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은 왜 신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2 05:03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09983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5 : 유럽인은 왜 신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나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2
러시아의 인구가 1위로 가장 많고, 그 뒤를 독일, 프랑스가 따르고 있다. 유럽의 인구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의 순서였다. (2005년 현재)
러시아 1억 4340만 명
독일 8240만 명
프랑스 약 6080만
영국 약 6030만
이탈리아 5810만
우크라이나 4742만
에스파냐 4000만
폴란드 3810만
루마니아 2169만
네덜란드 1600만
19세기 유럽은 혁명의 시대였다.
인류 대부분이 북반구에 살던 세계는 18세기 말엽부터 소빙하기가 물러가는 기미를 보이더니 1850년대에 이르러 소빙하기가 끝났다. 이에 따라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지역은 유럽이다. 상기한 인구 통계에서 보면, 다른 지역 평균보다 월등하게 175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유럽 인구가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음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 유럽 인구 상당수가 신대륙으로 이주한 것을 감안하면, 3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는 유럽에는 구소련 지역을 제외하고 약 4억 9800만(1990)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평균 인구밀도는 101인/km2으로 세계 평균의 2.5배 이상이나 되며, 오세아니아의 33배나 된다. 대륙별로는 아시아 대륙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다.
약 2,000년 전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지역에 거주했던 인구는 3300만에 불과했다. 농업이 경제 활동의 중심인 당시에는 유럽 전체 인구의 50 %가 남부 유럽에 거주했고, 20 %가 서부 유럽에,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 각각 10 % 및 9 %가, 그리고 북부 유럽에는 1 % 미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 후 인구는 점차 증가하여 1000년경에는 3800만이 되었고, 1340년에는 7000만으로 늘어나 서기 원년의 배가 되었다. 1340년의 7000만 인구 중 남부 유럽에 거주한 인구는 30 %였고, 서부 유럽 지역에는 영국을 포함하여 35 %로 늘어났고,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 지역에는 각각 16 %, 7 %로 증가 또는 감소되었다.
1750년대 이후부터는 많은 해외 이민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750년 1억 4000만의 인구가 1950년에는 5억 5000만으로 증가하여 200년 동안에 유럽의 인구는 3배 이상 늘어났다. 70년대의 인구분포를 보면 남부 유럽 지역에는 17 %의 인구가 거주하였고, 영국을 포함한 서부 유럽 지역에서는 22 %를 차지하였으며,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 지역에는 각각 15 %, 17 %가 되었다. 유럽의 러시아 지역에는 서기 원년에 유럽 총인구의 9 %만이 분포했으나 1970년에는 26 %로 크게 증가되었다.
과거 150여 년간에 적어도 6000여 만의 인구가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동하였고, 1700여 만 정도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로 이동하였다. 신대륙으로 이동한 6500만 중 4500여 만은 미국과 캐나다로, 나머지 2000만 정도는 중 ·남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들 유출 인구의 1/3 정도는 영국인이었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이 1/3 정도, 그리고 나머지 1/3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부 유럽과 북부 유럽 여러 나라가 차지하였다."
상기한 유럽 인구 분포 동향을 보면, 절대 다수이던 남유럽 인구 비율이 주는 반면, 중세에는 서유럽 인구 비율이 확대하고, 근대로 올수록 동유럽 인구와 러시아 인구 비율이 급증함을 알 수 있다.
날씨 때문이다. 남유럽과 서유럽은 소빙하기에도 지중해성 기후와 멕시코 만류 덕분에 사람 살기가 좋을 만큼 날씨가 춥지 않았던 반면 중북부 유럽과 동유럽,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성 기후로 사람 살기에는 혹독했다.
헌데, 지구 기후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하듯, 간빙기 중에도 소빙하기가 있는 것이다. 지난 십자군 전쟁 때는 상대적으로 따듯한 중세온난기 시대였다면, 1650년에서 1850년까지는 소빙하기 시기였던 것이다.
해서, 소빙하기 시기가 끝나가는 만큼 날씨가 점차 따뜻해졌고, 그에 따라 양질의 경작지가 늘어나고, 그만큼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맬더스가 '인구론'을 들고 나올 만큼 땅은 그대로인데, 인구가 폭발했다.
"마르크스는 파리 시절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본산인 '대 동방종단'에도 입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015
당대에 맑스를 공격한 이로는 아우구스트 빌리히가 있다. 1850년 아우구스트 빌리히는 맑스를 '반동'이라 비난하였으며, 그해 9월 1일에 열린 '동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빌리히는 맑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이에 대해 맑스는 결투 신청을 거절하는 '비겁함(?)'을 보였지만, 대신 결투를 받아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으니 콘라트 슈람이다. 그는 명사수 빌리히와 대담하게 맞서지만, 쓰러지고 만다. 해서, 다들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총알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서 기절한 것을 빌리히 측이 죽은 줄 오인했던 것이다. 이처럼 콘라트 슈람은 맑스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콘라드 슈람은 오랫동안 미국에 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온다. 이 시기 맑스는 신라인신문 정치경제평론지 발간을 위해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다. 이때, 맑스가 뉴욕트리뷴지에 기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프리메이슨. 위드, 찰스 앤더슨 데이나, 콘라드 슈람, 맑스, 헨리에테, 필립스, 코헨, 로스차일드...
"유대인 맑스는 음흉하고 시류에 민감한, 그렇고 그런 약삭빠른 유대 놈들에 둘러 싸여 있다. 모든 곳에서 상업, 은행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문필, 학계, 정계, 또는 각종 색깔의 언론계에 있는 유대인들은 문학과 지식, 정보의 브로커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유대인은 한 발은 사회주의 운동에, 또 한발은 자본주의에 담고 있으며 독일 언론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 놈들은 모든 신문사들을 거머쥐고 있다. 거기서 그 어떤 메스꺼운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올 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나의 거대한 착취적 종파, 거머리의 민족, 왕성한 식욕을 가진 기생충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는 이 유대인 세계는 오늘날 전체적으로 맑스와 로스차일드의 손끝에 놓여 있다. 나는 로스차일드는 맑스에게, 그리고 맑스는 로스차일드에게 본능적인 경외심을 품고 있을 거라 확신하다. 어떤 이에겐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와 국제금융자본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호 호! 맑스의 공산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한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있는 곳에 중앙은행이 있으며 또한 기생충 같은 유대민족이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인민을 더욱 악착같이 착취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살찌울 것 있다... 실로 맑스가 주창하는 사회는 진짜 프롤레타리아들에겐 노예수용소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제복을 입은 노동자 남녀는 북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들고, 일할 것이다. 이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은 영리한 유대인 소수에게 돌아갈 것이며 이들은 중앙은행들의 국제적 연결망을 통한 가렴주구로 만국 민중의 노동을 착취할 것이다. - 바쿠닌"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제 1 인터내셔널, 국제노동자협회 권력을 놓고 맑스와 자웅을 겨뤘던 불세출의 혁명가였다.
"트베리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이 되었으나, 1834년 군대에서 나와 모스크바로 갔다. 여기서 스탄케비치 서클(19세기 초에 이루어진 모스크바의 문예서클)에 가입하여 벨린스키, 헤르첸 등과 교제하였으며, 독일철학(특히 헤겔)을 공부하였다. 1840년 유럽으로 나와 점차 혁명적인 범(汎)슬라브주의와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붕괴와 모든 슬라브민족의 연방을 기대하여, 1848년 프라하의 봉기와 1849년 드레스덴의 봉기에 참가하였으나, 체포되어 러시아정부에 넘겨져, 1857년 시베리아에 유형되었으나, 1861년 탈출하였다.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에 참가하였으며, 1864∼1868년 이탈리아의 혁명운동에 관계하였다. 1868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사회민주동맹을 설립, 제1인터내셔널에서는 마르크스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의 급진적인 무정부주의는 에스파냐 ·이탈리아 ·러시아의 혁명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신과 국가》(1871) 《국가와 무정부》(1873) 등이 있다."
[출처] 미하일 바쿠닌 [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 | 네이버 백과사전
젊은 시절 그 당시 청년들의 로망인 나폴레옹적 열망으로 프리메이슨에 깊이 심취하여 프리메이슨 조직에 가입했다. 허나, 바쿠닌은 프리메이슨이 별 볼 일이 없으니까 실망을 하고 탈퇴했다. 이후, 프리메이슨 조직 원리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조직을 만드는 데에 평생을 몰두했다. 맑스와 미묘하게 다르면서 같은 길을 걸은 셈이다. 맑스 역시 프랑스 대동방 프리메이슨과 그 산하, 의인동맹에 들어갔다가 의인동맹을 자신의 조직으로 만든 뒤에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니까.
하면, 러시아 귀족, 바쿠닌이 왜 프리메이슨에 빠져든 것일까.
18세기 독일 출신의 유럽 강대국 황제들은 프리메이슨에 우호적이었다. 각국 귀족들은 대체로 국왕파 대 귀족파, 혹은 국왕파 대 교황파이기 마련이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떠올리면 될 듯. 해서,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당대 황제들은 귀족파/ 교황파의 권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우호적이거나 묵인했다.
여기에 예카테리나 2세, 혹은 예카테리나 대제가 있었다.
"프로이센 슈테틴 출생. 독일의 작은 공가(公家)에서 태어났다. 1745년, 후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3세에게 출가한 뒤 남편의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즉위한 지 얼마 안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불렀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法典)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유명한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만년(晩年) 특히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외정(外政)면에서는 두 차례의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
[출처] 예카테리나 2세 [Ekaterina II ] | 네이버 백과사전
예카테리나 대제가 편지를 주고받은 영국 유학파, 볼테르가 프리메이슨이었다. 인드라는 볼테르하면 철가면 음모론부터 떠올리곤 한다.
철가면 이야기는 볼테르가 루이 14세 엿먹이려고 꾸민 가짜 이야기
http://blog.naver.com/medeiason/120141781751
예카테레나 대제는 여걸이었다.
"(3) 남자도, 나라도 정복한 러시아의 대제 에카테리나
독일의 딸로 러시아 여제가 된 에카테리나 2세(1729∼1796)는 사랑과 색으로 충만했던 로코코시대에서도 가장 출세한 여인 중 하나였다.
에카테리나 2세의 본명은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 체르프스트. 눈을 내리깔고 얌전을 떨던 유럽식 궁중예절이 몸에 밴 이 15세 소녀는 시녀 몇만 거느리고 러시아의 여왕 엘리자베타 여제의 궁전으로 들어갔간다. 그녀가 머나먼 이국 땅으로 시집오게 된 것은 왕족 간에 피를 섞어 동맹국을 만드는 혼인정책, 즉 정략결혼제도가 전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침한 아우구스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타고난 지략을 동원해 러시아 왕궁을 조금씩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문제였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노골적인 파티와 그에 뒤이은 호색으로 백성들에게서 원성을 듣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 3세는 이 소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빨리 후손을 보기 원하던 모후 엘리자베타는 참다 못해 자신의 손으로 젊고 매력있는 귀족들을 골라 매일 며느리의 침실에 조용히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러시아 황실은 고대하던 황세자의 첫 울음소리로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왕이 된 표트르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신과 황후만이 안다"며 싸늘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한편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협조(?)로 방중술을 완전히 마스터한 에카테리나는 황제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정염의 화신으로 농익어갔다.
어느 날 에카테리나는 표트르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됐다. 당하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카테리나는 넘실대는 풍성한 금발을 군모 속에 집어넣고 군인으로 변장,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실을 점령해 버렸다.
33세의 에카테리나는 드디어 러시아라는 대국을 손에 넣고 우유부단했던 황제 표트르를 멀리 내치는 한편 러시아 군정을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높이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 개인의 삶은 더 화려했다. 어린 나이에 엘리자베타 여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에 눈을 뜨게 된 그녀의 성생활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하룻밤에 여러 남자를 그로키 상태로 만들 정도로 왕성해졌다. 이 소문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여성 이상의 여성'임을 자임하기 시작한 에카테리나 2세는 잠자리 역시 다른 여성과 다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집권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한 까닭에 예카테리아 대제는 프리메이슨 사상 등에 적극적이었다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국왕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프리메이슨을 단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계몽군주라 자처했던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사건은 프리메이슨이었던 평등공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평등공은 왕가 신분을 던지고 평민을 선언하여 평등공이라 하여 명성이 높았다. 헌데, 프랑스혁명이 걷잡을 수 없는 길로 치닫는 동시에 대내외적으로 프랑스혁명 배후에 프리메이슨이 있고, 프랑스 혁명 목적이 평등공을 전유럽의 프리메이슨 대왕으로 만들고자 함이다, 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당황한 프랑스 혁명 지도부격인 대동방파는 도마뱀꼬리 자르기 식 희생양으로 평등공을 단두대에 보낸 것이다. 결국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프랑스 대동방파는 내부적으로도 분열하여 자체 붕괴하고 만 것이다.
하여, 유럽 각국 왕들은 이전까지 귀족파/교황파를 견제할 국왕파의 사상이었던 프리메이슨 사상이 국왕파의 목을 조르는 사상이 되었으니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대제 역시 태도를 돌변하여 프리메이슨을 금지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1821년에 이르면 프리메이슨 금지법을 만든다. 허나, 이미 이 시기 러시아 귀족 사이에서는 프리메이슨 사상이 널리 퍼진 뒤였다.
예카테리나, 그녀는 폴란드 분할 통치의 장본인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 혹은 예카테리나 대제는 폴란드왕 스타니슬라브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면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해서 오스트리아가 국경을 맞닿는 데에 큰 위협을 느꼈다. 해서, 프러시아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중재에 나서서 하인리히 왕자를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냈다. 그 자리에서 예카테리나 2세는 프러시아의 분할안을 찬성한다. "폴란드에서는 욕심나는 것이 있을 때는 그저 몸을 구부려 집어들기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빈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가져가려면 다른 이웃나라들도 똑같이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3 명의 독일계 황제들은 폴란드를 3차에 걸쳐 분할하여 유럽 지도에서 폴란드를 지워버렸다.
"폴란드는 1025년에 첫 왕이 등극하면서 국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그 땅에 유태인이 들어간 최초 기록은 966년 스페인 - 당시는 아랍령 - 외교관이자 상인이며 여행가이던 이브라힘 이반 야콥의 기록에 나옵니다. 최초의 유태인 공동체는 1085년경부터 존재했다고 나옵니다. [유태인 학자 예후다 하코헨의 기록] 당시 폴란드 주화들은 유태인들에 의해 찍혀졌고 출토되는 당시 주화들에는 여러가지 히브리어와 유태문양이 새겨있습니다.
1098년 십자군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있자 폴란드 왕들은 유럽국가들과 달리 유태인 초빙 쪽으로 국가시책을 정하는데 국가부흥을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군 학살로 인해 첫번째 대규모 유태인 이주가 이루어지며 1240~1241 년에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폴란드가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그것을 복구시킬 인력으로 당시 유럽사회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선 유태민족의 이민을 적극 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유럽 각국에서 추방과 학살 대상이던 유태민족은 폴란드를 그 피난처로 삼게 됩니다.
1264년 유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칼리쯔 장전"이 나왔습니다. 칼리쯔 장전은 기독교인과 유태인이 싸울 경우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동수로 증인과 판사가 되게 하며 유태인의 거처에는 유태인의 허락이 없으면 기독교인은 못 들어가게 하는 등, 폴란드의 소수인구이던 유태인에게 매우 유리하게 한 칙령으로, 그 목적은 폴란드 왕실의 재정을 빌려주는 입장이던 유태인이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하게 묶어두기 위한 의도였으나 그 덕분에 유태인은 폴란드에서 유럽다른 지역과 달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에게 강제개종과 학살, 화형, 마녀재판, 추방이 휩쓸고 있던 중서유럽과 달리, 폴란드는 종교자유를 누리면서 유태인공동체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좋은 피난처 나라가 되어주었습니다. 여러 폴란드 왕들이 십자군을 피해 입국한 유태인들에게 관용책을 폈으며 유태인은 폴란드와 이웃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키에브까지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폴란드는 가장 많이 유태인들이 거주하는 나라가 되고, "유태인의 낙원"으로 불리웠습니다. 종교자유 시책 덕택으로 유태교가 번성하면서 폴란드는 탈무드정리,편찬사업과 각종 유태교분파의 발전, 또 히브리어의 모체가 된 이디쉬어 등 유태교의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inter:001039&uid=128898
폴란드는 중세 스페인계 유태인과 하자르계 유태인의 융합로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서유럽에서 추방당한 스페인계 유태인 중 일부가 폴란드로 간 것이다. 하고, 이들 스페인계 유태인을 중심으로 러시아 등지에 있던 하자르 유태인이 적극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서, 이들 언어가 독일계 방언이라는 의미에서 이디쉬어가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스페인계 유태인과 하자르계 유태인간 혼혈 확율이 매우 낮았을 것으로 본다. 혼혈이 많이 이루어지는 미국조차 혼혈율이 고작 3%라고 한다. 해서, 극소수의 스페인계 유태인과 다수의 하자르 유태인으로 유태사회 내부에서도 계급 사회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헌데, 폴란드 역시 유태인에게 직업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유태인은 폴란드의 종교 자유 시책으로 종교 부문만을 키웠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시오니즘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드라는 시오니즘이 발생한 배경이 폴란드 유태인 사회 내부의 문제가 아닐까 본다. 즉, 폴란드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극소수 스페인계 유태인은 교리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가진 게 없는 하자르 유태인은 같은 유태인이면서 자신들이 가난한 이유를 종교적으로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서, 유태인을 영혼이 살아 있는 유태인과 영혼마저 썩어버린 유태인으로 구분하면서 교리를 강조했을 것이다.
후일 미국에 쏟아져 들어온 동유럽, 러시아 유태인들은 이전 유태인과 달리 유대교 교리를 매우 강조하는 입장이어서 유태인 모자 같은 것을 꼭 쓰고 다녔다. 이들이 하층 유태인, 천민 유태인인 것이다. 가난하니까 믿을 건 종교밖에 없는 것이다.
16세기 폴란드 지역 종교 분포
파란색이 루터파, 노란색이 카톨릭, 보라색이 칼뱅파, 초록색은 러시아 그리스 정교 등.
"카르파티아산맥 북쪽의 구릉과 평야로 된 지방으로, 주요 도시는 크라쿠프 ·리보프 등이다. 주민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며, 산업은 석탄 ·석유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14세기까지는 갈리치-볼리니아 공국(公國:키예프 공국에 속했음)이었으나, 그 후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1772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1918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로 분할되었다. 19세기에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지방이었으며, 정책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변경적 농업지역이 되었고, 대지주 귀족의 지배로 인하여 농민들의 봉기가 종종 있었다. 특히, 1819, 1824, 1832, 1846년의 봉기는 '갈리치아의 농민전쟁'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약화되었다. 서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소수민족문제로 분쟁이 잦았다. 동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에 점령되었으며, 1945년의 소련-폴란드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
[출처] 갈리치아 [Galicia ] | 네이버 백과사전
미국 이민사 설명을 보면, 1848년 이후로 독일계 이민이 급증한다고 나온다. 1848년 3월 농민혁명 실패로 인해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미국 이민한다는 것이다.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인드라는 원론적으로 계급투쟁적 관점에 서 있는 편이지만, 지나치게 정치일변도로 설명하여 경제적인 면을 간과하는 데에는 비판적이다.
http://ganseochi.egloos.com/3825681
http://nojas2856.blog.me/10107556172
독일 1948년 3월 농민혁명은 독일 남서부에서 일어났다. 헌데, 농민혁명이 실패했다고 농민들이 대거 이민했다? 하고, 이들이 모두 자유주의자이다? 정말 이민간 이들이 모두 자유주의자였다면 독일 혁명은 성공했을 것이다.
쉽게 가자. 배고파서 이민간 것이다, 아일랜드인처럼. 다만, 배고픈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닌 것이다. 충분조건이려면 몇 가지 조건이 더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에 어떤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당대 아일랜드인이나 폴란드인은 오늘날 말하자면, 북한 탈북 인민인 것이다. 다시 말해, 배고프다고 무조건 다 탈북하지 않는다. 배고파도 참는 인민은 있는 법이다. 허나, 배고픈 데다 나라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때, 탈북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른 조건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1850년대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와 함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생긴 셈이다. 해서, 이 시기 대대적으로 독일계 이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독일계라고 해서 독일인인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때 손기정은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그처럼 미국 이민심사대에서 독일인이라고 썼다 해서 다 독일인이 아닌 것이다.
장기간의 폴란드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의 독립 여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월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어 1918년 11월 독립국가로 재등장하면서 폴란드는 1918년에서 1939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폴란드는 이 기간 동안 러시아와의 전쟁(1920~21)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많은 이민족을 거느린 대국이 되었으나,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프랑스와의 협력관계가 독일과의 협력관계로 뒤바뀌면서 폴란드는 파시스트화되어 갔다. 폴란드 정부는 1932년에 소련과,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나 1939년 9월 1일 나치스 독일의 침입이 시작되어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다. 나치스 독일은 점령 후 대량 학살의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어 역사에 오점이 된 잔학한 살상을 자행했다.
"나치 독일 점령 후 수립한 망명정부는 나치에 의한 파리 함락 후 런던에서 활약하였으며, 국내에는 망명정부 지휘 하의 국내군(國內軍)과 폴란드 노동자당이 편성한 인민군 등이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1945년 해방되었으나 1944년 8월 국내군이 일으킨 대(對)독일군 무장봉기인 '바르샤바 봉기'는 그 평가를 둘러싸고 큰 문제를 남겼다. 바르샤바 봉기로 시민 24만 명이 사망하고, 63만 명이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피살되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국민 재산의 38%에 해당하는 재산피해를 입었으며, 제2차 대전 전후(戰後) 처리 결과 폴란드 동부지역이 소련 국토에 편입되는 대신 독일 동북부지역이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국경선은 과거에 비하여 상당히 서쪽으로 이동된 것이다."
[출처] 폴란드 독립과 제2차 세계대전 | 네이버 백과사전
폴란드인의 독립 열정은 유태인 못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 내내 독립투쟁을 벌였다. 일차대전 때는 수많은 미국계 폴란드인들이 폴란드 독립을 위해 폴란드로 건너가서 독립투쟁을 하기도 했다.
"현재 독일인들의 성씨를 보면 슬라브계가 많은 것을 알 수있다. 이들은 대부분 슬라브인 조상을 둔 독일인일 것이다. 반면 폴란드와 체코를 지나 동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보면 독일계 성씨를 가진 사람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을 만큼 그 존재가 희박하다. 원인이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인, 스칸디나비아인, 네덜란드인, 프리지아인, 미국인 못지 않게 체코인, 폴란드인 을 포함한 서슬라브인이 독일인과 인종적으로 연관이 많다고한다. 서슬라브인은 언어계통 측에서 본다면 분명 슬라브인이지만, 인종적으로는 같은 동류의 남슬라브, 동슬라브인보다는 독일인에 연관이 깊다고한다. (Germans are closely related to other Western Germanic peoples such as the Austrians, Frisians, English, Liechtensteiners, Dutch, and Luxembourgers, as well as West Slavs, especially Czechs.)"
문제는 폴란드인과 폴란드계 유태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폴란드인이나 폴란드계 유태인 모두 역사적으로 독일에 호의적이었다. 친독파였던 셈이다. 해서, 독일계 유태인 등이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에 독일 통일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런 친독적 성향이 갈리게 되는 때는 히틀러 집권 이후 2차 대전 때부터인 게다.
상기한 그림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에서 260,000만명이 이주했다고 나온다.
정리하면, 초기 독일계 미국 이민자들은 용병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독일 용병은 유럽에서 유명했으니까.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군으로 참전한 용병도 대개가 독일 용병들이었다. 허나, 19세기 중후반부터 미국으로 간 독일인들 중에는 독일인도 있지만, 상당수는 겉은 독일인이지만, 폴란드 3국 분할로 더이상 유럽에 미련이 없는 폴란드인, 혹은 정체성이 모호한 이들이 다수였을 것이다. 하고, 그들 중에 일정 비율로 유태인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농촌 같은 데서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베를린이나 빈에 가본다. 일자리가 없다. 파리로 간다. 벨기에로 간다. 파리나 벨기에에도 일자리가 없다.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도 일자리가 없다. 미국으로 간다.
맑스가 독일에서 파리, 벨기에, 런던으로 움직였고, 맑스한테 권력투쟁에서 패한 바이틀링이 미국으로 가는데, 이 경로가 당대 일자리 루트, 인력공급업자들의 루트였을 것으로 본다.
간헐적으로 미국 이주를 하였다.
1840년대 흉년이 닥치고 게다가 감자마름병이 발생하여 유럽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1850년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농노제를 폐지한다.
이후 독일계 농민들이 대거 미국 이주하였다.
이중 일부가 독일계 유태인이었다.
즉, 유태인이 독자적인 이유로 미국 이주를 한 것이 아니라
독일계 농민들이 대거 미국 이주하니 그중에 유태인도 거주 비율로 함께 이주한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이 공업화 정책에 성공하고 일자리가 늘어나자
독일계 미국 이주민이 확 줄어든다.
그후에 들어오기 시작한 농민들이 마피아로 유명한 이태리 남부, 폴란드, 우크라이나 지역 러시아인들인 게다.
즉, 미국 이민의 주 공급 지역이 이전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북유럽 등이었다면, 19세기 말 이민의 주 공급 지역이 남부 및 동부 유럽인들(이탈리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그리스인, 슬라브인 등등)로 바뀌어서 산업노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볼 수 있듯, 농촌을 떠나는 이농 현상이 발생하는데, 도시에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일자리는 없다. 이들 잉여 노동력들은 캘리포니아에 금광이 발견했다 소문이 퍼지면 골드러시로 미국행을 하는 등 그때그때마다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아오는 동남아시아 노동력처럼.
해서, 국유본의 미국이나 호주 이민정책 방향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 백인 우위여야 한다. 흑인은 몰라도 황인종은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흑인은 쪽수가 많아도 상관이 없다. 국가 경영 능력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바가 전혀 없다. 반면, 황인종은 쪽수도 많은 데다 국가 경영 능력이 있으므로 아주 어려운 사정이 아니면 황인종 이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일타 삼피.
유럽의 잉여 노동력을 미국으로 보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 실제로 영국 런던에서는 19세기 중엽 당국의 지원을 등에 입은 프리메이슨(?) 인력공급업 회사들이 부랑자들을 납치해서 미국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발을 위해서는 인력이 필요했으며, 미국 공업화를 위해서는 잉여 노동력이 필요했다. 19세기 초반에 이르르면서 영국, 스코틀랜드, 북유럽 인력 공급이 한계에 다다른다. 해서, 미국 중서부를 개발할 독일계 이주민이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금광 개발 때는 25만명 정도의 프랑스인을 이주시킨다.
단, 국유본이 원하는 정치사회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백인 우세가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국유본이 지금까지는 한반도를 폴란드와 유사하게 보았다는 점이다. 특히 폴란드 유태인 출신 브레진스키가 대표적이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판들이 만나는 지점에는 충돌이 일어나 지진이 발생하는데, 지정학에서는 정치적 충돌이 잘 일어나는 지역을 발칸 지역으로 부른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인드라가 간다.
인드라의 목표는 한반도를 발칸 지역에서 졸업하게 하는 것.
"2002년의 인구 조사에서는 1억 4500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다. 대략 러시아의 인구의 78% 정도인 1억 1000만 명이 유럽 쪽에 거주하고, 나머지 인구인 4,200만명이 아시아 쪽의 시베리아 등에 거주한다. 2002년의 조사에서는, 전체 인구의 79.83%인 1억 1588만 9107명을 러시아인이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유대인 22만9,938명 (0.16%) 고려인 14만8,556명 (0.10%)"
http://ko.wikipedia.org/wiki/%EB%9F%AC%EC%8B%9C%EC%95%84%EC%9D%98_%EC%9D%B8%EA%B5%AC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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