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5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7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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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1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5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7

   

   

17. 유태인은 1654년에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영국 프리메이슨 회사인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는 영국 왕실 명을 받들어 1607년 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미국에 이민선단을 보냈다. 이 당시는 신대륙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아무도 가려하지 않아 프리메이슨 회사에서는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끌고 간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개척하는 데에는 종교적인 신념이 중요하다고 본 영국 왕실의 판단이었던 듯싶다. 해서, 이들은 버지니아주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한다. 이때, 식민지 경제를 유지할 방편으로 담배 농업이 활성화한다. 이후, 담배 농업은 미국 남부 대표적 업종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쿠바 담배가 인기를 끌자 미국 담배 농업이 큰 위기를 맞는다. 쿠바 정권이 나름 잘 통치했는데, 국유본이 쿠바 혁명을 일으킨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미국 담배산업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크다. 쿠바 혁명 후 쿠바 담배 유입이 끊기자 미국 담배 산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주는 워싱턴, 제퍼슨을 배출하는 등 초기 미국을 주도하던 미국 남부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 지역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한반도 크기의 땅을 소유하고 노예를 수도 없이 거느릴 만큼 노예주 천국 대농장 체제였다. 워싱턴, 제퍼슨 대농장에서는 담배, 아편 농사를 했다.  이 지역 노예주 상당수는 국교회(성공회)였다.

   

1620년 뉴잉글랜드에는 버지니아인과는 다른 유럽 이주민이 들어온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그들이다. 전체 인원은 102명. 이중 여성은 28명이었다.

   

하면, 예서 반문할 수 있다. 유럽인이 왜 이리도 북미에 식민지 이주를 꺼려했는가고 말이다. 전지구적으로 1650년 이후로 소빙하기가 찾아왔다. 특히 남반구보다 북반구가 추웠나 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을 보면 조선 역시 소빙하기 시대여서 험하게 살았음을 보여준다. 소빙하기는 1850년까지 지속된다.

   

해서, 17세기 내내 북미에 유럽인 이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1654년 8월22일 뉴욕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떠나 한달 보름여 동안 대서양을 건넌 피어 트리호에서 야곱 바르심손이 내렸다.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최초의 유태인이다. 허나,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개인 도착이어서인지 1654년 9월 집단 이주를 최초의 북미 이주로 본다. 

   

유태인을 태운 찰스호가 1654년 9월 북미 뉴욕에 모습을 드러낸다. 23명의 유태인은 유럽이 아니라 브라질에서 온다. 사정은 이렇다.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으로 일부가 포르투갈로 이주했다가 포르투갈마저 박해를 하니 더는 유럽에 있고 있지 않았던 유태인 일부가 남미로 이주한다.

   

이들을 마라노라고 한다. 혹은 콘베르소라고도 한다.  스페인 유태인이지만, 당국의 강요로 인해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들이 콘베르소, 마라노이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겉으로만 개종하고, 가정에서 몰래 예배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 마라노, 혹은 콘베르소는 마치 카르타고인인양 능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대농장을 건설하여 부를 축적한다. 허나,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늘 자금이 필요한 포르투갈에서 그냥 놔둘 수는 없었을 터. 이단 심판을 명분으로 대농장을 장악하고, 유태인을 축출한다.

   

브라질에서 쫓겨난 유태인이 갈 곳이 어디겠는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던 이들이, 가진 재산을 다 정리하여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당시 뉴욕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통치하고 있었다. 총독 스토이베산트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거주를 불허하였으나,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당국은 총독에게 유태인 거주를 허락하라고 지시한다. 명분은 이들 유태인이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을 잠시 점령하였을 때, 유태인들이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실제 이유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이사회를 장악한 유태인들이 소식을 듣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유태인 사회에서 파문당한 유태인 철학자, 스피노자가 아버지가 죽었기에 형과 함께 상점을 한동안 운영했다.

   

해서, 23명의 유태인들은 뉴욕에 거주하게 된다. 네덜란드령일 때는 뉴욕이 아니었다. 뉴암스텔담이었다. 허나, 십년 뒤 영란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 뉴암스텔담이 영국 소유가 된다. 해서, 이름도 뉴암스텔담에서 뉴욕으로 바뀐다.

   

하면, 유태인은 또 추방당했는가. 아니다. 크롬웰의 예를 따라서  미국에 살던 청교도들은 유태인과의 공존을 취했다. 크롬웰은 당대 네덜란드가 순식간에 강국이 된 배경에 유태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유태인과의 제휴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당시 구교에서 청교도들을 '신유대교'라고 부를 정도로 청교도와 유대교도 관계가 매우 친했다.

   

뉴욕은 18세기까지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초기에는 천여 명, 1770년대 뉴욕 인구가 3만여 명, 1790년대에 가면 17만여 명이었다.

   

이런 뉴욕에 이들 유태인이 정착하여 유럽과 남미에서 했듯 뉴욕주에서도 대농장을 꾸려 북미에서도 봉건적인 장원 제도를 만들었다. 이들은 뉴욕시가 아니라 뉴욕주에 기반하여 미국 1% 이내 부유층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고, 이들 후예가 루즈벨트 집안인 게다. 루즈벨트는 어려서 보통학교를 다니지 않고 귀족수업만 받았다. 루즈벨트 어머니는 300인위원회의 델라노 가문이다. 델라노 가문은 프랑스 위그노파였는데, 이 시기 유대교도와 위그노교도간 결혼이 상류층 사이에서 일어난 듯싶다.

   

인드라가 미국 역사 자료를 분석한 잠정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미국을 만든 것은 유태인과 위그노파이다. 이들의 물리적 결합을 도운 것은 프리메이슨이며, 이들 화학적 결합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이들 초기 유태인들은, 자신이 마라노, 콘베르소 유태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까지 형식적으로 유지하던 카톨릭을 버리고 청교도로 적극적으로 개종해서 미국 주류인 와스프(WASP)에 결합했던 것이다.

   

해서, 루즈벨트도 뉴욕주에서 의원을 하며 정치적 성장을 했던 게다. 이 지역, 뉴욕시와 뉴욕주, 펜실바니아는 미국 남부와 미국 북부의 경계를 이루는 주요한 지역이었기에 캐스팅보드를 쥐면서 본격 성장할 수 있었다. 인드라는 남북 통일이 이루어질 때, 인천이 뉴욕과 같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어쩌면, 강화도에 월스트리트와 같은 거리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안보 문제 때문에 송도 영종도가 개발되었지만, 통일이 되면, 연평도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지역이 엄청난 지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인드라는 국유본이 평양 정권에 지시해서 틈만 나면 연평도 사건 같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라고 보고 있다. 땅값이 충분하게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유태인 북미 이주는 전혀 계획적이지 않았다. 단지, 떠밀려서 우연하게 북미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고, 유태인 특유의 강한 생존 본능으로 미국 1% 이내 부자가 된 것이다.

   

   

   

18. 두번째 유태인 이민 물결 주인공은 독일계 유태인이다

   

17세기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독일 남부는 쑥밭이 되었다. 해서, 이 지역 상당수 농민은 결단을 해야 했다. 죽든가, 이주하든가. 이때, 이주민 중 다수는 폴란드 발트해 방면에서 흑해 방면 등 동쪽으로 이주했다. 하고, 일부가 북미로 떠났다.

   

이들 초기 독일계 이민은 펜실바니아주에 주로 살았다. 이유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다. 독일계 이민자들은 대개 루터파여서 뉴잉글랜드에는 청교도가,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미국 남부는 국교도가 사는 곳에서는 부담을 느꼈다.

   

이때, 이들 이민 경로는 어떠한가. 19세기 초반까지도 미국으로 이주하려는 유럽인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백인이더라도 노예계약으로 속아서 북미로 왔거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나 정치범이거나 중대 범죄자나 매춘부, 골드 러쉬 같은 데에 현혹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서, 이들 독일계 이민은 이민 커넥션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커넥션, 베트남 보트피플 커넥션, 이차대전 당시의 유태인 탈출 커넥션, 아프칸 구출 커넥션과 같다. 불법 체류에는 돈이 든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프리메이슨이 인력 공급업체로서 떼돈을 번 것 같다. 당대 무역회사 수익구조가 뻔했다. 노예무역이 가장 돈 되는 장사였는데, 인력 공급업이란 노예무역보다는 못하지만, 짭짤했던 것이다. 이는 식민지 국가에서 백인 수를 늘리고자 하는 국유본 정책과도 부합되는 것이어서 국유본이 적극 지원했다. 혹, 베어링 가문이 순식간에 영국 최고의 금융가문으로 부상한 이유가, 백인 노예무역 때문인 것일까? 

   

다시 말해, 영국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북미로 가는 정거장이었던 게다. 하고, 이러한 스코틀랜드 정거장은 20세기 초반까지 작동한 것으로 본다.

   

   

   

   

북미 이주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인 게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독일계 이민이 펜실바니아주 정도면 충분했던 듯싶다. 이때, 독일계 이민자란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생존한 자들은 특정 기술을 보유한 자들인 듯싶다.

   

즉, 전쟁을 생각하면 된다. 영지전이나 국가간 전쟁을 하면, 영지민을 포로로 하는데, 이때 우대받는 층이 누구인가. 임진왜란에서 보듯 도자기 굽는 장인처럼 특정 기술을 보유한 자이다.

   

영국은 양모를 수출했고, 네덜란드 플랜다스 기술자들이 양모를 가공했던 것이다. 해서, 백년 전쟁이 터지자 전쟁을 기회로 원료만 팔던 영국으로서는 네덜란드 기술자를 모셔오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인드라는 당대 북미 대륙 상황을 소설처럼 펼쳐보인다.

   

이미 북미에서 지배계급인 자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선거하듯 분류하는 것이다.

   

상층 지배계급은 선거에서 새누리당이나 쪽발민통당 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다.

다만, 어떤 넘이 자신을 위해 일을 더 잘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저울질할 따름이다.

   

중산층, 혹은 중층은 새누리당이나 쪽발민통당 하나에 목숨을 건다.

왜? 그들 밑에서 해바라기처럼 라인을 타기 때문이다.

물론, 새누리당이 이기건, 쪽발민통당이 이기건, 상당수 중산층, 중층은 죽어갈 것이다.

왜? 먹을 게 없거든?

문제는 알면서도 지지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도 확율이 상대적으로 높기에.

   

하층은 선거에서 누가 되건 상관없다. 투표 안 한다. 어차피 둘 다 개색희들이니까.

   

이런 분류 방식으로 북미 지배계급은 독일계 이주민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쓸만한 넘들은 정착시키고, 쓸 모 없는 넘들을 자연도태시키는 방식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은, 독일계 이주자 중에서는 기술을 지닌 이들, 장인, 도제 그룹이 주도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독일에서 이주할 때 기술자만 이주할 결심을 할 이유는 없다.

   

허나, 오늘날 호주 이민 같은 데서 보듯, 자본 이민 다음으로는 기술 이민인 게다. 독일에서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서 북미, 뉴욕에서 펜실바니아에 이르는 도정에서 상당수 독일계 이주민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독일계 이주자 중에는 독일계 유태인도 섞여 있었던 게다.

   

해서, 이들 독일계 유태인들은 독일계 이주자 다수처럼 생존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일, 비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 요구라 함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사태인 게다. 이미 북미 지배층이 형성된 상황이다. 유럽과 다른 조건은, 능력만 있으면 유럽과 같은 제약없이 상류층으로 진출할 수 있다. 미국 지배층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자는 거의 없다.

   

이. 집단적이어야 한다.

   

먼저 온 집단보다 나중에 온 집단은, 유럽과 다른 차별을 겪어야 했다. 유럽에서의 차별이란 신분적 차별이었다면, 미국에서의 차별이란 그야말로 원초적 차별이었다.

   

신분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선점 집단은, 단지 내가 먼저 찜했음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분쟁 양상을 잘 묘사한 것이  영화, 갱스 오브 뉴욕 (Gangs Of New York, 2002)이다. 이때, 기준이란 민족적, 문화적 구분인 게다.

   

해서, 독일계다, 프랑스계다, 영국계다 이런 식으로 싸움이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 대안을 제시해야 살아남았다.

   

상류층 입장에서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이기든가 관심이 없었다. 격투기장에서 살아남은 검투사에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전자는 생존 본능이 강한 자들이다.

하면, 후자는 생존 본능 플러스 기획이다.

   

상류층이 지속적으로 상류층이려면 단지 족보만 상류층이면 말짱 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북미 상류층이 잘 안다. 해서, 북미 상류층은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북미 상류층이 새 사상과 신기술에 등한시하면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미국 독립 이후 독일계 이민자들은 펜실바니아 이외의 지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역이란 서부인 게다. 뉴잉글랜드는 청교도, 버지니아주는 국교도, 펜실바니아는 초기 독일계 이주자. 

   

이때, 이주 결심을 확고하게 한 배경이 있었으니 영국 왕조가 이전에도 독일계였지만, 이번에는 독일 남부 작센주, 오늘날로 보면 바이에른 주 귀족이 영국 왕이 되는 것이다.

   

해서, 작센주 출신 독일왕을 따라 수많은 자들이 기회를 찾아 영국으로 이주했다. 허나, 영국에 오니 막상 살 길이 없었던 게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데, 영국민은 다른 나라 인민처럼 어렵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계 해상을 제패한 영국 해군은 19세기 초중반까지 해병이 없어서 스코틀랜드 해안가를 돌며 닥치는 대로 청년을 납치해서 해병을 만들든가, 아니면 미국 수송선을 털어서 수송선 선원을 해병으로 삼을 지경이었다.

   

하여, 이들은 프리메이슨 궤변에 속아서, 혹은 영국 왕에 대한 착각 때문에, 그냥 먹고 살기 힘들어서 등등의 이유로 북미 이주 커넥션에 넘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중서부에 자영농으로 살았다. 드라마 '초원의 집'에 나오는 미국 자영농 장면이란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미국 남부의 노예주 제도를 혐오했다. 유럽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동시에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사회에서 개인적으로 대응하기 보다 집단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국 원조 공화당파인 게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킬 사람은 국가가 아니라 오직 자신임을 안다. 개인주의.

   

동시에 다른 집단이 집단적이므로 일시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보안관주의, 영웅주의.

   

세계는 필요없다. 어차피 세상이란 불합리하므로 내가 살고 있는 이곳만 안전하면 된다. 미국 고립주의.

   

정리하자.

   

초기에는 스페인 유태인, 마라노, 혹은 콘베르소 유태인이 월등했다. 허나, 1700년이 지나 독일 30년 전쟁 이후에는 마라노, 콘베르소 유태인은 독일에서 오는 유태인과 완전히 뒤섞였다. 둘의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았기에. 둘은 기존 사회에 재빨리 적응하여 상류층이 되었다.

   

1700년 이후로는 스페인 유태인이 북미로 이주할 이유가 없는 반면, 독일 유태인이 북미로 이주할 사유는 계속 발생하였기에 1750년에는 이미 독일계 유태인 수가 스페인계 유태인 수를 넘어섰다. 그래봐야 1650년에서 1825년까지의 약 175년 동안 유태인 이민 숫자는 약 1만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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