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5 : 미국 연방준비은행, 윌슨, 하우스 대령, 브랜다이즈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6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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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5 : 미국 연방준비은행, 윌슨, 하우스 대령, 브랜다이즈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06

   

이차대전 이후로 가기 전에 일차대전 이전으로 간다. 종교인이나 지식인이야 왜곡되었다 해도 영적 갈망이나 지적 갈망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터인데 부족할 것 하나 없을 듯한 헨리 포드와 같은 이가 왜 프리메이슨이 되었던 것일까.

   

인드라는 이를 세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하나, 프리메이슨 조직의 특성. 프리메이슨 조직은 중앙집권적이지 않다. 각 지부가 독자적이다. 중앙 권력이 각 지부에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적인 지배를 하는 것이기 보다는 봉건제적인 통치, 즉 각 지부장의 권한을 승인하면 그 나머지는 지부에서 영주가 영지 관리하듯이 하는 것이다. 해서, 때로는 힘이 센 지부가 다른 지부를 흡수하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영지전을 해서 영지 확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게 해서 영향력이 커진 지부가 프랑스 대동방 지부인 것이다. 하여, 프리메이슨이 역사적 사건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하는 것은 허구인 게다. 그보다는 각 지부에 속했던 프리메이슨들이 개별적, 지부적 인맥을 통해 역사에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해서, 시일이 지나면, 프리메이슨 조직은 그 조직 원리상 현지화하기 마련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을 건국한 중심 세력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니 프리메이슨의 현지화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둘, 1920년대부터 있었던 안티 프리메이슨 운동 덕분이다. 프리메이슨은 그 조직 특성상 친영국적인 조직이었다. 허나,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프리메이슨 조직은 점차 사멸의 위기를 맞이하였기에 벗어나고자 친영적인 색채를 탈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흐름이 미국 대학에 있던 프리메이슨 아류 조직들의 변화다. 최초에는 친영국적이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미국적인 엘리트 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하여, 미국 프리메이슨은 현지화, 토착화, 미국화하였던 것이다.

   

셋, 시온의정서의 영향이다. 유태인들이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세계정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러하니 이에 대항하여 유태인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 이때, 프리메이슨 만큼 흥미로운 조직이 없는 것이다. 물론 국유본이 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시온의정서를 만들고 유포시킨 것이다.

   

해서, 시온의정서 유포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이란 미국 대학가 극소수 엘리트들이나 사교용 겉멋으로 즐기던 것이었는데,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지만,시온의정서 유포 이후 미국 프리메이슨이 역설적으로 대중화한 셈이다.

   

해서, 미국 프리메이슨은 현지화, 토착화, 미국화를 거쳐 부흥의 역사를 맞이한 셈이다.

   

하면, 헨리 포드 같은 이가 국유본 떡밥에 넘어가는데, 시온의정서만으로 넘어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여, 미국에서 연방준비은행이 만들어졌던 때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헨리 포드와 같은 산업자본가가 회사를 움직이려면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 이 자금 조달을 하려면 금융자본가를 만나야 하는데, 헨리 포드는 이 과정에서 국유본의 존재를 발견한 듯싶다. 하고, 헨리 포드는 국유본에 대항한 국제조직, 국제자본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러한 시도 중 하나가 프리메이슨일 확율이 크다.

   

   

아래 글은 달러에서 발췌한 글인데, 78 : 22라는 독법을 기억하면서 읽어보자.

   

   

"지킬섬의 마녀 잔치

   

미국 역사상 가장 웅장한 계획을 뚝딱 만들어낸 마녀 잔치는 지킬섬에서 벌어졌다. 지킬섬은 조지아 앞바다에 있는 J.P.모건 소유의 땅이었다.

   

잔치는 1910년에 로드아일랜드의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주최했다. 그는 모건의 사업 동반자이자 존 D.(2세) 록펠러의 장인이었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올드리치는 월스트리트 상원의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대기업과 은행의 대변자였다.

   

올드리치가 모임을 주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폴워버그라는 독일계 이민자였다. 그는 로스차일드가 남북전쟁 이후 미국 내의 주요 금융업체로 삼고 있던 쿤.로브의 공동 경영자였다. 다른 참석자로는 당시  모건의  뱅커스트러스트사 회장으로 있던 벤저민 스트롱과 다른 두 모건계 은행장, 미국 재무부차관보, 당시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은행었던 내셔널시티뱅크(지금은 시티뱅크로 불린다)의 프랭크 밴덜립 행장 등이었다. 밴덜립은 윌리엄 록펠러와 쿤.로브를 대표했다.

   

모건은 계획 막후의 최고 운영자였고, 모건과 록펠러 패거리는 오랫동안 최대의 맞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되는 금융체계를 짜내기 위해 이 비밀 회동에 모였다. 밴덜립은 나중에 이 모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차역으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 거기에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의 개인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 우리 특별 그룹이 금융 법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드러나면 그 법안은 의회를 통과할 기회를 도무지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 올드리치의 중앙은행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 핵심 부분은 나중에 채택된 계획에 포함됐다.

   

(그 3년 전에 발생했던) 1907년의 공황은 니커보커 은행과 아메리카트러스트사가 파산할 지경이라는 소문으로 촉발됐다. 모건하우스가 소문의 진원지였다는 증거는 나중에야 나왔다. 소문을 믿은 대중은 인출사태를 일으켜 소문을 현실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러자 모건은 점잖게 공황을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인출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럽에서 1억 달러어치의 금을 들여온 것이다. 여기에 홀린 대중은 앞으로 공황을 없게 하려면 중앙은행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됐다. 올드리치안을 공동 발의한 로버트 오웬스는 나중에 의회에서, 금융업계가 자기네들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을 요구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기 위해 그러한 금융 공황 유발을 모의했다고 증언했다.

   

1907년의 공황으로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의회조사단이 구성됐고, 지킬섬 비밀 회합이 이어졌다. 그 결과 '올드리치안'이라 불린 법안이 만들어졌으나, 조심스런 반대파는 그것을 간파하고 효과적으로 물리쳤다. 브라이언은 민간 화폐를 민간 은행에서 발행하도록 하는 어떤 법안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화폐는 정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국가 통화가 돼야 한다."

"

   

1907년 공황. 모건이 공황을 해결했다지만, 로스차일드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당시 1억 달러의 금을 일시에 동원할 수 이는 힘을 가진 유일한 세력은 로스차일드 가문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건이 국채로 큰 금융기업인데, 로스차일드가 배후에서 도와줬기에 국채 로또에 연속적으로 대박날 수 있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이 타켓이 되는 것을 극구 피해왔다. (로스차일드의 이런 전략으로 인해 오늘날 국유본 권력이 여전히 록펠러가 아니라 로스차일드에게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내내 베어링 가문 그늘에 있는 척하였고, 베어링 가문에게 역할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자 모건을 내세웠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건을 키워줄 때면 모건 위세에 영국 정부가 쩔쩔 매었고, 영국 정부가 답답해서 로스차일드에 중재를 요청하면, 로스차일드 가문이 저희도 모건이라면 쉽지 않습니다, 라며 난색을 표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국제 외교가와 사교가를 한바퀴 돌면 소문이 진실로 둔갑하기 마련이다.

   

모건도 모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모건 하우스에 유태인 출입 금지를 시켰던 것이다. 단,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인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당대 로스차일드와 모건은 겉으로 대립 관계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 로스차일드가 모건과 끝난 듯이 폴 와버그를 파견하여 로스차일드와 모건의 결별을 기정사실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러시아부터 시작해서 상당수 국가가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 모든 것이 간교한 술수였던 것이다.

   

해서, 모건은 국제유태자본과 대항하는 미국금융자본으로, 록펠러는 국제유태자본과 대항하는 미국산업자본의 대표가 된 셈이다. 하면, 왜 모건과 록펠러는 라이벌이었나?

   

1910년대 초반까지 국유본, 혹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록펠러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여, 록펠러에게 족쇄를 물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모건은 로스차일드의 충직한 종이었으나, 당시 록펠러는 로스차일드의 노예가 아니었다.

   

해서, 마침내 로스차일드 국유본은 록펠러를 노예로 만들 수 있었으니, 그것이 1910년대에 일어난 반독점법이다. 이로 인해, 록펠러는 로스차일드에게 항복한다. 이 극적인 반전을 합리화시키고자 나온 것이 록펠러의 자선 기부였던 것이다.

   

그간 비난만 받아온 록펠러 가문이 하루 아침에 나눔의 기쁨을 아는 선한 자본가로 둔갑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유본의 언론플레이다.

    

   

"모건에게는 의회의 반대말고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 법안에 서명하겠다는 대통령이 필요했다. 1910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모건의 똘마니가 아니었다. 매킨리의 뒤는 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이어받았는데, 그는 모건 진영에 있었고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를 해체하는 데 관여했다.

   

루즈벨트의 후임인 태프트는 공화당 소속이고 록펠러의 본거지인 오하이오주 출신이었다. 그는 인터내셔널 하비스트와 US스틸 등 모건의 주요 트러스트를 해체하기 위해 반트러스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복수를 했다. 태프트의 1912년 재선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의 대통령 유임을 막기 위해 모건은 침착하게 진보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은퇴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불러내 후보로 출마케 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발생한다. 만일 태프트의 반독점법이 성공했다면 미국 역사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우리는 반독점법하면 무조건 진보적인 정책으로 생각한다. 허나, 반독점의 대상을 차별화하면 그건 논란의 대상이다. 모건에 대한 반독점인가, 록펠러에 대한 반독점인가. 이는 더 치고 들어가면 금융자본에 대해 반독점을 할 것인가, 산업자본에 대해 반독점을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만일 테프트가 모건 반독점법을 추진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탄생되었을까. 1차 대전이 벌어졌을까. 러시아혁명은 성공했을까? 2차 대전은? 한국 분단은?

   

"루즈벨트는 태프트의 표를 충분히 잠식했고, 모건의 진짜 후보인 윌슨 민주당 후보가 1912년 선거에서 당선됐다. 루즈벨트는 속았음을 깨닫고 떠나갔고, 진보당은 해체됐다. 윌슨은 에드워드 멘델 하우스 대령 등 모건 똘마니들에게 둘러싸였다. 하우스 대령은 백악관에 집무실도 가지고 있었다. 윌슨은 하우스를 '분신'이라 불렀다.

   

이들 패거리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올드리치법안'의 이름을 '연밥준비법'으로 바꾸고 성탄절 사흘 전에 상정했다. 의회는 성탄절부터 연휴를 떠나도록 예정돼 있었다. 법안은 문구가 아주 애매해서 아무도 그 조항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

   

하우스는 모건 똘마니가 아니라 로스차일드 똘마니였다. 하우스는 국유본의 핵심 인사 중 하나였다.

   

국제유태자본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소설이 자주 등장한다. 시온의정서도 그렇고, 하워드 대령의 소설도 그렇고. 요즘은 소설쓰냐? 하지만, 이 시기에는 소설이란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대체 성경처럼 여겨진 면이 있다. 상당수 비밀결사 하부 조직이 문학모임, 독서모임에서 시작하였으니까.

   

하우스 대령에 대해 알아보자. 쑹훙빙 화폐전쟁에서 하우스 대령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신적 교주' 하우스 대령과 외교협회

   

워싱턴에서 진정한 통치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펠릭스 프랭크퍼터(Felix Frankfurter),미국 대법관

   

하우스 대령의 이름은 에드워드 하우스이며, '대령'이라는 칭호는 텍사스 주지사가 자신의 선거를 도운 하우스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붙여주었다. 하우스는 텍사스 주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 토머스는 남북전쟁 때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이었다. 일찌감치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하우스는 20세기의 미국 은행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조국으로 생각했으며, 영국의 은행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12년 하우스는 사학계의 강한 흥미를 유발하는 익명 소설 <행정관 필립 드루>를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그는 인자한 독재자가 미국 양당의 권력을 장악해 중앙은행을 설립한 다음 연방 누진 수입소득세 실시와 보호관세 폐지로 사회 안전망과 국제연맹을 세운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가 책에서 '예측'한 미래 세계와 훗날의 미국은 놀랍게도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다. 그의 '예견력'은 케인스와 맞먹는다.

   

 사실 하우스 대령과 케인스의 작품은 미래의 예언서라기보다 미래 정책 계획서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우스 대령의 책은 출판되지 마자 미국 상류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책에 소개된 미국 미래에 대한 예측은 국제 금융재벌들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졌다. 하우스 대령은 단숨에 엘리트 사회의 '정신적 교주'로 등극했다.

   

 191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간부들은 대선 후보를 지명하기 위해 하우스 대령에게 경선 후보 중 한 명인 윌슨을 '면접'하도록 했다. 하우스가 머무는 뉴욕의 호텔로 찾아간 윌슨은 한 시간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진작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만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윌슨의 말을 빌려보자. "하우스 선생은 나와 너무 비슷했다. 그는 독립된 또 하나의 나 자신이었다. 그의 생각은 나와 똑같았다. 내가 그의 자리에 있다면 그가 제안하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하우스는 정치가와 은행가들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월가 은행가들이 개최한 파티에서 하우스는 금융 거물들에게 '민주당이라는 나귀를 윌슨이 끈다면 결코 헛발질하지 않을 것'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쉬프, 와버그, 록펠러, 모건 같은 인물도 모두 하우스를 믿고 있었다. 쉬프는 하우스를 성경 속의 모세에 비유하면서 자기를 포함한 다른 은행가는 아론에 비유했다.

   

 윌슨은 191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버뮤다로 휴가를 떠났고, 이때 하우스의 <행정관 필립 드루>를 정독했다. 1913~1914년 윌슨이 내놓은 정책에서 입법에 이르는 대부분은 이 소설의 판박이였다.

   

 1913년 12월 23일에 미연방준비은행 법안이 통과된 후 월가의 쉬프가 하우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귀하가 이 화폐 법안 통과에 묵묵히 보내준 지지와 탁월한 공헌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민영 중앙은행 설립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완수한 하우스는 국제 사무로 주의력을 돌렸고, 구미에 폭넓게 퍼져 있는 인맥을 이용해 순식간에 세계무대의 중량급 인물이 되었다. "하우스와 뉴욕의 국제 금융재벌들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는 많은 금융기관과 은행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폴과 펠릭스 와버그 형제, 오토 칸, 헨리 모겐소, 야곱과 모티머 쉬프 형제, 허버트 리만 등이었다. 하우스는 유럽에서도 강력한 은행가 및 정치가 그룹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17년에 윌슨은 하우스에게 '조사'팀을 조직해 미래평화협의 제정 문제를 담당하도록 했다. 1919년 5월 30일,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조사 팀을 포함한 영국의 원탁회의 구성원들이 참가한 회의의 중심 의제는 '영국과 미국 엘리트의 역량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였다. 6월 5일, 이들은 또 다시 회의를 열고 조직 형식을 분리해서 통일적으로 협력하면 행동에 유리하다고 결정했다. 6월 17일, 하우스는 발기인의 자격으로 뉴욕에서 '국제사무협회'를 발족했다. 1921년 7월 21일, 하우스는 국제사무협회를 '외교협회(CFR)'로 개명했다. 조사 팀의 구성원을 비롯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미국 대표와 미연방준비은행 설립에 참여한 270명의 정계 및 금융계 엘리트들이 이 협회에 가입했다. 월가의 은행가들이 이를 위해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미국 사회와 세계 정치를 통제하는 데 열중하는 조직은 이렇게 탄생했다.

   

 윌슨 수하의 해군부 차관보로 있던 루스벨트도 하우스의 <행정관 필립 드루>를 읽고 느낀 바가 컸다. 책에 묘사된 '온화한 독재자'는 루스벨트의 훗날 모습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하우스는 백악관에 없어서는 안 될 참모가 되었다.

   

   

 루스벨트의 사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오랫동안 나는 루스벨트 스스로 그토록 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서 미국에 이익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디어나 정치적 '실탄'은 모두 외교협회와 세계 단일화폐를 주장하는 조직에서 '지급'받은 것이었다.

   

   

폴 와버그의 아들인 은행가 제임스 와버그는 루스벨트의 금융 고문을 지냈으며, 외교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1950년 2월 17일 상원의 외교관계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의 세계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말입니다. 유일한 문제는 이 세계정부가 과연 평화적인 공감대를 거치느냐 무력의 정복으로 형성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카고 트리뷴은 1950년 12월 9일 자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외교협회 회원들은 사회에 대해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 교육 배경의 우위를 이용해 세운 독보적인 지위로 이 나라를 경제 파산과 군사 붕괴의 길로 몰아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남은 지난 전쟁의 말라버린 피의 흔적과 최근 전쟁의 선명한 핏자국을 똑똑히 봐야 한다."

   

 1971년 루이지애나 주 하원의원 존 래릭은 외교협회를 이렇게 평가했다. "외교협회는 하나의 세계정부를 세우는 데 열중이다. 이들은 가장 큰 몇 개의 면세기금회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권력과 영향력의 결정판으로 금융, 상업, 노동, 군사, 교육, 대중매체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미국 헌법과 자유로운 상업 정신을 지키려는 좋은 정부의 국민이라면 이를 잘 파악해야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소중히 하는 이 나라의 뉴스 매체들은 그 동안 스캔들 폭로에는 매우 공격적이었으나, 외교협회와 그 회원들의 활동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외교협회는 엘리트 조직이다. 이 협회는 정부의 최고 결정권 층에 권력과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위로부터 아래로 압력을 가하며, 개인과 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을 통해 아래로부터 위로 압력을 행사한다. 이를 통해 주권을 지지하는 헌법공화국을 하나의 독재적 세계정부의 종속물로 만들 것이다."

   

 외교협회는 미국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 가운데 단 세 명만 빼고 모두가 이 협회의 회원이었다. 수십 년 동안 양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을 했는데도 정부의 정책이 그토록 일관성을 유지한 것은 외교협회 회원들이 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무장관은 1921년 이래 이 협회에서 도맡아서 배출했다. 미국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국가안보 고문은 대부분 이 협회에서 내정되었다. 그 밖에 외교협회는 국무장관(1949년 이래 모든 장관을 전담) 14명, 국방장관 11명, 중앙정보국장 9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외교협회는 곧 미국 엘리트의 '중앙당교'라 할 만하다. "일단 외교협회의 핵심 회원이 미국 정부의 특정 정책을 결정하고 나면 방대한 규모의 외교협회 연구기관이 즉각 행동을 개시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이성적이며 감성적인 논점을 제시해 정책의 설득력을 높임으로써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어떤 반대 의견에도 대처할 수 있었다.

   

 워싱턴 관가에 중요 인물이 결원될 때마다 백악관은 먼저 뉴욕 외교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외교협회 회원 중 거의 절반이 정부 요직으로 임명되거나 정부의 자문 고문을 맡았다고 전한다.

   

   

 외교협회 회원은 이미 3,600명이나 된다. 회원은 반드시 미국 국민이어야 하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은행가, 대기업의 임원, 정부 고위 관리, 매스컴의 엘리트, 저명한 대학교수, 최고의 브레인, 군대의 고급 장성 등이 주요 멤버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 정치 엘리트의 '막강한 핵심'을 형성했다.

   

 미국 메이저급 매체들의 '여론 주도'에 관해 살펴보면, 1987년 외교협회의 보고서가 262명에 달하는 기자와 미디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회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정부의 외교 정책을 '해독'할 뿐 아니라 '제정'하기도 한다. 외교협회 회원들은 CBS, ABC, NBC, PBS 등의 TV 네트워크를 완전히 장악했다.

   

 신문 쪽으로는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보스턴 글로브>, <볼티모어 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의 주류 신문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외교협회의 영향권에 있는 잡지는 <타임>, <포춘>, <라이프>, <머니>, <피플>,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뉴스위크>, <비즈니스위크>,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리더스 다이제스트>, <포브스> 등이 있다.

   

   

 출판계로는 맥밀란, 랜덤하우스, 사이먼앤드슈스터, 맥그로힐 등 대형 출판사가 있다.

   

 미 상원의원 윌리엄 제너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독재로 가는 길은 완전히 합법화 되었다. 의회, 대통령, 국민은 이미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표면적으로는 헌법에 기반을 둔 정부처럼 보이지만, 우리 정부와 정치 체제에는 또 하나의 권력이 있다. 이 권력은 '엘리트들'의 관점을 대표한다. 그들은 우리의 헌법이 이미 케케묵은 것이라고 여기며 시간은 그들의 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국내외 사무의 결정권은 이미 민주와 공화 양당의 수중에 있지 않으며, 슈퍼 엘리트 그룹이 장악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부터 CFR 창설까지 빈틈없는 전략전술로 역사를 주도한 인물을 단지 모건 똘마니로 생각하는 건 하우스 대령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는 국유본 수뇌부에서 파견나온 국유본 핵심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시 '달러' 책을 인용하자.

   

"국가 통화는 합중국 조폐국에서 찍지만, 그것은 정부의 부채로서 발행되는 것이었다. 민간은행인 연방준비은행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빚이었다.

   

법안은 1913년 12월 22일 통과됐고, 윌슨 대통령은 이튿날 이를 서명해 발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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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의 연방준비법은 국제 은행가들에게 중요한 성과였다. 그들은 민간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한 세기 넘게 싸워왔다. 이 중앙은행은 정부 부채를 '화폐화'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가진 은행이었다. 이 법은 '연방준비은행들의 설립을 규정하고, 탄력적인 통화를 갖추며, 상업어음 재할인 수단을 제공하고, 미국 금융에 대한 효율적인 감독 체계를 수립하며, 그 밖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페드스피크(FedSpeak)의 시작이었다. 페드스피크는 모호함 속에 논점을 감추는 연방준비은행의 독특하고 추상적인 어법을 가리키는 용어다. 예컨대 앞에서 인용한 '탄력적인 통화'는 은행이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대출금을 의미한다. '재할인'은 미불 대출금을 만기 전에 재대출함으로써 은행이 자금을 요술이라도 부리듯이 뻥튀기하는 기술이다. ... 린드버그 의원은 이 법을 '당대 최악의 입법 범죄'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특혜다. 과거에 존재했던 정부가 일부 특권층의 손에 쥐어주었던 어떤 특혜보다도 뛰어나다. ... 금융시스템은 완전히 모리배 집단에게 넘어갔다. 이 시스템은 민간의 것이고, 남의 돈을 이용함으로써 생기는 이득을 가능한 한 최대로 늘린다는 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운용되는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했지만, 중앙은행을 얻기 위해 백 년동안 국유본이 싸워오지 않았다. 즉, 국유본이 19세기에는 미국에서 중앙은행을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보자. 어느날 오키나와가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국유본은 오키나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느끼나? 그보다는 당분간 일본이나 한국을 통해 오키나와 은행시스템을 관리할 것이다.

   

식민지 관리를 위해 영국에서만 중앙은행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허나, 국유본이 영국 단일 제국주의에서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과 같이 가는 제국주의를 결정하자 이들 국가에도 중앙은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각국이 각국 식민지를 관리해야 하기에.

   

이 점을 전제하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서의 중앙은행 설립이 이 시기 국유본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미국으로의 유럽 이민 등 미국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최고의 전략적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CFR 창설인 게다.

   

   

"월스트리트와 사상 최대의 금융권력 J.P.모건

   

강탈영주는 많았지만, 패거리의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J.P.모건과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존 D. 록펠러였다. 모건은 금융을 지배하고, 카네기는 철강을 지배했으며, 록펠러는 석유를 독점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의 금융 및 기업구조는 모건의 금융.수송회사와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에 의해 지배됐다. 그리고 이들 복합기업은 그들끼리 긴밀한 동맹을 맺었다. 겸직임원제를 통해 그들은 미국의 경제조직 거의 전부를 지배했다. ...

   

월스트리트 23번가에 위치한 모건의 은행은 '모건 하우스'로 알려졌는데, 수십 년 동안 미국 금융의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1920년에 폭탄이 이 은행 앞에서 터져 40명이 죽고 400명이 다쳤다. (나중에 이 미국 금융의 중심은 세계무역센터로 옮겨갔는데, 2001년에 또 다른 비극적인 공격의 표적으로 선택됐다)

   

20세기 초에 모건은 월스트리트의 신디케이트를 지배했다. 금융저술가 존 무디는 이를 '세계 사상 최대의 금융권력'이라고 불렀다. 모건은 22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100여 개의 법인을 지배했다.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1913년 <은행가는 어떻게 남의 돈을 쓰는가>라는 책에서 미국 경제에 가장 큰 위협은 '금융 트러스트'라고 썼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금융 트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힘센 은행을 세운 J.P.모건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영국의 로스차일드처럼 모건은 미국에서 비상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다. 모건의 똘마니가 통상적으로 국제 금융 회의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랫동안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를 그 자리에 지명하기 전에 J.P.모건의 법인 이사였다.

   

모건과 다른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자금을 받은 행운의 기업들은 자기 산업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이 모든 합병이나 취득에 꿔줄 돈이 어디서 났을까? 해답은 라이트 패트먼 의원 및 다른 세심한 관찰자들이 내놓았다.

   

강탈영주들은 빈 모자에서 돈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은행들은 결정적인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장부 기입'이라는 바닥 없는 원천에서 나온 돈을 계열 법인들에 '빌려'주는 것이다. 그런 뒤에 이 자금은 경쟁사들을 사들이고, 시장을 독점하며, 정치가들에게 기부하고, 의회에 로비하며, 여론을 조작하는데 쓰였다.

   

록펠러와 모건은 정치 무대에서 권력을 다툰 적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강력한 영국 금융업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록펠러는 체이스은행을 사들였는데, 그 자금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스차일드가로 연결된다. ... 1955년 록펠러의 체이스은행은 맨허튼사와 합병해 체이스맨허튼은행이 됐다.

   

모건가의 금융회사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50년대에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은 나중에 피바디 모건사가 되는 회사의 공동경영자가 됐다. 영국과 미국 사이의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런던의 투자회사였다. 남북전쟁 때 이 회사는 북부연합의 최고 재무대리인이 됐다. 주니어스의 아들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나중에 이 회사의 뉴욕 지점장이 됐다. 이 회사는 1895년에 'J.P.모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873년, 1884년, 1893년, 1907년의 금융 공황에서, 다른 은행들은 망해 나갔지만 모건의 은행은 언제나 어떻게든 자금을 구하고 살아남아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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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준비은행은 독립 조직으로, 민간이 소유한 법인이다. 이는 열두 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들로 구성되며, 이 지역 연방준비은행들은 여러 회원 상업은행들이 소유한다. 12개 연방준비은행 가운데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전체 연방준비은행 지분의 53%를 소유하고 있으며, 연방 재무부의 재무대리인으로 지정되어있다. 이 특권적 민간 은행의 최대 주주는 뉴욕 지구의 거대 상업은행들이다.

   

1997년에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그 3대 회원 은행이 체이스맨허튼은행, 시티뱅크, 모건보증신탁이라고 밝혔다. 2000년에 J.P.모건과 체이스맨허튼이 합병해 J.P.모건체이스가 됐다. ... 2004년 J.P.모건체이스는 뱅크원을 인수해 시티그룹(자산 1조2천억 달러) 다음으로 큰 은행이 됐다. 시티그룹은 록펠러 제국의 초석이다. ...

   

이렇게 록펠러와 모건 제국의 금융 토대인 시티뱅크와 J.P.모건체이스는 미국의 뉴욕 연방은행의 양대 주주다. 연방준비제도는 그것을 고안한 강탈영주들의 통제 하에 확실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워싱턴의 중앙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재무부 장관과 통화감독관이 참여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이사회는 열두개 지역 연방준비은행에 대한 통제권이 별로 없다. 그들은 대개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선도에 따른다. 그러므로 연방준비제도의 진짜 권력은 거기에 집중돼 있다.

   

지킬섬 회동 참석자들 중 한 사람인 벤저민 스트롱이 초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됐다. 스토롱은 런던의 금융권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의 이력은 모건 은행의 호의에 기댄 것이었다."

*출처: 달러(The Web of Debt) - Ellen Hodgson Brown저, AK(도서출판 이른아침)발행

   

인드라는 강조한 바 있다. 대부분의 음모론은 국유본에서 나온다고 말이다. 특히 출판된 책도 예외가 아닌 게다. 또한, 국유본의 음모론에는 비판이 국유본 다음 계획을 시사한다고 했다. 가령 IMF를 비판하는 스티글리츠가 주장하는 SDR 같은 것이 국유본의 다음 계획이라고 말이다. 다음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이전에 자신이 행한 일을 자료를 공개하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78%를 공개하고, 22% 계획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해서, 이 대목에서 브랜다이스에 알아보기로 하자.

   

"37) 노동운동의 아버지들=현상유지를 거부하는 유태인은 19세기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그대로 두고 볼수 없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했다. 미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노동운동연합(AFL)을 만든 사무엘 곰퍼스가 유태인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주 54시간 근무와 잔업수당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중 한명은 나중에 최초의 유태인 대법관이 됐던 루이스 브랜다이즈(1856-1941)였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협상, 불만처리, 중재등의 절차를 만드는 등 노동운동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구사했다. "

http://blog.naver.com/1kimjt/20001569077

   

한국경제신문 뉴욕주재기자인 육동인이 작성한 기사다. 인드라가 보기에, 이런 수준의 기사는 유태인들 검열을 받은 상태에서 작성한다고 보고 있다. 헌데, 이런 기사에서 등장하는 유태인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서, 인드라 흥미를 끌었던 것이 곰파스와 브랜다이즈다. 노동운동사 공부하면 알게 되는 곰파스. 과연 곰파스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가 알기 위해서는 인드라 블로그에서 '곰파스'라고 치면 된다. 인드라는 곰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곰파스는 평생 국유본을 위해서 살아왔을 뿐, 단 한 번이라도 노동자를 위해 산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데 앞장서온 병쉰색희이다. 

   

그러하기에 브랜다이즈가 궁금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제 2장, 1993년 9월 9일 목요일, 1:42 P.M. 7년 0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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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존 비티[John Beaty]의 책, "미국에 드리운 철의 장막[The Iron Curtain over America]"(1951년 12월 초판 간행, 1954년 4월 제 11쇄까지 발행), 제 3장]

   

[존 비티[John Beaty](1890-1961): 영문학자, 반공산주의 연구가. 1921년 콜롬비아대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19-1957년간 남부 감리 대학[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 정보장교로 근무--역주]

   

하자르인들, 민주당에 가입하다.

   

승리에 도취한 하자르인들[Khazars]('러시아 vs. 하자르' 참조--역주)은, 다른 공산주의 "전향자"들의 도움 속에, 이미 그들 앞에 굴복해 있던 러시아를 상대로 계속되는 "숙청"을 통해 자신들의 장악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수백 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은 즉각적인 살해로 또는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했던 강제 수용소에서 천천히 밀려드는 공포 속에 죽어 갔다. 이런 방식의 숙청은 이곳 미국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적어도 소비에트식 통치 방식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미가 있다면, 학살된 1,500만 명의 사람들은 그 명단과 카테고리에 따른 분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국제 공산주의 단체의 고위급 인사였으나 나중에 "스탈린주의[Stalinism]"를 포기했던 인물의 진술) FBI 비밀공작원 출신의 대학 강사인 매트 스베틱[Matt Cvetic]의 최근 언급에 따르자면, 당시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서른 살이 넘은 거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재-교육"을 시키기에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은 것으로 간주되어 학살되었다고 말한다. 구체 내역을 알고 싶다면, 텍사스 보거[Borger, Texas]에서 간행되는 '보거 뉴스-헤럴드[Borger News-Herald]'지에 편지를 써서, J.C. 필립스[J.C. Phillips]의 "우리는 빚이 있다[We Owe a Debt]"라는 기사(1952년 4월 16일자)의 재간행을 부탁해 봐야 할 것이다.

   

   

하자르인들은 공포 정치를 통해 러시아 국민들을 정복했지만, 이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들(하자르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서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미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우리 나라를 그들의 주요 목표물 중 하나로 정한 이 숙명적인 선택에는--비록 아직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단계에 접어들진 못했지만,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상호 호혜적인 자본-노동 관계, 엄청난 생산성, 그리고 높은 삶의 질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 독재정체가 미국의 공화정체보다 노동자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이 새빨간 거짓말에 대한 명백한 반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식" 민주주의(영국과 미국)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끔찍한 방해물이며,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소련 지도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며, 특히 스탈린이 제 18대 공산당 의회에서 한 기조 연설(1939년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뚜렷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소련 정책의 공식적 선언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우리의(미국의) 개입이 있기 거의 3년 전에 나온 것으로, 조심스레 감춰지기 보다는 떠들썩하게 공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인력과 사무실과 부처를 보유한 국무부는 이 연설의 내용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식 민주주의"를 타도하려는 소련의 목표를 즉각적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대규모 미국 개척의 두 번째 이유는, 미국에는 이민 금지법 혹은 이민 규제법이 전통적으로 미비했으며, 또 이와 같은 이민법이 통과되었을 때에도 그 엄격한 적용은 등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의 불법적인 미국 밀입국은 이민 및 귀화청[the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이 직면한 가장 심각하면서도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불법 밀입국은 엄청나게 증대했다. 놀랍도록 많은 숫자의 외국인들이 불법적인 지위로 미국 내에 거주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1940년 발효된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약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등록되었다."('미국의 이민 및 귀화 체계', pp.629, 630)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개척의 세 번째 주요 이유는 미국은 거주 외국인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책이 부재한 나라로, 심지어 이들의 활동이 정부 전복을 지향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50년 수백만 명의 불법 밀입국자들 가운데 수백, 수천의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방할만한 적절한 조항이 없어서 그대로 다시 풀어주기도 했다.

   

앞서 제 2장에서도 보았듯이, 하자르계 배경과 전통을 가진 인물들은, 1880년과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사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이 있을 당시 미국에 입국했던 것이다. 1917년에는 소비에트가 러시아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경도된 동유럽 출신들의 불법 밀입국은 제 1차 세계대전 종전(1919년)과 이민 제한법이 통과된 1924년 사이, 5년의 기간 동안 정점을 이루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입국 기록을 남긴 이민자들의 수는 약 3백만 명에 달하며, 그들 중 다수는 동유럽 출신들이었다.

   

러시아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새로운 이민자들의 다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서구 기독 문명에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러시아 지도자들의 실질적인 요원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 중 두드러지는 인물은 시드니 힐먼[Sidney Hillman](1887-1946, 미 노동계의 지도자로 미 합동 방직 노조[the Amalgamated Clothing Workers of America]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미국 산업별 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창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 미국 산업별 조합회의(CIO)는 이후 미국 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과 1955년 합병, AFL-CIO를 형성--역주)이었는데, 그는" 랍비(유태 율법) 교육"을 받다가(미국 인명사전[Who Was Who in America] 제 2권, p.254) 국제적인 수준의 정치 운동가로 변모했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시드니[Sidney]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22년 전, 아주 유사한 명령이 레닌[Lenin] 자신에 의해 미국 내 활동중이던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달되었는데, 당시 힐먼[Hillman]은 미국-러시아간 산업 협동 조합(뉴욕 14번가, 103E)[The Russian-American Industrial Corporation at 103 E. Fourteenth St., New York]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분명히 러시아에서 넘어온 하자르계 이민자들 가운데 실질적인 소비에트 요원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또한 하자르계 이민자들 모두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confirmed Marxist]인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의심없이 미국 전통의 관습을 따르기도 했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구성 비율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에 반하는 점들이 언급되거나 암시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이민자들은 앞선 시대의 이민자들과 비교해 봤을 때, 아주 상당 수의 사람들이 서구 기독 문명에 흡수되기를 거부하기로 결심한 자들이었으며, 또한 정치적 연대와 압력 행사를 통해 자신들만의 목표를 달성해 나가기로 마음먹은 자들이었다.

   

20세기의 첫 30년동안, 비기독교도였던 수백만 명의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공화당에 가입했다. 당시 공화당은 다수 정당으로서 가입을 위한 홍보활동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반면 민주당은 상황이 나빴으며 더 많은 지지자들이 필요했다. 1912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큰 표 차이로 당선되기는 했지만, 그 때 공화당은 윌리엄 호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지지층과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지지층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실제 투표수에 있어서 민주당의 윌슨은 태프트와 루즈벨트가 받은 표을 합친 것에 비교해 봤을 때 1,413,708표가 적었다. 사실상, 1892년(클리브랜드가 해리슨을 이긴 선거)부터 1932년(루즈벨트가 후버를 이긴 선거) 사이,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보다 많은 투표수를 얻었던 것은 단 한 차례로(9,129,606표 : 8,538,221표), 윌슨 대통령의 재선(1916년) 때였으며, 그 때 내건 슬로건은 "그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대선에서는 공화당이 항상 더 많은 표를 얻었다. 1904년부터 1928년까지 있었던 7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받은 투표수를 계산해 보면, 민주당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평균적으로 45%이상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더 많은 지지를 받을 필요성을 넘어, 당시 민주당은, 정치적인 성향을 띤 동유럽계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고, 또 이들 모두를 정당 서열상 높은 자리에 앉힐 수 있을만한 다른 특징도 가졌지만, 실상 그들 중 급진 좌파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던 소수만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공화당이 상당히 동일성을 띤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민주당은 여러 개 그룹의 집합이었다. 사실상 민주당은 '정치적 정당'이 전혀 아니었다. 대부분이 서로 서로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편의상 '동료'로 불리는 사람들 간의 결합이었다.

   

20세기 초반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크게 두 가지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남부 시골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톨릭 성향의 북부 도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물론 '서구 기독 문명'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공유하고 있긴 했지만, 그 밖에는, 공화당에 반대한다는 점(주로 이슈를 선점 당했기에)을 빼고는 정치적인 공통 분모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 내에는 1880년 이후로 점점 그 세를 빠르게 불려가는 제 3의 그룹도 있었는데, 이들은 동유럽계 출신들과 기타 "자유주의자들[liberals]"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대표적인 예는 루이스 뎀비츠 브랜다이스[Louis Dembitz Brandeis](1856-1941, 1916-1939년간 미 대법관 역임, 대법관 시절 '철도 독점 반대', '노동법 사수' 등의 입장 표명. 시오니스트 운동을 지지했으며,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 창설에도 기여--역주)가 될 것인데, 그는 프라하 혈통이자, 명문 하버드대 출신의 유태인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브랜다이스가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참신성을 띤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법관에 지명하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 자신의 법적 성향과 기타 가치관들에 따라 1916년의 미국을 이내 좌편향으로 몰고 갔다. 이를 통해 그는 민주당의 미래, 그리고 민주당을 통해 본 미국의 미래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유태 백과 사전[the Universal Jewish Encyclopedia]에 따르자면, 상원에서는 "브랜다이스의 '급진주의'"와 "그의 법적 소양 부족"에 대한 "역사적 투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특징들'에 대한 반감으로, 엘리후 루트[Elihu Root](1845-1937, 1905-1909년간 미 국무장관 역임--역주) 전 국무장관, 윌리엄 호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 1909-1913년간 제 27대 미 대통령 역임--역주) 전 대통령, 그리고 7명의 전직 미 변호사 협회[the American Bar Association] 회장들이 그의 대법관 지명에 반대했다.[하톤: 되돌아 가서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변호사 협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법관 지명 안은 1916년 6월 5일 상원에서 근소한 표차로 통과되었다. 이 날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날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최고위급 공직자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한 이익 기반이 미국 바깥에 있는 자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은 19세기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나아가 그는 법을 '선행된 사건들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물로 형성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법을 해석하는 자가 의도하는 일련의 결과들'에 맞춰서 법을 해석했다.

   

유태 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브랜다이스 대법관에 관한 글(Vol. II, pp.495-499)은 가능하다면 전체를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

   

세계 전쟁 동안, 브랜다이스는 각 나라의 유태 관련 사건들의 정치적 국면들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때 이후로 그는 유태인 관련 사건들에 관한 한 시오니즘을 자신이 추구하는 이익의 근저로 삼았다. 1919년 그는 정치적 이유로, 그리고 몸 담고 있던 기관상의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회, 경제적 활동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법관으로서 브랜다이스는 :

   

'미국중심주의'와 '소수 문화 또는 유태인들의 고향, 팔레스타인'과 같은 문제들 간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때면, 학문적 당혹감에 대해 결코 걱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적 '교리문답서[catechisms]'의 틀을 과감히 깨고, 주어진 모든 사건들의 '경제적인 의미들'을 철저히 그리고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가 가진 확신에 따르자면, 우리의 개별적인 철학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현대적 경제 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적절한 해결의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 작용적인 질서를 고찰했다. 브랜다이스는 헌법은 '자유로운 구조[liberal construction]'를 가져야만 한다고 느꼈다.

   

이것이 어쩌면 미국 법원들이, 재판을 통해 마치 입법 기관의 역할을 함께 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 출발점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윌슨은 미국의 제 1차 세계 대전 개입 결정을 내렸고, 이어지는 결과로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뒤따랐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계 혈통의 아들, 딸들의 희생이 컸는데, 그러한 결정에는 브랜다이스의 윌슨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으며, 이는 이집트 최고 집정관이던 헨리 맥마흔 경[Sir Henry Macmahon](1862-1949, 1915-1917년간 이집트 집정관 역임--역주), 그리고 이 지역 영국군 최고 사령관이던 알렌비 경[Field Marshal Lord Allenby](1861-1936, 1차 세계대전 동안 이집트 원정대를 이끌었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1917년과 1918년 각각 점령--역주)과 다른 여러 명의 공식적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지만, 윌슨 대통령은, 나중에 영국 정부의 다른 밀실에서 고안된 계획에, 이미 경도되어 있었다. 이 계획이 바로 '시오니즘'으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1863-1945, 1916-1922년간 영국 전시 내각 수반--역주) 영국 수상도 이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역시 윌슨과 마찬가지로, 몇몇 저명한 유태인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제 19권 p.4)에 '제 1대 리딩 후작'(과거에는 루푸스 다니엘 이삭스 경[Sir Rufus Daniel Isaacs](1860-1935, 유태인, 영국 정치인. 영국 하원의원, 법무장관, 대법원장 등 역임--역주)으로 표기)으로 설명되어 있는 인물이다. S. 랜드먼[S. Landman]의 논문, '벨푸어 선언의 비밀 역사[Secret History of the Balfour Declaration]'에 따르자면(벨푸어 선언 : 1차 세계 대전중인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태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한 것--역주), "마크 사이커스 경[Mark Sykes](1879-1919, 영국 보수당 정치인, 외교참모--역주), 와이즈먼[Weizmann](체임 와이즈먼[Chaim Weizmann]1874-1952, 벨라루스 태생의 유태인, 시오니스트 운동 지도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역임--역주), 그리고 소코로프[Sokolow](나훔 소코로프[Nahum Sokolow] 1859-1936,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시오니스트 지도자, 세계 시온의회 의장 역임--역주)간의 합의가 성립된 후, 영국 내각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는 일을 돕겠다는 내용의 비밀 메시지를 브랜다이스 대법관에게 보내기로 했다. 미국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동정과 지원 움직임이 활발하여 그 결과로, 미국이 급격히 친-연합국적 태도를 갖게 된 것에 따른 보답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벨푸어 선언의 기원"(1936년 2월 7일자, 유태 연대기[The Jewish Chronicle])이라는 기사 내용은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 정부 대표들"은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 개입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최고의,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약속해 줌으로서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합국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막강한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의 힘을 미국에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동원하고 뿌리내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윌슨 대통령이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조언을 가장 중요하고 여기고 있었기에", 시오니스트들은 그를 통해 미국의 전쟁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톤: 독자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오늘날 당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른 사건들에 대한 숙고 없이 그저 이 글을 단순히 읽고만 있다면, 당신들은 대단히 부주의한 자들일 것입니다. 누가 대통령이었으며, 어떻게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이 만들어 졌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퍼즐의 모든 조각들을 다 제시하고 있지만, 만약 당신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그저 "흩어진 조각들"만을 갖게 될 뿐이며, 전체 그림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헷갈린다구요? 물론 헷갈리겠지요.--그렇지만, 행위자들과 그들의 행동들에 관하여, 당신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수준까지 헷갈리게 만드는 건 이미 의도된 일입니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윌슨 대통령에게 미쳤던 이 이상한 힘은 스테펜 와이즈[Stephen Wise](1874-194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으로 유아시절 미국으로 이민. 랍비, 시오니스트 지도자--역주)의 자서전인 '도전의 세월들[Challenging Years]'( 'G.P. 풋넴의 아들들[G.P. Putnam's Sons](출판사명--역주), 뉴욕, 1949년판)에도 여러 차례 나와 있다. 예를 들어 랍비 와이즈는 "윌슨이 한 선택들에 대해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만큼, 그의 이 과도한 브랜다이스 의존 경향은..."이라고 썼다. 그리고 독립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의 대통령'이 한 놀랄만한 언급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랍비 와이즈가 시오니즘과 미국 유태 의회[American Jewish Congress]의 제 1차 회의 소집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게 언제가 되든, 당신과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내가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오면, 내게 말해 주시오. 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소."

   

이러한 진술들의 진위 여부는, 인용을 따온 정보 소스가 기록으로 잘 남아 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윌슨 대통령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제 1차 세계 대전에 관한 비밀 문서들이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될 때까지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윌슨 대통령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의 '내밀한 의도'가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처럼 '유럽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방식의 전쟁 수행은 끝없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유혈이 낭자한 승리와 평화 정착의 실패는,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 미 제 26대 대통령(1901-1909)--역주) 시절, 드라마틱하고 성공적인 러일 전쟁(1904-1905) 종결(개입보다는)(테오도르 루즈벨트는 양국 사이를 중재, 포츠머스 조약(1905년)을 이끌어 내었으며, 19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역주)'과 더 큰 대조를 이루었다.

   

윌슨 대통령의 8년간의 통치 이후, 민주당은 1920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어지는 12년(1921년 3월 4일-1933년 3월 4일)동안 민주당내 3가지 다른 그룹들--남부 프로테스탄트, 북부 카톨릭, 그리고 브랜다이스 스타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다음 번의 승리와 이에 수반하는 권력을 기약하며, 서로 협조적이었던 지도자들을 매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민주당의 지도자들은 아직은 주로 남부 프로테스탄트와 북부 카톨릭계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아주 약삭빠르게도, 당내에서 동유럽계 이민자들의 구성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서로 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20세기 들어 동유럽계 이민자들은 발빠르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민주당에 가입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모두는 '이 낯선 동료들'에게 익숙해져 갔으며, 대부분 비-기독교계였던 이 제 3의 세력은 그러한 가운데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잠깐만 한가지 살펴보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플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제 1기 시절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민주당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것은 아마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이었던 바이어드[Byrd](해리 F. 바이어드[Harry F. Byrd], 1887-1966, 언론인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 1933-1965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역임--역주)의 언급이 될 것이다. 1951년 11월 1일 알라바마주 셀마[Selma Alabama]에서 한 연설에서, 그는 민주당을 "트루만주의를 추종하는 이질적인 사람들의 군집[heterogeneous crowd of Trumanites]"이라고 묘사했다. 이에 더해, 그는 "모호한 기원과 무책임한 방향성, 그리고 약탈적 목적성을 띤 민주당이 과연 정당이라 불릴 수 있을 지 의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사실상 소수 정당의 대표였던 우드로우 윌슨은 공화당의 심각한 분열로 인해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주로 해외로부터의 지속적인 보강을 통해 구성된 동유럽계 "제3 세력",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은, 민주당을 소수당에서 다수당의 지위로 끌어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몇몇 외국인 출신의 지도자들, 또는 외국인과도 같은 성향을 가진 자들은, 민주당의 승리에 대한 그들의 기여에 대해, 특별한 방식의 보상을 받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들이 그 대가로 얻어 낸 것은, 미국 국민들로부터 주의 깊게 숨겨졌고, 심지어 같은 동유럽계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비중이 낮은 다수의 인물들은 배제되었던 것으로, 바로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러한 목적 달성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쉬운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선거 방식 아래에서는 한 주 전체를 대표하는 투표수가 해당 주에서 다수 표를 얻은 후보자에게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미국에서는 메인주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 48개주에서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선출--역주) 오랜 전통의 주에서는 대체로 공화당 지지 주민과 민주당 지지 주민이 반반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지만, 잘 조직화된 소수가 역량을 발휘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유태인 비율이 아주 높은 주로는 뉴욕,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뉴저지, 매사추세츠,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미시건이 있다. 물론 이들 주들이 바로 다수의 선거인단을 보유한 대단히 "의심스러운" 주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프랭클린 들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당선되어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 때, 오랜 전통의 민주당원들은, 그들이 남부 프로테스탄트계이건 북부 카톨릭계이건 간에, 댐, 다리, 정부 청사 등의 건설 그리고 기타 각지에서 정부 재정 지원하의 프로젝트들을 추진하길 원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 또는 그들의 동료들과의 계약을 원했다. 그들은 또한 연방 판사 등 안정적 임기를 보장하는 직위들의 일부를 할당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전통의 민주당원들 가운데, 그 어느 그룹도 "외교"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잘 아는 지도자나 또는 어학에 뛰어난 지도자들을 많이 보유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 어떤 그룹도, 그저 원만한 수준의 이익 기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당내 동유럽 출신자들에게, 워싱턴 정가에서 준-각료에 이르는 직위를 할당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기독교 동유럽 출신의 민주당원들이 만들어 낸 첫 번째 가장 놀랄만한 승리는, 루즈벨트 취임 이후 채 9개월이 지나지 않아 찾아 온 것으로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승인한 일이었다. 윌리엄 라 바레[William La Varre]는 미 재향군인회보[the American Legion Magazine](1951년 8월호)에 "미국 역사에 있어서 모스크바의 붉은 편지의 날[Moscow's RED LETTER DAY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제목의, 사실에 입각한 장문의 글을 썼는데, 이 글에는 미국 외교 정책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설명들이 들어 있다. 라 바레에 따르자면 당시 미국 외교는 "음흉한 미소의 리트비노프[Litvinov](Maxim M. Litvionv, 1876-1951, 러시아 혁명에 참여, 소련 외무장관(1930-39), 주미 소련 대사(1941-43) 역임--역주)"와 "모두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1882-1965, 비엔나 태생으로 12세 때 뉴욕으로 이주, 미 대법관(1939-1962) 역임--역주)의 수하들인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1891-1967, 미 재무장관(1934-1945) 역임--역주) 그리고 딘 애치슨[Dean Acheson](1893-1971, 미 국무장관(1949-1953) 역임, 1950년 1월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 6.25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애치슨 선언'으로 유명--역주)"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도, 리트비노프의 태명은 월렉[Wallach]이었고, 그는 또한 핀켈슈타인[Finkelstein]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라 바레가 거명한 4명 가운데 3명이 이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로 모두 비-기독교 동유럽 출신들이었다. 네 번째 인물인 딘 애치슨은 "프랑크푸르터의 부하[Frankfurter boy]"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루이스 D.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 대법관의 법률 서기로 근무"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터 부하들" 가운데 주요 인물이었던 애치슨은 아메리칸 머큐리[American Mercury]지(뉴욕주, 뉴욕 16, 이스트 36번가 11번지[11 East 36th Street, New York 16, N.Y.]) 1952년 4월호[하톤: 이 잡지는 오래된 잡지로 이 주소는 맞을 수도 있고,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당신이 도서관에서 정확한 "판본"을 찾거나 하는 일에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에 실린 메인 기사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이 글의 저자인 펠릭스 위트너[Felix Wittner]는 기사 일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자유라는 대의'에 해를 끼친 애치슨의 기록은 최소 19년 전, 그러니까 그가 스탈린으로부터 급료를 지급받는 미국 변호사로 활동할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애치슨은 심지어 소련이 미국에 의해 승인되기 전부터도 스탈린의 급료 지불 명부에 들어 있었다.[하톤: 멈추십시오! 가서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부탁합니다.]

   

라 바레가 쓴 기사는 다른 어떤 글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글에서 F.D. 루즈벨트가 어떻게 라틴 아메리카를 배신하여, 공산주의가 이 곳에 뚫고 들어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련 정부 승인'이라는 기본적인 사항을 염두에 둔 채, 다음 중요한 인용 글을 보기로 하자. :

   

[인용 : La Varre]

   

바로 모스크바의 특수 요원이자, 붉은 광장의 악명 높은 국제 조직[Red Square's nefarious international machinations]의 정치 위원[Commissar]이며, 미 대륙 공산화라는 크렘린 계획의 총 책임자였던 루즈벨트는, 한 밤 중, 백악관 미국 대통령 좌석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지난 기만의 14년 동안, 붉게 물든 크렘린은, 미국 내에, 외교 면책 특권으로 보호받는 공산당 전진기지를 만들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4명의 대통령들--윌슨[Wilson], 하딩[Harding], 쿨리지[Coolidge](1872-1933, 미 제 30대 대통령(1923-29)--역주), 그리고 후버[Hoover]--이 모스크바의 무신론적 사상 또는 그 매개물을 수용하는 일을 거부했다. 그러나 여기 마침내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대통령이 나타났던 것이다.

   

유서 깊은 국무부, 미 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 그리고 미 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등에 소속된 많은 애국자들과 저명 인사들은 미국을 새로이 이끌게 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사악하고, 위험하며, 무신론에 기반한 '손님'을 받아들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주지 말 것을 탄원했다.--소련에서 오는 '손님'과는 악수도 하지 말고, 자국민들의 피로 붉게 물든, 모스크바로 되돌려 보낼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자신의 새로운 권위에 대한 도전에 분개했으며, 지식인들이자 자유주의자들인 양 행동하나 실상 막시즘과 파비언 사회주의(혁명보다 점진적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운동--역주)를 신봉하는 자들--그리고 과격 노조, 대학, 아첨하는 관료들--의 주장에 보다 경도되어, 크렘린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안에 결국 서명했다. 의회 승인도 없이, 그는 미국내 공산주의 대사관과 영사관들의 설립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소련과 체결하여, 완전한 외교적 환대과 특권을 '스탈린의 요원들[Stalin's agents]'과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들에게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1933년 11월 16일(미소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역주)--한 밤 중! 이 날이야말로 미국 역사상, 우리 후손들이 오랫동안 겪게 될 비극의 원인이 제공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 날은 바로 에스토니아의 약탈자이자 영국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크렘린이 파견한 첫번째 요원이기도 했던, 소련 외교부 정치 위원, 막심 리트비노프[Maxim Litvinov]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함께 미 국민과 우리의 광대한 자원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국가적 재앙이자 전 세계적 재앙의 가장자리로 몰고 가게 될 계약, 사회,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게 될 계약, 바로 딘 애치슨과 헨리 모겐소가 이미 철저한 예비작업을 해 두기도 했던 계약을 맺게 된 날이었다...

   

크렘린과 거래할 경우 미국이 갖게 될 불리한 점들에 대해, 가장 잘 요약된 사실 자료들, 폭넓은 분석들, 경찰 기록들, 그리고 군사 정보들이 워싱턴에 자발적으로 몰려 들었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루즈벨트는 헨리 모겐소와 딘 애치슨, 둘 다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부하들이기도 했던, 이들에게 소련과 미국간의 교역 기회에 대한 "연구"를 맡겼으며, 소련과의 "우의"로부터 미국 국민들이 얻게 될 이득에 대해 설명한 그들의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이에 대해 칭송해 마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자면, 소련의 지속적인 표리부동적 태도를 폭로하는 문서들을 수령했던 코델 헐[Cordell Hull](1871-1955, 1933-44간 미 국무장관 역임--역주)은 모스크바에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맺은 외교관계를 철회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루즈벨트는 미 국무부의 "재조직"을 시작했으며, 반-공산주의 이력을 가진 관료들을 --멀리 떨어진 고립된 직위로-- 좌천시켰다.

   

1933년 11월 루즈벨트-스탈린 계약은, 비단 국가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 전반에 걸쳐 보더라도 너무나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갖게 된 손실과 부채들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향후 수 세대에 걸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크렘린이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갖게 된 이득과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는 1951년인 이제 와서야--우리의 수도에 소련 대사관이 설치되고, 그들의 비밀 요원들이 전 미국을 돌아다니게 된 지 18년이 지난 이제 와서야-- 겨우 국민들이 인식하게 되었다.[하톤: 학생들이여, 당신들은 아직도, 당신들 사랑스러운 미국인들을 괴롭히는 소련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글은 이미 40년도 넘은 글입니다!]

   

악마를 칭송해 온 미스터리한 우호관계를 통해, 그리고 기만과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미국적 타협[un-American compromises]을 통해, 우리는 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시대를 보내 왔다. 당시의 지도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죽었으며, 그들 무덤의 기념비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 위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을 잇는 다른 이들이, 다시금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죽은 자들이 누렸던 전략적 직위에 올라서는 일이 계속 허용되어 왔다.

   

[인용의 끝 : La Varre]

   

라 바레가 미재향군인회보에 실은 기사에서 묘사된 형태의 정부 아래, 다수의 새로 도착한 이민자들, 최근에 귀화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동료들이, 지명에 의해, 혹은 임용 시험을 통해, 국무부에, 대통령 보좌직에, 그리고 기타 여러 정부내 민감 직위에 침투해 들어 왔다. 이 기간 워싱턴에 둥지를 튼 자들 가운데는 단지 동유럽 출신의 좌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원래의 미국인들 가운데 사실상 공산주의로 전향한 자들, 또는 아예 공산당에 가입한 "변절자들"도 있었다. F.D.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항상 근심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이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에 대해서는 늘 확고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전 하원의원이자, 원내 비-미국적 행위 조사 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1969년 국내 안보 위원회로 개명되었다가 1975년 폐지되면서 기능이 법제사법위원회로 이관--역주) 위원장이었던 마틴 다이스[Martin Dies](1900-1972, 텍사스 출신 민주당 소속 하원 의원(1931-45)--역주)는 여러 차례 연설(그 중 한 번은 저자인 내가 직접 듣기도 했다. 1950년)을 통해 다음 사실을 증언했다. :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소환되어 몇 번이나 백악관에 불려 갔으며--루즈벨트는 큰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 때마다 '공산주의자들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다이스의 완고한 태도에 대해, 루즈벨트가 제시한 최고의 논거는 "우리는 그들의 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유사한 주제에 대한 다이스의 연설(1951년 5월 17일)은 미국 유산(헤리티지) 보호 위원회[the American Heritage Protective Committee]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다.[하톤: 이건 헤리티지 재단[The Heritage Foundation]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위원회는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 601 베델 빌딩[601 Bedell Building., San Antonio, Texas]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백악관이 정부내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한다'는 제목의 다이스의 또 다른 연설은,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헤롤드 H. 벨드[Harold H. Velde]가 작성한 의회 기록물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 정부는 앞서 서술한 동유럽계 이민자 그룹과 공산주의에 물든 자생적 미국인들로 구성된 "위험인물들"에 의해 침투당했지만, 이들이 다는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소위 말하는 "망명자들"이 즉시 미국에 도착했고, 이들은 '행정 명령'에 의해 정부내 민감 직위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시민권 취득이라는 공식 절차 없이, 그리고 그들이 유럽을 떠난 이유에 대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침투는 '행정 명령'을 통해 원활히 이루어 졌는데, 특히, '인종, 신념 또는 출신 국적'에 따라 고용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러한 행정 명령의 주된 근거로 사용되었다.

   

먼 유럽의 적대적 지역에서 온 망명자들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미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 가운데는 소련에 동정적인 정서를 가진 자들도 많았기에, 이들의 공직 고용을 허용하는 행정 명령은, 잠재적으로, 그리고 여러 측면에 걸쳐 보았을 때, 너무나도 역력한, 국가 안보에 대한 치명타가 될 일이었다.

   

거의 '보안에 반하는 더블 체크'의 일환으로, 새로운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대한 보안 유지 임무는 F.B.I의 전문가들 손에 맡겨진 게 아니라, 원자력 담당 관료, 자신들에게 맡겨졌다. 이 문제에 관한 그들의 상대적인 경험 부재와, 또 외국인들의 관료 고용에 대단히 관대했던, 놀라운 '행정 명령'에 비추어 봤을 때, 비밀 원자 폭탄 기술 도난 사건에 대해서는 원자력 담당 관료들 보다가는 차라리 이들을 그 자리에 임명한 "중도좌파" 행정부가 비난을 받아야 할 문제였다. 원자폭탄 비밀을 알아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가운데는 유명한 외국인인, 영국 출신의 클라우스 푸흐스[Klaus Fuchs](1911-1988, 이론물리학자, 미, 영, 캐나다 공동, 원자폭탄 연구(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비밀을 빼돌려 소련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스파이--역주)--그러나 그는 영국 태생이 아니었다--가 있었다. 다른 원자력 스파이들도 모두다 외국인이거나 혹은 외국인들과 연계된 인물들로 모두 이미 예전부터 거명되던 인물들이었다.

   

원자력 에너지 연구에 고용된 자들 다음으로, 어쩌면 '미국 공공 건설 근로자 연맹[the United Public Workers of America]'에도 미국 국방에 치명적인 비밀을 훔쳐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주어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맹에는 다수의 동유럽 출신자들,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파나마 운하 건설의 책임 관리자였던 레오나르드 골드스미스[Leonard Goldsmith]와 로버트 바인슈타인[Robert Weinstein]도 있었는데, 둘 다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된 인물들이었다. 이 연맹--주요 조직이 워싱턴에 있었다--은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지배적이라는 이유로 C.I.O.(미국 산업별 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역주)에서 쫓겨 났다(1950년 3월 1일). 그렇지만 만약, C.I.O가 소속 회원들을 보호해 주듯이, 미국 정부가 이 단체를 보호해 주었더라면, 이 사실은 본 저자의 주목을 피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유럽 이민자들의 미국 정부 내 침투는 점점 더 부풀어 올라, 급류를 형성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으며, 또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목표에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정확히 그 반대가 참이라고 언급하거나 암시하지도 않아 왔다. 저자의 목적은, 동유럽 출신의 사람들 또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근간을 형성하던 시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최근에 와서, 그들은, 루즈벨트-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 내에서 가장 전략적인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 정책 형성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종종 결정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실 W.M. 키플링[W.M. Kiplinger]이 자신의 책, '워싱턴은 저것과 같다[Washington is like that]'(하퍼 & 브라더스[Harper & Brothers]사, 1942년--역주)에서 처음 끄집어 낸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는 '워싱턴에 있는 유태인들에 관한 사실들[The facts about Jews in Washington]'이라는 글에서, 이 내용을 요약해 두었는데, 이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은 1942년경, 재무, 인사 그리고 법무와 관련된 정부 각 부처와 기관에서 그 수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내 비-유태계 관료들이 대통령의 명령 아래에서" "다양한 정부 기관에 더 많은 유태인들을 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동유럽 출신, 또는 그 기원와 이데올로기에 있어 동유럽계 인물들의 영향력은,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활동하던 때에 정점에 달했다.(그 이후로도 죽 계속되었다.) : (1951년 중반까지)미국의 대유럽 정책을 주도했던 밀턴 카츠[Mr. Milton Katz](1907-1995, 하버드대 법학 교수(1940-78), 1933년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정책 시행 당시 참모 역할을 했으며, 진주만 사건 이후에는 '전시 물자 생산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 1950년에는 유럽 재건 문제에 깊이 관여--역주) ; 미국 육, 해, 공군의 인력 수급을 책임졌던 안나 로젠버그[Anna Rosenberg](1902-1983, 전시 인력수급 위원회 위원장(1942-1945), 미 국방 차관보(1950-1953) 등 역임--역주) ; 군수물자 관리 책임자였던 맨리 플레이셔먼[Manly Fleischman](1908-1987,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전시 물자 관리 책임관으로 임명, 1952년 주 인도네시아 대사 역임, 1969년에는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가 '공공교육 주립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역주) ; 그리고 임금 안정화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나탄 P. 파인싱어[Nathan P. Feinsinger](1951년 8월 30일자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1902-1983, 위스콘신대 법학교수, 국가중재위원회 위원장(1943-44), 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1945-47), 임금안정화위원회 위원장(1951-53) 등 역임--역주). 마찬가지로, 1948년 10월, 트루먼 대통령은 뉴욕 출신의 변호사이자 '국가 유태인 복지 위원회[the National Jewish Welfare Board]' 의장이었던, 프랭크 L. 웨일[Frank L. Weil]을 "군대 내 종교, 도덕 관련, 복지 정책 지도 위원회[committee on religious and moral welfare and character guidance in the armed forces]" 위원장에 임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하자르계[Khazar] 또는 유사한 배경이나 연관성을 가진 인물들이 영국 사회주의 소수파 정부 내에서도, 레옹 블룅[Leon Blum](1872-1950, 중도좌파 정치인, 3차(1936-1937, 1938.3-1938.4, 1946-1947)에 걸쳐 프랑스 국무총리 역임--역주)을 필두로 한 프랑스 정계에서도 눈에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엠마누엘 신벨[Rt. Hon. Emanuel Shinwell](1884-1986, 애틀리[Attlee] 노동당 정부하 국방장관(1950-51) 역임--역주)과 쥘 모끄[Jules Moch](1893-1985, 프랑스 제4공화국(1946-58) 당시 8차례에 걸쳐 장관 역임, 공공 건설 및 교통장관(1945-47), 내무부장관(1947-1950), 국방장관(1950-1951) 등--역주)--패탱 장군[Marchal Petain](1856-1951, 프랑스 비시[Vichy] 정부(2차 대전 당시 독일과 협력) 당시 국가 수반(1940-44)--역주)의 적--가 그들로, 이들은 최근 각각 영국과 프랑스 내각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 미국에서 비-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자들이 민주당에 가입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벨은 영국에서 좌파 노동당에 가입했다. 1951년 여름, 영국 하원에서 노동당 의원들 가운데만 21명의 유태인들이 있었으며, 보수당 의원들 가운데는 없었다.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 영국 노동당 당수(1935-55), 총리--역주)는, 그의 인종적 배경이 어떻든 간에, 오랜 기간 영국 "노동"당["Labor" Party] 당수이자 사회주의 총리(1945-1951)로 활동하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인물[a Communist sympathizer]로 여러 해 동안 국제적인 악명을 날렸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 공산주의 연대[the international Communist force] 병력의 일부로 참전한 "영국 부대[English company]"를 방문하고, 그들을 칭송했다.

   

높은 직위나 전략적 직위 또는 양쪽 모두에 걸친, 동유럽 출신 또는 배경을 가진(또는 그러한 배경의 인물들과 관련된) 몇몇 인물들은, 그들이 가진 유명세로 인해, 저자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거론되었으며,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도 다시 거론될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한가지--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들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없으며, 또 그렇게 여기는 것이 일부러 의도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하톤: 아직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국회의원들와 여러 참모진들, 기타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그 의도에 있어서 하자르계 시오니스트들[Khazarian Zionist]이며,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까? 미국 국회는 통제되고[CONTROLLED] 있습니다. 독자들이여--당신이 선한 자이건, 악한 자이건, 혹은 다른 그 무엇이건 간에. 나아가, 미국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적 가치 아래 탄생한 국가이지만, 당신들의 국회는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Christian" stance]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미국이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퇴폐 국가가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도덕은 "남부"로 내려 갔습니다. 어제 내가 "아메리카[America]"는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나라는 '타락의 국가[state of degradation]'가 되었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명 미국인들 목록 가운데, 어떤 목록에서든 처음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비엔나 태생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여야 할 것인데, [하톤: 잘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이 글은 1951년에 쓰여졌으며, 그간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고위직에서의 조작과 대체는 끝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는 20세기 중반, "청교도주의 혈통"이 유지되던 자리를 '빛나는 하버드 대학의 광채와 상징'으로 대체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버드 법대 교수직을 그만둔 후, 프랑크푸르터 박사는 대법관이 되었으며, 법률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걸쳐서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이 나라의 국가 정책 결정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전 분야 걸쳐서 최고 수준으로 발휘되었다. 카톨릭 월드지[The Catholic World] 편집장인 존 P. 시어린 목사[Rev. John P. Sheerin]는, "나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가 다른 누구보다도 워싱턴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고 썼으며, 시카고 트리뷴[The Chicago Tribune]지를 소유한, 장로교파의 로버트 R. 맥코믹 대령[Robert R. McCormick] 역시 유사한 견해를 표명했다. 사실상,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미국의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언급된다. "당신은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사진을 보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이후, 프랑크푸르터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유머"이기도 하다.[하톤: 일종의 빌러리[Billaries] 같은 것인가요?(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영향력을 의미--역주)]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참모로서만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전략적 지위에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들을 지명하는 일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위 말하는 "프랑크푸르터의 부하들[Frankfurter's boys]"에는, 날씨가 좋으면 항상 같이 산책을 하곤 했던 애치슨[Mr. Acheson]을 포함하여 ; 앨저 히스[Alger Hiss](1904-1996, 변호사, 1933-1946년간 미 법무부, 국무부 등에서 근무, 1948년 소련 스파이로 판명--역주) ; 리 프레스먼[Lee Pressman](1906-1969, 노동 변호사, 1933-1936년간 미 농무부, 공공산업진흥국, 중재위원회 등에서 근무--역주) ; 장기간 트루먼 대통령의 고위 참모로 일했던 데이비드 닐스[David Niles](1988-1952, 1942-1951년간 루즈벨트 정부와 트루먼 정부에서 연달아 정치 참모로 근무--역주) ; 장기간 국무부 참모로 일했던 벤자민 V. 코헨[Benjamin V. Cohen](1894-1983, 1933년 뉴딜정책 시행 시기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정부 참모로 근무--역주) ; 장기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데이비드 릴리엔탈[David Lilienthal](1899-1981, 테네시 개발 기구[Tennessee Valley Authority](1941-46) 및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1946-50) 위원장--역주) ; 존 J. 맥클로이[John J. McCloy](1895-1989, 국방차관보(1941-45), 세계은행 총재(1947-49) 등 역임--역주) ; 조 라우[Joe Rauh](1911-1992, 미국 인권변호사--역주) ; 나탄 마르골드[Nathan Margold](연대미상, 변호사, 루즈벨트 정부 시절 내무부 법무 참모--역주) ; 앨저 히스의 동생이자 "현재 애치슨 법률 회사 간부[now a member of the Acheson law firm]"로 있는 도날드 히스[Donald Hiss](1906-1999, 1936-1945년간 국무부에서 근무--역주) ; 밀턴 카츠[Milton Katz](1907-1995, 1940-78년간 하버드 법대 교수--역주) ; 그리고 전직 국방장관이자 "100% 프랑크푸르터의 사람"인 로버트 패터슨[Robert Patterson](1891-1952, 1945-1947년간 미 국방장관 역임--역주) 등이 있었다.(이 단락에서 인용된 모든 인물들은 드루 피어슨[Drew Pearson](1897-1969, 미국 저널리스트--역주)의 칼럼(1950년 2월 1일자)에서 따온 것이다.)

   

막강한 힘을 누렸던 정부 관료 중에는 러시아 태생의 이사도르 루빈[Isador Lubin](1896-1978, 경제학자, 대통령 경제정책 보좌관--역주)도 있었는데, F.D.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계 수치 해석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종종 그를 부르곤 했다.("루브에게 보내[Send for Lube]"에서 인용) ; 이어서 그는 UN에서 미국을 대표하기도 했다. 또 한 명의 러시아 태생 관료였던 레오 파스볼스키[Leo Pasvolsky](1893-1953, 경제학자, 국무부 근무, 전후 계획 입안, UN 헌장 초안 작성 등에 중요 역할 담당--역주)는 국무부에서 장기간 요직을 두루 맡았는데, 1944년에는 "전후 프로그램 위원회, 집행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5-46년간에는 "국제 기구와 안보 문제"를 담당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아주 가까웠던 다른 인물들 가운데는 사무엘 로젠먼[Samuel Rosenman](1896-73, 변호사, 판사, 민주당 정치인--역주)도 있었는데, 그는 "특별 참모"로 여러 차례에 걸쳐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는 재무장관으로서 악명높은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독일 산업의 잠재력을 말살시키려는 계획이었으나 미실현--역주)의 입안자였다. 허버트 레만[Herbert Lehman](1878-1963, 민주당 정치인, 뉴욕주지사(1933-1942)--역주)은 1943년에서 1946년간 UN 구제부흥국(UNRRA)[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사무총장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조달되었던 기금(주로 미국으로부터 조달되었다.)의 대부분은,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결과에 따라 이내 소련 위성국이 되고 말 국가들을 돕는데 전용되었다.

   

최근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내 전략적 직위들은 동유럽 출신 인물들, 또는 이들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조하는 인물들이 차지해 왔는데, 대개 각 부처 차관보급[Assistant Secretaryships] 인사들이 그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국방성, 법무부(관세청과 법무차관 사무실), 노동부의 민감 직위들에는 현재 이들이 재직 중에 있다. 주지사급 직위도 이들의 중요한 전진기지인데, 특히 알래스카(러시아로부터 3마일 떨어져 있다.)와 버진 제도[virgin Islands](파나마 운하가 근접해 있다.)(총독 관할--역주)가 그러하다. 기타 미 대통령 행정부[the 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주요 직위들 ; 국제 무역 및 지원 기구내 직위들 ;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직 ; 그리고 UN내 미 대표단 전체를 망라한 직위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유럽 출신 또는 이들과 연계된 인물들의 수는, 미국내 그들의 전체적인 인구 구성비에 비교해 봤을 때, 우리 정부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임명직 직위'에 있어서, 그 비율이 깜짝 놀랄 만큼 높다. 반면, '선출직 직위'에 있어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 구성비에 비추어 봤을 때, 깜짝 놀랄 만큼 낮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미국내 전략적 직위에 있어서 동유럽 출신 또는 이들과 연계된 인물들이 높은 비율로 '임명'되어 있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떤 통제력이, 어떤 통제적 의지[controlling WILL]가 여기 반영되어 있는 것인가?

   

[인용의 끝: John Beaty]

   

하톤: 그렇습니다. 이 글은 깁니다. 그러나 국민들이여. 당신들 전체의 생존이, 지금껏 당신들의 정부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정부는 지금, 새로운 미국 헌법[New States Constitution](피닉스 저널 제 15권 참조--역주)을 통해, 그리고 UN 단일 세계 질서[the United Nations One World Order]를 통해, 당신들을 완전히 통제하려 드는 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생존"을 위해 남겨져 있는 유일한 것은, 이제 당신들의 '결정'일 뿐입니다.--헛간의 문은 이미 잠겼습니다. 가축들은 달아났고 당신들만 남았으며, 이제 헛간은 불타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옳은 길을 가십시오. 그리고 준비되어 있기 바랍니다!

   

Salu.

   

   

피닉스 저널 제 78권, "The Iron Trap Around America" 제 2장, pp. 11-28.

http://phoenixjournals.wavenews.net/content/94-제078권-하자르계-유태인들의-미-정부-침투사

   

   

 물론 인드라는 피닉스저널에 대해서도 78 : 22로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피닉스저널도 국유본의 촉수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피닉스 저널의 브랜다이즈 기사를 올린 것은 일단 브랜다이즈에 대한 주류 평가가 광란적일 정도로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두 가지 지점에서 브랜다이즈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하나, 브랜다이즈를 유명하게 한 것이 뉴헤이븐 철도 싸움이었다. 이때, 상대는 놀랍게도 모건이었다. 결과는 브랜다이즈의 승리. 모건 측은 뉴헤이븐 철도 담당자를 해임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 보면, 풀뿌리 싸움인 듯하지만, 그 이면은 그렇지 않다.

   

바로 이 시기 브랜다이즈는 평범한 유태인이 아니라 평범한 법조인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 윌슨과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윌슨의 경제 자문일 뿐만 아니라 연설문 작성까지 담당했다.

   

이 정도면 눈치깠는가. 모건과의 투쟁은 한마디로 위장 투쟁이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모건 덩치에 비해 피해입은 바는 없다. 오히려 모건은 유태인 브랜다이즈와의 투쟁으로 로스차일드와 완전히 결별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모건을 로스차일드의 하수인이라고 하면 브랜다이즈의 투쟁을 보라. 브랜다이즈는 유명한 시오니스트잖아. 그런 그가 모건을 공격했다고. 윌슨도 모건 공격에 공감을 했다더군. 미국 연방준비은행 설립에는 로스차일드의 개입이 없는 것 같군~!!! ㅋ

   

이런 것이 하우스 대령의 기획일까?

   

둘, 브랜다이즈는 평범한 유태인이 아니라 세계적인 시오니스트이다. 차후 소개할 주요 유태인 조직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지도할 정도로 명성이 높던 시오니스트이다.

   

   

"In 1919 he broke on issues of structural organization and financial planning with Chaim Weizmann, the leader of European Zionism. Weizmann defeated Brandeis for power and in 1921 Brandeis resigned from the Zionist Organization of America, along with his closest associates Rabbi Stephen S. Wise, Judge Julian W. Mack and Felix Frankfurter. He remained active in philanthropy directed at Jews in Palestine. In the late 1930s he endorsed immigration to Palestine in an effort to help European Jews escape genocide when Britain denied entry to more Jews.[49]"

http://en.wikipedia.org/wiki/Louis_Brandeis

   

   

1910년대 브랜다이즈는 시오니스트 조직을 열 배 이상 확장시키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국제적으로도 벨푸어 선언 등에 영향을 끼쳤다. 헌데, 그가 1919년에 역시 세계적인 유태인 지도자인 와이즈만에게 비판을 받는다. 비판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지도적 위치에 커다란 손상을 입을 정도로 타격을 받는다.

   

유태인 조직간 갈등 문제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겠다. 1910년대는 유태인 시대, 1920년대는 안티 유태인 시대? 바로 이러한 것이 국유본이 짜놓은 알파 오메가 프로그램이 아니겠는가. 이차세계대전이 무르익기 시작하였는데, 일차세계대전 끝나고서부터이니 준비 기간만 이십년이었던 셈이다.

   

와이즈만하면 한국에서는 천재수학교육 사설기관으로 알려졌는데, 바로 그 와이즈만이 유태인 와이즈만이다. 브랜다이즈하면 미국 명문학교고~!

   

끝으로 국유본이 브랜다이즈를 활용한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가 아니었을까. 이는 언뜻 보면 좋은 것 같은데, 국유본 입장에서 보면 보다 명확하다. 자본의 분리로 미국 자본이 로스차일드 자본보다 커질 일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산분리.

이건 사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한 법이다.

허나, 록펠러가 이를 뚫고 권력 교체를 하였으니

하늘이 정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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