'상을 수상,4학년 졸업후 1백명의 소수정예학생을 뽑는 이대학 본과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파이 베타 카파'상은 美동부 명문 아이비 리그에서 우수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 美역대 대통령 15명이 이 상을 수상했다.

   

姜군의 성적을 석차로 따지면 생화학과에서는 1등이고 의과대학 전체 6백6명중에서는 6등.

   

공무원 출신인 아버지 姜鵬翊씨를 따라 서울 청담국교 4학년때 미국으로 온 姜군은 로스앤젤레스의 부유층 지역 학교인 팔로스 버디스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존스 홉킨스大의대에 진학했다.

   

姜군은 미국이 첨단 의술을 다른 나라로 넘겨주지 않고 있는 사실을 지적, 2000년대에 실용화될 컴퓨터이용 수술등 첨단기술을 직접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 의술을 보급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姜군과 함께 동생 榮佑군(19)도 존스 홉킨스大 의예과 1학년에 재학중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845150

   

국유본이 한국인, 한국계에 세계적으로 인정한 분야는 현재까지 셋이다. 하나가 영성이다. 국유본이 인드라를 주목하는 면도 영성 부문으로 현재까지 알고 있다. 두번째는 바이오이다. 보건의료이다. 한국 의료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바이오 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종욱룸, 이종욱 보건의료상이 있을 정도로 국유본은 보건의료 부문에서의 한국계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세계은행 총재 후보가 된 김용 역시 보건의료 부문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토드 박 역시 보건의료 부문이다. 세번째는 한류다. 춤과 노래하면 흑인, 남미인, 인도인, 아랍인, 북유럽인이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인이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남미 정도로 타켓을 잡는 것 같다. 러시아는 몰라도 미국과 유럽,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는 어렵지 않나 보고 있다.

   

   

"

송주영 일병의 2011년 5월 졸업때 모습. News1

   

현역 군인의 미국 대학 졸업논문이 세계적인 권위의 국제학술지에 실렸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해 7월부터 육군 제3사관학교 영어학과 조교로 복무 중인 송주영 일병(22).

   

송 일병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 월시 국제외교대(국제정치학과 아시아국제관계학 전공)를 지난해 5월 졸업했다.

   

송 일병의 졸업논문은 '이중 위협 방정식:북한 도발에 대한 중국 반응의 이해'이다. 송 일병은 성적우수 조기졸업을 하면서 우등졸업상(마그나 쿰 아우데 상)과 함께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이 졸업논문은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아시안 서베이(Asian Survey)'2011년 겨울호에 실렸다.이 학술지는 미국의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급의 아시아 외교안보 분야의 유명 학술지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 졸업논문이 이 학술지에 실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송 일병은 이 논문에서 "중국은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제재조치에 동의하고 북한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도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한 상반된 태도를 나타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개의 안보 위협(북한 정권의 붕괴, 미군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일관된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북한도발에 의해 국익이 위협받을 경우에만 대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중국은 철저하게 국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문은 북한의 5차례의 도발(2010년 천안함 사건,연평도 포격,2006년 1차 핵실험,2009년 2차 핵실험,2003년 핵비확산조약탈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분석했다.

   

북한이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을 때 중국은 북한 감싸기로 일관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해서는 "북한이 제멋대로 핵실험을 했다"며 강도높은 비난 성명을 내고 유엔의 대북 제재도 지지했다.

   

이 논문은 '이중 위협 방정식(Dual Threats Model)'이라는 분석틀을 이용해 중국의 태도를 분석했다. 이 분석틀에 의하면 중국은 두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조건은 첫째 북한의 도발에 의한 미국의 군사대응, 둘째 북한 체제의 안정이다.이 두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되지 않을 경우 중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북한을 감싸안는다고 논문은 주장하고 있다.

   

이 논문은 빅터 차(Victor Cha)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으로부터"북한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의 이견과 마찰,나아가 동북아 안보구도를 간단명료하게 분석했다"며 "대개 대학 교수나 박사 학위 전문가들이 논문을 등재하는 '아시안 서베이'학술지에 학부생 논문이 게재된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송 일병은 서울 영동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2004년 9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2008년 5월 밀턴아카데미 고등학교를 우등졸업상을 받고졸업했다.

   

토익 990점 만점을 받기도 한 송 일병은 대학 재학시절 미국의 대표적인 대외정책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인턴생활을 했다.대학을 졸업하면서 우수한 인재들만 가입할 수 있는 엘리트 사교 클럽(PHi Beta Kappa)회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송 일병은 제대 후 미국에 건너가 로스쿨에 진학할 계획이다."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22816078259542&outlink=1

   

예서 보듯 국유본과 한국인을 연계하는 미국계 한국인들 역할이 중요하다. 비록 송 일병이 대학 시절 전략문제연구소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하나 빅터 차와 같은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십대 시절부터 전 세계 유태인 청소년들 활동을 면밀히 분석하여 재능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키운다. 

   

"美명문대 10곳 동시합격 박원희 씨, 7년 지난 지금은…

   

2004년 민족사관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하버드 프린스턴 스탠퍼드 등 미국 명문대 10곳을 동시 합격해 화제를 모았던 대전 출신 박원희 씨(25·여·사진)가 최근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에 입학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씨는 21일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올해 8월 스탠퍼드대 경제전공 박사과정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은 전 세계에서 8명을 선발해 학교 측이 5년간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며 생활비 지원 이외에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면서 세계적인 석학을 길러내고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1억 원이다. 박 씨는 스탠퍼드대에서 큐비클(개인이 공부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을 배정받아 현재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박 씨는 2009년 하버드대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동시에 수학하고 졸업했다.

   

졸업 당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경제학부 300명 중 가장 성적이 좋은 학생 8명에게만 수여하는 'Highest Honor'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교수 추천과 높은 성적 이외에 다양한 능력을 고려하는 까다로운 선정 기준으로 미국인 학생들도 뽑히기 힘들다는 하버드 상위 5%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 클럽 멤버로 가입되기도 했다.

   

박 씨와 그의 가족은 한때 '박 씨가 미국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귀국했다'는 소문 때문에 적잖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박 씨는 "한때 부모님이 로스쿨을 권장했지만 수학을 기반으로 한 경제학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며 "대학의 모든 학비도 장학금(삼성 이건희장학금)으로 공부했기에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수기격인 '공부 9단 오기 10단', '스무살 청춘, A+보다 꿈에 미쳐라'(김영사)를 출간하기도 한 그는 "이제는 나의 이야기 책은 그만 쓰고, 좀 시간이 흐른 뒤 미래를 위한 경제학 서적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11024/41343325/1

   

   

"한인 대학생 3명이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2~3년간 수학할 자격이 주어지는 로즈장학생32명에 포함돼 화제다.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사회학과 4학년에 각각 재학중인 앤드루 박군과 앨버트 조군,시라큐스대 4학년에 재학중인 그레이스 유 양이 그 주인공이다.

   

올 로즈장학생 선발에는 미국 3백19개 대학에서 9백25명이 신청,치열한 경쟁을벌였다.

   

로즈장학재단은 일리노이주 휠링 출신인 박군이 하버드대에서 다원적 문화와 인종 관계 연구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베트남 및 캄보디아 지역사회의 서비스 프로그램에서도 활동해온 점이 높이 평가됐다고 밝혔다.

   

애리조나 템페 출신의 조군은 트루먼 장학생으로 미 우등생 클럽(Phi Beta Kappa) 멤버이며 무역 및 국제개발센터(CTID)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하버드 국제리뷰에 기고해왔다.

   

조군은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와 사회사를 전공할 예정이다.

   

그레이스 유양도 미 우등생 클럽 멤버로 옥스퍼드대에서 일본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로즈장학생은 지난 1902년 자선사업가인 세실 로즈의 뜻에 따라 창립돼 현재까지 미국3백4개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의 학생 2천9백명이 혜택을 받았다.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도 로즈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에 유학했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455328

   

   

   

   

   

2. 월가의 최상류 비밀 사교모임 'Kappa Beta Phi'

   

파이 베타 카파의 앞뒤 이름을 바꾼 카파 베타 파이는

월가 인물들이 파이 베타 카파를 모방한 짝퉁 클럽 모임이다.

일 년에 한 차례 만나 환락적인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월가의 최상류 비밀 사교모임 'Kappa Beta Phi'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4879165

   

인드라 추정으로는, 일 년 중 364일은 파이 베타 카바처럼 살고, 하루는 그 반대로 살자는 취지이거나, 아니면, 낮에는  '파이 베타 카파'로 살고, 밤에는 '카파 베타 파이'로 살자는 취지가 아닐까 싶다.  

   

   

   

   

3. 파이베타카파와 프리메이슨

   

파이베타카파는 1776년 5월, 버지니아주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서 시작하였다.

   

   

The Phi Beta Kappa Society was founded on December 5, 1776 at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in Williamsburg, Virginia,

   

   

파이베타카파와 프리메이슨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주요 멤버 중 열 명이 후에 프리메이슨이 되었다.

   

   

The group consisted of students who frequented the Raleigh Tavern as a common meeting area off the college campus (a persistent story maintains that a Masonic lodge also met at this tavern, but the Freemasons actually gathered at a different building in Williamsburg).[9] It is true that ten of the original members later became Freemasons.[10]

   

   

조직의 전신은 1750년에 출발한 F.H.C 클럽으로 보인다. 프리메이슨 혐의를 받고는 하는 토머스 제퍼슨이 F.H.C 클럽 회원이었다. 형제애하면 프리메이슨이다. 헌데, 미국 독립전쟁 이후 F.H.C 클럽이 오리무중이 된 것을 보면, F.H.C 에서 파이베타카파로 이름을 바꾸고, 주요 멤버의 탈퇴 후 재가입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There had been earlier fraternal societies at the College, but these, including the well-known F.H.C. Society (nicknamed "the Flat Hat Club"), founded in 1750, were Latin-letter societies: their names were taken from initial letters of a secret Latin motto. William and Mary alumnus and third U.S. President Thomas Jefferson was perhaps the most famous member of the F.H.C.;[13] other notable members of the original Society included Col. James Innes, St. George Tucker, and George Wythe.[14] Jefferson noted that "When I was a student of Wm. & Mary college of this state, there existed a society called the F.H.C. society, confined to the number of six students only, of which I was a member, but it had no useful object, nor do I know whether it now exists."[10] The best opinion is that the society did not survive the invasion by British forces during the Revolution.[13]

   

파이베타카파는 예일, 하버드, 다트머스, 스탠퍼드 등 미국 270여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831년, 전미국적으로 안티 메이슨 정서가 들끓을 때, 하버드 그룹에서 조직을 노출시키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자 조직을 새롭게 재편한 것으로 보인다.  

   

Before the British invasion of Virginia forced the temporary closure of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and disbandment of the Phi Beta Kappa there early in 1781, Elisha Parmelee, an alumnus of Yale College and Harvard College, passed through Williamsburg and took charters from the Phi Beta Kappa to establish branches of the society at these schools. A second chapter was founded at Yale College in late 1780; a third, at Harvard College in 1781; and a fourth, at Dartmouth College in 1787. From these new chapters, the Phi Beta Kappa evolved from a fraternity with principally academic and some social purposes to an entirely honorary organization recognizing scholastic achievement. While the Phi Beta Kappa developed some of the characteristics which still distinguish Greek-letter fraternities, it was left to other students to fill the natural human need for fellowship with kindred students by extension of fraternity to a purely social context.   Further chapters appeared at Union College in 1817, Bowdoin College in 1825, and Brown University in 1830. The original chapter at William and Mary was re-established. In 1831, the Harvard chapter publicly disclosed the fraternity's secrets during a period of strong anti-Masonic sentiment.

   

http://en.wikipedia.org/wiki/Phi_Beta_Kappa

   

   

파이베타카파가 프리메이슨 산하 조직이 아니더라도 토머스 제퍼슨처럼 친 프리메이슨적 성향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버지니아주는 프리메이슨 회사가 영국 왕의 명을 받고 미국 최초로 식민지를 개발한 지역이다. 해서, 이 지역의 주요 종교는 국교회, 혹은 성공회이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 초기 대통령들이 이 지역에서 나왔다.

   

해서,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대학에서 미국 독립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파이베타카파 전신인 F.H.C 클럽 성향이란 친영적인 동시에 프리메이슨적이다, 라고 본다. 

   

   

"컬럼비아 대학의 원래 이름은 <왕의 대학(King's College)>입니다. 프린스턴 대학 설립 직후에 세워졌고, 설립의 주체는 영국국교 성공회입니다. 성공회가 <왕의 대학 컬럼비아>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730~1760년대에 미국에서 <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성공회가 주교-사제-신도의 계층적 질서와 제의적 권위를 강조한 것이라면, <1차 대각성 운동>은 신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 소통과 개인적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1차 대각성 운동>은 미국 중부와 남부의 노예들에게 어필했습니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원래 취지는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만, 영국 왕실과 성공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성격이 짙었습니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목사들을 '뉴 라이트'라고 불렀는데, '뉴 라이트' 장로회가 <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 1746년에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성공회 측은 역시 대학을 하나 세우고 '왕의 대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의 탄생입니다.   

   

<왕의 대학 컬럼비아>는 미국혁명으로 큰 타격을 받아, 대학 관계자들이 대부분 캐나다와 영국으로 도피했습니다. 미국혁명이 끝난 다음해 1784년에 '왕의 대학'은 <컬럼비아 컬리지>로 개명합니다. 새로 들어선 미국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냄새나는 '왕의 대학' 이름을 버린 겁니다. - 수반아님의 글 중에서" 

   

   

허나,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친영적일 수 없으니 컬럼비아 대학 예처럼 이름을 바꾸어서 친영적인 색채를 은폐시키는 대신 프리메이슨적 성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파이베타카파는 오늘날 데이비드 록펠러,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 등 오늘날 미국과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 최고 동문회 클럽 중 하나가 되었다.

   

   

   

4. 파이베타카파와 안티 프리메이슨

   

예서, 안티 프리메이슨 운동이 미국에서 벌어진 배경은 무엇인가. 인드라는 윌리엄 씨워드부터 찾아간다.

   

윌리엄 씨워드하면 잘 모를 것이다. 허나, 1867년 3월 30일, 당시 국무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씨워드는 러시아와의 비밀협상 끝에 알래스카를 7백만 달러에 매입한 장본인이다. 이 일로 당시 윌리엄 씨워드는 박정희처럼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오늘날 윌리엄 씨워드는 미국인의 자랑이다.

   

아무튼 윌리엄 씨워드가 중요한 키맨인 이유는 파이베타카파 회원이기 때문이다.

   

Seward studied law at Union College, graduating in 1820 with highest honors, and as a member of Phi Beta Kappa.[5

   

또한, 윌리엄 씨워드는 1830년대 미국 정가에 파란을 일으킨 '안티 메이슨' 정당의 중요한 정치인이었다. 정당 목적이 프리메이슨 반대였던 것이다.

   

Seward was an as an Anti-Masonic member of the New York State Senate (7th D.) from 1831 to 1834, sitting in the 54th, 55th, 56th and 57th New York State Legislatures. In 1834, Seward was nominated as the Whig candidate for Governor of New York, but he lost the election to the incumbent Democrat William L. Marcy.

   

윌리엄 씨워드는 이 시기에 네덜란드 회사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이 네덜란드 회사는 암스텔담 열 세 명의 네덜란드 투자자가 뉴욕주과 펜실바니아주 부동산 투자를 목적으로 만든 회사이다.

   

The Holland Land Company was an unincorporated syndicate of thirteen Dutch investors in Amsterdam, who placed funds in the hands of certain trustees in America for the purpose of investing in land in central and western New York State and western Pennsylvania.

   

http://en.wikipedia.org/wiki/Holland_Land_Company

   

From 1836 to 1838, Seward served as agent for a group of investors who had purchased the over 3-million-acre (12,000 km2) western New York holdings of the Holland Land Company.

   

   

다음은 수반아님의 글이다. 수반아님이 자신의 글을 모두 자삭해서 수반아님 의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따로 링크를 걸지 않겠다.

   

"인월리 :

"미국 유태인 그룹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일찌감치 미국에 정착하여 부를 축적한 은행가, 노예주들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터전을 잡은 이들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바로 이 계열이다. 반면 1880년 이후로 쏟아져 들어온 동유럽 유태인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계급이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아일랜드인이나 다름없었다. 국제유태금융가들은 흑인처럼 아일랜드인, 이태리인과 더불어 동유럽 유태인들을 경멸했다."

   

( 수정 : (5) 루즈벨트 가문과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내용이 불충분해서 전체를 지우고 다시 썼습니다. )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설립한 식민지 지역을 <뉴네덜란드>라고 부르고,

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설립한 식민지 지역을 <뉴잉글랜드>라고 불렀더군요.

   

   

   

뉴네덜란드의 짧은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621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설립됨 - 아메리카 신대륙 식민지 개척을 위해서.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신대륙 동부해안에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시) 건설.

1628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뉴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개혁교회> 설립 - 식민지 공식 종교기관으로.

1650년대 무렵부터 뉴네덜란드와 뉴잉글랜드가 충돌

1664년 뉴잉글랜드가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여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다.

167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해산.

   

뉴네덜란드의 역사는 약 50년 뿐이 안되네요. 

이후 아메리카 신대륙은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루즈벨트 가문은 1650년대에 네덜란드에서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온 후손으로,

당연히 전통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멤버입니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1858~1919)와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882~1945)는

그들의 조상처럼 <네덜란드 개혁교회> 멤버였습니다.

(*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는 나중에 성공회 멤버가 됩니다.)  

   

뉴잉글랜드와 뉴네덜란드 지역을 확대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빨간색 뉴잉글랜드 지역은 영국 청교도들이 와서 정착한 곳이고,

노란색 뉴네덜란드 지역은 네덜란드 인들이 와서 정착한 곳입니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 9개 대학> 중 청교도가 설립한 3개 대학은 모두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고, 

   

하버드 (매사추세츠)

예일 (커넥티컷)

다트마우스 (뉴앰프셔)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설립한 대학은 뉴네덜란드 지역에 있습니다."

   

예서, 인드라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윌리엄 씨워드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친구, 썰로우 위드를 만났기 때문이다.

   

 Seward entered politics with the help of his friend Thurlow Weed, whom he had met by chance after a stagecoach accident.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H._Seward

   

썰로우 위드는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세기 중반 미국 정가를 배후에서 움직인 거물 정치인이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부터 링컨까지 무려 6 명의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킨 킹메이커인 게다.

   

Thurlow Weed (November 15, 1797 – November 22, 1882) was a New York newspaper publisher, politician, and party boss. He was the principal political advisor to the prominent New York politician William H. Seward and was instrumental in the presidential nominations of William Henry Harrison (1840), Henry Clay (1844), Zachary Taylor (1848), Winfield Scott (1852), John Charles Frémont (1856) and Abraham Lincoln (1860).

   

위드는 또한 반메이슨운동의 지도자였고, 안티 메이슨당과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Weed was a vocal member of the Anti-Masonic movement. In 1825, he bought the Rochester Telegraph, but was forced out in 1828 by Masonic interests. Subsequently, he founded the Antimasonic Enquirer, which became the voice of the Antimasonic movement in New York. That year, Weed again supported John Quincy Adams and worked to align the strong anti-Masonic movement in New York with the national Adams organization. Adams' political supporters were key players in the development of the Whig Party, and that party soon absorbed the Anti-masonic movement in New York, giving Weed a new home in a more mainstream and larger political organization.

   

위드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독립 전쟁 후 신문사에서 일하는 동안 정치계 인사와 연을 맺은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드위트 클린턴이다.

   

Weed became interested in politics while working with the newspaper, and was an early supporter of DeWitt Clinton.

   

드위트 클린턴은 뉴욕시장과 뉴욕주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뉴욕주지사 때 행한 이리운하가 유명하다. 뉴욕주지사 시절 드위트 클린턴은 극렬한 반대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해서, 당시엔 이 운하를 '클린턴의 멍청한 짓(Clinton's Folly)'이라고 폄하했다. 일부에선  '클린턴의 하수구'라고까지 비아냥댔다. 허나, 이 뱃길은 그러나 나중에 '돈길'이 되었다.

   

헌데, 드위트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었다.

   

Clinton was a Freemason, and in 1806, he was elected Grand Master of the Grand Lodge of New York. He retained this title until 1819. The Grand Lodge of New York has established The DeWitt Clinton Award. The Award recognizes distinguished or outstanding community service by non-Masonic organizations or individuals whose actions exemplify a shared concern for the well-being of Mankind and a belief in the worldwide brotherhood of Man.[3]

   

헌데, 드위트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인데, 드위트 클린턴 덕분에 정계 입문한 위드는 안티 메이슨이다? 어찌된 일일까?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 정권에서 국무부 장관이 된 버지니아파 매디슨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In 1812, Clinton ran fo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s candidate for both the Federalist Party and a small group of anti-war Democratic-Republicans. In the close Election of 1812, Clinton was defeated by President Madison; Clinton received 89 electoral votes to James Madison's 128.

http://en.wikipedia.org/wiki/DeWitt_Clinton

    

버지니아주(州) 출생. 1776년 버지니아 식민의회 의원, 1784~1786년 버지니아주의회 의원, 1787~1788년 대륙회의 대표를 역임하였다.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는 버지니아 대표로 출석, 주로 헌법초안 기초를 맡아 '미국헌법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후 1789~1797년 연방 하원의원, 1798년 연방파가 제정한 외인법 및 치안법에 반대, 버지니아 결의를 기초하여 주권론(州權論)을 주장하였다. 1801년 T.제퍼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고 1808년 공화당 소속으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제퍼슨의 중립정책을 계승하였으나 마침내 1812년 미국-영국전쟁에 말려 들었다. 정치학자로서는 영국의 정치철학에 조예가 깊고 헌법옹호론으로 집필한 《The Federalist Papers》는 미국 정치학의 고전이 되었다.[출처]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 | 네이버 백과사전

   

   

드위트 클린턴이 대선에서 매디슨에게 패배한다. 하고, 드위트 클린턴 덕분에 정계에 입문한 위드가 반메이슨 선봉에 선다.

   

무슨 의미일까.

   

미국 프리메이슨이 분열한 것이다. 친영국 프리메이슨과 친프랑스 프리메이슨으로 찢어진 것이다. 미국 건국 전까지는 함께 했던 프리메이슨이었지만, 미국 독립 이후에는 갈라섰던 것이다.

   

보스턴 티파티. 이 사건은 프리메이슨이 포함된 이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벤자민 프랭클린, 대표적인 프리메이슨이다. 프랑스 프리메이슨에게 원조를 요청하여 프랑스 군대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다. 프랑스 참전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토머스 제퍼슨은 프리메이슨, 정확히 말하면, 일루미나티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에도 관여했다.  

   

간단히 정리하자. 제퍼슨 - 매디슨 - 앤드류 잭슨은 친프랑스 프리메이슨 계열이었던 셈이다. 반면, 이들과 반대편에 선 이들은 친영국 프리메이슨 계열이었던 게다. 이들간 쟁점은, 외교와 경제, 마지막으로 연방제였다.

   

외교는 당연 친영적이냐, 친불적이냐였다.

   

경제는 뉴잉글랜드적 공업 중심 국가 지향이냐, 버지니아적 농업 중심 국가 지향이냐.

   

행정은 잘 사는 버지니아주가 양보해라. 싫다. 남부 버지니아주만 잘 먹고 잘 살겠다.

   

해서, 1810년대를 통과하면서 프리메이슨 간 대결구도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위드는 정치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위드가 1824년 선거에서 존 퀸시 애덤스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In 1824, he was a strong supporter of the presidential bid of John Quincy Adams, and was able to use his influence to ensure Adams' victory in New York.[2]

http://en.wikipedia.org/wiki/DeWitt_Clinton

   

문제는 차기 대통령 선거였다. 프리메이슨이었던 앤드류 잭슨과의 대통령 선거는 이전 대통령 선거와 달랐다. 이전까지는 돈 좀 있는 백인, 재산권이 있는 백인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헌데, 이때부터 모든 백인에게 선거권을 준 것이다. 여전히 여성과 흑인 등 유색인종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지만.

   

해서, 이 시기, 미국에서 최초의 포퓰리즘 선거가 진행된 것이다. 대중에게 한 방에 먹힐 수 있는 정치 구호를 내세워라! 그것이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의 중앙은행 공격이었다.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은 대중의 적개심 향방을 은행가다, 라고 지목하였다. 왜냐하면 상대가 애덤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상대가 애덤스가 아니었다면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은 연방은행에 대한 반대에 나섰을까? 더 나아가 만일 앤드류 잭슨 출신이 오하이오주가 아니라 버지니아주였다면 보다 강력하게 반대했을까. 앤드류 잭슨은 자신의 반영 전사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최초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답게 연방은행 문제를 이슈화시킨 것이다. 연방은행의 기한은 1936년, 1928년부터 따지면 8년 뒤이니 연임을 해먹기 딱 좋은 이슈였던 셈이다.

   

예서, 시대정신이나 쑹훙빙이나 이리유카바최는 중앙은행과 금본위제 운운을 한다.

프리메이슨,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영국왕 '조지 3세'가 미국의 독립적 화폐생산사용권을 금지하고 영국의 중앙은행에서 이자와 함께 화폐를 빌리도록 강제해 미국이 갑작스럽게 빚을 안게 된 데 있었습니다. '조지 3세'는 영국의 화폐지배권에서 벗어나려는 미국의 독립적 통화시스템을 불허했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주요 명분이 됐다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기록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금융가들의 '중앙은행'이자시스템과부패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http://blog.naver.com/lucas0213?Redirect=Log&logNo=40092432975

   

   

인드라는 웃기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간단히 말한다. 20세기에 미국연방준비은행을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윌슨이나 이후 프랭클린 루즈벨트나 아이젠하워, 케네디 이런 대통령들 말을 보아라.

   

언론플레이와 실제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오늘날 '월가를 점령하라'에 지지 의사를 보내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가장 후원금을 많이 낸 이들이 월가인 게다.

   

언플이다.

   

인드라가 간단하게 반박하겠다. 유럽에서 중앙은행과 금본위제가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나라라고는 1816년 영국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 한 독일조차도 1871년, 미국이 1873년이다.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19세기 말엽에 가서야 금본위제를 한 것이다.

   

하면, 이들 국가에서 왜 금본위제를 하지 않았을까? 로스차일드 영향력이 없어서? ㅎㅎㅎ. 아니다.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이다.

   

왜? 각국은 아직 제국주의할 능력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가 지시해야 제국주의를 실시할 수 있기에. 하면, 각국은 왜 로스차일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나? 세계 자본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이전까지 로스차일드는 각국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잘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스차일드가 중국을 비롯한 제 3세계 공략이 영국 혼자로서는 힘들다고 판단하여 유럽 각국 용병의 힘을 빌리고자 제국주의를 선언한다. 그 선언의 뒷받침은 물론 실탄이다.

   

한국 경제 개발, 어떻게 이루어졌나? 박정희 때 자금이 없어서 쩔쩔 매지 않았나? 독일 역시 절망 상태에서 국유본 자금 받고 일어선 것 아닌가. 일본 역시도 정신줄 놓았다가 625 전쟁 덕에 살아난 것 아닌가. 모택동은 국유본이 자금을 안 주니까 대약진 운동이 대실패했다.

   

독일이나 미국이나 오스트리아나 러시아나 일본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국유본 자금 없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일본은 국유본 자금으로 국유본 배와 무기를 사서 국유본이 훈련시킨 전략전술로 러시아에 승리했을 뿐이다.

   

게다가 미국은 지금과 달리 그리 큰 시장이 아니었다. 땅덩어리가 크다고 해서 착각하지 않았으면 싶다. 불과 십수년 전까지 세계 금융시장에서 러시아,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였나. 암 것도 아니었다. 미국 독립할 때 미국 금융 역시 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드라는 미국 독립 배경에는 국유본의 치밀한 계산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대목은 추후 미국 독립 부문을 따로 설명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친프랑스 프리메이슨파가 선거 전략으로 썼던 것일 뿐이다. 실제로 제퍼슨 등 버지니아 파벌은 선거 때만 영국을 비난하다가도 막상 대통령이 되면 입 닥치고 영국 눈치보기 바빴다. 매디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 국유본이 영국을 움직여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프랑스 프리메이슨이 지원 요청을 했다. 이때, 미국 프리메이슨은? 말만 도와주네, 마네 하더니 결국 영국 눈치만 보면서 손가락 빨고 있었다. ㅋㅋㅋ

   

하여간, 미국 선거에서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이 승리했다. 은행가 타격은 효과적이었다.

   

이에 복수심을 품은 위드의 반격. 그것이 바로 안티 메이슨 운동이었던 셈이다.

   

 - 너희가 중앙은행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프리메이슨을 공격하겠다.

   

1826년에 이르면, 미국 메이슨은 오만 명에 달했다. 당대 프리메이슨이 일당 백 실력이었던 만큼 수천 명 수준도 미국을 장악할 수준인데, 오만 명이면 대단한 것이다.

   

이 시기 메이슨이었던 윌리엄 모건 대위가 프리메이슨의 해악을 담은 책을 출판하려 하다 죽는다. 그는 죽은 후 1827년 그가 쓴 "30년 동안 헌신했던 한 형제가 쓴 메이슨의 실상"이란 책이 유작으로 출간한다. 1829년 여론의 압력을 받은 뉴욕 주 상원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조사를 단행해 "프리메이슨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고, 언론도 프리메이슨의 위세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프리메이슨이었던 잭슨 대통령에 대항해 위드가 중심이 되어 반메이슨 정당이 들어선다. 이들은 1832년 선거에서 반 메이슨 정당의 후보들은 각 주와 지방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잭슨을 물러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때, 위드는 절감했던 것이다. 정책만으로는 사람들 마음을 돌릴 수 없다. 정책과 인물이 함께 가야 한다. 인물 50, 정책 50이었던 셈이다.

   

정리하자.

   

위드와 앤드류 잭슨과의 투쟁으로 인해,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은 자취를 감춘 셈이다. 오늘날 국유본이 가끔 영화에서나 써먹을 정도인 프리메이슨일 뿐이다. 1830년대 이후로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은 죽었다.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은 아마도 한인 사회 영향력보다 낮지 않을까 본다. 물론 다 죽은 프리메이슨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역시 국유본 마음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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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이 무늬만 한국인이라고 비난질해대는 쪽발찌라시 한경오프 넘들아.

그러니까 니 애비가 쪽발이인 거야.

한국인이 잘 나가니까 배가 아프지?

쪽발이가 한반도를 지배해야 되는데, 그래야 씨발넘들이 잘 먹고 잘 사니까.

삼대를 멸족할 쪽발이 색희들아~!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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