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김용, 시온의정서, 1897년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4 06:21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43766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9 : 대한제국, 김용, 시온의정서, 1897년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4
김용 세계은행 총재 임명 뉴스를 보고서 유태인 시리즈를 대신하여 긴급 작성하는 글이다.
인드라 논평이다.
국유본의 김용 세계은행 총재 임명에 인류와 함께 환영한다.
김용 총재 임명은 시대사적 요청이다.
지난 역사에서 IMF는 유럽 몫, 세계은행은 미국 몫이었다.
케인즈가 바보 같은 넘들에게 중책을 맡길 수가 없었다고 한 점은 일리가 있다.
허나, 시대가 지난 만큼 케인즈의 발언도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건 여전히 미국, 유럽, 일본이다.
허나, 미국, 유럽, 일본은 갈수록 경제 여력이 약화되고 있다.
반면, 한국, 러시아, 중국, 브라질 등은 세계 경제의 희망이다.
특히, 한국은 이차대전 이전 식민지 국가 중에서 모범이 되는 발전을 해왔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짧은 시간 내에 이룩한 국가가 전 세계에 누가 있는가.
이러한 국가 출신에서 세계은행 총재가 나온다는 것은 필연인 게다.
아쉬운 점은, 대한민국에서 활동중인 인물이 총재가 되었으면 했다.
허나, 역대 미국에서 총재가 나왔다는 점에서 미국 측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한국인을 믿어주길 바란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홍익인간을 위해 태어난 족속이다.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면 주었지, 해를 끼칠 족속은 못 된다.
알고 보면, 굉장히 착한 넘들인데,
시대가 힘들다 보니 나쁜 넘들이 좀 많다.
쪽바리를 많이 제거하면 인류가 가장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민족일 것이다.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에게 총살을!
고맙다.
일회적인 관계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관계가 이어지기를!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인 1897년은 우리나라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光武로 고치는 등 격변하는 한말의 풍운속에 적어도 겉으로는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한 해였다. 당시는 동학혁명 진압을 구실로 러시아, 일본, 청,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대내외에 면모일신을 선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외세에 의존한 나머지 아관파천으로 무려 1년동안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이 해 2월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어, 무너진 나라의 체면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또 3월에는 `베베르.고무라 각서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는 우리 정부가 체결한 것이 아니므로 각 조항이 조선정부의 자주권을 구속할 수 없다'는 내용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 10월에는 국호를 바꿨으며 황제즉위식도 거행, 왕후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하는등 중국,일본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아관파천 이후 1년간 중요 정책이 러시아 수중에서 이루어진데다 유혈정쟁을 치른 내각이 친러파 중심으로 채워지는 등 나라의 주체성이 크게 흔들린데 대한 자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외세의 개입은 당시 탁지부 고문이었던 알렉세예프가 사실상 재무장관의 역할을 한데서 알 수 있다. 또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여타 서구열강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이권을 차지하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이 해에는 실제로 많은 이권이 열강으로 넘어갔다. 4월에 독일 상사인 세창양행에 광산채굴권을 허가했으며 3월에 공사가 시작된 경인철도를 넘겨받기 위해 5월에 일본인들이 인수조합을 발족시켰다. 또 6월에는 일본이 자국에 대한 미곡수출 금지령인 방곡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10월1일부터는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했다. 12월에는 충청도 각지의 방곡령이 실제로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나라 꼴을 바로잡고자 한 노력도 활발했다.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는 비록 형태나, 기구 등이 체제가 잡혀있지는 않았으나 의회정치의 근대적 시초를 잡으려는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평가된다. 황국협회의 방해.파괴책동으로 기능이 마비되고 서재필이 두번째 망명길에 오르는 사태까지 벌어지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1897년 10월 만민공동회를 개최, ▲관민협심하에 황권을 견고히 할 것 ▲각종 이권은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결재과정을 거칠 것 ▲재정의 공명과 예산.결산은 국민에게 공포할 것 ▲재판의 공정과 인권을 존중할 것 ▲책임관의 임명은 정부의 의견을 들어서 할 것 ▲이를 실천장정할 것 등의 6가지 결의안을 채택, 고종에게 전달했다. 정부에서는 일부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아직 열강에 의존하려는 분위기였다. 이 해 9월 러시아 군인 14명을 군사고문으로 해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한 것이 그 예. 12월에는 총세무사 브라운의 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벌릿 제독이 인솔하는 영국 군함 12척이 인천항에 들어오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단발령 때문에 술렁거렸다. 8월에 철회되긴 했지만 그 때까지 관리들이 칼이나 가위를 가지고 거리나 성문에서 사람들의 두발을 강제로 잘랐으며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털을 자를 수 없다며 버텼다. 유생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해 1월1일에는 한성거리에 석유 가로등이 처음 등장했으며 청나라의 마적들이 삼수와 경원, 경흥 등지에 출몰해 민심을 사납게 만들기도 했다. 종교계에서는 손병희가 동학의 3대 교주로 선출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도 개점했다. 한편 미국인 선교사 베어드는 평양에 숭실학교를 설립했으며 현재의 조흥은행인 한성은행도 이 때 설립됐다. 96년의 이화학당에 이어 97년 설립된 정신여학교는 여성들에게 신식교육을 실시,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082523
1897년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이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부여하는 칭제건원(稱帝建元)으로 조선의 중흥을 염원하였다.
광무제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2년 뒤인 1897년 11월 22일에야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루었다.
도마 안중근 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관이 안동 김씨인 김구 선생은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몰락해서 가문이 황해도로 이주한 뒤 평민으로 위장하여 살던 중 20세였던 1895년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에서 의병부대에 소속돼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의 손해 시해된 해였다. 그는 명성황후 서거 이듬해인 1896년에는 일본 중위 쓰치다를 죽여 체포됐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그는 광무제의 특명으로 1897년 특사, 구사일생했다.
1897년 일본 군사용 지리교과서는 `독도는 조선땅'이라고 표기했다.
"영월 호야지리박물관은 1897년 일본 문부성(우리나라의 교육과학기술부)이 검정을 마친 일본지지(地誌, 지리교과서)를 소장 중이다. 이 교과서에 수록된 당시 지도를 보면 일본열도와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 등 일본의 영토는 모두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다. 반면 당시 대한제국을 선포한 우리나라의 영토는 모두 흰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지만 울릉도는 죽도, 독도는 송도로 써놓고 우리 영토인 흰색 점으로 표시했다."
http://www.kwnews.co.kr/nview.asp?s=501&aid=211081100095
1897년은 한국 최초 제약회사 동화약품이 부채표 활명수를 내놓은 해이다.
1897년 남대문로에 세워진 회동서관이 한국 최초의 서점이다.
한국 최초의 보험은 사람 보험이 아니라 1897년 6월에 대조선보험회사가 발행한 소 보험이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20일 준공됐다.
수옥헌은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양식 2층 건물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97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다.
인천 답동성당(사적 제287호,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은 1897년 프랑스 선교사 코스트 신부에 의해 지어진 우리나라 초기의 성당이다.
1897년 러시아 건축가의 설계로 덕수궁 중명전이 건립되었다.
탑골공원은 1897년 탁지부(국가 재정을 담당했던 관청) 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존 브라운의 건의로 만들어졌다.
하고,
HSBC는 1897년 중국, 일본과 교역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지점을 열었다.
1897년 당시 러시아 통계에 따르면, 한국말을 하는 인구수는 26,005명(남자: 16,225, 여자: 9,780)이었다.
조선이 근대화하고자 몸부림을 치는데, 왜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 교훈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역사를 국내적으로만 파악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최소화하고, 세계 정세에 눈을 뜰 때다.
국내 정치는 쪽바리 색희들만 뒈지면 된다.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 정은에게 총살을!
우물 안 개구리는 죽는다.
1897년은 세계에서나 한국에서나 중요한 한 해였다.
"거문도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에야, 그것도 국장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러시아가 평가한 우리 나라의 비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는 관심의 대상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러시아가 한반도병합을 기도할 경우 청나라와의 관계악화는 물론이고,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시켜 영국과 청나라의 연합을 촉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디겐스키회담이나 1888년의 한러육로통상장정(韓露陸路通商章程)도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의 개전은 두 가지 점에서 러시아의 대한정책을 크게 바꾸어놓았으니, 첫 번째는 종래 국장급회의로 결정되던 대한정책을 각료회의의 논의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한반도문제에 관한 한 일본과의 협조가 아니라 일본에 대하여 열강과 공동간섭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테의 입안에 따라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조인 후 6일 만에 전격적으로 제기한 대일(對日) 3국간섭이다(1895.4.23.).
이에 따라 일본은 러시아 등의 열강에 굴복,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되었다. 우리정부에서는 노골적인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멀리하는 정책)을 써서 친일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친러파를 중용하였다.
이에 일본은 약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민비(閔妃)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10.8.)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국내의 거센 반발과 국제적인 압력에 부닥치게 되고, 이어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1.∼1897.2.20.)으로 일본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입장이 된 반면, 러시아는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활동과 이권획득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96년 5월 14일 러시아·일본 양국의 주한공사들 사이에 합의된 베베르(Weber,K.)·고무라(小村)각서는 러시아의 우위가 인정된 것이었다.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 참석을 이용해서 모스크바에서 성립된 로바노프·야마가타(山県)의정서(일명 모스크바의정서, 1896.6.9.)는 한반도에서의 양국의 지위를 협의한 고위층간의 타결이었다.
그러나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가 일본과 타협한 것은 태평양연안에서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일본을 잠시 안정시키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위테는 이미 그보다 일주일 전에 대관식에 참석한 이홍장과 러청비밀동맹(露淸秘密同盟)이라는 대일본공동방위동맹을 맺어 동청(東淸)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고, 6월 1일부터는 고종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閔泳煥)과도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와는 상반되는 목적을 가진 '조선사절에의 회답요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교행각과 아울러 서울에서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온 고종을 상대로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4월 니시첸스키(Nisichensky)라는 자의 명의로 함경북도 경원·종성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해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린너(Brynner,Y.)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유역과 울릉도 삼림채굴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동해의 포경권에도 손을 뻗쳐 울산·성진 등지의 어장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시기의 러시아는 우리 나라의 군사·재정에 관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만주방위를 위한 완충지대의 역할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과의 평형을 유지하며 자국세력의 거점을 마련한 뒤, 친위대 및 군대의 훈련을 관장하고 재정고위직을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데 그치려 하였다. 1896년 8월 스트렐비트스키(Strelbitski)대령이 내한하였으며, 같은해 10월말에는 푸티아타(Putiata)대령 등 교관단일행이 민영환 등과 함께 서울로 왔다.
한편, 우리 나라 사절에게 약속하였던 차관제공을 미루고, 이것이 불신을 사게 되어 러시아의 한반도에서의 세력이 한때 흔들리는 위치에 있었다. 경제적으로 일본에 훨씬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테의 모든 관심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되어 이홍장과의 교섭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백이 영국·프랑스 등의 열강에 이용당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환궁도 러시아에 대한 실망을 말해준다.
그러나 위테가 그의 비서장 로마노프(Romanov,P.M.)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이 대한진출을 결심하고 알렉세이프(Alexeiv,K.A.)를 파견함에 따라 사태는 다시 바뀌었다.
그는 "한러은행설립을 준비하고 세관관리를 러시아인 수중에 넣으라."는 위테의 훈령에 따라 1897년 9월초 서울도착과 함께 우리 나라 세관관리상태를 파악하고,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Brown,M.)의 부정행위 증거를 포착, 축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5일 그는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로 임명되었고, 11월 10일까지는 세관의 모든 업무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의 약세는 완전히 만회되었다. 그렇지만 위테의 이러한 대한정책도 자르의 신임이 외상 무라비에프(Muraviev)로 옮아가게 되고, 그의 제의에 따라 1897년 12월 19일 뤼순·다롄(大連)을 점령하게 되자 다시 한번 크게 바뀌게 된다.
아시아정책이 한반도 중심에서 만주중심정책으로 바뀌게 되고, 그 반영으로서 러시아의 양보를 의미하는 1월의 제의가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西)협상으로 매듭지어졌다. 이에 앞서 러시아는 훈련교관과 재정고문을 자진 철수시켰고, 개점한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한러은행도 해체시켰다. 로젠·니시협상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우위만을 인정해주었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의 외교적 우위마저 인정해주는 셈이 되어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만주중심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일본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만으로 인정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러시아가 일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한반도에서 대일견제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인 '금융 및 산업위기'가 겹쳐 모든 사태를 1898년 중반으로 묶고 더 이상의 진전을 자제한다는 '신정책'이 확정된 상태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4941
세계 최강 영국이 일본 편만 드니 조선은 러시아로 편향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이것이 국유본의 함정이요, 노림수였던 것이다.
상기한 자료를 검토하면 알 수 있다. 러시아가 부동항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조선을 화끈하게 지원하는 방안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미온적이었다. 자료에도 조선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설명들이 역사책에 곧잘 나온다. 이걸 그냥 그대로 믿어야 하나?
왜 중요하지 않을까.
예서, 핵심인물은 재무장관 위테, 혹은 빅테이다.
"'황금의 루블화' 라는 말은 푸틴 대통령이 만든 조어가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 제국의 재상이었던 '세르게이·빅테'가 실시한 통화 개혁을 상징하는 말이다.
빅테는 러일전쟁 종결을 짓는 포츠머스 조약의 러시아측 교섭책임자로서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러시아의 역사에 남는 빅테의 업적은 금융·재정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빅테는 1982년부터 1903년까지 알렉산더3세부터 니콜라이2세에 이르는 정권에 걸쳐, 11년간의 재상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에 재정개혁을 단행하고 루블화의 금본위제를 실현하였으며, 교환 가능한 세계에 통용할 수 있는「황금의 루블」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화폐 개혁이 개혁자 빅테라는 이름을 러시아 역사에 찬란하게 빛 낼 수가 있었다.
세계는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대영제국은 1821년에 금본위 체제를 확립하였다. 당시에는 금을 배경으로 대영제국의 파운드가 최강의 통화였다. 1870년부터 열강은 차례대로 금본위제도를 도입하였다. 각국 통화와 금과의 교환비율이 정해진 금본위제도의 확산은 대영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리게 되었고, 일곱 개의 바다를 지배하는 팍스·브리테니커의 세계 속에서 금을 기준으로 하는 자유무역체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말하자면 최초의 글로벌화였다. 러시아제국이 금본위제로 이행한 것은 주요 선진국 보다도 훨씬 늦은 1897년이었고 일본이 금본위제로 이행한 해와 같은 해였다.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유지하는 경비를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확대일로로 지속된 제국의 전쟁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서 방만한 재정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금본위 체제를 도입하기 전에도 루블화 지폐는 금 혹은 은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황제의 명령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는 명령은 일반 서민이나 외국에서는 신용 받지 못하고, 루블화와 금과의 교환 비율은 크게 하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금본위체제로의 이행은 영국의 파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글로벌 경제를 향한 러시아 제국경제의 통합을 의미하고 있었다. 늦어진 농업국가 러시아를 공업화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의 유입을 가속화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빅테는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빅테의 개혁에는 놀랄 정도로 현재의 푸틴 정권의 전략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빅테의 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러시아 제국의 중요한 수출품인 곡물 수출에 따른 거액의 금 축적이었다. 이것도 원유라고 하는 최강의 무기를 가진 현재의 푸틴 정권과 유사하다. 금본위제도라고 하는 당시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통합은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켰고, 러시아 제국의 공업 생산은 연10% 이상 증가를 지속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루블화도 거액의 금 축적과 공업화의 촉진에 따라 파운드 다음으로 신용이 있는 통화로서 「황금의 루블화」하고 불리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해외 여행을 할 경우 황금의 루블화를 손에 넣고 있으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강한 루블화를 배경으로 러시아 국채의 신용도 올라가고, 빅테는 이러한 국채를 통해서 얻은 자금을 가지고 장대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 등, 니콜라이2세 시대의 국가사업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http://blog.daum.net/focusbank/5340321
1821년 영국에서 금본위제가 시작된 이후, 독일은 1871년, 미국 1873년, 프랑스 1878년에 이어 189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96년에 러시아가, 1897년에는 일본이 각각 금본위제도로 이행한다.
이때, 왜 재무장관, 빅테는 금본위제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일반적인 설명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유지하는 경비를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확대일로로 지속된 제국의 전쟁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서 방만한 재정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금본위 체제를 도입하기 전에도 루블화 지폐는 금 혹은 은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황제의 명령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는 명령은 일반 서민이나 외국에서는 신용 받지 못하고, 루블화와 금과의 교환 비율은 크게 하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라는 것이다.
허나, 과연 그러한가.
금본위제를 한다는 것은, 금본위체제로의 이행은 영국 파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글로벌 경제를 향한 러시아 제국경제의 통합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스차일드 경제로의 통합을 의미한다. 일본을 제외하고, 각국 금본위제 실시 연도가 다른 것은, 로스차일드 경제로의 항복 선언이 각기 달랐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실각 당시로 시계추를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 프랑스 재정을 책임진 리셸리외 공작은 베어링 브라더스가 제시한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수모를 당한 뒤 말했다.
"유럽에는 6대 파워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베어링 브라더스가 그들이다."
이 시기 영국과 유럽, 세계를 주도한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니라 베어링 가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로스차일드는 막 금융계에 입문한 신참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브레멘의 루터파(派) 교회에 속하는 목사의 아들 J. 베어링이 명예혁명 후 영국에 이주하여 데본셔에서 모직물업을 시작하였으며, 후에 유럽의 제6의 강국으로까지 알려진 금융왕국 베어링가(家)가 등장하게 되었다. 1762년 J. 베어링의 아들 S. F. 베어링은 형과 함께 런던에서 존프랜시스 베어링(John & Francis Baring & Co.)을 설립하여 무역·은행업 등을 경영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1806년 현재의 이름으로 상호를 바꾸고, 1817년 프랑스의 배상금 지불을 위한 기채(起債)를 맡으면서 외국채(外國債)의 발행 중개(仲介)를 하기 시작하여 영국의 금융적·상업적 팽창을 매개하였다. 1890년 아르헨티나의 재정파탄으로 그 기채를 보증하였던 이 회사가 지불정지 일보 직전까지 몰림으로써 영국 경제계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는데, '베어링 공황'이라고 불리는 이 위기는 잉글랜드은행의 과감한 조치로 저지되었으나, 1891년 이 회사는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그 후 4년 만에 신용을 회복하여 이 무렵부터 급속히 증대된 영국의 해외투자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근까지도 영국의 금융권력의 일각을 유지하다 1995년 싱가포르지점 딜러의 무리한 투자로 인해 파산하여 그 경영권이 네덜란드의 ING그룹으로 넘어갔다. 한국에는 1986년 진출, 서울 중구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
[출처] 베어링브러더스 [Baring Brothers & Co. ] | 네이버 백과사전
베어링 가문은 본디 네덜란드 양모 상인 출신이었는데, 독일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온다. 이때, 이들이 터를 잡은 데가 장로교와 프리메이슨 세력이 강했던 스코틀랜드 지역이다. 예서, 삼형제가 옷장사를 했는데, 이중 프란시스가 형제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역 금융업을 시작해서 대박이 난 것이다.
"원래 이름이 존앤드프랜시스베어링사(社)였던 이 가문의 회사는 장차 준남작 1세가 된 프랜시스 베어링 경(1740~1810)의 주도하에 1763년 런던에서 설립되었다. 처음에 이 회사 동업자들은 다른 상인들의 수출입을 중개하는 일을 했으나 곧 자신들의 이름으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상품을 사들였으며 무역어음을 인수하는 형태로 신용대부를 하고 고객들과 개인적인 친구들로부터 예탁금을 받기 시작했다. 1792년부터는 영국이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는 데 필요한 자금조달을 도왔으며 1806년 회사 이름을 베어링브러더스사로 했다. 프랜시스 베어링은 또한 해상보험을 인수했으며 동인도 회사 경영에 기여한 공로로 준남작작위를 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추종자였으며 공리주의 개혁가 제러미 벤담의 친구이자 총리 윌리엄 소(小)피트를 비롯한 많은 영국 정치가들의 자문 역할을 했다."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9b2202a&ref=8#ID8
베어링 가문 프란시스는 런던에 회사를 차린 지 불과 삼십 년만에 영국 최고의 금융가로 떠오른다. 하고, 그 과정은 신비에 쌓여 있다. 인드라는 세 가지 지점을 짚어본다.
일, 영국과 네덜란드 왕실이다.
나사우는 1866년까지는 독립된 독일동맹의 공국이었으며, 그 이후로 1944년까지는 프로이센령 헤센나사우와 비스바덴에서 주요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라인란트팔츠주와 헤센주에 속한다.
1100년 무렵 라우렌부르크백작이 나사우성을 축조한 사실에서 이 이름이 붙여졌고, 1160년 이후 이 집안은 나사우백작 집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255년 이 집안은 발람 가계와 오토 가계로 나뉘고, 주류인 발람 가계는 독일 국왕 아돌프(재위 1292∼98)를 배출하였고 영토의 분할 통합이 되풀이된 뒤 1802∼1806년에 재통합되었고, 1806년에 후작위가 인정되었다. 오토 가계는 1514년 당시 나사우(Nassau) 백작 '조용한 윌리엄'이 '오런지공'의 지위를 상속받아 오런지 나사우(Orange-Nassau)가문이 되었다.
오런지공 윌리엄(오란여 빌럼)은 1515년부터 에스파냐왕 겸 독일 황제 카를 5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 총독이 된다. 그러다가 1566년 에스파냐에서 파견한 네덜란드 총독 알바공과 그의 군대에 반란을 일으켜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 북부 7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오런지공 윌리엄의 지휘로 에스파냐군을 몰아냈고, 오런지-나사우 가문 혈통의 오런지공이 1579년 성립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초대 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581년 북부지역 신교국가로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1588년에는 영국과 함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6세기 해상 패권을 장악하며, 1618~1648년 30년 전쟁 끝에 완전한 독립이 승인되었다.
이 당시 오런지 윌리엄 군대는 헤센-카셀의 란츠크네이트 용병에 대해 처우개선을 내걸어 신분 보장을 함으로써 강력한 군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여기에 나사우 백작 가문의 독특한 군대 전술이 결합되어 강군이 된다.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무장해선은 세계 최강이었다. 당대 비교할만한 영국보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막강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해상무역의 4/5을 독점하였고, 여기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각국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4차례에 걸친 영란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크롬웰이 혁명을 성공시키자마자 유태인 입국을 허가한 것은 네덜란드가 수십년만에 해상강국이 된 배경에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의 자금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명예혁명 후 윌리엄 3세와 함께 호프가문 등 네덜란드 유태 금융 자본가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했다. 또한 영란은행이 화폐발행권을 따낸 것도 네덜란드의 예를 따른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시티지구를 석권하기 이전에 패권을 쥐었던 베어링 가문 역시 네덜란드에서 양모 사업을 하다가 독일로 이주했다 스코틀랜드로 온 상인 출신이다. 참고로 양모사업은 백년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될 만큼 네덜란드 핵심 산업 중 하나이다.
이때, 명예혁명 이후 독일/네덜란드 계 왕이 영국왕이 되었으니 동향 출신이라는 점에서 우대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영국과 네덜란드 왕가는 오늘날에도 빌더버그와 로열더치셀에서 보듯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형제애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프리메이슨 인맥
베어링 가문 인맥에서 살필 수 있는 애덤 스미스, 제레미 밴담, 윌리엄 소 피트로 이어지는 인맥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1783년에 수상이었던 윌리엄 페티, 셀번 백작이다. 이 인물은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삼. 동인도 회사에 기여한 공로로 준남작 작위를 받다?
이 시기 베어링이 동인도 회사에 기여했다면 무엇일까. 179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권리를 영국 왕실로 넘기는 데에 중재 역할을 잘 했던 것일까.
이처럼 막강했던 것이 베어링 가문이었다. 헌데, 언제부터 베어링 가문이 힘을 잃기 시작했는가. 나폴레옹 실각 이후이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 유럽 판짜기를 새로할 때, 필요했던 것은 프랑스 국채 발행이었는데, 이때부터 로스차일드 위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미 스페인이 맛이 간 상태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어링 가문 6대 파워였던 것이 로스차일드가 추가되어 7대 파워가 된 것이다.
어떻게? 프랑스 국채를 높은 가격에 발행하려던 것이 승전국들의 의도였다. 헌데,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니 로스차일드였다. 프랑스 국채를 낮은 가격에 유지시켰던 것이다. 한마디로 껴주지 않으면 덤핑(?) 가격으로 훼방놓겠다는 게다. 해서, 베어링은 로스차일드 가문도 포함시키자고 열강에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몫을 6등분에서 7등분하면 몫이 작아지니 반대했던 열강들이 그제서야 로스차일드 파워를 감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나, 이때까지만 해도 열강 생각은 로스차일드 파워를 인정했지만, 독자적 능력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베어링 가문에 속한 지분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열강들은 로스차일드 배후에 베어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일면 사실이었다. 잔존 쟈코뱅/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세력이 있다 해도 베어링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지,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다.
로스차일드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단지 돈 좀 많이 쥔 졸부였을 뿐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열강 황제들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이 확고한 황제일수록 로스차일드보다 베어링에 더 의존했던 것이다.
해서, 일본을 제외하고, 금본위 역순으로 순서를 보면, 러시아 > 오스트리아 > 프랑스 > 미국> 독일 순으로 베어링을 신뢰하고, 그만큼 로스차일드를 불신했던 것이다.
헌데, 이것이 로스차일드 노림수였던 것이다.
잉글랜드 은행은 지속적으로 위기에 놓였었다. 이때, 잉글랜드 은행 위기를 구해낸 것은 베어링이 아니라 로스차일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로스차일드는 능력이 넘쳐도 자신을 베어링 다음인양 처신했던 것이다. 즉, 겉으로는 베어링을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 섰던 게다.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유럽 대륙 정치를 움직였던 것이다.
작은 것은 져준다. 해서, 베어링 가문 체면을 차려준다.
가끔 큰 것 한 방만 먹는다.
타짜의 방식인 게다.
이런 식으로 해먹다가 인월리가 말한 대로 중국 아편전쟁 이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란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각국도 식민지에 뛰어들어 해먹는 체제이다. 이때, 중구난방으로 해먹으면 곤란하니 교통정리가 필요한 게다. 그것이 금융이고, 금본위제인 게다.
최상위로 로스차일드가 있고, 금본위제, 중앙은행, 금융, 각국 정치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부동항이네, 뭐네 하는 땅따먹기 수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러시아 황제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를 지지해야 하는데, 북부를 지지해서 군대까지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 황제는 사실 개혁군주였는데, 국유본 덕분에 수구꼴통 신세가 된 것이다~!
이래서, 스탈린이 역사가를 두려워한 것이다. 사실은 국유본 역사가이겠지만~!
러시아 황제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를 지지해야 하는데, 북부를 지지하니, 별 수 있나. 로스차일드 가문 내부에서 역할 놀이가 발생한 것이다. 영국 로스차일드는 북부를 지원할 터이니, 프랑스 로스차일드는 남부를 지원하자~!
인드라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이것이 어디 남의 이야기인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피눈물이 흐른다.
1897년의 러시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이 구역 내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수는 5백여만 명으로 지역 인구의 11%를 차지했다.
1897년 당시 러시아 통계에 따르면, 한국말을 하는 인구수는 26,005명(남자: 16,225, 여자: 9,780)이었다.
영란은행은 위기 때 독일 금화로 150만 파운드를 러시아에서 빌렸다. 이때, 러시아는 베어링에 예치되어 있는 상당한 금액의 예금을 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예서, 중요한 건, 러시아 황실이 오늘날 스위스 은행에 예금하듯 베어링 은행에 예금을 예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뿐인가. 베어링 사가 파산하면서 회계정리를 하는데, 뜻밖의 계좌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베어링 지점 계좌에 제정 러시아 황제 이름으로 200만 파운드가 예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파악하고 있는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면, 이때 반문할 것이다. 그렇듯 무소불위하다면, 1905년 혁명을 실패하게 만들고, 1917년 혁명을 성공하게 만든 이유는?
그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인 게다.
이 의미를 1% 정도 수준이면 인드라가 더 말 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말씀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힌트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 관계이다. 미국 혁명이 발발했을 때 곧바로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면 너무 노골적이지 않겠나? 십 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
1.힘은 곧 정의요 진정한 권력이다.
2.언론을 통해 민중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3.우리는 경제력으로 세계를 장악한다.
4.우리는 혼란을 조장하고, 물질주의로 신앙을 대체시킨다.
5.흥행사업(연극 영화)으로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취미생활에 몰두시켜라.
6.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이를 멸절시켜야 한다.
7.군사력을 강화하고, 언론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켜 이득을 본다.
8.전문가를 양성해 우리에게 유리한 법 조항을 만든다.
9.각 국의 국민들을 프리메이슨적 의식구조로 교육시킨다.
10.약점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11.하나님은 우리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하였다.
12.언론을 통제해 대중의 심리를 조종한다.
13.대중을 스포츠, 연예, 오락에 심취하게 해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14.세계정부에서는 유대교만 허용하고 기독교는 말살하라.
15.세계정부는 법 적용을 엄격히 하고, 반항자는 가혹히 처벌한다.
16.역사를 조작하고, 새로운 철학으로 교육한다.
17.인간을 개조하고 서로 고발하게 해 완벽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18.고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음모를 일삼고, 우리 통치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시킨다.
19.국민에게 철권정치의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한다.
20.정부를 빚으로 옭아매고, 국민을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킨다.
21.우리는 내국채로 정부를 파산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
22.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23.세계정부는 사치를 금하고 절대적인 전체주의사회를 구성한다.
24.다윗의 후손 중 왕을 선출하여 비밀지식을 전수한 후 권좌에 앉힌다."
http://ko.wikipedia.org/wiki/%EC%8B%9C%EC%98%A8_%EC%9E%A5%EB%A1%9C_%EC%9D%98%EC%A0%95%EC%84%9C
시온의정서는 1903년에 나온 위서이나 비공식적으로 1897년에 유출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이에 대한 인드라 생각은 무엇인가.
시온의정서는 300인 위원회의 첫 사업이다. 존 콜먼에 의하면, 300인 위원회는 1897년에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시온의정서라는 위서를 작성한 실체는 누구인가. 인드라는 페이비언협회라고 보고 있다.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끈질기게 시기가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는 것을 모토로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페이비언협회의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명칭은 지구전술(持久戰術)로 한니발을 격파한 고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유래하였다.
페이비어니즘은 특정한 사상체계가 공식으로 정해진 것이 없는데다가 80년 이상 활동해 온 페이비언협회의 주장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협회 창설 당시의 지도자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그의 친구 시드니 웨브(Sidney Webb), 애니 베전트(Annie Besant) 등의 사회주의사상, 즉 의회정치의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사회개량을 진행하면서 생산수단의 공공적 소유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정의된다.
페이비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특정의 역사관·경제이론·정치학설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초기 지도자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 역사관은 점진적 진보의 낙천론 위에 서 있다. 즉 사회는 기술적 발달과 물질적 부의 증대에 의한 구성원의 행복의 증진이라는 방향으로 진보해가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의 내부에 그 존속을 위협할 만한 파괴적 요소가 나타나면, 그것을 극복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자본주의 문명이 발달한 결과로 많은 부(富)가 축적되는 한편 노사의 대립이라든가 도시문제 등의 폐해가 생겼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는 정책이 대증요법식(對症療法式)으로 취해져 왔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의식적·계획적으로 폐해에 대한 극복책이 취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경제생활에 적용한 것으로서, 혁명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페이비어니즘 초기에는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지대론(地代論)의 생각을 토지 이외의 생산요소, 특히 자본에 적용하여 자본 및 토지의 생산성의 차액에서 생기는 잉여를 그들 생산요소의 소유자가 사유함으로써 빈부의 차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거기에서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는 착취하는 것은 소유에 의한 불로소득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고, 착취당하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사회라는 관점이다.
이 이론은 그뒤 포기되었지만, 생산수단의 공유화는 여전히 주장되었다. 또한 그와 함께 재정정책과 사회보장, 그밖에 노동입법 등에 의한 부와 소득의 평등화 정책이 사회주의 실현의 방법으로서 주장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사회주의 실현의 담당자도 노동자계급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불로소득의 폐지에 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 지지자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페이비언주의의 기초이론은, 그뒤에도 사상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으나 의회정치에 의한 개선의 축적에 의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생각은 그뒤에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1918년에는 그 생각이 영국 노동당의 정책으로 채택되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뒤의 제2인터내셔널에 가맹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 1931년에는 독립기관인 페이비언조사국이 결성되었으며, 1938년에 조사국은 협회에 통합되었다. 1940년에 협회 안에 식민지 지국이 설립되고, 1941년에는 페이비언 국제국이 창설되었다.
페이비언협회의 회원은 최전성기였던 1946년에도 지지자가 8,400여 명 정도로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하원의 노동당 지도부는 물론 노동당 출신 의원의 상당수가 페이비언협회 출신이었던 만큼 그 영향력은 지대했다. 협회의 주요활동은 강연, 토론회를 통해 대중에게 페이비어니즘을 홍보하고, 소책자와 정기간행물 등 출판물을 간행하며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출처] 페이비어니즘 [Fabianism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때, 연도에 주의해야 한다.
제 1 인터내셔널이 1864년에 맑스 주도로 구성되었다.
1871년 파리콤뮨으로 제 1 인터내셔널은 큰 혼란에 빠진다. 지금까지 맑스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맑스의 난해한 책 때문인가. 아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맑스의 '공산당 선언' 정도만 읽은 이들이 99.99% 이다.
그럼에도 맑스가 권위를 유지했던 배경은, 맑스와 로스차일드를 잇는 특수한 관계였다. 그것은 맑스가 아무리 부정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1848년 혁명 실패에서 맑스가 구사일생 치사빤스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공황 이론이었다. 이것 하나로 간신히 1871년까지 버틴 것인데, 니미, 씨발, 로스차일드 색희가 맑스 운지시킨 게다.
하여간, 1871년 파리콤뮨. 더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인터내셔널이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이때, 맑스는 바쿠닌을 음해한 뒤 바쿠닌을 제거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얍삽한 짓을 저지르고 만다.
허나, 얍삽한 짓이었던 만큼 바쿠닌파 축출 이후 제 1 인터내셔널은 직후 기능이 사실상 정지된다.
그러다가 1876년 바쿠닌이 죽자 제 1 인터내셔널도 해체가 된다.
맑스도 나이를 먹었잖아. 도리가 있지. 바쿠닌 죽고 뭔 제 1 인터내셔널이냐? 이때부터 맑스는 도인이 되기 시작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시기 이후 맑스 발언 보면 죄다 저렇다. 그저 사람 좋은 병쉰 할배가 되었던 게다.
하고, 맑스가 1883년에 죽는다.
이때, 1883년에 결성했던 페이비언 협회가 1884년 연초에 정식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간 맑스가 담당했던 것을 페이비언 협회가 책임지겠다는 것이 아니냐.
게다가 페이비언 협회 과제는 맑스 뿐만 아니었다.
1878년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자 탄압법과 함께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법을 실시했던 것이다.
해서, 이러니 저러니 하며 십 년을 보냈는데,
생각보다 페이비언 협회가 헛빵이다 보니
국유본의 간접 응원 속에서 엥겔스가 1889년 제 2 인터내셔널을 만들었는데,
이미 열기는 식었던 게다.
상설 사무소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897년 제 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바젤에서 열리는 게다.
누가 기획했을까.
유태인일까.
아니다.
헤르츨이 바보가 아니지만, 이 정도 머리가 있는 넘은 아니다.
로스차일드이다.
다시 한 번 음미하자.
"
1.힘은 곧 정의요 진정한 권력이다.
2.언론을 통해 민중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3.우리는 경제력으로 세계를 장악한다.
4.우리는 혼란을 조장하고, 물질주의로 신앙을 대체시킨다.
5.흥행사업(연극 영화)으로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취미생활에 몰두시켜라.
6.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이를 멸절시켜야 한다.
7.군사력을 강화하고, 언론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켜 이득을 본다.
8.전문가를 양성해 우리에게 유리한 법 조항을 만든다.
9.각 국의 국민들을 프리메이슨적 의식구조로 교육시킨다.
10.약점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11.하나님은 우리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하였다.
12.언론을 통제해 대중의 심리를 조종한다.
13.대중을 스포츠, 연예, 오락에 심취하게 해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14.세계정부에서는 유대교만 허용하고 기독교는 말살하라.
15.세계정부는 법 적용을 엄격히 하고, 반항자는 가혹히 처벌한다.
16.역사를 조작하고, 새로운 철학으로 교육한다.
17.인간을 개조하고 서로 고발하게 해 완벽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18.고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음모를 일삼고,우리 통치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시킨다.
19.국민에게 철권정치의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한다.
20.정부를 빚으로 옭아매고, 국민을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킨다.
21.우리는 내국채로 정부를 파산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
22.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23.세계정부는 사치를 금하고 절대적인 전체주의사회를 구성한다."
제 1회 시오니스트 대회는 1897년 8월 29일 3일간에 걸쳐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Diamond Jubilee(다이아몬드 기념식)은 1897년 6월 20일에 열렸다.
록펠러(John Davision Rockefeller)는 1897년부터 자선사업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영국과 프랑스계 로스차일드(Rothschild) 은행의 재정 지원으로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유조선을 소유한 쉘 운송 무역 회사(Shell Trans - portation and Trading Company)를 설립했다.
에밀 졸라는 1897년 드레퓌스 사건을 고발했다.
1897년의 그리스 터키 전쟁 또는 30일 전쟁 내지는 그리스 역사상 암흑의 1897년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서 치뤄진 전쟁이다.
국제수학자대회는 18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4년마다 열려왔다. 필즈 메달 시상식도 이 대회에서 진행된다.
1897년 미국에서 설립된 다우케미칼은 화학, 특수물질, 신소재, 플라스틱, 비즈니스, 농화학 등 다양한 기술 기반 제품과 솔루션을 세계 160여 개국에 제공하는 글로벌 화학기업이다.
캠핀스키그룹는 1897년 독일에서 창업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톱 클래스 호텔 그룹이다.
포레시아 그룹은 프랑스 낭테르에 본사를 두고 1897년 설립했다.
1897년 '토마스 에디슨'이 설립한 GE의 모체인 GE라이팅은 백열램프, 형광램프, LED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897년 흑백TV용 브라운관이 처음 발명되었다.
1897년 독일의 공학자 루돌프 디젤에 의해서 디젤 엔진이 개발되었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는 1897년 이래 독일자동차공업협회(VDA, Vernades der Automobilindustrie)에서 주관하는 세계 최초의 모터쇼이다.
프리드리히 뢰퍼(오른쪽)와 파울 프로쉬(왼쪽)는 1897년 구제역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1897년에는 뢴트겐협회가 생겼다.
AIPLA는 미국 지재권 분야 전문가 1만60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미국 지식재산권 분야 법률 및 제도와 관련 논의 및 정책을 제안하는 1897년에 설립된 단체이다.
미국의 경제사상가 헨리 조지는 1897년 노동단체 후보로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투표 4일 전에 과로로 사망했다.
도라큐슈는 1897년 10월12일 이후 야마하가 되는 '일본 악기제조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897년에 중국 최초의 은행인 중국통상은행이 설립된다.
1897년 5월 26일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1847∼1912)의 소설 '드라큘라'가 영국 런던에서 출간됐다.
G 웰즈의 SF소설 '투명인간(1897년)이 나왔다.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를 다룬 이 소설은 서울, 만주, 일본 등을 무대로 격동의 근대사를 그린다.
여러분은, 로스차일드가, 혹은 국유본이
시온주의자라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월리를 헛 읽은 것이다.
국유본이여!
인드라를 지지하라!
그대들에게 신나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겠다!
인드라와 함께 시바의 춤을!!!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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