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2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2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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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6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2
국제유태자본론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2
11. 유태인들이 근대 세상을 지배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 보듯 로스차일드 가문에 비기로 내려오는 '타임머신' 장비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리도 빈틈 없이 근대 세상을 장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아 학자들조차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곡자 :
로스차일드가 워털루 전쟁 이후 발휘한 역할과 기능을 대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위의 인드라 님의 글과 연결되어 로스차일드를 막연하게 인식하는 많은 분들을 위해 올려드립니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금본위제를 통해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워털루 전쟁(1815년) 이후 1914년까지 서방세계가 백년평화를 누린 것은 로스차일드의 막후 활동 덕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그 반대급부로서 식민지 시대가 본격화된 것입니다. <거대한 전환>에서의 폴라니의 글입니다:
"19세기 국제 은행의 성격에 대한 전면적인 탐구는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이 신비로운 제도의 정체는 여전히 단조로운 흑백의 정치 경제의 신화 속에 깊이 묻혀 있는 상태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각국 정부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오히려 각국 정부들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끝없는 이윤의 갈망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국제적 분쟁의 씨앗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강건한 나라들의 전투력을 좀먹는 나약한 국제주의의 도구였다고 주장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었다. 오트 피낭스라는 이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는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과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기간에만 고유하게 나타났던 것으로서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 사회를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 고리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국제 평화 체제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여러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니, 비록 국제 평화 체제는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지만 강대국들 스스로는 그 평화 체제를 확립할 수도 없었고 또 유지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유럽 협조 체제는 그저 가끔 한번씩 작동하는 것인 반면, 이 오트 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기관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가장 강력한 정부조차도 이것의 독립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므로 이것은 결국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 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다. 잉글랜드 은행(The Bank of England)을 포함한 그 어떤 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었으며 한편 이것은 또 그 모든 중앙은행들과 긴밀한 관련을 맞고 있었다. 금융과 외교 사회에는 긴밀한 연관이 존재했으니, 이 둘 중 어느 쪽도 다른 쪽 호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평화 쪽이든 전쟁 쪽이든 장기적 계획을 구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 평화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 국제 금융의 입장, 조직, 그리고 각종 기법들 쪽에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독특한 조직은 구성원으로 보나 행동의 동기로 보나, 철저한 영리 이익이라는 사적 이해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은 어느 한 정부에 종속되는 법이 없었다. 이 가문의 여러 가족은 서로 다른 나라로 퍼져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가문으로는 국제주의라는 추상적 원칙을 몸소 체현하는 것이었다. 이 여러 가족의 충성을 한 몸에 지닌 단일한 기업으로서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야말로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 활동을 정치 영역의 정부와 잇는 유일의 초국가적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면,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수많은 전쟁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한 자들이며, 도덕적인 고민 따위에는 전혀 무감각하고, 전쟁이 아무리 많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규모나 기간이 대단치 않고 또 국지적인 것이기만 하다면 눈 하나 깜빡 않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 이익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적 논리에 의하여, 전 지구의 모든 민족들을 휘말아 넣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적인 평화를 유지한다는 필요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업이 그들의 어깨 위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틈을 비집고,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들이대는 것이다. 허나, 인드라는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허무맹랑하다고 보고 있다. 해서, 이들 음모론과 기존 학설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탐색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자료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전제하고, 세 지점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
1492년 카톨릭화한 스페인에서 유태인 완전 추방령이 나오고 동시에 오스트리아, 헝가리도 그러했다. 단, 독일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공국으로 쪼개져 있었기에 일부는 역시 유태인을 추방했지만, 맑스가 살던 라인란트 지역과 같은 곳에서는 추방하지 않았다. 하여, 라인란트 지방으로 위그노파, 서유럽 유태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해서, 라인란트 사람들이 프랑인인듯 행세하거나, 프랑스 땅을 동경하고, 틈만 나면 프랑스 땅을 사려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
"팬션 산업은 1970년 小杉惠氏의 오랜 노력에 의해서 일종의 Technology transport의 산물로서 유럽에서부터 일본에 도입되었고, 일본의 영향을 늘 직접적으로 받는 한국에서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로 시작한 듯싶다.
펜션은 아파트형 콘도에 비해 고급스런 별장이어서 보다 인기가 있다. 펜션의 유래는 그리스 시대의 민박업에서 찾고 있으나, 고대 올림픽처럼 단지 유래에 불과하며, 실제는 은퇴하여 연금을 타는 유럽 노부부가 저렴하게 시골에서 노후생활을 즐기는 것에서 등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특히 프랑스가 언급된다는 데에 나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금, 노후생활,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라인란트 인민이기 때문이다. 라인란트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한 괴이한 광적 취미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프랑스 부동산에 관해서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알려져 있다. 왜일까. 나는 11세기 십자군이 라인계곡에서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던 것에서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들은 라인란트로 이주했으며, 마치 유대인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그리듯, 프랑스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 포도밭에서 포도주를 만들며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지 않았겠는가.
제조업에서 승승장구를 구가하던 일본이 버블로 망했던 것이 부동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였는데 이후에는 헐값으로 모두 내놓아야 했다고 한다. 미국 지배자들은 일본을 대하듯 한국 역시 병 주고 약을 주었고, 중국과 북한에 대해서도 비슷한 처방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일본의 펜션 산업은 일본 부동산 정책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해서, 오늘날 한국 펜션 산업 현주소도 일본과 과히 다르지 않은 듯이 보인다. 성공한 극히 일부의 펜션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초기 시설투자에 감당을 못한 채 채산성이 맞지 않아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펜션 경쟁자들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더군다나 펜션업을 창업하는 이들 대다수가 기업에서 정리해고당하거나 명예퇴직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퇴직금으로 시작하였고, 상당수가 저리의 은행 이자를 받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출이자를 높인다면? 대다수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마치 외환위기처럼, 저리에 싼 차입금을 지원하다가, 어느 순간 싹 빼돌려, 세계경영 한답시고 유태인 무서운 줄 모르고 무섭게 돌진하던 대우그룹 김우중 마냥 맛 갈 수도 있다는 것을...
해서, 나는 펜션산업을 라인란트 모델이라 감히 주장하고픈 것이다.
http://blog.empas.com/jinguja/16070066
'라인란트(라인강이 흐르는 서유럽 지역) 모델'이란 성장보다 분배와 사회적 평등을 우선시하는 모델이다. 평등성과 효율성이 모두 높다는 '북유럽 모델'에 비해서는 정리해고 등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북유럽 모델이 적은 인구수에 근거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등가적 비교를 함이 어렵다 할 것이다.
라인란트는 프랑스에 인접한 독일 라인강 인접 지역이다. 알퐁소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알사스-로렌과 이웃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민들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지지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맑스의 고향도 트리어이며, 로스차일드도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이다. 미하일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비난한 바 있다.
"유대인 맑스는 음흉하고 시류에 민감한, 그렇고 그런 약삭빠른 유대 놈들에 둘러 싸여 있다. 모든 곳에서 상업, 은행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문필, 학계, 정계, 또는 각종 색깔의 언론계에 있는 유대인들은 문학과 지식, 정보의 브로커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유대인은 한 발은 사회주의 운동에, 또 한발은 자본주의에 담고 있으며 독일 언론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 놈들은 모든 신문사들을 거머쥐고 있다. 거기서 그 어떤 메스꺼운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올 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나의 거대한 착취적 종파, 거머리의 민족, 왕성한 식욕을 가진 기생충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는 이 유대인 세계는 오늘날 전체적으로 맑스와 로스차일드의 손끝에 놓여 있다. 나는 로스차일드는 맑스에게, 그리고 맑스는 로스차일드에게 본능적인 경외심을 품고 있을 거라 확신하다. 어떤 이에겐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와 국제금융자본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호 호! 맑스의 공산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한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있는 곳에 중앙은행이 있으며 또한 기생충 같은 유대민족이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인민을 더욱 악착같이 착취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살찌울 것 있다... 실로 맑스가 주창하는 사회는 진짜 프롤레타리아들에겐 노예수용소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제복을 입은 노동자 남녀는 북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들고, 일할 것이다. 이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은 영리한 유대인 소수에게 돌아갈 것이며 이들은 중앙은행들의 국제적 연결망을 통한 가렴주구로 만국 민중의 노동을 착취할 것이다."
시온의정서에 따르면, 불행히도 유태인들은 대중이 바쿠닌처럼 권력에 대해 깊은 불신을 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바뵈프나 블랑키를 보듯 순수한 열정에 불타오르나, 머리가 부족한 혁명가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026425890
중요한 건,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이다. 왜인가. 다른 서유럽 지역에서는 유태인의 공직 진출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스페인 유태인은 사정이 달랐다. 스페인에는 이슬람 국가인 사라고사, 발렌시아, 그라나다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은 맑스의 자칭 별명인 무어인이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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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왕국에서 유태인은 황금기를 구가했던 것이다. 공직에도 진출해서 마음껏 기량을 펼쳤던 것이다. 해서, 이들이 떠나자 스페인 경제에 갑자기 위기가 찾아올 정도였다. 반면 다른 서유럽 국가에서는 공직 진출을 할 수 없었기에 출신을 숨기거나 로스차일드 방식으로 어용상인이 되는 방식으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국가 경영 같은 경험이 없었다.
헌데, 그 수에 상관없이 한 무리 집단만으로도 능히 국가를 세워 경영할 정도였던 이들 스페인 유태인이 추방당한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중동, 남미 등지로 갔으나, 일부는 네덜란드 등 다른 서유럽 국가로 간 것이다. 예서, 근대 사회가 시작하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이 백 년만 늦춰졌다면, 로스차일드 개인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세계 경제를 휘어잡지 못했을 것이다.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일각에서는 추방된 대부분이 북아프리카, 중동으로 갔고, 유럽으로 간 이들은 채 삼십 만이 되지 않는다고 과소평가한다. 허나, 그 삼십 만이 일당 백, 일당 만이었던 것이다. 미국에 초기 정착한 고작 수십 명 되는 유태인이 만든 뉴욕주 농장지대만 생각해도 된다. 루즈벨트 집안이 뉴욕주를 기반으로 한 네덜란드 유태인 출신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
서유럽 유태인 사회는 이들 스페인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에서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던 것이다.
하면, 왜 스페인 유태인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일까.
누구보다 아랍어, 히브리어, 유럽어, 역사, 수학, 과학, 경제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이. 생존 본능이 강했던 유태인
중세 유럽은 변방이었다. 당시 세계사의 중심은 아랍과 중국이었다. 아랍 상인은 신흥종교인 이슬람교 보호 속에 신밧드의 모험에서 보듯 전 세계를 무대로 무역을 하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중국 당송시대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시대였다. 시쳇말로 중국을 침략한 북방민족에게 다 주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앞선 문명을 누구보다 일찍 온전히 체득한다는 건 시대를 앞서가는 일이 분명하다.
교회에서 재산 관리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엉터리였다. 0의 개념 등 복식 부기 등이 유럽에 뒤늦게 도입되었는데, 스페인 유태인은 이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뿐이랴. 스페인 유태인은 아랍인과 중국인이 발견, 발명한 과학 기술과 물품을 잘 알고 있었다.
하면, 스페인 유태인이 서유럽 유태인은 물론 다른 중동 지역 유태인은 물론 아랍인에 비해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왜인가.
한마디로 생존 본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0.01%라니까 관점에 따라서 0.01%가 다른 것 아니냐 반문하는 분들이 있다.
0.01%란 단지 머리가 똑똑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헛똑똑이도 있으니까.
0.01%란 생존 본능 수치이다.
말 그대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는데, 만 명 중 한 명꼴로 살아날 확율이다.
만여 명 군대가 충돌했는데, 9,999명이 죽고 한 명이 전쟁터에서 살아날 확율이다.
머리가 좋건, 힘이 세건, 운이 좋건, 이 모든 건 생존본능 요소 중 일부일 뿐인 게다.
수메르 - 페니키아 - 카르타고로 이어지는 오천 년간의 생존 본능이 스페인 유태인 속에 각인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해진 억압은 생존본능이 강한 자들만 살아남게 만든 것이다.
수메르인이 뛰어난 문명을 자랑했다고 해도 수메르인 모두가 생존 본능이 강했던 것은 아닐 게다.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다. 어느 민족이든 생존 본능이 강한 족속과 약한 족속이 골고루 있었을 것이다.
이때, 유태인에게만 지속적으로 억압을 가한다면, 어찌될까. 생존 본능이 강한 자만 추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핏줄로, 기억으로, 기록으로 전승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로스차일드 가문은 누구보다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표하며, 근친 결혼 실험도 강행한 바 있다. 명분으로는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나, 다른 이유도 있는 듯이 보인다. 근친 교배를 하면, 상당수는 바보 천지가 된다고 한다. 허나, 극소수로 천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천재였다.
오늘날도 인드라가 전해 듣기로, 미국 생물학 상당수 프로젝트가 우생학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다.
다만, 지속적인 억압을 당한다고 해서 강한 족속이 된다면, 집시나 드라비다족 등 세계 도처에는 역사상 한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계속 억압당하는 족속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족속들과 유태인 차이는 무엇인가.
문자다. 선민의식이다. 성경이다.
어린이에게 교육하길, 오늘의 시련은 하나님이 유태민족에게 내리는 축복이라고 설명한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설명인가.
다른 민족들은?
왜 우리는 이렇게 당해야 해요? 라고 아이들이 물을 때, 어른들 반응은 무엇일까? 응? 우리는 원래 노예거든. 혹은,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까. 또는, 아, 몰라, 일이 힘들어서 말할 기운이 없어. 말 시키지 마. 그딴 골치 아픈 것 생각하기 전에 돈이나 벌어, 병쉰아.
바로 이 대목이 근대 민족의 출발점인 것이다.
인드라는 강조한다. 오늘날 근대 민족론의 출발은 유태인 부러워하기인 것이다. 우리도 유태인처럼. 이것이 근대 민족주의의 모토인 게다.
해서, 유태인처럼 자신들만의 신화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이 늘 삑사리가 나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외부의 강한 스트레스를 강력한 초자아로 이겨내었을 때, 그 힘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하다. 그것이 0.01%의 힘이다.
헌데, 대부분 민족은 외부의 강한 스트레스를 강력한 초자아로 매개할 문자와 선민의식과 성경이 없다.
예서, 선민의식이란 뭐냐.
비록 지금 노예 신분이지만, 나도 알고 보면 왕족, 귀족, 혹은 신이 선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서, 스페인 유태인이 다른 지역 유태인보다 강력했던 것은, 생존 본능을 유지시킬 외부 위협을 받으면서도 국가 경영까지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에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해서 무역이 번성하였는데, 그후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십자군 전쟁과 몽골군 진출 이전까지 이 지역 유태인들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해서, 스페인 유태인이나 유럽 유태인처럼 생존 본능이 강한 족속들로 추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몽골군 진출 이후에는 이 지역 역시 생존 본능이 강화되었지만, 대서양 항로가 뚫리면서 이들 지역 경제가 죽었다는 것이다.
해서, 정리해보자.
생존 본능이 강해야 한다.
세계의 중심지, 무역의 중심지에서 살아야 한다.
공직, 전문직에 진출해야 한다.
자, 오늘날 유태인을 보자.
이차대전과 이스라엘 건설로 생존 본능 강화를 유지시켰다.
세계의 중심지가 런던이면 런던, 뉴욕이면 뉴욕에 몰려 산다.
죽어라고 자식들을 공직, 전문직에 진출시킨다.
예서, 요즘 유태인들 고민이 무엇인지 답이 나온다.
첫번째 조건, 생존 본능 약화이다.
인드라가 보기에, 삼십 년 약발이다.
이스라엘 아랍전쟁이 1970년대에 있었으니 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삼십 년 약발 법칙!
자신들과 달리 아이들은 재벌 2세가 된 듯 물렁물렁하다.
하면, 해법은 무엇인가.
프랑스 유태인 학교 총격사건 같은 걸 자꾸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유태인이 무엇인지 자각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건 바다에 사이다 뿌리기인 게다.
지난 이차대전과 같은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태인이 오늘날처럼 권력을 쥐고 있을 기간은 단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삼. 근대 유럽이 유태인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중세유럽에는 상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이 있었다.
근대유럽에는 과학기술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태리, 프랑스, 독일, 영국인이 있었다.
로스차일드 이전에도 거상들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과 푸거 가문이 예다.
헌데, 왜 유태인인가.
당대 거상을 하려면, 동서고금 정경유착이 필수였다.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 모두 구교와 국왕 권력과 밀착했던 것이다.
문제는 구교와 국왕 권력이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세유럽에서 구교가 유지되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너무 춥거나 온갖 질병, 전쟁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나아가지 못하게 자연재해 등이 너무 혹독하니 숙명론이 인간 생존을 보장했던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하지만, 자유의지론과 숙명론 어느 하나가 정답이 아니다. 외부환경이 너무 혹독하면 숙명론이 답인 게다. 우리네 어머니를 보라. 그 처참했던 시절을 이겨낸 힘이 숙명론이었다. 반면, 자유의지론으로 무장한 우리네 아가씨들, 어머니처럼 살라고 하면 단 하루도 못 살 것이다. 그만큼 생존 본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숙명론이 무조건 옳다는 게 아니다. 정답이 없다는 게다. 다만, 요즘 지나치게 자유의지론이 득세하니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서, 인드라가 헌법 개정을 해서 처녀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더라도, 사회봉사를 최소한 일 년 동안 의무적으로 하도록 하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 보고 이런 비인기 정책을 과감하게 내놓을 자들이 없으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지금 북한 인민이 버틸 수 있는 건 숙명론 때문인 게다. 해서, 국유본이 작심하고 훅하고 바람 한 번 일으키면, 쪽발 정은은 48시간 이내로 총살당하는 것이다. 왜? 북한 인민이 자유의지론으로 돌아서니까. 국유본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과 달리 유태인은 적극적으로 종교 개혁에 지지했다는 점이다. 유태 상인이 부각한 요인? 새롭게 떠오르는 종교 개혁 권력과 손잡았다는 것이다.
해서, 유태 상인은 영국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을 지원한다. 크롬웰이 청교도 혁명을 성공시키자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유태인 영국 입국을 허가한 것이다.
그뿐이랴. 스코틀랜드 장로교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의 위그노파 종교개혁 운동, 스위스의 칼뱅 종교개혁 운동이다.
예서, 알아야 한다. 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운동이 실패했고,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이 성공했는가를 말이다.
칼뱅은 구교의 이자제한을 풀었다. 완전 푼 것이 아니지만, 5% 정도로 이자 제한을 규제 완화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유태인만 과학기술에 능통했던 것이 아니다. 뉴튼이 유태인인가? 아니다. 다빈치가 유태인인가? 아니다. 이처럼 근대에 접어들면서 멍청한 유럽인 중에도 제법 쓸만한 족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맑스적 표현으로 생산력이라 하자~!
문제는 무엇인가.
구교와 국왕 권력이었다. 맑스적 표현으로 생산관계라고 하자!
이 병쉰색희들이 이 놀라운 능력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자.
펠리페 2세 따위 허접한 넘들을 제외하자.
초점은 루이 14세이다.
왜 루이 14세인가.
이 시기 프랑스는 루이 14세 하기에 따라 영국 대신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초기 루이 14세에게는 운이 따랐다.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루이 14세 때에 영국 런던이 대화재가 난 것만 봐도 루이 14세에게는 천운이 있었다.
허나, 루이 14세는 천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오늘날 저 꼴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 시기, 프랑스에는 로스차일드에 필적하는 뛰어난 금융가들이 있었다.
그들이 오늘날 스위스 비밀금고를 지키는 은행가들이다.
또한, 이 시기, 프랑스에는 놀랄만한 과학기술자들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위그노파들이었다.
위그노파들은 스페인, 이태리와 교류가 자주 있어서 누구보다 신기술에 능통했다.
이들 대부분은 박해를 피해 독일 라인란트로 이주하여 독일 제조업 시조가 되었다.
하고, 이 시기, 메디치가와 푸거가가 있었다.
메디치가는 아들은 교황으로, 딸은 왕비로 보내는 전략을 취했다.
해서, 프랑스왕에게도 메디치가 핏줄이 흐르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왕비가 메디치 가문에 충실하니 구교 수호자를 자임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 권력으로 큰 가문. 구교 권위가 몰락하자 함께 추락했다.
푸거 가문. 푸거 가문은 스페인 필립페 2세를 전폭 지원했다. 독일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푸거 가문 문제는 무엇인가. 스페인 필립페 2세처럼 당대 독일, 스페인, 프랑스 국왕들은 한편으로 교황에 맞서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른 국왕을 누르고 교황의 권위를 받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동양식으로 말한다면, 전국시대였던 셈이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이 주나라 황실을 인정하면서 패자가 되려 했다면, 전국시대는 제후들이 주나라 황실을 개무시하면서 패자가 되려한 것이다.
이때, 필립페 2세나 루이 14세 등의 한계는 무엇인가. 진시황의 꿈을 키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황을 넘어선 황제의 시대.
그들은 그저 교황의 권위를 받는 국왕 권력에 만족했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이가 있으니 그가 누구인가. 서양의 여불위, 로스차일드였던 게다.
로스차일드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하나, 서양의 여불위처럼 영국 국왕에게 세상의 권력을 안겨준 것이다.
둘, 진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영 제국은 그래도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셋, 여불위는 망했다. 반면, 로스차일드는 오랜 권력을 유지했다.
정리하자.
로스차일드로 함축한다면, 로스차일드 비법은 무엇인가.
누구보다 권력과 가까이 하라, 친구가 되라.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허나, 늘 다른 카드를 마련하라.
그 권력을 이을 차기 권력과도 가까이 하라, 친구가 되라.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현재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단체가 누구인가.
에이팩(AIPAC). 미국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이다.
회장을 선출하는데, 당대 대통령과 가장 친한 사람을 뽑는 것이 전통이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가 프랑스 대선에 충고할 대목이 있는가?
있다.
프랑스가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지, 그것은 인드라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지금 프랑스는 균형 감각이 요구되고 있다.
인드라가 보기에, 지금은 사르코지가 재선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다만, 사르코지가 집권하는 조건으로 선거 때 내건 공약을 지키지 않고 욕을 먹어야 한다.
프랑스가 욕을 먹으면서 유로체제를 끌고 가야 유로공동체 미래가 밝다.
국유본은 지금 인드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12. 카자르인, 혹은 하자르인은 누구인가
카자르왕국 역사 참고목록.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1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2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3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4
http://memolog.blog.naver.com/miavenus/595
밀로나드 파비치의 '카자르 사전'도 참고목록이다.
"'사전소설'이라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다. 유고슬라비아 작가 밀로라드 파비치가 지난 84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카자르 사전」(전2권·중앙M&B)가 그것. 한때 카프카스(코카서스) 지방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카자르인들의 역사 미스터리를 다룬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과는 딴판의 모습을 하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카자르는 7세기에서 10세기 무렵에 걸쳐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부 일대에 실존했던 역사상의 제국으로, 한때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으나 11세기 이후 바람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제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당시 군주였던 카간의 개종. 그가 민족의 전통종교를 버림으로써 민족과 언어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가 어느 종교로 개종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카간의 개종에 대해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는 치열한 논쟁을 벌여 카간이 자신의 종교로 바꿨다고 주장했다. 「카자르 사전」은 한 종교의 승리로 결론짓지 않고 각 종교가 논쟁에서 주장하는 자료를 뒷받침해 핵심을 소설화했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구성과 글의 서술방식 그리고 읽는 방식이 독특하다. '사전소설'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외견상 사전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물론 엄밀한 의미의 사전은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등 3대 종교의 주장을 과거의 미래를 넘나드는 환상적 이야기로 풀어놓고 있다. 먼저 이 책은 남성판과 여성판으로 분리해 각권을 구성했다. 두 권의 내용은 12줄(원문은 7줄)을 뺀 나머지가 동일해 다른 부분을 찾아내기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과 같다. 각권은 세 종교의 주장을 레드 북(기독교), 그린 북(이슬람교), 옐로 북(유대교) 등 세 가지로 구분해 실었다. 카자르 민족의 백과사전격인 이 소설은 카자르 제국의 등장인물과 주제를 표제어와 해설로 담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8세기 카자르 공주였던 아테를 각기 다루되 해석이 상호 다르다. 레드 북의 경우 아테를 9세기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옐로 북은 8세기의 인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9세기 전후의 사건과 17세기 후반의 전쟁, 1982년 터키 킹스턴호텔 살인사건을 고리로 연결해 풀어나가는 점도 이채롭다. 「카자르 사전」은 이야기 구성과 서술 등이 파격적이다. 기승전결이라는 기존 소설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는 한편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줄거리도 갖춰야 한다는 통념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순서에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읽어도 무방하다. 독자의 자유분방한 의식에 따라 어느 부분이라도 마음대로 펼쳐 읽어도 그만이다. 소설을 번역한 문학평론가 신현철씨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전기를 구성한 방식으로 쓰인 소설은 처음으로 일반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읽기를 요구한다"면서 " 이 작품은 동유럽 문학의 인식을 한 차원 높였다"고 말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346739
다음은 카자르 사전의 한 대목이다.
"카간(KAGHAN)-카자르 군주를 의미한다, 타타르어 '칸'에서 온 단어인데 타타르어로 '칸'은 왕자 라는 뜻이다. 이븐 파들란의 주장에 따르면 카자르 민족은 카간을 강바닥에 묻었다. 카간은 언제나 또 한 명의 군주와 권령을 나누었고, 단지 제일 먼저 아침 문안 인사를 받는 정도의 권위만을 더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카간은 유서 있는 왕가에서 나왔는데, 이 가문은 아마도 터키 계통이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왕 혹은 '베이' 라고 불리던 카간의 동료 군주는 카자르 제국의 평민 출신이었다. 9세기에 씌어진 야쿠비 문서를 보면, 카간은 6세기에 이미 칼리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카자르 민족의 공동 통치에 대하여, 알 이스타흐리가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랍력으로 320년에 씌어진 이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카자르의 정치와 행정에서 그 군주는 카자르 민족의 카간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카자르 왕 '베이'보다 지위가 더욱 높다. 하지만 카간을 임명하는 것('카간' 이라는 직위를 내리는 것)은 바로 왕이다. 카간을 새로 임명하고 싶을 때, 왕은 카간으로 지명당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서 비단 조각으로 목을 조른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이 거의 숨이 끓어질 지경에 이르면 얼마나 오랫동안 지배할 생각입니까? 하고 묻는다. 카간으로 지명당한 사람은 '얼마만큼이오' 라고 대답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대답한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죽는다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말한 그 해를 채우자마자 살해된다. "
투르크 민족 계열의 카자르 왕국은 7~9세기 카프카스 지역에 융성했다가 이후 점차 멸망의 길을 걸은 왕국이다. 카자르 왕국이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카자르인이 유대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카자르 왕국 지배층이 이슬람교의 사라센 제국과 기독교의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성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교를 국교로 한 것이었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르 왕국은 956년 우크라이나 왕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또한 잔존하던 카자르인도 몽고군 진출로 러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카자르인이 주로 살던 곳이 러시아와 폴란드이다. 카자르인은 말로는 카자르어로 하고, 문자로는 히브리어를 썼다고 전해진다. 헌데, 오늘날 카자르어는 사라지고 이디쉬어를 쓰고 있다. 하면, 왜 이들은 러시아 방언도 아니고, 폴란드 방언도 아닌 독일 방언 히브리어를 구사했던 것일까. 인드라는 여기에 힌트가 있다고 보고 추론하고 있다.
이디쉬어 어휘를 보면, 히브리어, 아랍어, 로망스어 - 중세 남부유럽(이태리, 스페인, 프랑스)에서 쓰이던 라틴어에서 파생한 민중어가 섞여 있다. 허나, 11세기 이후 폴란드, 백러시아어 등이 섞였다.
이를 통해 카자르인 유태인 이주 경로를 알 수 있다.
서유럽에 살던 유태인이 십자군 전쟁 이후 서유럽 각지에서 축출을 당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폴란드, 러시아 등지로 이주했다. 동유럽으로 이주한 유태인이 순식간에 동유럽 상권을 장악한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일부 유태인이 남미로 가서 순식간에 남미 경제권을 장악했던 역사가 있다.
하여, 부유한 동시에 여전히 독일 같은 데서 막강한 권세를 유지하는 서유럽 유태인과 잘 알고 지내는 유태인 가문들을 중심으로 카자르 유태인들이 결합하기 시작했다라고 인드라는 보는 것이다.
"폴란드는 1025년에 첫 왕이 등극하면서 국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그 땅에 유태인이 들어간 최초 기록은 966년 스페인 - 당시는 아랍령 - 외교관이자 상인이며 여행가이던 이브라힘 이반 야콥의 기록에 나옵니다. 최초의 유태인 공동체는 1085년경부터 존재했다고 나옵니다. [유태인 학자 예후다 하코헨의 기록] 당시 폴란드 주화들은 유태인들에 의해 찍혀졌고 출토되는 당시 주화들에는 여러가지 히브리어와 유태문양이 새겨있습니다.
1098년 십자군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있자 폴란드 왕들은 유럽국가들과 달리 유태인 초빙 쪽으로 국가시책을 정하는데 국가부흥을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군 학살로 인해 첫번째 대규모 유태인 이주가 이루어지며 1240~1241 년에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폴란드가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그것을 복구시킬 인력으로 당시 유럽사회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선 유태민족의 이민을 적극 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유럽 각국에서 추방과 학살 대상이던 유태민족은 폴란드를 그 피난처로 삼게 됩니다.
1264년 유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칼리쯔 장전"이 나왔습니다. 칼리쯔 장전은 기독교인과 유태인이 싸울 경우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동수로 증인과 판사가 되게 하며 유태인의 거처에는 유태인의 허락이 없으면 기독교인은 못 들어가게 하는 등, 폴란드의 소수인구이던 유태인에게 매우 유리하게 한 칙령으로, 그 목적은 폴란드 왕실의 재정을 빌려주는 입장이던 유태인이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하게 묶어두기 위한 의도였으나 그 덕분에 유태인은 폴란드에서 유럽다른 지역과 달리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에게 강제개종과 학살, 화형, 마녀재판, 추방이 휩쓸고 있던 중서유럽과 달리, 폴란드는 종교자유를 누리면서 유태인공동체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좋은 피난처 나라가 되어주었습니다. 여러 폴란드 왕들이 십자군을 피해 입국한 유태인들에게 관용책을 폈으며 유태인은 폴란드와 이웃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키에브까지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폴란드는 가장 많이 유태인들이 거주하는 나라가 되고, "유태인의 낙원"으로 불리웠습니다. 종교자유 시책 덕택으로 유태교가 번성하면서 폴란드는 탈무드정리,편찬사업과 각종 유태교분파의 발전, 또 히브리어의 모체가 된 이디쉬어 등 유태교의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inter:001039&uid=128898
폴란드 유태인 역사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당대 서유럽 유태인 수는 매우 적었다. 서유럽 각지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라고 해봐야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즉, 폴란드 왕국이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서유럽 유태인이 필요했고, 인구 수 증가를 위해서는 동유럽 유태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카자르 유태인이 잘 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카자르 유태인은 다른 러시아 민족들처럼 가난하게 살았다. 극히 소수의 유태인만 잘 살았던 것이다.
하면, 카자르 유태인이 문제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19세기말 20세기초반부터였다. 이 시기 아일랜드인과 이태리인, 카자르 유태인은 미국사회에서 유럽인 대접을 받지 못할 만큼 천민 축에 속했다. 헌데, 이들이 과거 게르만족 이동처럼 서유럽으로, 미국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왜? 당대 러시아 황제가 유태인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1881년 3월 한 명의 유태인이 포함된 러시아 혁명가들이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였는데 암살자가 유태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러시아에서 유태인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예서, 반유태주의자들은 이들이 맑스주의자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나로드니끼 성향의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11886
반유태주의자들에 의하면, 1881년 3월 1일,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5인방 Grinevetski, Rysakov, Mikhailov, Emelianov, Helfmann은 지하조직이었던 Narodnaya Volya(민중의 의지)의 멤버들이었다. 헌데, 나로드냐 볼야는 유태인 Mark Natanson이 구축한 무정부주의적 나로드니끼 조직 토지와 자유(Land and Freedom)의 하위 무장조직이었다는 게다.
이 사건에 배후가 있었는지, 영국이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바쿠 유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 인드라는 여전히 자료가 부족하여 사안을 유보할 것이다. 운동권 시절에는 짜르가 반동적인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유태인 암살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고 알고 지냈다. 허나, 당대 러시아 황제는 개혁적이었다. 남북전쟁 때도 노예해방 기치를 내건 북군을 돕기 위해 러시아 황제가 군대를 파견할 정도였다. 하여, 국유본론을 정립하면서 이에 대한 역사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는가 여기고 있다.
아무튼 이 당시 영국 외교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국유본의 의지는 무엇이었는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300인 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인 핼퍼 매킨더(Mackinder, Sir Halford John)가 있다.
"1861년 2월 15일 잉글랜드 게인즈버러에서 의사 집안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7년부터 1905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레딩대학교와 런던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국에서 지리에 대한 연구열을 부활시키고, 지리학을 학문으로 성립시켰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런던정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자연지역 구분 연구로 유명한 허버트슨(1865∼1915), 스탬프 등 많은 지리학자를 육성했다. 그 이후로 영국 추밀원 고문, 제국조선협회 회장 등을 거쳤다. 이처럼 많은 공직을 역임하는 것이 초기 영국풍 학자의 특색이었다. 주요 저서로는 《영국과 영국해(Britain and the British Seas)》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영국의 자연지지에서부터 인류지리나 역사지리, 산업도시의 문제를 순환론적으로 전개하고, 마지막으로 섬나라로서 영국의 발전방향을 다루었다. 그는 1904년 출판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Democratic Ideals and Reality)》에서 지리적 축과 역사의 '핵심지역(heartland)'으로서 유라시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 이론은 영국과 미국에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핵심지역 이론은 권력의 자연적 위치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독일에서, 특히 저명한 지정학자이며 헤스의 스승이기도 했던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에 의해 나치스의 지정학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다. 말년에는 귀가 멀어 공개적인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1947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집필한 교과서의 개정판을 내는 일에 전념했다. 1944년, 미국국립지리학회가 4년마다 지리학상 위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는 '찰스 P. 데일리 메달(Charles P. Daly Medal)'을 받았다. "
[출처] 해퍼드 매킨더 [Sir Halford John Mackinder ] | 네이버 백과사전
공식적으로는 매킨더의 해양세력 대 대륙세력으로서의 대유라시아 전략이 이차대전 이후부터 검토되었다고 하지만, 브레진스키의 스승격이자, 300인위원회 일원으로서의 위상을 고려하면, 국유본이 제국주의 시대를 결정하는 시점부터 국유본의 전략이었다고 본다. 즉, 매킨더 이전부터 영국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유력국인 프랑스, 스페인,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를 이간하면서 이득을 취해왔다. 국유본은 이러한 경험에서 제국주의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하고, 매킨더 역할은 이러한 국유본 전략을 개념화, 이론화한 것이다.
* 유태인 시리즈를 2부로 하려고 했으나, 예상보다 반응이 좋고, 또 글을 쓰려니 분량이 많아져서 2부가 아닌 4부 정도가 될 듯합니다.
* 국유본이 인드라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인드라의 생존 본능 때문도 요인이 되는 듯싶다.
* 덧글에 답변을 달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드라가 답변을 달 때도 심혈을 기울여 답변을 달지 않습니까. 지금 현 주제에 집중하다 보니까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덧글을 읽고 순식간에 답변을 쓸 수 있지만 - 이건 번개에 참석한 분들은 알 겁니다 -. 그러다 보면 현 주제에 집중하지 못해서요.
인드라가 아스퍼거 증세가 있어서요. 지금 집중하는 걸 다른 데에 분산시키다가 흥미를 느끼면 이 글 마침표를 못 찍습니다 ㅠㅠㅠ
요즘 글을 쓰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서너시간 자는데, 자는 게 자는 게 아닙니다.
약간 힘든데요.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는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자, 생각하고 있어요.
해서, 인드라가 이전에도 그렇지만, 교정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읽는 분들은 24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면 다른 글이 보일 겁니다.
고맙습니다.
유태인 시리즈를 마감하면 답변드리겠습니다.
급한 분은 번개에 참석해서 질문주세요.
직빵으로 답변이 나옵니다.
번개에 참석한 분들은 알 겁니다.
이해해주세요.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