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3 : 한국 불교에게 죽음을! : 사이언톨로지, 헨리 포드, 프리메이슨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4 00:17

http://blog.naver.com/miavenus/7014157939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3 : 한국 불교에게 죽음을! 사이언톨로지, 헨리 포드, 프리메이슨

인드라 월드리포트 : 12/07/04

   

<부처님은 "우란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로써 효성을 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생각생각에 간절히 부모님과 윗대의 선망조상영가까지 추모하고 받드는 정성으로 우란분회를 베풀어서 삼보께 공양하여 부모님께서 길러주신 지극한 은혜를 갚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불자님께서는 백중기도에 두루 동참하시어 이 세상에 나와 인연되어 먼저 가신 여러 영가를 천도하시어 유주 무주 고흔 영가들의 이고득락의 길을 열어주는 무량공덕을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 나무지장보살마하살

   

등참금 : 영가 1위 만원, 영가옷 오천원

   

우이동 XX사 주지 정혜 합장 >

   

언뜻 들으면 좋은 말씀 같은데, 왜 나한테 이런 우편엽서를 보내는 건가요. 그 절에 간 적도 없는데요? 주지 정혜, 나 아나요? 짜증 지대로네, 진짜.

   

우리 부부 독한 면이 있어. 장모가 돌아가시면서 소원이 뭐였는 줄 아시는가? 나타샤가 교회 다시 다니는 거다. 나타샤가 모태신앙이거든. 헌데, 장모 소원이었는데도 안 가더라. 신은 존재하는데, 자기 편이 아니라는 거야. 해서, 교회 가기 싫대. 반기독교는 아니야. 민이 교회 가겠다고 하면 안 말리니까. 단, 민이 교회 간다고 하고 PC방으로 빠져나가지만.

   

반면, 인드라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인인데, 어머니가 절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지만, 나는 절이 굉장히 싫었거든. 인드라가 불씨잡변 정도전 존경하는 면이 있다. 하여간, 절만 싫었던 게 아니라 철들고 초등 5학 년 때 이후인 어릴 때부터 중넘의 색희들이 정말 싫었거든. 내면에는 부러움이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무위도식하면서 사기꾼처럼 살아가는 게 좀 부러웠던 것 같다. 그래도 예전에는 몇몇 땡중 넘들만 문제라고 여겼는데, 나이를 점차 먹으면서 이넘의 한국 불교 자체가 썩었다는 걸 체감한다는 게다. 내가 불쌍한 어머니 생각해서 현실에서는 그냥 참고 있는데, 어지간하면 나한테 엽서 따위 좀 보내지 마라. 씨발 잡것 스님아. 신도들 돈 뜯을 일이 있으면 그간 금수강산 세금 한 푼 안 내고 자리세 받은 것 다 내놔, 개씨발 땡중 색희들아. 이런다고 또 색안경 쓰지 마라. 교회도 세금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인드라가 무신론자는 아냐. 이십여년간 무신론자였는데 신을 믿기 시작했다. 전도는 할 생각없다. 나도 모르는 신을 누구한테 전도하겠냐, 니미럴. 다만, 딱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신이 말이야, 국유본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 그건 확실해. 인드라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신인 것 같다.

   

가끔 인드라한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신을 믿는다는 발언이 혹 전략적인 것 아니냐고. 인드라가 자신있게 말하는데, 사실 처음에는 전략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성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인드라에게 일어나니 신이 있나?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 다른 이들의 인드라에 대한 비판을 즐기면서 그래, 맞아, 인드라가 좀 나댄 것이지, 하는 반성을 하도록 인드라가 작전을 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문제를 비판한 것이 나타샤거든? 사람이 막 죽어가는 것 같더니 뭐야, 그거 국유본론을 하면서부터 막 살아나네, 하긴 그러니까 신을 믿고 싶기도 하겠지. 허나, 난 아냐. 세상이 비관스러워. 해서, 나타샤의 비판을 늘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드라인데, 사실 그렇게 여기고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에 그걸 뛰어넘은 것이다. 나타샤가 국유본론더러 그거 돈이 되냐는 식으로 비난을 할 때마다 하긴 돈이 안 되지, 하던 인드라가 어느 순간 득도를 하고 만 것인 게다.

   

마자세. 그것이다. 마자세를 하니까 나타샤와도 부부 관계가 좋아진 거다. 부모님과도 좋아지고. 물론 민과는 아직 불화상태이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좋아졌다. 지인들과도 좋아졌다. 국유본론보다 마자세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국유본론 떠들기보다 쪽발돼중, 쪽발놈현, 쪽발일성정일정은 까대지 않고 마자세 하나로 밀고 법정처럼 사기질했으면 지금쯤 인드라는 벤처 재벌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열 받네?

   

"[도박 이어 성매수 의혹까지…불교계 진실게임] "명진 스님이 룸살롱 진상 밝혀야"

9면4단| 기사입력 2012-05-17 03:27

   

[서울신문]

   

조계종 승려 도박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성호 스님은 16일 "신밧드 룸살롱을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가봤다는 명진 스님이 당시의 진상을 육하원칙에 따라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호 스님은 서울신문과 전화통화를 하고 총무원 호법부장 정념 스님이 이날 아침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명진 스님 말씀이 자승 스님은 다른 곳에 있다가 중요한 얘기를 하자고 그래서 (신밧드 룸살롱에) 왔다고 한다. 장소가 적절치 않아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나가셨다고 한다."고 말한 데 대해 이같이 요구했다. 성호 스님은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명진 스님이 잘 알고 있는 만큼 신밧드 룸살롱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릴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포커판을 "놀이 문화"라고 표현한 총무원 호법부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스님들이 모이면 화엄경을 봐야지 왜 카드를 보느냐."고 반박했다.

   

성호 스님은 문제의 신밧드 룸살롱에 대해 "나도 가본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성호 스님에 따르면 신밧드는 '2차'(성매수의 은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풀코스 룸살롱'으로, 방이 40개 정도 있으며 여자 종업원이 150명가량 있었다. "다른 스님을 목격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성호 스님은 "그건 말할 수 없지만 자승·명진 스님의 2001년 술자리에는 J, W 스님도 동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의 신밧드 룸살롱은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영업을 해 오다가 두 차례 이름을 바꾸어 현재는 A 룸살롱으로 영업하고 있다. 업소는 지하 1층에 있는데 5층에 있는 모텔까지 바로 연결되는 구조다. 경찰 관계자는 "업소에 들어갈 때는 가발을 쓰고 평상복을 입는데 스님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다.

   

황성기·배경헌기자

   

marry04@seoul.co.kr"

   

   

조계종 띠발넘들아. 귀씻고 잘 들어. 인드라가 하는 말을 내면적으로 누구보다 붓다의 길을 가기에 비판하는 것이라는 언론플레이로 해석하지 말아. 인드라 그런 것 굉장히 싫어한다. 본질을 회피하는 듯한 말장난으로 넘기는 것, 인드라가 좌시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김용옥 넘도 문제군. 이 색희가 머리를 깎고 사기치는 걸 보니까 용옥이 두개골을 도끼로 찍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 김용옥이 '기철학산조'를 그나마 잘 써서 힘겹게 용서했지만, 이 색희 지금까지 생쥐랄을 떨어대는 꼴을 보기가 힘들더군. 조져버려야 하는데. 이 대목에서 꼭 하는 말들이 있더군. 닮아서 싫어한다나. 인드라가 이런 것에 아직 초연하지 못하니 큰 넘이 아닌가 보다. 저런 말도 다 천사의 언어로 들을 줄 알아야, 진짜 마자세인데. 

   

하여간, 땡중 색희들이 배만 불러서 중세 귀족처럼 사기치는 말만 현자의 말씀이라고 떠드는 것 인드라가 안 속는다. 인드라는, 네넘들 배때지를 죽창으로 찔러서 네넘들이 치부한 재산을 해부해야 직성이 풀리는 넘이라는 것만 알아라.

   

하여, 중생을 걱정하는 시간에 니네들 일이나 좀 걱정해라. 맨날 들리는 게 신도 강간하고, 돈 뺐고, 사기치고, 도박하고, 성매수하는 것이냐. 법정이란 색희도 도저히 못 믿을 색희고, 명진이란 병쉰색희는 뭐하는 넘인지 모르겠고. 그나마 성철 스님이나마 있어서 인드라가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소설 패러디로 좀 씹어보기나 했지, 다른 색희들은 뭐냐. 죄다 동해 바닷물에 쓸어버리고 싶구만. 국유본 CIA 지시 받아서 베트남이나 티벳에서 하는 것처럼 씨발넘들이 이명박 길들이기 따위나 하고^^! 생각하니까, 법륜, 이 개종자 색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믹서기에 갈아야 하나? 정말 죄많은 중생이로고.

   

인드라가 다른 건 모르겠다. 허나, 인드라가 가끔 골 때릴 때가 있는데, 몸이 으스스한 느낌이 일더라. 4대강 때문에 분신했다는 스님 한 명이 있지?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했다는 것이 인드라가 받은 계시다.국유본 CIA 작품인지 뭔지 모르겠다만,  매우 괴로워하면서 죽었어. 인드라가 그 당시에 느끼기에 그 죽음은 너희 썩은 도박 성매수 땡중 수뇌부 생각과 달리 선거를 위해 타살당했다는 것이다. 이것 물증 없다. 오직 인드라 예감일 뿐이다. 이런 예감 아무 때나 오지 않고, 언제 올 지도 모른다. 그냥 살면서 몇 번 정도 제 멋대로 온 것 뿐이다.

   

허나, 인드라를 신화화하지 말길. 한반도는 영성의 나라여서 가문마다 집안마다 한 명쯤은 샤먼이요, 무당이요, 구루요, 랍비요, 선생이니까. 인드라는 그저 한반도 영성계의 은하수처럼 깔린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남들보다 좀 영성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해서, 어지간한 영성을 뿜는 존재에게는 기가 죽지 않는 편이다.

   

   

"[8시뉴스 '날'] 사이언톨로지가 뭐길래…톰크루즈 세번째 이혼

| 기사입력 2012-07-01 22:22 | 최종수정 2012-07-01 22:27

   

   

[앵커]

   

할리우드 최고 배우인 톰 크루즈가 세 번째 이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혼 사유가 그가 신봉하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사이언톨로지교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루라 기자입니다.

   

[리포트]

   

톰 쿠르즈, 제니퍼 로페즈, 윌 스미스. 이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의 공통점은, 사이언톨로지스트.

   

[인터뷰] 톰 크루즈 / 2008년

   

"사이언톨로지스트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처음 접했을 때 '바로 이거다' 했어요."

   

사이언톨로지는 1954년 미국의 공상과학 소설가 로널드 허바드가 창시했습니다. 과학적으로 개발한 심리치료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치유한다고 믿습니다. 1993년 미 정부로부터 면세특권을 받는 종교로 인정받고, 신도수가 8백만명에 이른다고 선전합니다.

   

[인터뷰] 토미 데이비스 / 사이언톨로지교 대변인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지난 5년간 신도 수가 과거 50년동안보다 더 증가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도 약 30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이 내는 기부금 명목의 교리비가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유럽 등 일부 국가는 불법종교단체라며 활동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톰 크루즈 이혼도 바로 '사이언톨로지' 종교를 둘러싼, 부부간 갈등때문인것으로 보입니다. 부인 홈즈는 6살 난 딸 수리가 사이언톨로지에 심취되지 않도록 이혼까지 결심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홈즈는 단독양육권을 위해 공동부양권을 지지하지 않는 뉴욕주까지 가서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헐리우드에서도 종교 갈등 때문에 이혼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TV조선 이루라입니다.

   

[이루라 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01/2012070101440.html

   

   

언론 재벌 머독, 사이언톨로지교 비난…톰 크루즈 이혼과 관련

| 기사입력 2012-07-02 08:34 | 최종수정 2012-07-02 08:45

【로스앤젤레스=로이터/뉴시스】양문평 기자 =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최근 이혼 소송을 당한 배우 톰 크루즈가 사이언톨로지교에서 2위나 3위의 서열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이언톨로지가 으스스한 단체라고 비난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로 유명한 정상급 스타 크루즈는 오래 전부터 사이언톨로지교에서 유력한 멤버로 꼽혀왔으며 바로 그것이 그와 그의 세 번째 부인 케이티 홈스와의 이혼 소송 사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머독은 그의 공식 트위터에 "사이언톨로지는 매우 괴상한 종교단체며 그러나 엄청난 돈으로 톰 크루즈는 그 서열이 2위나 3위로 돼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머독처럼 세계적인 언론사 경영주가 톰 크루즈 같은 유명한 배우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머독도 자신의 글이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1시간 뒤 "사이언톨로지 측이 수 백 건의 트위터로 공격해오니 그것이 더 늘어나며 더 가관이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라"고 썼다.

   

yang_pyung@newsis.com"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20702&rankingSectionId=104&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1&oid=003&aid=0004584598

   

영성 천국에서 매일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이런 기사 보고 딱 감을 잡지 않느냐?

   

우크라이나 같은 데서는 김태희 같은 여자가 밭을 간다는데

한국 같은 데서는 닭 튀기는 사람도 샤먼이라는 게다.

   

따지자면, 전 세계에서 영성이 차고 넘치는 지역으로 이스라엘만이 유일한 적수라는 것이 한반도인 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워낙 똘끼가 많은 넘들이 많이 산다.

해서, 오해가 많은 것이다.

한국이 지나치게 경직되었다느니 뭐니 하는 게다.

허나, 이런 애들일수록 해외 경험이 의외로 없는 병쉰들이다.

   

한국애들이 얼마나 개성이 넘치는 줄 아냐?

한국애들이 해외에 배낭여행 가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뭔 지 아냐?

한국인만한 애들이 없어.

다들 평범해.

외국인만 있는 데서 보면 한국인은 죄다 천재야.

단지, 올림픽 금메달 기능공 손재주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한국애들은 말이지,

그 하나하나가 다 대장감이요, 선생감이야.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국애들은 세계 어디를 내놔도 반드시 대장 아니면 직성이 안 풀리는 넘들이다.

   

이게 유태인 넘들하고 비슷한 성격인데,

유태인들도 둘만 모이면 서로 신경 많이 쓰거든?

그거 알아?

유태인이 단결력이 높다고?

다 헛소리다.

유태인이 가게하거나 기업하면 자기 밑에 직원으로 유태인이 들어오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 색희가 자기 가게나 기업 말아먹을 게 틀림없으니까.

분명 노조를 만들든, 아니면 외부에 정보 팔아서 기업 M&A하고도 남을 넘이니까.

   

바로 이 기질과 유사한 족속이 있으니 한반도인이다.

   

한국인들이 주변에 한국인이 없으면 어떤 줄 아냐?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제대로 실천한다.

이럴 때 한국인 믿어야 한다.

한국인 믿고 살면 그 집단 복 받는다.

천국이니까.

   

허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 지역에 한국인이 한 명 더 가면 그 다음부터 그 지역은 지옥이 된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이유는 매우 유치하다.

   

한국인이 다른 족속들과 함께 있으면 신이 되고, 천재가 되고, 리더가 된다.

허나, 다른 한국인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 있는가.

   

- 허접한 색희가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있네?

   참 인생 편하게 사는 넘이다.

   

천사 같은 한국인이 악마가 되어

온종일 다른 한국인 생각만 한다.

먼저 온 한국인이나 나중에 온 한국인이나 서로 죽기살기로 살다가 둘 다 뒈진다.

   

한국인이 획일적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겉만 보고 아는 거다.

겉보기에 서양인이 한국인 보기에 다 똑같아 보이지?

   

인드라가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건

세상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족속은

유태인과 한국인 뿐이다.

   

헌데, 오해하고 있다.

유태인이 단결을 잘 한다고.

한국인이 집단적이라고.

전혀 아니다.

   

그건 진짜 오해다.

유태인이,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정말 단결할 때가 있다.

아주 드물다.

그런 때가 오면 전세계 민족이 몸을 으스스 떨기 마련이다.

   

한국인은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 응원 때 그랬다.

누구도 붉은악마 응원을 한 적이 없다고 그때 많이 비난받았다.

헌데, 어쩌랴.

그 이전까지 그런 야외응원하면 스킨헤드족 광란으로 살인, 방화, 약탈로 이어졌었다.

허나, 한국인은 그런 것 거의 없었지.

예서, 세계가 놀란 것이다.

   

유태인도 비슷하지.

거의 대부분은 유태인들 스스로는 유태인들 서로도 부정해.

넌 너고, 난 나일 뿐이다.

   

이 표현을 환상(판타지) 문학으로 말한다면,

드래곤의 삶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성인인 드래곤은 고독한 삶을 살면서 가끔 유희를 하지.

이런 드래곤이 설사 인간에게 레이드 당해서 죽는다 하더라도

다른 드래곤이 인간에게 복수한다 이렇게 생각을 안 하지.

   

독립된 개체일 따름이니까.

쿨한 것이지.

   

잘 생각해 봐.

   

어떤 넘들은 한국 유학생 이야기하면서 창의성 부족을 내세울 수 있다.

헌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근대 서양인들이 조선에 와서 한국 통치가 참 쉽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와 달리 형편없는 군사력으로 한국인을 통치했거든.

생각해봐.

오늘날까지도 뉴욕, 파리, 런던, 베를린, 로마 등은 밤길을 조심해야 해.

치안이 확립되지 않았어.

허나, 백 년 전 조선 말이야.

치안이 잘 되었어.

놀랍지 않아?

처녀들도 밤길을 맘대로 활보하며 다녔다고 해.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아 지하철에서 술취해서 침흘리며 자는 여자애들 많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강간당하거든.

궁금하면 배낭여행 해보라고.

헌데, 백년전 포졸들은 그저 육모방망이 하나로 다녔어.

그걸로도 치안 유지가 된 것이야.

   

하면, 한국인이 병쉰일까?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류더미에 파묻어야했다.

왕인 게 고역이었어.

내가 왕이니까 멋대로 하겠다고 하잖아?

그럼 왕이 멋대로 했다고 사관이 글을 썼어.

죽기를 각오하고 말이야.

그것이 조선왕조실록 오백년사야.

전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역사기록 없다.

   

왕이 뭐 좀 한다고 하면 일단 상소문부터 올리는 게 조선이었다.

아무리 잘 만든 제도도 정말 엄청나게 태클 걸었다.

대표적인 게 세종 대 귀족 싸움 아니냐.

여기서 귀족이 악인이 되는데, 사실은 그게 조선 전통이었다.

   

또 한국 백성들 졸라 착취당했다고 생각해?

웃기지 마.

그게 국유본 서양사 애들이 가르치는 것들이지.

왜? 서양이 백성들 착취를 졸라 했거든?

병쉰들아, 잘 들어라.

조선은 노예마저도 대접받고 살았어.

   

단적으로 하나만 말하겠다.

   

초야권 알아?

초야권이 뭐냐?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민들 처녀들을 결혼하기 전에 시식하는 게 초야권이야.

영주가 결혼식 전에 남편 먼저 처녀들을 따먹어서 영지의 장남을 모두 영주 자식으로 만들어

영지의 단결과 발전을 꾀하는 게 목적이었다는군.

   

영화 '브레이브즈 하트'를 참고해라.

프리메이슨과도 연관이 있는 영화이니까.

   

봐라. 이런 제도가 조선에 있었냐?

   

이것 하나만 예외다 라고 말할 것인데, 잘 생각해보렴.

한국의 평민이 과거제도로 고관대작으로 등용된 예가 유럽보다는 많잖아?

   

게다가 결정적인 건,

노예라고 해서 서양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이 노예라고 생각하냐?

조선이?

   

쪽발이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뻥튀기한 한국 재야역사론도 문제이지만,

서양사 기준의 한국 역사관도 지나치게 자학적인 것도 반성할 대목이야.

하긴 이 때문에 왜곡되었긴 하더라도 쪽발이 사관을 응용한 주사파 역사관이 환영을 받기는 하지. 

   

조선은 말이야.

봉건제 폐지 뭐 이러면서 서양애들이 국유본 지시 받아서 졸라 작전했거든?

결과가 뭔지 아냐?

유생들만 봉건제 폐지, 사회주의 운운한 것이야.

안동 선비들 말이야.

상당수가 사회주의자가 되었어.

박정희 형이 동학혁명 가문 출신으로 사회주의자가 된 것도 다 이 때문이야.

이게 유학과 사회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는 거야.

좆도 모르고 유학 비난하는 애들은 공부 좀 해라.

   

한국인도 유태인과 실은 비슷해.

해서, 한국인이 모래알과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야.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뒈집니다.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우연적으로 같이 하는데

이때는 한국인이나 유태인이나 역사의 기원이 되는 것이지.

   

붉은악마 이후에 각국 응원은 물론 클럽 응원도 붉은악마처럼 하는 것 알기는 아냐.

물론 여기서 겸손해야 한다.

왜, 사실 2002년 붉은악마 기획은 국유본이 했으니까.

   

인드라가 2002년 이전에 사실상 붉은악마 수뇌부 중 하나여서 안다.

붉은악마 회장들 인드라에게 자문 받았다.

   

본론 격인 사이언톨로지로 가자.

   

   

   

"Aleister Crowley(1875-1947)

   

요절한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Randy Rhoads)의 아름다운 펜타토닉(도레미솔라의 다섯 음계로 이루어진 스케일) 솔로로 많은 Rock팬들의 가슴을 쥐어짰던 이 고전은 '악마주의를 찬양한 노래'라는 꼬리표를 달고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당시 [월간팝송]이라는 음악전문지가 있었다). 이 크로울리라는 양반이 사탄을 신봉하는 종교의 교주였으며, 오지 오스본 역시 악마를 숭배하기 때문에 크로울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아마 이 곡에 대한 소개는 아직까지도 큰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오늘의 '노래따라 이름따라' 주인공은 바로 Mr.Crowley 즉, 알리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다.

   

본명은 알렉산더 크로울리(Alexander Crowley). 1875년 영국 워윅셔(Warwickshire)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엄격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어머니의 교육방침에 따라 학교 역시 기독교 기숙 학교로 보내졌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운동 경기를 할때 점수를 기록하지 못하게 했는데, 점수를 기록하면 소위 '탐욕의 죄'를 범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또한 학생이 죄악을 범하는 것을 많이 잡아내는 교사는 승진 등의 이득을 보게 되어 있었는데 몇몇 교사들이 이를 악용하여 일부러 학생이 죄를 범하게 유인하고는 이를 트집잡아 처벌하는 함정수사를 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끼리 친구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도, 사탄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는 거룩한 행위였으므로 장려되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 재학중이던 12세의 크로울리는 어느날 동급생에 의해 "몰래 맥주를 마셨다"는 허위고발을 당하게 된다. 이후 크로울리에게는 빵과 물 이외에는 어떠한 음식도 금지되었으며 매일매일 심문을 당하면서 죄의 자백을 강요당했다. 크로울리는 무려 두 학기에 걸쳐 이같은 벌을 계속해서 받았는데, 스트레스와 영양부족으로 인해 신장의 질병을 얻게 되어 결국은 자퇴하고 집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지나치게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했던 어머니, 그리고 왜곡된 교육을 시행하던 기숙학교에서의 기억때문에 크로울리는 소년시절부터 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가지게 된다. 이 무렵 그는 타락 천사 루시퍼와 신에의 도전을 다룬, 밀턴의 [실락원]을 우연히 구해서 읽게 되는데 루시퍼의 행각에 큰 감명을 받은 크로울리는 '사탄'과 '마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스무살이 된 크로울리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이무렵 그는 이름도 알렉산더에서 알리스터(그리스어로 '복수의 신'이라고 한다)로 바꾼다. 습작과 독서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크로울리는 어느날 중세의 마법서적들을 고서점에서 구해 읽게 된다.

   

소년시절부터 운명적으로 끌렸던 은비학에 눈을 뜨게 된 크로울리는 좀 더 체계적으로 마법을 배우기 위해 '황금새벽(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이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 단체의 상층부에는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브람 스토커(Bram Stoker)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같은 유명 작가들도 요직을 맡고 있었으며, 프리 메이슨(Free Mason)의 지회와 같은 성격의 조직이었다고 한다. 황금새벽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게 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크로울리는 이 비밀 조직의 상층부에서 일어났던 멤버들간 암투와 음모에 넌더리를 내고 세계일주를 떠난다. 남미와 아시아 등지를 여행하던 크로울리는 마법에의 관심을 접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기로 결심하여 1903년경 로즈 켈리(Rose Kelly)라는 평범한 여인과 결혼한다.

   

그러다가... 신부 로즈와 신혼여행을 떠났던 이집트에서 크로울리는 뜻하지 않게 이집트의 전쟁신 '호루스'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들의 에퀴녹스(Equinox of the Gods)가 도래했다!"는 천상의 선언을 들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대략 2000년을 단위로 어떤 신이 도맡아 세상을 관장하는데, 그 순번이 바뀌는 걸 에퀴녹스라고 한다. 이집트 신화에 의거, 기원전 2000년무렵부터 예수탄생까지는 '자애의 여신' 이시스가, 예수탄생 이후부터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그리고 이제 서기 1900년을 맞아 이 세계를 '전쟁의 신' 호루스가 관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마누라고, 호루스는 그들의 자식이다). 이시스가 지배하던 시대는 '모계사회'였다. 어머니 대자연의 권능이 모든 것을 지배했고, 인류는 본능에 따라 성생활을 영위했다. 그리고 오시리스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죽음, 즉 시체를 숭배하게 되었다. 여기서 시체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부계사회가 확립되었고 자손 번식 이외의 섹스는 죄악시되었다. 이제 '호루스'의 시대, 크로울리는 이 시대를 '왕좌에 앉은 어린아이의 시대'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신은 1904년부터 앞으로 2000년의 주기를 지배하며 이미 그의 지배력은 사방에서 뿌리내리고 있다. 어느새 원죄의 개념은 사라지고 천진무구함과 무책임함이 사회 곳곳에 퍼지고 있으며 생식 본능은 이상하게 변화되어 양성 내지 중성화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룩해낸 과학 문명의 진보를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가올 재앙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재앙들을 방지할 노력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해당 사회의 도덕적 진화가 극도로 초보적일 때만 가능한 독재자들의 등장은 어떠한가. 유아적인 사교들(공산주의, 전체주의 등)의 등장은 어떠한가. 기성 종교들의 무너지는 권위는 어떠한가. 연예사업의 발달을 보라. 축구 경기와 퀴즈 쇼에 열광하는 이들을 보라.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보채는 아기를 달래기 위한 딸랑이와 같은 것이다.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의 참혹함은 매일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지만 우리는 별로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린아이인 것이다. 이 호루스의 시대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랄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하여 크로울리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던 것처럼, 호루스 신의 율법이 적힌 새로운 성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리베르 레기스(Liber Legis, 율법의 서 - 속칭 지옥의 성서)]라고 한다. 이 율법의 대전제는 '그대 뜻하는 것을 행하라(Do what thou wilt)'이다. 여기서 '뜻', '의지'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텔레마(Thelema)'를 가지고 크로울리는 이태리의 세팔루 지방에 '텔레마의 사원(Abbey of Thelema)'을 세워 호루스 신의 율법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원의 규율을 어긴 자에게 내렸다는 '면도날 자해 수련'이나 '고양이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행위'등 다소 엽기적인 행각들이 세상에 알려져, 크로울리는 그 악명을 서서히 떨치게 되었다. 또한 크로울리는 [리베르 레기스]를 총 4번 출판하였는데, 이때마다 세계적으로 큰 혼란이 닥쳤다. 크로울리에 따르면 [리베르 레기스]는 출판하는 행위만으로도 마법적인 효력을 지녀 텔레마의 율법이 가진 영적인 힘으로 기존의 질서를 와해시킨다고 했다. 말씀을 전할 때가 되었을때, 이 행성 전체가 반드시 피로 씻겨야 한다는 것.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나, 그 구체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12년, [리베르 레기스] 초판 발행 9개월 후 제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라 할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9개월은 수태된 태아가 자궁에서 나오는 시간이라고 한다. 1913년, [리베르 레기스]가 두번째로 출판되고 9개월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30년, [리베르 레기스]가 세번째로 출판되고 또 9개월 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중일전쟁 및 진주만 기습을 준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938년 12월 22일, [리베르 레기스]가 마지막으로 출판되고 9개월이 지나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주장이 있다. 크로울리는 1925년 '동방성당기사단'이라는 비밀 마법조직의 총수로 임명되는데,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역시 이 동방성단기사단의 회원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울리에 따르면 히틀러의 사상 역시 [리베르 레기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우주의 원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마침내 국제 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용당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또한 크로울리는 동방성당기사단 독일 지회의 다른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그 사실을 히틀러에게 경고하였으나 히틀러가 당최 듣지를 않았다고도 한다).

   

이후 크로울리는 '텔레마의 사원'에서 호루스의 율법과 마법을 가르치다가, 1934년 자신을 '흑마법사'로 묘사한 미술가 '니나 햄닛(Nina Hamnett)'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며 송사에 휘말린다. 이 건에는 텔레마 사원에서 자신의 남편이 크로울리에게 마법을 배우다가 살해당했다는 피고측 증인의 주장까지 개입되면서 결국 크로울리는 패소하고 전재산을 잃었다. 남은 여생동안 크로울리는 동방성당기사단의 연금으로 연명하다가 1947년 생을 마감하였다. 크로울리의 저작과 사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60년대 히피즘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Rock음악에의 영향이 지대하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204&docId=50067773&qb=QWxlaXN0ZXIgQ3Jvd2xleQ==&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cNG35Y7udssbee7Hsssc--189837&sid=T-HNDXK38U8AAAFQEOM

   

크롤리 이야기를 들으면 국유본론을 오래 접한 이들은 일단 '물병자리 프로젝트'를 떠올릴 것이다.

   

출처] 존콜먼의 300인위원회 중 발췌(버나드레빈과 물병자리프로젝트)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존콜먼의 300인위원회 중 발췌(버나드레빈과 물병자리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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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蘇塗)

2009.02.0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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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레빈 (Bernard Levin) 은 아마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닐것이다.  퇴폐적인 팝 스타들이나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발생한 가십거리와는 달리, 이러한 학자는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에서 로마 클럽의 통제 아래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 가운데 레빈은 이란, 필리핀, 남아프리카, 니카라과, 한국을 동요시키는 연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란 국왕의 몰락은 버나드 레빈과 리처드 포크 ( Richard Falk) 가 작성하고 로버트 앤더스 (Robert Anderson) 의 아스펜 연구소가 감독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레빈은 또한 <시대의 전망과 도덕 Time Perspective and Moral>이라는 논문의 저자이기도 하다.  국가와 그 지도자의 정신력을 떨어뜨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이 책은 로마클럽에서 출판했다.  여기에 발췌한 일부가 있다.

   

"공포 전략에 의해 사기를 떨어뜨리는 주요 기술은 바로 이 전술에 있다.  대상이 된 사람의 시야를 흐르게 하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 덧붙여 모순된 뉴스를 퍼뜨린다. 대상이 된 인간은 엄한 징계 처분과 제대로 인간 대우를 한다는 약속 사이에서 동요하여 흔히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그때 그 사람은 특정한 계획이 목표로 가고 있는지 빗나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명확한  목표로 가지고 그에 따른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가혹한 내적 갈등에 빠져 온몸이 마비된다."(우리의 체념이 이런것인가요?)

   

   

로마클럽의 청사진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들, 특히 각국의 정부 지도자들에게 유효하다.  미국 국민인 우리들은 "아, 여기는 미국인데 그럴리가 없어"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마 다른 국가들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에서 말이다.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을 강제로 물러나게 한 수법이야말로 전형적인 레빈의 방법이다.  그가 사기가 떨어져서 혼란에 빠지는 일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탄핵되었을 리가 없다.

   

레빈과 로마 클럽의 공동계획은 우리 모두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계획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양떼와 같은 존재가 된다.  국가를 '구원' 하겠다는 강력한 지도자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반드시 의심의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영국 정보부에 의해 특히 파리 체재 중 몇 년 동안 훈련받았던 호메이니의 예를 생각해 보자.  그는 이란의 구세주처럼 별안간 등장했다.  보리스 옐친 (Boris Yeltsin) 도 남아프리카의 모반 수뇌 '케린스키' 데 클레르크 ( 'Kerensky' F. W. De Klerk) 전 대통령도 똑 같이 MI-6  훈련소 출신이다.

   

   

<기독교를 장악한 물병자리 프로젝트>

   

로마 클럽은 미국을 '약화시키기' 위한 300인 위원회의 명령을 실행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47년 동안 미국 국민을 상대로 전재을 벌였는데 그들이 실로 그 임무를 마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위를 돌아 보고 우리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살펴보라.

   

마약, 포르노, 로큰롤 음악, 프리섹스, 가정 파괴, 레즈비언, 동성애가 가득하고 드디어 임산부가 죄없는 아기들을 몇백만씩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른 현실을 보라.  대규모 낙태만큼 잔인한 범죄가 지금까지 있었던가?

   

미국은 정신적. 도덕적으로 무너졌다.  공업 기반은 붕괴되어 4천만명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대도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의 끔찍한 소굴이 되었고, 살인 범죄율은 외국보다 거의 세 배에 이르며 4백만 노숙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고.  정부의 붕괴는 임계점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이 내부에서 썩어들어 단일세계정부라고 하는 신암흑시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로마 클럽은 기독교 교회들을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질적인 이념을 위해 싸울 카르스마파와 근본주의자, 복음주의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에 혼란스러워했다.  어떻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립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이 교파에 속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기독교와 다른 근원에서 기인했거나 심지어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념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 조직들이 미국에 일곱 군데가 넘는다.

   

그 이름을 밝혀서 마녀사냥의 목표물이 되는 것은 내라 바라는 바가 아니다.  또한 밝힌다고 해서 내가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유명한 기독교 교회에 융자를 해준 아먼드 해머 ( Armand Hammer)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프로젝드에 몇백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는 평생 반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종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은 중동이라는 숨은 목적 때문이었다.

   

해머는 정원을 호화롭게 꾸민 거대한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큰 영향력을 이용하여 몇백만 명의 청취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시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그 교회는 기독교 메시지를 보내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원래 MI-6 의 지배 아래에 있는 중동의 조직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정보원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기독교 우익을 장악한 것은 '물병자리 그룹 계획 작전 (PAGO)' 이라는 암호를 지닌 미국의 최고 정보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미국이 드디어 무정부상태가 되면 기독교 우익이 일제단속을 이유로 결집할 것이므로 이를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위한다는 저명한 사람들이 동시에 반대파를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실상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른바 '기독교' 관련 책들이 수없이 배포되고 있는데 그들은 교묘하게 의식조작을 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1930년대에 조지 버나드쇼와 시드니 웨브의 지도 아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그룹에서 고안한 것이었다.

   

둘 다 300인 위원회의 프로젝트인 걸프 전쟁과 NAFTA 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기독교를 더욱 지지함으로써 신세계질서 - 단일세계정부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걸프 전쟁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편지들을 많이 받았다.

   

"당신은 어떻게 기독교 전쟁인 걸프 전쟁에 반대할 수가 있습니까?  개전하기 직전에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목사가 조지 부시 대통령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편지들을 읽으면 타비스톡 인간관계연수소가 임무를 얼마나 잘 해냈는지 알 수가 있다.  잘 했든 못 했든 이것는 '내적인 세뇌' 이다.  정부는 기독교 우익에게 무시무시한 힘을 쌓아올린 다음 단일세계정부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기독교 우익이 얼마나 심하게 악용되었는지 잠깐 생각해볼 때이다.

   

걸프 전쟁을 지지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이제 눈을 뜨고 그들이 내게 보낸 편지에 나타낸 의견과 신념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미국 곳곳에 있는 300인 위원회의 싱크탱크가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미국의 다른 걸프 전쟁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300인 위원회의 목표물이 되어 철저히 세뇌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고 있다.

   

우리 미국 국민은 전세계로부터 부려움을 샀던 미국식 생활양식의 종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한때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해운업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로 만든 주요한 역할을 했다.  해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므로 경제 번영에 지속적으로 한몫을 했다.  하지만 '관세와 무역법' 이 통과되고 특히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 Eisenhower) 정권시대에 조선업은 로마클럽의 압력을 받아 의도적으로 붕괴되었다.

   

2세기에 걸쳤던 바다의 지배권은 아이젠하워 정부와 더글러스 딜런 ( Douglas Dillon) 에 의해 외국으로 넘어갔다.  딜런은 윌 스트리트의 은행가이며 딜런 리드 회사의 사람이었다.  이 회사의 멤머들은 민주, 공화양당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딜런은 양당과 잘 융화되어 유권자들이 백악관에 누구를 보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중했다.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외교문제평의회인 것이다.

   

300인 위원회의 하수인들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딜런은 자랑스러운 무역국으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고 지금은 NAFTA가 그 종착점을 향해 끌어가고 있다.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클린턴 ( Bill Clinton) 은 남아 있는 공업력을 마저 파묻는 데 바쁘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뉴트 깅리치 ( Newt Gingrich) 같은 '공화주의자' 들이다.  깅리치는 의회에서 132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 의원들의 지도자이며 단일세계정부 계획을 지지하고 있다.

   

   

 ps)

300인위원회는 2001년 8월 28일 발행으로 되어있는데 몇년이 지난 지금 시대정신 동영상에서

물병자리 프로젝트에 1시간을 할애한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인가요?

물병자리 프로젝트와 시대정신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응이님 글 중에서"

   

   

크롤리는 이집트 여행 중에 계시를 받는다. 헌데, 계시를 받은 뒤 행각이 흥미롭다. 청소년기에 받았던 가혹한 교리 실천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일수록 더 악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것과 유사한 듯싶다. 이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데, 인드라는 청출어람으로 설명하고프다. 그만큼 크롤리에게는 강력한 기독교가 마음 속에 자리잡았기에 그 지독한 기독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더 엽기적인 검증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크롤리는 겉만 기독교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니체인 게다. 겉의 사상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못하니 이성은 더더욱 짐승적 본성과 결합한 셈이다. 그것이 공산주의요, 파시즘인 게다. 하고,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강제한 국유본인 게다.

   

크롤리의 행태는 사이언톨로지에 남아 신도가 되기 위한 심리테스트를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여기에 하나 더 말한다면, 동방기사단이다.

   

"크로울리는 1925년 '동방성당기사단'이라는 비밀 마법조직의 총수로 임명되는데,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역시 이 동방성단기사단의 회원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울리에 따르면 히틀러의 사상 역시 [리베르 레기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우주의 원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마침내 국제 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용당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또한 크로울리는 동방성당기사단 독일 지회의 다른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그 사실을 히틀러에게 경고하였으나 히틀러가 당최 듣지를 않았다고도 한다)."

   

이 시기 크롤리가 프리메이슨적 조직을 만들었다고 화제인데, 이 시대 크롤리만 신비주의 교주가 된 것이 아니다. 이 시기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조직들의 융성기였다.

   

"1903.8 포드의 첫 차 'A형'출시,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가다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1908년,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광고였다. 그리고 포드는 앞으로 포드 사에서는 오직 T형 하나만을 생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앞으로 포드라는 상표를 붙인 자동차는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단 색깔만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검은색이기만 한다면!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군!"

포드의 이런 대담한 결정을 듣고 가장 소리 높여 환호한 사람들은 미국의 일반 대중이 아니라, 경쟁업체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망하려고 작정했군!" 그들이 보기에 포드는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우선 자동차란 사치품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 부유층은 단조로움을 제일 싫어하며,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옵션이 전혀 없이 색깔부터 성능까지 오직 한 모델로 승부한다고? 그리고 싼 가격에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내놓는다는 목표는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같은 시간, 한때 포드의 동업자로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창립했던 알렉스 맬컴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옛 친구이자 동료는 끝장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이미 3년 전에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고집하는 포드와 충돌한 끝에 자신의 주식을 팔아 치우고 포드 사를 떠났으니 말이다.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 'T형' 앞에 선 헨리 포드

   

   

맬컴슨은 1903년을, 포드와 의기투합해서 처음 회사를 세우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 때는 모든 게 엉성했지. 하지만 두려울 게 없었는데…." '빨리 달리는 차'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오직 속력에만 중점을 두고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주대회에 내보내 당당히 1등! 그 여세를 몰아 마침내 회사를 창립! 목공소 건물에 세를 들고, 제작 기계도 살 수 없어서 하청을 주는 형편이었지만 의욕만은 어떤 회사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 해 7월, 그 덥던 여름날, 마침내 포드의 첫 차인 'A형'을 내놓았지. 850달러짜리 소형차였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첫 해에 2천 대 가까이 팔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헨리 그 녀석이 고집을 피워서…. "기술자로서는 최고인데, 하지만 경영자로서는 틀렸어…." 포드 자동차의 '초대 회장'이었던 맬컴슨은 옛 동료의 몰락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그 안타까움은 당혹감과 괴로움으로 변한다. 포드의 T형이 사상 최초로 연간 1만 대 판매를 돌파했던 것이다. 그 기세는 날로 더했다. 1911년에는 3만 대, 1913년에는 10만 대를 넘어섰으며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T형이 생산되었다. 얼마 후에는 지구상의 자동차 100대 중 68대가 포드의 T형으로 채워졌다.

   

   

'마이 카'시대를 열다

"망할 작정을 했던" 포드는 어떻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자동차는 어차피 소수를 위한 사치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반 대중에서 고객을 찾은 그의 선택이 바야흐로 대중사회로 접어들고 있던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포드는 입버릇처럼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동차라면 복잡해서는 안 되며, 기술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운전과 정비를 척척 할 수 있어야 하고(당시의 자동차는 아주 단순한 정비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했다), 유지비도 적게 들고, 비포장도로든 어디든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싼 값으로 차를 내놓기란 쉽지 않았다. 비싼 차라면 95퍼센트의 대중이 지갑을 열 리가 없다.

   

포드는 이 문제를 '생산 공정 단순화'와 '합리화'로 해결했다. 오직 T형만을 생산하기로 함으로써 생산 공정은 표준화되었다. 여기에 테일러가 수립했던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 "노동자가 단 한 순간도 업무에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게 하고", "작업장의 단 한 뼘도 불필요한 공간이 없도록" 모든 것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조립 라인의 노동자들(1913년)

   

   

1911년부터는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했다. 그때까지는 백화점 진열장 등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컨베이어 벨트를 처음으로 공장에 설치한 포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벨트의 부품에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라인 생산 시스템을 창출해냈다. 이로써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 1908년에는 노동자 한 사람이 연간 자동차 3대를 생산하는 꼴이었으나 1914년에는 19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자동차가 만들어졌는데, 1914년에는 24초당 1대가 되었다. 그만큼 가격도 싸져서, 1908년에 900달러이던 T형이 1914년에는 400달러가 되었다. 생산 비용이 줄어든 만큼 종업원의 임금도 후해졌다. 포드 사의 노동자들은 일당 5달러를 받았는데, 동종업계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고임금이었다. 헨리 포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돈을 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포드의 T형 덕분에 미국은, 그리고 곧 이어 세계는 '마이 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노동자도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말이건, 마차건, 자동차건 '자가용 탈것'은 언제나 소수 귀족-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오랜 역사를 마감하는 '혁명'이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고속도로가 뚫리기 시작했고, 일주일 동안 고된 근무를 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멀리 여행을 떠나는 풍경이 점차 일상화되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의 생활은 자동차가 없으면 안 되며, 출근, 통학에서 쇼핑, 레저, 뭐든지 자동차 도로를 중심으로 생활의 틀이 짜여 있다. 이런 생활방식이야말로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포드의 생산 방식과 경영 철학은 T형 자동차처럼 세계로 퍼져나갔고,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라인 생산, 과학적 관리기법, 소수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소품종 대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테마로 자리잡았다. 학자들은 이것을 '포디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포디즘의 그림자도 컸다. 이제는 세계 최대의 부자 대열에 낀 포드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히 고임금을 주고 있는 자신의 회사에서도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파업을 벌이다가 경찰의 손에 질질 끌려가며 외치는 노동자들의 말에 포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맞는 말이야.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 기계에 비하면 훨씬 못한 존재라고. 그런데도 그들을 고용하고 비싼 임금을 주고 있어.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지?"

   

   

기계를 사랑한 고독한 소년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있는 디어번에서 태어났다. 디어번은 당시 개발이 전혀 안 된 시골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했다. 헨리의 아버지 윌리엄 포드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농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미국으로 온 처지였으니, 아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미국이야말로 그에게는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헨리는 도무지 농사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대신 공학이니 발명이니 하는 데 흥미가 있었고, 어쩌다가 기계류를 보면 눈을 반짝이곤 했다. 포드네 집 일대에는 자명종 시계가 하나도 없었다. 어린 헨리가 보기만 하면 순식간에 분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조금 들고부터는 분해했다가 다시 완벽하게 조립해 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헨리 포드에게는 인간보다 기계가 친근했고, 그가 존중할 수 있는 인간은 토머스 에디슨 같은 발명가나 패러데이 같은 과학자뿐이었다.

   

젊은 시절의 헨리 포드(왼쪽),토머스 에디슨과 함께. 왼쪽에 있는 이가 헨리(1929년)

   

   

   

청소년이 된 헨리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기계 따위는 제발 집어치고 농사일을 착실하게 배우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결국 가출을 해서 디트로이트로 간다. 거기서 작은 공장에 취직했는데, 얼마 안 되어 쫓겨났다.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공장의 업무 과정을 단순하게 고침으로써 작업 능률을 향상시키고 필요 인력을 줄일 수 있는 기획안을 대뜸 내놓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노동자들이 노동력 수요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싫어하는 것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노동자도 더 많은 임금을 받을 테니 모두가 좋아지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그의 불신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헨리는 에디슨 일루미네이팅 사에서 일하며 점차 능력을 인정받고, 수석 기사가 되었다. 34세 때는 그가 고안해낸 엔진을 본 토머스 에디슨의 격려도 받았다. 자신이 평생 존경해온 인물의 인정을 받은 그는 뛸 뜻이 기뻤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마침내 자신만의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되돌아 본 회한의 세월

1922년, 그는 이제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유럽의 조그마한 정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했다. 독일의 잔챙이 정당에서 그가 이익을 볼 전망은 없었고,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그가 절실히 원하는 이익도 없었다. 그런데도 막대한 기부를 한 것은 그 정당이 그의 평생 신념과 일치하는 노선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반(反) 노동조합, 반 사회주의, 그리고 반 유대주의. 정당의 이름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바로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 16년 뒤, 포드는 당의 초창기에 아낌없이 베푼 재정적 기여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제는 집권당이 된 나치당에게서 대십자 훈장을 받는다.

   

대공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문명이 위기에 빠졌던 이 시기에 그 찬란한 꽃을 상징했던 포드 역시 위기로 빠져들었다. 포드의 완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포드 사에도 노동조합을 수립해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갈수록 과격해졌고, 집단 파업이 잇달았다. 마침내 포드는 1941년이 되어서야 "이대로라면 회사는 망하고, 당신은 맞아 죽을 것이다. 고집을 계속 피운다면 당신과 갈라서겠다"는 아내 클라라의 최후통첩에 못 이겨 노조 설립을 승인했다.

   

세 살부터 77살까지 헨리 포드의 초상

   

   

아들인 에셀과의 불화도 골칫거리였다. 에셀 포드는 그의 유일한 자식이었는데, 1930년대에 포드 사 대표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다. 포드는 아버지처럼 뛰어난 기술자였고 경영자였지만 경영철학은 아버지와 많이 달랐다. 특히 T형 단일 품종의 생산을 고집하는 아버지에게 에셀은 경쟁사인 GM처럼 차의 성능보다 디자인을 강조하고, 다양한 모델을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결국 아버지가 져서 새로운 'A형'을 비롯한 여러 모델이 나오게 되지만, 에셀이 암에 걸려 1943년에 사망함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는 빼낼 수 없는 못이 박혔다. 당시 81세였고 뇌졸중 증세가 있던 헨리는 아들을 대신해서 다시 회장직에 취임했다. 나이로나 건강으로나 도저히 제대로 일을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를 잃은 마음의 고통을 평생 몸 바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기계'를 돌봄으로써 달래려 했던 걸까? 아무튼 회사 상황은 그가 경영을 놓지 않는 동안에 계속 나빠져만 갔다. 그가 나치 협력자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포드가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을 질타하는 지식인들도 끝이 없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포드 사를 국유화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고난과 실망과 회한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헨리 포드는 1945년에 다시 은퇴했고, 1947년 4월 7일에 뇌출혈 발작을 일으켜 영영 눈을 감았다.

   

포드는 자동차도 컨베이어 벨트도 과학적 관리기법도 처음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경영의 기적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냈다. 20세기 초, 소수에게만 허락되던 개인용 탈것을 만인의 것으로 대중화시킨 그의 혁명은 20세기 말, 컴퓨터가 대중화되는 혁명에만 비교 가능한 규모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혁명은 포디즘의 혁명을 폐기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를 접고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가 가졌던 여러 가지 신념,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에 대한 불신과 오로지 효율성만을 따지는 경영철학, 그리고 나치즘이나 반유대주의 성향 등도 오늘날에는 대부분 낡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는 포드가 만든 틀에 얹혀서 돌아간다. '기계' 부분은 포드의 것이고, '디자인'은 포드 이후의 것이랄까. 미국의 유머작가이며 배우였던 윌 로저스는 포드를 두고 1920년대에 이런 말을 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 알려면 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2009년, 아직 백 년은 되지 않았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859

 "

   

이는 백설공주 문고판처럼 헨리 포드에 대한 동화적인 이야기를 할 따름이다.

   

   

"스탈린·히틀러도 우러러본 '복지 자본주의'원조

새 시대를 연 거목들 <8> 헨리 포드

김환영<whanyung@joongang.co.kr> | 제262호 | 20120318 입력 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김환영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 출신이건 하버드대 졸업생이건 내겐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지 사람의 과거를 채용하는 게 아니다."

한때 소련의 공장에는 레닌의 초상화와 더불어 헨리 포드(1863~1947)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스탈린은 포드가 자동차 분야에서 이룩한 대량생산이 전 산업 분야로 확산됐고 대량생산이 연합군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포드는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소련의 아이콘이었다.

   

소련은 모범에 도달하지 못했다. '노동자 천국'이어야 할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동차는 공장의 당간부들이나 타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굴릴 만한 임금을 받았다.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소련·동구권은 붕괴했다.

   

   

1500만 대가 생산된 포드 모델 T 자동차.

헨리 포드는 자동차 시대를 개막한 주역이다. 헨리가 자동차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18년에 도입한 어셈블리라인(assembly line, 부품을 컨베이어에서 조립하는 공정)은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드는 시간을 12.5시간에서 93분으로 단축했다.

   

포춘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인물

어셈블리라인으로 가능해진 대량생산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Modern Times)'에서 보듯 현대를 상징한다. 포드가 개막한 자동차 시대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 중산층의 시대와 함께 등장했다.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2000년 포드를 '세기의 인물(Man of the Century)'로 선정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는 역사를 기원전·기원후가 아니라 포드 이전(Before Ford), 포드 이후(After Ford)로 나눈다.

   

   

포드는 비교적 넉넉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포드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다루는 손재주가 있었다. 온 마을의 망가진 시계를 수리했다. 고등학교는 문턱에도 가지 않고 15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평생 읽기·쓰기가 수월하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포드는 16세에 가출했다. 디트로이트의 기계제작소에서 도제로 일하며 내연기관 제조를 배웠다.

   

1891년에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회사에 기술자로 취직했다. 시간만 나면 자동차 개발에 골몰했다. 회사는 자동차 연구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그에게 관리총책임자 자리를 제의했다. 그럴 수 없었다. 포드는 1899년 회사를 그만두고 자동차 개발에 매진했다. 실패가 거듭됐다.

   

포드는 1903년 포드자동차를 창립했다. 당시 미국에는 이미 88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었지만 포드는 성공의 기회를 붙들었다. 1908년 모델 T 자동차를 출시했다. 1927년까지 1500만 대가 팔린 대히트였다. 1913년부터 10년간 포드자동차의 생산량은 매년 두 배로 뛰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미국 자동차의 반이 모델 T였다. 포드는 1910년에서 1927년까지 모델 T만 생산했는데 1913년부터는 색상을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페인트가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포드자동차는 1932년 세계 자동차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포드의 경영 철학은 '포드주의(Fordism)'라고 불린다. 최고 품질의 제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어 최대한 많이 팔고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최대한 많이 주는 게 포드주의다. 포드의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은 성공했다. 자동차는 더 이상 부자들의 사치품이 아니었다. 일반 서민들의 필수품이 됐다.

   

포드는 '복지 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를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4년 포드는 노동자 최저임금을 두 배나 인상했다. 일당 5달러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20달러다. 동시에 근무 시간은 9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했다. 1926년에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노동자들이 여가가 많고 쓸 돈이 많아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게 포드의 지론이었다.

   

대공황(1929~39) 때인 1932년에는 어쩔 수 없이 임금을 깎았다. 형편이 나아지자 1935년 고임금 정책으로 복귀했다. 포드는 저축이 아니라 지출이 경제를 살린다고 봤다. 그는 "성공한 사람치고 저축하는 사람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포드자동차를 구매해 차이를 절약하세요(Buy a Ford and Save the Difference)"라는 광고 카피를 가져오자 '절약'을 지우고 '지출(Spend)'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포드는 시대를 앞서간 고용 정책을 실천했다. 장애인, 상이군인의 채용을 위해 쿼터를 뒀다. 그는 또한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흑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흑인들은 남부를 떠나 북부로 이주해 포드자동차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아내의 <ec37>가출<ec38> 통첩에 노조 설립 승인

포드는 오점도 남겼다. 그는 노조 설립을 저지했다. 포드자동차에는 '포드 서비스부(Ford Service Department)'라는 부서가 있었는데 하는 일은 노조 설립 저지였다. 서비스부의 인력은 800명의 전직 깡패들로 채워졌다. 1932년에는 노조 설립을 추진하다 해고된 노동자들과 경찰이 충돌해 5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포드는 노조를 인정하느니 회사 문을 아예 닫을 궁리를 했다. '내부'의 반발이 있었다. 아내 클라라는 회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는 최후통첩을 들이대자 포드는 결국 1941년 노조를 승인했다. 일단 노조를 승인하면서 맺은 협약은 다른 회사들보다 노동자들에게 유리했다.

   

포드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참 종교는 오직 개신교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그는 노동자들도 기독교 가치에 맞춰 살기를 바랐다. 그는 술·담배·도박뿐만 아니라 껌 씹는 것까지 싫어했다. 고임금 정책을 썼지만 대신 노동자들의 가정 생활, 특히 음주 습관까지 감시했다. 그는 고무 확보를 위해 아마존에 포드랜디아(Fordlandia)라는 농장을 설립했는데 현지 노동자들의 기숙사 위생검사를 실시하고 성병 감염 여부를 조사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실천하지 못했다. 아들 에드셀 포드(1893~1943)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위장암 때문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들에겐 아버지 못지않은 능력이 있었다. 에드셀이 개발한 1941년형 링컨콘티넨털은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 중 하나로 기록된다. (링컨콘티넨털은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타고 있던 차다.) 사장직을 물려주고 난 다음에도 포드는 아들을 믿지 않고 달달 볶았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반유대주의를 신봉했다. 반유대주의는 당시 미국에 만연된 풍조였다. 쿼터로 유대인들의 하버드대 입학을 제한하던 시절이었다. 포드는 1919~27년 '디어본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이 주간지에는 '국제 유대인:세계 최고의 문제(The International Jew:The World's Foremost Problem)'와 같은 반유대주의 기사를 실었다. 디어본인디펜던트는 러시아 비밀경찰이 19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시온 장로 의정서(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에 나오는 주장을 미국 사회에 유포했다. 포드는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부추긴다고 믿었다.

   

포드는 히틀러의 우상이었다. 히틀러는 미국을 미워했지만 포드는 사랑했다. 포드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에 나오는 유일한 미국인이다. 히틀러는 포드가 발간한 반유대주의 기사의 선집을 애독했다. 히틀러의 꿈은 포드가 미국에서 이룩한 것을 독일에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폴크스바겐은 모델 T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포드는 1922년 나치스당에 7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90만 달러)를 후원했다.

   

들끓는 여론 때문에 포드는 디어본인디펜던트를 1927년 폐간하고 사과하는 한편 기사 내용을 몰랐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이 썼지만 기사는 포드가 저자로 돼 있었다. 포드는 죽을 때까지 반유대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나치스 독일은 포드에게 1938년 메달을 수여했다. 유대 단체들이 되돌려주라고 요구했으나 묵살했다.

   

사망 당시 1881억 달러 재산 남겨

포드에겐 사회공학자(social engineer)의 면모가 있었다. 그는 전쟁에 반대했으며 세계연방의 설립을 꿈꿨다. 돈키호테 기질도 있었다. 1915년에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막겠다며 '평화의 배(Peace Ship)'를 유럽으로 출항시켰다. 웃음거리가 됐다. 1918년에는 상원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000표 차로 낙선했다. 1920년대에는 대통령 출마를 두고 고민했다.

   

포드는 자동차 산업의 천재였으나 역사나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1919년 시카고 트리뷴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가 무식쟁이라는 기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미국혁명이 1812년에 일어났다"는 둥 그가 실제로 '무식'하다는 게 드러났다.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포드는 사망 당시 1881억 달러(2008년 가치)의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소탈한 삶을 살았다. 모델 T의 100만 대 돌파 기념식에서 연설을 부탁하자 그는 "여러분, 뭐든지 100만이라는 것은 아주 많은 겁니다"라고 딱 한마디만 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포드는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정부(情婦)를 두었다. 아내 클라라의 묵인 아래 30년 동안 내연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부자나 사회 명사들이 아니라 농부·기술자·발명가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말년에는 18~19세기 물품 수집에 열중했다. 그는 20세기의 심벌이지만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도시화되기 이전의 농촌사회 미국이었던 것이다.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312

   

헨리 포드는 살아 생전 시오니즘과의 투쟁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헨리 포드는 시온의정서를 비판하여 미국에 시온의정서 열풍을 불러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헌데, 헨리 포드 그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다.

   

이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터인가. 이는 오직 전세계적으로 국제유태자본론만이 설명가능한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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