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루즈벨트, 그리고 알 스미스 국유본론 2008

2008/08/01 09:54

http://blog.naver.com/miavenus/70033609062

   

   

   

국제유태자본과 루즈벨트, 알 스미스

   

내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대해 비판하면서 기대한 반비판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업적론이었다. 다행히 한국 지식인들과 인터넷 유저들이 그만큼 타락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혹은 잘 몰라서 비판을 안 할 수도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업적 둘을 들라면, 우파라면 뉴딜로 평가할 것이며, 좌파라면 노동관계법 제정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정당한 평가일까. 나는 단연코 노라고 말할 것이다.

   

일단 뉴딜은 한마디면 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자신조차 뉴딜을 평가절하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집권 이전부터 국제유태자본과 철저하게 협력하여 그들의 지시를 받아 당선되었다. 해서, 후버의 제안에도 후버 이미지를 타격하기 위해 후버의 경제살리기 제안을 일절 무시했다. 해서, 차라리 후버댐이 의미가 있을 지경이다. 뉴딜은 성공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실패했다. 그런 이유로 경제 실정으로 지지기반이 약화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남부 표를 의식하여 반린치법을 무산시킨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마마보이였다. 그의 유태인 엄마 가문인, 델라노 가문은(유태인은 구약에 의거 모계 혈통을 따른다.) 중국과의 아편장사로 떼돈을 벌은 300인 위원회 일원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사교육을 받았고, 학교도 귀족학교를 갔다. 그만큼 그는 노동문제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미국 유태인 그룹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일찌감치 미국에 정착하여 부를 축적한 은행가, 노예주들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터전을 잡은 이들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바로 이 계열이다. 반면 1880년 이후로 쏟아져 들어온 동유럽 유태인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계급이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아일랜드인이나 다름없었다. 국제유태금융가들은 흑인처럼 아일랜드인, 이태리인과 더불어 동유럽 유태인들을 경멸했다.

   

일각의 사기치는 역사가들은 그가 노동문제를 알게 된 것이 1910년대 주 상원의원 탈락 후 노예주의 대명사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 윌슨과 시어도어 루즈벨트과의 협조(당대 윌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공화당 표를 분열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하에 해군 차관보가 되어 재직 시에 노동자들의 삶을 알았다는 것이 설명이다. 한마디로 거짓에 불과하다. 그는 1910년대 내내 한 일이라고는 정략결혼으로 (이 당시 국제유태자본 가문들은 왕족처럼 재산 보호와 혈통 보호를 위해 근친을 장려했다.) 사촌과 결혼하여 애정이 없었는데 그로 인해 숱한 여자와 만나 바람이나 핀 것이 전부였다.

   

이에 반해 알 스미스, 혹은 알프레드 스미스는 누구인가. 한마디로 케네디와 같은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시대를 앞선 정치인 탓에 케네디처럼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노예주 남부 민주당원들이 적극 반대한 것이다. 현상적인 이유는 그가 카톨릭 출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비록 최초의 카톨릭 대통령 후보이기는 해도 실제로는 아니다. 그보다 그를 반대한 이유는 그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민주당 후보였기 때문이다. 해서, 그는 1924년에 이어 1928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도 같은 민주당임에도 남부 KKK단은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를 낙선시키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 건국 당시부터 노예제도에 반대해온 메사추세스주나 로드아일랜드주에서만 알 스미스가 승리했을 뿐, 알 스미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대패하고 만다. 남부의 반대 탓이다.

   

알 스미스는 태머니파였다. 태머니파에 대해 나는 이전 글들에서 그 유래서부터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이후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아무튼 아일랜드계가 뉴욕주 정치, 특히 태머니 정치를 장악한 이래로 태머니파는 노동조건 개선에 힘을 기울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시절의 노동관계법을 와그너법이라고 한다. 이때 와그너가 누구인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측근이라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그는 바로 알 스미스와 같은 태머니파였다. 그만큼 알 스미스와 와그너는 노동법 개선에 정치력을 기울인 만큼 개혁적인 후보였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은 알 스미스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태도는 어떠했나. 뉴욕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주민들로 구성된 뉴욕시와 봉건영주가 다스리는 뉴욕주 시골.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주 상원의원이 된 것은 뉴욕주 시골 대표로 봉건 영주의 이익을 대표했던 지극히 수구적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개혁적인 태머니파와 대립한 것은 당연했다. 초기에 시어도어 루즈벨트 인기에 영합하여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이후 낙선한 이유도 아일랜드 갱들과 대립한 동유럽계 유태인 갱들이 루즈벨트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정략적으로 태머니파를 비난하다가 이때에는 태머니파에게 갖은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해서, 1920년대 내내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태머니파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뒤에서 정작 뒷통수를 치는 배신을 때린 것이 바로 1932년 선거였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알 스미스 덕으로 뉴욕주지사가 된 이후로 한 일이 뉴욕 주지사 영향하에 있던 판사들을 동원하여 태머니파와 알 스미스 흠집을 내려한 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바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진정한 면모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악한 새끼, 그 자체다.

   

이에 대해서는 당대 유명한 마피아 갱들의 증언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얼마나 추잡한 인간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으니까.

   

해서, 이런 개 같은 인간에게 영광스런 정치인 칭호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미국의 수치이자, 국제유태자본의 농간이다.

   

그대는 말할 것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노동관계법을 시행한 것은 루즈벨트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말한다. 그조차도 향후 이차대전 포석을 위한, 히틀러와 차별되기 위한, 국제유태자본의 치밀한 계략에 불과하였으며, 이후 노동관계법 개정을 통해 전쟁이 끝나자 대폭 조항을 축소시켰다. 게다가 그가 정녕 개혁에 관심이 있었다면 헨리 윌리스를 부통령으로 재차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트루먼을 부통령으로 삼았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잘 조련된 배우였을 뿐이며, 국제유태자본의 인형이었을 뿐이다.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한다. 국제유태자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한반도를 무대로 한 전쟁을 획책했으며,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를 지원했으며,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을 말이다. 또한 외환위기의 주범이기도 하다. 만일 향후 한반도에 전쟁이나 혹은 경제위기가 온다면 이는 전적으로 국내 사정과 무관한 국제유태자본의 짓거리이다.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국내 어떤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든, 미국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전쟁과 경제위기 위험이 닥친다는 것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예제 정당이 미국 민주당 역사이기 때문이다, 마치 악질 친일 지주 정당이 한국 민주당의 뿌리인 것처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