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밀당 - 시대정신, 유니테리언, 그노시스, UFO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5 03:22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328464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7 : 신과의 밀당 - 시대정신, 유니테리언, 그노시스, UFO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월드리포트 12/04/05

   

   

인드라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 60~70%는 주식, 환율, 부동산, 경제 전망 등 경제 문제 때문이지만, 20~30%는 영성 문제 때문이다. 하고, 10% 정도가 시사, 역사, 음모론 등 정치 문제이다. 

   

영성 문제 주요 검색어로는 '시대정신', '시대정신 비판', '뉴에이지', '뉴에이지 비판'이다. 

   

해서, 오늘은 인월리에서 언급했던 다큐 시대정신(Zeitgeist) 비판을 재정리하면서 영성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다큐멘터리 시대정신(Zeitgeist) 비판 

   

'시대정신(Zeitgeist)'은 2007 할리우드 활동가영화 페스티벌 최우수 특집 다큐멘터리 상 수상작이다. 3부작인 이 영화는 현재 인터넷에서 자유로이 공유할 수 있다. 과거의 시대정신(1부 : 기독교), 현재의 시대정신(2부 : 9.11 테러), 미래의 시대정신(3부 : 금융위기 및 세계정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2007년 헐리웃 활동가 영화 최우수상을 받았다? 주지하다시피 헐리웃은 시초부터 지금까지 국제유태자본의 홍보 창구였다. 따라서 이는 국제유태자본이 승인한 사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니테리언-유니버설리스트 종교관?

   

1부에서 등장한 종교관은, 유니테리언 유니버설리스트 협회 쪽 사상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Unitarian_Universalism

   

일, 유니테리언 - 유니버설리스트 종교는 2007년 현재 미국 성인의 0.3%인 약 340,000명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헌데, 뉴욕 시티대학(City University)의 연구자 코시민(Barry A. Kosmin)과 라크맨( Seymour P. Lachman)의 조사에 따르면 유니테리언의 49.5%가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며(상대적으로 유대교인은 46.7%, 천주교인 20%, 몰몬교도 19.2%, 침례교도 10.4%가 대학을 졸업) 불균형적이지만 전 세계의 수준 높은 학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 5개 주의 주지사가 유니테리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미국 대통령 중 극소수파인 유니테리언이 사실상의 유니테리언인 제퍼슨을 포함하여 무려 5명이나 된다.

   

   

   

미국 역대 대통령 종교

http://www.infoplease.com/ipa/A0194030.html

   

   

미국 독립 후 초기 대통령 종교관만 보면, 누가 미국을 청교도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 영국 종교인 국교회(성공회)이거나 유니테리안이다. '이신론자'라고 나오는 토머스 제퍼슨도 유니테리언에 경도된 프리메이슨적 신앙이었다. 

   

'시대정신' 영화에서는 곧잘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 인용된다. 헌데, 제퍼슨의 멋들어진 말이 과연 실생활에는 얼마나 실천이 되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부자로 태어난 조지 워싱턴, 오직 땅과 노예만을 보고 정략 결혼한 조지 워싱턴, 친구의 부인과 25년간 불륜을 저지른 조지 워싱턴, 사생아만 최소 10명이 된다는 조지 워싱턴, 남한 크기의 땅을 매입하고도 모자라 정치활동 중에도 땅 투기에 나섰던 조지 워싱턴, 결국 땅과 노예가 많은 탓에 총사령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 노예 3천명을 소유한 조지 워싱턴, 아편 농장을 운영했던 버지니아 출신 조지 워싱턴.

   

당대 조지 워싱턴만큼 독보적이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가 있으니 토머스 제퍼슨입니다. 세상에 눈 뜰 때부터 부자였던 토머스 제퍼슨, 정략  결혼이기는 마찬가지인 토머스 제퍼슨, 최소 2명의 유부녀와 바람이 난 토머스 제퍼슨, 무엇보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흑인 노예를 범한 토머스 제퍼슨, 혼혈아를 낳고 방관한 토머스 제퍼슨, 정적들의 음모일 뿐이라 일축하다가 현대 과학으로 들통이 난 토머스 제퍼슨, 조지 워싱턴에게는 안 되어도 여타 노예주들보다는 월등한 200명의 노예를 보유했던 토머스 제퍼슨, 역시 아편 농장을 운용했던 버지니아 출신 토머스 제퍼슨.

   

오!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들에게 갓뎀 오브 아메리카라는 조승희 난사가 함께 하기를!"

http://blog.naver.com/miavenus/70036232852

   

인드라가 '조승희 난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기에 인드라가 워싱턴, 제퍼슨 비판하면 '정보 택배' 에셜런(세계적 스파이망)이 곧바로 '조승희적 난사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일까. 우연이면 다행이되, 아니라면, 다른 경로가 있는가. 

   

삼, 이들은 예수의 실재를 시대정신 동영상처럼 부정한다. 정통파 크리스천이 주장하는 신으로서의 예수도 부정하며, 자유주의파 크리스천이 주장하는 역사적인 예수도, 인간으로서의 예수도 부정한다. 그들은 예수 신화가 시대정신 동영상처럼 이집트 신화에서 비롯된 가짜 신화이기에 예수는 실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골드스타인 프로젝트?

   

시대정신은 현실을 여전히 은폐하고 있다. 시대정신 전편에서 그 의도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시대정신 후속 편에서 국제유태자본은 보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후속편에서도 역시 종교 비판이 진행된다. 왜 시대정신은 종교 비판에 그토록 목을 매달까. 만일 종교 비판 없이 통화 기반 경제체제 비판에만 집중하였더라면 보다 광범위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종교 비판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드라는 이를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따온 '골드스타인 프로젝트'로 명명하고자 한다.

   

골드스타인 프로젝트의 목표는 무엇인가. 인드라는 역설적으로 시대정신의 진정한 의도가 통화기반 경제체제를 해체하기 위함이 아니라 강화하고자 하는 알파오메가 중 오메가 전술이라고 보고 있다. 비판이 오히려 체제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해서, 이 역시 프리메이슨 운운처럼 국제유태자본의 자기 방어 프로그램이라고 보고 있다. 

   

시대정신 후속편을 본 대다수 사람들은 단지 시대정신만을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정신의 일부 내용이 설령 설득력이 있을 지라도, 그것이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종교 비판에 비롯된 것이기에 오히려 더 현존 체제를 지지해야 한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드라가 주장하는 국제유태자본론조차도 눈 감게 만들 수 있거나 도매급으로 비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드라 주장 역시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어떤 것으로 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유태자본은 국제유태자본을 비판하는 정치적 지분마저도 자신이 장악하고자 한다.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 이상한 경로로 교수가 된 유태인 촘스키더러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들 한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해체되자 맑스레닌주의 사회운동을 대체한 신사회운동이 나타났다. 신브레튼우즈체제를 대체한 신자유주의와 같은 맥락이다.

   

헌데, 틈만 나면 대한민국을 씹고, 삼각위원회를 예찬하는, 국제유태자본의 알파오메가 전술의 오메가 하수인이며 정신나간 유태인 노엄 촘스키를 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2002년 1월, 노엄 촘스키는 뉴욕의 한 강연에서 한 관중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911테러에 미국정부의 일부가 공모했다는 믿을 만한 증가가 있나요?", 그의 대답 : " 그건 인터넷 이론일 뿐이고 절망적일 정도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얘기에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얘기라서 저는 그와 같은 얘기에 대해 논하는 일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봐요."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930185

   

   

   

   

   

비너스 프로젝트?

   

이 동영상에서 유익한 점 하나는 있었다. 불과 수천 명의 시위를 전국적인 시위로 공작하여 정권 흔들기를 시도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미국 쇠고기 사태 시위 배후에 국제유태자본이 있다는 가설에 보탬을 주는 자료이기도 했다.

   

이외에는 국제유태자본에게 실망한다. 이런 허접한 비너스 프로젝트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대학 학부를 나온 수준이라면 시대정신 동영상 보면서 아, 굉장한데 하다가 막판 대안으로 내세운 비너스 프로젝트를 보고서 다들 뭥미? 했을 듯싶다. 자끄 프레스코 개인만 보면 훌륭한 인물로 보인다.

   

http://en.wikipedia.org/wiki/Jacque_Fresco

   

허나, 그들이 주장하는 국제유태자본에 대한 행동 수칙에는 미소를 금할 수 없다. 국제유태자본이 장악한 은행 계좌가 있다면 다른 데로 옮기란다. 허나 역사적인 선례로 보면, 금융위기 때는 오히려 국제유태자본이 장악한 은행 계좌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게다가 실제로 통화되는 통화량이 3%밖에 안 된다. 즉, 통화량 대부분을 국제유태자본이 장악한 마당에 설령 이 운동에 동참해서 상당수 시민이 계좌를 변경한다고 해도 달라질 바가 거의 없다는 게다. 직장을 관두라고? 왜 관두나? 쫓겨나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순진하게 말 듣고 회사 그만 둔 이들이 지금 노숙자가 되어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다. 하고, 비너스 프로젝트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해서, 허망하다고 여기는 게다. 대안이란 곧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이런저런 유토피아적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비너스 프로젝트가 잘 되어서 공동체가 일부 지역에서 국가적 수준이 되었을 때, 이 공동체를 국제유태자본이 공격하지 않고 잘 해봐라, 라고 여길 근거가 무엇이 있는가. 그러자면,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비너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주인이 록펠러이므로 다른 세계는 가능한 게다.

   

   

   

   

   

   

시대정신이 종교 비판을 고수하는 이유

   

진실이 어떠하든 나는 처세가 좋아, 실리가 좋아 하는 이들에게는 진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허나, 일부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다. 설사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의 끝'을 보고픈 사람들이 있다. 이들 때문에 시대정신이 종교 비판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들마저도 국유본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인드라는 이처럼 시대정신 동영상을 비판하여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미네르바 절필 이후 가짜 미네르바 소동도 일어나고, 미네르바가 말한 대로 주가가 747 등 폭락하는 것이 아니라 인드라 말대로 주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네르바는 시대정신 동영상을 추천하였지만, 반대로 인드라는 시대정신 동영상을 비판했던 것이다.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이제 문제는 인드라이다. 시대정신을 비판하는 인드라를 높이 살만하다. 허나, 국유본은 알파오메가 전략을 늘 취한다. 국유본이 시대정신과 미네르바 대신 인드라를 선택한 만큼 인드라는 신뢰할만한가?

   

이 질문은 인드라는 영지주의자인가로 물을 수 있다. 

   

인드라는 답한다. 아니다.

   

하면,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1966년이탈리아 메시나에서 영지주의 체계들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여러 목적 가운데는 최근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를 번역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과 '영지주의(Gnosticism)'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 합의를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그노시스적(gnostic)'이라는 용어를 이 용어의 기원이 함의하는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철학과 종교 운동을 해석하는 분류 개념으로서 사용하는, 18세기 이래로 유행하고 있던 경향성에 대해 답하는 것이었다. 예들 들어, 1835년신약 성경 학자인 페르디난드 크리스천 바우어(Ferdinand Christian Baur)는 헤겔종교 철학에서 절정을 이루는 영지주의 발전 모델을 구성하였다. 문학평론가 하롤드 블룸(Harold Bloom)은 현대 미국의 종교에서 영지주의 요소들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에릭 보에겔린(Eric Voegelin)은 영지주의을 해석을 제공하는 렌즈로 사용하여 전체주의적인 충동들을 해석하였다. 크리스토프 마르크쉬스(Christoph Markschies)는 이 회의에서 합의된 영지주의에 관한 '신중한 제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메시나 회의의 결론 문서에서 제시된 제안은 '영지주의(gnosticism)'이라는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2세기의 특정 신앙 체계 그룹'을 가리키는 '역사적ㆍ분류적 방법'으로 사용하며, '그노시스(gnosis)'라는 용어는 '엘리트를 위한 신적인 신비의 지식'이라고 기술되는 '시대를 초월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 크리스토프 마르크쉬스, 《Gnosis: An Introduction》, 13쪽

이 제안이 뜻하는 바는 '영지주의(Gnosticism)'은 3세기에 유행하였던 그노시스적 운동을 가리키는 역사적인 의미의 용어로만 사용하며, 반면 '그노시스(gnosis)'는 '특권적인 엘리트를 위한' 어떤 지식 체계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로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용어들의 의미를 명확히 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사실 더 많은 개념상의 혼란을 야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인 용어인 '영지주의'은 완전히 현대에서 만들어진 말인 반면 새로운 일반 용어인 '그노시스'는 오히려 역사적인 용어'였기' 때문이다. 즉, 고대 신학자들이 "그노시스"라고 불렀던 것이 이 회의로 인해 "영지주의"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역사적인 의미로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개념이 메시나 회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93] "

   

   

   

   

http://ko.wikipedia.org/wiki/%EC%98%81%EC%A7%80%EC%A3%BC%EC%9D%98

   

   

용어 혼란 전술의 목적은 짝퉁이 원조가 되기 위함이다.

   

국제유태자본의 그간 영성 부문 목표는 기독교 문명을 극복하는 것이다. 하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전대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여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전전왕조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후예를 자칭하는 것이다. 촉을 세운 유비가 한나라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하여, 기독교 문명 이전의 문명을 찾아서 그 문명의 후예를 내세워야 하는 것이다.

   

해서, 찾아낸 것이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이요, 그노시스 철학이다.

   

문제는 그들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건, 명분이 서지 않았던 게다. 왜냐하면,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 페르시아 문명은 물론 그노시스 철학까지 모두 종합 편집해서 등장한 것이 기독교 문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명은 선대 문명의 적자였던 게다.

   

해서, 선대 문명의 서자 격인 그노시스 철학을 내세우면서, '서자'인 측면을 부단히 희석하여 승자의 논리이니 뭐니하는 상투적인 공격을 하는 한편, 그노시스 철학이 기독교 철학보다 교리가 저열하여 '서자'일 수밖에 없는 면을 보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계승하면서 개혁한다는 변증법적 논리인 게다.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칸트, 헤겔에서 하이데거까지 독일 철학이 난해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그노시스 철학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난점을 피하느라 말을 빙빙 돌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맑스의 저술도 순진한 노동자와 꼴통 좌파들을 꼬시기 위해서 신비주의적 색채를 은폐시키면서 이야기해야 하기에 그때마다 세익스피어 등 문학적 용어를 총동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움베르코 에코는 소설에서 맑스를 중서부 유럽의 랍비로 표현한 바 있다. 

   

해서, 맑스가 자신의 저술에서 헤겔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부분이 오히려 맑스의 합리적인 핵심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가 이 때문으로 인드라는 보는 것이다. 맑스와 헤겔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흐르는 공통 분모는 그노시스이기 때문이다.

   

초점은 자신을 기원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데리다가 하이데거 비판에서 예리하게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해서, 용어 혼란 전술이 필요한 것이다. 옛날 그노시스는 영지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현재의 그노시스는 그대로 그노시스라고 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노시스의 긍정적인 면을 재발견하자는 취지인 게다. 오늘날 대부분이 써먹는, 심지어 인드라도 박정희를 내세우면서 써먹는, 계승과 개혁의 변증법적 논리인 게다.

   

과거의 김대중주의는 난닝구고, 오늘날 김대중주의는 중도다.

과거의 노무현주의는 노빠고, 오늘날 노무현주의는 진보다.

과거의 박정희주의는 수구꼴통이고, 오늘날 박정희주의는 중도좌파다?

   

실천론적인 면부터 이야기하니 혼동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면을 이야기하자.

   

"정통파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신앙 · faith)"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 "(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것에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8%81%EC%A7%80%EC%A3%BC%EC%9D%98

   

뭔 말이냐.

   

믿음과 앎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구원이라는 공통 목표가 있음에도 방법론에서 왜 이리 갈라지고 있는가.

   

   

   

   

영지주의적 앎이란 무엇인가.

   

"'영지주의(Gnosticism, 나스티시즘)'이라는 낱말은 현대에 만들어진 낱말이다. 하지만 이 낱말은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들어진 낱말이 아니다. 이 낱말은 고대의 언어적 표현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낱말은 '지식(knowledge)'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낱말인 '그노시스(γνσις, gnosis)'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노시스는 아주 특별한 형태의 지식을 의미하며, 이러한 의미는 원래의 그리스어 낱말의 정확한 의미와 그 낱말이 플라톤 철학에서 사용된 용법에 근거하여 도출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앎(knowing)을 구분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현대의 언어로는 서술적인 지식경험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술적인 지식은 다른 사람들이 한 진술이나 자신의 추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획득된 지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나는 조지 부시'에 대해' 알고 있다" 또는 "나는 베를린이 독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할 때의 지식이다. 그리고 경험적인 지식은 직접적인 참여 또는 직접적인 앎에 의해 의해 획득된 지식을 의미하다. 예를 들면, "나는 조지 부시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또는 "나는 베를린을 알고 있고 있는데, 직접 방문해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의 지식이다. 그노시스는 두 번째 종류의 경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문맥에서, '그노시스적(Gnostic)'이라고 말할 때는 일반적 의미의 서술적 지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divine)에 직접 참여함으로부터 온 신비적 또는 내부 밀교적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거의 모든 영지주의 체계들에서 구원에 도달하게 하는 직접적인 수단 또는 원인은 이러한 경험적 지식으로서의 '신을 아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영지주의의 일파인 오피스파(Ophites)에서는 그노시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금언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해지는 것의 시작은 인간을 아는 것이고 완전해지는 것의 완성은 신을 아는 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98%81%EC%A7%80%EC%A3%BC%EC%9D%98

    

왜 그노시스보다 베드로요, 베드로보다 바울인가. 일인 전승파와 다수 제자들 전승파인 소림, 무당파의 차이인 게다. 듣기만 해서는 그노시스 앎이 될 수 없다. 직접 경험해야만 그노시스 앎이 된다.

   

그노시스는 앎을 중시하되, 경험이다. 허나, 이 경험은 독특한 경험이므로 공유할 수 없다. 반면, 기독교 역시 앎을 중시하되, 경험을 승화시킨 믿음이다.

   

믿는 것이 그냥 믿어지는가. 절대 아니다. 믿음은 철학, 과학적으로는 요소로 분할해서 입증 가능해야 할 뿐더러 신학적으로는 보편타당해야 한다.

   

그노시스는 홀로 열 걸음 성큼 나간 지혜를 중시한다. 반면, 기독교는 열 사람이 한 걸음 나간 믿음을 중시한다.

   

해서, 오늘날 그노시스와 기독교 과제란 무엇인가. 기독교처럼 열 사람이 나서는 믿음이면서 그노시스처럼 열 걸음 나간 지혜를 찾는 것이다.

   

쉽지 않다.

허나, 그것이 인드라의 길이다.

길없는 길.

   

   

   

   

영지주의 비판

   

오늘날 영지주의 비판으로 알려진 비판은 그노시스 비판이다. 그노시스 비판이란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동시에 비판해야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금욕주의를 추구한다. 14세기 동방정교회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거룩한 고요함, 즉 침묵의 영적 체험을 중시했다. 지금도 요가나 심신수양과 같은 프로그램이 기독교식으로 이름만 바꿔달고 신자들을 유혹한다. 둘째는 카리스마, 즉 은사다. 잘못된 방법으로 은사를 받으면 엘리트의식에 빠진다. 남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거나 계급적 사고를 가지면 위험하다. 셋째는 상상으로, 이단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한다. 아전인수식으로 성경구절을 끌어다 쓰는 설교 역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688595&cp=nv

   

   

금욕. 은사. 상상. 실천론, 존재론, 인식론이다. 이 문제란 그 어느 하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 기독교, 그노시스 모두에게 해당하는 비판인 게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몇몇 이웃분들의 질문에 답변드린다.

   

   

   

리순신 :

선민사관은 위험합니다. 유태인들의 천재성 타령 그것도 일부 아닙니까?

   

선민사관이... 여기저기 존재합니다... 한국에도 있지요? 선생님께서도 어느 정도는 잘...아시리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내심... .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을 파멸시킵니다...!

남의 신격 남의 신성 남의 인성 남의 가치를... 두부 짜르듯 ...깍아내리고 보는 가치관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종족도 다르고. 카르타고 페니키아 궁정 귀족 유태. 천민 유태 카자르 뚜르끄 유태, 우르를 떠나 팔레스티나를 떠돌던 아브라함 유태, 아브라함 유태인들의 끝없는 신화 날조^^, 창작, 뻥 튀기기, 과장,- 어느 민족의 역사서도 거의 마찬가지겠지만,,,,

   

0.1 퍼센트, 0.01, 0.001 퍼센트의 광파시스트 개종 카르타고 유,태세력들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또 다른 0.1, 0.01, 0.00! 퍼센트의 유럽계 인간떨거지들. 그들을 미친듯 따라가는 세계의 그런 류의 유태 용병 자본주의 전사들, 서구 신앙 맹종주의자들 조폭 쪽바리 해적 일본왕, 조폭 북한 단군 팔어먹고 쪽바리 해적왕 마르크스 레닌이즘으로 위장하고 해쳐먹는 일성이 3 대까지...

신과 종교는 선일 것 같습니다.

   

과정이야 어쨌든...인간들이, 유태잡종인간들이,,,어떻게 비꼬아 놨든,,, 서양꼴통 노란색애들이 어떻게 기독교로 비틀어 놓고 인종사냥질을 해왔든,,,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대로... 신은 신, 잡신은 잡신일 따름 일겁니다.

   

신을 믿으면 선생님 말씀처럼 마자세...를 찾고 인류형제애를 구현하고 이웃끼리 서로 위하고 도와줄려는 삶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전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부 쓰레기 허잡 유태 허잡 기독 허잡 국산종교 허잡 잡교들 때문에 천재성을 갖었다고 주댕이질하고 세계를 여불위 처럼 일시적으로 거머쥐고 있다고 거미줄을 여기저기 똥뚯깐 왕거미...그 거미줄에 ... 인류가... 갇혀 있다고 봅니다...

   

허잡한 종교 허잡한 신앙은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 됩니다... 백로가 까마귀 됩니다.

   

이제는 개인적은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민족적인 차원까지 세계적인 차원으로 진

정한 신성과 진정한 인간의 가치 추구와 실현, 진정한 종교가치 탐색을 찾아 국제 유태 종교...국제 유태 사상...국제 유태주의에 모태를 둔 사이비 종교가치에 대한 선별화 작업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헛뻥 치는 넘들은 한마디로 ... 고기 삶을 때 뜨는 떠껑이일 따름입니다. 걷어낼 땐 단호화게 걷어내서 구조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누구든 그게 무엇이든... 걸러내야...내가 내 가족이 내 나라가 인류가 그들 배후의 물신세력들과 ... 그들의 홍두깨... 허잡신 허잡교 ...인민...혹세무민 세력들에게 우리들의 운명을... 산 제물로 바치고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 상황을 종결시킬 것 같습니다.

   

국제 사이비성 유태교, 국제 사이비성 허잡 유태 친연종교의 떠껑이를 건져내고... 그들도 이젠 본연의 유태교,,,진정한 유태이즘,... 진정한 유태 친연종교의 가르침...으로 국제적인 종교가르침의 표준과...인간 윤리정서, 인간 성정의 표준,... 인간 영성의 표준에..맞는 것만...살아남게...살아남을 수 있게...그들을... 유도할 새 시대가 와야 할 것 같은데요..?^^

   

   

   

인드라 :

   

우선 님의 심원한 사상에 경의를 표한다. 전제하고, 님의 우려가 단지 우려가 될 듯싶다. 우선, 님이 우려하는 대목 중 하나가 역사 인식이라고 보는데, 이는 님과 인드라 같은 사람만 아는 대목일 게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가 혹 대륙론자 (대륙 삼국론자, 대륙 고려론자, 대륙 조선론자)가 아닐까 싶은 것인데 안심해도 된다. 인드라는 대륙론자에 비판적이다.

   

다만, 대륙론자가 등장할 만큼 한국사나 동아시아사에는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석을 달리 해서 대륙론자가 비판을 당할 따름이지,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문헌과 유물이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다. 해서, 이를 어떻게 실천론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인가가 화두인 게다.

   

또한, 님의 우려가 우려인 것은, 님이 인드라에게 권고하는 사안이 인드라가 지향하는 길이기도 하는 것이다. 계승과 개혁이 아니겠는가. 낡은 폐단을 과감하게 쳐내서 올곧은 면을 더욱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진정 사회주의이건, 진정 유태주의이건, 진정 기독교이건, 진정 조선 사상이건.

   

   

   

   

   

우주론을 UFO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실천적일 것이다.

   

하나, UFO란 교감신경의 혼란, 즉 환상일 뿐이다. 없다.

   

둘, UFO란 국내정치문제를 물타기 위한 미국 정부 떡밥으로 실체는 네바다주 51구역에 있다.

   

셋, UFO란 세계정치문제를 물타기위한 국유본의 떡밥으로 실체는 호주 파인 갭 기지에 있다.

   

넷, UFO란 히틀러 나찌 일당이 남극 지하를 기지화해서 인류를 감시하는 비행체이다.

   

다섯,  UFO란 고대 문명인이 지구 지하에 살면서 지상 인류를 감시하는 비행체이다.

   

여섯, UFO란 미래 인류가 터미네이터처럼 지상 인류를 감시하는 비행체이다.

   

일곱, UFO란 외계인이 인류를 감시하기 위한 비행체이다.

   

여덟, UFO란 차원이 높은 존재들이 인류를 지켜보기 위한 비행체이다.

   

                    

   

   

   

우주론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과 경험하지 못하는 영역 경계면에 있다. 해서, 형이상학적인 견해부터 유물론적인 견해까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추신 : 어이쿠. 오늘 글은 여기까지.

더 많이 썼는데, 중간에 날아갔네요. 2부는 언제 쓸 지 모르겠는데.

이 주제는 한 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음.

   

   

국제유태자본과 미국 독립의 불쌍한 진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3 01:26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17421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6 : 국제유태자본과 미국 독립의 불쌍한 진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3

   

1. 1776년에 무슨 일이?

2. 1789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 영국왕 조지 3세는 왜 정신착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나?

4. 노스규제법은 오히려 동인도회사를 위한 법이었다

5. 국제유태자본은 미국 독립(아웃소싱)이 이익이었다

6. 영국의 미국 독자화폐 발행 저지설?

7. 전쟁을 통한 용병장사가 미국혁명을 태동시켰다?

8. 미국은 본디 자치를 원했을 뿐이다

9. 미국 혁명 지도부는 프리메이슨이었다

10. 상품이냐, 노예냐

   

    

   

1897년 일본 군사용 지리교과서는 `독도는 조선땅'이라고 표기했다.

   

"영월 호야지리박물관은 1897년 일본 문부성(우리나라의 교육과학기술부)이 검정을 마친 일본지지(地誌, 지리교과서)를 소장 중이다. 이 교과서에 수록된 당시 지도를 보면 일본열도와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 등 일본의 영토는 모두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다. 반면 당시 대한제국을 선포한 우리나라의 영토는 모두 흰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지만 울릉도는 죽도, 독도는 송도로 써놓고 우리 영토인 흰색 점으로 표시했다."

http://www.kwnews.co.kr/nview.asp?s=501&aid=211081100095

   

1. 1776년에 무슨 일이?

   

인드라는 한국사든, 국사든, 무엇이든 세계사와 함께 이해하자고 강조한 바 있다. 지금이야 말할 나위없지만, 과거에도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사교과서 71쪽 통일신라를 보면 북한의 남포에서 동쪽으로 원산까지로 되어 있다. 필자가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정역한 신라본기(新羅本紀)와 원전(原典)에 따르면 통일신라강역은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AD 742년) 때부터 제55대 경애왕(景哀王·AD 926년)까지 신라의 대통일 시대였다.

   

교과서 '신라의 발전' 편 36쪽과 53쪽에 보면 경상도 경주(慶州)에 금성(金城)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첫번째 연재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자 지명이 한반도 전국 곳곳에 완전히 옮겨진 것은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AD 13321356년) 때다. 고로 한반도에 신라 금성의 한자 지명은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제1권 거서간(居西干) 21년에 기록된 금성(金城)은 경성(京城)을 쌓은 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이십오사(二十五史) 신라편에 금성(金城)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청(淸)나라 건융(乾隆) 때인 1736년부터 1776년까지 40년간 60명의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를 쓸 당시 이십오사를 고증본으로 했기에 신라의 금성(金城)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장여화가 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43쪽의 금성군(金城郡), 금성현(金城縣)에는 대륙의 서쪽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가 금성(金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성(城)의 흔적도 없이 도시화가 되었다. 바로 이곳이 옛 신라 도읍지인 금성(金城)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알고 두 번이나 답사했다.

   

그런데 중학교 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통일의 강역은 3·8의 약간 북쪽까지로 되어있다. 이런 기록은 모든 역사 원전을 다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타난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를 보면 대륙에 구주(九州)를 두고 경(京)을 다섯 군데를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상고사학회서 신라본기 정역의 책자에 수록되어 있다.(각 대학과 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에 소장)

   

중학교 국사 7쪽에 있는 통일신라강역은 한반도 허리 부분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따라서 경북에 있는 지금의 경주에 금성(金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필자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수만권의 역사원전을 뒤지고 찾아보아도 한반도에서 신라가 통일한 사실이 없고 금성(金城)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중학교 국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신라의 대통일은 당(唐)나라가 망한 후에 이루어졌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부터 제55대 경애왕까지 약 216년간 신라는 대통일의 시대였다. 지금도 대륙 남부인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 지방에 신라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인민위원회(新羅人民委員會)가 있는 간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 책에 실었다. 한국의 학계와 신문, 방송 등에서 도저히 믿지 못할 사실들이 정사(正史)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금성(金城)의 이름이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중재 사단법인 상고사학회장"

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922060031&cDateYear=2010&cDateMonth=08&cDateDay=05

   

   

  • (淸)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 41년
  • 조선(朝鮮) 영조(英祖) 52년
  • 3월 - 조선 정조조선의 제 22대왕으로 왕위에 오름.
  • 5월 10일 - 루이 16세프랑스의 왕이 되다.
  • 7월 4일 - 미국이 정식으로 독립선언을 함.
  • 3월 9일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출간.
  • 규장각 설치.

       

    1776년 영국에서 출판된 윌리엄 섹스피어의 작품 36편을 총 8권으로 집대성하다.

       

    1776년 첫 상업용 볼턴 & 와트 증기기관이 만들어졌다.

       

    1776년 러시아 볼쇼이극장  건립.

        

    1776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바이에른 일루미나티를 조직하다.

       

    1776년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임진왜란 개념을 처음 사용되었다.

       

        

       

       

    2. 1789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淸)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 54년
  • 조선(朝鮮) 정조(正祖) 13년
  • 4월 4일 -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당선
  • 5월 5일 - 프랑스에서 175년 만에 삼부회가 소집됨.
  • 6월 17일 - 프랑스 제 3 신분의 대표자들이 삼부회에서 국민의회 구성 선언.
  • 6월 20일 - 테니스 코트의 조약베르사유에서 열림.
  • 6월 23일 - 루이 16세가 세 신분의 만남을 주선함.
  • 7월 13일 -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생.
  • 7월 14일 - 프랑스 혁명: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7명의 죄수들을 풀어주다.
  • 8월 4일 - 프랑스 혁명: 국민의회 의원들이 봉건 제도와 특권 폐지를 서약함.
  • 8월 26일 - 프랑스 혁명: 프랑스 인권선언제헌 의회에서 채택되다.
  •    

    1789년과 1897년은 독도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한 해이다.

    1789년과 1897년 독도 관련 지도가 각각 등장하니 더욱 흥미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1789년 수원화성의 꽃인 화성행궁은  정조가 팔달산의 동쪽 기슭에 세운 행궁으로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 행궁이란 임금이 궁을 떠나 지역에 갔을 때 일도 하고 잠도 자던 시설을 말한다.

       

       

    1789년 다산 정약용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그해 겨울 한강 에 설치하는 배다리(빠橋)를 설계해 그대로 배다리가 놓였다.  배다리란 교량을 가설하기 어려운 큰 강에 배를 나란히 붙여 띄운 위에 임시로 놓는 다리를 말한다.

       

    1789년 베트남 응웬 왕조는 하노이까지 침략한 청 군대를 격퇴하였다.

       

    1789년 북부 이란 투르만계 카자르 부족 출신 아가 무함마드가 이란을 통일시키며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던 테헤란을 수도로 정했다. 카자르 왕조는 백여년간 유지하며 근대화에 힘을 쓰나 무너지고 팔레비 왕조가 들어선다.

       

    1789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 풍선을 이용하여 최초로 인간비행을 했다.

       

    1789년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의회에서 인간을 농장의 짐승처럼 매매하지 못하게 하는 날이 오기를 강력히 주장하며 외쳤다.

       

    1789년 미국 연방재판소가 설립하였다.

       

    1789년 미국 정부는 전쟁부를 창설했다.

       

    1789년 미국에서 태머니협회가 출범했다.

       

       

       

    3. 영국왕 조지 3세는 왜 정신착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나?

       

    미국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해 유력한 설은 우선 동인도회사 경영난이다. 

       

    동인도회사 경영난이 미국혁명을 일으켰다?

       

    1773년 영국수상 F.노스는 미국 식민지의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성립시켜 그간 영국 행태에 실망하던 미국인들을 분노시켜 보스턴 차사건을 일으킨 데서 찾는 설이다. 

       

    보스턴 차사건과 미국혁명의 진실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4iPcXhwCjK6mDr2nd0lQmHc+xtlXqRyb&qb=ucyxucf1uO3AxyDB+L3H

       

    이 가설에 따르면, 노스 내각이 동인도회사에 독점권을 부여한 것은 동인도회사가 경영난에 빠져 이를 보완하고자 미국 식민지에 이전보다 더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해서, 이에 따르면, 동인도회사의 경영난이 미국혁명을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1773년 동인도회사는 경영난이 발생함에 따라 정부에 원조 요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지 3세하의 노스 총리 내각이 노스 규제법을 시행하여 정부의 감독 권한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헌데, 노스 규제법을 보면, 그 핵심 중 하나가 동인도회사가 그간 영국 국왕이 수여하는 특허장에 의하여 특권을 인정받던 것을, 본국의회의 소관 사항으로 종속하게 변경한 것이다.

       

    이때, 영국 국왕은 조지 3세였다. 하면, 왜 노스 내각은 동인도회사 관리 권한을 조지 3세에서 의회로 변경했는가.

       

    명예혁명 이후로 영국 경제는 왕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온 국제유태자본이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영란은행을 만들면서 영속적인 지배 틀을 다진다. 이 시기는 로스차일드 이전 시기이며, 국유본 역사에서 태동기이다. 이 시기 국유본 권력을 잡았던 세력은 정치의 영국 왕실과 귀족, 종교의 신교와 프리메이슨, 자본의 한자 상인/ 유태인 상인 삼자 동맹체제였다.

       

    허나, 명예혁명 초기에는 영국 왕실의 위엄은 전혀 없었다. 명예혁명으로 윌리엄 메리 공동왕이 추대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제유태자본 동맹체제의 힘이었다.

       

    유태인 추방령 이후 영국 경제를 장악했던 것은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이었다. 허나, 영국에서 교황 권력이 약화하는 동시에 대서양 교역로가 뚫리면서 메디치 가문처럼 지중해 교역권과 교황권에 의존했던 롬바드 상인 역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리장전은 윌리엄과 메리 사이에 후손이 없을 경우 메리의 여동생 앤에게 왕위가 계승되도록 규정했으며, 가톨릭교도에게는 왕위계승을 봉쇄했다. 왕위계승법이 뭐 이따위냐 하겠지만, 이미 왕을 처형한 국제유태자본이었다. 당신이 윌리엄과 메리라면 후손을 남기고 싶을까? 또한 앤 역시 후손을 남기고 싶었을까.

       

    "독일의 하노버 선거후의 아들로 태어나, 1698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외가(外家) 계통으로는 영국제임스 1세의 증손에 해당되기 때문에, 1714년 앤 여왕의 사망과 함께 왕위계승법(1701년 제정)의 규정에 따라 영국 왕위에 올라, 하노버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성장하여 영어를 모르는데다가, 고향 하노버에 칩거하는 일이 많아 국정이 내각과 의회에 맡겨짐로써,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이 확립되고, 내각책임제가 발달하였다." 

    [출처] 조지 1세 [George I ] | 네이버 백과사전

       

    국제유태자본은 영어를 하지 못하고 독일에 칩거하는 왕을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벨기에에서 실험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나 수상없이, 정부없이 국가 운영이 가능한가 하는 실험 말이다.

       

    그렇듯 조지 1세, 조지 2세를 보내고 조지 3세를 맞이했다. 헌데, 영어 좀 하는 조지 3세는 조지1세, 2세와 달리 정치에 개입하려 애를 썼던 왕이었다.

       

    "조지 2세의 손자로, 1760년에 즉위하여 앞의 2대의 왕과는 달리 왕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래서 왕실비용을 줄인 돈으로 의원을 매수하여 어용당을 만들어, 이를 조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정의 지도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뼈아픈 실패를 초래하였다. 이따금 정신에 이상을 보였고, 특히 1811년 이후에는 폐인 같은 만년을 보냈다. 더욱이 그의 치세는 초기의 토리당(黨) 어용화 시대 등, 전후 수년간을 제하고는 소(小)피트가 주도하는 토리당의 지배 시대가 되었다. "

    [출처] 조지 3세 [George III ] | 네이버 백과사전

       

    하면, 실제로 조지 3세에게 없던 권한이 발생한 것일까. 인드라는 아니다, 라고 본다.

       

    영국 정당은 토리당과 휘그당이 있는데, 카톨릭 왕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로 갈렸다. 카톨릭 왕을 인정하면 토리당, 안 하면 휘그당이었다. 헌데, 권리장전에서 카톨릭 왕은 안 된다, 라는 조항에서 보듯 실권은 휘그당이 잡고 있었다. 하고, 휘그당이 국제유태자본 알파 정당이었던 것이다. 하면, 토리당은? 오메가 정당이었다.

       

    조지 1세, 조지 2세 약 오십여 년간은 휘그당이 정권을 잡고 국정 운영을 하였고, 토리당은 대부분 시골영주 귀족들이어서 국제유태자본이 주는 떡고물을 조금만 더 주면 신나게 재롱떨지롱, 하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다.

       

    허나, 오십여 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가장 큰 불만은 살림살이였다. 영국 국부는 날로 늘어나는데, 특히 동인도회사가 떼돈을 번다는데, 왜 대다수 영국 백성은 여전히 가난한가하는 것이었다. 

       

    해서, 영국이 백성을 소홀히 하는 것은 나라가 지나치게 귀족과 장삿꾼 손에 놀아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여, 영국 백성이 영어도 못 하는 무능한 왕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조지 3세에게 역할놀이를 제안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힘이 하나도 없지만, 힘이 있는 것처럼 연기해달라는 설정 주문이었다. 가령 노스는 조지 3세의 소꿉친구이다. 조지 3세가 노스를 발탁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미국 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 회장 선출 방안을 떠올려보자. 공공정책위원회는 당대 대통령과 가장 친한 사람을 회장으로 선출한다고 한다.

       

    조지 3세는 영어를 했다. 왕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는 언론플레이에 영국민이 환호했다. 때로는 영국 귀족과 자본가에 겉으로만 맞서는 모양새도 보여주니 인기가 날로 치솟았다. 쪽발놈현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연예인도 아닌데, 조지 3세는 열심히 노력했다. 허나, 실제와 설정이 너무나 다르다 보니 종종 정신착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대항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누구보다 노예였던 조지 3세는 자아 상실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지 3세는 위기 때마다 퇴위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자살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말년에는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당대 국유본의 신출귀몰한 기획 전모를 안다면, 그 누가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지만, 국유본은 주도면밀했다. 혹시나 조지 3세가 역할놀이를 거부할까 싶어 노스규제법을 만든 것이다. 혹시나 있을 조지 3세의 변덕에 대비하여 국왕 권한을 의회로 돌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나 언급하고 지나간다.

       

    영국 의회주의, 대의제 뿌리는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로마 식민총독부에서 기원을 찾아야 하며, 더 올라가면 카르타고 정치체제에 기반한다, 즉 영국 의회주의는 영국 자체를 혐오하는 정복왕과 야만 켈트족을 두려워하는 지방주의 귀족이 만들어낸 '사기' 합작품이다, 그 이후 권리장전이니 뭐니 하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은 죄다 훗날의 역사가들이 윤색한 조작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인드라의 '독특한' 주장이다. 찾아보면, 이런 주장을 한 이들도 없지 않겠지만, 하여간 국내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인드라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카르타고인은 상인 권력을 억누르는 정치 권력을 늘 억압하였다.

       

       

       

       

    4. 노스규제법은 오히려 동인도회사를 위한 법이었다

       

    노스규제법

    http://100.naver.com/100.nhn?docid=38770

       

       

    노스규제법의 배경이 이뿐인가.

    아니다.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 직원을 공무원 격으로 지위를 격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동인도회사 직원이 하는 업무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중국이 1729년에 아편밀무역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1757년 인도 아편 전매권을 따낸다.

    하고, 1773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전반까지 유효한 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따낸다.

    경쟁자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8세기에 망한 것은 향신료 무역이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영국의 해적 무역에 당할 도리가 없었으며, 영국이 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따냈기에 더 이상 아편무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영국은 1729년에는 아편을 연 이백상자 수출하던 것을 1776년에는 1000상자, 1790년에는 5000상자, 1820년에는 10,000상자를 중국으로 보낸다.

       

    아편전쟁

    http://blog.naver.com/gemengi/42308873

       

    차무역 결제대금으로 불가피하게 마약 장사를 했다는 것은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존 콜먼이 획기적인 제안을 하므로 그의 주장을 깊이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약 프로그램의 성공

    http://www.lightearth.net/zboard/zboard.php?id=disclosur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마약&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3

       

    주력 상품인 마약 수출 여건이 호전되고, 마약이 보다 많이 수출되었다는 점에서 동인도회사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것은 의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동인도회사는 주주 대부분이 영국 왕실과 영국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주변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국이 노골적으로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도 엄청난 수익과 이해 때문이다.

       

    헌데, 이러한 동인도회사가 비난을 받는다. 영국인은 분노한다. 전 세계를 영국이 장악해나간다는데, 왜 영국인들은 보다 더 가난해지는가. 이 분노는 동인도회사에 집중된다. 왜냐하면 동인도회사가 일반회사에 비해 각종 특혜를 받아 온갖 수익을 낼 동안 소상공인들은 동인도회사의 횡포에 분노를 삼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면, 동인도회사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란? 다 죽어가는 척해야 하는 것이다.

       

    조지3세는 7년 전쟁으로 재정이 파산상태라고 말한다. 해서, 조지 3세는 영국인들이 싫어하는 시티지구 금융가들과도 불화하고, 정권 잡았던 휘그당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 영국 왕실 비용을 줄인다고 발표한다. 줄인 비용으로 왕실 우호세력을 키운다 어쩐다 한다. 이러하니, 조지 3세는 오히려 영국인에게 인기가 있었다.

       

    헌데, 이상하다. 당대 영국은 오늘날 미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신민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신민이 영란은행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막말로 돈 찍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세한 사정은 극소수의 전문가들만 알 따름이다.

       

       

    5. 국제유태자본은 미국 독립(아웃소싱)이 이익이었다

       

    게다가 미국 사정은 어떠한가. 당시 미국 식민지 유지비용은 영국 본토에서 더 많이 부담하였다. 이에 비해 미국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지극히 미미하였다. 이는 17세기 정착과정에서 워낙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정착민 이주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행해진 정책이 이어져온 것이다. 해서, 소수야 피해를 겪을 지라도 대다수 미국인들은 의외로 세금 부담을 감당할 수도 있었다. 

       

    프리메이슨, 벤자민 프랭클린은 1789년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에서 분명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것은 죽음과 세금이다"라고 주장했다. 세금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헌데, 흉악한 프리메이슨, 벤자민 프랭클린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미국혁명 시기에 관한 미묘한 발언을 한다. 

       

    "만일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 미국의 자체 화폐 발행권을 앗아가지 않았다면 식민 정부는 차(茶)등 다른 품종에 대한 세금 정도는 기꺼이 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화폐법에 의거한 영국의 조치 때문에 식민지에서는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어 그들의 높은 원성을 샀다. 이처럼 조지 3세와 국제 금융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돈을 만들 수 없게 된 일이 미국 독립전쟁의 주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뭔 말이냐. 견디기 힘들다는 세금을 얼마든지 낸다는 말이 아니냐. 이 무슨 개같은 수작이냐~!

       

    영국은 미국이 독립하면서 오히려 재정이 안정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독립 초기부터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증세 대책을 찾다 보니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웃소싱이 뭐냐.  

       

    대기업의 비용 절감이다. 고정 비용이 발생하는 부문을 약간의 이익을 주어 외부에 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때, 대부분 대기업에 일하다 퇴직한 이들, 혹은 프리랜서를 자임한 이들에게 일감을 주기 마련이다. 이들은 처음에 사장이 된 기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한, 일한 만큼 번다는 데에 매력을 느낀다. 허나, 처음과 달리 차츰 옥죄는 경영 환경. 그 모든 경우의 수에 책임을 다 져야 한다는 것. 생각하지 못했던,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여 차라리 대기업에 남아 있을 걸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마련이다. 중소기업 사장보다, 자영업자보다 대기업 말단 사원, 말단 대리가 낫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6. 영국의 미국 독자화폐 발행 저지설?

       

    미국혁명의 배경으로 거론되는 가설이 1764년 영국 화폐법으로 상징되는 영국의 미국 독자 화폐 발행 저지설이다.

       

    미국은 벤자민 플랭클린을 중심으로 '식민지 유가증권(Colonial script)' 형식의 신용 중심 지폐를 유통시켜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당시 금본위 화폐제도로 식민지 조세를 강력 금은으로 뽑아 가려 했던 영국에 맞서는 유일한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허나, 영국에서는 1764년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서의 자체적인 화폐 발행을 금지하는 "화폐법"을 통과를 시키고, 식민지 세금을 금과 은으로 뽑아가 버렸다.

       

    국제유태자본이 식민지에서 멋대로 화폐 발행을 하도록 허용한다면, 보다 많은 이들이 화폐 발행의 손익을 헤아리게 되어 독점적 권한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해서, 이 가설론자들은 국제유태자본이 로버트 모리스, 알렉산더 해밀턴, 좀 애덤스, 제퍼슨과 접촉하여 이들을 포섭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언뜻 보면 일리가 있다 할 수 있다.

       

    흑인노예 여성 강간 아편농장주 제퍼슨이 연방 중앙은행에 비판하였다고 하나, 단지 정적에 대한 비판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인드라가 그간 지속적으로 강조한 사안이다. 제퍼슨 - 앤드류 잭슨 라인은 겉으로만 영국을 강하게 비판하였지만, 실은 대통령만 되면 똥마린 강아지가 되었던 자들이라고.

       

    그처럼 해밀턴이나 애덤스, 제퍼슨, 메디슨 등은 다만 주인공이고 싶어 정적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와 자신이 대통령일 때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듯 다른 정책을 펼치면서 비난을 위한 비난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떡고물이겠다. 실제로 조지 워싱턴부터 해밀턴, 제퍼슨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정치 활동 이면에 열심히 땅 투기에 열중했다. 흥미로운 점은, 로버트 모리스를 비롯하여 해밀턴, 제퍼슨 등이 말년에 파산하였다는 점이다. 로버트 모리스 경우에는, 그는 재무부장관 직도 마다하고 땅 투기에 적극 나섰다. 이유는 유럽 자금, 국유본 자금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허나, 기다리던 유럽 자금, 국유본 자금은 오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프랑스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알거지가 되어 심지어 채무자로서 감방 신세까지 졌다. 

       

    주식 투자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냉철하게 알다시피, 그 어떤 멋진 말도 주식투자자들 앞에서는 오히려 믿지 못할 언행으로 간주되지 않는가. 유일한 증거는 자신의 계좌를 까서 결과를 확인시켜주는 것뿐이다. 그만큼 시장은 힘에 의한 결과를 신뢰할 뿐이다. 그 힘이 어디에서 오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기, 협박, 내부거래 등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윤리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하여, 보스턴 차사건보다 화폐법이 더 식민지 부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확인될 뿐, 미국 혁명을 낳게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게다가 이 당시에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재계에서 지배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면, 베어링인가.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단지 중앙은행만 장악하거나, 화폐발행권을 획득한다고 해서 금융 권력을 유지, 발전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즉, 금융 권력을 영구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평균 이윤율 이상의 초과 이윤을 어디에선가 반드시 획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해적질을 이용한 군사력이 계기였다면, 결정적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동인도회사에서의 인도에서의 아편 전매권과 중국에서의 아편 독점판매권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윤 원천을 지니고 있으니 그만큼 중앙은행에 대한 권위와 신용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간단히 개념화하면 '안전자산'이다.

       

    농노제를 폐지하면, 농노제에 의존하여 영지 경영을 하던 시골 귀족들이 큰 타격을 입는다. 하면, 왜 유럽 제국은 제국 권력 한 축을 담당하던 시골 귀족들 반발이 뻔함에도 농노제 폐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교과서적 설명은 이렇다.

       

    부국강병이다. 제국 권력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은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  강력한 군대를 키워야 하고, 이 군대를 먹여살릴 재원이 필요하다. 근대화, 공업화, 자본주의화, 제국주의화해야 한다.

       

    이전까지 유럽 각국은 농업 경제와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 가령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 헌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유럽 각국은 영국처럼 제조업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국유본론적 관점은 이렇다.

       

    유럽 제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제조업을 키웠다. 허나, 그 배후에는 국유본이 있다. 제조업 이전에 금융업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몰락한 것은 약탈 경제체제를 무계획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반면, 국유본은 약탈 경제체제를 계획적으로 했다. 또한, 유럽 제국이 제조업을 무시했다고 볼 수 없다. 루이 14세도 프랑스 상공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으니까. 문제는 금융업이다.

       

    유럽 금융시장이 네덜란드와 영국 런던, 특히 영국 런던에 집중했다. 용병장사로 유럽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독일 헤센 가문이 주식투자를 영국 런던에서 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만일 독일 금융시장이 영국 런던시장처럼 되었다면 독일 헤센가문이 영국 런던시장에 투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면, 프랑스도 금융시장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결투로 살인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쳐 은행경영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1710년 후 영국으로 돌아와 은행개혁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이 1716년 루이 15세로부터 받아들여져 프랑스 총은행(總銀行)과 서방회사(西方會社:루이지애나회사)의 설립 허가를 얻었다. 1717년 루이지애나회사를 서(西)인도회사로 발전시켜, 북아메리카 미시시피강(江) 유역의 광대한 프랑스령(領)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로의 재정체계는 프랑스에서 일대 붐을 일으켰다. 조폐권(造幣權)과 무역독점권을 둘러싸고 '로 체제'를 확립하였다. 1720년 재정총감(財政總監)이 되어 프랑스 재정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나, 지폐의 남발과 투기확대의 결과 경제공황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직하여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출처] 존 로 [John Law ] | 네이버 백과사전

       

    프랑스는 존 로라는 스코틀랜드인을 재무총감으로 임명한 비극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후 금융업을 상당히 제한했다.

       

    반면, 영국은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 등 끊이질 않는 금융사고에도 불구하고 금융업에 대해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했다.

       

    이 차이가 영국과 그밖의 나라를 구분시킨 것이다.

       

    하면, 영국은 뭘 믿고 금융업에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영국이 금융업을 믿은 것이 아니다. 금융업이 영국더러 말 들을래? 아니면 떠난다? 하니 말 들으마! 한 것이다. 금융업이 떠나면 영국이 망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이다. 적국인 프랑스 왕도, 러시아 왕도, 오스트리아 왕도, 독일 왕도 로스차일드에게 돈을 맡긴다. 이자를 기대하는 돈도 아니다. 맡기면 오히려 보관료를 받기까지 한다. 그래도 맡기는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인드라가 강조하고, 또 강조했지만, 진짜 부자들의 관심사는 돈 불리기가 아니라 보전이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쪽발놈현, 쪽발돼중, 전두환, 김영삼, 그밖의 회장님들의 재산관리인 역할은 위험한 베팅이 아니라 원금 보전인 게다.

        

    반면 미국 중앙은행의 신뢰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가. 없지 않는가.

       

    더 나아가 중앙은행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자신이 중심이 된 식민지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영국이 일찌기 영란은행이라는 중앙은행을 만들고, 1816년에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전세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서, 간단히 생각해보자. 중앙은행이 왜 필요한가.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은행처럼 기축통화화폐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금본위제가 왜 필요한가. 본국 기축통화와 식민지국 통화의 원활한 거래를 위해서이다.

       

    해서, 제국주의 자체가 불가능했던 유럽 각국은 금본위제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국유본이 결정하니까 그제서야 1870년대부터 독일,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에서 금본위제를 한 것이다.

       

    정리하자. 당시 미국이 중앙은행 만들고, 자신들만의 화폐를 만든다고 해서 누가 신경쓰겠느냐. 냉정하자. 내일이라도 당장 망할 것 같은 미국 화폐로 거래하겠느냐, 아니면 영국 파운드로 거래하겠냐. 당신이 캐러비안의 해적, 조니 뎁이라면 배를 약탈했는데, 미국 화폐만 나온다면, 그 돈을 그냥 보관하겠느냐, 아니면 영국 파운드화로 바꾸거나 금으로 바꾸어서 보관하겠느냐.

       

    경제의 쌩기초도 모르고, 음모론 떠드는 씹색희들 뺨을 절라리 때리고 싶고나. 애비가 쪽발이냐, 무식한 넘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오늘날 달러 체제가 위기라고 금본위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헛소리맨 쑹훙빙 같은 병쉰 색희들은 들어라.

       

    좆밥들아! 혁명전사, 인드라의 말을 들어라.

       

    냉수 먹고 속 차려, 씨밸럼들아.

       

    - 핫핫핫. 전 세계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드라가 유일한 사람^^? 이래서, 국유본이 인드라를 주시하는 것이겠지만.

       

             

               

             쪽발 일성은 쪽발 경제 부흥을 위해 대를 이어 충성한 쪽발이다

        

       

    7. 전쟁을 통한 용병장사가 미국혁명을 태동시켰다?

       

    헤센 카셀 왕은 당대 유럽 최고의 부자였다. 비결은 역대 선조들이 대대로 용병 장사를 해온 탓이다. 당대 독일은 삼십년 전쟁이다, 뭐다 하여 농토가 황폐화하고, 인구는 1/3로 격감하였지만, 그럴수록 헤센 카셀 왕의 용병장사는 날로 수지가 맞았던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헤센 카셀 왕의 재무담당 궁정신하와의 친분으로 궁정신하로부터 영국 주식투자와 용병장사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제자였던 로스차일드는 스승 궁정신하로부터 청출어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적인 신뢰를 받아 헤센 카셀 왕의 도피 자금을 관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부대와의 유명한 일화는 흡사 이명박이 태국 건설현장에서 금고를 사수했다는 다소 의혹이 있는 신화와 맞물린다.)

       

    영국 왕실은 금융유태자본에 의해서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정부가 사설 은행에 1억 4천만 파운드의 빚을 지자 이에 대한 해결로서 식민지 목을 쪼였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 되고 있다. 허나, 인드라는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다.

       

    왜? 이는 영국 왕실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돈이란 돈을 버는 사람들 관점에서 바라봐야, 폼이 나는 말로 생산자 입장에서 봐야 되는 것이다. 해서, 영국 왕실이 아니라 헤센 카셀 왕 입장, 더 핵심적인 것은 헤센 카셀 왕이 독일의 이름난 여성들과 떡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때, 열심히 일만 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재무담당 궁정신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무엇이 과연 보였겠는가. 용병 장사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 전쟁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허나, 계속된 전쟁은 가령 담배농사로 특화한 미국 버지니아주가 19세기 후반에 가면 이미 더 이상 담배농사를 지을 수 없을 지경에 도달한 땅들이 등장할 정도로 작황이 좋다고 마구잡이로 땅을 혹사시면 땅이 거부를 하듯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 하여, 전쟁이란 화전민 농법처럼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 지르고 떠나자! 하여, 전쟁을 발생시키기 위한 온갖 수단을 연구해야 한다. 역사, 종교, 이념, 문화, 이해관계 그 어떤 것이든!

       

    둘, 용병의 부단한 충당이다. 잉여다. 산업예비군이다. 실업자이다. 이농이다.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어 아무 것도 살 수가 없는, 그로 인해 생계가 불가능한 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용병이 탄생한다. 만일 그조차 어렵다면, 납치를 해서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셋, 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용병을 부단하게 충당하려면 용병에게 고향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스위스 용병은 고향이 존재한다. 스위스 용병이 자존심이 높은 이유가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고용주가 아무리 호조건을 걸어도 스위스 용병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는 이유가 스위스 용병에게는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주 입장에서는 고향이 없는 용병이 필요하다. 스위스 용병의 민족주의는 파괴되어야 한다. 오직 떠돌이 용병만이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의 강간, 강도, 폭력을 위해 기도하자. 혹은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시청하자. 근대 법적 이성은 오직 그들의 인권과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 

       

       

       

       

    8. 미국은 본디 자치를 원했을 뿐이다

         

    미국 혁명세력 다수는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상당수는 식민지 자치를 원했다. 허나, 영국 왕 조지 3세가 대륙회의의 요구를 전면 무시했다.

       

    이것이 뭔 말이냐.

       

    미국 혁명세력은 체면을 살리는 항복을 원했던 것이다. 허나, 조지 3세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거부한 것이다.

       

    본국 대 식민지간 대립구도를 보면, 오늘날 중국처럼 본국이 자치권을 보장하고, 티벳과 같은 식민지가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잖은가. 헌데, 상황이 이따위이니 희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9. 미국 혁명 지도부는 프리메이슨이었다

       

    http://blog.naver.com/maria1483/90125072848

       

    보스턴 티파티 사건에 프리메이슨이 개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독립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라파예트가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1830년대에 이르면, 미국 프리메이슨이 5만 여명에 달한다 했다.

       

    프리메이슨. 고대적 신비주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근대에서는 국제유태자본의 도구였다. 국제유태자본이 미국 식민지화를 위해 최초로 미대륙에 보낸 이주민도 프리메이슨을 통해서였다.

       

    내부적으로 복잡한 의도를 지녔겠지만, 간단 정리하면, 프리메이슨 상부, 즉 국제유태자본은 미국 독립을 결정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를 책임질 자들로 프리메이슨을 선정한 것이다라고 보면 무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미국 초대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민의 의사가 아니라 국유본의 의도였다는 게다. 초대 대통령이 프리메이슨이였으니까.

       

       

       

       

       

    10. 상품이냐, 노예냐

       

    인드라는 말한다.

       

    맑스의 화폐론을 극복한 상품론 이전에 노예론이 있다. 최초의 상품은 노예였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같은 논의가 근대에 진행된 까닭이 무엇인가.

       

    상품론은 물신화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 비판으로 향한다.

    반면, 노예론은 물신화 이전에 주목한다.

       

    왜 인간은 화폐나 상품을 주인 모시듯 하는가.

       

    인간은 두 부류이기 때문이다.

       

    그 화폐나 상품을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존재와 실체로 여기는 존재로 나뉘기 때문이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면 돈을 번다는 것쯤은 다 안다.

    허나, 왜 대다수 인간은 실천이 어려운가.

    오직 극소수만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나.

       

    이렇듯 인류가 나눠지는 조건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물신화 비판이란 허망한 것이다.

       

    지난 사회주의 실험 실패가 이를 입증한다.

       

    여러분은 왜 인드라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여기면서도 오히려 인드라 이야기 반대로 행하는 게 이익이라고 지금 당장 판단하는가?

       

    물신화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허나, 노예론은 설명가능하다. 인드라가 아직 노예를 극복한 자인지를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드라가 그 아무리 지금 진실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노예의 진실일 뿐이다. 만일 인드라가 노예를 극복한 자라면, 여러분은 인드라 이야기에 적극 찬성할 것이다.

       

    우리가 비판을 관망하는 것이 결코 물신화, 우상숭배 때문이 아니다. 그 가능성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란 우리 삶이 노예냐, 상품이냐에 달린 것이다. 

       

    노예라면 들고 일어난다. 허나, 상품이라면 조금 더 꾸밀 따름이다,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인양 하는 것이 오히려 폼이 나는 것처럼.  

       

    상품이냐, 노예냐.

       

       

유럽인은 왜 신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2 05:03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09983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5 : 유럽인은 왜 신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나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2

   

   

 러시아의 인구가 1위로 가장 많고, 그 뒤를 독일, 프랑스가 따르고 있다. 유럽의 인구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의 순서였다. (2005년 현재)

러시아 1억 4340만 명

독일 8240만 명

프랑스 약 6080만

영국 약 6030만

이탈리아 5810만

우크라이나 4742만

에스파냐 4000만

폴란드 3810만

루마니아 2169만

네덜란드 1600만

   

19세기 유럽은 혁명의 시대였다.

   

   

   

인류 대부분이 북반구에 살던 세계는 18세기 말엽부터 소빙하기가 물러가는 기미를 보이더니 1850년대에 이르러 소빙하기가 끝났다. 이에 따라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지역은 유럽이다. 상기한 인구 통계에서 보면, 다른 지역 평균보다 월등하게 175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유럽 인구가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음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 유럽 인구 상당수가 신대륙으로 이주한 것을 감안하면, 3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는 유럽에는 구소련 지역을 제외하고 약 4억 9800만(1990)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평균 인구밀도는 101인/km2으로 세계 평균의 2.5배 이상이나 되며, 오세아니아의 33배나 된다. 대륙별로는 아시아 대륙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다. 

   

약 2,000년 전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지역에 거주했던 인구는 3300만에 불과했다. 농업이 경제 활동의 중심인 당시에는 유럽 전체 인구의 50 %가 남부 유럽에 거주했고, 20 %가 서부 유럽에,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 각각 10 % 및 9 %가, 그리고 북부 유럽에는 1 % 미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 후 인구는 점차 증가하여 1000년경에는 3800만이 되었고, 1340년에는 7000만으로 늘어나 서기 원년의 배가 되었다. 1340년의 7000만 인구 중 남부 유럽에 거주한 인구는 30 %였고, 서부 유럽 지역에는 영국을 포함하여 35 %로 늘어났고,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 지역에는 각각 16 %, 7 %로 증가 또는 감소되었다. 

   

1750년대 이후부터는 많은 해외 이민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750년 1억 4000만의 인구가 1950년에는 5억 5000만으로 증가하여 200년 동안에 유럽의 인구는 3배 이상 늘어났다. 70년대의 인구분포를 보면 남부 유럽 지역에는 17 %의 인구가 거주하였고, 영국을 포함한 서부 유럽 지역에서는 22 %를 차지하였으며,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 지역에는 각각 15 %, 17 %가 되었다. 유럽의 러시아 지역에는 서기 원년에 유럽 총인구의 9 %만이 분포했으나 1970년에는 26 %로 크게 증가되었다. 

   

과거 150여 년간에 적어도 6000여 만의 인구가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동하였고, 1700여 만 정도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로 이동하였다. 신대륙으로 이동한 6500만 중 4500여 만은 미국과 캐나다로, 나머지 2000만 정도는 중 ·남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들 유출 인구의 1/3 정도는 영국인이었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이 1/3 정도, 그리고 나머지 1/3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부 유럽과 북부 유럽 여러 나라가 차지하였다."

[출처] 유럽의 인구 | 네이버 백과사전

   

상기한 유럽 인구 분포 동향을 보면, 절대 다수이던 남유럽 인구 비율이 주는 반면, 중세에는 서유럽 인구 비율이 확대하고, 근대로 올수록 동유럽 인구와 러시아 인구 비율이 급증함을 알 수 있다.

   

날씨 때문이다. 남유럽과 서유럽은 소빙하기에도 지중해성 기후와 멕시코 만류 덕분에 사람 살기가 좋을 만큼 날씨가 춥지 않았던 반면 중북부 유럽과 동유럽,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성 기후로 사람 살기에는 혹독했다.

   

헌데, 지구 기후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하듯, 간빙기 중에도 소빙하기가 있는 것이다. 지난 십자군 전쟁 때는 상대적으로 따듯한 중세온난기 시대였다면, 1650년에서 1850년까지는 소빙하기 시기였던 것이다.

   

해서, 소빙하기 시기가 끝나가는 만큼 날씨가 점차 따뜻해졌고, 그에 따라 양질의 경작지가 늘어나고, 그만큼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맬더스가 '인구론'을 들고 나올 만큼 땅은 그대로인데, 인구가 폭발했다. 

   

   

"마르크스는 파리 시절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본산인 '대 동방종단'에도 입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015

   

   

당대에 맑스를 공격한 이로는 아우구스트 빌리히가 있다. 1850년 아우구스트 빌리히는 맑스를 '반동'이라 비난하였으며, 그해 9월 1일에 열린 '동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빌리히는 맑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이에 대해 맑스는 결투 신청을 거절하는 '비겁함(?)'을 보였지만, 대신 결투를 받아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으니 콘라트 슈람이다. 그는 명사수 빌리히와 대담하게 맞서지만, 쓰러지고 만다. 해서, 다들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총알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서 기절한 것을 빌리히 측이 죽은 줄 오인했던 것이다. 이처럼 콘라트 슈람은 맑스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콘라드 슈람은 오랫동안 미국에 있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온다. 이 시기 맑스는 신라인신문 정치경제평론지 발간을 위해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다. 이때, 맑스가 뉴욕트리뷴지에 기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프리메이슨. 위드, 찰스 앤더슨 데이나, 콘라드 슈람, 맑스, 헨리에테, 필립스, 코헨, 로스차일드...

   

"유대인 맑스는 음흉하고 시류에 민감한, 그렇고 그런 약삭빠른 유대 놈들에 둘러 싸여 있다. 모든 곳에서 상업, 은행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문필, 학계, 정계, 또는 각종 색깔의 언론계에 있는 유대인들은 문학과 지식, 정보의 브로커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유대인은 한 발은 사회주의 운동에, 또 한발은 자본주의에 담고 있으며 독일 언론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 놈들은 모든 신문사들을 거머쥐고 있다. 거기서 그 어떤 메스꺼운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올 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나의 거대한 착취적 종파, 거머리의 민족, 왕성한 식욕을 가진 기생충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는 이 유대인 세계는 오늘날 전체적으로 맑스와 로스차일드의 손끝에 놓여 있다. 나는 로스차일드는 맑스에게, 그리고 맑스는 로스차일드에게 본능적인 경외심을 품고 있을 거라 확신하다. 어떤 이에겐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와 국제금융자본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호 호! 맑스의 공산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한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있는 곳에 중앙은행이 있으며 또한 기생충 같은 유대민족이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인민을 더욱 악착같이 착취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살찌울 것 있다... 실로 맑스가 주창하는 사회는 진짜 프롤레타리아들에겐 노예수용소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제복을 입은 노동자 남녀는 북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들고, 일할 것이다. 이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은 영리한 유대인 소수에게 돌아갈 것이며 이들은 중앙은행들의 국제적 연결망을 통한 가렴주구로 만국 민중의 노동을 착취할 것이다. - 바쿠닌"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제 1 인터내셔널, 국제노동자협회 권력을 놓고 맑스와 자웅을 겨뤘던 불세출의 혁명가였다.

   

"트베리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이 되었으나, 1834년 군대에서 나와 모스크바로 갔다. 여기서 스탄케비치 서클(19세기 초에 이루어진 모스크바의 문예서클)에 가입하여 벨린스키, 헤르첸 등과 교제하였으며, 독일철학(특히 헤겔)을 공부하였다. 1840년 유럽으로 나와 점차 혁명적인 범(汎)슬라브주의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붕괴와 모든 슬라브민족의 연방을 기대하여, 1848년 프라하의 봉기와 1849년 드레스덴의 봉기에 참가하였으나, 체포되어 러시아정부에 넘겨져, 1857년 시베리아에 유형되었으나, 1861년 탈출하였다.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에 참가하였으며, 18641868년 이탈리아의 혁명운동에 관계하였다. 1868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사회민주동맹을 설립, 제1인터내셔널에서는 마르크스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의 급진적인 무정부주의는 에스파냐 ·이탈리아 ·러시아의 혁명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신과 국가》(1871) 《국가와 무정부》(1873) 등이 있다." 

[출처] 미하일 바쿠닌 [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 | 네이버 백과사전

   

젊은 시절 그 당시 청년들의 로망인 나폴레옹적 열망으로 프리메이슨에 깊이 심취하여 프리메이슨 조직에 가입했다. 허나, 바쿠닌은 프리메이슨이 별 볼 일이 없으니까 실망을 하고 탈퇴했다. 이후, 프리메이슨 조직 원리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조직을 만드는 데에 평생을 몰두했다. 맑스와 미묘하게 다르면서 같은 길을 걸은 셈이다. 맑스 역시 프랑스 대동방 프리메이슨과 그 산하, 의인동맹에 들어갔다가 의인동맹을 자신의 조직으로 만든 뒤에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니까.

   

하면, 러시아 귀족, 바쿠닌이 왜 프리메이슨에 빠져든 것일까.

   

18세기 독일 출신의 유럽 강대국 황제들은 프리메이슨에 우호적이었다. 각국 귀족들은 대체로 국왕파 대 귀족파, 혹은 국왕파 대 교황파이기 마련이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떠올리면 될 듯. 해서,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당대 황제들은 귀족파/ 교황파의 권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우호적이거나 묵인했다.

   

   

여기에 예카테리나 2세, 혹은 예카테리나 대제가 있었다.

   

"프로이센 슈테틴 출생. 독일의 작은 공가(公家)에서 태어났다. 1745년, 후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3세에게 출가한 뒤 남편의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즉위한 지 얼마 안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불렀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法典)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유명한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만년(晩年) 특히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외정(外政)면에서는 두 차례의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

[출처] 예카테리나 2세 [Ekaterina II ] | 네이버 백과사전

   

   

예카테리나 대제가 편지를 주고받은 영국 유학파, 볼테르가 프리메이슨이었다. 인드라는 볼테르하면 철가면 음모론부터 떠올리곤 한다. 

   

철가면 이야기는 볼테르가 루이 14세 엿먹이려고 꾸민 가짜 이야기 

http://blog.naver.com/medeiason/120141781751

   

예카테레나 대제는 여걸이었다.

   

"(3) 남자도, 나라도 정복한 러시아의 대제 에카테리나

   

독일의 딸로 러시아 여제가 된 에카테리나 2세(17291796)는 사랑과 색으로 충만했던 로코코시대에서도 가장 출세한 여인 중 하나였다.

   

에카테리나 2세의 본명은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 체르프스트. 눈을 내리깔고 얌전을 떨던 유럽식 궁중예절이 몸에 밴 이 15세 소녀는 시녀 몇만 거느리고 러시아의 여왕 엘리자베타 여제의 궁전으로 들어갔간다. 그녀가 머나먼 이국 땅으로 시집오게 된 것은 왕족 간에 피를 섞어 동맹국을 만드는 혼인정책, 즉 정략결혼제도가 전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침한 아우구스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타고난 지략을 동원해 러시아 왕궁을 조금씩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문제였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노골적인 파티와 그에 뒤이은 호색으로 백성들에게서 원성을 듣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 3세는 이 소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빨리 후손을 보기 원하던 모후 엘리자베타는 참다 못해 자신의 손으로 젊고 매력있는 귀족들을 골라 매일 며느리의 침실에 조용히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러시아 황실은 고대하던 황세자의 첫 울음소리로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왕이 된 표트르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신과 황후만이 안다"며 싸늘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한편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협조(?)로 방중술을 완전히 마스터한 에카테리나는 황제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정염의 화신으로 농익어갔다.

   

어느 날 에카테리나는 표트르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됐다. 당하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카테리나는 넘실대는 풍성한 금발을 군모 속에 집어넣고 군인으로 변장,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실을 점령해 버렸다.

   

33세의 에카테리나는 드디어 러시아라는 대국을 손에 넣고 우유부단했던 황제 표트르를 멀리 내치는 한편 러시아 군정을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높이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 개인의 삶은 더 화려했다. 어린 나이에 엘리자베타 여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에 눈을 뜨게 된 그녀의 성생활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하룻밤에 여러 남자를 그로키 상태로 만들 정도로 왕성해졌다. 이 소문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여성 이상의 여성'임을 자임하기 시작한 에카테리나 2세는 잠자리 역시 다른 여성과 다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docId=41356816&qb=7JeQ7Lm07YWM66as64KY64yA7KCc&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3AW835Y7v4ssvhGnAossc--342390&sid=T3ipj3JteE8AAGTCDR8

   

집권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못한 까닭에 예카테리아 대제는 프리메이슨 사상 등에 적극적이었다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국왕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프리메이슨을 단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계몽군주라 자처했던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사건은 프리메이슨이었던 평등공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평등공은 왕가 신분을 던지고 평민을 선언하여 평등공이라 하여 명성이 높았다. 헌데, 프랑스혁명이 걷잡을 수 없는 길로 치닫는 동시에 대내외적으로 프랑스혁명 배후에 프리메이슨이 있고, 프랑스 혁명 목적이 평등공을 전유럽의 프리메이슨 대왕으로 만들고자 함이다, 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당황한 프랑스 혁명 지도부격인 대동방파는 도마뱀꼬리 자르기 식 희생양으로 평등공을 단두대에 보낸 것이다. 결국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프랑스 대동방파는 내부적으로도 분열하여 자체 붕괴하고 만 것이다.

   

하여, 유럽 각국 왕들은 이전까지 귀족파/교황파를 견제할 국왕파의 사상이었던 프리메이슨 사상이 국왕파의 목을 조르는 사상이 되었으니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대제 역시 태도를 돌변하여 프리메이슨을 금지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1821년에 이르면 프리메이슨 금지법을 만든다. 허나, 이미 이 시기 러시아 귀족 사이에서는 프리메이슨 사상이 널리 퍼진 뒤였다.

   

예카테리나, 그녀는 폴란드 분할 통치의 장본인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 혹은 예카테리나 대제는 폴란드왕 스타니슬라브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면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해서 오스트리아가 국경을 맞닿는 데에 큰 위협을 느꼈다. 해서, 프러시아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중재에 나서서 하인리히 왕자를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냈다. 그 자리에서 예카테리나 2세는 프러시아의 분할안을 찬성한다. "폴란드에서는 욕심나는 것이 있을 때는 그저 몸을 구부려 집어들기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빈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가져가려면 다른 이웃나라들도 똑같이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3 명의 독일계 황제들은 폴란드를 3차에 걸쳐 분할하여 유럽 지도에서 폴란드를 지워버렸다. 

   

   

   

"폴란드는 1025년에 첫 왕이 등극하면서 국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그 땅에 유태인이 들어간 최초 기록은 966년 스페인 - 당시는 아랍령 -  외교관이자 상인이며 여행가이던 이브라힘 이반 야콥의 기록에 나옵니다. 최초의 유태인 공동체는 1085년경부터 존재했다고 나옵니다. [유태인 학자 예후다 하코헨의 기록] 당시 폴란드 주화들은 유태인들에 의해 찍혀졌고 출토되는 당시 주화들에는 여러가지 히브리어와 유태문양이 새겨있습니다.

   

1098년 십자군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있자 폴란드 왕들은 유럽국가들과 달리 유태인 초빙 쪽으로 국가시책을 정하는데 국가부흥을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군 학살로 인해 첫번째 대규모 유태인 이주가 이루어지며  1240~1241 년에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폴란드가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그것을 복구시킬 인력으로 당시 유럽사회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선 유태민족의 이민을 적극 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유럽 각국에서 추방과 학살 대상이던 유태민족은 폴란드를 그 피난처로 삼게 됩니다.

   

1264년 유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칼리쯔 장전"이 나왔습니다. 칼리쯔 장전은 기독교인과 유태인이 싸울 경우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동수로 증인과 판사가 되게 하며 유태인의 거처에는 유태인의 허락이 없으면 기독교인은 못 들어가게 하는 등, 폴란드의 소수인구이던 유태인에게 매우 유리하게 한 칙령으로, 그 목적은 폴란드 왕실의 재정을 빌려주는 입장이던 유태인이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하게 묶어두기 위한 의도였으나 그 덕분에 유태인은 폴란드에서 유럽다른 지역과 달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에게 강제개종과 학살, 화형, 마녀재판, 추방이 휩쓸고 있던 중서유럽과 달리, 폴란드는 종교자유를 누리면서 유태인공동체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좋은 피난처 나라가 되어주었습니다. 여러 폴란드 왕들이 십자군을 피해 입국한 유태인들에게 관용책을 폈으며 유태인은 폴란드와 이웃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키에브까지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폴란드는 가장 많이 유태인들이 거주하는 나라가 되고, "유태인의 낙원"으로 불리웠습니다.  종교자유 시책 덕택으로 유태교가 번성하면서 폴란드는 탈무드정리,편찬사업과 각종 유태교분파의 발전, 또 히브리어의 모체가 된 이디쉬어 등 유태교의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inter:001039&uid=128898

   

폴란드는 중세 스페인계 유태인과 하자르계 유태인의 융합로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서유럽에서 추방당한 스페인계 유태인 중 일부가 폴란드로 간 것이다. 하고, 이들 스페인계 유태인을 중심으로 러시아 등지에 있던 하자르 유태인이 적극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서, 이들 언어가 독일계 방언이라는 의미에서 이디쉬어가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스페인계 유태인과 하자르계 유태인간 혼혈 확율이 매우 낮았을 것으로 본다. 혼혈이 많이 이루어지는 미국조차 혼혈율이 고작 3%라고 한다. 해서, 극소수의 스페인계 유태인과 다수의 하자르 유태인으로 유태사회 내부에서도 계급 사회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헌데, 폴란드 역시 유태인에게 직업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유태인은 폴란드의 종교 자유 시책으로 종교 부문만을 키웠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시오니즘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드라는 시오니즘이 발생한 배경이 폴란드 유태인 사회 내부의 문제가 아닐까 본다. 즉, 폴란드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극소수 스페인계 유태인은 교리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가진 게 없는 하자르 유태인은 같은 유태인이면서 자신들이 가난한 이유를 종교적으로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서, 유태인을 영혼이 살아 있는 유태인과 영혼마저 썩어버린 유태인으로 구분하면서 교리를 강조했을 것이다.

   

후일 미국에 쏟아져 들어온 동유럽, 러시아 유태인들은 이전 유태인과 달리 유대교 교리를 매우 강조하는 입장이어서 유태인 모자 같은 것을 꼭 쓰고 다녔다. 이들이 하층 유태인, 천민 유태인인 것이다. 가난하니까 믿을 건 종교밖에 없는 것이다.

   

   

16세기 폴란드 지역 종교 분포

파란색이 루터파, 노란색이 카톨릭, 보라색이 칼뱅파, 초록색은 러시아 그리스 정교 등.

   

   

   

"카르파티아산맥 북쪽의 구릉과 평야로 된 지방으로, 주요 도시는 크라쿠프 ·리보프 등이다. 주민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며, 산업은 석탄 ·석유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14세기까지는 갈리치-볼리니아 공국(公國:키예프 공국에 속했음)이었으나, 그 후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1772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1918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로 분할되었다. 19세기에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지방이었으며, 정책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변경적 농업지역이 되었고, 대지주 귀족의 지배로 인하여 농민들의 봉기가 종종 있었다. 특히, 1819, 1824, 1832, 1846년의 봉기는 '갈리치아의 농민전쟁'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약화되었다. 서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소수민족문제로 분쟁이 잦았다. 동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에 점령되었으며, 1945년의 소련-폴란드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

[출처] 갈리치아 [Galicia ] | 네이버 백과사전

   

미국 이민사 설명을 보면, 1848년 이후로 독일계 이민이 급증한다고 나온다. 1848년 3월 농민혁명 실패로 인해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미국 이민한다는 것이다.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인드라는 원론적으로 계급투쟁적 관점에 서 있는 편이지만, 지나치게 정치일변도로 설명하여 경제적인 면을 간과하는 데에는 비판적이다.

   

 http://ganseochi.egloos.com/3825681

   

http://nojas2856.blog.me/10107556172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75510&dencrt=UHefDMujQ5NF5mlON51vaZXMwJKL3M%253%39%252B%252B6abColAmWc%253D&term=1845%B3%E2+%C8%E4%B3%E2&query=1845%EB%85%84+%ED%9D%89%EB%85%84

   

   

독일 1948년 3월 농민혁명은 독일 남서부에서 일어났다. 헌데, 농민혁명이 실패했다고 농민들이 대거 이민했다? 하고, 이들이 모두 자유주의자이다? 정말 이민간 이들이 모두 자유주의자였다면 독일 혁명은 성공했을 것이다.

   

쉽게 가자. 배고파서 이민간 것이다, 아일랜드인처럼.  다만, 배고픈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닌 것이다. 충분조건이려면 몇 가지 조건이 더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에 어떤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당대 아일랜드인이나 폴란드인은 오늘날 말하자면, 북한 탈북 인민인 것이다. 다시 말해, 배고프다고 무조건 다 탈북하지 않는다. 배고파도 참는 인민은 있는 법이다. 허나, 배고픈 데다 나라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때, 탈북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른 조건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1850년대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와 함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생긴 셈이다. 해서, 이 시기 대대적으로 독일계 이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독일계라고 해서 독일인인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때 손기정은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그처럼 미국 이민심사대에서 독일인이라고 썼다 해서 다 독일인이 아닌 것이다.

   

장기간의 폴란드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의 독립 여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월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어 1918년 11월 독립국가로 재등장하면서 폴란드는 1918년에서 1939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폴란드는 이 기간 동안 러시아와의 전쟁(1920~21)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많은 이민족을 거느린 대국이 되었으나,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프랑스와의 협력관계가 독일과의 협력관계로 뒤바뀌면서 폴란드는 파시스트화되어 갔다. 폴란드 정부는 1932년에 소련과,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나 1939년 9월 1일 나치스 독일의 침입이 시작되어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다. 나치스 독일은 점령 후 대량 학살의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어 역사에 오점이 된 잔학한 살상을 자행했다.

   

"나치 독일 점령 후 수립한 망명정부는 나치에 의한 파리 함락 후 런던에서 활약하였으며, 국내에는 망명정부 지휘 하의 국내군(國內軍)과 폴란드 노동자당이 편성한 인민군 등이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1945년 해방되었으나 1944년 8월 국내군이 일으킨 대(對)독일군 무장봉기인 '바르샤바 봉기'는 그 평가를 둘러싸고 큰 문제를 남겼다. 바르샤바 봉기로 시민 24만 명이 사망하고, 63만 명이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피살되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국민 재산의 38%에 해당하는 재산피해를 입었으며, 제2차 대전 전후(戰後) 처리 결과 폴란드 동부지역이 소련 국토에 편입되는 대신 독일 동북부지역이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국경선은 과거에 비하여 상당히 서쪽으로 이동된 것이다."

[출처] 폴란드 독립과 제2차 세계대전 | 네이버 백과사전

   

폴란드인의 독립 열정은 유태인 못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 내내 독립투쟁을 벌였다. 일차대전 때는 수많은 미국계 폴란드인들이 폴란드 독립을 위해 폴란드로 건너가서 독립투쟁을 하기도 했다.

   

   

"현재 독일인들의 성씨를 보면 슬라브계가 많은 것을 알 수있다. 이들은 대부분 슬라브인 조상을 둔  독일인일 것이다. 반면 폴란드와 체코를 지나 동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보면 독일계 성씨를 가진 사람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을 만큼 그 존재가 희박하다. 원인이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인, 스칸디나비아인, 네덜란드인, 프리지아인, 미국인 못지 않게 체코인, 폴란드인 을 포함한 서슬라브인이 독일인과 인종적으로 연관이 많다고한다. 서슬라브인은 언어계통 측에서 본다면  분명 슬라브인이지만, 인종적으로는 같은 동류의 남슬라브, 동슬라브인보다는 독일인에 연관이 깊다고한다.  (Germans are closely related to other Western Germanic peoples such as the Austrians, Frisians, English, Liechtensteiners, Dutch, and Luxembourgers, as well as West Slavs, especially Czechs.)"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310383&qb=7Y+0656A65OcIOuvuOq1reydtOuvvOyCr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3Bf1c5Y7twsscJIdgdssc--361362&sid=T3ipj3JteE8AAGTCDR8

   

문제는 폴란드인과 폴란드계 유태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폴란드인이나 폴란드계 유태인 모두 역사적으로 독일에 호의적이었다. 친독파였던 셈이다. 해서, 독일계 유태인 등이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에 독일 통일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런 친독적 성향이 갈리게 되는 때는 히틀러 집권 이후 2차 대전 때부터인 게다.  

   

   

   

상기한 그림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에서 260,000만명이 이주했다고 나온다.

   

정리하면, 초기 독일계 미국 이민자들은 용병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독일 용병은 유럽에서 유명했으니까.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군으로 참전한 용병도 대개가 독일 용병들이었다. 허나, 19세기 중후반부터 미국으로 간 독일인들 중에는 독일인도 있지만, 상당수는 겉은 독일인이지만, 폴란드 3국 분할로 더이상 유럽에 미련이 없는 폴란드인, 혹은 정체성이 모호한 이들이 다수였을 것이다. 하고, 그들 중에 일정 비율로 유태인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농촌 같은 데서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베를린이나 빈에 가본다. 일자리가 없다. 파리로 간다. 벨기에로 간다. 파리나 벨기에에도 일자리가 없다.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도 일자리가 없다. 미국으로 간다.

   

맑스가 독일에서 파리, 벨기에, 런던으로 움직였고, 맑스한테 권력투쟁에서 패한 바이틀링이 미국으로 가는데, 이 경로가 당대 일자리 루트, 인력공급업자들의 루트였을 것으로 본다.

   

간헐적으로 미국 이주를 하였다.

1840년대 흉년이 닥치고 게다가 감자마름병이 발생하여 유럽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1850년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농노제를 폐지한다.

이후 독일계 농민들이 대거 미국 이주하였다.

이중 일부가 독일계 유태인이었다.

즉, 유태인이 독자적인 이유로 미국 이주를 한 것이 아니라

독일계 농민들이 대거 미국 이주하니 그중에 유태인도 거주 비율로 함께 이주한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이 공업화 정책에 성공하고 일자리가 늘어나자

독일계 미국 이주민이 확 줄어든다.

   

그후에 들어오기 시작한 농민들이 마피아로 유명한 이태리 남부, 폴란드, 우크라이나 지역 러시아인들인 게다.

   

즉, 미국 이민의 주 공급 지역이 이전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북유럽 등이었다면, 19세기 말 이민의 주 공급 지역이 남부 및 동부 유럽인들(이탈리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그리스인, 슬라브인 등등)로 바뀌어서 산업노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볼 수 있듯, 농촌을 떠나는 이농 현상이 발생하는데, 도시에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일자리는 없다. 이들 잉여 노동력들은 캘리포니아에 금광이 발견했다 소문이 퍼지면 골드러시로 미국행을 하는 등 그때그때마다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아오는 동남아시아 노동력처럼.

   

해서, 국유본의 미국이나 호주 이민정책 방향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 백인 우위여야 한다. 흑인은 몰라도 황인종은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흑인은 쪽수가 많아도 상관이 없다. 국가 경영 능력이 역사적으로 검증된 바가 전혀 없다. 반면, 황인종은 쪽수도 많은 데다 국가 경영 능력이 있으므로 아주 어려운 사정이 아니면 황인종 이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일타 삼피.

   

유럽의 잉여 노동력을 미국으로 보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 실제로 영국 런던에서는 19세기 중엽 당국의 지원을 등에 입은 프리메이슨(?) 인력공급업 회사들이 부랑자들을 납치해서 미국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발을 위해서는 인력이 필요했으며, 미국 공업화를 위해서는 잉여 노동력이 필요했다. 19세기 초반에 이르르면서 영국, 스코틀랜드, 북유럽 인력 공급이 한계에 다다른다. 해서, 미국 중서부를 개발할 독일계 이주민이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금광 개발 때는 25만명 정도의 프랑스인을 이주시킨다.  

   

단, 국유본이 원하는 정치사회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백인 우세가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국유본이 지금까지는 한반도를 폴란드와 유사하게 보았다는 점이다. 특히 폴란드 유태인 출신 브레진스키가 대표적이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판들이 만나는 지점에는 충돌이 일어나 지진이 발생하는데, 지정학에서는 정치적 충돌이 잘 일어나는 지역을 발칸 지역으로 부른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인드라가 간다.

인드라의 목표는 한반도를 발칸 지역에서 졸업하게 하는 것.

   

"2002년의 인구 조사에서는 1억 4500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다. 대략 러시아의 인구의 78% 정도인 1억 1000만 명이 유럽 쪽에 거주하고, 나머지 인구인 4,200만명이 아시아 쪽의 시베리아 등에 거주한다. 2002년의 조사에서는, 전체 인구의 79.83%인 1억 1588만 9107명을 러시아인이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유대인 22만9,938명 (0.16%) 고려인 14만8,556명 (0.10%)"

http://ko.wikipedia.org/wiki/%EB%9F%AC%EC%8B%9C%EC%95%84%EC%9D%98_%EC%9D%B8%EA%B5%AC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국제유태자본, 로스차일드, 칼 맑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31 04:22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958597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4 : 국제유태자본, 로스차일드, 칼 맑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31

   

이 글은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중심으로 인터넷 자료를 참조하여 썼다. 평전 작가하면 유태인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데 그가 맑스 평전을 쓰지 않아 매우 아쉽다.

   

   

   

   

1. 칼 맑스의 아버지는 변호사, 하인리히 맑스

   

칼 맑스의 아버지, 히르셀 맑스는 칼 맑스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파로 개종했다. 개종한 뒤로는 하인리히 맑스가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법이 바뀌어 유태인의 직업 제한 규정 탓에 종교를 그대로 유지하고서는 변호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맑스의 변호사 능력은 어떨까.

   

   

<18세 생일 직후 칼 맑스는 약한 가슴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병역 기피 의혹은 맑스 아버지가 징집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준 편지를 보내준 것으로 뒷받침된다. "가능하다면 그곳에 있는 유능하고 유명한 의사의 확실한 확인서를 받아두도록 해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네 양심에 거리낄 일은 없을 게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중에서>

   

   

변호사 일을 그다지 잘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금이 좀 드는 방법을 아들에게 소개했으니까.   

   

허나, 칼 맑스의 히르셀 맑스는 부자였다. 모젤에 포도밭 몇 개를 소유할 정도였다. 맑스가 태어난 독일 트리어 지역은 라인란트 지방이라 부르는데, 이 지역 로망은 프랑스인처럼 사는 것이다. 현장 답사를 해보니 그리 보이기도 했다. 해서, 프랑스인처럼 포도밭 몇 개를 소유했다는 건 굉장한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맑스 가문은 1819년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에서 방 열 개짜리 개인 소유 주택으로 이사했다. 이 정도면 지금도 부자 소리 듣지 않겠는가?

   

1838년, 칼 맑스 부친, 하인리히 맑스는  칼 맑스의 나이 20세에 사망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맑스여서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후 칼 맑스 경제 생활이 딱히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대학도 잘 다녔으니까. 다시 말해, 그간 벌어놓은 재산이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맑스 아버지가 변호사업으로 그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볼 수는 없다. 생활 씀씀이도 귀족적이었으니까. 해서, 본디 집안이 지닌 돈이 많다고 본다면?

   

칼 맑스 어머니가 결혼하면서 지참금을 많이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하면, 칼 맑스 어머니는 누구인가.

   

   

   

   

   

2. 칼 맑스의 어머니, 헨리에타 프레스버그

   

   

   

   

   

 도표 제작 by 수반아

   

   

칼 맑스의 어머니, 헨리에타 프레스버그는 네덜란드계 유태인이다. 헌데, 그녀의 외가 쪽이 유명한 가문이다. 인드라가 맑스를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지만 하자르계가 아니라 페니키아/카르타고/스페인/네덜란드계 유태인 계통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바렌트 코헨 가문은 누구인가. 네덜란드에서 알아주는 부자 상인이었다.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와는 친척 사이라고 한다.

   

바렌트 코헨 가문에서 레비가 영국에 와서 사업을 시작했다. 헌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르면 이미 런던을 주도하는 대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레비 바렌트 코헨에게는 딸들이 있었는데, 이 딸들이 당대 유력 유태인 상인들과 정략 결혼했던 것이다. 

   

그중 한 명이 영국 로스차일드의 대부인 네이션 로스차일드와 결혼한 것이다.

   

집안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부자끼리 뭉치면 돈이 딴 데로 새지 않고 종잣돈이 따따블이 된다는 생각이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와 바렌트 코헨 가문의 소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 정도 친척 관계면 가난한 집안인 경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형제도 도와주지 못하는 마당에 사촌만 넘어서도 남남일 수밖에 없는 것이 서민의 삶이니까. 허나, 가진 게 돈뿐인 그야말로 지구상 최강 부자, 로스차일드 인척이라면 사정이 다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무엇일까.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맑스의 삶을 비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중 돋보이는 대목 중 하나가 맑스와 예니의 결혼이다.

   

예서, 예니는 누구인가. 예니는 귀족의 딸이었다. 예니의 아버지는 프러시아 추밀고문관이었던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이다.  예니의 배다른 오빠는 1850년대 프러시아 재무장관이 되었다. 

   

헌데, 두 사람은 1836년에 비밀리에 약혼하고, 1843년 6월 19일에 결혼했다고 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감격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계급간 인종간 비극적 사랑이 이루어졌다는 식이다. 더군다나 예니가 그 지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미인, 무도회의 여왕이었다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의도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신의 영웅인 맑스가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온갖 신분차별을 다 극복하고 미인을 쟁취할 만큼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리라. 불쌍한 남아공 출신 런던 또라이 색희^^!

   

허나, 어쩌랴.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인드라가 가볍게 웃었다는 것을! 이해해달라. 성격인 것을~! 맑스나 인드라나 이런 점은 비슷한 것 같다.

   

- 모든 것을 회의하라!

   

맑스 1818년생. 예니 1814년생.

   

둘이 비밀 약혼한 1836년 당시 맑스 나이 18세, 예니 22세.

   

둘이 결혼한 1843년 당시 맑스 나이 25세, 예니 29세.

   

"[결혼연령]

르네상스가 나타나기 전을 중세시대라고 보고 있으니.. 14세기 까지는 결혼연령이 14세 즈음 이었습니다. 여성은 약혼은 최소 12세, 결혼은 14세였습니다. 교회가 인정하는 결혼연령은 12세로, 그 전에 한 결혼은 무효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나이와 비교해서는 굉장히 어린 나이인데..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출산시 사망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귀족은 아주 늦게 해서 20-24세에 결혼을 하는 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예로 12세기 영국 왕 헨리2세는 19세에 결혼을 했어요)

   

이후 르네상스가 퍼지면서.. 즉 14세기 이후부터는 15-16세의 젊은층으로 나이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16-19세기 에는 오늘날의 연령과 가까운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17세기의 교회자료에 따르면, 평민들은 남자는 26세 이상, 여자는 24세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족 젊은이들의 결혼연령만 이보다 낮았다고 합니다.

   

[사망연령]

중세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남짓이었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고, 고된 일 때문에 하층민의 수명이 짧았기 때문인데 왕이나 교황 중에는 70세, 90세까지 산 사람의 경우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 루키우스 3세) 이후 수명은 점점 높아져 15 -18세기 에는 평균수명이 약 40-50세가 됩니다.

서양중세의 삶과 생활, 중세로의 초대 참고"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hty.top&where=nexearch&ie=utf8&query=19%EC%84%B8%EA%B8%B0+%EC%9C%A0%EB%9F%BD+%EA%B2%B0%ED%98%BC%EC%97%B0%EB%A0%B9

   

   

해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 있겠다. 허나, 가장 무난한 설명이란, 칼 맑스 나이가 어리고 공부하는 중이니 학업을 마친 다음에 결혼합시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예니 집안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딸을 시집을 보내는데, 사위가 직업이 확실해야 될 것 아니냐.

   

헌데, 나이 고작 18세의 기숙사 생활하는 젖비린내나는 대학생.

   

맑스가 왕이냐? 세습 귀족이냐? 뭘 믿고 딸을 주냐? 당신이 예니 아버지라면 맑스에게 딸 주겠어? 못 주지! 암.

   

해서, 사실 맑스 어머니 가계도를 몰랐을 때까지만 해도 맑스 평전을 읽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예니 아버지는 뭘 믿고 딸을 주었을까.

   

유태인 출신 변호사 집안이랑 독일 귀족 가문이 아무리 옆집에 살고 있었다고 해도 어려서부터 어울리겠는가. 심지어 예니 아버지는 어린 칼 맑스에게 호머와 세익스피어이니 뭐니 하는 문학작품과 사회주의를 소개해주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예니 아버지는 칼 맑스에게 과잉 친절을 해주었으며, 집안끼리 오가는 와중에 예니와 맑스가 어릴 때부터 친교하면 애정이 싹트는 건 시간문제임을 알면서도 왜 모른 척했던 것일까^^?

   

예니 아버지. 알고 보면 무서운 사나이. 유럽 정세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니가 태어난 1814년. 맑스가 태어난 1818년. 이 시기는 나폴레옹 시대가 저무는 시대였다. 동시에 전유럽에 로스차일드 이름을 알리는 시대이기도 했다.

   

예니 아버지가 라인란트 귀족이었으니 모르면 간첩인 게다.

   

같은 라인란트 지역인 프랑크푸르트 출신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용병장사로 당대 유럽 최고의 부자가 된 독일 헤센 귀족이 절대 신임하는 재산관리인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나폴레옹 군대가 로스차일드 목에 칼을 들이대어도 재산을 지킨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던가. 또한, 그 로스차일드 아들이 런던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 경제의 70%를 석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듣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영국 국왕은 독일계.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라는 어용상인이 헤센 가문과 어떻게 연을 맺을 수 있었는가. 헤센 가문 재산관리인은 관료였다. 하는 일이 천문학적 거래인데, 관료였던 만큼 월급이 매우 작았다. 이 관료와 연을 맺은 것이다. 관료와 정치인은 돈이 필요하고, 장삿꾼은 껀수가 필요한 게다.

   

그처럼 예니 아버지는 하인리히 맑스라는 덜 떨어진 유태인 넘이랑 친하고 싶어서 친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칼 맑스의 어머니인 헨리에테 가문 배경을 보고 친하게 지내려 한 것이 확실하다. 

   

허나, 예니 아버지를 속물로 볼 수만은 없다. 처세를 알았던 사람일 뿐이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미래 권력자에게 주고 싶었을 따름인 게다.

   

다만, 사정이 아무리 그래도 맑스가 18세에 결혼하자고 하는데 장인 입장에서 그걸 무턱대고 들어준다면 어찌 되겠는가. 독일 귀족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예니 아버지는 적당한 핑계거리를 대서 모양새를 만든 뒤에 결혼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이 결혼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는 예니 아버지,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이었다.

   

더군다나 칼 맑스 아버지는 1838년에 사망한다. 칼 맑스는 홀어머니 신세인 게다. 칼 맑스는 1841년 23세의 나이에야 박사학위를 딴다.

   

예니 아버지는 딸을 줄 적당한 핑계를 계속 찾고 있었고, 칼 맑스는 장인 어른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이 시기 쌩쇼를 벌였던 것 같다. 그만큼 칼 맑스에게 장인이란 삼촌과도 같은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허나, 장인 어른도 1842년 저 세상 사람이 된다.

   

미룰 수 없는 일인 게다. 1843년 결혼을 한다. 후일 프러시아 재무장관이 되는, 예니의 배다른 오빠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당연한 일이다. 칼 맑스를 민 여태까지 이유가 칼 맑스 어머니 때문이다. 헌데, 칼 맑스와 맑스 어머니가 연을 끊었다. 해서, 이 결혼 반대일세, 나오는 것이 어찌 상식을 벗어나는 일일까. 단지 눈에 별표시가 되어 연인만 보이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자들 입장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뿐인 게다.

   

칼 맑스 집안에서는 칼 맑스가 헨리에테 여사와 연을 끊었기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칼 맑스 어머니가 유학 시절의 칼 맑스에게 크게 실망한 모양이다. 어느 유학생 생활비보다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는데, 칼 맑스는 그 돈을 몽땅 술 마시는데 탕진했다고 한다. ㅋㅋㅋ 술고래, 맑스. 참다 못한 맑스 어머니는, 니가 정녕 사람이냐 역정을 내며 정치/사회주의와 어머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 모양이다. 칼 맑스는 정치/사회주의를 택했다.

   

해서, 결혼식에는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의 후처인 예니 어머니와 예니의 멍청한 남동생, 그리고 친지 몇 명만이 참석했다. 둘은 결혼 직후 한동안 남작 집에서 밀월을 즐기다 파리로 갔다.

   

정리하면, 이 결혼은 칼 맑스 아버지의 염려가 현실이 된 셈이다. 하인리히 맑스는 칼 맑스의 약혼 소식에 칼 맑스의 악마적 심성이 칼 맑스 부부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인드라 생각에 하인리히 맑스 결혼 생활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헨리에테 여사와의 결혼 생활, 마님을 모시고 살아야만 하는 머슴 생활, 그 결혼 생활이 자식대에서 되풀이되는 것에 대해 아버지로서 걱정을 한 셈이다.

   

그 자신이 헨리에테 여사라는 귀족 유태인과 결혼하여 결혼 내내 짓눌려 살아야만 했던 삶을 자식이 되풀이하는 꼴을 보아야 하는 슬픔을 '악마적 심성'이라 표현한 것이다. 즉, 이때 '악마적 심성'이란 못 오를 나무를 올려다 본 자신의 탐욕에 대한 회한일 것이다. 격이 맞는 집안끼리 했어야 서로에게 행복했을 터인데...

   

동시에 장인 어른의 뜻도 이루어진 셈이다. 1850년대 프러시아 재무장관이 된 예니의 배다른 오빠가 과연 순수한 개인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을까. 이는 1852년, 프러시아에서 런던으로 파견한 밀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맑스는 비록 공산당 선언을 써서 유명세를 탔다고 해도 당대는 1848년 2월 혁명 실패로 맑스가 매우 낙담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 맑스는 별 볼 일이 없는 넘이었다. 헌데, 입술좌파 - 인드라가 만들어보았다. 입에 술을 달고 다는 특이한 족속을 일컫는다 살롱좌파보단 재미있는 표현이잖아? -  맑스를 왜 프러시아 밀정이 감시하겠나^^?

   

인드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었다고 본다. 어머니와 연을 끊었다던 칼 맑스. 생활이 궁핍해지자 친척들에게 연신 편지를 쓰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때, 친지 중에 친가 쪽으로 메일을 썼을까, 아니면 외가 쪽으로 트윗을 보냈겠나^^?

   

   

   

맑스는 외숙인 레온 필립스와 친했는데 극빈 시절에는 염치없이 손을 벌리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필립스 집안은 맑스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친척이었다. 맑스가 특히나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숙부인 리옹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필립스는 네덜란드 축구클럽 PSV 에인트호번의 주요 스폰서이기도 하다. 필립스는 1891년에 칼 맑스 모계 사촌인 제랄드 필립스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설립했다. - 필립스에 관한 인터넷 자료 중에서

   

이빨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칼 맑스. 뉘앙스 풍부한 문장력으로 지인들에게 기대와 실망감을 동시에 주었을 터.

   

어머니는 틈만 나면 딸들을 칼 맑스에게 보내 탕아 칼 맑스가 되돌아오기를 기대했던 듯싶다.

   

맑스의 여동생들은 칼 맑스를 비롯한 당대 쟁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저녁 만찬에서 늘 강조했다고 한다.

   

- 오빠가 지금 비록 정신줄을 놓고 있지만, 우리 가문, 댁들하고는 다른 고귀한 핏줄이거든요?

   

이때, 세상을 당장 바꿀 것같은 혁명가들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맑스 줄만 잡고 있으면 최소한 떡고물이 떨어지겠군!'

   

허나, 속을 내보인다면, 어디 베테랑 혁명가 소리를 듣겠는가.

   

- 동생분도 역시 혁명가 핏줄을 이으셨군요. 암요, 고귀한 핏줄이지요. 혁명가 핏줄.

   

맑스 여동생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귀족답게 속으로 경멸했을 것이다.

   

'하여간 혁명가라고 하는 색희들 속으로 돈타령하는 위선질 꼴은 정말 역겨워.'

   

- 언니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날뿐이지요.

   

   

   

   

3.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의 신비로운 진정한 정체는?

   

맑스가 1840년대부터 1863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예로 맑스 자식들이 죽었음을 예로 든다.

   

허나, 과연 그럴까? 

   

19세기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 40세 ~ 50세일 만큼 열악했다. 특히 런던이라고 사정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시기 삶을 알고 싶다면, 디킨즈 같은 소설, 혹은 디킨즈 소설을 영화화한 올리버!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런던이 이 정도이니 다른 곳은 어떠하겠나. 맑스는 본디 인드라처럼 장남도 아니었다. 장남이 일찍 죽으니 장남이 된 것이다. 하고, 인드라 여동생이 아직 꽃을 피우기 전에 일찍 죽었듯이 맑스 형제들도 죽은 것이다. (어, 갑자기 눈물이 ㅠㅠ)

   

하여간, 맑스가 부유한 집안에서 살았음에도 맑스 형제들 중에 몇몇이 어린 시절에 죽었다는 것이다. 마치 맑스의 자식만이 굶주림 탓에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위생 문제 등이 매우 심각한데, 그만큼 보건의료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오늘날이라면 간단히 치료가 될 병도 치료하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일 뿐이다.

   

이 시기 유럽 지식인들 중 어지간한 넘들이 죄다 폐병 환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여간 맑스가 아주 아주 가난하게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맑스가 참 부유하게 살았다. 다른 말로 낭비벽이 있었다. 이유는? 예니가 명품족이었다. 맑스는 예니와 결혼하면서 내내 채무 의식을 지녔던 것 같다.

   

- 어찌 고귀한 이가 나 같은 천민과 결혼을 해서 이 고생이오?

   

사실 알고 보면, 베스트팔렌 집안도 근본을 따지면 야만족이라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족속이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예니는 태어나길 귀족의 딸로 태어났고, 평생 귀족처럼 살다간 것이다. 맑스는 예니가 어릴 때 살던 그대로를 유지시키고자 무던히 애를 썼던 것이다. 해서, 가정부를 둔 것이다. 다만, 가끔 내가 왜 머슴살이를 해야 하나, 하고 술 먹고 정신줄을 놓았을 때, 이상하게 이심전심이 되어 통한 가정부와 관계를 가진 듯싶다.

   

아무튼 맑스는 귀족처럼 살아야 했다. 일반 서민처럼 살았다면, 굳이 엥겔스의 도움이 필요없었을 수 있다.

   

이때, 엥겔스가 등장한다.

   

엥겔스는 프러시아 방적업자의 아들이란다.

   

헌데, 인드라가 그간 어느 자료를 보더라도 엥겔스 출신에 대한 이력은 누군가 흡사 삭제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맑스에 대해서는 사돈의 팔촌까지 설명이 상세하다. 반면, 엥겔스는 어떠한가. 엥겔스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저 엥겔스 어머니가 엘리자베쓰 엥겔스라는 것뿐이다.

   

엥겔스가 어떤 인물인가를 굳이 세세하게 소개하지 않겠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79323

   

중요한 건, 엥겔스가 있었기에 맑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엥겔스가 없었다고 생각해보자. 맑스는 오늘날처럼 알려진 맑스가 될 수 있었을까?

   

많은 이들이 엥겔스를 비판한다. 맑스를 오독했다고 말이다. 허나, 당대에 엥겔스 만큼 맑스를 이해한 사람이 또 누가 있나?

   

인드라가 묻는다. 오늘날 인월리를 온전하게 읽는 이가 몇 명이나 되나?

   

인드라가 인드라 이웃의 격을 고려해서 인드라 생각을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인드라가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면서 인드라 글쓰기를 그나마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 열 명 이내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해서, 기대도 하지 않지만, 실망도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인월리의 10%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망하지 마시라.

사실 10%만 이해해도 대단하니까.

   

하여간, 하여간! 그리고 하여간?

   

엥겔스가 없었다면, 맑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만큼 엥겔스가 인드라 관심 대상이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국유본론 정립 전까지는 관심이 맑스에게 있었지, 엥겔스에게는 없었다.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천 년대 이전까지는 인드라가 맑스인양 생각했다가 이천 년대로 접어드니 인드라는 예수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처럼 인드라보다 맑스적인 인물을 찾았는데 그것이 엥겔스적 모습이었던 것 같다. 허나, 그러한 작업이 아쉽게 끝나서 이제 인드라가 은둔할 때인가 싶을 때, 국유본론을 만난 것이다.

   

해서, 이제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맑스보다 엥겔스에게 더 관심이 간다. 대체 엥겔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맑스 가계도는 인터넷에서 약간 수고로운 검색만 하면 다 나온다. 반면 엥겔스는 인드라의 숙달된 만큼 신비로운 검색법으로도 가계도가 나오지 않는다.

   

왜 엥겔스 아버지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인가.

   

나온 단서라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Leupold라는 대규모 수출회사에서 경영훈련을 시작했다. 엥겔스 아버지가 엥겔스 경영 수업을 시키고자 김나지움을 중퇴시키고 일찌기 경영 수업을 시켰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인드라 마음에 든다. 인드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인문고 대신 상업고를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쪽발돼중, 쪽발놈현, 이명박 쉴드치느라고 구라치는 넘들이 많은데, 인드라가 고교 다닐 80년대만 하더라도 상업고 인기가 인문고 인기보다 좋았다. 커트라인이 더 높았다. 왜? 하루바삐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반면, 공업고 인기는 낮았다.

   

현데, 상업고여서 마이너라고? 개가 웃을 이야기다. 당장 역대 국회의원 출신들 조사해봐라. 야구부있는 상업고등학교 중심으로 조회하면 1980년대까지 한국 권력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지경이다.

   

독립군 고문하던 일본 헌병이었던 니 애비, 쪽바리가 그리 가르치던? 역사를 조작해도 인민은 모르기에 양심에 털나지 않는다고? 

   

 다른 하나는 ermen & engels 회사이다.

   

엥겔스 아버지는 프러시아에서 직조업 사업을 꾸렸고, 영국에도 동업하여 방적업을 하고 있었다. 해서, 회사 이름이 ermen & engels이다. 즉, 에르멘과 엥겔스 합작 회사라는 것이다.

   

예서, 엥겔스는 1844년, 맨체스터에 소재한 이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썼다고 한다. 하고, 엥겔스는 아버지가 강제한 이 일이 싫어서 하지 않다가 18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하기 싫지만 맑스 생계를 대기 위해서 회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1869년에 동업자인 에르멘에게 가진 지분을 모두 매각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볼 점.

   

에르멘. 독일어 기원으로 전체, 우주라는 의미라고 한다.

   

 Emma (EM-a) - Derived from Germanic ermen (meaning 'whole' or 'universal')

   

또한 그 성 유래가 참회왕 에드워드 어머니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잉글랜드의 왕(재위 : 1042~1066). 서(西) 색슨계의 왕으로 에델레드 2세(Aethelred Ⅱ)의 아들. 데인 사람인 커뉴트(Knut) 대왕과 그 아들이 잉글랜드 왕위에 있을 때에는 노르망디에 피신해 있다가 하르디 커뉴트의 사후 웨섹스 백(伯)의 비호로 즉위, 그 딸 에디스와 결혼, 그의 원조에 의해 정치하였다. 그는 왕궁의 풍습을 노르망디식으로 고치고 그들의 세력을 보급하여 뒤에 노르망디에 의해 정복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앵글로 색슨이 노르만인에게 정복되는 최후를 장식한 왕으로 무능하고 유치했으나 그 후 인민과 외래인이 왕실과의 대립과정에서 자유 잉글랜드의 상징으로 이상화하여 경모되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건립하는 등 신앙심이 극도로 깊어 "참회왕"이라고 추존되었다. 《에드워드 참회자의 법 The Compilation Laws of Edward the Confessor(1070)》이라는 법령집을 만들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3037

   

에드워드왕을 한국으로 치면 고려 왕건에 나라를 바친 신라 경순왕인 게다. 에르멘이 이런 에드워드왕의 어머니 성이다?

   

맑스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은 온통 맑스 가문에만 집중한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맑스 주변 인물만 캐면, 특히 물주만 조사하면 그냥 답이 나올 것 같은데, 답이 안 나온다? 왜? 자료가 부족하다. 인드라가 왜 딱 이 대목까지만 말하는 것도 권력이란 역시 자본력이 가장 막강함을 실감하겠다 ㅎㅎㅎ

   

   

국유본이 자료 단속하나^^?

   

   

   

   

 4. 맑스 물주는 예니, 어머니, 엥겔스, 그리고 위드?

   

   

맑스 어머니, 헨리에타 여사는 1863년에 돌아가셨다. 

   

(휴. 어머니. 죄송해요. 인드라가 그간 평생 정말 어머니에게 못 되게 굴었어요. 왜 어머니만 생각하면, 어머니 말만 들으면 피가 솟구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제 의지만은 아닙니다. 마.자.세. 앞으로는 효도만 하고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맹세하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꼭 맹세하면 그 다음 날 바로 인드라에게 시련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어서요.) 

   

정리해보자.

   

맑스 첫번째 물주는 예니였다. 예니 친지로부터 소소한 두어번의 유산 상속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예니 어머니와 예니 남동생 정도일 것이다. 허나, 이들은 얼빵한 탓에 베스트팔렌 가문 재산을 얼마 차지하지 못했지만, 나름 짭짤했을 것이다. 물론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금새 탕진했다.

   

맑스 두번째 물주는 어머니였다. 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각종 맑스 평전에는 기록하고 있는데, 솔직하게 납득할 수 없다. 만일 맑스 어머니가 진짜 관심이 없었다면, 맑스가 자본론을 내었다는 소식에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을 만들었으면 좋을 터인데, 따위의 논평이 절대로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 맑스 평전들을 보면, 예니를 소크라테스 악처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 대신 맑스 어머니를 소크라테스 악처로 만든 감이 있는 것이다. 느낌상 뭔가 억지스러운 게 많은 게다.

   

인드라가 여전히 철이 없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그림이 나온다. 맑스 어머니가 겉으로는 맑스와 연을 끊은 듯이 보이지만,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사람 만나면서 맑스 좀 잘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닌 모양이다.

   

맑스가 홀로 잘 나서 국제노동자협회, 혹은 인터내셔널이다 깝치고 다닌 모양이지만, 나름 맑스 어머니가 물심양면으로 은근 맑스를 도와달라 여기저기 말하듯 싶은 것이다. 해서, 맑스 어머니 관점으로 1차 인터내셔널을 재조명한다면,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만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하여간, 맑스 어머니가 돌아가자 유산 상속이 이루어져서 맑스 삶이 갑자기 상류층이 되었다. 집 이사도 하고 그러면서 제 1 인터내셔널 활동도 본격 전개하고, 자본론도 쓰고, 잘 나갔다. 물론 이내 명품 사랑 때문에 재산을 탕진하지만. 역시 물주가 중요해요~!

   

사회주의 역사, 인터내셔널 역사도 물주 중심으로 바뀌면 보다 실체적 접근을 하면 좋을 터인데, 언제까지 이념 중심으로 청년들에게 백해무익한 허상만을 제공할 것인지 ㅠㅠㅠ

   

(알고 보면, 인드라가 맑스보다 약간 더 점수를 주고 있는 폴란드계 유태인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된장녀였다고 한다. 어이쿠~ 우리네 한국 된장녀들 인드라 말에 힘내겠네~! 하긴, 씨발, 왜 된장녀만 탓하는데, 된장녀보다 못난 병쉰색희들 투성인데.)

   

이제 맑스 물주 네번째 위드이다. 

   

 언론인 출신인 위드는 반메이슨 운동의 지도자이자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영향력을 발휘하며, 링컨을 포함해서 미국 여섯 대통령의 킹메이커로서 활약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위드가  인쇄소 견습공 출신에 불과하던 호레이스 그릴리를 뉴욕 트리뷴지 발행인으로 만든다. 

   

이때, 맑스 명함에 무엇이 새겨져 있었던 것일까?

   

반메이슨 신문 뉴욕 데일리 트리뷴 유럽 통신원 칼 맑스.

   

칼 맑스의 통쾌한 지점이란 무엇인가. 당대 프리메이슨 특권적 조직을 비판할 수 있어도 누구도 감히 당대 프리메이슨 정신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허나, 비판을 과감하게 하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칼 맑스였다.

   

칼 맑스는 특히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형제애에 대한 집중 성토했다.

   

의인동맹의 바이틀링을 비판할 때 구사한 방식이다. 당대 바이틀링은 비밀 결사체를 유지하며 소수의 엘리트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때, 칼 맑스는 의인동맹의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적 '우리는 형제이다' 슬로건을 비난한 것이다.

   

형제끼리 총질하는 게 프랑스 혁명이었고, 2월 혁명이었는데, 뭔 개소리냐? 이것이 칼 맑스가 온갖 쌈박한 논리로 공산당 선언이다, 프랑스 혁명 삼부작이다 한 것의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 형제는 없다. 이제는 계급이다,가 맑스의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이런 대목에 반한 것이, 미국의 위드였던 게다.

   

왜? 간단히 생각해보자. 한총련 조직을 깬다고 주사파가 무너지나? 절대 아니다. 중요한 건, 정신 회복이다. 쪽발 정은을 쪽발 정은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 한반도 통일은 없는 셈이다.

   

해서, 국유본이 인드라를 현재 매우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위해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다시 본론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신랄한 불평은 엥겔스의 입에서 나왔다. 엥겔스는 말했다. '그는 저널리스트가 아니야. 저널리스트가 될 수도 없어. 다른 사람 같으면 두어 시간이면 써낼 사설을 무슨 심오한 철학 문제라도 다루는 것처럼 하루 종일 붙들고 앉아 있으니 말이야. 바꾸고 다듬고, 그러고 나서 바꾼 것을 또 바꿔. 그 끈질기고 철저한 태도 때문에 글이 제 시간에 나오지를 못해.' ;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중에서"

   

맑스는 체질적으로 언론인이 될 수 없었다. 저널리스트가 되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저널리스트가 되지 못하니 맑스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시스템이었던 게다. 누군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물자를 대주어야 하는 임시방편의 시스템이었던 게다.

   

바로 이런 모습대로 사회주의가 건설되었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1851년 맑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통신원이 된다. 예서, 대체적인 관심사는 맑스가 부르주아 신문에 기고를 하느냐는 따위일 것이다. 허나, 인드라가 이 기사를 읽었을 때, 독특한 흥미를 느낀다. 이것이 인드라와 여러분의 차이일까.

   

   

뉴욕 인구가 네덜란드 점령 시절 17세기에는 800여명, 독립 당시인 18세기 말에는 삼사만 명,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850년에는 대략 70만이었다. 뉴욕에서는 1830년대부터 요즘 우리 식으로 보자면, 지하철 무료신문이라고 할 정도인 저가인 페니 신문이 유행이었다. 따라서 하층민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835년에 창간된 뉴욕 헤럴드는 창간 직후 발행부수가 삼만 부에 이를 정도였다.

   

헌데, 뉴욕 트리뷴지는 주간지인 경우에 이십 만부가 팔려나갔다. 이 당시 발행부수가 고작 오천 부였던 맑스의 신라인신문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인 셈이다. 물론 뉴욕시민만 읽은 것이 아니라 뉴욕 북부에 위치한 뉴잉글랜드에서도 읽었다.

   

인쇄소 견습공 출신이던 호레이스 그릴리는 반메이슨운동의 지도자이자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영향력을 발휘한 위드를 만난다. 하여, 태머니파(현 노예민주당) 성향의 페니 신문들과 달리 노예제도 폐지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등 반노예민주당 성향을 내보인다. 호레이스 그릴리(Horace Greeley)는 1841년에〈뉴욕 트리뷴〉을 창간한 후, 종종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는 사설을 발표하여 뉴욕 트리뷴지를 일등신문으로 만든다. 그는 훗날 링컨 사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서기까지 한다. 

   

1850년대는 호레스 그릴리의 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이후 미국 언론은 호레스 그릴리에 영향을 받은 언론인들로 꾸려진다.

   

뉴욕 트리뷴에 있던 리치몬드가 1851년에 뉴욕타임즈를 창간한다. 그는 1860년대에 어떤 언론도, 심지어 뉴욕 트리뷴지도 꺼려하던 태머니파 비리를 폭로하여 폭로 저널리즘의 효시로 기록된다. 이후 저널리즘은 사설의 시대에서 폭로의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뉴욕타임즈는 퓰리처와 허버트가 내세운, 재미가 없으면 저널리즘이 아니다, 라는 황색 저널리즘에 경영난을 겪어 옥스에게 준다. 미국 언론은 사주가 바뀌면 정체성 자체가 바뀐다. 이후 뉴욕타임즈는 더 이상 뉴욕타임즈가 아니었다.

   

헌데, 리치몬드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다. 그는 뉴욕 트리뷴의 편집장이었으며, 맑스와의 연결고리였다. 해서, 그가 호레이스 그릴리와 충돌하여 사임하자 맑스도 뉴욕 트리뷴지 기고를 끊게 만드는 핵심 인물인 것이다. 그 인물은, 훗날 링컨의 전쟁부 차관보를 역임하고, 뉴욕 선지를 인수하여 편집장을 했던 찰스 앤더슨 데이나(Charles A. Dana)이다.

   

찰스 A. 데이나

http://en.wikipedia.org/wiki/Charles_Anderson_Dana

   

예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오늘의 여정을 정리해야겠다.

   

과연, 로스차일드가문의 국제유태자본은 대륙을 뛰어넘는 심계를 지녔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이었던 것일까. 정답은 없다. 그저 여러분이 존재하고, 인지하고, 실천하는 데서 변화하는 것이니까.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끝무럽에는 영국 공주 대리인과 맑스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다.  

   

1879년, 영국 여왕의 딸이자 훗날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부인이 되는 여성 왕위계승자 빅토리아는 마운트 스튜어트 엘핀스턴 그랜드 더프 경에게 맑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마운트 스튜어트 경이 맑스와 약속을 잡는다.

   

둘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이 만난 보고서를 마운트 스튜어트 경이 공주에게 제출했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칼 맑스는 폐하와 공주에 대해 몇 번 언급했는데, 그때마다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세상을 뒤집을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닐 것입니다. - 프란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중에서"

   

   

   

   

"1997년 4월 29일 화

   

시계까지 말썽이다. 시계가 고장이 났다. 룩셈부르크로 가는 기차로 도중에 트리에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RB선으로 갈아탔다. RB선을 굳이 비유한다면 우리네 비둘기호라고 할까. 역마다 선다. RB선도 콤파트먼트식이지만, 탁자가 없으며, 흡연석은 1등석에만 있다. 

   

비가 내린다. 새벽 기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라인강을 바라보며 가니 언짢은 기분이 조금씩 풀려온다. 춘천행 기차를 떠올려 보라. 생각해 보니 라인강변보다는 북한강변이 훨씬 괜찮은 듯싶었다. 새삼 우리네 금수강산에 대한 자긍심이 밀려온다. 비가 계속 내린다. 약간 배고프다. 프랑스 바케트빵 맛이 그리워졌다. 바케트빵에 독일 맥주 한 잔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일 터인데... 식욕을 잠재우고자 생각에 몰두하였는데 생각할수록 더 배가 고팠다. 점심 먹고 물만 먹었으니...

   

새벽을 지나 이제는 아침이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침 기차에는 출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이 떠들썩하다.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들을 본다. 문득 나는 즐거워졌다. 내가 여행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른 이들이 여느 날처럼 일상적 생활을 할 때 바로 옆에서 나는 그들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내가 조금 흥분하여 노트를 꺼내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하는데 차장이 표 검사를 한다.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쓰자 차장이 나를 슬쩍 보더니 윙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학생들은 코헴역에서 대부분 내린다. 굳이 유람선이나 로맨틱가도를 달리는 버스를 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연히 풍경에 녹아든 독일인들의 일상을 보니 마음이 즐겁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비가 내리는 라인강변의 집들은 아름다웠다. 우리네 금수강산에도 자연과 합일하는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강산인데...

   

트리에 도착. 역에서 시내만 다니는 전차를 타서 Hauptmarkt에서 내려 맑스 기념관으로 향하다. 작은 읍 정도에 불과한 이 도시도 겉모습만 보면 참 살기 좋은 동네로 보인다. 가는 도중 재래시장을 접하다. 아침 일찍 신선한 야채와 꽃, 생선 등을 거리에 진열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엽서처럼 괜찮았다.

   

맑스 기념관 가까이에 이르러 한 여성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파마를 한 검정머리, 푸른 눈의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사우쓰? 노오쓰?라고 묻는다. 그래도 사정을 아는 여성이다. (몇몇 독일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본 조심스런 생각은 독일인들이 한국에 대해 다른 유럽인보다는 아는 편인 듯싶다.) 뭐 이런 촌동네에 볼 것이 있겠냐하는 투가 역력한 표정으로 여기에는 왜 왔냐고 했다. 맑스를 보러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배를 비벼 끄더니 오! 맑스! 그러면서 놀라면서도 친근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와 헤어진 후 맑스기념관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해서, 이리저리 거리 구경하다 다시 가보니 계속 닫혀 있는 것이다. 어? 무슨 일일까,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념관에서 일하는 여성이 당신이 찾는 맑스기념관은 여기가 아니라 맑스가 탄생한 집이고 여기서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은 연구소쯤 되는 것이었다. 관료적 말투로 딱딱하게 대하는 것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기분으로 맑스가 탄생한 집에 갔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다. 혼자서 맑스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전시된 사진들을 본다. 아, 초라하기 짝이 없다. 책으로만 보던 이들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사회주의운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별 느낌이 없이 맑스 동상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중국인들이 몰려왔다. 모택동 모자를 쓴 중국인들은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로 보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저마다 맑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나에게 와서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찍어주었다. 갑자기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난 지금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왔는가? 중국 관료들로 보이는 저들과 무엇이 다를까? 중국 관료들이야 자신들 출세시켜 주었으니 맑스를 고맙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나는 뭔가.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뭔가 다른 듯이 행동하는, 론리 플래닛에서 '향수에 젖은 사회주의자들'이란 대목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현재형이라고 믿었던, 뭔가 혁명적인 계기를 얻을 것만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연극처럼 느껴졌다. 잔뜩 긴장한 채로 뭔가를 갈구하며 맑스의 집에서 헤매던 나를 일깨워준 것은 중국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맑스 흉상을 원했으며, 다른 것들은 안중에 없었다. 마치 정치인의 사진 찍기처럼.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워하였으며, 그것으로 맑스 관광이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아아! 그들에 비한다면 나는... 나는 반성하는 자세로 그들에게 나도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나의 초라하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보라.

   

트리에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맑스를 비난하는 이들이나 맑스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죽을 듯이 보이는 교조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나는 해방되었다. 그만큼 그들과 나에게 맑스는 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 맑스를 만났으며, 맑스를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 산업이 되기도 하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가 박정희와 같은 대접을 받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맑스는 금기된 무엇이기도 하다.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아니, 그 굴레를 영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던 모든 관념들이 깨끗하게, 일순간에 정리된 것이다. 이제 나는 맑스를 내 머리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가 맑스주의자라고 했던 그 모든 굴레들로부터 맑스를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여! 당신, 그동안 내 머리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맑스여! 해방이다! 그 순간 동상의 맑스가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세상이 나, 맑스를 해방시킬 일만 남았군, 그래." 나는 순간 혁명적인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안녕! 트리에! 안녕! 맑스 산업! 그리고 기념하는 모든 것들이여! 이제는 안녕!

-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중에서"

   

   

가수 박정현의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를 아세요?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30 04:33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88043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3 : 가수 박정현의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를 아세요?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30

   

오늘은 인드라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모아서 인월리를 내놓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다. 인드라는 인터넷 자료를 통해 인월리를 쓴다. 왜 여러분은 인드라처럼 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하나. 정보를 어디 가면 볼 수 있지? 정보가 어디에 있는 지를 모른다. 어떻게 검색해야 하는지 모른다.

   

둘, 보물섬 지도라도 해독할 줄 모르면 말짱 꽝이다.

   

셋,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분석 판단해야 한다. 일단 모은 정보라도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고 난감해 한다. 

   

   

   

   

1. 박정현과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

    

가수 박정현이 파이베타카파 출신이라 해서 한국에서 화제이다. 헌데, 박정현만 파이베타카파일까. 

   

한국인으로는 1999년에 파이베타카파 명예회원이 된 사람이 김성복 교수이다. 미국사 연구로 정식회원이 아니라 명예회원이 되었다. 

   

국유본이 한국인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때부터라고 보고 있다. 시작은 클린턴의 사돈, 메즈빈스키 여사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골드만파 힐러리 클린턴의 사돈이자 첼시 클린턴의 시어머니는 마저리 마골리스 메즈빈스키이다. NBC방송 기자 출신으로  필라델피아 지역방송과 NBC 방송 등에서 24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다섯 차례나 에미상을 받았다. 1993~95년 필라델피아주 하원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예서, 마저리의 특기 사항은 한국과 관련한 문제이다. 마저리는 28살이었던 1970년 한국에 와 고아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한국 소녀 리혜(Lee Heh)를 입양했다. 당시 미혼이었던 마저리는 미국 역사상 미혼 여성이 외국 어린이를 입양한 최초의 인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리혜 입양 후에도 마저리는 한국과의 인연을 지속했다.  마저리는 리혜 외에도 미혼시절 베트남 소년을 한 명 더 입양했으며 에드워드 메즈빈스키를 만나 결혼하면서 총 11명의 자녀를 보살폈다. 메즈빈스키 부부는 첼시의 남편 마크를 비롯해 2명의 아들을 낳았다. 또 3명의 베트남 소년을 더 입양했으며 메즈빈스키가 이전 결혼생활에서 4명의 자녀를 둬 11명 자녀를 둔 것이다.

   

마저리가 입양 할 당시 리혜는 6살이었다. 1979년 15살이었던 이혜는 워싱턴국립가톨릭스쿨에 다니면서 수 백 명의 지원자들 중 미 의회 '사환'으로 뽑혀 화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TV출연을 비롯해 언론 매체 인터뷰를 통해 입양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고 아동잡지를 위해 유명인을 인터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 당시 '정치와 연예계' 중 어디에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연예계"를 선택하며 "나는 유명해지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현재는 뉴저지에서 변호사 남편 케네스 메이맨과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파 클린턴 가문은 침례교이고, 메즈빈스키 가문은 유대교이다. 첼시 클린턴과 마크 메즈빈스키는 스탠퍼드 대학 동기동창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22677927

결정적인 계기는, 밤의 미국 대통령, 우디 앨런이 미아 패로우와의 사이에서 한국으로부터 20여년 전에 입양한 양녀 순이와 1997년 결혼한 사건이라고 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정부의 새 CTO로 한국계 미국인인 토드 박을 임명했다. 2003년부터 미 연방보건국(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의 CTO를 역임했던 박은 1997년 의료 전문 IT업체인 아테나헬스(Athenahealth)를 공동으로 설립했으며 그 전에는 부즈알랜&해밀턴(Booz Allen & Hamilton)에서 의료와 IT를 담당하는 경영 컨설턴트였다. 또한 의료 IT 및 보험 제도 개혁을 위한 미 진보정책연구소(Center for American Progress)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자원해 참여하기도 했다.

   

연방보건국 웹사이트(HHS.gov)에 실린 그에 대한 소개 자료에 따르면, 박은 사회적 기업을 발굴에 후원하는 글로벌 인큐베이터인 아쇼카(Ashoka)에서 수석 의료 고문으로도 활동하며 인도의 시골 마을에 저렴한 의료서비스와 맑은 물을 제공하는 벤처의 창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HHS에서 박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상당히 활기찬 힘을 보여줬다고 백악관 과학기술정책 실장 존 홀드런이 지난 금요일 블로그에 글을 남겼다. 또한 홀드런은 "미국 최초의 공공 및 민간 의료 보험 제도 개선에 대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웹사이트인 HealthCare.gov 개발을 주도했다"라고 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정부의 기술 현대화에 주력하고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IT를 활용하기 위해 CTO를 만들었다. 박은 지난 달 사임한 아니시 초프라를 대신해 CTO를 맡게 된다.

   

박은 하버드대학교 경제학을 전공하고 우등생(magna cum laude)으로 졸업했으며 엘리트들의 사교 모임(Phi Beta Kappa)에 가입된 인물이다. 박의 아버지는 한국인으로 1960년대 말 유타대학교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다우케미칼에서 30년 이상 근무했다." 

 http://www.ciokorea.com/news/11895

   

"한국 교포 대학생이 의과대학으로서 세계최고 명문인 존스 홉킨스大에서 3년동안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최우수 학생들에게 수여되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상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존스 홉킨스대 의대 생화학과 3년생인 姜榮珉군(21)은 1학년 2학기때 한과목에서 B플러스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A학점을 받아 만점 4점에 3년간 평균학점 3.96을 기록했다.

   

姜군은 이에따라 지난 5월3일 3학년 전체 학생의 2%에 수여되는 `파이 베타 카파'상을 수상,4학년 졸업후 1백명의 소수정예학생을 뽑는 이대학 본과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파이 베타 카파'상은 美동부 명문 아이비 리그에서 우수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 美역대 대통령 15명이 이 상을 수상했다.

   

姜군의 성적을 석차로 따지면 생화학과에서는 1등이고 의과대학 전체 6백6명중에서는 6등.

   

공무원 출신인 아버지 姜鵬翊씨를 따라 서울 청담국교 4학년때 미국으로 온 姜군은 로스앤젤레스의 부유층 지역 학교인 팔로스 버디스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존스 홉킨스大의대에 진학했다.

   

姜군은 미국이 첨단 의술을 다른 나라로 넘겨주지 않고 있는 사실을 지적, 2000년대에 실용화될 컴퓨터이용 수술등 첨단기술을 직접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 의술을 보급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姜군과 함께 동생 榮佑군(19)도 존스 홉킨스大 의예과 1학년에 재학중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845150

   

국유본이 한국인, 한국계에 세계적으로 인정한 분야는 현재까지 셋이다. 하나가 영성이다. 국유본이 인드라를 주목하는 면도 영성 부문으로 현재까지 알고 있다. 두번째는 바이오이다. 보건의료이다. 한국 의료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바이오 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종욱룸, 이종욱 보건의료상이 있을 정도로 국유본은 보건의료 부문에서의 한국계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세계은행 총재 후보가 된 김용 역시 보건의료 부문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토드 박 역시 보건의료 부문이다. 세번째는 한류다. 춤과 노래하면 흑인, 남미인, 인도인, 아랍인, 북유럽인이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인이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남미 정도로 타켓을 잡는 것 같다. 러시아는 몰라도 미국과 유럽,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는 어렵지 않나 보고 있다.

   

   

"

송주영 일병의 2011년 5월 졸업때 모습. News1

   

현역 군인의 미국 대학 졸업논문이 세계적인 권위의 국제학술지에 실렸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해 7월부터 육군 제3사관학교 영어학과 조교로 복무 중인 송주영 일병(22).

   

송 일병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 월시 국제외교대(국제정치학과 아시아국제관계학 전공)를 지난해 5월 졸업했다.

   

송 일병의 졸업논문은 '이중 위협 방정식:북한 도발에 대한 중국 반응의 이해'이다. 송 일병은 성적우수 조기졸업을 하면서 우등졸업상(마그나 쿰 아우데 상)과 함께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이 졸업논문은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아시안 서베이(Asian Survey)'2011년 겨울호에 실렸다.이 학술지는 미국의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급의 아시아 외교안보 분야의 유명 학술지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 졸업논문이 이 학술지에 실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송 일병은 이 논문에서 "중국은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제재조치에 동의하고 북한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도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한 상반된 태도를 나타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개의 안보 위협(북한 정권의 붕괴, 미군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일관된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북한도발에 의해 국익이 위협받을 경우에만 대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중국은 철저하게 국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문은 북한의 5차례의 도발(2010년 천안함 사건,연평도 포격,2006년 1차 핵실험,2009년 2차 핵실험,2003년 핵비확산조약탈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분석했다.

   

북한이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을 때 중국은 북한 감싸기로 일관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해서는 "북한이 제멋대로 핵실험을 했다"며 강도높은 비난 성명을 내고 유엔의 대북 제재도 지지했다.

   

이 논문은 '이중 위협 방정식(Dual Threats Model)'이라는 분석틀을 이용해 중국의 태도를 분석했다. 이 분석틀에 의하면 중국은 두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조건은 첫째 북한의 도발에 의한 미국의 군사대응, 둘째 북한 체제의 안정이다.이 두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되지 않을 경우 중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북한을 감싸안는다고 논문은 주장하고 있다.

   

이 논문은 빅터 차(Victor Cha)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으로부터"북한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의 이견과 마찰,나아가 동북아 안보구도를 간단명료하게 분석했다"며 "대개 대학 교수나 박사 학위 전문가들이 논문을 등재하는 '아시안 서베이'학술지에 학부생 논문이 게재된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송 일병은 서울 영동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2004년 9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2008년 5월 밀턴아카데미 고등학교를 우등졸업상을 받고졸업했다.

   

토익 990점 만점을 받기도 한 송 일병은 대학 재학시절 미국의 대표적인 대외정책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인턴생활을 했다.대학을 졸업하면서 우수한 인재들만 가입할 수 있는 엘리트 사교 클럽(PHi Beta Kappa)회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송 일병은 제대 후 미국에 건너가 로스쿨에 진학할 계획이다."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22816078259542&outlink=1

   

예서 보듯 국유본과 한국인을 연계하는 미국계 한국인들 역할이 중요하다. 비록 송 일병이 대학 시절 전략문제연구소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하나 빅터 차와 같은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십대 시절부터 전 세계 유태인 청소년들 활동을 면밀히 분석하여 재능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키운다. 

   

"美명문대 10곳 동시합격 박원희 씨, 7년 지난 지금은…

   

2004년 민족사관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하버드 프린스턴 스탠퍼드 등 미국 명문대 10곳을 동시 합격해 화제를 모았던 대전 출신 박원희 씨(25·여·사진)가 최근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에 입학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씨는 21일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올해 8월 스탠퍼드대 경제전공 박사과정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은 전 세계에서 8명을 선발해 학교 측이 5년간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며 생활비 지원 이외에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면서 세계적인 석학을 길러내고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1억 원이다. 박 씨는 스탠퍼드대에서 큐비클(개인이 공부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을 배정받아 현재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박 씨는 2009년 하버드대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동시에 수학하고 졸업했다.

   

졸업 당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경제학부 300명 중 가장 성적이 좋은 학생 8명에게만 수여하는 'Highest Honor'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교수 추천과 높은 성적 이외에 다양한 능력을 고려하는 까다로운 선정 기준으로 미국인 학생들도 뽑히기 힘들다는 하버드 상위 5%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 클럽 멤버로 가입되기도 했다.

   

박 씨와 그의 가족은 한때 '박 씨가 미국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귀국했다'는 소문 때문에 적잖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박 씨는 "한때 부모님이 로스쿨을 권장했지만 수학을 기반으로 한 경제학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며 "대학의 모든 학비도 장학금(삼성 이건희장학금)으로 공부했기에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수기격인 '공부 9단 오기 10단', '스무살 청춘, A+보다 꿈에 미쳐라'(김영사)를 출간하기도 한 그는 "이제는 나의 이야기 책은 그만 쓰고, 좀 시간이 흐른 뒤 미래를 위한 경제학 서적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11024/41343325/1

   

   

"한인 대학생 3명이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2~3년간 수학할 자격이 주어지는 로즈장학생32명에 포함돼 화제다.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사회학과 4학년에 각각 재학중인 앤드루 박군과 앨버트 조군,시라큐스대 4학년에 재학중인 그레이스 유 양이 그 주인공이다.

   

올 로즈장학생 선발에는 미국 3백19개 대학에서 9백25명이 신청,치열한 경쟁을벌였다.

   

로즈장학재단은 일리노이주 휠링 출신인 박군이 하버드대에서 다원적 문화와 인종 관계 연구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베트남 및 캄보디아 지역사회의 서비스 프로그램에서도 활동해온 점이 높이 평가됐다고 밝혔다.

   

애리조나 템페 출신의 조군은 트루먼 장학생으로 미 우등생 클럽(Phi Beta Kappa) 멤버이며 무역 및 국제개발센터(CTID)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하버드 국제리뷰에 기고해왔다.

   

조군은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와 사회사를 전공할 예정이다.

   

그레이스 유양도 미 우등생 클럽 멤버로 옥스퍼드대에서 일본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로즈장학생은 지난 1902년 자선사업가인 세실 로즈의 뜻에 따라 창립돼 현재까지 미국3백4개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의 학생 2천9백명이 혜택을 받았다.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도 로즈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에 유학했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455328

   

   

   

   

   

2. 월가의 최상류 비밀 사교모임 'Kappa Beta Phi'

   

파이 베타 카파의 앞뒤 이름을 바꾼 카파 베타 파이는

월가 인물들이 파이 베타 카파를 모방한 짝퉁 클럽 모임이다.

일 년에 한 차례 만나 환락적인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월가의 최상류 비밀 사교모임 'Kappa Beta Phi'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4879165

   

인드라 추정으로는, 일 년 중 364일은 파이 베타 카바처럼 살고, 하루는 그 반대로 살자는 취지이거나, 아니면, 낮에는  '파이 베타 카파'로 살고, 밤에는 '카파 베타 파이'로 살자는 취지가 아닐까 싶다.  

   

   

   

   

3. 파이베타카파와 프리메이슨

   

파이베타카파는 1776년 5월, 버지니아주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서 시작하였다.

   

   

The Phi Beta Kappa Society was founded on December 5, 1776 at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in Williamsburg, Virginia,

   

   

파이베타카파와 프리메이슨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주요 멤버 중 열 명이 후에 프리메이슨이 되었다.

   

   

The group consisted of students who frequented the Raleigh Tavern as a common meeting area off the college campus (a persistent story maintains that a Masonic lodge also met at this tavern, but the Freemasons actually gathered at a different building in Williamsburg).[9] It is true that ten of the original members later became Freemasons.[10]

   

   

조직의 전신은 1750년에 출발한 F.H.C 클럽으로 보인다. 프리메이슨 혐의를 받고는 하는 토머스 제퍼슨이 F.H.C 클럽 회원이었다. 형제애하면 프리메이슨이다. 헌데, 미국 독립전쟁 이후 F.H.C 클럽이 오리무중이 된 것을 보면, F.H.C 에서 파이베타카파로 이름을 바꾸고, 주요 멤버의 탈퇴 후 재가입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There had been earlier fraternal societies at the College, but these, including the well-known F.H.C. Society (nicknamed "the Flat Hat Club"), founded in 1750, were Latin-letter societies: their names were taken from initial letters of a secret Latin motto. William and Mary alumnus and third U.S. President Thomas Jefferson was perhaps the most famous member of the F.H.C.;[13] other notable members of the original Society included Col. James Innes, St. George Tucker, and George Wythe.[14] Jefferson noted that "When I was a student of Wm. & Mary college of this state, there existed a society called the F.H.C. society, confined to the number of six students only, of which I was a member, but it had no useful object, nor do I know whether it now exists."[10] The best opinion is that the society did not survive the invasion by British forces during the Revolution.[13]

   

파이베타카파는 예일, 하버드, 다트머스, 스탠퍼드 등 미국 270여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831년, 전미국적으로 안티 메이슨 정서가 들끓을 때, 하버드 그룹에서 조직을 노출시키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자 조직을 새롭게 재편한 것으로 보인다.  

   

Before the British invasion of Virginia forced the temporary closure of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and disbandment of the Phi Beta Kappa there early in 1781, Elisha Parmelee, an alumnus of Yale College and Harvard College, passed through Williamsburg and took charters from the Phi Beta Kappa to establish branches of the society at these schools. A second chapter was founded at Yale College in late 1780; a third, at Harvard College in 1781; and a fourth, at Dartmouth College in 1787. From these new chapters, the Phi Beta Kappa evolved from a fraternity with principally academic and some social purposes to an entirely honorary organization recognizing scholastic achievement. While the Phi Beta Kappa developed some of the characteristics which still distinguish Greek-letter fraternities, it was left to other students to fill the natural human need for fellowship with kindred students by extension of fraternity to a purely social context.   Further chapters appeared at Union College in 1817, Bowdoin College in 1825, and Brown University in 1830. The original chapter at William and Mary was re-established. In 1831, the Harvard chapter publicly disclosed the fraternity's secrets during a period of strong anti-Masonic sentiment.

   

http://en.wikipedia.org/wiki/Phi_Beta_Kappa

   

   

파이베타카파가 프리메이슨 산하 조직이 아니더라도 토머스 제퍼슨처럼 친 프리메이슨적 성향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버지니아주는 프리메이슨 회사가 영국 왕의 명을 받고 미국 최초로 식민지를 개발한 지역이다. 해서, 이 지역의 주요 종교는 국교회, 혹은 성공회이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 초기 대통령들이 이 지역에서 나왔다.

   

해서,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대학에서 미국 독립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파이베타카파 전신인 F.H.C 클럽 성향이란 친영적인 동시에 프리메이슨적이다, 라고 본다. 

   

   

"컬럼비아 대학의 원래 이름은 <왕의 대학(King's College)>입니다. 프린스턴 대학 설립 직후에 세워졌고, 설립의 주체는 영국국교 성공회입니다. 성공회가 <왕의 대학 컬럼비아>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730~1760년대에 미국에서 <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성공회가 주교-사제-신도의 계층적 질서와 제의적 권위를 강조한 것이라면, <1차 대각성 운동>은 신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 소통과 개인적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때문에 <1차 대각성 운동>은 미국 중부와 남부의 노예들에게 어필했습니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원래 취지는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만, 영국 왕실과 성공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성격이 짙었습니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목사들을 '뉴 라이트'라고 불렀는데, '뉴 라이트' 장로회가 <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 1746년에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성공회 측은 역시 대학을 하나 세우고 '왕의 대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의 탄생입니다.   

   

<왕의 대학 컬럼비아>는 미국혁명으로 큰 타격을 받아, 대학 관계자들이 대부분 캐나다와 영국으로 도피했습니다. 미국혁명이 끝난 다음해 1784년에 '왕의 대학'은 <컬럼비아 컬리지>로 개명합니다. 새로 들어선 미국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냄새나는 '왕의 대학' 이름을 버린 겁니다. - 수반아님의 글 중에서" 

   

   

허나,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친영적일 수 없으니 컬럼비아 대학 예처럼 이름을 바꾸어서 친영적인 색채를 은폐시키는 대신 프리메이슨적 성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파이베타카파는 오늘날 데이비드 록펠러,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 등 오늘날 미국과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 최고 동문회 클럽 중 하나가 되었다.

   

   

   

4. 파이베타카파와 안티 프리메이슨

   

예서, 안티 프리메이슨 운동이 미국에서 벌어진 배경은 무엇인가. 인드라는 윌리엄 씨워드부터 찾아간다.

   

윌리엄 씨워드하면 잘 모를 것이다. 허나, 1867년 3월 30일, 당시 국무부 장관이었던 윌리엄 씨워드는 러시아와의 비밀협상 끝에 알래스카를 7백만 달러에 매입한 장본인이다. 이 일로 당시 윌리엄 씨워드는 박정희처럼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오늘날 윌리엄 씨워드는 미국인의 자랑이다.

   

아무튼 윌리엄 씨워드가 중요한 키맨인 이유는 파이베타카파 회원이기 때문이다.

   

Seward studied law at Union College, graduating in 1820 with highest honors, and as a member of Phi Beta Kappa.[5

   

또한, 윌리엄 씨워드는 1830년대 미국 정가에 파란을 일으킨 '안티 메이슨' 정당의 중요한 정치인이었다. 정당 목적이 프리메이슨 반대였던 것이다.

   

Seward was an as an Anti-Masonic member of the New York State Senate (7th D.) from 1831 to 1834, sitting in the 54th, 55th, 56th and 57th New York State Legislatures. In 1834, Seward was nominated as the Whig candidate for Governor of New York, but he lost the election to the incumbent Democrat William L. Marcy.

   

윌리엄 씨워드는 이 시기에 네덜란드 회사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이 네덜란드 회사는 암스텔담 열 세 명의 네덜란드 투자자가 뉴욕주과 펜실바니아주 부동산 투자를 목적으로 만든 회사이다.

   

The Holland Land Company was an unincorporated syndicate of thirteen Dutch investors in Amsterdam, who placed funds in the hands of certain trustees in America for the purpose of investing in land in central and western New York State and western Pennsylvania.

   

http://en.wikipedia.org/wiki/Holland_Land_Company

   

From 1836 to 1838, Seward served as agent for a group of investors who had purchased the over 3-million-acre (12,000 km2) western New York holdings of the Holland Land Company.

   

   

다음은 수반아님의 글이다. 수반아님이 자신의 글을 모두 자삭해서 수반아님 의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따로 링크를 걸지 않겠다.

   

"인월리 :

"미국 유태인 그룹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일찌감치 미국에 정착하여 부를 축적한 은행가, 노예주들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터전을 잡은 이들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바로 이 계열이다. 반면 1880년 이후로 쏟아져 들어온 동유럽 유태인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계급이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아일랜드인이나 다름없었다. 국제유태금융가들은 흑인처럼 아일랜드인, 이태리인과 더불어 동유럽 유태인들을 경멸했다."

   

( 수정 : (5) 루즈벨트 가문과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내용이 불충분해서 전체를 지우고 다시 썼습니다. )

   

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설립한 식민지 지역을 <뉴네덜란드>라고 부르고,

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설립한 식민지 지역을 <뉴잉글랜드>라고 불렀더군요.

   

   

   

뉴네덜란드의 짧은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621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설립됨 - 아메리카 신대륙 식민지 개척을 위해서.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신대륙 동부해안에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시) 건설.

1628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뉴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 개혁교회> 설립 - 식민지 공식 종교기관으로.

1650년대 무렵부터 뉴네덜란드와 뉴잉글랜드가 충돌

1664년 뉴잉글랜드가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여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다.

1674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해산.

   

뉴네덜란드의 역사는 약 50년 뿐이 안되네요. 

이후 아메리카 신대륙은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루즈벨트 가문은 1650년대에 네덜란드에서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온 후손으로,

당연히 전통적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멤버입니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1858~1919)와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882~1945)는

그들의 조상처럼 <네덜란드 개혁교회> 멤버였습니다.

(*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는 나중에 성공회 멤버가 됩니다.)  

   

뉴잉글랜드와 뉴네덜란드 지역을 확대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빨간색 뉴잉글랜드 지역은 영국 청교도들이 와서 정착한 곳이고,

노란색 뉴네덜란드 지역은 네덜란드 인들이 와서 정착한 곳입니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 9개 대학> 중 청교도가 설립한 3개 대학은 모두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고, 

   

하버드 (매사추세츠)

예일 (커넥티컷)

다트마우스 (뉴앰프셔)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설립한 대학은 뉴네덜란드 지역에 있습니다."

   

예서, 인드라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윌리엄 씨워드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친구, 썰로우 위드를 만났기 때문이다.

   

 Seward entered politics with the help of his friend Thurlow Weed, whom he had met by chance after a stagecoach accident.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H._Seward

   

썰로우 위드는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세기 중반 미국 정가를 배후에서 움직인 거물 정치인이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부터 링컨까지 무려 6 명의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킨 킹메이커인 게다.

   

Thurlow Weed (November 15, 1797 – November 22, 1882) was a New York newspaper publisher, politician, and party boss. He was the principal political advisor to the prominent New York politician William H. Seward and was instrumental in the presidential nominations of William Henry Harrison (1840), Henry Clay (1844), Zachary Taylor (1848), Winfield Scott (1852), John Charles Frémont (1856) and Abraham Lincoln (1860).

   

위드는 또한 반메이슨운동의 지도자였고, 안티 메이슨당과 휘그당과 공화당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Weed was a vocal member of the Anti-Masonic movement. In 1825, he bought the Rochester Telegraph, but was forced out in 1828 by Masonic interests. Subsequently, he founded the Antimasonic Enquirer, which became the voice of the Antimasonic movement in New York. That year, Weed again supported John Quincy Adams and worked to align the strong anti-Masonic movement in New York with the national Adams organization. Adams' political supporters were key players in the development of the Whig Party, and that party soon absorbed the Anti-masonic movement in New York, giving Weed a new home in a more mainstream and larger political organization.

   

위드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독립 전쟁 후 신문사에서 일하는 동안 정치계 인사와 연을 맺은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드위트 클린턴이다.

   

Weed became interested in politics while working with the newspaper, and was an early supporter of DeWitt Clinton.

   

드위트 클린턴은 뉴욕시장과 뉴욕주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뉴욕주지사 때 행한 이리운하가 유명하다. 뉴욕주지사 시절 드위트 클린턴은 극렬한 반대에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해서, 당시엔 이 운하를 '클린턴의 멍청한 짓(Clinton's Folly)'이라고 폄하했다. 일부에선  '클린턴의 하수구'라고까지 비아냥댔다. 허나, 이 뱃길은 그러나 나중에 '돈길'이 되었다.

   

헌데, 드위트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었다.

   

Clinton was a Freemason, and in 1806, he was elected Grand Master of the Grand Lodge of New York. He retained this title until 1819. The Grand Lodge of New York has established The DeWitt Clinton Award. The Award recognizes distinguished or outstanding community service by non-Masonic organizations or individuals whose actions exemplify a shared concern for the well-being of Mankind and a belief in the worldwide brotherhood of Man.[3]

   

헌데, 드위트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인데, 드위트 클린턴 덕분에 정계 입문한 위드는 안티 메이슨이다? 어찌된 일일까?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 정권에서 국무부 장관이 된 버지니아파 매디슨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In 1812, Clinton ran fo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s candidate for both the Federalist Party and a small group of anti-war Democratic-Republicans. In the close Election of 1812, Clinton was defeated by President Madison; Clinton received 89 electoral votes to James Madison's 128.

http://en.wikipedia.org/wiki/DeWitt_Clinton

    

버지니아주(州) 출생. 1776년 버지니아 식민의회 의원, 1784~1786년 버지니아주의회 의원, 1787~1788년 대륙회의 대표를 역임하였다.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는 버지니아 대표로 출석, 주로 헌법초안 기초를 맡아 '미국헌법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후 1789~1797년 연방 하원의원, 1798년 연방파가 제정한 외인법 및 치안법에 반대, 버지니아 결의를 기초하여 주권론(州權論)을 주장하였다. 1801년 T.제퍼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고 1808년 공화당 소속으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제퍼슨의 중립정책을 계승하였으나 마침내 1812년 미국-영국전쟁에 말려 들었다. 정치학자로서는 영국의 정치철학에 조예가 깊고 헌법옹호론으로 집필한 《The Federalist Papers》는 미국 정치학의 고전이 되었다.[출처]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 | 네이버 백과사전

   

   

드위트 클린턴이 대선에서 매디슨에게 패배한다. 하고, 드위트 클린턴 덕분에 정계에 입문한 위드가 반메이슨 선봉에 선다.

   

무슨 의미일까.

   

미국 프리메이슨이 분열한 것이다. 친영국 프리메이슨과 친프랑스 프리메이슨으로 찢어진 것이다. 미국 건국 전까지는 함께 했던 프리메이슨이었지만, 미국 독립 이후에는 갈라섰던 것이다.

   

보스턴 티파티. 이 사건은 프리메이슨이 포함된 이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벤자민 프랭클린, 대표적인 프리메이슨이다. 프랑스 프리메이슨에게 원조를 요청하여 프랑스 군대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다. 프랑스 참전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토머스 제퍼슨은 프리메이슨, 정확히 말하면, 일루미나티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에도 관여했다.  

   

간단히 정리하자. 제퍼슨 - 매디슨 - 앤드류 잭슨은 친프랑스 프리메이슨 계열이었던 셈이다. 반면, 이들과 반대편에 선 이들은 친영국 프리메이슨 계열이었던 게다. 이들간 쟁점은, 외교와 경제, 마지막으로 연방제였다.

   

외교는 당연 친영적이냐, 친불적이냐였다.

   

경제는 뉴잉글랜드적 공업 중심 국가 지향이냐, 버지니아적 농업 중심 국가 지향이냐.

   

행정은 잘 사는 버지니아주가 양보해라. 싫다. 남부 버지니아주만 잘 먹고 잘 살겠다.

   

해서, 1810년대를 통과하면서 프리메이슨 간 대결구도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위드는 정치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위드가 1824년 선거에서 존 퀸시 애덤스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In 1824, he was a strong supporter of the presidential bid of John Quincy Adams, and was able to use his influence to ensure Adams' victory in New York.[2]

http://en.wikipedia.org/wiki/DeWitt_Clinton

   

문제는 차기 대통령 선거였다. 프리메이슨이었던 앤드류 잭슨과의 대통령 선거는 이전 대통령 선거와 달랐다. 이전까지는 돈 좀 있는 백인, 재산권이 있는 백인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헌데, 이때부터 모든 백인에게 선거권을 준 것이다. 여전히 여성과 흑인 등 유색인종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지만.

   

해서, 이 시기, 미국에서 최초의 포퓰리즘 선거가 진행된 것이다. 대중에게 한 방에 먹힐 수 있는 정치 구호를 내세워라! 그것이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의 중앙은행 공격이었다.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은 대중의 적개심 향방을 은행가다, 라고 지목하였다. 왜냐하면 상대가 애덤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상대가 애덤스가 아니었다면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은 연방은행에 대한 반대에 나섰을까? 더 나아가 만일 앤드류 잭슨 출신이 오하이오주가 아니라 버지니아주였다면 보다 강력하게 반대했을까. 앤드류 잭슨은 자신의 반영 전사 이미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최초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답게 연방은행 문제를 이슈화시킨 것이다. 연방은행의 기한은 1936년, 1928년부터 따지면 8년 뒤이니 연임을 해먹기 딱 좋은 이슈였던 셈이다.

   

예서, 시대정신이나 쑹훙빙이나 이리유카바최는 중앙은행과 금본위제 운운을 한다.

프리메이슨,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영국왕 '조지 3세'가 미국의 독립적 화폐생산사용권을 금지하고 영국의 중앙은행에서 이자와 함께 화폐를 빌리도록 강제해 미국이 갑작스럽게 빚을 안게 된 데 있었습니다. '조지 3세'는 영국의 화폐지배권에서 벗어나려는 미국의 독립적 통화시스템을 불허했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주요 명분이 됐다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기록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금융가들의 '중앙은행'이자시스템과부패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http://blog.naver.com/lucas0213?Redirect=Log&logNo=40092432975

   

   

인드라는 웃기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간단히 말한다. 20세기에 미국연방준비은행을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윌슨이나 이후 프랭클린 루즈벨트나 아이젠하워, 케네디 이런 대통령들 말을 보아라.

   

언론플레이와 실제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오늘날 '월가를 점령하라'에 지지 의사를 보내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가장 후원금을 많이 낸 이들이 월가인 게다.

   

언플이다.

   

인드라가 간단하게 반박하겠다. 유럽에서 중앙은행과 금본위제가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나라라고는 1816년 영국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 한 독일조차도 1871년, 미국이 1873년이다.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19세기 말엽에 가서야 금본위제를 한 것이다.

   

하면, 이들 국가에서 왜 금본위제를 하지 않았을까? 로스차일드 영향력이 없어서? ㅎㅎㅎ. 아니다.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이다.

   

왜? 각국은 아직 제국주의할 능력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가 지시해야 제국주의를 실시할 수 있기에. 하면, 각국은 왜 로스차일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나? 세계 자본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이전까지 로스차일드는 각국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잘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스차일드가 중국을 비롯한 제 3세계 공략이 영국 혼자로서는 힘들다고 판단하여 유럽 각국 용병의 힘을 빌리고자 제국주의를 선언한다. 그 선언의 뒷받침은 물론 실탄이다.

   

한국 경제 개발, 어떻게 이루어졌나? 박정희 때 자금이 없어서 쩔쩔 매지 않았나? 독일 역시 절망 상태에서 국유본 자금 받고 일어선 것 아닌가. 일본 역시도 정신줄 놓았다가 625 전쟁 덕에 살아난 것 아닌가. 모택동은 국유본이 자금을 안 주니까 대약진 운동이 대실패했다.

   

독일이나 미국이나 오스트리아나 러시아나 일본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국유본 자금 없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일본은 국유본 자금으로 국유본 배와 무기를 사서 국유본이 훈련시킨 전략전술로 러시아에 승리했을 뿐이다.

   

게다가 미국은 지금과 달리 그리 큰 시장이 아니었다. 땅덩어리가 크다고 해서 착각하지 않았으면 싶다. 불과 십수년 전까지 세계 금융시장에서 러시아,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였나. 암 것도 아니었다. 미국 독립할 때 미국 금융 역시 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드라는 미국 독립 배경에는 국유본의 치밀한 계산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대목은 추후 미국 독립 부문을 따로 설명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친프랑스 프리메이슨파가 선거 전략으로 썼던 것일 뿐이다. 실제로 제퍼슨 등 버지니아 파벌은 선거 때만 영국을 비난하다가도 막상 대통령이 되면 입 닥치고 영국 눈치보기 바빴다. 매디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 국유본이 영국을 움직여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프랑스 프리메이슨이 지원 요청을 했다. 이때, 미국 프리메이슨은? 말만 도와주네, 마네 하더니 결국 영국 눈치만 보면서 손가락 빨고 있었다. ㅋㅋㅋ

   

하여간, 미국 선거에서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이 승리했다. 은행가 타격은 효과적이었다.

   

이에 복수심을 품은 위드의 반격. 그것이 바로 안티 메이슨 운동이었던 셈이다.

   

 - 너희가 중앙은행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프리메이슨을 공격하겠다.

   

1826년에 이르면, 미국 메이슨은 오만 명에 달했다. 당대 프리메이슨이 일당 백 실력이었던 만큼 수천 명 수준도 미국을 장악할 수준인데, 오만 명이면 대단한 것이다.

   

이 시기 메이슨이었던 윌리엄 모건 대위가 프리메이슨의 해악을 담은 책을 출판하려 하다 죽는다. 그는 죽은 후 1827년 그가 쓴 "30년 동안 헌신했던 한 형제가 쓴 메이슨의 실상"이란 책이 유작으로 출간한다. 1829년 여론의 압력을 받은 뉴욕 주 상원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조사를 단행해 "프리메이슨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고, 언론도 프리메이슨의 위세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프리메이슨이었던 잭슨 대통령에 대항해 위드가 중심이 되어 반메이슨 정당이 들어선다. 이들은 1832년 선거에서 반 메이슨 정당의 후보들은 각 주와 지방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잭슨을 물러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때, 위드는 절감했던 것이다. 정책만으로는 사람들 마음을 돌릴 수 없다. 정책과 인물이 함께 가야 한다. 인물 50, 정책 50이었던 셈이다.

   

정리하자.

   

위드와 앤드류 잭슨과의 투쟁으로 인해,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은 자취를 감춘 셈이다. 오늘날 국유본이 가끔 영화에서나 써먹을 정도인 프리메이슨일 뿐이다. 1830년대 이후로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은 죽었다.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은 아마도 한인 사회 영향력보다 낮지 않을까 본다. 물론 다 죽은 프리메이슨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역시 국유본 마음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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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이 무늬만 한국인이라고 비난질해대는 쪽발찌라시 한경오프 넘들아.

그러니까 니 애비가 쪽발이인 거야.

한국인이 잘 나가니까 배가 아프지?

쪽발이가 한반도를 지배해야 되는데, 그래야 씨발넘들이 잘 먹고 잘 사니까.

삼대를 멸족할 쪽발이 색희들아~!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인드라는 메시아인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8 04:43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73312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2 : 인드라는 메시아인가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8

   

   

   

   

"헤브라이어의 māša

(기름을 붓다)의 명사형 masiah(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그리스어화 한 말(Christos)로 '그리스도'의 어원(語源)이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의 왕은 물론, 사제나 또 사울왕의 방패와 같은 물건도 메시아라고 부르다가, 장차 나타날 왕으로서의 '구세주'에 대한 기대(期待)로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구약성서》 본래의 의미는 하느님의 대행기관으로서의 은사를 받은 자(판관 8:22, 사무상 8:7)로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대제사장(히브 9:23~28)으로, 예언자로, 왕으로 믿은 것(마태 16:16)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역할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선택-계약 관계에서 그 중간을 다리 놓는 것으로, 영(靈)을 받은 자, 신(神)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 죄를 씻는 제사의 희생제물 공여자, 재판장, 새 생명을 통치하는 자 등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메시아의 개념은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점차로 개인에 대한 기대가 부각되고, 각 집단이 각기 다른 내용을 강조하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변이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와 고난이 오히려 메시아 신앙을 강건하게 하고 신학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메시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17세기에 나타난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체비이다.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 기대는 유대교의 교리로 굳어졌으며, 유대교의 현대화 운동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메시아를 내세우지 않고 구원된 세계와 메시아적 미래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하려는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출처] 메시아 [messiah ] | 네이버 백과사전

   

   

24차 번개를 잘 마무리했다.

그간 번개를 하면서 자주 질문을 받고 답했던 문제 하나를 말씀드린다. 

인드라가 자주 질문을 받았던 문제는 국유본 세력에 대한 과도한 우려감이다.

이 문제는 특히 인드라와 관련을 지어 발생한다.

   

이웃들 중에는 인월리 글을 많이 읽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인드라 의견에 반대만 하고 싶거나

혹은 인드라 의견을 적극적으로 옹호를 하는 자신을 만난다.

   

티브이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겪는 아픔이 마치 자기 일처럼 여겨진다.

레슬링 경기에서 심판 몰래 악당 선수가 우리 편에게 반칙을 하는 장면을 보면 화가 난다. 

   

지지하는 정치인 애환을 듣다 보면 정치인과 자신이 동일시된다.

그처럼 인월리를 읽다 보면 어느덧 인드라 일이 자기 일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공감 장치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가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C%9A%B8_%EC%8B%A0%EA%B2%BD_%EC%84%B8%ED%8F%AC

   

   

여성이 눈물이 많고 감정 표현이 많은 것은 거울신경세포가 상대적으로 발달해서이다.

상을 당하면 여성 대부분이 오열을 하는 반면 남성은 잘 울지 않는다.

속으로 운다고 하지만, 실은 남성도 울만하면 운다.

다만, 감정이입, 즉 공감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양철북(The Tin Drum)

   

http://l00000000l.egloos.com/478303

   

   

물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울 만큼 공감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관을 매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슬프고 서럽겠느냐.

이런 상상이 저절로 되는 것이 여성인 편이다.

물론 여성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남성이라고 다 둔감한 건 아니다.  

   

예민하면 일을 재빨리 배울 수 있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배, 선생, 혹은 조교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둔감하면 주변 환경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다.

자기만 잘 하면 될 뿐, 주변 일들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서, 예민한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둔감해서 좋을 때도 있다.

   

인월리 이야기를 해보겠다.

인드라가 인월리를 전개하면서 종종 사적일 수 있는 이야기,

인드라가 국유본 혹은 국유본으로 추정되는 주변과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면, 국유본과 인드라 관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집중해서 읽는 편이다.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인드라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다고 여기는 분들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

   

구자철(가명)이 있다.

구자철은 인월리 글을 어렵사리 읽고 크게 공감한 상황이다.

헌데,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인드라라면? 하는 식으로 생각해야 이해가 빠른 법이다.

공감도 잘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구자철은 축구 선수다.

쉬는 시간 동안 잠깐 인월리를 읽은 것 뿐이다.

구자철은 하루 종일 인월리만 생각할 수는 없다.

허나, 크게 공감한 상황에서 인월리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구자철은 축구 시합에 선발로 뛴다.

선발로 뛰면서도 인월리를 생각한다.

그때 우연히 공이 와서 논스톱으로 때렸는데 슛이 들어간다.

슛을 때릴 때는 몰랐다.

나중에 자기 플레이를 보니 그야말로 환상의 슈팅이었다.

   

구자철은 자기 진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그때 내가 왜 그런 멋진 슈팅을 때릴 수 있었을까.

얼마든지 헛발질을 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 문득 구자철은 인월리를 떠올린다.

그래, 인월리야.

   

구자철은 인드라 블로그에 메일을 보낸다.

인드라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골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적극 지지하겠습니다.

   

허나, 갑작스런 구자철 인사에 인드라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 좋은 일이 있어서 좋기는 한데, 그것이 어디 인드라 덕이겠어요?   

  다 구자철 선수가 잘 해서이죠.

  절대로 제가 전복을 먹거나 닭을 먹어서가 아닙니다. 응? (웬 동문서답?)

   

허나, 구자철 선수에게는 이것마저도 겸양의 미덕을 갖춘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 선생님, 인품도 멋지세요. 존경스럽습니다.

   

구자철 선수는 한두달 열심히 메일을 보내고 가끔 덧글도 단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식이 없다.

   

한동안 소식이 없길래 궁금해서 어떻게 사나 하고 인드라는 구자철 트위터를 가본다.

헌데, 트위터에 구자철 선수가 혼잣말로 툴툴거리는 트윗을 썼다.

   

- 아놔, 거기서 왜 똥볼을 차.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구자철 선수는 꽤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 선발 명단에서 몇 차례 제외되었고

간혹 교체선수로 나왔는데, 교체로 나왔을 때,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동점골을 넣을 수 있는 완벽한 골찬스였던 것이다.

허나, 그만 후지산대폭발슛을 날린 것이다.

공이 하늘로 치솟고,

분노한 팬들은 구자철에게 삿대질하고,

평점은 촐전선수 중 최하점을 받은 것이다.

언론에서는 성급하지만 방출 소식을 보도하는 것이다.

   

그때, 구자철 선수는 문득 인월리를 떠올린다.

   

그래, 이 모든 불행은 내가 인월리를 만난 데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골을 넣은 것은 인드라 말대로 자신 덕분이다.

자신이 잘 해서이다.

   

반면, 선발 출장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선발 출장이 어려우니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없고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없는 와중에도 인월리를 읽고 있었으니

내가 똥볼을 날린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인월리다.

아니, 인드라나 인월리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다.

   

결국 문제는 국유본인 게다.

국유본이 이제 자기 자신까지 감시를 확장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지난 시기에 별로 연관이 없을 듯한 문제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내가 인월리에 주목할 때까지만 해도 국유본은 내 존재를 몰랐었다.

해서, 내 인생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허나, 내가 인월리를 주목한다는 것을 국유본이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내 인생이 달라진 것이다.

국유본이 훼방을 놓아 축구시합을 망친 것이다.

   

하면, 이제부터 어쩜 좋은가.

방법은 없는가.

   

국유본에게 빌 수밖에 없나?

하면, 어떻게 국유본에게 용서를 구하지?

인드라한테 시비 좀 걸면 국유본이 용서해주려나?

인드라를 비판하면 혹 국유본이 자신을 잘 해줄까?

맞아. 인드라 말로는 국유본이 외부적으로는 명박 키우고

내부적으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명박까를 찾는다고 한다.

하면, 지금부터 명박까가 되볼까?

   

공감이 가는가?

여기까지는 대부분 한 번 이상 겪어보았을 문제이다.

   

마치 국가대표축구팀 보다가 이기면, 거봐, 내가 보면 이긴다니까, 신기하다니까.

국가대표축구팀 경기 보다가 지면,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결국 하루 내내 망치네.

   

인드라 생각은 이렇다.

   

   

   

   

가끔은 공감장치를 꺼두셔도 됩니다^^!

   

인드라랑 잠시 시비를 걸어도,

짐짓 인드라랑 다른 의견인양 블로그에서 의견 표시를 해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결국 제 풀에 쓰러져서 인드라 블로그도 잘 안가게 되고,

그래, 어차피 내 갈 길은 열심히 축구하는 것일 뿐,

축구만 생각하자, 하고 인월리를 잊을 때까지 축구만 생각하자 하고 축구만 열심히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선발 출장을 한다.

골도 넣는다.

   

아! 이제야 국유본이 반응하나?

이제 국유본이 나를 용서했나?

국유본이여!

이제 순종하겠나이다.

인월리한테 안 가고 열심히 축구만 하겠습니다.

다짐을 하고, 축구에만 열심히 매진한다.

   

그러던 중 구자철은 다시 컨디션 난조에 빠지고,

넣어야 할 대목에서 그만 다리가 꼬이며 나자빠진다.

평생 다시 못 볼 최악의 평점을 받는다.

다시 방출설이 언론에 보도된다.

   

아놔! 이번엔 인월리랑 상관이 없는데?

인월리 망령이 다시 살아나나?

왜 또 국유본이 날 못 살게 구는데?

언론에서 내가 병역 면제 받았다고 난리를 치네?

미치겠네.

   

인드라 이 자식이 내 욕하고 있는 것 아니야?

그래서 내가 죽쑤고 있는 거 아냐?

하고, 모처럼 인월리에 들어갔다.

   

모처럼 읽은 인월리!

감동이었다.

그래, 이 맛이야.

   

구자철 : 인드라 선생님, 그간 오해가 많았습니다.

         잘 지내시죠?

         용서해주십시오.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제 결례를 꾸짖어주십시오.

   

인드라 : 구자철 선수, 무슨 오해가 있다고 하세요?

   

구자철 : 인드라 선생님, 알면서도 저를 위해 배려를 해주시는군요. 눈물이 납니다.

   

인드라 : 구자철 선수, 대체 무슨 오해를. 저같이 둔감한 사람이 무슨 배려를...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구자철 : 크ㅡ흑. 선생님 마자세. 맞습니다. 마.자.세.

   

   

구자철 선수는 감동을 주체 못해 밤을 꼴딱 세운 뒤 갑작스런 선발 출전 통보를 받고 경기를 뛴다.

   

고오오오오오올!

   

구자철 선수는 내심 기도를 하면서 되뇌인다.

   

- 인드라 선생님 덕분!

   

해서, 인류는 이 공감 장치 덕분에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런 이후에 획득한 인류의 결론은?

   

내가 잘 되면 내 탓이다. 이건 인드라 선생님 강조 대목.

내가 안 되면 인드라 탓이다. 인드라 선생님의 책임 회피, 너무 안타깝다. 크흑.

   

   

   

사실 이 문제는 인드라부터 겪은 문제이다.

   

인드라도 국유본론을 정립하면서 한 일 년간은 모든 게 국유본 탓하곤 했다.

특히 쪽발놈현이 죽은 다음에는 증세가 더 심해졌다.

다음 차례는 인드라가 아닐까

밤길에 국유본이 인드라를 린치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해서, 인드라가 마음이 참 불안하였다.

아마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해 미네르바가 정신쇠약증을 앓는 것 같다.

   

인드라가 고민 많이 했다.

그때, 인드라가 새벽에 홀연히 깨달은 바, 마자세였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어떤 분은 어디서 따온 인용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니다.

지난 날 인드라가 겪었던 경험을 개념화한 것이다.

   

   

마음을 열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혹은 길을 걸었다.

여행을 했다.

   

그때, 일상에 얽매인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꽉 쥐고 있던,

놓으면 죽을 것만 같았던 것들을 막상 놓으면,

어리석은 자기 자신이 보이고,

웃고 있는 지인들 모습이 보이고,

일이 술술 풀린다.

   

   

자세를 낮추고.

   

자존심 때문에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내가 먼저 다가가서 용서를 구한다.

   

운동권 학생일 때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 유인물을 뿌리고

군부독재 타도 구호를 외친 적이 있다.

그때, 아무리 승객들이 인드라를 독선적이라고 비난해도 개의치 않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선전하는 분들과 심정이 같았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대들은 무지몽매한 자, 나는 거듭난 자!

   

자동차 영업사원 때다.

빌딩에 들어갈 때부터 수위가 가로막는다.

잡상인 출입금지인 게다.

어찌어찌해서 경비실을 통과하면 일단 화장실부터 간다.

낯짝이 두껍지 않기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며 해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사무실에 들어가 명함과 자동차 찌라시를 돌리면

1/3은 호의적이고, 1/3은 무관심이고, 1/3은 왕짜증이다.

   

문제는 1/3 왕짜증이다.

   

드라마적인 상황.

   

아침 일찍 출근하여 지하철역에서 홍보를 한 적이 있다.

   

보통 찌라시를 주면 받거나 받지 않는다.

이 정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헌데, 주면 받되, 눈길 한 번 주고 눈앞에서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어지간하면 넘어갈 수 있다.

   

한번은 찌라시를 주니까 받고서 쭉 읽어본다.

웬 넘인가 싶어 지켜봤다.

쭉 읽더니 나를 보면서 씩 웃는다.

나를 보며 웃으면서 찌라시를 천천히 찢는다.

내 앞에서 갈갈이 찢어진 찌라시를 버리고 간다.

   

그때 정말 참담한 기분이 말할 수 없었다.

   

시장에 차 팔러 나갔을 때다.

차를 팔지 않았다면 평소 자신도 모르게 은근 깔볼만한 사람들이 시장 사람들이다.

헉! 알고 보니 옷차림새도 형편없고, 가게도 후줄근한데,

그런 사람일수록 알부자들이 많다는 게 자동차 영업지점 분석인 게다.

   

하여간, 시장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자세를 낮추면, 세상 사람들이 진실을 말한다.

반면, 내가 조금이라도 상대를 내려다보면 세상 사람들은 소통을 하지 않는다.

   

큰 상인이 자세를 낮추는 이유.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판다는 이야기.

   

   

세상에 감사한다.

   

군복무할 때 인드라가 모시던 연대장이 진급해서 영전되었다.

비결은?

   

생각해보면, 연대장이 잘 해서다.

연대별 경연대회만 하면 이상하게도 우리 연대가 이겼다.

그러니 고과 성적이 당연히 좋게 나오기 마련.

왜일까?

   

연대장은 쫄병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쫄병 소원이 무엇인가.

월급 올리는 일?

아니다.

   

요즘 쫄병 월급 백만 원 운운하는데,

군대 다녀오지 못한 사실상 병역면제 박원순 주니어 같은 넘들 이야기 같다.

인드라 생각에 국회의원 수 줄이자는 주장처럼 병쉰같은 주장이다.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오히려 국회의원 수는 지금보다 열 배 이상 늘이면 좋다.

단, 무급이어야 한다.

무급이면 일을 못 할 것으로 생각하나?

무급이면 더 일을 잘 한다.

   

쫄병 소원은 휴가다.

   

젊은 날, 휴가 받아서 친구들이랑 진탕 술 처먹고 나이트 가서 춤추고 싶다.

젊은 날, 애인 만나서 밤새 이야기하고 싶다.

젊은 날, 갑자기 철들어서 부모님 얼굴이 보고 싶다.

젊은 날, 그냥 일주일 내내 잠만 잤으면 좋겠다?

젊은 날, 서점에서 내내 책만 읽고 싶다. (뭔 황당 시츄에이션?이지만 실제 사례다.)

   

연대장이 가끔 부대를 불시에 돌아본다.

그때, 작업하던 쫄병, 훈련하던 쫄병, 보초서던 쫄병을 만난다.

   

연대장 하는 말은 이렇다.

   

- XXX. 자네, 휴가를 언제 언제 다녀왔지? 이제 다시 갈 때도 된 것 같은데?

   

일. 쫄병의 이름을 기억한다.

이. 쫄병 휴가를 언제 다녀왔는지 인사계나 인사장교보다 소상하게 더 잘 안다.

삼. 잘 하면 포상휴가를 시도 때도 없이 준다.

   

연대장, 다른 것 없었다.

   

두루두루 잘 해봐야 다 소용없다.

쫄병이 원하는 것, 큰 것 한 방인 게다.

   

다른 부대에 비해서 죽어라고 포상 휴가만 많이 보낸 것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냈다.

다른 건 다 포기한 듯이 보일 지경이었다.

오직 휴가만 열심히 보냈다.

   

그랬더니, 무슨 대회만 열면 다 우승했다.

   

그런 연대장이 진급을 하자 모든 사람에게 다 인사한다.

   

이 모두가 당신 덕분이라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고마운 게다.

사실 듣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연대장이 잘 해서라는 것을 말이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이런 깨달음 속에 탄생한 것이다.

   

해서, 여러분이 마음 공부가 필요하다 여기면,

특히 국유본론을 처음 접한 분일수록

인드라가 강조하는 것이다.

   

지식 공부도 중요하지만, 마음 공부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인드라도 국유본론 정립하고 한 일 년간, 길게는 이 년간 마음 고생했다.

허나, 이제는 마음이 평안한 것이다.

   

평정심.

   

마음이 평온하면,

한국 고질병인 화병도 사라지고,

실수도 덜 하게 되고,

지인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신 뿐만 아니라

지인들마저 영향을 받아 같이 마음이 평온해진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오늘 행복하게 지인과 함께 사랑하리라 생각해보자.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486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들어봐야 한 번 본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헌데, 인간의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이란 것이 과연 확실한가.

   

착시 현상이 있다.

   

가령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보자.

지평선이나 수평선에 있던 해가 순식간에 떠오른다.

마치 해가 뛰어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중천에 떠서는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 같거나 아예 정지한 듯싶다.

왜일까.

   

착시 현상이다.

   

인간의 눈은 그 대상 물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비교해서 본다.

해서, 못 생긴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잘 생겨 보이기 마련인 게다.

똑똑한 사람 둘을 나란히 놓으면 한 사람은 영락없이 바보천치로 보인다.

헌데, 신기하게도 당사자들도 느낀다.

둘 다 술 취했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취했다고 여기면 이상하게 잠시라도 깬다.

하고, 집에 바래다주고 오는데, 그때 신기하게도 취해 길바닥에서 잔다.

   

인드라는 꿈의 원리도 그리 본다.

약 오백여 명을 대상으로 꿈 해몽을 해준다 등의 감언이설로 임상실험한 결과이다.

이중 95% 이상 여성이다 ㅠㅠㅠ

   

인드라 생각은, 인류 보편적인 언어란

나, 너, 우리 인칭대명사 다음으로는 동사형이라고 본다.

   

나 힘세다.

너 예쁘다.

우리 잔다.

   

예서, 친하거나, 급하거나 하면, 나, 너, 우리를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다.

즉, 예의를 차려야 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는 동사형만으로 진행한다.

   

힘세다.

예쁘다.

자자.

   

보통 꿈을 꾸는 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대리해소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힘이 약하다. -> 힘이 강하다.

예쁘다.

자자.

   

한 십 년간, 혹은 이십 년간 생각하지 않은 인물이 갑자기 꿈에 나타난다. 왜일까?

   

여러분의 취향을 종합한 뇌의 판단인 게다.

잘 생각해보시라.

현실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러분 취향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다.

현실이란 욕망과 도덕간의 균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허나, 꿈에서는 욕망은 욕망대로, 도덕은 도덕대로

슈퍼컴퓨터처럼 냉혹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연결시킨다. 

해서, 현실에서는 그 명사, 혹은 고유명사를 기억창고에만 보관하고 있을 뿐인데,

현실에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명사를, 혹은 고유명사를 호출하는 것이다.

   

이때, 대개의 꿈 해몽은 명사형, 고유명사형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동사형이 중심이다.

그 동사형에 가장 부합한 자를 뇌라는 슈퍼컴퓨터가 호출한 것일 뿐이다.

즉, 대리운전사가 필요했는데, 대리운전사가 온 것일 뿐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직접 운전하지 않는다,인 게다.

   

하면, 서양은 동양과 다른 사고 판단을 하지 않느냐, 라고 물을 것이다.

   

인드라 생각에 정확히 말하면,

서양과 동양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과 비서양의 문제라고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태인 대 비유태인의 문제라고 본다.

   

   

   

   

인류는 공동체 정신이 있기에 보편적으로는 다수가 화난 표정이면 혼자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서양인은 동양인과 달리 혼자 기뻐해도 행복하다고 보는 것일까.

   

그것은 기독교 문화, 혹은 수메르 문명, 유대교 문명에서 이어진 중동 문화의 결과라고 본다.

   

구약을 보라.

   

다수가 반대함에도 모세 혼자 하나님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하나님이 모세 편을 든다. 모세 편을 들지 않은 다수는 죽는다.

   

메시아인 게다. 유태인은, 서양인은 오랜 기간 동안 한 명의 천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던 것이다. 해서, 메시아는 늘 세상의 외면을 받는다는 존재론에 익숙해졌고, 죽지 않으려면 유별난 개인에 주목하는 인식을 강화하였고, 실천적으로 개인주의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것이 마치 교육탓으로만 생각하는데, 아닌 것이다. 그 교육이 수천 년간 이루어진 것인데, 고작 수십 년 교육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 없다.

   

별 것 아닌 습관은 한 달, 일 년, 십수 년이면 바뀐다. 허나, 수천 년 흐른 습관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소련 공산당이 왜 실패했는가. 인간의 가장 바깥 대뇌피질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허나, 인간의 두뇌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발견되는 정보란 그만큼 오래된 기억들인 게다. 그 오래된 기억들을 무리하게 짧은 시기에 바꾸려고 하니 인간 두뇌가 반발을 일으켜서 실패한 것이다. 해서, 상대적이지만, 동양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보다 잘 나서가 아니라 인민 두뇌가 서양과 달리 동양적이어서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허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나중에 말할 것이다.

   

더군다나 유태인/서양인 시각은 특수한 것이다. 동양인 시각이 보편적이다. 다만, 근대 오백년이 흐르는 기간 유태인/서양인이 세계를 지배하다 보니 유태인/서양인 시각이 보편적이고, 동양인 시각이 특수하게 되니 혼란이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 인드라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그 문제가 동사형에서 온 것임에도 명사형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일반적이지 않다.

   

애초에 동사형적인, 동양적인 삶을 사는 분들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동양적이면서 서양적인, 서양적이면서 동양적인,

특히 서양적인 분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를 동사형이 아닌 명사형으로 인식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인드라나 국유본으로 비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근래 자주 접한 명사형이 인드라 아니면 국유본이기에.

물론 인드라나 국유본을 모를 때는,

이명박이나 쪽발놈현, 쪽발일성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쪽발놈현 탓, 쪽발일성 탓, 미제 탓, 이명박 탓인 게다.

혹은 기독교 탓^^?

   

해서, 인드라는 마자세를 우선 추천하면서도

인식론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양적이거나,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분들에게

단지 동양적인 것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동양적인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동사형 사고와 명사형 사고를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사고 과정에 적용해서 생각해보고,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지난 번개에서 욕망과 도덕 균형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있었다.

   

   

   

   

정리하자.

   

인드라 덕분에 주식에서 큰 돈을 벌어 외제차를 샀다고 고마워하신다.

   

아니다.

   

님이 그간 공덕을 쌓아 인월리를 참고해서 돈 번 것이다.

   

똑같이 인월리를 보면서도 누군가는 주식으로 돈을 벌고, 누군가는 돈을 잃는다.

   

   

   

인드라 넘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고, 요즘 국정원인지 CIA인지 감시가 심해졌다.

   

인드라가 맨날 쪽발놈현 욕하고,

   

국유본이 쪽발놈현을 지지하는 듯하니 쪽발놈현 지지하면 살림살이 나아질까?

   

아니다.

   

인드라가 맨날 쪽발왕에게 천벌을! 하며 저주를 퍼붓는데,

   

그러면 일본에서 연일 좋은 소식이 와야 일리가 있지 않은가.

   

허나, 현실은?

   

   

"[주간동아] 

   

사수키 의원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가 폭발한 지 1년이 지났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지난해 12월 16일 "사고 원전이 냉온 정지됐다"며 "안정화에 접어들었다"고 전 세계에 공표했다. 후쿠시마 원전을 운영하는 도쿄전력이 "스트론튬 90이 녹아 들어간 방사능 오염수 4만5000가 후쿠시마 원전에서 누출됐으며, 그중 일부는 바다로 흘러들어갔다"고 밝힌 지 12일 만이었다. 방사성 물질인 스트론튬 90에 오염된 해초와 생선을 섭취할 경우 암이 발병할 수 있다.

   

노다 총리의 사고 원전 안정화 발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뒤집혔다. 후쿠시마시 경계에서 서북쪽으로 24km 떨어진 미나미소마시의 사쿠라이 가쓰노부 시장을 통해 원전 4호기의 추가 폭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쿠라이 시장은 시의회에서 "원전 4호기가 1월 9일 폭발한 것 같다. 건물이 기울어졌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후 상부에 "정부의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알렸고, 이런 내용을 자민당 카타야마 사수키 의원이 며칠 후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공개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원전 4호기 폭발에 대해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관한 한 일본 정부가 철저히 두 얼굴의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안전하니 안심하라"고 공표하는 한편, 공포심과 혼란을 초래할 만한 원전과 방사능 관련 정보 공개를 지속적으로 차단했다.

   

일본 정부는 1937년부터 시행해온 공공보안법을 폐지하고 좀 더 강력한 국가보안법 제정을 위해 2월 10일 기밀보전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기밀보전법안은 통치자가 일본에서 발생한 어느 사안이든 기밀로 지정할 권한을 행정 부처에 부여하며, 기밀이나 정보를 누설할 경우 최대 10년형을 언도할 수 있다. 도쿄신문은 정부가 입법예고한 새 법안에 대해 "원전에 관한 정보 은폐도 가능하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 법안은 내년 1월 입법을 목표로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이 '정보 보호에 관한 검토위원회'를 구성해 법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도쿄 시내 공원은 체르노빌 수준"

   

일본 정부의 강력한 단속에도 1월 이후 후쿠시마 원전 및 인근 도시와 도쿄의 상황을 담은 일본발(發) 방사능 관련 뉴스가 시시각각 언론과 웹을 통해 해외로 전달됐다.

   

2월 6일부터 원자로 온도가 급상승한 원전 2호기는 2월 13일과 14일, 규정 최고치인 80°를 넘어 93.7° 이상 가열됐다. 도쿄전력은 이를 "온도계 고장"으로 긴급 발표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상황을 매일 기록하는 원전 전문 블로거 아이오리 모치츠키 씨(토목공학자)는 "후쿠시마시 인근 거주허가구역 대기에 2월 11일부터'죽음의 재'로 불리는 세슘 134와 137의 양이 4.45마이크로베크렐(microBq)/에서 139microBq/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2월 13일엔 '마이니치신문'이 "후쿠시마에서 200km 미만 거리에 있는 지바현 농가에서 고농도 세슘이 검출됐다"고 보도했다. 지바현 지방자치기구가 출자한 지바 원예 플라스틱 가공소와 인근 농가의 토양에서 정부 매립 기준치의 7배가 넘는 방사성 세슘을 검출한 것. 이 흙은 비닐하우스의 폐비닐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전문가들은 대기 중의 세슘이 비닐하우스 겉면에 내려앉아 쌓인 것으로 진단했다.

   

2월 20일부터는 쇳가루 같은 검은색 가루가 도쿄 곳곳에 내려앉은 사실이 국내 TV 뉴스로도 보도됐다. 도쿄시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문제의 쇳가루를 분석한 결과, kg당 100만베크렐(Bq)이 넘는 초고농도 방사성 물질이라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세계 최초 방사선 피폭 수도"

    

   

방송에서 매일 후쿠시마 농산물을 시식했던 오츠카 노리카즈 앵커(오른쪽)는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최근 방송에서 은퇴했다.

    

   

2월 22일엔 원전 2호기 온도가 105°까지 상승했다는 자료가 공개됐다. 도쿄전력은 그간 온도가 급상승했던 2호기에 냉각수인 붕산수를 투입해왔다. 온도가 내려가자 2월 19일 저녁부터 냉각수 투입량을 줄였는데 이후 100°를 넘어선 것이다.

   

2월 20일을 전후해 도쿄 시내의 검은색 가루가 후쿠시마 원전 2호기와 관련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2월 22일 도쿄 시내의 미츠모토 공원에서도 kg당 2만Bq 이상의 고농도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다고 도쿄신문과 온라인 매체 '젠다이넷'(gendai.net)이 보도했다. 미츠모토 공원의 오염 정도는 체르노빌의 거주지역제한 최고 수준인 '거주금지구역'(당 148만Bq 이상)에 해당한다. 조사에 참여한 한 도의원은 "이번 조사에서 미츠모토 공원의 오염은 밝혀졌지만, 인근에 이런 장소가 더 존재할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 환경학회 소속 토양오염 전문가인 사카마키 유키오 씨는 "도쿄 거주 불가"를 주장한다. "도쿄는 세계 최초 방사선 피폭 수도다. 더욱이 인재에 의한 피폭이다. 도쿄 동부는 물론이고 수도 전역에서 공간 방사선량이 사고 이전보다 2~3배 이상 높다. 이런 계측수치를 당국이 계속 무시하다가는 큰 화를 초래할 것이다."

   

원전 사고 이후 미츠모토 공원이 있는 도쿄 카츠시 카구와 에도가와구 등 수도권 동부는 '핫스팟' 지역으로 분류됐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농도 방사성 물질이 검출된다는 소식에 일본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 깊어졌다. 현재 동일본과 도쿄에서 일본산 생수를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산 생수의 일본 수출은 급증했다. 지역방송에서 도쿄의 한 편의점 주인이 "한국산 생수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사고 원전 안정화' 염원을 무색케 하듯, 일본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뉴스가 이어졌다. 그간 정부의 처지를 고려해 원전과 관련한 부정적인 기사를 배제해왔던 '아사히신문'은 3월 9일 "정부가 발표한 위험지역 주민 피폭 조사 결과는 축소,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원전 사고 한 달 후 주민거주안전구역으로 지정한 이와키, 가와마타, 이이다테무라 등 후쿠시마 원전 인근 지역 주민 1080명을 대상으로 피폭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최고 피폭량은 35밀리시버트(mSv)로 안심할 수 있는 수치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은 "'기준치 이하'로 발표했던 피폭량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아오모리현 히로사키대학 피폭의료종합연구소의 도코나미 신지 교수팀이 지난해 3~4월 해당 지역 주민 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자 중 약 80%에서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됐고, 갑상선 피폭이 최고 87mSv였으며, 50mSv 이상 피폭자도 5명이나 됐다. 방사성 요오드 피폭은 갑상선암을 일으킬 위험성이 높지만, 반감기가 다른 방사성물질에 비해 비교적 짧다.

   

한편 방송에서 날마다 후쿠시마 농산물을 시식했던 방송인이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아 충격을 주기도 했다. '후쿠시마 농산물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중견 앵커 오츠카 노리카즈(64) 씨는 후지TV의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원전 사고 한 달 뒤부터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요리코너에서 후쿠시마산(産)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시식했는데, 지난해 10월 식도에 혹이 생겨 병원에 갔다가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방송에서 알렸다. 현재 6개월째 투병 중인 그는 3월 14일 방송 은퇴를 발표했다.

   

내각과 왕실도 피난 검토

   

3월 들어 일본 기업들이 본사를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전하고 있다. 미쓰비시 주식회사, 미쓰비시 도쿄 UFJ은행, 스미토모 미쓰이은행, 미쓰이· 컴퍼니 등이 이전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에 진출한 다수의 해외 기업은 이보다 먼저 일본을 떠났다. 영국의 대형 슈퍼체인 테스코가 지난해 8월 말 일본에서 철수했고, 벨기에 국책은행 덱시아도 지난해 6월 일본을 떠났다. 알리안츠생명보험은 올해 1월 철수했으며, 일본 패망 직후 일본에 진출했던 상하이은행도 3월 중 일본 내 전점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피난을 고려하기는 일본 내각도 마찬가지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퇴임 전 "수도 이전을 고려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왕실이 피난을 심각하게 검토한 사실도 드러났다. 3월 12일 아사히신문은 지난해 3월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 직후 일왕 부부와 왕실 가족의 피난에 대해 당시 간 총리, 에다노 관방 장관,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이 비공식적으로 검토한 사실을 보도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원전 사고 이후 줄곧 일본 정부의 발표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일본 정부의 보고가 신통치 않다고 여긴 IAEA는 1월 29일 후쿠시마 현지사무소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후쿠시마 핵재앙' 당사국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자국민에게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다. 원전 수출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재난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초기 보고체계도 엉망이었다. 정부에 정확한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내각은 오류투성이 정보를 근거로 이미 몇백조 원을 원전에 투자한 까닭에 원전을 포기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지난해 3월 후쿠시마 제1원전이 폭발한 후 방사능 위험구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임시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준치 이하 피폭"이라던 정부 발표와 달리 재난지역 거주민의 약 80%가 피폭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원전에 쏠린 관심 돌리기

   

현재 후쿠시마 제1원전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다. 원전 내부 정보가 정확지 않기 때문이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3월 9일 방송인 김미화가 진행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후쿠시마 원전은 이제 손쓸 시간이 지났다"고 진단했다. 현재 후쿠시마 원전 1, 2, 3호기는 모두 멜트다운(원자로가 노심용융 현상을 일으켜 전부 녹아 바닥에 흘러 쌓인 것) 상태로, 검사로봇을 투입하면 바로 못쓰게 될 만큼 방사선량이 높다는 것. 서 교수는 4호기의 폐연료봉 수조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4호기에는 폐연료봉 수조가 8층 높이에 올라가 있다. 문제는 지진이다. 여진이 1년 내내 이어지고 있어 언젠가는 무너진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1, 2, 3호기 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 현실은 너무 참담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본 정부는 은폐에 급급하다 유야무야 1년을 보내버렸다. 3월 14일에는 동일본 신리쿠 지역에 진도 6.8의 강진과 쓰나미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독도는 일본 영토" "센카쿠도 일본 땅"을 부르짖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런 도발을 벌이는 까닭은 원전에 쏠린 자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다. 이 와중에 도쿄도지사인 극우정치인 이시하라는 도민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이 '올림픽 유치' 공약을 남발해 원성을 샀다. 일본의 내일은 한치 앞도 어둡다. "

이미숙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자 iwillee@donga.com

[국제] 도쿄까지 덮친 방사능 공포 기업들 줄줄이 짐 싼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4695870

   

인드라가 틈만 나면 쪽발 정일이 뒈지기를 염원했다.

   

결과는?

   

"링거를 꽂은채로 처형당한 김정일의 짝사랑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권력도 가질 수 없는 사랑'을 가르친 여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이후 김정일이 가장 총애를 했다고 하는 '북한보천보전자악단'의 가수 윤혜영.

   

1999년 금성 제1고등학교를 졸업한 윤혜영은 '준마처녀'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이다.

   

윤혜영은 김위원장의 절절한 구애를 외면하고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가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윤혜영을 총애했던 김정일은 집단체조 '아리랑'에 그녀의 노래 '준마처녀'를 삽입하도록 지시하고 생일날 함께 공연을 관람을 하기도 했는데 그 동안 김정일의 총애를 받은 여성들은 많았지만 윤혜영처럼 공개행사에서 옆자리까지 꿰찬이는 없었다.

   

김정일의 애정은 윤혜영의 무대의상과 액세서리를 구입하러 유럽에 사람을 보낼 정도로 깊었다.

   

하지만 정작 윤혜영은 같은 악단 피아니스트로 일하던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김정일 측근들의 도청으로 탄로났고 윤혜영은 목란관 지붕에 올라가 애인과 함께 뛰어내렸다.

   

남자는 즉사했지만 김정일은 "무조건 살려낸 다음에 죽이라"고 지시했다.

   

윤혜영은 2003년 말 의식불명 상태에서 링거를 꽂은 채 처형되었고 김정일은 이후 보천보전자악단의 공연에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40&aid=0000103072&sid1=001

   

님 운세가 잠시 안 좋을 때다.

   

참고 인내하고 마자세하고 있으면 시련이 깊은 만큼 좋은 날이 온다.

   

공덕을 쌓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자.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는 당분간 인드라에게 맡겨도 되나요?

하고, 나는 내 생활 경제에 올인해도 되나요?

   

그렇다.

   

마자세가 아니라도 좋다.

여러분이 감명깊은 구절이나 좌우명이 있다면

그 좌우명으로 매일같이 해보시라. 

   

그렇듯 마음 문제를 어느 정도 풀 때까지

두 문제는 분리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마음 문제를 푼다면,

평정심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서야 자신의 생활 경제와 한국 경제, 세계 경제를 접목시켜보시라.

   

끝으로 인월리가 전략적이라고 하니

알파오메가에서 오메가로만 보는 분이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한다.

게임이란 여러분과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과 게임을 하는 것이다.

헌데, 여러분 주요 착각 중 하나가

인드라가 여러분과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여러분과 게임을 하지 않는다.

오직 국유본과 게임을 할 따름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5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7 02:14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65559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1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5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7

   

   

17. 유태인은 1654년에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영국 프리메이슨 회사인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는 영국 왕실 명을 받들어 1607년 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미국에 이민선단을 보냈다. 이 당시는 신대륙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아무도 가려하지 않아 프리메이슨 회사에서는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끌고 간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개척하는 데에는 종교적인 신념이 중요하다고 본 영국 왕실의 판단이었던 듯싶다. 해서, 이들은 버지니아주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한다. 이때, 식민지 경제를 유지할 방편으로 담배 농업이 활성화한다. 이후, 담배 농업은 미국 남부 대표적 업종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쿠바 담배가 인기를 끌자 미국 담배 농업이 큰 위기를 맞는다. 쿠바 정권이 나름 잘 통치했는데, 국유본이 쿠바 혁명을 일으킨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미국 담배산업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크다. 쿠바 혁명 후 쿠바 담배 유입이 끊기자 미국 담배 산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주는 워싱턴, 제퍼슨을 배출하는 등 초기 미국을 주도하던 미국 남부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 지역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한반도 크기의 땅을 소유하고 노예를 수도 없이 거느릴 만큼 노예주 천국 대농장 체제였다. 워싱턴, 제퍼슨 대농장에서는 담배, 아편 농사를 했다.  이 지역 노예주 상당수는 국교회(성공회)였다.

   

1620년 뉴잉글랜드에는 버지니아인과는 다른 유럽 이주민이 들어온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그들이다. 전체 인원은 102명. 이중 여성은 28명이었다.

   

하면, 예서 반문할 수 있다. 유럽인이 왜 이리도 북미에 식민지 이주를 꺼려했는가고 말이다. 전지구적으로 1650년 이후로 소빙하기가 찾아왔다. 특히 남반구보다 북반구가 추웠나 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을 보면 조선 역시 소빙하기 시대여서 험하게 살았음을 보여준다. 소빙하기는 1850년까지 지속된다.

   

해서, 17세기 내내 북미에 유럽인 이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1654년 8월22일 뉴욕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떠나 한달 보름여 동안 대서양을 건넌 피어 트리호에서 야곱 바르심손이 내렸다.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최초의 유태인이다. 허나,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개인 도착이어서인지 1654년 9월 집단 이주를 최초의 북미 이주로 본다. 

   

유태인을 태운 찰스호가 1654년 9월 북미 뉴욕에 모습을 드러낸다. 23명의 유태인은 유럽이 아니라 브라질에서 온다. 사정은 이렇다.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으로 일부가 포르투갈로 이주했다가 포르투갈마저 박해를 하니 더는 유럽에 있고 있지 않았던 유태인 일부가 남미로 이주한다.

   

이들을 마라노라고 한다. 혹은 콘베르소라고도 한다.  스페인 유태인이지만, 당국의 강요로 인해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들이 콘베르소, 마라노이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겉으로만 개종하고, 가정에서 몰래 예배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 마라노, 혹은 콘베르소는 마치 카르타고인인양 능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대농장을 건설하여 부를 축적한다. 허나,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늘 자금이 필요한 포르투갈에서 그냥 놔둘 수는 없었을 터. 이단 심판을 명분으로 대농장을 장악하고, 유태인을 축출한다.

   

브라질에서 쫓겨난 유태인이 갈 곳이 어디겠는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던 이들이, 가진 재산을 다 정리하여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당시 뉴욕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통치하고 있었다. 총독 스토이베산트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거주를 불허하였으나,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당국은 총독에게 유태인 거주를 허락하라고 지시한다. 명분은 이들 유태인이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을 잠시 점령하였을 때, 유태인들이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실제 이유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이사회를 장악한 유태인들이 소식을 듣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유태인 사회에서 파문당한 유태인 철학자, 스피노자가 아버지가 죽었기에 형과 함께 상점을 한동안 운영했다.

   

해서, 23명의 유태인들은 뉴욕에 거주하게 된다. 네덜란드령일 때는 뉴욕이 아니었다. 뉴암스텔담이었다. 허나, 십년 뒤 영란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 뉴암스텔담이 영국 소유가 된다. 해서, 이름도 뉴암스텔담에서 뉴욕으로 바뀐다.

   

하면, 유태인은 또 추방당했는가. 아니다. 크롬웰의 예를 따라서  미국에 살던 청교도들은 유태인과의 공존을 취했다. 크롬웰은 당대 네덜란드가 순식간에 강국이 된 배경에 유태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유태인과의 제휴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당시 구교에서 청교도들을 '신유대교'라고 부를 정도로 청교도와 유대교도 관계가 매우 친했다.

   

뉴욕은 18세기까지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초기에는 천여 명, 1770년대 뉴욕 인구가 3만여 명, 1790년대에 가면 17만여 명이었다.

   

이런 뉴욕에 이들 유태인이 정착하여 유럽과 남미에서 했듯 뉴욕주에서도 대농장을 꾸려 북미에서도 봉건적인 장원 제도를 만들었다. 이들은 뉴욕시가 아니라 뉴욕주에 기반하여 미국 1% 이내 부유층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고, 이들 후예가 루즈벨트 집안인 게다. 루즈벨트는 어려서 보통학교를 다니지 않고 귀족수업만 받았다. 루즈벨트 어머니는 300인위원회의 델라노 가문이다. 델라노 가문은 프랑스 위그노파였는데, 이 시기 유대교도와 위그노교도간 결혼이 상류층 사이에서 일어난 듯싶다.

   

인드라가 미국 역사 자료를 분석한 잠정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미국을 만든 것은 유태인과 위그노파이다. 이들의 물리적 결합을 도운 것은 프리메이슨이며, 이들 화학적 결합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이들 초기 유태인들은, 자신이 마라노, 콘베르소 유태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까지 형식적으로 유지하던 카톨릭을 버리고 청교도로 적극적으로 개종해서 미국 주류인 와스프(WASP)에 결합했던 것이다.

   

해서, 루즈벨트도 뉴욕주에서 의원을 하며 정치적 성장을 했던 게다. 이 지역, 뉴욕시와 뉴욕주, 펜실바니아는 미국 남부와 미국 북부의 경계를 이루는 주요한 지역이었기에 캐스팅보드를 쥐면서 본격 성장할 수 있었다. 인드라는 남북 통일이 이루어질 때, 인천이 뉴욕과 같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어쩌면, 강화도에 월스트리트와 같은 거리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안보 문제 때문에 송도 영종도가 개발되었지만, 통일이 되면, 연평도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지역이 엄청난 지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인드라는 국유본이 평양 정권에 지시해서 틈만 나면 연평도 사건 같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라고 보고 있다. 땅값이 충분하게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유태인 북미 이주는 전혀 계획적이지 않았다. 단지, 떠밀려서 우연하게 북미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고, 유태인 특유의 강한 생존 본능으로 미국 1% 이내 부자가 된 것이다.

   

   

   

18. 두번째 유태인 이민 물결 주인공은 독일계 유태인이다

   

17세기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독일 남부는 쑥밭이 되었다. 해서, 이 지역 상당수 농민은 결단을 해야 했다. 죽든가, 이주하든가. 이때, 이주민 중 다수는 폴란드 발트해 방면에서 흑해 방면 등 동쪽으로 이주했다. 하고, 일부가 북미로 떠났다.

   

이들 초기 독일계 이민은 펜실바니아주에 주로 살았다. 이유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다. 독일계 이민자들은 대개 루터파여서 뉴잉글랜드에는 청교도가,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미국 남부는 국교도가 사는 곳에서는 부담을 느꼈다.

   

이때, 이들 이민 경로는 어떠한가. 19세기 초반까지도 미국으로 이주하려는 유럽인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백인이더라도 노예계약으로 속아서 북미로 왔거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나 정치범이거나 중대 범죄자나 매춘부, 골드 러쉬 같은 데에 현혹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서, 이들 독일계 이민은 이민 커넥션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커넥션, 베트남 보트피플 커넥션, 이차대전 당시의 유태인 탈출 커넥션, 아프칸 구출 커넥션과 같다. 불법 체류에는 돈이 든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프리메이슨이 인력 공급업체로서 떼돈을 번 것 같다. 당대 무역회사 수익구조가 뻔했다. 노예무역이 가장 돈 되는 장사였는데, 인력 공급업이란 노예무역보다는 못하지만, 짭짤했던 것이다. 이는 식민지 국가에서 백인 수를 늘리고자 하는 국유본 정책과도 부합되는 것이어서 국유본이 적극 지원했다. 혹, 베어링 가문이 순식간에 영국 최고의 금융가문으로 부상한 이유가, 백인 노예무역 때문인 것일까? 

   

다시 말해, 영국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북미로 가는 정거장이었던 게다. 하고, 이러한 스코틀랜드 정거장은 20세기 초반까지 작동한 것으로 본다.

   

   

   

   

북미 이주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인 게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독일계 이민이 펜실바니아주 정도면 충분했던 듯싶다. 이때, 독일계 이민자란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생존한 자들은 특정 기술을 보유한 자들인 듯싶다.

   

즉, 전쟁을 생각하면 된다. 영지전이나 국가간 전쟁을 하면, 영지민을 포로로 하는데, 이때 우대받는 층이 누구인가. 임진왜란에서 보듯 도자기 굽는 장인처럼 특정 기술을 보유한 자이다.

   

영국은 양모를 수출했고, 네덜란드 플랜다스 기술자들이 양모를 가공했던 것이다. 해서, 백년 전쟁이 터지자 전쟁을 기회로 원료만 팔던 영국으로서는 네덜란드 기술자를 모셔오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인드라는 당대 북미 대륙 상황을 소설처럼 펼쳐보인다.

   

이미 북미에서 지배계급인 자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선거하듯 분류하는 것이다.

   

상층 지배계급은 선거에서 새누리당이나 쪽발민통당 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다.

다만, 어떤 넘이 자신을 위해 일을 더 잘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저울질할 따름이다.

   

중산층, 혹은 중층은 새누리당이나 쪽발민통당 하나에 목숨을 건다.

왜? 그들 밑에서 해바라기처럼 라인을 타기 때문이다.

물론, 새누리당이 이기건, 쪽발민통당이 이기건, 상당수 중산층, 중층은 죽어갈 것이다.

왜? 먹을 게 없거든?

문제는 알면서도 지지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도 확율이 상대적으로 높기에.

   

하층은 선거에서 누가 되건 상관없다. 투표 안 한다. 어차피 둘 다 개색희들이니까.

   

이런 분류 방식으로 북미 지배계급은 독일계 이주민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쓸만한 넘들은 정착시키고, 쓸 모 없는 넘들을 자연도태시키는 방식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은, 독일계 이주자 중에서는 기술을 지닌 이들, 장인, 도제 그룹이 주도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독일에서 이주할 때 기술자만 이주할 결심을 할 이유는 없다.

   

허나, 오늘날 호주 이민 같은 데서 보듯, 자본 이민 다음으로는 기술 이민인 게다. 독일에서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서 북미, 뉴욕에서 펜실바니아에 이르는 도정에서 상당수 독일계 이주민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독일계 이주자 중에는 독일계 유태인도 섞여 있었던 게다.

   

해서, 이들 독일계 유태인들은 독일계 이주자 다수처럼 생존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일, 비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 요구라 함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사태인 게다. 이미 북미 지배층이 형성된 상황이다. 유럽과 다른 조건은, 능력만 있으면 유럽과 같은 제약없이 상류층으로 진출할 수 있다. 미국 지배층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자는 거의 없다.

   

이. 집단적이어야 한다.

   

먼저 온 집단보다 나중에 온 집단은, 유럽과 다른 차별을 겪어야 했다. 유럽에서의 차별이란 신분적 차별이었다면, 미국에서의 차별이란 그야말로 원초적 차별이었다.

   

신분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선점 집단은, 단지 내가 먼저 찜했음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분쟁 양상을 잘 묘사한 것이  영화, 갱스 오브 뉴욕 (Gangs Of New York, 2002)이다. 이때, 기준이란 민족적, 문화적 구분인 게다.

   

해서, 독일계다, 프랑스계다, 영국계다 이런 식으로 싸움이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 대안을 제시해야 살아남았다.

   

상류층 입장에서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이기든가 관심이 없었다. 격투기장에서 살아남은 검투사에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전자는 생존 본능이 강한 자들이다.

하면, 후자는 생존 본능 플러스 기획이다.

   

상류층이 지속적으로 상류층이려면 단지 족보만 상류층이면 말짱 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북미 상류층이 잘 안다. 해서, 북미 상류층은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북미 상류층이 새 사상과 신기술에 등한시하면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미국 독립 이후 독일계 이민자들은 펜실바니아 이외의 지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역이란 서부인 게다. 뉴잉글랜드는 청교도, 버지니아주는 국교도, 펜실바니아는 초기 독일계 이주자. 

   

이때, 이주 결심을 확고하게 한 배경이 있었으니 영국 왕조가 이전에도 독일계였지만, 이번에는 독일 남부 작센주, 오늘날로 보면 바이에른 주 귀족이 영국 왕이 되는 것이다.

   

해서, 작센주 출신 독일왕을 따라 수많은 자들이 기회를 찾아 영국으로 이주했다. 허나, 영국에 오니 막상 살 길이 없었던 게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데, 영국민은 다른 나라 인민처럼 어렵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계 해상을 제패한 영국 해군은 19세기 초중반까지 해병이 없어서 스코틀랜드 해안가를 돌며 닥치는 대로 청년을 납치해서 해병을 만들든가, 아니면 미국 수송선을 털어서 수송선 선원을 해병으로 삼을 지경이었다.

   

하여, 이들은 프리메이슨 궤변에 속아서, 혹은 영국 왕에 대한 착각 때문에, 그냥 먹고 살기 힘들어서 등등의 이유로 북미 이주 커넥션에 넘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중서부에 자영농으로 살았다. 드라마 '초원의 집'에 나오는 미국 자영농 장면이란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미국 남부의 노예주 제도를 혐오했다. 유럽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동시에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사회에서 개인적으로 대응하기 보다 집단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국 원조 공화당파인 게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킬 사람은 국가가 아니라 오직 자신임을 안다. 개인주의.

   

동시에 다른 집단이 집단적이므로 일시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보안관주의, 영웅주의.

   

세계는 필요없다. 어차피 세상이란 불합리하므로 내가 살고 있는 이곳만 안전하면 된다. 미국 고립주의.

   

정리하자.

   

초기에는 스페인 유태인, 마라노, 혹은 콘베르소 유태인이 월등했다. 허나, 1700년이 지나 독일 30년 전쟁 이후에는 마라노, 콘베르소 유태인은 독일에서 오는 유태인과 완전히 뒤섞였다. 둘의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았기에. 둘은 기존 사회에 재빨리 적응하여 상류층이 되었다.

   

1700년 이후로는 스페인 유태인이 북미로 이주할 이유가 없는 반면, 독일 유태인이 북미로 이주할 사유는 계속 발생하였기에 1750년에는 이미 독일계 유태인 수가 스페인계 유태인 수를 넘어섰다. 그래봐야 1650년에서 1825년까지의 약 175년 동안 유태인 이민 숫자는 약 1만 명이었다.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4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6 05:02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579634

   

   

   

   

예수는 로마인이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0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4

국제유태자본론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6

   

16. 한국인과 유태인만이 처녀성을 쓰는 이유 

   

세계에서 한국인과 유태인만이 여성 처녀성을 그대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 결혼 전에 김씨이면 결혼 후에도 김씨다. 반면 다른 민족은 결혼 전에 김씨라도 결혼 후에 쪽발씨가 되면 쪽발씨로 바뀐다. 왜일까?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미즈'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미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 제257호 | 20120212 입력

여권 신장과 양성평등 실현은 세계 모든 여성의 오랜 숙원이다. 아직도 "여성은 남자의 반"이란 주장을 펴는 나라가 지구상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세계 각지에서 여권은 크게 신장됐다.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지만 대다수 국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에게 선거권·피선거권을 부여했다. 자유·평등사상의 요람이란 프랑스도 그랬다. 모범적 민주국가인 스위스는 1971년이나 돼서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이슬람권은 터키를 제외하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권에 관한 한 지구상에서 가장 완고한 사우디아라비아마저 2015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초기 여성운동 리더는 대부분 유대인

유대인 사회는 전통적으로 여성 우위가 인정돼 왔다. 특히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할 때 첫 번째 조건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냐는 것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비유대인이어도 자식은 자동적으로 유대인이 된다. 그리고 전 세계를 통틀어 결혼 후 처녀성(Maiden Name)을 그대로 쓰는 것도 유대인과 우리밖에 없다.

   

여성운동이 본격화된 시기는 20세기 초 러시아 공산혁명 태동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동유럽 출신 급진 여성운동가들이 미국 또는 서유럽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여성 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여성운동 지도자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만, 최초의 여성기구 NOW(전국여성기구)를 설립하고 <ec2e>여성의 신비<ec2f>란 베스트셀러를 낸 독일-폴란드계 미국인 베티 프리단, 그리고 70년대 프랑스 사회·보건장관을 지낸 시몬 베일 등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사진)은 진보 성향의 유대인 여권 운동가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스타이넘은 34년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폴란드-독일계 유대인 가계다. 열 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는 정신병 요양소에 가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명석한 두뇌로 학업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고교졸업 후 미국 명문 여자대학 스미스 칼리지를 장학생으로 다녔고 또 1등으로 졸업했다. 60년부터는 프리랜스 리포터로 여러 매체서 일했다. 스타이넘은 선배 여성운동가 베티 프리단이 쓴 <ec2e>여성의 신비<ec2f>에 큰 감명을 받았다. 68년부터 신좌파 성향 여성운동을 벌였다. 베트남전 반전운동 그리고 여성의 인공 임신중절 결정권을 위한 투쟁도 벌였다. 62년 에스콰이어 매거진에 낙태 문제 관련 특집기고를 해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또한 여배우 제인 폰다와 함께 당시 국제사회의 관심사인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일명 '아파타이드' 퇴치운동도 전개했다.

   

71년 12월 그녀는 '미즈'(Ms)지를 창간했다. 남성은 결혼 여부에 불구하고 미스터로 불리는 데 반해 여성은 결혼 전엔 미스, 그리고 결혼 후엔 미시즈로 불리는 것을 양성 불평등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그래서 '미즈'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이제 미즈는 보편적 용어로 정착됐다. 72년 1월 10만 부로 창간호를 낸 미즈지는 매년 부수가 늘어 80년대엔 75만 부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83년 그녀는 한 여성잡지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인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스타이넘은 여성운동가가 주는 일상적인 이미지를 탈피했다. 당시 미국의 여성운동가 대부분이 용모엔 관심 없이 남성화된 풍모에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인상을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녀는 미니스커트에 긴 생머리 또 큰 테의 선글라스 등으로 모델 수준의 미모를 과시했다. 평생 많은 남자 친구를 사귀었으나 결혼은 거부하던 그녀도 66년 인종차별 철폐운동의 동지인 남아공 태생의 연하 애인과 2000년 66세 나이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3년 후 남편이 병으로 사망해 다시 독신으로 돌아왔다.

   

2002년, 2011년 두 차례 방한

스타이넘은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포르노 영화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보였다. 2010년 미국 포르노 영화의 전설적 배우 린다 러브레이스의 일대기를 주제로 매슈 와일더 감독이 만든 영화 '러브레이스'가 나왔다. 이 영화엔 포르노 추방운동을 벌인 스타이넘이 등장한다. '섹스 앤드 더 시티'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대인 여배우 새라 제시카 파커가 스타이넘 역을 맡았다.

   

스타이넘도 구설에 오른 적이 있었다. 우선 그녀는 대학 졸업 후 50~60년대 CIA의 위장 전위단체로 알려진 한 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60년대 플레이보이 바니 걸로 분장하고 뉴욕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일한 적도 있다. 그녀는 취재 목적의 잠입이라고 주장했지만 바니 걸 복장의 스타이넘 사진은 한동안 가십지에 게재돼 세인의 입방아에 올랐다. 스타이넘은 2002년 그리고 2011년 두 차례 방한했다.

   

우리도 최근 여권이 크게 신장됐다. 그런데 사실 오래 전부터 한국 여성은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시대 주자학을 도입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제도적으로 격하시켰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왕이 궐위돼 마땅한 후사가 없을 때 왕을 지명한 사람은 대왕대비였다. 왕이 나이가 어리면 발을 치고 수렴청정도 했다. 그리고 과거 우리 가정 경제권의 핵심인 쌀 뒤주 열쇠도 할머니가 갖고 있었다. 여성단체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여권은 이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니 우리 여성도 이제는 남성을 타도 대상이 아닌 더불어 공존하고 협조할 동반자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것은 또한 진보 여성운동가 스타이넘의 일관된 지론이기도 하다. " </ec2f></ec2e></ec2f></ec2e>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874

   

유태인과 한국인이 처녀성을 그대로 쓰는 이유는 솔직하게 말해, 여성 권리와는 무관하다.

   

일단 유태인/한국인을 제외한 동서고금 일반론을 이야기하자.

   

왜 한국인과 유태인을 제외하고, 다른 민족은 여성이 결혼하면 처녀성을 잃는가. 여성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행한 후,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고, 노예였고, 가축이었다. 프랑스 혁명 때조차 여성은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투표권도 20세기 들어서야 인정받기 시작했을 정도다.

   

하면, 유태인은 왜 처녀성을 그대로 유지시켰을까.

   

일반적 설명은 구약에서 근거한다. 구약에 따르면, 수메르인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자식으로 둔다. 예서, 장남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첩, 하갈의 자손으로 후일 아랍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과 조강지처, 사라의 자손으로 후일 유태인의 조상이 되었다.

   

해서, 유태인이 구약에 근거하여 모계 전승을 중시한다는 게다.

   

헌데, 과연 그럴까?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일. 아담서부터 야곱 이야기까지 창세기는 수메르 신화로 본다. 언제 썼는지는 몰라도 구약 기자가 중동에서 내려오던 신화를 각색했다고 본다. 

   

다만, 잠정적 추정하기로는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직후가 아니겠나 싶다.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 원년, 고레스 칙령에 의해 바벨론에서 유대로 돌아온 총독 스룹바벨 일행은 성전을 건축하게 된다. 이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강제로 이주한 이방인들과 남아있던 유대인과의 혼혈민족인 사마리아인들도 동참을 원했다. 그러나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 등은 반대했다. (에스라 4:1-2)

   

사마리아인들을 소외시키자 그들은 고레스-다리오-아하수에로-아닥사스다 왕의 재임시절 내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반란 혐의가 있다고 고소하게 된다. (에스라 4장) 고레스 왕 때 멈추었던 성전 건축은 다리오왕 2년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잇도의 손자)에 의해 건축을 격려받았고(에스라 5장)  아닥사스다 왕 때 귀환한 에스라는 레위인과 제사장일부가 이방여인을 취한 사실을 알고 통분하며 그 명단을 기록하게 된다. (에스라 9장-10장)

   

한편 에스라의 뒤를 이어 신임 유다 총독으로 포로들을 이끌고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을 건축하게 되지만 사마리아 총독이었던 산발랏과 그와 동조한 암몬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방해를 받게 된다. (느헤미야 4장-6장)"

http://blog.yahoo.com/jongseong/articles/768842 

   

   

앗시리아는 정복한 민족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혼혈시켜, 그들의 민족정신을 파괴하여 복종시키고자 했다. 하여, 바빌론 유수 때 이스라엘로 돌아온 엘리트 유태인들, 학개, 스룹바벨, 느헤미아 등이 혼혈인 사마리아인을 성전 건축에서 배제시켰다. 특히, 에스라는 혼혈에 분개하여 강제 이혼을 시킬 정도였다.

   

이. 오늘날 유태인의 조상격인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바리새인의 특징은 달의 신(수메르남신) 숭배가 변형하여 여성신 숭배 전통이 있었다. 다시 말해, 부계는 군사력으로 이어져오는 반면, 모계는 문화력으로 계승한다.

   

이는 수메르 문화가 인류 최후의 모계 사회였음을 시사한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 성이란 같은 여자 자궁에서 태어난 족속을 말하며, 씨란 직위를 말했다. 헌데,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 무계급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성보다 씨가 중요하게 되었으며, 씨 위주로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헌데, 멸망당한 족속 입장에서는 씨보다는 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영화 설정상 영국왕 후손이 스코틀랜드 후손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달의 신, 신전을 수호하는 신관들은 대부분 여사제들이었다. 수메르를 침략한 아카드족은 수메르를 정복한 뒤 수메르 달의 신 여사제들을 취했다. 해서, 상업과 문화를 중시하는 전통이 페니키아/카르타고로 이어졌기에 페니키아/카르타고 역시 여신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이 관계는 동아시아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북방민족과 화족과의 관계와 같다. 해서, 북방 민족이 중국에 오래 머물수록 북방 민족은 자신의 문화를 잊고 중국화한다. 그처럼 아카드족을 비롯한 숱한 민족들이 중동 패자가 되었지만, 이들 족속이 중동에서 권력을 유지할수록 점차 수메르화되었던 게다. 이러한 까닭에 고대 중동 종교어가 수메르어요, 고대 외교어가 아카드어가 된 것으로 본다. 

   

삼. 모국어, 엄마나라 말이란 표현에서 보듯, 문화 전승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대부분 교육을 여성이 도맡아서 하지 않는가?

   

예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전 세계에서 교육열이 굉장히 높은 족속이 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유태인이고, 다른 하나가 한국인이다. 이들에 비해, 약한 편이지만, 중국인, 일본인, 몽골인이 적극적이라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들 족속들 IQ 수치는 전 세계 평균보다 높다. IQ가 비록 상대적이며, 신뢰도가 낮은 편이라 해도 흥미로운 결과가 아닌가. 미국 대학 입학생 조사하면 대체로 상대적이며, 신뢰도가 낮다는 IQ 순서 비율로 입학생 비율이 정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에서 가장 극성맞는 맘은 유태인 맘이다.

   

인드라가 전해듣기로는, 유태인 여자랑 산다는 것, 정말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인드라는 감당이 될 것 같은데, 어지간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요즘 한국인 남편들이 하소연하지만, 유태인 남편들과 토론하다 보면, 그래도 아직은 천국에 살고 있다고 느낄 법하다.

   

오늘날 유태인 족속에서 천재가 많이 나온다면 그건 유태인 맘 덕분인 게다. 그처럼 한국인 족속에서 천재가 나온다면 그 역시 한국인 맘 덕분인 게다.

   

결국 유태인은 가정 교육이 중요함을 일찌기 파악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인 면을 가부장적인 남성 유태인에게 이야기하려니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해서, 구약에 근거해서 도덕 기준을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욕망과 도덕 두 축으로 움직이기에. 욕망을 견제하는 건 도덕이므로. 그 도덕 기준이 구약이므로.

   

해서, 유태인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기를 바란다.

   

가령, 로스차일드는 여성이 경영에 절대로 나서지 못하게 했을 만큼 가부장적이었다. 동시에 여성 핏줄도 중시하여 근친상간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던 것이다.

    

   

하면, 한국인은 어떠한가.

   

   

"성씨(姓氏)는 혈족(血族)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표지(標識)로,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며,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성(姓)과 씨(姓)의 구분이 없어져 성씨(姓氏)가 성(姓)을 높여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초기 발생 단계에서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된 개념이었다.

   

한국의 성씨(姓氏) 제도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국에서는 성(姓)이 먼저 나타나고, 뒤에 씨(氏)의 구별이 나타났다. 성(姓)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녀들'이라는 글자의 의미처럼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母系) 혈족(血族)을 구분하기 위해 나타났다. 때문에 '희(姬)', '사(姒)', '강(姜)', '영(嬴)' 등 초기의 성(姓)들에는 '계집 녀(女)' 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성(姓)은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바뀌면서 부계(父系)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종족(宗族)에 따라 자신들의 거주지나 숭배물 등을 성(姓)으로 삼기도 하였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宗族)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지파(支派)는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계통의 구별을 나타내는 칭호를 씨(氏)라고 한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별은 하(夏), 상(商), 주(周) 3대(三代)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BC 221)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은 분봉(分封) 받은 국읍(國邑)의 지명(地名)이나 관직(官職), 조상의 자(字)나 시호(諡號), 작위(爵位), 거처(居處) 등을 씨(氏)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부자(父子) 사이에도 성(姓)은 같지만 씨(氏)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姓)이 다른데도 씨(氏)는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그래서 성(姓)이 같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씨(氏)가 같아도 성(姓)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소(離騷)'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문인(文人) 굴원(屈原)은 초(楚) 무왕(武王) 웅통(熊通)의 아들 굴하(屈瑕, ? ~ BC 699)의 후손으로 굴(屈)은 씨(氏)이고, 성(姓)은 미()이다. 초(楚)의 왕들은 무왕(武王)처럼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姓)은 마찬가지로 미()였다. 때문에 진(秦, BC 221 BC 207) 말기에 항량(項羽)이 서초(西楚)을 세우면서 옹립한 의제(義帝,?~ BC 206)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미심(心)이나 웅심(熊心)으로 달리 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종법(宗法) 제도가 무너지면서 성씨(姓氏)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종족(宗族)의 유대와 연결 관계가 약해지면서 씨(氏)가 성(姓)처럼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 이후에는 평민(平民)의 지위가 상승해 그들도 성(姓)을 지니기 시작했다. 결국 진(秦), 한(漢) 시대 이후에는 성(姓)과 씨(氏)의 구별이 점차 사라져 하나의 의미로 쓰였으며, 백성(百姓)이 민중(民衆)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출처] 성씨 [姓氏 ] | 네이버 백과사전

   

성씨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한 명칭이며, 곧 족적 관념(族的觀念)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데서 결국 족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 것으로,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더욱 밀착되어 있다.

   

후대의 성씨는 한자식 표기로서 이름 앞에 붙어 족계(族系)를 나타내는 동계혈족집단의 명칭을 가리키고, 이는 바로 중국식 출자율(出自律)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과 씨는 역사상 때로는 함께 붙어서, 때로는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관과 함께 사용하여 혈연관계가 없는 동일한 성과 구별된다. 여기에서 현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본·성·이름을 가지게 되어 있다.

   

성씨는 발생한 이래 계속 분화하여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며, 동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또는 부의 성을 따르기도 하며 또는 모의 성을 따르는가 하면, 또는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성을 거짓 사용하거나[冒姓] 변성(變姓)·사성(賜姓)·자칭성(自稱姓)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경우 삼대(三代:夏·殷·周) 이전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성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이름 그 자체만으로는 독립된 인격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성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다.

   

성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의 표지(標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여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 동안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 나라 고래의 관습법이다.

   

현행 <민법>상으로 자(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제781조), 성이 잘못 불리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성의 변경은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의 문자구조에 관한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 說文解字에 "성인지소생야(姓人之所生也)"라 하듯이,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모계시대에는 여계의 혈통을, 부계시대에는 남계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또, 좌전 左傳에 "천자건덕 인생이사성(天子建德 因生以賜姓)"이라 한 것처럼, 천자가 유덕한 사람을 세워 제후(諸侯)를 봉할 때 그 조상의 출생지로써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씨이다. 좌전에 "조지토이명지씨(胙之土而命之氏)"라 한 바와 같이, 씨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됨을 말하고 있다.

   

씨는 분화된 혈통(성)의 각각의 지연(地緣)을 표시하는 표지인 것이 분명하므로 그 본원적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고전에서 말하는 성은 혈통의 연원을 표시하는 것으로 역시 우리의 성이라는 것에 해당되며, 씨란 같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써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된다.

   

경주 김씨·전주 이씨·밀양 박씨 등의 씨자에는 존칭적 의미도 잠재하여 있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씨는 또한 조선시대 양반의 처(妻)에 대한 이름 대용의 경칭적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 우리나라 성씨의 특징 -

우리 나라의 성씨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의 수용 및 보급, 분화과정과 본관의 세분과 통폐합 등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성명의 구성이 복잡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체계이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 위주의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의 가에서 '을'의 가로 입적(入籍)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아내는 김(金)성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대(漢代) 이래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父)족과 부(夫)족의 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表徵)하는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이라면 자식이나 새로 온 며느리 모두가 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안다.

   

우리의 그와 같은 성씨제도는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 혈연관념상 자기의 출자한 씨족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한 성씨 본래의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성씨와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조를 이루어 사상·문화·도덕·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성씨제도의 하나인 사성(賜姓)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왕실과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거나 귀화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와 같은 사성에는, 첫째 유덕한 자를 표창하는 일종의 영전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둘째 봉건시대 제후나 귀순한 호족 대우의 표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셋째 혼인을 정하는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혈연적인 귀속의식과 뿌리 깊은 성씨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적어넣어 부계혈통을 밝힌다든지,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기시한다든지, 또는 각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든가, 또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진다 하는 일이 그 단적인 표현이다.

   

또한, '성불변의 원칙'은 우리 <민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으로서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가령, 여자가 시집을 가서 남편의 호적에 들어가더라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자기 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같은 호주 밑에 한 가구로서 살면서도 조모의 성, 어머니의 성, 며느리의 성이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이는 한 집안에 여러 성이 섞여 있는 한국인 생각으로는 당연한 일이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남편과 아내가 같은 성을 갖는 부부동성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외국인의 눈에는 이상한 일처럼 비쳐지고 있다.

   

일본의 구민법에서는 씨(우리 나라의 성에 해당)는 가(家)를 나타내는 법률상의 명칭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일가일씨주의(一家一氏主義)였다.

   

따라서,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은 곧 다른 가에 입적하는 것이므로 일단 시집을 가면 그 집의 성을 따르고, 또 개가를 하게 되면 다시 개가한 집의 성으로 바꾸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습은 서양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신민법에서는 씨도 각 개인의 호칭으로 바뀌었으므로 종래와는 달리 부부는 혼인할 때 서로 협의하여 어느 한 쪽의 성을 따르되, 이혼하면 본래의 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종래의 관습을 좇아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이다.

   

이탈리아·스위스·오스트리아·독일·브라질 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른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관습이다. 하지만 이것은 법률상의 의무는 아니며, 아내는 혼인 전의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자유로이 바꿀 수도 있다.

   

소련의 경우는 부부가 서로 상의하여 어느 한 쪽의 성을 공통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거나 아니면 결혼 전의 각자의 성을 그대로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법률상의 규정이 그럴 뿐, 실제 관습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임은 물론이다.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 자기의 성명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부가 같은 성을 쓰든 각기 다른 성을 쓰든 상관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만의 경우는 좀 독특하다. 아내는 자기의 본성 위에 남편의 성을 덧얹어[合冠] 사용하는 복성주의(複姓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혼인한 여자의 성명은 '남편의 성+자기성+이름'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세계에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국민도 많고, 또는 정치지도층(지배계층)만 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많다. 미얀마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아프리카 신생국들 가운데는 지배층만 성을 가지고 있고, 일반 국민은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프리카 신생국의 지도자들도 대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유학생 출신이 많으므로 서구식의 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튀니지 같은 나라에서는 1960년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범국민창성운동(凡國民創姓運動)을 전개한 바 있다.

   

세계에서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랜 민족인 중국과 이웃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발전과 궤도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열하여 분관·분파작용을 하였는가 하면 소멸되기도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우리 성씨의 구체적인 모습은 최초의 인문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조에 담겨져 있다. 성씨 그 자체가 혈연과 지연의 이중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우리 성씨의 특징규명에는 성의 생성·분화 과정과 함께 그 성의 출자지(出自地), 곧 본관의 지역적 구획과 연혁을 동시에 결부시켜 고찰해야 한다.

   

중국식 성씨제도는 벌써 삼국시대부터 왕실·귀족순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한국적 성씨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였다.

   

후삼국시대의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른 신분제의 재편성과정에서 태조 왕건(王建)은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신분적으로 재편성하였고, 이러한 성씨체계가 뒷날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로 나타났던 것이다.

   

고려 초기에 전국 주·부·군·현과 향·소·부곡 등 군현과 임내(任內)별로 분정된 성씨의 구성요소는 읍치(邑治)의 지배성단인 인리성(人吏姓)과 촌락지배성단인 백성성(百姓姓) 및 각종 임내성이었다. 이들 성씨의 수장들은 후삼국시대에는 성주·촌주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이른바 호족이며,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거주지별로 토성(土姓:토박이성)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고급 관인을 출신 성씨별로 분석해 보면, 소수의 중국·발해계의 귀화인·유민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군현의 토성들이었다.

   

후삼국시대 호족들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관료와 태조공신(太祖功臣:三韓功臣)이 되고 각기 성과 본관을 분정 또는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邑) 성씨들은 본관을 떠나 일찍이 서울로 진출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거나 그대로 토착한 성씨는 각기 읍사(邑司:州司·府司·郡司·縣司·鎭司·鄕司·部曲司 등)를 중심으로 향리·장리(長吏)층을 구성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해 나갔다.

   

이러한 군현성씨의 진출기반은 강력한 씨족적 유대와 공고한 경제적 기반 및 학문적·행정적 소양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였다. 고려 광종 이후에 새로 진출한 성씨들은 대개 군현 향리층의 자제였다.

   

그들은 향공(鄕貢)·상경유학(上京留學)·기인(其人)·시위(侍衛)·선군(選軍)·부전(赴戰) 등의 수단을 통하여 당시의 3대 출사로인 문(文)·무(武)·이(吏)의 세 계열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시대가 내려올수록 지방성씨의 진출이 활발하여 지배층의 저변확대를 가져왔다. 이런 추세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집권세력이 점차 문벌귀족에서 무신 내지 신진사대부로, 근기(近畿)지방의 군현토성에서 삼남지방의 토성으로, 대읍(大邑)토성에서 중소군현토성으로 확산되어 가는 결과로 나타났다.

   

빈번한 정변과 기성관인들의 정권쟁탈전이 끊임없이 세력교체를 가져왔고, 그러한 와중에서 지배세력의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신흥세력은 주로 지방의 토착성씨에서 공급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각 본관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반근착절(盤根錯節)되어 있던 토성은 상경종사(上京從仕)·유이(流移)·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기존 토성의 소멸에서 망성(亡姓)이 생기고, 북진정책에 따른 사민(徙民)에서 입진성(入鎭姓)이 생겼는가 하면, 지역적인 이동에서 경래성(京來姓)·내성(來姓)·입성(入姓) 등이 발생하였고, 특히 고려 후기 군현간의 향리조정책에 의하여 속성(續姓)이 대량 발생하였다.

   

토성을 제외한 다른 성종(姓種)은 귀화성이나 새로운 사성을 제외하면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며, 15세기라는 시기를 기준하여 볼 때 이른바 거족(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는 각기 군현토성에서 나왔다.

   

서울로 진출한 재경관료나 유향품관(留鄕品官)을 중심으로 한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의 구성 주체, 경저리(京邸吏)·영리(營吏)·읍리(邑吏)를 공급했던 향리의 주체들도 역시 군현성씨에서 나왔다.

   

고려시대 지방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던 계층은 각 읍 향리의 상층부인 호장(戶長)층이었다. 마치 서울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고관요직을 놓치지 않고 부지해 나가는 데서 가문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토착세력은 호장층의 확보 여부가 그들 성씨의 세력소장에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지방 향리에서 서울로 진출한 계층은 대개 호장층의 자제였고, 후대에 대성명문으로 성장한 성씨의 시조 가운데는 호장이 많았다.

   

한편, 12세기 후반 무신집권을 계기로 한 급격한 사회변동은 군현 및 향·소·부곡 성씨의 대규모적 이동을 가져왔다. 그 결과 군현토성 이외에 촌성(村姓)·향·소·부곡성과 내성·속성 등 비(非)토성 출신의 관인이 점차 증가해 갔는데, 이러한 추세는 원의 지배시기와 왕조교체기를 겪으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화과정에서 향리의 지위와 권한은 계속 저하되고 축소되어 갔으며, 후대에 올수록 향리에게 부과되는 향역(鄕役)이 과중해지자 토성향리의 유망이 보편화되었다. 이산한 향리자원을 보충하고 행정구역간에 향리수량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비토성 향리가 계속 증가해 갔다.

   

우리 성씨체계는 그 토대가 왕건의 토성 분정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중국의 경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성족분정(姓族分定)작업과 당태종(唐太宗)의 정관씨족지 貞觀氏族志 편찬사업과 비교된다.

   

조위(曺魏)의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 실시를 계기로 문벌사회가 확립됨에 따라 각 군별로 군망(郡望)이 형성되어 갔다. 그 뒤 진실(晉室)의 남도(南渡)와 오호(五胡)의 강북지배에서 종전의 성망체제가 획기적으로 개편되었다.

   

그 결과 이른바 군성·교성(僑姓)·오성(吳姓)·노성(盧姓)이 지역과 씨족에 따라 구분되었고, 그들은 남북조 역대 왕조의 흥망과 집권세력의 소장에 따라 성씨와 가격(家格)이 한결같지 않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군현성씨가 읍격(邑格)에 따라 주·부·군·현성이 있듯이, 수·당시대의 군망도 사해대성(四海大姓)·군성·주성·현성이 있었다.

   

한편, 효문제가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면서 496년에 성족(姓族)을 새로 정하자 북방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가 활발해진 것은, 신라 말 고려 초 호족이 고유명에서 한식성명을 수용한 경우와 비슷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새 질서를 강화하려 했던 태종(李世民)은 당대의 현실적 힘의 관계에 의하여 기존의 최(崔)·노(盧)·이(李)·정(鄭)과 같은 특정 대상의 성족을 확대, 개편해서 평준화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벌관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당시에 합당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는 데 당태종의 의도가 있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군현토성을 분정한 배경도,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신분을 편성하는 데 있었다.

   

고려 태조는 940년 3월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하면서 경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고 6성의 출자처인 6부의 명칭을 개정하는 한편, 후일의 호장인 당제(堂祭:堂大等) 10명을 크게 갈아서 임명하였다. 이때 명칭이 개정된 읍수는 218군현으로서 종전의 9주 5소경을 위시한 전국의 대읍은 물론 일부의 소현까지 미치고 있다.

   

마치 본관이 국가에 의하여 정해지듯이, 고려왕조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적극 참여했던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이 제각기 출신지 군현에 토성으로 지정되면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들은 이때를 기하여 시작되었다.

   

940년 이전에 폐합된 군현에는 토성이 없으며, 또한 그때까지 토착씨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지역, 즉 신라 말의 북쪽 국경선인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북지방(평안·함경도)에는 토성이 전무하였다.

   

대소읍 사이에 영속관계(領屬關係)가 형성되어 갔듯이, 기존의 토성은 본읍의 읍치를 중심으로 점차 임내와 직촌(直村)으로 확산되어 감으로써 성씨의 분화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즉, 토성 다음에 가속성(加屬姓)·입주후성(立州後姓)·차성(次姓)·차리성(次吏姓) 등이 생기게 되었다. 본읍 성씨와는 별도로 속현 및 향·소·부곡·처(處)·장(莊)성과 촌락을 본관으로 하는 촌성이 시간적 선후를 두고 계속해서 생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에 의거 당시 본관으로 존재했던 구역을 통계하면, 주읍 331, 속현 72, 폐현 141, 합계 544읍은 신라시대의 9주 소관 450읍에 후대 북진정책에 따라 양계(兩界)의 신설 주진이 가산된 것이며, 일부 군현은 종래의 향·소·부곡에서 승격되었다.

   

군현을 제외한 특수본관을 통계해 보면 부곡 377, 향 130, 소 243, 처 35, 장 9개 소나 되었다. 이들 구역에도 당초에는 각기 토성이 존재하였다가 그 뒤 임내의 소멸과 함께 토착씨족이 유망되어 15세기 이후에는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군현과 향·소·부곡은 고려 초기 이래 승격과 강등, 병합과 폐합, 영속의 변동, 임내의 직촌화 등의 변동은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원구역만은 좀처럼 쉽게 분해되지 않고 16세기까지 존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 구역에는 각기 토박이 성씨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위 지리지 편찬자들은 각 읍 성씨조를 정리하면서 그 폐읍이나 향·소·부곡 등은 비록 이미 혁파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곳 성씨의 출자지, 즉 본관을 밝혀야 하였기 때문에, 이미 혁파되고 직촌이 된 구역들로 각 읍의 고적조에 기재하였다.

   

본관인 읍격의 높고 낮음은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세의 대소강약과 대체로 비례하였다. 여기에서 비로소 본관의 우열이 나오게 되었다. 고려 초기 이래 인구증가에 따른 신생촌락의 계속적인 발생은 주읍토성의 임내성화를 촉진시켜 본관의 세분화와 다양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의하여 붙여진 본관은 그 바탕이 된 구역의 성격에 따라 격차가 있게 되고 신분과 직역(職役)에 따라 본관이 가지는 의미는 서로 달랐다. 읍격이 높은 토성이나 기성 명문대족은 그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는가 하면, 섬이나 역·진 또는 향·소·부곡을 본관으로 한 사람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그 본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국가에 조세·공부·역역(力役)을 지고 있는 일반 양민들은 그 거주지를 각기 본관으로 해서 편호(編戶)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확인받고 있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민을 파악하는 데는 항상 혈연과 지연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즉, 호적제도를 마련하여 국민을 지역별·계층별로 호적에 등재함으로써, 한편에서는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징세·조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신분의 주민을 긴박시킴으로써 주민의 유망을 방지하고, 직역부과는 물론 임관·선군에도 활용했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각 읍 성씨조는 바로 고려시대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씨체계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하였던 고려시대의 성과 본관은 후기 이래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인 편제와 신분구조에 획기적인 변혁을 초래하였다.

   

임내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향·소·부곡의 승격과 소멸, 행정구획의 개편과 폐합, 즉 성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획기적으로 가해지면서 15세기 말부터는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즉 촌과 향·소·부곡 등이 소속군현에 폐합되듯이, 종래의 촌성과 향성·소성·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어 갔고, 향·소·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어 갔듯이,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 병합되어 갔다.

   

그 결과 15세기 지리지에 실려 있던 폐현·촌·향·소·부곡·처·장·역 등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대부분 소속 주읍성에 흡수되거나 주읍을 새 본관으로 개정하게 되고, 15세기까지 존재했던 임내성의 본관은 대부분 사문화(死文化)되었으며, 일반 양민·천민들은 현 거주지에서 편호됨으로써 앞 지리지에 없던 새로운 본관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17세기 이후의 울산·대구·단성·언양 등의 호적대장에서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 성씨체계의 특징은 일찍이 중국의 것을 수용하면서 발전해 왔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성씨 가운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 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러한 추세는 후삼국시대 지배계층인 호족에 미쳐 사성·모성·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고려 초기 태조 왕건에 의하여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이 분정되면서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조선 후기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천민층의 신분해방과 함께 무성층이 새로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신분질서의 해이에 따른 위조족보가 대량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무명성씨나 신흥세력들은 다투어 기성의 대성명문에 투탁함으로써 기존의 대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희성·벽관(僻貫)이나 현조(顯祖)를 확보하지 못한 무명의 성씨들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한말을 거치면서 모든 한국인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었고, 모든 성씨가 양반성씨로 되어 갔던 것이다.

   

- 유래와 보급과정 -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고대 씨족사회에는 아직 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가령,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인들이 우리의 토착사회에서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족내혼(族內婚)을 하지 않는 풍속을 보고 그 일정한 집단을 동성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거나 부계거나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처럼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황제(黃帝)의 어머니가 각각 강수(姜水)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강씨와 희씨로 하였던 것이며, 성자 자체가 여성에서 나온 것처럼 중국 초기의 성자에는 여자(女字)변을 딴 글자가 많았다.

   

우리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우리의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夫餘氏)라 하였다 한다.

   

또한 신라는 박·석·김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이사금 때 6부(촌)에 이·최·정·손·설·배씨 6성을 주었다고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540576)에 건립한 4개 순수비, 진지왕 3년(578)과 진평왕 때(579632)에 각각 건립한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와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등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 역사상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성을 사용하였는데 삼국사기당서 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구려는 해(解)·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마(馬)·손(孫)·창(倉)·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 10여 종, 백제는 사(沙)·연(燕)·협()·해(解)·진(眞)·국(國)·목(木)·백()의 8대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고이(古爾)·흑치(黑齒) 등 10여 종, 신라는 3성(박·석·김)과 6성(이·최·정·손·배·설) 및 장(張)·요(姚)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고대 중국의 경우, 성은 천자가 내리는 것이며, 제후의 경우 그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을 주고 그 봉지(封地, 采邑)에 연유하여 씨를 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사성할 수 없으므로 그 지족(支族)인 공손(公孫)들은 그 왕부(王父)의 자(字)로써 씨를 삼았다 한다. 또 관직자나 치읍자(治邑者)는 세공(世功)이 있을 때 그 관직명이나 고을 이름으로 씨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성씨 사여(姓氏賜與)는 우선 국왕의 지배를 전제로 그 영역 내의 인민을 출생의 지연에 따라 성별을 나누되, 다시 일족을 이룰 만한 지배세력에게는 씨를 명함으로써 그 족계(族系)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구려 건국기의 성씨 사여는 국왕을 전제로 제도화한 감이 있다는 점, 그 수성자(受姓者)들에게 정치적 배려가 주어지며, 또 그들 각자가 연고지가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 당시 상황이 아직은 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것은 곧 그 정치적 지배조직과 좀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 할 것 없이 고대국가 체제정비기에 사성은 부제(部制)개편, 관등설정 등과 함께 국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의 정치적 편성의 한 방법이었음을 예상하게 한다.

   

신라시대 성씨 취득과정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박·김·석·신김씨와 같이 중고 왕실지배층의 성씨 취득, 삼국통일 전후의 6부 사성 및 나당(羅唐)관계에서 견당사신(遣唐使臣)·견당유학·숙위학생·입당수도승, 기타 중국에 내왕한 인사(張保皐·鄭年 등)들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성씨 취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성씨 취득은 주위 여러 집단에 대한 배타적 집단을 의미하였고, 특히 성씨를 획득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특권이 예상되었다.

둘째, 전통적 친족출계관념, 즉 신라 고유의 출자관념은 부계나 모계 또는 양계출자(兩系出自)라는 한정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성원권의 획득에 있어서 부계·모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나 변경할 수 있는 융통성이 존재했던 사회였고, 성씨를 취득함으로써 출자율이 부계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셋째, 성씨를 취득하는 집단은 족적 관념의 변질 및 혈족 자체 내의 극심한 변동으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사실상 족단 또는 친족공동체라는 용어로서의 의미는 사라질 만큼 해체되었다.

성을 최초로 지닌 집단은 왕실·귀족과 같이, 성이 골(骨)·족(族)과 관련되면서 최상층 지배집단에서 비롯되었다. 6부성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성씨 취득이 통일과정과 그 뒤 국가체제의 재정비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각 족단의 세력변동을 단계적으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들 집단의 성씨 취득과 등장이 비단 6부성에 그치지 않고 신라 하대로 갈수록 현저히 많은 성이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음은 6성 사성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단계적이고 계기적임을 시사한다.

   

우리 나라의 중국식 한자성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왕실부터 시작해서 귀족·관료·양민 및 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7세기 초부터 신라의 종성인 김씨·박씨가 구당서·신당서에 나온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金眞平)이며, 국인에는 김·박 양성이 많고 이성(異姓)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6성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런데 3성 또는 6성이 한성화(漢性化)한 시기는 비록 7세기 이후라 하더라도 그 씨족적 유래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데서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부터 한자성이 보급되어 갔다.

   

7세기 후반부터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과 육두품 계층은 점차 한성을 수용했던 것이며, 또한 신라는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왕경의 귀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결과 이미 한성화한 중앙의 귀족과 관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 귀족·관인은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한성화 뒤에 이주한 자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王大妃) 또는 왕비(王妃)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성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 가운데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 사이에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신씨(申氏)·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씨 표기방식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어 왕실은 근친혼을 계속하면서 동성의 왕비로 하여금 모성 또는 외조모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며, 그러한 관념이 지배층에 보급되자 성과 본관의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득성 사실과 시조 유래에 관한 신화·전설·민담 등 설화는 상고시대의 건국신화 외에도 각 가문의 가첩·족보 등에서 구전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국신화 겸 시조설화로는 혁거세(赫居世)·탈해(脫解)·알지(閼智)·수로왕, 제주의 고(高)·양(良)·부(夫) 3성시조설화가 있다.

   

신화는 신성시되는 이야기라는 입장에서 본 것이며 신성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거나 존재하는 것을 포괄적·규범적 의미를 가지도록 차원을 높여 나타내는 현상이라는 관점과 주인공의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로써 성립된다는 이론에 근거한다.

   

신라의 박·석·김씨 시조의 3성신화를 대비하여 볼 때, 각 신화가 가지는 화소(motif)가 공통되는 면도 보이고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보인다. 그것은 제의론적(祭儀論的) 측면에서도 각 족단이 소유한 신앙대상과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신화의 화소를 비교해 보면, 첫째 동일 화소로서는 ① 태어나자 부모로부터 유기됨, ② 유기 후 짐승들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도움을 받음, ③ 사람에게 구출되어 양육됨, ④ 모두 신화와 관련되는 성을 가진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둘째 이질적인 화소로는 '난생(卵生), 왕자로 태어남, 꿰짝 속에 들어 있음, 표류되어 왔음, 특이한 여자와 결혼, 죽은 뒤에 신이 됨' 등이 있다.

   

이들 신화는 그 자체로서는 허구이지만, 우리의 상고사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부족의 이동이나 형성,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 원시민간신앙 등을 아울러 반영하고 있다.

   

이들 시조설화는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난생설화를 가진 혁거세·탈해·수로왕의 경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족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알영(閼英)이나 허황후(許皇后) 또는 제주 삼을나(三乙那)의 배필이 된 처녀들은 바다를 건너왔거나 아니면 우물과 관련된 지신족임을 나타내고 있다.

   

상자 속에 담겨 표류하다가 노파에 의해 건져지고 수양되는 탈해의 전승은 후세의 시조설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평 윤씨·강화 봉씨의 시조와 남평 문씨의 시조는 각기 연못에서 석함에 담겨진 상태로 노파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바다 위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탄생에는 대개 구름과 안개 또는 천둥과 번개가 개재되어 더욱 신이한 것으로 수식되었다.

   

또 황간 견씨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인과 지렁이와의 교배에 의하여 태어나고 호랑이에 의하여 길러진다. 이런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은 우리 민담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신라의 시조설화는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지금도 영남지방에는 '골맥이'라는 동신제가 전승되고 있다. 여기에는 성씨가 붙어서 '골맥이김씨할배'·'골맥이이씨할매' 등으로 불리는데, 이때의 김씨할배는 그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시조신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의 인물인 신숭겸(申崇謙)·김홍술(金洪術)·김인훈(金忍訓)·손긍훈(孫兢訓)·박영규(朴英規)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각기 출신지인 곡성·의성·양산·밀양·순천의 성황신(城隍神)으로 기재된 것이 그 예이다.

   

또 남부지방에는 이른바 '조상단지'나 '삼신바가지'라는 단지에 쌀·보리 등을 넣어 방안 시렁 위에 모시는 풍습이 있는데, 이 쌀알은 조령(祖靈)을 상징한다. 알지(閼智)신화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금궤(金櫃)는 바로 이 조상단지의 신화적 반영이며, 계림(鷄林)은 곧 '골맥이제당'이었다.

   

신라에서 출자한 3성과 6성의 시조와 같이 고대에 등장하는 족장들은 다같이 천강설화(天降說話)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전승은 고려·조선시대까지로 면면히 이어져, 현존하는 대성들의 시조 또는 원조로서 숭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마다 제향이 베풀어지고 있다.

   

또한, 이천 서씨의 시조 신일(神逸)이 사냥꾼으로부터 사슴을 구하고, 문화 유씨의 유효금(柳孝金)이 범의 목구멍에 걸린 여자의 은비녀를 제거해 줌으로써 각각 신령이 꿈에 나타나 보은을 약속한 데서 그 자손들은 음덕을 받아 대대로 현달하였다는 설화는 후삼국시대 이래 고려·조선의 성씨 관계자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시조 또는 조상의 비상한 은공과 효성에 감복한 신령(산신령과 같음)이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음덕을 입게 하였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 지방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사회 자체 내에서의 성장과 신라 중앙문화의 지방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 하대 중앙통제력의 점진적인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일찍부터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앙귀족의 후예들과 신라 하대 재래의 토착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이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지방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통하여 지방행정 말단에 참여해 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관제에 버금가는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군현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통일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군현토성을 분정하였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

정, 씨족지·성씨록의 편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邦·芳·價·勝·濯·承氏)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 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정초는 그의 서문에서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성자는 바로 이렇게 생성된 중국의 것을 모방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 擇里志에서 우리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락국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첫째,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3성과 6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위 지리지에 의거하여 15세기에 존재하였던 우리 성씨의 종류와 본관수의 도별 통계는 [표 1]과 같다.

   

[표 1] 성씨의 도별·성종별 본관수

도별\성종·본관수

토성

망(토)성

내(망래)성

속성

촌(망촌)성

입진성

입(망입)성

사성

합계

경기도

242

162

37

35

10

·

·

·

486

충청도

305

98

33

81

49

·

·

1

567

경상도

561

15

131

172

28

·

·

4

911

전라도

656

69

37

99

2

·

·

·

863

황해도

100

82

51

53

16

·

·

·

302

강원도

107

82

25

87

·

·

·

3

304

평안도

10

·

21

14

·

389

·

·

434

함경도

98

57

46

24

17

15

332

·

589

합계

2,079

565

381

565

122

404

332

8

4,457

자료 : 세종실록 지리지.

  

  

  

  

  

  

  

  

  

이에 의거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종(姓種)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관에 의한 구분:주성(州姓)·부성(府姓)·군성(郡姓)·현성(縣姓)·촌성(村姓)·외촌성(外村姓)·부곡성(部曲姓)·향성(鄕姓)·소성(所姓)·처성(處姓)·장성(莊姓)·역성(驛姓)·수성(戌姓).

② 성씨의 출자에 의한 구분:천강성(天降姓)·토성(土姓)·차성(次姓)·인리성(人吏姓)·차리성(次吏姓)·백성성(百姓姓)·입주후성(立州後姓)·입현후성(立縣後姓)·가속성(加屬姓).

③ 성의 소멸과 이동에 의한 구분:망성(亡姓)·망촌락성(亡村落姓)·경래성(京來姓)·내성(來姓)·입성(入姓)·입진성(入鎭姓)·속성(續姓)·망래성(亡來姓)·망입성(亡入姓).

④ 사성 및 귀화성에 의한 구분:사성(賜姓)·당래성(唐來姓)·향국입성(向國入姓)·투화성(投化姓).

   

역사상 우리 나라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은 그만큼 많았다. 16세기 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갖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당시 사회계층을 크게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눌 때, 양반층은 일찍이 군현토성에서 귀족과 관인을 배출한 사족(士族) 가문이며, 중인층은 군현과 임내의 이족(吏族)에서 서리·기술직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의 서얼 출신이 여기에 해당된다. 상민층은 고려 이래 관인을 내지 못한 일반 농민층으로서 성종상 백성성·촌성·향·소·부곡성 출신이 많았다.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최하층인 이들은 조선 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인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되며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갖게끔 법제화되었다.

   

상당수였던 무성인이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담당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였는가 하면,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또 주위에 많은 김·이·박 등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함으로써 종전의 대성 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으로 정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는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하고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국민 모두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시기는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에 와서 단행된 것이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과정에서 시행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우리의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무엇보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이는 대륙침략과 미일전쟁을 전개하던 일제의 발악적인 마지막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른바 그들이 부르짖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인 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한 일이다.

   

성이란 일생토록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한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제적인 창씨개명에 그대로 순종할 리 없었고, 그래서 웃지도 보지도 못할 허다한 희비극이 연출되었다. 그때 각 씨족 문중은 회의를 열어 창씨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가령 이가(李家)·김본(金本)·배정(裵井)·오산(吳山)·장전(張田) 하는 식으로 본성을 표시하였는가 하면, 남양(南陽)·수원(水原)·경산(京山)·광산(光山) 하는 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가령, 파평 윤씨의 경우 평소(平沼)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 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李穡)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이라 하였고, 청주 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이러한 일본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서양자(婿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며 일제하의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씨명은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한편, 성자에 의한 우리 성의 수는 성씨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250여개의 성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 陶谷叢說에는 298성이 나오는 데 비하여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모든 성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성세(姓勢)와 본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김·이·박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수가 많았다. 이의현은 도곡집의 <도곡총설>에서 우리의 성 298성을 그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저성(著姓):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12성).

② 그 다음 저성:吳·姜·沈·安·許·張·閔·任·南·徐·具·成·宋·兪·元·黃(16성).

③ 그 다음 다음 저성:曺·林·呂·梁·禹·羅·孫·盧·魚·睦·蔡·辛·丁·裵·孟·郭·卞·邊·愼·慶·白·全·康·嚴·高(25성).

④ 희성(稀姓):田·玄·文·尙·河·蘇·池·奇·陳·庾·琴·吉·延·朱·周·廉·潘·房·方·孔·偰·王·劉·秦·卓·咸·楊·薛·奉·太·馬·表·殷·余·卜·芮·牟·魯·玉·丘·宣 (41성).

⑤ 그 다음 희성:都·蔣·陸·魏·車·邢·韋·唐·仇·邕·明·莊·葉(섭)·皮·甘·鞠·承·公·石(19성).

⑥ 벽성(僻姓):印·昔·龔·杜·智·甄·於·晉·伍·拓·夜·賓·門·于·秋·桓·胡·雙·伊·榮·思·邵·貢·史·異·陶·龐·溫·陰·龍·諸·夫·景·强·扈·錢·桂·簡(38성).

⑦ 그 다음 벽성[貴姓]:段·彭·范·千·片·葛·頓·乃·間·路·平·馮·翁·童·鍾··宗·江·蒙·董·陽·章·桑·萇·程·荊·耿·敬·寗·京·荀·井·原·袁·萬·班·員·堅·騫·燕·時·傅·瞿··米·艾·梅·雷·柴·聶·包·何·和·賀·花·華·賈·夏·麻·牛·僧·俊·曲·栢·翟·畢·谷·弓·種·邦·凉·良·芳·卿·刑·永·乘·登·昇·勝·信·順·侯·藩·端·鮮·芊·牙·水·彌·吾·珠·斧·甫·部·素·附·凡·固·台·才·對·標·肖·那·瓜·化·壽·祐·價·尋·森·占·汎·克·郁·翌·宅·直·則·澤·綠·赫·冊·濯·骨·燭·律·物·別·實·弼·合··鴌·揚(136성).

⑧ 복성(復姓):南宮·皇甫·鮮于·石抹·扶餘·獨孤·令狐·東方·西門·司馬·司空(11성).

   

이상 298성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250여 성과 동국여지승람 270여 성 및 그 뒤 귀화성이 모두 합산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이미 소멸된 망성이 많이 포함되었다. 성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늘고 줄게 마련이어서 옛날에 있던 성이 뒤에 소멸되기도 하고 과거에 없던 성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15세기 이래 현재까지 우리 나라의 성수는 대략 250성 내외가 되었는데,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 姓解에 의하면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일 양국과 비교하면 우리 나라의 성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 성 가운데 김·이·박·최·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성씨에 대한 전체조사가 최초로 실시된 시기는 1930년도인데 이때 전국에 250성이 있음이 국세조사에서 밝혀졌다. 8·15광복 후 최초의 성씨조사는 1960년도 인구센서스의 부대조사로 실시되었는데, 30년 전의 조사보다 8종이 많은 258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의 조사는 북한지역이 제외된 남한만의 조사라는 데서 1930년도의 조사결과와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

   

남북분단에 따른 대규모 인구이동으로 인하여 남북한의 성씨 구성에도 변동이 컸다. 남한지역에만 사는 성씨가 있는가 하면 북한에만 있는 성씨도 많다.

   

1985년 11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성씨와 본관을 조사한 결과 1975년도의 247성에 비하여 25성이 새로 추가되어 274성에다 본관은 3,435개로 나타났다. 성씨별 인구수는 [표 2]와 같으며, 표 성은 1975년 이후에 새로 나타난 성이다.

[표 2] 전국 성씨와 인구(북한지역 제외)

순위

성씨

인 구

순위

성씨

인 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순위

성씨

인구

1

8,785,554

52

97,634

103

10,279

154

1,381

205

230

256

13

2

5,985,037

53

97,412

104

10,069

155

1,364

206

229

257

10

3

3,435,640

54

81,416

105

9,243

156

1,351

207

229

258

9

4

1,913,322

55

81,267

106

8,696

157

1,265

208

109

259

8

5

1,780,648

56

72,382

107

8,660

158

990

209

198

260

5

6

958,163

57

72,148

108

8,565

159

978

210

196

261

5

7

877,050

58

69.776

109

皇甫

8,529

160

956

211

189

262

綱切

5

8

834,081

59

65,186

110

7,959

161

943

212

179

263

5

9

810,231

60

64,143

111

7,888

162

932

213

177

264

5

10

672,755

61

54,472

112

7,406

163

901

214

東方

174

265

3

11

628,388

62

54,445

113

7,370

164

873

215

165

266

3

12

620,950

63

50,379

114

7,088

165

824

216

156

267

椿

3

13

619,615

64

48,914

115

5,945

166

794

217

154

268

$

2

14

611,148

65

48,626

116

5,440

167

700

218

154

269

1

15

567,768

66

46,528

117

5,430

168

700

219

141

270

1

16

564,265

67

40,709

118

5,241

169

獨孤

695

220

140

271

岡田

1

17

557,137

68

40,387

119

5,076

170

687

221

137

272

小峰

1

18

556,391

69

39,709

120

5,028

171

648

222

136

273

長谷

1

19

509,077

70

34,262

121

5,012

172

643

223

133

274

1

20

457,567

71

33,664

122

4,644

173

621

224

西

129

  

  

  

21

430,055

72

33,220

123

4,522

174

604

225

122

  

  

  

22

384,012

73

30,930

124

4,395

175

567

226

113

  

  

  

23

375,765

74

30,864

125

4,329

176

527

227

110

  

  

  

24

368,717

75

27,852

126

3,691

177

520

228

106

  

  

  

25

343,985

76

24,562

127

諸葛

3,652

178

499

229

104

  

  

  

26

323,004

77

24,257

128

司空

3,634

179

464

230

100

  

  

  

27

309,572

78

23,371

129

3,529

180

459

231

94

  

  

  

28

304,810

79

22,689

130

3,046

181

452

232

93

  

  

  

29

264,228

80

22,519

131

鮮于

3,032

182

450

233

87

  

  

  

30

222,246

81

21,548

132

3,021

183

449

234

87

  

  

  

31

219,737

82

20,377

133

3,018

184

427

235

85

  

  

  

32

218,445

83

20,355

134

2,866

185

424

236

83

  

  

  

33

196,284

84

20,194

135

2,748

186

398

237

80

  

  

  

34

184,621

85

18,837

136

2,647

187

381

238

68

  

  

  

35

168,078

86

18,278

137

2,471

188

359

239

68

  

  

  

36

165,381

87

17,635

138

西門

2,328

189

359

240

66

  

  

  

37

163,513

88

17,392

139

2,300

190

328

241

59

  

  

  

38

163,413

89

16,938

140

2,297

191

326

242

56

  

  

  

39

159,679

90

16,435

141

2,203

192

315

243

55

  

  

  

40

157,526

91

南宮

16,227

142

2,117

193

310

244

52

  

  

  

41

155,456

92

16,106

143

2,074

194

308

245

51

  

  

  

42

153,474

93

16,037

144

1,990

195

307

246

51

  

  

  

43

150,008

94

15,527

145

1,952

196

282

247

46

  

  

  

44

147,694

95

15,349

146

1,881

197

275

248

37

  

  

  

45

146,662

96

14,733

147

1,862

198

270

249

36

  

  

  

46

141,328

97

13,626

148

1,856

199

258

250

30

  

  

  

47

137,839

98

13,264

149

1,538

200

249

251

25

  

  

  

48

125,624

99

12,320

150

1,527

201

243

252

17

  

  

  

49

123,087

100

10,937

151

1,511

202

238

253

16

  

  

  

50

116,002

101

10,859

152

1,487

203

238

254

14

  

  

  

51

104,472

102

10,069

153

1,484

204

232

255

14

  

  

  

자료 : 인구센서스(경제기획원, 1985).

  

  

  

  

  

  

  

  

  

  

  

  

  

  

  

  

  

인구 100명 미만의 희귀 성씨 40여 개는 호적기재 착오로 인한 경우와 고아 출신이 입적하거나 외국인의 귀화 때 생겨나는 등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 조사에서 나타난 10대 성씨의 본관수를 보면 김씨가 285, 이씨 241, 박씨 128, 최씨 127, 정씨 122, 강씨 33, 조(趙)씨 56, 윤씨 44, 장(張)씨 63, 임(林)씨 60개로 각각 집계되며 국내 30개 대본관의 순위와 인구수를 들면 [표 3]과 같다.

[표 3] 본관별 인구 (단위 : 천명)

순위

본 관

인 구

1

김해김씨

3,767

2

밀양박씨

2,705

3

전주이씨

2,308

4

경주김씨

1,523

5

경주이씨

1,217

6

진주강씨

921

7

경주최씨

876

8

광산김씨

751

9

파평윤씨

647

10

청주한씨

598

11

안동권씨

559

12

인동장씨

539

13

평산신씨

460

14

김녕김씨

424

15

순흥안씨

418

16

동래정씨

415

17

안동김씨

398

17

달성서씨

398

18

남양홍씨

382

19

해주오씨

377

20

남평문씨

344

21

전주최씨

343

22

제주고씨

318

23

경주정씨

301

24

창녕조씨

300

25

수원백씨

296

26

한양조씨

273

27

나주임씨

263

28

문화유씨

256

29

밀양손씨

243

30

영일정씨

237

   

- 성과 본관 -

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하고 있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성씨 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도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이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이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등 8가지 경우가 있다.

   

본관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첫째 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 같은)을 하였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조역의 필요상 일반 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이다.

   

이에 의거 본관의 지역적 성분을 고려하여 정리하면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씨 체계가 확립된 고려 초기부터 15세기 지리지가 편찬될 때까지 모든 성은 본관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주·부·군·현·진·촌 및 향·소·부곡·처·장·역·수 등 시조의 출신지나 주민의 거주지별로 각기 본관이 구분되어 있었다.

   

[표 4] 본관의 지역적 성분

구분

지 역

楊州 開城 廣州 驪州 陽根 利川 貞州 瑞原 坡平 安峽 水原 南原 安城 鐵原 長湍 富平 江華 仁川 黃州 瑞興 鳳山 遂安 谷山 海州 長煙 平山 白川 載寧 信川 延安 豊川 文化 忠州 淸州 洪州 鎭川 天安 舒川 公州 沃川 瑞山 永同 林川 慶州 密陽 梁山 蔚山 淸道 安東 寧海 醴泉 榮川 永川 星州 草溪 善山 陜川 晋州 金海 大邱 順興 尙州 金山 咸安 咸陽 全州 羅州 錦山 靈光 靈巖 南原 長興 潭陽 順天 濟州 益山 金堤 淳昌 光州 寶城 江陵 原州 春川 寧越 三陟 淮陽 旌善 杆城 高城 平壤 祥原 慈山 成川 肅川 順川 安州 价川 德川 郭山 隨川 嘉山 博川 寧邊 宣川 雲山 泰川 鐵山 定州 熙州 義州 麟山 龍川 朔州 昌城 碧潼 江界 安邊 宣川 預原 文川 高原 永興 定平 咸興 北靑 端川 吉州 鍾城 富寧 三水(130개 본관)

衿川 見州 豊壤 安山 陽川 金浦 守安 童城 砥平 幸州 交何 深岳 臨津 龍駒 陽城 僧嶺 河陰 德水 喬桐 陰竹 果川 川寧 沙川 高峰 富原 積城 抱川 加平 朝宗 雙阜 永新 貞松 龍城 廣德 載陽 處仁 陽智 朔寧 永平 臨江 松林 麻田 連川 鎭江 通津 俠溪 永康 牛峰

山 鐵和 安岳 新恩 三支 甕津 白翎 江陰 靑松 嘉禾 海安 殷栗 連豊 陰城 木川 竹山 全義 韓山 扶餘 沔川 大興 定山 丹陽 淸風 文義 稷山 平澤 溫水 新昌 藍浦 德山 靑陽 結城 市津 翼安 槐山 延豊 堤川 永春 靑川 安邑 利山 陽山 靑塘 道安 燕岐 慶陽 牙山 黃澗 懷仁 報恩 靑山 新豊 儒城 德津 德恩 庇仁 鴻山 連山 懷德 石城 鎭岑 尼山 新平 黎陽 興陽 合德 泰安 貞海 餘美 唐津 禮山 保寧 延日 東萊 仁同 海平 高靈 龍宮 安康 杞溪 興海 壽城 河濱 慶山 昌寧 彦陽 長

靈山 玄風 臨何 豊山 加利 一直 甘泉 英陽 多仁 靑鳧 禮安 河陽 殷豊 基川 奉化 岳溪 眞寶 北屋 八

開寧 咸昌 義昌 會原 固城 巨濟 泗川 居昌 江東 江城 漆原 利安 宣寧 中牟 山陽 永順 神光 慈仁 豊角 守山 鮮顔 東平 機張 桂城 淸河 吉安 奈城 春陽 才山 靑杞 新寧 松生 安德 盈德 宣仁 若木 義興 安貞 靑理 化寧 丹密 功城 花園 治

禦海 聞慶 加恩 虎溪 軍威 孝靈 知禮 班城 永善 岳陽 熊神 莞浦 昆明 蘭浦 平山 松邊 加祚 溟珍 丹溪 龜山 山陰

陰 山岐 嘉樹 新繁 鎭海 沃溝 高山 耽津 茂松 南平 務安 高敞 興德 光陽 珍山 萬頃 龍安 扶寧 泰山 礪山 押海 潘南 會津 海南 道康 長沙 雲峰 長水 樂安 高興 綾城 和順 同福 玉果 古阜 咸悅 居寧 遂寧 伊城 利城 沃野 紆州 伉山 富利 平皐 金溝 巨野 富潤 臨陂 澮尾 保安 井邑 仁義 朗山 榮山 安老 伏龍 艅

樂

長山 珍島 昆湄 黃原 玉泉 森溪 臨淄 大昌 咸豊 牟平 海際 長城 復興 赤城 龍潭 求禮 任實 九皐 長溪 茂豊 朱溪 鎭安 馬靈 會寧 長澤 荳原 栗原 鹿水 突山 富有 南陽 泰江 豊安 道化 福城 昌平 珍原 橫城 平昌 平康 平海 蔚珍 通川 羽溪 連谷 襄陽 洞山 酒泉 洪川 和川 水入 文登 嵐谷 長楊 金城 通溝 岐城 金化 伊川 基麟 狼川 楊口 方山 麟歸 瑞和 烈山 安昌 臨道 碧山 雲

茅縕

谷 中和 三和 龍岡 江西 咸從 三登 江東 順安 永淸 通海 孟山 定寧 汶山 翼谷 瑞谷 鶴浦 衛山 派川 霜陰 福令 永豊 鎭溟(370개 본관)

長命 寧遠 陽巖 樹德 安戎 定戎 寧德 寧朔 威遠 龍津 元興 宣德 雲林 隘守 靜邊 寧仁 長平 耀德(18개 본관)

金津村 古等村 八谷村 上樹介村(경상도지리지)

部 曲

內彌 亡沙梁 爭忽 甘彌呑 高安 秋溪 所仍林 甘彌 廣反石 德興 毛山 神宗 楓谷 仰岩 金化 林堰 酒城

$釜 貴知 廣炤 仁政 助立 聖淵 鹽率 仇史 北安谷 竹長 省法伊 豆也保 今音勿 伊冬音 甲火 仇知山 南 界 小川 皆丹 召羅 石保 寶進 高林 勿也 買吐 春甘 巴叱 新平 長川 連山 茂林 平安 緋山 道開 加德 高 雅 助馬 月伊谷 頭衣谷 大山 川邑 坤義 皆品 正首 黑石 毛助 雨日 大栗 桃平 公村 皮堤 居平 極浦 任 城 群山 金磨 孫利 松旨 懷義 深井 陳良 弘農 貢牙 水雲 永可 多慶 大良坪 波等村 醉仁 栗谷 阿麻 貞 石 嘉音 梨村 竹靑 栗村 進禮 赤良 召羅浦 下伊沙 別良 良苽 慶旨 碧津 也村 紆州 古多山 群智

谷 長平 金山 又刀谷(109개 본관)

石淺 工二 柱石 盆村 浮石 黃魚 海寧 德山 周岸 頓義 德泉 彩雲 良化 福平 廣地 來進 延命 福山 松慈 多音 曲山 鹿鳴 砥山 景明 富安 荒調 水金 鳴良 堤見 從政 鼓村 從南 北平 鎭南 平德 永豊 甲鄕 南調 北調 銅鄕 南田 本井 三日浦 正方 於沙 甲鄕 興福 馬良(48개 본관)

於上川 椒子 拜音 栗谷 界銀 古多只 林述 猪井 安眼 禾邊 寺谷 文石 居邊 資己 冬老 安心 代如谷 馬 淺 加乙山 楮旨 豆毛村 陽良 金岩 大谷 安城 橫川 德林 馬川 才南

陽 尼波山 大谷 大口 七良 水多 陶城 柳等村 放光 楊等良 陽岳 利方 骨若 豆仍只 加用 品魚 所乙呑 史丁 新村(48개 본관)

奢井 今勿村 楡梯 楊干 深谷(5개 본관)

迷原 五朶 宗德 新永 松庄 買浦 化物 萬珍 寺伊岩(9개 본관)

  

德留 昌德 六驛 維鳩 平川 貞民 續驛(7개 본관)

鐵垣 禾登 押戎(3개 본관)

   

이는 조선 초기 신분제도의 재편성과 행정구획의 개편에 따라 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한 것만 남고, 진·촌·향·소·부곡 등 임내와 특수지역을 본관으로 한 것은 그 구역의 직촌화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벽성과 함께 천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士族)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개관(改貫)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 조씨, 한(韓)은 청주 한씨, 심(沈)은 청송 심씨, 문(文)은 남평 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우리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문의 품격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공씨는 곡부(曲阜), 천씨는 영양(穎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 성씨관계 자료와 족보 -

우리 나라에서는 성씨 관계자료가 고려시대부터 단편적으로 나타나지만, 한자성씨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는 사마천(司馬遷) 부자가 재래의 세본(世本)과 주보(周譜)를 근거로 하여 사기 史記를 편찬한 데서 성씨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사기는 그 본기·세가·열전 등에서 등장인물의 계보적 서술이 상세하였고, 그것을 모방한 후대의 역대 정사(正史)들은 사기의 그러한 서술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한서 漢書의 '고금인표(古今人表)', 위서의 관씨지(官氏志), 신당서의 종실·재상세계표(宗室宰相世系表) 등은 각기 당대의 관계인사의 성씨·관향 유래와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 및 종실·재상 가문의 계보적 서술을 하였다.

   

후한 말부터 문벌사회가 성립되고 곧 이어 구품중정법 (九品中正法)이 실시되자 군현성씨의 가격등제(價格等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뒤 위진남북조와 수당시대를 경과하면서 신분제의 재편성과 이민족의 한화(漢化)에서 성씨의 개편이 수반되었다.

   

그 결과 각종 보첩류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수서 隋書 경적지의 보계편과 구당서·신당서의 예문지 보첩류편에는 이른바 후위의 방사격(方司格), 당의 씨족지를 비롯하여 각종 족보·가보류가 실렸다.

   

중국의 세본과 같은 제왕의 계보는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각기 국사를 편찬하는 가운데 작성되었다고 짐작되며,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에 의하여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으로도 나타났다. 그것은 다시 삼국사기 본기와 연표 및 삼국유사의 왕력조(王曆條)에서 삼국 내지 가락국의 왕실 계보로 체계화되었다.

   

신라와 후삼국시대의 인물 성씨를 기재한 자료는 정사의 열전과 비문이 있다. 최치원·최언위(崔彦撝) 등 육두품 출신 문사들에 의한 승려들의 비문에는 우리의 성씨가 주로 중국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152년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의 묘지(墓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보첩과 같은 것은 없었다.

   

문종 이후 고려의 문벌귀족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씨족·가보·가첩·세보·족보 등의 용어는 있어 왔지만, 이들 보첩류는 15세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족보와는 성질이 달랐다.

   

중국에서 구품중정법 실시와 군현성의 성립에 따라 벼슬과 혼인에 인물과 가격을 결정하는 보첩류가 쏟아져 나왔듯이, 고려에서도 문음(門蔭)을 받기 위한 조상의 내외세계가 기재된 씨족·족도(族圖)·정안(政案) 등이 작성되었고, 지방의 각 읍사에는 향리의 명부인 이안(吏案, 壇案)이 비치되어 향리의 선임과 승진, 향공(鄕貢)과 기인(其人)의 선임등에 활용했다.

   

거기에는 그들의 내외세계와 가격의 고하 및 개별적인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각 읍 향리의 족파(族派)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각 읍별로 향내 사족을 망라한 향안(鄕案)이 유향소나 향교에 비치되었던 사실과 비교된다.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 관계자료인 고적(古籍)은 바로 고려 이래 당시까지 중앙과 지방에 전래되고 있던 문서였던 것이다.

   

성씨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최초의 자료는 위 지리지를 비롯한 경상도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이다. 이상의 세 지리지의 성씨조는 그 기재양식이 약간씩 상이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각 읍 성씨 가운데 전자에 누락된 것이 후자에 기재되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으며, 성종 표기에도 상이한 점이 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는 인리성·백성성·속성 등이 없고 그 기재 형태가 고졸하여 세련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후자는 당대 최고의 문사들을 동원하여 고려시대부터 전래된 고적과 전자를 비롯한 팔도지리지 및 주관육익 周官六翼 등을 참고·종합·정리하여 각 읍 성씨의 내부구조와 그 변화과정을 체계화했다.

   

성종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성씨조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토성·차성·인리성·차리성·백성성·입주후성·입현후성 등의 용어가 없어지고, 단지 본관을 본읍과 임내로 구분, 기재하였고, 특히 망성을 토성과 혼효(混淆)하여 기재하였다.

   

그 편찬자의 주해처럼 이 지리지의 성씨조는 주관육익·세종실록 지리지·경상·전라관풍안 慶尙全羅觀風案에 의거 편찬했던 것이며, 이래(移來)한 성씨에 대해서는 본관을 세자(細字)로 주기하되 본관을 모를 때는 성자 밑에 '내(來)'·'속(續)'·'속(屬)'자를 주기하였다.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시대의 진전에 따른 성씨 관념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며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의 대종을 이루었던 '토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은, 당시 양반사족의 본관이 거주지와 분리되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종래 토착적 의미의 토성은 무의미해지고, 그 대신 성의 출자와 지망(地望) 내지 문벌을 추상적으로 의미하는 본관만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국여지승람 성씨조는 그 기재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비하여 훨씬 후퇴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물조와 고적조를 대폭 강화하여 그 본관 출신의 인물과 각 성의 본관을 기재함으로써 후대 읍지와 족보 및 증보문헌비고 씨족조에서 인용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최초의 성씨관계 단행본이라고 사료되는 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은 1467년(세조 13) 왕명을 받은 양성지(梁誠之)에 의하여 찬진되었으나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단지 당의 씨족지·성씨록을 모방하여 우리의 성씨를 각 군현별로 정리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사가의 족보편찬에 앞서 조선왕조의 왕실에서는 1412년(태종 12)에 선원록 璿源錄·종친록 宗親錄·유부록 類附錄이 작성되었는데, 이는 태종이 서얼차대법을 제정하고 난 다음 종실에서도 적서(嫡庶)를 명확히 구분하여 명분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왕실에서는 국조보첩 國朝譜牒·당대선원록 當代璿源錄·열성팔고조도 列聖八高祖圖 등을 종부시(宗簿寺)에서 편찬, 비치하고, 돈녕부(敦寧府)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敦寧譜牒)을 편찬하였는가 하면, 충훈부(忠勳府)와 충익부(忠翊府)에서는 각기 역대공신과 원종공신들의 족보를 작성, 비치하였다.

   

왕실과 관부의 이러한 보첩편찬은 사가의 족보편찬에 하나의 촉진제가 되었다. 우리의 족보사상 판각, 성책해서 반포한 것은 안동권씨성화보 安東權氏成化譜(성종 7, 1476)가 최초이다. 나머지 명문들의 족보는 주로 구보(舊譜)의 서문에 나타나는 사실로서, 초고 또는 족도·세계도·가첩 형식으로 전해오다가 16세기 또는 17세기에 와서 족보를 정식 간행할 때 전재되었다.

   

안동권씨성화보가 발간된 뒤 족보편찬은 오랫동안 중단상태에 있다가 1565년(명종 20) 문화유씨가정보 文化柳氏嘉靖譜가 간행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여러 성씨의 족보가 이에 힘입어 작성되었다."는 김안국(金安國)의 말과 같이, 권씨·유씨의 족보는 조선 전기 여러 성씨의 족보편찬에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이들 족보는 자녀의 기재를 출생순으로 하되 부자로 이어지는 친손계는 물론, 부여로 이어진 외손계까지 대수에 관계없이 등재하였으니, 이는 바로 당대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족보편찬은 18세기 이후처럼 친손들이 주관하지 않고 친손과 외손들이 합작하였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족보는 17세기 후반부터 가족제도·상속제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변모해 갔다. 16세기 이래 민중의 성장에 따른 천민층의 양민화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신분질서가 크게 해이해지자 전통적인 양반과 신흥세력을 막론하고 모두 세계·족계를 새로 정리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17세기 후반부터 족보가 속간되었다.

   

조선 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이 심하였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대동보적 성격을 띤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혈연적으로 관계없는 타성이 동성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래 같은 조상에서 나온 파계가 사족과 이족 또는 성장과 진출의 선후에 따라 서로 타성으로 오인되는 예도 많았다.

   

그 결과 희성·벽관들은 비교적 순수성을 지녔으나 대성·명문일수록 투탁자가 급증하였고 한말·일제강점기로 내려오면서 모든 성씨가 양반성화하면서 족보편찬도 일반화되었다.

   

- 현대사회의 성씨 -

성과 씨가 전근대사회에서는 신분과 특권을 표시했거나 존칭 또는 비칭으로 사용되어, 가령 이씨·김씨라 할 때는 양반신분을 뜻하나 이성·김성 또는 이가·김가라 할 때는 상민 이하의 신분을 지칭하였다.

   

또는 유성자가 역적이나 모역과 같은 죄를 범하면 신분이 곧 천인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을 쓸 수 없었고, 불교의 승려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였다는 데서 역시 성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계층과 직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고 있다. 성씨 관념과 관련있는 관습과 민속이 많다. 가령, 자녀혼인에 있어 어떤 성을 선호하는 대신 특정한 성은 금기하는 관행이 있으며, 일년간의 신수를 점칠 때나 토정비결 같은 것을 볼 때도 접촉하는 사람의 성씨에 따라 이해득실이 있다는 것이다.

   

성씨는 일찍부터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분화, 발전해 왔는가 하면 신분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무성에서 유성으로, 또한 유성층에서 무성층이 되기도 하였다.

   

성씨는 당초 왕실부터 시작하여 귀족·관인·양민·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기 때문에, 신성시 또는 특권시되어 득성 유래와 시조의 출자에 관해서는 신화와 민담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성씨에 관한 속담도 비교적 많다. 가령, 조선시대 이래 '성불변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 온 우리 나라에서 맹세 또는 굳은 약속을 할 때 '성을 갈겠다.'는 말을 한다든지, 근대 이후 성이 일반화되자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름도 성도 모른다.'라 한다든지, 우리의 성 가운데 김씨와 이씨가 절대 다수라는 데서 '촌놈 성 김가 아니면 이가다.'라든지, 또는 '김씨가 한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라는 속담들이 있다.

   

또한, 상대방과의 수인사에서 성씨를 묻는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머슴살이 삼년에 주인 성 묻는다.', '한 집안의 김별감성을 모른다.', '10년을 같이 산 시어미 성도 모른다.'는 등의 속담도 있다.

   

또한, 성에 따라 별명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성의 출자와 유래 또는 시조나 조상에 관한 일, 또는 발음이나 어휘에 따라 박씨는 '말', 정(鄭)씨는 '당나귀', 정(丁)씨는 '곰배', 홍씨는 '물렁감' 하는 식의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성과 본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다. <민법>에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하고 일가를 창립한다. 그러나 성과 본을 창설한 뒤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781조)."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듯 우리 나라의 성은 원칙적으로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성의 변경은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일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혼인하여 부부가 되더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성을 바꾸지 않으며 각자의 성을 가진다.

   

그러나 <민법>은 입부혼인제도(入夫婚姻制度)를 인정하고 이 경우에 한하여 입부혼인에 의한 출생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826조 4항), 모계혈통을 표시하는 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서양자(壻養子:데릴사위)의 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별도로 규정하는 바 없으므로 부의 성과 본

을 따른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서양자는 입부혼인의 경우와 같이 부(夫)가 처가에 입양하여 그 출생자는 모가, 즉 양가에 입적할 뿐만 아니라 호주상속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성(異姓)양자의 성과 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성불변의 원칙상 변경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구관습법에는 서양자는 허용하지 않았으나, 신민법은 이를 창설하여 남자 없는 가족을 위하여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남독녀가 호주 또는 호주상속인인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입부혼인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부혼인을 한 경우에는 부부는 처의 주소나 거소에서 동거해야 하며, 그 부부 사이의 출생자녀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의 가에 입적한다(826조).

   

아동복지시책으로서의 고아입양문제와 함께 최근 새로운 형식의 입양은, 양친됨에는 기혼·미혼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며(866조), 양자됨에 있어서도 남녀·소목(昭穆)을 가리지 않음(877조)은 물론, 이성양자까지도 인정하여 전통적인 입양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나, 양부모의 입양목적에는 별로 큰 변동이 없다.

   

자녀 없는 양부모가 가계를 잇기 위한 것이 주된 입양목적이기 때문에 현대적 입양 역시 남아가 더 많이 입양되고 있으며, 양자의 성이 무엇이었든 간에 양친의 호적에 기재되는 양자의 성과 본은 양부와 동일해야 한다는 뜻에서 친생자로서 신고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동성불혼'·'이성불양'의 관습하에 윤리적 또는 우생학적 견지에서 동성동본간 금혼제가 철저히 지켜졌으나, 현재와 같이 인구의 급증과 이동, 산업화와 도시화로 종래 한 부락에 살던 동족이 사방으로 이산되고 김해 김씨·전주 이씨·밀양 박씨 등 수백 만이 넘는 동성자가 시조를 같이한다고 하여 촌수를 가릴 것 없이 그 사이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남녀평등을 기조로 한 현대사회에서 모계혈족에 대해서는 최근친을 제외하고는 혼인을 방임하면서 부계혈족에 대해서는 촌수의 제한 없이 금혼하는 것은 일종의 남녀차별이다.

   

최근 이름의 한글화와 함께 성씨의 한글화도 장차 거론되겠지만, 성자의 한글표기에 있어 '리(李)'·'류(柳)'로 하는 씨족이 있어 두음법칙에 어긋나는 예가 있듯이, 성은 이름과 달라서 성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 나라의 성씨에 관한 최초의 구체적인 자료는 세종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로서 성씨의 내부구조와 시대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반면, 18세기 이후에 쏟아져 나온 각 성씨 족보들은 당대인의 수록에도 개관(改貫), 투탁한 예가 많았던 것은 물론, 특히 시조의 유래와 조상의 계보에는 조작과 분식(粉飾)이 가해져 오히려 성씨의 발생과 분화 및 발전과정을 구명하는 데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일제시대 성의 연혁과 당시의 성에 관한 연구·조사서로는 총독부 중추원 발행의 조선의 성명씨족에 관한 연구조사 朝鮮の姓名氏族に關する硏究調査와 국세조사과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 朝鮮の姓이 있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검토는 식민통치하에 우리 나라의 특징적인 현상이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의 성격을 보다 조직적으로 파악하려는 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사회구조·사회변동과 같은 사회사를 살피는 한 과정으로서 족적 문제와 관련하여 성씨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으며, 고려·조선시대 연구에 있어서는 정치적·사회적 지배세력의 형성과 내부구조 및 소장관계를 성씨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慶尙道地理誌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安東權氏成化譜

文化柳氏嘉靖譜

大東韻府群玉

陶谷叢說

盎葉記(李德懋)

增補文獻備考

萬姓大同譜

韓國家族制度硏究(金斗憲,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9)

우리 나라 民法上의 姓氏制度硏究(李光信, 法文社, 1973)

韓國人의 姓氏(李勝羽, 創造社, 1977)

韓國中世社會史硏究(李樹健, 一潮閣, 1984)

朝鮮の姓名氏族に關する硏究調査(令村글, 1934)

朝鮮の姓(1934)

高句麗 建國期의 姓氏賜與(金光洙, 金哲埈博士華甲紀念韓國史論叢, 知識産業社, 1983)

新羅時代 姓氏取得과 그 意味(李純根, 韓國史論 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0)

土姓硏究其一(李樹健, 東洋文化 16, 영남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1975)

韓國에 있어서의 家系記錄의 歷史와 그 解釋(宋俊浩, 歷史學報 87, 198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성씨 유래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이것이 여권 신장의 의미로 파악하는가 하면, 반대로 여권 억압의 의미로 파악한다. 이는 존재적으로 여권 신장인 면이 있고, 인식적으로 여권 억압인 면이 있는데, 이를 실천적으로 파악하지 못해 분열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체계이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 위주의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의 가에서 '을'의 가로 입적(入籍)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아내는 김(金)성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대(漢代) 이래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父)족과 부(夫)족의 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처녀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 중국에서 비롯한 관습이다.

   

이. 조선 개국의 명분 중 하나가 몽골 침략으로 고려 왕가의 핏줄이 혼탁해졌다는 것이다.

   

삼. 조선 태종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엄마 핏줄이 강조되었다. 헌데, 임진왜란과 17세기부터 찾아온 전세계적인 혹한기로 인하여 시련이 닥치자 엄마 핏줄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던 것이다.

   

   

   

"3-3. 이방원주의와 정도전주의의 대결

   

드디어 꿈에 그리던 집권을 하였다. 전 세계 맹가주희주의자들이여! 기뻐할 일이다. 인민은 평화와 복지를 원하는데, 고려 왕씨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오직 패권전쟁만을 일삼았다. 해서, 나온 것이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해서, 맹가주희주의자들은 격변하는 동북아정세를 직시하여 혁명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 낙마사고를 당한 틈을 타 정몽주는 이성계를 탄핵하여 축출하려 했다. 이를 알아챈 이방원이 정몽주을 회유하려 하여가란 시조로 속마음을 떠보니 정몽주는 단심가로 응답하고 거절한다. 하여, 이방원이 부하를 시켜 선죽교를 지나가는 정몽주를 척살한다.

   

예서, 조선의 율곡학파가 태어나는 셈이다. 유교 나라를 태어나게 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인 게다.

   

불교나라 고려왕국을 지키고자 유학적 지조를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불교나라 고려왕국을 혁파하고, 유교나라 조선왕국을 건설하고자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율곡은 말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과업만 완수된다면 만사 오케이?"

   

하지만 집권하자마자 산적한 과제는 끝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방원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의 이복동생들이었다. 태조는 강비를 총애했다. 어차피 남자란 족속들은 로리타 취향이 있는 게다. 여기에다 조선을 건국한 것은 사실상 자신의 힘이라고 여기는 정도전이 걸림돌이었다. 이방원은 유교나라를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정도전은 유교나라란 귀족이 강한 나라, 신하가 강한 나라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해서, 정도전은 얼굴마담으로서 적당하게 별 볼 일이 없는, 강비의 소생이자 이방원의 이복동생이자 고작 열 한 살짜리 방석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한다. 외척을 배격하지 않고서는 혁명에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셈이다.

   

예서, 조선의 퇴계학파가 태어나는 셈이다. 유교 나라를 태어나게 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왕권이 튼튼해야 한다는 교훈인 게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정도전과 같은 자에게 왕권을 맡겨 마치 고려 말 신돈처럼 왕을 수족처럼 부려 나라를 패망시킬 셈인가, 아니면 이방원과 같은 개혁군주가 나와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을 것인가. 

   

퇴계는 말한다.

   

"네 어미가 더러운 창기에 불과한지, 아닌지 내게 말해 봐. 피는 깨끗해야 왕이 된다?"

   

조선 초기만 해도 서얼에 대한 차별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성종 무렵에 이르게 되면 서얼에 대한 규제가 확연하다 할 것이다. 이 원인은 이방원에게 있다 할 것이다. 왕권 강화. 순수한 피의 혈통만이 집권뿐만 아니라 장기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은 신라의 골품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골품제는 신라 고유의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게다. 즉, 이 제도는 남성 유전자뿐만 아니라 여성 유전자도 귀하게 여겨 원시적인 방식으로 조상의 혁명성을 보존, 유지하려는 정책인 게다.

   

사단과 칠정이 기에 속한다? 만일 그렇다면, 시정잡배의 개싸움과 이방원의 권력투쟁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생각해 봐라. 방석의 권력의지와 방원의 권력의지를 같다고 볼 수 있냐? 이 한심한 작자들아! 백성? 지랄하고 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 책만 들입다 판 서생들아."

  http://blog.naver.com/miavenus/70027490458

   

이 문제를 보다 쉽게 가보자.

   

여성의 처녀성은 엄마성이 아니라 아빠성이다. 해서, 서양의 여성성은 아빠성에서 남편성으로 바뀌는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과 한국은 아빠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스라엘과 한국은 아빠성에서 남편성으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는 아빠성에서 남편성으로의 변화를 인정한다.

   

해서, 이 문제는 남성 대 여성, 여성 대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 내부의 문제이며, 계급투쟁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아빠성에서 남편성으로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빠성에서 남편성으로의 변화를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마는 유태인이요, 한국인인데,

아빠는 로마인이요, 쪽바리이다.

   

당신은 엄마를 따를 것인가, 아빠를 따를 것인가.

   

   

http://youtu.be/8uPHaioopKM

   

   

대한제국, 김용, 시온의정서, 1897년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4 06:21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43766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9 : 대한제국, 김용, 시온의정서, 1897년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4

   

   

   

   

김용 세계은행 총재 임명 뉴스를 보고서 유태인 시리즈를 대신하여 긴급 작성하는 글이다.

   

인드라 논평이다.

   

   

   

국유본의 김용 세계은행 총재 임명에 인류와 함께 환영한다.

김용 총재 임명은 시대사적 요청이다.

지난 역사에서 IMF는 유럽 몫, 세계은행은 미국 몫이었다.

케인즈가 바보 같은 넘들에게 중책을 맡길 수가 없었다고 한 점은 일리가 있다.

허나, 시대가 지난 만큼 케인즈의 발언도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건 여전히 미국, 유럽, 일본이다.

허나, 미국, 유럽, 일본은 갈수록 경제 여력이 약화되고 있다.

반면, 한국, 러시아, 중국, 브라질 등은 세계 경제의 희망이다.

특히, 한국은 이차대전 이전 식민지 국가 중에서 모범이 되는 발전을 해왔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짧은 시간 내에 이룩한 국가가 전 세계에 누가 있는가.

이러한 국가 출신에서 세계은행 총재가 나온다는 것은 필연인 게다.

아쉬운 점은, 대한민국에서 활동중인 인물이 총재가 되었으면 했다.

허나, 역대 미국에서 총재가 나왔다는 점에서 미국 측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한국인을 믿어주길 바란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홍익인간을 위해 태어난 족속이다.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면 주었지, 해를 끼칠 족속은 못 된다.

알고 보면, 굉장히 착한 넘들인데,

시대가 힘들다 보니 나쁜 넘들이 좀 많다.

쪽바리를 많이 제거하면 인류가 가장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민족일 것이다.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에게 총살을!

   

고맙다.

일회적인 관계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관계가 이어지기를!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인 1897년은 우리나라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光武로 고치는 등 격변하는 한말의 풍운속에 적어도 겉으로는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한 해였다. 당시는 동학혁명 진압을 구실로 러시아, 일본, 청,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대내외에 면모일신을 선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외세에 의존한 나머지 아관파천으로 무려 1년동안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이 해 2월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어, 무너진 나라의 체면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또 3월에는 `베베르.고무라 각서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는 우리 정부가 체결한 것이 아니므로 각 조항이 조선정부의 자주권을 구속할 수 없다'는 내용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 10월에는 국호를 바꿨으며 황제즉위식도 거행, 왕후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하는등 중국,일본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아관파천 이후 1년간 중요 정책이 러시아 수중에서 이루어진데다 유혈정쟁을 치른 내각이 친러파 중심으로 채워지는 등 나라의 주체성이 크게 흔들린데 대한 자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외세의 개입은 당시 탁지부 고문이었던 알렉세예프가 사실상 재무장관의 역할을 한데서 알 수 있다. 또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여타 서구열강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이권을 차지하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이 해에는 실제로 많은 이권이 열강으로 넘어갔다. 4월에 독일 상사인 세창양행에 광산채굴권을 허가했으며 3월에 공사가 시작된 경인철도를 넘겨받기 위해 5월에 일본인들이 인수조합을 발족시켰다. 또 6월에는 일본이 자국에 대한 미곡수출 금지령인 방곡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10월1일부터는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했다. 12월에는 충청도 각지의 방곡령이 실제로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나라 꼴을 바로잡고자 한 노력도 활발했다.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는 비록 형태나, 기구 등이 체제가 잡혀있지는 않았으나 의회정치의 근대적 시초를 잡으려는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평가된다. 황국협회의 방해.파괴책동으로 기능이 마비되고 서재필이 두번째 망명길에 오르는 사태까지 벌어지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1897년 10월 만민공동회를 개최, 관민협심하에 황권을 견고히 할 것 각종 이권은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결재과정을 거칠 것 재정의 공명과 예산.결산은 국민에게 공포할 것 재판의 공정과 인권을 존중할 것 책임관의 임명은 정부의 의견을 들어서 할 것 이를 실천장정할 것 등의 6가지 결의안을 채택, 고종에게 전달했다. 정부에서는 일부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아직 열강에 의존하려는 분위기였다. 이 해 9월 러시아 군인 14명을 군사고문으로 해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한 것이 그 예. 12월에는 총세무사 브라운의 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벌릿 제독이 인솔하는 영국 군함 12척이 인천항에 들어오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단발령 때문에 술렁거렸다. 8월에 철회되긴 했지만 그 때까지 관리들이 칼이나 가위를 가지고 거리나 성문에서 사람들의 두발을 강제로 잘랐으며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털을 자를 수 없다며 버텼다. 유생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해 1월1일에는 한성거리에 석유 가로등이 처음 등장했으며 청나라의 마적들이 삼수와 경원, 경흥 등지에 출몰해 민심을 사납게 만들기도 했다. 종교계에서는 손병희가 동학의 3대 교주로 선출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도 개점했다. 한편 미국인 선교사 베어드는 평양에 숭실학교를 설립했으며 현재의 조흥은행인 한성은행도 이 때 설립됐다. 96년의 이화학당에 이어 97년 설립된 정신여학교는 여성들에게 신식교육을 실시,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082523

   

1897년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이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부여하는 칭제건원(稱帝建元)으로 조선의 중흥을 염원하였다.

   

광무제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2년 뒤인 1897년 11월 22일에야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루었다. 

   

도마 안중근 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관이 안동 김씨인 김구 선생은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몰락해서 가문이 황해도로 이주한 뒤 평민으로 위장하여 살던 중 20세였던 1895년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에서 의병부대에 소속돼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의 손해 시해된 해였다. 그는 명성황후 서거 이듬해인 1896년에는 일본 중위 쓰치다를 죽여 체포됐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그는 광무제의 특명으로 1897년 특사, 구사일생했다.

   

   

   

1897년 일본 군사용 지리교과서는 `독도는 조선땅'이라고 표기했다.

   

"영월 호야지리박물관은 1897년 일본 문부성(우리나라의 교육과학기술부)이 검정을 마친 일본지지(地誌, 지리교과서)를 소장 중이다. 이 교과서에 수록된 당시 지도를 보면 일본열도와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 등 일본의 영토는 모두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다. 반면 당시 대한제국을 선포한 우리나라의 영토는 모두 흰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지만 울릉도는 죽도, 독도는 송도로 써놓고 우리 영토인 흰색 점으로 표시했다."

http://www.kwnews.co.kr/nview.asp?s=501&aid=211081100095

   

   

   

   

   

1897년은 한국 최초 제약회사 동화약품이 부채표 활명수를 내놓은 해이다.

   

1897년 남대문로에 세워진 회동서관이 한국 최초의 서점이다.

   

한국 최초의 보험은 사람 보험이 아니라 1897년 6월에 대조선보험회사가 발행한 소 보험이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20일 준공됐다.

   

   

수옥헌은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양식 2층 건물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97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다.

   

인천 답동성당(사적 제287호,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은 1897년 프랑스 선교사 코스트 신부에 의해 지어진 우리나라 초기의 성당이다.

   

1897년 러시아 건축가의 설계로 덕수궁 중명전이 건립되었다.

   

탑골공원은 1897년 탁지부(국가 재정을 담당했던 관청) 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존 브라운의 건의로 만들어졌다.

   

하고,

   

HSBC는 1897년 중국, 일본과 교역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지점을 열었다.

   

1897년 당시 러시아 통계에 따르면, 한국말을 하는 인구수는 26,005명(남자: 16,225, 여자: 9,780)이었다.

   

   

   

   

조선이 근대화하고자 몸부림을 치는데, 왜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 교훈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역사를 국내적으로만 파악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최소화하고, 세계 정세에 눈을 뜰 때다.

   

국내 정치는 쪽바리 색희들만 뒈지면 된다.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 정은에게 총살을!

   

우물 안 개구리는 죽는다.

   

1897년은 세계에서나 한국에서나 중요한 한 해였다.

   

   

"거문도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에야, 그것도 국장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러시아가 평가한 우리 나라의 비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는 관심의 대상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러시아가 한반도병합을 기도할 경우 청나라와의 관계악화는 물론이고,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시켜 영국과 청나라의 연합을 촉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디겐스키회담이나 1888년의 한러육로통상장정(韓露陸路通商章程)도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의 개전은 두 가지 점에서 러시아의 대한정책을 크게 바꾸어놓았으니, 첫 번째는 종래 국장급회의로 결정되던 대한정책을 각료회의의 논의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한반도문제에 관한 한 일본과의 협조가 아니라 일본에 대하여 열강과 공동간섭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테의 입안에 따라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조인 후 6일 만에 전격적으로 제기한 대일(對日) 3국간섭이다(1895.4.23.).

   

이에 따라 일본은 러시아 등의 열강에 굴복,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되었다. 우리정부에서는 노골적인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멀리하는 정책)을 써서 친일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친러파를 중용하였다.

   

이에 일본은 약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민비(閔妃)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10.8.)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국내의 거센 반발과 국제적인 압력에 부닥치게 되고, 이어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1.1897.2.20.)으로 일본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입장이 된 반면, 러시아는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활동과 이권획득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96년 5월 14일 러시아·일본 양국의 주한공사들 사이에 합의된 베베르(Weber,K.)·고무라(小村)각서는 러시아의 우위가 인정된 것이었다.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 참석을 이용해서 모스크바에서 성립된 로바노프·야마가타(山県)의정서(일명 모스크바의정서, 1896.6.9.)는 한반도에서의 양국의 지위를 협의한 고위층간의 타결이었다.

   

그러나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가 일본과 타협한 것은 태평양연안에서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일본을 잠시 안정시키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위테는 이미 그보다 일주일 전에 대관식에 참석한 이홍장과 러청비밀동맹(露淸秘密同盟)이라는 대일본공동방위동맹을 맺어 동청(東淸)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고, 6월 1일부터는 고종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閔泳煥)과도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와는 상반되는 목적을 가진 '조선사절에의 회답요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교행각과 아울러 서울에서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온 고종을 상대로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4월 니시첸스키(Nisichensky)라는 자의 명의로 함경북도 경원·종성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해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린너(Brynner,Y.)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유역과 울릉도 삼림채굴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동해의 포경권에도 손을 뻗쳐 울산·성진 등지의 어장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시기의 러시아는 우리 나라의 군사·재정에 관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만주방위를 위한 완충지대의 역할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과의 평형을 유지하며 자국세력의 거점을 마련한 뒤, 친위대 및 군대의 훈련을 관장하고 재정고위직을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데 그치려 하였다. 1896년 8월 스트렐비트스키(Strelbitski)대령이 내한하였으며, 같은해 10월말에는 푸티아타(Putiata)대령 등 교관단일행이 민영환 등과 함께 서울로 왔다.

   

한편, 우리 나라 사절에게 약속하였던 차관제공을 미루고, 이것이 불신을 사게 되어 러시아의 한반도에서의 세력이 한때 흔들리는 위치에 있었다. 경제적으로 일본에 훨씬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테의 모든 관심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되어 이홍장과의 교섭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백이 영국·프랑스 등의 열강에 이용당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환궁도 러시아에 대한 실망을 말해준다.

   

그러나 위테가 그의 비서장 로마노프(Romanov,P.M.)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이 대한진출을 결심하고 알렉세이프(Alexeiv,K.A.)를 파견함에 따라 사태는 다시 바뀌었다.

   

그는 "한러은행설립을 준비하고 세관관리를 러시아인 수중에 넣으라."는 위테의 훈령에 따라 1897년 9월초 서울도착과 함께 우리 나라 세관관리상태를 파악하고,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Brown,M.)의 부정행위 증거를 포착, 축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5일 그는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로 임명되었고, 11월 10일까지는 세관의 모든 업무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의 약세는 완전히 만회되었다. 그렇지만 위테의 이러한 대한정책도 자르의 신임이 외상 무라비에프(Muraviev)로 옮아가게 되고, 그의 제의에 따라 1897년 12월 19일 뤼순·다롄(大連)을 점령하게 되자 다시 한번 크게 바뀌게 된다.

   

아시아정책이 한반도 중심에서 만주중심정책으로 바뀌게 되고, 그 반영으로서 러시아의 양보를 의미하는 1월의 제의가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西)협상으로 매듭지어졌다. 이에 앞서 러시아는 훈련교관과 재정고문을 자진 철수시켰고, 개점한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한러은행도 해체시켰다. 로젠·니시협상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우위만을 인정해주었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의 외교적 우위마저 인정해주는 셈이 되어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만주중심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일본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만으로 인정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러시아가 일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한반도에서 대일견제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인 '금융 및 산업위기'가 겹쳐 모든 사태를 1898년 중반으로 묶고 더 이상의 진전을 자제한다는 '신정책'이 확정된 상태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4941

   

세계 최강 영국이 일본 편만 드니 조선은 러시아로 편향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이것이 국유본의 함정이요, 노림수였던 것이다.

   

상기한 자료를 검토하면 알 수 있다. 러시아가 부동항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조선을 화끈하게 지원하는 방안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미온적이었다. 자료에도 조선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설명들이 역사책에 곧잘 나온다. 이걸 그냥 그대로 믿어야 하나?

   

왜 중요하지 않을까. 

   

예서, 핵심인물은 재무장관 위테, 혹은 빅테이다.

   

   

"'황금의 루블화' 라는 말은 푸틴 대통령이 만든 조어가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 제국의 재상이었던 '세르게이·빅테'가 실시한 통화 개혁을 상징하는 말이다.

   

빅테는 러일전쟁 종결을 짓는 포츠머스 조약의 러시아측 교섭책임자로서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러시아의 역사에 남는 빅테의 업적은 금융·재정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빅테는 1982년부터 1903년까지 알렉산더3세부터 니콜라이2세에 이르는 정권에 걸쳐, 11년간의 재상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에 재정개혁을 단행하고 루블화의 금본위제를 실현하였으며, 교환 가능한 세계에 통용할 수 있는「황금의 루블」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화폐 개혁이 개혁자 빅테라는 이름을 러시아 역사에 찬란하게 빛 낼 수가 있었다.

   

세계는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대영제국은 1821년에 금본위 체제를 확립하였다. 당시에는 금을 배경으로 대영제국의 파운드가 최강의 통화였다. 1870년부터 열강은 차례대로 금본위제도를 도입하였다. 각국 통화와 금과의 교환비율이 정해진 금본위제도의 확산은 대영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리게 되었고, 일곱 개의 바다를 지배하는 팍스·브리테니커의 세계 속에서 금을 기준으로 하는 자유무역체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말하자면 최초의 글로벌화였다. 러시아제국이 금본위제로 이행한 것은 주요 선진국 보다도 훨씬 늦은 1897년이었고 일본이 금본위제로 이행한 해와 같은 해였다.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유지하는 경비를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확대일로로 지속된 제국의 전쟁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서 방만한 재정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금본위 체제를 도입하기 전에도 루블화 지폐는 금 혹은 은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황제의 명령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는 명령은 일반 서민이나 외국에서는 신용 받지 못하고, 루블화와 금과의 교환 비율은 크게 하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금본위체제로의 이행은 영국의 파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글로벌 경제를 향한 러시아 제국경제의 통합을 의미하고 있었다. 늦어진 농업국가 러시아를 공업화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의 유입을 가속화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빅테는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빅테의 개혁에는 놀랄 정도로 현재의 푸틴 정권의 전략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빅테의 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러시아 제국의 중요한 수출품인 곡물 수출에 따른 거액의 금 축적이었다. 이것도 원유라고 하는 최강의 무기를 가진 현재의 푸틴 정권과 유사하다. 금본위제도라고 하는 당시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통합은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켰고, 러시아 제국의 공업 생산은 연10% 이상 증가를 지속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루블화도 거액의 금 축적과 공업화의 촉진에 따라 파운드 다음으로 신용이 있는 통화로서 「황금의 루블화」하고 불리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해외 여행을 할 경우 황금의 루블화를 손에 넣고 있으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강한 루블화를 배경으로 러시아 국채의 신용도 올라가고, 빅테는 이러한 국채를 통해서 얻은 자금을 가지고 장대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 등, 니콜라이2세 시대의 국가사업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http://blog.daum.net/focusbank/5340321

   

   

   

   

   

   

1821년 영국에서 금본위제가 시작된 이후, 독일은 1871년, 미국 1873년, 프랑스 1878년에 이어 189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96년에 러시아가, 1897년에는 일본이 각각 금본위제도로 이행한다.

   

이때, 왜 재무장관, 빅테는 금본위제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일반적인 설명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유지하는 경비를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확대일로로 지속된 제국의 전쟁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서 방만한 재정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금본위 체제를 도입하기 전에도 루블화 지폐는 금 혹은 은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황제의 명령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는 명령은 일반 서민이나 외국에서는 신용 받지 못하고, 루블화와 금과의 교환 비율은 크게 하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라는 것이다.

   

허나, 과연 그러한가.

   

금본위제를 한다는 것은, 금본위체제로의 이행은 영국 파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글로벌 경제를 향한 러시아 제국경제의 통합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스차일드 경제로의 통합을 의미한다. 일본을 제외하고, 각국 금본위제 실시 연도가 다른 것은, 로스차일드 경제로의 항복 선언이 각기 달랐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실각 당시로 시계추를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 프랑스 재정을 책임진 리셸리외 공작은 베어링 브라더스가 제시한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수모를 당한 뒤 말했다.

   

"유럽에는 6대 파워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베어링 브라더스가 그들이다."

이 시기 영국과 유럽, 세계를 주도한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니라 베어링 가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로스차일드는 막 금융계에 입문한 신참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브레멘루터파(派) 교회에 속하는 목사의 아들 J. 베어링명예혁명영국에 이주하여 데본셔에서 모직물업을 시작하였으며, 후에 유럽의 제6의 강국으로까지 알려진 금융왕국 베어링가(家)가 등장하게 되었다. 1762년 J. 베어링의 아들 S. F. 베어링은 형과 함께 런던에서 존프랜시스 베어링(John & Francis Baring & Co.)을 설립하여 무역·은행업 등을 경영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1806년 현재의 이름으로 상호를 바꾸고, 1817년 프랑스의 배상금 지불을 위한 기채(起債)를 맡으면서 외국채(外國債)의 발행 중개(仲介)를 하기 시작하여 영국의 금융적·상업적 팽창을 매개하였다. 1890년 아르헨티나의 재정파탄으로 그 기채를 보증하였던 이 회사가 지불정지 일보 직전까지 몰림으로써 영국 경제계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는데, '베어링 공황'이라고 불리는 이 위기는 잉글랜드은행의 과감한 조치로 저지되었으나, 1891년 이 회사는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그 후 4년 만에 신용을 회복하여 이 무렵부터 급속히 증대된 영국의 해외투자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근까지도 영국의 금융권력의 일각을 유지하다 1995년 싱가포르지점 딜러의 무리한 투자로 인해 파산하여 그 경영권네덜란드의 ING그룹으로 넘어갔다. 한국에는 1986년 진출, 서울 중구사무실을 두고 있다. "

[출처] 베어링브러더스 [Baring Brothers & Co. ] | 네이버 백과사전

   

베어링 가문은 본디 네덜란드 양모 상인 출신이었는데, 독일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온다. 이때, 이들이 터를 잡은 데가 장로교와 프리메이슨 세력이 강했던 스코틀랜드 지역이다. 예서, 삼형제가 옷장사를 했는데, 이중 프란시스가 형제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역 금융업을 시작해서 대박이 난 것이다.

   

"원래 이름이 존앤드프랜시스베어링사(社)였던 이 가문의 회사는 장차 준남작 1세가 된 프랜시스 베어링 경(1740~1810)의 주도하에 1763년 런던에서 설립되었다. 처음에 이 회사 동업자들은 다른 상인들의 수출입을 중개하는 일을 했으나 곧 자신들의 이름으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상품을 사들였으며 무역어음을 인수하는 형태로 신용대부를 하고 고객들과 개인적인 친구들로부터 예탁금을 받기 시작했다. 1792년부터는 영국이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는 데 필요한 자금조달을 도왔으며 1806년 회사 이름을 베어링브러더스사로 했다. 프랜시스 베어링은 또한 해상보험을 인수했으며 동인도 회사 경영에 기여한 공로로 준남작작위를 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추종자였으며 공리주의 개혁가 제러미 벤담의 친구이자 총리 윌리엄 소(小)피트를 비롯한 많은 영국 정치가들의 자문 역할을 했다."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9b2202a&ref=8#ID8

   

베어링 가문 프란시스는 런던에 회사를 차린 지 불과 삼십 년만에 영국 최고의 금융가로 떠오른다. 하고, 그 과정은 신비에 쌓여 있다. 인드라는 세 가지 지점을 짚어본다.

   

일, 영국과 네덜란드 왕실이다.

   

나사우는 1866년까지는 독립된 독일동맹의 공국이었으며, 그 이후로 1944년까지는 프로이센령 헤센나사우와 비스바덴에서 주요한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라인란트팔츠주와 헤센주에 속한다.

   

1100년 무렵 라우렌부르크백작이 나사우성을 축조한 사실에서 이 이름이 붙여졌고, 1160년 이후 이 집안은 나사우백작 집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255년 이 집안은 발람 가계와 오토 가계로 나뉘고, 주류인 발람 가계는 독일 국왕 아돌프(재위 129298)를 배출하였고 영토의 분할 통합이 되풀이된 뒤 18021806년에 재통합되었고, 1806년에 후작위가 인정되었다. 오토 가계는 1514년 당시 나사우(Nassau) 백작 '조용한 윌리엄'이 '오런지공'의 지위를 상속받아 오런지 나사우(Orange-Nassau)가문이 되었다.

   

오런지공 윌리엄(오란여 빌럼)은 1515년부터 에스파냐왕 겸 독일 황제 카를 5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 총독이 된다. 그러다가 1566년 에스파냐에서 파견한 네덜란드 총독 알바공과 그의 군대에 반란을 일으켜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 북부 7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오런지공 윌리엄의 지휘로 에스파냐군을 몰아냈고, 오런지-나사우 가문 혈통의 오런지공이 1579년 성립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초대 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581년 북부지역 신교국가로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1588년에는 영국과 함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6세기 해상 패권을 장악하며, 1618~1648년 30년 전쟁 끝에 완전한 독립이 승인되었다.

   

이 당시 오런지 윌리엄 군대는 헤센-카셀의 란츠크네이트 용병에 대해 처우개선을 내걸어 신분 보장을 함으로써 강력한 군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여기에 나사우 백작 가문의 독특한 군대 전술이 결합되어 강군이 된다.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무장해선은 세계 최강이었다. 당대 비교할만한 영국보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막강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해상무역의 4/5을 독점하였고, 여기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각국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4차례에 걸친 영란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크롬웰이 혁명을 성공시키자마자 유태인 입국을 허가한 것은 네덜란드가 수십년만에 해상강국이 된 배경에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의 자금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명예혁명 후 윌리엄 3세와 함께 호프가문 등 네덜란드 유태 금융 자본가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했다. 또한 영란은행이 화폐발행권을 따낸 것도 네덜란드의 예를 따른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시티지구를 석권하기 이전에 패권을 쥐었던 베어링 가문 역시 네덜란드에서 양모 사업을 하다가 독일로 이주했다 스코틀랜드로 온 상인 출신이다.  참고로 양모사업은 백년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될 만큼 네덜란드 핵심 산업 중 하나이다.

   

이때, 명예혁명 이후 독일/네덜란드 계 왕이 영국왕이 되었으니 동향 출신이라는 점에서 우대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영국과 네덜란드 왕가는 오늘날에도 빌더버그와 로열더치셀에서 보듯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형제애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프리메이슨 인맥

   

베어링 가문 인맥에서 살필 수 있는 애덤 스미스, 제레미 밴담, 윌리엄 소 피트로 이어지는 인맥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1783년에 수상이었던 윌리엄 페티, 셀번 백작이다. 이 인물은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삼. 동인도 회사에 기여한 공로로 준남작 작위를 받다?

이 시기 베어링이 동인도 회사에 기여했다면 무엇일까. 179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권리를 영국 왕실로 넘기는 데에 중재 역할을 잘 했던 것일까.

   

   

이처럼 막강했던 것이 베어링 가문이었다. 헌데, 언제부터 베어링 가문이 힘을 잃기 시작했는가. 나폴레옹 실각 이후이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 유럽 판짜기를 새로할 때, 필요했던 것은 프랑스 국채 발행이었는데, 이때부터 로스차일드 위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미 스페인이 맛이 간 상태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어링 가문 6대 파워였던 것이 로스차일드가 추가되어 7대 파워가 된 것이다.

   

어떻게? 프랑스 국채를 높은 가격에 발행하려던 것이 승전국들의 의도였다. 헌데,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니 로스차일드였다. 프랑스 국채를 낮은 가격에 유지시켰던 것이다. 한마디로 껴주지 않으면 덤핑(?) 가격으로 훼방놓겠다는 게다. 해서, 베어링은 로스차일드 가문도 포함시키자고 열강에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몫을 6등분에서 7등분하면 몫이 작아지니 반대했던 열강들이 그제서야 로스차일드 파워를 감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나, 이때까지만 해도 열강 생각은 로스차일드 파워를 인정했지만, 독자적 능력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베어링 가문에 속한 지분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열강들은 로스차일드 배후에 베어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일면 사실이었다. 잔존 쟈코뱅/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세력이 있다 해도 베어링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지,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다.

   

로스차일드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단지 돈 좀 많이 쥔 졸부였을 뿐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열강 황제들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이 확고한 황제일수록 로스차일드보다 베어링에 더 의존했던 것이다.

   

해서, 일본을 제외하고, 금본위 역순으로 순서를 보면, 러시아 > 오스트리아 > 프랑스 > 미국> 독일 순으로 베어링을 신뢰하고, 그만큼 로스차일드를 불신했던 것이다.

   

헌데, 이것이 로스차일드 노림수였던 것이다.

   

잉글랜드 은행은 지속적으로 위기에 놓였었다. 이때, 잉글랜드 은행 위기를 구해낸 것은 베어링이 아니라 로스차일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로스차일드는 능력이 넘쳐도 자신을 베어링 다음인양 처신했던 것이다. 즉, 겉으로는 베어링을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 섰던 게다.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유럽 대륙 정치를 움직였던 것이다.

   

작은 것은 져준다. 해서, 베어링 가문 체면을 차려준다.

가끔 큰 것 한 방만 먹는다.

   

타짜의 방식인 게다.

   

이런 식으로 해먹다가 인월리가 말한 대로 중국 아편전쟁 이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란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각국도 식민지에 뛰어들어 해먹는 체제이다. 이때, 중구난방으로 해먹으면 곤란하니 교통정리가 필요한 게다. 그것이 금융이고, 금본위제인 게다.

   

최상위로 로스차일드가 있고, 금본위제, 중앙은행, 금융, 각국 정치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부동항이네, 뭐네 하는 땅따먹기 수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러시아 황제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를 지지해야 하는데, 북부를 지지해서 군대까지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 황제는 사실 개혁군주였는데, 국유본 덕분에 수구꼴통 신세가 된 것이다~!

   

이래서, 스탈린이 역사가를 두려워한 것이다. 사실은 국유본 역사가이겠지만~!

   

러시아 황제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를 지지해야 하는데, 북부를 지지하니, 별 수 있나. 로스차일드 가문 내부에서 역할 놀이가 발생한 것이다. 영국 로스차일드는 북부를 지원할 터이니, 프랑스 로스차일드는 남부를 지원하자~!

   

인드라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이것이 어디 남의 이야기인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피눈물이 흐른다.

   

1897년의 러시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이 구역 내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수는 5백여만 명으로 지역 인구의 11%를 차지했다.

   

1897년 당시 러시아 통계에 따르면, 한국말을 하는 인구수는 26,005명(남자: 16,225, 여자: 9,780)이었다.

   

   

   

   

   

영란은행은 위기 때 독일 금화로 150만 파운드를 러시아에서 빌렸다. 이때, 러시아는 베어링에 예치되어 있는 상당한 금액의 예금을 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예서, 중요한 건, 러시아 황실이 오늘날 스위스 은행에 예금하듯 베어링 은행에 예금을 예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뿐인가.  베어링 사가 파산하면서 회계정리를 하는데, 뜻밖의 계좌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베어링 지점 계좌에 제정 러시아 황제 이름으로 200만 파운드가 예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파악하고 있는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면, 이때 반문할 것이다. 그렇듯 무소불위하다면, 1905년 혁명을 실패하게 만들고, 1917년 혁명을 성공하게 만든 이유는?

   

그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인 게다.

이 의미를 1% 정도 수준이면 인드라가 더 말 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말씀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힌트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 관계이다. 미국 혁명이 발발했을 때 곧바로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면 너무 노골적이지 않겠나? 십 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

1.힘은 곧 정의요 진정한 권력이다.

2.언론을 통해 민중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3.우리는 경제력으로 세계를 장악한다.

4.우리는 혼란을 조장하고, 물질주의로 신앙을 대체시킨다.

5.흥행사업(연극 영화)으로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취미생활에 몰두시켜라.

6.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이를 멸절시켜야 한다.

7.군사력을 강화하고, 언론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켜 이득을 본다.

8.전문가를 양성해 우리에게 유리한 법 조항을 만든다.

9.각 국의 국민들을 프리메이슨적 의식구조로 교육시킨다.

10.약점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11.하나님은 우리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하였다.

12.언론을 통제해 대중의 심리를 조종한다.

13.대중을 스포츠, 연예, 오락에 심취하게 해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14.세계정부에서는 유대교만 허용하고 기독교는 말살하라.

15.세계정부는 법 적용을 엄격히 하고, 반항자는 가혹히 처벌한다.

16.역사를 조작하고, 새로운 철학으로 교육한다.

17.인간을 개조하고 서로 고발하게 해 완벽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18.고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음모를 일삼고, 우리 통치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시킨다.

19.국민에게 철권정치의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한다.

20.정부를 빚으로 옭아매고, 국민을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킨다.

21.우리는 내국채로 정부를 파산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

22.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23.세계정부는 사치를 금하고 절대적인 전체주의사회를 구성한다.

24.다윗의 후손 중 왕을 선출하여 비밀지식을 전수한 후 권좌에 앉힌다."

http://ko.wikipedia.org/wiki/%EC%8B%9C%EC%98%A8_%EC%9E%A5%EB%A1%9C_%EC%9D%98%EC%A0%95%EC%84%9C

   

시온의정서는 1903년에 나온 위서이나 비공식적으로 1897년에 유출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이에 대한 인드라 생각은 무엇인가.

   

시온의정서는 300인 위원회의 첫 사업이다. 존 콜먼에 의하면, 300인 위원회는 1897년에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시온의정서라는 위서를 작성한 실체는 누구인가. 인드라는 페이비언협회라고 보고 있다.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끈질기게 시기가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는 것을 모토로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페이비언협회의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명칭은 지구전술(持久戰術)로 한니발을 격파한 고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유래하였다.

   

페이비어니즘은 특정한 사상체계가 공식으로 정해진 것이 없는데다가 80년 이상 활동해 온 페이비언협회의 주장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협회 창설 당시의 지도자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그의 친구 시드니 웨브(Sidney Webb), 애니 베전트(Annie Besant) 등의 사회주의사상, 즉 의회정치의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사회개량을 진행하면서 생산수단의 공공적 소유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정의된다.

   

페이비언주의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특정의 역사관·경제이론·정치학설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초기 지도자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 역사관은 점진적 진보의 낙천론 위에 서 있다. 즉 사회는 기술적 발달과 물질적 부의 증대에 의한 구성원의 행복의 증진이라는 방향으로 진보해가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의 내부에 그 존속을 위협할 만한 파괴적 요소가 나타나면, 그것을 극복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자본주의 문명이 발달한 결과로 많은 부(富)가 축적되는 한편 노사의 대립이라든가 도시문제 등의 폐해가 생겼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는 정책이 대증요법식(對症療法式)으로 취해져 왔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의식적·계획적으로 폐해에 대한 극복책이 취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경제생활에 적용한 것으로서, 혁명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페이비어니즘 초기에는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지대론(地代論)의 생각을 토지 이외의 생산요소, 특히 자본에 적용하여 자본 및 토지의 생산성의 차액에서 생기는 잉여를 그들 생산요소의 소유자가 사유함으로써 빈부의 차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거기에서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이는 착취하는 것은 소유에 의한 불로소득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고, 착취당하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사회라는 관점이다.

   

이 이론은 그뒤 포기되었지만, 생산수단의 공유화는 여전히 주장되었다. 또한 그와 함께 재정정책사회보장, 그밖에 노동입법 등에 의한 부와 소득의 평등화 정책이 사회주의 실현의 방법으로서 주장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사회주의 실현의 담당자도 노동자계급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불로소득의 폐지에 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 지지자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페이비언주의의 기초이론은, 그뒤에도 사상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으나 의회정치에 의한 개선의 축적에 의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생각은 그뒤에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1918년에는 그 생각이 영국 노동당의 정책으로 채택되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뒤의 제2인터내셔널에 가맹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 1931년에는 독립기관인 페이비언조사국이 결성되었으며, 1938년에 조사국은 협회에 통합되었다. 1940년에 협회 안에 식민지 지국이 설립되고, 1941년에는 페이비언 국제국이 창설되었다.

   

페이비언협회의 회원은 최전성기였던 1946년에도 지지자가 8,400여 명 정도로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하원의 노동당 지도부는 물론 노동당 출신 의원의 상당수가 페이비언협회 출신이었던 만큼 그 영향력은 지대했다. 협회의 주요활동은 강연, 토론회를 통해 대중에게 페이비어니즘을 홍보하고, 소책자와 정기간행물 등 출판물을 간행하며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출처] 페이비어니즘 [Fabianism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때, 연도에 주의해야 한다.

   

   

제 1 인터내셔널이 1864년에 맑스 주도로 구성되었다.

   

1871년 파리콤뮨으로 제 1 인터내셔널은 큰 혼란에 빠진다. 지금까지 맑스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맑스의 난해한 책 때문인가. 아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맑스의 '공산당 선언' 정도만 읽은 이들이 99.99% 이다.

   

그럼에도 맑스가 권위를 유지했던 배경은, 맑스와 로스차일드를 잇는 특수한 관계였다. 그것은 맑스가 아무리 부정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1848년 혁명 실패에서 맑스가 구사일생 치사빤스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공황 이론이었다.  이것 하나로 간신히 1871년까지 버틴 것인데, 니미, 씨발, 로스차일드 색희가 맑스 운지시킨 게다.

   

   

하여간, 1871년 파리콤뮨. 더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인터내셔널이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이때, 맑스는 바쿠닌을 음해한 뒤 바쿠닌을 제거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얍삽한 짓을 저지르고 만다.

   

허나, 얍삽한 짓이었던 만큼 바쿠닌파 축출 이후 제 1 인터내셔널은 직후 기능이 사실상 정지된다.

   

그러다가 1876년 바쿠닌이 죽자 제 1 인터내셔널도 해체가 된다.

   

맑스도 나이를 먹었잖아. 도리가 있지. 바쿠닌 죽고 뭔 제 1 인터내셔널이냐? 이때부터 맑스는 도인이 되기 시작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시기 이후 맑스 발언 보면 죄다 저렇다. 그저 사람 좋은 병쉰 할배가 되었던 게다.

   

   

   

하고, 맑스가 1883년에 죽는다.

   

이때, 1883년에 결성했던 페이비언 협회가 1884년 연초에 정식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간 맑스가 담당했던 것을 페이비언 협회가 책임지겠다는 것이 아니냐.

   

게다가 페이비언 협회 과제는 맑스 뿐만 아니었다.

   

1878년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자 탄압법과 함께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법을 실시했던 것이다.

   

   

   

해서, 이러니 저러니 하며 십 년을 보냈는데,

   

생각보다 페이비언 협회가 헛빵이다 보니

   

국유본의 간접 응원 속에서 엥겔스가 1889년 제 2 인터내셔널을 만들었는데,

   

이미 열기는 식었던 게다.

   

상설 사무소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897년 제 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바젤에서 열리는 게다.

   

누가 기획했을까.

   

   

유태인일까.

   

아니다.

   

헤르츨이 바보가 아니지만, 이 정도 머리가 있는 넘은 아니다.

   

로스차일드이다.

   

다시 한 번 음미하자.

   

"

1.힘은 곧 정의요 진정한 권력이다.

2.언론을 통해 민중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3.우리는 경제력으로 세계를 장악한다.

4.우리는 혼란을 조장하고, 물질주의로 신앙을 대체시킨다.

5.흥행사업(연극 영화)으로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취미생활에 몰두시켜라.

6.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이를 멸절시켜야 한다.

7.군사력을 강화하고, 언론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켜 이득을 본다.

8.전문가를 양성해 우리에게 유리한 법 조항을 만든다.

9.각 국의 국민들을 프리메이슨적 의식구조로 교육시킨다.

10.약점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11.하나님은 우리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하였다.

12.언론을 통제해 대중의 심리를 조종한다.

13.대중을 스포츠, 연예, 오락에 심취하게 해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14.세계정부에서는 유대교만 허용하고 기독교는 말살하라.

15.세계정부는 법 적용을 엄격히 하고, 반항자는 가혹히 처벌한다.

16.역사를 조작하고, 새로운 철학으로 교육한다.

17.인간을 개조하고 서로 고발하게 해 완벽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18.고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음모를 일삼고,우리 통치자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시킨다.

19.국민에게 철권정치의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한다.

20.정부를 빚으로 옭아매고, 국민을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킨다.

21.우리는 내국채로 정부를 파산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

22.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23.세계정부는 사치를 금하고 절대적인 전체주의사회를 구성한다."

   

   

제 1회 시오니스트 대회는 1897년 8월 29일 3일간에 걸쳐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Diamond Jubilee(다이아몬드 기념식)은 1897년 6월 20일에 열렸다.

   

록펠러(John Davision Rockefeller)는 1897년부터 자선사업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영국과 프랑스계 로스차일드(Rothschild) 은행의 재정 지원으로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유조선을 소유한 쉘 운송 무역 회사(Shell Trans - portation and Trading Company)를 설립했다.

   

에밀 졸라는 1897년 드레퓌스 사건을 고발했다.

   

1897년의 그리스 터키 전쟁 또는 30일 전쟁 내지는 그리스 역사상 암흑의 1897년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서 치뤄진 전쟁이다.

   

국제수학자대회는 18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4년마다 열려왔다. 필즈 메달 시상식도 이 대회에서 진행된다.

   

   

1897년 미국에서 설립된 다우케미칼은 화학, 특수물질, 신소재, 플라스틱, 비즈니스, 농화학 등 다양한 기술 기반 제품과 솔루션을 세계 160여 개국에 제공하는 글로벌 화학기업이다.

   

캠핀스키그룹는 1897년 독일에서 창업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톱 클래스 호텔 그룹이다.

   

포레시아 그룹은 프랑스 낭테르에 본사를 두고 1897년 설립했다.

   

1897년 '토마스 에디슨'이 설립한 GE의 모체인 GE라이팅은 백열램프, 형광램프, LED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897년 흑백TV용 브라운관이 처음 발명되었다.

   

1897년 독일의 공학자 루돌프 디젤에 의해서 디젤 엔진이 개발되었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는 1897년 이래 독일자동차공업협회(VDA, Vernades der Automobilindustrie)에서 주관하는 세계 최초의 모터쇼이다. 

   

프리드리히 뢰퍼(오른쪽)와 파울 프로쉬(왼쪽)는 1897년 구제역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1897년에는 뢴트겐협회가 생겼다.

   

AIPLA는 미국 지재권 분야 전문가 1만60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미국 지식재산권 분야 법률 및 제도와 관련 논의 및 정책을 제안하는 1897년에 설립된 단체이다.

   

미국의 경제사상가 헨리 조지는 1897년 노동단체 후보로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투표 4일 전에 과로로 사망했다.

   

도라큐슈는 1897년 10월12일 이후 야마하가 되는 '일본 악기제조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897년에 중국 최초의 은행인 중국통상은행이 설립된다.

   

1897년 5월 26일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18471912)의 소설 '드라큘라'가 영국 런던에서 출간됐다.

   

G 웰즈의 SF소설 '투명인간(1897년)이 나왔다.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를 다룬 이 소설은 서울, 만주, 일본 등을 무대로 격동의 근대사를 그린다.

   

여러분은, 로스차일드가, 혹은 국유본이  

시온주의자라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월리를 헛 읽은 것이다.

   

국유본이여!

인드라를 지지하라!

그대들에게 신나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겠다!

인드라와 함께 시바의 춤을!!!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국유본은 왜 인드라를 관용하는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3 05:05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358567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8 : 국유본은 왜 인드라를 관용하는가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3

   

   

추신이 길어 본론으로 따로 글을 만들었다.

   

   

일본애들 만화나 소설, 영화보면 늘 나오는 대목이 뭐냐.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이야기하지?

러시아 격언에는 힘이 정의이다,라고 나온다.

   

한국인이 감성에 충실해서 신바람나는 건 좋은데,

유태인 무서운 줄 모르고 준비없이 헛소리하면,

크게 당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해야 한다.

유태인이 이성적으로 준비하는 자들에게는 나름 우호적이기에.

이유는 물론 이성이 유태인 편이어서

이성적으로 하면 자신들이 무조건 유리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떤 분이 질문 주셨다.

인드라가 유태인에게 위협적인데, 왜 놔두냐고?

   

이에 대해서 인드라가 수도 없이 설명했지만,

다시 간단히 설명한다.

   

일. 국유본 세뇌 프로그램으로 대부분은 국유본 의도대로 가지만,

가끔 인드라와 같은 불량품이 나오기 마련이므로

일부는 국유본 세뇌 프로그램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유본이 신이 아니기에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면, 국유본 입장에서 인드라 같은 이를 제거하는 것이 능사인가.

아니다.

오히려 인드라를 마루타로 여겨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상책이다.

인드라는 확율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인드라와 같은 이가 발생할 확율이

최소한 1%는 될 것으로 본다.

            

하고, 실제로 국유본은 소설 1984에서 보는 프로그램을 작동중이다.

   

록펠러 반란 주체가 알고 보니 록펠러 자회사더라는.

쪽발 정은 자금줄이 국유본이라는.

             

해서, 국유본은 인드라를 통해 기존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악할 것이다.

   

인드라는 인드라 의지와 상관없이 국유본으로부터 해커 대접을 받고

나아가 해커를 잡는 화이트해커가 되는 셈이다.            

         

이. 국유본이 인드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가 절필하기 전인 2008년 10월까지 인드라 블로그는 검색 불가였다.

   

인드라, 국제유태자본 등으로 검색하면 아무 것도 안 나왔다.

   

인드라 블로그 모든 글이 차단당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미네르바 절필이 있었던 10월 이후 갑자기 다 해금되었다.

   

해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유본은 인드라 블로그로 네티즌을 유도했다.

네이버 통계 기준 지금은 이삼 천에서 조회수가 왔다갔다하지만,

당시에는 조회수가 평균 만 회가 훌쩍 넘었다.

인드라가 글 썼다 하면 스크랩 수가 50회 넘는 건 기본이었다.

   

여러분은 국제유태자본과 상관없이

88만원 세대, 시대정신 동영상, 미네르바, 리먼 사태, 주가 폭락,

환율, 부동산 폭락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인드라 블로그로 이동했을 것이다.

   

허나, 검색이란 국유본 통제 대상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인드라처럼 어떤 혐의가 잡히면 그 다음으로 관리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유의지로 인드라 블로그에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허나, 과연 그런가, 하고 반문해보시라.

여러분이 쪽발 놈현이 그립습니다, 따위 사이트로 유도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기술은 그다지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국유본은 인드라에게 무엇을 기대했나.

   

인드라가 감옥 다녀온 이력도 있고, 진보좌파였고,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비판 전력도 있으니

또한, 문화평론가로 활약한 데다 경제 전문가이니,

미네르바보다 백 배 낫다고 본 것이다.

해서, 인드라를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인드라도 친일파 대신 자신을 지지해달라고까지 말했다.

해서, 국유본이 인드라를 지지한 게다.

국유본이 인드라를 대한민국 제 1의 블로거로 키워서

뉴욕타임즈나 BBC에서 밀착취재하며 보도하면서

한반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전개하면서도

이명박 적당히 비판하는 음모론 전개했으면

인드라는 이외수, 나꼼수, 어산지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을 수도 있다.

   

헌데, 인드라가 뜬금없이

한반도 평화 통일과 경제 발전, 사회 복지를 위해

정치 안 하고,

언론 출현 안 하고,

책 안 낸다는 것이다.

   

국유본 입장에서는 지금 다소 황당한 것이다.

이건, 국유본과 인드라 게임이고 전략이니 구체적인 건 말씀드리지 않겠다.

   

삼. 국유본이 인드라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인드라 능력과 관련이 있다.

국유본이 제 2의 미네르바로 키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 차원이다.

세상에는 인드라 같은 이들이 많으니까.

   

문제는 무엇인가.

기존 음모론 대부분은 국유본이 만들어낸 것이다.

해서, 대부분의 음모론자들은 국유본이 의도한 대로 움직인다.

외국 번역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다.

미네르바가 이런 편이었고, 켄지 등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인드라는 독창적이다.

세계 어느 음모론자도 주장하지 않는 걸 말한다.

또한, 기존 음모론을 비판한다.

기존 정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인드라는 잘 모르겠다.

국유본이 인드라를 인정하든, 말든 그건 인드라 관심사항이 아니다.

   

어차피 인드라는 국유본론을 이 세상에 온 소명이라 여기니까.

열심히 국유본론을 전개하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죽으면 된다 여기고 있다.

            

헌데, 이런 삶의 태도가 국유본 마음에 들었나?

자신들과 비슷하게 여기는 느낌도 간혹 든다.

            

더 나아가 국유본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를 인드라가 요즘 많이 느끼고 있다.

그 존재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그 존재가 인드라를 상당히 보호하고 있다고 여긴다.

   

인드라가 맛갈 수 있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마치 수호천사처럼 인드라를 구출했다.

인드라도 믿기 힘들다.

평생 무신론자로 살아왔으니까.

헌데, 근래 신을 믿게 되었다.

남들에게는 절대로 전도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잘 모르는 신이니까.

아무튼 국유본이 인드라를 시험하고 위험에 빠트린 적이 몇 번 있는데,

운 좋게 살아났다.

              

운 좋은 것도 몇 번 우연이 겹치니 더 이상 우연일 수만은 없더라.

   

하여간, 지금까지 인드라가 국유본으로부터 무사한 이유는

운이 좋아서라고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드라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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