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 로스차일드, 칼 맑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31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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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4 : 국제유태자본, 로스차일드, 칼 맑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31

   

이 글은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중심으로 인터넷 자료를 참조하여 썼다. 평전 작가하면 유태인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데 그가 맑스 평전을 쓰지 않아 매우 아쉽다.

   

   

   

   

1. 칼 맑스의 아버지는 변호사, 하인리히 맑스

   

칼 맑스의 아버지, 히르셀 맑스는 칼 맑스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파로 개종했다. 개종한 뒤로는 하인리히 맑스가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법이 바뀌어 유태인의 직업 제한 규정 탓에 종교를 그대로 유지하고서는 변호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맑스의 변호사 능력은 어떨까.

   

   

<18세 생일 직후 칼 맑스는 약한 가슴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병역 기피 의혹은 맑스 아버지가 징집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준 편지를 보내준 것으로 뒷받침된다. "가능하다면 그곳에 있는 유능하고 유명한 의사의 확실한 확인서를 받아두도록 해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네 양심에 거리낄 일은 없을 게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중에서>

   

   

변호사 일을 그다지 잘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금이 좀 드는 방법을 아들에게 소개했으니까.   

   

허나, 칼 맑스의 히르셀 맑스는 부자였다. 모젤에 포도밭 몇 개를 소유할 정도였다. 맑스가 태어난 독일 트리어 지역은 라인란트 지방이라 부르는데, 이 지역 로망은 프랑스인처럼 사는 것이다. 현장 답사를 해보니 그리 보이기도 했다. 해서, 프랑스인처럼 포도밭 몇 개를 소유했다는 건 굉장한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맑스 가문은 1819년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에서 방 열 개짜리 개인 소유 주택으로 이사했다. 이 정도면 지금도 부자 소리 듣지 않겠는가?

   

1838년, 칼 맑스 부친, 하인리히 맑스는  칼 맑스의 나이 20세에 사망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맑스여서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후 칼 맑스 경제 생활이 딱히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대학도 잘 다녔으니까. 다시 말해, 그간 벌어놓은 재산이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맑스 아버지가 변호사업으로 그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볼 수는 없다. 생활 씀씀이도 귀족적이었으니까. 해서, 본디 집안이 지닌 돈이 많다고 본다면?

   

칼 맑스 어머니가 결혼하면서 지참금을 많이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하면, 칼 맑스 어머니는 누구인가.

   

   

   

   

   

2. 칼 맑스의 어머니, 헨리에타 프레스버그

   

   

   

   

   

 도표 제작 by 수반아

   

   

칼 맑스의 어머니, 헨리에타 프레스버그는 네덜란드계 유태인이다. 헌데, 그녀의 외가 쪽이 유명한 가문이다. 인드라가 맑스를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지만 하자르계가 아니라 페니키아/카르타고/스페인/네덜란드계 유태인 계통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바렌트 코헨 가문은 누구인가. 네덜란드에서 알아주는 부자 상인이었다.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와는 친척 사이라고 한다.

   

바렌트 코헨 가문에서 레비가 영국에 와서 사업을 시작했다. 헌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르면 이미 런던을 주도하는 대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레비 바렌트 코헨에게는 딸들이 있었는데, 이 딸들이 당대 유력 유태인 상인들과 정략 결혼했던 것이다. 

   

그중 한 명이 영국 로스차일드의 대부인 네이션 로스차일드와 결혼한 것이다.

   

집안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부자끼리 뭉치면 돈이 딴 데로 새지 않고 종잣돈이 따따블이 된다는 생각이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와 바렌트 코헨 가문의 소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 정도 친척 관계면 가난한 집안인 경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형제도 도와주지 못하는 마당에 사촌만 넘어서도 남남일 수밖에 없는 것이 서민의 삶이니까. 허나, 가진 게 돈뿐인 그야말로 지구상 최강 부자, 로스차일드 인척이라면 사정이 다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무엇일까.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맑스의 삶을 비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중 돋보이는 대목 중 하나가 맑스와 예니의 결혼이다.

   

예서, 예니는 누구인가. 예니는 귀족의 딸이었다. 예니의 아버지는 프러시아 추밀고문관이었던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이다.  예니의 배다른 오빠는 1850년대 프러시아 재무장관이 되었다. 

   

헌데, 두 사람은 1836년에 비밀리에 약혼하고, 1843년 6월 19일에 결혼했다고 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감격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계급간 인종간 비극적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식이다. 더군다나 예니가 그 지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미인, 무도회의 여왕이었다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의도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신의 영웅인 맑스가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온갖 신분차별을 다 극복하고 미인을 쟁취할 만큼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리라. 불쌍한 남아공 출신 런던 또라이 색희^^!

   

허나, 어쩌랴.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인드라가 가볍게 웃었다는 것을! 이해해달라. 성격인 것을~! 맑스나 인드라나 이런 점은 비슷한 것 같다.

   

- 모든 것을 회의하라!

   

맑스 1818년생. 예니 1814년생.

   

둘이 비밀 약혼한 1836년 당시 맑스 나이 18세, 예니 22세.

   

둘이 결혼한 1843년 당시 맑스 나이 25세, 예니 29세.

   

"[결혼연령]

르네상스가 나타나기 전을 중세시대라고 보고 있으니.. 14세기 까지는 결혼연령이 14세 즈음 이었습니다. 여성은 약혼은 최소 12세, 결혼은 14세였습니다. 교회가 인정하는 결혼연령은 12세로, 그 전에 한 결혼은 무효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나이와 비교해서는 굉장히 어린 나이인데..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출산시 사망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귀족은 아주 늦게 해서 20-24세에 결혼을 하는 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예로 12세기 영국 왕 헨리2세는 19세에 결혼을 했어요)

   

이후 르네상스가 퍼지면서.. 즉 14세기 이후부터는 15-16세의 젊은층으로 나이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16-19세기 에는 오늘날의 연령과 가까운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17세기의 교회자료에 따르면, 평민들은 남자는 26세 이상, 여자는 24세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족 젊은이들의 결혼연령만 이보다 낮았다고 합니다.

   

[사망연령]

중세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남짓이었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고, 고된 일 때문에 하층민의 수명이 짧았기 때문인데 왕이나 교황 중에는 70세, 90세까지 산 사람의 경우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 루키우스 3세) 이후 수명은 점점 높아져 15 -18세기 에는 평균수명이 약 40-50세가 됩니다.

서양중세의 삶과 생활, 중세로의 초대 참고"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hty.top&where=nexearch&ie=utf8&query=19%EC%84%B8%EA%B8%B0+%EC%9C%A0%EB%9F%BD+%EA%B2%B0%ED%98%BC%EC%97%B0%EB%A0%B9

   

   

해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 있겠다. 허나, 가장 무난한 설명이란, 칼 맑스 나이가 어리고 공부하는 중이니 학업을 마친 다음에 결혼합시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예니 집안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딸을 시집을 보내는데, 사위가 직업이 확실해야 될 것 아니냐.

   

헌데, 나이 고작 18세의 기숙사 생활하는 젖비린내나는 대학생.

   

맑스가 왕이냐? 세습 귀족이냐? 뭘 믿고 딸을 주냐? 당신이 예니 아버지라면 맑스에게 딸 주겠어? 못 주지! 암.

   

해서, 사실 맑스 어머니 가계도를 몰랐을 때까지만 해도 맑스 평전을 읽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예니 아버지는 뭘 믿고 딸을 주었을까.

   

유태인 출신 변호사 집안이랑 독일 귀족 가문이 아무리 옆집에 살고 있었다고 해도 어려서부터 어울리겠는가. 심지어 예니 아버지는 어린 칼 맑스에게 호머와 세익스피어이니 뭐니 하는 문학작품과 사회주의를 소개해주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예니 아버지는 칼 맑스에게 과잉 친절을 해주었으며, 집안끼리 오가는 와중에 예니와 맑스가 어릴 때부터 친교하면 애정이 싹트는 건 시간문제임을 알면서도 왜 모른 척했던 것일까^^?

   

예니 아버지. 알고 보면 무서운 사나이. 유럽 정세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니가 태어난 1814년. 맑스가 태어난 1818년. 이 시기는 나폴레옹 시대가 저무는 시대였다. 동시에 전유럽에 로스차일드 이름을 알리는 시대이기도 했다.

   

예니 아버지가 라인란트 귀족이었으니 모르면 간첩인 게다.

   

같은 라인란트 지역인 프랑크푸르트 출신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용병장사로 당대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된 독일 헤센 귀족이 절대 신임하는 재산관리인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나폴레옹 군대가 로스차일드 목에 칼을 들이대어도 재산을 지킨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던가. 또한, 그 로스차일드 아들이 런던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 경제의 70%를 석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듣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영국 국왕은 독일계.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라는 어용상인이 헤센 가문과 어떻게 연을 맺을 수 있었는가. 헤센 가문 재산관리인은 관료였다. 하는 일이 천문학적 거래인데, 관료였던 만큼 월급이 매우 작았다. 이 관료와 연을 맺은 것이다. 관료와 정치인은 돈이 필요하고, 장삿꾼은 껀수가 필요한 게다.

   

그처럼 예니 아버지는 하인리히 맑스라는 덜 떨어진 유태인 넘이랑 친하고 싶어서 친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칼 맑스의 어머니인 헨리에테 가문 배경을 보고 친하게 지내려 한 것이 확실하다. 

   

허나, 예니 아버지를 속물로 볼 수만은 없다. 처세를 알았던 사람일 뿐이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미래 권력자에게 주고 싶었을 따름인 게다.

   

다만, 사정이 아무리 그래도 맑스가 18세에 결혼하자고 하는데 장인 입장에서 그걸 무턱대고 들어준다면 어찌 되겠는가. 독일 귀족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예니 아버지는 적당한 핑계거리를 대서 모양새를 만든 뒤에 결혼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이 결혼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는 예니 아버지,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이었다.

   

더군다나 칼 맑스 아버지는 1838년에 사망한다. 칼 맑스는 홀어머니 신세인 게다. 칼 맑스는 1841년 23세의 나이에야 박사학위를 딴다.

   

예니 아버지는 딸을 줄 적당한 핑계를 계속 찾고 있었고, 칼 맑스는 장인 어른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이 시기 쌩쇼를 벌였던 것 같다. 그만큼 칼 맑스에게 장인이란 삼촌과도 같은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허나, 장인 어른도 1842년 저 세상 사람이 된다.

   

미룰 수 없는 일인 게다. 1843년 결혼을 한다. 후일 프러시아 재무장관이 되는, 예니의 배다른 오빠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당연한 일이다. 칼 맑스를 민 여태까지 이유가 칼 맑스 어머니 때문이다. 헌데, 칼 맑스와 맑스 어머니가 연을 끊었다. 해서, 이 결혼 반대일세, 나오는 것이 어찌 상식을 벗어나는 일일까. 단지 눈에 별표시가 되어 연인만 보이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자들 입장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뿐인 게다.

   

칼 맑스 집안에서는 칼 맑스가 헨리에테 여사와 연을 끊었기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칼 맑스 어머니가 유학 시절의 칼 맑스에게 크게 실망한 모양이다. 어느 유학생 생활비보다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는데, 칼 맑스는 그 돈을 몽땅 술 마시는데 탕진했다고 한다. ㅋㅋㅋ 술고래, 맑스. 참다 못한 맑스 어머니는, 니가 정녕 사람이냐 역정을 내며 정치/사회주의와 어머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 모양이다. 칼 맑스는 정치/사회주의를 택했다.

   

해서, 결혼식에는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의 후처인 예니 어머니와 예니의 멍청한 남동생, 그리고 친지 몇 명만이 참석했다. 둘은 결혼 직후 한동안 남작 집에서 밀월을 즐기다 파리로 갔다.

   

정리하면, 이 결혼은 칼 맑스 아버지의 염려가 현실이 된 셈이다. 하인리히 맑스는 칼 맑스의 약혼 소식에 칼 맑스의 악마적 심성이 칼 맑스 부부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인드라 생각에 하인리히 맑스 결혼 생활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헨리에테 여사와의 결혼 생활, 마님을 모시고 살아야만 하는 머슴 생활, 그 결혼 생활이 자식대에서 되풀이되는 것에 대해 아버지로서 걱정을 한 셈이다.

   

그 자신이 헨리에테 여사라는 귀족 유태인과 결혼하여 결혼 내내 짓눌려 살아야만 했던 삶을 자식이 되풀이하는 꼴을 보아야 하는 슬픔을 '악마적 심성'이라 표현한 것이다. 즉, 이때 '악마적 심성'이란 못 오를 나무를 올려다 본 자신의 탐욕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격이 맞는 집안끼리 했어야 서로에게 행복했을 터인데...

   

동시에 장인 어른의 뜻도 이루어진 셈이다. 1850년대 프러시아 재무장관이 된 예니의 배다른 오빠가 과연 순수한 개인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을까. 이는 1852년, 프러시아에서 런던으로 파견한 밀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맑스는 비록 공산당 선언을 써서 유명세를 탔다고 해도 당대는 1848년 2월 혁명 실패로 맑스가 매우 낙담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 맑스는 별 볼 일이 없는 넘이었다. 헌데, 입술좌파 - 인드라가 만들어보았다. 입에 술을 달고 다는 특이한 족속을 일컫는다 살롱좌파보단 재미있는 표현이잖아? -  맑스를 왜 프러시아 밀정이 감시하겠나^^?

   

인드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었다고 본다. 어머니와 연을 끊었다던 칼 맑스. 생활이 궁핍해지자 친척들에게 연신 편지를 쓰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때, 친지 중에 친가 쪽으로 메일을 썼을까, 아니면 외가 쪽으로 트윗을 보냈겠나^^?

   

   

   

맑스는 외숙인 레온 필립스와 친했는데 극빈 시절에는 염치없이 손을 벌리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필립스 집안은 맑스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친척이었다. 맑스가 특히나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숙부인 리옹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필립스는 네덜란드 축구클럽 PSV 에인트호번의 주요 스폰서이기도 하다. 필립스는 1891년에 칼 맑스 모계 사촌인 제랄드 필립스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설립했다. - 필립스에 관한 인터넷 자료 중에서

   

이빨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칼 맑스. 뉘앙스 풍부한 문장력으로 지인들에게 기대와 실망감을 동시에 주었을 터.

   

어머니는 틈만 나면 딸들을 칼 맑스에게 보내 탕아 칼 맑스가 되돌아오기를 기대했던 듯싶다.

   

맑스의 여동생들은 칼 맑스를 비롯한 당대 쟁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저녁 만찬에서 늘 강조했다고 한다.

   

- 오빠가 지금 비록 정신줄을 놓고 있지만, 우리 가문, 댁들하고는 다른 고귀한 핏줄이거든요?

   

이때, 세상을 당장 바꿀 것같은 혁명가들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맑스 줄만 잡고 있으면 최소한 떡고물이 떨어지겠군!'

   

허나, 속을 내보인다면, 어디 베테랑 혁명가 소리를 듣겠는가.

   

- 동생분도 역시 혁명가 핏줄을 이으셨군요. 암요, 고귀한 핏줄이지요. 혁명가 핏줄.

   

맑스 여동생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귀족답게 속으로 경멸했을 것이다.

   

'하여간 혁명가라고 하는 색희들 속으로 돈타령하는 위선질 꼴은 정말 역겨워.'

   

- 언니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날뿐이지요.

   

   

   

   

3.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의 신비로운 진정한 정체는?

   

맑스가 1840년대부터 1863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예로 맑스 자식들이 죽었음을 예로 든다.

   

허나, 과연 그럴까? 

   

19세기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 40세 ~ 50세일 만큼 열악했다. 특히 런던이라고 사정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시기 삶을 알고 싶다면, 디킨즈 같은 소설, 혹은 디킨즈 소설을 영화화한 올리버!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런던이 이 정도이니 다른 곳은 어떠하겠나. 맑스는 본디 인드라처럼 장남도 아니었다. 장남이 일찍 죽으니 장남이 된 것이다. 하고, 인드라 여동생이 아직 꽃을 피우기 전에 일찍 죽었듯이 맑스 형제들도 죽은 것이다. (어, 갑자기 눈물이 ㅠㅠ)

   

하여간, 맑스가 부유한 집안에서 살았음에도 맑스 형제들 중에 몇몇이 어린 시절에 죽었다는 것이다. 마치 맑스의 자식만이 굶주림 탓에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위생 문제 등이 매우 심각한데, 그만큼 보건의료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오늘날이라면 간단히 치료가 될 병도 치료하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일 뿐이다.

   

이 시기 유럽 지식인들 중 어지간한 넘들이 죄다 폐병 환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여간 맑스가 아주 아주 가난하게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맑스가 참 부유하게 살았다. 다른 말로 낭비벽이 있었다. 이유는? 예니가 명품족이었다. 맑스는 예니와 결혼하면서 내내 채무 의식을 지녔던 것 같다.

   

- 어찌 고귀한 이가 나 같은 천민과 결혼을 해서 이 고생이오?

   

사실 알고 보면, 베스트팔렌 집안도 근본을 따지면 야만족이라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족속이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예니는 태어나길 귀족의 딸로 태어났고, 평생 귀족처럼 살다간 것이다. 맑스는 예니가 어릴 때 살던 그대로를 유지시키고자 무던히 애를 썼던 것이다. 해서, 가정부를 둔 것이다. 다만, 가끔 내가 왜 머슴살이를 해야 하나, 하고 술 먹고 정신줄을 놓았을 때, 이상하게 이심전심이 되어 통한 가정부와 관계를 가진 듯싶다.

   

아무튼 맑스는 귀족처럼 살아야 했다. 일반 서민처럼 살았다면, 굳이 엥겔스의 도움이 필요없었을 수 있다.

   

이때, 엥겔스가 등장한다.

   

엥겔스는 프러시아 방적업자의 아들이란다.

   

헌데, 인드라가 그간 어느 자료를 보더라도 엥겔스 출신에 대한 이력은 누군가 흡사 삭제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맑스에 대해서는 사돈의 팔촌까지 설명이 상세하다. 반면, 엥겔스는 어떠한가. 엥겔스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저 엥겔스 어머니가 엘리자베쓰 엥겔스라는 것뿐이다.

   

엥겔스가 어떤 인물인가를 굳이 세세하게 소개하지 않겠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79323

   

중요한 건, 엥겔스가 있었기에 맑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엥겔스가 없었다고 생각해보자. 맑스는 오늘날처럼 알려진 맑스가 될 수 있었을까?

   

많은 이들이 엥겔스를 비판한다. 맑스를 오독했다고 말이다. 허나, 당대에 엥겔스 만큼 맑스를 이해한 사람이 또 누가 있나?

   

인드라가 묻는다. 오늘날 인월리를 온전하게 읽는 이가 몇 명이나 되나?

   

인드라가 인드라 이웃의 격을 고려해서 인드라 생각을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인드라가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면서 인드라 글쓰기를 그나마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 열 명 이내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해서, 기대도 하지 않지만, 실망도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인월리의 10%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망하지 마시라.

사실 10%만 이해해도 대단하니까.

   

하여간, 하여간! 그리고 하여간?

   

엥겔스가 없었다면, 맑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만큼 엥겔스가 인드라 관심 대상이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국유본론 정립 전까지는 관심이 맑스에게 있었지, 엥겔스에게는 없었다.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천 년대 이전까지는 인드라가 맑스인양 생각했다가 이천 년대로 접어드니 인드라는 예수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처럼 인드라보다 맑스적인 인물을 찾았는데 그것이 엥겔스적 모습이었던 것 같다. 허나, 그러한 작업이 아쉽게 끝나서 이제 인드라가 은둔할 때인가 싶을 때, 국유본론을 만난 것이다.

   

해서, 이제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맑스보다 엥겔스에게 더 관심이 간다. 대체 엥겔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맑스 가계도는 인터넷에서 약간 수고로운 검색만 하면 다 나온다. 반면 엥겔스는 인드라의 숙달된 만큼 신비로운 검색법으로도 가계도가 나오지 않는다.

   

왜 엥겔스 아버지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인가.

   

나온 단서라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Leupold라는 대규모 수출회사에서 경영훈련을 시작했다. 엥겔스 아버지가 엥겔스 경영 수업을 시키고자 김나지움을 중퇴시키고 일찌기 경영 수업을 시켰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인드라 마음에 든다. 인드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인문고 대신 상업고를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쪽발돼중, 쪽발놈현, 이명박 쉴드치느라고 구라치는 넘들이 많은데, 인드라가 고교 다닐 80년대만 하더라도 상업고 인기가 인문고 인기보다 좋았다. 커트라인이 더 높았다. 왜? 하루바삐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반면, 공업고 인기는 낮았다.

   

현데, 상업고여서 마이너라고? 개가 웃을 이야기다. 당장 역대 국회의원 출신들 조사해봐라. 야구부있는 상업고등학교 중심으로 조회하면 1980년대까지 한국 권력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지경이다.

   

독립군 고문하던 일본 헌병이었던 니 애비, 쪽바리가 그리 가르치던? 역사를 조작해도 인민은 모르기에 양심에 털나지 않는다고? 

   

 다른 하나는 ermen & engels 회사이다.

   

엥겔스 아버지는 프러시아에서 직조업 사업을 꾸렸고, 영국에도 동업하여 방적업을 하고 있었다. 해서, 회사 이름이 ermen & engels이다. 즉, 에르멘과 엥겔스 합작 회사라는 것이다.

   

예서, 엥겔스는 1844년, 맨체스터에 소재한 이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썼다고 한다. 하고, 엥겔스는 아버지가 강제한 이 일이 싫어서 하지 않다가 18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하기 싫지만 맑스 생계를 대기 위해서 회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1869년에 동업자인 에르멘에게 가진 지분을 모두 매각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볼 점.

   

에르멘. 독일어 기원으로 전체, 우주라는 의미라고 한다.

   

 Emma (EM-a) - Derived from Germanic ermen (meaning 'whole' or 'universal')

   

또한 그 성 유래가 참회왕 에드워드 어머니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잉글랜드의 왕(재위 : 1042~1066). 서(西) 색슨계의 왕으로 에델레드 2세(Aethelred Ⅱ)의 아들. 데인 사람인 커뉴트(Knut) 대왕과 그 아들이 잉글랜드 왕위에 있을 때에는 노르망디에 피신해 있다가 하르디 커뉴트의 사후 웨섹스 백(伯)의 비호로 즉위, 그 딸 에디스와 결혼, 그의 원조에 의해 정치하였다. 그는 왕궁의 풍습을 노르망디식으로 고치고 그들의 세력을 보급하여 뒤에 노르망디에 의해 정복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앵글로 색슨이 노르만인에게 정복되는 최후를 장식한 왕으로 무능하고 유치했으나 그 후 인민과 외래인이 왕실과의 대립과정에서 자유 잉글랜드의 상징으로 이상화하여 경모되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건립하는 등 신앙심이 극도로 깊어 "참회왕"이라고 추존되었다. 《에드워드 참회자의 법 The Compilation Laws of Edward the Confessor(1070)》이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3037

   

에드워드왕을 한국으로 치면 고려 왕건에 나라를 바친 신라 경순왕인 게다. 에르멘이 이런 에드워드왕의 어머니 성이다?

   

맑스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은 온통 맑스 가문에만 집중한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맑스 주변 인물만 캐면, 특히 물주만 조사하면 그냥 답이 나올 것 같은데, 답이 안 나온다? 왜? 자료가 부족하다. 인드라가 왜 딱 이 대목까지만 말하는 것도 권력이란 역시 자본력이 가장 막강함을 실감하겠다 ㅎㅎㅎ

   

   

국유본이 자료 단속하나^^?

   

   

   

   

 4. 맑스 물주는 예니, 어머니, 엥겔스, 그리고 위드?

   

   

맑스 어머니, 헨리에타 여사는 1863년에 돌아가셨다. 

   

(휴. 어머니. 죄송해요. 인드라가 그간 평생 정말 어머니에게 못 되게 굴었어요. 왜 어머니만 생각하면, 어머니 말만 들으면 피가 솟구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제 의지만은 아닙니다. 마.자.세. 앞으로는 효도만 하고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맹세하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꼭 맹세하면 그 다음 날 바로 인드라에게 시련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어서요.) 

   

정리해보자.

   

맑스 첫번째 물주는 예니였다. 예니 친지로부터 소소한 두어번의 유산 상속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예니 어머니와 예니 남동생 정도일 것이다. 허나, 이들은 얼빵한 탓에 베스트팔렌 가문 재산을 얼마 차지하지 못했지만, 나름 짭짤했을 것이다. 물론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금새 탕진했다.

   

맑스 두번째 물주는 어머니였다. 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각종 맑스 평전에는 기록하고 있는데, 솔직하게 납득할 수 없다. 만일 맑스 어머니가 진짜 관심이 없었다면, 맑스가 자본론을 내었다는 소식에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을 만들었으면 좋을 터인데, 따위의 논평이 절대로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 맑스 평전들을 보면, 예니를 소크라테스 악처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 대신 맑스 어머니를 소크라테스 악처로 만든 감이 있는 것이다. 느낌상 뭔가 억지스러운 게 많은 게다.

   

인드라가 여전히 철이 없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그림이 나온다. 맑스 어머니가 겉으로는 맑스와 연을 끊은 듯이 보이지만,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사람 만나면서 맑스 좀 잘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닌 모양이다.

   

맑스가 홀로 잘 나서 국제노동자협회, 혹은 인터내셔널이다 깝치고 다닌 모양이지만, 나름 맑스 어머니가 물심양면으로 은근 맑스를 도와달라 여기저기 말하듯 싶은 것이다. 해서, 맑스 어머니 관점으로 1차 인터내셔널을 재조명한다면,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만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여간, 맑스 어머니가 돌아가자 유산 상속이 이루어져서 맑스 삶이 갑자기 상류층이 되었다. 집 이사도 하고 그러면서 제 1 인터내셔널 활동도 본격 전개하고, 자본론도 쓰고, 잘 나갔다. 물론 이내 명품 사랑 때문에 재산을 탕진하지만. 역시 물주가 중요해요~!

   

사회주의 역사, 인터내셔널 역사도 물주 중심으로 바뀌면 보다 실체적 접근을 하면 좋을 터인데, 언제까지 이념 중심으로 청년들에게 백해무익한 허상만을 제공할 것인지 ㅠㅠㅠ

   

(알고 보면, 인드라가 맑스보다 약간 더 점수를 주고 있는 폴란드계 유태인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된장녀였다고 한다. 어이쿠~ 우리네 한국 된장녀들 인드라 말에 힘내겠네~! 하긴, 씨발, 왜 된장녀만 탓하는데, 된장녀보다 못난 병쉰색희들 투성인데.)

   

이제 맑스 물주 네번째 위드이다. 

   

 언론인 출신인 위드는 반메이슨 운동의 지도자이자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영향력을 발휘하며, 링컨을 포함해서 미국 여섯 대통령의 킹메이커로서 활약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위드가  인쇄소 견습공 출신에 불과하던 호레이스 그릴리를 뉴욕 트리뷴지 발행인으로 만든다. 

   

이때, 맑스 명함에 무엇이 새겨져 있었던 것일까?

   

반메이슨 신문 뉴욕 데일리 트리뷴 유럽 통신원 칼 맑스.

   

칼 맑스의 통쾌한 지점이란 무엇인가. 당대 프리메이슨 특권적 조직을 비판할 수 있어도 누구도 감히 당대 프리메이슨 정신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허나, 비판을 과감하게 하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칼 맑스였다.

   

칼 맑스는 특히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형제애에 대한 집중 성토했다.

   

의인동맹의 바이틀링을 비판할 때 구사한 방식이다. 당대 바이틀링은 비밀 결사체를 유지하며 소수의 엘리트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때, 칼 맑스는 의인동맹의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적 '우리는 형제이다' 슬로건을 비난한 것이다.

   

형제끼리 총질하는 게 프랑스 혁명이었고, 2월 혁명이었는데, 뭔 개소리냐? 이것이 칼 맑스가 온갖 쌈박한 논리로 공산당 선언이다, 프랑스 혁명 삼부작이다 한 것의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 형제는 없다. 이제는 계급이다,가 맑스의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이런 대목에 반한 것이, 미국의 위드였던 게다.

   

왜? 간단히 생각해보자. 한총련 조직을 깬다고 주사파가 무너지나? 절대 아니다. 중요한 건, 정신 회복이다. 쪽발 정은을 쪽발 정은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 한반도 통일은 없는 셈이다.

   

해서, 국유본이 인드라를 현재 매우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위해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다시 본론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신랄한 불평은 엥겔스의 입에서 나왔다. 엥겔스는 말했다. '그는 저널리스트가 아니야. 저널리스트가 될 수도 없어. 다른 사람 같으면 두어 시간이면 써낼 사설을 무슨 심오한 철학 문제라도 다루는 것처럼 하루 종일 붙들고 앉아 있으니 말이야. 바꾸고 다듬고, 그러고 나서 바꾼 것을 또 바꿔. 그 끈질기고 철저한 태도 때문에 글이 제 시간에 나오지를 못해.' ;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중에서"

   

맑스는 체질적으로 언론인이 될 수 없었다. 저널리스트가 되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저널리스트가 되지 못하니 맑스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시스템이었던 게다. 누군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물자를 대주어야 하는 임시방편의 시스템이었던 게다.

   

바로 이런 모습대로 사회주의가 건설되었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1851년 맑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통신원이 된다. 예서, 대체적인 관심사는 맑스가 부르주아 신문에 기고를 하느냐는 따위일 것이다. 허나, 인드라가 이 기사를 읽었을 때, 독특한 흥미를 느낀다. 이것이 인드라와 여러분의 차이일까.

   

   

뉴욕 인구가 네덜란드 점령 시절 17세기에는 800여명, 독립 당시인 18세기 말에는 삼사만 명,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850년에는 대략 70만이었다. 뉴욕에서는 1830년대부터 요즘 우리 식으로 보자면, 지하철 무료신문이라고 할 정도인 저가인 페니 신문이 유행이었다. 따라서 하층민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835년에 창간된 뉴욕 헤럴드는 창간 직후 발행부수가 삼만 부에 이를 정도였다.

   

헌데, 뉴욕 트리뷴지는 주간지인 경우에 이십 만부가 팔려나갔다. 이 당시 발행부수가 고작 오천 부였던 맑스의 신라인신문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인 셈이다. 물론 뉴욕시민만 읽은 것이 아니라 뉴욕 북부에 위치한 뉴잉글랜드에서도 읽었다.

   

인쇄소 견습공 출신이던 호레이스 그릴리는 반메이슨운동의 지도자이자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영향력을 발휘한 위드를 만난다. 하여, 태머니파(현 노예민주당) 성향의 페니 신문들과 달리 노예제도 폐지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등 반노예민주당 성향을 내보인다. 호레이스 그릴리(Horace Greeley)는 1841년에〈뉴욕 트리뷴〉을 창간한 후, 종종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는 사설을 발표하여 뉴욕 트리뷴지를 일등신문으로 만든다. 그는 훗날 링컨 사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서기까지 한다. 

   

1850년대는 호레스 그릴리의 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이후 미국 언론은 호레스 그릴리에 영향을 받은 언론인들로 꾸려진다.

   

뉴욕 트리뷴에 있던 리치몬드가 1851년에 뉴욕타임즈를 창간한다. 그는 1860년대에 어떤 언론도, 심지어 뉴욕 트리뷴지도 꺼려하던 태머니파 비리를 폭로하여 폭로 저널리즘의 효시로 기록된다. 이후 저널리즘은 사설의 시대에서 폭로의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뉴욕타임즈는 퓰리처와 허버트가 내세운, 재미가 없으면 저널리즘이 아니다, 라는 황색 저널리즘에 경영난을 겪어 옥스에게 준다. 미국 언론은 사주가 바뀌면 정체성 자체가 바뀐다. 이후 뉴욕타임즈는 더 이상 뉴욕타임즈가 아니었다.

   

헌데, 리치몬드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 그는 뉴욕 트리뷴의 편집장이었으며, 맑스와의 연결고리였다. 해서, 그가 호레이스 그릴리와 충돌하여 사임하자 맑스도 뉴욕 트리뷴지 기고를 끊게 만드는 핵심 인물인 것이다. 그 인물은, 훗날 링컨의 전쟁부 차관보를 역임하고, 뉴욕 선지를 인수하여 편집장을 했던 찰스 앤더슨 데이나(Charles A. Dana)이다.

   

찰스 A. 데이나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_Anderson_Dana

   

예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오늘의 여정을 정리해야겠다.

   

과연, 로스차일드가문의 국제유태자본은 대륙을 뛰어넘는 심계를 지녔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이었던 것일까. 정답은 없다. 그저 여러분이 존재하고, 인지하고, 실천하는 데서 변화하는 것이니까.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끝무럽에는 영국 공주 대리인과 맑스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다.  

   

1879년, 영국 여왕의 딸이자 훗날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부인이 되는 여성 왕위계승자 빅토리아는 마운트 스튜어트 엘핀스턴 그랜드 더프 경에게 맑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마운트 스튜어트 경이 맑스와 약속을 잡는다.

   

둘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이 만난 보고서를 마운트 스튜어트 경이 공주에게 제출했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칼 맑스는 폐하와 공주에 대해 몇 번 언급했는데, 그때마다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세상을 뒤집을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닐 것입니다. - 프란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중에서"

   

   

   

   

"1997년 4월 29일 화

   

시계까지 말썽이다. 시계가 고장이 났다. 룩셈부르크로 가는 기차로 도중에 트리에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RB선으로 갈아탔다. RB선을 굳이 비유한다면 우리네 비둘기호라고 할까. 역마다 선다. RB선도 콤파트먼트식이지만, 탁자가 없으며, 흡연석은 1등석에만 있다. 

   

비가 내린다. 새벽 기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라인강을 바라보며 가니 언짢은 기분이 조금씩 풀려온다. 춘천행 기차를 떠올려 보라. 생각해 보니 라인강변보다는 북한강변이 훨씬 괜찮은 듯싶었다. 새삼 우리네 금수강산에 대한 자긍심이 밀려온다. 비가 계속 내린다. 약간 배고프다. 프랑스 바케트빵 맛이 그리워졌다. 바케트빵에 독일 맥주 한 잔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일 터인데... 식욕을 잠재우고자 생각에 몰두하였는데 생각할수록 더 배가 고팠다. 점심 먹고 물만 먹었으니...

   

새벽을 지나 이제는 아침이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침 기차에는 출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이 떠들썩하다.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들을 본다. 문득 나는 즐거워졌다. 내가 여행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른 이들이 여느 날처럼 일상적 생활을 할 때 바로 옆에서 나는 그들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내가 조금 흥분하여 노트를 꺼내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하는데 차장이 표 검사를 한다.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쓰자 차장이 나를 슬쩍 보더니 윙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학생들은 코헴역에서 대부분 내린다. 굳이 유람선이나 로맨틱가도를 달리는 버스를 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연히 풍경에 녹아든 독일인들의 일상을 보니 마음이 즐겁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비가 내리는 라인강변의 집들은 아름다웠다. 우리네 금수강산에도 자연과 합일하는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강산인데...

   

트리에 도착. 역에서 시내만 다니는 전차를 타서 Hauptmarkt에서 내려 맑스 기념관으로 향하다. 작은 읍 정도에 불과한 이 도시도 겉모습만 보면 참 살기 좋은 동네로 보인다. 가는 도중 재래시장을 접하다. 아침 일찍 신선한 야채와 꽃, 생선 등을 거리에 진열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엽서처럼 괜찮았다.

   

맑스 기념관 가까이에 이르러 한 여성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파마를 한 검정머리, 푸른 눈의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사우쓰? 노오쓰?라고 묻는다. 그래도 사정을 아는 여성이다. (몇몇 독일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본 조심스런 생각은 독일인들이 한국에 대해 다른 유럽인보다는 아는 편인 듯싶다.) 뭐 이런 촌동네에 볼 것이 있겠냐하는 투가 역력한 표정으로 여기에는 왜 왔냐고 했다. 맑스를 보러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배를 비벼 끄더니 오! 맑스! 그러면서 놀라면서도 친근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와 헤어진 후 맑스기념관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해서, 이리저리 거리 구경하다 다시 가보니 계속 닫혀 있는 것이다. 어? 무슨 일일까,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념관에서 일하는 여성이 당신이 찾는 맑스기념관은 여기가 아니라 맑스가 탄생한 집이고 여기서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은 연구소쯤 되는 것이었다. 관료적 말투로 딱딱하게 대하는 것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기분으로 맑스가 탄생한 집에 갔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다. 혼자서 맑스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전시된 사진들을 본다. 아, 초라하기 짝이 없다. 책으로만 보던 이들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사회주의운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별 느낌이 없이 맑스 동상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중국인들이 몰려왔다. 모택동 모자를 쓴 중국인들은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로 보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저마다 맑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나에게 와서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찍어주었다. 갑자기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난 지금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왔는가? 중국 관료들로 보이는 저들과 무엇이 다를까? 중국 관료들이야 자신들 출세시켜 주었으니 맑스를 고맙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나는 뭔가.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뭔가 다른 듯이 행동하는, 론리 플래닛에서 '향수에 젖은 사회주의자들'이란 대목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현재형이라고 믿었던, 뭔가 혁명적인 계기를 얻을 것만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연극처럼 느껴졌다. 잔뜩 긴장한 채로 뭔가를 갈구하며 맑스의 집에서 헤매던 나를 일깨워준 것은 중국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맑스 흉상을 원했으며, 다른 것들은 안중에 없었다. 마치 정치인의 사진 찍기처럼.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워하였으며, 그것으로 맑스 관광이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아아! 그들에 비한다면 나는... 나는 반성하는 자세로 그들에게 나도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나의 초라하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보라.

   

트리에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맑스를 비난하는 이들이나 맑스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죽을 듯이 보이는 교조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나는 해방되었다. 그만큼 그들과 나에게 맑스는 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 맑스를 만났으며, 맑스를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 산업이 되기도 하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가 박정희와 같은 대접을 받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맑스는 금기된 무엇이기도 하다.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아니, 그 굴레를 영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던 모든 관념들이 깨끗하게, 일순간에 정리된 것이다. 이제 나는 맑스를 내 머리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가 맑스주의자라고 했던 그 모든 굴레들로부터 맑스를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여! 당신, 그동안 내 머리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맑스여! 해방이다! 그 순간 동상의 맑스가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세상이 나, 맑스를 해방시킬 일만 남았군, 그래." 나는 순간 혁명적인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안녕! 트리에! 안녕! 맑스 산업! 그리고 기념하는 모든 것들이여! 이제는 안녕!

-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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