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6 : 왕회장경제학과 구라경제학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11 02:05

http://blog.naver.com/miavenus/70142075231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6 : 왕회장경제학과 구라경제학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10

   

아무래도 대선 시즌이다 보니 요즘 이웃분들이 자주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느냐며 인드라 의중을 넌지시 묻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인드라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지요.  

   

님이 찍은 사람이 안 되면 마음이 아프죠? 

   

또 한국 대통령 중에 끝이 좋은 이가 누가 있나요? 예외가 없잖아요. 님이 믿고 찍은 사람이 실정을 거듭하면 마음이 아프죠?

   

이래저래 마음만 아픈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나요?

   

하면, 반론이 보통 이렇습니다.

   

다른 선거는 몰라도 대통령 선거면 나라에서 제일 중대한 일이니까요? 

   

인드라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투표를 해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국유본이 대통령을 임명합니다. 님이 투표를 하건, 안 하건, 대통령은 될 사람이 됩니다. 더 나아가 대통령 권력이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국유본 권력은 영원하잖아요. 대통령보다 국유본 권력에 더 고민한다면, 한반도 미래를 위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이해한 분이 질문합니다.

   

이번에 국유본이 미국 대통령을 누구로, 한국 대통령을 누구로 임명하리라 생각합니까.

   

인드라가 말씀드립니다.

   

미국 대통령은 현재까지 오바마가 될 확율이 90%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9월쯤에는 95% 이상 당선 유력합니다.

   

한편, 한국 대통령은 김두관 대 박근혜 구도가 될 것으로 보며, 현 시점에서 보면, 김두관이 6 : 4 정도로 우세하여 김두관 대통령 당선이 유력합니다. 다만, 아직은 유동적인 상황이므로 노비네파 박근혜가 뉴라이트파 정몽준의 정당 독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정몽준은 한반도 서열 1위이기에 쪽발정은보다 끗발이 높습니다. 새누리당과 쪽발민주당, 쪽발통진당 등 한국 주요 정당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인드라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정몽준은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배후에서 한국 정치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해서, 현재까지는 정몽준 뜻대로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몽준이 아직 내공이 부족한지 일처리가 말끔하지 못하여 하는 짓거리가 병쉰색희 짓거리여서 두고볼 수 없다고 여기면 국유본에서 직접 나설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 가능성입니다.

   

요즘 정몽준이 병쉰색희 짓을 좀 많이 하는 것 아니냐, 이런 건 국유본답지 않은 것이다, 인드라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런 뉴스가 떴습니다.

   

"국내 완성차 업계, 줄줄이 파업 '비상'

| 기사입력 2012-07-10 18:06 | 최종수정 2012-07-10 19:11

   

국내 완성차 업계가 줄줄이 파업을 예고하고 있어, 하반기 자동차 업계에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최근 내수침체와 유럽발 경제위기로 판매실적 영향으로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동차업계 입장으로서, 이번 파업은 더욱 반갑지 않은 상황이다.

   

10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한국GM 노조는 사측과의 임금 및 단체협의 협상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한국GM 노조원 5000여명은 이날 주간조(오후 1시50분부터 4시50분까지), 야간조(오후 8시부터 11시까지)별로 각각 3시간씩 부분 파업을 벌였다.

   

한국GM 노사는 지난 5월 첫 상견례 이후 임단협 협상을 13차례 벌였지만, 협상안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현재 한국GM 노조의 요구사항은 기본급 15만1696원 정액 인상(호봉 승급분 제외)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과 노동시간 단축 월급제 시행 등이 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요구안을 검토하는 상황으로 노조와의 협의를 위한 제시안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다.

   

한국GM 노조가 파업에 들어갈 경우 수출물량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유럽지역에서 판매되는 쉐보레 크루즈와 아베오 물량의 98%를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GM 관계자는 "이미 노사가 13차례 협의를 통해 대화를 진행하는 가운데 파업이 진행돼 안타깝다"면서 "노사가 합리적인 타결안을 마련하기 도출하기 위한 지속적인 교류를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기아차 노조 역시 파업 '초읽기'에 들어갔다. 현대자동차(005380)노조는 이날부터 이틀간 4만5000명의 전체 조합원을 상대로 파업 여부를 묻는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한다. 현대·기아차 노조는 주간조는 물론 공장의 야간조 조합원에 대해서도 새벽 시간 투표소를 열고 투표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만약 이번 찬반투표가 가결돼 파업으로 이어질 경우 현대차의 3년 연속 무파업 타결기록은 깨지게 된다. 현재까지 현대차 노조가 임금협상을 놓고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벌여, 부결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번 찬반투표 역시 무난히 가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 노조는 찬반투표 결과에 따라, 13일부터 4시간씩 부분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주간조는 13일 오후 1~5시, 야간조는 다음날인 14일 오전 2~6시까지 초과근무(잔업)를 거부하는 형태로 파업이 진행할 계획이다.

   

현대차 노사는 지난 5월 첫 상견례 이후 9차례에 걸쳐 올해 임금협상을 진행했으나 밤샘근무를 없애는 주간 연속 2교대제, 타임오프(근로시간면제제도) 철회,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협상이 결렬됐다.

   

아울러 현대차 노조는 지난 9일 윤갑한 공장장의 교섭재개 요청 건에 대해 오는 16일 오후 1시 쟁의대책위원회를 다시 열어 논의할 계획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노조 요구안에 무리한 부분이 많아, 그 어느 때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함에도 상급 노동단체의 파업일정에 따른 짜맞추기식 노조 행보에 대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한편 기아자동차(000270)도 10~11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할 예정으로, 현대차와 기아차의 동반 파업이 우려되고 있다.

   

[박성우 기자 foxpsw@chosun.com]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0/2012071002242.html

   

국유본 측에서 정몽준이 일 좀 똑바로 하라고 경고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드라가 지난 주에 지금까지 벌인 일을 정리하고 새 마음 새출발하라고 요구하니 정몽준이 반성하고 인드라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고 노력하는 것일까요^^?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본디 계획대로 가는 것인데, 인드라가 아전인수 격 해석을 하는 것일까요? 알 수 없지요^^!

   

이 이야기는 이쯤하기로 하지요.

   

여러분은 국유본에 대해 어떤가요? 국제유태자본에 대해 긍정적인가요? 부정적인가요? 26차에 걸쳐 번개에서 만난 분들을 분석하면 사실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국제유태자본에 긍정적이랍니다. 왜일까요? 간단하죠. 모두들 돈을 벌고 싶기 때문이죠.

   

왁스의 머니란 노래를 한 번 들어볼까요?

   

   

   

머니머니 해도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머니머니 해도 마음이 예뻐야 남자지

   

머니로 뭐든 다할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수도 있어

   

머니로 예뻐질 수도 있고 사랑도 쉽게 얻을수 있어

   

그만 그만 그게 먼데 자꾸 날 울려

   

거짓없고 순수한 사랑을 난 원해 필요해

   

머니머니 해도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머니머니 해도 마음이 예뻐야 남자지

   

Rap) 돈없어 굶어봤어 돈없어 당해봤어

   

돈없어 맞아봤어 돈없어 울어봤어 돈돈 니가 뭔데

   

돈돈 나만그래 돈돈 돈때문에 네사랑을 팔지마

   

머니가 많은 사람

   

머니가 없는 사람

   

머니가 어딜가도

   

눈물의 씨앗이라 하겠어

   

그만 그만 그게 뭔데 자꾸 날 울려

   

난 머니말고 순수한 사랑을 원해 필요해

   

머니머니 해도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머니머니 해도 마음이 예뻐야 남자지

   

허니허니 나의 허니 진정날 사랑하니

   

맘이 맘이 예쁜 남자 남자가 필요해

   

   

   

   

   

인드라는 십대 때부터 이미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다만, 지인들이 돈 때문에 고민하니 돈을 많이 벌어서 그분들이 더 이상 돈 걱정하지 않게 한 뒤에 세상을 등지고 강원도 산골짜기 같은 데서 은둔하며 살아가는 게 십대 때부터 해왔던 꿈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드라 블로그에서 '동감시대'란 카테고리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인드라가 온오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유태인이다, 유태인 간첩이다, 프리메이슨 한국 랏지 수장이다, 일루미나티다, 국유본 간첩이다, 미국 간첩이다, 일본 간첩이다, 신자유주의자다, 뉴라이트다, 기독교 광신자다, 이명박 알바다, 쪽발놈현 알바다, 히틀러 추종자다, 쪽발돼중 알바다, 쪽발평양정권 간첩이다 등등 수도 없습니다만.

   

인드라가 이에 대해 피식할 수 있는 이유는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정립하면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국유본을 향후 몇 년이 걸리더라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세력은 누구일까요? 인드라는 좌파나 유태인이나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히틀러, 파시즘 등 정치, 종교 분야가 결코 국유본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인가요? 인드라가 근현대사를 검토한 결과 이들 정치, 종교 세력이란 유한하고, 그 누구보다 국유본에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국유본은 정치, 종교 부문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서 경계를 푼 것이 아닙니다. 만일 완전하게 두려움이 없다면 지금 당장 세계정부를 공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국유본은 굳이 무리한 방법을 써서 세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국유본이 원하는 건 인류 모두가 영화 매트리스에 나오는 전향자처럼 가상현실이 비록 가짜이더라도 그 가짜의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바라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는 상당 부분 현실이 되고 있지 않던가요? 대부분 인류는 이미 현실에 대해 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습니다. 국유본이 만일 기막힌 가상현실게임을 만든 뒤 당신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대신 가상현실게임 무료이용권과 에너지 영양 공급을 해주겠다고 제안하면 당신은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겠습니까. 국유본은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자 합니다. 당신이 심리적으로 한계상황에 도달해서 항복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모두 무너진 뒤에 오직 자기 자신만을 기대하게 하는데, 그런 자기 자신이란 매우 허약하기 그지 없어 국유본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마약쟁이인 것입니다.

   

아직은 기술적으로 부족해서 가상현실게임이 나오지 않아 국유본의 세계정복이 늦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혹은, 아직은 인류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보다 완벽한 계획을 실행하고자 시일을 늦추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다행인가요^^?

   

아무튼 인드라가 깨달은 바는 이렇습니다.

   

국유본이 진정 두려워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은 정치나 종교 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가 권력이나 프리메이슨이다, 카톨릭이다, 신흥종교다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면, 무엇일까요?

   

운동 신경이란 말을 하잖아요. 운동 신경을 타고난 사람이 노력해야 피겨스케이팅을 해도 김연아가 되는 것입니다. 운동 신경도 없는 사람이 노력한다고 김연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돈 신경을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 신경을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다. 

   

헌데, 국유본이 진정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다면, 두 부류인데, 하나는 돈 신경을 타고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사업 신경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예서, 국유본이 가장 경계하는 이가 돈 신경을 맡는 사람입니다.

   

국유본이 전세계에서 행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처음에는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을 무한 권력에서 유한 권력으로 바꿉니다.

두번째는 사업 권력을 무한 권력에서 유한 권력으로 바꿉니다.

세번째는 돈 권력을 무한 권력에서 유한 권력으로 바꿉니다.

   

돈 권력이나 사업 권력에 비해 국가/종교 권력이란 국유본에게 있어서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일까요?

   

욕망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욕망은 인간의 기본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출세하고픈 욕망, 신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란 이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출세하고, 신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하기 위함입니다.

   

국유본의 뒤를 이어 세상을 장악한다면, 바로 이 욕망에 대해 국유본보다 더 잘 해주어야 하고, 이치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헌데, 이러기 위해서는 국유본 이상으로 욕망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죠. 이는 국유본 대안세력이기 위해서는 국유본보다 돈 냄새를 기막히게 아는 이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국유본도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세상이 명한 명줄을 최대한 늦출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다리 치우기'일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신과 유사한 자들을 포섭하여 자기 밑으로 두거나, 아니면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드라는 국유본과 생각이 같습니다. 인드라는 인드라더러 일루미나티다, 프리메이슨이다, 뭐다 하는 비판에는 피식 웃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인드라를 부러워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인드라를 그런 방식으로 비판해서 얻는 이익이란 돈일 것입니다. 인드라가 하는 일을 자신이 한다면 돈이 되니까요. 정확히는 국유본에게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인드라는 세 가지 면에서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기존의 음모론자들이 음모론을 펼치면서 그간 수익사업(?)을 했는데, 인드라가 음모론자들을 믿지 말라고 하니 사업에 지장이 온 것입니다. 인드라가 이렇게 말하면, 이리유카바최의 그림자 정부나 쑹훙빙의 화폐전쟁이 제대로 팔리겠습니까^^!

   

둘, 국유본의 존재를 폭로해서 정치, 종교 사업 확장 좀 하려는 분들이 피곤합니다. 인드라가 정치 안 한다, 종교 안 한다, 언론 우습다 이러면 이걸로 그간 돈벌려고 하는 사람들 입장이 뭐가 됩니까. 쪽발놈현 관장사와 비슷하게 되잖아요? 이러니까 중권이, 노자, 국이, 어준이가 심경이 복잡한 것입니다.

   

셋, 국유본이 정치, 종교 본능을 지닌 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경계하지 않지만, 가끔 경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지학회 크리슈나무르티나 사파티스타 마르코스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별의 재단 헤체 선언

http://blog.yahoo.com/_BPQGSWXKDKXFZGVU4TWMMMOYRY/articles/515113

   

사파티스타 마르코스, 멕시코 운동권이란 인간말종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1&aid=0000134164

   

   

인드라는 얼마 전까지 이들 크리슈나무르티나 사파티스타 마르코스에 기대를 하였습니다. 허나, 지난 시기 소중한 휴가 두 달간 깨다르니즘에 도전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보다 사회주의 건설이 더 어렵다고 했는데, 레닌이 실패했습니다. 이는 레닌이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능력이란 신경과 같다. 레닌도 노력했을 것입니다. 허나, 타고난 재주가 없는데, 아무리 노력한다고 되나요? 안 됩니다.

   

공산주의이든, 지상낙원이든, 행복공동체든, 능력없는 넘들에게 맡기면, 쪽발평양정권처럼 비극이 되고맙니다. 능력없는 넘들에게 결코 과제를 맡길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이든, 지상낙원이든, 행복공동체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돈냄새 맡는 걸 타고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대우 김우중은 절반의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김우중 왈, 사회주의 국가는 지도자에 의해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제대로 말합니다.

   

사회주의 국가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이 행복하게 살려면, 정치 신경이 있는 자들이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 왕회장경제학과 구라경제학

   

   

유남규:

저기 인드라님께선 국제유태자본에 관한 자료를 주로 어디서 찾으셨어요?? 만약 위의 질문이 인드라님한테 매우 실례가 되었으면 정말 죄송합니다.

   

INDRA:

글 감사드린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 이 기회에 '자료 찾는 법, know-where'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국제유태자본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는 놀랍게도 인터넷에서 대부분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드라처럼 소수만이 국제유태자본 자료에 접근이 가능할까. 이는 자료를 보는 안목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평가하는 자료의 기준은 신뢰도, 정확도, 연관도로 분류한다.

   

신뢰도란 정보 제공자에 대한 평가, 즉 출처에 관한 것이다.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기관, 국내외 언론사, 출간된 서적 등이다. 출처가 분명하면, 정보 제공자가 발표하는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공식적인 견해이거나 공식적인 의견으로 간주가 되므로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는 누구나 검색만 하면 되는 사안이므로 어렵지 않다.

   

당장 로스차일드, 록펠러, CFR, 빌더버그, 프리메이슨, 피닉스저널, 삼각위원회, 국제유태자본 등으로 검색해도 무수한 자료가 쏟아진다. 이에 대해 각각 신뢰도를 매기고 분류를 하면 된다. 참고로 신뢰도가 가장 낮은 것은, 인터넷 자료 중에 자신이 쓴 것 같지 않은데, 출처나 인용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정확도란 누가 썼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즉 출처에 상관없이 기사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검증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다양한 지적 학습과 함께 풍부한 사회 경험이 수반되어야 하기에 대부분 예서 어려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연관도다. 연관도란 나의 독특한 자료 찾기 방식이다. 전혀 연관이 없는(혹은 그간 연관을 시키지 않은) 것끼리 짝짓기를 하는 습관이다. 가령 이전 글에서 보면, 어떤 분이 영화 '예스맨'을 언급하면, 나는 오 헨리의 단편을 언급한다. 예스맨과 오 헨리 단편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일까. 근래 발생한 가자지구 전쟁에 대해서는 수에즈 전쟁을 이야기한다. 숱한 중동전쟁이 있었고, 이스라엘과 관련한 전쟁이 한둘이 아닌데, 왜 하필 수에즈전쟁일까? 이는 오랜 지적 학습과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한다 해서 나타나는 방식이라고만 할 수 없다. 다소 타고난 것일 수 있다. 가령 인드라는 왼손잡이, 왼발잡이이기도 하다^!^

   

창의성의 비밀‥유레카는 없다 …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100201861

   

왼손잡이男, 성적은 나빠도 돈 더 잘 번다

http://www.kormedi.com/news/article/1187239_2892.html

   

우뇌와 좌뇌의 균형

http://blog.naver.com/yongsil?Redirect=Log&logNo=30006670170

   

뇌량의 감각 깨우기

http://blog.naver.com/pso2850?Redirect=Log&logNo=60003407255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보다 상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뇌량을 개발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것이 왼손잡이가 수적으로 적음에도 오른손잡이와 대등한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요인이라면 초점은 뇌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뇌와 좌뇌를 연결시키는 뇌량이 비록 선천적으로 기능이 약하다고 해도 이를 의식적으로 개발하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뇌량을 개발하는 것은 뇌량에 대해 즐거운 자극을 주면 되는 것이다. 가령 어릴 때 양손을 모두 활용하게 하는 피아노를 치게 하는 것 등이다. 혹은 축구할 때 양발을 모두 사용하게 하면 된다. 그리고 추천하는 것이 자주 환경을 바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보다 새로운 환경을 지속적으로 조성하면 그만큼 뇌량의 쓰임새도 많아질 것으로 나는 본다.

   

정리하면, 국제유태자본에 관한 자료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에 관한 자료는 사방 천지에 깔려 있다. 문제는 쉽게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에서 정보를 찾아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하여, 신뢰도 면에서 자료를 성실하게 찾아다니는 노력을 하고, 정확도 면에서 지적 학습과 사회 경험을 꾸준히 하며, 연관도 면에서 자기 개발, 혹은 수행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국제유태자본론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정말 중요한 정보는 얻기 힘들다고? 그렇지 않다. 국제유태자본론 전문가가 되면 고급 정보를 찾지 않아도 고급 정보가 국제유태자본 전문가에게 몰려온다. 재미나게 UFO 전문가로 비교한다면, 전문가가 아니면 UFO를 봐도 UFO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해서, UFO 여부를 전문가에게 의뢰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전문가가 되면 정보는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온다. 물론 진정한 전문가가 되려면 그래도 찾아다니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지만 말이다.

   

모야모얌:

안녕하세요. 인드라님 얼마 전 친구의 권유로 인드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드라님의 글을 읽으면서 정말 존경스럽고 멘토로 삼고 싶습니다. 인드라님만 괜찮으시다면요. 제가 궁금한 것은 경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은데요. 어떤 것을 먼저 알고 읽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가 이외수님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럼 일요일 즐겁게 보내세요. 2009년에도 파이팅입니다.

   

pladinhq:

인드라님 글을 작년부터 읽고 있는 31세 청년입니다. 이렇게 쪽지를 보내게 된 이유는 인드라님 글이 상당히 여러 분야에 걸친 지식이 없이는 읽기가 어려워서입니다. 저에게 배경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나 공인노무사 수험서 이외에는 독서와 담을 쌓고 살아서 무슨 책부터 접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하아. 수많은 분야의 책이 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추천해달라고 하니 제가 보기에도 난감한 질문이네요. 기본서(?)에 가까운 책을 좀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할멈:

국제유태자본의 사나리오 대로 간다면 한국통일도 머지않은 일인진데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대비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요. 통일이 되기 전에 공기업 민간화가 진행된다면 그것도 통일 후 가장 돈이 되는 부분의 독점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즉 돈 되는 것은 미리 선점해 놓자는 것이겠죠. 독일통일 후에도 10년간 많은 혼란과 경제 후퇴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독일 통일 후 10년이란 책을 한국이 통일되면 독일의 경제 발전 예를 따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남들보다 한발 앞서 행동하고자 책만 사놓고 그 책 문장 문장의 어려움에 읽어보지도 못하고 아직도 책장에 꽂혀만 있습니다.ㅋㅋㅋ 국제 유태자본에 깽판을 놓고 싶어도 깽판 놓을 깡다구나 옆구리라도 찔러댈 막대기라도 있었으면 합니다. 점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중산층이 없어지고 부가 한곳으로 몰린다는 것이 그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만 치중하게 하여 순한 양들을 만들어 놓는 것 같은... 대기업이나 국제유태자본에 대항하기에는 미미하겠지만 그래도 개미군단의 힘이랄까 이곳 블로그에서부터라도 시작한다면 깽판 놓을 돗자리나 옆구리 찌를 꼬챙이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겠지요. 당연히 통일이 되면 북한의 부동산도 오를 테고 그 밖의 많은 나라의 투기자본들이 들이 닥칠 텐데 그곳에서 우리 자본의 밥그릇이라도 지키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뺏기고 싶지요. 이곳 블러그에 글 올리기엔 전 너무 내공도 짧고 지식도 짧아 어떤 때는 글 올리기도 부끄럽습니다. 샤를다르님이나 너무쉬워 그 밖의 다른 님들이 올리시는 국제 정세나 정치 돌아가는 애기들은 확실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또 그님들의 지식에 부럽기도 하고 그것에 비하면 난 뭔가 하는 자괴감도 들기도 하지만, 또 제가 올린 질문들이 너무 세속적이라 이런 글들을 올려도 되나 싶지만, 그래도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솔직히 듣고 싶은 질문이 경제적인 질문이라 용기를 내어 올려봅니다. 인드라님 블로그에 들어와서 생긴 고민 한 가지 더.... 이상과 현실의 갭이 점점 커져가기에 힘들기만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주식이나 환율 그밖의 돈되는 정보가 알고 싶고 이상적으로는 그것에 초월하여 그들 뜻대로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고 대응하는 그런 기본을 세우고 싶고, 그러면서도 세속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먹고사는 문제에 걱정하는 나에 대해 실망도 해봅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들락날락 거리고 그 위에 지식이 짧아 기초적인 질문조차 무식이 보일까봐 올리지 못하는 님도 있으리라 봅니다.

   

INDRA:

모야모얌님, pladinhq님, 마귀할멈님 글 감사드린다.

   

왜 우리는 경제, 혹은 경제학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하고 싶어졌을까. 두 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원초적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서, 돈 벌고 싶어서다. 다른 하나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싶어서다. 해서, 전자에 관한 것을 왕회장경제학이라 하고, 후자에 관한 것을 구라경제학이라고 하자. 이 둘은 궁극에서야 만나겠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서, 이 둘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 왕회장경제학이란 뭐냐. 정주영을 왕회장이라고 한다. 나는 한반도에서 누가 뭐라 해도 정치는 김일성, 경제는 정주영, 종교는 문선명을 제일로 친다. 순위야 물론 언제든 변동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내가 주사파라거나 친북이어서 김일성을 최고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그처럼 정주영이나 문선명을 존경해서 경제는 정주영이니, 종교는 문선명이니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바라보는 영향력 면에서 우선으로 보는 게다. 가령 파워엘리트 순위를 매기면 김일성, 김정일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과 같다.

   

해서, 왕회장경제학이다. 그런데 정주영이 경제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왕회장이 된 게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리고 왕회장경제학에는 왕회장 이야기가 정작 없다. 그저 왕회장이란 상징적인 용어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왕회장처럼 돈 냄새를 기막히게 잘 맡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영화 '빠삐용'에서 보듯 언제 석방될 지도 모르는데 감방에서조차 장사를 하는 이들이 있다. 왕회장경제학은 바로 이런 이들이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회장경제학에는 일반론이 없다. 왜냐하면 각자 돈을 버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왕회장경제학을 안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방법'이란 수만 가지 책에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저자는 책을 내어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며, 독자는 책을 사서 읽고도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왕회장경제학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학문일까. 그렇지 않다. 일단 돈을 버는 이들은 타고난 능력이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유전되는 성향이 아니다. 해서, 부자라고 언제까지 부자가 아닌 게다. 그렇다면 여기에 힌트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근대 들어서서 돈을 많이 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어떤 정신적 유산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나는 그것을 탈무드라고 본다. 탈무드에는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으며, 그 교훈이 같은 내용이더라도 읽을 때마다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또한 읽은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에 따라 또 다르게 읽힐 것이다. 나는 이것이 왕회장경제학이라고 본다. 언뜻 보면 모순적이어도 지나고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탈무드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만난 '탈무드'에 대한 결론은 간단하다. 내 몸에 맞는 철학을 하고, 내 몸에 적당한 정치를 하고, 내 몸 하나 지탱할 수 있는 경제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식시장에서 전문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맞는 매매기법을 개발해서 매매하라고 말이다. 누구 말대로 해봐야 누구만 돈을 벌 뿐이다. 자기 말대로 해야 돈을 번다. 자기 몸에 맞게 해야 크건, 작건 돈을 번다. 해서, 왕회장경제학이다. 왜 탈무드경제학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탈무드경제학하면 일반적이라는 오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왕회장경제학이라고 해야 특수하게 보이고, 촌스럽게 보이고, 웃기네 하고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조하지만, 왕회장경제학에는 정답이 없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 다르다. 해서, 부자인 아버지가 성공한 대로, 혹은 아버지가 말한 대로 아들이 따라 해도 실패하는 것이 왕회장경제학이다.

   

그렇다면 왕회장 경제학을 실천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몸으로 부딪치는 게다. 주식을 한다고 하면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주식시장에 도전하는 게다. 단, 조건이 있다. 자신에게 부담이 안 되는 액수 한도가 있을 것이다. 이 기준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 하면,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 안에 든 액수가 얼마 이하일 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가가 액수 한도액이다. 만 원이든, 십만 원이든, 백만 원이든... 이 액수 한도가 정해졌다면, 그 액수 한도보다 1%~5% 정도 더 투자해라. 왜냐하면 왕회장경제학에서는 모든 행위를 도박 행위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 투자해서는 안 된다. 밑천이 털리면 안 되기 때문에. 다음으로 주식을 할 때 그 누구 말도 믿지 말고, 오직 자신의 감만 믿어라.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멈춰라. 생각을 멈추고 감정대로 해라. 시험 볼 때 사지선다형에서 찍을 때를 떠올려라. 그때 제 일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설령 말이 안 된다고 나중에 여기더라도 그것을 정답으로 알고 덤벼라. 찍고 나서 절대 후회하지 마라. 수정하지 마라. 어차피 찍은 것에 불과하다.

   

해서, 돈을 따면 다행이다. 반면 돈을 잃었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성적이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몸이 가는 대로 행했으면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혹 이성이다, 합리성이다, 이딴 것에 홀려서 투자를 망쳤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펀드매니저와 침팬지가 함께 주식투자하면 성공률이 누가 더 높을까. 이 실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침팬지이니까 성공률이 높은 것이다. 인간은 성공률이 낮다. 초보가 돈을 번다. 그러나 조금 안다고 여기는 순간부터 운전 일 년 정도한 운전사처럼 매번 돈 꼴아 박는다. 왕회장경제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강조한다. 오직 자신의 길로만 가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에게도 결코 물려줄 수가 없는 자신의 길로만 가야 한다. 주식 투자 등에서 손실을 본 것은 그대가 몰라서 손실을 본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지 않았기에 잃은 것이다. 하여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아트만이든, 무아이든... 하여,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야성을 길러야 한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쳐야 한다.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다. 오직 자신이 해내야 할 뿐.

   

정리하면, 왕회장경제학의 참고문헌은 딱 한 권뿐이다. 탈무드. 조건은 국제유태자본이 멸망하기 전까지다. 멸망하면 탈무드는 다른 참고서로 바꾸어야 한다. 국제유태자본을 멸망시킨 세력이 참고하는 책으로 말이다. 다른 책들은 다 필요 없다. 헛것이다. 읽어봐야 눈만 아프다.

   

둘째로 구라경제학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구라경제학이다. 해서, 구라경제학을 진정으로 알면 돈을 번다는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물론 현실을 즐겼지만 말이다. 돈도 벌고, 구라경제학도 펼칠 줄 알면 그건 사기꾼이다. 왜냐? 고전경제학의 대부, 아담 스미스 주장이 뭐냐. 아무리 이기적인 경제활동을 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서 결과적으로 사회에 보탬이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느냐. 그처럼 신자유주의건, 오스트리아 학파이건, 맑스주의 학파이건, 무엇이건 경제학의 출발은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경제적 모색이다. 

   

그러므로 신성하게 도박하는 장소에서 구라경제학 펼치는 놈들은 사기꾼이 아닌가 일단 의심해야 한다. 환율, 선물옵션, 주식, 부동산, 제조업, 서비스 시장 등 모든 시장 현장에서 구라경제학을 펼치면 사기라고 보아야 한다. 구라경제학은 현실과 맞지 않을수록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예측이 완벽히 빗나가야 진정한 구라경제학이다. 그러나 일부분 맞다면, 그것은 현실과 타협하고, 이성적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해서, 오히려 예측이 맞은 것을 스스로 안타까워하면서 반성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는 맑스가 공황 예측에 기뻐 날뛰는 대목을 심히 불쌍하게 보는 편이다. 다른 한편, 맑스도 나처럼 속물이었구나, 해서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쯤해서 눈치를 채었을 것이다. 구라경제학이란 한마디로 라퓨타다. 구름 위의 성을 짓는 것이다. 유토피아다. 현실에서, 혹은 지상에서 어디에서든 찾을 수도 없고, 미래에도 건설할 수 없는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구라경제학이 현실과 일치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아니다. 크게 오해하고 있다. 베블렌이나 케인즈나 미제스나 갤브레이드나 하이에크나 프리드만이나 루카스나 스티글리츠, 헨리 조지, 가이스너, 제프리 삭스, 서머스 그리고 장하준에게 자신의 양심을 걸고 누가 가장 구라경제학의 권위자냐 묻고 싶다. 나는 그들이 99%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맑스다.

   

해서, 구라경제학의 힘은 무엇인가. 비판에 있다. 결코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라경제학에 있어서 가령 맑스로 돈을 벌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모욕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보다는 맑스 때문에 전 재산을 날렸다, 라는 식이 되어야 그는 진정한 맑스 경제학의 후예, 구라경제학을 추구했던 모범생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물옵션 토론방에서 공자왈 맹자왈 맑스왈 하는 넘이야말로 가장 한심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신성한 도박판에서 구라를 펼치면 그 죄는 삼대를 멸족해도 갚을 길이 없는 것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현실과 이상의 변증법적인 관계다. 해서, 세상은 가장 현실적인 인간과 가장 이상적인 인간에 가까운 족속들만 살아남게 만드는 시스템인 게다. 실제로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들이란 둘 중 하나다^^!

   

해서, 구라경제학의 최고봉은 맑스경제학이다. 맑스경제학에서 노동가치론이 문제가 많다느니, 현실에 부적합하다드니 아무리 말해도 왜 맑스경제학이 구라경제학의 으뜸인가. 이는 성경과 같다. 성경이 성경인 것은 현실에서 맞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성경인 게다. 현실에서 하나라도 일치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 대목은 성경에서 성경 기자가 자신의 의지를 담은 것이므로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라경제학의 일등은 변함이 없는가. 아니다. 맑스 경제학보다 혹은 자본론보다 더 대중적으로 읽히지도 않으면서 모든 구라경제학자들 가슴을 파고들게 한다면 맑스 경제학은 언제든지 폐기될 수밖에 없다. 맑스경제학이 영원하다는 것은 인류의 수치인 게다. 인류는 발전할 것이다. 언젠가는 맑스경제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릴 것이 분명하다. 

   

추신 : 이외수는 내게 남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85년에 언더그룹에서 여름을 나던 때다. 1학년이었는데, 구로에서 합숙을 했다. 구로 합숙 장소는 심리학과 3학년 재학생인 꼭지 누나 자취방이었다. 그녀 때문에 내가 언더그룹에 가입했던 것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5월 축제 때다. 당시 학교 안에서 썰렁하게 남자밖에 없던 술모임 자리에 불쑥 나타난 것이 꼭지 누나 일행이다. 그녀는 술을 달라고 했고, 우리는 술을 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문득 나를 보더니 너, 참 재미나게 생겼구나, 그러더니 나더러 나중에 만나자고 했다. 하여, 중고등대학까지 여자라고는 만날 수 없었던 나는 흥분해서 그녀를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녀랑 재차 만났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로 담배를 참 맛있게 피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 나는 담배를 피지 않았다. 물론 그 이전에 실험적으로 아버지와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하니까 해보자고 시도한 적이 있지만, 둘 다 실패했다. 그런데 그녀를 보니 참말로 담배를 피지 않는 여성이란 참된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꼭지 말대로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언더그룹에 들지 않을래? 해서 든 것이 지하서클이다. 물론 운동조직이었다. 하여간 그때 그 구로합숙소, 꼭지누나의 자취방이 꼭지누나의 명명법에 따라 '아르카디아'였는데, 이 명명법은 아무래도 심리학과라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꼭지누나의 가정사가 매우 복잡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참 꼭지 누나를 많이 괴롭혔다는 생각이다. 지금 만나면 참회하고프다. 너무 괴롭혔다. 하여간 그때 합숙소에 가져간 내 책이 유일하게 이외수의 '칼'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웃주민의 신고로 우리는 잡혔다. 혼숙이 문제였던 게다. 이때 내가 일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재수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에 비해 집중적인 질문과 피곤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문제된 것은 이외수의 칼이었다. 왜 하필 '칼'이냐. 난들 압니까. 조폭이나 쓰는 칼을 왜 도닦는 소설가가 제목을 칼이라고 했는지...

   

물론 우리의 도닦는 소설가가 근래에 나섰다. 이명박 대선 과정 때부터 나섰는데, 아무래도 국제유태자본이 활용한 측면이 큰 듯보인다. 해서, 일반의 예상과 달리 이외수는 요즘 제 2의 전성기다. 요즘은 이명박을 까야 스타가 된다. 이런 것이 독재정권이라고 하니 나로서는 우습기 짝이 없다."

http://blog.naver.com/miavenus?Redirect=Log&logNo=70040281262&from=postView

   

   

인드라 대학 입학식 때 모습

대학 1년인데, 요즘 애들과 비교해서 굉장히 조숙한 모습?

   

   

87년 연세문학회 회장으로 6월 항쟁 당시 공동창작시 발표 모습.

옆에서 보조하는 이는  신혼 직후 신부가 국정원에 끌려가 화제가 된 사노맹 시인.

왼쪽은 연세문학회 인드라가 가르친 직속 후배들이고,

오른쪽은 인드라가 술집에서 인드라가 썰을 풀어 인드라에게 뻑간 풍물패임.

가장 오른 쪽에 있는 넘이 재능이 뛰어났던 넘인데, 요즘 모하고 지내는지.

중요한 건, 암 것도 몰라 순수할 대학생 때는 그나마 조은데,

대학 나오고서도 운동권하면 인간 쓰레기, 인간 말종됨.

주변에서 아직도 운동권이다 하면 피라미드 다단계처럼 반드시 피해야 한다.

정신세계가 완전 쓰레기이니까.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5 : 미국 연방준비은행, 윌슨, 하우스 대령, 브랜다이즈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6 03:42

http://blog.naver.com/miavenus/7014173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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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5 : 미국 연방준비은행, 윌슨, 하우스 대령, 브랜다이즈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06

   

이차대전 이후로 가기 전에 일차대전 이전으로 간다. 종교인이나 지식인이야 왜곡되었다 해도 영적 갈망이나 지적 갈망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터인데 부족할 것 하나 없을 듯한 헨리 포드와 같은 이가 왜 프리메이슨이 되었던 것일까.

   

인드라는 이를 세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하나, 프리메이슨 조직의 특성. 프리메이슨 조직은 중앙집권적이지 않다. 각 지부가 독자적이다. 중앙 권력이 각 지부에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적인 지배를 하는 것이기 보다는 봉건제적인 통치, 즉 각 지부장의 권한을 승인하면 그 나머지는 지부에서 영주가 영지 관리하듯이 하는 것이다. 해서, 때로는 힘이 센 지부가 다른 지부를 흡수하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영지전을 해서 영지 확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게 해서 영향력이 커진 지부가 프랑스 대동방 지부인 것이다. 하여, 프리메이슨이 역사적 사건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하는 것은 허구인 게다. 그보다는 각 지부에 속했던 프리메이슨들이 개별적, 지부적 인맥을 통해 역사에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해서, 시일이 지나면, 프리메이슨 조직은 그 조직 원리상 현지화하기 마련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을 건국한 중심 세력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니 프리메이슨의 현지화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둘, 1920년대부터 있었던 안티 프리메이슨 운동 덕분이다. 프리메이슨은 그 조직 특성상 친영국적인 조직이었다. 허나,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프리메이슨 조직은 점차 사멸의 위기를 맞이하였기에 벗어나고자 친영적인 색채를 탈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흐름이 미국 대학에 있던 프리메이슨 아류 조직들의 변화다. 최초에는 친영국적이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미국적인 엘리트 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하여, 미국 프리메이슨은 현지화, 토착화, 미국화하였던 것이다.

   

셋, 시온의정서의 영향이다. 유태인들이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세계정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러하니 이에 대항하여 유태인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 이때, 프리메이슨 만큼 흥미로운 조직이 없는 것이다. 물론 국유본이 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시온의정서를 만들고 유포시킨 것이다.

   

해서, 시온의정서 유포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프리메이슨이란 미국 대학가 극소수 엘리트들이나 사교용 겉멋으로 즐기던 것이었는데,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지만,시온의정서 유포 이후 미국 프리메이슨이 역설적으로 대중화한 셈이다.

   

해서, 미국 프리메이슨은 현지화, 토착화, 미국화를 거쳐 부흥의 역사를 맞이한 셈이다.

   

하면, 헨리 포드 같은 이가 국유본 떡밥에 넘어가는데, 시온의정서만으로 넘어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여, 미국에서 연방준비은행이 만들어졌던 때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헨리 포드와 같은 산업자본가가 회사를 움직이려면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 이 자금 조달을 하려면 금융자본가를 만나야 하는데, 헨리 포드는 이 과정에서 국유본의 존재를 발견한 듯싶다. 하고, 헨리 포드는 국유본에 대항한 국제조직, 국제자본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러한 시도 중 하나가 프리메이슨일 확율이 크다.

   

   

아래 글은 달러에서 발췌한 글인데, 78 : 22라는 독법을 기억하면서 읽어보자.

   

   

"지킬섬의 마녀 잔치

   

미국 역사상 가장 웅장한 계획을 뚝딱 만들어낸 마녀 잔치는 지킬섬에서 벌어졌다. 지킬섬은 조지아 앞바다에 있는 J.P.모건 소유의 땅이었다.

   

잔치는 1910년에 로드아일랜드의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이 주최했다. 그는 모건의 사업 동반자이자 존 D.(2세) 록펠러의 장인이었다.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인 올드리치는 월스트리트 상원의원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대기업과 은행의 대변자였다.

   

올드리치가 모임을 주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폴워버그라는 독일계 이민자였다. 그는 로스차일드가 남북전쟁 이후 미국 내의 주요 금융업체로 삼고 있던 쿤.로브의 공동 경영자였다. 다른 참석자로는 당시  모건의  뱅커스트러스트사 회장으로 있던 벤저민 스트롱과 다른 두 모건계 은행장, 미국 재무부차관보, 당시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은행었던 내셔널시티뱅크(지금은 시티뱅크로 불린다)의 프랭크 밴덜립 행장 등이었다. 밴덜립은 윌리엄 록펠러와 쿤.로브를 대표했다.

   

모건은 계획 막후의 최고 운영자였고, 모건과 록펠러 패거리는 오랫동안 최대의 맞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되는 금융체계를 짜내기 위해 이 비밀 회동에 모였다. 밴덜립은 나중에 이 모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차역으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 거기에는 올드리치 상원의원의 개인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 우리 특별 그룹이 금융 법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드러나면 그 법안은 의회를 통과할 기회를 도무지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 올드리치의 중앙은행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 핵심 부분은 나중에 채택된 계획에 포함됐다.

   

(그 3년 전에 발생했던) 1907년의 공황은 니커보커 은행과 아메리카트러스트사가 파산할 지경이라는 소문으로 촉발됐다. 모건하우스가 소문의 진원지였다는 증거는 나중에야 나왔다. 소문을 믿은 대중은 인출사태를 일으켜 소문을 현실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러자 모건은 점잖게 공황을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인출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럽에서 1억 달러어치의 금을 들여온 것이다. 여기에 홀린 대중은 앞으로 공황을 없게 하려면 중앙은행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됐다. 올드리치안을 공동 발의한 로버트 오웬스는 나중에 의회에서, 금융업계가 자기네들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을 요구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기 위해 그러한 금융 공황 유발을 모의했다고 증언했다.

   

1907년의 공황으로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의회조사단이 구성됐고, 지킬섬 비밀 회합이 이어졌다. 그 결과 '올드리치안'이라 불린 법안이 만들어졌으나, 조심스런 반대파는 그것을 간파하고 효과적으로 물리쳤다. 브라이언은 민간 화폐를 민간 은행에서 발행하도록 하는 어떤 법안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화폐는 정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국가 통화가 돼야 한다."

"

   

1907년 공황. 모건이 공황을 해결했다지만, 로스차일드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당시 1억 달러의 금을 일시에 동원할 수 이는 힘을 가진 유일한 세력은 로스차일드 가문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건이 국채로 큰 금융기업인데, 로스차일드가 배후에서 도와줬기에 국채 로또에 연속적으로 대박날 수 있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이 타켓이 되는 것을 극구 피해왔다. (로스차일드의 이런 전략으로 인해 오늘날 국유본 권력이 여전히 록펠러가 아니라 로스차일드에게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내내 베어링 가문 그늘에 있는 척하였고, 베어링 가문에게 역할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자 모건을 내세웠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건을 키워줄 때면 모건 위세에 영국 정부가 쩔쩔 매었고, 영국 정부가 답답해서 로스차일드에 중재를 요청하면, 로스차일드 가문이 저희도 모건이라면 쉽지 않습니다, 라며 난색을 표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국제 외교가와 사교가를 한바퀴 돌면 소문이 진실로 둔갑하기 마련이다.

   

모건도 모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모건 하우스에 유태인 출입 금지를 시켰던 것이다. 단,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인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당대 로스차일드와 모건은 겉으로 대립 관계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 로스차일드가 모건과 끝난 듯이 폴 와버그를 파견하여 로스차일드와 모건의 결별을 기정사실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러시아부터 시작해서 상당수 국가가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 모든 것이 간교한 술수였던 것이다.

   

해서, 모건은 국제유태자본과 대항하는 미국금융자본으로, 록펠러는 국제유태자본과 대항하는 미국산업자본의 대표가 된 셈이다. 하면, 왜 모건과 록펠러는 라이벌이었나?

   

1910년대 초반까지 국유본, 혹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록펠러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여, 록펠러에게 족쇄를 물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모건은 로스차일드의 충직한 종이었으나, 당시 록펠러는 로스차일드의 노예가 아니었다.

   

해서, 마침내 로스차일드 국유본은 록펠러를 노예로 만들 수 있었으니, 그것이 1910년대에 일어난 반독점법이다. 이로 인해, 록펠러는 로스차일드에게 항복한다. 이 극적인 반전을 합리화시키고자 나온 것이 록펠러의 자선 기부였던 것이다.

   

그간 비난만 받아온 록펠러 가문이 하루 아침에 나눔의 기쁨을 아는 선한 자본가로 둔갑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유본의 언론플레이다.

    

   

"모건에게는 의회의 반대말고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 법안에 서명하겠다는 대통령이 필요했다. 1910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모건의 똘마니가 아니었다. 매킨리의 뒤는 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이어받았는데, 그는 모건 진영에 있었고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를 해체하는 데 관여했다.

   

루즈벨트의 후임인 태프트는 공화당 소속이고 록펠러의 본거지인 오하이오주 출신이었다. 그는 인터내셔널 하비스트와 US스틸 등 모건의 주요 트러스트를 해체하기 위해 반트러스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복수를 했다. 태프트의 1912년 재선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의 대통령 유임을 막기 위해 모건은 침착하게 진보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은퇴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불러내 후보로 출마케 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발생한다. 만일 태프트의 반독점법이 성공했다면 미국 역사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우리는 반독점법하면 무조건 진보적인 정책으로 생각한다. 허나, 반독점의 대상을 차별화하면 그건 논란의 대상이다. 모건에 대한 반독점인가, 록펠러에 대한 반독점인가. 이는 더 치고 들어가면 금융자본에 대해 반독점을 할 것인가, 산업자본에 대해 반독점을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만일 테프트가 모건 반독점법을 추진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탄생되었을까. 1차 대전이 벌어졌을까. 러시아혁명은 성공했을까? 2차 대전은? 한국 분단은?

   

"루즈벨트는 태프트의 표를 충분히 잠식했고, 모건의 진짜 후보인 윌슨 민주당 후보가 1912년 선거에서 당선됐다. 루즈벨트는 속았음을 깨닫고 떠나갔고, 진보당은 해체됐다. 윌슨은 에드워드 멘델 하우스 대령 등 모건 똘마니들에게 둘러싸였다. 하우스 대령은 백악관에 집무실도 가지고 있었다. 윌슨은 하우스를 '분신'이라 불렀다.

   

이들 패거리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올드리치법안'의 이름을 '연밥준비법'으로 바꾸고 성탄절 사흘 전에 상정했다. 의회는 성탄절부터 연휴를 떠나도록 예정돼 있었다. 법안은 문구가 아주 애매해서 아무도 그 조항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

   

하우스는 모건 똘마니가 아니라 로스차일드 똘마니였다. 하우스는 국유본의 핵심 인사 중 하나였다.

   

국제유태자본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소설이 자주 등장한다. 시온의정서도 그렇고, 하워드 대령의 소설도 그렇고. 요즘은 소설쓰냐? 하지만, 이 시기에는 소설이란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대체 성경처럼 여겨진 면이 있다. 상당수 비밀결사 하부 조직이 문학모임, 독서모임에서 시작하였으니까.

   

하우스 대령에 대해 알아보자. 쑹훙빙 화폐전쟁에서 하우스 대령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신적 교주' 하우스 대령과 외교협회

   

워싱턴에서 진정한 통치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펠릭스 프랭크퍼터(Felix Frankfurter),미국 대법관

   

하우스 대령의 이름은 에드워드 하우스이며, '대령'이라는 칭호는 텍사스 주지사가 자신의 선거를 도운 하우스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붙여주었다. 하우스는 텍사스 주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 토머스는 남북전쟁 때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이었다. 일찌감치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하우스는 20세기의 미국 은행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조국으로 생각했으며, 영국의 은행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12년 하우스는 사학계의 강한 흥미를 유발하는 익명 소설 <행정관 필립 드루>를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그는 인자한 독재자가 미국 양당의 권력을 장악해 중앙은행을 설립한 다음 연방 누진 수입소득세 실시와 보호관세 폐지로 사회 안전망과 국제연맹을 세운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가 책에서 '예측'한 미래 세계와 훗날의 미국은 놀랍게도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다. 그의 '예견력'은 케인스와 맞먹는다.

   

 사실 하우스 대령과 케인스의 작품은 미래의 예언서라기보다 미래 정책 계획서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우스 대령의 책은 출판되지 마자 미국 상류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책에 소개된 미국 미래에 대한 예측은 국제 금융재벌들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졌다. 하우스 대령은 단숨에 엘리트 사회의 '정신적 교주'로 등극했다.

   

 191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간부들은 대선 후보를 지명하기 위해 하우스 대령에게 경선 후보 중 한 명인 윌슨을 '면접'하도록 했다. 하우스가 머무는 뉴욕의 호텔로 찾아간 윌슨은 한 시간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진작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만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윌슨의 말을 빌려보자. "하우스 선생은 나와 너무 비슷했다. 그는 독립된 또 하나의 나 자신이었다. 그의 생각은 나와 똑같았다. 내가 그의 자리에 있다면 그가 제안하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하우스는 정치가와 은행가들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월가 은행가들이 개최한 파티에서 하우스는 금융 거물들에게 '민주당이라는 나귀를 윌슨이 끈다면 결코 헛발질하지 않을 것'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쉬프, 와버그, 록펠러, 모건 같은 인물도 모두 하우스를 믿고 있었다. 쉬프는 하우스를 성경 속의 모세에 비유하면서 자기를 포함한 다른 은행가는 아론에 비유했다.

   

 윌슨은 191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버뮤다로 휴가를 떠났고, 이때 하우스의 <행정관 필립 드루>를 정독했다. 1913~1914년 윌슨이 내놓은 정책에서 입법에 이르는 대부분은 이 소설의 판박이였다.

   

 1913년 12월 23일에 미연방준비은행 법안이 통과된 후 월가의 쉬프가 하우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귀하가 이 화폐 법안 통과에 묵묵히 보내준 지지와 탁월한 공헌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민영 중앙은행 설립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완수한 하우스는 국제 사무로 주의력을 돌렸고, 구미에 폭넓게 퍼져 있는 인맥을 이용해 순식간에 세계무대의 중량급 인물이 되었다. "하우스와 뉴욕의 국제 금융재벌들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는 많은 금융기관과 은행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폴과 펠릭스 와버그 형제, 오토 칸, 헨리 모겐소, 야곱과 모티머 쉬프 형제, 허버트 리만 등이었다. 하우스는 유럽에서도 강력한 은행가 및 정치가 그룹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17년에 윌슨은 하우스에게 '조사'팀을 조직해 미래평화협의 제정 문제를 담당하도록 했다. 1919년 5월 30일,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조사 팀을 포함한 영국의 원탁회의 구성원들이 참가한 회의의 중심 의제는 '영국과 미국 엘리트의 역량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였다. 6월 5일, 이들은 또 다시 회의를 열고 조직 형식을 분리해서 통일적으로 협력하면 행동에 유리하다고 결정했다. 6월 17일, 하우스는 발기인의 자격으로 뉴욕에서 '국제사무협회'를 발족했다. 1921년 7월 21일, 하우스는 국제사무협회를 '외교협회(CFR)'로 개명했다. 조사 팀의 구성원을 비롯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미국 대표와 미연방준비은행 설립에 참여한 270명의 정계 및 금융계 엘리트들이 이 협회에 가입했다. 월가의 은행가들이 이를 위해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미국 사회와 세계 정치를 통제하는 데 열중하는 조직은 이렇게 탄생했다.

   

 윌슨 수하의 해군부 차관보로 있던 루스벨트도 하우스의 <행정관 필립 드루>를 읽고 느낀 바가 컸다. 책에 묘사된 '온화한 독재자'는 루스벨트의 훗날 모습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하우스는 백악관에 없어서는 안 될 참모가 되었다.

   

   

 루스벨트의 사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오랫동안 나는 루스벨트 스스로 그토록 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서 미국에 이익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디어나 정치적 '실탄'은 모두 외교협회와 세계 단일화폐를 주장하는 조직에서 '지급'받은 것이었다.

   

   

폴 와버그의 아들인 은행가 제임스 와버그는 루스벨트의 금융 고문을 지냈으며, 외교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1950년 2월 17일 상원의 외교관계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의 세계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말입니다. 유일한 문제는 이 세계정부가 과연 평화적인 공감대를 거치느냐 무력의 정복으로 형성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카고 트리뷴은 1950년 12월 9일 자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외교협회 회원들은 사회에 대해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 교육 배경의 우위를 이용해 세운 독보적인 지위로 이 나라를 경제 파산과 군사 붕괴의 길로 몰아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남은 지난 전쟁의 말라버린 피의 흔적과 최근 전쟁의 선명한 핏자국을 똑똑히 봐야 한다."

   

 1971년 루이지애나 주 하원의원 존 래릭은 외교협회를 이렇게 평가했다. "외교협회는 하나의 세계정부를 세우는 데 열중이다. 이들은 가장 큰 몇 개의 면세기금회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권력과 영향력의 결정판으로 금융, 상업, 노동, 군사, 교육, 대중매체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미국 헌법과 자유로운 상업 정신을 지키려는 좋은 정부의 국민이라면 이를 잘 파악해야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소중히 하는 이 나라의 뉴스 매체들은 그 동안 스캔들 폭로에는 매우 공격적이었으나, 외교협회와 그 회원들의 활동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외교협회는 엘리트 조직이다. 이 협회는 정부의 최고 결정권 층에 권력과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위로부터 아래로 압력을 가하며, 개인과 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을 통해 아래로부터 위로 압력을 행사한다. 이를 통해 주권을 지지하는 헌법공화국을 하나의 독재적 세계정부의 종속물로 만들 것이다."

   

 외교협회는 미국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 가운데 단 세 명만 빼고 모두가 이 협회의 회원이었다. 수십 년 동안 양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을 했는데도 정부의 정책이 그토록 일관성을 유지한 것은 외교협회 회원들이 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무장관은 1921년 이래 이 협회에서 도맡아서 배출했다. 미국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국가안보 고문은 대부분 이 협회에서 내정되었다. 그 밖에 외교협회는 국무장관(1949년 이래 모든 장관을 전담) 14명, 국방장관 11명, 중앙정보국장 9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외교협회는 곧 미국 엘리트의 '중앙당교'라 할 만하다. "일단 외교협회의 핵심 회원이 미국 정부의 특정 정책을 결정하고 나면 방대한 규모의 외교협회 연구기관이 즉각 행동을 개시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이성적이며 감성적인 논점을 제시해 정책의 설득력을 높임으로써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어떤 반대 의견에도 대처할 수 있었다.

   

 워싱턴 관가에 중요 인물이 결원될 때마다 백악관은 먼저 뉴욕 외교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외교협회 회원 중 거의 절반이 정부 요직으로 임명되거나 정부의 자문 고문을 맡았다고 전한다.

   

   

 외교협회 회원은 이미 3,600명이나 된다. 회원은 반드시 미국 국민이어야 하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은행가, 대기업의 임원, 정부 고위 관리, 매스컴의 엘리트, 저명한 대학교수, 최고의 브레인, 군대의 고급 장성 등이 주요 멤버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 정치 엘리트의 '막강한 핵심'을 형성했다.

   

 미국 메이저급 매체들의 '여론 주도'에 관해 살펴보면, 1987년 외교협회의 보고서가 262명에 달하는 기자와 미디어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회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정부의 외교 정책을 '해독'할 뿐 아니라 '제정'하기도 한다. 외교협회 회원들은 CBS, ABC, NBC, PBS 등의 TV 네트워크를 완전히 장악했다.

   

 신문 쪽으로는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보스턴 글로브>, <볼티모어 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의 주류 신문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외교협회의 영향권에 있는 잡지는 <타임>, <포춘>, <라이프>, <머니>, <피플>,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뉴스위크>, <비즈니스위크>,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리더스 다이제스트>, <포브스> 등이 있다.

   

   

 출판계로는 맥밀란, 랜덤하우스, 사이먼앤드슈스터, 맥그로힐 등 대형 출판사가 있다.

   

 미 상원의원 윌리엄 제너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독재로 가는 길은 완전히 합법화 되었다. 의회, 대통령, 국민은 이미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표면적으로는 헌법에 기반을 둔 정부처럼 보이지만, 우리 정부와 정치 체제에는 또 하나의 권력이 있다. 이 권력은 '엘리트들'의 관점을 대표한다. 그들은 우리의 헌법이 이미 케케묵은 것이라고 여기며 시간은 그들의 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국내외 사무의 결정권은 이미 민주와 공화 양당의 수중에 있지 않으며, 슈퍼 엘리트 그룹이 장악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부터 CFR 창설까지 빈틈없는 전략전술로 역사를 주도한 인물을 단지 모건 똘마니로 생각하는 건 하우스 대령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는 국유본 수뇌부에서 파견나온 국유본 핵심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시 '달러' 책을 인용하자.

   

"국가 통화는 합중국 조폐국에서 찍지만, 그것은 정부의 부채로서 발행되는 것이었다. 민간은행인 연방준비은행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빚이었다.

   

법안은 1913년 12월 22일 통과됐고, 윌슨 대통령은 이튿날 이를 서명해 발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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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의 연방준비법은 국제 은행가들에게 중요한 성과였다. 그들은 민간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한 세기 넘게 싸워왔다. 이 중앙은행은 정부 부채를 '화폐화'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가진 은행이었다. 이 법은 '연방준비은행들의 설립을 규정하고, 탄력적인 통화를 갖추며, 상업어음 재할인 수단을 제공하고, 미국 금융에 대한 효율적인 감독 체계를 수립하며, 그 밖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 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페드스피크(FedSpeak)의 시작이었다. 페드스피크는 모호함 속에 논점을 감추는 연방준비은행의 독특하고 추상적인 어법을 가리키는 용어다. 예컨대 앞에서 인용한 '탄력적인 통화'는 은행이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대출금을 의미한다. '재할인'은 미불 대출금을 만기 전에 재대출함으로써 은행이 자금을 요술이라도 부리듯이 뻥튀기하는 기술이다. ... 린드버그 의원은 이 법을 '당대 최악의 입법 범죄'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특혜다. 과거에 존재했던 정부가 일부 특권층의 손에 쥐어주었던 어떤 특혜보다도 뛰어나다. ... 금융시스템은 완전히 모리배 집단에게 넘어갔다. 이 시스템은 민간의 것이고, 남의 돈을 이용함으로써 생기는 이득을 가능한 한 최대로 늘린다는 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운용되는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했지만, 중앙은행을 얻기 위해 백 년동안 국유본이 싸워오지 않았다. 즉, 국유본이 19세기에는 미국에서 중앙은행을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보자. 어느날 오키나와가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국유본은 오키나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느끼나? 그보다는 당분간 일본이나 한국을 통해 오키나와 은행시스템을 관리할 것이다.

   

식민지 관리를 위해 영국에서만 중앙은행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허나, 국유본이 영국 단일 제국주의에서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과 같이 가는 제국주의를 결정하자 이들 국가에도 중앙은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각국이 각국 식민지를 관리해야 하기에.

   

이 점을 전제하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서의 중앙은행 설립이 이 시기 국유본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미국으로의 유럽 이민 등 미국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최고의 전략적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CFR 창설인 게다.

   

   

"월스트리트와 사상 최대의 금융권력 J.P.모건

   

강탈영주는 많았지만, 패거리의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J.P.모건과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존 D. 록펠러였다. 모건은 금융을 지배하고, 카네기는 철강을 지배했으며, 록펠러는 석유를 독점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의 금융 및 기업구조는 모건의 금융.수송회사와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에 의해 지배됐다. 그리고 이들 복합기업은 그들끼리 긴밀한 동맹을 맺었다. 겸직임원제를 통해 그들은 미국의 경제조직 거의 전부를 지배했다. ...

   

월스트리트 23번가에 위치한 모건의 은행은 '모건 하우스'로 알려졌는데, 수십 년 동안 미국 금융의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1920년에 폭탄이 이 은행 앞에서 터져 40명이 죽고 400명이 다쳤다. (나중에 이 미국 금융의 중심은 세계무역센터로 옮겨갔는데, 2001년에 또 다른 비극적인 공격의 표적으로 선택됐다)

   

20세기 초에 모건은 월스트리트의 신디케이트를 지배했다. 금융저술가 존 무디는 이를 '세계 사상 최대의 금융권력'이라고 불렀다. 모건은 22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100여 개의 법인을 지배했다.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1913년 <은행가는 어떻게 남의 돈을 쓰는가>라는 책에서 미국 경제에 가장 큰 위협은 '금융 트러스트'라고 썼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금융 트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힘센 은행을 세운 J.P.모건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영국의 로스차일드처럼 모건은 미국에서 비상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다. 모건의 똘마니가 통상적으로 국제 금융 회의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랫동안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를 그 자리에 지명하기 전에 J.P.모건의 법인 이사였다.

   

모건과 다른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자금을 받은 행운의 기업들은 자기 산업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이 모든 합병이나 취득에 꿔줄 돈이 어디서 났을까? 해답은 라이트 패트먼 의원 및 다른 세심한 관찰자들이 내놓았다.

   

강탈영주들은 빈 모자에서 돈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은행들은 결정적인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장부 기입'이라는 바닥 없는 원천에서 나온 돈을 계열 법인들에 '빌려'주는 것이다. 그런 뒤에 이 자금은 경쟁사들을 사들이고, 시장을 독점하며, 정치가들에게 기부하고, 의회에 로비하며, 여론을 조작하는데 쓰였다.

   

록펠러와 모건은 정치 무대에서 권력을 다툰 적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강력한 영국 금융업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록펠러는 체이스은행을 사들였는데, 그 자금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스차일드가로 연결된다. ... 1955년 록펠러의 체이스은행은 맨허튼사와 합병해 체이스맨허튼은행이 됐다.

   

모건가의 금융회사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50년대에 주니어스 모건(Junius Morgan)은 나중에 피바디 모건사가 되는 회사의 공동경영자가 됐다. 영국과 미국 사이의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런던의 투자회사였다. 남북전쟁 때 이 회사는 북부연합의 최고 재무대리인이 됐다. 주니어스의 아들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나중에 이 회사의 뉴욕 지점장이 됐다. 이 회사는 1895년에 'J.P.모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873년, 1884년, 1893년, 1907년의 금융 공황에서, 다른 은행들은 망해 나갔지만 모건의 은행은 언제나 어떻게든 자금을 구하고 살아남아 번성했다.

   

.....................

   

연방준비은행은 독립 조직으로, 민간이 소유한 법인이다. 이는 열두 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들로 구성되며, 이 지역 연방준비은행들은 여러 회원 상업은행들이 소유한다. 12개 연방준비은행 가운데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전체 연방준비은행 지분의 53%를 소유하고 있으며, 연방 재무부의 재무대리인으로 지정되어있다. 이 특권적 민간 은행의 최대 주주는 뉴욕 지구의 거대 상업은행들이다.

   

1997년에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그 3대 회원 은행이 체이스맨허튼은행, 시티뱅크, 모건보증신탁이라고 밝혔다. 2000년에 J.P.모건과 체이스맨허튼이 합병해 J.P.모건체이스가 됐다. ... 2004년 J.P.모건체이스는 뱅크원을 인수해 시티그룹(자산 1조2천억 달러) 다음으로 큰 은행이 됐다. 시티그룹은 록펠러 제국의 초석이다. ...

   

이렇게 록펠러와 모건 제국의 금융 토대인 시티뱅크와 J.P.모건체이스는 미국의 뉴욕 연방은행의 양대 주주다. 연방준비제도는 그것을 고안한 강탈영주들의 통제 하에 확실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워싱턴의 중앙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재무부 장관과 통화감독관이 참여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이사회는 열두개 지역 연방준비은행에 대한 통제권이 별로 없다. 그들은 대개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선도에 따른다. 그러므로 연방준비제도의 진짜 권력은 거기에 집중돼 있다.

   

지킬섬 회동 참석자들 중 한 사람인 벤저민 스트롱이 초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됐다. 스토롱은 런던의 금융권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의 이력은 모건 은행의 호의에 기댄 것이었다."

*출처: 달러(The Web of Debt) - Ellen Hodgson Brown저, AK(도서출판 이른아침)발행

   

인드라는 강조한 바 있다. 대부분의 음모론은 국유본에서 나온다고 말이다. 특히 출판된 책도 예외가 아닌 게다. 또한, 국유본의 음모론에는 비판이 국유본 다음 계획을 시사한다고 했다. 가령 IMF를 비판하는 스티글리츠가 주장하는 SDR 같은 것이 국유본의 다음 계획이라고 말이다. 다음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이전에 자신이 행한 일을 자료를 공개하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78%를 공개하고, 22% 계획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해서, 이 대목에서 브랜다이스에 알아보기로 하자.

   

"37) 노동운동의 아버지들=현상유지를 거부하는 유태인은 19세기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그대로 두고 볼수 없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했다. 미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노동운동연합(AFL)을 만든 사무엘 곰퍼스가 유태인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주 54시간 근무와 잔업수당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중 한명은 나중에 최초의 유태인 대법관이 됐던 루이스 브랜다이즈(1856-1941)였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협상, 불만처리, 중재등의 절차를 만드는 등 노동운동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구사했다. "

http://blog.naver.com/1kimjt/20001569077

   

한국경제신문 뉴욕주재기자인 육동인이 작성한 기사다. 인드라가 보기에, 이런 수준의 기사는 유태인들 검열을 받은 상태에서 작성한다고 보고 있다. 헌데, 이런 기사에서 등장하는 유태인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서, 인드라 흥미를 끌었던 것이 곰파스와 브랜다이즈다. 노동운동사 공부하면 알게 되는 곰파스. 과연 곰파스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가 알기 위해서는 인드라 블로그에서 '곰파스'라고 치면 된다. 인드라는 곰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곰파스는 평생 국유본을 위해서 살아왔을 뿐, 단 한 번이라도 노동자를 위해 산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데 앞장서온 병쉰색희이다. 

   

그러하기에 브랜다이즈가 궁금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제 2장, 1993년 9월 9일 목요일, 1:42 P.M. 7년 024일

……

   

[인용: 존 비티[John Beaty]의 책, "미국에 드리운 철의 장막[The Iron Curtain over America]"(1951년 12월 초판 간행, 1954년 4월 제 11쇄까지 발행), 제 3장]

   

[존 비티[John Beaty](1890-1961): 영문학자, 반공산주의 연구가. 1921년 콜롬비아대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19-1957년간 남부 감리 대학[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 정보장교로 근무--역주]

   

하자르인들, 민주당에 가입하다.

   

승리에 도취한 하자르인들[Khazars]('러시아 vs. 하자르' 참조--역주)은, 다른 공산주의 "전향자"들의 도움 속에, 이미 그들 앞에 굴복해 있던 러시아를 상대로 계속되는 "숙청"을 통해 자신들의 장악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수백 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은 즉각적인 살해로 또는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했던 강제 수용소에서 천천히 밀려드는 공포 속에 죽어 갔다. 이런 방식의 숙청은 이곳 미국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적어도 소비에트식 통치 방식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미가 있다면, 학살된 1,500만 명의 사람들은 그 명단과 카테고리에 따른 분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국제 공산주의 단체의 고위급 인사였으나 나중에 "스탈린주의[Stalinism]"를 포기했던 인물의 진술) FBI 비밀공작원 출신의 대학 강사인 매트 스베틱[Matt Cvetic]의 최근 언급에 따르자면, 당시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서른 살이 넘은 거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재-교육"을 시키기에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은 것으로 간주되어 학살되었다고 말한다. 구체 내역을 알고 싶다면, 텍사스 보거[Borger, Texas]에서 간행되는 '보거 뉴스-헤럴드[Borger News-Herald]'지에 편지를 써서, J.C. 필립스[J.C. Phillips]의 "우리는 빚이 있다[We Owe a Debt]"라는 기사(1952년 4월 16일자)의 재간행을 부탁해 봐야 할 것이다.

   

   

하자르인들은 공포 정치를 통해 러시아 국민들을 정복했지만, 이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들(하자르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서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미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우리 나라를 그들의 주요 목표물 중 하나로 정한 이 숙명적인 선택에는--비록 아직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단계에 접어들진 못했지만,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상호 호혜적인 자본-노동 관계, 엄청난 생산성, 그리고 높은 삶의 질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 독재정체가 미국의 공화정체보다 노동자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이 새빨간 거짓말에 대한 명백한 반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식" 민주주의(영국과 미국)는 공산주의의 확산에 끔찍한 방해물이며,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소련 지도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며, 특히 스탈린이 제 18대 공산당 의회에서 한 기조 연설(1939년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뚜렷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소련 정책의 공식적 선언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우리의(미국의) 개입이 있기 거의 3년 전에 나온 것으로, 조심스레 감춰지기 보다는 떠들썩하게 공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인력과 사무실과 부처를 보유한 국무부는 이 연설의 내용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식 민주주의"를 타도하려는 소련의 목표를 즉각적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대규모 미국 개척의 두 번째 이유는, 미국에는 이민 금지법 혹은 이민 규제법이 전통적으로 미비했으며, 또 이와 같은 이민법이 통과되었을 때에도 그 엄격한 적용은 등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의 불법적인 미국 밀입국은 이민 및 귀화청[the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이 직면한 가장 심각하면서도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불법 밀입국은 엄청나게 증대했다. 놀랍도록 많은 숫자의 외국인들이 불법적인 지위로 미국 내에 거주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1940년 발효된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약 5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등록되었다."('미국의 이민 및 귀화 체계', pp.629, 630)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개척의 세 번째 주요 이유는 미국은 거주 외국인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책이 부재한 나라로, 심지어 이들의 활동이 정부 전복을 지향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50년 수백만 명의 불법 밀입국자들 가운데 수백, 수천의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방할만한 적절한 조항이 없어서 그대로 다시 풀어주기도 했다.

   

앞서 제 2장에서도 보았듯이, 하자르계 배경과 전통을 가진 인물들은, 1880년과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사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이 있을 당시 미국에 입국했던 것이다. 1917년에는 소비에트가 러시아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경도된 동유럽 출신들의 불법 밀입국은 제 1차 세계대전 종전(1919년)과 이민 제한법이 통과된 1924년 사이, 5년의 기간 동안 정점을 이루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입국 기록을 남긴 이민자들의 수는 약 3백만 명에 달하며, 그들 중 다수는 동유럽 출신들이었다.

   

러시아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새로운 이민자들의 다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미국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서구 기독 문명에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러시아 지도자들의 실질적인 요원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 중 두드러지는 인물은 시드니 힐먼[Sidney Hillman](1887-1946, 미 노동계의 지도자로 미 합동 방직 노조[the Amalgamated Clothing Workers of America]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미국 산업별 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창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 미국 산업별 조합회의(CIO)는 이후 미국 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과 1955년 합병, AFL-CIO를 형성--역주)이었는데, 그는" 랍비(유태 율법) 교육"을 받다가(미국 인명사전[Who Was Who in America] 제 2권, p.254) 국제적인 수준의 정치 운동가로 변모했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시드니[Sidney]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22년 전, 아주 유사한 명령이 레닌[Lenin] 자신에 의해 미국 내 활동중이던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달되었는데, 당시 힐먼[Hillman]은 미국-러시아간 산업 협동 조합(뉴욕 14번가, 103E)[The Russian-American Industrial Corporation at 103 E. Fourteenth St., New York]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분명히 러시아에서 넘어온 하자르계 이민자들 가운데 실질적인 소비에트 요원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또한 하자르계 이민자들 모두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confirmed Marxist]인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의심없이 미국 전통의 관습을 따르기도 했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구성 비율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에 반하는 점들이 언급되거나 암시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이민자들은 앞선 시대의 이민자들과 비교해 봤을 때, 아주 상당 수의 사람들이 서구 기독 문명에 흡수되기를 거부하기로 결심한 자들이었으며, 또한 정치적 연대와 압력 행사를 통해 자신들만의 목표를 달성해 나가기로 마음먹은 자들이었다.

   

20세기의 첫 30년동안, 비기독교도였던 수백만 명의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공화당에 가입했다. 당시 공화당은 다수 정당으로서 가입을 위한 홍보활동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반면 민주당은 상황이 나빴으며 더 많은 지지자들이 필요했다. 1912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큰 표 차이로 당선되기는 했지만, 그 때 공화당은 윌리엄 호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지지층과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지지층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실제 투표수에 있어서 민주당의 윌슨은 태프트와 루즈벨트가 받은 표을 합친 것에 비교해 봤을 때 1,413,708표가 적었다. 사실상, 1892년(클리브랜드가 해리슨을 이긴 선거)부터 1932년(루즈벨트가 후버를 이긴 선거) 사이,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보다 많은 투표수를 얻었던 것은 단 한 차례로(9,129,606표 : 8,538,221표), 윌슨 대통령의 재선(1916년) 때였으며, 그 때 내건 슬로건은 "그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대선에서는 공화당이 항상 더 많은 표를 얻었다. 1904년부터 1928년까지 있었던 7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받은 투표수를 계산해 보면, 민주당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평균적으로 45%이상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더 많은 지지를 받을 필요성을 넘어, 당시 민주당은, 정치적인 성향을 띤 동유럽계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고, 또 이들 모두를 정당 서열상 높은 자리에 앉힐 수 있을만한 다른 특징도 가졌지만, 실상 그들 중 급진 좌파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던 소수만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공화당이 상당히 동일성을 띤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민주당은 여러 개 그룹의 집합이었다. 사실상 민주당은 '정치적 정당'이 전혀 아니었다. 대부분이 서로 서로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편의상 '동료'로 불리는 사람들 간의 결합이었다.

   

20세기 초반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크게 두 가지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남부 시골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톨릭 성향의 북부 도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물론 '서구 기독 문명'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공유하고 있긴 했지만, 그 밖에는, 공화당에 반대한다는 점(주로 이슈를 선점 당했기에)을 빼고는 정치적인 공통 분모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 내에는 1880년 이후로 점점 그 세를 빠르게 불려가는 제 3의 그룹도 있었는데, 이들은 동유럽계 출신들과 기타 "자유주의자들[liberals]"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대표적인 예는 루이스 뎀비츠 브랜다이스[Louis Dembitz Brandeis](1856-1941, 1916-1939년간 미 대법관 역임, 대법관 시절 '철도 독점 반대', '노동법 사수' 등의 입장 표명. 시오니스트 운동을 지지했으며,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 창설에도 기여--역주)가 될 것인데, 그는 프라하 혈통이자, 명문 하버드대 출신의 유태인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브랜다이스가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참신성을 띤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법관에 지명하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 자신의 법적 성향과 기타 가치관들에 따라 1916년의 미국을 이내 좌편향으로 몰고 갔다. 이를 통해 그는 민주당의 미래, 그리고 민주당을 통해 본 미국의 미래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유태 백과 사전[the Universal Jewish Encyclopedia]에 따르자면, 상원에서는 "브랜다이스의 '급진주의'"와 "그의 법적 소양 부족"에 대한 "역사적 투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특징들'에 대한 반감으로, 엘리후 루트[Elihu Root](1845-1937, 1905-1909년간 미 국무장관 역임--역주) 전 국무장관, 윌리엄 호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1857-1930, 1909-1913년간 제 27대 미 대통령 역임--역주) 전 대통령, 그리고 7명의 전직 미 변호사 협회[the American Bar Association] 회장들이 그의 대법관 지명에 반대했다.[하톤: 되돌아 가서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변호사 협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법관 지명 안은 1916년 6월 5일 상원에서 근소한 표차로 통과되었다. 이 날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날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최고위급 공직자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한 이익 기반이 미국 바깥에 있는 자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은 19세기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나아가 그는 법을 '선행된 사건들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물로 형성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법을 해석하는 자가 의도하는 일련의 결과들'에 맞춰서 법을 해석했다.

   

유태 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브랜다이스 대법관에 관한 글(Vol. II, pp.495-499)은 가능하다면 전체를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

   

세계 전쟁 동안, 브랜다이스는 각 나라의 유태 관련 사건들의 정치적 국면들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때 이후로 그는 유태인 관련 사건들에 관한 한 시오니즘을 자신이 추구하는 이익의 근저로 삼았다. 1919년 그는 정치적 이유로, 그리고 몸 담고 있던 기관상의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회, 경제적 활동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법관으로서 브랜다이스는 :

   

'미국중심주의'와 '소수 문화 또는 유태인들의 고향, 팔레스타인'과 같은 문제들 간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때면, 학문적 당혹감에 대해 결코 걱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적 '교리문답서[catechisms]'의 틀을 과감히 깨고, 주어진 모든 사건들의 '경제적인 의미들'을 철저히 그리고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가 가진 확신에 따르자면, 우리의 개별적인 철학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현대적 경제 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적절한 해결의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 작용적인 질서를 고찰했다. 브랜다이스는 헌법은 '자유로운 구조[liberal construction]'를 가져야만 한다고 느꼈다.

   

이것이 어쩌면 미국 법원들이, 재판을 통해 마치 입법 기관의 역할을 함께 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 출발점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윌슨은 미국의 제 1차 세계 대전 개입 결정을 내렸고, 이어지는 결과로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뒤따랐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계 혈통의 아들, 딸들의 희생이 컸는데, 그러한 결정에는 브랜다이스의 윌슨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으며, 이는 이집트 최고 집정관이던 헨리 맥마흔 경[Sir Henry Macmahon](1862-1949, 1915-1917년간 이집트 집정관 역임--역주), 그리고 이 지역 영국군 최고 사령관이던 알렌비 경[Field Marshal Lord Allenby](1861-1936, 1차 세계대전 동안 이집트 원정대를 이끌었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1917년과 1918년 각각 점령--역주)과 다른 여러 명의 공식적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지만, 윌슨 대통령은, 나중에 영국 정부의 다른 밀실에서 고안된 계획에, 이미 경도되어 있었다. 이 계획이 바로 '시오니즘'으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1863-1945, 1916-1922년간 영국 전시 내각 수반--역주) 영국 수상도 이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역시 윌슨과 마찬가지로, 몇몇 저명한 유태인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제 19권 p.4)에 '제 1대 리딩 후작'(과거에는 루푸스 다니엘 이삭스 경[Sir Rufus Daniel Isaacs](1860-1935, 유태인, 영국 정치인. 영국 하원의원, 법무장관, 대법원장 등 역임--역주)으로 표기)으로 설명되어 있는 인물이다. S. 랜드먼[S. Landman]의 논문, '벨푸어 선언의 비밀 역사[Secret History of the Balfour Declaration]'에 따르자면(벨푸어 선언 : 1차 세계 대전중인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태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한 것--역주), "마크 사이커스 경[Mark Sykes](1879-1919, 영국 보수당 정치인, 외교참모--역주), 와이즈먼[Weizmann](체임 와이즈먼[Chaim Weizmann]1874-1952, 벨라루스 태생의 유태인, 시오니스트 운동 지도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역임--역주), 그리고 소코로프[Sokolow](나훔 소코로프[Nahum Sokolow] 1859-1936,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시오니스트 지도자, 세계 시온의회 의장 역임--역주)간의 합의가 성립된 후, 영국 내각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는 일을 돕겠다는 내용의 비밀 메시지를 브랜다이스 대법관에게 보내기로 했다. 미국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동정과 지원 움직임이 활발하여 그 결과로, 미국이 급격히 친-연합국적 태도를 갖게 된 것에 따른 보답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벨푸어 선언의 기원"(1936년 2월 7일자, 유태 연대기[The Jewish Chronicle])이라는 기사 내용은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 정부 대표들"은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 개입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최고의,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약속해 줌으로서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합국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막강한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의 힘을 미국에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동원하고 뿌리내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윌슨 대통령이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조언을 가장 중요하고 여기고 있었기에", 시오니스트들은 그를 통해 미국의 전쟁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톤: 독자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오늘날 당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른 사건들에 대한 숙고 없이 그저 이 글을 단순히 읽고만 있다면, 당신들은 대단히 부주의한 자들일 것입니다. 누가 대통령이었으며, 어떻게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이 만들어 졌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퍼즐의 모든 조각들을 다 제시하고 있지만, 만약 당신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그저 "흩어진 조각들"만을 갖게 될 뿐이며, 전체 그림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헷갈린다구요? 물론 헷갈리겠지요.--그렇지만, 행위자들과 그들의 행동들에 관하여, 당신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수준까지 헷갈리게 만드는 건 이미 의도된 일입니다.]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윌슨 대통령에게 미쳤던 이 이상한 힘은 스테펜 와이즈[Stephen Wise](1874-194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으로 유아시절 미국으로 이민. 랍비, 시오니스트 지도자--역주)의 자서전인 '도전의 세월들[Challenging Years]'( 'G.P. 풋넴의 아들들[G.P. Putnam's Sons](출판사명--역주), 뉴욕, 1949년판)에도 여러 차례 나와 있다. 예를 들어 랍비 와이즈는 "윌슨이 한 선택들에 대해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만큼, 그의 이 과도한 브랜다이스 의존 경향은..."이라고 썼다. 그리고 독립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의 대통령'이 한 놀랄만한 언급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랍비 와이즈가 시오니즘과 미국 유태 의회[American Jewish Congress]의 제 1차 회의 소집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게 언제가 되든, 당신과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내가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오면, 내게 말해 주시오. 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소."

   

이러한 진술들의 진위 여부는, 인용을 따온 정보 소스가 기록으로 잘 남아 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윌슨 대통령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제 1차 세계 대전에 관한 비밀 문서들이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될 때까지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윌슨 대통령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의 '내밀한 의도'가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처럼 '유럽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방식의 전쟁 수행은 끝없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유혈이 낭자한 승리와 평화 정착의 실패는,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 미 제 26대 대통령(1901-1909)--역주) 시절, 드라마틱하고 성공적인 러일 전쟁(1904-1905) 종결(개입보다는)(테오도르 루즈벨트는 양국 사이를 중재, 포츠머스 조약(1905년)을 이끌어 내었으며, 19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역주)'과 더 큰 대조를 이루었다.

   

윌슨 대통령의 8년간의 통치 이후, 민주당은 1920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어지는 12년(1921년 3월 4일-1933년 3월 4일)동안 민주당내 3가지 다른 그룹들--남부 프로테스탄트, 북부 카톨릭, 그리고 브랜다이스 스타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다음 번의 승리와 이에 수반하는 권력을 기약하며, 서로 협조적이었던 지도자들을 매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민주당의 지도자들은 아직은 주로 남부 프로테스탄트와 북부 카톨릭계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아주 약삭빠르게도, 당내에서 동유럽계 이민자들의 구성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서로 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20세기 들어 동유럽계 이민자들은 발빠르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민주당에 가입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모두는 '이 낯선 동료들'에게 익숙해져 갔으며, 대부분 비-기독교계였던 이 제 3의 세력은 그러한 가운데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잠깐만 한가지 살펴보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플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제 1기 시절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민주당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것은 아마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이었던 바이어드[Byrd](해리 F. 바이어드[Harry F. Byrd], 1887-1966, 언론인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 1933-1965간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역임--역주)의 언급이 될 것이다. 1951년 11월 1일 알라바마주 셀마[Selma Alabama]에서 한 연설에서, 그는 민주당을 "트루만주의를 추종하는 이질적인 사람들의 군집[heterogeneous crowd of Trumanites]"이라고 묘사했다. 이에 더해, 그는 "모호한 기원과 무책임한 방향성, 그리고 약탈적 목적성을 띤 민주당이 과연 정당이라 불릴 수 있을 지 의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사실상 소수 정당의 대표였던 우드로우 윌슨은 공화당의 심각한 분열로 인해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주로 해외로부터의 지속적인 보강을 통해 구성된 동유럽계 "제3 세력",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은, 민주당을 소수당에서 다수당의 지위로 끌어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몇몇 외국인 출신의 지도자들, 또는 외국인과도 같은 성향을 가진 자들은, 민주당의 승리에 대한 그들의 기여에 대해, 특별한 방식의 보상을 받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들이 그 대가로 얻어 낸 것은, 미국 국민들로부터 주의 깊게 숨겨졌고, 심지어 같은 동유럽계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비중이 낮은 다수의 인물들은 배제되었던 것으로, 바로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러한 목적 달성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쉬운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선거 방식 아래에서는 한 주 전체를 대표하는 투표수가 해당 주에서 다수 표를 얻은 후보자에게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미국에서는 메인주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 48개주에서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선출--역주) 오랜 전통의 주에서는 대체로 공화당 지지 주민과 민주당 지지 주민이 반반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지만, 잘 조직화된 소수가 역량을 발휘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유태인 비율이 아주 높은 주로는 뉴욕,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뉴저지, 매사추세츠,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미시건이 있다. 물론 이들 주들이 바로 다수의 선거인단을 보유한 대단히 "의심스러운" 주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프랭클린 들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당선되어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 때, 오랜 전통의 민주당원들은, 그들이 남부 프로테스탄트계이건 북부 카톨릭계이건 간에, 댐, 다리, 정부 청사 등의 건설 그리고 기타 각지에서 정부 재정 지원하의 프로젝트들을 추진하길 원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 또는 그들의 동료들과의 계약을 원했다. 그들은 또한 연방 판사 등 안정적 임기를 보장하는 직위들의 일부를 할당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전통의 민주당원들 가운데, 그 어느 그룹도 "외교"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잘 아는 지도자나 또는 어학에 뛰어난 지도자들을 많이 보유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 어떤 그룹도, 그저 원만한 수준의 이익 기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당내 동유럽 출신자들에게, 워싱턴 정가에서 준-각료에 이르는 직위를 할당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기독교 동유럽 출신의 민주당원들이 만들어 낸 첫 번째 가장 놀랄만한 승리는, 루즈벨트 취임 이후 채 9개월이 지나지 않아 찾아 온 것으로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승인한 일이었다. 윌리엄 라 바레[William La Varre]는 미 재향군인회보[the American Legion Magazine](1951년 8월호)에 "미국 역사에 있어서 모스크바의 붉은 편지의 날[Moscow's RED LETTER DAY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제목의, 사실에 입각한 장문의 글을 썼는데, 이 글에는 미국 외교 정책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설명들이 들어 있다. 라 바레에 따르자면 당시 미국 외교는 "음흉한 미소의 리트비노프[Litvinov](Maxim M. Litvionv, 1876-1951, 러시아 혁명에 참여, 소련 외무장관(1930-39), 주미 소련 대사(1941-43) 역임--역주)"와 "모두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1882-1965, 비엔나 태생으로 12세 때 뉴욕으로 이주, 미 대법관(1939-1962) 역임--역주)의 수하들인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1891-1967, 미 재무장관(1934-1945) 역임--역주) 그리고 딘 애치슨[Dean Acheson](1893-1971, 미 국무장관(1949-1953) 역임, 1950년 1월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 6.25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애치슨 선언'으로 유명--역주)"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도, 리트비노프의 태명은 월렉[Wallach]이었고, 그는 또한 핀켈슈타인[Finkelstein]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라 바레가 거명한 4명 가운데 3명이 이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로 모두 비-기독교 동유럽 출신들이었다. 네 번째 인물인 딘 애치슨은 "프랑크푸르터의 부하[Frankfurter boy]"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루이스 D.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 대법관의 법률 서기로 근무"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터 부하들" 가운데 주요 인물이었던 애치슨은 아메리칸 머큐리[American Mercury]지(뉴욕주, 뉴욕 16, 이스트 36번가 11번지[11 East 36th Street, New York 16, N.Y.]) 1952년 4월호[하톤: 이 잡지는 오래된 잡지로 이 주소는 맞을 수도 있고,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당신이 도서관에서 정확한 "판본"을 찾거나 하는 일에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에 실린 메인 기사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이 글의 저자인 펠릭스 위트너[Felix Wittner]는 기사 일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자유라는 대의'에 해를 끼친 애치슨의 기록은 최소 19년 전, 그러니까 그가 스탈린으로부터 급료를 지급받는 미국 변호사로 활동할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애치슨은 심지어 소련이 미국에 의해 승인되기 전부터도 스탈린의 급료 지불 명부에 들어 있었다.[하톤: 멈추십시오! 가서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부탁합니다.]

   

라 바레가 쓴 기사는 다른 어떤 글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글에서 F.D. 루즈벨트가 어떻게 라틴 아메리카를 배신하여, 공산주의가 이 곳에 뚫고 들어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련 정부 승인'이라는 기본적인 사항을 염두에 둔 채, 다음 중요한 인용 글을 보기로 하자. :

   

[인용 : La Varre]

   

바로 모스크바의 특수 요원이자, 붉은 광장의 악명 높은 국제 조직[Red Square's nefarious international machinations]의 정치 위원[Commissar]이며, 미 대륙 공산화라는 크렘린 계획의 총 책임자였던 루즈벨트는, 한 밤 중, 백악관 미국 대통령 좌석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지난 기만의 14년 동안, 붉게 물든 크렘린은, 미국 내에, 외교 면책 특권으로 보호받는 공산당 전진기지를 만들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4명의 대통령들--윌슨[Wilson], 하딩[Harding], 쿨리지[Coolidge](1872-1933, 미 제 30대 대통령(1923-29)--역주), 그리고 후버[Hoover]--이 모스크바의 무신론적 사상 또는 그 매개물을 수용하는 일을 거부했다. 그러나 여기 마침내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대통령이 나타났던 것이다.

   

유서 깊은 국무부, 미 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 그리고 미 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등에 소속된 많은 애국자들과 저명 인사들은 미국을 새로이 이끌게 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사악하고, 위험하며, 무신론에 기반한 '손님'을 받아들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주지 말 것을 탄원했다.--소련에서 오는 '손님'과는 악수도 하지 말고, 자국민들의 피로 붉게 물든, 모스크바로 되돌려 보낼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자신의 새로운 권위에 대한 도전에 분개했으며, 지식인들이자 자유주의자들인 양 행동하나 실상 막시즘과 파비언 사회주의(혁명보다 점진적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운동--역주)를 신봉하는 자들--그리고 과격 노조, 대학, 아첨하는 관료들--의 주장에 보다 경도되어, 크렘린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안에 결국 서명했다. 의회 승인도 없이, 그는 미국내 공산주의 대사관과 영사관들의 설립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소련과 체결하여, 완전한 외교적 환대과 특권을 '스탈린의 요원들[Stalin's agents]'과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들에게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1933년 11월 16일(미소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역주)--한 밤 중! 이 날이야말로 미국 역사상, 우리 후손들이 오랫동안 겪게 될 비극의 원인이 제공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 날은 바로 에스토니아의 약탈자이자 영국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크렘린이 파견한 첫번째 요원이기도 했던, 소련 외교부 정치 위원, 막심 리트비노프[Maxim Litvinov]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함께 미 국민과 우리의 광대한 자원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국가적 재앙이자 전 세계적 재앙의 가장자리로 몰고 가게 될 계약, 사회,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게 될 계약, 바로 딘 애치슨과 헨리 모겐소가 이미 철저한 예비작업을 해 두기도 했던 계약을 맺게 된 날이었다...

   

크렘린과 거래할 경우 미국이 갖게 될 불리한 점들에 대해, 가장 잘 요약된 사실 자료들, 폭넓은 분석들, 경찰 기록들, 그리고 군사 정보들이 워싱턴에 자발적으로 몰려 들었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루즈벨트는 헨리 모겐소와 딘 애치슨, 둘 다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부하들이기도 했던, 이들에게 소련과 미국간의 교역 기회에 대한 "연구"를 맡겼으며, 소련과의 "우의"로부터 미국 국민들이 얻게 될 이득에 대해 설명한 그들의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이에 대해 칭송해 마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자면, 소련의 지속적인 표리부동적 태도를 폭로하는 문서들을 수령했던 코델 헐[Cordell Hull](1871-1955, 1933-44간 미 국무장관 역임--역주)은 모스크바에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맺은 외교관계를 철회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루즈벨트는 미 국무부의 "재조직"을 시작했으며, 반-공산주의 이력을 가진 관료들을 --멀리 떨어진 고립된 직위로-- 좌천시켰다.

   

1933년 11월 루즈벨트-스탈린 계약은, 비단 국가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 전반에 걸쳐 보더라도 너무나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갖게 된 손실과 부채들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향후 수 세대에 걸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크렘린이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갖게 된 이득과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는 1951년인 이제 와서야--우리의 수도에 소련 대사관이 설치되고, 그들의 비밀 요원들이 전 미국을 돌아다니게 된 지 18년이 지난 이제 와서야-- 겨우 국민들이 인식하게 되었다.[하톤: 학생들이여, 당신들은 아직도, 당신들 사랑스러운 미국인들을 괴롭히는 소련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글은 이미 40년도 넘은 글입니다!]

   

악마를 칭송해 온 미스터리한 우호관계를 통해, 그리고 기만과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미국적 타협[un-American compromises]을 통해, 우리는 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시대를 보내 왔다. 당시의 지도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죽었으며, 그들 무덤의 기념비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 위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을 잇는 다른 이들이, 다시금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죽은 자들이 누렸던 전략적 직위에 올라서는 일이 계속 허용되어 왔다.

   

[인용의 끝 : La Varre]

   

라 바레가 미재향군인회보에 실은 기사에서 묘사된 형태의 정부 아래, 다수의 새로 도착한 이민자들, 최근에 귀화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동료들이, 지명에 의해, 혹은 임용 시험을 통해, 국무부에, 대통령 보좌직에, 그리고 기타 여러 정부내 민감 직위에 침투해 들어 왔다. 이 기간 워싱턴에 둥지를 튼 자들 가운데는 단지 동유럽 출신의 좌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원래의 미국인들 가운데 사실상 공산주의로 전향한 자들, 또는 아예 공산당에 가입한 "변절자들"도 있었다. F.D.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항상 근심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이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에 대해서는 늘 확고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전 하원의원이자, 원내 비-미국적 행위 조사 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1969년 국내 안보 위원회로 개명되었다가 1975년 폐지되면서 기능이 법제사법위원회로 이관--역주) 위원장이었던 마틴 다이스[Martin Dies](1900-1972, 텍사스 출신 민주당 소속 하원 의원(1931-45)--역주)는 여러 차례 연설(그 중 한 번은 저자인 내가 직접 듣기도 했다. 1950년)을 통해 다음 사실을 증언했다. :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소환되어 몇 번이나 백악관에 불려 갔으며--루즈벨트는 큰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 때마다 '공산주의자들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다이스의 완고한 태도에 대해, 루즈벨트가 제시한 최고의 논거는 "우리는 그들의 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유사한 주제에 대한 다이스의 연설(1951년 5월 17일)은 미국 유산(헤리티지) 보호 위원회[the American Heritage Protective Committee]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다.[하톤: 이건 헤리티지 재단[The Heritage Foundation]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위원회는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 601 베델 빌딩[601 Bedell Building., San Antonio, Texas]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백악관이 정부내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한다'는 제목의 다이스의 또 다른 연설은,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헤롤드 H. 벨드[Harold H. Velde]가 작성한 의회 기록물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 정부는 앞서 서술한 동유럽계 이민자 그룹과 공산주의에 물든 자생적 미국인들로 구성된 "위험인물들"에 의해 침투당했지만, 이들이 다는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소위 말하는 "망명자들"이 즉시 미국에 도착했고, 이들은 '행정 명령'에 의해 정부내 민감 직위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시민권 취득이라는 공식 절차 없이, 그리고 그들이 유럽을 떠난 이유에 대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침투는 '행정 명령'을 통해 원활히 이루어 졌는데, 특히, '인종, 신념 또는 출신 국적'에 따라 고용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러한 행정 명령의 주된 근거로 사용되었다.

   

먼 유럽의 적대적 지역에서 온 망명자들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미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 가운데는 소련에 동정적인 정서를 가진 자들도 많았기에, 이들의 공직 고용을 허용하는 행정 명령은, 잠재적으로, 그리고 여러 측면에 걸쳐 보았을 때, 너무나도 역력한, 국가 안보에 대한 치명타가 될 일이었다.

   

거의 '보안에 반하는 더블 체크'의 일환으로, 새로운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대한 보안 유지 임무는 F.B.I의 전문가들 손에 맡겨진 게 아니라, 원자력 담당 관료, 자신들에게 맡겨졌다. 이 문제에 관한 그들의 상대적인 경험 부재와, 또 외국인들의 관료 고용에 대단히 관대했던, 놀라운 '행정 명령'에 비추어 봤을 때, 비밀 원자 폭탄 기술 도난 사건에 대해서는 원자력 담당 관료들 보다가는 차라리 이들을 그 자리에 임명한 "중도좌파" 행정부가 비난을 받아야 할 문제였다. 원자폭탄 비밀을 알아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가운데는 유명한 외국인인, 영국 출신의 클라우스 푸흐스[Klaus Fuchs](1911-1988, 이론물리학자, 미, 영, 캐나다 공동, 원자폭탄 연구(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비밀을 빼돌려 소련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스파이--역주)--그러나 그는 영국 태생이 아니었다--가 있었다. 다른 원자력 스파이들도 모두다 외국인이거나 혹은 외국인들과 연계된 인물들로 모두 이미 예전부터 거명되던 인물들이었다.

   

원자력 에너지 연구에 고용된 자들 다음으로, 어쩌면 '미국 공공 건설 근로자 연맹[the United Public Workers of America]'에도 미국 국방에 치명적인 비밀을 훔쳐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주어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맹에는 다수의 동유럽 출신자들,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파나마 운하 건설의 책임 관리자였던 레오나르드 골드스미스[Leonard Goldsmith]와 로버트 바인슈타인[Robert Weinstein]도 있었는데, 둘 다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된 인물들이었다. 이 연맹--주요 조직이 워싱턴에 있었다--은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지배적이라는 이유로 C.I.O.(미국 산업별 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역주)에서 쫓겨 났다(1950년 3월 1일). 그렇지만 만약, C.I.O가 소속 회원들을 보호해 주듯이, 미국 정부가 이 단체를 보호해 주었더라면, 이 사실은 본 저자의 주목을 피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유럽 이민자들의 미국 정부 내 침투는 점점 더 부풀어 올라, 급류를 형성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으며, 또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목표에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정확히 그 반대가 참이라고 언급하거나 암시하지도 않아 왔다. 저자의 목적은, 동유럽 출신의 사람들 또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근간을 형성하던 시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최근에 와서, 그들은, 루즈벨트-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 내에서 가장 전략적인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 정책 형성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종종 결정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실 W.M. 키플링[W.M. Kiplinger]이 자신의 책, '워싱턴은 저것과 같다[Washington is like that]'(하퍼 & 브라더스[Harper & Brothers]사, 1942년--역주)에서 처음 끄집어 낸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는 '워싱턴에 있는 유태인들에 관한 사실들[The facts about Jews in Washington]'이라는 글에서, 이 내용을 요약해 두었는데, 이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은 1942년경, 재무, 인사 그리고 법무와 관련된 정부 각 부처와 기관에서 그 수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내 비-유태계 관료들이 대통령의 명령 아래에서" "다양한 정부 기관에 더 많은 유태인들을 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동유럽 출신, 또는 그 기원와 이데올로기에 있어 동유럽계 인물들의 영향력은,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활동하던 때에 정점에 달했다.(그 이후로도 죽 계속되었다.) : (1951년 중반까지)미국의 대유럽 정책을 주도했던 밀턴 카츠[Mr. Milton Katz](1907-1995, 하버드대 법학 교수(1940-78), 1933년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정책 시행 당시 참모 역할을 했으며, 진주만 사건 이후에는 '전시 물자 생산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 1950년에는 유럽 재건 문제에 깊이 관여--역주) ; 미국 육, 해, 공군의 인력 수급을 책임졌던 안나 로젠버그[Anna Rosenberg](1902-1983, 전시 인력수급 위원회 위원장(1942-1945), 미 국방 차관보(1950-1953) 등 역임--역주) ; 군수물자 관리 책임자였던 맨리 플레이셔먼[Manly Fleischman](1908-1987,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전시 물자 관리 책임관으로 임명, 1952년 주 인도네시아 대사 역임, 1969년에는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가 '공공교육 주립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역주) ; 그리고 임금 안정화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나탄 P. 파인싱어[Nathan P. Feinsinger](1951년 8월 30일자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1902-1983, 위스콘신대 법학교수, 국가중재위원회 위원장(1943-44), 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1945-47), 임금안정화위원회 위원장(1951-53) 등 역임--역주). 마찬가지로, 1948년 10월, 트루먼 대통령은 뉴욕 출신의 변호사이자 '국가 유태인 복지 위원회[the National Jewish Welfare Board]' 의장이었던, 프랭크 L. 웨일[Frank L. Weil]을 "군대 내 종교, 도덕 관련, 복지 정책 지도 위원회[committee on religious and moral welfare and character guidance in the armed forces]" 위원장에 임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하자르계[Khazar] 또는 유사한 배경이나 연관성을 가진 인물들이 영국 사회주의 소수파 정부 내에서도, 레옹 블룅[Leon Blum](1872-1950, 중도좌파 정치인, 3차(1936-1937, 1938.3-1938.4, 1946-1947)에 걸쳐 프랑스 국무총리 역임--역주)을 필두로 한 프랑스 정계에서도 눈에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엠마누엘 신벨[Rt. Hon. Emanuel Shinwell](1884-1986, 애틀리[Attlee] 노동당 정부하 국방장관(1950-51) 역임--역주)과 쥘 모끄[Jules Moch](1893-1985, 프랑스 제4공화국(1946-58) 당시 8차례에 걸쳐 장관 역임, 공공 건설 및 교통장관(1945-47), 내무부장관(1947-1950), 국방장관(1950-1951) 등--역주)--패탱 장군[Marchal Petain](1856-1951, 프랑스 비시[Vichy] 정부(2차 대전 당시 독일과 협력) 당시 국가 수반(1940-44)--역주)의 적--가 그들로, 이들은 최근 각각 영국과 프랑스 내각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 미국에서 비-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자들이 민주당에 가입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벨은 영국에서 좌파 노동당에 가입했다. 1951년 여름, 영국 하원에서 노동당 의원들 가운데만 21명의 유태인들이 있었으며, 보수당 의원들 가운데는 없었다.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 영국 노동당 당수(1935-55), 총리--역주)는, 그의 인종적 배경이 어떻든 간에, 오랜 기간 영국 "노동"당["Labor" Party] 당수이자 사회주의 총리(1945-1951)로 활동하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인물[a Communist sympathizer]로 여러 해 동안 국제적인 악명을 날렸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 공산주의 연대[the international Communist force] 병력의 일부로 참전한 "영국 부대[English company]"를 방문하고, 그들을 칭송했다.

   

높은 직위나 전략적 직위 또는 양쪽 모두에 걸친, 동유럽 출신 또는 배경을 가진(또는 그러한 배경의 인물들과 관련된) 몇몇 인물들은, 그들이 가진 유명세로 인해, 저자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거론되었으며,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도 다시 거론될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한가지--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들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없으며, 또 그렇게 여기는 것이 일부러 의도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하톤: 아직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국회의원들와 여러 참모진들, 기타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그 의도에 있어서 하자르계 시오니스트들[Khazarian Zionist]이며,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까? 미국 국회는 통제되고[CONTROLLED] 있습니다. 독자들이여--당신이 선한 자이건, 악한 자이건, 혹은 다른 그 무엇이건 간에. 나아가, 미국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적 가치 아래 탄생한 국가이지만, 당신들의 국회는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Christian" stance]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미국이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퇴폐 국가가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도덕은 "남부"로 내려 갔습니다. 어제 내가 "아메리카[America]"는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나라는 '타락의 국가[state of degradation]'가 되었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명 미국인들 목록 가운데, 어떤 목록에서든 처음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비엔나 태생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여야 할 것인데, [하톤: 잘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이 글은 1951년에 쓰여졌으며, 그간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고위직에서의 조작과 대체는 끝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는 20세기 중반, "청교도주의 혈통"이 유지되던 자리를 '빛나는 하버드 대학의 광채와 상징'으로 대체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버드 법대 교수직을 그만둔 후, 프랑크푸르터 박사는 대법관이 되었으며, 법률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걸쳐서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이 나라의 국가 정책 결정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전 분야 걸쳐서 최고 수준으로 발휘되었다. 카톨릭 월드지[The Catholic World] 편집장인 존 P. 시어린 목사[Rev. John P. Sheerin]는, "나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가 다른 누구보다도 워싱턴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고 썼으며, 시카고 트리뷴[The Chicago Tribune]지를 소유한, 장로교파의 로버트 R. 맥코믹 대령[Robert R. McCormick] 역시 유사한 견해를 표명했다. 사실상,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미국의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언급된다. "당신은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사진을 보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이후, 프랑크푸르터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유머"이기도 하다.[하톤: 일종의 빌러리[Billaries] 같은 것인가요?(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영향력을 의미--역주)]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참모로서만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전략적 지위에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들을 지명하는 일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위 말하는 "프랑크푸르터의 부하들[Frankfurter's boys]"에는, 날씨가 좋으면 항상 같이 산책을 하곤 했던 애치슨[Mr. Acheson]을 포함하여 ; 앨저 히스[Alger Hiss](1904-1996, 변호사, 1933-1946년간 미 법무부, 국무부 등에서 근무, 1948년 소련 스파이로 판명--역주) ; 리 프레스먼[Lee Pressman](1906-1969, 노동 변호사, 1933-1936년간 미 농무부, 공공산업진흥국, 중재위원회 등에서 근무--역주) ; 장기간 트루먼 대통령의 고위 참모로 일했던 데이비드 닐스[David Niles](1988-1952, 1942-1951년간 루즈벨트 정부와 트루먼 정부에서 연달아 정치 참모로 근무--역주) ; 장기간 국무부 참모로 일했던 벤자민 V. 코헨[Benjamin V. Cohen](1894-1983, 1933년 뉴딜정책 시행 시기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정부 참모로 근무--역주) ; 장기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데이비드 릴리엔탈[David Lilienthal](1899-1981, 테네시 개발 기구[Tennessee Valley Authority](1941-46) 및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1946-50) 위원장--역주) ; 존 J. 맥클로이[John J. McCloy](1895-1989, 국방차관보(1941-45), 세계은행 총재(1947-49) 등 역임--역주) ; 조 라우[Joe Rauh](1911-1992, 미국 인권변호사--역주) ; 나탄 마르골드[Nathan Margold](연대미상, 변호사, 루즈벨트 정부 시절 내무부 법무 참모--역주) ; 앨저 히스의 동생이자 "현재 애치슨 법률 회사 간부[now a member of the Acheson law firm]"로 있는 도날드 히스[Donald Hiss](1906-1999, 1936-1945년간 국무부에서 근무--역주) ; 밀턴 카츠[Milton Katz](1907-1995, 1940-78년간 하버드 법대 교수--역주) ; 그리고 전직 국방장관이자 "100% 프랑크푸르터의 사람"인 로버트 패터슨[Robert Patterson](1891-1952, 1945-1947년간 미 국방장관 역임--역주) 등이 있었다.(이 단락에서 인용된 모든 인물들은 드루 피어슨[Drew Pearson](1897-1969, 미국 저널리스트--역주)의 칼럼(1950년 2월 1일자)에서 따온 것이다.)

   

막강한 힘을 누렸던 정부 관료 중에는 러시아 태생의 이사도르 루빈[Isador Lubin](1896-1978, 경제학자, 대통령 경제정책 보좌관--역주)도 있었는데, F.D.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계 수치 해석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종종 그를 부르곤 했다.("루브에게 보내[Send for Lube]"에서 인용) ; 이어서 그는 UN에서 미국을 대표하기도 했다. 또 한 명의 러시아 태생 관료였던 레오 파스볼스키[Leo Pasvolsky](1893-1953, 경제학자, 국무부 근무, 전후 계획 입안, UN 헌장 초안 작성 등에 중요 역할 담당--역주)는 국무부에서 장기간 요직을 두루 맡았는데, 1944년에는 "전후 프로그램 위원회, 집행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5-46년간에는 "국제 기구와 안보 문제"를 담당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아주 가까웠던 다른 인물들 가운데는 사무엘 로젠먼[Samuel Rosenman](1896-73, 변호사, 판사, 민주당 정치인--역주)도 있었는데, 그는 "특별 참모"로 여러 차례에 걸쳐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는 재무장관으로서 악명높은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독일 산업의 잠재력을 말살시키려는 계획이었으나 미실현--역주)의 입안자였다. 허버트 레만[Herbert Lehman](1878-1963, 민주당 정치인, 뉴욕주지사(1933-1942)--역주)은 1943년에서 1946년간 UN 구제부흥국(UNRRA)[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사무총장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조달되었던 기금(주로 미국으로부터 조달되었다.)의 대부분은,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결과에 따라 이내 소련 위성국이 되고 말 국가들을 돕는데 전용되었다.

   

최근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내 전략적 직위들은 동유럽 출신 인물들, 또는 이들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조하는 인물들이 차지해 왔는데, 대개 각 부처 차관보급[Assistant Secretaryships] 인사들이 그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국방성, 법무부(관세청과 법무차관 사무실), 노동부의 민감 직위들에는 현재 이들이 재직 중에 있다. 주지사급 직위도 이들의 중요한 전진기지인데, 특히 알래스카(러시아로부터 3마일 떨어져 있다.)와 버진 제도[virgin Islands](파나마 운하가 근접해 있다.)(총독 관할--역주)가 그러하다. 기타 미 대통령 행정부[the 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주요 직위들 ; 국제 무역 및 지원 기구내 직위들 ;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직 ; 그리고 UN내 미 대표단 전체를 망라한 직위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유럽 출신 또는 이들과 연계된 인물들의 수는, 미국내 그들의 전체적인 인구 구성비에 비교해 봤을 때, 우리 정부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임명직 직위'에 있어서, 그 비율이 깜짝 놀랄 만큼 높다. 반면, '선출직 직위'에 있어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 구성비에 비추어 봤을 때, 깜짝 놀랄 만큼 낮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미국내 전략적 직위에 있어서 동유럽 출신 또는 이들과 연계된 인물들이 높은 비율로 '임명'되어 있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떤 통제력이, 어떤 통제적 의지[controlling WILL]가 여기 반영되어 있는 것인가?

   

[인용의 끝: John Beaty]

   

하톤: 그렇습니다. 이 글은 깁니다. 그러나 국민들이여. 당신들 전체의 생존이, 지금껏 당신들의 정부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정부는 지금, 새로운 미국 헌법[New States Constitution](피닉스 저널 제 15권 참조--역주)을 통해, 그리고 UN 단일 세계 질서[the United Nations One World Order]를 통해, 당신들을 완전히 통제하려 드는 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생존"을 위해 남겨져 있는 유일한 것은, 이제 당신들의 '결정'일 뿐입니다.--헛간의 문은 이미 잠겼습니다. 가축들은 달아났고 당신들만 남았으며, 이제 헛간은 불타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옳은 길을 가십시오. 그리고 준비되어 있기 바랍니다!

   

Salu.

   

   

피닉스 저널 제 78권, "The Iron Trap Around America" 제 2장, pp. 11-28.

http://phoenixjournals.wavenews.net/content/94-제078권-하자르계-유태인들의-미-정부-침투사

   

   

 물론 인드라는 피닉스저널에 대해서도 78 : 22로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피닉스저널도 국유본의 촉수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피닉스 저널의 브랜다이즈 기사를 올린 것은 일단 브랜다이즈에 대한 주류 평가가 광란적일 정도로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두 가지 지점에서 브랜다이즈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하나, 브랜다이즈를 유명하게 한 것이 뉴헤이븐 철도 싸움이었다. 이때, 상대는 놀랍게도 모건이었다. 결과는 브랜다이즈의 승리. 모건 측은 뉴헤이븐 철도 담당자를 해임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 보면, 풀뿌리 싸움인 듯하지만, 그 이면은 그렇지 않다.

   

바로 이 시기 브랜다이즈는 평범한 유태인이 아니라 평범한 법조인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 윌슨과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윌슨의 경제 자문일 뿐만 아니라 연설문 작성까지 담당했다.

   

이 정도면 눈치깠는가. 모건과의 투쟁은 한마디로 위장 투쟁이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모건 덩치에 비해 피해입은 바는 없다. 오히려 모건은 유태인 브랜다이즈와의 투쟁으로 로스차일드와 완전히 결별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모건을 로스차일드의 하수인이라고 하면 브랜다이즈의 투쟁을 보라. 브랜다이즈는 유명한 시오니스트잖아. 그런 그가 모건을 공격했다고. 윌슨도 모건 공격에 공감을 했다더군. 미국 연방준비은행 설립에는 로스차일드의 개입이 없는 것 같군~!!! ㅋ

   

이런 것이 하우스 대령의 기획일까?

   

둘, 브랜다이즈는 평범한 유태인이 아니라 세계적인 시오니스트이다. 차후 소개할 주요 유태인 조직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지도할 정도로 명성이 높던 시오니스트이다.

   

   

"In 1919 he broke on issues of structural organization and financial planning with Chaim Weizmann, the leader of European Zionism. Weizmann defeated Brandeis for power and in 1921 Brandeis resigned from the Zionist Organization of America, along with his closest associates Rabbi Stephen S. Wise, Judge Julian W. Mack and Felix Frankfurter. He remained active in philanthropy directed at Jews in Palestine. In the late 1930s he endorsed immigration to Palestine in an effort to help European Jews escape genocide when Britain denied entry to more Jews.[49]"

http://en.wikipedia.org/wiki/Louis_Brandeis

   

   

1910년대 브랜다이즈는 시오니스트 조직을 열 배 이상 확장시키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국제적으로도 벨푸어 선언 등에 영향을 끼쳤다. 헌데, 그가 1919년에 역시 세계적인 유태인 지도자인 와이즈만에게 비판을 받는다. 비판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지도적 위치에 커다란 손상을 입을 정도로 타격을 받는다.

   

유태인 조직간 갈등 문제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겠다. 1910년대는 유태인 시대, 1920년대는 안티 유태인 시대? 바로 이러한 것이 국유본이 짜놓은 알파 오메가 프로그램이 아니겠는가. 이차세계대전이 무르익기 시작하였는데, 일차세계대전 끝나고서부터이니 준비 기간만 이십년이었던 셈이다.

   

와이즈만하면 한국에서는 천재수학교육 사설기관으로 알려졌는데, 바로 그 와이즈만이 유태인 와이즈만이다. 브랜다이즈하면 미국 명문학교고~!

   

끝으로 국유본이 브랜다이즈를 활용한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가 아니었을까. 이는 언뜻 보면 좋은 것 같은데, 국유본 입장에서 보면 보다 명확하다. 자본의 분리로 미국 자본이 로스차일드 자본보다 커질 일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산분리.

이건 사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한 법이다.

허나, 록펠러가 이를 뚫고 권력 교체를 하였으니

하늘이 정한 듯싶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4 : 1달러 지폐의 비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5 03:18

http://blog.naver.com/miavenus/70141655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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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4 : 1달러 지폐의 비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7/05

   

"세계의 금융업자들이 모두 전쟁의 배후에 있다. 그들은 국제 유대인, 즉 독일 유대인, 프랑스 유대인, 영국 유대인, 미국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이 모든 나라에서 유대인 금융업자는 최고다. 이곳에서 유대인은 위협적인 존재이다." - 1920년 헨리 포드의 발언

   

헨리 포드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에 손꼽히는 유명인이다. 포드는 자동차에 조립라인 제조기법을 도입하여 대량생산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후 자동차는 일반인도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 되어 세계의 교통문화 전체가 바뀌게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포드가 열광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거나 유대인의 세계지배를 두려워해서 자신의 자산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까지 대중들에게 선전했다거나 히틀러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내용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학교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헨리 포드가 저술한 책 <국제 유대인,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

   

포드는 열렬한 반유대주의자로서 1919년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라는 신문사를 세워서 자신의 이름으로 악의에 찬 반유대주의 기사를 게재했다. 미국 전역의 포드 자동차 판매 대리점에 무료로 이 신문 70만 부가 배포되었다. 또 포드는 자신이 쓴 기사를 모아 네 권 분량의 책 <국제 유대인,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출판하여 주요 서점에 무료로 배포했다.

   

   

1919년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헨리 포드가 세운 신문사 <더 디어본 인디펜던트>

   

포드는 사람들의 압력을 받자 1927년 신문을 폐간하고 비방반대연맹(미국의 친유대인 민권단체)에 사과했지만 여전히 히틀러를 찬양했다. 사실 포드는 히틀러가 1920년대에 독일에서 정권을 잡던 때 이미 재정지원을 했다. 포드는 7만 5000달러를 나치 선거 비용에 투자했다.

   

   

   

헨리 포드의 75회 생일에 축하 편지와 함께 히틀러가 전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독일 최고 훈장인 독일독수리훈장을 헨리 포드의 옷에 달아주는 독일 외교관

   

포드 사와 히틀러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가까운 관계였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는 포드의 75회 생일에 축하 편지와 함께,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독일 최고 훈장인 독일독수리훈장을 보냈다.

   

   

New York Times에 실린 히틀러의 훈장을 받는 헨리 포드

   

히틀러는 포드의 초상화를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어 두고 있었다. 포드는 전쟁 기간에도 이 훈장 반환을 거부했으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부사항이 밝혀진 이후에도 여전히 이 훈장을 1947년 4월 7일,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실제로 헨리 포드가 히틀러로부터 받은 독일독수리훈장

   

"유대민족은 다른 모든 국가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지상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세상에서 오늘의 미국정부처럼 국제유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국이 이런일을 했다', '독일이 저런 일을 했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 모두는 유대인들이 한 일이었다... 요즘 미국인은 전 세계에 타락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로 알려져있다. 왜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금권(金權)이 이 나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천재성은 그들은 땅 대신 사람을 벗겨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처럼 땅을 일구거나 천연자원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삶을 꾸려가는 대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들판과 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둔체 유대인은 이들이 거둔 결실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생적인 천재성이다.... 내가 국제유대 권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건 간에 돈의 권력은 항상 승리한다. 그 어떤 전쟁도 이들 없이는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전쟁도 이들의 허락없이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이들에 맞서는 이유는 이들은 조국도 없으면서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때문이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평화주의를 내건 단체들은 그저 표면 위에서 목청을 돋울 뿐이다. 국제자본이 모든 국가위에 군림하는 누상정부로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국제자본은 평화적인 산업이 아니라 전쟁으로 돈을 번다. 이러한 근원을 파헤쳐 이들을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국제적 돈의 권력은 유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Wall Street Journal, January 26, 1926)

출처 -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프리메이슨 헨리 포드는 히틀러와 죽을 때까지 친구였던 것이다.

   

하면, 헨리 포드만 히틀러를 지지했을까.

   

   

6. 루스벨트조차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지지했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써 전체주의를 후반에는 증오했을지 몰라도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잊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뮌헨 협약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1933년 말에 히틀러가 총통 자리에 오르자 주미 독일대사에게 히틀러가 독일을 이끌 적임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또한 1935년에는 옛 직장 동료인 새뮤얼 풀러에게 독일인이 평화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지 탐문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1937년에는 섬너 웰레스를 유럽에 보내 영국이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반환할 용의가 있는지 조사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1938년에는 주독 미국대사 윌리엄 도드가 나치당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자 그를 해임했으며, 그 해에 독일이 평화에 대한 대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지역인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요구하자 지지를 표명했다. 이렇게 해서 뮌헨 협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1930년대에 유럽 독재자들의 전제정치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그는 또한 유럽인이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은 그들의 관심사이지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라고 연설도 했다.

   

또한 미국 대사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새롭고 멋진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위험은 없다. 열정과 생기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모두 열광하고 있다." 1924년, 이탈리아의 유력 인사인 사회주의자 자코모 마테오티의 납치 살해의 배후로 무솔리니가 지목받고 있다고 뉴스에 보도되었을 때, 미국은 그 사실을 간과했다. 미국 관리들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무솔리니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공산화를 저지했으며, 국민들의 지지도도 높았다. 1931년, 미국 국무장관인 헨리 스팀슨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무솔리니가 질서를 확립했다."고 치켜세웠으며, "파시즘이야말로 이탈리아인에게 필요한 이념일지도 모른다."고 연설했다. 스팀슨은 "미국인은 서부 개척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법 시대에는 자경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33년, 루스벨트는 측근에게 "무솔리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 그가 "훌륭한 이탈리아 신사"라고 언급했다. 미국 장군이 독재자 무솔리니가 어린 소녀를 차로 치고도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한 뒤에도 루스벨트는 여전히 무솔리니를 신뢰하며 믿었다. 그렇지만 전쟁 후에 유대인들과 과장으로 인해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7.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 8세와 그의 아내는 히틀러를 지지했다.

   

   

1937년,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에드워드 8세와 그의 아내인 심프슨 부인

   

 "세계 역사상 히틀러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를 갖고 있는 독일은 축복 받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히틀러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하기 때문에 영국이 히틀러와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장차 영국의 국왕이 될지도 모르는 에드워드 8세가 공식 석상에서 한 말이다. 에드워드 8세는 영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중에도 히틀러의 독일을 좋아하고 존경스러워 했다. 에드워드 8세(윈저공)는 양위 직후인 1937년, 부인과 함께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공식적인 만남을 가졌었고, 그의 아내인 심프슨 부인 역시, 히틀러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8.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미국 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대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두 기업이 전쟁 비용을 댔고, 독일은 화벤(interssen Gemeinschaft Faben)이라는 대기업이 자금을 대주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화벤은 미국 자본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화벤이라는 화학회사는 막강한 자금력, 조직, 연구팀, 생산시설 등을 지원했는데 이 회사의 주인은 독일인이 아니라 뉴욕에 있는 'J. P. 모건' 등의 국제 금융가였다. 화벤은 2차대전 이후에 세 개의 회사로 나뉘었는데, 그 유명한 바이에르(Bayer), 헥스트(Hoechst), 바스프(BASF)가 그것이다. 이들은 제약과 화학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으며, 생명공학과 UFO 연구, 개발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들이다. 이들은 1924년 미국의 은행가 '찰스 도드'의 이름으로 독일의 화벤에 8억 달러를 투자했고, 1928년에는 미국의 '헨리 포드'가 포드자동차회사의 독일 공장을 화벤과 병합했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은 적국을 원조함으로써 힘을 키워준 다음에 다시 싸웠다는 말이다. 화벤은 1차 대전 때에도 염소가스를 개발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도구로 알려져 있는 '지클론 B' 가스를 생산한 기업이다. (실제로 '지클론 B'는 그 당시 유행이던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의 예방 살균제였다.)

   

2차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군의 공습이 그렇게 치열했는데도 이 회사의 시설만은 유난히 거의 파손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폭격 대상에서 원래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폭격 제외 대상이 된 이유는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인을 물자 부족으로 판단하여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그에 대비를 하였다. 화벤 사에서는 석탄에서 휘발유룰 추출하는 기술을 마침내 완성했고, 1927년 록펠러(미국의 석유부호, 프리메이슨)의 '스탠다드 오일'사가 화벤과 합자하여 대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전쟁을 치루기에 충분했고, 히틀러는 기름 걱정을 하지 않고, 전쟁에 임할 수가 있었다.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이 대용품으로 전체 휘발유 소비량의 75%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노라하는 첩보원과 공작원들이 있던 연합군 측에서 그 사실을 몰랐을까? 공장의 위치를 몰라서 폭격을 못했을까? 그 치열했던 전쟁과 폭격 속에서 화벤 공장 시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연합군이 공격을 피했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록펠러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또 스탠다드 오일 회사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2천만 달러의 항공기용 휘발유를 공급해주었고, 독일의 탱크 제작사인 오펠 사는 제너를 모터스의 계열사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100개 이상의 미국 회사들이 사업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 나치는 전 인종을 차별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베를린 올림픽 육상최다관왕인 제시 오웬스와 나치 국가대표 선수인 루츠 롱

   

이는 유대 언론에 의해서 그 당시에 왜곡된 것임이 틀림없다. 멀리뛰기 결승전에서 오웬스의 라이벌이었던 나치 선수 루츠 롱은 멀리뛰기의 비결을 흑인인 오웬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결국 오웬스가 멀리뛰기도 우승해 4관왕이 됐다.

   

사람들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단지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육상 5관왕이었던 제시 오웬스와 악수하기를 거부했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달랐다. 히틀러는 1936년 8월 2일 메인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육상종목 첫째날 경기를 직접 관람했고 이 날 1896년 올림픽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독일 육상선수 한스 볼케를 로열박스로 초대해 격려했다. 그 날 히틀러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계속 그의 좌석으로 초대해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다음 날인 8월 3일 IOC위원장 베일르-라투어 백작(Comte Baillet-Latour)은 이른 아침 히틀러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일개국가의 원수가 선수들을 자신의 좌석에 초대하여 축하해주는 것은 올림픽 의정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와 같은 일을 삼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히틀러는 자신의 무지를 사과하며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따라서 바로 이 날 첫번째 금메달을 획득한 제시 오웬스를 포함하여 로열박스에 초대되어 독일 총통과 악수를 나눈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히틀러가 의도적으로 흑인 오웬스를 무시했다는 얘기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한편 오웬스는 1970년에 출간된 자서전 The Jesse Owens Story 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VIP석 아래를 지날 때 나를 본 총통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나 역시 손을 흔들어 그에게 화답했다. 독일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총통을 그런 식으로 모략함으로서 일부 언론인들은 그들의 고약한 심성을 드러냈다." 우습게도 미국 언론이 퍼뜨렸던 낭설과 똑같이 행동했던 인물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당시 재선 선거전을 치르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남부 표를 의식하여 올림픽 5관왕으로 금위환향한 오웬스를 백악관에서 맞기를 거부했다. 후일 오웬스는 대중에게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그를 냉대한 사람은 히틀러가 아니라 루즈벨트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오웬스 에피소드는 제3제국의 공개적인 반유태주의 때문에 생겨난 수 많은 흑색선전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http://kin.naver.com/knowhow/detail.nhn?d1id=5&dirId=5&docId=570675&qb=67CY7Jyg64yA7KO87J2Y7J6QIO2PrOuTnA==&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HrWWU5Y7uGssvYKeMGssc--127027&sid=T5rECXK0mk8AAA2HCuA

   

   

대체 적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었던 사실들을 어떻게 보아야만 할 것인가. 이런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국유본론이 유일할 것이다.

   

인드라는 이 문제를 1달러 지폐로부터 풀어간다.

   

   

    

   

프리메이슨 혐의 1달러 지폐는 프리메이슨 단원인 루즈벨트와 헨리 월리스의 작품이다. 헌데, 루즈벨트와 헬리 월레스는 차이가 있다.

   

   

"수반아님이 인월리에 영향을 받아 작성한 러셀 공사에 관한 글을 우선

   

 Russell & Co

   

인월리 :

"이버지가 귀족 유태인 계열인 루즈벨트는 어머니 역시 귀족 가문인 델라노 가문인데, 이 델라노 가문 역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이룬 300인 그룹 멤버였다."

   

1757년 인도에서의 아편 "재배"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가고, .

1773년 중국으로의 아편 "무역"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갑니다.

이전까지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1820~1830년대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파는 아편무역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딘 매더슨 회사>에 중국 아편무역을 프랜차이즈합니다.

여기에 봄베이의 <사순 회사>가 뛰어들어, 두 회사는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 회사는 아편무역 프랜차이즈로 번 돈의 일부를 영국왕실에 바쳤습니다.

   

이 시기에 <사순 회사>의 하청을 받아 아편무역을 시작한 것이 미국의 <러슬 회사>이고,

<러슬 회사>의 파트너였던 '워런 델라노 2세'가 바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러슬 회사>는 1842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편무역회사로 성장합니다.

   

<러슬 회사>는 워런 델라노 2세 외에도 파트너가 3명 더 있었습니다.

   

(1) 설립자 새뮤얼 러슬의 삼촌은 <Skull & Bones>를 설립한 사람이고,

(2) 파트너 조시프 쿨리쥐는 토머스 제퍼슨의 사위이고,

(3) 파트너 워런 델라노 2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이고,

(4) 파트너 애비얼 로우는 컬럼비아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이고,

(5) 파트너 존 클리브 그린은 프린스턴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입니다.

   

   

<러슬 회사>와 관련된 인물들만 잘 조사해도 미국의 아편무역 유명인사(?)들이 총출연합니다."

   

루즈벨트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결된 네덜란드계 유태인이다. 

   

Frederic Adrian Delano (1863 – 1953) was an American railroad president born in Hong Kong, China of the Delano family. He was the uncle of U.S. President Franklin Delano Roosevelt. Frederic Adrian Delano was Chairman of the Committee on the Regional Plan for New York and Its Environs, which released the regional plan for New York on May 27, 1929. He was also a member of the Commercial Club of Chicago which impacted the development of Chicago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He was the first vice-chairman of the Federal Reserve and the National Resources Planning Board.

   

미국 연방은행의 초대 이사 중 한 명이 루즈벨트의 삼촌, 프레데릭 델라노였다. 예서, 보듯 루즈벨트는 집안 내력이 외가로는 경쟁자인 프리메이슨 계열 회사를 물리친 유태인 사순 가문과 로스차일드로 연결되어 있고, 친가는 유태인이었다는 점이다.

   

   

"광기의 산맥과 니콜라스 로에리치

몽환적인 색채로 물든 거대한 산맥. 그 아득한 능선 너머 미지의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은 오싹한 신비로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는 많은 화가들이 언급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거대한 자연을 환상적 색채로 적셔놓은 이 화가의 그림에는 절로 매료될 수 밖에 없더군요.

초자연의 환상을 그려볼까 한때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상상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까마득히 모자라는 것을 깨닫고 접어버렸습니다. 그 뒤로 이 그림을 만나게 되었지요. 작은 사진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음에도 그 색채와 풍광은 바로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 속에 그렸던 장면 바로 그대로였으니 실지로 눈앞에 큰 캔버스를 대면한 이의 감동은 대체 얼마만큼일지 짐작이 되더이다. 러브크래프트가 홀딱 반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다음은 로에리치 미술관에 수록된 그의 작품으로서 러브크래프트의 글과 함께 몇 점만 소개해 올립니다.

   

Himalayas. 1933

   

&quot;항해의 마지막 여정은 여러가지 공상을 일으킬 만큼 생생하고도 짜릿했다. 신비를 간직한 거대한 봉우리들이 북쪽에 낮에 걸린 정오의 태양을 배경으로 장관을 이루더니, 자정이 되어도 여전히 남쪽 수평선 위로 낮게 드리워진 태양이 새하얀 눈과 푸르스름한 얼음, 깊은 계곡과 능선에 드문드문 검게 드러난 화강암 위로 아스라한 붉은 빛을 뿜었다. 황량한 산맥 정상에는 간혹 혹독한 남극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요란한 바람소리는 때론 거칠면서도 음역이 대단히 넓은 신비의 피리소리를 연상시겼는데. 인간의 잠재의식을 일깨우는 듯한 섬뜩한 화음을 들으며 나는 왠지 마음이 불안해져 막연한 공포에 떨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언젠가 본 니콜라스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아시아를 기이하게 표현한 그 그림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불안해졌었다. 광인으로 불리는 압둘 알하즈레드의 '네크로노미콘' 에 악마의 전설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 렝 고원의 소름끼치는 장면도 떠올랐다. 나는 공연히 대학 도서관에서 그 끔찍한 책을 들여다보았다고 후회하기도 했다.&quot;

- 광기의 산맥 P18-19

   

Star of the Morning. 1932

   

&quot;가장 높은 산의 능선에는 이상한 형태가 보임. 양쪽 끝면을 정확하게 수직으로 깎은 거대한 벽돌 모양의 돌들이 낮은 성벽처럼 산을 감싸고 있음. 마치 로에리치의 그림에서 깎아지른 산의 능선에 매달린 아시아의 옛 성곽유적같은 모습이라, 멀리서도 대단히 인상적임. 좀 더 가까이 접근 중. 캐롤 생각은 더 작은 벽돌들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것 같다는데 어쩌면 날씨 탓으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음. 수백만년동안 폭풍과 기후에 노출된 때문인 듯, 모서리는 대부분 부서져 둥글게 깎여 있음. 성벽을 이루고 있는 부분 암석들은 특히 윗부분은 능선 자체의 지층보다 색이 흐려보임. 크리스탈 계통의 성분으로 판단됨. 가까이 비행한 결과 수많은 동굴 입구들이 드러났음. 사각형이거나 반원형의 동굴 입구는 이상할 정도로 규칙적임.&quot;

- 광기의 산맥 P34-35

   

Tibetan Stronghold (Basgo). 1932

   

&quot;산맥 주봉들이 이상한 규칙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은 댄포스였다. 레이크 교수가 전문에서 언급했던 대로 완벽한 입방체 모양이 규칙적으로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시아의 어느 산 정상에 있다는 고대사원의 폐허를 음산하게 그린 로에리치의 그림과 비교했던 그의 설명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상의 세계와는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비로운 산맥의 모양이 정말로 자꾸만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10월에 처음 빅토리아 랜드를 보았을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을, 나는 지금 또 다시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quot;

- 광기의 산맥 P66

   

Mount of Five Treasures (Two Worlds).From "Holy Mountains" series. 1933

   

&quot;그러나 우리는 이미 거대한 별 모양의 폐허를 지나쳐 비행기에 도착해 있었고 공포의 대상도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산맥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었다. 구릉 지대에서 바라본 검은 산등성이는 동쪽 하늘을 배경으로 험악하게만 보였고 또 한번 니콜라스 로에리치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형체없이 흐물거리는 소름끼치는 존재들이 어쩌면 지독한 악취를 내뿜으며 산맥 지하로 뚫린 수많은 동굴을 통해 제일 꼭대기의 뾰족탑까지 올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악마의 피리소리를 닮은 바람소리가 휘몰아치는 산 정상의 동굴들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몸서리가 쳐졌다. 설상가상으로 산 정상에서 심상치 않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레이크 교수는 그것을 화산활동으로 오인했었지만 어쩌면 우리가 탈출해온 불길한 어둠의 심연에서 뿜어나온 수증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quot;

- 광기의 산맥 P218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Konstantinovich Roerich, 1874-1947)

1874년 러시아 세인트 페테스부르그에서 출생한 니콜라스 콘스타노비치 로에리치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학자이며 사상가입니다. 예술 문화계의 적십자와도 같은 Pax Cultura를 창설하여 활동한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티벳과 히말라야 인디아 등지의 아시아의 풍속과 문화, 풍광에 심취하여 그곳에서 긴 기간 머무르며 글과 풍경을 남겼던 인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화가의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아 소설 광기의 산맥 속에 수 차례 언급합니다. 거대한 산맥 너머 미지의 비밀을 목도한 인물일지도 모르며 그 경이로움을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편지에서 밝히기도 했더군요. 특히 이 작가의 티벳과 히말라야 풍경 연작들로부터 받은 영감이 러브크래프트의 남극 광기의 산맥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Kanchenjunga. 1936

   

http://blog.yahoo.com/_5COMUCYOEZ3YP6QENETKEAZDM4/articles/523601

   

다만, 당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혹은 루즈벨트 역시 니콜라이 로에리치 영향을 받아서인지 루즈벨트가 대통령 별장 이름을 '샹그릴라'로 불렀다는 것이다.

   

예서, 샹그릴라는 1933년 제임스 힐튼은 장편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멀리 동양의 뭇산들속에 영원히 평화롭고 고요하게 있는 신비의 땅을 샹그릴라로 묘사했었다.   

   

   

   

중국 윈난성 디칭티베트족자치주에 있는 현(縣)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서 지상에 있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위치

중국 윈난성 북서부

경위도

동경 99°21'100°19', 북위 26°52'28°52'

면적

11,613

홈페이지

http://www.xianggelil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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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윈난성[雲南省] 디칭티베트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에 있는 현(縣)이다. 쿤룬산맥[崑崙山脈] 서쪽 끝에 있다. 원래 지명은 중뎬[中甸]이었으나, 2001년 샹그릴라라고 개명하였다. 샹그릴라는 티베트어(語)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다. 티베트족·후이족·먀오족 등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중 티베트족이 43%이다.

   

평균 해발고도 3,459m의 고산지대로, 산악지형이 전체 면적의 약 93%이며, 여름 평균 기온이 15 정도이다. 눈 덮인 산, 계곡, 호수, 울창한 숲 등이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고, 동식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에 나오는 지명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로 묘사되었다. 1997년 중국 정부에서 중뎬이 샹그릴라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출처] 샹그릴라 [香格裏拉(향격리랍), 香格里拉, Shangri-La ] | 네이버 백과사전

    

아라라트산, 수미산처럼 샹그릴라 역시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하늘을 떠도는 움직이는 섬처럼. 이러한 상상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프리메이슨적 종교관이 개입한 것으로 본다.

   

같은 프리메이슨 단원이라도 루즈벨트와 헨리 월레스 정치관이 달랐다. 헨리 월리스 역시 유태인이었는데, 니콜리아 로에이치를 구루로 여겼으며, 무엇보다 소문난 친소련파였다.

   

"헨리 A.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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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그래드 월리스

  

미국제33대 부통령

  

임기

1941년 1월 20일~1945년 1월 20일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임: 존 낸스 가너(제32대)

후임: 해리 S. 트루먼(제34대)

  

  

출생일

1888년 10월 7일

출생지

미국 아이오와 주 애데어 카운티

사망일

1965년 11월 18일 (77세)

사망지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

정당

민주당

진보당

학력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종교

미국 성공회

배우자

일로 브라운 월리스

서명

헨리 어거드 월리스

Henry Agard Wallace

헨리 어거드 월리스(Henry Agard Wallace, 1888년 10월 7일 ~ 1965년 11월 18일)은 미국의 제33대 부통령(1941~1945)이다. 그의 부인은 일로 월리스이다. 그는 또한 농무 장관(1933~1940), 상무 장관(1945~1946)을 지낸 바있다.

아이오와 주 애데어 카운티에서 태어나,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C. 월리스가 농무부 장관이 되었던 1921년에 어린 월리스는 잡지 월리스의 농부(Wallace's Farmer)의 편집자로 근무하였다.

그는 뉴딜 정책과 공정 정책 시기에 가장 논쟁적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농장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설계한 뉴딜 정책의 농업조정법(AAA)의 채택을 주장하였다. 월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전쟁노력에 대한 활동적 행정관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에 그를 우선적 공급, 배당 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핵무기 개발을 이끄는 의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은 민주당 원들이 그의 사회 관념론과 국제론을 싫어했던 이유로 1944년 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되지 못하였다. 1946년에는 소련에 향한 미국의 강경책에 비평한 연설로 트루먼 대통령이 그에게 상무부 장관직을 사임하도록 시켰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반대한 세번째 정당 진보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원예 전문가인 그는 1920년대에 교배종 옥수수를 개발하였고, 대기업 씨앗 회사 파이오니어 하이브레드(Pioneer Hi-bred)사를 설립하였다.

1965년 11월 8일 코네티컷 주 댄버리에서 사망하였다."

   

지난 인월리에서 이차대전 당시의 국유본 정세에 잠시 설명한 것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와 헨리 윌리스 관계를 짧게 정리하면, 루즈벨트가 헨리 윌리스를 부통령으로 삼은 것은 소련과의 연합 때문이다. 친소파 헨리 윌리스를 부통령으로 삼도록 국유본에서 지시한 것이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헨리 윌리스가 용도폐기되고, 역시 국유본이 지시하여 반소련파 트로먼이 부통령이 된 것이다. 짧게 설명하다보니 당대 노예민주당 권력 구도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달라.

   

하여간 중요한 건 헨리 윌리스는 부통령에서 물러난 뒤 노예민주당을 나와 진보당으로 대선에 나섰다는 것이다.

   

"1948년의 대통령선거진보당 당수로 출마하였다. 그 결과 일반투표에서는 115만 표를 얻었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1표도 얻지 못하였다. 그후 진보당과도 결별하고 정치에서 물러났다."

[출처] 월리스 [Henry Agard Wallace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때, 노예민주당 트루먼 등 정적들이 헨리 윌리스를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했다. 이때, 헨리 윌리스는 다른 프리메이슨과 달리 당당하게 자신은 프리메이슨이라고 하고, 오히려 프리메이슨을 선거 주요 이슈로 삼기까지 하면서 나갔는데, 결과는 참패였다.

   

헨리 윌리스는 진보당과도 결별하였는데 이유는?

   

"처음에 먼슬리 리뷰는 좌파들을 정확한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깃대였다. 이 잡지는, 대중전선(the Popular Front)이라는 정치적 경험을 함께 나누며 살았으며 어려운 때에 마르크스주의자의 실천과 이론의 다양한 면을 고요히 숙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사회주의 신념을 계속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이들의 관심과 정치적 신념을 반영했다. 이 독립된 사회주의 무리는 독자, 지지자, 글쓴이의 고갱이를 제공했다. 물론 이들은 이 잡지 성공의 전제조건이었다.

   

직접적인 배경은, 단지 6개월 전에 불행한 결론을 맺은 헨리 윌리스의 1948년 대통령 선거유세였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밑에서 부통령을 지난 뒤 월리스는 1944년 상무장관으로 지명됐다. 루즈벨트가 숨진 뒤에 해리 트루먼 정부에서도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 갈수록 심해지는 워싱턴의 반공 대외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48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것은 노동과 좌파와 새로운 진보당(Progressive Party) 자유주의자들의 뉴딜 제휴를 되살리는 시도를 뜻했다.

   

그는 별로 급진적이지도 않았고 특별히 예리한 정치 사상가도 아니지만, 인권 문제에 관해서 단호히 트루먼의 왼쪽으로 갔고 냉전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초기에 대중의 지지는 상대적으로 실질적이었는데, 이는 노동계의 전투적인 좌파와 뉴딜 지지자가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 이들은 루즈벨트의 개혁을 지지하며 그 개혁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부류다. 대신 대통령선거 유세는 "진보주의"의 분열을 특징지었다. 트루먼은 월리스의 국내 관련 공약을 빼앗아가면서도 훨씬 더 분명하게 냉전시대 전사가 됐다. 이는 20세기 중반 주류 자유주의가 주도한 빨갱이 딱지 붙이기를 감싸안는 것의 전형이다. 결국 월리스는 몇몇이 예상한 5백만 내지 1천만표가 아니라 단 100만표를 얻었다.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무리는 월리스가 무소속 단독 후보로 나선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당 진영의 통탄할 표류는 이들에게 양당체제의 대안을 찾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만을 확인시켜줬다. 후버만은 심지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독자정당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9) 편집자들은, 진짜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한 대중전선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강화된 십자군이 대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십자군은 종종 자유주의자들이 고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대공황기와 2차 대전 기간 좌파-자유주의 연합은 냉전 분위기 속에 깨어졌다.

월리스의 참패는 먼슬리 리뷰의 설립자들에게 두겹으로 비극적이었는데,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정치적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지와 후버만은 진보당의 전국 강령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다. 그들은 월리스가 진짜 급진적 공약을 멀리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루먼이 자신의 국내 정책을 전용하게 놔뒀으며 진보당 지지자들이 사회 체제의 변화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지 못했다. 월리스는 단순히 3번째 후보, 좀더 나은 후보였다.(10)

   

좌파에서는 많은 이가 먼슬리 리뷰의 편집인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이 변화를 기대한 것은 1930년대 위대한 운동 덕분에 불붙었으며 2차 대전 이후 파시스트 권력의 종말과 미국 국내의 위대한 파업 물결과 함께 다시 불붙었다.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은 반동이 그렇게 강하고 빠르게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저항을 중단했으나, 많은 이들은 그 망령을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실업자들의 거리 행진, 노동자들의 점거농성 파업,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 파시즘과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1948년 선거에 대해 비슷한 실망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었다. 1948년에 창간된 내셔널 가디언(The National Guardian)은 이런 환경을 언론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런 분위기는 먼슬리 리뷰에서 더 지적이며 분석적으로 가지쳤다. "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1656427

   

먼슬리 리뷰나 진보당 구성원 상당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트로츠키주의자였다. 당대 미국 좌파에서 트로츠키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노조를 중심으로 절대적이었다. 해서, 루즈벨트는 2차 대전 전에 스탈린에게 보내는 선물로 트로츠키 암살을 선사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죽였다고 하는데, 인드라는 루즈벨트가 스탈린을 죽였다고 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트로츠키 측에서 부통령이란 대중성 때문에 헨리 윌리스를 지지했을 뿐, 내부적으로 지지한 것이 아니어서 선거가 끝난 후에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헨리 윌리스는 프리메이슨이었고, 친소련파였지만, 좌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헨리 윌리스는 프리메이슨 이상에 심취한 이상주의적 면모가 강했고, 소련의 실상을 외면하면서 소련이 이상주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여겨 높이 평가했으며, 예수가 인도 수행을 했다고 믿었으며, 그 연장선에서 동방 티벳 쯤에서 고대의 비밀을 간직한 '지식'이 있을 것이라 여겨 동경했던 것이다.

   

반면, 국유본 덕에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 국유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현실주의자였다. 그가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었던 것도 그 이상에 심취한 것이라기보다는 당대 유행을 쫓았을 뿐일 것이다. 당시에는 프리메이슨 풍조를 믿는 척해주어야 지식인 대접을 받던 때이니까. 더군다나 그 자신이 유태인이기에 반유대주의 풍조에서 비켜가기 위해서도 프리메이슨 자격증이 필요했던 셈이다.

   

하여, 루즈벨트와 헨리 윌리스 간의 관계를 통해 인드라는 당대 국유본의 전략을 유추하는 것이다.

   

하나, 국유본은 세계대전을 원했다. 전쟁을 하여 이익을 취해 더 큰 경제 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세계경제체제를 만들고, 둘째, 이를 기반으로 각국에 친국유본 정부를 세우고, 셋째, 이들 정부들을 내세워 세계연방정부의 모델인 국제연합을 조직한다.

   

이를 위해 한 편에서는 유대주의, 시온주의를 부추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 죽어가던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부흥시킨 것이다. 이때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네스터 웹스터였다.

   

 "20세기에 이르러서 네스터 웹스터에 와서야 다시 일루미나티가 거론되기 시작한다. 일루미나티 음모론에서 주목할 인물은 존 로비슨과 네스터 웹스터 두 명이다. 다른 자들 주장이란 대체로 이 둘의 자료에 근거하여 당대의 현안을 엮어서 일루미나티의 특정 부분을 과장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인드라 시각이다. 예외적으로 짐 마스는 현대 음모론을 총정리를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Perhaps her most influental book was Secret societies and subversive movements published in 1921 and reprinted in 1924, 1966, 1970, 1980 and 1989."

   

네스터 웹스터의 'Secret societies and subversive movements'이 출판되고, 재출판이 된 시기가 흥미롭지 않은가. 인드라는 줄곧 음모론은 국제유태자본에서 기원하고, 국제유태자본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온 바 있다. 화페전쟁, 빌더버그클럽이 랜덤하우스에서 나왔다. '시대정신'모임이 뉴욕에서 성황리에 개최된다^^!

   

네스터 웹스터 여사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역사학자가 된 것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명을 받았다는 게다. 여사는 전생을 믿는다. 프랑스혁명 때 길로틴에 희생되었다고 믿는다. 여사는 인도, 미얀마, 싱가포르, 일본 등의 지역을 여행하면서 힌두교를 비롯한 동양 컬트 종교에 큰 흥미를 지니게 된다. 그녀에 관한 전기를 쓰는 작가 말에 따르면, 이때 그녀는 기독교 신앙를 버렸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네스터 웹스터 여사는 그때부터 열정적인 글쓰기에 들어간다. 해서, 그녀의 저서가 등장하자 윈스턴 처칠과 같은 이가 특별히 언급을 할 정도였다. 당대 영미권의 화두는 시온의정서다. 이 시기 미국과 영국에서 시온의정서가 소개되었고, 포드가 시온의정서를 언급하기도 했다. 네스터 웹스터의 주장은 시온의정서를 오픈마인드로 보라는 것이다. 하고, 시온의정서와 일루미나티의 관련성을 넌지시 암시하였다. 여사는 또한 한동안 영국 파시즘 정당 멤버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인드라는 여사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면, 페타의 잉그리드 뉴커크가 연상되고는 한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http://en.wikipedia.org/wiki/British_Fascists

   

모슬리를 중심으로 한 영국 파시즘 연구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og&logNo=40010050538

   

이전에 인드라가 영국 파시즘의 특징을 언급한 바 있는데, 한 번 더 짧게 요약한다. 영국 파시즘은 대륙 파시즘과 달리 인종적이지 않다. 안티세미티즘, 반유태주의가 아니라는 게다. 해서, 같은 음모론자임에도 영국 출신 존 콜먼도 자신의 저서에 안티세미티즘 색채가 없다.

   

영국 파시즘이 왜 태동했는가. 정치적으로는 보수당(지주)과 양당체제를 이루던 자유당(금융자본)이 붕괴함에 기인하는 바 크다. 자유당 시절에도 제국주의 시대서부터는 국제유태자본의 세계전략에 따라 금융자본 위주였고, 산업자본이 내놓은 자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해도, 그나마 간신히 정치적 통로를 마련했었는데, 자유당이 무너짐에 따라 산업자본이 갈 길을 잃은 셈이다. 노동당으로 갈 수는 없고, 보수당으로도 가지 못한 이들이 영국 파시즘의 주요 구성원이 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국제유태자본의 세계전략에 의거하여 영국이 금융부문 중심으로 돌아가고 산업부문을 공동화시키자 산업 부문이 침체되기 시작한다. 해서, 19세기 초반의 미국처럼 영국 민족주의가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은 국제유태자본이 영국을 왕따 시켰다고 간주한 것이다. 다만, 그 이름이 국제유태자본이 아니라 일루미나티였던 게다. 그들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가설이다. 이제까지 국제유태자본이 영국을 숙주로 삼아 대영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제 국제유태자본이 러시아혁명을 명예혁명, 청교도혁명처럼 성공시키면서 러시아를 제 2의 영국으로 삼고자 한다. 하여, 이 음모를 막아내어야 한다. 국제유태자본을 영국에 계속 묶어두어야 한다. 이런 시나리오가 되겠다.

   

지금까지 국제유태자본론은 이차대전 양측을 모두 조종했다고 주장해왔다. 양측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자금 지원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무기도 동원되어야 한다. 네스타 웹스터의 이론은 영국에서 반유태주의를 피하면서 대륙 파시즘을 옹호하는데 유효한 수단을 제공했다. 영국 왕실에서도 파시즘 옹호하는 이가 등장하기도 했다. 역할 분담은 끝났다. 오른손은 우파, 왼손은 좌파. 이제 버블경제 이후 대공황, 대공황에 이은 전쟁 시작!

   

해서, 잠시 수면 위로 부상했던 지상 최고의 비밀조직인'일루미나티'는 1966년까지 재차 잠수한다. 백 년을 잠수했는데, 오십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때의 화두는 무엇인가.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되었고, 국제유태자본과 카톨릭의 동맹(?)이 이루어져서 로마올림픽이 개최된다. 이때는 예수회와 일루미나티를 겹쳐서 보기가 유행이었던 듯싶다. 또한 국제유태자본이 유포한 반문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목표는 청소년들을 마약으로 찌들게 해서 전쟁도 반대, 노동자운동도 반대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교양서적으로 다시 등장한 네스타 웹스터 여사의 저서. 바이스하우프트의 동양적 신비주의, 어쌔씬, 약물을 강조한다. 또 십년을 잠수했다가 레이건 시대에 한 번 더 등장~! 그리고 부시 시대에 등장^!^ 이때 집중 조명된 것은 시나키즘이며, 해골종단이다. 하고, 근래 '천사와 악마'로 재조명을 받는다? 이유가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83206305

   

   

시온의정서로 상징되는 세계유태인협회와 프리메이슨은 상호대립, 상호발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인드라는 이를 당대 국유본 핵심 조직인 300인 위원회의 기획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여, 크롤리의 동방기사단 역시 국유본의 전략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되, 국유본의 끄나풀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독자적인 흐름을 만든 셈이다. 해서, 크롤리는 히틀러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던 것이고.

   

여기서 당대 프리메이슨이 얼마나 유행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지표 하나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는다.

   

헨리 루스가 공덕을 많이 쌓은 모양이다.

글을 쓸려고 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 미루어진다.

해서, 이번에 못 쓰면 영영 못 쓸 것이라는 각오로 글을 쓰고 있다.

   

헨리 루스는 누구인가.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줄 수 있다 

http://dovan125.com/140139130950

   

모두가 국내 정치에만 몰두할 때 헨리 루스는 해외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 보도, 논평하는 '타임지'를 창간했다. 

   

포춘을 만들 때에는 고급스런 디자인과 탐미적인 가격 책정으로 명품 경제지를 만들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읽어낸 것이다. 

   

세계 최초의 사진 잡지, 라이프를 만들어냈다. 문화란 스타일임을 웅변하는 것일까.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 1898년 4월 3일 ~ 1967년 2월 28일)는 미국의 잡지 발행인이자 출판업자이다.

   

1898년 4월 3일 중국 산둥 성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1912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일 대학교에 재직할 당시 1923년 그의 동창이던 브리턴 헤이든과 함께 당시 미국 주요 신문들과 잡지들이 해외 뉴스를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을 착안해 세계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 보도, 논평하는 뉴스 잡지 《타임》을 창간했다.

   

《타임》은 창간 5년 만에 흑자를 내고 기존 미국 사회의 신문과 잡지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미국의 격주간 종합 경제지 《포춘》과 1936년 사진 중심의 미국의 대표적 주간 그래프지 《라이프》를 창간했다.

   

특히 《라이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보도로 큰 빛을 발했고 이후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52년 주부용 잡지 《하우스 앤드 홈》과 1954년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을 발행했다.

   

하지만 그는 장로교파에 속하는 공화당원이라 자주 스태프들과 충돌하였고 이후 1972년에 폐간된 《라이프》를 제외하고는 그의 잡지 왕국은 건재했고 타임 워너가 그 뒤를 잇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_%EB%A3%A8%EC%8A%A4

   

   

"《포춘》(Fortune)은 미국의 최장수 비즈니스 잡지이다. 1930년 헨리 루스에 의해 세워진 《포춘》은 현재 타임 워너가 소유하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내 놓는 기업 이익 순위표로 유명하다.  《포춘》은 《타임》지의 공동 설립자인 헨리 루스1929년 월가 붕괴가 있은 지 4개월 후인, 1930년 2월 설립했다. 원래 루스의 파트너였던 브리턴 헤이든 《포춘》지 설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스는 1929년 10월 15일 헤이든이 숨진 후에 《포춘》지 설립을 추진했다. 루스는 1929년 11월, 타임 주식회사에 "우리는 무작정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경기 침체는 1년씩이나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1] 《포춘》의 첫 번째 판은 1달러로 발매되었는데, 당시 주간 《뉴욕 타임즈》가 5센트에 판매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파격적인 것이었다.[1] 가격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남달랐다. 당시 여러 비즈니스 관련 출판물들은 흑백으로 통계 된 통계 자료정도만 제공했었는데 《포춘》은 11인치 x 14인치에 크림 색 두꺼운 종이, 특수 처리를 통해 인쇄된 멋진 커버로 무장했다.[2] 근거 없는 소문에 따르면, 당시 커버 디자이너였던 T M 클랜드가 가격을 1달러로 정하고 첫 번째 판의 커버 디자인을 한 것은, 아무도 이 잡지의 가격을 얼마로 할지 몰라서였다고 한다. 딱히 가격을 정하기도 전에 1달러로 된 것이 찍혀나갔고, 이는 잘 팔려나갔다. 그래서 《포춘》지 직원들은 이 잡지가 1달러의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처음 판을 받기 위해 구독한 사람은 이미 3만 명이나 되었었다. [2] 1937년에는 구독자의 수가 46만명으로 늘어났다. 경제 대공황동안, 《포춘》 지는 사회적으로 큰 공신력을 얻었다. 이를 통해 후에 타임 워너가 된 루스의 타임/라이프 미디어 그룹에서 주축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포춘》지는 원래 월간지로 발간되었으나 2005년 9월부터는 격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포춘》지는 넓은 분야의 사업, 사업가, 경향, 회사, 현대 비즈니스계를 이끌어 가는 사상등을 다루고 있다. 《포춘》지의 주요 경쟁사는 《포브스》지와 《비즈니스위크》이다. 2000년부터 비즈니스 잡지들의 구독량이 현저하게 줄고 있지만[3], 《포춘》지의 구독자는 83만 3천여 명에서[4] 85만 7천명으로 증가했다.[5] 《포춘》지의 가장 큰 특색은 포춘 미국 500대 기업, 포춘 미국 1000대 기업, 포춘 세계 500대 기업 등의 기업 순위이다. 이같은 순위는 기업의 전체 수익과 사업 성격을 고려해서 매겨진다.

[편집] 한국판

발행사는 한국일보 이며 명칭은 '포춘 코리아'다. 2009년 4월에 창간했으며 월간으로 발행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D%8F%AC%EC%B6%98_(%EC%9E%A1%EC%A7%80)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 1898년 4월 3일 ~ 1967년 2월 28일)는 미국의 잡지 발행인이자 출판업자이다.

1898년 4월 3일 중국 산둥 성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1912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일 대학교에 재직할 당시 1923년 그의 동창이던 브리턴 헤이든과 함께 당시 미국 주요 신문들과 잡지들이 해외 뉴스를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을 착안해 세계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 보도, 논평하는 뉴스 잡지 《타임》을 창간했다.

《타임》은 창간 5년 만에 흑자를 내고 기존 미국 사회의 신문과 잡지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미국의 격주간 종합 경제지 《포춘》과 1936년 사진 중심의 미국의 대표적 주간 그래프지 《라이프》를 창간했다.

특히 《라이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보도로 큰 빛을 발했고 이후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52년 주부용 잡지 《하우스 앤드 홈》과 1954년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을 발행했다.

하지만 그는 장로교파에 속하는 공화당원이라 자주 스태프들과 충돌하였고 이후 1972년에 폐간된 《라이프》를 제외하고는 그의 잡지 왕국은 건재했고 타임 워너가 그 뒤를 잇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_%EB%A3%A8%EC%8A%A4

   

   

   

   

"공화당 내 근본보수파 중에는 반공우익단체인 '존 버치 협회'(Jhon Birch Society)가 있습니다. 존 버치는 미군 정보장교로 1930년대에 중국으로 건너가 장개석의 국민당과 함께 활동하던 중에 중국 공산당에게 암살당한 인물로 존 버치 협회는 그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초기 지도자는 반공주의자인 '래리 맥도널드'(Larry Mcdonald)였고, 현재 지도자는 '존 맥매너스'(Jhon Mcmanus)입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존 버치 협회 회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에 의해 공산주의자 색출 광풍인 매카시즘(McCathyism)이 휘몰아 쳤습니다. 그는 언론인과 문화인 뿐 아니라 소련과 중국에 대해 공감을 품고 있던 국무성 및 국방성 내의 진보파와 자유파, 뉴딜주의자인 공무원 및 군인들을 상원 국가안전보장위원회(The Senate Internal Security Committee) 내 소위원회 공청회에 출두시켜 신문을 가했습니다. 또한 하원 비(非)미활동조사위원회(The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y, HUAC) 조사를 통해 자유파 공무원들을 '공산주의자 숙청'(red purge)란 명목 아래 공직에서 추방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존 서비스'(John Service)와 '앨저 히스'(Alger Hiss) 등 국무성 관료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매카시즘은 중국의 문화혁명처럼 비이성적인 정치선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대외강경론이 주류를 이루어 소련과의 불필요한 극한대립과 무한 군비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존 버치 협회의 애국우익들은 유대인들이 세계지배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을 신봉합니다. 이들은 원래 공화당 내 강경 보수세력이자 고립주의자였는데 공화당마저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다며 공화당을 탈당합니다. 1983년 대한항공 KAL 007 편이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는데  이 배행기에 존 버치 협회 지도자인 래리 맥도널드가 탑승했기 때문에 회원들은 글로벌리스트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TIME(타임)과 LIFE(라이프) 지의 창설자 헨리 루스는 1930년대에 일본 군대가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을 열렬히 지원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차이나 로비파'(반공, 타이완 독립지지파)의 주요 인물이 되는데 매파 상원의원 중 일부가 차이나 로비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추천으로 하원의원이 된 헨리의 부인 클레어 부스 루스도 차이나 로비파인데 그녀는 보수파의 여걸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타임워너 CNN도 공화당 내 강경보수세력의 하나인 차이나 로비파인데 이들은 글로벌리스트 언론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그의 주장은 마녀사냥이라고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허나, 조지프 매카시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쪽발찌라시는 물론 조중동 역시 국유본 지시를 받아서인지 이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모두 사실이다. 베노나 프로젝트로 사실인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조지프 매카시가 국제유태자본이 한국전쟁을 기획하고, 십년 뒤에 베트남 전쟁을 기획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도 역사적으로 사실로 입증되었다.

   

헨리 루스. 타임지를 만들었다. 헨리 루스 역시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목사인 동시에 건축가였던 데서 짐작할 일이다.

   

무엇보다 숨겨진 인맥이 중요하다.

   

"http://blog.daum.net/worldonepercent/157 

   

하치키스와 태프트는 거의 같은 시기인 1890년과 1891년에 코네티컷 서부와 중부에 예일대학의 학생들을 공급하는 고등기숙학교로 세워졌다. 두 학교는 엑시터와 앤도버와 같이 치열한 라이벌 관계이며 매년 번갈아가며 운동대회를 치루고 있다. 하치키스에는 자동차 왕 포드가문, 태프트에는 미국 정치에서 케네디와 부시가문에 버금가는 태프트 가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두 학교 모두 아래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아름답고 어마어마한 캠퍼스를 보유하고 있다.

   

하치키스 Hotchkiss School

1891년에 총기, 화약, 군사용 자동차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벤저민 하치키스의 미망인 마리아 하치키스Maria Hotchkiss에 의해 설립되었다. "배운 뒤 더 높은 것들을 추구하자. After instruction, let us move on to pursue higher things.'가 교훈이다. 예일대학 총장인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설립을 권유한 인연으로, 초기 졸업생들은 주로 예일대학에 진학했다. 코네티컷 주 서부 레이크빌 시의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 산과 호수를 끼고 있는 수려한 경관 덕분에, 내셔널 콘서반시National Conservancy로부터 '마지막 위대한 지역Last Great Places' 200곳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캠퍼스에는 9홀 골프 코스도 있다.

하치키스는 창립자가 자동차 사업을 했던 연유에서인지 미국의 자동차 왕 포드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에드젤 포드Edsel Ford,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 포드자동차 회장인 클레이 윌리엄 포드Clay Willaim Ford, Jr.가 이곳을 졸업했다. 에드젤은 포드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 1세의 외아들 이었으며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냈다.

<타임>매거진의 공동 창설자 헨리 루스Henry Luce와 브리튼 해든Briton Hadden, 다우 케미컬 창설자인 허버트 다우Herbert Dow, IBM 사장이었던 아서 왓슨Arthur Watson, 모건 스탠리의 창설자인 해롤드 스탠리Harold Stanley가 졸업했다. 헨리 루스는 중국 선교사였던 아버지 헨리 루스Henry Winters Luce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연세대학에 루스 채플을 기증했다. 노벨상 수상자로는 의학상(1935)의 디킨슨 리처드슨Dickinson W. Richardson이 있다.

정계 인물로는 로렌스 저드Lawrence Judd 전 하와이 주지사, 토머스 에디슨의 아들이며 뉴저지 주지사이었던 찰스 에디슨Charles Edison, 알래스카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어니스트 그루닝Ernest Gruening,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이었던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Warren Scranton이 있다. 역대 상무장관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존경을 받았던 말콤 발드리지Malcom Baldridge와 해군장관을 지낸 폴 니체Paul Nitze가 있다.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 홉킨스 국제정치대학원SAIS의 정식 명칭은 폴 니체 국제정치대학원이다. 연방대법원 판사를 지낸 포터 스튜어트Porter Stewart와 1980년대에 법무장관 대행을 했고 연방대법원 판사 인준에서 큰 논쟁을 일으키고 탈락한 로버트 복Robert Bork이 알려진 법조인이다.

   

하치키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3eZV4MQMif4

하치키스 동영상http://www.hotchkiss.org/admission/video.aspx "

   

하면, 헨리 루스의 타임지, 헨리 포드의 포드자동차 등의 미래는 어떨까? 과연 누가 지금 장악하고 있을까?

   

하여, 사이언톨로지와 함께 전개되는 이차대전 이후의 미국 생활상이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3 : 한국 불교에게 죽음을! : 사이언톨로지, 헨리 포드, 프리메이슨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4 00:17

http://blog.naver.com/miavenus/7014157939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3 : 한국 불교에게 죽음을! 사이언톨로지, 헨리 포드, 프리메이슨

인드라 월드리포트 : 12/07/04

   

<부처님은 "우란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로써 효성을 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생각생각에 간절히 부모님과 윗대의 선망조상영가까지 추모하고 받드는 정성으로 우란분회를 베풀어서 삼보께 공양하여 부모님께서 길러주신 지극한 은혜를 갚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불자님께서는 백중기도에 두루 동참하시어 이 세상에 나와 인연되어 먼저 가신 여러 영가를 천도하시어 유주 무주 고흔 영가들의 이고득락의 길을 열어주는 무량공덕을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 나무지장보살마하살

   

등참금 : 영가 1위 만원, 영가옷 오천원

   

우이동 XX사 주지 정혜 합장 >

   

언뜻 들으면 좋은 말씀 같은데, 왜 나한테 이런 우편엽서를 보내는 건가요. 그 절에 간 적도 없는데요? 주지 정혜, 나 아나요? 짜증 지대로네, 진짜.

   

우리 부부 독한 면이 있어. 장모가 돌아가시면서 소원이 뭐였는 줄 아시는가? 나타샤가 교회 다시 다니는 거다. 나타샤가 모태신앙이거든. 헌데, 장모 소원이었는데도 안 가더라. 신은 존재하는데, 자기 편이 아니라는 거야. 해서, 교회 가기 싫대. 반기독교는 아니야. 민이 교회 가겠다고 하면 안 말리니까. 단, 민이 교회 간다고 하고 PC방으로 빠져나가지만.

   

반면, 인드라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인인데, 어머니가 절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지만, 나는 절이 굉장히 싫었거든. 인드라가 불씨잡변 정도전 존경하는 면이 있다. 하여간, 절만 싫었던 게 아니라 철들고 초등 5학 년 때 이후인 어릴 때부터 중넘의 색희들이 정말 싫었거든. 내면에는 부러움이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무위도식하면서 사기꾼처럼 살아가는 게 좀 부러웠던 것 같다. 그래도 예전에는 몇몇 땡중 넘들만 문제라고 여겼는데, 나이를 점차 먹으면서 이넘의 한국 불교 자체가 썩었다는 걸 체감한다는 게다. 내가 불쌍한 어머니 생각해서 현실에서는 그냥 참고 있는데, 어지간하면 나한테 엽서 따위 좀 보내지 마라. 씨발 잡것 스님아. 신도들 돈 뜯을 일이 있으면 그간 금수강산 세금 한 푼 안 내고 자리세 받은 것 다 내놔, 개씨발 땡중 색희들아. 이런다고 또 색안경 쓰지 마라. 교회도 세금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인드라가 무신론자는 아냐. 이십여년간 무신론자였는데 신을 믿기 시작했다. 전도는 할 생각없다. 나도 모르는 신을 누구한테 전도하겠냐, 니미럴. 다만, 딱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신이 말이야, 국유본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 그건 확실해. 인드라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신인 것 같다.

   

가끔 인드라한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신을 믿는다는 발언이 혹 전략적인 것 아니냐고. 인드라가 자신있게 말하는데, 사실 처음에는 전략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성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인드라에게 일어나니 신이 있나?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 다른 이들의 인드라에 대한 비판을 즐기면서 그래, 맞아, 인드라가 좀 나댄 것이지, 하는 반성을 하도록 인드라가 작전을 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문제를 비판한 것이 나타샤거든? 사람이 막 죽어가는 것 같더니 뭐야, 그거 국유본론을 하면서부터 막 살아나네, 하긴 그러니까 신을 믿고 싶기도 하겠지. 허나, 난 아냐. 세상이 비관스러워. 해서, 나타샤의 비판을 늘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드라인데, 사실 그렇게 여기고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에 그걸 뛰어넘은 것이다. 나타샤가 국유본론더러 그거 돈이 되냐는 식으로 비난을 할 때마다 하긴 돈이 안 되지, 하던 인드라가 어느 순간 득도를 하고 만 것인 게다.

   

마자세. 그것이다. 마자세를 하니까 나타샤와도 부부 관계가 좋아진 거다. 부모님과도 좋아지고. 물론 민과는 아직 불화상태이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좋아졌다. 지인들과도 좋아졌다. 국유본론보다 마자세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국유본론 떠들기보다 쪽발돼중, 쪽발놈현, 쪽발일성정일정은 까대지 않고 마자세 하나로 밀고 법정처럼 사기질했으면 지금쯤 인드라는 벤처 재벌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열 받네?

   

"[도박 이어 성매수 의혹까지…불교계 진실게임] "명진 스님이 룸살롱 진상 밝혀야"

9면4단| 기사입력 2012-05-17 03:27

   

[서울신문]

   

조계종 승려 도박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성호 스님은 16일 "신밧드 룸살롱을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가봤다는 명진 스님이 당시의 진상을 육하원칙에 따라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호 스님은 서울신문과 전화통화를 하고 총무원 호법부장 정념 스님이 이날 아침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명진 스님 말씀이 자승 스님은 다른 곳에 있다가 중요한 얘기를 하자고 그래서 (신밧드 룸살롱에) 왔다고 한다. 장소가 적절치 않아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나가셨다고 한다."고 말한 데 대해 이같이 요구했다. 성호 스님은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명진 스님이 잘 알고 있는 만큼 신밧드 룸살롱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릴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포커판을 "놀이 문화"라고 표현한 총무원 호법부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스님들이 모이면 화엄경을 봐야지 왜 카드를 보느냐."고 반박했다.

   

성호 스님은 문제의 신밧드 룸살롱에 대해 "나도 가본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성호 스님에 따르면 신밧드는 '2차'(성매수의 은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풀코스 룸살롱'으로, 방이 40개 정도 있으며 여자 종업원이 150명가량 있었다. "다른 스님을 목격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성호 스님은 "그건 말할 수 없지만 자승·명진 스님의 2001년 술자리에는 J, W 스님도 동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의 신밧드 룸살롱은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영업을 해 오다가 두 차례 이름을 바꾸어 현재는 A 룸살롱으로 영업하고 있다. 업소는 지하 1층에 있는데 5층에 있는 모텔까지 바로 연결되는 구조다. 경찰 관계자는 "업소에 들어갈 때는 가발을 쓰고 평상복을 입는데 스님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다.

   

황성기·배경헌기자

   

marry04@seoul.co.kr"

   

   

조계종 띠발넘들아. 귀씻고 잘 들어. 인드라가 하는 말을 내면적으로 누구보다 붓다의 길을 가기에 비판하는 것이라는 언론플레이로 해석하지 말아. 인드라 그런 것 굉장히 싫어한다. 본질을 회피하는 듯한 말장난으로 넘기는 것, 인드라가 좌시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김용옥 넘도 문제군. 이 색희가 머리를 깎고 사기치는 걸 보니까 용옥이 두개골을 도끼로 찍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 김용옥이 '기철학산조'를 그나마 잘 써서 힘겹게 용서했지만, 이 색희 지금까지 생쥐랄을 떨어대는 꼴을 보기가 힘들더군. 조져버려야 하는데. 이 대목에서 꼭 하는 말들이 있더군. 닮아서 싫어한다나. 인드라가 이런 것에 아직 초연하지 못하니 큰 넘이 아닌가 보다. 저런 말도 다 천사의 언어로 들을 줄 알아야, 진짜 마자세인데. 

   

하여간, 땡중 색희들이 배만 불러서 중세 귀족처럼 사기치는 말만 현자의 말씀이라고 떠드는 것 인드라가 안 속는다. 인드라는, 네넘들 배때지를 죽창으로 찔러서 네넘들이 치부한 재산을 해부해야 직성이 풀리는 넘이라는 것만 알아라.

   

하여, 중생을 걱정하는 시간에 니네들 일이나 좀 걱정해라. 맨날 들리는 게 신도 강간하고, 돈 뺐고, 사기치고, 도박하고, 성매수하는 것이냐. 법정이란 색희도 도저히 못 믿을 색희고, 명진이란 병쉰색희는 뭐하는 넘인지 모르겠고. 그나마 성철 스님이나마 있어서 인드라가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소설 패러디로 좀 씹어보기나 했지, 다른 색희들은 뭐냐. 죄다 동해 바닷물에 쓸어버리고 싶구만. 국유본 CIA 지시 받아서 베트남이나 티벳에서 하는 것처럼 씨발넘들이 이명박 길들이기 따위나 하고^^! 생각하니까, 법륜, 이 개종자 색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믹서기에 갈아야 하나? 정말 죄많은 중생이로고.

   

인드라가 다른 건 모르겠다. 허나, 인드라가 가끔 골 때릴 때가 있는데, 몸이 으스스한 느낌이 일더라. 4대강 때문에 분신했다는 스님 한 명이 있지?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했다는 것이 인드라가 받은 계시다.국유본 CIA 작품인지 뭔지 모르겠다만,  매우 괴로워하면서 죽었어. 인드라가 그 당시에 느끼기에 그 죽음은 너희 썩은 도박 성매수 땡중 수뇌부 생각과 달리 선거를 위해 타살당했다는 것이다. 이것 물증 없다. 오직 인드라 예감일 뿐이다. 이런 예감 아무 때나 오지 않고, 언제 올 지도 모른다. 그냥 살면서 몇 번 정도 제 멋대로 온 것 뿐이다.

   

허나, 인드라를 신화화하지 말길. 한반도는 영성의 나라여서 가문마다 집안마다 한 명쯤은 샤먼이요, 무당이요, 구루요, 랍비요, 선생이니까. 인드라는 그저 한반도 영성계의 은하수처럼 깔린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남들보다 좀 영성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해서, 어지간한 영성을 뿜는 존재에게는 기가 죽지 않는 편이다.

   

   

"[8시뉴스 '날'] 사이언톨로지가 뭐길래…톰크루즈 세번째 이혼

| 기사입력 2012-07-01 22:22 | 최종수정 2012-07-01 22:27

   

   

[앵커]

   

할리우드 최고 배우인 톰 크루즈가 세 번째 이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혼 사유가 그가 신봉하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사이언톨로지교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루라 기자입니다.

   

[리포트]

   

톰 쿠르즈, 제니퍼 로페즈, 윌 스미스. 이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의 공통점은, 사이언톨로지스트.

   

[인터뷰] 톰 크루즈 / 2008년

   

"사이언톨로지스트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처음 접했을 때 '바로 이거다' 했어요."

   

사이언톨로지는 1954년 미국의 공상과학 소설가 로널드 허바드가 창시했습니다. 과학적으로 개발한 심리치료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치유한다고 믿습니다. 1993년 미 정부로부터 면세특권을 받는 종교로 인정받고, 신도수가 8백만명에 이른다고 선전합니다.

   

[인터뷰] 토미 데이비스 / 사이언톨로지교 대변인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지난 5년간 신도 수가 과거 50년동안보다 더 증가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도 약 30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이 내는 기부금 명목의 교리비가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유럽 등 일부 국가는 불법종교단체라며 활동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톰 크루즈 이혼도 바로 '사이언톨로지' 종교를 둘러싼, 부부간 갈등때문인것으로 보입니다. 부인 홈즈는 6살 난 딸 수리가 사이언톨로지에 심취되지 않도록 이혼까지 결심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홈즈는 단독양육권을 위해 공동부양권을 지지하지 않는 뉴욕주까지 가서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헐리우드에서도 종교 갈등 때문에 이혼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TV조선 이루라입니다.

   

[이루라 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01/2012070101440.html

   

   

언론 재벌 머독, 사이언톨로지교 비난…톰 크루즈 이혼과 관련

| 기사입력 2012-07-02 08:34 | 최종수정 2012-07-02 08:45

【로스앤젤레스=로이터/뉴시스】양문평 기자 =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최근 이혼 소송을 당한 배우 톰 크루즈가 사이언톨로지교에서 2위나 3위의 서열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이언톨로지가 으스스한 단체라고 비난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로 유명한 정상급 스타 크루즈는 오래 전부터 사이언톨로지교에서 유력한 멤버로 꼽혀왔으며 바로 그것이 그와 그의 세 번째 부인 케이티 홈스와의 이혼 소송 사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머독은 그의 공식 트위터에 "사이언톨로지는 매우 괴상한 종교단체며 그러나 엄청난 돈으로 톰 크루즈는 그 서열이 2위나 3위로 돼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머독처럼 세계적인 언론사 경영주가 톰 크루즈 같은 유명한 배우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머독도 자신의 글이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1시간 뒤 "사이언톨로지 측이 수 백 건의 트위터로 공격해오니 그것이 더 늘어나며 더 가관이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라"고 썼다.

   

yang_pyung@newsis.com"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20702&rankingSectionId=104&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1&oid=003&aid=0004584598

   

영성 천국에서 매일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이런 기사 보고 딱 감을 잡지 않느냐?

   

우크라이나 같은 데서는 김태희 같은 여자가 밭을 간다는데

한국 같은 데서는 닭 튀기는 사람도 샤먼이라는 게다.

   

따지자면, 전 세계에서 영성이 차고 넘치는 지역으로 이스라엘만이 유일한 적수라는 것이 한반도인 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워낙 똘끼가 많은 넘들이 많이 산다.

해서, 오해가 많은 것이다.

한국이 지나치게 경직되었다느니 뭐니 하는 게다.

허나, 이런 애들일수록 해외 경험이 의외로 없는 병쉰들이다.

   

한국애들이 얼마나 개성이 넘치는 줄 아냐?

한국애들이 해외에 배낭여행 가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뭔 지 아냐?

한국인만한 애들이 없어.

다들 평범해.

외국인만 있는 데서 보면 한국인은 죄다 천재야.

단지, 올림픽 금메달 기능공 손재주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한국애들은 말이지,

그 하나하나가 다 대장감이요, 선생감이야.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국애들은 세계 어디를 내놔도 반드시 대장 아니면 직성이 안 풀리는 넘들이다.

   

이게 유태인 넘들하고 비슷한 성격인데,

유태인들도 둘만 모이면 서로 신경 많이 쓰거든?

그거 알아?

유태인이 단결력이 높다고?

다 헛소리다.

유태인이 가게하거나 기업하면 자기 밑에 직원으로 유태인이 들어오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 색희가 자기 가게나 기업 말아먹을 게 틀림없으니까.

분명 노조를 만들든, 아니면 외부에 정보 팔아서 기업 M&A하고도 남을 넘이니까.

   

바로 이 기질과 유사한 족속이 있으니 한반도인이다.

   

한국인들이 주변에 한국인이 없으면 어떤 줄 아냐?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제대로 실천한다.

이럴 때 한국인 믿어야 한다.

한국인 믿고 살면 그 집단 복 받는다.

천국이니까.

   

허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 지역에 한국인이 한 명 더 가면 그 다음부터 그 지역은 지옥이 된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이유는 매우 유치하다.

   

한국인이 다른 족속들과 함께 있으면 신이 되고, 천재가 되고, 리더가 된다.

허나, 다른 한국인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 있는가.

   

- 허접한 색희가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있네?

   참 인생 편하게 사는 넘이다.

   

천사 같은 한국인이 악마가 되어

온종일 다른 한국인 생각만 한다.

먼저 온 한국인이나 나중에 온 한국인이나 서로 죽기살기로 살다가 둘 다 뒈진다.

   

한국인이 획일적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겉만 보고 아는 거다.

겉보기에 서양인이 한국인 보기에 다 똑같아 보이지?

   

인드라가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건

세상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족속은

유태인과 한국인 뿐이다.

   

헌데, 오해하고 있다.

유태인이 단결을 잘 한다고.

한국인이 집단적이라고.

전혀 아니다.

   

그건 진짜 오해다.

유태인이,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정말 단결할 때가 있다.

아주 드물다.

그런 때가 오면 전세계 민족이 몸을 으스스 떨기 마련이다.

   

한국인은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 응원 때 그랬다.

누구도 붉은악마 응원을 한 적이 없다고 그때 많이 비난받았다.

헌데, 어쩌랴.

그 이전까지 그런 야외응원하면 스킨헤드족 광란으로 살인, 방화, 약탈로 이어졌었다.

허나, 한국인은 그런 것 거의 없었지.

예서, 세계가 놀란 것이다.

   

유태인도 비슷하지.

거의 대부분은 유태인들 스스로는 유태인들 서로도 부정해.

넌 너고, 난 나일 뿐이다.

   

이 표현을 환상(판타지) 문학으로 말한다면,

드래곤의 삶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성인인 드래곤은 고독한 삶을 살면서 가끔 유희를 하지.

이런 드래곤이 설사 인간에게 레이드 당해서 죽는다 하더라도

다른 드래곤이 인간에게 복수한다 이렇게 생각을 안 하지.

   

독립된 개체일 따름이니까.

쿨한 것이지.

   

잘 생각해 봐.

   

어떤 넘들은 한국 유학생 이야기하면서 창의성 부족을 내세울 수 있다.

헌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근대 서양인들이 조선에 와서 한국 통치가 참 쉽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와 달리 형편없는 군사력으로 한국인을 통치했거든.

생각해봐.

오늘날까지도 뉴욕, 파리, 런던, 베를린, 로마 등은 밤길을 조심해야 해.

치안이 확립되지 않았어.

허나, 백 년 전 조선 말이야.

치안이 잘 되었어.

놀랍지 않아?

처녀들도 밤길을 맘대로 활보하며 다녔다고 해.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아 지하철에서 술취해서 침흘리며 자는 여자애들 많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강간당하거든.

궁금하면 배낭여행 해보라고.

헌데, 백년전 포졸들은 그저 육모방망이 하나로 다녔어.

그걸로도 치안 유지가 된 것이야.

   

하면, 한국인이 병쉰일까?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류더미에 파묻어야했다.

왕인 게 고역이었어.

내가 왕이니까 멋대로 하겠다고 하잖아?

그럼 왕이 멋대로 했다고 사관이 글을 썼어.

죽기를 각오하고 말이야.

그것이 조선왕조실록 오백년사야.

전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역사기록 없다.

   

왕이 뭐 좀 한다고 하면 일단 상소문부터 올리는 게 조선이었다.

아무리 잘 만든 제도도 정말 엄청나게 태클 걸었다.

대표적인 게 세종 대 귀족 싸움 아니냐.

여기서 귀족이 악인이 되는데, 사실은 그게 조선 전통이었다.

   

또 한국 백성들 졸라 착취당했다고 생각해?

웃기지 마.

그게 국유본 서양사 애들이 가르치는 것들이지.

왜? 서양이 백성들 착취를 졸라 했거든?

병쉰들아, 잘 들어라.

조선은 노예마저도 대접받고 살았어.

   

단적으로 하나만 말하겠다.

   

초야권 알아?

초야권이 뭐냐?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민들 처녀들을 결혼하기 전에 시식하는 게 초야권이야.

영주가 결혼식 전에 남편 먼저 처녀들을 따먹어서 영지의 장남을 모두 영주 자식으로 만들어

영지의 단결과 발전을 꾀하는 게 목적이었다는군.

   

영화 '브레이브즈 하트'를 참고해라.

프리메이슨과도 연관이 있는 영화이니까.

   

봐라. 이런 제도가 조선에 있었냐?

   

이것 하나만 예외다 라고 말할 것인데, 잘 생각해보렴.

한국의 평민이 과거제도로 고관대작으로 등용된 예가 유럽보다는 많잖아?

   

게다가 결정적인 건,

노예라고 해서 서양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이 노예라고 생각하냐?

조선이?

   

쪽발이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뻥튀기한 한국 재야역사론도 문제이지만,

서양사 기준의 한국 역사관도 지나치게 자학적인 것도 반성할 대목이야.

하긴 이 때문에 왜곡되었긴 하더라도 쪽발이 사관을 응용한 주사파 역사관이 환영을 받기는 하지. 

   

조선은 말이야.

봉건제 폐지 뭐 이러면서 서양애들이 국유본 지시 받아서 졸라 작전했거든?

결과가 뭔지 아냐?

유생들만 봉건제 폐지, 사회주의 운운한 것이야.

안동 선비들 말이야.

상당수가 사회주의자가 되었어.

박정희 형이 동학혁명 가문 출신으로 사회주의자가 된 것도 다 이 때문이야.

이게 유학과 사회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는 거야.

좆도 모르고 유학 비난하는 애들은 공부 좀 해라.

   

한국인도 유태인과 실은 비슷해.

해서, 한국인이 모래알과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야.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뒈집니다.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우연적으로 같이 하는데

이때는 한국인이나 유태인이나 역사의 기원이 되는 것이지.

   

붉은악마 이후에 각국 응원은 물론 클럽 응원도 붉은악마처럼 하는 것 알기는 아냐.

물론 여기서 겸손해야 한다.

왜, 사실 2002년 붉은악마 기획은 국유본이 했으니까.

   

인드라가 2002년 이전에 사실상 붉은악마 수뇌부 중 하나여서 안다.

붉은악마 회장들 인드라에게 자문 받았다.

   

본론 격인 사이언톨로지로 가자.

   

   

   

"Aleister Crowley(1875-1947)

   

요절한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Randy Rhoads)의 아름다운 펜타토닉(도레미솔라의 다섯 음계로 이루어진 스케일) 솔로로 많은 Rock팬들의 가슴을 쥐어짰던 이 고전은 '악마주의를 찬양한 노래'라는 꼬리표를 달고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당시 [월간팝송]이라는 음악전문지가 있었다). 이 크로울리라는 양반이 사탄을 신봉하는 종교의 교주였으며, 오지 오스본 역시 악마를 숭배하기 때문에 크로울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아마 이 곡에 대한 소개는 아직까지도 큰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오늘의 '노래따라 이름따라' 주인공은 바로 Mr.Crowley 즉, 알리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다.

   

본명은 알렉산더 크로울리(Alexander Crowley). 1875년 영국 워윅셔(Warwickshire)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엄격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어머니의 교육방침에 따라 학교 역시 기독교 기숙 학교로 보내졌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운동 경기를 할때 점수를 기록하지 못하게 했는데, 점수를 기록하면 소위 '탐욕의 죄'를 범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또한 학생이 죄악을 범하는 것을 많이 잡아내는 교사는 승진 등의 이득을 보게 되어 있었는데 몇몇 교사들이 이를 악용하여 일부러 학생이 죄를 범하게 유인하고는 이를 트집잡아 처벌하는 함정수사를 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끼리 친구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도, 사탄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는 거룩한 행위였으므로 장려되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 재학중이던 12세의 크로울리는 어느날 동급생에 의해 "몰래 맥주를 마셨다"는 허위고발을 당하게 된다. 이후 크로울리에게는 빵과 물 이외에는 어떠한 음식도 금지되었으며 매일매일 심문을 당하면서 죄의 자백을 강요당했다. 크로울리는 무려 두 학기에 걸쳐 이같은 벌을 계속해서 받았는데, 스트레스와 영양부족으로 인해 신장의 질병을 얻게 되어 결국은 자퇴하고 집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지나치게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했던 어머니, 그리고 왜곡된 교육을 시행하던 기숙학교에서의 기억때문에 크로울리는 소년시절부터 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가지게 된다. 이 무렵 그는 타락 천사 루시퍼와 신에의 도전을 다룬, 밀턴의 [실락원]을 우연히 구해서 읽게 되는데 루시퍼의 행각에 큰 감명을 받은 크로울리는 '사탄'과 '마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스무살이 된 크로울리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이무렵 그는 이름도 알렉산더에서 알리스터(그리스어로 '복수의 신'이라고 한다)로 바꾼다. 습작과 독서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크로울리는 어느날 중세의 마법서적들을 고서점에서 구해 읽게 된다.

   

소년시절부터 운명적으로 끌렸던 은비학에 눈을 뜨게 된 크로울리는 좀 더 체계적으로 마법을 배우기 위해 '황금새벽(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이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 단체의 상층부에는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브람 스토커(Bram Stoker)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같은 유명 작가들도 요직을 맡고 있었으며, 프리 메이슨(Free Mason)의 지회와 같은 성격의 조직이었다고 한다. 황금새벽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게 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크로울리는 이 비밀 조직의 상층부에서 일어났던 멤버들간 암투와 음모에 넌더리를 내고 세계일주를 떠난다. 남미와 아시아 등지를 여행하던 크로울리는 마법에의 관심을 접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기로 결심하여 1903년경 로즈 켈리(Rose Kelly)라는 평범한 여인과 결혼한다.

   

그러다가... 신부 로즈와 신혼여행을 떠났던 이집트에서 크로울리는 뜻하지 않게 이집트의 전쟁신 '호루스'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들의 에퀴녹스(Equinox of the Gods)가 도래했다!"는 천상의 선언을 들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대략 2000년을 단위로 어떤 신이 도맡아 세상을 관장하는데, 그 순번이 바뀌는 걸 에퀴녹스라고 한다. 이집트 신화에 의거, 기원전 2000년무렵부터 예수탄생까지는 '자애의 여신' 이시스가, 예수탄생 이후부터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그리고 이제 서기 1900년을 맞아 이 세계를 '전쟁의 신' 호루스가 관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마누라고, 호루스는 그들의 자식이다). 이시스가 지배하던 시대는 '모계사회'였다. 어머니 대자연의 권능이 모든 것을 지배했고, 인류는 본능에 따라 성생활을 영위했다. 그리고 오시리스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죽음, 즉 시체를 숭배하게 되었다. 여기서 시체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부계사회가 확립되었고 자손 번식 이외의 섹스는 죄악시되었다. 이제 '호루스'의 시대, 크로울리는 이 시대를 '왕좌에 앉은 어린아이의 시대'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신은 1904년부터 앞으로 2000년의 주기를 지배하며 이미 그의 지배력은 사방에서 뿌리내리고 있다. 어느새 원죄의 개념은 사라지고 천진무구함과 무책임함이 사회 곳곳에 퍼지고 있으며 생식 본능은 이상하게 변화되어 양성 내지 중성화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룩해낸 과학 문명의 진보를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가올 재앙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재앙들을 방지할 노력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해당 사회의 도덕적 진화가 극도로 초보적일 때만 가능한 독재자들의 등장은 어떠한가. 유아적인 사교들(공산주의, 전체주의 등)의 등장은 어떠한가. 기성 종교들의 무너지는 권위는 어떠한가. 연예사업의 발달을 보라. 축구 경기와 퀴즈 쇼에 열광하는 이들을 보라.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보채는 아기를 달래기 위한 딸랑이와 같은 것이다.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의 참혹함은 매일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지만 우리는 별로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린아이인 것이다. 이 호루스의 시대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랄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하여 크로울리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던 것처럼, 호루스 신의 율법이 적힌 새로운 성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리베르 레기스(Liber Legis, 율법의 서 - 속칭 지옥의 성서)]라고 한다. 이 율법의 대전제는 '그대 뜻하는 것을 행하라(Do what thou wilt)'이다. 여기서 '뜻', '의지'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텔레마(Thelema)'를 가지고 크로울리는 이태리의 세팔루 지방에 '텔레마의 사원(Abbey of Thelema)'을 세워 호루스 신의 율법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원의 규율을 어긴 자에게 내렸다는 '면도날 자해 수련'이나 '고양이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행위'등 다소 엽기적인 행각들이 세상에 알려져, 크로울리는 그 악명을 서서히 떨치게 되었다. 또한 크로울리는 [리베르 레기스]를 총 4번 출판하였는데, 이때마다 세계적으로 큰 혼란이 닥쳤다. 크로울리에 따르면 [리베르 레기스]는 출판하는 행위만으로도 마법적인 효력을 지녀 텔레마의 율법이 가진 영적인 힘으로 기존의 질서를 와해시킨다고 했다. 말씀을 전할 때가 되었을때, 이 행성 전체가 반드시 피로 씻겨야 한다는 것.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나, 그 구체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12년, [리베르 레기스] 초판 발행 9개월 후 제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라 할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9개월은 수태된 태아가 자궁에서 나오는 시간이라고 한다. 1913년, [리베르 레기스]가 두번째로 출판되고 9개월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30년, [리베르 레기스]가 세번째로 출판되고 또 9개월 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중일전쟁 및 진주만 기습을 준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938년 12월 22일, [리베르 레기스]가 마지막으로 출판되고 9개월이 지나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주장이 있다. 크로울리는 1925년 '동방성당기사단'이라는 비밀 마법조직의 총수로 임명되는데,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역시 이 동방성단기사단의 회원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울리에 따르면 히틀러의 사상 역시 [리베르 레기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우주의 원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마침내 국제 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용당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또한 크로울리는 동방성당기사단 독일 지회의 다른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그 사실을 히틀러에게 경고하였으나 히틀러가 당최 듣지를 않았다고도 한다).

   

이후 크로울리는 '텔레마의 사원'에서 호루스의 율법과 마법을 가르치다가, 1934년 자신을 '흑마법사'로 묘사한 미술가 '니나 햄닛(Nina Hamnett)'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며 송사에 휘말린다. 이 건에는 텔레마 사원에서 자신의 남편이 크로울리에게 마법을 배우다가 살해당했다는 피고측 증인의 주장까지 개입되면서 결국 크로울리는 패소하고 전재산을 잃었다. 남은 여생동안 크로울리는 동방성당기사단의 연금으로 연명하다가 1947년 생을 마감하였다. 크로울리의 저작과 사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60년대 히피즘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Rock음악에의 영향이 지대하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204&docId=50067773&qb=QWxlaXN0ZXIgQ3Jvd2xleQ==&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cNG35Y7udssbee7Hsssc--189837&sid=T-HNDXK38U8AAAFQEOM

   

크롤리 이야기를 들으면 국유본론을 오래 접한 이들은 일단 '물병자리 프로젝트'를 떠올릴 것이다.

   

출처] 존콜먼의 300인위원회 중 발췌(버나드레빈과 물병자리프로젝트)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존콜먼의 300인위원회 중 발췌(버나드레빈과 물병자리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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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蘇塗)

2009.02.0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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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레빈 (Bernard Levin) 은 아마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닐것이다.  퇴폐적인 팝 스타들이나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발생한 가십거리와는 달리, 이러한 학자는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에서 로마 클럽의 통제 아래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 가운데 레빈은 이란, 필리핀, 남아프리카, 니카라과, 한국을 동요시키는 연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란 국왕의 몰락은 버나드 레빈과 리처드 포크 ( Richard Falk) 가 작성하고 로버트 앤더스 (Robert Anderson) 의 아스펜 연구소가 감독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레빈은 또한 <시대의 전망과 도덕 Time Perspective and Moral>이라는 논문의 저자이기도 하다.  국가와 그 지도자의 정신력을 떨어뜨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이 책은 로마클럽에서 출판했다.  여기에 발췌한 일부가 있다.

   

"공포 전략에 의해 사기를 떨어뜨리는 주요 기술은 바로 이 전술에 있다.  대상이 된 사람의 시야를 흐르게 하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 덧붙여 모순된 뉴스를 퍼뜨린다. 대상이 된 인간은 엄한 징계 처분과 제대로 인간 대우를 한다는 약속 사이에서 동요하여 흔히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그때 그 사람은 특정한 계획이 목표로 가고 있는지 빗나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명확한  목표로 가지고 그에 따른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가혹한 내적 갈등에 빠져 온몸이 마비된다."(우리의 체념이 이런것인가요?)

   

   

로마클럽의 청사진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들, 특히 각국의 정부 지도자들에게 유효하다.  미국 국민인 우리들은 "아, 여기는 미국인데 그럴리가 없어"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마 다른 국가들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에서 말이다.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을 강제로 물러나게 한 수법이야말로 전형적인 레빈의 방법이다.  그가 사기가 떨어져서 혼란에 빠지는 일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탄핵되었을 리가 없다.

   

레빈과 로마 클럽의 공동계획은 우리 모두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계획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양떼와 같은 존재가 된다.  국가를 '구원' 하겠다는 강력한 지도자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반드시 의심의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영국 정보부에 의해 특히 파리 체재 중 몇 년 동안 훈련받았던 호메이니의 예를 생각해 보자.  그는 이란의 구세주처럼 별안간 등장했다.  보리스 옐친 (Boris Yeltsin) 도 남아프리카의 모반 수뇌 '케린스키' 데 클레르크 ( 'Kerensky' F. W. De Klerk) 전 대통령도 똑 같이 MI-6  훈련소 출신이다.

   

   

<기독교를 장악한 물병자리 프로젝트>

   

로마 클럽은 미국을 '약화시키기' 위한 300인 위원회의 명령을 실행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47년 동안 미국 국민을 상대로 전재을 벌였는데 그들이 실로 그 임무를 마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위를 돌아 보고 우리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살펴보라.

   

마약, 포르노, 로큰롤 음악, 프리섹스, 가정 파괴, 레즈비언, 동성애가 가득하고 드디어 임산부가 죄없는 아기들을 몇백만씩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른 현실을 보라.  대규모 낙태만큼 잔인한 범죄가 지금까지 있었던가?

   

미국은 정신적. 도덕적으로 무너졌다.  공업 기반은 붕괴되어 4천만명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대도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의 끔찍한 소굴이 되었고, 살인 범죄율은 외국보다 거의 세 배에 이르며 4백만 노숙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고.  정부의 붕괴는 임계점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이 내부에서 썩어들어 단일세계정부라고 하는 신암흑시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로마 클럽은 기독교 교회들을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질적인 이념을 위해 싸울 카르스마파와 근본주의자, 복음주의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에 혼란스러워했다.  어떻게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립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이 교파에 속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기독교와 다른 근원에서 기인했거나 심지어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념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 조직들이 미국에 일곱 군데가 넘는다.

   

그 이름을 밝혀서 마녀사냥의 목표물이 되는 것은 내라 바라는 바가 아니다.  또한 밝힌다고 해서 내가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유명한 기독교 교회에 융자를 해준 아먼드 해머 ( Armand Hammer)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프로젝드에 몇백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는 평생 반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종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은 중동이라는 숨은 목적 때문이었다.

   

해머는 정원을 호화롭게 꾸민 거대한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큰 영향력을 이용하여 몇백만 명의 청취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시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그 교회는 기독교 메시지를 보내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원래 MI-6 의 지배 아래에 있는 중동의 조직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정보원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기독교 우익을 장악한 것은 '물병자리 그룹 계획 작전 (PAGO)' 이라는 암호를 지닌 미국의 최고 정보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미국이 드디어 무정부상태가 되면 기독교 우익이 일제단속을 이유로 결집할 것이므로 이를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위한다는 저명한 사람들이 동시에 반대파를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실상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른바 '기독교' 관련 책들이 수없이 배포되고 있는데 그들은 교묘하게 의식조작을 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1930년대에 조지 버나드쇼와 시드니 웨브의 지도 아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그룹에서 고안한 것이었다.

   

둘 다 300인 위원회의 프로젝트인 걸프 전쟁과 NAFTA 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기독교를 더욱 지지함으로써 신세계질서 - 단일세계정부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걸프 전쟁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편지들을 많이 받았다.

   

"당신은 어떻게 기독교 전쟁인 걸프 전쟁에 반대할 수가 있습니까?  개전하기 직전에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목사가 조지 부시 대통령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편지들을 읽으면 타비스톡 인간관계연수소가 임무를 얼마나 잘 해냈는지 알 수가 있다.  잘 했든 못 했든 이것는 '내적인 세뇌' 이다.  정부는 기독교 우익에게 무시무시한 힘을 쌓아올린 다음 단일세계정부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기독교 우익이 얼마나 심하게 악용되었는지 잠깐 생각해볼 때이다.

   

걸프 전쟁을 지지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이제 눈을 뜨고 그들이 내게 보낸 편지에 나타낸 의견과 신념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미국 곳곳에 있는 300인 위원회의 싱크탱크가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미국의 다른 걸프 전쟁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300인 위원회의 목표물이 되어 철저히 세뇌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고 있다.

   

우리 미국 국민은 전세계로부터 부려움을 샀던 미국식 생활양식의 종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한때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해운업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로 만든 주요한 역할을 했다.  해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므로 경제 번영에 지속적으로 한몫을 했다.  하지만 '관세와 무역법' 이 통과되고 특히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 Eisenhower) 정권시대에 조선업은 로마클럽의 압력을 받아 의도적으로 붕괴되었다.

   

2세기에 걸쳤던 바다의 지배권은 아이젠하워 정부와 더글러스 딜런 ( Douglas Dillon) 에 의해 외국으로 넘어갔다.  딜런은 윌 스트리트의 은행가이며 딜런 리드 회사의 사람이었다.  이 회사의 멤머들은 민주, 공화양당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딜런은 양당과 잘 융화되어 유권자들이 백악관에 누구를 보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중했다.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외교문제평의회인 것이다.

   

300인 위원회의 하수인들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딜런은 자랑스러운 무역국으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고 지금은 NAFTA가 그 종착점을 향해 끌어가고 있다.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클린턴 ( Bill Clinton) 은 남아 있는 공업력을 마저 파묻는 데 바쁘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뉴트 깅리치 ( Newt Gingrich) 같은 '공화주의자' 들이다.  깅리치는 의회에서 132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 의원들의 지도자이며 단일세계정부 계획을 지지하고 있다.

   

   

 ps)

300인위원회는 2001년 8월 28일 발행으로 되어있는데 몇년이 지난 지금 시대정신 동영상에서

물병자리 프로젝트에 1시간을 할애한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인가요?

물병자리 프로젝트와 시대정신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응이님 글 중에서"

   

   

크롤리는 이집트 여행 중에 계시를 받는다. 헌데, 계시를 받은 뒤 행각이 흥미롭다. 청소년기에 받았던 가혹한 교리 실천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일수록 더 악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것과 유사한 듯싶다. 이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데, 인드라는 청출어람으로 설명하고프다. 그만큼 크롤리에게는 강력한 기독교가 마음 속에 자리잡았기에 그 지독한 기독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더 엽기적인 검증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크롤리는 겉만 기독교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니체인 게다. 겉의 사상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못하니 이성은 더더욱 짐승적 본성과 결합한 셈이다. 그것이 공산주의요, 파시즘인 게다. 하고,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강제한 국유본인 게다.

   

크롤리의 행태는 사이언톨로지에 남아 신도가 되기 위한 심리테스트를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여기에 하나 더 말한다면, 동방기사단이다.

   

"크로울리는 1925년 '동방성당기사단'이라는 비밀 마법조직의 총수로 임명되는데,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히틀러 역시 이 동방성단기사단의 회원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울리에 따르면 히틀러의 사상 역시 [리베르 레기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우주의 원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마침내 국제 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용당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또한 크로울리는 동방성당기사단 독일 지회의 다른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그 사실을 히틀러에게 경고하였으나 히틀러가 당최 듣지를 않았다고도 한다)."

   

이 시기 크롤리가 프리메이슨적 조직을 만들었다고 화제인데, 이 시대 크롤리만 신비주의 교주가 된 것이 아니다. 이 시기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조직들의 융성기였다.

   

"1903.8 포드의 첫 차 'A형'출시,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가다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1908년,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광고였다. 그리고 포드는 앞으로 포드 사에서는 오직 T형 하나만을 생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앞으로 포드라는 상표를 붙인 자동차는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단 색깔만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검은색이기만 한다면!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군!"

포드의 이런 대담한 결정을 듣고 가장 소리 높여 환호한 사람들은 미국의 일반 대중이 아니라, 경쟁업체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망하려고 작정했군!" 그들이 보기에 포드는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우선 자동차란 사치품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 부유층은 단조로움을 제일 싫어하며,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옵션이 전혀 없이 색깔부터 성능까지 오직 한 모델로 승부한다고? 그리고 싼 가격에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내놓는다는 목표는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같은 시간, 한때 포드의 동업자로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창립했던 알렉스 맬컴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옛 친구이자 동료는 끝장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이미 3년 전에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고집하는 포드와 충돌한 끝에 자신의 주식을 팔아 치우고 포드 사를 떠났으니 말이다.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 'T형' 앞에 선 헨리 포드

   

   

맬컴슨은 1903년을, 포드와 의기투합해서 처음 회사를 세우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 때는 모든 게 엉성했지. 하지만 두려울 게 없었는데…." '빨리 달리는 차'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오직 속력에만 중점을 두고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주대회에 내보내 당당히 1등! 그 여세를 몰아 마침내 회사를 창립! 목공소 건물에 세를 들고, 제작 기계도 살 수 없어서 하청을 주는 형편이었지만 의욕만은 어떤 회사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 해 7월, 그 덥던 여름날, 마침내 포드의 첫 차인 'A형'을 내놓았지. 850달러짜리 소형차였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첫 해에 2천 대 가까이 팔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헨리 그 녀석이 고집을 피워서…. "기술자로서는 최고인데, 하지만 경영자로서는 틀렸어…." 포드 자동차의 '초대 회장'이었던 맬컴슨은 옛 동료의 몰락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그 안타까움은 당혹감과 괴로움으로 변한다. 포드의 T형이 사상 최초로 연간 1만 대 판매를 돌파했던 것이다. 그 기세는 날로 더했다. 1911년에는 3만 대, 1913년에는 10만 대를 넘어섰으며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T형이 생산되었다. 얼마 후에는 지구상의 자동차 100대 중 68대가 포드의 T형으로 채워졌다.

   

   

'마이 카'시대를 열다

"망할 작정을 했던" 포드는 어떻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자동차는 어차피 소수를 위한 사치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반 대중에서 고객을 찾은 그의 선택이 바야흐로 대중사회로 접어들고 있던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포드는 입버릇처럼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동차라면 복잡해서는 안 되며, 기술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운전과 정비를 척척 할 수 있어야 하고(당시의 자동차는 아주 단순한 정비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했다), 유지비도 적게 들고, 비포장도로든 어디든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싼 값으로 차를 내놓기란 쉽지 않았다. 비싼 차라면 95퍼센트의 대중이 지갑을 열 리가 없다.

   

포드는 이 문제를 '생산 공정 단순화'와 '합리화'로 해결했다. 오직 T형만을 생산하기로 함으로써 생산 공정은 표준화되었다. 여기에 테일러가 수립했던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 "노동자가 단 한 순간도 업무에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게 하고", "작업장의 단 한 뼘도 불필요한 공간이 없도록" 모든 것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조립 라인의 노동자들(1913년)

   

   

1911년부터는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했다. 그때까지는 백화점 진열장 등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컨베이어 벨트를 처음으로 공장에 설치한 포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벨트의 부품에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라인 생산 시스템을 창출해냈다. 이로써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 1908년에는 노동자 한 사람이 연간 자동차 3대를 생산하는 꼴이었으나 1914년에는 19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자동차가 만들어졌는데, 1914년에는 24초당 1대가 되었다. 그만큼 가격도 싸져서, 1908년에 900달러이던 T형이 1914년에는 400달러가 되었다. 생산 비용이 줄어든 만큼 종업원의 임금도 후해졌다. 포드 사의 노동자들은 일당 5달러를 받았는데, 동종업계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고임금이었다. 헨리 포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돈을 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포드의 T형 덕분에 미국은, 그리고 곧 이어 세계는 '마이 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노동자도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말이건, 마차건, 자동차건 '자가용 탈것'은 언제나 소수 귀족-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오랜 역사를 마감하는 '혁명'이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고속도로가 뚫리기 시작했고, 일주일 동안 고된 근무를 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멀리 여행을 떠나는 풍경이 점차 일상화되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의 생활은 자동차가 없으면 안 되며, 출근, 통학에서 쇼핑, 레저, 뭐든지 자동차 도로를 중심으로 생활의 틀이 짜여 있다. 이런 생활방식이야말로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포드의 생산 방식과 경영 철학은 T형 자동차처럼 세계로 퍼져나갔고,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라인 생산, 과학적 관리기법, 소수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소품종 대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테마로 자리잡았다. 학자들은 이것을 '포디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포디즘의 그림자도 컸다. 이제는 세계 최대의 부자 대열에 낀 포드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히 고임금을 주고 있는 자신의 회사에서도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파업을 벌이다가 경찰의 손에 질질 끌려가며 외치는 노동자들의 말에 포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맞는 말이야.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 기계에 비하면 훨씬 못한 존재라고. 그런데도 그들을 고용하고 비싼 임금을 주고 있어.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지?"

   

   

기계를 사랑한 고독한 소년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있는 디어번에서 태어났다. 디어번은 당시 개발이 전혀 안 된 시골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했다. 헨리의 아버지 윌리엄 포드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농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미국으로 온 처지였으니, 아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미국이야말로 그에게는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헨리는 도무지 농사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대신 공학이니 발명이니 하는 데 흥미가 있었고, 어쩌다가 기계류를 보면 눈을 반짝이곤 했다. 포드네 집 일대에는 자명종 시계가 하나도 없었다. 어린 헨리가 보기만 하면 순식간에 분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조금 들고부터는 분해했다가 다시 완벽하게 조립해 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헨리 포드에게는 인간보다 기계가 친근했고, 그가 존중할 수 있는 인간은 토머스 에디슨 같은 발명가나 패러데이 같은 과학자뿐이었다.

   

젊은 시절의 헨리 포드(왼쪽),토머스 에디슨과 함께. 왼쪽에 있는 이가 헨리(1929년)

   

   

   

청소년이 된 헨리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기계 따위는 제발 집어치고 농사일을 착실하게 배우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결국 가출을 해서 디트로이트로 간다. 거기서 작은 공장에 취직했는데, 얼마 안 되어 쫓겨났다.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공장의 업무 과정을 단순하게 고침으로써 작업 능률을 향상시키고 필요 인력을 줄일 수 있는 기획안을 대뜸 내놓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노동자들이 노동력 수요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싫어하는 것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노동자도 더 많은 임금을 받을 테니 모두가 좋아지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그의 불신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헨리는 에디슨 일루미네이팅 사에서 일하며 점차 능력을 인정받고, 수석 기사가 되었다. 34세 때는 그가 고안해낸 엔진을 본 토머스 에디슨의 격려도 받았다. 자신이 평생 존경해온 인물의 인정을 받은 그는 뛸 뜻이 기뻤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마침내 자신만의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되돌아 본 회한의 세월

1922년, 그는 이제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유럽의 조그마한 정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했다. 독일의 잔챙이 정당에서 그가 이익을 볼 전망은 없었고,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그가 절실히 원하는 이익도 없었다. 그런데도 막대한 기부를 한 것은 그 정당이 그의 평생 신념과 일치하는 노선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반(反) 노동조합, 반 사회주의, 그리고 반 유대주의. 정당의 이름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바로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 16년 뒤, 포드는 당의 초창기에 아낌없이 베푼 재정적 기여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제는 집권당이 된 나치당에게서 대십자 훈장을 받는다.

   

대공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문명이 위기에 빠졌던 이 시기에 그 찬란한 꽃을 상징했던 포드 역시 위기로 빠져들었다. 포드의 완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포드 사에도 노동조합을 수립해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갈수록 과격해졌고, 집단 파업이 잇달았다. 마침내 포드는 1941년이 되어서야 "이대로라면 회사는 망하고, 당신은 맞아 죽을 것이다. 고집을 계속 피운다면 당신과 갈라서겠다"는 아내 클라라의 최후통첩에 못 이겨 노조 설립을 승인했다.

   

세 살부터 77살까지 헨리 포드의 초상

   

   

아들인 에셀과의 불화도 골칫거리였다. 에셀 포드는 그의 유일한 자식이었는데, 1930년대에 포드 사 대표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다. 포드는 아버지처럼 뛰어난 기술자였고 경영자였지만 경영철학은 아버지와 많이 달랐다. 특히 T형 단일 품종의 생산을 고집하는 아버지에게 에셀은 경쟁사인 GM처럼 차의 성능보다 디자인을 강조하고, 다양한 모델을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결국 아버지가 져서 새로운 'A형'을 비롯한 여러 모델이 나오게 되지만, 에셀이 암에 걸려 1943년에 사망함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는 빼낼 수 없는 못이 박혔다. 당시 81세였고 뇌졸중 증세가 있던 헨리는 아들을 대신해서 다시 회장직에 취임했다. 나이로나 건강으로나 도저히 제대로 일을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를 잃은 마음의 고통을 평생 몸 바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기계'를 돌봄으로써 달래려 했던 걸까? 아무튼 회사 상황은 그가 경영을 놓지 않는 동안에 계속 나빠져만 갔다. 그가 나치 협력자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포드가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을 질타하는 지식인들도 끝이 없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포드 사를 국유화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고난과 실망과 회한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헨리 포드는 1945년에 다시 은퇴했고, 1947년 4월 7일에 뇌출혈 발작을 일으켜 영영 눈을 감았다.

   

포드는 자동차도 컨베이어 벨트도 과학적 관리기법도 처음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경영의 기적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냈다. 20세기 초, 소수에게만 허락되던 개인용 탈것을 만인의 것으로 대중화시킨 그의 혁명은 20세기 말, 컴퓨터가 대중화되는 혁명에만 비교 가능한 규모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혁명은 포디즘의 혁명을 폐기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를 접고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가 가졌던 여러 가지 신념,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에 대한 불신과 오로지 효율성만을 따지는 경영철학, 그리고 나치즘이나 반유대주의 성향 등도 오늘날에는 대부분 낡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는 포드가 만든 틀에 얹혀서 돌아간다. '기계' 부분은 포드의 것이고, '디자인'은 포드 이후의 것이랄까. 미국의 유머작가이며 배우였던 윌 로저스는 포드를 두고 1920년대에 이런 말을 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 알려면 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2009년, 아직 백 년은 되지 않았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859

 "

   

이는 백설공주 문고판처럼 헨리 포드에 대한 동화적인 이야기를 할 따름이다.

   

   

"스탈린·히틀러도 우러러본 '복지 자본주의'원조

새 시대를 연 거목들 <8> 헨리 포드

김환영<whanyung@joongang.co.kr> | 제262호 | 20120318 입력 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김환영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 출신이건 하버드대 졸업생이건 내겐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지 사람의 과거를 채용하는 게 아니다."

한때 소련의 공장에는 레닌의 초상화와 더불어 헨리 포드(1863~1947)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스탈린은 포드가 자동차 분야에서 이룩한 대량생산이 전 산업 분야로 확산됐고 대량생산이 연합군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포드는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소련의 아이콘이었다.

   

소련은 모범에 도달하지 못했다. '노동자 천국'이어야 할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동차는 공장의 당간부들이나 타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굴릴 만한 임금을 받았다.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소련·동구권은 붕괴했다.

   

   

1500만 대가 생산된 포드 모델 T 자동차.

헨리 포드는 자동차 시대를 개막한 주역이다. 헨리가 자동차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18년에 도입한 어셈블리라인(assembly line, 부품을 컨베이어에서 조립하는 공정)은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드는 시간을 12.5시간에서 93분으로 단축했다.

   

포춘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인물

어셈블리라인으로 가능해진 대량생산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Modern Times)'에서 보듯 현대를 상징한다. 포드가 개막한 자동차 시대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 중산층의 시대와 함께 등장했다.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2000년 포드를 '세기의 인물(Man of the Century)'로 선정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는 역사를 기원전·기원후가 아니라 포드 이전(Before Ford), 포드 이후(After Ford)로 나눈다.

   

   

포드는 비교적 넉넉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포드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다루는 손재주가 있었다. 온 마을의 망가진 시계를 수리했다. 고등학교는 문턱에도 가지 않고 15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평생 읽기·쓰기가 수월하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포드는 16세에 가출했다. 디트로이트의 기계제작소에서 도제로 일하며 내연기관 제조를 배웠다.

   

1891년에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회사에 기술자로 취직했다. 시간만 나면 자동차 개발에 골몰했다. 회사는 자동차 연구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그에게 관리총책임자 자리를 제의했다. 그럴 수 없었다. 포드는 1899년 회사를 그만두고 자동차 개발에 매진했다. 실패가 거듭됐다.

   

포드는 1903년 포드자동차를 창립했다. 당시 미국에는 이미 88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었지만 포드는 성공의 기회를 붙들었다. 1908년 모델 T 자동차를 출시했다. 1927년까지 1500만 대가 팔린 대히트였다. 1913년부터 10년간 포드자동차의 생산량은 매년 두 배로 뛰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미국 자동차의 반이 모델 T였다. 포드는 1910년에서 1927년까지 모델 T만 생산했는데 1913년부터는 색상을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페인트가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포드자동차는 1932년 세계 자동차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포드의 경영 철학은 '포드주의(Fordism)'라고 불린다. 최고 품질의 제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어 최대한 많이 팔고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최대한 많이 주는 게 포드주의다. 포드의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은 성공했다. 자동차는 더 이상 부자들의 사치품이 아니었다. 일반 서민들의 필수품이 됐다.

   

포드는 '복지 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를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4년 포드는 노동자 최저임금을 두 배나 인상했다. 일당 5달러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20달러다. 동시에 근무 시간은 9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했다. 1926년에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노동자들이 여가가 많고 쓸 돈이 많아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게 포드의 지론이었다.

   

대공황(1929~39) 때인 1932년에는 어쩔 수 없이 임금을 깎았다. 형편이 나아지자 1935년 고임금 정책으로 복귀했다. 포드는 저축이 아니라 지출이 경제를 살린다고 봤다. 그는 "성공한 사람치고 저축하는 사람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포드자동차를 구매해 차이를 절약하세요(Buy a Ford and Save the Difference)"라는 광고 카피를 가져오자 '절약'을 지우고 '지출(Spend)'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포드는 시대를 앞서간 고용 정책을 실천했다. 장애인, 상이군인의 채용을 위해 쿼터를 뒀다. 그는 또한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흑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흑인들은 남부를 떠나 북부로 이주해 포드자동차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아내의 <ec37>가출<ec38> 통첩에 노조 설립 승인

포드는 오점도 남겼다. 그는 노조 설립을 저지했다. 포드자동차에는 '포드 서비스부(Ford Service Department)'라는 부서가 있었는데 하는 일은 노조 설립 저지였다. 서비스부의 인력은 800명의 전직 깡패들로 채워졌다. 1932년에는 노조 설립을 추진하다 해고된 노동자들과 경찰이 충돌해 5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포드는 노조를 인정하느니 회사 문을 아예 닫을 궁리를 했다. '내부'의 반발이 있었다. 아내 클라라는 회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는 최후통첩을 들이대자 포드는 결국 1941년 노조를 승인했다. 일단 노조를 승인하면서 맺은 협약은 다른 회사들보다 노동자들에게 유리했다.

   

포드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참 종교는 오직 개신교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그는 노동자들도 기독교 가치에 맞춰 살기를 바랐다. 그는 술·담배·도박뿐만 아니라 껌 씹는 것까지 싫어했다. 고임금 정책을 썼지만 대신 노동자들의 가정 생활, 특히 음주 습관까지 감시했다. 그는 고무 확보를 위해 아마존에 포드랜디아(Fordlandia)라는 농장을 설립했는데 현지 노동자들의 기숙사 위생검사를 실시하고 성병 감염 여부를 조사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실천하지 못했다. 아들 에드셀 포드(1893~1943)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위장암 때문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들에겐 아버지 못지않은 능력이 있었다. 에드셀이 개발한 1941년형 링컨콘티넨털은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 중 하나로 기록된다. (링컨콘티넨털은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타고 있던 차다.) 사장직을 물려주고 난 다음에도 포드는 아들을 믿지 않고 달달 볶았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반유대주의를 신봉했다. 반유대주의는 당시 미국에 만연된 풍조였다. 쿼터로 유대인들의 하버드대 입학을 제한하던 시절이었다. 포드는 1919~27년 '디어본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이 주간지에는 '국제 유대인:세계 최고의 문제(The International Jew:The World's Foremost Problem)'와 같은 반유대주의 기사를 실었다. 디어본인디펜던트는 러시아 비밀경찰이 19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시온 장로 의정서(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에 나오는 주장을 미국 사회에 유포했다. 포드는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부추긴다고 믿었다.

   

포드는 히틀러의 우상이었다. 히틀러는 미국을 미워했지만 포드는 사랑했다. 포드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에 나오는 유일한 미국인이다. 히틀러는 포드가 발간한 반유대주의 기사의 선집을 애독했다. 히틀러의 꿈은 포드가 미국에서 이룩한 것을 독일에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폴크스바겐은 모델 T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포드는 1922년 나치스당에 7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90만 달러)를 후원했다.

   

들끓는 여론 때문에 포드는 디어본인디펜던트를 1927년 폐간하고 사과하는 한편 기사 내용을 몰랐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이 썼지만 기사는 포드가 저자로 돼 있었다. 포드는 죽을 때까지 반유대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나치스 독일은 포드에게 1938년 메달을 수여했다. 유대 단체들이 되돌려주라고 요구했으나 묵살했다.

   

사망 당시 1881억 달러 재산 남겨

포드에겐 사회공학자(social engineer)의 면모가 있었다. 그는 전쟁에 반대했으며 세계연방의 설립을 꿈꿨다. 돈키호테 기질도 있었다. 1915년에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막겠다며 '평화의 배(Peace Ship)'를 유럽으로 출항시켰다. 웃음거리가 됐다. 1918년에는 상원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000표 차로 낙선했다. 1920년대에는 대통령 출마를 두고 고민했다.

   

포드는 자동차 산업의 천재였으나 역사나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1919년 시카고 트리뷴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가 무식쟁이라는 기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미국혁명이 1812년에 일어났다"는 둥 그가 실제로 '무식'하다는 게 드러났다.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포드는 사망 당시 1881억 달러(2008년 가치)의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소탈한 삶을 살았다. 모델 T의 100만 대 돌파 기념식에서 연설을 부탁하자 그는 "여러분, 뭐든지 100만이라는 것은 아주 많은 겁니다"라고 딱 한마디만 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포드는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정부(情婦)를 두었다. 아내 클라라의 묵인 아래 30년 동안 내연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부자나 사회 명사들이 아니라 농부·기술자·발명가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말년에는 18~19세기 물품 수집에 열중했다. 그는 20세기의 심벌이지만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도시화되기 이전의 농촌사회 미국이었던 것이다.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312

   

헨리 포드는 살아 생전 시오니즘과의 투쟁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헨리 포드는 시온의정서를 비판하여 미국에 시온의정서 열풍을 불러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헌데, 헨리 포드 그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다.

   

이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터인가. 이는 오직 전세계적으로 국제유태자본론만이 설명가능한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2 : 친미친중 반일반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6/29 03:08

http://blog.naver.com/miavenus/70141253983

   

   

   

이후로 인드라 블로그는 이웃공개 포스팅만 합니다.

   

그간 서로이웃만 받아들이고,

이웃만 한 분들 약 1,500명을 이웃 해지했는데요.

이웃만 한 분들, 해지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삼천 명 정도 이웃일 겁니다.

   

앞으로는 이웃도 받겠습니다.

   

왜 또 변덕이냐 할 분도 있겠습니다.

뭐, 따지자면, 인드라 조울증 탓이고,

좀 이성적으로 보면,

인드라가 주제 파악을 해서

감당하기 힘들어서 정리했던 것인데

이제는 오지랖 넓혀도 되겠구나 한 셈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웃신청만으로는 이웃공개 글을 읽지 못합니다.

서로이웃 신청을 해주셔야 이웃공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면, 서로이웃 신청하는데 자격이 있나?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아울러 사정 때문에 서로이웃을 신청할 수 없으나,

인드라 이웃공개 글을 읽고픈 분들은

안부게시판이나 메일을 통해 사정을 말씀해주세요.

말씀해주시면 이웃사촌됩니다.

   

하고, 읽기 전에 다음뷰 손가락에 클릭 꾹 해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읽기 전에 꾹 누르세요.

중복 클릭은 사절이에요.

   

조회수 검색하면

많게는 이만, 좀 나오면 오천, 평균 이천 찍고,

최소한 천오백인데

검색로봇도 있고, 중복 읽기도 있고, 신기한 경로로 읽는 분도 있어서요.

의심스럽잖아요^^?

   

끝으로 요즘 사람 만나려고 해도

마음이 잘 안 가는데요.

그래도 마음을 다 잡아서

칠월 초 무렵에 부산 번개를 할 예정입니다.

부산 번개 하기 전에 대전에 들려 대전 번개를 할 지도 모릅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안부게시판이나 메일, 전화 메시지로 말씀해주세요.

   

010-8801-734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2 : 친미친중 반일반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6/29

   

   

쪽발이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 

할퀴고 간 상처엔

쪽발민주당만 나부껴

민족의 생존이  

혁명의 전야에 섰다

이 땅의 양심들아

어깨걸고 나가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이 목숨 다 바쳐

해방의 함성으로

가열찬 투쟁으로

반일반북

평화통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사진)이 차기 세계은행 총재인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의 아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17일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국 `아버지의 날`인 17일을 맞아 오바마 대통령은 김 차기 총재의 큰아들 토머스 김(12)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 너에게 빚졌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김 차기 총재 아들에게 사과한 이유가 뭘까.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토머스가 아버지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으로 매사추세츠주를 떠나 워싱턴DC로 이사하는 것에 실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앞서 김 차기 총재는 방송 인터뷰 중에 아들이 이사하는 것에 실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김 총장을 세계은행 차기 총재에 임명함으로써 이사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데 대한 위로의 전화를 건 셈이다.

   

김 총재는 로버트 졸릭 총재를 이어 다음달 1일부터 5년간 세계은행을 이끈다.

   

[김덕식 기자]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369677"

   

희.노.애.락

by 시인 인드라

   

역대 한국 대통령과 북한 주석은 국유본이 모두 임명했다네.

미국 대통령 역시 국유본이 임명한다네.

   

어이쿠!

   

하면,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궁합 한번 알아나 볼까나.

   

1. 슬픔의 시대

   

미국 노예민주당과 한국 쪽발민주당이 집권한 시대.

   

CIA의 이승만 퇴진 419 음모 후 쪽발보선 정권 탄생, IMF 외환위기.

   

쪽발이만 배부르게 하는 시대.

   

최악이구나.

   

차기 오바마 재선이 확실시.

하면, 한국인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쪽발민주당 집권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

   

어여로 상사뒤요.

   

2. 화냄의 시대

   

미국 공화당과 한국 자유당/민자당/신한국당이 집권한 시대.

   

1950년대, 1980년대와 1990년대.

   

슬픔의 시대에 비해선 낫지만,

기쁨의 시대보다는 못하네.

   

슬픔 반, 기쁨 반이되 슬픔이 약간 우세한 시대.

   

88올림픽이 있었지만,

625전쟁이란 비극이 있었다.

몸(경제)가 기쁜 듯하지만,

때로는 몸(경제)조차 힘겹던 시대였지만,

마음(정치)가 언제나 우울했던 시대.

   

쪽발일성 대 이승만이라면 쪽발일성을 택하기.

쪽발정일 대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라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을 찍기.

   

민주주의의 기본이 인민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

민주주의 쌩기초를 망각한 이승만이나 쪽발정일 시대보다는 낫지.

허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어여로 상사뒤요.

   

3. 즐거움의 시대

   

미국 공화당과 한국 쪽발민주당이 집권한 시대.

   

2002 월드컵이 있었지만,

마음(정치)가 기쁜 듯하지만,

몸(경제)가 우울했던 시대.

   

몸이 안 가는데

마음만 저 멀리 있으니

몸 따로 마음 따로 유체이탈해서

마음은 뽕먹고 해롱해롱,

몸은 사분오열하는 시대.

   

슬픔의 시대보다는 낫지만,

기쁨의 시대보다는 못한,

화냄의 시대와는 우열을 정하기가 힘든 시대.

   

누구는 화냄의 시대가 낫다 하고

누구는 즐거움의 시대가 낫다 말하지.

   

박정희 정권 때 박정희와 맞싸운 투사조차

박정희 시대를 몹시 그리워하게 만드는 시대.

   

어여로 상사뒤요.

   

4. 기쁨의 시대

   

미국 노예민주당과 한국 공화당/새누리당이 집권한 시대.

   

1960년대, 1970년대, 2009년에서 지금까지.

   

당장은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지나고 나서야 느끼는

희망이 있는 시대.

   

한반도 통일과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시대.

통일의 적기.

   

이명박이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아쉬운 시대.

시대는 기쁨의 시대였는데,

이명박 덕분에 화냄의 시대가 되고만 시대.

   

박정희는 과연 누구도 오를 수 없는 나무란 말인가.

박근혜조차.

   

   

동시에 야당다운 야당을 만들기 위해

쪽발민주당을 해체하고

쪽발돼중, 쪽발놈현 세력을 퇴치하고

도덕적으로 참신한 정당을 만들어서

견제세력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

   

도덕적으로 참신한 정당이란

삿된 이해로 집권을 노리기보다는

다가올 혁명을 위해 기꺼이 집권을 포기하고 기다릴 줄 아는 정당.

백년대계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세력.

   

어차피 모든 것은 타락하니까.

   

어여로 상사뒤요.

   

   

"【 앵커멘트 】

일본에서 수많은 한국 여성들이 납치와 감금을 당해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일본의 인신매매 실태는 선진국 가운데 최악이지만, 일본 정부는 대책 마련에 소극적입니다.

박문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

"피를 너무 흘려서 어지럽다."

   

20대 초반의 한국 여성 A씨가 일본의 인권 단체에 보낸 문자메시지입니다.

   

구조될 당시 A씨는 골반 내 염증으로 하혈이 심하고, 영양 부족에 시달린 상태였습니다.

   

A씨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도쿄로 갔지만, 여권을 뺏기고 감금당한 채 출장 성매매에 내몰렸습니다.

   

또 다른 20대 여성 B씨도 일본 유학 중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가 빚을 떠안고 성매매를 강요당했습니다.

   

일본의 한 인권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여성 가운데 한국인은 29%, 외국인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 민간단체와의 공조 아래 피해자 지원책을 강화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협조 없이는 한계가 많습니다.

   

인터뷰() : 서영학 / 여성가족부 권익지원과장

- "실제로 해외 성매매 브로커와 업주를 단속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국가 간 공조체계가 굉장히 중요한데, 일본 정부가 매우 소극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미국은 10년 연속으로 일본을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국가'로 꼽았습니다.

   

캄보디아, 인도와 같은 등급입니다.

   

법적인 대책은 물론 피해자를 위한 쉼터나 신고전화조차 마련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무관심 속에 수많은 여성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MBN뉴스 박문영입니다. [ mypark@mbn.co.kr ]"

   

   

   

"전거리교화소는 수감자가 잘 수 있는 공간보다 수감자가 많아 서로 발 냄새를 맡으며 자야 할 정도로 열악하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이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던 탈북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거리교화소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 제공

   

'탈북자의 지옥'이라 불리는 북한의 전거리교화소의 참상을 담은 '살려주세요- 반인륜 범죄의 현장 북한 교화소 전거리교화소 편'(김상헌 김희태 저, 북한인권 제3의 길 간)이 출간될 예정이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은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에 온 탈북자 81명 중 11명의 증언과 북한인권정보센터가 수집한 문헌 자료, 6000여 탈북자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이번 책을 발간했다고 25일 밝혔다.

   

전거리교화소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청진 방향으로 12 올라간 산속에 있다. 북한은 전거리교화소, 요덕 수용소 같은 각종 수용소의 위치를 공개하거나 지도에 표시하지 않는다. 전거리교화소는 수감자의 80%가 탈북했다가 강제 북송으로 끌려온 북한 주민이며 각종 고문과 학대로 악명 높은 곳이다.

   

탈북자가 아닌 전거리교화소 수감자들은 외국 방송이나 외국 노래를 부르거나, 북한 체제에 반하는 사소한 말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수감됐다.

   

   

   

구타와 학대가 일상인 최악의 인권유린 장소-전거리교화소

   

전거리교화소 수감자들은 한 끼 300그램 미만에 훨씬 못 미치는 식량을 받으면서 벌목, 광산 작업 같은 고강도의 노동에 동원된다. 요구받은 작업량에 비해 제공된 음식이 적은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수감자들은 뱀, 지렁이, 쥐, 곤충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옷이 없어서 시체의 옷을 가져가 입기도 한다.

   

25세 같은 나이의 회령 출신 남성 수감자 두 명은 팬티만 입은 상태로 함경도 혹한 겨울 날씨 속에 팬티만 입은 상태로 아침부터 온종일 무릎 꿇어앉아있는 벌을 받다가 결국 동사했다.

   

탈북자는 "두 젊은이가 일어서거나 움직이면 실내에서 지켜보는 보안요원이 달려나가 발길질을 했다"며 "죄목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담배꽁초를 주웠거나 음식을 훔친 정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거리교화소에선 담배꽁초를 줍거나 다른 죄수와 얘기만 해도 발로 채이거나 삽 등으로 구타를 당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벌어진다.

   

   

   

처벌 중에는 앉지도 일어나지도 않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두 팔을 뒤로 묶어두는 것도 있다. 이런 자세에서 시간이 지나면 어지러워 구토가 난다. 식사 과정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100번 하고 먹도록 하기도 한다.

   

   

   

2층 높이의 담을 쌓다가 부실 공사로 담이 무너져 10여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거리교화소 간부들은 수감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며 작업을 했던 수감자들을 본보기로 나무말뚝에 일주일간 묶어 놓기도 했다.

   

도주하다 붙잡히면 밧줄로 목을 매 트럭에 달고 개처럼 마당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이기도 한다. 다른 수감자가 심한 매를 맞는 장면을 보고 울었다는 죄목으로 두들겨 맞은 여자 수감자도 있었다.

   

중국에서 인신매매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가 다시 북으로 끌려 온 탈북 여성들이 강제로 낙태 당하는 곳도 전거리교화소이다. 한 탈북자는 "전거리교화소 간부들이 중국인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 수감자를 다시는 임신을 못하게 하겠다며 불로 자궁을 지지기도 했다"며 "또한 교화소 간부들은 여성 수감자에게 성적 행위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자궁과 유방을 라이터불로 지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거리교화수 수감자의 80%가 사망한다는 증언…가족들도 면회하러 와서야 사망 사실을 알아

   

전거리교화소 수감자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지내다 보니 사망률도 높다. 전거리교화소 수감자였던 탈북자들은 "40명이 같이 입소했는데 3년 후 퇴소할 때 생존자는 5명도 안 됐다", "50명이 감방에 있었는데 29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전거리교화소에서 시체처리 업무를 담당했던 탈북자는 "1998년 6월30일부터 1999년 1월19일 사이인 6개월간 매립한 시체의 수는 정확히 859구였다"며 "하루 평균 4~5명의 수감자가 사망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작업장에서 공개처형 방식으로 사망한 수감자의 시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며칠씩 방치해 시체를 보면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사망자가 너무 많아 인근의 불망산 산속에 소각장을 따로 만들어 시체를 소각하기도 했다. 1998년 수감자는 "자동차로 시체를 소각장까지 운반했다"고 증언했고, 2010년 석방된 수감자는 "당시엔 자동차가 아니라 벌목 운반용 큰 수레를 20여명의 수감자가 한 시간 정도 끌어 옮기고, 마지막에는 어깨에 멘 채 소각장까지 시체를 운반했다"고 말했다. 수감자가 끝없이 죽어나가지만, 가족에게 사망통지서를 보내는 일은 없다.

   

김상헌 이사장은 "이번에 출간된 책을 유엔에 제출해 북한 인권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겠다"며 "북한 당국은 전거리교화소를 비롯한 각종 수용소를 하루빨리 폐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호진 기자 superstory@chosun.com]"

   

   

작성자: 인드라(miavenus)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1116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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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글] 놈현과 지도자의 단상

  

   

Cf : 이거 내가 쓴게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 검색하다 펌 한거임.

   

   

한국의 경제문제와 세계 경제문제 때문에 (특히 부동산이나 자영업 양극화 문제) 

바닥경험부터 원론까지 몇년간 골머리를 썩고있던 차에,

2010년 3월달 쯤 인드라 님 블로그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후로 일종의 중생체험을 했다.

두번째 중생체험이다.

물론 첫번째 기독교 중생체험 때처럼 유난스럽고 강력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중생체험은 길고 깊숙하게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평생 갈 것이라고 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쌓여왔던 모든 억울함과 억눌림을 이렇게 뻥 뚫리듯 시원하고

화통하게 터뜨려 준 유일한 해방구가 국제유태자본론이었다.

인드라님을 존경한다거나 우상처럼 느껴져서 그 블로그에 중독된 것은 아니다.

영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두고 살아와서인지 위인,성직자,연예인,정치인이든 지인이든

그 어느 사람에게든 여지껏 영향을 받기는 힘든 체질을 지녔다.

본능적으로 6살때쯤부터

'세상은 내편이 아니며 결코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어떤 초월적 존재가 항상 나를 감시 조종하고 있다'

라는 강박증과  유태인적 동병상련성과 함께 인간에 대한 기대감이 없이 살아와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고독에 강하다. 여지껏 본인보다 고독에 더 강한 사람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따라서 본인은 상대방의 가치관이나 그 내용,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질적인 그릇에 영향을 받는 것일뿐

그 사람 자체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평생 우울했던 모세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 사도 바울, 베드로 모두 인간적인 가시나 결함을 가지고 있는 한낱 인간이었다.

영적인 그릇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간혹 그를 대책없이 우상시 하면 없던 반감도 생기는 체질이었다. 

최면에 강한 체질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형식이든 우상화에 대한 경계적 민감함이 강한 체질이다.

인드라 님을 하나의 부족한 인간으로서, 다만 닮고 싶은 인간으로서 바라볼 뿐이다.

인드라 님 블로그에 중생체험이 된 이유는 (개인적 잣대일지 모르겠지만) 

태어나서 지금껏 본인이 속으로 답답해 왔지만 누구와도 소통할수 없었던 영적, 경제적, 정치적, 전 인간적인 사안들에 대해 

원론적이면서도 몇십배로 다차원적으로 '너무나도 맞는 얘기만 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 이유이다. 

본인이 유별나서인지 몰라도 인드라 님 알기 전까지는 내 잣대나 기준으로 보건데,

맞는 얘기를 한 사람을 온 오프라인을 통틀어서 지금껏 한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 

유일하게 김진홍 목사님 정도만 그의 과거 행적이나 종교적 가치관 때문에 20년 이상 존경해오고 있었으며

그의 얘기가 여전히 맞다고만 생각지는 않는다.

기독교 체제 자체가 이미 오래전에 세계정부에 의해 붕괴되었기에 그 분도 예외일수는 없음을 알고 있어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 세상 자체가 모두 잘못되었고 온통 썪었다 라고 하는 체념정신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온갖 복잡한 실타래들을 희안하리만치 적재적소적시에

교통정리 해준 사람은 인드라 님이 최초였다.

아마도 어떤 사안에 있어서 이렇게 제대로 과거 현재 미래 통찰력으로 깊숙하게 다각적으로 

'맞는 얘기만 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볼수 없을 것 같다.

결정적으로 국제유태자본론과 통하는 이유는, 아마도 경제 정치적인 사실적 부분보다는 영적인 부분이 차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놓고 보면,

본인은 2000년대 이전까지는 성향상 극단파나 극렬파가 될순 없었어도 반박정희, 반한나라당 성향이었다.

어려서부터 권위주의나 엄숙주의, 근본주의, 하면된다 일벌레주의, 떼거리주의, 인맥주의, 연고주의,

형식 요식주의, 위선, 가부장주의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특히 파시즘은 증오하다시피했다.

게다가 기독교 내에서의 여러 영적 경험이나 소장파 모임 등을 통해서 반박정희, 반권위주의 사상이 한층 강화되었다.

90년대 그당시 유시민 책들은 걸레가 되도록 읽고 또 읽었으며, 우울하고 괴로울 때면 문성근 주연의 사회고발성 영화나

엄숙주의 비판영화를 하루종일 돌려보며 대리만족과 함께 이놈의 세상 하루라도 빨리 뒤집어져야 한다고 결의하곤 했었다.

 ('비상구가 없다' 라는 영화에서 강남 오렌지족과 사회쓰레기를 소독기로 응징하는 문성근의 모습과

   현재 좌파인척 환관노릇하는 강남오렌지 연예인과 딴따라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문성근의 모습이 대비된다.)

그러면서도,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보수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항시 긍정적이었고

극단적인 그 어느 모양새든 좋게 보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개념 정립이 복잡했으며 그러한 개념간의 내면싸움이 점철된 시기였기 때문에 어느것 하나에 동조하기 무지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서는 그러한 사상들이 어느정도 조작임을 깨달았다. (물론 친일 김대중, 친일 노무현 덕이었지만)

오히려 어용 친일민주당이나 관변언론 관변단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온갖 악랄한 표현과 학생범죄 조장과 성차별 성범죄 세대간 차별 상호간 전쟁들이 난무하는 인터넷,

온갖 불법과 사회악 조장하며 안성기 장동건 강제규 강우석 류를 내세워 블록버스터와 한류라는 떡밥으로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를

양산하고 나서는 어느순간부터 물량주의에 재미 다보았는지 기회 살려보겠다고 언제 좌파정신 있었는지는 몰라도

관변 어용단체 대변인 노릇하는 영화판과 환관 강남좌파 연예인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나 노사모 단체 등이

되려 권위주의적이고 대인파괴적이며 파시즘적임을 체감하고나서 모든 개념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좀 더 전체적으로 개념잡게 된 것이 과거로부터 알게 된 세계정부에 대한 감지였고, 더 나아가 국제유태자본론이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명박산성만 기억하지, 명박산성보다 더 높았던 쪽발놈현산성은 잘 모를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이명박 정부여서 노동계에서 투쟁하면 거의 다 보도하는 편이다.

허나, 쪽발놈현 정권 같은 정권이 들어서면 야당이 한나라당이 되기 때문에 노동계 뉴스는 

찬밥 신세가 된다. 해서, 쪽발놈현 정권 때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 서민이 자살했던 것이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

한나라당이 서민정당이 아니지만, 한나라당이면 노동자, 농민, 서민이 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이 한나라당이니 세계 금융위기에도 서민이 이만큼 살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쪽발민주당 정권이면

세계 금융위기에 한국은 이미 파산 선고를 했을 수도 있다. 정치 위주로 해서 경제를 깽판칠 것이므로.

민생에 무관심할 것이므로. 경제를 살리고 정치를 깽판친 이명박 정부가 친서민적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국유본은 자신이 임명한 대통령에게 경제냐, 정치냐 둘 중

택일하라고 하는데, 쪽발정권은 정치를 택할 것이기에 경제를 망친다.

한나라당은 경제를 택하기에 정치를 망친다. 여러분이 잘 선택해야 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27764481 중에서

본인은 인터넷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껏 이렇게 제대로 된 얘기들을 가감없이 하는 논객을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을 하루 온종일 눈씻고 찾아보라. 

그 무한하다는 세상 정보의 바다 속에서 이런 내용 비스무리한 것도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 세상은 78%의 거짓과 22%의 진짜를 섞어 놓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짜를 볼수없게 만든 세계정부 관변세상)

직감에 올해 대선은 민주당(민주통합당)일지 아닐지 몰라도 반한나라당에서 차지하게 될 것임은 삼척동자도 알 정도로 확률이 커졌다.

그동안 세계정부 하에서 제2의 박정희 역할을 담당했던 이명박은 천성이 참을성이 강하고 착해빠져서인지

아니면 정말 인터넷 무서운지 몰라서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묵묵히 갈 길을 가는 것인지,

아니면 빈티나는 외양 때문인지 그건 내 알 바 아닐지라도, 역대 최고로 미련할 정도로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하면서도

그 사람 나름대로 기를쓰고 나라 살려보겠다고 별 짓을 다하며 노력했지만 지금 이정도의 망신살로 결과를 맺었다고 볼 때,

앞으로의 한국정치로서의 희망은 이미 예전에 물건너갔다고 봐야 할 공산이 크다.

이명박은 세계정부가 지배의 마각을 드러내며 꽉조여오고 있는 현 세상에서 마지막 행운카드였을 공산이 크며,

앞으로 답답한 한국 군중들에게 있어 박정희나 더 나아가 이명박 같은 부류는 땅을 치고 후회를 해도 오지 못할 카드였음을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하게 될 미래를 미리 예상한다. (이미 희망이 없는 세상임에도 앞을 내다보고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 카드)

   

세계정부의 세 가지 장난 : 국채,지급준비금,환율   http://blog.naver.com/bbbaaaooo/100116569408 

모든 악마의 길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통한다       http://blog.naver.com/jalto/30106610708 

시온의정서의 주 내용 http://blog.naver.com/jalto/30112499937          

   

참조.

   

온갖 욕설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제일 민주적이다 못해 방종적인 분위기에서 땡깡이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는데다가

노빠나 어용 관변단체들처럼 파시즘을 행사하는 같은 편들도 없이 홀로 외로이 나라경제 살려보겠다고 5년 내내 불철주야 불끄고

뛰어다니던 지도자나 리더는, 앞으로 등신이 아니고서는 미쳤다고 나오지도 않을 것이며,

점점 기회주의나 핫바지같은 지도자와 원숭이떼 같은 군중이 서로 맞서는 형국의 국가가 될 것이다.

왜? 앞으로는 점점 더 군중들, 특히 인터넷 찌라시들에 흐려 판단력이 없는 젊은 군중들 눈치를 보며

기회주의적으로 통치해야 목숨 부지할수 있으니까. 원희룡처럼...

2005년도부터 박사모 회원이었던 본인은 박근혜가 제아무리 통뼈에 소신정치인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 덫에서 자유로울수 있을까? 에

이미 부정적으로 본다. 이명박에서 끝났다고 보여진다.

지도자나 리더가 점점 핫바지 같아지면, 아울러 군인,경찰,선생, 학급 반장, 선도부가 핫바지가 되고 세상은 점점 무법천지가 되고

학생폭력이나 학생성폭력, 빵셔틀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세계정부의 지도자 실종 시대의 구체적 진행은 가속화 되고 있다.

지도자의 힘을 점점 무기력화 시키면 세계정부의 과학만능 전체주의는 아무도 모르게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요즘 불거지는 학생폭력, 학생성폭력 문제나 빵셔틀 문제의 원인을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지도자 실종 시대와 연계되게 된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서조차도 선생이나 리더, 반장, 선도부의 권위가 있어서 

학생폭력이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하더라도 정화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이나 리더, 반장은 과거와 같은 권위를 이미 상실했고

이제는 그 역할을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학부모가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양극화의 차이는 뚜렷이 부각된다.

물론 자격이나 인성 미달의 지도자나 리더는 과거와 달리 보다 가혹하게 다뤄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A(체벌, 선생문란화)를 해결하기 위해 B(체벌금지, 학생문란화)만 부각시키거나,

B를 해결하기 위해 A만 부각시키는 식의 다람쥐쳇바퀴 같은 허공에 킥 하는 방식이 문제였으며,

이를 또한 인권위나 전교조가 정치세력화에 이용함은 문제를 더 확장시켰을 뿐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폭력선생이나 폭력학생을 둘 다 더더욱 가혹하게 법으로 엄중하게 다루는 것 뿐이다.

   

앞으로 과학만능 세계정부 전체주의 가속화 세상에서는 지도자나 리더가 일개 연예인 딴따라보다 더 조롱상대가 될 것이며,

여기서 가족의 힘이나 권위까지 상실되면 가장 최소단위의 공동체까지 해체되게 될 것이며,

언론 인터넷을 환관으로 앉혀두고 귀가 얇고 단순하고 위선적인 절대권력 네티즌을 기고만장한 왕으로 점점 강화시켜 주면서

배후에서는 세계정부가 중앙집권적 독재와 감시를 강화하며,

인간은 초개인주의 세상에서 그러한 감시에 점차 무기력하게 적응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도자, 리더의 실종 시대...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과학만능 세계정부를 가속화시킨 빌게이츠,스티브잡스 류의 제 2의 니므롯이 지도자가 된다면?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여전히 지도자에 따라서 세상이 바뀌리라 믿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답답할 뿐이며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한없이 답답하다.

블로그에서 이짓 하는 것도 결국 자식 미래걱정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알 바 아니었을 텐데.

내가 뭐하러 밥도 안나오는 블로그에서 시간낭비해가며 이짓하고 있나?

자꾸 글쓰면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고 마음의 변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싶고 나날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고 싶어서이며

하루라도 정신 바짝 차려가며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결국 인간은 생존과 양육을 위해 끊임없이 대처해야 하는 속물에 불과할 뿐이다.

홀가분한 청년 시절에나 한때 불같은 것이지 사람인 이상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보수화되고 나약해지게 마련이다.

허나 그런 현상도 사람마다 다 같은 건 아닌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더 내면이 강해지고 판단력이 더 강해지는 사람도 있다.

   

학부모이고 노인이니 공부 안하고 변화에 대처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지향적 사고방식이다.

엄밀히 보면, 우리 윗세대들의 '자식 공부만 시키고 돈만 벌면 되지 공부는 더 할 필요없다' 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연배의 권위의식, 대첵없는 유교사상과 경로사상, 대책없는 윤리맹동주의와 안보맹동주의가 지금의 비극을 만들었다.

오히려 친일 노무현 세력, 어용언론, 어용 관변단체의 프락치 노릇을 제대로 해왔다고 본다.

지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넋놓고 있으면 코베어가는 세상이다.

이제는 결코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가 세상을 바꿔나가는 시대가 아니다. 경제 자본가들이야 기대할 건덕지도 없고.

'지도자'라는 단어에 현혹되다가는 언제 봉변당할지 모른다. 이제는 개개인이 각자 알아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시대다.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죽일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은 이미 왔으나, 동시에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아무런 희망이 없어도 하던대로 사과나무를 심는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영원한 보수주의 세상이다. 무난하고 최적인 상태에서 영원히 변함이 없는 세상.

권위주의, 엄숙주의, 연고주의, 떼거리 인맥주의, 인종주의, 근본주의, 국경주의, 국수주위, 단일민족주의, 파시즘,

친일 관변좌파, 공산주의, 주사파주의는 거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해 온 과학만능 전체주의 세계정부를 거부한다.

그것은 또다른 형식의 치명적인 반보수주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든 친일 민주통합당이든 좌파든 우파든 다 세계정부 아래에서는 한통속이며 낮에는 서로 싸우는 척하고

밤에는 같이 양주마시는 사이이며, 이건희나 정몽구 류만 변함없는 황제 노릇하고 바닥에서 기는 민초들 힘든건 어짜피 매한가지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잔잔한 물에 돌을 자꾸 던지던 자들이 오히려 더 이상하고 괴로운 세상을 만들었기에

그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또다른 변혁을 찾게 되며 궁극의 온전한 보수주의로 다시 돌려놓고 싶은 것이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news_new&no=1550808

   

   

"<조선일보>에 따르면 18대 국회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8번 서종표 전 의원은 자신의 딸 서모씨를 3년여간 4급 보좌관으로 채용했다.

   

여러 관계자들은 서씨가 일상 업무를 위한 출근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딸 서씨는 상임위원회와 관련한 전문성도 없었다. 심지어는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책상까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도 7천여만원에 달하는 4급 보좌관 연봉을 약 3년간 빠짐없이 받아갔다.

   

일은 안하면서 챙길 건 다 챙긴 것이다.

   

서종표 전 의원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지역구 사무실도 따로 없어 사실상 일을 하지 않았다.

   

민주통합당 서종표 전 의원

   

이런 기사 올릴 때 밉상으로 찍힌 사진을 올려 놓아 선입견을 더욱 증폭시켜 욕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도 욕한다. 씨팔놈 조까치 생겼네. 딸년이 저놈 닮았으면 역시나 조까치 생겼겠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딸 서씨는 19대 국회에서도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8번인 백군기 의원실에 6급 비서로 등록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백군기 의원(육사 29기)은 서종표 전 의원(육사 25기)의 군(軍) 후배다.

   

서종표 전 의원은 2001년 육군 3군사령관을 지냈다. 백군기 의원 역시 2006년 3군사령관을 지냈다.

   

백군기 의원이 4.11 총선에서 비례대표 상위 순번을 받는 데 서종표 전 의원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통합당 관계자는 "서 전 의원이 군 출신 비례대표 후보로 백 전 의원을 추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국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백 의원이 보은(報恩) 차원에서 서 전 의원의 딸을 6급 비서로 채용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4급 보좌관이 6급 비서가 되는 경우도 국회에서는 전례가 드물다.

   

부장급 사원이 부서를 옮겨 대리급 사원으로 근무하는 셈이다.

   

이에 대해 딸 서씨는 19일 "(18대 국회에서) 상임위 활동은 안 했고 후원회 관련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백군기 의원실에서는 정책 담당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백군기 의원은 '채용 당시 서씨의 상임위 활동 경력을 봤느냐'는 물음에 "그것까지는 안 따졌고 서종표 전 의원이 추천했다"고 답했다.

   

서종표 전 의원의 딸이 출근도 제대로 안 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밖에서 사무실 일도 보고 내 개인적인 임무도 맡아 해서 보좌관 업무를 했다, 조금"이라고 말했다.

   

국회 보좌관들 사이에서는 "몰염치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국회 차원의 조치는 없다.

   

2010년 당시 '빈민의 대모(代母)'로 불리던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이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을 보좌진으로 채용하지 못하도록 발의한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2년 넘게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가 18대 국회가 끝나면서 폐기됐다.

   

"이러려고 법안 처리를 미뤘구나···"

   

여의도를 보는 국민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다.

   

백군기 의원은 이날 보은 차원에서 서종표 전 의원의 딸을 채용했다는 지적에 대해 보도자료를 내고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지난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신청자는 무려 282명이었고 저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또한 국방 부분 비례대표 후보는 본인 뿐만 아니라 이성출 한미연합사부사령관, 송영무 전 해군참모총장, 이한호 공군 참모총장등이 물망에 올랐다고 언론(3.16 매경)에 보도 된 바 있다."

   

   

"따라서, 국방 부분 지원자들과 면접 등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된 공심위원회의 공개채용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선출된 것이지 타 의원의 도움이나 추천을 받아 후보가 된 것이 아님을 거듭 밝히는 바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1156195

   

   

629 선언. 어떤 술집 주인은 '오늘은 기쁜 날'이라면서 오늘 술값 무료를 외쳤던 날. 허나, 역사의 중죄인, 전대협 종자들을 성토하며 인드라는 그날 피눈물을 흘렸지. 아마도 그때부터 인드라가 '해체'론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해체'적인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 같아.

   

이후 국유본론을 정립하면서 1980년 광주항쟁서부터 1987년 629선언까지, 아니 그 이후 쪽발돼중의 사자필승론과 노태우 당선, 김영삼 당선과 쪽발돼중 은퇴 번복 후 당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기획의 이면을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야.

   

허나, 잡으려고 하면 멀리 달아나기만 하는 무지개처럼 그 정체가 늘 뜬 구름 속에 있었는데, 지난 대선 때 아프간 샘물교회 사건이 터지면서 깨닫게 되었지. 이 모두가 국유본의 대국민 기만쇼였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되고 있어. 국유본이 일으킨 광우병 파동. 천 명이 모여도 만 명이 모였다고 국유본 언론이 과장허위 보도로 연일 떠들어대어 난리굿 했지. 목표는 이명박 길들이기. 목표를 이룬 듯하자 국유본은 병주고 약주기, 즉 오메가알파 프로그램을 가동했지.

   

그때 알아? 쪽발놈현, 마누라가 얼마 처먹었는지도 모른 채 병쉰 지랄을 할 때인데,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이명박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양 말씀하셨지. 청와대 뒷산에 올라간 이명박을 이해한다? 국유본 지시로 볼 수밖에 없는 쪽발놈현 발언 직후로 광우병 파동 국면을 전환시켰지. 이후, 만 명이 모여도 천 명, 백 명 모였다고 국유본 언론은 처음과 다르게 축소 보도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보도하지 않았어.

   

심지어 이 시기 느닷없이 민주노동당 다함께 분파가 극좌파라고 욕을 처먹어야 했었지. 항상 정해진 수순이야. 촛불시위. 본디 국유본의 발명품으로써 유태인들이 행사 때마다 애용한 것. 한국인이 먼저 했다고 착각하지 말자. 여러분이 아는 대부분의 조직화, 선동선전, 시위 방식은 대부분 국유본이 발명한 것이니까.

   

정국 구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국유본이 키운 쪽발통진당. 총선이 끝나자마자 연일 때려 지지율을 폭락시키는 것은 예상된 수순. 지난 지방선거 직후에도 인천연대가 물먹었지. 왜 이럴까. 이 역시 국유본의 기획 속에 있어.

   

일타 삼피.

   

가장 큰 이유는 신자유주의와 FTA 때문. 대선에서 쪽발민통당 후보 지지한답시고 FTA 전면 폐기 이딴 주장 못 할 것 아냐? 그냥 쪽발놈현 사랑해요, 이딴 짓거리나 하라고 민주노동당 없애고 쪽발통진당 만들라고 국유본이 지시한 것이지.

   

미(국과)친(한)년, 이정희.

   

둘, 쪽발민통당을 보전하려는 것이야. 쪽발통진당이 커지면 망하는 건 쪽발민통당이거든. 쪽발통진당이 쪽발민통당의 대체정당이기 때문. 이런 이유로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 쪽발통진당을 비난하지. 그래야 방송위원 자리라도 나오니까. 한국 기자들? 개똥도 쓸 때가 있다던데, 한국 기자넘들은 개똥만도 못하지. 특히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 기자넘들.

   

셋, 국유본이 현 시점에서 2012년 내에 통일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 국유본은 지금까지도 쪽발정은 병쉰색희를 찬양하고, 그만큼 쪽발통진당을 까대는 전술을 쓰고 있어. 반면, 인드라는 역으로 국내 주사파를 보호하는 대신 쪽발정은 병쉰색희 타도에 전력을 다 하려고 하지.

   

하면 결과는 어디로 흘러가지?

   

임수경이 예라고 할 수 있을까.

인드라가 쪽발통진당을 옹호하는 포지션을 취하자 똥물이 쪽발민통당으로 튀더군.

총론은 그대로 가져가되, 세론에서 바꿀 수밖에 없으니.

   

인드라 생각.

국내 주사파가 비록 지금은 세뇌되어 잘 못된 인생을 살지만,

시대가 변화하면 탈북자들과 더불어 통일 한국을 위한 일꾼이 되리라.

   

남한 주사파가 바뀌면

한반도 통일이 온다네.

   

한반도는 인재밖에 자원이 없어.

인재를 잘 써야 해.

   

단, 쪽발시민이나 이인영, 임수경, 노회찬 같은 자들은 예외.

림수경 등은 국정원, CIA와 연계한 국유본 세작이 아니겠냐? 

지금까지 운동 경력을 이력삼아 국회의원한 놈들치고 제대로 된 넘 하나도 없으니까.

니들 가족들은 너의 가식과 위선을 온 몸으로 느끼겠지?

저 냄새나는 족속들은 빨아도 걸레.

   

   

오케이, 여기까지.

이제 서론 이쯤하고 본론으로 가보자꾸나.

   

어여로 상사뒤요.

   

   

"주요 공격대상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한 가운데 영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26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

   

영국 국내 정보기관인 MI5 조나단 에반스 국장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알카에다 조직이 다시 아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민주화혁명이 촉발된 국가들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반스 국장은 "1990년대 아랍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했던 알카에다 조직이 파키스탄의 탈레반 해체 이후 다시 아랍지역으로 돌아오고 있다. 또 이들은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혁명이 성공한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예멘 등지에서 예비 조직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중동의 민주화혁명은 서방세계 지도자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지역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선거를 치른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오히려 이슬람세력이 집권을 하는 등 불안요소가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예로 민주화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리비아의 상황이 알카에다 조직이 예멘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보고도 있다.

   

에반스 국장은 "아랍지역 곳곳에서 알카에다 조직이 활동하기 쉬운 환경들이 조성되고 있다. 비록 소수지만 알카에다 조직원이 되기 위해 소말리아나 예멘 같은 아랍국가들로 넘어가는 영국인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반드시 다시 돌아와 영국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고 강조하며 "이것은 새롭고 우려할 변화이며 앞으로 더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고 경고했다.

   

이어 에반스 국장은 "영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적이다. 즉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소말리아, 예멘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예비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에반스 국장은 런던이나 버밍햄 같은 대도시의 18~30세가량의 젊은이들 중 100~200명 정도가 이들 조직의 일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30년 이상을 정보기관에 몸담은 에반스 국장은 이번 런던올림픽은 이러한 테러리스트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공격대상이라고 단정하며 "전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올림픽 같은 행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공격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때문에 현재 MI5 조직원은 3,800명으로 늘었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예멘과 소말리아 등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에반스 국장은 전했다.

   

미국의 911테러 이후 영국을 겨냥한 테러가 해마다 늘고 있지만 지난 2005년 이후 성공한 공격은 단 한 건도 없다. 하지만 언제든지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특히 최근에는 지난 10년 중 두 번째로 높은 안보단계를 발령 중이다.

   

   

김옥경 기자[kak@newshankuk.com] "

   

음모론자들은 런던 올림픽 때 런던에서 테러, 혹은 복합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대부분 해외 인터넷 찌라시다. 반면, 인드라는 인터넷 대부분 음모론이 국유본이 만들고 유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면, 무조건 음모론을 배척해야 하는가. 아니다. 78 : 22로 파악해야 한다. 왜 국유본은 이 시점에서 런던올림픽 테러 음모론을 유포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드라 분석은 다음과 같다. 유럽 재정위기를 가속화시켜 미국 양적완화를 원만하게 실행하기 위함이다.

   

예서, 인드라는 일타삼피적 접근으로 유럽이 아닌 일본에서 복합재앙이 일어나야 세계 이성인 국유본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런던 올림픽이 예상과 달리 별 일없이 무사히 끝날 시점. 2002 한일 월드컵 때처럼 막판에 백두산 폭발이나 후지산 대폭발,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 일본 원전 파괴 등 복합재앙이 일어나는 것이다.

   

허나,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현재까지는 만일 런던 올림픽 시기에 복합재앙이 일어난다면 가능성 제 1순위는 일본이며, 그 다음이 영국과 일본 외의 제 3지역(브릭스 국가 유력), 마지막으로 영국 혹은 유럽이라고 본다. 다른 음모론자와 달리 인드라는 런던 올림픽 테러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지만,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

   

국유본의 전매특허 중 하나가 성동격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홍수 및 가뭄 피해가 동시에 발생했다.

   

신화통신 28일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 남부 지역은 며칠째 지속되는 폭우로 피해가 속출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특히 서남쪽 구이저우(貴州)에서는 이미 폭우로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들의 수가 80.5만 명에 이르고, 광시(廣西) 저역에서도 이번 자연 재해로 10명이 숨지고 이재민 121여만 명이 발생했다.

   

이와는 반대로 주부 산시(陝西)성, 허난성 (河南省) 등지에는 가뭄이 지속되고 있으며 강물과 호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각 지역의 구조대를 동원해 긴급 조치를 취하고 있다."

http://www.anewsa.com/detail.php?number=366081&thread=05r02

   

현재 가뭄을 국유본의 기후 조작이라고 보지 않는다.

   

"모건스탠리는 기후변화 경제학입문서를 통해 "기후변화는 공산주의 몰락이나 인터넷혁명에 맞먹을 정도로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한국이 세계의 공장인 중국과 인접한 데다 인구밀도도 높아 환경재앙의 피해를 볼 가능성이 짙다고 한 바 있습니다. 미 국방부 보고서에는 2010년 중국 기후가 남북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2010년경 중국 남부지방에 10년간 지속될 초대형 가뭄이 올 것"으로 관측하면서 "남부에 큰 비가 많고 북부에 가뭄이 많은 현재의 강수 분포도가 이 때쯤이면 '남부-가뭄, 북부-큰 비'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988871

   

국유본 예상대로라면, 중국 서남부에 초대형 가뭄이 오고, 중국 서북부에 홍수가 와야 하는데, 여전히 예전대로이기 때문이다.

   

"가뭄주기의 원인에 대해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된 건 없다. 주로 과거 가뭄 기록을 분석한 결과에 기초하고 있다. 태양흑점주기(약 11년)가 6년의 두 배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외국 논문이 많이 있지만 한반도와의 관련성은 찾지 못했다는 게 변 교수의 말이다. 오히려 한반도에서는 정확히 6년 주기로 가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1245344

   

인드라는 전문가들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런 태도로 중첩된 결과가 아닐까 보고 있다.

   

태양 흑점. 엘니뇨, 라니냐 등등. 이외에 인간이 모르는 여러 변수가 있을 것이다. 허나, 지구온난화는 아니다. 지구온난화 현상에 의하면, 한반도는 고온다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수량이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점은 인드라 블로그에서 '불쌍한 진실 - 불편한 진실이 아니다.'로 검색하길 바란다.

   

이 대목에서 농산물 원자재 가격을 잠깐 논한다면, 동아시아 농산물이 세계 교역 비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지 않는다. 아메리카 농산물이야 영향을 주더라도 동아시아 농산물이야 여전히 자급자족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서, 중국 가뭄, 홍수로 인한 가격 변동 운운 뉴스를 좀 웃기게 바라보는 편이다.

   

금값을 로스차일드 가문과 런던/취리히 시장에서가 아니라 인도 시장에서 보는 것이 웃기듯(그럼 리보 금리를 무슨 힘으로 세계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니?), 중동 산유국 왕족들이 석유 자본으로 세계 경제 권력을 좌지우지한다는 발상도 웃기듯, 곡물가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수급에서 구하는 것 역시 그냥 웃길 뿐이다. 그나마 북반구 기준 겨울에 남미에서 기후 이상으로 수급에 차질 예정 뭐 이런 뉴스라면 분석할 법도 하겠지만.

   

   

"알아사드 퇴진 지지" 시리아 사태 국면 전환

   

21면2단| 기사입력 2012-06-28 15:21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서도 시리아 정권을 감싸 온 러시아가 마침내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퇴진 지지로 돌아서면서 시리아 사태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28일 블룸버그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유엔 관리 3명을 인용해 러시아가 유엔이 마련한 시리아 정권 이양 로드맵에 지지를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오는 30일 제네바에서 열리는 시리아 사태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이하 시리아 국제회의)에서는 알아사드에 퇴진을 설득하고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중점 논의될 것이라고 이들은 전했다.

   

시리아 국제회의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을 비롯해 터키, 이라크, 쿠웨이트, 카타르와 유럽연합(EU)의 장관급이 참석한다.

   

유엔 소식통에 따르면 유엔과 아랍연맹이 임명한 시리아 특사인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최근 참석국에 알아사드 퇴진 등을 명시한 '시리아 주도 권력이양의 지침과 원리'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내 각국의 입장을 요청했으며 러시아는 26일 이를 수용했다.

   

통신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과도정부의 신뢰성과 시리아 안정·화해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알아사드 정권과 반정부 세력 등을 모두 아우르는 거국정부를 구성하는 내용의 로드맵을 담고 있다. 이 로드맵과 관련해 익명의 미 관료는 과도정부 구성 협상 과정에서 알아사드 정권과 반정부 세력 대표 양측 모두에 상대방이 추천한 인사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시리아에 무기 공급을 계속하며 정권을 지원한 러시아마저 등을 돌림에 따라 알아사드는 사면초가로 내몰리게 됐다. 러시아의 입장 변화는 최근 알아사드가 장악력을 잃는 조짐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라고 유엔 관리들은 설명했다. 시리아 정권이양 과정에서 러시아가 소외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러시아는 체제 교체에는 반대하며 과도정부에 친(親) 아사드 인사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고 미국도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1&aid=0002117734

   

   

이집트에서 국유본이 뉴라이트 계열인 이슬람형제단 대통령을 임명힌 뒤 다음 수순으로 시리아 권력 교체를 준비하고 있다. 현 시리아 대통령은 노비네파이다. 다만, 시리아 사태가 조기에 수습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가 유로존 위기 확산을 대비해 올해와 내년에 걸쳐 400억달러(약 11조6000억원)를 확보키로 했다고 러시아 재무장관이 밝혔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자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유로존 채무위기 확산에 대비하고, 은행 재자본화를 지원하기 위해 재원을 확보하기로 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올해 최대 8000억루블(약 28조7600억원), 내년 5000억루블을 확보해 위기 대응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이 돈은 저소득층과 러시아 경제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들, 또 2009년 입안됐지만 아직 시행되지 않은 은행 재자본화에 투입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러시아는 이와는 별도로 올해 예산에 위기가 확산될 경우 기업에 자금지원을 하기 위한 용도로 44억달러를 확보한 상태다.

   

실루아노프 장관은 "실질적으로 필요한 모든 수단이 준비됐다"면서 "상황이 악화할 경우 (비상계획을) 신속히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로존 위기가 확산되고, 러시아의 주력 수출품인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서 러시아 증시는 3월 최고치 대비 20% 넘게 폭락했고, 러시아 루블은 외환시장에서 가치가 13% 급락했다.

   

러시아의 부채수준이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불과하고, 외환보유액은 5000억달러에 이르지만 러시아 경제의 석유의존도가 매우 높아 배럴당 100달러 수준으로 떨어진 유가가 발목을 잡고 있다.

   

앞서 2008~2009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에도 러시아는 크게 타격을 받아 외환방어를 위해 수개월만에 보유외환 가운데 2000억달러를 날려버린 적도 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세운 교사·의사 급여 인상 등 대중지향적 정책들을 달성하기 위해 GDP의 2% 정도를 추가 재원으로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될 경우 재정의 석유 의존도가 더 높아져 균형재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올라야 한다고 씨티그룹은 전망하고 있다.

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이는 노비네파 푸틴 러시아의 석유자본 이해 때문이다. 최근 시리아의 터키 비행기 격추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국유본 분파 중 노비네파, 특히 러시아가 적극 끼어들어서 중동에서 위기를 부채질하여 국제 유가를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오바마 재선이라는 큰그림을 내세운 국유본 CGI 측이 득표 효과가 그다지 없는 중동 문제보다 '바캉스 효과'를 통한 국내 경제 문제에 관심을 지닐 것이기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9월 이전까지, 길게는 미국 대선 종료일까지 국제 유가가 안정세를 이룰 것으로 전망한다.

   

   

   

"이슈마다 美 쥐고 흔드는 케네디 대법관

   

A17면3단| 기사입력 2012-06-28 03:04

   

좌·우 넘나드는 판결로 유명

   

오바마 주도 '건보개혁법' 위헌 여부 결정의 열쇠… 미국민·언론, 초미의 관심

   

"'결정자(The Decider)'가 이번엔 어느 쪽으로 기울까."

   

미 대선정국을 흔들 '건강보험 개혁법 위헌여부 판결'(28일 예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온 미국의 관심은 한 남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언론으로부터 '결정자'라는 별명을 얻은 앤서니 케네디(76·사진) 대법관이 그 대상이다.

   

9명의 대법관 중 유독 케네디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대법원 내에서 유일한 '스윙 보트'(보수·진보를 넘나드는 판결)를 행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케네디를 제외한 8명의 대법관은 '확실한 진보' 4명, '확실한 보수' 4명으로 구성돼 있고, 이들은 이번 건보개혁법 판결에서 각각 합헌(진보)·위헌(보수)으로 갈릴 것이라는 게 공통된 관측이다. 이 때문에 케네디의 결정이 위헌여부를 사실상 판가름하게 되는 것이다.

   

1987년 공화당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케네디는 기본적으로 보수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 같은 그의 독특한 판결 성향 때문에 지난 25년간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한 판결에서는 항상 케네디의 한 표로 인해 합헌·위헌이 갈리는 결과가 나왔다.

   

케네디는 낙태 문제, 총기소지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파 대법관들과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2008년 6월 "관타나모 군기지에 수용된 포로들에게도 인권 보호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고, 1989년 성조기를 불태운 사건과 관련해서는 "국가는 국기를 불태운 사람도 가슴 아프지만 보호해야 한다"며 진보성향 대법관들 편에 섰다. 이에 대해서는 "케네디가 법리학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판결을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타임지는 "민감한 이슈 때마다 케네디 한 사람이 사실상 판결을 좌우하는 게 민주주의 원칙에 맞느냐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임민혁 특파원 lmhcool@chosun.com]"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3&aid=0002409146

   

   

   

캐스팅보드를 쥔 케네디는 레이건 때 대법관이 된 사람, 즉 뉴라이트파이다. 레이건은 뉴라이트파. 뉴라이트파는 공화당과 노예민주당의 양다리를 걸친 국유본 분파이다. 오늘날 국유본 권력은 노비네파와 CGI파 사이에서 뉴라이트파가 데이비드 록펠러 가신 그룹의 힘으로 중도 중재역을 취하는 형국이다. 현재 데이비드 록펠러의 생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는 오바마 재선 구도에 이상 징후가 없어 오바마 당선이 확실시된다. 친공화당 뉴라이트 계열인 타임즈가 케네디에 비판적인 것을 보면 케네디 판결도 합헌으로 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허나, 미국 대선을 싱겁게 끌고 가지 않고 박빙으로 가야 선거쇼가 흥행이 되고 그만큼 국유본 권력이 유지되는 만큼 오바마에게 약간의 핸디캡을 줄 가능성, 즉 위헌으로 판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베네수엘라 대선, 여론조사서 팽팽한 접전…차베스가 3.4%P 앞선 정도

   

| 기사입력 2012-06-28 08:28 | 최종수정 2012-06-28 08:38

   

   

【카라카스=로이터/뉴시스】양문평 기자 = 베네수엘라 대선에 대한 최근 여론조사 결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야권 후보인 엔리케 카프릴레스 후보에게 근소하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베네수엘라의 권위있는 여론조사기관 콘술토레스 21은 지난 2일부터 12일까지 조사한 결과 차베스는 47.9%의 지지로 44.5%의 카프릴레스에 3.4%포인트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차베스는 자신의 특유의 사회주의 혁명을 가속화시키기 위해 3선에 나섰으며 최근 들어 지난해 발병했던 암으로부터 건강이 회복되는 징후를 보이면서 부쩍 공식 활동을 늘리고 있다.

   

이에 대해 카프릴레스는 베네수엘라의 높은 범죄율과 물가 앙등 및 일련의 국유화에 지친 민심을 파고 들고 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차베스가 두자리 숫자로 앞서고 있다는 최근의 여론조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의 정치 여론조사의 문제점을 비쳐준 것이기도 하다.

   

콘술토레스 21은 지난 3월에도 여론조사를 했으며 당시는 차베스가 46.3% 지지로 카프릴레스는 44.8%로 이번 조사와 비슷하게 나타났다.

   

yang_pyung@newsis.com"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578504

   

   

국제유가는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석유좌파라는 별칭으로 국유본이 남미 경제개발을 위해 키웠던 노비네파 차베스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유본론에서는 베네수엘라 정치구도를 박정희 차베스 노비네파 대 전두환 카프릴레스 뉴라이트 대결로 보고 있다.

   

   

   

차베스는 남미의 박정희로서 남미 혁명의 아이콘이다.

   

   

   

국유본이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를 키우는 등 현재의 정국을 만들면서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남미에서 신자유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하기에는 반발이 크므로 박정희의 반미 민족주의와 새마을운동 등의 계획경제를 접목한 좌파 권위주의 정부를 내세우는 것이다. 자본주의화하려면 전통사회를 붕괴시켜야 하는데, 기존 정책으로는 원주민들이 좌파 게릴라 운동에 반감을 지니고 있기에 반미 코드를 적절히 활용하면 전통사회를 붕괴시키는데 따른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

   

   

   

차베스가 성공적으로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다 한다면, 향후 남미는 개발독재 차베스 시대에서 신자유주의 룰라 시대로 이행할 것이다.

   

   

   

둘째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운동을 희석화함이다. 치아파스의 사바티스타 운동은 국유본, 특히 신자유주의에 위협적인 운동이므로 물타기를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국유본 곡물카르텔이 페론 정부를 무너뜨리자 이를 물타기하기 위해 국유본이 쿠바에서 아르헨티나 유태인 체게바라를 시켜 쿠바 쿠테타를 시도한 것이 예이다.

   

   

   

셋째는 제 3세계에서의 유태인 지도자 실험이다. 야당후보 카플릴레스는 유태인이다. 참고로 세계적인 유태인 지도자로는 이란의 아흐마디네자드, 칠레의 아옌데가 있다. 둘 다 국유본이 임명한 대통령이다. 현재 남미가 반미 공동체로 남미연합의 기틀을 다지고 있다. 허나, 경제공동체로 가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보다는 훨씬 나은 여건이나 아직도 많은 난관이 있다. 해서, 지역연합에서 세계정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국유본은 유능한 유태인 지도자를 내세울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베네수엘라 野대선 후보 카프릴레스, 차베스에 공식 도전장

   

A16면3단| 기사입력 2012-06-12 03:11 | 최종수정 2012-06-12 07:55

   

수십만 지지자들과 출정식… 출마선언 뒤 후보등록 마쳐

   

건강문제 불거진 차베스 겨냥 10 거리 행진하기도

   

오는 10월 7일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서 13년째 집권 중인 우고 차베스(58) 대통령에 맞설 야권 후보 엔리케 카프릴레스 라돈스키(40·사진) 전 미란다주(州) 지사가 10일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4선(選)에 도전하는 차베스 대통령도 곧 후보 등록을 할 예정이라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카프릴레스는 이날 수도 카라카스앙에서 수십만명이 모인 가운데 출정식을 가진 후 후보 등록을 마쳤다. 그는 출정식에서 "10월 7일 우리는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삶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프릴레스는 자신이 집권하면 차베스의 급진적인 인기영합주의 대신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방식의 '중도 좌파' 노선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그는 또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차베스 정권의 산업 국유화 정책을 중단하되 서민들에게 인기있는 복지정책들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날 운집한 인파를 향해 "100만 유권자들이 내 편으로 돌아섰다"며 "나는 국민이 선택했기에 후보가 됐다. 하지만 10월 7일이면 나는 모든 베네수엘라 국민의 대통령이 돼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야당 깃발과 카프릴레스 지지 문구가 담긴 피켓을 흔들며 승리를 외쳤다. 베네수엘라 야권은 사상 처음으로 단일 후보를 선출해 정권 교체를 꾀하고 있다.

   

카프릴레스는 이날 후보 등록을 위해 선거관리위원회로 가면서 지지자들과 함께 10 거리를 행진했다. 암 투병으로 건강 문제가 불거진 차베스를 의식해 젊음과 건강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는 11일(현지시각) 차기 대통령직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직접 후보 등록을 할 예정이라고 AFP통신이 전했다. 그동안 관영 언론의 전화인터뷰에 응하거나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던 차베스는 최근 들어 공개 석상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의 최근 조사 결과 차베스의 지지율이 카프릴레스에 15%포인트 정도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베네수엘라 대선은 차베스의 병세에 대한 관심이 정책 대결 등 다른 이슈를 덮고 있는 양상이다.

   

[김승범 기자 sbkim@chosun.com]"

   

   

   

   

"INDRA:

   

연금술사님이 마크 와이스브로트가 남미은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여 마크 와이스브로트에 관한 인터넷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었다.

   

   

   

   

하나, 마크 와이스브로트는 미국 유대인이다.

   

둘, 마크 와이스브로트는 록펠러의 귀염둥이라 평가받는 촘스키와 연대 행동을 하는 등 교류가 있고, 촘스키의 책에도 인용이 되고 있다.

   

셋, 마크 와이스브로트는 제이 록펠러 상원의원이 있는 노예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있고, 미국 공화당에 비판적이다.

   

넷, 마크 와이스브로트는 언론에서 좌파 성향의 남미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섯, 마크 와이스브로트는 스티글리츠와 보조를 맞추어 IMF 처방을 비판하고 있다. 동시에 베네수엘라에서 중요한 작업을 진행중이다. 차베스는 록펠러의 숨은 귀염둥이로서 엑슨 모빌 등을 모시고 유전개발중이다. 또한 차베스의 반유대주의는 단지 부시정권을 비판하고, 록펠러를 찬양하기 위한 연극이었을 뿐, 본심은 아니었다.

   

   

   

인드라가 그간 국제유태자본이 남미 개발독재를 위한 좌파전략을 수행중이라는 주장과 차베스는 남미의 박정희라는 주장을 해왔는데, 마크 와이스브로트의 이력이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 중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마크 와이스브로트가 남미은행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면 향후 국제유태자본이 제 2의 제국주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세계 전략 포석으로서 그를 남미 지역에 관한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사님에게 감사드린다. "

   

국제유태자본: 유대인 마크 와이스브로트에 관한 보고서

   

http://blog.naver.com/miavenus/70046479403

   

   

현재까지 외신 뉴스 분석으로는 국유본이 차베스를 연임시킬 것인지, 끝장낼 것인지 결정한 바가 없이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국유본 분파들 사이에서 치열한 내부 갈등과 조율 중이다. 이를 전제하고, 현재까지는 노비네파 차베스의 근소한 우세승으로 나오고 있다.

    

허나, 국제유가가 현재처럼 낮은 시세를 유지한다면, 이러한 시세가 10월까지 이어진다면, 고유가로 퍼주기해서 유지시킨 차베스 지지세력의 이탈이 가속화할 것이다. 이는 기존 여론조사와 달리 정권교체 가능성을 높인다.

   

"중국 ″일본 핵무장 가능성에 우려″

   

기사입력 [2012-06-22 11:29] , 기사수정 [2012-06-22 11:29]

   

아시아투데이 추정남 기자 = 중국 매체들이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했다. 일본이 원자력 기본법에 '안전보장 목적'을 추가한데 따른 것이다.

   

중국 화남지역의 최대 포털 21CN은 21일자 뉴스평론 기사에서 이미 기술과 원료를 갖춘 일본이 원자력 기본법을 수정함으로써 핵무장을 위한 3박자를 갖추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는 일본이 21세기 군국주의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시아 각 국가는 고도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사는 또 일본이 2000년부터 민수용 핵발전용이라는 명분 아래 대량의 핵폐기연료를 매입, 아오모리현의 롯카쇼무라에서 재처리해 대량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를 준비해 놓은 상태며 그동안 첨단 핵무기 기술도 개발해왔다고 밝혔다.

   

기사는 일본이 위성발사에 사용된 로켓은 일정한 개조과정을 거치면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로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 누리꾼들 역시 일본의 우경화와 핵무장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일본연구'라는 아이디를 내건 한 누리꾼은 웨이보에 일본의 비핵화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며 일본 민중의 민족주의를 자극, 핵무장을 통해 `강대한 일본'을 건설하자는 우익인사들이 주장이 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다른 누리꾼도 일본이 핵무장을 하게 되면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추정남 기자 qtingnan@asiatoday.co.kr>"

http://m.asiatoday.co.kr/mnews/section/m_view.asp?seq=658501 

   

   

국유본이 인드라 예상보다 빠르게 일본 핵무장을 가시화한 것은 쪽발정은 정권이 위협받고 있기에 쪽발정은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꺼내든 카드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순서에 다름이 있을 뿐, 어차피 진행시켜나갈 프로그램이었다. 일본이 실제적으로 핵무장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통일한국이 들어서야 일본 핵무장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국유본의 최종 목표는 독일의 핵무장이다.

   

   

   

"통일 한국의 핵보유 :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여기에 북한이라는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한국의 전략적 위치는 더 중요해졌습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두 나라 중 어떤 나라로부터도 조정되고 싶어하지 않죠. 그러려면 이 지역 외부의 강국이면서 독립적인 한국을 지지하는 국가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을 싫어하고, 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미국인들 역시 한국에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국은 서로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죠."

   

―한국의 통일이 늦어도 2030년 이전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지요.

   

"북한 정부는 지탱될 수 없습니다. 북한의 후원자인 중국이 더 이상 북한을 지원하는데 관심을 보일 수 없는 시대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역시 북한에 관심이 없고, 일본도 북한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죠. 중국이 북한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는 의지와 이해가 줄어들면 북한의 생존가능성도 줄어듭니다. 어떤 지점에 이르면 한국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북한을 흡수해야 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80175550

   

   

상기한 지정학적인 분석에서 한국의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몽고,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네팔,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폴란드, 영국과 독일 사이의 프랑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베네룩스 삼국. 국유본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을 잘 활용한다. 허나, 지정학에 진실은 없다. 그것은 그저 국유본이 만든 체스게임과 같다. 마치 주식시장의 엘리어트 파동과 같은 것이다. 참가자들이 엘리어트 파동을 믿는다면 국유본은 타짜답게 어느 순간까지는 엘리어트 파동대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비켜간다. 그래야 수익이 극대화되니까. 그처럼 국유본은 지정학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상황을 만든 뒤에 어느 순간 그 반대로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현재 국유본이 한반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왜 한반도가 필요한가? 이 문제에 대해 이 글에서는 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펴 본 것이다. 물론 핵만이 변수가 아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어떤 형태로 이뤄지든 핵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가 남아있는 채로 통일이 이뤄진다면, 혹은 통일된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일본은 새로운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일본의 몇몇 분석가는 핵무장한 한반도 통일 국가가 핵무장한 북한보다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역설해온 바 있다.: 미 의회조사국의 '일본 핵 미래' 보고서"

http://blog.daum.net/0116010989/15870849

   

   

북핵만으로는 일본이 핵무장할 수 없다. 한반도 핵이어야만 일본 핵무장이 가능해진다.

   

"마이니치에 따르면 이번 조사에서 이바라키현 내 원자력기구 원자력과학연구소에서는 시멘트로 고체화된 2.8의 고농축 우라늄과 636g의 플루토늄이 발견됐다. 이 중 고농축 우라늄은 시험용 샘플로서 미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일 언론들은 "일 정부는 정부계 연구소의 고농축 우라늄뿐만 아니라 원자력연료 제조기업에서 약 4t의 저농축 우라늄이 검출된 사실에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며 "일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해 이미 IAEA와 처리 방향을 물밑 협상 중"이라고 덧붙였다.

   

주부(中部)·호쿠리쿠(北陸)·주고쿠(中國)전력 등 세 곳의 전력회사에서도 계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핵물질이 발견됐다. 추가 조사에서 발견된 미확인 핵 폐기물의 상당수는 IAEA와의 핵안전협정 발효 이후 처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마이니치는 "해당 물질이 무기로 이용되거나 테러세력의 수중으로 들어가 국제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사회에 완벽한 해명을 하지 않을 경우 IAEA나 다른 기관의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고 전했다.

   

한편 2004년 IAEA는 한국에서 2000년 천연우라늄 3.5으로부터 불과 0.2g의 저농축 우라늄을 만들어낸 실험 등을 문제 삼아 대규모 사찰단을 파견, 철저한 경위조사를 벌인 바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7565112

   

국유본은 이미 일본에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노트북 따위나 팔던 노비네/미쓰이 계열인 도시바가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도시바가 인수할 당시 도시바는 적자 상태였다. 웨스팅하우스 같은 회사를 인수할 상황이 아니었던 게다. ㅎㅎㅎ 도시바 = 올림푸스인 게냐^^?

   

국유본은 알파 오메가 작전으로 전세계적으로 핵확산을 시킬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제하는 방식으로. 빅터 로스차일드 시대에서 빅터 로스차일드는 냉전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핵을 활용하였다면, 데이비드 록펠러 시대에서는 다극화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핵을 활용하고 있다.

   

해서,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통일한국은 핵을 보유한다. 그뿐 아니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지니게 될 것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것으로는 동북아 긴장관계를 유지해나가기가 어렵다. 그보다는 한반도와 중국, 중국과 일본, 한반도와 일본 식으로의 대립 갈등이 보다 효과가 크다.

   

허나, 이를 위해서는 국유본이 지시한 대로 북에서 핵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쪽발 정일이는 인민의 식량난 해소 대신 북핵을 택하여 국유본으로부터 그간 체제보장을 받았던 것이다. 쪽발 돼중이 북에 핵무기 자금을 괜히 송금한 것이 아니다. 국유본 지시를 받아서 한 것이며,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물론 한국 경제 말아먹은 것도 업적이었지만.아직까지 한반도 통일이 안 된 것은 국유본이 기대한 것보다 미흡하게 북에서 핵을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제 거의 완료한 것 같다. 해서, 쪽발 정일이 색희가 뒈진 게다. 앞으로 역할을 다 한 한중일 쪽발이 색희들이 뒈질 것이다. 축하할 일이다. 통일이 가까이 온 것이다.

   

그런 만큼 더 긴장해야 한다. 이제 일본이 핵무장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으니까. 한일연방공화국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다행이다. 평화적인 한일연방공화국 조건은 쪽발왕체제 해체, 공소시효없는 일본 전범 처벌과 전범 쪽발 정당 해체와 쪽발민통당/쪽발통진당 해체, 한반도 통일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가피하게 동북아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하여, 국유본 기획대로 움직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일본인들은 지금이라도 떨쳐 일어나 쪽발 왕실을 향해 바주카포라도 쏴서 쪽발이 섬멸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동북아인의 생존이 걸려 있다.

   

군중은 그의 몸짓을 발견하지 못 하고 천황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그는 마스크를 한다. 그리고 바주카포를 꺼내 조준한다. 이때 경호원들이 달려온다. 그를 발견한다. 샐러리맨은 그의 울분을 담아 발사한다. "천황제를 폐지하라!!!"

http://blog.naver.com/miavenus/60009973090

아시아인은 지엽적인 지역 문제로 동북아를 볼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보아야 한다. 지구의 문제가 동북아에 걸려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한국과 중국은 세계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있다. 쪽발이들의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과 중국 관계는 좋다. 한반도 평화 통일의 적기이다.

    

아시아인이여, 한국인이여!

한반도 통일로 아시아 인민에게 평화를!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8 : 국제유태자본과 북핵, 한반도 통일

http://blog.naver.com/miavenus/70127655079

   

   

쪽발의 핵무장 뉴스는 당장으로는 악재다. 국유본이 일본정권에게 지시하여 오늘 망하나 내일 망하나 하는 쪽발정은 정권을 생명 연장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길게 보면, 한반도에 호재이다. 국유본이 쪽발정은 위력이 별로 없다고 보고 총론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세론에서 기획을 앞당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반도 통일이 보다 앞당겨졌다고 본다. 해서, 더더욱 경각심을 지니고서 한반도 통일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한반도 통일은 더 이상 당위가 아니다.

칠천만 인민의 생존이 달린 즉각적인 긴급 문제다.

   

추신 : 본문에는 의도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뭐, 보물찾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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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1 : 해골종단과 러셀회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24 01:48

http://blog.naver.com/miavenus/7013668543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1 : 해골 종단과 러셀 회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24

   

1. 해골 종단 (Skull and Bones) 

   

졸업반 학부생 4학년생이 3학년생 중 15명을 선발하여 일년간 활동한다는 해골종단. 오늘날 해골종단이 인기가 있는 것은 순전히 부시 가문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일 부시 가문이 없다면 해골종단도 의미가 없지 않을까?  

   

18세기,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문학 토론 모임은 프리메이슨으로의 연결고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스와 자웅을 겨뤘던 러시아 아나키스트 귀족 바쿠닌도 문학 토론 모임에서 프리메이슨을 만났던 것이다. 이 점에서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나는 그가 김일성을 말할 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내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데모하는 대학생들은 다 빨갱이고 북한으로 보낼 놈들이거나 아니면 무인도에 다 빠뜨려 다 죽여야 할 놈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솔한 판단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곤란했다. 내가 민주, 민중, 민족이라는 삼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이것이 왜 논쟁거리인지 모르기에 당연했다. 게다가 어느 날 제헌의회 깃발을 내리고 반미구국의 전위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니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헌의회는 무엇이고 반미구국은 무엇이냐 차이가 뭐냐 물어보면 그는 자세히 가르쳐 주었지만 뭐가 뭔지 몰랐다. 내가 그럼 제헌의회는 민중 편이고 반미구국은 민족 편이야 그러면 그는 쓴웃음만 지었다. 내가 에이, 모르겠다, 전두환이랑 싸우면 그만이지 라고 말하면 그는 마구 웃으면서 네 말이 맞다, 그것이 바로 애국애족의 순결한 정신이야, 지금은 우유부단함보다 단순한 정열이 필요해,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파스테르나크란 러시아 작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인용문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그런 귀족적, 부르주아적 태도야말로 반민중적이지. 수많은 혁명가들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에 몸을 바칠 때 그런 자식이 살아서 한다는 게 기껏 닥터 지바고 따위나 내놓는 것이니. 내용을 읽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말로는 나 같은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다고 하였다. 철의 규율로 단련된 동지를 모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쳬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꼭 읽어보라 하였다. 레닌도 매우 칭찬한 소설이라면서 말이다. 아, 그는 레닌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레닌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만큼 레닌을 아는 사람도 드문 듯 싶었다. 내가 레닌을 알 지 못 했고 책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지만 그가 레닌과 관련하여 토론을 할 때이면 누구도 그에게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김일성을 말했으니 깜짝 놀랄 일이다. 레닌은 훌륭한 혁명가지만 김일성은? 그는 전위는 적들의 수많은 이념적 공세를 받기 때문에 대중에게 오해될 여지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일 북에서 북한군이 내려오면 우리는 환영해야 할 것이며, 만일 북한군이 우리를 처형한다면 기꺼이 죽어야 할 것이라 말했다.

   

- 그래도 억울하잖아. 우리는 싸웠는데. 상 받지는 못 할 망정.

- 우리는 자본주의에 오염된 족속이야. 특히 우리는 전위로서 제대로 해내지 못 하는 일도 많았어. 과오가 많아. 나는 김일성 수령을 존경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지. 그의 명령이라면 죽을 각오가 언제든지 되어 있어.

   

- 그럼, 넌 김일성주의자야?

- 하하. 아니야. 냉정히 말하면. 아니야. 나는 나야. 전위이지. "

 http://blog.naver.com/miavenus/60003890297

   

Before the British invasion of Virginia forced the temporary closure of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and disbandment of the Phi Beta Kappa there early in 1781, Elisha Parmelee, an alumnus of Yale College and Harvard College, passed through Williamsburg and took charters from the Phi Beta Kappa to establish branches of the society at these schools. A second chapter was founded at Yale College in late 1780; a third, at Harvard College in 1781; and a fourth, at Dartmouth College in 1787. From these new chapters, the Phi Beta Kappa evolved from a fraternity with principally academic and some social purposes to an entirely honorary organization recognizing scholastic achievement. While the Phi Beta Kappa developed some of the characteristics which still distinguish Greek-letter fraternities, it was left to other students to fill the natural human need for fellowship with kindred students by extension of fraternity to a purely social context.   Further chapters appeared at Union College in 1817, Bowdoin College in 1825, and Brown University in 1830. The original chapter at William and Mary was re-established. In 1831, the Harvard chapter publicly disclosed the fraternity's secrets during a period of strong anti-Masonic sentiment.

(이하 영문자료 출처는 위키피디아)

   

파이베타카파는 1776년 5월, 버지니아주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서 시작하여 1780년 예일대학에서 두번째, 1781년 하버드대학에서 세번째 조직을 만들었다. 

   

파이베타카파는 다트머스, 스탠퍼드 등 미국 270여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 너희가 중앙은행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프리메이슨을 공격하겠다.

   

1826년에 이르면, 미국 메이슨은 오만 명에 달했다. 당대 프리메이슨이 일당 백 실력이었던 만큼 수천 명 수준도 미국을 장악할 수준인데, 오만 명이면 대단한 것이다.

   

이 시기 메이슨이었던 윌리엄 모건 대위가 프리메이슨의 해악을 담은 책을 출판하려 하다 죽는다. 그는 죽은 후 1827년 그가 쓴 "30년 동안 헌신했던 한 형제가 쓴 메이슨의 실상"이란 책이 유작으로 출간한다. 1829년 여론의 압력을 받은 뉴욕 주 상원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조사를 단행해 "프리메이슨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고, 언론도 프리메이슨의 위세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프리메이슨이었던 잭슨 대통령에 대항해 위드가 중심이 되어 반메이슨 정당이 들어선다. 이들은 1832년 선거에서 반 메이슨 정당의 후보들은 각 주와 지방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잭슨을 물러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880436

   

   

당대 미국 사회에서 프리메이슨 폭로는 꽤 충격적이었다.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의 대통령 당선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1830년대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프리메이슨 조직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시기 카톨릭 로마교황청에 맞서기 위해 기독교회와 프리메이슨에 동시에 몸담은 이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반메이슨 운동이 한창이던 1831년, 하버드 파이베타카파 비밀조직이 노출되면서 논란은 미국 대학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Skull and Bones was founded in 1832 after a dispute among Yale's debating societies, Linonia, Brothers in Unity, and the Calliopean Society, over that season's Phi Beta Kappa awards; its original name was "the Order of Skull and Bones."[1][3]

   

   

해골종단은 당대 시대정신 속에서 탄생한 셈이다.

   

   

"역대 43명의 미국 대통령 중에서도 학부를 기준으로 할 때 하버드대 출신이 5명으로 가장 많았다. 존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 테오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하버드대 출신이다. 예일대는 윌리엄 태프트, 조지 H 부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등 3명을 배출했다. 윌리엄 앤드 매리대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타일러 전 대통령 등 3명을 배출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2&aid=0002173463&sid1=001

   

   

당시 예일대학에는 Linonia, Brothers in UnityCalliopean Society 등의 문학 토론 모임들이 있었다. 이들 문학 토론 모임들이 파이베타카파 선정 발표 후 논쟁을 거듭한 끝에 해골종단을 탄생시켰다. 파이베타카파가 논란이 되니 PBK와 구별되는 독립된 조직을 만들자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문학 토론 모임들이 해골종단이 만들어진 이후에 즉시 해산한 것이 아니다.

    

By the 1830s the campus literary societies, Linonia, Brothers in Unity, and Calliope, were losing prominence. Calliope folded in 1853 and the others shut down after the American Civil War.[10] Calliope, Linonia, and Brothers in Unity existed respectively: 1819-1853, 1768–1878, and 1735-1868.[11] 

   

Phi Beta Kappa was inactive 1871 to 1884 at Yale.[12] In the 1820s Anti-Masonic agitation acros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rompted PBK to examine the role of secrecy in its proceedings. Secrecy was soon shelved at the Yale chapter.[13] Associated with PBK's national reorganization in 1881, secrecy disappeared as a signature among all chapters, quelling rivalry with collegiate fraternities, clubs and societies.[14] PBK exists today, without any secrecy, as an academic honor society.

   

해골종단이 성립한 이후에도 친메이슨적 문학토론 조직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허나, 이후 위드를 중심으로 한 반메이슨 세력이 정권을 잡자 친메이슨류 문학토론 조직들이 문을 닫았으며, 특히 남북전쟁 이후 대부분의 조직들이 폐관한다.

   

The only chapter of Skull and Bones created outside Yale was a chapter at Wesleyan University in 1870. That chapter, the Beta of Skull & Bones, became independent in 1872 in a dispute over control over creating additional chapters; the Beta Chapter reconstituted itself as Theta Nu Epsilon.[4][5][6]

   

하면, 해골종단이 파이베타카파를 대체할 수 있었나? 그렇지는 않다. 해골종단이 예일대학을 제외하고 분회를 만든 것이 기껏해야  Wesleyan University 이다. 허나, 이 분회조차 나중에는 독립하고 만다.

   

결국 PBK이든, 해골종단이든 1870년대~1880년대를 통과하면서 비밀조직 성향을 버리고, '가십걸'이나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등에서 볼 수 있는 돈질 좀 자랑하는 학내 사교 조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 러셀 트러스트 (Russell Trust)

   

William Huntington Russell (12 August 1809 – 19 May 1885) was an American businessman, educator, and politician. He was the founder of the Yale University secret society Skull and Bones.[1]:82 He was a descendant of several old New England families, including those of Pierpont, Hooker, Willett, Bingham, and Russell. His ancestor Rev. Noadiah Russell was a founder and original trustee of Yale College.[2]

   

The Russell Trust Association is the business name for the New Haven, Connecticut, based Skull and Bones society, incorporated in 1856.[1] The Russell Trust was incorporated by William Huntington Russell as its president, and Daniel Coit Gilman as its first treasurer. Gilman later went on to becom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and Johns Hopkins University before leaving to become the first president of the Carnegie Foundation. Gilman also served as one of the first board members of the Russell Sage Foundation.

   

" Russell & Co

   

인월리 :

"이버지가 귀족 유태인 계열인 루즈벨트는 어머니 역시 귀족 가문인 델라노 가문인데, 이 델라노 가문 역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이룬 300인 그룹 멤버였다."

   

1757년 인도에서의 아편 "재배"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가고, .

1773년 중국으로의 아편 "무역" 독점권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어갑니다.

이전까지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1820~1830년대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파는 아편무역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딘 매더슨 회사>에 중국 아편무역을 프랜차이즈합니다.

여기에 봄베이의 <사순 회사>가 뛰어들어, 두 회사는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 회사는 아편무역 프랜차이즈로 번 돈의 일부를 영국왕실에 바쳤습니다.

   

이 시기에 <사순 회사>의 하청을 받아 아편무역을 시작한 것이 미국의 <러슬 회사>이고,

<러슬 회사>의 파트너였던 '워런 델라노 2세'가 바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러슬 회사>는 1842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편무역회사로 성장합니다.

   

<러슬 회사>는 워런 델라노 2세 외에도 파트너가 3명 더 있었습니다.

   

(1) 설립자 새뮤얼 러슬의 삼촌은 <Skull & Bones>를 설립한 사람이고,

(2) 파트너 조시프 쿨리쥐는 토머스 제퍼슨의 사위이고,

(3) 파트너 워런 델라노 2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이고,

(4) 파트너 애비얼 로우는 컬럼비아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이고,

(5) 파트너 존 클리브 그린은 프린스턴 대학의 막대한 재정기부자입니다.

   

   

<러슬 회사>와 관련된 인물들만 잘 조사해도 미국의 아편무역 유명인사(?)들이 총출연합니다.

   

   

- 수반아님 글 중에서 "

   

   

위키피디아 등에서는 해골종단과 러셀회사와의 관련을 애매하게 소개하고 있다. 반면, 수반아님의 소개는 일목요연하다.

   

음모론에서는 러셀회사 배후에 해골종단이 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허나, 수반아님 글에 따르면, 새뮤얼 러셀은 해골종단이 탄생하던 1832년 이전인 1824년에 중국 광동에서 러셀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러셀 회사는 1839년부터 로스차일드 계열 사순을 위해 일하며, 1842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편회사로 성장한다. 예서, 인드라가 강조한 바 있다.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등이 아편농장을 경영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의 아편 재배 및 무역 거래는 담배 농사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다. 국유본 지시로 쪽발 정일이 씹쌕희가 북한에서 담배공장을 만들었었다? 이러면, 아편공장이 생겼다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쪽발 일성, 쪽발 정일, 쪽발 정은의 피를 이어받은 쪽바리색희들을 몰살시켜 독립운동가들의 원혼을 달래자! 칠천만 인민의 혁명투쟁으로 인민의 원쑤, 개씨발색희 쪽발정은과 그 일족을  똥침으로 똥구녕을 허벌나게 만든 뒤에 모조리 총살시키자. 천백배로 복수하자. 지하에서 조만식 선생, 김구 선생, 김두봉 선생 등이 미소짓는 모습이 선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러셀 가문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이주한 최초 가문 중 하나로 미국에서 유서깊은 가문이다. 허나, 이들이 청교도로 아무리 독실하면 무엇하나. 중요한 건 '먹고사니즘'이다. 뉴잉글랜드 지역은 남부 버지니아주와 달리 무역에 의존해야 했는데, 당대 무역에서 가장 돈되는 사업은 역시 노예무역과 아편무역이었다.

   

영국에서 출항한 배가 영국산 사치품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판 뒤 대금으로 흑인 노예를 잔뜩 사서 카리브해로 와서 쿠바나 남부 미국에 판다. 그 대금으로 미국 농산물을 잔뜩 산 뒤 영국으로 돌아간다. 남부 버지니아주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뉴잉글랜드 업자들이 중계하는 시스템이었던 게다.

   

예서, 아편 무역이 추가한 것이다. 1837년 영국의 중국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자 미국 상인의 아편 밀수 및 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로스차일드의 사순과 러셀회사가 손을 잡은 셈이다.

   

"넷,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안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57년 세포이항쟁 결과로 문을 닫게 된다. 헌데, 신묘하게도 1857년 공황이 발생한다. 이뿐만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본격적으로 수에즈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이 모든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74년에 가서야 문을 닫지만, 그 이전까지 지리한 청산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두 가지 대안을 마련했다. 투자은행 격인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와 상업은행 격인 'HSBC 은행'의 출범. 1870년대말에 이 모든 기획을 주도했던 영국 하원의원이자 전쟁의 신, 라이오넬 로스차일드가 숨을 거둔다. 하고, 1880년대부터 상원의원 내티 로스차일드의 시대가 시작한다. 내티 로스차일드하면 타이타닉이 유명하다. 타이타닉이 가라앉자 보험회사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이때, 로스차일드 은행만 무사했다. 내티가 보험 사업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내티에게 비결을 묻자 내티는 말했다. "그렇게 큰 배가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았다."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1442673&dencrt=dD%252BmtduWah%252Fbv4yYyuvLvgONadmSwyb80j0m7p%253%39n4Xw%253D&term=%BF%B5%B1%B9+%BD%C4%B9%CE%C1%F6+%C5%F5%C0%DA+%BD%C5%C5%B9+1868&query=%EC%98%81%EA%B5%AD+%EC%8B%9D%EB%AF%BC%EC%A7%80+%ED%88%AC%EC%9E%90%EC%8B%A0%ED%83%81+1868

   

"잠세트지 타타가 1868년 봄베이(現뭄바이)에 설립한 무역회사에서 출발하여, 印度가영국領이 된 1877년 엠프레스밀(Empress Mill)이라는 綿방적공장을 세우면서 印度산업화의 시발점이 된 상징적인 기업. 1914년 G.D. 비를라(Birla)가 창업한 아디티야비를라그룹, 1958년 디루바니 암바니(Dhirubhai Ambani)가 창업한 릴라이언스그룹과 함께 인도의 3大그룹에 속하며,3大그룹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 ."

 http://www.kmobile.co.kr/k_mnews/news/news_view.asp?tableid=IT&idx=250325

    

하면, 왜 국유본은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가 필요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는 당대 로스차일드의 치밀한 각본 하에서 흑자 부도한 셈이다. 해서, 부를 축적한 주주들을 위한 대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안은 세포이 항쟁이 끝난 후 십년 동안 세밀하게 시나리오가 짜여졌고, 그후에야 비로소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에즈 운하가 영국 소유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 회사가 최초로 투자한 국가가 다름 아닌 일본이다. 일본 근대화는 국유본 덕분이다. 99% 국유본 덕분에 근대화가 되었다. 1% 정도만이 일본인의 야동(AV) 덕분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94744015

   

"상당수 음모론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수에즈이다. 한마디로 유태인 영국 총리 디즈데일리 총리와 로스차일드간의 밀담을 통해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접수한다는 내용이다. 허나, 앞뒤 생략하고, 이런 대목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음모론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하고, 이런 이야기는 다른 음모론에서 듣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벤자민 디스데일리(Benjamin Disraeli). 그의 성, 디스데일리에서 앞의 D와 뒤의 I를 빼면 이스라엘이다^^!

   

1820년대이면 이미 유럽에서는 로스차일드 형제들이 귀족 지위를 취득할 때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전과 달리 유태인들도 이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단지 로스차일드 가문의 경사가 아니었다. 반면 영국 혁명에서 보듯 그 누구보다 유태인 덕을 보았던 영국에서는 오히려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치 입문이 1850년대에야 이루어졌고, 귀족 작위는 1870년대에 가야 이루어진다.

   

   

   

   

예서, 프리메이슨이니 일루미나티이니 하는 것이 유용했던 이유를 짚어본다. 하나, 귀족 작위는 장자나 그에 합당한 이들에게만 세습되었다. 그외의 자손들은 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로 인해 당대 교황 대 국왕의 권력투쟁 와중에서 국왕 편을 들어 출세를 도모한 귀족들이 많았다. 둘, 로만 카톨릭에 대항하는 개신교 종교세력은 유태인 만큼이나 정치 세력을 원했던 바,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프리메이슨이다. 다른 한편, 영국과 달리 역사적 조건이 상이한 독일에서 프리메이슨의 변형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일루미나티이다. 셋, 허나, 이들은 모두 유태인들이 공직 진출을 제한하고 있을 때의 산물이다. 해서, 유태인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다시 말해, 유태인들이 더 이상 얼굴마담을 필요치 않자 이들 조직은 급속도로 쇠퇴했다. 두 조직이 사실상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을 때, 유태인들이 세를 확장하고, 이 세를 바탕으로 당대 영국 귀족들과의 합작 형태로 만든 것이 19세기 말엽 300인위원회이다. 하고, 이를 완벽하게 국유본적 조직으로 만든 것이 빅터 로스차일드이며, 빌더버그가 그 실체이다.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패한 이후 실질 권력은 빌더버그에서 삼각위원회로 넘어갔다. 오늘날에는 CGI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면,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왜 수에즈는 결국 로스차일드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일까. 국유본은 처음부터 수에즈에 개입할 수 없었다. 수에즈 이권은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자본과 프랑스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국유본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는 수법을 잠깐 소개하자. 수에즈 운하는 공사가 계속 지체되었는데 이유는 뻔했다. 국유본의 사주를 받아 국유본 언론이 운하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한다 어쩐다 하고 비판을 해대었다. 공사가 지지부진하니 이를 통해서 수에즈 운하에 투자한 프랑스 자본을 크게 취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유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임을 잘 간파해야 한다. 또한 영국에서는 수에즈에 관심을 지니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영국이 잘 나가는 이유는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수에즈에 관심을 기울인다 함은 대서양 루트 대신 이전의 인도양 루트로 되돌아가니 세계 패권이 영국에서 다시 이태리, 혹은 프랑스로 되돌아가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이다. 헌데, 이는 국유본이 기획적으로 인도에서 사건을 일으키면서 해소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인도에서 국유본 기획의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카드로 수에즈가 부각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집트 현지 통치 세력을 장악하는 일이다. 이는 사이드 파샤 때에 이루어졌다. 하면, 왜 사이드 파샤는 수에즈 운하를 찬성하였을까. 여기에는 크림전쟁을 비롯한 이해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국유본이 사태를 국지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 문제를 해소하고, 정치 문제를 완결한 뒤에야 디즈데일리와 로스차일드가 만났던 것이다. 헌데, 대체적인 음모론은 이러한 과정을 무시한다. 그저 특정 사건에만 매몰되어 있고, 이를 역사적인 흐름으로 펼치지 못하는 것이 그간 음모론의 결정적인 약점인 것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04189031

   

   

새뮤얼 러셀에 힘을 실어준 이는 대니얼 길먼이다.

   

 http://blog.naver.com/maria1483/90122429283

   

특히 음모론자 멀린스가 주목하는 이는 대니얼 길먼이다. 이유는 대니얼 길먼이 미국 교육계를 지배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허나, 인드라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음모론자 멀린스는 국유본 간첩이다. 음모론으로 책낸 넘들은 모조리 국유본 간첩이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기 때문이다.

   

국유본이 유포한 것으로 보이는 인터넷 음모론에 따르면, 윌리엄 러셀이 1850년대에 독일을 여행할 때, 독일 프리메이슨 조직을 본따 러셀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인드라가 분석했을 때, 대니얼 길먼 때문인 듯싶다.

   

   

"미국의 교육가. 1852년 예일대학교 졸업, 주(駐)러시아 대사관 직원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였다. 18541855년 베를린에 유학, 귀국 후 17년 간 예일대학교에서 있었고, 18721875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분교의 학장, 18751901년 존스홉킨스대학교 총장직에 있었다. 그 후 1904년까지 카네기재단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출처] 대니얼 길먼 [Daniel Coit Gilman ] | 네이버 백과사전

   

   

대니얼 길먼은 약 2년간 베를린에서 유학했다. 이때, 대니얼 길먼은 독일 교육체제에 큰 감명을 받는다. 해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 미국에 독일식 교육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아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하면, 대니언 길먼은 구체적으로 독일 교육 어디에 감명을 받았나. 당시 독일 대학 체제는 학술연구 중심이었다. 해서, 학부 중심이 아니라 대학원 중심, 일반 교양 교육이 아니라 전문 학술 교육 체제였던 것이다.

   

해서, 대니얼 길먼은 미국 교육체제를 혁신적으로 뒤바꿀 기획을 했던 것이다. 문제는 자금. 이 자금을 러셀 회사에서 구했던 것이다. 해서, 회사 이름은 당근 물주 이름으로 했던 것이다. 이건 상식이지 않는가. 무릇 회사 이름이란 물주 이름으로 해야 탈이 안 난다.

   

여기에 그 어떤 음모론이 개입할 수 있는가. 없다. 있다면, 니 애비가 을사오적급 쪽발이 색희일 가능성이 크다.

   

인드라는 애초에 멀린스 같은 병쉰색희를 불신했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해골종단도 다른 비밀 사교클럽처럼 맛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일대 해골종단 출신 대니얼 길먼이 활약하니 해골종단 명맥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인 것이다.

   

예서, 여러분은 조직과 리더라는 조직의 생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99.9%의 조직은 리더에 의해 좌우된다. 해서, 대우 김우중이 말했지 않던가. 사회주의 체제란 지도자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나뉜다고 말이다.

   

그 나머지 0.1%만이 시스템에 의해 좌우되는데, 이런 이유로 조선과 일본이 국유본의 연구대상인 것이다. 중국만 해도 왕조가 평균 삼십년마다 바뀌고, 이는 유럽도 예외가 아닌데, 조선과 일본 왕조는 수백년 이상 권력을 유지하니까 관심인 게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19세기 후반, 예일대학의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해골종단 역시 점차 별 볼 일이 없게 되었다. 초기에는 세상을 열정적으로 바꿀 기획으로 넘쳐났지만 현실에서 막히자 관념과 실천이 분리되면서 해골종단은 오로지 전통적인 의미 이외에는 없는 조직으로 쇠퇴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80년대에 접어들어 새롭게 열정을 가져보자고 제 3의 그룹이 출범했지만, 스타 부재, 리더십 부재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일대는 완전한 기숙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학부생간 유대를 꾀하였으나 효과는 지지부진이었다.

   

1950년대까지 유지되던 예일대 신화는 이후 무너졌다. 오늘날 부시 가문으로 발생한 해골종단 예일대 신화란 흡사 프리메이슨 노이즈 마케팅과 같다고 할 것이다. 별 볼 일이 없는데, 볼 일이 있는 것인양 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단언한다.

   

해골종단?

실체는 없다.

오늘날 해골종단 믿고 예일대 가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한다.

   

조직에 의존하지 마라.

   

진정한 리더란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만든다.

   

인물이 없으면

로스차일드이든, 록펠러이든

조직은 멸문하기 마련이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만일 부시 가문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해골종단에 대해 단 1그램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가?

    

추신 :

증산도 사이비 쉬발넘들 각을 떠서 조국통일 이룩하자!

   

   

국제유태자본론이 평가하는 로스차일드의 재산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18 04:02

http://blog.naver.com/miavenus/70136262887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0 : 국제유태자본론이 평가하는 로스차일드의 재산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18

   

로스차일드 재산은 얼마나 될까?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날 수 있다.

    

록펠러 76조 달러, 로스차일드 45조 달러, 케네디 37조 달러.

   

일반적으로 인터넷 음모론으로 들이대는 애들을 보면, 쪽발병쉰 놈현빠들이 많다.

정신 나간 개색희들이고.

이런 신흥 종말론 병쉰 색희들이 한국 사회 주류란 것이 이 나라의 불행일 따름이고.

   

일부는 캐병쉰 증산도 색희들이고~! 역시 엿이나 처먹을 색희들이고.

   

해서, 믿을 수가 없다.

    

대체 이 자료 출처는 어디일까.

   

"포천지에 따르면 록펠러 가문의 자산은 약 76조달러로 엑슨모빌에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으나 상세 내역은 알려지지 않았다. "

http://economy.hankooki.com/lpage/worldecono/200804/e2008042918555169760.htm

   

출처가 인터넷 한국일보이다. 어떤 출처를 인용할 때는 '최근 포천지에 따르면' 이란 표현을 보통 쓴다. 최근이 아니면 근래도 좋다. 허나, 언제적 포천지인지 명기하지 않았다. 수상하다. 이런 건 기자가 기사쓰려고 인터넷 기사보다가 대충 보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문기사라도 인터넷 기사와 페이퍼 기사를 구분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인터넷 기사는 낚시용이 꽤 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출처가 의심스러워 더 조사를 해보니 이런 자료가 나왔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6739071&qb=MjAwMyDroZ3tjqDrn6wg66Gc7Iqk7LCo7J2865Oc&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1&pid=gG1zYF5Y7vdssacVitVssc--258250&sid=T41Mfi8xjU8AADwPFxU

   

    

재미교포가 썼단다. 2003년 포천지이다. 이제 2003년 포천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인터넷에서는 확인 불가능하다. 이상하게도 이 글 이외에는 이 문제를 거론한 글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세계 3대 경제 전문잡지라고 평가받는 포천지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로스차일드 대 록펠러 가문 재산 비교를 했다는데 한국 그 어느 뉴스도 취급하지 않았다? 이것 말 되나? 안 된다.

   

허나, 가끔 국내 국유본 언론이 미친 짓을 할 때가 있으니 가능성을 열어놓자. 해서, 미국에 있는 분들 중 2003년 포천 잡지 좀 알아봐서 사실 관계 좀 확인했으면 싶은 게다. 정말 이런 기사가 있는지. 인드라가 확인이 되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할 것이다.

   

이를 전제하고, 하나만 더 의혹을 제기한다. 록펠러와 로스차일드는 그렇다치자. 허나, 케네디 가문이 3위다?

   

웃길 뿐.

그냥 니가 말한 말이 웃긴다. 

   

   

   

   

   

   

"[로얄패밀리] 세계 금융의 보이지 않는 손…'로스차일드家'

250여년간 금융· 정치계 지배…역사적 사건 배후

최종수정시간 : 2010-11-24 15:51

(편집자주: 역사적으로 글로벌 사회·문화·경제를 좌우하는 명문 가문은 존재해왔다.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글로벌 자본시장을 주무르듯 이른바 로열패밀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파워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를 이해하고 역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로열패밀리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13회에 걸쳐 글로벌 로열패밀리의 역사와 자본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을 분석한다)

   

18세기 이후 약 250여년간 전세계의 돈줄을 좌우한 유대계 최대 금융가문 로스차일드.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은 세계 최고의 부자는 빌 게이츠가 아닌 유대계 자본가 로스차일드가라고 언급했다. 그는 로스차일드가문의 재산규모가 50조달러 정도일 것으로 추정했지만 전세계 자본의 절반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막강한 자본 파워를 자랑한다는 점에서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보통 '추정 불가능'으로 정의된다.

   

로스차일드가 금융의 힘은 세계 정치를 주물러왔다.

   

미국 남북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발포어선언, 수에즈운하 건설, 이스라엘 건국까지 인류 역사의 굵직한 정치 사건에 개입하며 2세기 동안 세계를 호령했다.

   

가문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어 로트쉴러로 붉은 방패라는 의미. 가문의 선대는 독일에서 골동품을 팔며 붉은 방패를 집 앞에 내걸었다.

   

로스차일드가문의 영광을 탄생시킨 인물은 174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희귀한 옛날 지폐를 구해 귀족과 상류층에게 팔러 다니던 마이어는 당시 프로이센의 왕 헤센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 빌헬름 황태자를 만나 직접 거래하며 환전 등 금융 관련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세계 최대 돈줄의 시작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당시 4000만달러에 달하는 최대 상속을 받았던 빌헬름의 재정을 담당하는데 이어 왕실의 자금을 관리하는 등 금고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로스차일드가가 자본 증식의 꿈을 실현한 데에는 다른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바로 정보력이다.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을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등 주요 유럽국가로 보내 금융사업을 확대했고 아들의 정보력과 명석한 두뇌는 가문의 전성기를 실현케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만의 정보 네트워크가 빛을 발한 것은 워털루 전쟁 투기 사건이다. 가장 명석했던 셋째 아들 네이선이 투자의 귀재 노릇을 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미리 간파했던 네이선은 워털루 전쟁에 정보원을 투입, 나폴레옹 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입수했다.

   

   

영국 런던 소재 로스차일드 은행. 블룸버그.

명석한 네이선은 정보를 역으로 이용했다. 프랑스가 아닌 영국 국채를 내다 팔아 치운 것이다. 영국군이 대패했다고 믿은 투자가들은 금융계 거목의 움직임에 재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영국 국채는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100파운드에 달하던 영국 국채는 한때 5파운드까지 떨어졌다. 네이선은 영국 국채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국채 가격은 폭등했고 그는 5000만파운드로 로스차일드 가문에 2억3000만파운드의 돈을 쌓았다.

   

당시의 시세차익은 현 시가로 약 6억 파운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채권을 쓸어 담은 네이선은 당시 거래소 상장 채권의 62%를 소유했다.

   

명석한 두뇌들의 활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워털루 투기로 막강한 자본력을 거머쥔 로스차일드가는 유럽 각지에 은행을 설립, 유럽 금융에 깊숙히 개입한다.

   

첫째 암셀은 프랑크프루트, 둘째 살로몬은 빈, 셋째 네이선은 런던, 넷째 칼은 나폴리,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에 각각 은행을 설립했다.

   

각국에 포진한 형제들은 상호간에 현지 정보 교환을 최우선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의 네트워크는 유럽 금융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이들의 활약은 정치성을 띠기 시작해 각국의 왕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기에 이른다. 국가의 재정도 이 가문에 의해 좌우됐으며 정부는 전쟁 참여와 지원에도 이 엄청난 가문의 손을 빌려야 했다.

   

"로스차일드가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떤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로스차일드가는 철도사업의 미래를 예측, 꾸준한 투자를 단행해 철도 산업 발전과 동시에 자본을 늘렸고 19세기 중반 영국정부의 수에즈 운하 주식매입 자본을 공급해 정경유착을 더 견고하게 했다.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물론 2차대전 중 영국에 전쟁비용을 지원했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해 이스라엘을 독립케 한 발포어 선언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보이지 않는 배후로 움직였다.

가문은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는 금융으로 똘똘 뭉친 철학을 심었다.

   

자식들이 금융인으로 성장해 가문이 금융제국이 되길 원했던 아버지는 가문내 결혼, 재산의 비밀관리, 장남의 가문 승계 등을 철저하게 요구하며 가문이 가진 파워의 분산을 막았다.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약 5000억 달러였다. 이는 당시 미국내 자산의 2배이며 전 세계 부의 50%에 해당하는 규모다.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추정이 불가능하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업들이 대부분 비상장이기 때문. 일각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이 세계의 부호 빌 게이츠가 가진 500억달러의 1000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로스차일드가문은 8대에 걸쳐 여전히 글로벌 금융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김동효 기자(sorahosi@)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3099&idxno=380360

   

이것이 일반적인 로스차일드 음모론을 설명한 글일 것이다.

   

예서, 1940년대에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이 5,000억 달러였다는 대목에 유념하자.

   

이에 대한 반론은 1929년 미국의 국민총생산이 984억 달러인데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이 이보다 많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이다. 허나, GDP 등과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반론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전세계 GDP 총합은 2011년 세계은행 발표 기준으로 약 63조 달러이다.

   

http://201480.tistory.com/1

   

반면, 세계 금융자산은 얼마일까.

   

"삼성생명 보험금융연구소에서는 2010년 말 현재 세계 금융권 관리자산은 180조8000억 달러로 세계 GDP(62조9000억 달러)의 2.9배 수준이라는 내용을 '세계 금융자산 현황' 보고서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90년대 이후 실물경제 성장보다 높은 성장을 이어오다 2008년 금융위기로 자산이 감소했으나 2009년 이후 성장을 이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http://www.forbes.com/2002/02/28/0228dynasties_7.html

   

180조 달러로 GDP 대비 약 3배이다.

   

예서, 금융자산이란 무엇인가. 실물자산이 아닌 자산으로 주식, 채권, 예금, 적금 등이다. 이때, 부동산이나 금, 골동품은 실물자산이므로 금융자산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금융자산 대 실물자산 비율이 대체로 7 : 3에서 6 : 4 정도되니 최소로 잡아 7 : 3으로 하면 금융자산과 실물자산을 합치면, 260조 달러가 된다. 이는 GDP 대비 4배가 넘는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GDP 대비는 부적절해 보인다. 해서, GDP 비교론을 간단히 제낀다.

   

좀 더 지혜로운 비판은 없을까.

   

   

   

천국보화(마13:44) | 성모세

http://blog.naver.com/cjseong123/60067206895

   

얼마 전 <250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이란 책을 번역하고 출간했다. 어떤 책이든 완전한 번역을 위해서는 책의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배경지식을 수집해야 한다. 이 책이 유명한 유대인 집안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다룬 책이므로 유대인과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서 여러 정보를 수집했다. 그 정보를 그냥 묵혀두기 아까워 블로그에 6차례에 걸쳐 포스팅한다. 혹시 포스팅에 틀린 정보가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를...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얼마나 될까? 그 답은 대략 얼마나 되는지 추정을 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다 이다.

   

왜 알 수 없을까? 그 이유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대외적으로 유산을 공표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업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상장기업이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최대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파리 오를레앙 은행이 겨우 파리 증권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기업일 정도니까.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 그 어떤 경우이든 법원이나 다른 기관이 나의 재산을 조사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동시에 유산의 평가에 관한 어떤 법적 조치나 공표도 금지한다. …… 누구든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가족 간에 분쟁을 야기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 자는 나의 유언에 대항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 행동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250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360쪽

   

그러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있다.

   

1. 50조 달러 設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폐전쟁>(랜덤하우스 刊)의 저자 쏭훙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이 50조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50조 달러? 영어로 표현하면 50trillion dollars이다. 50trillion dollars는 5billion dollars 곱하기 10,000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1조원이 영어로 1billion dollars(10억 달러)이니, 50조 달러는 5조원 곱하기 10,000, 즉 5경원이 된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World Bank에 따르면, 2007년 세계 GDP는 54,347,038 million dollars이다. 54,347,038million dollars는 54,347billion dollars 이고 trillion dollars로 바꾸면 54trillion dollars, 즉 대략 54조 달러이다. 미국의 GDP는 13조 달러이고, 일본의 GDP는 4조 달러이다. 세계 1,2위의 GDP를 합쳐도 20조 달러가 안 되는데, 50조 달러나 되는 돈을 로스차일드 가문이 몇년에 걸쳐 어떻게 모았을까? 그들이 50조 달러를 모을때 다른 사람들은 잠자고 있었다는 말인가? 50조 달러라는 숫자는 어떻게 해서 놔왔을까? 저자의 숫자 개념이 없는지,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그런지 그 어데고?

   

   

저자 쑹훙빙은 이런 음모설 비슷한 주장에 대해 동아일보와 인터뷰했는데, 이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여전히 자신의 주장의 근거에 대해 '~카더라'로 일관하고 있다. 정말 그렇게 확신하는지, 아니면 음모론을 적당히 부풀려 자신의 책을 띄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2. 최대 420억 달러 設

   

<250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저자 프레더릭 모턴은 책을 저술했던 1962년 당시 19세기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은 재산을 약 60억 달러로 추정했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를 참조하면 1962년 1달러는 2008년 현재 7.25달러 정도 하므로, 20세기 100년 동안 재산을 하나도 불리지도 잃지도 않은채 이어 왔다고 해도 현재의 재산은 최대 420억 달러 정도이다. 영어로는 42billion dollars이고 한국 돈으로는 42조원 정도이다.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이 쇠퇴했다. 과연 자신들의 재산을 하나도 잃지 않고 21세기로 넘어올 수 있었을까? <250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가문>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3. 10억 달러 안팎 設

   

2002년 미국의 <포브스>지는 당시 기준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을 15억 달러로 추산하였다. 15억 달러면 영어로 1.5billion dollars이고 한국 돈으로는 1조 5천억원 정도이다. 나는 이정도가 가장 합리적인 추정치라고 생각한다. 이 재산은 많아보이나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2002년 기준 록펠러 가문이 85억 달러, 멜론 가문이 100억 달러, 듀폰 가문이 120억 달러이다. 참고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를 참조하면 2002년의 1달러는 2007년 1.15달러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대부자 이건희 일가의 재산은 2007년 기준으로 2~4조원 한다."

http://blog.naver.com/cjseong123?Redirect=Log&logNo=60067206895

   

   

인월리는 주류 가설과 음모론 사이에 있다고 했다. 상기한 이는 로스차일드 관련 책을 번역 한 분이다. 그런 만큼 신뢰도가 높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이름을 건 것이 아니겠는가. 인드라도 비록 인터넷이지만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였으니 역시 이름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다. 이 정도 자신을 노출하고 말해야 맞든, 틀리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이 분을 남이라 부르고 남 견해에 대해서 말하기로 하자.

   

   

 http://www.haclass.com/bbs/board.php?bo_table=ha_0001&wr_id=2842&page=

   

하나, 50조 달러설에 대하여

   

인드라도 쑹훙빙 추정액에 비판적이다. 허나, 남에게도 비판적이다.

   

남은 1, 2위 GDP를 거론한다. 이는 좀 웃긴 비유이다. 미국과 유럽을 드는 것이 합리적이다. 남 기준일 때, 미국과 유럽은 대체로 같다. 해서, 미국 유럽 합쳐 26조, 일본 4조 해서 30조다.

   

해서, 1940년대 로스차일드 재산이 그대로 존속했다면, 오늘날 로스차일드 재산이 30조 이상이라고 추정해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1940년대까지 로스차일드가 딱히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이 시기까지는 모건 재산, 록펠러 재산도 모두 로스차일드 재산으로 간주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둘, 420억 달러설에 대하여

   

쑹훙빙은 병쉰색희였다. 공감한다. 헌데, 남은 프레더릭 모튼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프레더릭 모튼의 1960년대 60억 달러를 오늘날로 환산하여 420억 달러로 말한다.

   

비판 근거는 양차대전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많은 돈을 잃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 이후 모든 것을 잃었다는 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우라늄 광산 발견으로 재기했다고 나온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으로 이득을 본 가문이다. 겉으로는 손해인 듯싶지만, 시일이 지난 후에 보면 이익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것이 한두번인가. 만일 로스차일드 가문이 쇠퇴했다면, 무슨 힘으로 빌더버그를 조직할 수 있었고, 세계은행과 IMF를 만들 수 있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인드라가 보기에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로스차일드 가문은 쇠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 로스차일드 가문은 빅터 로스차일드를 통해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 십억 달러설에 대하여 

   

"2002년 미국의 <포브스>지는 당시 기준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을 15억 달러로 추산하였다. 15억 달러면 영어로 1.5billion dollars이고 한국 돈으로는 1조 5천억원 정도이다. 나는 이정도가 가장 합리적인 추정치라고 생각한다. 이 재산은 많아보이나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2002년 기준 록펠러 가문이 85억 달러, 멜론 가문이 100억 달러, 듀폰 가문이 120억 달러이다. 참고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를 참조하면 2002년의 1달러는 2007년 1.15달러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대부자 이건희 일가의 재산은 2007년 기준으로 2~4조원 한다."

   

이에 대해 인드라는 록펠러 이야기를 할까 한다.

   

1974년 11월에 발표된 '록펠러 가문의 부(富)에 관한 미국 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내의 록펠러 일족이 관리하고 있는 재산만도 당시의 추정으로 6,400억달러였다. 당시 록펠러 재산 추정액이 60억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백 배인 게다.

   

주인공은 넬슨 록펠러이다. 넬슨 록펠러가 대통령이 될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서, 미국에서 청문회를 하자 넬슨 록펠러가 록펠러 가문을 까발린 것이다. 여기에 놀란 것이 록펠러 뿐만 아니라 국유본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넬슨 록펠러는 복상사라는 희안한 병병으로 뒈졌다.

   

해서, 포브스가 록펠러 재산을 85억 달러로 추산하면, 최소한 그 백 배인 8,500억 달러로 환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이 15억 달러라면, 그 백 배인 1,500억 달러로 일단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인 게다.

   

예서, 끝인가. 그렇지 않다.

   

록펠러 재산은 대부분 미국에 있다. 해서, 미국법에 의거하여 그나마 공개된 재산이 많다. 반면, 로스차일드 재산은 상당 부분 유럽에 있다. 하고, 유럽 재산은 상당수 유럽 금융기관처럼 대부분이 비공개 가족 기업들이기 때문에 재산 파악이 어렵다.

   

허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록펠러 재산보다 많다는 추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재산이 살아 있으려면 교환이 되어야 한다. 교환하지 않고 장롱 속에 있으면 죽은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해서, 아무리 많아도 기껏해야 록펠러 재산과 등가인 정도인 게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록펠러 재산도 로스차일드 것, 모건도 로스차일드 것이었으나 이제는 모두 분리되고, 오직 로스차일드 것만 재산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인드라가 강조하는 1973년 국유본 권력교체론에 근거한다.

   

여기까지 남을 비판했다.

   

하면, 다시 캐병쉰 놈현빠나 증산도빠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로스차일드에게는 숨겨진 금이 있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금에 대해 말해보자.

   

현재 전 세계 금 보유량은 40억 온스에서 60억 온스에 이른다고 한다.

   

40억 온스설은 '골드' 저자에 근거한 것이다.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6008383&dencrt=G0I6SuM8gYlS%253%39oWYsYoLDBw7A%253%39f7cX%252Bq2p7QcVKr8x8%253D&term=40%BE%EF%BF%C2%BD%BA&query=40%EC%96%B5%EC%98%A8%EC%8A%A4

   

반면, 60억 온스설은 '달러' 저자에 근거한 것이다.

   

"버핏은 세상의 모든 금을 모두 모아 합해 놓으면 1큐빅, 약 68피트의 정육면체가 되는데 현재 금 1온스당 가격이 1750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크기의 금값은 9조6000억달러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버핏은 이 정도의 돈이면 "미국의 모든 농경지(매년 2억달러 가량의 농산물을 산출해내는 4억에이커의 토지)와 엑슨 모빌(매년 400억달러 이상의 순익을 내는 세계 최고로 수익성 높은 기업) 16개사를 살 수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하고도 1조달러가 남는다는 설명이다.

   

버핏은 "지금부터 1세기 동안 4억에이커의 농경지는 엄청난 규모의 옥수수와 밀, 면화, 다른 여러 농작물을 산출할 것이고 어떤 화폐로 계산하든 매우 가치 있는 풍부한 작물을 계속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 기간 동안 "엑슨 모빌은 아마도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수조달러 선사할 것이고 수조달러가 넘는 자산을 계속 보유할 것"이라며 "이런 엑슨 모빌을 16개나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버핏은 "(그동안) 17만톤의 금은 규모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아무 것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라며 "정육면체의 금을 애무할 수야 있겠지만 반응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21004504436455&outlink=1

   

예서, 버핏이 60억 온스설을 이야기했으니 60억 온스설로 가보자. 

   

오늘날 국제 금값 기준이 온스가 아니라 트로이 온스이지만, 별 차이가 없다고 보고 버핏 말대로 세계 금 가치가 10조 달러라고 하자. 예서, 로스차일드가 세계 금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스위스 은행에 비밀리에 예치한 금이 10조 달러라고 가정하면, 총 20조 달러 금이 있는 셈이다.

   

해서, 공개된 금의 2/3도 로스차일드 영향력 하에 있다고 보면, 최대 16조 달러가 로스차일드 금 재산인 셈이다.

   

일단, 이것만 보면, 인터넷 음모론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로스차일드가 대단한 재산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해보인다.

   

이를 전제하고, 비판을 해보자.

   

설사 로스차일드가 보유한 스위스 은행 금이 공개된 금 만큼 있다고 해도 세계 부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왜인가.

   

만일 로스차일드가 숨긴 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현재 금값 가치 총액에 근접할 때까지 금값이 폭락하기 때문이다.

   

해서, 로스차일드 숨겨진 금을 고려해도 로스차일드 재산은 최대 6조 달러 미만인 게다.

   

    

인드라 국유본론에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의문을 지닌 분들이 하는 생각이 있다.

   

정치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장악했는지 몰라도

경제를 여전히 로스차일드가 지배하고 있다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얼굴마담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아니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인맥으로 연결된다.

과거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으로 생각했던 재산들이 독립하거나 데이비드 록펠러 재산으로 이동한 것을 고려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모건체이스맨해튼은행이다.

   

국유본 권력에서 패배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과거 재산 계산법이 로스차일드 직할령 재산 뿐만 아니라 관할 재산 전부를 포함한 것이었다면, 이제 남은 재산이란 로스차일드 직할령 재산뿐인 게다.

   

   

   

정리하자.

   

국유본론이 평가하는 로스차일드 재산은 얼마일까.

   

6조 플러스 1,000억 달러이다.

   

2002년 포브스에서 15억 달러 판정을 받았다면, 그 당시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백배인 1,500억 달러였던 셈이다.

   

예서, 왜 1,500억 달러에서 1,000억 달러로 줄였는가.

   

당시 2002년은 노비네파 전성 시절. 지금은 골드만파 시절.

   

또한 6조는 무엇인가.

   

금 가치인 게다. 이 정도 영향력을 가져야 금 시장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본다.

허나, 예전과 같지 않음이 분명하다.

또한, 금시장 비중이 전체 시장 규모에 비해 미미한 편이다.

   

무엇보다 록펠러 가문 자체 재산은 비율이 낮을 지라도

그 이상으로 록펠러 인맥으로 만들어진 재산이 압도적이기에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은 록펠러 가문 재산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

국제유태자본론 결론이다.

   

   

미트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11 12:37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781675

   

   

15.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16. 엘람왕국이 중요한 이유 세 가지

17. 수메르 문화에 심취한 아리안은 히타이트와 미탄니를 통해 수메르 신화를 현지화한다.

18. 베다의 초기 경전, 리그 베다에서 바루나와 인드라

19. 페르시아 키루스 2세는 모세신화와 조로아스터를 융합한 신화를 창조한다. 

   

   

오른쪽 인물이 엔릴

   

   

이슈타르

   

바루나

   

   

   

15.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원주지(原住地)는 아르메니아였으나 인류학상의 계통은 불명(不明)하며, BC 3000년대부터 북(北)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였다. BC 15세기에는 미탄니왕국(王國)을 세워, 동쪽은 자그로스산맥에서 서쪽은 시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최성기에는 아시리아를 지배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으며, 왕녀(王女)를 투트모세 4세의 후궁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히타이트제국(帝國)과의 싸움에 지자, 이에 편승해서 독립한 아시리아에 의해서 BC 13세기에 멸망하였다. 후르리인의 문화는 그 후에도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후르리인 [人, Hurrian ] | 네이버 백과사전

   

미탄니 제국은 후르리인, 후리인(오늘날 국가없는 민족으로서는 가장 많은 삼천만 명인 쿠르트족)과 아리안이 함께 만든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예서, 아리안이 최상층 지배계급을 형성했다고 한다. 해서, 그들의 언어나 문화는 산크리스트어와 많은 관련이 있고, 그들 자신도 인도 아리안족과 같은 족속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동시에 선진 수메르 문명을 아리안족에게 알리는 택배 기사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신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국가간 조약에서 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보증인 게다. 오늘날보다 보증 관계가 더 확실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근대 인디언 문화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당대 신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으므로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미인 게다.

   

이때, 일각의 해석에서는 미트라를 해의 신, 바루나를 달의 신으로 여기는데, 아니다. 굳이 해의 신을 말한다면 바루나가 해의 신이다.

   

오늘날의 관념으로 생각하니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수메르만 보더라도 해와 달과 별의 신은 그저 그런 신이었다. 즉, 엔릴과 엔키보다 하위의 낮은 지위의 신이었을 뿐이다. 단지 밤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있으니 그에 맞는 신을 지정했을 뿐인 게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달의 신, 해의 신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수메르가 최초로 달의 신을 최고신으로 만든다. 또한, 이집트가 최초로 해의 신을 최고신으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아예 유일신으로 만들었다.

   

하면, 인드라는 충분히 설명하였고, 쌍둥이신은 논외로 하고, 바루나와 미트라를 설명하도록 하자.

   

"바루나는 베다(Veda) 신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신. 언제나 미트라(Mithra) 신과 함께 불린다. 천공(天空)의 신이라 하며 그들의 눈이 태양이라고 한다. 그는 신들의 지배자요, 우주 질서의 수호자로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아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조물주이면서 도의신(道義神)이다. 그러나 브라흐마나(Brahmana) 시대에 와서는 창조주의 성격이 프라자파티(Prajapati)에게 옮겨지고 그는 물(水)의 신(神)으로 격하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1026

http://blog.naver.com/sukhh/20139842486

   

사법신, 혹은 율법신이자 계약의 신인 바루나는 전쟁 시에는 원반을 던져 상대를 죽이곤 했다. 원반은 태양을 의미하는 동시에 무기였다.

이 바루나 신이 후일 페르시아에서 변형을 거쳐 아후라 마즈다 신이 되는 것이다.

http://cafe.naver.com/grace119/1262

   

충성의 신, 미트라는 신들의 왕이요, 마법사 격인 바루나를 호위하는 신이었던 듯싶다. 게임하는 이들은 잘 알 것이다. 마법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 동안 몸빵이 되어줄 전사가 필요하다. 그것이 미트라다.

   

다시 말해, 미트라는 호위 무사, 호위 대장인 게다. 오늘날로 치면, 수도경비사령관이나 경호실장인 게다. 해서, 낮이건, 밤이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고, 항상 왕 또는 마법사 옆을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 인드라는?

   

인드라는 전쟁신이다. 물론 처음부터 전쟁신이 아니었다.

   

"인드라(Indra)는 처음부터 전쟁의 신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폭풍의 신으로 간주되다가 후에 아리안 족이 들어와 기존 종교와 통합되면서 인드라는 전쟁신의 경향을 가지게 된다."

   

"영웅들이 자신의 가장 좋은 말을 타고 서로 싸우다가 포위되었을 때, 불러 도움을 구하는 존재가 바로 나이다. 아주 관대한 나 인드라는 전쟁터를 뒤흔든다. 나 인드라는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그 어느 누구도 나의 힘을 막아내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을 내가 하였다. 어떤 신도 나를 막지는 못한다. 나는 무적이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카스트의 네 가지 계급 중에 두 번째인 크샤트리아 계급의 신격화다. 후에는 하늘의 신인 드야우스(Dyaus)를 대신하여 하늘 신[천신(天神)] 역을 떠맡았기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의미를 반영한 제석천(帝釋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인드라는 자신의 아버지를 밟아 가루로 만들었다. 이런 패륜아적 파렴치한 행위는 낡고 쇠약해지는 우주의 질서를 재편한다는 의미이며, 이런 과정에서는 (설혹 자신의 부모라 할지라도) 예외란 없음을 상징한다. 아래로는 자신의 늙은 부모를 추방하고 패권을 잡는 동물 세계를 포함하여, 위로는 우주에서 별들의 파괴처럼 진화하며 발전하는 존재들의 세대교체의 제식(祭式)인 셈이다. 인드라에게는 막강한 무기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지상에 내리꽂히는 천둥번개로 바지람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금강저, 바즈라(Vajra)라고 하며, 티베트 불교 문화권에서는 도르제(Dorje)라는 이름을 갖는다."

http://www.himal.kr/1-himal/2004Garhwal/garhwal-015.htm

   

전쟁하면 최일선에서 싸우는 야전사령관이다. 아두를 구하기 위해 조조 진영으로 들어가 대군과 맞싸우며 적 장수 50명을 베고 돌아오는 조자룡이다.

   

"힘은 산을 뽑을 정도이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정도로 기력이 雄大(웅대)함.

   

유래 및 용례

   

史記(사기) 項羽紀(항우기)에 나오는 말이다. 楚(초)나라 項羽(항우)가 漢(한)나라 沛公(패공) 劉邦(유방)을 맞아 垓下(해하)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던 날 군대는 적고 먹을 것마저 떨어져 四面楚歌(사면초가)에 몰렸는데 자신의 여자 虞美人(우미인)과 술을 한 잔 마시며 감개가 무량해서 시를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세상을 덮었다는데 때가 불리하니 騅(추)마저 가지 않누나. 추마저 가지 않으니 난들 어찌하리 虞(우)야, 우야 너를 어찌하리. 노래를 마치고 우미인과 눈물을 흘리다가 우미인에게, "너는 얼굴이 아름다우니 잘만 하면 沛公(패공)의 사랑을 받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미인은 자살을 하고 만다. 위의 시를 '虞兮歌(우혜가)'라고 한다. 騅(추)는 항우의 말인 오추마이다."

   

역발산기개세 항우이다.

   

알렉산더요, 한니발이요, 시저(카이사르)요, 징기스칸이요, 광개토대왕이요, 이순신이다.

   

해서, 인드라와 미트라는 은근히 경쟁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는 돌격대장이요, 다른 하나는 수비대장이니까.

   

이는 역사적으로도 구도가 잡힌다. 인드라는 아리안이 인도로 진입했을 때 부각된 신이다. 반면, 미트라는?

아케네메네스 왕조에서 미트라가 부각되었다고 하나 실제로 미트라가 뜬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다음이다.

   

즉, 알렉산더 통치기에는 조로아스터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이후 파르티아 왕국 초기에 미트라 신앙이 크게 퍼진다.

   

왜이겠는가?

   

미트라가 수비대장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보다 자세하게 후술하겠다. 로마 군인이 왜 미트라에 푹 빠졌는지를 설명하겠다.

   

중요한 건, 아케네메네스 왕조에서 미트라는 별 볼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왜인가?

많은 이들이 아리안이 이란의 토착민으로 잘 못 알고 있다. 아니다. 아리안은 인도를 침략했듯 이란 역시 침략했던 것이다.

   

하면, 이곳에는 원래 누가 살았나?

   

엘람인이 살았다.

   

16. 엘람왕국이 중요한 이유 세 가지

   

"엘람을 이란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짙지만 엘람시대의 언어와 이란의 언어는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두 언어가 엘라모-드라비디안(Elamo-dravidian)에 속한다. BC 4000년대 말부터 3000년대 초까지 이란 고원에는 메소포타미아식의 도시문명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저지대인 쿠제스탄에서는 엘람이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다. 엘람에는 다양한 지역을 통합시킬 수 있는 일원화된 정치권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본 권력구조는 1명의 군주가 여러 공국의 통치자들을 지배하는 형태를 취했다. 군주의 바로 아래 동생이 부왕이 되었고, 아들은 수사(Susa) 지역의 통치자가 되어 3명이 함께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엘람이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던 BC 2000년대에 만들어진 사원 유적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독자적인 구조의 지구라트가 수사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 시기 엘람의 조각품 가운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수사의 나피라수 왕후의 실물크기 청동상은 놀랄 만한 걸작품으로 여겨진다. "

[출처] 엘람왕국 [Elamite Dynasty ] | 네이버 백과사전

   

엘람인은 페르시아의 드라비다인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 왕조사 연표입니다

   

주요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

메디아 제국(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

파르티아 제국 (250 BC–AD 226)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226년–651년)

이슬람 제국 (650–1037)

셀주크 제국(투르크) (1037–1219)

몽골 제국(티무르제국) 점령 시대(1219–1500)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팔레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그래서일까. 어떤 연표에서는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허나, 이란땅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워 오래도록 통치했던 족속인 게다. 어찌하여, 알렉산더 점령시대를 기록하면서도 엘람왕국 시대를 쏙 빼놓을까.

   

이는 오늘날 이란인들이 자신들은 마치 한번도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개쑈를 벌이고자 하는 것일까.

   

인드라는 강조한다. 이란인이 오늘날 이란인인 건 엘람왕국을 침략해서 식민지화했기 때문이다.

   

엘람왕국은 세 가지 이유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일. 엘람인은 이웃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끊임없이 교류한 덕분에 일찌기 문명화한 족속이다.

   

이. 엘람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인도, 이란을 잇는 교통로였다.

   

"엘람 시대는 이란 고원에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만나이 왕국(Mannaeans kingdom)과 자볼의 샤르에 소흐타(Shahr-i Sokhta), "불타버린 도시") 및 최근에 발견한 지로프트 문명과 같은 더 오래된 문명이 있음에도 이란 역사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엘람어는 이란어와 그다지 관련이 없으나, 크게 보아 두 언어는 모두 엘람드라비다어(Elamo-dravidian)에 속한다. 오늘날 이란의 주 가운데 하나인 "일람(Ilam)"의 이름이 "엘람"에서 유래하였다…

   

신 엘람 2기(신 엘람 후기)는 이란인이 이란 고원으로 옮겨간 대이주로 특징지어진다. 기원전 800년 무렵에 시작한 아시리아의 근원은 "강한 메디아인" 곧 활동적인 메디아인이고, 그들을 가리키는 적당한 이름(파르티아인, 사가르티아인(Sagartian), 마르지아인(Margian), 박트리아인, 소그디아나인 들)으로 뒷날 역사에 등장하는 "멀리 떨어진 메디아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압박하는 부족 가운데 하나가 파르수(Parsu)이다. 파르수는 기원전 844년에 처음 기록에 보이는데, 우르미아 호 남동쪽 바닷가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파르수는 이 시기의 끝에 엘람인의 원래 살던 곳인 이란 고원의 이름이 페르시아 본래의 이름으로 바뀌는 원인이 되다."

   

삼. 성경에서는 고레스왕인, 후일 아케네메네스 왕조를 여는 키로스 2세, 혹은 키로스 대왕이 엘람을 다스리던 총독 출신인 게다.

   

투란인 영역

   

17. 수메르 문화에 심취한 아리안은 히타이트와 미탄니를 통해 수메르 신화를 현지화한다.

   

"아리아라는 말은 '고귀한'이란 뜻으로 그들이 자칭하는 말이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은 펀자브 지방에 들어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혼혈을 장려하였다. 이 무렵은 청동기문화의 단계로, 가부장적(家父長的) 대가족의 집합으로서의 부족이 정치경제의 단위였다. 신앙은 다신적으로,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여러 가지 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의 일부는 BC 1000년 무렵부터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상류 각지에 작은 촌락을 형성하고 농경을 주로 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철기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며 바라문을 정점으로 하는 사성제도(四姓制度:카스트)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BC 1000년에서 BC 700년 사이에 《리그 베다》로 이어지는 3개의 성전이 성립되었는데 이들 성전은 지금도 브라만의 근본 성전으로서 존중되고 있다. "

[출처] 아리아인 [人, Aryan ] | 네이버 백과사전

   

아리안계의 시원은 의견이 분분하나 유력한 가설은 박트리아이다.

   

박트리아는 현재까지 조로아스터 발생 지역으로 유력한 지역으로, 오늘날 아프카니스탄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박트리안인이 인도, 이란, 터키, 유럽 방면으로 왜 이동하였는가는 투란인 때문으로 보인다.

   

투란인은 돌궐, 투르크, 흉노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란인은 아리안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자신을 고귀한 자로 부르는 의미가 있다. 즉, 중국인이 변방인을 야만족으로 보는 명칭처럼 이란인 역시 투란인을 야만족으로 보고, 자신을 문명인으로 보는 의도가 깔려 있다.

   

아리안인이 인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 2,000년경부터 기원 전 1,000년에 이르른다. 하고, 또 다른 일부가 오늘날의 이란인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터키에 도달하여 히타이트 제국과 미탄니 제국을 건설한다.

   

18. 베다의 초기 경전, 리그 베다에서 바루나와 인드라

   

펀잡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신은 바루나 대신 인드라였다.

"인도의 곡창지대, 펀잡으로 들어선 아리안족은 최고신 인드라를 잊는다. 대신, 농경신으로 삼위일체화한다.

그것이 브라흐만 종교, 브라흐만 체제이다.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하고 일체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브라흐만은 우주를 창조하는 에너지인 동시에 우주를 창조하는 근본 원리이다. 모든 것이 다 브라흐만에 의해서 형체를 입고 태어나 다시 형체를 잃고 브라흐만으로 돌아간다.

   

이를 성경 기자들이 구약을 재구성할 때 참고했다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이전에는 각각의 신이었다. 헌데, 유목에서 농경으로 전환하자 신을 통일해야 했다. 이전 유목 부족에게는 불필요했던 신의 통일이, 농경 부족화하자 신의 통일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왜? 대규모 농경은 소규모 수렵에 비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였기에 이 많은 사람들을 묶을 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20067080

   

펀잡에 이르기까지 아리안의 이주 여정은 온갖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해서, 전쟁신 인드라가 찬양받을 수밖에 없었다. 펀잡 이전까지는 인드라가 최고신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펀잡에 도착하여 농경사회로 접어들자 전쟁신 인드라에게 의존할 일이 크게 줄었다. 전쟁이 끝났으니까. 반면 원주민을 지배하며 농경사회를 이끌어야해서 카스트 제도를 만든 직후라 아리안은 새로운 질서에 걸맞는 신적 체제가 요구되었다.

   

인도 이주 과정에서 바루나에서 인드라로 이동한 신의 권력은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브라만, 우주의 창조자인 시바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비수뉴로 옮겨갔다.

   

기원전 13세기, 인도 펀잡에 정착한 아리안과 여전히 박트리아와 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아리안 차이는 사제계급 사이에서 사법신, 바루나와 전쟁신, 인드라에 대한 평가에서 갈렸을 것이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을 건너 펀잡에 도달한 아리안인은 여기까지 올 때 수고로운 신이 사법신 바루나가 아니라 전쟁신 인드라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

   

사법신 바루나를 믿는 사제계급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 때, 전쟁신 인드라를 믿는 전사계급이 정복사업을 계속한 것이다.

   

이에 리그베다 찬가는 초기 바루나 찬가 대신 인드라 중심 찬가가 되는 것이다.

   

허나, 바로 이 대목에서 신학적 반발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겠다.

   

펀잡 지역에서 아리안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배가 아플 족속이란 여전히 고향에 남아 있던 부족일 터. 이에 대해 박트리아에 남아 있던 제사장들은 답변할 필요가 있었던 게다. 그것이 최초의 조로아스터적 의문인 게다.

   

- 그들 인드라 족속은 떠나 잘 먹고 잘 산다. 우리는 남아 있는데, 배고프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루나 일족은 말한다. 바루나도 인드라 업적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조로아스터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거의 없고, 신화의 형태로만 조금씩 전한다. 후기의 경전에 따르면, 그는 천상적인 선존재(先存在)로서 역사의 한중간에 세계의 중심이 되는 곳을 골라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출생과정은 좀 특이하다. 하늘에서 만들어진 그의 육신의 재료는 먼저 비를 타고 내려 식물에 흡수되고, 다시 그 식물은 암소에게 먹히어 우유속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그 우유를 하오마와 섞어 마신 그의 양친이 마침내 조로아스터를 임신하게 된다는 게 후기의 경전이 말하는 그의 출생 경로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로아스터는 웃으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출생하기 사흘전부터 신성한 빛이 그 마을을 감싸 그것을 불길이라고 생각한 악마들은 그를 죽일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온몸으로 빛을 뿜는 어린아이들 보게되었는데 그가 바로 갓 태어난 조로아스터였다. 악마들은 그를 불타는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늑대의 굴에 던져 놓는 등 네가지의 혹독한 시험을 했으나, 그는 가까스로 그걸 이겨내고 악마들을 물리쳤다. <초자연적 빛>에 대한 믿음과 <악에 대한 투쟁>의 의무를 상징하는 신화인 성싶다.

   

그의 성장시기에 관해서는 그가 열다섯 살에 성인임을 나타내는 띠를 두르게 되었다는 것과, 세 아내의 남편이요, 여섯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게 없다. 그가 무엇으로 생업을 삼았는지, 어떤 학습과 연마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사건이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은 커녕 구전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러던 그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은 서른이 되던 해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신앙적인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그는 어떤 강가의 언덕에서 천사 '보후 마나'-Vohu mana. 선한 사상의 상징-를 만났다. 사람의 형상으로 아홉 번이나 조로아스터 앞에 나타난 보후 마나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신은 아후라 마즈다밖에 없다는 것과 조로아스터는 그 아후라 마즈다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뒤 10년에 걸쳐 각기 다른 천사장(天使長)들이 나타나 아후라 마즈다의 가르침을 일러주었는데, 그들은 '아샤 바이슈타'-Asha Vaishta. 참 또는 완전한 正義-와 '크샤트라 바이리야'-Kshatra Vairya. 권세 또는 완전한 왕국의 기대-, '하우르바타트'-Haurvatat. 온전함 또는 인간의 구원-, '아메레타트'-Ameretat. 불멸, 특히 영혼의 불멸-, '스펜타 아르마이티'-Spenta Armaiti. 헌신 또는 조화와 대지-였다.

   

그들로부터 깨달음과 믿음을 얻게 된 조로아스터는 곧 그 새로운 교의를 전하려고 나섰다. 처음 10년 간은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할 만큼 그의 포교활동은 참담한 실패였다.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자신의 사촌 하나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어 비슈타시파 왕(王)의 궁정을 찾아듦으로써 그의 종교적 생애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비슈타시파 왕은 보통 아케메네스 왕조 키루스 대왕의 아버지로 추측되는데, 그 역시도 처음에는 조로아스터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파 승려들의 모함을 믿어 그를 감옥에 던져넣기까지 했다가 어떤 계기로 그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가 왕의 병든 애마를 고쳐주고 그 환심을 샀다는 말도 있고, 또 달리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비슈타시파 왕의 총신 자마스프에게 시집 보내 왕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고도 하나, 그 극적인 개종의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왕이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자 오래잖아 그의 궁정과 왕국 전체가 조로아스터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 그 새로운 가르침은 다른 아리안족의 나라에까지 번졌으며 나중에는 종교전쟁으로 개종을 강요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로아스터의 죽음은 그런 종교 전쟁의 와중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튜란족과의 싸움에서 져 그가 살던 도시가 점령되자 그 도시로 난입한 적병은 별 생각없이 한 사원에서 신성한 불을 지키고 있는 늙은이를 죽여버렸는데 그게 바로 일흔일곱살의 조로아스터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또다른 얘기로는 브라만교를 고집한 교적(敎敵) 아레자도오스빠에게 피살되었다는 것과 도시가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그의 최후인지는 판정하기 어렵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19. 페르시아 키루스 2세는 모세신화와 조로아스터를 융합한 신화를 창조한다.

   

"캄비세스 1세의 아들로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BC 559년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켰고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나보니도스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출처] 키루스 2세 [Cyrus II ] | 네이버 백과사전

   

키루스 2세는 과연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의 아들인가.

   

"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 제1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뒤이어 키악사레스(Cyaxares)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왕위를 계

승했다. 아스티아게스에게 만다네(Mandane)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이 딸의 방뇨(放尿)로 전 도시가 물에 잠기고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

까지 범람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해몽가인 마고스들에게 이 꿈을 이야기하고 그들로부터 꿈의 의미를

자세히 듣고 대단히 놀랐다. 그리하여 아스티아게스는 딸이 결혼할 만큼

나이가 차자 그 꿈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메디아(Media,

Medes)인 중에서 사위를 고르지 않고 캄비세스(Cambyses)라는 이름의

페르시아인에게 딸을 주었다. 이 남자는 가문도 좋고 성격도 조용했다.

아스티아게스는 그 청년이 메디아의 중류층보다 훨씬 낮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다네가 캄비세스에게 시집간 그 해 아스티아게스는 다시 꿈을 꾸

었다. 이번에는 이 딸의 음부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이것이 아

시아 전역을 뒤덮는 꿈이었다.

   

그는 이 꿈을 꾸고 해몽가들로부터 이 꿈의 의미를 전해 들은 후, 이미 임

신 중인 딸을 페르시아로부터 불러들여 딸을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 그는

딸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를 죽여 없애려 했다. 왜냐하면 해몽가인 마

고스들이 이 꿈으로 판단하기를, 딸의 소생이 마침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예서, 볼 수 있듯, 키루스 2세 출생 신분이 불확실하다. 승자의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 2세는 캄비네스 2세와 메디안 공주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나 장차 왕이 된다는 예언에 따라 메디안왕이 단속함에 따라 아기 때에 버려지고 이리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반박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런 신화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리우스 1세 당시에 페르시아 곳곳에서 키루스 후예를 내세운 이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전하는 키루스 2세 족보는 날조되었을 확율이 높은 것이다.

   

예서, 누가 키루스 2세 족보 날조를 도왔던 것일까.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다니엘이 키루스 2세의 외삼촌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전승을 신뢰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키루스가 정치적 발판을 삼았던 지역이 엘람 지역이고, 엘람 지역이 바빌로니아 지역과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키루스 2세와 유태인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를 공격할 때, 성문을 열어줘서 바빌론 공략을 용이하게 한 족속이 유태인이기도 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쪽발 석현 각을 떠서 한일연방공화국 제물로!

한일연방공화국 만세!

   

   

인드라 VS 미트라 1 (수메르에서 페르시아까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9 07:35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61606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9 : 인드라 VS 미트라 1 (수메르에서 페르시아까지)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9 

   

   

   

   

   

0. 수메르 이전에는 문명이 있었는가.

1. 신화는 수메르로부터 시작하였다.

2. 수메르 대홍수 신화의 엔릴(새, 봉)과 엔키(뱀, 용)이라는 신들의 대립 구조가 세계의 선악 신화들을 탄생시켰다. 

3. 노아 대홍수는 언제 일어났는가?

4. 새, 봉 계열은 사자, 독수리, 늑대, 매, 까마귀로 하늘과 태양의 신으로 변형하고, 뱀과 용 계열은 황소로 대지와 물의 신으로 변형한다.

5. 길가메쉬는 하늘의 황소를 죽인다.

6. 이슈타르는 죽은 황소를 부활시키며 황소를 그리워한다.

7. 대홍수 이후 바빌론에서는 대홍수 책임을 물어 엔릴의 인기가 추락하고, 달의 신, 난나르가 최고신으로 등극한다.

8. B.C 3000년대 대홍수 이후 이집트 왕조가 성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9. 호루스는 대기와 불의 신이지, 태양신이 아니다.

10. 이집트 제 5왕조 우세르카프 때부터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다.

11. 엔릴 일족은 바빌론을 떠나 이집트에 당도하여 태양신 일족으로 거듭난다.

12. 이집트에서 아크나톤 유일신 사상이 전 세계 최초로 성립한다.

13. 기원전 13세기 무렵 모세는 람세스 2세 때 아크나톤 유일신 사상으로 무장하고 이집트를 탈출한다.

14.  가나안에 정착한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는 태양신과 달신의 융합 시대였다.

   

   

   

   

   

0. 수메르 이전에는 문명이 있었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으나 현재까지 99.99% 허망하다.

0.01%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1. 신화는 수메르로부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동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바빌로니아신화에 등장하는 낙원의 옛 지명. 틸문(Tilmun)이라고도 한다. BC 2520년경 라가시의 왕 우르난셰의 옛 수메르어 각문(刻文)에서부터 BC 710년경 사르곤 2세의 아시리아어 각문에 이르기까지 약 1800년간에 걸쳐 수메르아카드어 각문에서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곳은 페르시아만과 인더스강 지방 사이를 왕복하는 배의 중계지점(급수지)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우르난셰의 기록에는 목재의 공급지로 되어 있다. 딜문의 위치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1946년 P.B. 콘월의 연구와 1953년 덴마크의 G. 비비의 조사 등으로 역사상의 딜문은 페르시아만 서쪽 연안에 있는 바레인섬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딜문이라는 지명은 수메르어의 신화적 원전(原典)에도 나타나 있어 옛날에는 신화적 지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우스드라(ziusdra;생명을 본 사람)를 주인공으로 하는 <대홍수신화>를 기록한 단편으로, 대홍수로 인류가 멸망했을 때 지우스드라만이 구조되어 신들의 도움으로 딜문 땅에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대홍수신화는 아카드어로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 제11권의 에피소드 및 《아트라 하시스 이야기》의 대홍수 이야기의 원형으로서 이들이 뒤에 《구약성서》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로 발전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수메르의 대홍수신화에 기록된 딜문은 2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이 사는 낙원, 즉 <에덴동산>의 원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낙원이라는 뜻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수메르인의 세계는 심연에서부터 형성되었고 하늘과 땅은 신의 힘으로 단단한 돔(dome)에 의해 분리됐다. 창세기 두번째 장은 에덴 낙원을 소개한다. 수메르의 딜문과 비슷한 장소인 그곳은 "엔키와 닌후르사드"의 신화에서 묘사되었다. 딜문은 순결하고 찬란하며 성스런 땅이다. 엔키에 의해 축복받아 달콤한 물이 넘쳐흘렀다. 엔키는 그곳을 풍성한 개펄과 야자나무로 채웠다. 그는 닌후르사그를 임신시켜 대지에 여덟 가지 새로운 식물을 자라게 했다. "동쪽에 자리잡은" 에덴에는 물이 "붇거나(riese)" 범람하는 강이 하나 있었는데,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과 더불어 4대강을 형성했다.

   

그곳은 또한 푸르게 우거져 나무들에는 열매가 가득했다. "주님은 땅의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콧구멍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으니, 비로소 인간이 생명체가 되었더라." 엔키와 닌마는 비슷한 방법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심연(abyss)의 여왕이자 엔키의 어머니인 남무는 엔키에게 "아브주를 덮고 있는 진흙의 '심장(heart)'을 다듬고" "그것으로 모양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거기서부터 유사한 점은 끝이 나서 두 신은 형태가 잘못된 인간을 여럿 창조하곤 논쟁을 시작한다.

   

엔키와 닌후르사그로 되돌아와서, 우리는 이브 탄생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엔키는 닌후르사그의 자식들인 식물을 먹어버렸기 때문에 그녀에게 저주를 받아 먹어치운 각 식물에 대해 하나당 하나씩의 상처를 입었다. 엔릴과 여우는 엔키 대신에 그 저주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엔키와 다시 결합하여 새로운 자식들 여덟을 낳았고, 그들이 각각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의 갈비뼈를 치료한 자식을 닌티라고 불렀는데 달(months)의 여왕이고, 갈비뼈의 부인, 또는 생명을 주는 여인이란 의미이다. 이런 연상은 이브에게로 이어진다. "

http://blog.yahoo.com/_TMN2C4CZ5UA73VMPUPOXRKIZPA/articles/128938

   

   

   

소돔산

   

"성서 고고학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한 이론에 따르면 현 바위 소금으로 된 소돔 산 근처에 위치한 소돔 시가 고대 소돔시였다. 그러나 다른 이론에 따르면 사해 바다 동족 해안에 위치한 밥 에드-드라와 누메이라가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라는 설이있다." 

http://blog.naver.com/paul3377/115559188

   

   

롯의 아내 소금기둥?

   

"성경에서 신의 분노로 유황 불 속에 멸망한 것으로 나와있는 소돔과 고모라가 존재했으며 두 도시의 멸망은 신의 노여움보다는 자연 재난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BBC 방송이 18일 보도했다. BBC 방송에 따르면,은퇴한 영국의 지질학자 그레이엄 해리스 박사는 소돔과 고모라가 사해 연안에 건설됐던 것으로 믿어지며 따라서 당시 사해에서 나는 자연산아스팔트를 거래했을수 있다고 설명했다. 타르질(質)의 이 물질은 당시 배의 방수용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돌과 돌 사이에 발라 건물 등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사해 인근의 땅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지구의 2개 판(板)구조사이에 위치해 매우 불안정했다.즉 소돔과 고모라가 위치한 지역은 지진에 매우 취약한 지역이었다는 것. 지질학과 고고학적인 증거로 미루어 볼때 커다란 지진이, 성경에서 말한 멸망이일어났다고 했던, 450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해리스 박사는 당시 사해 연안 하부에는 가연성 메탄 가스층이 존재했으며 지진이 이 가스에 불을 붙였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땅은 사람이나 짐승이 빠지면 나오지 못하는 유사(流砂)로 변하면서 대규모 사태가 두 도시를 휩쓸었을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설명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실험을 통해 뒷받침됐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잔해가 사해의 소금끼 먹은 물밑에서 발견돼 이런 가설을 증명하지 않는 한 결정적인 증거가 아직도 더 필요한 상태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093390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책소개

저자는 신화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히브리 경전보다 빨리 수메르에서 신화가 만들어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히브리 경전은 르의 신화가 전승된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수메르에서 최초의 신화와 문명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그것에 대한 여러 자료와 주장을 이 책에 실었다.

    

저자소개 

김산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신화와 인류학을 공부하고 주로 수메르 신화에 관련된 책들을 주로 저술하는 작가이다. 저자는 20년동안 수메르의 신화, 역사, 문명과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고, 수메르어, 악카드어와 같은 고대어를 해독하며 인류의 '최초'를 찾아 나서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수메르어 판본과 악카드어 판본으로 구성된 점토서판 원문 모두를 음역한 작품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2005년)를 발표하여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청소년을 위한 길가메쉬 서사시』(2006년)를 집필하여 2007년 문화관광부 교양부문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를 발표했으며 여전히 지리산에서 수메르 신화 시리즈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919

   

   

   

   

   

2. 수메르 대홍수 신화의 엔릴(새, 봉)과 엔키(뱀, 용)이라는 신들의 대립 구조가 세계의 선악 신화들을 탄생시켰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엔릴은 새(봉)였으며, 엔키는 뱀(용)이었다.  엔키가 장남이어서 처음에는 지구의 신이었는데 서자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엔릴이 지구의 신이 되었다. 이후 엔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만, 분한 마음에 틈만 나면 엔릴을 씹었다고 전해진다. 해서, 엔릴이 홍수를 일으켰을 때, 가장 반대한 이가 엔키였다.

   

예서, 영지주의가 말하는 이 세상을 만든 신이 불완전하다는 '불완전한 신' 개념이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해서, 이는 불완전한 신보다 불완전한 신을 만든 상위의 최고신 개념으로 이어진다.

   

   

"바빌로니아 창세기 에누마 엘리쉬(원형 수메르 신화를 국조신 마르두크를 섬기는 바빌론 사람들 입맛에 맞게 변용한 것) 이전의 이 진짜배기 수메르 신화의 최대 매력은 바로 엔키라는 존재입니다. 창세신 아누의 서자이며 신 중 제2 서열인 이 엔키는 에아 또는 누딤무드라고도 불리는 자로서, 신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미래를 아는 자, 금속을 지배하는 자이자 신들의 유전 공학자로서 생명의 창조 비법을 알고 있으며 기형체에게도 각자 살길을 터 주는 인간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입니다. 창세신 아누의 적통자로서 인간에게는 엄하고 가혹하며 신들의 수장이자 실세로서 권위적인 제 1서열의 하늘의 신 엔릴과는 성격적으로 상반된 존재입니다.

   

엔키는 서자이지만 장남이기에 원래는 자신이 최고위에 올라도 부족함 없다 생각하고 있지만, 아누의 의중은 엔릴에게 있으며 세도 밀리는 탓에 그냥 생각을 죽이고 있을 따름입니다.(여기서 야훼와 루시퍼(사탄)와의 대립각이 은근히 드러나네요). 단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서만은 곧잘 최고의 권력자 엔릴의 불같은 성격을 거스릅니다. 대놓고 항명하지는 않더라도 엔키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엔릴의 심기를 상하게 하기는 충분합니다. 허나 엔키는 겉으론 모른 체 잡아 떼거나 때로는 타고난 유창한 언변으로 자기 위치를 흐트리지 않고서도 좀은 단순한 성격인 엔릴의 기분까지 살살 달래주면서, 뒤로는 인간들이 좀이나마 낫게 살도록, 엔릴이 내리는 해를 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돕고 있습니다. 뭐 고생고생해서 만든 내 걸작품인데..하는 정도의 심산 아니었을까 싶지만 정말로 매력있습니다. ^^

   

이 수메르 전승에서는 하늘의 신 엔릴의 상징은 새이며 그의 소속신들 또한 대체로 동일하게 새라고 하는 하늘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땅과 물의 신(나중 엔릴이 땅까지 지배하면서 물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만)인 엔키와 그 소속신들의 공통적 상징은 바로 뱀으로 나타나는 존재들이지요. 이중 의술과 관계되는 신도 엔키 소속에 들어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고로 옛 시대에서 의술은 생명 창조와도 직결이 되기에 그러한즉 의술을 상징하는 헤르메스의 지팡이의 2두사 카두세우스나 생성과 소멸, 나아가서는 지식을 상징하는 꼬리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가 엔키 소속의 대표적 상징체입니다. 구약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놋쇠뱀을 만들어 장대에 다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독에서 회복되더라는 사건도 모세 이전부터 전해왔을 엔키의 전승을 따른 대목입니다. (왜 하필이면 사탄의 상징인 뱀을 야훼의 종인 모세의 지팡이에 달아야 했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인류 공통의 오랜 신화적 구도인 뱀과 새의 대립각이 바로 이 수메르 신화에서 최초로 등장합니다. (동양에도 용(뱀)과 봉(새)의 대립각이 있죠.) 특히 대체로 엔키의 영역이었던 이집트에서는 뱀 숭앙의 자취가 꽤나 많이 남아있는 편이고요. "

http://blog.daum.net/solpee/15075425 

   

   

   

   

   

   

지우쑤드라는 BC 3000년경 수메르  '슈루파크'의 마지막 왕이자 제사장이었다. 

   

   

"길가메쉬서사시(수메르 신화)에선 작은 신들이 큰 신들을 위한 노역에 지쳐 반란을 하고 이에 당황한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을 누그러 뜨리고자 신들의 원시 노동자인 인간을 창조한 것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작은 신들의 주동자를 참수하고 그 피를 찰흙과 섞어서 지혜의 신 엔키와 어머니신 아루루에 의해 인간을 만듭니다. 큰 신이며 권력자 신인 엔릴은 이런 원시 노동자인 인간들이 해마다 늘어 매우 수가 많아 지면서 신들에게 불평을 해대며 외쳐대는 소리에 세상이 시끄러워 졌다며 인간들을 청소할 계획을 세웁니다. 기근 등 여러 재해로 몇 번 시도했지만 인간을 끝내지 못하자 대홍수로 밀어버릴 것을 결정하고 모든 신들에게 인간에게 알리지 말라는 맹세를 하고 인간의 구세주며 창조자인 엔키에게도 강요하고 결국 하죠. 하지만 엔키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겨 엔키의 사제였던 지우쑤드라를 갈대벽 반대편에 세우고 엔키는 갈대벽에게 중얼거린 모습으로 이 사실을 알려주고 방주를 만들게 하고. 결국 소수의 인간만 살아 남게 된 거죠. 하지만 대홍수로 수많은 인간이 죽어서 잠자리마냥 물위에 떠있는 모습을 보고 많은 큰신과 작은신들이 고통을 겪으며 매우 슬퍼하고 특히나 인간 탄생에 관여한 아루루 여신의 비통 또한 컸으며 수많은 신들이 엔릴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구요. 이를 안 엔릴은 엔키에게 따지고 엔키의 일로 일단락 됩니다. 그후 엔키는 인간이 또 늘어나면 세상이 시끄러워 질 것을 염려해 언어를 나누어 다시는 한마음이 되는 것을 막은 겁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docId=48900190&qb=7KeA7Jqw7JGk65Oc6528IOyXlO2CpCDsl5TrprQ=&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GKUdc5Y7uwsstfX7%2Bhssc--419007&sid=T4MU1nP5gk8AAAGAC6o

   

   

   

   

   

3. 노아 대홍수는 언제 일어났는가?

   

   

   

   

   

   

노아 대홍수는 언제 일어났는가?

   

인드라가 성서에서 흥미를 느끼는 대목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다. 또한 구약 중에서도 창세기이며, 노아의 대홍수 때까지다. 이후 아브라함이 어쩌느니 하는 것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래서인지 인드라는 유독 세 가지에 관심이 끌렸다. 하나는 당대의 사람들이 장수하는 것이었다. 이는 슈메르 왕도 그렇고, 한단고기의 단군들도 굉장히 오래 산다. 현 인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 불가인 게다. 또 다른 하나는 거인족이다. 과연 거인족이 실재하였는가이다. 한 2미터 정도야 지금도 있으니 별 문제가 없는데, 3미터는 물론 10미터 넘는 거인족이 있었다는 게다. 믿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전 지구적인 홍수이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황당해서 웃고 넘어갔다. 하고, 이십대 이후에는 딴에는 문학, 문예 이론 좀 공부했다고 상징체계로 잠시 접근해봤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엽 하이텔에서 반문화동호회를 만들었는데, 그때 회원간 진화론자와 창조과학론자끼리 날밤을 까며 토론을 하는 데에 큰 흥미를 느꼈다. 처음에는 골수 진화론자여야 좌파 행세한다고 여겨 잘 모르고 폼 잡고 있었지만, 워낙 모르는 내용이 많아 진지하게 처음부터 공부하는 자세로 하다 보니 어언 십여년이 흘렀다. 고대사 사이트, 외계인 사이트, 음모론 사이트, 창조과학 사이트, 각종 사이비과학 비판 사이트들을 섭렵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열린 마음'이 되었다. 하면, 지금은 어떤 태도인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다. 단지 지금 말하는 것은 잠정적인 것이다. 설사 인드라가 진리를 언급했다 할 지라도 그것은 진리가 잠시 인드라에게 머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전제하고, 홍수설화에 대해 말해 본다.

   

전 세계적으로 홍수설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 시기가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지구를 뒤덮는 홍수여야 성서에서 말하는 대홍수라고 하였을 때 기록만 보면 기원전 2,000년~2,30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홍수가 기원전 24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쯤에 인류의 멸망을 가지고 올 대홍수설이 각 지역마다 거의 공통된 시기에 일어나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 단군조선 = 치수 기록으로 남아있음 B.C 2200년

- 중국 = 치수 기록 단군과 동일

- 그리스 = 데우칼리온의 신화 B.C 2000~2300년으로 추정

- 노아의 홍수 = B.C 2000~2300년

- 이미르 홍수 = B.C 1800년대로 추정

- 묘족 뇌공 설화 = B.C 2000년 이전

- 인도 마누 신화 = B.C 2200년 이전

- 수메르 홍수 신화 = B.C 2300년경"

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d1id=5&dir_id=5&docid=522522&qb=7ZmN7IiY7ISk7ZmUIOyLnOq4sA==&enc=utf8&section=kin&rank=1&sort=0&spq=0&pid=fX3SRB331ylssbnXfPNssv--026161&sid=Su3SNXOi7UoAAFzqH0Y

   

허나, 이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다. 각 지역에서 지역적인 대홍수가 있었다고 추정이 되지만,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고 볼 여지는 희박한 편이다.

   

"두 교수는 20여년에 걸친 각종 문헌 연구와 현지 탐사를 통해 1만5000년 전 빙하기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7500년 전에 이르러 지중해로부터 흑해 남서쪽 보스포루스해협 너머로 나이아가라폭포의 200배에 달하는 속도로 바닷물이 유입되는 '대홍수'가 일어났으며 그 결과 '흑강(江)'이 '흑해(海)'가 됐다고 주장했다."

http://www.mission1691.com/zbxe/b4/3497

   

이런 와중에 흑해 대홍수설은 재미있는 가설이다. 빙하기 시절 지중해는 호수였다가 빙하기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대서양 바닷물이 지중해로 유입되었다. 다만, 보스포루스해협 강바닥이 높아서 흑해로까지 오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범람하면서 대홍수를 이뤘다는 게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 이전에도 문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따지자면, 이 지역에서 농경의 흔적, 가축의 흔적 같은 것은 만 년 전까지 소급해야 하지 않나 싶다. 허나, 보다 뚜렷한 자취를 남긴 것은 하라프와 하수나 문명이다. 이들 문명이 주목을 받는 것은 흑해 홍수와의 관련 여부 때문이다. 이들 문명 흥망에 대홍수가 관여하지 않았는가 여부이다. 게다가 팔천년 전에 짧은 기간이지만 이백여 년간 한파와 가뭄이 이어졌다는 대목도 참고할 수 있겠다. 노아 대홍수 직전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이어졌다고 했다.

   

하라프문명과 하수나 문명이다.

http://blog.naver.com/koviet2?Redirect=Log&logNo=70069305908

   

이 문명은 우바이드 문명으로 이어진다.

http://ko.wikipedia.org/wiki/%EC%9A%B0%EB%B0%94%EC%9D%B4%EB%93%9C

   

허나, 성서론자들은 흑해홍수가 이미 거짓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입장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메소포타미아에 국한된 국지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구적인 사건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에는 40일간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는데, 흑해홍수는 단지 둑이 터져 홍수가 난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이들 지역에 홍수층이 있어야 한다.

   

헌데, 영국인 올리가 발견한 우바이드 홍수층은 대체로 기원전 사천년에서 삼천년 사이로 나타나고 있다. 허나, 이 홍수층도 성서와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성서론자에 의하면, 노아 대홍수 시기는 기원전 2304년 전이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는 언제 있었을까

http://blog.naver.com/larminaflow?Redirect=Log&logNo=110022741494

   

   

   

만일 올리 홍수층이 노아 홍수층이라면 어떠한가. 일단 이 시기도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한파와 가뭄이 천년 정도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서, 노아 대홍수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사건이라고 본다면 다른 증거가 등장하기 전까지 현재 유력한 시기는 기원전 3천 년 전이라 잠정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구온난화는 축복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3766812

   

   

   

   

   

   

4. 새, 봉 계열은 사자, 독수리, 늑대, 매, 까마귀로 하늘과 태양의 신으로 변형하고, 뱀과 용 계열은 황소로 대지와 물의 신으로 변형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인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언급한 대홍수는 성서의 홍수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신들은 인간들의 소음에 화가 나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한다. 물의 신 엔키가 길가메시의 조상인 우트나피슈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생명들의 씨를 큰 배에 실으라고 말한다. 대홍수가 끝난 뒤 우트나피슈팀은 새를 날려 마른 땅이 있는지 알아본다. "

http://news.donga.com/3//20081122/8661241/1

   

   

 "태양신화에는 독수리·매·까마귀·늑대·사자 등이 태양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 자주 등장한다. "

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121149

   

   

   

   

   

   

5. 길가메쉬는 하늘의 황소를 죽인다.

   

"길가메쉬는 젊은 시절,영웅적 가치인 명성을 추구했다. 절대 인간 길가메쉬는 우룩의 지도자로서 젊은이들을 실신할 정도로 군사 훈련시켰다. 더욱이 초야권을 행사하여 우룩의 모든 신부들은 첫날밤을 길가메쉬와 지내야만 했다. 당연히 우룩의 시민들은 불만을 갖게 되었고,신들에게 불평하며 어떤 조치를 취해 주기를 간청했다. 신들은 길가메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월등한 에너지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그에게 걸맞은 비범한 잠재력과 포부를 가진 친구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반신반인인 길가메쉬의 다른 반쪽으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엔키두가 탄생한다.

   

길가메쉬는 엔키두와 함께 최고의 명성을 차지한다. 백향나무 숲을 지키는 산지기 신 후와와를 살해하고,우룩의 여신이며 전쟁과 사랑의 여신인 이시타르에게 모욕을 주며,하늘의 황소를 살해한다. 결국 신들은 자신들한테 도전하는 이들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리고 그 결과 엔키두가 죽게 된다. 자기의 반쪽인 엔키두가 죽게 되자 길가메쉬는 자신도 결국에는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 앞에선 그토록 일생 동안 매달리던 가치들이 허물어진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추구가 시작된다. 불멸을 이미 얻어 지하세계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우트나피시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온갖 고생 후에 우트나피시팀을 만난 길가메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트나피시팀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길가메쉬는 이 죽을 경험을 통해 불멸은 이미 자기 자신 안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길가메쉬는 성서의 노아처럼,우트나피시팀이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게 된 이유를 묻는다. 우트나피시팀은 다시는 신들이 인간에게 불멸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길가메쉬는 그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우트나피시팀은 만일 길가메쉬가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불멸의 시작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너무도 피곤했던 길가메쉬는 7일 내내 잠을 잔다.

   

동정심을 느낀 우트나피시팀의 아내는 길가메쉬에게 선물을 주라고 요구하고,마침내 우트나피시팀은 영생을 보장하는 불로초의 존재를 알려 준다. 그들은 이 불로초가 페르시아 만(灣),바다 속 깊은 곳에 있다고 알려 준다. 길가메쉬는 다리에 돌을 묶고 바다의 가장 깊은 곳,'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심연'에서 그는 드디어 불로초를 따온다. 소망을 이룬 것이다. 그는 불멸을 자신의 손에 거머쥐었다. 이제 그가 늙게 되더라도 언제고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길가메쉬는 마음을 끄는 연못을 발견하고는 그 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려고 부주의하게 불로초를 둑에 남겨 놓는다. 때마침 뱀이 이 풀을 발견해 집어삼키고는,뱀 껍질을 대신 남겨 놓는다.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121731401

   

   

   

6. 이슈타르는 죽은 황소를 부활시키며 황소를 그리워한다.

   

"후와와 레이드를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온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이랬든 저랬든 그 무시무시한 악마, 삼목산의 산지기 후와와를 무찌른 기념으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왕관도 새로 마련해 썼습니다.

어찌나 위엄이 넘치는지 하늘에 계신 금성, 사랑의 여신 인안나(아루루 , 이슈타르라고도)의 눈에 들정도 였습니다. 아루루는 지상으로 내려와 길가메시에게 "오빠 쫌만 놀다가"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우리의 영웅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개한 이슈타르는 길가메시에게 애원합니다.

   

"저의 사랑이 되어 당신의 아름다운 몸을 만질수 있께 해주세요.

당신은 저의 훌륭한 남편이 되고,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저가 당신을 위해 라피스 라줄리lapis-lazuli로 만든 금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마차의 바퀴는 금으로, 호박으로 만든 뿔로 장식한 마차를!

당신은 폭풍의 신들과 나란히 서계실겁니다.

삼목 향으로 가득한 우리 집으로 어서 들어오세요."

하지만 길가메시는 이슈타르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여지껏 문란했던 그녀의 연애 경력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말하며 그녀를 조롱했습니다.

"너는 너에게 모든걸 바친 남편 양치기, 두무지(탐무즈 혹은 탐무즈드)를 저승으로 보내 저승신들과 나란히 제삿밥을 먹게하고 날아다니는 새가 곡식보다 너의 목걸이를 쪼게하고, 사자가 먹이를 잡지아니하고, 말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 소를 치는 목동을 욕정에 몸부리치는 늑대로 만들고, 정원의 나무를 보살피는 정원사에게서 너의 음부나 보살피게 만들려다 거절당하자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는 이 욕정으로 달아오른 창녀야 썩 꺼져라."

   

이슈타르는 세상 어떤 여자도 따라올수 없을만큼 파렴치한 그녀의 연애 경력을 열거한 길가메시에게 분통이 나, 반론도 하지않고 하늘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어여뿐 얼굴에 닭똥만한 눈물을 흘리며 하늘의 신 아누(안의 바빌로니아식 이름)에게 간청했습니다.

"하늘의 황소를 만들어 그를 짓밟게 해주세요.

황소가 길가메시를 삼키고 그가 사는곳을 어지럽게 해주세요.

만일 황소가 그리 하지않으면 저는 저승 문을 부시고 우두머리를 만들어, 저승에 빈 자리가 부족해 죽음이 산 자들을 삼키게 하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보다 많게 만들겠습니다."

   

아누는 인안나에게 묻습니다.

   

"하늘의 황소를 만들면 우르크에는 7년동안이나 기근이 들것이다. 식량이 그만큼 비축되었느뇨?"

그리고 하늘의 황소를 만들어 우르크로 보냅니다. 하늘 황소는 우르크의 사람 200명을 죽이고 우르크 사람을 200명 죽이고 우르크 인을 200명 죽였습니다. 이 성나고 포악하기 그지없는 황소를 엔키두가 올가미로 옭아메고, 길가메시는 황소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황소를 갈라 방금전까지 빨딱빨딱 뛰던 심장을 정의롭고 정의로운 위대한 태양신 우투에게 바쳤습니다. 황소가 죽은것을 안 이슈타르는 곡녀哭女로 위장한후 우르크로 내려와 길가메시를 저주했습니다. 자신의 친구이자 애인이며 우르크의 위대한 지배자인 길가메시를 모욕하는 저 입싼 창녀에게 엔키두는 소의 넓적다리를 냅다 집어던졌습니다. 소의 넓적다리가 찰싹하고 그녀의 얼굴을 때리자 이슈타르의 여사제들은 비탄을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황소의 뿔을 전리품 삼아 가져갔습니다.

이때 하늘에서는 위대하신 신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랬든 저랬든 하늘의 황소를 함부로 잡은 놈을 어떻게 벌줄까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 말이 오간 후, 하찮은 인간이 감히 여신을 모욕했으니 그놈을 족치자!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엔키두는 원인도 모른 채 아프게 됬고 사자 머리에 독수리 날개와 몸을 가진 새인 천둥새가 엔키두를 덮쳤습니다. 그렇게 엔키두는 가장 사랑하며 친하고 위대한 길가메시 곁을 떠나 저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친구 엔키두를 멀리 떠나보내고, 강물 위에서 떠내려가는 시체들을 보며 죽음을 두려워 하게된 길가메시는 그 옛날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대현자 우트나피쉬팀이 살고 있다는 머나먼 동쪽 딜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http://lafcadiohearn.egloos.com/1284755

   

   

   

   

"탐무즈

Tammuz

아카드어로는 Dumuzi.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풍요의 신.

봄이 되면 자연에 새 생명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다. 탐무즈라는 이름은 초기 수메르의 Damu-zid('흠 없는 젊은이')에 근거한 아카드어 Tammuzi에서 유래한 것 같다. 후에 표준 수메르어 형태인 Damu-zid는 아카드어에서 Damuzi가 되었다. 탐무즈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은 BC 2600경~2334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탐무즈에 대한 제의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듯하다. 이 제의는 BC 3000년이나 BC 2000년 이전에 수메르의 대부분의 주요도시에서 증명되었지만, 탐무즈를 도시 신으로 예배하던 바드티비라(지금의 마디나)같이 목초지역(edin) 주변에 있는 도시들이 중심역할을 했다. 가장 일반적인 통칭이 시파드('목자')라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탐무즈는 본래 목초지의 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엔키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어머니인 여신 두투르는 암양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이름 두무지드와 별명인 아마가('모유') 및 우루루('목초를 늘려주는 사람')는 실제로 목동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예를 들면 사막에서 풀을 자라게 하는 것, 건강한 양을 낳게 하는 것, 동물의 암컷들이 젖을 많이 내게 하는 것 등이 있다. BC 2000~1000년에 탐무즈 제의가 아시리아로 전파되었을 때 그 성격이 유목신에서 농경신으로 변화된 듯하다. 문헌에 따르면, 아시리아와 하란의 시바인 사이에서 탐무즈는 근본적으로 곡식을 찧을 때 죽어가는 곡식 안에 있는 힘으로 보았다.

   

탐무즈 제의는 연중 2가지 축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여신 이난나와 탐무즈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이며, 다른 하나는 지하세계의 악마의 손에 그가 죽은 것을 애도하는 축제이다. 우르의 제3왕조 통치기간(BC 2112경~2004경) 동안 움마 시(지금의 텔 요카)에서 움마의 탐무즈 축제의 달인 2~3월에 탐무즈의 결혼이 극적으로 거행되었다. 문헌을 보면 이신-라르사 시대(BC 2004경~1792경)의 결혼 의식에서 왕은 실제로 탐무즈 신과 동일시되었고, 이난나 여신의 화신인 여사제와 결혼함으로써 절정에 다다랐다. 이는 마술적으로 한 해의 모든 자연을 풍요롭게 하고 비옥하게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탐무즈의 죽음을 표현하는 3~4월의 축제 역시 극적으로 상연된 듯하다. 이때에는 많은 애가(哀歌)가 살해당한 신의 거처를 향해 사막으로 나가는 행렬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BC 7세기에 아시리아에서는 이 의식이 6~7월에 행해졌다. 그 지역의 주요도시에서는 탐무즈 신을 누워 있는 상태로 두기 위해 침상을 설치했고, 그의 몸은 야채와 꿀 및 여러 음식물로써 상징되었다.

   

탐무즈와 관련된 문헌 중에 〈두무지의 꿈 Dumuzi's Dream〉이라는 신화가 있는데, 이 신화는 어떻게 탐무즈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꿈을 꾸었고, 그가 도피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이와 매우 유사한 이야기가 수메르 신화의 후반부에 기록된 〈이난나의 강림 The Descent of Inanna〉에 있는데, 이 신화에 따르면 이난나(아카드어로 이슈타르)는 탐무즈를 자신의 대리로 지하세계에 보낸다. 그의 여동생인 게슈티난나는 결국 그를 발견하고 이난나는 탐무즈와 그의 여동생이 지하세계를 번갈아 오가면서 1년의 반은 살아 있는 세계에서 각각 보내도록 명령하는 것으로 이 신화는 끝난다. 탐무즈의 구애와 결혼은 여흥을 위해 사용된 듯한 연가와 일화풍의 시작(詩作)에서 일반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본래의 여러 제의 문서는 관찰자가 가까이에서 말하는 것처럼 제의의 단계를 따르고 있고, 많은 애가가 실제 의식에서 불렸을 것이다.

   

결국 원래는 독립적이었던 다양한 풍요의 신들이 탐무즈와 동일시되었다. 북부의 농경적인 형태에서 그는 곡식과 동일시되었고 봄에 채소에 생명을 주는 역할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매우 초기이지만 우루크의 탐무즈와 대추야자나무 번식력의 위대한 원천인 아마우슘갈라나와의 융합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에 탐무즈는 봄에 나무와 식물에서 나오는 수액(樹液)의 힘을 표현하는 풍요의 신 ' 다무'와 융합되었다. 아직까지 탐무즈와 그밖의 다른 신, 즉 채소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지하수(아브주)에 있는 힘으로 나타나는 여신 두무지 아브주 같은 신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2t2069a&ref=4#ID4

   

"수메르인은 매해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다. 그들은 탐무즈를 성장의 신으로서,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서 숭배했다.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가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남자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는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하나 남편 이외의 연인의 정액은 밖으로 흐르게 하여 스스로 임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2]"

http://ko.wikipedia.org/wiki/%ED%83%90%EB%AC%B4%EC%A6%88

   

   

   

   

   

7. 대홍수 이후 바빌론에서는 대홍수 책임을 물어 엔릴의 인기가 추락하고, 달의 신, 난나르가 최고신으로 등극한다.

   

   

"노아(Noah)는 이스라엘아랍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성경 구약성서창세기의 홍수이야기(창세기 6:5-17)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구약 창세기 4장과 5장에 따르면, 노아는 아담과 이브의 첫째 아들인 카인의 후손이 아니라 셋째 아들인 의 후손이다. 성경의 창세기 5장에 따르면, 노아의 아들은  ·  · 야벳의 3명이다.

   

실존여부는 불명확하나 기원전 2800년 경 무렵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변 지역에 일어났던 대 홍수기에 살던 한 실존인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그리스 지역에도 홍수가 범람하여 소수의 생존자가 있었다는 신화들도 존재한다. 노아의 모델이 된 인물은 이때 이스라엘 혹은 아랍 지역에서 홍수를 피해 살아남은 한 인물이 신화화된것으로 추정된다."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C%95%84

   

   

"신들의 왕 엔릴(Enlil)과 닌릴(Ninlil, 수드(sud)라고도 불림)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수엔(Suen) 또는 아카드어로 신(Sin)이라 불렸다. 난나는 수메르어로 '빛나는 자'라는 뜻이다. 태양신 우르를 낳은 '위대한 부인' 닌갈(Ningal)이 그의 아내다. 난나 숭배의 중심 도시는 수메르의 최대 곡창지대이자 가장 강성한 도시국가 였던 우르였다. 특히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강자로 군림하던 기원전 2600년부터 2400년 사이에는 최고신으로 간주되어 '신들의 아버지' 또는 '신들의 우두머리'로 불리기도 했다. 우르가 멸망한 뒤에도 북쪽의 하란(Harran)을 중심으로 널리 숭배되었다. 날개 달린 황소를 탄 모습으로 표현되며, 황소와 삼각대, 초승달이 신의 상징물이다. 수메르의 신들 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신'에 속한다 ."

[출처] 난나 [Nanna ] | 네이버 백과사전

   

   

   

   

8. B.C 3000년대 대홍수 이후 이집트 왕조가 성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집트 왕조

J. H. Breasted의 연대기

Ian Shaw의 연대

1 & 2왕조

3400 – 2980

c.3000 – 2686

3 왕조

2980 – 2900

2686 – 2613

4 왕조

2900 – 2750

2613 – 2494

5 왕조

2750 – 2625

2494 – 2345

6 왕조

2623 – 2475

2345 – 2181

7 & 8 왕조

2475 – 2445

2181 – 2160

9 & 10 왕조

2445 – 2160

2160 – 2025

11 왕조

2160 – 2000

2125 – 1985

12 왕조

2000 – 1788

1985 – 1773

13~ 17 왕조

1780 – 1580

1773 – 1550

18 왕조

1580 – 1350

1550 – 1295

19 왕조

1350 – 1205

1295 – 1186

20 왕조

1200 – 1090

1186 – 1069

21 왕조

1090 – 945

1069 – 945

22 왕조

945 – 745

945 – 715

23 왕조

745 – 718

818 – 715

24 왕조

718 – 712

727 – 715

25 왕조

712 – 663

747 – 656

26 왕조

663 – 525

664 – 525

   

   

   

   

   

9. 호루스는 대기와 불의 신이지, 태양신이 아니다.

   

   

호루스의 눈

히에로글리프

"호루스는 이집트의 신들 중에서 다양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보통 매의 머리를 한 남성으로 표현되나, 호루미오스라고 불릴때에는 사자의 외관을 취하며, 하르마키스라고 불릴때에는 스핑크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후대에는 유아신(幼神)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하며, 토트의 도움을 빌려 호루스를 몰래 출산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이시스의 무릎 위에 놓인 아기(하포크라테스)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병사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성 게오르기우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호루스는 대기을 상징하며, 그 색은 일반적으로 흑, 적, 백을 의미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D%98%B8%EB%A3%A8%EC%8A%A4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그의 아내이자 최고의 여성신인 이시스(Isis)의 아들이며, 사랑의 여신 하토르(Hathor)의 남편이다.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부활시켜 주문의 힘으로 잉태해 태어났다. 유년시대에는 '유아(幼兒) 호루스'라 하여 땋은 머리 외에는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갓난아기 모습 또는 이시스의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빠는 모습 등으로 표현된다.

   

원래는 매우 허약하였으나, 이시스의 마법으로 각종 위험이나 병을 물리칠 수 있었고, 성장해서는 오시리스로부터 병법을 전수받아 결국 아버지의 동생이자 원수인 세트를 죽이고 통일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후 곳곳에 신전을 세우고, 통일 이집트를 평화적으로 다스리면서 이집트 왕들의 화신으로서 영원히 이집트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이집트의 모든 국왕들은 누구나 '살아 있는 호루스'로 불렸다.

   

오시리스·이시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왕자 또는 신의 아들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저승에서 오시리스 앞으로 사자(死者)들을 이끌어 영혼의 무게를 재는 일을 감독하는 감독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보통은 태양·하늘의 화신(化身)으로서, 매[鷹]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에는 20여 명이나 되는 호루스신이 존재했는데, 일종의 태양신으로서 그리스신화의 태양신인 아폴론동일시되었다. 대개 매나 매의 머리 모습을 한 신으로 표현되는데, 신들마다 약간씩 성격이 다르다. 이 가운데서도 호루스라 하면 일반적으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을 가리킨다.

   

이 호루스를 수호신으로 하는 노모스(nomos:州)만도 이드푸·히에라콘폴리스를 비롯하여 7개나 되었다고 한다. 노모스는 상·하 이집트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고, 여러 신들의 속성을 흡수하여 이집트신화에서 가장 복잡한 성격을 지닌 신으로 불린다. "

[출처] 호루스 [Horus ] | 네이버 백과사전

   

   

   

10. 이집트 제 5왕조 우세르카프 때부터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다.

   

 "우세르카프(Userkaf )는 고대 이집트 제5왕조의 첫 파라오이다. 그는 투린 왕 명단 (Turin King List)과 마네토(Manetho)에 의하면 BC 2494년부터 BC 2487년까지 7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정신은 강력하다'를 뜻한다. 우세르카프는 쿠푸(Khufu)의 단명한 후계자인 제데프레(Djedefre)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여왕 네페르헤테프(Neferhetepes)이며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켄트카우스1세(Khentkaus I)와 결혼함으로서 쿠푸 후손의 두 줄기가 다시 한번 합쳐졌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그러나 일설에는 켄트카우스1세는 우세르카프(Userkaf)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있고 우세르카프의 부인은 여왕 네페르헤테페스로서 사후레(Sahure)의 어머니가 된다는 학설이 있어 혼동이 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견해는 제5왕국의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의 통치자들은 모두 한 형제들로서 라제데트(Raddjedet)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제5왕조의 왕들은 기자에 피라미드를 건설한 제4왕조 전임자들의 전통을 거부하고 묘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우세르카프는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 단지의 담장 북동쪽 모퉁이 바로 너머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이다. 독특한 것은 그 무덤 신전이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피라미드의 동쪽 면이 아니라 남쪽 면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세르카프는 태양 숭배를 중시했기 때문에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남쪽에 설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전 벽에 새겨진 부조 중 새를 묘사한 부분이 매우 정교하다다. 신전의 뜰에서는 네메스 머리 장식을 쓰고 있는 우세르카프의 분홍색 화강암 두상이 발견되었는데 실제보다 훨씬 큰 크기의 이 당당한 두상은 스핑크스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이집트 고 왕국 시대의 두상 가운데 가장 크다.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머리는 제5왕국의 통치자들이 건축한 아부 구로브(Abu Ghurob)에 있는 5개 태양 신전중 첫 번 째 신전에서 발견된 것이다. 45 센티미터 높이에 회색 돌로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은 하 이집트(Lower Egypt)의 데슈레트(Deshret,붉은 왕관)를 쓴 군주임을 나타내는 아주 희귀한 조각중의 하나라고 평가되고 있다. "

[출처] 우세르카프 [Userkaf ] | 네이버 백과사전

   

 "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출처] 이집트의 역사 | 네이버 백과사전

   

    

   

11. 엔릴 일족은 바빌론을 떠나 이집트에 당도하여 태양신 일족으로 거듭난다.

   

   

    

"힉소스 민족과 히브리족

우리는 성서를 통해 이집트가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가 되어왔음을 알고 있다.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자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신약시대 예수의 가족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피하기도 했다.하지만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이집트의 성서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중세 이후 이집트를 여행했던 유럽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고'라고 불렀으며,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이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흐르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즉 `요셉 하천'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기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그 도시의 아피온이라는 한 이집트인이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을 통해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만들어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했다.그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해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다.그는 그 글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은 기원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이집트의 역사를 그리스시대까지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였다.비록 그의 역사책 원본이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됐을 뿐이지만,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힉소스 민족은 북쪽에서 쳐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민족을 학살했다.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했고,나중에 이집트에서 쫓겨날 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가서 유다 지방에 예루살렘이란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1824년 영국의 윌킨슨(G.Wilkinson)은 이집트 중부지방의 한 유적지인 베니 하산에 들러 절벽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사했다.모두 39개나 되는 무덤의 주인들은 대부분 중왕국시대인 11왕조와 12왕조시대의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었다.그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영주의 무덤 벽에는 농사짓는 모습과 사냥하는 장면,다양한 동작으로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는 모습 등 당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이 매우 생동감있게 표현돼 있었다. 

   

그는 벽화 중에서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이 있고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주목했다.그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돼 있었다.또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윌킨슨은 그들을 통해 아브라함을 비롯해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그 무덤은 기원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는 연대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히브리 족장들 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였다.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 풍뎅이 형상의 부적을 만들었으며,도장에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돼 베를린의 이집트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상형문자로 분명하게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베를린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해 그 무덤의 주인공인 야곱이 기원전 1750년 경의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또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새겨져있다.그는 힉소스 왕조의 2대 왕으로서 기원전 1600년 경의 통치자였다.그 조그만 도장들을 통해 야곱은 당시 가나안의 왕족들에겐 흔한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 전 1900년 경의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37명의 힉소스들과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기원전 1750년 경 한 도시의 왕이었던 야곱,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기원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 창세기의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1백여년간 이집트를 식민통치했다.따라서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60533968&qb=7Z6J7IaM7IqkIO2eiO2DgOydtO2KuA==&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G74l35Y7uwssuumaGRssc--414476&sid=EHQ@azK@fU8AAFSohrIAAAAj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힉소스(Hyksos)는 '이민족 통치자'를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어 '헤까 카세웨트(heqa khasewet)'에서 유래한 말로써, 나일강 동부의 델타(Delta) 유역을 점령한 민족이다. 힉소스 민족은 B.C. 17세기에 들어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고대 이집트 중왕조의 제 15, 16대 왕조 때 108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B.C. 1648-1540 추정).

   

힉소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관련 문헌이 거의 없어 불분명한 점이 많다. 힉소스 민족의 기원은 셈족(Semites), 히브리인,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하던 후르리인(Hurrian), 인도-아리안계(Indo-Aryans)의 아시아인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따라서 힉소스 민족의 등장은 B.C. 2000년 경부터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동지중해 연안으로의 대규모 민족 이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힉소스라는 명칭은 이집트 지방으로 이주해온 이민족들을 가리키던 고대 이집트어 '헤까 크세웨트(heqa khsewet: 외국인 통치자, 외국 땅의 왕자들)'를 역사가 마네토(Manetho)가 '목자의 우두머리들'이라는 뜻의 힉소스로 오역하며 붙여졌다. A.D. 1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힉소스'의 어원이 '양치기 왕'의 의미를 지니므로 힉소스인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대민족의 원류라고 주장했으나, 후에 마네토의 오역이 밝혀지면서, 이 학설은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중왕조의 제 13대 왕조 때부터 이집트로 유입된 셈족과 아시아 민족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이들은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며 서서히 이집트 사회의 통치구조를 잠식해나갔다. 관료, 군인 등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키운 이민족들은 왕조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나일강 하류를 점진적으로 정복했다. 아바리스(Avaris) 요새를 점령한 힉소스는 나일강 상류를 향해 영역을 넓혀갔다. 파라샤, 텔 엘-샤하바, 부바스티스, 인샤스 등에 요새를 구축한 힉소스는 마침내 시나이(Sinai) 반도에서부터 나일강 동부의 델타(Delta) 유역을 장악했다. 힉소스의 빠른 세력 확장에는 뛰어난 철기제조기술이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조립식 활, 개량된 전투용 도끼 등 철제 무기를 비롯한 각종 도구를 도입했으며, 말을 이용한 전차를 활용하여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요새 축조술 뿐만 아니라, 투석기 등을 전술에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군사적으로 우세했다.

   

고대 이집트 중왕조의 제 15 왕조 때에 이르러 힉소스 출신 최초의 군주 살리티스(Salitis)가 등장했다. 살리티스 이후 제 16대 왕조에 이르기까지 108년간 6명의 힉소스왕이 이집트를 통치했다(B.C. 1648-1540 추정). 이들은 이집트 식 칭호와 복식 및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이집트의 신을 비롯한 문화를 존중했으므로 토착민의 저항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힉소스의 직접 통치가 행해진 기간은 제 15대 왕조(B.C. 1674-1567 추정)이며, 나머지 기간은 제 16대 왕조로서, 제 15대 왕조의 봉신들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힉소스의 주 근거지는 델타지역으로, 반독립상태에 있던 상이집트에는 힉소스의 영향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힉소스의 이집트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이집트의 중심지인 테베(Thebes)는 자연히 반(反)힉소스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특히 B.C. 16세기 이후 상이집트의 세켄엔레 타오 2세(Seqenenre Tao II)가 파라오가 되면서 운동이 거세졌다. 당시 힉소스 군주 아포피(Apopi)가 반힉소스 운동을 경고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세켄엔레는 이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 세켄엔레는 전투 중 사망했으며 현재 보존되어 있는 그의 미라 상태는 당시의 전투가 매우 극렬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세켄엔레의 사망으로 상이집트는 위기에 처했으나 그의 장남 카모세스(Kamoses)가 왕위를이어 해방전쟁에 돌입했다. 카모세스는 힉소스의 전차군단을 급습하고 무기와 재화를 탈취했으며, 경작지를 황폐화시켰으나 아바리스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카모세스의 뒤를 이어 상이집트의 왕위에 오른 아흐모스(Ahmose) 때에 이르러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가 끝나게 된다. 아흐모스는 재위 15년부터 22년까지 지속적인 공격을 계속했으며, B.C. 1539년에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 요새를 함락시켰으며, 이로서 108년에 걸친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힉소스 지배기에 이집트는 완전한 청동기 시대에 들어가 동부 지중해 지역의 청동기 문화 발달에 큰 열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힉소스가 보유했던 고도의 축성술과, 상이집트와의 사이에 일어난 해방전쟁 말기에 서아시아에서 도입된 각종 신형 무기들은 후일 이집트가 군사강국이 되는 데게 일조했다.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힉소스는 수직 베틀을 이용한 방적 및 직조술, 주금, 오보에, 탬버린 등의 새로운 악기 등을 발명했다. 또한 아시아로부터 등이 굽은 황소를 들여와 사육하기 시작했으며, 올리브와 석류를 재배하는 등 이집트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출처] 힉소스 [Hyksos ] | 네이버 백과사전

   

   

"히타이트 신화에는 히위족(族)의 신화 및 히위 신화의 매개(媒介)에 의해서 수용(受容)된 것으로 보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이 뚜렷하다. 히타이트 고(古)왕국의 공식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신(神)은 폭풍우의 신과 태양의 여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히위족의 신 테슈브 및 그의 아내 대여신(大女神) 헤바트와 동일시되었다. 가장 중요한 신화는, 폭풍우의 신이 아버지 쿠마르비를 무찔러, 쿠마르비가 천신(天神) 아누의 손에서 빼앗은 신계(神界)의 주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또한 이렇게 해서 얻은 왕위를 쿠마르비가 왕위를 되찾기 위해 만든 괴물 울리쿰미의 공격으로부터 지킨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 ·티폰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리스의 '천상의 왕권신화(王權神話)'의 원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풍요의 신 텔리피누의 갑작스런 실종에 의해서 세계가 불모(不毛)와 기근에 허덕이는데, 최후에 노여신(老女神) 한나한나가 탐색을 위해 파견한 한 마리의 꿀벌이 목장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텔리피누를 발견하여, 그 팔다리를 쏘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폭풍우의 신과 악룡(惡龍) 일루양카의 투쟁을 주제로 한 신화는 구약성서레비아단(《시편》 74:14), 그리스 신화의 티폰과 유사한 면이 있다. 히타이트 신화에서는 폭풍우의 신이 악룡에게 많은 술을 마시게 한 후 죽여 퇴치함으로써 신년 축제(푸룰리)를 벌였다. "

[출처] 히타이트신화 [神話, Hittite myth ] | 네이버 백과사전

   

       

   

   

12. 이집트에서 아크나톤 유일신 사상이 전 세계 최초로 성립한다.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라고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며 왕비는 네페르티티이다. 당시 이집트는 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펼쳤으며, 나일 계곡에는 많은 외국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왕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의 세계종교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노모스[州]에도 속하지 않는, 태양을 상징으로 한 유일신(唯一神) 아톤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수도 테베는 주신(主神) 아몬의 사제(司祭)들이 권력과 막대한 부(富)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치세 6년째에 자신의 이름을 '아톤에게 이로운 자'라는 의미인 아크나톤으로 개명하고 테베를 버린 다음, 새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기고, 아케트 아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이름붙였다.

   

전국의 신전·기념비·무덤에서 아몬의 이름을 지웠다. 왕은 명상에 빠지고 아톤 찬가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왕의 이상은 이해받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몬 신앙은 부활하였으며,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졌다. 그러나 자연과 진실을 중시하는 아톤의 가르침은 사실적이고 명쾌한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탄생시켰다."

[출처] 아크나톤 [Akhnaton ] | 네이버 백과사전

   

   

   

13. 기원전 13세기 무렵 모세는 람세스 2세 때 아크나톤 유일신 사상으로 무장하고 이집트를 탈출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모세라는 인물을 람세스 2세 시대인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 영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활동한 정확한 시기나 그와 관련된 일들을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약성서에 다르면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는 등 파라오의 박해를 받았다. 이스라엘 레위족 집안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族)의 사제(司祭)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80세 되던 해 호렙 산에서  신(神) 야훼에게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이어 시나이산(山)에서 야훼한테서 십계명(十誡命)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契約)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 ·34장).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출처] 모세 [Mose(s) ] | 네이버 백과사전

   

   

"아톤 18계명

빛의 신이자 창조의 신이신 아톤신이 내려주신 평등의 율법은 이러 하니라.

제1계명. 너희는 다른신들을 질투의 신이자 창조주인 내앞에 있게하지 말라.

(모세 1계명) 너희는 내앞에 다른신을 모시지 말라(출 20:3)

제2계명.너를 위하여 우상이나 다른 신들을 섬기기위하여 어떠한 상도 만들지 말라.

(모세 2계명)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20:4)

제3계명.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주 아톤신을 사랑하라.

너 자신을 신으로 사랑하고 신을 너자신으로 사랑하라.

제4계명. 너의 주 아톤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또한 그 이름을 걸고 거짓되이 맹세하지 말라.

(모세3계명)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증언을 하지말라.(출20:7)

(모세9계명)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증언하지말라(출 20:16)

제5계명.너의 주 아톤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모세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출(20:8)

제6계명.너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

(모세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제7계명. 살인하지말라.

(모세 6계명) 살인하지말라(출20:13)

제8계명.간음하지말라.

(모세 7계명) 간음하지말라(출20:14)

제9계명.물질적으로도 마음으로도 도둑질 하지말라.

(모세8계명) 도둑질 하지말라.(출20:15)

제10계명. 네 이웃에속한 일체의 모든것을 탐내지 말라.

(모세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20:17)

제11계명. 너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말라.

제12계명.남을 판단하려들지말라.

제13계명.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를 기억하라.

제14계명.신에게 행하는 모든봉사를 거룩하게 여기라.

제15계명.인류의 번영을 위하여 신의 지혜를 본받으라.

제16계명.남에게 대접받고자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제17계명.악행은 쉽게 드러남을 알라.

제18계명.너희는 신이 창조한 어떤 인간도 노예로 부려서는 안된다."

http://blog.yahoo.com/COCOLAND/articles/55524 

   

   

 http://blog.daum.net/conjugiallove/16150098

   

   

   

   

14.  가나안에 정착한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는 태양신과 달신의 융합 시대였다.

   

    

"바알 과 아스다롯 

    

또 고대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님의 궤(Ark of God)와 함께 남성(男性)과 여성(女性)의 정기를 표시하는 성기(性器)를 각각 만들어 신봉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다윗 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사무엘상 7장 4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엘 의 큰 아들 바알 (Baal)들과 엘 의 처 아스다롯 (Ashtoreth)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긴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바알 은 남근상(男根像)을 대표하며 아스다롯 은 여근(女根)의 형상을 표한다.

   

이를 뒤집어서 설명하면 모든 유대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는데 이 즈음부터 유독 이스라엘 부족만이 이를 빼고 야훼만 섬겼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알 신봉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 특히 가나안 지역에서 히브리 사람들이 갖고 있던 믿음이었는데, 이는 어머니 하나님 또는 어머니 신(神) 아셔라 또는 아스타테 (Astarte)의 남편 엘 엘리온 (El Elyon)이 아니고 달리 좋아하던 남성 동반자 주검의 신 얌 (Yamm)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이는 힌두교의 야마 (Yama)에서 온 신(神)으로,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Sanskrit) 말로 제물로 바친다는 뜻의 Bala' 또는 Bali'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남근(男根)이라는 것은 여성을 위해 희생물로 바친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옛날 왕(王)들은 영생을 갖지 못한 남신(男神)으로 결국 하나님 어머니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존체1(存體-being)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알 이란 어휘는 옛날 페니키아(Peoenician)사람들을 통하여 유태민족은 물론 스페인이나 켈트 민족에게도 전파되어 그 곳에서는 Bel, Bial , 또는 Beltain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호세아 2장 2-8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의 어머니를 질책하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어머니가 바알 을 섬기고 사용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하나님을 일컫는 아셔라 (Ashera)라는 말은 그 의미가 페르시아 말로 움푹 들어간 곳이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이 출생하는 근원이라 하여 여신의 성기를 상징하며 상(像)을 만들어 모계사회(母系社會) 시절의 히브리 민족이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신의 움푹 들어간 곳(grove 또는 pit), 즉 성기 요니 (Yoni)를 아트라 카디사 (Athra Qaddisa)라 불렀다.

   

이 말은 직역을 하면 성스러운 창녀의 구멍 이란 뜻이며, 후일에 가나안 사람들은 콰니야투 엘리마 (Qaniyatu Elima)라 불러 하나님(Gods, 남신)들을 탄생시키는 여자 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또 에짚트에서도 여신 이시스 (Isis) 시절 이전에 율법을 만드는 어머니 라는 뜻으로 아쉐쉬 (Ashesh)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이 말의 뜻 자체는 솟아낸다 또는 지원을 한다 라는 뜻으로 유방의 기능을 뜻했다.

   

그래서 그녀의 요니 (Yoni, 여자의 성기)를 섬기는 사당을 테베스(Thebes)에서는 아셔, 아슈렐,

아슈렐트 (Asher, Ashrel, Ashrelt) 등으로 불렀고, 남신들을 낳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 라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셔라는 히브리 사람들의 신인 엘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샤헤르(Shaher)와 샬렘(Shalem) 쌍둥이를 낳게 된다. 여기서 아셔라 는 암소이고 엘 은 황소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성스러운 결혼의 축제로 어머니의 젖 국물에 어린 염소를 넣어 탕을 만들어 삶아 먹었으며,

   

이것을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동지에 팥죽 끓여 먹듯 염소 새끼를 우유로 탕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풍습을 유대인 승려들이 금지시킨 내용이 출애굽기 23장 19절에 소개된다.  히브리 사람들이 야훼 라는 홀로 존재하는 남신을 섬기고 남성우월주의인 부계사회를 조성하면서 여신의 존재를 제거시켰던 것이고, 그래서 열왕기상 14장 23절에서 아셔라 상을 만들어 놓은 일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노발대발했다는 말이 나오며, 역대하 24장 7절에는 바알 을 섬기는 여자 승려의 자식들이 야훼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성물을 훔쳐다 바알 상을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소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엘 엘리온 이란 신은 이사야 14장 13절에 나오는 북극집회, 또는 북극산에 있는 신들의 회의장에서 회의를 주관하는 여호와의 전임자인 주신(主神)의 이름이었고, 회의장에서 다른 신들 (Master Craftsmen)과 상의하여 군주(Lordship)의 직위를 주는 권리도 가진 신이었다.

   

註 1 : 존체(存體)라는 어휘는 영어의 being'을 뜻하는 적절한 한국어 단어를 찾을 수 없어 저자 자의로 지은 말이니,

   

이 책에서는 being'의 우리말로 약속하고 읽어 주기 바란다.

   

being 이라는 것은 창조주와 같은 절대신(絶對神), Supreme Being'이나 divine being' 또는 인간 human being' 등을 말하는 의식(意識)을 갖고 존재(存在)하는 유형 또는 무형의 체(體)를 말한다.

 이것은 영(靈)을 소유한 존체 라 할 수 있는 entity'와 비슷하여 저자는 entity'를 혼체(魂體) 또는 영체(靈體)라 표기하기로 했다. 혹 독자 중 더욱 적절한 우리 말 어휘가 있으면 저자에게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 희망이며, 이 책에서 서로의 약속으로 이 말뜻을 이해해 줌에 감사하는 바이다. "

[출처] 반기독교 안티예수 - http://antiyesu.net/bbs/board.php?bo_table=tb11&wr_id=24

   

   

빠르시, 사순, 국유본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4/08 03:27

http://blog.naver.com/miavenus/7013554476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78 : 빠르시, 사순, 국유본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4/08

   

1. 조로아스터교 후손 빠르시를 아세요?

2. 인도 타타 그룹은 로스차일드 국유본 재벌이다.

3. 국유본이 비주류 종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1. 조로아스터교 후손 빠르시를 아세요?

   

 "빠르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인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으로 이들은 현재 인도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시크교도들이 인도의 정치ㆍ군사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면 빠르시는 인도 경제를 주름잡는 '인도의 유태인'이다. 중국에 객가인이 있다면 인도에는 빠르시가 있는 셈이다. 인도 최대 재벌 타타그룹은 지금의 구자라트주 출신의 빠르시교 승려 가문이었으며 세계적인 락그룹 퀸의 리더인 프레디 머큐리와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도 빠르시다. 세계 시장에서 친디아가 약진하면서 인도 경제ㆍ사회의 최상위계층으로 떠오른 빠르시의 가장 큰 과제는 '양적' 열세.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SJ)은 인구 증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빠르시를 6일 집중보도했다.

   

6세 미만 빠르시는 3500명도 안 돼

   

전세계적으로 조로아스터교 인구는 약 20만 명. 대부분이 종교 발생지인 인도와 이란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 조로아스터교 인구는 감소 추세여서 2001년 자료에 따르면 인도 빠르시는 10년 전 7만6382명에서 6만9601명으로 줄었다. 특히 60세 이상 인구는 31%를 차지하는 반면 6세 미만 인구는 5%를 밑돈다.

   

결혼배우자 조건, "무조건 빠르시!"

   

빠르시의 급격한 인구 감소는 젊은 세대들이 유학 및 취업으로 해외로 나서면서 연애와 결혼, 출산이 늦어진 데 따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빠르시들이 빠르시만 배우자로 선호하기 때문이다. 회교도의 박해로 8세기에 인도로 피신한 조로아스터 교도의 자손인 이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과의 결혼을 피하고 있다. 불을 숭상하고 사자(死者)의 육체를 풍장(風葬) ·조장(鳥葬)으로 독수리 밥으로 내어놓는 빠르시 특유의 풍습과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고 공유하기 위해선 같은 빠르시여야 한다는 것. 타종교인과 결혼했을 경우엔 아버지가 빠르시일 때만 자녀가 빠르시로 인정되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할 수 밖에 없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8&aid=0000626605&sid1=001

   

인드라는 신화 이야기를 현재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가 유태인 이야기를 흥미있게 읽는 까닭은 현 세계를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유태인이 집시처럼 계속 세계를 구걸하며 다닌다면, 컬트적 취미가 있지 않고서는 그 누가 유태인에게 관심을 보일 것인가. 없다.

   

하면, 오늘날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관심을 지닐 필요가 있느냐 하면 대부분은 왜 그딴 것까지 신경써야 하지? 혹은 기껏해야 안티 기독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이 글은 인터넷에 범람하는 안티 기독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인드라는 지난 시대정신 다큐 비판 글에서 안티 기독교 역시 국유본의 오메가알파 전술의 한 부분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해서, 종교에만 국한한 문제가 아니므로 읽어보고 각자 필요한지, 아니면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볼 것인지를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본다.

   

프레디 머큐리, 주빈 메타, 타타그룹.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오늘은 타타그룹에 집중하자. 

   

   

2. 인도 타타 그룹은 로스차일드 국유본 재벌이다.

   

"인도의 기업가 가문으로 인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제철소, 면직물 공장, 수력 발전소 등을 세웠다. 타타 가문은 원래 이전의 바로다주(州)(지금의 구자라트주) 출신의 파시교 승려 가문이었다. 이들 가문의 부를 일으킨 사람은 잠셋지 나사르완지 타타(Jamsetji Nasarwanji Tata:18391904)였다.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있던 엘핀스턴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858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수출 회사에 참여하여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등지에 지점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1872년에는 면직공업에 전념하여 1877년 나그푸르에 이어 봄베이와 쿠를라(Coorla)에도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의 사업체는 효율, 근로자들의 복지 후생, 품질 좋은 직물 생산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는 또 생사를 인도에 처음 소개하였고 봄베이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은 그의 사후에 타타전력이라는 이름의 여러 회사들이 되었다. 1901년 인도 최초의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제철소들은 1907년 타타철강회사로 통합되었다. 그의 아들인 도라브지 잠셋지 타타(Dorabji Jamsetji Tata:18591932)와 라탄지 타타(Ratanji Tata:18711932)의 통솔 아래 타타제철회사는 인도 최대의 민간 제철회사가 되었으며 이들이 경영하는 일군의 회사들은 섬유, 철강, 전력뿐 아니라 화학제품, 농기구, 트럭, 기관차, 시멘트까지도 생산하였다. 이들 가문의 산업 시설은 비하르주에 새로 건설된 도시 잠셰드푸르에 집중되어 있었다. 1898년 타타는 연구소 설립을 위한 토지를 기부하였고 이 연구소는 나중에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벵갈루루(Bangalore)의 인도 과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타타 가문은 그후 꾸준히 민간인으로서는 가장 활발하게 인도의 기술교육과 과학연구를 위하여 자금을 제공하였다. 1932년 도라브지가 세상을 떠나자 창립자의 조카인 나오로지 사클랏발라(Naoroji Saklatvala)가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그리고 1938년 그가 사망하자 창립자의 사촌이자 동업자였던 R.D. 타타의 아들 제한지르 라탄지 다다보이 타타(Jehangir Ratanji Dadabhoy Tata:19041993)가 회장이 되었다. J.R.D. 타타는 1932년 타타항공(Tata Airlines)을 설립하였는데, 이 항공사는 1953년 국유화되면서 국내 항공사인 인디언항공(Indian Airlines Corporation)과 국제선 항공사인 에어인디아(Air-India)로 양분되었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타타그룹은 인도 최대의 기업 집단을 거느렸고, 1971년에는 가족계획재단을 설립하였다. J.R.D. 타타는 1991년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인도 최고의 상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1992년에는 국제연합 인구상을 수상하였다. 모두 82개의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0년 현재 26만 2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은 90억 달러에 이른다. 참여 분야는 정보 기술에서부터 니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무려 25개 이상의 산업에 걸쳐 있다. 2000년 현재 그룹 창립자의 종손자인 라탄 나발 타타(Ratan Naval Tata)가 그룹을 이끌고 있다.

[출처] 타타그룹 [財閥, Tata Group ] | 네이버 백과사전

   

   

타타 그룹

http://theme.etoday.co.kr/luxury/view.php?ARTICLEID=384927&category=878&page=2

   

   

타타 그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 경제의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 인도 경제는 비즈니스 페밀리가 지배한다.

   

인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기업인 미탈 스틸이나 타타 그룹. 이들의 공통점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둔 상인 카스트 그룹이며, 각기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는 인도의 비즈니스 페밀리라는 것이다. 즉, 인도 경제는 자신들 스스로는 커뮤니티, 공동체라고 부르는 비즈니스 페밀리가 지배한다.

   

이들 경영 방식은 개인보다 가문을 내세우는 '마피아 경영학'이다. 해서, 만일 뭄바이(봄베이)에 10만의 상인이 있는데 1명이 실패하면 99,999명의 같은 커뮤니티 상인들이 1루피 씩 모아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한다. 

   

지역별로 보면 인도서부 라자스탄주에 뿌리를 둔 마르와리 상인(marwari), 자이나교를 신봉하는 제인 상인(jains), 중서부 구자라트 주의 구자라티 바니아(banias) 와 보라 상인(vohras), 파키스탄 접경 펀잡주의 펀자비 힌두 카트리(khattris),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체띠아(chettiars), 남인도 안드라쁘라데시 주의 코마티(komatis), 뭄바이(봄베이) 지역의 파시(parsee) 등이다.

   

"인도는 지방분권과 자율성이 더 센 편이다. 과거 네루 정권이 집권했던 1964년까지만 해도 중앙정부의 파워가 지방정부를 압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네루 사후 제정파는 이합집산을 거듭, 1970~1980년대 들어 종교, 인종, 카스트(계급) 등에 기반한 다당제 지역 기반 세력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지금은 지방정부의 권한이 크게 신장됐다. 세제(稅制)에서 그 단면이 드러난다. 중앙이 조세항목의 세율을 정해 국가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하는 중국과 달리 인도 지방정부는 조례를 통해 적용세율에 차등을 둘 수 있다. 지방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도의 외자기업들에게는 큰 불편 사항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인도 지방정부의 자율성은 재정 면에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인도는 정부 수입 중 중앙정부 수입 비중이 30%대에 그치고, 지방교부금에서도 15~2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정 파워가 약한 중앙정부가 지방권력에 대해 강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도의 지역성은 중국보다 더욱 심하다. 지방 언어도 수십 개에 이르고, 인종별 거주 분포도 뚜렷하게 구별된다. 인도 대륙 전역에 권력을 행사했던 마지막 왕조가 이슬람 왕조였기에, 전통 힌두교 사회와 이슬람 사회의 갈등은 심각하다. 두 종교사회의 점유율은 현재 각각 80%, 13%대에 이른다. 인종, 언어, 종교가 한데 융합되지 못한 채 갈리면서 인도의 지역성은 모자이크 스타일처럼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다. 이 같은 지역성은 외자기업에게도 인도를 단일 시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역별로 세분화(Segmentation)하고 개별적 최적화 시장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2636682&sid1=001

   

   

인도는 중앙권력 체제이기 보다는 지방분권 체제라고 할 수 있어서 각 지역마다 비즈니스 페밀리가 한 자리를 해먹는 체제인 게다. 인도 정치경제체제가 처음부터 중앙집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 직후 잠시만 그러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 식민정책 때문이다.

   

분리해서 지배하라.

   

영국이 인도를 분리 지배하면서 키웠던 그룹은 인도 소수민족 그룹이다. 이이제이. 해서, 빠르시, 마르와리 상인 그룹이 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인도는 여전히 '허가 경제 체제'이다.

   

"인도가 독립 초기 식민지 유산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소위 '허가경제(License Raj)' 체제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식민지 수탈에 기여했던 자본가 세력에 대한 반동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초대 수상 네루(Jawaharlal Nehru)와 집권 국민의회당의 정치경제적 성향과 관련이 깊다. 명문가 출신의 영국 유학파였지만, 네루는 부농, 산업자본가 등 식민지 기득권 세력과 궤를 달리했다. 인도 정부의 경제에 대한 계획과 통제는 IMF 구제금융을 받고 개혁·개방 노선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1991년까지 지속됐다. 1991년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을 표명한 이래 인도의 허가경제는 서서히 완화돼 점차 자유시장경제체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2636682&sid1=001

간디나 네루가 영국에 반대했다고 한다. 허나, 정말로 영국에 반대하고, 국유본에 반대했는지 의심스럽다. 인도를 독립시킬 필요가 발생하여 국유본이 적당한 인물을 고르고 키운 것이 간디요, 네루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다.

   

가령 1957년 타타스틸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네루 총리가 잠세트지 타타를 '1인 경제기획원'이라고 부를 만큼 둘 관계는 오랫동안 친구일 만큼 특별한 관계였다.

   

네루 국민의회당의 허가경제체제란 국유본 - 타타그룹이라는 식민지 경제체제를 몸통을 그대로 둔 채 껍데기만 약간 변용시킨 국유본 - 네루 - 타타그룹 신식민지 경제체제였을 뿐이다. 다만, 이 몸통을 비켜가기 위해서 조무래기 몇몇을 전시용으로 조졌을 뿐인 게다.

   

하면, 암에푸 위기 이후 변화한 인도 경제체제는 무엇인가.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비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교체가 되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신자유주의를 주창하였다. 신자유주의란 중국, 인도도 이제는 경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가 경제 성장하면 경제 규모가 커진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간 인도 경제 규모란 영국 혼자 해처먹을 정도였다. 허나, 이제 인도 경제 규모가 엄청 커진 것이다. 영국 혼자 처먹으면 탈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해서, 이제 나눠서 같이 해처먹자는 것이다. 신제국주의인 셈이다.

   

이때, 중요한 건, 여전히 허가경제라는 것이다.

   

뭔 말이냐.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고 그 지역으로 아무나 들어가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국유본 허가가 있어야 한다. 인드라가 강조했다. 아무나 적대적 인수합병 시장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이다. 감히 멋모르고 국유본 허가없이 들어오면 반드시 대가를 치룬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인도도 그렇다. 아무나 들어가면 작살난다. 겉으로는 개방했는데, 속으로는 아니다~!

   

잘 생각해봐라. 인도가 한국 기업을 일부 인수하지 않았나. 타타그룹이 대우 상용차 부문 인수했다. 타타나 대우가 모두 노비네파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마힌드라가 쌍용차 인수전에서 노비네파 삼성 - 로스차일드를 인수 주간사로 선정하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더 무서운 법이다.

   

   

삼. 인도 재벌을 키운 건 로스차일드, 사순, 국유본이다.

   

   

"(7) 아편무역 승자는 세파르딤 유대인 <사순 회사>

   

맨 위에서 언급했던 <사순 회사>에 대해서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사쑨(沙遜)으로 발음한다고 합니다.

   

사순 가문의 아편무역 역사는 데이비드 사순(1792~1846)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데이비드 사순은 바그다드로 이주한 스페인 세파르딤 유대인의 후손으로,

바그다드 총독의 재정담당이자 바그다드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였습니다.

   

바그다드는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1829년에 새로 들어선 바그다드 총독이 유대인을 학대하자

데이비드 사순은 일가를 이끌고 인도 봄베이로 갔습니다.

   

   

   

데이비드 사순

   

   

데이비드 사순은 봄베이에서 직물과 아편 제조 사업을 일으켜

곧 영국정부가 데이비드 사순에게 면, 실크, 아편 제조의 독점권을 부여했고

1830~1831년 사이 데이비드 사순은 중국 아편무역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수익의 일부는 당연히 빅토리아 여왕과 영국정부에 - 

   

1833년 데이비드 사순은 봄베이에 <사순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해보자"

   

1839년 청나라 황제가 아편금지 명령을 내리고

광둥 총독을 시켜 <사순 회사> 소유의 아편 2,000 상자를 압수, 폐기하자

화가 난 데이비드 사순이 영국정부에 요구하여 1차 아편전쟁(1839~1842)이 발발합니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1812년 전쟁이 생각나네요.

   

1842년 청왕조가 난징조약에 사인하여 1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중국이 강제개항합니다.

난징조약은 아래 항목을 포함합니다 :

   

(1) 중국에서의 아편무역을 전적으로 합법화한다

(2) 광둥 총독이 압수한 아편 2백만 파운드를 보상한다

(3) 영국왕실이 중국 해안섬 2백개에 주권을 행사한다

   

1845년 봄베이의 데이비드 사순은 둘째 아들 엘리어스 데이비드 사순을 광둥으로 보냈습니다.

광둥에 도착한 첫번째 유대인입니다.

   

1850년 데이비드 사순이 직접 상하이로 와서 와이탄 지역에 <사순 회사>의 상하이 브랜치를 설립했습니다,

상하이의 와이탄은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과 마찬가지로 내국인 접근금지 지역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사순 회사>는 경쟁자인 선발주자 <자딘 매더슨 회사>와 동등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사순 일가가 상하이에서 막대한 부를 쌓자, 동족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몰려 왔습니다.

데이비드 사순은 상하이 브랜치에 유대인만 고용했고 그들의 정착을 지원했습니다.

바그다드 -> 봄베이 -> 상하이의 유대인 공동체 리더가 된 것이네요.

   

데이비드 사순은 곧 중국 항구지역 뿐 아니라 대륙 전체의 아편판매권을 요구했습니다.

만주 청왕조가 이에 저항하자, 영국은 다시 2차 아편전쟁(1856~1860)을 일으켰습니다.

   

* 2차 아편전쟁이 마무리되던 1859년에 새뮤얼 로빈스 브라운이 귀도 페어벡을 데리고 나가사키에 왔네요.  

중국사업이 마무리 되었으니 일본으로 눈을 돌리자?

(* 새뮤얼 로빈스 브라운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 쓰겠습니다.)

   

1860년 10월에 북경이 함락되어 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아편수입이 합법화 되었습니다. 

1860년 10월 25일에 맺어진 새로운 "평화조약"에서,

<사순 회사>는 중국 지역의 8분의 7을 점하는 아편무역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유대인 가문이 되었습니다.

   

1864년 데이비드 사순은 인도 푸나의 시골집에서 사망합니다.

"다 이루었다"

   

1880년 무렵 <사순 회사>는 중국 아편무역의 70 퍼센트를 점했고,

<사순 회사>를 쫒아 여러 유대인 회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자딘 매더슨 회사>를 비롯한 다른 영국 회사들은 경쟁에서 나가 떨어져

1900년 무렵 중국 아편무역은 완전히 유대인들이 독점하게 됩니다.

   

   

   

알버트 데이비드 사순

   

   

데이비드 사순은 8 아들을 중국 아편무역에 적절히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사순 가문을 <중국의 로스차일드>라고 부릅니다.

   

데이비드 사순의 첫째 아들 알버트 데이비드 사순은 1887년에

첫째 아들 에드워드 알버트 사순을 로스차일드 가문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중국의 로스차일드> 사순 가문은 진짜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친척이 되었습니다.

   

   

- 수반아님의 글 중에서 "

   

   

   

   

스페인계 유태 가문, 사순(Sassoon) 가(家). 사순 가문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동아시아 시장을 장악하라는 특명을 받고 19세기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인드라 분석은 이렇다. 기존 아편무역 구조는 베어링 - 동인도회사 - 프리메이슨이었다. 베어링이 자금을 대고, 동인도회사를 통해 영국 왕실과 귀족이 이익을 차지하고, 아시아 현지에서는 프리메이슨이 일하는 구조. 로스차일드는 이를 바꾸었던 것이다.

   

베어링 - 동인도회사 - 프리메이슨에서 로스차일드 - HSBC - 유태인으로 말이다.

   

해서, 인드라는 인도 세포이 항쟁 배후에는 일타삼피 목적의 로스차일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포이 항쟁 이후 동인도 회사가 해체 수순을 밟았다.

   

본론으로 다시 가자. 

   

아편 루트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사순 가문의 보호 아래  봄베이 - 싱가포르 - 광둥, 홍콩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계절풍을 타고 케냐 잔지바르을 갔다 오면 동인도회사 루트가 완성되는 셈이다.

   

이때, 사문 가문만 들어왔겠느냐. 아니다. 오늘날에도 활약중인 스페인계 유태인들이 같이 들어왔던 것이다. 하면, 이들로 되겠느냐. 아니다.

   

사순 가문은 뭄바이(봄베이)에 직물회사를 차린다. 허나, 이는 명분이었을 뿐이다. 산업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국 의류제품이 인도 의류제품보다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낫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아편 무역이 주업무였다.

   

이를 위해서는 현지 파트너가 필요했다. 현지 파트너, 그들이 빠르시고, 마르와리인 게다. 타타그룹 등 이들 상인 카스트들이 한 것은 대부분 옷장사였는데, 무역업으로 커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타그룹이건, 미탈스틸이건 아편으로 돈을 번 것이었던 게다.

   

일본도? 그렇다. 미쓰이가 그렇다. 옷장사하던 넘들을 국유본이 교육시켜서 일본 최대의 재벌로 만들어준 것이다. 한국도? 그렇다. 삼성이 그렇다.

   

경박단소! 시작은 아편!

   

   

3. 국유본이 비주류 종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국유본은 라엘리안, UFO 종교, 뉴에이지 종교, 유니테리언, 통일교, 원불교, 증산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비주류 종교를 선호한다. 왜일까?

   

   

일. 국유본은 자신보다 소수파인 종교롤 선호한다.

   

전 세계 유태인은 세계 인구의 0.2% 천 사백만 명 정도 된다. 이들은 능히 일당 백, 일당 만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이때, 소수의 인원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은?

   

자신보다 소수파를 활용하는 것이다.

   

가령 여러분이 한일연방공화국을 만들 기획을 한다고 하자. 일본 공략을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 일본 소수민족을 파고들어갈 것이다. 재일교포, 아이누인, 오키나와인, 재일중국인이 대상일 것이다.

   

이들에게 자금을 주고, 이들을 교육시키고, 이들이 정재계를 장악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유신 때 국유본이 한 방식이다. 죠슈-사츠마번은 임진왜란 이후에 소외된 번이었는데, 국유본이 이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서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기술을 전수시켜서 일본 기업을 일으킨 것이다. 국유본이 없었다면, 일본은 스스로 근대화에 나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애들 머리가 원래 빠가야로이니까.

   

이제 국유본은 준비하고 있다. 재일교포, 아이누인, 오키나와인, 재일중국인, 하고, 메이지유신 이후 칼을 갈고 있는 막부 후손들, 동경대 사태 이후 취업을 박탈당한 운동권들. 가깝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에 걸친 한을 풀 때가 왔다.

   

한일연방공화국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서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쪽발 석현의 각을 떠서 한일연방공화국의 제물로!

동아시아 혁명 만세!

   

문제는 자신보다 쪽수가 크면 언제나 경계 대상인 게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자신보다 십분지 일이어야 안심이다.

   

백만 명 남짓해야 한다.

해서, 명심하라.

교세 확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님을 말이다.

교세 확장보다 내실을 다져야 한다.

문선명이나 조다윗이 실수한 것은 규모를 더 키우기 보다 내실을 다져야 했던 것이다.

쪽발 라희가 물주인 원불교 따위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이. 종교는 친자본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뜨는 마이너 종교 대부분이 친자본적이다. 교회는 마치 마트 같은 데 놀러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불교를 하더라도 생활 불교요, 기독교를 하더라도 민생 기독교요, 민족종교를 하더라도 먹고사니즘 종교여야 하는 것이다.

   

인민은 먹고살아야 믿는다.

   

   

삼. 종교는 교회일치, 종교일치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오늘날 칠대종단이니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이스라엘 같은 데 가서 랍비랑 썰을 풀고, 이를 국유본 언론이 대서특필한다.

   

1960년대 국유본 지시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대세인 게다. 지지하면 키우고, 반대하면 죽인다.

   

이를 전제하고, 국유본이 종교 공동체를 고려하는 건, 일부 종교에서 보듯 일상적인 착취가 가능하면서도 착취 대상이 자신이 착취당하면서도 착취당하는지 모르고 오히려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쪽발 주사파 사상이 대표적이다.

   

또한 국유본이 이들 종교를 지원하는 것은 종교의 일반적 속성인 돈을 멀리하는 성향 탓이다. 국유본이 이들을 후원해도 이들은 결코 국유본의 적수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돈을 멀리하는 성향 때문이다. 돈을 모을 수가 없다.

   

해서, 국유본은 이런 종교를 그간 지지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다수파에 밀린 비주류이기에 주류가 되고픈 열망이 있고, 국유본은 이들을 주류로 키울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쪽발 돼중아, 나라를 팔아먹을래?

넵! 죽어도 충성하겠습니다.

   

쪽발 놈현아, 나라를 팔아먹을래?

넵! 대를 이어 충성하겠습니다.

   

쪽발 석현아, 나라를 팔아먹을래?

넵! 좀비가 되어도 충성하겠습니다.

   

허나, 무조건 충성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닌 게다.

   

국유본이 이들을 지지해왔던 건 나름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인드라 같은 이가 이 관계를 폭로한다면! 말짱 꽝인 게다.

   

영화 봤지?

국유본은 역할이 끝난 넘에겐 아무런 미련이 없어.

즉결 처분인 게다.

   

쪽발 정은이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보면

국유본은 48시간 이내에 쪽발 정은을 미사일로 총살시켜 시체 흔적조차 없이 만들고

평양 정권을 붕괴시킬 것이다.

   

   

추신 :

이제 본격적으로 조로아스터와 미트라교에 대해 쓸려고 하니까 솔솔 잠이 오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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