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프리메이슨,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메이데이의 유래 국유본론 2012
2012/05/02 02:30
http://blog.naver.com/miavenus/70137223776
국제유태자본과 프리메이슨,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메이데이의 유래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5/02
1. 메이데이의 배후는 국유본이다
2. 자유의 여신상 : 1870년대에 왜 프리메이슨은 부활하나?
어제는 메이데이, 노동절이었다. 해서, 주로 대기업 노동자들이 하루를 쉬면서 노동절의 유래를 떠올릴 것이다.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라고도 한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로서, 매년 5월 1일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 유래는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독점기업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미국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전국 노동조합 연합단체인 노동기사단이 결성되고, 1886년 미국 노동총연맹이 탄생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에서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격분한 노동자 30만 명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시위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고, 집회를 주도한 노동운동가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헤이마켓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7년후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경악케 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위한 상황을 보고받고,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여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세계적인 시위를 결의했다. 이렇게 메이데이는 시작되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노동절 [勞動節, Labor Day ]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정도가 여러분이 검색해서 알 수 있는 메이데이, 노동절의 유래일 것이다.
허나, 여러분은 궁금할 것이다. 인드라가 메이데이, 노동절을 언급했다면, 그 역사적 이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인드라가 하니까 여러분이 인월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그간 진보좌파연하면서 쪽발돼중, 쪽발놈현, 쪽발일성, 쪽발석현, 쪽발증산교를 위해 용쓰던 병쉰색희들 몇몇이 이 글 읽고 감동하여 '그간 난 병쉰색희처럼 살았군요.', 하고 반성문 쓰고 인드라의 국유본론으로 정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럼 시작하자.
1. 메이데이의 배후는 국유본이다
남북전쟁 직후 미국에는 전국노동협회가 등장한다. 전국노동협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 조합 중심의 노동자 조직으로서 백인 기득권을 중시하여 흑인과 인디언, 중국인을 배격하는 인종차별주의 조직이었다. 둘, 조직 다수파가 북부 출신이지만 남부를 옹호하는 노예민주당 성향이었다. 셋, 돈을 내면 병역 면제를 통과시킨 공화당에 비판적이어서 이것으로 대중적 지지세를 획득했다.
1860년대 국유본은 남북전쟁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했다. 이때, 미국 정치세력은 둘이 아니라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 남부 세력. 이들은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기득권을 지속시키려는 성공회, 노예민주당, 프리메이슨(금원기사단) 연합 세력이다. 둘, 북부 세력. 이들은 청교도, 공화당, 반메이슨, 링컨 연합 세력이다. 셋, 북부세력이지만, 링컨에 반발하는 프리메이슨 전쟁 지속 세력이다.
사람들은 보통 첫째와 둘째만 있다고 생각해서 링컨이 사실은 노예해방에 관심이 없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하는데, 그건 오해이다. 링컨의 최우선 목표는 미국 통합이었다. 미국 통합을 전제하는 데서 노예해방을 원했던 것이다. 반면, 북부 프리메이슨 세력은 노예해방을 빌미로 남부의 완전한 파멸을 위한 전쟁 지속을 원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남북 프리메이슨 세력은 공동의 이해가 있었던 것이다. 해서, 링컨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오늘날 한국처럼 남북 분단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링컨을 후원한 배경도 국유본이다. 다시 말해, 그린백도 국유본 발명품이다. 당시 국유본 내부에서 링컨 노선을 지지한 분파가 승리했다고 보아야 한다. 인맥만으로도 링컨 - 맑스 - 로스차일드로 연결할 수 있다. 이들은 프리메이슨, 혹은 일루미나티에 적대적이었다.
이 시기 국유본에게 전국노동협회의 쓰임새는 무엇이었을까. 남북 갈등을 극대화시키는 도구였던 것이다. 허나, 링컨 지지 노선이 국유본 분파 투쟁에서 승리하자 국유본은 링컨을 암살하는 조건으로 미국 통합을 결정한다. 해서, 국유본은 키우던 전국노동협회를 버린다. 전국노동협회가 1873년부터 시작하여 오 년간 이어진 공황에서 조직이 쇠퇴한다고 인터넷에서 나온다. 물론 공황이 닥치면 노조가 약화된다. 허나, 이런 일반적 설명만으로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노동기사단의 활약인 게다.
"노동기사단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활동한 급진 성향의 노동조합 전국 조직이었다. 노동기사단이 처음 조직된 것은 1869년이다. 유라이아 스미스 스티븐슨(Uriah Smith Stephens)과 제임스 라이트(James L. Wright) 등 7명의 필라델피아 피복공장 노동자들이 '노동 기사단의 고귀한 질서(Noble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라는 이름의 회합을 가진 것이 기사단의 출발점이었다. 초기 이들의 모임은 비밀 결사 조직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1879년 테런스 파우덜리(Terence Powderly)가 조직을 이끌기 시작하면 노동기사단은 공개적인 전국 조직으로 변신했다. 이때 조직의 명칭도 노동기사단으로 바뀌었다. 노동기사단은 백인 남성 노동자 중심의 온건주의 운동에 반대하고 인종과 성별, 나이, 숙련도를 차별하지 않는 혁명적인 운동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들의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노조 운동은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을 받던 많은 흑인, 여성, 어린이, 비숙련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1880년 2만 8000명이었던 조합원 숫자가 5년 뒤에는 10만 명을 넘어섰고 1886년에는 70만 명을 돌파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886년 5월 4일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affair)으로 과격 성향의 노동운동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서 노동기사단은 세력을 잃기 시작했다. 노동기사단은 1900년 온건주의 성향의 미국노동총연맹(AFL) 등에 흡수되면서 소멸됐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5213
노동기사단 세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 노동기사단은 그 이름에서 보듯 프리메이슨 계열 비밀결사로 출발했다. 둘, 법률가나 금융가가 아니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아니어도 회원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전국노동협회와 달리 개인 노동자도 받아들였다. 전국노동협회는 길드 회원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동기사단은 유색인종도 받아들였다. 셋, 모건이 제이 굴드와 힘겨운 싸움을 할때, 노동기사단이 제이 굴드와 투쟁하여 모건이 경제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기사단이 1885년 파업투쟁에서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인 모건과 경쟁했던 제이 굴드와 맞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한마디로 노동기사단은 모건을 도와 불과 수만 명에 불과했던 노동기사단 회원 수를 수십만 명으로 불린 것이다. 당대 노동기사단에서 스티븐스에 이어 권력을 잡은 포덜리는 케네디, 클린턴처럼 아일랜드계로서 온건한 노동운동을 주장했던 인물이나 오히려 1885년 파업투쟁으로 명성을 날린 셈이다. 헌데, 이듬해 노동기사단은 1986년 헤이마켓 투쟁으로 조직이 쇠락한다. 하고, 곰파스의 전미노동협회가 노동권력을 장악한다. 곰파스가 누구인가. 유태계로서 아버지가 담배수입상이었다. 13세에 아버지 일을 이어 연초사업에 뛰어든 곰파스는 노동기사단에 있다가 1880년대에 노동기사단을 탈퇴하여 독자적 노동조직을 만드는데 이것이 AFL이다. AFL의 목표는 전미노동협회의 복원이었던 게다. 이 시기 미국에 이민을 온 가난한 동유럽 유태인들 상당수가 담배산업에 종사했다. 그리스 선박왕 유태인 오나시스도 담배산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쿠바혁명도 담배산업, 아르헨티나 유대인 체게바라, 뉴욕타임즈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케네디, 체게바라, 박정희는 당대 국유본이 키운 3대 혁명가다.
정리하면, 두 가지다. 하나, 국유본은 필요하면 키우고, 필요할 때 버린다. 둘, 미국 노동운동사만 봐도 프리메이슨 대 유태계, 유태계 대 프리메이슨 대결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이념적으로 표현하면, 프리메이슨(아나키즘, 록펠러) VS 유태계(맑스주의, 로스차일드)인 게다.
2. 자유의 여신상 : 1870년대에 왜 프리메이슨은 부활하나?
인드라는 그간 맑스 이후 줄곧 프리메이슨이 맛갔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1870년대에 이르면, 곳곳에서 프리메이슨의 징조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자유여신상이다.
이런 글 저런 글 2009/09/28 17:47 Posted by 김삼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부르지 말고 '자유인상'이라고 부르세요.".
요 얼마 전 일이지만..로스앤젤레스 한인교계의 원로 명사, 이정근 목사(칼럼니스트)가 뉴욕 한인 교계에다 위와 같은 주문을 해 왔다. 그래야만 뉴욬 한인 교계가 LA 교계보다 수준이 높지 않겠냐는 애정 어린(?) 귀띔과 함께.
사실 따지고 보면, 영어명 'the Statue of Liberty'야 '자유의 상' 또는 '자유상'이 더 정확하다. '자유인(人) 상'이라면 이 목사의 사적인 해석이 다소나마 포함된 느낌이다. [미국인들=자유인들] 같은.
뭐, 어떻게 불리든 필자야 별 상관 없는 일이지만..과연 이 목사를 비롯한 교계 사람들이 '자유 상'의 역사적 뒤안길을 얼마나 알며 또 시인하려나 궁금하던 차, 이 글을 쓴다.
뉴욬 항만의 헏슨 강 어귀에 우뚝 선 이 구리 조각상은 1886년 건립돼 방문자들과 갓 입국자들, 특히 이민자들의 눈길을 받곤 한다. 이 상은 미국을 상징한다는 이콘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의 하나로, 압박에서의 자유나 해방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처음부터 끝, 머리 꼭대기부터 발, 횃불부터 아래 받침대까지 모두 프리메이슨들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상징물이고 여신상이다! "음, 또 그 얘긴가? 제발 좀 그런 얘기는.." 하려는가?
하지만 만사는 겉으로만 보면 안 된다. 내막을 알아야 객관적이고 바른 얘기를 할 수 있다.
광선 뿔과 횃불의 정체
현재 뉴욬주 베들로 섬(일명 '리버티 아일랜드')에 있는 미 국가 기념비인 이 상은 알다시피 프랑스 사람들이 미국에 선사한 것이지만, 프랑스어 원명은 좀 길다. '라 리베르테 에클레랑 르 몽드' 즉 "세계를 밝히는(계몽하는) 자유"이다.
이 공식 명칭은 프리메이슨들의 이상을 드러내는 표어와도 같다. '자유상(像)'의 머리에 쓴 태양 광선 뿔의 관과 한 손으로 높이 치켜 든 횃불로써 잘 상징된다. 관 주위의 광선은 '7 대양'을 상징한다는데..마치 계몽적인 빛보다 지배적 야망 같은 걸 느끼게 된다.
누가 뭘로다 '계몽'한다는 것인가? 이 조각상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계몽 대신 '깨몽'해야 할 헛 꿈을 꾸는 게 아닐지. 참된 계몽의 빛은 오직 세상의 빛-예수 크리스토의 진리 밖에 없다! 그 분은 또 신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다. 참 계몽은 참 진리만으로 가능하다.
오히려 이 광선은 자유상이 본디 태양여신 상이기도 함을 암시한다. 환언하면, 일반인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메이슨들은 태양신으로 보게 된다는 말이다. 메이슨들은 과거에 집착하기에 숱한 신화들을 신봉하면서 자기네 '종교' 의식에 활용해 온 데다..둘레에 광선을 뿜어내는 태양신 우상들이 고대의 제국으로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 대소 국가와 종족을 막론하고 태양신들은 있어 왔다. 한국의 일월성신이나 일본의 아마테라스오호카미처럼.
메이슨들에게 그런 태양신들은 궁극적으로 세계 모든 비밀집단과 메이슨들의 우두머리 신인 루키페르(루시퍼)를 상징한다는 것은 주로 고위급 메이슨들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국의 수많은 크고 작은 기업체들의 로고엔 '해오름' 광선들이 뻗쳐 있다. 숱한 종교 단체들의 로고도 그렇다. 그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다수는 메이슨적 영향을 받고 있거나 또는 메이슨적 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다.
횃불 역시 메이슨들의 매우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다. 이 역시 새벽을 밝히는 '신'-루키페르-을 상징한다. 루키페르는 실은 남성 신이 아니다. 남신도 여신도 아닌 중성 신이다. 일각에서는 에덴 동산에 나타난 뱀 속에 있던 싸탄도 남성도 여성도 아닌 릴맅(Lilith) 신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성전기사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도 메이슨과 직결된 비밀집단인 성전기사단은 수염소+인간 모습의 반인반수형인, 남성도 여성도 아닌 해괴망칙한 형이상학적 이미지인 '바포멭'을 섬겨 왔는데, 이 신상의 정수리엔 횃불이 세워져 있다. 바포멭도 사실상의 루키페르라고 할 수 있다.
성전기사단은 지금도 스카티쉬라잍(SR)의 '기독교'계 고위층이 소속된 단체다.
알고 보면, 이들은 이처럼 참 신이 아닌 피조물을 신인 양 섬기고 있는 허황되고 저급한 족속들이다.
'자유'- 메이슨 야망의 구현
1865년. 프랑스의 문인/예술인들/정치인들 약간 명이 베르사이유에 가까운 한 저택에 모였다. 그중 몇몇은 열정적으로 미국을 애호하는 사람들로서 프랑스/미국 사이의 공통된 자유애의 결속을 절감했다. 초청한 집 주인은 프랑스 국회의원/법률가/교수/시인/작가인 에두와르 르네 르페브르 드 라불레.
이 모임은 훗날 친미 단체-'위니옹 프랑코-아메리케느(프랑스/미국 연합, UFA)의 결성 동기가 된다.
라불레는 당시 몸은 나폴레옹 3세의 수하에 있었지만, 1850년 미국 헌법에 관한 담론, 그 연구의 유익성. 벤저민 프랭클린(메이슨)의 청년기에 관한 논문, '미국의 파리'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소설의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우매와 야망의 광기는 때때로 치유가 가능한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 열광은 불치병이다."
그 말대로 자유광이자 열렬한 친미 '광팬'인 라불레는 이미 3권에 달하는 '미국정치사'도 펴 냈다. 미국 헌법과 남북전쟁(북군)을 지지했고 '프랑스 노예폐지론협회' 의장이기도 했다. 그는 때마침 남북전쟁이 끝나던 그해 미국에 큰 선물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고, 역시 야망이 큰, 한 건축미술가를 통해 실현된다.
라불레의 저택 모임에 참석했던 조각가가 바로 '자유상'의 디자이너/제작자, 프레드맄 오귀스트 바르톨디(일명 '아밀카르 하센프라츠')였다. 그와 라불레는 널리 알려진 프리메이슨이었다.
그리고..'자유상'의 내부 구조는 에펠 탑으로 유명한 알레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작업했다. 또 표면의 구리를 다루는 기술분야를 유젠 비올레-르-뒼이 맡아 했다. 에펠 역시 메이슨임은 두 말 할 나위조차 없겠다.
자유상의 몸통은 강철 프레임에다 껍질을 순동으로 만들었고, 횃불만은 금으로 입혔다. 완성된 날짜는 1884년 5월 21일.
그보다 전에, 미국건축가 리처드 헌트(메이슨)가 설계한 받침대는 신상 바로 아래를 고여 주는 사각형 돌판 기단과 그 아래에 불규칙적인 '별' 모양인 11각형 구조물로 돼 있다. 11은 메이슨들이 매우 중시하는 숫자의 하나이다.
역시 다수가 메이슨을 겸한 관리들은 '자유상'을 옛 포트우드 요새지에 세우기로 결정한 뒤, 1883년 4월18일 받침대 기공식을 했다. 기공식은 메이슨 의식으로 치러졌다. 이 받침대는 1886년 4월 22일 완공된다.
받침대의 정초식은 이듬해 1884년 8월 5일 치러진다. 이 역시 프리메이슨 전통 의식대로였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이날, 정초식을 위해 먼저 울긋불긋 장식된 '베이 리지'호 선상에 수 백 메이슨들과 주/시 관리들이 올라타고 베들로 섬으로 향했다. 받침대 수석설계사 헌트는 메이슨 고위인사들에게 메이슨 연장들을 건넸다.
그리고는 에드워드 엘러즈 (컨티넨털 라지 #287의 수석서기관)가 머릿돌 속 구리상자에 넣을 기념물품의 목록을 읽었다. 즉 미국 헌법(카피), 조지 워싱턴의 고별연설문, 초대부터 당대의 체스터 아터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동메달 20개, 뉴욕시에서 발행되는 여러 신문 한 부씩, 바르톨디의 초상화, E.R. 조운즈의 작품인 '자유에 붙이는 시', 그랜드라지 관련 문서 등.
행사는 전통적인 메이슨식으로 치러졌다. 뉴욬주 그랜드라지의 그랜드매스터, 윌리엄 브라디는 직각자/수준의(레벌)/추 등 메이슨 도구를 사용한 뒤, 모르타르를 붓고 돌을 박아 넣은 뒤, 해머로 3번 돌을 치고 모퉁이돌 정초선언을 했다. 이어서 메이슨 전통을 따라 곡식/술/기름 헌정식을 했다. 이 모든 순서는 초대 대통령이자 메이슨인 워싱턴이 연방의사당 정초식 때 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브라디 그랜드매스터는 메이슨 의식 특유의 질문을 엄숙히 자문했다:
"왜 여기 세워질 그런 구조물의 모퉁잇돌을 놓는 데 메이슨 형제들이 요청되는가?"
그리고는 자답 겸 선언을 했다:
"자유를 증진하고 사람들을 무지와 독재의 굴레 및 구속에서 풀어 주기를 프리메이슨리보다 더 많이 해 온 단체는 없다."
이 선언을 곰곰히 뜯어 보면, 메이슨 겸 크리스천이 있을 수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굴레와 압박에서 풀어 주기를 예수 크리스토와 그의 제자들보다 더 많이 한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리고 나자 부그랜드매스터가 메이슨 특유의 형이상학적 용어를 동원해 가며 연설했다.
"이 조각상의 중량감 만큼 그 물적 부분은 그 개념의 고상함과는 대조되는, 비교적인 몽롱함 속으로 깊이 잠깁니다. 세계를 밝히는 자유! 얼마나 드높은 사상입니까! 자유로움은 인류의 가슴 속의 으뜸가는, 가장 고상한 열망입니다. 이제 보편적으로 시인되는 진리는, 인류가 부분적으로나마 자유를 소유하고 문화화 되고 계몽되고 쓸모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프랑스에서 완성된 자유상은 1884년 수에즈 운하 건설감독 페르디낭 드 레셒 백작에 의해 레비 모턴 대사에게 공식 헌정/인계돼, 이듬해 초 프랑스 프리깉 함 '이세르' 호에 실려 운송된다. 모두 350개의 조립부품이었다.
도착한 부분품들은 1885년초 하역 작업을 끝나자 받침대 위에 조립/건립됐다.
헌정식은 1886년 10월 28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당시 대통령(비 메이슨)이 주재했고 헨리 포터 성공회 뉴욬대교구 주교(메이슨)가 기원을 했다. 제작자 바르톨디는 자유상의 얼굴을 덮었던 프랑스 국기를 걷어냈고, 숀시 디퓨 상원의원(메이슨)이 연설을 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자유상 공식 인수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유가 이곳을 그녀의 집으로 삼았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고른 제단도 소홀히 여기지 않을 겁니다."
'제단'이라..비록 상징적이라지만, 자유를 여신으로 받든 냄새가 나지 않는가. 그 제단에다 뭘 바친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클리블랜드는 메이슨도 아니었을 뿐더러 바로 주지사 시절인 1884년, 자유상 받침대 기금 조성 거부권 행사를 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여신상을 구상했다
바르톨디는 프랑스-독일 국경지대인 알사스의 콜마르 출신이다. 한때 5,000 군대를 이끄는 병참감이었고 1870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도 부대 사령관으로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는 예술감각에다 보히미언 기질이 있어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러 파리로 건너 왔지만 한동안 에짚트/예멘 등지를 여행하다가 수에즈 운하 프로젴트 소식을 듣는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건축가가 됐고 1875년 10월 14일 프랑스 그랑 오리앙 랄사스-로렌 라지에 입단, 프리메이슨이 된다(프리메이슨단은 주로 중세부터 건축/석공의 비밀결사조합이었음). 그의 첫 작품은 콜마르의 라프 장군 기념비. 그 뒤로도 다양한 작품을 연이어 제작, 국/내외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바르톨디는 직접 미국을 여행해 보고 뉴욬 항만이 건립지로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그는 이 상의 제작 이전에도 독립선언서 서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뉴욬시의 마르퀴 드 라파옡 기념상을 제작한 바 있다(1876년).
바르톨디는 에짚트 방문 당시 수에즈 운하 건설계획에 관심을 쏟다가 프로젴트 책임자 페르디낭 드 르셒 백작과 평생 친구가 된다.
그는 수에즈 운하 초입에 마치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있었다는 거대한 등대를 연상시키는 조각상을 운하 입구에 세우는 꿈을 꾸며 계획을 세운다.
그 기본 개념은 고대의 로마 여신 '리베르타스'를, 모델은 에짚트의 팔라하(농사꾼 여인)로 삼아, 머리띠와 횃불로부터 빛이 발산되어 하늘을 비추는 형상이었다. 자유상과 거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즉 여신상이다.
노예들의 삭발한 머리 위에다 씌워 줄 '자유의 모자'(the cap of the liberty)를 한 손에 든 여신, 리베르타스는 바로 자유를 뜻하는 '리버티'의 어원이다(풍요/관용을 뜻하는 여신 '리베랄리타스'와 혼동하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자유를 뜻하는 영어 낱말 자체가 여신 이름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이슨들은 리버티란 말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여신을 떠올린다. '자유상'이 신상이 아닐 순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자유상 제작자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신을 염두에 뒀음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 메이슨들은 이 여신상을 볼 때마다 그들의 이상과 어젠다를 새롭게 굳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우리는 신을 신뢰한다"고 말한다. 표면 상의 말과 제스처와는 달리, 실제로 그들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 즉 예수 크리스토는 결코 아니다!
그들의 신은 본질적으로 루키페르다.
수에즈를 위한 신상의 기본설계가 완성되자 바르톨디는 1867년 에짚트 사람 이스마일 파샤 케디브에게 보였고, 1869년 다시 수정안을 제시하지만 실행되지 못한다.
중세의 암흑과 교회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인문주의-문예부흥을 거쳐 소위 '계몽시대'에 이른 18세기에 해방과 자유의 '컬트'는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적합했다.
'프리+메이슨리'라는 단체명이 뜻하듯 이들은 압박과 구속을 싫어하고 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자임하고 행세해 왔다.
뉴욬항의 자유상은 그래서 중세 교회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해온 메이슨들이 천주교가 혐오하던 바빌론의 이쉬타르, 로마의 리베르타스를 개념적 이상 모델로 삼은 것이다. 여신상의 실제 모델은, 얼굴은 바르톨디의 어머니, 몸통은 그의 애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훗날 미국의 한 정치인은 바르톨디를 방문했다가 그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유!"라고 외쳤다니까 유력한 설이다.
아무튼 바르톨디는 귀국하자마자 기금조성에 들어갔고 프리메이슨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통해 총 350만 프랑에 달하는 거액의 기금을 모은다. 미국에서는 받침대 건설을 위해 헝가리 이민자 출신 언론인인 조셒 퓰리처가 10만 달러를 모금했다.
미 연방의회는 1877년 (메이슨인) 워싱턴의 생일 때, 이 프랑스로부터의 선물을 받기로 공식 결의한다.
메이슨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부각시키고 "지구촌 계몽"에 앞장선 명사로서 온 세계 곳곳에서 온갖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는 데 앞장서 왔고, 거액의 돈을 들여 자신들의 숨은 어젠다와 이상을 반영한 이런 건축구조물 세우기에도 힘써 왔다.
'자유상'은 미국에다 메이슨의 드높은(오만한?) '자유관'을 심고 루키페르의 힘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려는 꿈과 야망의 도도한 표출이다. "우리의 자유의 힘을 보라!"라고 뻗대는 듯.
이래서..일각에서는 자유상은 프랑스의 그랑 오리앙(그랜드 오리엔트) 신전 메이슨들이, 이를 테면, 미국이 최초의 '메이슨 공화국'으로 탄생한 백 주년에 보낸 기념선물인 셈이라는 견해가 있다. 미국은 초대 대통령부터가 메이슨이었으니까.
흥미롭게도 프랑스는 세계 주요 카톨맄 국가의 하나이며..지금 미국은 빠른 속도로 '카톨맄화' 돼 가고 있다. 다른 나라들처럼 뉴에이지 화 돼 가는 것은 물론이고.
연방 대법원과 의회, 수사기관 등에서 카톨맄 세력은 두드러진다. 대법원은 개정 때마다 대법관들을 위한 '붉은 미사'를 드린다.
따라서 미국의 정국은 중세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던 메이슨 세력과 카톨맄 세력의 야합처럼 보이는 건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 증거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치 세력들의 중요한 연결고리의 하나인, 워싱턴DC의 카톨맄 '예수회' 학교-조지타운대학교의 대표 건물인 개스탄 홀에는 천주교 상징물과 함께 메이슨 상징물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
자유의 여신상 제작 배경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6798700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탤리즈먼 뉴욕의 이시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6756974
76.<이성(理性)의 여신>을 경배한 <프랑스 혁명정부>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36899060
프리메이슨이 1870년대에 부활했다. 몇 가지 지표로 설명할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 제작이 이루어졌다. 미국 내 프리메이슨 대학 조직이 재차 활성화되었다. 1875년 블라바츠키가 프리메이슨 신지학회를 설립했다.
프리메이슨이 1870년대에 부활한 배경은 무엇인가.
제국주의가 세계사적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관해서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잘 설명하였고 본 이야기가 아니고 나중에 비판적 검토를 해야 하므로 생략하고 국유본론적으로 설명하자.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0년대 유럽에서 6대 세력은 영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베어링 가문이었다.
예서, 중요한 건 베어링 가문인 게다. 1810년대에도 로스차일드 영향이 상당했지만, 베어링과 비교해서는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았던 것이다. 혹자는 베어링 가문이 있던 자리는 스페인이거나 이태리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다. 스페인/이태리는 프러시아나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등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의미는 베어링 가문이 국가가 아니면서도 국가처럼 6대 세력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국가가 아니지만, 국가처럼 유럽에서 역할을 했던 세력이 베어링 가문 이전에 있었으니 푸거 가문이요, 메디치 가문이다. 예서, 푸거/메디치 가문과 베어링 가문의 차이점이 있으니 로마 교황청에 대한 의존 여부였다. 다시 말해, 이전에 푸거나 메디치가 베어링 가문 역할을 맡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마 교황청의 대리인 자격이었던 게다. 반면 베어링은 로마 교황청에서 독립하였던 게다.
헌데,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콤뮌 사태 직후, 누가 봐도 유럽 판도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로스차일드.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와 프리메이슨 열풍이 일어난 것이 필연적인 셈이다.
나폴레옹은 로베스삐에르 동생 덕분에 출세했다. 박정희와 비교되는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쟈코뱅 출신으로 본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몸바칠 심산이었지만, 코르시카 내부 권력투쟁 탓에 탈북자처럼 탈코르시카해서 코르시카와 프랑스, 나아가 유럽을 통합하는 대프랑스주의 노선으로 나간다.
프랑스 혁명 막바지에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프랑스혁명정부 세력이 나폴레옹을 쑥맥인 줄 알고 얼굴마담으로 뽑았으나 나폴레옹은 오히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프랑스혁명정부 세력을 말아먹는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제를 프랑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파견하여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왕으로 만들어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지배한 것이다.
그뿐이랴. 나폴레옹 3세 역시 젊어서 프리메이슨이었으나, 프랑스 황제에 올라서는 과거 경력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왝더독. 프리메이슨적 열망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서 근대 제국주의의 얼굴마담이 된 것이다.
1870년대. 로스차일드 다섯 아들 중 상당수가 이 시기 사망한다. 세대 교체의 시기였다. 동시에 로스차일드의 최초 전성기였다. 로스차일드가 이 시기부터 행한 국제은행 시스템이 주체가 달라져도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셈이다. 그뿐인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황제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동인도회사 지배였던 인도를 실질적으로 영국 식민지로 만든 때이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손아귀에 넣은 시기도 이 시기다.
이뿐인가. 아니다. 1870년대에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 제국주의에 박차를 가한 때인 게다. 국유본 전략에 따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맑스의 프랑스 내전 책이 잘 팔렸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적대적인 맑스는 1차 인터내셔널에서 별 같잖은 이유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친화적인, 아나키스트 바쿠닌을 내쫓을 수 있었다. 동시에 1차 인터내셔널은 1870년대 이후 사실상 업무가 중지된다.
그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 1차 인터내셔널이 프랑스 파리콤뮌 과정에서 한 일이 없었다. 나중에 이 사태에 언급하고, 책장사한 것밖에 없었다. 둘, 국유본이 파리콤뮌의 배후로 1차 인터내셔널과 맑스를 지목하였다. 셋, 결정적인 이유이다. 그간 혁명가들이 맑스를 신뢰한 이유는 혁명 성공 가능성 때문이다. 당대 혁명가들은 맑스의 자본론에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당대 혁명가들은 맑스가 자본론 따위 쓸 데 없는 현학 짓거리를 하는 대신 당대 혁명을 성공시켜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맑스 개인에게는 별 기대하지 않았다. 독일 촌넘 색희가 헤겔, 헤겔하면서 헛소리를 주절대는데 시민정신에 투철한 중산층이라면 누가 이런 진부한 종말론적 장난질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중요한 건 맑스가 로스차일드 친척이었던 것이 중요 변수였다. 허나, 이 기대가 무너지자, 1차 인터내셔널이 급속하게 몰락한다. 1870년대 1차 인터내셔널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이유는 믿었던 맑스가 로스차일드 친척답지 않게 일을 엉망으로 처리해서 믿을 수 없는 병쉰색희가 되었기 때문이다.
추신 : 술에 취해 더 쓸 수가 없다. 자세한 건 한 달 뒤, 혹은 그 이후에나 기대하시라. 5월 1일 유래가 단지 시카고 투쟁에만 있었다고 본다면, 넌 병쉰이다^^! 5월 1일. 이 날이 무슨 날인 줄 아냐?
일루미나티 창립일이다. 하고, 일루미나티가 괜히 이 날 창립했는 줄 아나? 중동 신화와 연결되어 두무지 이난나 수메르 신화까지 가야 한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인드라가 지금 영적으로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야곱의 불알잡고 하는 맹세의 유래
http://blog.naver.com/genghis98/120134951800
18세기까지만 해도 하나였던 세력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분화했고, 20세기에 이르러 일곱 세력으로 분열한 것이다.
하나,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세력.
둘, 시오니즘 세력.
셋, 이슬람 세력 및 각국 민족주의 세력.
넷, 기독교 세력.
다섯, 공산주의 세력.
여섯, 로스차일드 세력.
일곱, 록펠러 세력.
물론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국유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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