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3/2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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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실제 모습이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65 : 유태인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3/21

   

1. 유태인이란?

   

혈연적으로 유태인이거나  개종을 통해 유대교를 믿어 유태인이 된 사람을 말한다.

   

유대인을 가리키는 명칭인 그리스어의 Iudaios (Ιουδαίος), 라틴어의 Judaeus, 프랑스어의 Juif, 독일어의 Jude, 영어의 Jew, 스페인어의 Judío, 러시아어의 Zhid (Жид) 등은 모두 고대 히브리인의 12지파 중 하나인 '유다(예후다)' 지파에서 왔다.

   

   

2. 유태인과 유대인 차이는?

   

유태인은 유대인을 오히려 猶, 클 泰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넘치도록 크다, 과하게 크다, 별 것 아닌 듯이 보이는데 알고 보면 대단한 족속이다 이런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 중에는 원숭이 유로 해석해서 작은 원숭이 쪽바리를 배후조종하는 큰 원숭이로 보기도 하는데, 그건 상상에 맡기겠다.

   

   

3. 유대교를 믿으면 태어나길 한국인으로 태어나도 유태인이 될 수 있는가?

   

오늘부터 난 유대교를 믿는다, 고로, 나는 유태인이다, 라고 하면 인정받나?

   

그렇다.

   

1970년대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옛 소련에서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때 유대교에 잘 모르고 언어도 모르던 이들이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우겨서 상당수 이스라엘로 건너왔다. 이스라엘 당국은 알면서도 묵인한 듯싶다.

   

왜 이스라엘 당국은 묵인할 수밖에 없나?

   

DNA, 핏줄 등으로는 유태인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개족보가 유태인이다.

   

심지어 구약에 나온 유태인 후손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가능성도 크다.

   

   

4. 구약은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인가

   

구약 역사성에 대한 논란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최대주의란 성경 기록 중에 지나치게 과장되고 황당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시에 이집트 등 다른 지역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중동 지역 역사를 성경에서 보여주는 면이 많으므로, 아직 고고학적 성과물이 발굴되지 않았다 하여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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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최소주의란  요시아왕 때에 유대교 부흥을 일으키면서 구전되어온 기록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라고 보아 아브라함과 모세는 물론 솔로몬마저도 역사가 아니라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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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예수도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최대/최소 논쟁은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에서 단지 논쟁만으로 그치지 아니 하고 있다. 건물을 짓다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자기 편에 유리하면 발굴하고, 자기 편에 불리하면 유물을 없애버린다고 한다. 

   

예서, 최소주의를 비유태인이 주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유태인 종교 분파와 정치 분파가 굉장히 많다.

   

일부 유태인 랍비는 이란 대통령, 차베스와 함께 한 반이스라엘 회의에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중동에서 이스라엘 말고 유태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 이란이다. 극단적인 정통 유태인 입장에서 시오니즘이란 메시아를 부정하고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세속화된 입장이므로 이런 주장을 하는 유태인을 신의 이름으로 마땅히 절멸시켜야 하는 것이다.

   

   

5. 바리새인이 오늘날 유태인 뿌리라고 인드라가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신교가 읽는 구약성서는 바빌론으로 유다 지도층이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이 끝이다. 헌데, 구교는 마카베오 상, 하를 외경으로 간주한다.

   

마카베 상, 하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마카베 가문(Maccabees)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태인 왕국을 세운다. 이 왕조가 하스몬 왕조인데, BC 165년부터 BC 63년까지 계속된다.

   

예서, 마카베 가문이 유태인 풍습대로 성전 중심 제사장 제도를 운영했다. 이 제사장 그룹이 모세 때부터 이어져온 레위파, 아론파, 사독파는 아니나 새로운 제사장 그룹이 된 게다.

   

허나, 바리새파는 마카베의 독립투쟁에는 지지했으나, 성전 중심 제사장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오늘날로 치면, 무교회주의인 짜라투스투라나 고타마 싯타르다에 많이 심취한 듯싶다. 성전, 혹은 만신전을 우상숭배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대성전주의가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마카베까지 이어져온 전통이었던 반면,

만신전 타파주의는 바리새파부터 시작한 전통이었던 것이다.

   

예수와 바리새파는 만신전 타파주의라는 면에서 한 편이었다.

다만, 교리가 가장 유사한 만큼 서로 이단 짝퉁이라며 가장 많이 싸웠다.

반면, 레위파나 사독파는 당대 이미 예수와 교리가 많이 달라

예수 교리를 이단의 범주를 넘어선 완전 다른 교리라고 보아 예수와 논쟁하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바리새인 정체가 누구인가하면,

인드라는 수메르의 후예,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등장한 시기는 카르타고인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당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지중해 상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그리스인에 악감정을 품은 족속도 카르타고인 밖에 없다.

   

구약에 나타난 유태인을 보라.

목동질이나 열심히 했지, 상인 자질을 전혀 엿볼 수 없다.

한마디로 멍청한 족속이었다.

   

반면, 바리새인을 보라.

대부분 율법을 중시할 만큼 지식인들이다.

직업도 세금 징수인이거나 상인이다.

이런 족속은 당대 바리새인 외에 찾기 힘들다.

   

특히 로마시대에 유태인이 자연적 인구 증가를 뛰어넘어 급증했는데 개종 외에는 다른 요인이 없다. 이 시기 카르타고인, 에돔인, 이집트인은 물론 노예가 된 이들 상당수가 유대교로 개종한 것이다.

   

왜?

   

누구도 막을 자 없을 듯한 로마제국을 우습게 보는 종교가 딱 하나 있으니 유대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 이후 기독교가 대세가 되지만^^!

   

   

   

6. 디아스포라란?

   

디아스포라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전치사 dia와 동사 '뿌리다'라는 의미의 spero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은 뒤 그곳으로 자국민을 강제 이주시켜 세력을 확장했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식민지 영토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스포츠 제전으로 오늘날 영연방국가들이 럭비를 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때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와 식민지 건설을 의미하는 능동적인 의미였다.

   

헌데, 그간 고대 그리스인들이 정복지로 삼았던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안에는 누가 있었는가.

   

페니키아인이 있었다.

   

예서, 인드라는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유태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가나안에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페니카아인들이 정착해서 살았다. 이들은 기원전 2600년 정도에 예루살렘에까지 들어가 정착하고 지중해 동부 해안지대에 주로 도시를 건설하여 무역을 주업으로 생계를 잇기 시작했다. 기원전 1400년 경 페니키아인들과 잦은 충돌을 일으키던 민족은 히타이트 족이었다. 그 후 1200년 경에는 역사적 기록으론 남아 있지 않은 미상의 민족(이태리 부족으로 추정)이 쳐들어와 페니키아인들이 살던 해안지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크레타 섬에 살던 블레셋인이 가자지구 땅으로 도망쳐 정착한다. 헌데,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도 블레셋인이 아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부르는 이들도 그저 오랫동안 가나안에 살던 정체불명의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000년 정도부터 유태인이 가나안 땅 남부에 살기 시작했고, 이들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페니키아인들도 가나안 북부 해안지대에서 타이어(또는 티레), 사이돈(또는 시돈) 등 해상교역 도시를 발달시켰다. 당대 이 두 민족은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 공존을 했다. 페니키아의 왕 히람은 동시대 인물인 이스라엘의 다윗왕과 솔로몬왕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구약성경에 나온다. 허나, 앗시리아 왕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을 기원 722년에 멸망시킨다. 또 페니키아의 중심도시 시돈도 678년에 함락시킨다. 해서, 최초의 디아스포라가 발생한다.

   

   

   

기원 전 8세기이다. 헌데, 목축업에 종사하던 히브리인들로서는 먼 지역으로의 이주가 용이하지 않았을 게다. 게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포기하는 것도 모세교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을 게다. 반면 페니키아인은 어떠한가. 종교적으로 아무 제약이 없다. 또한 이전부터 항해술을 터득하는 등 원거리 상업활동에 능숙했던 페니키아인들로서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을 게다.

   

과연 상기한 이주 경로가 유태인 이주 경로인지, 페니키아인 경로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카르타고에 정착하는 대목을 보면, 페니키아인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지 않은가?

   

인드라는 디아스포라라는 그리스어 기원에 유념한다. 지중해 역사에서 최초로 지중해 식민지를 건설한 족속은 페니키아인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카르타고이다. 이후 지중해는 헬라인, 혹은 그리스인들이 장악한다. 헬라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이 행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을 게다. 해서, 가나안인더러 페니키아인이라 부르듯 페니키아식 식민지 건설 방식을 디아스포라로 불렀을 것으로 인드라는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빌론 유수 이후 디아스포라가'이산 유대인''이산의 땅'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왜인가. 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미도 있으나, 그리스 침입 이후에는 남하하는 그리스를 피하는 피동적인 의미도 있었다. 그리스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식민지를 개척하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시대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처럼 본토에서 귀족에게 핍박받던 빈농이었다. 그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해외 이주를 한 것이 아니라 본토에서 살기 힘들어서 불가피하게 이주한 것이다. 그리스 빈농들은 조선 후기 만주로 간 한국인처럼 황무지를 개척하여 옥토로 바꾸었던 게다.

   

정리하자. 디아스포라는 페니키아 시대까지만 해도 능동적인 의미였으나, 그리스 시대에서는 능동/피동적인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의미였지만, 유태인이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에는 오직 피동적인 의미만 남았던 셈이다.

   

   

7. 사두개인, 바리새인 차이가 무엇인가?

   

인드라가 모세교라고 부른 이들은 사두개인이다.

   

"사두개인은 아마 유대교의 사제 사독 (Zadok)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다. 열왕기 상 (2.35)에 따르면 사독은 솔로몬 왕에 의해 새로 세운 성전의 제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에언서 에제키엘 (40.46)에서는 사독의 후손들은 사제직을 대대로 이어받았다고 하며 이들을 유대교에서 이른바 레위(Levi)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사독의 후손들은 에루살렘 성전의 관리를 맞아서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에제키엘 44. 10-31)"

http://ko.wikibooks.org/wiki/%EC%9C%A0%EB%8C%80%EA%B5%90/%EC%82%AC%EB%91%90%EA%B0%9C%EC%9D%B8

   

모세교 형성과정을 보면, 이집트 지중해 유일신 선진종교를 중심으로 가나안 토속종교를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해서, 태생적으로 지중해적이었고, 이런 연유로 바리새인과 달리 사두개인은 그리스 로마 문화에 거부감이 없었다. 

   

반면, 로마제국에 멸망당한 카르타고인이 모세교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와 로마제국에 저항적인 짝퉁 짜라스투라교를 믿을 것인가. 당연히 후자되겠다. 

   

바빌론 유수로 끌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유태인은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조금이라도 교리에 맞지 않게 생활한 사람들을 동족이더라도 잔인하게 내치고 살해했다. 하고, 성전을 재건했다.

   

바리새인이 바빌론 유수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들과 합치할 수 있겠는가. 사마리안인마저도 내치는 바빌론 유수인과 어찌 어울릴 수 있겠는가.

   

이때, 바리새인은 여러 가지 종교를 섞은 것 같다. 쉽게 말해, 유불선을 종합한 동학처럼 자신들에게 좋은 점만 취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와 비타협적 자세를 보여주는 바빌론 유수교, 성전 타파 짜라투스투라, 드라비다족의 내세 관념을 종합하여 바리새파 율법을 창시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인도 피압박 민족이었던 드라비다족은 지배 민족인 아리안족이 내세운 최초의 계급사회에 맞서 내세 관념을 발명했다. 이 믿음은 오늘날 순교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정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대표적인 학자이자 존 콜먼에 의해 국유본 정보원으로 지명된 아도르노가 우리 세계의 가장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면서 인도에까지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예서, 예수가 고타마 싯타르다의 고행에 깨달은 바, 길없는 길로 나선 건 아닐까?

   

   

8. 유태인은 중세 시기 유럽 어느 곳에 정착했나?  

   

    

상기한 지도는 10세기의 유태인 활동 지역이다. 로마제국이 유태인더러 단지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못하게 했을 뿐, 가나안 지역에서 퇴출한 것이 아니다. 모세교에 신앙심이 깊은 유태인이라면 가나안 땅을 떠날 리가 있겠는가. 떠난 이들은 한번 떠난 바 있던 바리새인들일 게다. 유태인은 목축업이나 하던 종자들이었던 반면, 카르타고인은 고대에 아프리카는 물론 아메리카도 탐사하기까지 했다는 일족인 게다.

   

상기한 그림을 보자. 스페인의 유태인 정주 시기보다 카르타고인 정주 시기를 따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포에니 전쟁 때의 한니발을 기억하면 된다.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 주력은 카르타고와 스페인에 있었다.

   

기후적으로 로마 온난기 시기에 일시적으로 중부 유럽에 살 수는 있었을 지라도 이후 혹한이 닥친 중부 유럽에는 야만인들만 거주하였다. 대부분은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 북부 아프리카, 레반트 지역에서 유태인이 산 셈이다. 극히 일부가 로만틱 가도를 따라 중부유럽 지역인 라인란트에 거주했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해서, 중세 온난기 이전까지 중부 유럽에는 국가다운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다. 중세 온난기에 와서야 여러 국가들이 출현한 게다.

   

해서, 이 시기, 유태인이 많이 살던 지역은, 이태리, 스페인, 북아프리카, 바그다드였던 게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아랍 상인 루트인 셈이다.

   

   

9. 아슈케나지는 혈통적 분류인가, 거주민적 분류인가?

   

   

   

아슈케나지나 세파르딤은 혈통적 분류가 아니라 거주민적 분류이다. 세파르딤(sephardim)의 sephard는 히브리어로 '에스파냐'를 뜻한다. 아슈케나지(ashkenazi)의 ashkenaz도 히브리어로 '독일'에서 유래한다. 에스파냐에 사는 유태인, 독일에 사는 유태인인 셈이다. 한마디로 사투리로 분류한 셈이다. 같은 유태인이더라도 독일 액센트가 있으면 아슈케나지이고, 스페인 액센트가 있으면 세파르딤이었던 게다.

   

일반적으로 아슈케나지란 본디 러시아에 살던 카자르인은 물론 라인란트 유역 및 인접한 프랑스 지역에 살다가 십자군전쟁(11~13세기)이 끝난 뒤 슬라브 지역(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으로 이주한 유태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하면, 왜 아슈케나지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처럼 라인강을 건너 동부로 진군했던 것일까?

   

1290년 영국이 유태인을 추방시켰으며 1394년엔 프랑스가 유태인을 추방했고, 1492년 통일 스페인 왕국이 유태인을 추방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이 오늘날 서유럽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게다. 하여, 이들 중 상당수가 라인강을 건너 동유럽으로 향했던 게다. 하고, 이들은 동유럽에서 고리대금업을 중심으로 광산업, 무역업 등 닥치는 대로 장사를 했던 게다.

   

예서, 오인이 있는 게다. 오늘날 유태인에 대한 잘못된 상식 중 하나가 세파르딤과 아슈케나지 종족 자체가 다르다고 여긴다. 허나, 중세까지만 해도 이들은 모두 같은 뿌리였고, 단지 지역적으로 다른 이들이었을 뿐이다. 

   

단지, 러시아 및 동유럽에 살던 카자르인, 혹은 하자르인 때문에 발생한 혼동인 게다. 엄밀하게 보자면, 독일계 이태리계 유태인 및 서유럽 유태인은 모두 스페인 유태인과 핏줄이 같은 카르타고 유태인인 게다. 반면, 러시아,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은 카자르 유태인이다. 

   

해서, 맑스는 자신을 무어인이라고 별명을 지을 만큼 카르타고 유태인이다. 물론 친척도 오늘날 네덜란드 필립스 재벌일 만큼 귀족 유태인 그룹이었다. 반면, 레닌은 몰라도 스탈린이나 트로츠키 등은 천민 유태인, 카자르 유태인 그룹인 것이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귀족 유태인 그룹은 시오니즘에 냉소적이었던 반면, 천민 유태인 그룹은 시오니즘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해서, 맑스도 시오니즘에 매우 매우 냉소적이었다.

   

   

10. 로스차일드는 가짜 유태인인가?

   

   

   

유태인의 장점이 무엇이었던가. 조선도 마찬가지였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좁은 동네를 떠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일본 영화에도 나오지만, 이유없는 거주지 이탈은 반역죄에 준하는 엄벌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에 자유로운 족속은 십자군 전쟁처럼 전쟁을 하는 용병이거나 한자동맹과 같은 원거리 상인 집단이었다. 해서, 역사적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서 살 수밖에 없는 동시에 강한 유대감이 있던 이들 유태인 집단은 이미 로스차일드 이전에 국제적인 통신망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핵심은 궁정 유태인이었다. 궁정 유태인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가는 스페인 왕국의 세파르딤 유태인 추방령 이후 한때 스페인 경제가 큰 위기에 빠졌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궁정 유태인들은 영화 '쇼생크 탈출' 주인공에서 보듯 회계, 재정 문제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하여, 이들은 당대 귀족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던 게다. 

   

예서, 다시 강조하자. 19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는 오늘날 말하는 아슈케나지 유태인, 보다 명확하게 카자르 유태인은 없었다. 단지 독일어 방언이냐, 스페인 방언이냐의 차이 뿐인 카르타고 유태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카르타고 유태인 인구가 매우 적고, 카자르인이 많으니 이들간 혼혈해서 카자르인이 압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허나, 오늘날 가장 혼혈이 잘 이루어진다는 미국에서조차 3%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19세기까지 카자르인이 서유럽에 들어올 일도 없었던 게다.

   

하고, 스페인 추방령 이후 상당수 유태인이 아랍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카자르 유태인처럼 빈한하게 살았다. 오직 극소수만이 스페인 추방령 이후 유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이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남미로 이주하면서 오늘날 세계를 장악한 것이다. 유태인 전체가 아니다. 유태인 중 극히 일부가 세계를 지배한 게다.

   

그 비율은 인류의 0.01%이다.

   

로스차일드 시조, 암셀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작고 땅딸막하고 가무잡잡한 특징이 있다. 이들은 결론적으로 카자르 유태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게다.

   

정리하면, 귀족 유태인이란 수메르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유태인보다는 페니키아 유태인이 적절하고, 페니키아 유태인보다는 카르타고 유태인이 적당하고, 카르타고 유태인보다는 궁정 유태인이 합리적이다.

   

수메르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바리새인 - 스페인 궁정유태인 - 로스차일드

   

   

추신 : 글이 길어져서 1,2부로 나눠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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