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3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3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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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7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3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3  

요즘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유태인 관련 글을 일차로 마무리한 뒤 답변을 할 것이니 기다려주셨으면 싶다.

   

   

13. 유태인식 성이 따로 있는가?

   

   

유태인식 성이라고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네 김, 이, 박, 최, 정처럼 흔할 따름이다. 

   

일. 유태인 성과 이름은 우선 사이먼 (가수 폴 사이먼~!), 이삭, 솔로몬, 모세 등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이름을 많이 쓴다.

   

허나, 서구 사회에 유태인 경계심이 컸으므로 성과 이름을 새로 짓거나 바꾸거나 은폐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이 중 빈도수가 가장 높은 것이 지명을 성으로 삼는 것이다. 보통 서유럽 성을 보면 귀족이 아니면 직업과 관련된 성씨가 많다. 허나, 중세 유럽에서 유태인에게 따로 직업을 주지 않았기에 유태인 성은 동네 지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 thal (dale, valley) : 계곡 예) Lilienthal(백합계곡), Rosenthal(장미계곡), Blumenthal(꽃계곡), Wiesenthal(잔디계곡)

   

- berg (hill, mountain) : 산 예) Lindberg(보리수산), Schonberg(이쁜산), Spielberg(놀이동산)

   

   

- feld (field) : 들판 예) Blumenfeld(꽃들판), Rumsfeld(넓은들판), Rosenfeld(장미들판)

   

   

http://blog.naver.com/swatch1997?Redirect=Log&logNo=120049733199

   

   

허나, 지명 성도 너무 알려지자, 그 다음으로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성이 생겨났다.

   

- stein (stone) : 돌 예) Einstein(하나의 돌), Goldstein (금돌)

   

유럽인이 유태인에게 성을 팔았다고 한다. 조선에서도 족보를 파는 일이 있었듯 유럽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다만, 자연 명칭에도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있었는데, 부자한테는 좋은 의미의 성을 팔고, 가난뱅이에게는 나쁜 의미의 성을 팔았다고 한다.

   

삼. 우연찮은 실수로 생긴 성

   

   

http://blog.naver.com/1kimjt?Redirect=Log&logNo=20001569077

   

   

   

   

알렉스 퍼거슨. 성만 보면 유태인인데, 아무도 그를 유태인이라 하지 않으니 유태인이 아닌 듯.

   

   

   

헨리 키신저 자서전을 맡는 등 요즘 잘 나가는 노비네파 학자. 유태인일 것으로 99% 추정.  

   

이처럼 유태인 성을 기억하면, 인드라처럼 자료를 많이 구해서 분석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로움이 많다. 즉, 신문기사를 검색하거나 대형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니얼 퍼거슨처럼 못 보던 학자 이름이 등장할 때, 무심코 지나다가다 어? 퍼거슨? 하면서 한번 더 눈길이 간다는 것이다. 해서, 그 기사나 관련 책을 살펴 보면서 아, 이 친구가 앞으로 뜨는 것인가? 하고 지켜보면, 뜨더라~!!!

   

   

   

   

14. 유태인 특징이 매부리코라던데?

   

일부 네티즌은 카자르 유태인 특징으로 매부리코를 말한다. 해서, 매부리코가 있는 유태인은 가짜 유태인 식인 게다.

   

다시 정리하자.

   

오늘날 세계 유태인은 다음과 같다. 

   

   

        

   

   

이들 유태인을 다섯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일. 수메르인 아브라함

   

구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수메르인이다.

   

이. 이집트인 모세

   

유태인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인이다.

   

http://blog.naver.com/sthephankim?Redirect=Log&logNo=30131240297

   

삼. 페니키아/카르타고인 유태인

   

인드라 주장에 따르면, 바리새인은 페니키아/카르타고인 유태인이다.

   

바리새인에는 이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 때 유대교로 개종한 노예, 에돔인, 이집트인, 이디오피아인, 아랍인, 북아프리카인, 흑인, 백인, 동양인 등을 포함한다.

   

사. 카자르 유태인

   

오. 근래 유대교로 개종한 유태인

   

부모가 유대교로 개종한 뒤 그 자식이 유대인이 된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세대부터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을 말한다.

   

1970년대 이후 소련에서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 중 일부가 이 부류이다.

   

이중 근래 유대교로 개종한 유태인에게는 매부리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로마시대 때 개종한 유태인들 중에는 노예, 백인, 흑인, 동양인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매부리코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 이외의 유태인은 매부리코가 특징적일 수 있다.

   

셈족 특징 중 하나가 매부리코다. 셈족이란 수메르인, 아랍인, 시리아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유태인 등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모세 역시 실존했다면, 기원전 15세기~13세기로 추정하므로 매부리코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 이집트 왕조는 셈족, 후르리인 혼혈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카자르인 역시 매부리코다. 카자르인이 투르크 계통인데, 카자르인만 매부리코가 많은 것이 아니라 같은 투르크 계통인 오늘날 중국 신장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도 매부리코가 많다.

   

해서, 혹 한국인 중에도 매부리코가 있다면, 투르크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다~! 혹은 흉노인이라고 해야 하나?

   

참고로 마야인도 매부리코이다. 이러한 영향인지, 중남미 유태인 중 일부는 유태인이 되면 출세할까 싶어 유태인으로 행세하는 이들도 좀 있는 것 같다. 유태인하면 뭔가 있어보이고, 상류층과 인맥을 쌓을 수 있으니까. 

   

   

15. 서구 지배층이 유태인 권력을 건들일 수 없는 이유는?

   

지난 유태인 설명에서 유태인이 서구 지배층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기에 유태인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했다. 허나, 이는 필요조건 설명이지, 충분조건 설명일 수는 없다.

   

토사구팽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서구 지배층이 그 아무리 유태인이 필요하더라도 자신들 권력까지 위협하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해서, 토사구팽할 수 있었을 터이고. 실제로 서유럽에서 유태인 추방령을 내릴 때, 유태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국가 경영 능력이 뛰어나도 쫓겨났다. 그 당시에도 유태인이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을까. 히든 카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쫓겼다.

   

어찌된 일일까.

   

일. 구교의 몰락이다.

   

신념, 사상, 세계관, 종교 이런 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단지 욕망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욕망과 도덕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움직인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왕을 죽이지 못했다. 신이 선택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왕위 다툼으로, 귀족간 암투로 인해서 왕이 죽는 일이야 다반사다. 허나, 이는 신성한 피들끼리의 싸움이었기에 문제가 없다. 허나, 프랑스 혁명 때 왕이 사형을 당했다. 신성한 피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민들이 왕을 죽였다.

   

프랑스 혁명 전에도 영국에서 크롬웰 청교도 정권이 찰스 1세를 처형했다.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구교가 몰락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국교회를 선언한 이후 별 일(?)이 없자 구교의 권위가 추락한 것이다.

   

이전의 도덕 관념에 따르면, 헨리 8세는 벼락을 맞아 뒈져야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회 재산을 몰수한 것이 큰 충격이기도 했다.

   

영국은 물론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 황제와 귀족들은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신들도 언제든 목이 잘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 배후에 공공연히 프리메이슨이 언급되었고, 프리메이슨은 신교와 연관이 크고, 신교와 종교개혁 운동 자금으로 유태인 자금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유태인을 건들면 혁명이 발생한다.

   

이 두려움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상황이었다.

   

실제로 19세기 혁명적인 정세 때마다 혁명가들은 비밀리에 로스차일드 가문을 찾아와 지원을 부탁하곤 했다. 막말로 로스차일드가 허가하면 혁명이 성공하고, 거절하면 혁명이 실패했던 셈이다.

   

이러한 위협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이루어졌다.

   

역사적인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말대로 유태인이 언론, 학술 분야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는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다. 그런 이유로 미하일 바쿠닌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던 것이다. 허나, 미하일 바쿠닌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할 때는, 이미 유태인이 프리메이슨 지원을 사실상 끊었을 때였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유태인은 프리메이슨을 후원했다. 이유는 유태인이 공직 진출을 할 수 없기에 프리메이슨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활용했던 것이다. 허나, 19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점차 유태인도 일반 직업도 획득할 수 있을 뿐더러 공직에도 나갈 수 있었기에 더 이상 프리메이슨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반프리메이슨 운동이 일어나 프리메이슨 세력이 크게 위축이 된다. 인드라는 반프리메이슨운동 배후에 로스차일드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하면, 왜 로스차일드와 유태인은 프리메이슨을 죽였는가. 프리메이슨 자리에 유태인을 넣기 위함이다. 토사구팽인 게다.

   

해서, 유럽, 미국에서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사회개혁 모임하면 대부분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개혁 모임은 유태인이 주도하게 된다.

   

가령 맑스가 속했던 의인동맹이 있다.

   

"의인동맹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은 1836년에 조직된 "Bund der Gerechten"(의인동맹(義人同盟) 또는 정의자동맹(正義者同盟))이었다. "의인동맹"은 프랑스 혁명당시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브프의 사상을 따르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기독교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단체로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나중에 가입하였다. "의인동맹"이 내건 구호는 《모든 사람은 형제이다!》였으며, "평등과 정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상에 기초하여, 지상에 (복음서에 나오는)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편집] 공산주의자 동맹으로의 변화

1847년 6월 런던에서 있은 의인동맹 제1차대회에서 이 동맹은 공산주의자동맹으로 개편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B5%EC%82%B0%EC%A3%BC%EC%9D%98%EC%9E%90%EB%8F%99%EB%A7%B9

   

"1830년대에는 많은 독일인 수공업자들이 마이스터를 목표로 길드원이 되고자 도제 수업을 하기 위해 프랑스나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징집연령이 되면 귀국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기고 그대로 국외에 머물러 있곤 했다. 해서, 이들은 '추방자동맹' 이라는 단체로 모여 있었다.

   

이런 가운데 1837년에 추방자동맹의 급진적인 성원들이 독립하여 '의인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의 지도자는 바이틀링이었다. 이 단체가 독일인 노동자들과 수공업자들의 최초의 비밀조직이었다. 이 단체는 1839년에 블랑키의 '계절단'이 파리에서 일으킨 봉기에 연루되어 유럽의 정부들로부터 탄압을 받아, 1845년경에는 런던 지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때 동맹에서는 바이틀링파 지도부의 봉기 노선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출처] 맑스-공산주의 선언 (coocii02) |작성자 coocii02

이것이 운동권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다. 헌데, 운동권이라도 책과는 담을 쌓은 까막눈 운동권도 많으니 운동권 중 1%~5% 정도만 아는 이야기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맑스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인드라가 이 문제를 말끔하게 설명드리겠다.

   

우선 상기한 대목에서, 기독교 공산주의자라고 말함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는 신교 부류 중 과격파 정도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헌데, 맑스가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단지 이름만 바꾼 것일까. 아니다. 바이틀링을 내쫓았다. 당대 최고의 혁명가였던 바이틀링은 유태인이 무섭다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바이틀링만 추방했나. 바이틀링과 가까운 자들을 모조리 다 축출시켰다. 또한, 사람과 조직만 바꾸었나? 아니다.

   

무엇보다 이념을 새롭게 했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이론은 부르주아 이론이라면서 배격했다. 블랑키와 같은 후기 쟈코뱅주의자에 대해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열정만 있고, 골 빈 넘으로 격하시켰다.

   

맑스의 업적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잔당과 이념을 모조리 제거시킨 것이다. 하고, 맑스 주변으로는 유태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식으로 유태인들은 언론, 학술, 사회조직 부문에서 기존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푸셰, 그 자신이 나폴레옹처럼 쟈코뱅주의자였으면서 푸셰와 나폴레옹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제거하기 보다 조직을 유지시키지만, 빈 껍데기로 만들었다.

   

맑스 방식은 나폴레옹 시대의 푸셰와 비교하면, 한층 진일보한 것이다. 나폴레옹과 푸셰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상층부를 자기 사람으로 채워 조직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을 뿐이라면, 맑스는 상층부를 제거한 것은 물론 이념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세계의 심장부, 런던에 맑스가 있다.

   

로스차일드를 건들면, 유태인을 건들면, 영국 왕궁은 쑥밭이 될 것이다.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로스차일드가 자금을 대주면 혁명은 백 프로 성공한다.

   

언론, 학술, 사회시민단체를 장악했다.

   

언제든 수틀리면 혁명이다!!!

   

혁명이 아니더라도 유태인에 대해 쓸 데 없이 말하는 넘들은, 일단 언론에서 발언을 문제 삼아 평판을 나쁘게 하여 직위해제시키는 것이다.

   

삼. 경제적 압박이다.

   

북한 국채로 설명을 해보자. 국유본은 쪽발 정일에게 국채 발행을 지시한다. 쪽발 정일이 북한 국채를 십억 달러 규모로 발행한다. 

   

이때, 국유본은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구사했을 것이다.

   

핵폭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든다. 해서, 전자는 쪽발 정일 핵폭탄 비용을 대주기 위해 선이자없이 다 사주는 방식이다. 후자는 여기서도 이문을 남기겠다고 국채 액면가의 10%만 쪽발 정일에게 준다. 쪽발 정일이야 꽁돈이기에 "충성! 대를 이어 충성하겠습니다."하며 국유본 앞에서 혹부리 춤, 또는 펭귄댄스로 재롱을 떤 뒤 일억 달러를 낼름 삼켰을 것이다. 물론 이 중 오천만 달러 정도는 기쁨조를 위해 쓰는 배달사고를 일으켰지만, 국유본이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해서, 지금 시세가 15% 정도되어도 5% 이익인 게다. 이러다가 한반도 통일되어 통일 정부에 적당히 협박해서 20% 정도 해먹으면 더블로 해먹는 셈이다.

   

예서, 전자든, 후자이든, 기본은 PPP 프로그램인 게다. 세계 주요 국유본 은행이 신용 보증하는 비밀 프로그램이다. 1% 이내의 작은 수익률 국채 프로그램인데, 잦은 거래로 큰 수익률을 내는 프로그램이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 큰손들만 거래한다. 해서, 북한 국채도 이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서 손바뀜이 일어나 자금 세탁이 이루어진다. 최종적으로는 국유본이 국채를 보유하는 셈이다.

   

바로 이 대목이 국유본이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인 게다.

   

돈이야 엄청 많다. 이 돈으로 주요 권력층을 매수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투자인 게다. 요즘이야 사모펀드, 헤지펀드 방식이 주류이겠다. 과거에는 투자은행이었다. 허나, 이 바탕에는 국유본의 전략이 있는 것이다.

   

국유본이 PPP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기대해서인가.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렇지만, 당장의 이익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북한 국채를 할인없이 백프로 액면가 금액으로 국유본이 매수했다 치자. 국유본은 이 국채를 0%부터 시작해서 PPP 프로그램으로 돌리는 것이다. 매수, 매도자는 국유본 주요 은행 보증으로 안심하고 거래한다. 매수/매도자는 이 거래로 인해 차익을 챙길 수 있다. 게다가 국채는 북한 국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국유본이 세계 권력층에 자금을 대준다면, 그 누가 이 자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절대로 드러내는 일이 없는 자금인데.

   

헌데, 누군가 국유본 말을 듣지 않는다?

   

우선 이 자금줄을 끊는다. 귀족이 품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든다. 헌데, 자금줄을 끊으면, 당장 신용에 위기가 온다. 

   

뿐인가. 국유본은 귀족의 금융 거래 등을 속속들이 안다. 해서, 마음만 먹으면, 귀족의 비리 사실을 국유본 언론이나 국유본 정치인에게 슬쩍 넘긴다. 

   

쇠고랑을 찬다. 설사 쇠고랑을 차더라도 관련자는 말할 수 없다. 국유본 언론이 발언을 차단시킨다. 더 나아가 관련자 지인들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다. 체념한다.

   

정리하자.

   

서유럽 지배층이 유태인 권력을 건들일 수 없는 충분조건은?

   

혁명/쿠테타, 언론 장악, 경제권이다.

   

권력. 혁명/쿠테타로 언제든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

   

평판. 언론/학술/사회시민단체를 장악하여 언제든 평판을 나쁘게 할 수 있다.

   

신용. 경제 권력을 장악하여 언제든 부도나게 할 수 있다.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2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2 07:06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287367  

   

   

   

 http://berghausway.tistory.com/361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6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2

국제유태자본론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2

   

11. 유태인들이 근대 세상을 지배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 보듯 로스차일드 가문에 비기로 내려오는 '타임머신' 장비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리도 빈틈 없이 근대 세상을 장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아 학자들조차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곡자 :

   

로스차일드가 워털루 전쟁 이후 발휘한 역할과 기능을 대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위의 인드라 님의 글과 연결되어 로스차일드를 막연하게 인식하는 많은 분들을 위해 올려드립니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금본위제를 통해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워털루 전쟁(1815년) 이후 1914년까지 서방세계가 백년평화를 누린 것은 로스차일드의 막후 활동 덕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그 반대급부로서 식민지 시대가 본격화된 것입니다. <거대한 전환>에서의 폴라니의 글입니다:

   

"19세기 국제 은행의 성격에 대한 전면적인 탐구는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이 신비로운 제도의 정체는 여전히 단조로운 흑백의 정치 경제의 신화 속에 깊이 묻혀 있는 상태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각국 정부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오히려 각국 정부들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끝없는 이윤의 갈망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국제적 분쟁의 씨앗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강건한 나라들의 전투력을 좀먹는 나약한 국제주의의 도구였다고 주장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었다. 오트 피낭스라는 이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는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과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기간에만 고유하게 나타났던 것으로서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 사회를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 고리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국제 평화 체제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여러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니, 비록 국제 평화 체제는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지만 강대국들 스스로는 그 평화 체제를 확립할 수도 없었고 또 유지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유럽 협조 체제는 그저 가끔 한번씩 작동하는 것인 반면, 이 오트 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기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가장 강력한 정부조차도 이것의 독립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므로 이것은 결국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 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다. 잉글랜드 은행(The Bank of England)을 포함한 그 어떤 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었으며 한편 이것은 또 그 모든 중앙은행들과 긴밀한 관련을 맞고 있었다. 금융과 외교 사회에는 긴밀한 연관이 존재했으니, 이 둘 중 어느 쪽도 다른 쪽  호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평화 쪽이든 전쟁 쪽이든 장기적 계획을 구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 평화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 국제 금융의 입장, 조직, 그리고 각종 기법들 쪽에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독특한 조직은 구성원으로 보나 행동의 동기로 보나, 철저한 영리 이익이라는 사적 이해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은 어느 한 정부에 종속되는 법이 없었다. 이 가문의 여러 가족은 서로 다른 나라로 퍼져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가문으로는 국제주의라는 추상적 원칙을 몸소 체현하는 것이었다. 이 여러 가족의 충성을 한 몸에 지닌 단일한 기업으로서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야말로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 활동을 정치 영역의 정부와 잇는 유일의 초국가적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면,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수많은 전쟁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한 자들이며, 도덕적인 고민 따위에는 전혀 무감각하고, 전쟁이 아무리 많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규모나 기간이 대단치 않고 또 국지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눈 하나 깜빡 않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 이익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적 논리에 의하여, 전 지구의 모든 민족들을 휘말아 넣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적인 평화를 유지한다는 필요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업이 그들의 어깨 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틈을 비집고,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들이대는 것이다. 허나, 인드라는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허무맹랑하다고 보고 있다. 해서, 이들 음모론과 기존 학설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탐색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자료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전제하고, 세 지점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

   

1492년 카톨릭화한 스페인에서 유태인 완전 추방령이 나오고 동시에 오스트리아, 헝가리도 그러했다. 단, 독일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공국으로 쪼개져 있었기에 일부는 역시 유태인을 추방했지만, 맑스가 살던 라인란트 지역과 같은 곳에서는 추방하지 않았다. 하여, 라인란트 지방으로 위그노파, 서유럽 유태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해서, 라인란트 사람들이 프랑인인듯 행세하거나, 프랑스 땅을 동경하고, 틈만 나면 프랑스 땅을 사려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

   

"팬션 산업은 1970년 小杉惠氏의 오랜 노력에 의해서 일종의 Technology transport의 산물로서 유럽에서부터 일본에 도입되었고, 일본의 영향을 늘 직접적으로 받는 한국에서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로 시작한 듯싶다.

   

펜션은 아파트형 콘도에 비해 고급스런 별장이어서 보다 인기가 있다. 펜션의 유래는 그리스 시대의 민박업에서 찾고 있으나, 고대 올림픽처럼 단지 유래에 불과하며, 실제는 은퇴하여 연금을 타는 유럽 노부부가 저렴하게 시골에서 노후생활을 즐기는 것에서 등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특히 프랑스가 언급된다는 데에 나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금, 노후생활,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라인란트 인민이기 때문이다. 라인란트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한 괴이한 광적 취미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프랑스 부동산에 관해서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알려져 있다. 왜일까. 나는 11세기 십자군이 라인계곡에서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던 것에서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들은 라인란트로 이주했으며, 마치 유대인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그리듯, 프랑스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 포도밭에서 포도주를 만들며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지 않았겠는가.   

   

제조업에서 승승장구를 구가하던 일본이 버블로 망했던 것이 부동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였는데 이후에는 헐값으로 모두 내놓아야 했다고 한다. 미국 지배자들은 일본을 대하듯 한국 역시 병 주고 약을 주었고,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도 비슷한 처방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일본의 펜션 산업은 일본 부동산 정책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해서, 오늘날 한국 펜션 산업 현주소도 일본과 과히 다르지 않은 듯이 보인다. 성공한 극히 일부의 펜션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초기 시설투자에 감당을 못한 채 채산성이 맞지 않아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펜션 경쟁자들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더군다나 펜션업을 창업하는 이들 대다수가 기업에서 정리해고당하거나 명예퇴직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퇴직금으로 시작하였고, 상당수가 저리의 은행 이자를 받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출이자를 높인다면? 대다수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마치 외환위기처럼, 저리에 싼 차입금을 지원하다가, 어느 순간 싹 빼돌려, 세계경영 한답시고 유태인 무서운 줄 모르고 무섭게 돌진하던 대우그룹 김우중 마냥 맛 갈 수도 있다는 것을...

   

해서, 나는 펜션산업을 라인란트 모델이라 감히 주장하고픈 것이다.

   

http://blog.empas.com/jinguja/16070066

   

'라인란트(라인강이 흐르는 서유럽 지역) 모델'이란 성장보다 분배와 사회적 평등을 우선시하는 모델이다. 평등성과 효율성이 모두 높다는 '북유럽 모델'에 비해서는 정리해고 등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북유럽 모델이 적은 인구수에 근거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등가적 비교를 함이 어렵다 할 것이다.

   

라인란트는 프랑스에 인접한 독일 라인강 인접 지역이다. 알퐁소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알사스-로렌과 이웃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민들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지지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맑스의 고향도 트리어이며, 로스차일드도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이다. 미하일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비난한 바 있다.

   

"유대인 맑스는 음흉하고 시류에 민감한, 그렇고 그런 약삭빠른 유대 놈들에 둘러 싸여 있다. 모든 곳에서 상업, 은행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문필, 학계, 정계, 또는 각종 색깔의 언론계에 있는 유대인들은 문학과 지식, 정보의 브로커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유대인은 한 발은 사회주의 운동에, 또 한발은 자본주의에 담고 있으며 독일 언론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 놈들은 모든 신문사들을 거머쥐고 있다. 거기서 그 어떤 메스꺼운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올 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나의 거대한 착취적 종파, 거머리의 민족, 왕성한 식욕을 가진 기생충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는 이 유대인 세계는 오늘날 전체적으로 맑스와 로스차일드의 손끝에 놓여 있다. 나는 로스차일드는 맑스에게, 그리고 맑스는 로스차일드에게 본능적인 경외심을 품고 있을 거라 확신하다. 어떤 이에겐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와 국제금융자본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호 호! 맑스의 공산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한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있는 곳에 중앙은행이 있으며 또한 기생충 같은 유대민족이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인민을 더욱 악착같이 착취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살찌울 것 있다... 실로 맑스가 주창하는 사회는 진짜 프롤레타리아들에겐 노예수용소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제복을 입은 노동자 남녀는 북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들고, 일할 것이다. 이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은 영리한 유대인 소수에게 돌아갈 것이며 이들은 중앙은행들의 국제적 연결망을 통한 가렴주구로 만국 민중의 노동을 착취할 것이다."

   

시온의정서에 따르면, 불행히도 유태인들은 대중이 바쿠닌처럼 권력에 대해 깊은 불신을 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바뵈프나 블랑키를 보듯 순수한 열정에 불타오르나, 머리가 부족한 혁명가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026425890

    

   

중요한 건,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이다. 왜인가. 다른 서유럽 지역에서는 유태인의 공직 진출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스페인 유태인은 사정이 달랐다. 스페인에는 이슬람 국가인 사라고사, 발렌시아, 그라나다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은 맑스의 자칭 별명인 무어인이 지배했다.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93733&dencrt=IlFfbTDNmVGwR7TDc2lgB4EVIoI%253%39Y8%253%39%253%39bq1I8F%252FWlWE%253D&term=%BD%BA%C6%E4%C0%CE+%C0%AF%C5%C2%C0%CE&query=%EC%8A%A4%ED%8E%98%EC%9D%B8+%EC%9C%A0%ED%83%9C%EC%9D%B8

   

무어왕국에서 유태인은 황금기를 구가했던 것이다. 공직에도 진출해서 마음껏 기량을 펼쳤던 것이다. 해서, 이들이 떠나자 스페인 경제에 갑자기 위기가 찾아올 정도였다. 반면 다른 서유럽 국가에서는 공직 진출을 할 수 없었기에 출신을 숨기거나 로스차일드 방식으로 어용상인이 되는 방식으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국가 경영 같은 경험이 없었다.

   

헌데, 그 수에 상관없이 한 무리 집단만으로도 능히 국가를 세워 경영할 정도였던 이들 스페인 유태인이 추방당한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중동, 남미 등지로 갔으나, 일부는 네덜란드 등 다른 서유럽 국가로 간 것이다. 예서, 근대 사회가 시작하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이 백 년만 늦춰졌다면, 로스차일드 개인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세계 경제를 휘어잡지 못했을 것이다.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일각에서는 추방된 대부분이 북아프리카, 중동으로 갔고, 유럽으로 간 이들은 채 삼십 만이 되지 않는다고 과소평가한다. 허나, 그 삼십 만이 일당 백, 일당 만이었던 것이다. 미국에 초기 정착한 고작 수십 명 되는 유태인이 만든 뉴욕주 농장지대만 생각해도 된다. 루즈벨트 집안이 뉴욕주를 기반으로 한 네덜란드 유태인 출신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

   

서유럽 유태인 사회는 이들 스페인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에서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던 것이다.

   

하면, 왜 스페인 유태인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일까.

   

누구보다 아랍어, 히브리어, 유럽어, 역사, 수학, 과학, 경제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이. 생존 본능이 강했던 유태인

   

중세 유럽은 변방이었다. 당시 세계사의 중심은 아랍과 중국이었다. 아랍 상인은 신흥종교인 이슬람교 보호 속에 신밧드의 모험에서 보듯 전 세계를 무대로 무역을 하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중국 당송시대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시대였다. 시쳇말로 중국을 침략한 북방민족에게 다 주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앞선 문명을 누구보다 일찍 온전히 체득한다는 건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 분명하다.

   

교회에서 재산 관리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엉터리였다. 0의 개념 등 복식 부기 등이 유럽에 뒤늦게 도입되었는데, 스페인 유태인은 이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뿐이랴. 스페인 유태인은 아랍인과 중국인이 발견, 발명한 과학 기술과 물품을 잘 알고 있었다.

   

하면, 스페인 유태인이 서유럽 유태인은 물론 다른 중동 지역 유태인은 물론 아랍인에 비해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왜인가.

   

한마디로 생존 본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0.01%라니까 관점에 따라서 0.01%가 다른 것 아니냐 반문하는 분들이 있다.

   

0.01%란 단지 머리가 똑똑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헛똑똑이도 있으니까.

0.01%란 생존 본능 수치이다.

   

말 그대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는데, 만 명 중 한 명꼴로 살아날 확율이다.

만여 명 군대가 충돌했는데, 9,999명이 죽고 한 명이 전쟁터에서 살아날 확율이다.

   

머리가 좋건, 힘이 세건, 운이 좋건, 이 모든 건 생존본능 요소 중 일부일 뿐인 게다.

   

수메르 - 페니키아 - 카르타고로 이어지는 오천 년간의 생존 본능이 스페인 유태인 속에 각인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해진 억압은 생존본능이 강한 자들만 살아남게 만든 것이다.

   

수메르인이 뛰어난 문명을 자랑했다고 해도 수메르인 모두가 생존 본능이 강했던 것은 아닐 게다.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다. 어느 민족이든 생존 본능이 강한 족속과 약한 족속이 골고루 있었을 것이다.

   

이때, 유태인에게만 지속적으로 억압을 가한다면, 어찌될까. 생존 본능이 강한 자만 추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핏줄로, 기억으로, 기록으로 전승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로스차일드 가문은 누구보다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표하며, 근친 결혼 실험도 강행한 바 있다. 명분으로는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나, 다른 이유도 있는 듯이 보인다. 근친 교배를 하면, 상당수는 바보 천지가 된다고 한다. 허나, 극소수로 천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천재였다.

   

오늘날도 인드라가 전해 듣기로, 미국 생물학 상당수 프로젝트가 우생학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다.

   

다만, 지속적인 억압을 당한다고 해서 강한 족속이 된다면, 집시나 드라비다족 등 세계 도처에는 역사상 한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계속 억압당하는 족속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족속들과 유태인 차이는 무엇인가.

   

문자다. 선민의식이다. 성경이다.

   

어린이에게 교육하길, 오늘의 시련은 하나님이 유태민족에게 내리는 축복이라고 설명한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설명인가.

   

다른 민족들은?

   

왜 우리는 이렇게 당해야 해요? 라고 아이들이 물을 때, 어른들 반응은 무엇일까? 응? 우리는 원래 노예거든. 혹은,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까. 또는, 아, 몰라, 일이 힘들어서 말할 기운이 없어. 말 시키지 마. 그딴 골치 아픈 것 생각하기 전에 돈이나 벌어, 병쉰아.   

   

바로 이 대목이 근대 민족의 출발점인 것이다.

   

인드라는 강조한다. 오늘날 근대 민족론의 출발은 유태인 부러워하기인 것이다. 우리도 유태인처럼. 이것이 근대 민족주의의 모토인 게다.

   

해서, 유태인처럼 자신들만의 신화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이 늘 삑사리가 나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외부의 강한 스트레스를 강력한 초자아로 이겨내었을 때, 그 힘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하다. 그것이 0.01%의 힘이다.

   

헌데, 대부분 민족은 외부의 강한 스트레스를 강력한 초자아로 매개할 문자와 선민의식과 성경이 없다.

   

예서, 선민의식이란 뭐냐.

   

비록 지금 노예 신분이지만, 나도 알고 보면 왕족, 귀족, 혹은 신이 선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서, 스페인 유태인이 다른 지역 유태인보다 강력했던 것은, 생존 본능을 유지시킬 외부 위협을 받으면서도 국가 경영까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에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해서 무역이 번성하였는데, 그후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십자군 전쟁과 몽골군 진출 이전까지 이 지역 유태인들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해서, 스페인 유태인이나 유럽 유태인처럼 생존 본능이 강한 족속들로 추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몽골군 진출 이후에는 이 지역 역시 생존 본능이 강화되었지만, 대서양 항로가 뚫리면서 이들 지역 경제가 죽었다는 것이다.

   

해서, 정리해보자.

   

생존 본능이 강해야 한다.

세계의 중심지, 무역의 중심지에서 살아야 한다.

공직, 전문직에 진출해야 한다.

   

자, 오늘날 유태인을 보자.

   

이차대전과 이스라엘 건설로 생존 본능 강화를 유지시켰다. 

세계의 중심지가 런던이면 런던, 뉴욕이면 뉴욕에 몰려 산다.

죽어라고 자식들을 공직, 전문직에 진출시킨다.

   

예서, 요즘 유태인들 고민이 무엇인지 답이 나온다.

첫번째 조건, 생존 본능 약화이다.

인드라가 보기에, 삼십 년 약발이다.

이스라엘 아랍전쟁이 1970년대에 있었으니 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삼십 년 약발 법칙!

자신들과 달리 아이들은 재벌 2세가 된 듯 물렁물렁하다.

하면, 해법은 무엇인가.

프랑스 유태인 학교 총격사건 같은 걸 자꾸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유태인이 무엇인지 자각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건 바다에 사이다 뿌리기인 게다.

지난 이차대전과 같은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태인이 오늘날처럼 권력을 쥐고 있을 기간은 단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삼. 근대 유럽이 유태인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중세유럽에는 상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이 있었다.

근대유럽에는 과학기술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태리, 프랑스, 독일, 영국인이 있었다.

로스차일드 이전에도 거상들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과 푸거 가문이 예다.

   

헌데, 왜 유태인인가.

   

당대 거상을 하려면, 동서고금 정경유착이 필수였다.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 모두 구교와 국왕 권력과 밀착했던 것이다.

   

문제는 구교와 국왕 권력이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세유럽에서 구교가 유지되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너무 춥거나 온갖 질병, 전쟁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나아가지 못하게 자연재해 등이 너무 혹독하니 숙명론이 인간 생존을 보장했던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하지만, 자유의지론과 숙명론 어느 하나가 정답이 아니다. 외부환경이 너무 혹독하면 숙명론이 답인 게다. 우리네 어머니를 보라. 그 처참했던 시절을 이겨낸 힘이 숙명론이었다. 반면, 자유의지론으로 무장한 우리네 아가씨들, 어머니처럼 살라고 하면 단 하루도 못 살 것이다. 그만큼 생존 본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숙명론이 무조건 옳다는 게 아니다. 정답이 없다는 게다. 다만, 요즘 지나치게 자유의지론이 득세하니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서, 인드라가 헌법 개정을 해서 처녀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더라도, 사회봉사를 최소한 일 년 동안 의무적으로 하도록 하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 보고 이런 비인기 정책을 과감하게 내놓을 자들이 없으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지금 북한 인민이 버틸 수 있는 건 숙명론 때문인 게다. 해서, 국유본이 작심하고 훅하고 바람 한 번 일으키면, 쪽발 정은은 48시간 이내로 총살당하는 것이다. 왜? 북한 인민이 자유의지론으로 돌아서니까. 국유본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과 달리 유태인은 적극적으로 종교 개혁에 지지했다는 점이다. 유태 상인이 부각한 요인? 새롭게 떠오르는 종교 개혁 권력과 손잡았다는 것이다.

   

해서, 유태 상인은 영국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을 지원한다. 크롬웰이 청교도 혁명을 성공시키자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유태인 영국 입국을 허가한 것이다.

   

그뿐이랴. 스코틀랜드 장로교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의 위그노파 종교개혁 운동, 스위스의 칼뱅 종교개혁 운동이다.

   

예서, 알아야 한다. 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운동이 실패했고,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이 성공했는가를 말이다.

   

칼뱅은 구교의 이자제한을 풀었다. 완전 푼 것이 아니지만, 5% 정도로 이자 제한을 규제 완화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유태인만 과학기술에 능통했던 것이 아니다. 뉴튼이 유태인인가? 아니다. 다빈치가 유태인인가? 아니다. 이처럼 근대에 접어들면서 멍청한 유럽인 중에도 제법 쓸만한 족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맑스적 표현으로 생산력이라 하자~!

   

문제는 무엇인가.

   

구교와 국왕 권력이었다. 맑스적 표현으로 생산관계라고 하자!

   

이 병쉰색희들이 이 놀라운 능력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자.

펠리페 2세 따위 허접한 넘들을 제외하자.

   

초점은 루이 14세이다.

왜 루이 14세인가.

이 시기 프랑스는 루이 14세 하기에 따라 영국 대신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초기 루이 14세에게는 운이 따랐다.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루이 14세 때에 영국 런던이 대화재가 난 것만 봐도 루이 14세에게는 천운이 있었다.

허나, 루이 14세는 천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오늘날 저 꼴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 시기, 프랑스에는 로스차일드에 필적하는 뛰어난 금융가들이 있었다.

그들이 오늘날 스위스 비밀금고를 지키는 은행가들이다.

   

또한, 이 시기, 프랑스에는 놀랄만한 과학기술자들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위그노파들이었다.

위그노파들은 스페인, 이태리와 교류가 자주 있어서 누구보다 신기술에 능통했다.

이들 대부분은 박해를 피해 독일 라인란트로 이주하여 독일 제조업 시조가 되었다.

   

하고, 이 시기, 메디치가와 푸거가가 있었다.

   

메디치가는 아들은 교황으로, 딸은 왕비로 보내는 전략을 취했다.

해서, 프랑스왕에게도 메디치가 핏줄이 흐르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왕비가 메디치 가문에 충실하니 구교 수호자를 자임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 권력으로 큰 가문. 구교 권위가 몰락하자 함께 추락했다.

   

푸거 가문. 푸거 가문은 스페인 필립페 2세를 전폭 지원했다. 독일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푸거 가문 문제는 무엇인가. 스페인 필립페 2세처럼 당대 독일, 스페인, 프랑스 국왕들은 한편으로 교황에 맞서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른 국왕을 누르고 교황의 권위를 받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동양식으로 말한다면, 전국시대였던 셈이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이 주나라 황실을 인정하면서 패자가 되려 했다면, 전국시대는 제후들이 주나라 황실을 개무시하면서 패자가 되려한 것이다.

   

이때, 필립페 2세나 루이 14세 등의 한계는 무엇인가. 진시황의 꿈을 키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황을 넘어선 황제의 시대.

그들은 그저 교황의 권위를 받는 국왕 권력에 만족했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이가 있으니 그가 누구인가. 서양의 여불위, 로스차일드였던 게다.

   

로스차일드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하나, 서양의 여불위처럼 영국 국왕에게 세상의 권력을 안겨준 것이다.

   

둘, 진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영 제국은 그래도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셋, 여불위는 망했다. 반면, 로스차일드는 오랜 권력을 유지했다.

   

정리하자.

   

로스차일드로 함축한다면, 로스차일드 비법은 무엇인가.

   

누구보다 권력과 가까이 하라, 친구가 되라.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허나, 늘 다른 카드를 마련하라.

   

그 권력을 이을 차기 권력과도 가까이 하라, 친구가 되라.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현재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단체가 누구인가.

   

에이팩(AIPAC). 미국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이다.

   

회장을 선출하는데, 당대 대통령과 가장 친한 사람을 뽑는 것이 전통이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가 프랑스 대선에 충고할 대목이 있는가?

   

있다.

   

프랑스가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지, 그것은 인드라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지금 프랑스는 균형 감각이 요구되고 있다.

인드라가 보기에, 지금은 사르코지가 재선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다만, 사르코지가 집권하는 조건으로 선거 때 내건 공약을 지키지 않고 욕을 먹어야 한다.

프랑스가 욕을 먹으면서 유로체제를 끌고 가야 유로공동체 미래가 밝다.

   

국유본은 지금 인드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12. 카자르인, 혹은 하자르인은 누구인가

   

카자르왕국 역사 참고목록.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1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2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3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4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5

   

   

밀로나드 파비치의 '카자르 사전'도 참고목록이다.

   

 "'사전소설'이라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다. 유고슬라비아 작가 밀로라드 파비치가 지난 84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카자르 사전」(전2권·중앙M&B)가 그것. 한때 카프카스(코카서스) 지방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카자르인들의 역사 미스터리를 다룬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과는 딴판의 모습을 하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카자르는 7세기에서 10세기 무렵에 걸쳐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부 일대에 실존했던 역사상의 제국으로, 한때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으나 11세기 이후 바람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제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당시 군주였던 카간의 개종. 그가 민족의 전통종교를 버림으로써 민족과 언어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가 어느 종교로 개종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카간의 개종에 대해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는 치열한 논쟁을 벌여 카간이 자신의 종교로 바꿨다고 주장했다. 「카자르 사전」은 한 종교의 승리로 결론짓지 않고 각 종교가 논쟁에서 주장하는 자료를 뒷받침해 핵심을 소설화했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구성과 글의 서술방식 그리고 읽는 방식이 독특하다. '사전소설'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외견상 사전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물론 엄밀한 의미의 사전은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등 3대 종교의 주장을 과거의 미래를 넘나드는 환상적 이야기로 풀어놓고 있다. 먼저 이 책은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분리해 각권을 구성했다. 두 권의 내용은 12줄(원문은 7줄)을 뺀 나머지가 동일해 다른 부분을 찾아내기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과 같다. 각권은 세 종교의 주장을 레드 북(기독교), 그린 북(이슬람교), 옐로 북(유대교) 등 세 가지로 구분해 실었다. 카자르 민족의 백과사전격인 이 소설은 카자르 제국의 등장인물과 주제를 표제어와 해설로 담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8세기 카자르 공주였던 아테를 각기 다루되 해석이 상호 다르다. 레드 북의 경우 아테를 9세기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옐로 북은 8세기의 인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9세기 전후의 사건과 17세기 후반의 전쟁, 1982년 터키 킹스턴호텔 살인사건을 고리로 연결해 풀어나가는 점도 이채롭다. 「카자르 사전」은 이야기 구성과 서술 등이 파격적이다. 기승전결이라는 기존 소설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는 한편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줄거리도 갖춰야 한다는 통념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순서에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읽어도 무방하다. 독자의 자유분방한 의식에 따라 어느 부분이라도 마음대로 펼쳐 읽어도 그만이다. 소설을 번역한 문학평론가 신현철씨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전기를 구성한 방식으로 쓰인 소설은 처음으로 일반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읽기를 요구한다"면서 " 이 작품은 동유럽 문학의 인식을 한 차원 높였다"고 말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346739

   

다음은 카자르 사전의 한 대목이다.

   

"카간(KAGHAN)-카자르 군주를 의미한다,  타타르어 '칸'에서 온  단어인데 타타르어로 '칸'은 왕자 라는 뜻이다. 이븐 파들란의 주장에 따르면  카자르 민족은 카간을 강바닥에 묻었다. 카간은 언제나 또 한 명의 군주와 권령을 나누었고, 단지 제일 먼저 아침 문안 인사를 받는 정도의 권위만을 더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카간은 유서 있는 왕가에서 나왔는데,  이 가문은 아마도 터키 계통이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왕 혹은 '베이' 라고 불리던 카간의 동료 군주는 카자르 제국의 평민 출신이었다. 9세기에 씌어진 야쿠비 문서를 보면, 카간은  6세기에 이미 칼리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카자르 민족의 공동 통치에 대하여, 알 이스타흐리가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랍력으로 320년에 씌어진 이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카자르의 정치와 행정에서 그 군주는 카자르 민족의 카간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카자르 왕 '베이'보다 지위가 더욱 높다. 하지만  카간을 임명하는 것('카간' 이라는 직위를 내리는 것)은 바로 왕이다. 카간을 새로 임명하고 싶을 때, 왕은 카간으로 지명당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서 비단 조각으로 목을 조른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이 거의 숨이 끓어질 지경에 이르면 얼마나 오랫동안 지배할 생각입니까? 하고 묻는다. 카간으로 지명당한 사람은  '얼마만큼이오' 라고 대답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대답한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죽는다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말한 그 해를 채우자마자 살해된다. "

   

투르크 민족 계열의 카자르 왕국은 7~9세기 카프카스 지역에 융성했다가 이후 점차 멸망의 길을 걸은 왕국이다. 카자르 왕국이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카자르인이 유대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카자르 왕국 지배층이 이슬람교의 사라센 제국과 기독교의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성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교를 국교로 한 것이었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르 왕국은 956년 우크라이나 왕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또한 잔존하던 카자르인도 몽고군 진출로 러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카자르인이 주로 살던 곳이 러시아와 폴란드이다. 카자르인은 말로는 카자르어로 하고, 문자로는 히브리어를 썼다고 전해진다. 헌데, 오늘날 카자르어는 사라지고 이디쉬어를 쓰고 있다. 하면, 왜 이들은 러시아 방언도 아니고, 폴란드 방언도 아닌 독일 방언 히브리어를 구사했던 것일까. 인드라는 여기에 힌트가 있다고 보고 추론하고 있다.

   

이디쉬어 어휘를 보면, 히브리어, 아랍어, 로망스어 - 중세 남부유럽(이태리, 스페인, 프랑스)에서 쓰이던 라틴어에서 파생한 민중어가 섞여 있다. 허나, 11세기 이후 폴란드, 백러시아어 등이 섞였다.

        

이를 통해 카자르인 유태인 이주 경로를 알 수 있다.

   

서유럽에 살던 유태인이 십자군 전쟁 이후 서유럽 각지에서 축출을 당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폴란드, 러시아 등지로 이주했다. 동유럽으로 이주한 유태인이 순식간에 동유럽 상권을 장악한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일부 유태인이 남미로 가서 순식간에 남미 경제권을 장악했던 역사가 있다.

   

하여, 부유한 동시에 여전히 독일 같은 데서 막강한 권세를 유지하는 서유럽 유태인과 잘 알고 지내는 유태인 가문들을 중심으로 카자르 유태인들이 결합하기 시작했다라고 인드라는 보는 것이다.

   

"폴란드는 1025년에 첫 왕이 등극하면서 국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그 땅에 유태인이 들어간 최초 기록은 966년 스페인 - 당시는 아랍령 -  외교관이자 상인이며 여행가이던 이브라힘 이반 야콥의 기록에 나옵니다. 최초의 유태인 공동체는 1085년경부터 존재했다고 나옵니다. [유태인 학자 예후다 하코헨의 기록] 당시 폴란드 주화들은 유태인들에 의해 찍혀졌고 출토되는 당시 주화들에는 여러가지 히브리어와 유태문양이 새겨있습니다.

   

1098년 십자군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있자 폴란드 왕들은 유럽국가들과 달리 유태인 초빙 쪽으로 국가시책을 정하는데 국가부흥을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군 학살로 인해 첫번째 대규모 유태인 이주가 이루어지며  1240~1241 년에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폴란드가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그것을 복구시킬 인력으로 당시 유럽사회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선 유태민족의 이민을 적극 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유럽 각국에서 추방과 학살 대상이던 유태민족은 폴란드를 그 피난처로 삼게 됩니다.

   

1264년 유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칼리쯔 장전"이 나왔습니다. 칼리쯔 장전은 기독교인과 유태인이 싸울 경우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동수로 증인과 판사가 되게 하며 유태인의 거처에는 유태인의 허락이 없으면 기독교인은 못 들어가게 하는 등, 폴란드의 소수인구이던 유태인에게 매우 유리하게 한 칙령으로, 그 목적은 폴란드 왕실의 재정을 빌려주는 입장이던 유태인이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하게 묶어두기 위한 의도였으나 그 덕분에 유태인은 폴란드에서 유럽다른 지역과 달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에게 강제개종과 학살, 화형, 마녀재판, 추방이 휩쓸고 있던 중서유럽과 달리, 폴란드는 종교자유를 누리면서 유태인공동체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좋은 피난처 나라가 되어주었습니다. 여러 폴란드 왕들이 십자군을 피해 입국한 유태인들에게 관용책을 폈으며 유태인은 폴란드와 이웃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키에브까지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폴란드는 가장 많이 유태인들이 거주하는 나라가 되고, "유태인의 낙원"으로 불리웠습니다.  종교자유 시책 덕택으로 유태교가 번성하면서 폴란드는 탈무드정리,편찬사업과 각종 유태교분파의 발전, 또 히브리어의 모체가 된 이디쉬어 등 유태교의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inter:001039&uid=128898

   

폴란드 유태인 역사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당대 서유럽 유태인 수는 매우 적었다. 서유럽 각지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라고 해봐야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즉, 폴란드 왕국이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서유럽 유태인이 필요했고, 인구 수 증가를 위해서는 동유럽 유태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카자르 유태인이 잘 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카자르 유태인은 다른 러시아 민족들처럼 가난하게 살았다. 극히 소수의 유태인만 잘 살았던 것이다.

   

하면, 카자르 유태인이 문제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19세기말 20세기초반부터였다. 이 시기 아일랜드인과 이태리인, 카자르 유태인은 미국사회에서 유럽인 대접을 받지 못할 만큼 천민 축에 속했다. 헌데, 이들이 과거 게르만족 이동처럼 서유럽으로, 미국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왜? 당대 러시아 황제가 유태인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1881년 3월 한 명의 유태인이 포함된 러시아 혁명가들이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였는데 암살자가 유태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러시아에서 유태인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예서, 반유태주의자들은  이들이 맑스주의자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나로드니끼 성향의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11886

   

반유태주의자들에 의하면, 1881년 3월 1일,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5인방 Grinevetski, Rysakov, Mikhailov, Emelianov, Helfmann은 지하조직이었던 Narodnaya Volya(민중의 의지)의 멤버들이었다. 헌데, 나로드냐 볼야는 유태인 Mark Natanson이 구축한 무정부주의적 나로드니끼 조직 토지와 자유(Land and Freedom)의 하위 무장조직이었다는 게다. 

   

이 사건에 배후가 있었는지, 영국이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바쿠 유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 인드라는 여전히 자료가 부족하여 사안을 유보할 것이다. 운동권 시절에는 짜르가 반동적인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유태인 암살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고 알고 지냈다. 허나, 당대 러시아 황제는 개혁적이었다. 남북전쟁 때도 노예해방 기치를 내건 북군을 돕기 위해 러시아 황제가 군대를 파견할 정도였다. 하여, 국유본론을 정립하면서 이에 대한 역사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는가 여기고 있다.

   

아무튼 이 당시 영국 외교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국유본의 의지는 무엇이었는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300인 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인 핼퍼 매킨더(Mackinder, Sir Halford John)가 있다.

   

"1861년 2월 15일 잉글랜드 게인즈버러에서 의사 집안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7년부터 1905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레딩대학교런던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국에서 지리에 대한 연구열을 부활시키고, 지리학을 학문으로 성립시켰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런던정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자연지역 구분 연구로 유명한 허버트슨(18651915), 스탬프 등 많은 지리학자를 육성했다. 그 이후로 영국 추밀원 고문, 제국조선협회 회장 등을 거쳤다. 이처럼 많은 공직을 역임하는 것이 초기 영국풍 학자의 특색이었다. 주요 저서로는 《영국과 영국해(Britain and the British Seas)》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영국의 자연지지에서부터 인류지리나 역사지리, 산업도시의 문제를 순환론적으로 전개하고, 마지막으로 섬나라로서 영국의 발전방향을 다루었다. 그는 1904년 출판한 《민주주의이상과 현실(Democratic Ideals and Reality)》에서 지리적 축과 역사의 '핵심지역(heartland)'으로서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 이론은 영국과 미국에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핵심지역 이론은 권력의 자연적 위치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독일에서, 특히 저명한 지정학자이며 헤스의 스승이기도 했던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에 의해 나치스지정학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다. 말년에는 귀가 멀어 공개적인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1947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집필한 교과서의 개정판을 내는 일에 전념했다. 1944년, 미국국립지리학회가 4년마다 지리학상 위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는 '찰스 P. 데일리 메달(Charles P. Daly Medal)'을 받았다. "

[출처] 해퍼드 매킨더 [Sir Halford John Mackinder ] | 네이버 백과사전

   

공식적으로는 매킨더의 해양세력 대 대륙세력으로서의 대유라시아 전략이 이차대전 이후부터 검토되었다고 하지만, 브레진스키의 스승격이자, 300인위원회 일원으로서의 위상을 고려하면, 국유본이 제국주의 시대를 결정하는 시점부터 국유본의 전략이었다고 본다. 즉, 매킨더 이전부터 영국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유력국인 프랑스, 스페인,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를 이간하면서 이득을 취해왔다. 국유본은 이러한 경험에서 제국주의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하고, 매킨더 역할은 이러한 국유본 전략을 개념화, 이론화한 것이다. 

   

* 유태인 시리즈를 2부로 하려고 했으나, 예상보다 반응이 좋고, 또 글을 쓰려니 분량이 많아져서 2부가 아닌 4부 정도가 될 듯합니다.

   

* 국유본이 인드라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인드라의 생존 본능 때문도 요인이 되는 듯싶다.

   

* 덧글에 답변을 달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드라가 답변을 달 때도 심혈을 기울여 답변을 달지 않습니까. 지금 현 주제에 집중하다 보니까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덧글을 읽고 순식간에 답변을 쓸 수 있지만 - 이건 번개에 참석한 분들은 알 겁니다 -. 그러다 보면 현 주제에 집중하지 못해서요.

   

인드라가 아스퍼거 증세가 있어서요. 지금 집중하는 걸 다른 데에 분산시키다가 흥미를 느끼면 이 글 마침표를 못 찍습니다 ㅠㅠㅠ

   

요즘 글을 쓰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서너시간 자는데, 자는 게 자는 게 아닙니다.

약간 힘든데요.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는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자, 생각하고 있어요.

해서, 인드라가 이전에도 그렇지만, 교정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읽는 분들은 24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면 다른 글이 보일 겁니다.

고맙습니다.

   

유태인 시리즈를 마감하면 답변드리겠습니다.

급한 분은 번개에 참석해서 질문주세요.

직빵으로 답변이 나옵니다.

번개에 참석한 분들은 알 겁니다.

이해해주세요.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1 07:02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209798

   

   

   

   

예수의 실제 모습이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5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1

   

1. 유태인이란?

   

혈연적으로 유태인이거나  개종을 통해 유대교를 믿어 유태인이 된 사람을 말한다.

   

유대인을 가리키는 명칭인 그리스어의 Iudaios (Ιουδαίος), 라틴어의 Judaeus, 프랑스어의 Juif, 독일어의 Jude, 영어의 Jew, 스페인어의 Judío, 러시아어의 Zhid (Жид) 등은 모두 고대 히브리인의 12지파 중 하나인 '유다(예후다)' 지파에서 왔다.

   

   

2. 유태인과 유대인 차이는?

   

유태인은 유대인을 오히려 猶, 클 泰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넘치도록 크다, 과하게 크다, 별 것 아닌 듯이 보이는데 알고 보면 대단한 족속이다 이런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 중에는 원숭이 유로 해석해서 작은 원숭이 쪽바리를 배후조종하는 큰 원숭이로 보기도 하는데, 그건 상상에 맡기겠다.

   

   

3. 유대교를 믿으면 태어나길 한국인으로 태어나도 유태인이 될 수 있는가?

   

오늘부터 난 유대교를 믿는다, 고로, 나는 유태인이다, 라고 하면 인정받나?

   

그렇다.

   

1970년대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옛 소련에서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때 유대교에 잘 모르고 언어도 모르던 이들이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우겨서 상당수 이스라엘로 건너왔다. 이스라엘 당국은 알면서도 묵인한 듯싶다.

   

왜 이스라엘 당국은 묵인할 수밖에 없나?

   

DNA, 핏줄 등으로는 유태인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개족보가 유태인이다.

   

심지어 구약에 나온 유태인 후손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가능성도 크다.

   

   

4. 구약은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인가

   

구약 역사성에 대한 논란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최대주의란 성경 기록 중에 지나치게 과장되고 황당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시에 이집트 등 다른 지역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중동 지역 역사를 성경에서 보여주는 면이 많으므로, 아직 고고학적 성과물이 발굴되지 않았다 하여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4208027

   

반면, 최소주의란  요시아왕 때에 유대교 부흥을 일으키면서 구전되어온 기록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라고 보아 아브라함과 모세는 물론 솔로몬마저도 역사가 아니라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4208044

   

나아가 예수도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최대/최소 논쟁은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에서 단지 논쟁만으로 그치지 아니 하고 있다. 건물을 짓다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자기 편에 유리하면 발굴하고, 자기 편에 불리하면 유물을 없애버린다고 한다. 

   

예서, 최소주의를 비유태인이 주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유태인 종교 분파와 정치 분파가 굉장히 많다.

   

일부 유태인 랍비는 이란 대통령, 차베스와 함께 한 반이스라엘 회의에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중동에서 이스라엘 말고 유태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 이란이다. 극단적인 정통 유태인 입장에서 시오니즘이란 메시아를 부정하고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세속화된 입장이므로 이런 주장을 하는 유태인을 신의 이름으로 마땅히 절멸시켜야 하는 것이다.

   

   

5. 바리새인이 오늘날 유태인 뿌리라고 인드라가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신교가 읽는 구약성서는 바빌론으로 유다 지도층이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이 끝이다. 헌데, 구교는 마카베오 상, 하를 외경으로 간주한다.

   

마카베 상, 하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마카베 가문(Maccabees)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태인 왕국을 세운다. 이 왕조가 하스몬 왕조인데, BC 165년부터 BC 63년까지 계속된다.

   

예서, 마카베 가문이 유태인 풍습대로 성전 중심 제사장 제도를 운영했다. 이 제사장 그룹이 모세 때부터 이어져온 레위파, 아론파, 사독파는 아니나 새로운 제사장 그룹이 된 게다.

   

허나, 바리새파는 마카베의 독립투쟁에는 지지했으나, 성전 중심 제사장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오늘날로 치면, 무교회주의인 짜라투스투라나 고타마 싯타르다에 많이 심취한 듯싶다. 성전, 혹은 만신전을 우상숭배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대성전주의가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마카베까지 이어져온 전통이었던 반면,

만신전 타파주의는 바리새파부터 시작한 전통이었던 것이다.

   

예수와 바리새파는 만신전 타파주의라는 면에서 한 편이었다.

다만, 교리가 가장 유사한 만큼 서로 이단 짝퉁이라며 가장 많이 싸웠다.

반면, 레위파나 사독파는 당대 이미 예수와 교리가 많이 달라

예수 교리를 이단의 범주를 넘어선 완전 다른 교리라고 보아 예수와 논쟁하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바리새인 정체가 누구인가하면,

인드라는 수메르의 후예,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등장한 시기는 카르타고인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당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지중해 상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그리스인에 악감정을 품은 족속도 카르타고인 밖에 없다.

   

구약에 나타난 유태인을 보라.

목동질이나 열심히 했지, 상인 자질을 전혀 엿볼 수 없다.

한마디로 멍청한 족속이었다.

   

반면, 바리새인을 보라.

대부분 율법을 중시할 만큼 지식인들이다.

직업도 세금 징수인이거나 상인이다.

이런 족속은 당대 바리새인 외에 찾기 힘들다.

   

특히 로마시대에 유태인이 자연적 인구 증가를 뛰어넘어 급증했는데 개종 외에는 다른 요인이 없다. 이 시기 카르타고인, 에돔인, 이집트인은 물론 노예가 된 이들 상당수가 유대교로 개종한 것이다.

   

왜?

   

누구도 막을 자 없을 듯한 로마제국을 우습게 보는 종교가 딱 하나 있으니 유대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 이후 기독교가 대세가 되지만^^!

   

   

   

6. 디아스포라란?

   

디아스포라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전치사 dia와 동사 '뿌리다'라는 의미의 spero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은 뒤 그곳으로 자국민을 강제 이주시켜 세력을 확장했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식민지 영토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스포츠 제전으로 오늘날 영연방국가들이 럭비를 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때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와 식민지 건설을 의미하는 능동적인 의미였다.

   

헌데, 그간 고대 그리스인들이 정복지로 삼았던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안에는 누가 있었는가.

   

페니키아인이 있었다.

   

예서, 인드라는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유태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가나안에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페니카아인들이 정착해서 살았다. 이들은 기원전 2600년 정도에 예루살렘에까지 들어가 정착하고 지중해 동부 해안지대에 주로 도시를 건설하여 무역을 주업으로 생계를 잇기 시작했다. 기원전 1400년 경 페니키아인들과 잦은 충돌을 일으키던 민족은 히타이트 족이었다. 그 후 1200년 경에는 역사적 기록으론 남아 있지 않은 미상의 민족(이태리 부족으로 추정)이 쳐들어와 페니키아인들이 살던 해안지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크레타 섬에 살던 블레셋인이 가자지구 땅으로 도망쳐 정착한다. 헌데,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도 블레셋인이 아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부르는 이들도 그저 오랫동안 가나안에 살던 정체불명의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000년 정도부터 유태인이 가나안 땅 남부에 살기 시작했고, 이들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페니키아인들도 가나안 북부 해안지대에서 타이어(또는 티레), 사이돈(또는 시돈) 등 해상교역 도시를 발달시켰다. 당대 이 두 민족은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 공존을 했다. 페니키아의 왕 히람은 동시대 인물인 이스라엘의 다윗왕과 솔로몬왕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구약성경에 나온다. 허나, 앗시리아 왕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을 기원 722년에 멸망시킨다. 또 페니키아의 중심도시 시돈도 678년에 함락시킨다. 해서, 최초의 디아스포라가 발생한다.

   

   

   

기원 전 8세기이다. 헌데, 목축업에 종사하던 히브리인들로서는 먼 지역으로의 이주가 용이하지 않았을 게다. 게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포기하는 것도 모세교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을 게다. 반면 페니키아인은 어떠한가. 종교적으로 아무 제약이 없다. 또한 이전부터 항해술을 터득하는 등 원거리 상업활동에 능숙했던 페니키아인들로서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을 게다.

   

과연 상기한 이주 경로가 유태인 이주 경로인지, 페니키아인 경로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카르타고에 정착하는 대목을 보면, 페니키아인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지 않은가?

   

인드라는 디아스포라라는 그리스어 기원에 유념한다. 지중해 역사에서 최초로 지중해 식민지를 건설한 족속은 페니키아인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카르타고이다. 이후 지중해는 헬라인, 혹은 그리스인들이 장악한다. 헬라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이 행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을 게다. 해서, 가나안인더러 페니키아인이라 부르듯 페니키아식 식민지 건설 방식을 디아스포라로 불렀을 것으로 인드라는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빌론 유수 이후 디아스포라가'이산 유대인''이산의 땅'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왜인가. 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미도 있으나, 그리스 침입 이후에는 남하하는 그리스를 피하는 피동적인 의미도 있었다. 그리스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식민지를 개척하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시대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처럼 본토에서 귀족에게 핍박받던 빈농이었다. 그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해외 이주를 한 것이 아니라 본토에서 살기 힘들어서 불가피하게 이주한 것이다. 그리스 빈농들은 조선 후기 만주로 간 한국인처럼 황무지를 개척하여 옥토로 바꾸었던 게다.

   

정리하자. 디아스포라는 페니키아 시대까지만 해도 능동적인 의미였으나, 그리스 시대에서는 능동/피동적인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의미였지만, 유태인이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에는 오직 피동적인 의미만 남았던 셈이다.

   

   

7. 사두개인, 바리새인 차이가 무엇인가?

   

인드라가 모세교라고 부른 이들은 사두개인이다.

   

"사두개인은 아마 유대교의 사제 사독 (Zadok)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다. 열왕기 상 (2.35)에 따르면 사독은 솔로몬 왕에 의해 새로 세운 성전의 제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에언서 에제키엘 (40.46)에서는 사독의 후손들은 사제직을 대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며 이들을 유대교에서 이른바 레위(Levi)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사독의 후손들은 에루살렘 성전의 관리를 맞아서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에제키엘 44. 10-31)"

http://ko.wikibooks.org/wiki/%EC%9C%A0%EB%8C%80%EA%B5%90/%EC%82%AC%EB%91%90%EA%B0%9C%EC%9D%B8

   

모세교 형성과정을 보면, 이집트 지중해 유일신 선진종교를 중심으로 가나안 토속종교를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해서, 태생적으로 지중해적이었고, 이런 연유로 바리새인과 달리 사두개인은 그리스 로마 문화에 거부감이 없었다. 

   

반면, 로마제국에 멸망당한 카르타고인이 모세교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와 로마제국에 저항적인 짝퉁 짜라스투라교를 믿을 것인가. 당연히 후자되겠다. 

   

바빌론 유수로 끌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유태인은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조금이라도 교리에 맞지 않게 생활한 사람들을 동족이더라도 잔인하게 내치고 살해했다. 하고, 성전을 재건했다.

   

바리새인이 바빌론 유수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들과 합치할 수 있겠는가. 사마리안인마저도 내치는 바빌론 유수인과 어찌 어울릴 수 있겠는가.

   

이때, 바리새인은 여러 가지 종교를 섞은 것 같다. 쉽게 말해, 유불선을 종합한 동학처럼 자신들에게 좋은 점만 취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와 비타협적 자세를 보여주는 바빌론 유수교, 성전 타파 짜라투스투라, 드라비다족의 내세 관념을 종합하여 바리새파 율법을 창시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인도 피압박 민족이었던 드라비다족은 지배 민족인 아리안족이 내세운 최초의 계급사회에 맞서 내세 관념을 발명했다. 이 믿음은 오늘날 순교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정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대표적인 학자이자 존 콜먼에 의해 국유본 정보원으로 지명된 아도르노가 우리 세계의 가장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면서 인도에까지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예서, 예수가 고타마 싯타르다의 고행에 깨달은 바, 길없는 길로 나선 건 아닐까?

   

   

8. 유태인은 중세 시기 유럽 어느 곳에 정착했나?  

   

    

상기한 지도는 10세기의 유태인 활동 지역이다. 로마제국이 유태인더러 단지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못하게 했을 뿐, 가나안 지역에서 퇴출한 것이 아니다. 모세교에 신앙심이 깊은 유태인이라면 가나안 땅을 떠날 리가 있겠는가. 떠난 이들은 한번 떠난 바 있던 바리새인들일 게다. 유태인은 목축업이나 하던 종자들이었던 반면, 카르타고인은 고대에 아프리카는 물론 아메리카도 탐사하기까지 했다는 일족인 게다.

   

상기한 그림을 보자. 스페인의 유태인 정주 시기보다 카르타고인 정주 시기를 따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포에니 전쟁 때의 한니발을 기억하면 된다.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 주력은 카르타고와 스페인에 있었다.

   

기후적으로 로마 온난기 시기에 일시적으로 중부 유럽에 살 수는 있었을 지라도 이후 혹한이 닥친 중부 유럽에는 야만인들만 거주하였다. 대부분은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 북부 아프리카, 레반트 지역에서 유태인이 산 셈이다. 극히 일부가 로만틱 가도를 따라 중부유럽 지역인 라인란트에 거주했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해서, 중세 온난기 이전까지 중부 유럽에는 국가다운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다. 중세 온난기에 와서야 여러 국가들이 출현한 게다.

   

해서, 이 시기, 유태인이 많이 살던 지역은, 이태리, 스페인, 북아프리카, 바그다드였던 게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아랍 상인 루트인 셈이다.

   

   

9. 아슈케나지는 혈통적 분류인가, 거주민적 분류인가?

   

   

   

아슈케나지나 세파르딤은 혈통적 분류가 아니라 거주민적 분류이다. 세파르딤(sephardim)의 sephard는 히브리어로 '에스파냐'를 뜻한다. 아슈케나지(ashkenazi)의 ashkenaz도 히브리어로 '독일'에서 유래한다. 에스파냐에 사는 유태인, 독일에 사는 유태인인 셈이다. 한마디로 사투리로 분류한 셈이다. 같은 유태인이더라도 독일 액센트가 있으면 아슈케나지이고, 스페인 액센트가 있으면 세파르딤이었던 게다.

   

일반적으로 아슈케나지란 본디 러시아에 살던 카자르인은 물론 라인란트 유역 및 인접한 프랑스 지역에 살다가 십자군전쟁(11~13세기)이 끝난 뒤 슬라브 지역(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으로 이주한 유태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하면, 왜 아슈케나지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처럼 라인강을 건너 동부로 진군했던 것일까?

   

1290년 영국이 유태인을 추방시켰으며 1394년엔 프랑스가 유태인을 추방했고, 1492년 통일 스페인 왕국이 유태인을 추방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이 오늘날 서유럽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게다. 하여, 이들 중 상당수가 라인강을 건너 동유럽으로 향했던 게다. 하고, 이들은 동유럽에서 고리대금업을 중심으로 광산업, 무역업 등 닥치는 대로 장사를 했던 게다.

   

예서, 오인이 있는 게다. 오늘날 유태인에 대한 잘못된 상식 중 하나가 세파르딤과 아슈케나지 종족 자체가 다르다고 여긴다. 허나, 중세까지만 해도 이들은 모두 같은 뿌리였고, 단지 지역적으로 다른 이들이었을 뿐이다. 

   

단지, 러시아 및 동유럽에 살던 카자르인, 혹은 하자르인 때문에 발생한 혼동인 게다. 엄밀하게 보자면, 독일계 이태리계 유태인 및 서유럽 유태인은 모두 스페인 유태인과 핏줄이 같은 카르타고 유태인인 게다. 반면, 러시아,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은 카자르 유태인이다. 

   

해서, 맑스는 자신을 무어인이라고 별명을 지을 만큼 카르타고 유태인이다. 물론 친척도 오늘날 네덜란드 필립스 재벌일 만큼 귀족 유태인 그룹이었다. 반면, 레닌은 몰라도 스탈린이나 트로츠키 등은 천민 유태인, 카자르 유태인 그룹인 것이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귀족 유태인 그룹은 시오니즘에 냉소적이었던 반면, 천민 유태인 그룹은 시오니즘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해서, 맑스도 시오니즘에 매우 매우 냉소적이었다.

   

   

10. 로스차일드는 가짜 유태인인가?

   

   

   

유태인의 장점이 무엇이었던가. 조선도 마찬가지였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좁은 동네를 떠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일본 영화에도 나오지만, 이유없는 거주지 이탈은 반역죄에 준하는 엄벌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에 자유로운 족속은 십자군 전쟁처럼 전쟁을 하는 용병이거나 한자동맹과 같은 원거리 상인 집단이었다. 해서, 역사적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서 살 수밖에 없는 동시에 강한 유대감이 있던 이들 유태인 집단은 이미 로스차일드 이전에 국제적인 통신망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핵심은 궁정 유태인이었다. 궁정 유태인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가는 스페인 왕국의 세파르딤 유태인 추방령 이후 한때 스페인 경제가 큰 위기에 빠졌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궁정 유태인들은 영화 '쇼생크 탈출' 주인공에서 보듯 회계, 재정 문제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하여, 이들은 당대 귀족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던 게다. 

   

예서, 다시 강조하자. 19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는 오늘날 말하는 아슈케나지 유태인, 보다 명확하게 카자르 유태인은 없었다. 단지 독일어 방언이냐, 스페인 방언이냐의 차이 뿐인 카르타고 유태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카르타고 유태인 인구가 매우 적고, 카자르인이 많으니 이들간 혼혈해서 카자르인이 압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허나, 오늘날 가장 혼혈이 잘 이루어진다는 미국에서조차 3%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19세기까지 카자르인이 서유럽에 들어올 일도 없었던 게다.

   

하고, 스페인 추방령 이후 상당수 유태인이 아랍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카자르 유태인처럼 빈한하게 살았다. 오직 극소수만이 스페인 추방령 이후 유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이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남미로 이주하면서 오늘날 세계를 장악한 것이다. 유태인 전체가 아니다. 유태인 중 극히 일부가 세계를 지배한 게다.

   

그 비율은 인류의 0.01%이다.

   

로스차일드 시조, 암셀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작고 땅딸막하고 가무잡잡한 특징이 있다. 이들은 결론적으로 카자르 유태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게다.

   

정리하면, 귀족 유태인이란 수메르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유태인보다는 페니키아 유태인이 적절하고, 페니키아 유태인보다는 카르타고 유태인이 적당하고, 카르타고 유태인보다는 궁정 유태인이 합리적이다.

   

수메르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바리새인 - 스페인 궁정유태인 - 로스차일드

   

   

추신 : 글이 길어져서 1,2부로 나눠서 씁니다.

   

   

국제유태자본과 Y형 조직, 그리고 디지로그 비판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0 03:09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12294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4 : 국제유태자본과 Y형 조직, 그리고 디지로그 비판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0

   

   

1. 중장기전략위원회

2. 복수차관제도와 Y형 경력발전제도

3. Y이론과 Y형 인재, 그리고 글로벌 이니셔티브 

4. Y형과 디지로그

5. 국제유태자본과 Y형 조직

   

이번 글에서는 국제유태자본의 역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구조적인 측면을 검토하기로 한다.

   

구조적인 측면을 검토하는 이유는, 국제유태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작동시키고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다.

   

예서, 문제점은 국제유태자본 조직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자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있다.

   

일. 조직 구성이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상위 기관과 하위 기관의 역할과 업무 차이로 인해 세부적인 면에서는 달리할 수 있으나, 기본적 골격이 동일해야 조직적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국제유태자본 조직 역시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삼. 국제유태자본 상위기관 조직이 노출되지 않았으나 국제유태자본 하위기관 조직은 노출되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 하위기관 조직을 분석하면 국제유태자본 상위기관 조직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전제를 두고서 국제유태자본 하위기관을 분석해보자.

   

하면, 국제유태자본 하위기관 중 어디를 할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다.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처럼 국제유태자본의 하위기관이다.

   

   

1. 중장기전략위원회

    

"범정부 차원의 중장기 전략 수립을 위해 각 부처 장관급 18인과 민간전문가 20여명이 참여하는 중장기전략위원회가 마련된다. 지난 1월 기획재정부 내에 장기전략국이 신설된 데 이어 구체적인 중장기 전략의 수립과 집행의 추진체 역할이 마련되는 것이다. 4일 기획재정부는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중장기전략위원회 규정 제정안을 마련해 입법예고했다. 개설될 중장기전략위원회는 기획재정부 장관 소속으로 한 심의·의결기구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 통일부 장관, 법무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국무위원들과 국무총리실장, 금융위원장, 공정거래위원장, 통상교섭본부장 등 장관급 18명이 정부위원으로 참석한다. 장관급 인원으로는 국무회의 구성원을 뛰어 넘는다. 경제, 사회, 재정정책 분야의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 중 재정부 장관이 위촉하는 20명 이내의 민간전문가도 회의체의 구성원이 된다. 정부 장관과 함께 민간위원 중 1인이 공동위원장이 되며, 매월 정기회의를 열되, 위원 5명 이상이 요청할 경우 임시회의도 개최할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위원회 내부에는 장기 재정전망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는 장기재정전망협의회와, 위원회의 효율적 업무수행을 위한 실무조정위원회 및 민간자문단을 별도로 둘 수 있도록 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장기전략국의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자문위원회를 설치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4월 중으로는 민간자문위원 위촉 등을 마무리 하고 위원회를 정식 출범시킬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http://www.ajnews.co.kr/view_v2.jsp?newsId=20120314000675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라면 이런 기사를 가만 놔둘 리가 없을 게다. 정권 말기인데 웬 중장기 전략이냐며 선거용이라고 게거품을 물 것이다.

   

그럼 선거용이 아닌가? 선거용 맞다. 다만, 비판을 하려거든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김영삼, 쪽발돼중, 쪽발놈현 때도 정권 말기에 중장기 전략 비전을 제시했다가 흐지부지되었다. 해서,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가 될 것인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명박 정부는 임기말에 중장기 전략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가.

   

만일 선거용이면, 총선 전부터 준비하지, 총선이 끝난 후에 준비하나? 하면, 총선과 대선은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작년과 올해가 또 다르지 않느냐 말할 것이다. 허나, 여당 편에서 이왕 준비하는 것이라면 작년 4월부터 준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는가. 보다 치밀하게 정책을 준비하고 개발하여 총선 승리하고, 총선 승리를 대선 승리까지 이어져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또한,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 하지만, 단기적인 전략도 아니고 중장기 전략이다. 이전 정권들이 모두 실패한 것을 이명박이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안 된다. 이명박에게 권한이 없는 것이다.

   

하여, 인드라 생각은, 국유본이 정부 교체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것이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하든, 김두관으로 하든, 안철수로 하든 말이다.

   

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즉, 권력은 이명박이 아니라 국제유태자본에 있다. 그럼에도 다른 대통령처럼 이명박에게도 자율권이 있는데, 중장기전략위원회 같은 사안이 이명박 자율권에 해당하는가? 아니다, 라는 것이 인드라 판단이다. 즉, 중장기전략위원회는 국제유태자본의 지시사항인 게다.

   

이, 중장기전략위원회의 역할은 선거용인가. 맞다. 누구를 위한 선거용인가. 국제유태자본을 위한 선거용이다. 예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특정 후보를 위한 선거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몸통은 국제유태자본이고, 머리만 여러 개인 것이 새누리당부터 한국 거의 모든 정당 구조이다. 중장기전략위원회가 지난 5년간의 이명박 정부 현황을 정리하고 평가한 뒤 국제유태자본 취지에 걸맞는 중장기 기획안을 만든다. 즉, 중장기전략위원회 기획안은 차기 정부 5년간 과제를 위한 기초 자료인 셈이다. 동시에 대선 쟁점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조율 과정인 게다.

   

삼,  대통령 후보 정책팀들은 백지 위에서 움직이나? 아니다. 중장기전략위원회의 대선 쟁점 조율안을 받아서 자기 색깔을 입혀서 정책 비전으로 만든다. 차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정책팀은 인수위원회로 재구성되면서 중장기전략위원회에서 준비한 기초 자료를 토대로 차기 정부 준비에 나서는 것이다.

   

예서, 상기한 중장기전략위원회 조직을 보면, 조직이 기획재정부에 속하고, 위원장이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정책이란 예산이 중심임을 알 수 있다. 예산을 전제하지 않으면 정책이 아니다. 동시에 공동위원장 체제이다. 위원장이 대통령도 아니고, 기획재정부 장관 관료이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치인 출신이 아닌 한, 관료 출신이므로 힘을 실을 수가 없다. 게다가 혼자 위원장 맡는 것도 아니다.  민간위원 1인이 공동위원장을 맡는다.

    

국제유태자본론 관점에서는 상기한 조직 구성에 세 가지 가능성을 둔다.

   

일, 민간위원이 국제유태자본 책임자다.

   

겉보기에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동위원장을 맡는 민간위원이 국제유태자본의 지시를 받는 책임자이다.  

   

   

   

이, 민간위원에 힘이 실린 Y형 조직이다.

     

재정기획부 장관이 전문관료이고, 민간위원이 정책관료인 셈이다.

   

" Y형

  Y형은 확고한 중심인은 존재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구성원을 대표하는 리더가 존재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유형으로, 라인과 스탭이 혼합되어 있는 집단에서 흔히 나타난다. Y형은 주로 세력집단의 리더가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역할을 맡고, 비세력 또는 하위집단에도 연결되어 전체적인 커뮤니케이션망을 형성하게 된다.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102&docId=63228421&qb=7IiY66CI67CU7YC07ZiVIFntmJU=&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2P7A35Y7uwsstdQdN8ssc--063550&sid=T2eLi-JJZ08AABQfFqo

   

삼, 재정기획부 장관이 지휘관이고, 민간위원이 정치지도원이다.

   

재정기획부 장관에 힘을 실리는 대신 민간위원이 국유본을 대리하여 재정기획부 장관을 감시하는 체계인 게다.

   

Y형 조직을 공산당 군대 식이다, 라고 볼 수 있다.  하위 책임자를 두 명씩 두는 것이다. 해서, 공산당 군대 식으로 표현하면, 민간위원이 정치지도원인 셈이다. 공산당 군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지휘관보다 정치지도원을 우위로 두는 편이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지휘관과 정치지도원의 갈등을 잘 묘사한 바 있다.

   

   

"정치지도원 이라 합니다

   

구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국가의 군대 내부에서 대대, 또는 중대 단위의 부대 내부에서 정치적 임무를 담당하는 군인의 보직이다. 다른 말로는 정치장교라고도 한다. 주로 해당부대에서 정치사업을 책임지고 담당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지도원들은 병력지휘 또는 작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휘관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만 만들어진 군인들이였으므로 전문 군사 지식이 없었기에 지휘에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해당지휘관과 비슷하며 권한은 지휘관과 동등하였다. 그 이유는 정치장교 체제가 처음 도입된 소련 적군은 부대 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장교가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일단 지휘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원칙에 따라, 부대 지휘관이 수립한 작전을 프롤레타리아 병사 대중의 대표인 정치지도원의 승인을 받아 병사 전원의 만장일치라는 형식으로 지휘를 받게 돼 있었으므로 지휘관과 권한이 동등할 수 밖에 없었다.

    

각국현실

   

소련

독소전쟁중인 1943년부터 이때까지 누적된 정치지도원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이 직접 나서 정치지도원의 배속 수준과 권한을 대폭 조정했다. 일단 정치지도원은 통상 연대급 이상에만 배치하고, 그나마도 지휘관의 정치적 보좌 겸 최후까지 전투의지를 잃어서는 안 되는 참모장교로서의 임무만, 그것도 연대나 사단급 제대에서나 수행하게 되어서 정치지도원들이 지휘관의 작전에 간섭할 권한을 대폭 축소해 버린 것이다. 이후 정치지도원의 역할은 주로 병사들의 사기 상승을 위한 선전과 정치교육으로 거의 제한됐다.-자료인용-

소련 연방해체 이후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였습니다

   

중국

모택동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정치 군관들을 대폭 전진배치시켜 공산주의사상교육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런 중국군 체제가 1979년  중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군의 대패로 끝나자 그 패인이 전투경험없는 정치군관들의  부대지휘한 것 때문에  결론을 내리고  정치군관의 지휘관 진출을 억제하였다가 1976년 사인방사건이란 중국권력투쟁 당시  정치군관들의  정치적 활동이 문제되어  이 제도를 페지하엿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전통적으로 군대 반란 과 반역을 차단할 도구가 없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정치지도원을 대폭 강화하였고 현재 북한  정치지도원은 중대부터 편제되어 있으며 사실상 군의 실세입니다. 이 제도는 1996년 청진시 라남지구에 있던 6군단이 쿠데타 실패로 군단이 해체되면서  정치군관 활동과 역활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37671322&qb=7KCV7LmY6rWw6rSAIOq1sOyCrOq1sOq0g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2PeC35Y7uNsscEqdyZssc--292160&sid=Pmqpa2B1ZU8AAE7S7nsAAAAp

   

인드라는 두번째 가능성을 가장 높이 보고 있다. 첫번째는 민간위원에 흡사 차기 대통령이 된 듯 힘이 크게 실리기 때문에 말썽의 소지가 많다. 세번째는 평양정권처럼 사실상의 독재체제를 구축해야만 가능한 시스템이다. 현 대한민국 정부시스템상 불가능하다.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성공하는 정부의 신공직인사론)

10.0 | 네티즌리뷰 3건 김태유, 신문주 저 |삼성경제연구소 |2009.01.12

   

2. 복수차관제도와 Y형 경력발전제도

   

복수차관제란 쪽발놈현 정권 때 도입된 제도이다. 간단히 말해, 그간 차관을 한 명 두어 장관을 보좌하였으나, 한 명 이상을 두자는 제도이다.

   

조직규모가 방대하거나 사회적 현안이 자주 발생하는 부처에 도입해 차관의 통솔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업무의 전문화를 촉진하기 위한 제도이다. 재정기획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4개 부처는 행정업무에서 병목현상을 일으켰던 차관 소관업무를 제1차관과 제2차관이 분담해서 정책 결정 시간을 단축하고, 정책품질을 높이도록 하였다. 부처 내부의 기능이 이질적이고, 업무량이 방대하여 따로 운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정기획부는 국제금융업무(정책 관료)와 재정업무(전문 관료)를 분리한다.

   

<li style="LINE-HEIGHT: 2; FONT-FAMILY: 굴림체,gulimche; FONT-SIZE: 11pt">기획재정부에 제1차관 및 제2차관을 두며, 장관이 부득이한 사유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때에는 제1차관, 제2차관의 순으로 그 직무를 대행한다.</li> <li style="LINE-HEIGHT: 2; FONT-FAMILY: 굴림체,gulimche; FONT-SIZE: 11pt">제1차관은 인사과ㆍ운영지원과ㆍ세제실ㆍ경제정책국ㆍ정책조정국ㆍ국제금융국 및 대외경제국의 소관업무에 관하여 장관을 보조한다.</li> <li style="LINE-HEIGHT: 2; FONT-FAMILY: 굴림체,gulimche; FONT-SIZE: 11pt">제2차관은 기획조정실ㆍ예산실ㆍ국고국ㆍ재정정책국 및 공공정책국의 소관업무에 관하여 장관을 보조한다</li>

   

쪽발놈현 정권 이전의 쪽발돼중 정권 시절의 인위적 정부부처의 통합은 부처 간 업무상 이질성을 발생시키고 전문성을 저하시키며 또한 조직간 융화를 잘 되지 않게 하는 현상을 발생시켰다. 해서, 복수차관제를 도입하여 전문성 증진과 조직 장악에 기여한다는 명분이다.

   

허나, 명분과 달리 인드라가 분석할 때, 복수차관제도의 도입은 국유본의 지시사항이다. 하면, 왜 김영삼 때나 쪽발 돼중 때가 아니라 쪽발 놈현 때여야만 했는가.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행정조직으로는 매우 효율적인, 강력한 관료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쪽발 일성도 높이 평가한 고시제도를 통해 관료들이 엘리트 의식을 갖추게 된 데다가, 국가 발전이라는 이상을 지니고서 능력 발휘를 했던 것이다. 또한, 비교적 청렴하였다.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은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이다. 해서, 국제유태자본 권력을 쥔 데이비드 록펠러는 정권을 바꾸어야 했다. 단지 전두환으로 사람만 바꾸자고 했으면, 박정희를 암살할 필요가 없었으며, 광주항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허나, 데이비드 록펠러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를 하고 싶었다.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계승한 전두환 정권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가령 산별노조에서 기업별노조로 바꾸어야 했다. 해서, 광주항쟁을 일으킨 것이다.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하였는지 여부는 통일 이후에 밝혀질 일이다.  

   

국유본은 주도면밀하다. 바꾸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국유본 권력을 차지하고서 했던 방식대로 한 것이다. 관료를 건들지 않았다. 괜히 잘 못 건들다가는 문제가 커지기에. 대신, 스탠퍼드대학원 출신의 김재익 같은 인물을 투입시켰을 뿐이다.   

   

다시 말해, 국유본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시스템을 바꾸거나 관료를 교체시키보다 일부 관료에 힘을 실어주어서 일부 정책의 변화만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 시기는 국유본이 관료 시스템을 서서히 타락시키면서 신진 관료들을 키우며 훗날을 도모할 때였던 것이다. 신제윤 제 1 차관이 행정고시 24회이면 1981년에 고시 패스한 셈이다.

   

"[프로필]신제윤 기획재정부 제1차관 내정자

| 기사입력 2011-09-06 10:04

[이데일리 신상건 기자] 신제윤 기획재정부 제1차관 내정자(54·사진)는 정통 경제·금융통으로 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업무능력과 친화력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지난 3월 금융위 부위원장으로 승진 이동한 후 6개월만에 과천 복귀다.

   

   

 

신제윤 기획재정부 제1차관 내정자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재무부 경제협력국, 국제금융국,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과장,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심의관, 국제금융국장,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 등을 거쳤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과 통화스왑을 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작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에도 기여하면서 공로를 인정받아 황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임종룡 전임 1차관이 국무총리실장(장관급)으로 영전하면서 박재완 재정부 장관이 신 내정자를 후임으로 원했다는 후문이다.

   

1958년생 휘문고 서울대 경제학과 행정고시 24회 합격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과장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심의관 대통령비서실 국민경제비서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2489710

   

   

하고, 국유본은 김영삼, 쪽발 돼중 정권 시절에는 역시 시스템을 바꾸지 않았다. 허나, 국유본이 관료를 고향 사람 위주로 교체시키고, 퇴진시키고, 승진시키도록 고무시키면서 관료들 타락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즉, 국가 발전이란 과제 자체를 잊게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 관료들은 자신을 희생하여 국가 발전 대의에 복무하는 이상을 품었었다. 허나, 김영삼, 쪽발 돼중 정권에 이르러서는 국유본의 기획에 따라 국가 발전 대의를 내팽개치고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을 이상적 관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타락한 관료로 변모했던 것이다. 하고, 이 시기부터 국유본은 경실련이니 참여연대이니 하는 시민단체를 조직하였다.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관료란 국가 발전이라는 목표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날 시민단체란 무엇인가. 매국노 이완용 그 자체이지 않은가. 허나, 시민단체도 십 년 정도 사람을 키워야했던 것이다.

   

해서, 마침내 쪽발 놈현 정권이 등장한 것이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이다. 전두환 정권 때부터 연령순으로 물갈이가 진행되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의 관료들 씨를 말린 셈이다. 하고, 시민단체에서 키운 국유본 간첩들을 정부에 투입시켰던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박근혜가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모든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에 국유본이 박근혜를 내보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박근혜를 이중삼중으로 족쇄를 채운 후에 내세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나 정치적으로는 둘 사이에 별 관계가 없다. 하고, 박근혜가 설사 대통령이 되어서 이제까지 말과 달리 갑자기 박정희처럼 되겠다고 해도 이를 따를 관료나 정치인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고, 복수차관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하면, 국유본이 복수차관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국유본이 한국 정부 접수를 선언하고, 이제부터 한국 정부 관료를 국제 관료로 키우기 위함인 게다. 그 이전까지 한국 관료가 국제조직에 들어간 예는 거의 없었다. 허나, 쪽발 놈현, 이명박 시대에는 어떠한가.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허경욱 차관이 유럽으로 갔다. 신제윤 차관은 요즘 글로벌 회의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다. 최근 보건복지부도 차관을 복수화한다는데, 이것 역시도 겉보기에는 보건전문 차관 필요성 때문에 의료계가 환영이지만, 내건 명분과 달리 인드라가 보기에 국제 보건복지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하면, 왜 차관인가.

   

1급-차관, 2급-이사관, 3급-부이사관, 4급-서기관, 5급-사무관, 6급-주사, 7급-주사보, 8급-서기, 9급-서기보이다.

   

1급 차관 정도 업무를 보아야 국제 관계에 눈을 뜰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정기획부 1차관은 간단히 말해 국제 업무를 담당한다. 2차관이 전문 관료라면 1차관은 정책 관료인 게다. 정책 관료가 국제 조직에 진출한다. 

   

   

3. Y이론과 Y형 인재, 그리고 글로벌 이니셔티브 

   

조직 이론에서 Y형 인재란, X/Y이론에서 나왔지만, 근래 조직이론에서는 다기능 전문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정책 관료인 게다.

   

Y형 인재, 다기능 전문가, 정책 관료.

   

한 분야에 십 년 정도 전문가 경험을 쌓은 자들을 대상으로 다른 부문 등을 두루 체험할 재교육을 시켜 다기능 전문가로 육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유태자본이 요구하는 인재상이다.

    

http://blog.naver.com/hojin2778330?Redirect=Log&logNo=140120300719

   

   

"`YU CAN` 영남대…세계 일류大 도약 나선다

영남대는 2009년 이후 'YU Glocal Initiative'라는 새로운 비전을 마련하고 침체일로의 지방대라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담대한 도전'을 펼치고 있다. 2년 남짓한 기간 만에 국비 및 외부자금 1710억원을 유치했다. 성적우수 신입생 99.3%(881명) 증가, 신입생 수능평균 20.3점 상승, 2010년 졸업생 취업자 수 전국1위(건강보험DB기준), 취업률 전년 대비 11%증가, 대기업취업률 전국 평균 5% 상회라는 성과를 거뒀다... 영남대는 수도권 집중 현상의 대응책의 하나로 지역에서 세계와 바로 소통하는 글로벌지역거점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미국, 호주, 독일, 프랑스 등 그린에너지 분야에서 앞서 가는 각국의 거점기관들이 영남대에서 '글로벌그린에너지클러스터네트워크'(GGECN·Global Green Energy Cluster Network)를 구축했다. 지난 3월에는 EU본부의 지원을 받아 'YU-EU센터'를 열고 한·EU FTA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영남대가 직접 유럽과 소통하는 창구를 마련했다.

   

지난 6월에는 '한·중 대학총장포럼'을 개최해 아시아시대 개막을 위한 한·중 대학의 역할과 협력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한·중·일 대학총장포럼으로의 확대를 제안해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영남대는 이제 동북아를 넘어서 지구촌 전체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글로벌 리더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2009년부터 추진 중인 Y플랜은 종합적인 인재육성패러다임으로 입학 후 진로를 진단할 수 있게 하는 'YAT'(Y-type Aptitude Test), 대학 4년간 스스로 경력관리를 할 수 있게 한 정보화시스템 'YU CAN'(Yeungnam University Career Advancement Nurture), 대학생활과 봉사, 고전(명저)읽기와 글쓰기, 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를 강화하는 'BASE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창의적 교수법, 창의적 학습법, 브레인스토밍룸 운영 등으로 인성·창의성·진취성·전문성을 겸비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을 변경하고 있다.

   

이효수 총장은 "대학들이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X형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영남대는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Y형 인재' 양성을 목표로 새로운 인재육성패러다임 구축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대는 올 1학기말 신입생 234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90.3%의 학생이 '지원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영남대를 좋게 평가한다'고 응답하는 등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112008201

   

   

쪽발 놈현 정권에 이은 이명박 정부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국유본은 쪽발 놈현 정권 때 관료시스템을 접수했다. 하고, 국유본이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한 일은 무엇인가. 고시제도를 없애고, 시민단체장을 서울시장으로 만든 것이다. 동시에 국유본이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대학을 국유본 대학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일루미나티 카드에 있는 일루미나티 대학이 현실화하는가^^? 한마디로 스탠퍼드대처럼 일루미나티 대학 출신 인재를 키워 반기문처럼 만든다? 이런 것이 아닌가?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를 떠올리게 한다. 유 캔은 오바마를 떠올리지 않는가~!

   

현재까지 인드라는 박근혜를 노비네파 단독 대통령 후보로 보지 않고 있다. 노비네파와 골드만파 연합 대통령 후보로 보고 있다. 

   

   

4. Y형과 디지로그

   

 "홍 대표:그래서 내놓은 개념이 '디지로그' 아닙니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으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하게 되셨습니까. 이 교수:처음에는 디지털만이 우리의 신대륙이고, 아날로그라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빨리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대륙이라는 모체가 바뀌지 않는 한 디지털이라는 신세계는 절대로 신대륙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초기에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압도하는 현상이 포착됐습니다. 1998년 미국 미네소타 주의 주지사 선거에서 프로레슬러 출신의 제시 벤추라가 당선됐지요. 공화당도 민주당 소속도 아닌 데다 정치적 인지도도 떨어지는 사람이 당선된 건 미국 누리꾼들의 지지 때문입니다. 초기 정보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뭉갠다든지 하는 이항대립식 관계는 성립하지 않아요. 지금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서로 보완하지 않으면 양쪽 다 죽습니다. 초기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몰랐을 때, 사이버만 장악하면 기성체제를 완전히 부술 수 있었던 상황은 끝났습니다. 그럼 아날로그로 돌아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생하는 길목을 빨리 찾는 나라가 승리합니다. 홍 대표: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이 정보사회에 필수적인데도 이를 실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만남이 기계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교수:허리케인이 덮친 뉴올리언스에서 디지털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해요. 자전거를 사람 손으로 돌려 전류가 생겨야 겨우 기계를 쓸 수 있었지요. 디지털에 의존하는 우리 삶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습니다. 몸으로 체득하는 사소한 아날로그 정보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됩니다. 미국 9ㆍ11 사태의 한 생존자는 페트병이 사각모양이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비상물이 충분했는데도 막상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페트병이 둥글기 때문에 전부 굴러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보는 아날로그 정보, 생명정보, 사회문화정보입니다. 우리가 점심을 먹는다는 건 생명정보, 기계정보, 사회문화정보를 활용하는 행위입니다. 배고프다고 느끼는 건 생명정보고, 12시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한다는 생각은 사회문화정보고, 12시가 된 걸 아는 건 시계를 활용해 얻은 기계정보지요. 아날로그 정보와 디지털 정보가 통합된 사회가 안정된 사회고 진정한 정보사회입니다. 디지로그란 해병대입니다. 예전에는 해군만으로 혹은 육군만으로 전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대륙에 상륙해서 전쟁하려면 해군도 안 되고, 육군도 안 되고, 심지어 공군도 안 됩니다. 새로운 군대가 필요합니다. 육군과 해군을 단순하게 합친다고 해병대가 되는 건 아닙니다. 해병대라는 특수한 조직이 생겨난 것은 특수한 전략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디지털로만 또는 아날로그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디지로그라는 해병대는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해병대식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서류처럼 대립되고 모순된 것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홍 대표:저서에서 한국이 디지로그를 선도할 수 있는 국가라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교수: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정보사회로 들어섰고, 정보기술(IT) 분야에서는 벤치마킹할 나라가 없을 정도로 최첨단을 걷고 있습니다. 좁은 반도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중국이나 인도, 미국 같은 경우 국토가 너무 넓어서 광케이블이 모든 가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보 고속도로가 문앞까지 못 가는 격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의 집집이 초고속 인터넷을 설치했습니다. 또 스포츠계에서는 누리꾼들이 거리로 뛰어나온 붉은 악마, 정치계에서는 누리꾼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선된 현 대통령 등 디지털 세상에서 일어난 일은 기성세대가 상상도 못했던 현상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모순을 통합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여름과 겨울이 뚜렷한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상반된 기후의 조화가 한국 건축에 나타납니다. 마루는 여름의 공간이고, 온돌은 겨울의 공간입니다. 보통 남방형이면 남방형, 북방형이면 북방형인데 우리나라 집들은 남방형과 북방형 구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돌담과 조각보도 다른 돌과 천을 조화시켜 가면서 만든 것이지요. 스티브 잡스의 아이팟을 보고 안타까워서 땅을 쳤습니다. 아이팟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 블루오션 공간을 공략해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오프라인의 MP3로 연결했죠. 즉 디지로그를 한 겁니다. 디지로그 맞춤형 문화유전자를 지닌 한국 사람이 했어야 하는 일을 스티브 잡스가 선수쳤으니 통곡할 일입니다.

 홍 대표:디지로그라는 패러다임은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나 산업 외에도 우리가 디지로그 개념으로 바라보면 좀더 명확해지는 문제가 있을까요. 이 교수:외교문제도 디지로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는 영토개념이고 물질개념입니다. 반면 디지털은 비물질개념입니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은 아날로그적으로 밀접한 관계입니다. 아날로그, 즉 영토 문제로 들어가면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디지털로 가면 오히려 미국의 영향력이 세집니다. 아날로그로 가면 로컬리즘이고, 디지털로 가면 글로벌리즘입니다. 우리는 글로벌리즘으로 나가야 하고 로컬리즘으로 나가야 하고, 반대로 글로벌리즘으로만 나갈 수 없고 로컬리즘으로만 나갈 수 없고 이런 이율배반적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국제전략은 반드시 디지로그적 통합 개념으로 가야 합니다. 지역과 세계를 아우르는 외교정책이 필요해요. 상황에 따라 디지로그 전략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 기둥 사이를 오가는 횡선이 있는 H형,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맞물려 순환하는 O형,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연결된 W형,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차하는 X형,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하나가 된 Y형, 아날로그로 갔다 디지털로 갔다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Z형은 정치ㆍ경제 영역에도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이 됩니다. 홍 대표:역사상 말 타고 달리는 대륙세력과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해양세력이 존재합니다.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격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지정학적 여건에서 우리는 어떤 대외전략을 수립해야 할까요. 이 교수:지금 중국 인도 러시아는 대륙세력이고 영국 미국 일본 싱가포르는 해양세력입니다. 미국의 경우 대륙이긴 하지만 큰 섬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전에는 해양세력이 득세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대륙세력이 발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문명의 충돌보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이 더 현실적이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반도국가이기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를 디지로그적 전략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두 세력 틈바구니에서 고전할지, 아니면 조화를 이룰지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균형점을 찾으며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070102000073

   

이어령이 아무런 소스없이 정몽준 직계 홍정욱과 상기한 대담을 나눌 리가 없는 것이다. 이어령은 왜 아나로그와 디지털이 일체가 되는 Y형 디지로그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가.

   

브레진스키의 최근 저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쪽발 놈현이 아무런 소스없이 허브 국가 운운한 것이 아닌 게다.

   

하면, 이에 대한 인드라 생각은?

   

한국은 반도 국가가 아니다. 해양 국가이다. 개념을 달리 해야 한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낀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가가 아니다.

   

한국은 해양 국가다. 지금도 사실상 섬이고, 통일되어도 중국으로 인해 섬일 수밖에 없다.

   

한국이 반도적 인식을 하는 한, 기껏해야 작은 떡밥에서 큰 떡밥 신세밖에 안 된다.

   

판을 키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고 또 다시 한반도가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다.

   

판을 크게 키워야 한다. 한국이 떡밥에서 낚시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은 해양 국가여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

   

한국이 살 길은?

대륙 국가? 아니다.

반도 국가? 아니다.

해양 국가이다.

한국이 살 길은 해양 국가다.

   

   

 5. 국제유태자본과 Y형 조직

   

 국제

 유태

 자본

 국제유태 국제자본

 유태국제 유태자본

 자본국제 자본유태

   

상기한 데서 국제유태자본의 하위 기관인 한국 정부, 그리고 거버넌스 개념을 고려하여 시민단체와 대학과 언론까지 언급했다.

   

해서, 현재 국유본 조직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에서 국제, 유태, 자본은 각각 정치, 종교(과학), 자본을 담당한다. 이때, 각 부문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부문에서는 일종의 외교부(국무부)가 필요한 셈이다.

   

오늘은 정치 부문만 이야기했으니 국제 부문만 이야기하자.

   

국제(정치) 부문은 유태(종교 과학), 자본에 각각 외교부(국무부)가 필요하다.

   

국제유태는 국제 부문의 대유태 외교부이다.

국제자본은 국제 부문의 대자본 외교부이다.

   

시리아 사태를 예로 들면,

러시아, 중국은 국제유태 조직이다.

미국과 유럽은 국제자본 조직이다.

국제유태 부문과 국제자본 조직을 대립, 갈등, 충돌시킨다.

   

알파오메가 전략의 조직적 설명이기도 하다.

   

상위의 중심에는 유엔이 있다.

   

또한, 유엔도 상위의 조직 입장에서는 국제유태 조직이다.

   

유엔 안보리는 국제유태 조직이다.

G20은 국제자본 조직이다.

상위의 중심에는 삼각위원회가 있다.

   

인드라는 블로그와 번개라는 Y형 조직체계로 나아갈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그대가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을 지지하는 이유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19 08:07

http://blog.naver.com/miavenus/7013404485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3 : 그대가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을 지지하는 이유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19

   

무인도에서의  

처세술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인드라의 국유본론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인드라가 블로그와 카페, 전국 순회 번개 활동을 통해서 획득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 최하층일수록 상류층일수록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반면 자신이 중산층이라 여길수록 부정적이다. 상식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국유본론은 기존 상식을 초월한다.

   

이때, 최하층인 경우, 자신의 능력과 별개로 자신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모두 국유본 탓이 되기 때문에 인드라와 국유본론을 지지한다. 해서, 인터넷 검색하다 보면, 인드라의 국유본론을 새로운 좌빨 이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게 쪽발돼중 탓, 쪽발놈현 탓, 이명박 탓, 부르주아 탓에 이은 국유본 탓이라는 게다.  

   

반면, 상류층인 경우, 경험적으로 국유본을 알기에 인드라 글에 긍정적인 게다. 최하층은 인드라가 아니면 국유본을 전혀 만날 수 없기에 관념적으로 국유본론을 지지하는 반면, 상류층은 경험으로 알기에 정보 수집과 국유본과의 인맥을 위해 인드라 글에 실체적으로 긍정적이다.

   

   

환경 차이에서 온 존재론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둘, 국내 거주하는 분들보다 해외에 거주하는 분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해외 거주 분들이 똑똑하다기 보다는 처한 환경 때문에 사건 사고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국내 거주인보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환경 차이에서 비롯한 인식론적 차이인 게다.

   

'병 속의 파리'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국내 거주인은 '병 속의 파리'이다. 국유본의 면밀한 기획에 따라 국내 거주인은 국유본 언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인다. 반면, 해외 거주인은 해외에 있기에 '병 속의 파리'가 아니라 '병 바깥의 파리'가 되는 셈이다. 물론 해외 거주인 역시 해당 국가에서는 '병 속의 파리' 신세라는 이중적 상황에 놓여 있다.

   

허나, 바로 이러한 조건 탓에 유태인처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단, 한국 문제만! 왜냐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해외인이라면,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일 수 있어도, 미국 문제에서는 역시 '병 속의 파리'이기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더 나아가 해외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객관적일 수 없다. 왜? '먹고사니즘' 때문이다. 해외 거주인이 유난스럽게 국내 정치에 개입하려 할 때는 객관적이기 보다 '먹고사니즘'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을 비판해야 생계가 해결되는 자들이 있고, 반대로 이명박을 지지해야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 있다. 허나, 둘 다 이념과는 무관하고, 한국에서 유명대학 졸업한 스펙에 뉴욕 같은 데서 하층으로 사는 꼴을 극복하고자, 잘 되면 한국으로 역이민하고 싶은 열망의 소산이라고 보면 무방한 것이다.

   

다만, 해외 거주인이더라도 정치에 무관심하고 비정치적인 영역에 관심이 있으면 이런 해외 거주인의 국내 문제 관련 논평은 객관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반면, 정치에 지나치게 관심이 있으면, '먹고사니즘'과 관련이 크니 주의를 요한다.

   

아울러 소수이지만, 현재 국내 거주하더라도 해외에서 장기간 일했던 분들이거나 유학파이거나 한 분들도 해외 거주인과 같은 인식론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셋, 정치보다 경제, 종교(과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정치적 사고에 지나치게 매몰된 사람들 특징은, 모든 사태를 다 '꼼수'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모든 걸 '관계지향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관계지향성'이 중요하다. 국유본론에서도 '관계지향성'을 우선시하는 편이다. 동시에 국유본론에서는 '주체성' 역시도 중시하는 것이다.

   

빛의 본질로 비유해보자.

   

정치적 사고에 익숙한 분들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빛의 성질을 오직 파동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반면, 종교적 사고에 익숙한 분들은 빛을 입자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가 종교의 일부라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명제 역시 모든 것이 절대적이다, 라는 명제 안에 있다. 즉, 모든 것이 절대적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사고에 익숙한 분들은 파동과 입자를 동시에 받아들이려는 경항이 있다.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하더라도 경제적 사고에 익숙한 분들이 깨달은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단지,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 '깨다르니즘'을 수행하는 자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는 실천론적인 관점의 차이로 본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이든, 인식론적이든 국유본론에 대해 긍정적이더라도 인드라가 현재 취하고 있는 정치적 입장과 반대라면 국유본론을 긍정하고 싶겠는가. 현재 인드라 이웃인 동시에 쪽발노빠 분들의 고민이 이것이다.

   

인드라 말이 진실하다는 걸 안다.

허나, 진실이 밥 먹여주냐?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_-

   

인드라가 국유본에 포섭되건, 아니면 인드라가 이전처럼 갑자기 변덕을 부리건 해서 정치적으로 자신과 같은 편이 된다면 그 누구보다 인드라의 국유본론을 찬양할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웃이다~!

   

인드라 이웃 정치적 경향을 분석하면, 진보쉰당, 통합진보당, 민주통합당, 국민생각, 친박연대, 무당파, 새누리당 등 정치적 프리즘이 그 어떤 블로거 이웃보다 다양하다.

   

해서, 국유본이 인드라 블로거 이웃 반응을 주요한 여론 동향으로 삼을만하다.

   

   

넷, 금융부동산업 종사자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샐러리맨이더라도, 자영업자라도, 실업자라도 금융부동산업에 종사했거나, 현재 금융부동산업에서 일하는 분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저축은행이든, 시중은행이든, 투자은행이든, 국내은행이든, 해외은행이든, 부띠끄이든, 헤지펀드이든, 회장님 관재인이든, 동네 부동산중개업자이든, 부동산회사이든, 주식 투자자이든, 선물옵션 투자자이든, 업종 차이나 직위 차이는 상관이 없다. 

   

금융부동산업 종사자들이라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그들은 상류층이 아니더라도 속칭 '메이저' 혹은 '메쟈'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 단지 책에서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안다.

   

다만, 국유본론에 긍정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다.

   

메쟈가 세계 경제와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것까지는 동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정치와 경제 부문에 개입하고 있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가 있다.

   

이 점에서 기존 음모론을 오히려 가장 부정하는 층이 금융부동산업 종사자들일 수 있다. 기존 음모론이 유치하기 때문이다.

   

해서, 금융부동산업 종사자들 의견은 크게 둘로 나눠진다.

   

일. 인드라의 국유본론은 기존 음모론과 달리 국유본 세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나중에 다른 이론이 대체할 수 있어도 현재까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이론이다.

   

인드라 경제 뷰가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HSBS, 블랙록, 바클레이즈, 조지 소로스 등의 리포트 뷰에 필적하거나, 이보다 낫다는 게다. 

   

이. 인드라의 국유본론은 기존 음모론에 비해 매우 뛰어난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기존 음모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없다.

   

인드라 경제 뷰가 뛰어난 점을 인정하지만, 인드라가 국유본과 직접적인 연을 맺지 못한 이상, 국유본이 중요하게 취급하는 인간지표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인드라가 인간지표이기에 오히려 국유본이 이용해먹기 딱 좋다.

   

인드라가 주식하지 않는 이유  

http://blog.naver.com/miavenus/70103505337

   

   

   

다섯, 시각 종사자들, 특히 건축토목업 종사자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사진작가, 미술작가, 출판 편집자, 스타일리스트, 미용사, 영화감독, 에니메이터, 만화가 등 시각과 관련이 있는 분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인드라 평생 지인, 나타샤도 에니메이터이다. 또한, 인드라 인생을 보면, 시각 종사자들이 인드라에게 유난스럽다고 할 정도로 호감을 주셨다.

   

이유는 뭘까? 잠정적인 결론은,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즉, 인드라 역시 시각적 이미지적 감각이 자신들처럼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같은 편이니 이야기가 가능한 게다.

   

여기까지이면 인드라에 특별히 관심을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면, 인드라의 독특한 점은 무엇인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있기에 인드라에 호감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드라가 보는 세상이, 동양적이면서 서양적이고, 관계적이면서 주체적이고, 직관적이면서 이성적이고, 창조적이면서 평론적이기 때문이다.

   

에니메이션 무지개 통통 시나리오 작가, 인드라는 작가인 동시에 평론가이다.

이것이 매력적인 게다.

심지어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더 존경스런 인물일 수 있다.

   

국제유태자본,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 

 http://blog.naver.com/miavenus/70046077660

   

예서, 동양, 관계적, 직관적, 창조적은 작가적 항목이다.

예서, 서양, 주체적, 이성적, 평론적은 평론가적 항목이다.

   

작가는 작가적 경험을 해보지 못한 평론가들이 평론하면 내심 분노한다.

허나, 작가는 차범근처럼 선수 생활을 해본 이가 평론하면 내심 지지한다.

   

김기덕은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이다.

   

파리에서 김기덕을 만나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17311056

   

박찬욱은 한국 영화감독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찌질이 영화감독일 뿐인데,

국유본한테 아부를 열심히 해서 국유본 눈에 들은 병쉰넘일 뿐이다.

   

이런 인드라의 혁신적인 평론에 열띤 지지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인드라 평론이 국유본의 질투를 자극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건축토목 종사자들이다.

   

사실 건축토목업 공부하면 누구나 프리메이슨을 만나게 된다.

기분이 좋다. 

그저 기질이 맞거나, 먹고사니즘 때문이거나, 지인 때문이거나 해서 그냥 건축토목업에 종사한다.

헌데, 음모론에 따르면, 프리메이슨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게다.

하고, 프리메이슨 유래는 자유석공이다.

건축토목이다.

프리메이슨이 아무리 나쁜 넘들이라도 일단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지 않다면 더 이상 건축토목쟁이가 아닐 것이다. 

   

허나, 무조건 프리메이슨을 옹호할 수는 없는 게다. 건축토목쟁이 중에도 자부심 높은 마스터가 있을 것이며,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분들이 인드라의 국유본론을 만나면서 수십년간 고민했던 영적 문제들에 뻥뚫린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창조적인 활동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물 만난 고기인 게다.

   

이 역시 실천론적인 관점에서 볼 일이다.

   

   

여섯, 고학력자들이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드라가 난해하게 말하는데, 그걸 이해하는 독해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반면, 저학력자들은 답답하다. 인드라가 뭔가 말하고 있는데, 이해할 수가 없다. 세계관도 알 수 없는데, 읽다 보면 단어 하나 하나가 생소하다. 낯설다.

   

해서, 프린트해서 읽는데, 하나 하나 단어나 개념 검색하면서 읽는 데 하루 종일 걸린다. 심지어 일주일 걸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드라는 일주일에 서너개 글, 심지어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글을 올리기도 한다.

   

이뿐이랴. 메모게시판을 통해 하루에 27개의 최신 뉴스들을 뽑아서 올린다.

   

   

니미럴, 인드라 색희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일까 싶은 게다. 인드라 글 하나 읽는 데만도 일상에 지장을 준다. 헌데도, 인드라는 아랑곳없이 또 다른 글을 올리고, 하루에 27개의 최신 뉴스를 올린다. 언제 이것 다 읽냐.

   

ㅠㅠㅠ

   

반면, 고학력자일수록 훈련이 되어서 인드라 글을 하루에도 서너개 정도 소화한다. 메모게시판 뉴스도 필요하다 여기는 읽을 글만 골라서 읽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고학력자도 생계나 시간이 문제다.

   

고학력자라도 회사에서 사적인 업무를 제한하니 집에 와서 읽어야 한다. 시간 제약이 있다.

고학력자라도 생계에 허덕이면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이 문제 역시 실천론적인 문제일 것이다.

   

   

일곱, 세상의 왕따가 국유본론에 긍정적이다.

   

인드라는 어찌 보면, 세상 왕따의 희망인 것일까.

   

   

인드라는 B형이고 사수자리다.

인터넷에서 보면, 사수자리 B형은 전형적인 B형이고, 전형적인 사수자리이다.

게다가 인드라는 뱀띠에다가 왼손잡이이다.

   

아스퍼거 등 은근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다~~!

   

장남이고, 운동권이다!!!

   

다행스런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인드라는 최씨나 강씨가 아니며, 곱슬머리나 대머리가 아니고, 탈북자나 혼혈, 동성애자가 아니고, 전남광주나 경북대구에서 태어나지 않아 자신의 고향을 속이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

   

하여간, 인드라는 양면적이다.

   

한 편에서 보면, 인드라란 주류에서 가장 동떨어지고, 외면하고 싶은 종자이다.

반면,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인드라란 비주류의 희망인 게다.

   

내가 비록 지금 찌질하게 살아도 희망이 있다.

인드라가 있으니까.

   

이에 대한 세상 왕따들 입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드라는 왕따들의 왕초다. 앞으로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보자면, 왕따들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드라가 왕따 인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인드라 역시도 왕따 인생을 속으로 저주할 것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미래에서는 배신자의 편일 뿐.

   

   

[다큐] 동과 서 - 2부. 서양인은 보려하고 동양인은 되려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4013009

   

혈액형의 진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3969575

   

단일 민족의 과학적 증명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3969171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1)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3954758

   

SBS스페셜-신하균 내레이션 풀영상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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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바리 프로젝트와 한류천하 프로젝트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17 02:41

http://blog.naver.com/miavenus/7013389241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2 : 쪽바리 프로젝트와 한류천하 프로젝트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17

   

뭐, 도요타가 오오우치 가문 어쩌구라고?

   

한국의 삼성 격인 일본의 미쓰이는 노비네파이다.  도요타는 도레이, 도시바처럼 미쓰이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미쓰이 방계 회사로 분류할 수 있다. 전후 해체 후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국유본이 기묘한 소유 분산을 시도해서 알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인데, 향후 한국 재벌도 국유본의 지시에 따라 일본 재벌과 같이 지금처럼 뚜렷한 정체성보다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이행할 것으로 본다.

   

헌데, 도요타와 관련해서는 병쉰 전설이 나온다. 도요타가 오오우치 가문에서 나왔다는 게다. 중세 전국시대 때 가문이 몰락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오오우치 후손이 도요타로 성을 바꾸었다는 게다. 신기한 건, 이런 일이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당장 그것 믿을만한 것이냐, 근거는 뭐냐 하고 나왔을 것인데, 그냥 믿는다는 게다.

   

왜일까. 국유본이 암묵적으로 소문을 확산시키고, 쪽발찌라시들이 기사로까지 취급해서일까. 하긴, 요즘은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도 언론으로 취급하는 웃기는 세상이니까. 아무튼 쪽발왕 계보도 날조하는 판에 귀족 가문 날조야 누워서 떡먹기인데, 뭘 믿고 자시고 할 것이 있냐. 일제 강점 시기에는 자식이 쪽발민통당 국회의원이자 독립군 고문하던 일제 헌병이 쪽발이화를 강요했다면, 요즘은 쪽발찌라시들이 쪽발이화를 기사화하니 이것참 웃기는 세상이 아닐 수 없는 게다.

   

병쉰 쪽발이 색희가 오오우치가 백제계라고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에 가서 돈 기부하고 조상의 예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걸 또 기사화하는 쪽발 찌라시는 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병쉰색희들아, 백제 수도는 경기도랑 충청도에 있었어. 전라도에 수도가 있었던 후백제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자 본관이 충북 황간인 황간 견씨인 견훤이 세운 나라야. 전라도랑 아무 상관이 없어. 캐병쉰색희들아 ㅋ. 한국에 병쉰 쪽발이 색희들 굉장히 많다. 이런 개씨발색희들이 술을 먹으면 꼭 꼬장 부리는 색희들이다. 하는 짓이 젖 같으면서 자기는 뭐, 백제의 후손이라나, 신라의 후손이라나, 가야의 후손이라나, 개씨발 근본이 천하디 천한 노예놈의 쪽바리 색희들! 이런 색희들 정신상태가 썩어빠지니 찾을 것이라고는 개뻥뿐인 국유본 고대사밖에 없는 것이다. 국유본 고대사에 자빠져서 평생 빠져나오지 말아라. 니 애비, 쪽발이가 기뻐하겠다.

   

과거에는 성씨란 명분이었다. 배고파 일어난 천민 진승 오광이 뜬금없이 왕조의 후예를 내세운 예에서 보듯 이는 동서고금에 흔한 일이다. 고려 왕건도 보자. 중국 황제의 후손이라는데, 검증된 바는 전혀 없다.

   

인드라는 이 대목에서 일본 성씨와 귀족 가문이 대부분 막부 시대에 날조한 것임을 강조하겠다.

   

왜? 중국이야 그 허풍이 하늘을 찔러 유태인 아해들과 쌍벽을 이루니 논외로 치자. 서양만 봐도 근대에 이르러서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황제 후손이라고 뻥치는 색희들이나 러시아 황제 후손이라고 헛지랄하는 애색희들이 많았다.  문제는 한국도 그렇거든? 한국 성씨를 보면, 대개 왕의 성씨이다. 헌데, 왕족의 후예가 이리 많다는 게 말이 되나? 안 된다. 해서, 한국 성씨를 보면, 고려 후기, 특히 몽골 침략기와 무신 정권 때 많이 탄생했다. 시조가 아니라 중시조라는 이름 하에! 중시조가 뭐냐. 쇠퇴한 가문을 부활시켜 그 공을 인정받아 새로 가문을 열거나 계파를 형성한 조상을 말한다. 헌데, 왜 하필 몽골 침략기와 무신 정권 때 많이 탄생했냐 이것이다!

   

첫째, 사회 혼란기에는 기득권이 무너지면서 귀족 가문이 많이 몰락하기 마련이다.

둘째, 사회 혼란기여서 성씨 조작이 쉬웠다.

셋째, 몽골 정권이나 무신 정권에서 공을 세웠든, 매관매직했건, 평민이 관리가 되었는데, 간판이 필요했던 게다.

   

마찬가지로 도요타 병쉰 전설이 시작하는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 한국으로 치면 무신 정권 시기이다. 상기한 세 조건이 모두 충족시키는 시기인 게다.

   

한마디로 알 게 뭐냐 되겠다. 쪽발이들 잘 하는 짓 있잖아. 일단 우기고, 관련 자료 없애고, 매수하면서 시간 끌며 끝까지 버티기. 쪽발민통당 애들이 쪽발 애비들 짓거리를 책상머리 교육 잘 받아서 하는 짓거리잖아. 사기치는 것 잘 모르면 원숭이 나라 가서 가르침 받고 오잖아.

   

정리하자. 일단 조작이다. 믿을 게 못 된다. 기록이라는 것이 조선왕조실록 정도되면 믿을만하다. 서기가 목숨을 걸고 썼으니까. 그외에 일본서기라든가 하는 것을 비롯해서 일본 역사책을 믿는다는 건 쪽발이 애들도 속으로 좀 뜨끔할 일인 게다.

   

인드라 생각은 간단하다. 일본이 전통을 중시한다, 어쩐다, 가문이 유럽 가문보다 오래 되었네 하는 짓거리를 한다. 유럽 애들도 예예 하면서 속으로는 웃고 있다. 서구 문화는 기록 문화다. 중간에 조작이 있어도 워낙 여기저기서 기록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이며, 검증도 가능하다. 반면 쪽발이는? 암 것도 없다.

   

"헤이안 시대에 두각을 드러낸 성씨들 중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미나모토(源), 다이라(平)이 있는데 후지와라는 청기(靑旗), 타치바나는 황색(黃旗), 미나모토는 백기(白旗), 다이라는 적기(赤旗)로 이 군기(軍旗)들을 토대로 말하자면 후지와라는 신라계, 타치바나는 백제계, 미나모토는 가야계, 다이라는 고구려계라는 얘기였다. 특히 후지와라는 신라 김씨, 타치바나는 백제 부여씨, 미나모토는 가야 김씨, 다이라는 고구려 고씨."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375853&qb=64+E7L+g6rCA7JmAIOqzoOq1rOugpOqzh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2MKeU5Y7vNssbqlfQKssc--037633&sid=T2Nv73NVY08AAA-YDws

   

이것 다 구라라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저들이 실제 고구려계인지, 신라계인지, 가야계인지, 백제계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저 구라까는 색희들이 하는 이야기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신라계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후발주자인 백제계가 이후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것 무슨 말이냐.

   

인드라 생각은? 오래 전 초기 기마 민족이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북방에서 도래했겠다. 이들을 신라계라 하자. 허나, 이들이 신라계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말 타고 동해안을 달리다 끝을 보니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을 수도 있으니까. 또한, 이들이 왕국을 세운 건 아니다. 기껏해야 마을 몇 개 연합한 부족연맹체 정도였을 뿐이다.

   

중요한 건, 물 건너 왔다니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중국에서 건너오면 와~ 하는 것이 있지 않나. 하여, 원효가 중국 유학가려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어?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물 먹고 오면 한 수 접어주잖아?

   

해서, 신라계라고 하면 폼이 났던 시절이다. 허나, 신라계 호칭하던 호시절이 지나간다. 왜? 신라가 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 볼 일이 없는 망한 왕족, 멸문한 귀족 출신을 대어야 속일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구나 아는 왕족 후예 출신이라고 뻥치다가 탄로나면 무슨 개쪽인가. 해서, 그 다음부터 가야계가 나오고, 백제계가 나오는 것이다.

   

왜? 망했으니까. 망했으니까 속이기 쉬운 게다. 어차피 모르는 일이다. 천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잡고 난 오늘부터 고구려계다 하면 고구려계요, 백제계요 하면 백제계인 게다. 정권 잡았는데 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말에 토달겠나?

   

결국 구라인 게다.

   

마치 청나라 시조가 애신각라 신라 후손이라는 전설과도 같은 재미있는 뻥인 게다.

   

예서, 문제는 무엇인가.

   

청나라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고 믿는 순간, 당신은 청나라가 남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청황실에 애착감이 든다. 나아가 만주 고토 회복에 열을 올리게 된다. 원래 내 땅이니까.

   

그처럼 자신이 백제계요, 가야계요 하던 쪽발이들이 어느 순간, 한반도 고토 회복에 나서는 게다. 정말 한반도를 정복하면 그간 가지고 놀던 한반도 쪽발이 색희들을 멍청하다고 다 숙청하겠지만^^! 죽어라! 캐병쉰 반도 쪽발이 색희들아. 니 애비가 아들딸년이 쪽발민통당 국회의원인 일본 헌병으로 독립군 고문했던 천백배로 고문당하다 원자폭탄에 뒈져라, 나가싸대기들아~  

   

인드라는 지난 백 년 동안 일이 병쉰색희에 불과한 쪽발이들 머리에서 나왔다고 보지 않는다. 한반도를 강점하고, 만주 괴뢰국가를 세우고, 한단고기를 조작하고, 애신각라설을 유포하는 짓거리를 백년대계로 거침없이 해낼 수 있는 천재적인 머리를 지닌 부류는 현재까지 국유본이 유일하다. 지난 백 년간 쪽발이 뒤에는 국유본이 있었던 것이다. 쪽발이는 시키는 대로 했던 병쉰색희들이었던 게다.

   

   

예서, 쪽발왕 이야기를 해보자.

   

보통 만세일계 조작 비판하면 백이면 백 고대사 조작 운운이다. 허나, 인드라는 이에 회의적이다. 고대사란 건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해석이 대부분이다. 유물 하나 없이 그저 조작 책에 나온 문구 하나 가지고 소설을 써대는 게 사실 재야 고대사 연구가들의 하나같은 개수작이다. 한국이건, 일본이건, 열 중 아홉은 사기꾼이 아닐까 싶다.

   

인드라 접근 방식은 다르다. 기록이란 상황의 산물. 특히 쪽발왕 왕권이 크게 흔들릴 때 조작도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서, 쪽발 왕권이 크게 흔들린 시기의 쪽발왕 기록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검토하자.

   

막부 시대 쪽발왕 기록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매우 궁핍했다는 것이다. 관혼상제란 가장 기본적인 행사인데 생활이 어려워 행사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즉위식도 연기하고, 장례식도 치루지 못할 지경이다.

   

둘째, 쪽발왕 계보에 특이한 것이 있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습이 있다. 선왕이 제위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지내는 것이다. 여기까지이면 조선 태조 이성계 예가 있고, 서양, 중국에도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인가.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는 선왕이 대부분 권력을 잃었을 때이다. 견훤처럼 자식들이 견훤을 구금한다든가 할 때 발생하는 쿠테타 상황인 게다.

   

헌데, 쪽발왕 기록을 보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선왕이 왕위를 뜬금없이 물려준 후 뒤에서 왕을 배후조종한다는 게다. 이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일어난다. 이게 말이 되나? 그럴 거면, 선왕이 다시 왕에 올라 진두지휘할 일이지 웃기는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헌데, 이런 일이 고려에서 한번 있었다.

   

"고려 제 26대 왕(재위 : 1298 ; 1308~1313). 휘는 장(璋), 초휘는 원(願), 몽골의 휘는 이지르부카[益知禮普化], 자는 중앙(仲), 시호는 충선(忠宣). 충렬왕(忠烈王)의 장남. 어머니는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 공주(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 :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 1277년(충렬왕 3)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다음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원도(원도(元都) : 북경(北京))에서 혼사를 거행하였는데 앞서 서원후 영(西原候瑛)ㆍ홍문계(洪文系)ㆍ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은 내총(內寵)을 투기(妬忌) 하는 자(者)들의 소치(所致)라 하고 당시 부왕(부왕(父王) :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무비(무비(無比) : 백야단(伯也丹))와 그의 관련자인 여러 사람을 귀양, 혹은 죽이거나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 이양의 뜻을 원나라네 전하였다.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자 권문ㆍ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官制)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 공주와 왕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음모사건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ㆍ충선 양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 중상의 결과로 보겠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416

   

   

헌데,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쪽발왕에게 비일비재했다는 건, 그만큼 쪽발왕 실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왕위에 오른 왕이 젊은 나이에 하나같이 일찍 뒈지고, 상왕이 왕들을 여러 번 교체시키고, 그때마다 배후조종했다는 것이 이치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해서,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쪽발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는 이야기인 게다.

   

하면, 권력은? 당연히 막부에게 있었던 것이다. 선왕은 이미 뒈졌던 게다. 헌데, 기록에서 보면, 막부는 아무런 힘이 없는 듯이 보이고, 상왕이 일처리를 다 한 것처럼 나온다. 이 정도면 상왕이 정권 잡아서 막부에게도 대들만도 하건만^^! 하면? 무엇? 그렇다. 왕비의 수렴첨정인 게다. 이는 유럽, 중국,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왕비가 당대 막부 가문의 딸이라면!!! 이는 쪽바리가 조선을 강점한 후 조선 왕조에 행했던 것과 수법과 같은 게다. 조선 왕조에 쪽발이 왕비나 공주를 들이고 왕의 후예들을 수족으로 움직이려 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 몽골 역시도 고려 침략 시에 행했던 수법이기도 하다.

   

   

셋, 오늘날에도 여왕 문제가 이슈가 될 정도이다. 헌데, 이 시기에 여왕이 둘이나 등장한다. 대가 끊겨 양자를 들이고, 여왕을 모신다?

   

참고로 인드라는 여왕에 불만이 없다. 오히려 긍정적이다. 영국이나 네덜란드를 보면 여왕 재임 시에 국운이 크게 상승했다. 인드라는 신라 여왕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여왕 즉위시에는 당대 사회가 그만큼 위기라는 반증이다. 허나, 여왕 이후의 시대란 변혁의 시대여서 사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해서, 인드라는 한반도에도 하루바삐 여왕의 시대가 오길 고대하는 편이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 결론적으로 만세일계란 걸 잘 알 도리가 없고, 검증할 방법이 없는 고대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고대사 논란은 조선과 만주 침략을 위한 국유본의 명분 쌓기용이라고 보는 편이다. 국유본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이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사에서 고구려부터 논하기 시작하는 등 국유본 지시를 받아 만주 침략을 역사 조작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인드라는 현재 보고 있다.

   

해서, 고대사보다  무신 정권 시기 쪽발왕 기록을 검토하더라도 만세일계는 허구에 불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반도 쪽바리들이 하나같이 고대사에만 몰입하고 무신 정권 시기에는 침묵하다가 메이지 유신 때부터 쪽발왕을 언급하는 것은, 국유본에게 세뇌당했거나 알아서 기는 행태가 아닌가 보는 것이다.

   

캐병쉰새뀌들아! 잘 들어봐라. 영국왕이 독일에서 건너갔지? 오랜 옛날에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가기도 했지? 헌데, 그것이 지금 독일인과 무슨 상관이냐. 이런 것 좀 생각하면서 살자, 직전까지 쪽바리에게 세뇌될 뻔한 분들아~! 

   

왜 반도 쪽바리 사기꾼 자칭 재야 역사가 병쉰색희들은 막부 시대를 건너뛸까?

   

이 대목만 들입다파면 만세일계란 게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 수 있음에도 왜 침묵하는 것일까.

   

결론은, 오늘날 쪽발 정은과 비슷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쪽발 정은 권력이 강한 듯보인다. 중국도, 미국도 쪽발 정은 권력에 농락당하는 듯이 보인다. 허나, 이것이 바로 국유본의 눈속임인 게다. 실제 권력은 국유본이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스위스에 유학보내 국유본 세상을 보게 한 쪽발 정은을 내세우는 쪽바리 프로젝트인 게다. 가면 정권! 쪽발 정은 가면을 벗기면 권력의 실체, 국유본이 나온다.

   

그럼에도 오늘날 쪽바리 색희들, 쪽발민통당, 쪽발통진당, 쪽발찌라시들은 뭐라 하나? 그저 쪽발 정은이 신비롭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처럼 이 쪽바리 색희들은 쪽발 정은과 쪽발왕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왜? 신비로우니까. 씨발 색희들, 네 넘들 꿈 속에서 쪽발민통당 이미경 애비처럼 일제 헌병인 놈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이 네 넘들을 백만 배로 고문할 것이다.  

   

- 쪽바리 니 애비가 대대로 대한민국을 망치라고 밥상물림 교육을 시키든? 개쪽바리 색희들아!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하면, 쪽바리 프로젝트란 국유본의 항상적인 프로그램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국유본이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정책을 결정한 뒤부터 쪽바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해서, 국유본은 러일전쟁 막후에서 일본을 미친 듯이 지원하고, 조선 강점을 획책했던 것이다.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라고 본다. 인드라는 31운동 배후에도 국유본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이 시기부터 국유본이 일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이 시기부터 태평양 전쟁을 위한 떡고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후, 625 전쟁으로 다시 국유본은 일본을 찾는다. 625 전쟁 전까지 일본 경제는 말 그대로 남한 경제와 같았다. 망했던 것이다. 독일처럼 마셜자금도 없었다. 헌데, 쪽발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한 방에 경제 회복의 토대를 닦았으니 일본으로서는 애비가 쪽발이인 김일성이 대를 이어 쪽발왕에게 충성한다고 기특하게 여길 것이다.

   

아, 캐병쉰 색끼, 김일성, 통일되어 네 놈 미이라를 볼 수 있다면, 니 넘 좆을 엿가락처럼 늘여뜨려서 대한민국 시민 모두가 그 좆을 다 가위로 짤라버리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는 행사를 가질 것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저주한다, 쪽발 김일성! 네 놈의 후손이란 남김없이 구족을 멸할 것이니!

   

허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쪽바리 프로젝트는 중단한 듯이 보였다.

   

박정희는 쪽바리를 부를 때 반드시 왜넘이라고 했다. 또한, 한국에 두 혁명이 있었으니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행한 동학 혁명이요, 이것이 정신 혁명이라면, 자신의 혁명, 516 혁명은, 쪽바리에 대항한 경제 혁명이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오늘날 도요타 리콜, 올림푸스 분식회계, 엘피다 파산, 혼다 리콜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 기업들이 선전하는 것을 보면서 국립묘지에 있는 박정희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 같다. 반면, 쪽발 일성과 쪽발 정일, 쪽발 돼중과 쪽발 놈현은 쪽발이들과 동병상련이 되어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지금도 니 애비가 쪽바리인 색희들이 날뛰고 있다.

   

부디 전두환 개색희랑 김영삼 씹색희가 개과천선에서 죽기 전에 사람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두환이나 김영삼 개색희들이 쪽발 돼중이나 쪽발 놈현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나. 개새끼들.

   

중요한 건, 국유본이다. 결국 쪽바리 프로젝트를 중지하는가, 작동하는가는 국유본이지, 쪽발이에게는 권한이 없다. 예서, 아무리 쪽바리 욕한다고 해봐야 감정 해소 차원밖에 안 되는 소모적인 일일 수 있다.

   

해서, 국유본에게 쪽바리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프로젝트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국유본은 국유본 언론을 통해 중국 문제를 연이어 거론하면서 중국이냐, 미워도 쪽발이냐 하는 식으로 여론 몰이를 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중국이든, 쪽바리든, 배후에는 국유본이다. 쪽발 정은 미사일 기술과 자금 누가 대주나? 국유본이다.

   

해서, 국유본이 지금 쪽바리 프로젝트에 많이 공을 들였는데, 이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국유본은 쪽바리를 시켜 동아시아 역사를 재구성하도록 지시했는가.

   

이는 지금까지 인월리를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지금도 쪽바리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있는가.

   

해양을 통해 대륙을 봉쇄하는 전략이다.

   

허나, 실제로는 대륙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중국을 발전시킬 것이다.

   

단, 중국을 지속적으로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는 떡밥이 필요한데, 그것이 한반도인 게다.

   

해서, 길은 네 가지다.

   

하나, 한반도가 이왕 떡밥이라면 보다 큰 떡밥이 되어야 한다는 게다.

   

둘, 한반도가 떡밥에서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이러자면, 일본이 침몰하는 대신 한국이 그간 일본이 맡았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 한국인이 주동하여 능동적으로 아시아 연방에 나서는 길이다.

   

넷, 전략전술 닥치고 그냥 국유본에 들입다 반대하면 된다.

   

인드라는 현재 입장에서 첫번째와 네번째에 부정적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를 한류천하 프로젝트라고 규정한다.

   

   

에이쿄 1년 3월 9일 미나모토노 요시노부는 궁에서 존경받았고 그후 그는 쇼군 아사카가 요시노리라 알려졌다.

에이쿄 5년 6월(1433)중국의 황제가 요시노리에게 중국인들이 쇼군에게 일본왕이라는 직위를 주는 서한을 보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D%95%98%EB%82%98%EC%A1%B0%EB%85%B8_%EC%B2%9C%ED%99%A9

   

그의 즉위 직후에 오닌의 난이 발발하였다. 사원, 신사, 그리고 왕실 가족들의 저택이 불타 버렸다. 황실의 재정은 말라 버렸고 황궁은 쇠퇴하였다. 전임 천황 고코마쓰 천황이 1433년 죽을 때까지 고하나조노는 다애리의 전직 수장의 직책을 지녔다. 왕궁의 실제 권력은 그의 숙부에의해 전횡되었다. 그는 사원 섭정으로 알려진 관행을 계속하였다. 이후 고하나조노는 천황 직접 통치를 그의 양위 시까지 30년간 즐겼다. 그리고 그후 섭정 천황 간접 통치의 전통적인 형태가 다시 회복되었다. 고쓰치미카도의 치세의 연장된 지속은 36년 2개월간 계속되었고 메이지 천황 이전의 역사적인 기간에 어떤 주권보다 길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황궁의 고대 의식을 회복하려는 열의는 없었다.

1500년 10월 21일 천황이 사망하였다. 그의 계승자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장례식을 위한 자금이 부족하였고 죽은 천황의 시신은 수개월간 황실 창고에 방치되었다가 황궁으로 기부가 있은 후에 장례가 관찰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93%B0%EC%B9%98%EB%AF%B8%EC%B9%B4%EB%8F%84_%EC%B2%9C%ED%99%A9

   

그의 치세는 아시카가 쇼군 시대의 황실 권위의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다이에이 5년 1월 1일(1525) 왕궁의 모든 기념식이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원할 자금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B9%B4%EC%8B%9C%EC%99%80%EB%B0%94%EB%9D%BC_%EC%B2%9C%ED%99%A9

   

황궁은 매우 빈곤하였기 때문에 기여를 위한 전국적인 호소가 나갔다. 호조씨, 우치씨, 이마가와씨 그리고 센고쿠 시대의 다른 다이묘 씨족으로 부터의 기여 덕분에 천황은 10년후 공식적인 대관식을 수행할 수 있었다. 황실의 가난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천황은 그의 글을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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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일본 천황구게들은 이미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상태로, 오기마치 천황은 센고쿠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가 금을 헌상할 때까지 3년 동안 즉위식도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98%A4%EA%B8%B0%EB%A7%88%EC%B9%98_%EC%B2%9C%ED%99%A9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 후양성 천황)은 일본의 107대 천황(1571년 12월 31일 ~ 1617년 9월 25일, 제위 : 1586.12.17~1611.5.9)이었다. 고요제이 천황의 치세기간 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1592) 이때 고요제이는 거의 허수아비 상태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9A%94%EC%A0%9C%EC%9D%B4_%EC%B2%9C%ED%99%A9

   

1596년 고요제이 천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611년 (게이초 16년) 아버지에게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중 공가중제법도(1613년 제정), 금중병공가제법도(1615년 제정) 등이 제정되어 조정의 행동 전반이 쿄토에 설치된 쇼시다이(所司代)를 통해서 막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가즈코와의 약혼기간 중 궁녀 요쓰쓰지 요쓰코를 총애하여 남매를 두었던 일이 발각되어, 한때 가즈코의 입궁 취소가 고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쓰코 모자의 출궁 및 관련자 처벌 등으로 사과가 받아들여져 겐나 6년(1620년)에 도쿠가와 가즈코가 입궁, 마사코로 개명하고 후궁이 된다. 1627년 자의 사건, 아무런 품계도 없던 가스가노 쓰보네의 천황 배알 등으로 천황의 권위를 실추시킨 막부의 행동을 참지 못한 천황은 1629년 11월 8일, 둘째 딸 오키코 내친왕(후의 메이쇼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양위 이후에도 4명의 자식인 메이쇼 천황, 고코묘 천황, 고사이 천황, 레이겐 천황의 섭정을 맡아 실권을 휘둘렀지만, 도후쿠몬인이 천황의 뒤에서 이를 옹호했기 때문에 막부 역시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AF%B8%EC%A6%88%EB%85%B8%EC%98%A4_%EC%B2%9C%ED%99%A9

   

메이쇼 천황 (明正天皇, 명정 천황, 1624년-1696년)은 일본의 제109대 천황 (재위 1629년-1643년)이다.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외손녀이다.

   

쇼토쿠 천황 이래 859년만의 여성천황으로 7세의 나이로 즉위, 치세중에는 아버지 고미즈노오 천황의 섭정을 받아 조정에서의 실권은 가질 수 없었다. 1643년 {겐나 20년) 이복남동생 고코묘 천황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상황이 되어 출가. 1696년 (겐로쿠 9년)에 사망. 향년 74세.

http://ko.wikipedia.org/wiki/%EB%A9%94%EC%9D%B4%EC%87%BC_%EC%B2%9C%ED%99%A9

   

1642년 (간에이 19년)에 태자로 임명되어, 11세의 나이로 메이쇼 천황의 양위를 받아 천황위에 올랐다. 1654년 (조오 3년), 천연두로 인해 22세에 사망.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망 전해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대신들과 막내 아우인 아테노미야(高貴宮: 훗날의 레이겐 천황)를 양자로 삼는 것을 상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BD%94%EB%AC%98_%EC%B2%9C%ED%99%A9

   

고사쿠라마치 천황(後桜町天皇, 후앵정 천황, 1740년-1813년)은 일본의 제117대 천황(재위 1762년-1770년)이다. 현재는 일본의 마지막 여자 천황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조선 통신사(1764년)가 교토를 경유하던 시기의 천황이었다. 제115대 천황인 사쿠라마치 천황의 제2황녀이다. 어머니는 니조 요시타다의 딸로 사쿠라마치 천황의 여어인 니조 이에코이다. 언니는 모리코 내친왕(盛子親王)이며, 어머니가 다른 동생으로 제116대 천황인 모모조노 천황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82%AC%EC%BF%A0%EB%9D%BC%EB%A7%88%EC%B9%98_%EC%B2%9C%ED%99%A9

   

고모모조노 천황(일본어: 後桃園天皇, 후도원 천황, 1758년 8월 5일 ~ 1779년 12월 16일)은 일본의 제118대 천황(1771년 5월 23일 ~ 1779년 12월 16일)이다. 이름은 히데히토(英仁)였다. 17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2년 후에 1771년 그의 고모인 고사쿠라마치 천황이 그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몸이 허약했던 탓에 1779년에 2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딸 한명을 낳았을 뿐 아들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여 고카쿠 천황이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AA%A8%EB%AA%A8%EC%A1%B0%EB%85%B8_%EC%B2%9C%ED%99%A9

   

고카쿠 천황(일본어: 光格天皇 (こうかくてんのう) 고카쿠덴노[*], 광격 천황, 1771년~1817년 3월 22일)은 제119대 일본 천황이다. 그는 1780년에서 181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휘(諱)는 처음에는 모로히토(師仁)였고, 후에 도모히토(兼仁)로 고쳤다. 어릴적 명칭은 사치노미야(祐宮)였다. 그는 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閑院宮典仁親王)의 6번째 아들로 히가시야마 천황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오에 이와시로(大江磐代)이다. 안에이 8년 11월 8일(1779년 12월 15일)에 위독한 상태였던 고모모조노 천황의 양자가 되어 황태자로 정해졌다. (실제로는 고모모조노 천황은 이미 붕어한 상태였고, 황위가 공석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붕어를 발표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B9%B4%EC%BF%A0_%EC%B2%9C%ED%99%A9

   

원래 천황은 외래의 것을 배척하고 개국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막부쪽에서 미·일 수호 통상조약의 칙허를 요구하였을 때 이를 거절하였고, 훗날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이를 강제로 추진함으로써 막부와 궁정쪽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이에 황실과 막부를 통합하려는 공무합체 운동이 일어나 로주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및 여러 친막부파 공경들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和宮親子親王)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원래 천황은 이 결혼에 반대했으나 친막부파 공경들의 설득으로 결국 혼인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이에모치의 요절로 4년 만에 종료되었고, 막부와 존왕양이파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하여 황국주의가 자리잡아 독살설은 일본 사회에서 금기가 되었지만 안중근(安重根)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하라구치 기요시가 간호기록 등을 토대로 천연두에 의해 자연사했다고 주장하여 두 주장이 크게 맞서게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A9%94%EC%9D%B4_%EC%B2%9C%ED%99%A9

   

국제유태자본과 쪽바리 프로젝트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16 02:30

http://blog.naver.com/miavenus/7013381569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1 : 국제유태자본과 쪽바리 프로젝트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16

   

   

귀곡자 :

   

로스차일드가 워털루 전쟁 이후 발휘한 역할과 기능을 대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위의 인드라 님의 글과 연결되어 로스차일드를 막연하게 인식하는 많은 분들을 위해 올려드립니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금본위제를 통해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워털루 전쟁(1815년) 이후 1914년까지 서방세계가 백년평화를 누린 것은 로스차일드의 막후 활동 덕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그 반대급부로서 식민지 시대가 본격화된 것입니다. <거대한 전환>에서의 폴라니의 글입니다:

   

"19세기 국제 은행의 성격에 대한 전면적인 탐구는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이 신비로운 제도의 정체는 여전히 단조로운 흑백의 정치 경제의 신화 속에 깊이 묻혀 있는 상태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각국 정부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오히려 각국 정부들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끝없는 이윤의 갈망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국제적 분쟁의 씨앗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강건한 나라들의 전투력을 좀먹는 나약한 국제주의의 도구였다고 주장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었다. 오트 피낭스라는 이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는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과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기간에만 고유하게 나타났던 것으로서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 사회를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 고리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국제 평화 체제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여러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니, 비록 국제 평화 체제는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지만 강대국들 스스로는 그 평화 체제를 확립할 수도 없었고 또 유지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유럽 협조 체제는 그저 가끔 한번씩 작동하는 것인 반면, 이 오트 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기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가장 강력한 정부조차도 이것의 독립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므로 이것은 결국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 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다. 잉글랜드 은행(The Bank of England)을 포함한 그 어떤 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었으며 한편 이것은 또 그 모든 중앙은행들과 긴밀한 관련을 맞고 있었다. 금융과 외교 사회에는 긴밀한 연관이 존재했으니, 이 둘 중 어느 쪽도 다른 쪽  호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평화 쪽이든 전쟁 쪽이든 장기적 계획을 구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 평화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 국제 금융의 입장, 조직, 그리고 각종 기법들 쪽에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독특한 조직은 구성원으로 보나 행동의 동기로 보나, 철저한 영리 이익이라는 사적 이해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은 어느 한 정부에 종속되는 법이 없었다. 이 가문의 여러 가족은 서로 다른 나라로 퍼져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가문으로는 국제주의라는 추상적 원칙을 몸소 체현하는 것이었다. 이 여러 가족의 충성을 한 몸에 지닌 단일한 기업으로서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야말로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 활동을 정치 영역의 정부와 잇는 유일의 초국가적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면,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수많은 전쟁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한 자들이며, 도덕적인 고민 따위에는 전혀 무감각하고, 전쟁이 아무리 많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규모나 기간이 대단치 않고 또 국지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눈 하나 깜빡 않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 이익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적 논리에 의하여, 전 지구의 모든 민족들을 휘말아 넣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적인 평화를 유지한다는 필요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업이 그들의 어깨 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인드라 :

   

귀한 말씀 고맙다.

   

인드라는 국유본론을 통하여 국사 혹은 한국사를 전공하더라도 이제는 국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 취급당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조선 중후기서부터 해방,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그 아무리 폐쇄적인 국가였다고 하더라도 한국사는 한반도에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세계와 함께 움직인 역사였기에 이제는 세계사의 한 축인 한국사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한국 정치나 한국 경제는 세계와 함께 움직이니까. 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국제유태자본론을 공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근대 유럽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근대 유럽 역사로 인하여 동아시아 역사가 변화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마치 오늘날 유럽 재정 위기가 대한민국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 이제야말로 가짜 역사 의식으로

자신은 물론 한민족과 인류에게 죄를 짓기보다

역사 의식을 갖추고 세상을 직시할 때다.

   

왜 나가사끼스런 쪽바리 색희들이 오늘날 날뛰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간단한 예를 들자.

   

인구를 보자.  

   

   

http://cafe.naver.com/historygall.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623

   

   

토니 미첼 학자 주장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분석 자료에 보면, 대체로 1900년대 조선 인구는 천 만 명에서 천 이백만 명 수준이었다.

   

   

http://cafe.naver.com/sam10.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62056&

   

   

예서, 한국인이 일제 강점 시기에 천여만 명 정도에서 이천여만 명으로 늘었으니 쪽발 노빠 이미경스런 씹색희들이 조선시대보다 더 정치를 잘 했다느니 세계에서 가장 존경스런 인간, 쪽발 놈현 운운하는 식의 개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표현을 은근 조중동이 원하고 있기도 하다. 왜냐? 조중동이 국유본 지시를 받아 쪽발 놈현을 키웠으니까. 멘탈 붕괴된 색희들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요즘 조중동 봐라. 쪽발 놈현 칭찬하는 기사밖에 없다. 쪽발 노빠 씹색희들아, 쪽발 놈현 정신을 제대로 살펴라! 라는 게 조중동 말씀 아니겠냐? 사실 조중동 말이 99% 맞는 소리다. 쪽발왕에게 빠져 오직 나라 망치는 일에만 골몰하는 고기준 같은 구족을 멸할 병쉰색희들아!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61016911&qb=MTkwMOuFhCDshLjqs4Qg7J246rWs&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1&pid=g24i%2Bc5Y7tNsstlF5rRssc--108589&sid=T2IYpfMDYk8AABupC1Q

   

   

허나, 사정은 다르다. 조선만 딱 떼어놓고 보니 그럴 듯하지만, 당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른 지표 볼 것 없다. 아프리카가 착취당한 역사를 알 것이다. 그런 아프리카가 정체 상태를 보이다가 1900년대부터 인구 증가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말부터 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가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초반까지 국유본은 아프리카나 아시아나 그 어디에서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적 식민 경영을 하지 않았다. 과거 초기 카르타고인처럼 식민지 경영에는 지출을 상당폭 감수해야 하기에 식민지 경영보다는 동인도 회사 식의 지점 운영이었다. 이를 테면, 무역 독점권으로 실속만 챙기는 것이었다.

   

국유본은 왜 정책을 제국주의로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나?

   

하나, 중국이 아편 수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둘,  국유본이 해상을 장악하였으되 육상을 지배하지 못해 중국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의 전투 패배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고자 세계 각국에 주둔시킬 육상 용병을 필요로 했기에.

   

셋, 국유본이 유럽 대륙 전쟁을 부추겨 재미를 보다 1871년 파리콤뮨으로 더 전쟁을 조장하다가는 국유본에 적대할 수 있다고 보아 화전민 농법 식으로 유럽을 휴식시키고 전 세계로 전쟁터를 넓혔기 때문에.  

   

결국 국유본의 인위적인 정책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을 뿐이다.

   

국유본의 제국주의 이전과 이후로 비유하면?

   

제국주의 이전 인민은 야만 짐승이었다.

허나, 제국주의 이후 인민은 가축이었다.

   

오늘날 가축 품종 개량하는 이유가 뭔가.

키워 잡아먹기 위함이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는가.

   

쪽빨 노빠 가축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쪽발 노빠 노예 근성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더 흥미로운 대목은, 아시아와 유럽 추이이다.

   

1750년대와 1999년을 비교하면 세계와 아시아와 유럽은 각각 7배 정도 인구가 늘었다. (유럽인이 북미 이주가 많아 다른 지역으로의 유럽인 이주를 북미 이주로 포함시키고 북미인에서 유색인종을 뺀 북미 인구를 유럽인구와 합치는 조건임.)

   

더 나아가 2050년에 이르면, 아프리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다. 해서, 2050년에 이르르면, 유럽과 아시아에 이어 아프리카가 지금과 달리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전제하고,

   

칼 폴라니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칼 폴라니의 이야기에는 78%의 진실이 있다고 보기에. 해서, 칼 폴라니를 맑스를 대신하는 국유본 학자라고 비판하기 보다는 오늘날 칼 폴라니의 역할을 인정하고, 칼 폴라니의 한계를 짚어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단, 칼 폴라니와 관련해서는 이 글에서는 직접적으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칼 폴라니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으로 좀 더 미루어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보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유태인 세계 경영에 관해서이다.

   

대체 유태인이,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족속들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믿을 수가 없다는 의견에 대해 국유본론이 답변하는 것이다.

   

   

   

   

   

"예서, 봅시다. 전후 유태인 인구는 유럽에서 가장 안전하고 로스차일드가 살던 영국에서조차도 삼십오만명에 불과합니다. 당시 영국 인구는 사천칠백여만명. 유태인 인구는 영국 전체 인구의 1%가 안 됩니다. 영국도 이러니 다른 유럽 국가는 더 하겠지요? 그렇다면, 독일은? 육천육백여만명 중 유태인은 팔만 오천명. 0.01%에 육박하는군요. 이차대전 때 모두 학살되어서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허나, 서유럽 지역들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각국에서 유태인 비율이 차지하는 것은 대체로 0.3~0.5% 사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영국처럼 유태인 중심도 아니면서 유럽 대륙에서처럼 박해를 받지 않은 아일랜드 지역을 고려했을 때 말입니다.

   

해서, 프랑크푸르트 공국이 삼십여만명이라면, 이 지역에서 살았던 유태인 수는 많게는 1%인 삼천여명에서 적게는 0.3%인 천여명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데, 유럽에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특정 동네를 천여 명의 동네로 만들었다면, 아파트도 아닌 만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03966544

   

   

 이차대전 직후 영국 유태인 인구는 영국 인구의 1%도 안 되는 삼십 오만 명이었다. 예서, 누군가는 0.1%와 0.9%와 99%로 분류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http://blog.naver.com/eyeontop/90134682610

   

시골의사 박경철이 제레미 리프킨은 0.1%의 창의적 인간과 그것을 알아보고 협력하고 함께 문명을 건설한 0.9% 안목 있는 인간 즉 1%의 인간이 문명을 이끌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을 잉여인간이라고 규정했다고 인용한 것이다.

   

허나, 제레미 리프킨이 정말 그런 말을 하였는지를 출처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박경철과 출판사는 옹색한 답변만을 할 뿐이었다.

   

인드라는 시골의사 박경철이 무엇을 인용했는지 관심이 없다. 어차피 시골의사 박경철이나 안철수 자체에 회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유본이 박경철이나 안철수를 지나치게 뻥튀기했다는 것이 인드라 판단이다. 적당히 뻥튀기했으면 봐줄만 했는데. 해서, 그간 인드라가 안철수를 가급적 높이 평가해왔잖은가?

   

   

http://cafe.naver.com/worldrank.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5794&

   

78 : 22 법칙을 적용해보자.

   

22 중 22%는 4.84이다. 이런 식으로 22%의 22%로 계속 가보자.

   

22, 4.84, 1.0648, 0.234256, 0.05153632, 0.0113379904가 나온다.

   

해서, 78 : 22로 현재 인구를 분류해보자.

   

2009년 기준 세대별 한국인 수

   

   

   

  

 세대(27세)

 서울

 한국

 한반도

 아시아

 세계

 최대인구

 유태인

 100%

 700,000

 10,000,000

 50,000,000

 70,000,000

 4,000,000,000

 7,000,000,000

 15,000,000,000

 14,000,000

 22%

 154,000

2,200,000

11,000,000

15,400,000

880,000,000

 1,540,000,000

 3,300,000,000

 3,080,000

 4.84%

 33,880

484,000

2,420,000

3,388,000

193,600,000

 338,800,000

 726,000,000

 677,600

 1.064,8%

 7,454

106,480

532,400

745,360

42,592,000

 74,536,000

 159,720,000

 149,072

 0.234,256%

 1,640

23,426

117,128

163,979

937,024

 16,397,920

 35,138,400

 32,796

 0.051,536%

 361

5,154

25,768

36,075

206,145

 3,607,542

 7,730,448

 7,215

 0.011,338%

 79

1,134

5,669

7,937

453,52

 793,659

 1,700,699

 1,587

 0.002,494%

 17

249

1,247

1,746

9,977

 174,461

 374,154

 349

 0.000,549%

 4

55

274

384

2,195

 38,413

 82,314

 77

 0.000,121%

 1

12

48

85

483

 8,451

 18,109

 17

 0.000,027%

  

3

11

19

106

 1,859

 3,984

 4

 0.000,001%

  

1

2

4

23

 409

 876

 1

 13

  

  

1

1

5

 90

 193

  

 14

  

  

  

  

1

 20

 42

  

 15

  

  

  

  

  

 4

 9

  

 16

  

  

  

  

  

 1

 2

  

 17

  

  

  

  

  

  

 1

  

 18

  

  

  

  

  

  

  

  

 19

  

  

  

  

  

  

  

  

   

   

인드라가 기억하기에 2001년 전 세계 유태인 수는 1,400만이다. 2001년 세계 인구를 60억으로 본다면, 0.23%이다. 세계 인구 대비 5단계이다.

   

헌데, 인드라가 강조하길, 유태인에게도 계급이 있다고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귀족 유태인이 있다. 반면, 이들 귀족 유태인과 다른 천민 유태인이 있다. 귀족 유태인과 천민 유태인 비율이 19세기 영국에서 1 : 9 정도였다. 인드라가 오늘날 추정하기로는 전 세계 유태인 인구 중  오십만 명에서 백만 명 정도만이 성골이고, 나머지는 진골 혹은 육두품으로 보고 있다.

   

예서, 귀족 유태인은 스페인 궁정유태인으로 활약하다가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을 말한다. 반면, 천민 유태인은 러시아, 폴란드에서 살다가 홀로코스트도 당하고, 미국 등지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뉴욕에서 택시운전사 따위하면서 비참하게 사는 족속을 말한다.

   

   

정리하자.

   

인드라가 박경철 식 발언을 재구성한다면, 0.1%가 아니라 0.01%였을 것이다.

   

0.01%의 창의적 인간과 그것을 알아보고 협력하고 함께 문명을 건설한 0.09% 안목 있는 인간을 합한 0.1%의 인간이 문명을 이끌었고 나머지 99.9%의 인간은 잉여인간이다.

   

하면, 왜 0.1%였을까.

   

인드라 생각에 DNA 연구와 관계가 깊은 것 같다.

   

"조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DNA상의 0.1%의 차이점을 열심히 연구했는데, 오랜 시간 동안 유전 암호가 축적된 A·C·G·T 염기 배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것들을 '표지'라고 부릅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289

   

"영국 뉴캐슬 대학 존 번 교수는 암소의 난소에서 난자를 추출한 뒤 사람의 유전자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이종 배아 배양에 성공했다. 이 배아는 사흘간 생존했다. 그는 다음 실험에선 엿새 이상 성장시킨 뒤 줄기세포를 추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에 배양한 배아는 인간 유전자 99.9%와 소 유전자 0.01%로 돼 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403015007

인종이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개인차가 나타나는 것이 0.1% 차이라는 것이다.

   

허나, 인드라가 강조했다.

   

국유본 기본이 열 배 뻥튀기라고.

그래도 1% 운운하고 99% 운운해야 희망이 생긴다.

헌데, 0.01%와 0.1% 말해봐라.

의욕이 생기나.

   

근대사만 보면, 천재적인 귀족 유태인 0.01%가 천민 유태인 0.09%, 혹은 천민 유태인과 유사한 천민 프리메이슨을 이용해서 세상을 지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해서, 인드라는 상기한 유전자 프로젝트의 숨은 비밀이란 0.1%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0.01%의 비밀을 찾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언젠가 인터넷으로 교류한 미국 생물학자에 따르면, 오늘날 행해지는 상당수 생물학 프로젝트가 사실상 우생학이나 다름 없다고 알려준 바 있다. 

   

해서, 유전자를 통한 인류 기원 찾기 프로젝트에도 우생학적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0.01%를 찾는 데에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당 백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허나, 국유본 관점에서는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오백 만이다.

   

1900년 무렵에 300인위원회가 등장했다.

이 시기 세계 인구는 15억이다.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오백 만이다.

   

오늘날에도 이 의미는 중요하다.

   

비록 오늘날 국제유태자본 권력이 비유태인인 록펠러에게 넘어갔다 하더라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배했던 방식을 더더욱 발전시켰으면 시켰지, 후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당 오백 만을 맡았던 유태인 상당수가 낙오했고,

그 자리를 지금 록펠러 계열이 입성하는 과정인 게다.

   

나아가 오늘날 정보통신발달로 인하여 일당 오백 만이 아니라 일당 천 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까지 전제한 후,

인드라는 현재 국유본 핵심 인물을 몇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가.

   

   

60만 명에서 80만 명 사이로 보고 있다.

오십만 명에서 백 만 명 사이라고 했지만,

정규분포상 확율 낮은 좌우 십 만씩 떼내고,

몇 가지 고려상

60만 명에서 80만 명 사이라고 보는 것이다.

   

추정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하나, 19세기를 지배했던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귀족 유태인 수는 세계인구 대비 0.01%였다.

   

둘, 영란은행 지폐발행 비용이 0.01%이다.

   

셋, 세계의 부 99%는 인류 역사의 0.01%에 해당하는 지난 이백년 동안 달성되었다.

   

넷,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3년 존재했던 5만 6472개의 기업 중 10년 생존율이 고작 25.3%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300인 이상의 업체로 성장한 기업은 75개(0.13%), 500인 이상으로 성장한 기업은 8개(0.01%) 기업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설립하여 10년 동안 생존하고, 임직원 500인 이상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확률이 '10,000'개의 기업 중에 '1' 이라는 것이다.

   

다섯, 부품 불량률을 0.01% 이내로 떨어뜨리는 것이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는 제조업체의 목표이다.

   

여섯, 완보 동물은 극한에 처하면 0.01% 이내로 신진대사율을 낮추어 생존을 모색한다. 인간은 지구상 물의 0.01%만을 지표수로 사용할 수 있다.

     

일곱,  서기 1400년도에 책의 저자 수는 전체 인구의 0.000001%밖에 되지 않았다 한다. 그 후 저자의 수는 매 세기당 10배씩 증가하여 서기 2000년에 약 백만 명, 즉 0.01%에 도달했다고 한다. 저자 수는 특히 1500년경 아메리카의 발견과 개신교로 인한 성서의 발간으로 폭등하였으며, 1800년경 산업혁명으로 다시 한번 폭등하였다 한다. 하지만 2009년 현재 저자의 수는 불과 9년 만에 10배 증가하여 0.1%(70억 인구 중 약 천만 명)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100명 이상이 읽은 글을 쓴 사람들로 간주하였을 경우다. 인터넷으로 가속화된 결과다.

   

예서, 앞으로 더 늘어난다고 가정할 수 있으나, 인드라는 회의적이다. 저자 수는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본다. 저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다만, 늘어나는 것은 백 명이 아니라 천 명 이하가 글을 읽는 저자들이 늘어날 뿐이다. 해서, 천 명 이상이 읽는 글을 쓰는 저자들은 현재 인원을 유지할 것으로 본다.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카페나 게시판에서 글을 올릴 때마다 천 회 이상을 조회해주어야 네임드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던가. 문피아든, 조아라든 조회수가 최소한 천회가 넘어야 하지 않겠나. 블로그나 트위터나 어디이건 이웃이 적어도 천 명이 넘어야 저자 대접을 받는다.

   

이들 요인들 공통 분모가 무엇일까.

   

다른 것 없다. 생존 조건이다.

   

인류의 0.01%라면 대멸종 상황에서도 노아처럼 살아남을 듯싶은 것이다.

   

   

하면, 육십만에서 팔십만으로 추정되는 국유본 내부 구조는 어떠할까.

   

이를 위한 효과적인 모델이 27세 한국인 모델이라고 인드라는 본다.

   

국유본 핵심 구조는 10단계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이중 상위 4단계인 1 - 4 - 17 - 79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본다. 이는  1 - 3 - 15 - 66으로 대체할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상을 할 수 있다.

   

1인 : 록펠러

   

3인 : 국유본 3대 분파 : 데이비드 록펠러, 제이 록펠러, 로스차일드

   

15인 : 미국, 북중미, 영국, 독일, 프랑스, 서유럽,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일본, 중국, 한국과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인도 및 남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중동  

   

66인 : 정치, 경제, 종교(과학)를 각각 담당하는 삼대 분파 20인과 분파 책임자와 부책임자

   

예까지 국유본 핵심 조직이라면,

   

300 - 1364 - 6198 - 28174 - 128065 - 582113

   

300인 : 미국/아메리카 - 아시아/오세아니아 - 유럽/아프리카에 각각 100인

   

부문과 지역을 교차시키는 3단계 방식으로 육십만명선을 만든다.

   

하고, 이들 외피를 두를 천 만 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고려해서, 한국에 300위원회급 국유본 핵심 인물을 본다면, 기껏해야 세 명 정도이지 않겠나 싶다. 한국 영토, 인구,경제력을 검토하면 1% 정도의 지분율을 인정할 수 있으니 300인의 1%는 세 명. 해서, 정몽준, 쪽발 정은, 아건희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이러한 추정은 인드라가 망상을 겸해서 슬쩍 국유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니 괘념치 마시라~! 상상만 해보자는 것이다.

   

사실 인드라가 국유본 내부 핵심 구조를 알면, 지금 인드라가 인터넷할까.

   

인드라가 비록 국유본 간첩이 아니더라도 78% 정도 그럴 듯한 부분만 취하는 것이 글읽는 분들의 의무일 터^^!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하면, 인드라는 왜 이런 구상을 한 것일까. 존재와 사유의 통일인 게다. 실천을 위함이다. 인드라가 왜 서론 격으로 쪽바리를 말했을까.

   

인드라는 국유본 핵심 세력이 한국에서 쪽바리를 축출하고 한반도 독자 세력을 구축했으면 싶고, 지금까지 한반도 책임자가 중국이나 일본 중심이었다면, 이 기회에 한국 중심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드라가 지금까지 보기에 삼대 분파에서 한국 중심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허나, 지역 책임자가 나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역 책임자는 지역에 자부심을 주기 마련이다. 허나, 한국이 돌아가는 현황을 보면, 분열만 획책하지, 통일로의 과정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한국이 국유본 관점에서 변방에 속하기 때문이다. 해서,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국유본의 쪽바리 프로젝트를 중단시켜야 한다. 현재 인드라가 보기에 분파적 차원에서는 쪽바리 프로젝트 대신 한류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지역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쪽바리 프로젝트가 쓸 데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보인다. 쪽바리 프로젝트가 작동하다 보니 한반도 통일이 지지부진하다고 보고 있다. 

   

해서, 쪽바리 프로젝트를 중지시켜야 한반도 통일이 온다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 정은에게 총살을!

   

해서, 인드라가 노력할 것이다.

   

한반도 지역이 국유본 주요 관심사가 되고,  

세계사의 주요 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국유본이 브레진스키 리포트보다 인드라 리포트를 더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힘차게 삼삼칠 격려 박수를!!!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 정은에게 총살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당신의 지인은 왜 국유본론에 부정적인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14 01:34

http://blog.naver.com/miavenus/70133665873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0  : 당신의 지인은 왜 국유본론에 부정적인가?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14

   

   

세상은 요지경 :

제 주위에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술자리에서 국유본 얘기하면 4차원 소릴 듣습니다.

왜 이런 걸까요? 참 답답합니다.

   

   

인드라 :

   

번개를 하면 꼭 한 분 이상 말씀하시는 단골 질문이다.

온라인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질문을 주시는 레파토리이다.

해서, 그때마다 답변드리고, 번개 때도 말한다.

인월리에서도 쓴 바 있다.

허나,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다시 정리하기로 하자.

   

왜 사람들은 국제유태자본론을 말하면 대부분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미쳤다고 생각할까.

   

침묵의 나선이론/다원적 무지론

http://blog.naver.com/poverina?Redirect=Log&logNo=40007024396

   

침묵의 나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소수설보다는 다수설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왜일까. 인간은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원시 시대 오랜 기간에 걸쳐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인간의 나약한 신체 조건 때문에 부족과 떨어져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이었다. 또한, 부족내 갈등이나 부족간 전쟁 등은 대부분 다수파가 승리하니 소수파가 된다는 것 역시 죽음이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소수파가 되면 죽는다는 기억이 인간 두뇌에 각인되었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다원적 무지론이다. 다원적 무지론에 의하면, 자신이 설사 소수설을 믿고 있더라도 대다수가 다수설을 따르면 겉으로 다수설이 옳다고 말한다.

   

   

EBS 실험

   

국제유태자본론은 다수설이 아니다.

   

하면, 인간 다수가 생존 때문에 다수설을 따르더라도 소수는 소수설을 따르거나 내놓고 따르지 않더라도 소수설을 지지할 수 있잖은가.

   

인식적 한계가 있다.

   

제3자이론

http://blog.naver.com/naughtymong/40060115223

   

제 3자 이론에 따르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게 된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때,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병 속의 파리' 신세일 뿐이다. 해서, 병 속의 파리 둘이 있다 하자. 하나는 신의 존재 증명을 하려는 신학자 파리이다. 다른 하나는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는 철학자 파리이다. 허나, 둘 다 파리일 따름이고, 병 바깥으로 나온 파리가 아닌 한, 둘은 하나마나한 논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둘, 인간은 개인차가 있다.

   

예를 들면, 78%와 21%와 0.9%와 0.09%와 0.01%는 다르다. 해서, 인간은 자신보다 상위 인간을 만나면 신적인 취급을 하기 마련이요, 자신보다 하위 인간을 만나면 인간 이하 취급을 하기 마련이다.

   

예서, 신과 '신적인 것'과의 차이가 발생한다. 신과 달리 '신적인 것'은 머리가 좋거나 힘 센 인간일 수도 있고, 백두산 호랑이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

   

   

슈퍼스타 K에서 락통령으로 뜬 동영상이다.

포부와 달리 실력이 미치지 못해 웃음을 선사한다.

   

   

   

역시 슈퍼스타 K에서 힙통령으로 뜬 동영상이다.

마찬가지로 신념에 비해 실력이 아쉽다.

   

여기까지가 우리네 생각이다.

선생도 이렇게 살아왔다.

   

   

   

헌데, 힙통령과 합통령을 리믹스한 동영상이 나왔다.

과연 당신은 이러한 힙합통령을 예상할 수 있었던가.

   

이때, 대다수 78% 인간은 자신보다 상위의 인식을 할 수가 없기에 단지 신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끝이다. 또한, 21% 인간은 78%보다 상위의 인식이 가능하지만, 역시 철학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끝이다. 마지막으로 0.9% 인간은 보다 상위의 인식, 즉 수학적/과학적 인식이 가능하여 신과 공생하나 신을 문제삼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에 수학적/과학적 인식이 가능한 인류가 넉넉잡고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셋, 같은 인간도 나이를 먹는다.

   

300인 위원회 버트란트 러셀 세습백작이 동성애 파트너였던 유태인 비트겐슈타인과 불화한 후 새로 사귄 애인이며, 유태인 조지 소로스의 스승인, 유태인 칼 포퍼는 "젊어서 맑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는 바보요, 나이 들어서도 맑스주의자로 남아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집·차 다 팔고 전용기로 전 세계 돌며 사회변혁 꿈꾼다

'억만장자 노숙자' 베르그루엔 국내 첫 인터뷰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478

   

   

인간은 짝을 찾는 시기인 청소년기부터 30대까지는 호르몬 영향 탓에 부정적 인식을 한다고 한다. 왜일까. 인드라는 짝짓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한다면 굳이 다른 짝을 찾을 이유가 있겠는가. 없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해도 짝을 찾지 못한다. 자신이 없기에. 결국 자존심이 지나치거나 아예 없을 때, 짝을 찾기 어렵다. 적당하게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을 때, 짝을 적극적으로 찾기 마련이다.

   

반면, 인간은 짝짓기가 종료가 되는 사십대 이후부터는 호르몬 영향 탓에 긍정적 인식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원시 시대 인간 평균 생존 수명은 30세 정도였다. 허나, 인간이 역사 시대에 접어들면서 평균 수명이 점차 늘어 오늘날 환갑을 넘어 칠팔십을 넘보게 된 것이다.

   

하여, 인간의 역사는 급속도로 변모하였으나, 인류의 삶이 급속한 진화에 맞추지 못해 불균형이 발생했다. 수 만 년간의 기억을 고작 수 천 년의 기억으로 대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게다.

   

바로 이 대목. 누구보다 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청년층을 집중 공략하는 방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삼십대까지는 누구 말을 들을 여지가 있으나 사십대부터는 호르몬 작용도 그렇거니와 사회적으로도 회사에서 부장급이니 사실상 누구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일, 유태란 말만 들어도 여러분 의식 내부에서는 국유본이 오랜 기간 심어놓은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국유본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헐리우드 대작 유태인 영화를 만들어 보급시킨다. 유태인을 비판하면 아주 나쁜 족속인 게다.

   

이, 대부분의 교과서와 언론은 히틀러 = 극우 = 나쁜 것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흔히 수구꼴통 언론이라 부르는 조선일보조차도 이 공식에 충실하다. 이 공식에 충실하면, 쪽발 일성, 쪽발 돼중, 쪽발 놈현, 쪽발 지태, 쪽발 원숭은 우리 편, 심산, 조만식, 안중근, 김구 선생은 극우 꼴통 나쁜 편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삼, 미 국무부는 매년 전세계 반유태 움직임에 대해 백서를 내면서까지 감시한다. 근래에 미국무부 백서는 이원복 만화에 등장하는 반유태 묘사를 문제삼은 바 있다.

   

소수파에 대해서도 안전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소수파 인식을 지니더라도 자체적인 검열을 하도록 구조화한다. 이러면, 21% 소수파는 국유본에 순종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과정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인간 감성을 이용해서 호감을 사도록 노력한다. 그 다음에는 인지부조화를 유도한다. 그후 진영 논리를 구사한다. 이 삼단계에 걸려들면 피라미드 조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쪽발 놈현이는 쪽발이지만, 김구 선생보다 낫다? 하는 이상한 논리에 치중하게 만든다. 허나, 논리 구조가 형편이 없다 보니 골이 아파 온다. 해서, 등장하는 것이 수면용 논리이다.

   

쪽발 놈현이 그립습니다.

   

누군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면, 자빠져서 자면 진리가 되는 신기한 논리인 게다.

   

헌데, 이 마법을 푸는 주문이 있다.

   

- 노빠? 니 애비가 쪽발이냐? 쪽발이도 아닌데 왜 노빠야?

   

인간이 생존을 우선시하는 것은 존재론이다.

인간이 보고 싶어하는 대로 보는 것은 인식론이다.

   

남은 것은 실천론이다.

   

하나, 소극적 무관심이다.

   

한국 주요 직위 이만 오천개 이상을 임명할 수 있다는 대통령 선거조차도 투표하지 않는 층이 50%에 육박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누가 되든 상관이 없는 층이다. 누가 되든 상관이 없는 층은 둘이다. 국유본처럼 부와 권력을 쥔 이들이거나, 반대로 누가 되도 권력의 사각지대로 남은 이들이다. 누가 되도 권력의 사각지대로 남은 이들은 누구인가. 말 그대로 어떤 넘이 정권을 잡든, 힘든 인민이다.

   

혁명이 발생하면, 이들 인민은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이다.

   

첫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재산은 물론 쪽발 돼중, 쪽발 놈현 재산을 몰수한 뒤, 관계자들을 모두 인민재판에 회부해서 그 죄를 물어 삼족을 멸할 것이다.

   

둘째, 쪽발 엠비씨 간부, 쪽발 판사, 변호사, 시민단체 운동가를 비롯하여 부화뇌동에 적극 이바지한 자들을 색출하여, 그 죄에 따라 죄를 묻고, 모두 인민재판으로 재산을 몰수하고, 구족을 멸한다.

   

셋째, 쪽발 정보 단체(국정원, 기무사 등)를 일망타진할 것이다. 단, 적극적으로 투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이 대목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구술하지 않을 것이다. 그간 인드라와 접촉한 이들에 대해서는 선처할 것이다.

   

둘, 능동적 무관심이다.

   

국유본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 바로 그러하기에 겉으로 무관심한 척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 쪽발 통합진보당에서 출마하는 간부급들은 알 것이다. 쪽발 민주통합당에 묻어가는 것이 최선임을. 허나, 쪽발 통합진보당 당원/지지자 생각은 이와 다르다. 새누리당과 쪽발 민주통합당이 아닌 제 3의 가치에 방점을 두었기에 당원/지지자가 된 것이니까.

   

바로 이 대목이 쪽발 통합진보당 간부급과 평당원/지지자들의 간극인 게다. 전자는 세상 이치를 대략 눈치까고 있다. 어차피 버린 몸, 이렇게라도 출세하자는 생각이다. 반면, 평당원/지지자들은 순진하게 국유본의 의도에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셋, 적극적 관심이다.

   

국유본론이 진실이기에 오히려 국유본론을 활용하여 국유본에 가까이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국유본론에 접근하면, 그만큼 국유본 권력에 도달할 수 있다.

   

1% 이내 인간의 사유법이다.

   

아무나 이런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어느 정도 자격이 된다 여기는 이들이 나서는 방식이다.

   

인드라는 지금까지 존재론, 인식론, 실천론 차원에서 왜 국유본론을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면 4차원 취급받는가를 고찰했다.

   

   

하면, 이에 대한 대응책은 없을까.

   

불완전하지만, 있다.

   

하나, 존재론적 의문을 표하는 데에 대하여

   

간단히 말해, 국유본만 빼고 이야기하면 된다. 예를 들자. 세상이 말이야. 우연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신이든, 악마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외계인이든, 누구든 말이야. 이 세상을 누군가 쥐고 마구 흔드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는 그건 그래, 라고 말할 가능성이 크다. 허나, 그게 바로 '국유본'이야! 하면, 지지율은 90% 이상에서 1%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반면, 그간 인월리에서 말한 현상을 국유본만 빼고 말할 수 있다면, 상당수 지인들이 그건 그래 하면서 님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어디서 그런 고급 정보를 얻어왔냐고 말이다.

   

이것이 1%의 의문일 것이다.

   

   

둘, 인식론적 의문을 표하는 데에 대하여

   

이 문제도 역시 간단하다. 인식론적 의문을 표한 이들은 존재론적 의문을 표한 이들보다 한층 소수설에 자유로운 이들이란 점을 착안하면 된다.

   

인식론적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좋아. 니 말이 옳다 치자. 헌데, 상식적으로 보면 말이야, 왜 세계는 네 말에 조용하지? 설마 이 세상 69 억이 너 하나보다 못하다는 건 아니겠지?

   

이에 대해 당신은 무엇이라 답변할까.

   

상식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사의 특정한 시기에는 언제나 개인이 아니라 전체 과학자 집단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범적인 틀이 있는데, 이 모범적인 틀이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전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학 위에서 혁명적으로 생성되고 쇠퇴하며,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

[출처] 패러다임 [paradigm ] | 네이버 백과사전

   

허나, 상식적인 설명에도 납득하지 않는 층이 있을 것이다.

   

정통 보수이거나 급진 진보인 이들의 공통 사항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묻는 게다. 공간과 시대를 초월해서 묻고 있다.

   

이것이 0.1%의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묻는 수밖에 없는데,

   

이러자면, 님이 그것을 경험해야 하는 난관이 있다.

   

다만, 이 대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하층으로 갈수록 국유본론을 반신반의하지만,

   

오히려 상류층으로 갈수록 국유본론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을 이해하겠는가?

   

   

   

   

셋, 실천론적인 의문을 표하는 데 대하여

   

쉽게 가자.

   

만능 국유본 권능이라면 인드라 죽이면 쉽게 끝날 문제인데, 왜 인드라를 내버려두나.

   

국제유태자본론은 정설에도 비판적이고 음모론에도 비판적이다.

   

웹은 쿨한가

http://readmefile.net/blog/archives/000102.html

   

국제유태자본이 인터넷에서 음모론이 판을 쳐도 막을 생각이 별로 없다. 오히려 국유본이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음모론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터넷에 온갖 음모론을 방목하는 것이 오히려 국유본에게 유리한 게다.

   

해서, 하책은 직접적인 통제다.

   

국유본이 모든 음모론을 통제한다면, 그만큼 국유본 권력이 위태롭다고 보아야 한다. 하면, 쪽발 정은 정권은 지금 모든 음모론을 통제하는 데도 권력을 유지시키는 비결은 무엇인가. 국유본이 쪽발 정은 후견인이기 때문이다. 해서, 국유본이 지금 당장 전략을 수정하면, 쪽발 정은 정권은 48시간 이내에 붕괴한다. 즉, 한민족의 공공의 적이자 쪽발 개색희인 정은 씹색희는 인민의 돌팔매질에 의해 처형당한다.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사회복지와 경제발전을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중책은 국제유태자본론을 음모론 중에 음모론으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국유본론이 다른 음모론에 비해 낫다고 평가한 이상 국유본이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즉각 인드라 주변으로 국유본 인물들이 파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드라의 모든 것을 조사할 것.

인드라 약점을 파악할 것.

국유본론을 세밀히 조사할 것.

국유본론의 약점을 분석할 것.

   

하책과 중책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책은 단지 인드라라는 개인을 억압하는 것 다름 아니다. 허나, 인드라라는 개인을 억압함에 따라 오히려 인드라 사상과 이념이 세상에 알려진다. 초창기라면 인드라 개인을 억압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허나, 대한민국 사정이 초창기를 넘어서고 있다. 하여, 중책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중책이란 인드라라는 개인을 억압하기 보다 오히려 활약하게 하는 것이다. 대신, 조건을 다는 것이다, 치명적인 약점을! 한편으로 저항적 이미지를 통해 저항 세력을 조율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치명적 약점을 통해 결정적인 데서는 저항 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대부분의 반응은 실망스러울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 아하! 유태인의 세계정복론 말이지? 시온의정서? 아니면 예수회 음모? 프리메이슨? 그것 다 조작이야. 너, 히틀러 추종자냐? 이런 식의 반응을 얻기 쉬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래, 여기까지,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라는 질문인 게다. 네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 해도 국유본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기에.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그것은 교환할 수 있는가.

   

인드라는 말한다.

   

책 내지 않겠다. 언론에 출현하지 않겠다. 정치하지 않겠다.

   

이런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 해서, 상책이다.

   

상책이란 무엇인가.

   

그나마 근거를 요구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편견이 없는 이들일 것이다. 다만, 근거로 들어가면 문제가 되는 것이 전문성이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제외하고서는 모르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여, 아는 분야에 한정되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답변이 등장할 것이다. "부분적으로 옳게 보여도 일반화할 수 없지, 일반화의 오류를 고려해야 하지."

   

인드라는 이 단계에 도달한 바 있다.

   

전문화에 도달한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난 인간이다, 외에 다른 표현이 없다.

   

짐승이 아니다, 라고 번역하지 말길 바란다.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신적인 이들에 대해 자신이 신이 아닌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국유본이다.

   

헌데, 님은 이를 참으로 쉽게 이해한다.

   

목숨이 달린 일이다.

   

님은 목숨이 달린 일을 쉽게 가나?

   

아니라면, 다시 인월리를 읽기 바란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을 쉽게 가면 섭섭한 면이 없을 수 없다^^!

   

해서, 조급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생각해서 님이 국유본을 이야기하는데, 상대가 실천론적으로 오면, 쉽사리 답변할 수 있겠는가. 인드라가 현재 하기 힘든 답변을 말이다. 바로 여기서 승부가 갈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잔인한 패배를 맛보아야 한다.

   

허나, 거기서 역설적으로 국유본론의 가능성이 잉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패배한다,

   

허나, 내일은 이길 수 있다.

   

   

조건을 넘는다는 것.

   

훗!

   

아무나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국유본이 동종 상대로 여겨 승부욕을 느끼게 한다는 것.

   

당신이 이 지경이라고?

   

꿈깨라!

   

   

http://youtu.be/Ct9xzXUQLuY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9 : 왜 국제 자본인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12 04:20

http://blog.naver.com/miavenus/7013351463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9 : 왜 국제 자본인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12

   

   

왜 국제 자본인가

   

세계 자본, 초국 자본, 국제 자본 중 왜 국제 자본인가.

   

지난 인월리 설명 중 부족한 면이 있었다. 왜 세계 자본, 초국 자본, 국제 자본 중 국제 자본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계 자본.

   

오늘날 자본을 말하는 적절한 표현이 세계 자본, 혹은 글로벌 캐피탈일 것이다. 허나, 바로 이러하기에 인드라는 부정한 것이다.

   

초국 자본.

   

세계 자본에 대항하는 개념이다. 헌데, 이 개념은 마치 일국적 대응이 유의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북한, 이란, 이라크가 예다. 초국적 자본에 대항한 자본? 인드라는 허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 국가를 지탱하는 것이 국제유태자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드라는 초국 자본 개념을 록펠러의 안티 록펠러 트러스트로 본다. 즉, 록펠러가 미국 석유업계에서 지존으로 떠오르자 이에 반발하는 반 록펠러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에 록펠러는 안티 록펠러 전선을 주도하여 모든 반 록펠러 기업들을 끌어모아 지분을 위임하게 했다. 결국 반 록펠러 기업 연합이 록펠러 자회사였던 게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등장한 반전인 셈이다.

   

초국적 자본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반 록펠러 전선에 써먹을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드라의 산적론을 참고할 것.

   

해서, 국제 자본인 게다.

   

세계 자본도 아니요, 초국 자본이 아닌 국제 자본이다.

   

국제 자본의 이득이란 무엇인가.

   

첫째, 종교 정치 권력을 견제, 조종하여 경제 권력을 우위로 만든다

   

   

"6위 빌게이츠는 현재 세계 제일의 부자이긴 하나 미국경제의 0.58%를 차지하는데 그침으로써 역대 부자 순위에서는 6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5위 철도교량 건설을 하다가 철강산업에 투자해 부를 쌓은 앤드류 카네기로 1919년 사망하기 전 그의 재산은 미국경제의 0.60%에 달했다.

   

4위 해운업을 하다가 뒤에 퍼스트 뱅크의 최대 투자자가 된 스티븐 지라드로 1831년 사망하기 전 재산이 미국경제의 0.67% 규모였다.

   

3위 부동산 재벌 퍼리어 존 제이콥으로 1848년 사망하기 전 미국경제의 0.93%를 차지했다.

    

2위 증기선과 철도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코넬리어스 밴더빌트로 1877년 사망하기 전 그의 재산은 미국경제의 1.15%를 차지했었다.

   

1위 석유로 부를 이룩한 록펠러의 재산은 1937년 사망하기 전 미국경제의 1.53%를 차지, 전체 국가경제에 비해 재산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록펠러의 재산은 지금의 자산가치로 1,860억달러(200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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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보다 더 위의 세계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명은 성경속의 솔로몬이고,

   

다른 사람은 현재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로스차일드家이다.

   

솔로몬은 그의 40년 재임기간동안

   

173,000 달란트의 금을 조공, 세금 등의 명목으로 번 것으로 되어 있다.

   

1 금 달란트 = 34.2 Kg

   

1 Kg = 1,000 g = 267 돈

   

순금 시세 (2008년 1월4일 기준)= 200,000원

   

솔로몬의 총수입 = 173,000 x 34.2 x 267 x 200,000 =315,946,440,000,000원

   

계산해보면, 대략 315조원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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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은 로스차일드家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마치, 영화나 소설, 애니매이션에서만 나오는 그런 세계적으로 거대한 가문을...

   

그들은 매년 갑부순위에서 자신들의 가문을 빼려고,언론통제(조작?)을 한다.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약 5000억달러였다.

   

이는 당시 미국내 총자산의 2배이전세계 부의 50%에 해당하는 규모다.

   

현재의 자산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50조달러(60,000조원)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는 전세계 자본의 절반을 움직일 수 있기에'추정불가'로 정의한다.

   

아래는 로스차일드家에 대한관련정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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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패밀리] 세계 금융의 보이지 않는 손…'로스차일드家'

   

250여년간 금융· 정치계 지배…역사적 사건 배후

   

(편집자주: 역사적으로 글로벌 사회·문화·경제를 좌우하는 명문 가문은 존재해왔다.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글로벌 자본시장을 주무르듯 이른바 로열패밀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파워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를 이해하고 역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로열패밀리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글로벌 로열패밀리의 역사와 자본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을 분석한다)

   

   

   

영국버킹엄셔에위치한로스차일드가저택.1874~1889년네오르네상스양식으로지어졌다.

18세기

이후 약 250여년간 전세계의 돈줄을 좌우한 유대계 최대 금융가문 로스차일드.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빙은 세계 최고의 부자는 빌 게이츠가 아닌 유대계 자본가 로스차일드가라고 언급했다. 그는 로스차일드가문의 재산규모가 50조달러 정도일 것으로 추정했지만 전세계 자본의 절반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막강한 자본 파워를 자랑한다는 점에서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보통 '추정 불가능'으로 정의된다.

   

로스차일드가 금융의 힘은 세계 정치를 주물러왔다.

   

미국 남북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발포어선언, 수에즈운하 건설, 이스라엘 건국까지 인류 역사의 굵직한 정치 사건에 개입하며 2세기 동안 세계를 호령했다.

   

가문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로스차일드는 독일어 로트쉴러로 붉은 방패라는 의미. 가문의 선대는 독일에서 골동품을 팔며 붉은 방패를 집 앞에 내걸었다.

   

로스차일드가문의 영광을 탄생시킨 인물은 174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희귀한 옛날 지폐를 구해 귀족과 상류층에게 팔러 다니던 마이어는 당시 프로이센의 왕 헤센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 빌헬름 황태자를 만나 직접 거래하며 환전 등 금융 관련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세계 최대 돈줄의 시작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당시 4000만달러에 달하는 최대 상속을 받았던 빌헬름의 재정을 담당하는데 이어 왕실의 자금을 관리하는 등 금고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로스차일드가가 자본 증식의 꿈을 실현한 데에는 다른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바로 정보력이다.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을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등 주요 유럽국가로 보내 금융사업을 확대했고 아들의 정보력과 명석한 두뇌는 가문의 전성기를 실현케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만의 정보 네트워크가 빛을 발한 것은 워털루 전쟁 투기 사건이다. 가장 명석했던 셋째 아들 네이선이 투자의 귀재 노릇을 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미리 간파했던 네이선은 워털루 전쟁에 정보원을 투입, 나폴레옹 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입수했다.

   

   

   

   

영국런던소재로스차일드은행.블룸버그.

명석한 네이선은 정보를 역으로  이용했다. 프랑스가 아닌 영국 국채를 내다 팔아 치운 것이다. 영국군이 대패했다고 믿은 투자가들은 금융계 거목의 움직임에 재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영국 국채는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100파운드에 달하던 영국 국채는 한때 5파운드까지 떨어졌다. 네이선은 영국 국채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국채 가격은 폭등했고 그는 5000만파운드로 로스차일드 가문에 2억3000만파운드의 돈을 쌓았다.

   

당시의 시세차익은 현 시가로 약 6억 파운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채권을 쓸어 담은 네이선은 당시 거래소 상장 채권의 62%를 소유했다.

   

명석한 두뇌들의 활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워털루 투기로 막강한 자본력을 거머쥔 로스차일드가는 유럽 각지에 은행을 설립, 유럽 금융에 깊숙히 개입한다.

   

첫째 암셀은 프랑크프루트, 둘째 살로몬은 빈, 셋째 네이선은 런던, 넷째 칼은 나폴리,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에 각각 은행을 설립했다.

   

각국에 포진한 형제들은 상호간에 현지 정보 교환을 최우선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의 네트워크는 유럽 금융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이들의 활약은 정치성을 띠기 시작해 각국의 왕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기에 이른다. 국가의 재정도 이 가문에 의해 좌우됐으며 정부는 전쟁 참여와 지원에도 이 엄청난 가문의 손을 빌려야 했다. "로스차일드가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떤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로스차일드가는 철도사업의 미래를 예측, 꾸준한 투자를 단행해 철도 산업 발전과 동시에 자본을 늘렸고 19세기 중반 영국정부의 수에즈 운하 주식매입 자본을 공급해 정경유착을 더 견고하게 했다.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물론 2차대전 중 영국에 전쟁비용을 지원했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해 이스라엘을 독립케 한 발포어 선언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보이지 않는 배후로 움직였다.

   

가문은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는 금융으로 똘똘 뭉친 철학을 심었다.

   

자식들이 금융인으로 성장해 가문이 금융제국이 되길 원했던 아버지는 가문내 결혼, 재산의 비밀관리, 장남의 가문 승계 등을 철저하게 요구하며 가문이 가진 파워의 분산을 막았다.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약 5000억달러였다.

   

이는 당시 미국내 총자산의 2배이며, 전세계 부의 50%에 해당하는 규모다.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추정이 불가능하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업들이 대부분 비(非)상장이기 때문.

   

(참고로, 돈이 많은 기업들은 굳이 상장하지 않음.)

   

일각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이 세계의 부호 빌 게이츠가 가진 500억달러의 1000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로스차일드가문은 8대에 걸쳐 여전히 글로벌 금융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http://pann.nate.com/talk/314864608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380360

   

   

로스차일드 가문 이전에도 거대 자본은 있었다. 여불위 자본부터 시작해서 메디치 자본,  푸거 자본 등등등.

http://msh352000.egloos.com/3306599

   

공통점과 차이는 무엇인가.

   

여불위부터 메디치, 푸거와 로스차일드 공통점은 정경유착이다. 고래로부터 상인이란 권력과 가깝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하면, 차이는 무엇인가.

   

이전 가문이 권력에만 집중한 반면, 로스차일드는 권력과 반권력에 동시에 집중했다. 다시 말해, 권력과 반권력 사이에서 캐스팅보드 역할을 함에 따라 권력도 반권력도 동시에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3449239

   

권력 유지를 원하는가? 로스차일드에게 의탁하라.

쿠테타, 혁명을 원하는가? 로스차일드에게 문의하라.

   

종교, 정치 권력은 로스차일드 권력을 억압하거나, 철폐할 수 없었다. 로스차일드 권력을 억합하거나, 철폐하려고 시도한다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메디치나 푸거보다 로스차일드가 한 단계 우위의 권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국유본은 공화당, 노예민주당에도 줄을 대지만, 인드라에게 줄을 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유본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인드라에게 줄을 대지 못하는가. 국유본이 시도를 하고 있다. 허나, 인드라가 변덕이 심해서 맞추기가 어려운 게다. 인드라 변덕대로 국유본이 움직일 수 있다면, 국유본 권력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셈이다.

   

간단히 말하자. 인드라가 천 억 원을 주면 국유본의 개가 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신용할 근거가 있나? 없다. 그것이 국유본의 고민이다.

   

   

둘째, 국제유태자본의 적은 국제유태자본 편이다

   

"M&A와 세계 트러스트의 대결

[성보경의 M&A칼럼]M&A와 세계 트러스트의 대결 

   

한국의 투자금융업계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세계투자금융가들은 거대한 독점트러스트를 만들어 가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세계투자금융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략을 짜고, 각국에 투자한다면 다가올 국제적인 독점트러스트의 희생양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사모펀드들에 의해 세계 거대기업의 경영권이 장악되고 있다. 전세계는 거대 인수합병(M&A) 열풍에 빠져있고, 거대 다국적기업들의 경영권이 사모펀드 운영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추세다. 또 각국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자본과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거대 다국적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M&A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민간자본과 국가자본이 새로운 세계경영권지배를 위해 경쟁하는 초기단계의 출현을 의미한다.

   

'거대 중국'의 출현으로 세계 다국적기업들은 엄청난 자산 디플레이션을 겪었고, 이로 인해 전세계 산업자본들은 초토화됐다.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통화량을 확대했고, 이로 인해 금융자본가들은 초토화돼 있는 산업자본의 경영권을 헐값에 매입했다. 금융자본가들은 초토화된 산업자본의 경영권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기술과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원자재를 독점해 가격을 담합하고, 각국의 정부에 대한 모라토리엄 위기를 조장하며, 식량위기나 에너지 위기 등에 대한 경고로 가격을 높이는 행위를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정부권력에 의해 조성된 자본과 민간자본에 의해 조성된 투자금융자본이 마지막 머니 게임을 치르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형국이다.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 한국의 투자금융은 이런 전선의 변방에 놓여있는 것이다.

   

세계 독점트러스트의 형성에 의한 머니 게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1910년대에 있었던 상황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권력과 민간투자금융자본이 대결의 시나리오로 모방하고 있는 전략이 이 시기의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는 다방면에서 국제적인 카르텔이나 트러스트가 결성된 시기다. 그러다 1920년대 후반에 닥친 경제공황에 의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1910년대는 해상운송, 철도, 석유, 주식회사의 의결권, 금융, 자동차, 광산, 철강, 전기, 전신, 화학분야 등 산업 전분야에 걸쳐 카르텔이나 트러스트가 형성됐다.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는 자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경쟁력 유지방법이었으며, 부를 창출하는 기법으로 분야별 1위의 기업에 의해서 주도됐다.

   

해상운송분야에서의 국제 카르텔은 영국,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의 해운회사들로 결성된 범선소유주위원회,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러시아, 핀란드의 기업들에 의해 결성된 발틱운송협의회, 모건 그룹의 주도로 미국, 영국, 독일의 기업들에 의해 구성된 모건 트러스트 등이다. 모건 트러스트는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증기선을 독점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취했다.

   

광산분야에는 유태인 기업가 오펜하이머 그룹에 의해 주도된 카르텔이 가장 많았다. 국제아연사업가연맹, 독일,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미국의 기업들에 의해 결성, 유럽 생산량의 92%를 독점한 국제아연신디케이트, 국제아연제련소협의회 등이 있다.

   

철강분야에는 독일과 벨기에, 프랑스 등의 철강기업들의 신디케이트로 결성된 국제철강기업소유주카르텔, 미국철강트러스, 베들레헴철강회사, 쿤롭철강회사 등으로 결성된 국제철강협의회,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미국, 멕시코, 영국의 납제조업자들이 만든 국제납생산업자협의회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독일의 알게마이네전기, 미국의 제너럴전기, 영국의 톰슨, 프랑스의 휴스톤전기 등에 의해서 결성돼 세계 전기기업네트워크를 형성한 국제전기카르텔, 국제염화석회카르텔, 국제아교제조카르텔, 국제붕산염카르텔, 국제카바이드신디메이트, 국제화약 카르텔, 국제등유카르텔, 유럽원유생산카르텔, 국제면직업카르텔, 국제직물카르텔, 국제유리제조업카르텔, 국제도자기카르텔, 국제제지카르텔, 국제석재업카르텔, 국제점토업카르텔, 국제고무제조카르텔, 국제코코아카르텔, 스탠다드오일트러스트, 카네기철강트러스트, 모건의결권트러스트, 국제구리생산자트러스트, 국제바나나트러스트, 국제송수관트러스트, 국제금속트러스트, 국제과일생산자트러스트, 미국주식금융트러스트 등 전세계는 카르텔과 트러스트를 결성하기 위한 협회, 협의회, 연맹 등을 결성하고 가장 강력한 M&A를 추진하는 열풍이 몰아 닥쳤다.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는 가장 강력한 독점지배가 형성된 시기다. 시장독점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영국의 로스차일드 그룹이나 미국의 모건 그룹과 같은 거대한 투자금융회사가 있었고, 가장 국제화된 투자금융제국들에 의해 강력한 국제 카르텔이나 국제 트러스트가 만들어져 국가권력보다 힘의 우위를 점하는 세상이 됐다.

   

세상이 바뀌자 세계 각국에서는 국제 금융자본트러스트가 결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국제경제계는 집단적소유지배체제가 형성돼 국제금융황금기(Golden International of Finance))의 시대가 된다.

   

현대에도 민간업자의 사모펀드와 국가권력의 연금 및 기금이 거대 다국적기업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M&A전쟁에 돌입하고 있다.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의 사례를 정밀 분석해 다가오는 M&A전쟁에서의 생존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글쓴이 : ㈜프론티어 M&A 회장 성 보 경(merger@merger.co.kr)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7052910163066241&outlink=1

   

거대 중국의 출현 배경은 국제유태자본이다.

   

오늘날 쪽발 노빠들 현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파쇼색마 문성근 따위 씹색희같은 넘들 때문에 잠재적인 혁명 주체들이 불운하게도 노가다하는 주제에 파쇼색마에게 욕질을 하기 보다 오히려 분노를 인드라에게 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유본인 게다.

   

여러분의 생활을 옥죄는 것이 인드라인가, 국유본인가? 국유본이다. 그럼에도 왜 여러분은 인드라를 비판하는가. 국유본 때문이다. 인드라보다 국유본 권력이 강하기에.

   

   

셋, 국제자본 개념은 현존 권력을 영구 승인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인드라가 국제자본 개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서술할 왜 국제금융자본이 아니라 국제유태자본인가 하는 것과 맞물려 말한다.

   

일, 자본이 국제적인 것은 필연이다.

   

이, 국제는 신질서를 요구한다.

   

삼, 신질서는 자본을 붕괴시킨다.

   

가위바위보 게임이다.

   

역사적으로 입증한 바 있다. 자본은 국제없이는 확대될 수 없다. 국제는 유태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유태는 자본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오늘날 국제자본이 독과점을 피하는 요령이 무엇인가. 석유업계만 보면, 엑슨 등 석유업계는 각국에 소재한 국유본 업계 상호 침투를 통해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에이스 침대이다.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B41&newsid=02469846599461352&DCD=A10105&OutLnkChk=Y

   

일위, 이위, 삼위를 모두 장악하는 것이 국유본인 게다.

   

새누리당, 쪽발민통당, 쪽발진통당이 모두 국유본이라면, 당신은 과연 정치에 흥미를 느낄 것인가?

   

자, 여기까지 이해한다면,

   

인드라는 어디서부터 국유본 약점을 건들이고 있는 것인가.

   

자본에서 시작하였으니 자본이다.

   

헌데, 가위바위보 게임에 따르면, 전술적으로 자본을 이기는 건 종교요, 유태다.

   

이 의미를 이해하는 당신은 0.1%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PJv4KiPJkcs&feature=player_embedded

   

http://www.youtube.com/watch?v=LnL4F_vJV2o&feature=player_embedded

    

http://youtu.be/RBtTadeurLY

   

http://youtu.be/m8IH15p9INQ

   

http://youtu.be/Ri7-vnrJD3k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8 : 가위바위보 - 유다인가 주인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06 01:48

http://blog.naver.com/miavenus/70133071999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8 : 가위바위보 - 유다인가 주인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06

   

   

국제유태자본

 국제

 유태

 자본

한자

 國際

 猶太

 資本

영어

 international

 judea

 capital

수메르

엔릴

아누

엔키

기독교

성령

성부

성자

불교

보신

법신

화신

프로이트

의식 ego

초의식 super ego

무의식 id

인드라 제석천 단군

사람 인

하늘 천

땅 지

범주

생명체 수는 무한

우주는 무한

궁극 입자는 무한

마자세

 세상에 감사한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인드라

뼈만 남은 여자

머리통이 없는 남자

간이 없는 남자

분업

정치

종교

경제

황금율

21

1

78

남한  21 : 1 : 78

10,500,000

500,000

39,000,000

세계  21 : 1 : 78

1,470,000,000

70,000,000

5,460,000,000

십억  21 : 1 : 78

210,000,000

10,000,000

780,000,000

화목 사랑

무병 장수

생계 안전

가위바위보

가위

 바위

주체

 유엔 안보리, G20, CFR

카발라,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로스차일드, 모건, 록펠러 

조직

국제기구, 정부, 정당, 반정부 게릴라, 사법부, 의회, 언론, 노조, 시민단체, 사회과학,  대학, 스포츠, 대중문화, 갱

기성 종교, 신흥 종교, 외계인 종교, 음모론, 예술, 수학, 철학, 신학, 물리학, 생화학, 의학

에너지, 기후, 곡물, 생명, 정보통신, 우주항공, 건축토목, 물류, 군수, 금융

   

   

   

인드라는 3이란 숫자를 좋아하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좋아해서 일타 심피, 국유본 분파는 셋 등 3이란 숫자를 선호하는 것일까. 즉, 주관적인 이유 때문일까.

   

"3

3은 다수, 창조력, 성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표현, 통합을 뜻한다. 3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다. 3의 힘은 보편적이며 하늘, 땅, 바다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3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육체·혼·영, 탄생·삶·죽음, 처음·중간·끝, 과거·현재·미래, 달의 세 가지 상(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낸다. 3은 천계의 숫자이며, 4가 육체를 나타내는 데 비해 3은 영혼을 상징한다. 3은 4와 합쳐져 7이라는 성스러운 숫자가 된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는데, 그것은 '황도십이궁', 일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 3은 1과 2를 더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2와 1로 나누어질 수 있다. 도교에서 3은 평형을 성립시키는 중심점을 가지기 때문에 강한 숫자다. 3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족에게도 반영된다. 또한 3에는 중첩효과라는 권위가 있다. 즉 한 번이나 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이 되면 확실성과 강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3배 위대한 주(主)', '3배 행복한 섬' 등이 그것이다. 민화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3번의 소원, 3번의 시련, 3인의 왕자, 왕비, 마녀, 또는 운명의 세 여신, 3인의 요정을 뜻한다. 이중 둘은 착한 요정, 나머지 하나는 악한 요정인 경우가 많다. 3은 다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숫자, 군집, '만세삼창'을 나타낸다. 또한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들과 영적 존재의 삼위일체의 예는 무수히 많다. 삼위일체의 달의 여신이나 삼면의 여신은 특시 셈족, 그리스, 켈트, 게르만 등의 종교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하나의 신격을 가진 세 개의 상(相), 힘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제일 먼저 삼각형이 있다. 3개의 원, 또는 삼각형이 일부 중첩되어 있는 도형은 삼위일체로서의 3개의 인격의 불가분의 통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각형 외에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삼지창, 붓꽃, 세개의 잎, 3중 벼락, 괘상 등이 있다. 달에 속하는 동물들은 다리가 세 개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달의 세 가지 모양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달에 3마리의 토끼, 또는 세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아샨티 족 달의 여신은 셋인데, 그중 둘은 흑인, 하나는 백인이다.

   

   

연금술 황, 수은, 소금의 세 성분으로 이것들은 각기 영, 혼, 육체를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삼위일체의 신이 많다. 카르타고에서는 달을 뜻하는 '태모신'이 3개의 상징적인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아라비아 이슬람교 이전에 마나트는 3인의 성처녀(알-이타브, 알-우자, 알-마나트)로 나타내지는 삼위일체의 여신이다.1) 이 여신의 상징은 돌기둥, 돌, 기둥 또는 꼭대기에 비둘기를 장식한 기둥이다.

   

   

1) 이타브는 타이프 근교의 계곡에 있는 흰 돌에 사는 처녀신, 우자는 메카 근교의 계곡 아카시아 나무에 살고, 마나트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쿠다이드에서 제사지내는 검은 돌에 산다.

   

불교 3은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나타낸다.

   

   

켈트 브리지트 여신은 세 가지 모습을 가진다. 켈트에는 '지복의 세 여인' 외에 무수한 3인조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같은 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3은 특히 중요한 숫자다.

   

   

중국 3은 성스러움, 길(吉)한 숫자, 가장 작은 홀수이다. 달에 사는 두꺼비 혹은 태양에 사는 새는 다리가 세 개다.

   

   

기독교 3은 삼위일체, 혼, 인간과 교회의 영육간의 결합, 삼인의 동방박사가 '신, 왕, 희생'으로서의 예수에게 바치는 세 가지 선물(유향, 황금, 몰약), 변용된 예수의 세 가지 모습, 예수가 받은 세 차례의 유혹,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부인,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의 날 수, 부활한 예수가 세 번 출현함, 엠마오의 순례자, 사도들에게 출현, 3인의 마리아, 신앙·희망·은총으로 이야기되는 신을 향한 세 가지 덕목을 뜻한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 토트 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로 불렸다.

   

   

그리스, 로마 3은 숙명, 운명으로서 세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의 신 모이라이(라케시스, 클로토, 아트로포스)를 나타낸다. 헤카테(Hecate) 여신도 삼위일체다.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는 에리니에스(Erinyes, 알렉토, 타시포네, 메가이라)들과 메두사로 알려진 괴물 고르곤의 세 자매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도 하나이자 셋인 모습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 카리테스들(Caritas,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레이아), 미의 세 여신들(graces), 3인의 세이렌(Seiren),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고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들(Horae,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또는 탈로, 아우크소, 카르포),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지키는 세 명의 여신들(아이글레, 아리티아. 헤스펠라레투사 또는 아이글레, 아레투사, 헤스페리아), 태어날 때부터 백발을 하고 나온 그라이아이(Graeae, 팜프레도, 에니오, 데이노)도 있다.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os)는 머리가 셋이고 스킬라(Scylla)에게는 거대한 꼬리가 세 개, 키마이라(Chimaera)는 머리와 몸, 꼬리가 세 가지 다른 동물(사자, 산양, 뱀)의 모습이었다. 3,4 그리고 두 숫자의 합인 7은 3가지의 세계와 4대 원소를 주관하는 여왕으로서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Aphrodite/Venus)의 성스러운 숫자다. 오르페우스(Orpheus) 교의 상징체계는 '존재', '생명', '지성'이라는 3대 요소를 가진다.

   

   

유태교 3은 무한의 빛, 성화(聖化)된 지성, 카발라에서 3은 세피로스의 비나(지성)을 나타내며, 남·녀, 통합적 지성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헤르메스 사상 지고의 힘힘으로서의 신,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트리무르티(trimurti,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의미한다. 이는 창조·지속·파괴와 시작·유지·종결의 세 가지 힘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신일체의 신은 많다. 달의 전차는 바퀴가 세 개 달려 있다.

   

   

잉카 태양신에는 아버지 태양(아포인테이), 자식 태양(첼리인테이), 형제 태양(인테이카오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었고, 이들은 삼신일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세 가지 신기(神器)에는 거울(八咫鏡), 검(天叢雲劍), 옥(八坂瓊曲玉)이 포함되며, 각기 진리·용기·연민의 뜻을 가진다.

   

   

마오리 족 창조신인 큰영은 태양, 달, 대지의 삼위일체 신이다. 또한 자연의 신 즉 과거·현재·미래의 신이기도 하다. 3은 세워진 세 개의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정신·인격·체격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완성을 나타낸다.

   

   

북유럽, 게르만 숙명은 세 명의 노른(마니, 니, 니시), 즉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세 자매는 순서대로 보름달, 초승달, 반달을 상징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달이 숙명을 나타내며, 달의 여신 홀다는 두 자매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다리가 셋이다. 천둥신 토르(Thor)는 때로 머리가 셋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각 소용돌이 무늬 또는 삼각 호 장식은 오딘/보탄(Odin/Wotan)의 상징이다. 또한 3은 행운의 숫자다. 뭐든 좋은 것은 3이다.

   

   

슬라브 달의 신은 머리가 세 개다.

   

   

도교 삼재는 천, 지, 인을 가리킨다. 3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면, 중심이 남는 최초의 강한 숫자다. 3은 양. 길함을 뜻하며 다수를 상징한다 ."

http://blog.naver.com/miavenus/60003682657

   

   

   

알 수 없다. 인드라가 아이가 둘인데, 셋이었으면 싶은 마음이다. (앗, 인드라까지 포함 셋^^?)

   

계보를 굳이 따지자면, 수메르, 불교, 기독교이지만, 편의상 수메르, 기독교, 불교로 한다.

   

http://blog.daum.net/destination-ca/7270965

   

인드라는 국유본론 정립 이전까지 유럽 문명을 그리스 문명과 유대 문명의 변증법적 통일 과정으로 보았다.

   

유태 철학 [ Judaisme ]

유태 철학은 헤브라이 사상의 한 흐름이다. 구약성서 및 경외서(經外書) 안에 나타난 지혜(chokmah)의 사상에서 이미 실존의 문제가 깊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헤브라이인이 믿었던 유일신의 계시는 원래 역사적ㆍ특수적이며, 지혜의 사상이 합리적ㆍ일반적인 것과 대비된다. 헤브라이 사상의 발전은 이 대립하는 양자의 결합이라는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잠언'(箴言)에서는 지혜가 우주에 있어서의 계시의 전달자이지만 '욥기'에서는 신의 지혜가 인간에게 전혀 드러나고 있지 않다. 그 지혜를 거부당한 인간은 오히려 그 부정의 밑바닥에서 신을 만난다.

   

이 역설적 지혜의 사상은 '전도서'(Ecclesiastes)에서 완전히 부정적인 지혜로 되어 인간은 신과 만날 수 없게 된다. '시라(Sirach)의 지혜'에서도 지혜의 불가지성은 강조되고 있지만, 그 지혜는 또한 율법(Torah)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져 있다고 한다. '솔로몬의 지혜'(The Wisdom of Solomon)에서도 똑같은 관계가 양자 사이에 인정되고 있지만, 이 책은 그리스어로 씌어져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이러한 사상적 조류에 서서 플라톤, 스토아, 신피타고라스의 여러 학설을 배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종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도 신의 초월적 불가지성(不可知性)을 말했지만 그 신은 스스로의 로고스를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계시한다.

   

   

로고스(logos)와 소피아(sophia), 즉 지혜는 언뜻 구별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인 것이다. 필론은 로고스의 계시를 '모세 5서'(The Pentateuch)에서 발견하여, 5서의 로고스적ㆍ신비주의적 해석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 철학에로의 길을 열어, 기독교 교부(敎父)들의 신학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필론은 신의 계시 및 창조 작업을 발출적(拔出的)으로 보았는데, 그와 유사한 유태사상은 카발라(kabbalah)에게서 보여진다. 카발라의 경전이라고 할 『예지라』(Jezīrah) 및 『소하르』(Sohar)의 두 책은 각각 9세기와 1300년경에 씌어졌지만, 그 사상은 훨씬 오래된 것이라 간주된다.

   

   

소하르 서는 신의 불가지성, 무성(無性), 무한 정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 신은 제일 먼저 원인간(原人間 : 아담 가트몽)에게 자기를 계시한다. 원인간은 10의 세피로트(Sephiroth : 수의 뜻)로 구성되는데, 그것은 관(冠, Kether), 지혜(Chokmah), 이성(Binah), 은혜(Chesed) 등이다. 거기에서 일변하여 순수 형상의 세계인 베리아(Beriah)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 천계(天界)인 예지라가, 마지막으로 물적(物的) 세계인 아시야(Assijja)가 나타난다. 카발라의 신비주의적 성격을 배척하고 합리주의적 신학을 형성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6세기에 나타난 카라임파(Karaites)였다. 그런데 그들은 '탈무드'를 버렸다. 이에 반해 이른바 랍바니파(Rabbanites)는 정통주의적 전통에 충실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 학자는 사티아 벤 요셉 알파유미로서, 그의 저서 『신앙과 지식의 서』(Sepher ha-Emunoth we-ha-Deoth)는 유대교 신조의 합리성을 증명하고 그 반대론의 불합리함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어느 정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하고 있다. 11세기에 스페인에서 등장한 Salomon ben Jehuda ben Gebirol(Gabirol)은 오히려 신플라톤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는 아비케브론(Avicebron)이 바로 그다. 그의 주저 『생명의 분수』(Fons vitae)의 아라비아어 원문은 없어지고 라틴어 번역본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신의 본질과 작용(의지)을 구별한다. 전자는 전혀 불가지한 것이지만, 후자는 신비적 직관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정신적 존재도 질료를 지닌다고 하고 다만 신만이 일체의 질료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순수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철학은 유태인보다도 오히려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 많이 받아들여졌다. 그와 다른 신플라톤적 철학자들을 비교하면서, 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을 보인 사람으로는 아브라함 벤 다비드(Abraham ben David)를 들 수 있다. 그의 저서 『숭고한 신앙』은 1161년 아랍어로 씌어졌다. 이 경향을 대표한 사람은 마이모니데스(M. Maimonides)이다. 그의 저서 『방랑자의 인도자』(Moreh nebûchîm)는 1190년경에 완성되었다.

   

그는 모세 율법을 중요시했는데, 그것이 행위의 규범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최고 진리의 계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설파했고, 그 진리를 탐색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철학적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신은 순수현세(純粹現勢)이며 그 본질은 알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고 있어, 스스로를 책임지고 최고선(最高善)인 진리 인식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이모니데스의 저서는 유태인, 아랍인,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폭넓게 존경받았다. 그 밖에 아리스토텔레스 학자로서 Schem Tob ben Joseph ibn Falaquera(1225~1290), Levi ben Gerson(1288~1344) 등이 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유태인의 철학 작업은 계속되어 스피노자, 멘델스존, 코헨(H. Cohen) 등의 철학자가 나왔지만 여기에서는 중세 말기까지만 서술하는 것으로 멈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8436

   

허나, 인드라가 수메르 문명을 만난 뒤, 혹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사르트르, 사르트르에서 하이데거, 하이데거에서 데리다로 넘어가는 도정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인지하였다. (고맙습니다. 마광수 선생님.)

   

   

기원 - 과정 - 결과

   

해서, 이 문제는 변증법을 공부한 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로 전화하는 것이다.

   

정 반 합

   

이를 전제하고, 국제유태자본에서 국제유태자본을 International Judea Capital인가, International Jewish Capital 중 어떤 번역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인드라 의도는 International Judea Capital이다.

   

유태자본론은 International Jewish Capital으로 분석하고 싶겠지만, 인드라는  International Judea Capital이다. 왜? 인드라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유태인 역사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유태인 역사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예까지 전제하고, 왜 인드라는 유태 규정을 쥬가 아니라 유다로 하는가.

   

기원, 정 : 쥬란 하나님 약속을 어긴 개념이며, 유다란 하나님 약속의 개념이다.

과정, 반 : 쥬란 정체성이 불명료한 개념이며, 유다란 명료한 개념이다.

결과, 합 : 쥬란 이주민 개념이며, 유다란 정주민 개념이다.

   

예서, 인드라 기획은 무엇인가.

   

국제유태자본이 그들이 바라는 바, 하나님 약속을 지키고,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헛된 꿈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기 행위일 따름이다.

   

역사는 오늘날 국제유태자본의 활약상을 알릴 터이지만, 때가 되면 국제유태자본의 사기 행각을 기록할 것이다.

   

추신 1 : 국제,란 개념에 대해 보충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문제는 다음 글로 이월하겠다.

   

추신 2 : 지금 인드라는 소주 한 병과 병맥주 3병 (카프리, 버드와이저, 벡스)를 섞어 마신 뒤에 쓰고 있다. 

   

추신 3 : 한반도 혁명이 닥쳐올 것이다. 본디 국유본 기획이 아니었지만, 인드라에 감명한 국유본이 기획을 수정할 것이다. 똥대갈빡 정은이 준비해야 한다. 드디어 한반도 쪽발 대못이 뽑히려는가. 혁명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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