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뮤추얼펀드, 피델리티, 그리고 펀드의 미래 (1) 국유본론 2010

2010/10/01 02:34

http://blog.naver.com/miavenus/70094744015

   

   

   

영국군이 세포이항쟁을 일으킨 포로 인도인을 인간 대포알로 만들어서 학살하고 있다

   

   

곱창전골:

아 오늘 놀았는데,, 번개가 오늘이었군요. 갈 껄,,, 아무래도 추석 끝나고 뵈야겠어요.. 오늘 같은 날 곱창에 쇠주 한 잔 빨면 좋은데, 마포 쪽에 괜찮은 곱창집 알아놨거든요. ㅎㅎ 아참, 인드라님 기회 되심 피델리티 펀드에 대해서 한번 다뤄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라자드 펀드와 비교해서 그 성격, 연원, 투자 성격, 투자 시 그 종목의 주가흐름 등등,,, 어떤 회사에 피델리티가 관계사 3개사의 펀드 형식으로 투자한 후, 고점에서도 블록 딜로 가져갔는데 주가는 그 뒤로 영 아니네요,,, 기회 되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터키에서 껀수는 어느 방향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까요?

   

   

 http://kr.blog.yahoo.com/nyscan33/3954

   

    

INDRA:

글 고맙습니다.

   

오래 전에 질문을 주셨는데, 지금에야 답변을 드리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사실 많은 분들이 질문을 주셨고, 많이 밀렸다. 이전까지 글쓰기를 하지 못해 손 놓고 있었는데, 근래 며칠 전부터 집중하고 있어 지금에야 쓰고 있다. 이조차 9월 28일 번개 후유증으로 오늘 다 쓸 지 장담할 수 없다.

    

1. 뮤추얼 펀드의 기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펀드, 혹은 뮤추얼 펀드를 이해해야 한다. 해서, 찾아보면 상기한 도식이 나온다.  헌데,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이런 식으로 도표화하면 이해하기가 쉬워 당장 써먹을 수는 있지만, 펀드면 펀드지, 왜 이리 펀드 종류가 많을까 하는 궁금증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하여, 보다 근원적인 물음들, 가령 펀드는 왜 필요한가, 이런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이런 데서 역사적이고, 거시적인 구분들을 고려하게 된다.

   

"뮤추얼 펀드의 기원은 1822년 네덜란드의 왕 윌리엄 1세가 투자 수단 (Investment vehicle)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러나 실제 유형적 실체는 1860년경 영국에서 만든 식민지 신탁회사(Colonial Investment Trust)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가가 갹출한 자금을 여러 가지 형태의 투자를 통해 운용하여 그 결과로 나타난 이익을 나중에 분배했던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투자신탁회사는 금융 지원 면에서 미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정 기간 동안 환불을 해줄 의무가 없어 펀드 운용자가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폐쇄형(Closed Fund) 투자신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모습이 현대적 모습의 뮤추얼 펀드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24년이다. 미국에 매사추세츠 신탁기금(Massachusetts Investment Trust)이 5만 달러 규모의 자산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새로운 지분의 계속적인 발행이 가능했고 언제든지 구 주주가 원하면 자산의 시장가격에 근거하여 매도가 가능했다. 이것이 최초의 개방형 뮤추얼 펀드로 기록된다.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펀드에 대한 투기적 수요마저 일어, 1929년 10월 24일 이른바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경제 대공황 직전까지 19개의 펀드로 총자산 규모는 1억 4천만 달러로 급신장세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대공황 기간인 1930년대에는 성장이 크게 둔화되었다. 그러나 뮤추얼 펀드를 규율하는 1940년 투자회사법(Investment Company Act)의 제정은 뮤추얼 펀드 발전에 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뮤추얼 펀드는 1940년대부터 현재까지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1940년 초 펀드 수는 68개, 총자산 규모가 5억 달러 정도였던 것이 1986년에는 1,900개의 펀드와 총자산 규모는 7천 8백억 달러에 다다랐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금리 인하, 경제 발전과 더불어 퇴직 및 연기금 펀드의 증가세에 힘입어 1995년에는 3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는 상업은행(Commercial Bank)에 수탁고를 앞지르는 저축 수단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1997년 말 기준으로 개방형 기준으로 펀드 수는 6,700개 자산 규모로 4조 5천억 달러에 육박하였다. 1998년 10월 기준으로는 펀드 수 7천 2백 94개, 자산 규모는 5조 1천 22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현존하는 펀드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펀드는 1868년 런던에서 설립된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The Foreign & Colonial Investment Trust Plc) 이다. 이 신탁회사는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분산화 전략을 추구하며 외국 정부가 발행하는 정부 채권에 있어서 전문성을 키워 나갔다. 1882년 일본 채권에 투자를 하였고, 이어 1884년에는 홍콩에도 진출하였다. 1891년 업무 영역을 철도, 산업 채권에까지 확장하였다. 1933년 7월에는 외국 및 식민지 신흥시장(Foreign & Colonial Emerging Market Limited)을 설립하여 동남 아시아를 비롯 라틴 아메리카를 공략하기 위한 펀드회사를 새롭게 설립하였다. 1961년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주식시장에 참여하였고, 1987년 영국 신탁회사(The First British Investment Trust)로는 동경 증권시장에 처음으로 상장되기도 하였다. 동 펀드는 10여 년 전에는 한국을 비롯한 태국 시장에도 투자를 시작하였다.  회사의 실적과 자산 금액은 꾸준하게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1997년 말 기준으로 총자산 규모는 45억 달러에 달한다. 현재 외국 및 식민지 투자신탁회사(Foreign & Colonial Management Ltd)의 지분 중 65%는 독일 은행인 히포 은행(HYPO Bank)이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투자신탁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다."  

[출처] 국내 뮤추얼 펀드가 성공적으로 발매된 이유 (* SECURITY MARKETS * Team 2 -) |작성자 igughwa

   

    

이에 대한 인드라 설명은 어찌되나.

   

하나, 펀드는 '계'다.

   

펀드는 기금으로 번역이 된다. 인드라가 쉽게 풀이하겠다. '계'다.

   

둘, 펀드 = 계, 뮤추얼 펀드 = 묻지마 계

   

펀드가 아는 사람끼리 '계'를 했다면 뮤추얼펀드는 모르는 사람끼리 '계주'만 믿고 함께 하는 '묻지마 계'다. 하면, 왜 묻지마 계가 나왔나. 계주가 워낙 수완이 좋고 인기가 높아 '개인 사업자'로 등록하고 계모임을 회사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계원들은 졸지에 소액 주주가 된다. 무슨 말이냐. 이전의 '계'는 계원이 그저 은행이자만 따먹는 것에 불과했다. 허나, '묻지마 계'에서는 계주의 능력에 따라 배당을 크게 먹거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어 수익이 극과 극을 달린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셋, 윌리엄 1세는 왜 펀드의 시조가 되지 못했나?

   

네덜란드 왕 윌리엄 1세는 누구인가.

   

"베른하르트 왕자는 1937년 율리아나(빌헬미나) 여왕과 결혼한 독일 귀족이자, 현 네덜란드 여왕인 베아트릭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이차 대전 때 나찌와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죽기 전까지 받았는데 그 자신은 부정한 바 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 여왕조차 1966년에 외교관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Claus von Amsberg)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클라우스가 독일의 태생이며 나치 소년단을 가입했던 전적이 있다는 이유로 전 국민적인 심한 반발과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율리아나 여왕은 윌리엄(빌럼)3세의 딸이다. 명예혁명으로 부인과 함께 영국 공동왕으로 추대되었던 윌리엄(빌럼)3세가 죽자 독일 출신 윌리엄4세가 네덜란드왕이 된다. 나폴레옹전쟁이 벌어진 1792년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네덜란드왕은 영국 런던에 피신한다. 그리고 도피생활 중 1795년 네덜란드왕은 영국왕실에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권리를 넘긴다. 해서, 네덜란드왕실이 권리를 양도하는 대신 영국 동인도회사에서의 일정 지분을 확보하였을 것이란 추정은 자연스럽다. 이후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1815년 독일 귀족 정치가 가게른의 활약으로 윌리엄6세가 윌리엄1세로서 즉위했다."

국제유태자본과 빌더버그 

http://blog.naver.com/miavenus/70033647523

   

로스차일드 가문이 베어링 가문보다 우월한 지위에 올라서게 한 전쟁, 나폴레옹 전쟁. 이 전쟁이 끝난 뒤 닥친 것은 금융 공황이었다. 인드라는 윌리엄 1세가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은 공황에 대처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즉, 네덜란드 왕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분을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에 넘겼다. 그 대가로 지분을 챙겼음은 말할 나위없다. 나폴레옹 전쟁 후 네덜란드가 독립한 것도 전적으로 국유본 덕분이니까. 문제는 공황이다. 윌리엄 1세는 자신의 자금을 관리할 유능한 궁정 유태인, 또는 관재인, 혹은 로스차일드를 필요로 했다. 허나, 이것이 단지 아이디어에 그친 것은 왜일까. 인드라 추론은?

   

당대는 혁명의 시대, 복불복의 시대였다. 부를 타인에게 맡기고 한가롭게 떡이나 치는 시대가 아니라 신분이 왕족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죽음을 각오하고 삶에 뛰어들어 직접 부를 축적해야 하는 자수성가의 시대였다. 당연 윌리엄 1세의 말이 먹힐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윌리엄 1세의 제안이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은 당대가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었고, 제국주의가 막 태동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국유본은 당대 제국주의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아이디어란 때를 잘 만나야 빛을 보는 법인 게다.

   

넷,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안체

   

영국 동인도회사는 1857년 세포이항쟁 결과로 문을 닫게 된다. 헌데, 신묘하게도 1857년 공황이 발생한다. 이뿐만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본격적으로 수에즈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이 모든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74년에 가서야 문을 닫지만, 그 이전까지 지리한 청산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두 가지 대안을 마련했다. 투자은행 격인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와 상업은행 격인 'HSBC 은행'의 출범. 1870년대말에 이 모든 기획을 주도했던 영국 하원의원이자 전쟁의 신, 라이오넬 로스차일드가 숨을 거둔다. 하고, 1880년대부터 상원의원 내티 로스차일드의 시대가 시작한다. 내티 로스차일드하면 타이타닉이 유명하다. 타이타닉이 가라앉자 보험회사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이때, 로스차일드 은행만 무사했다. 내티가 보험 사업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내티에게 비결을 묻자 내티는 말했다. "그렇게 큰 배가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았다."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 ··· 1%2B1868

   

"잠세트지 타타가 1868년 봄베이(現뭄바이)에 설립한 무역회사에서 출발하여, 印度가영국領이 된 1877년 엠프레스밀(Empress Mill)이라는 綿방적공장을 세우면서 印度산업화의 시발점이 된 상징적인 기업. 1914년 G.D. 비를라(Birla)가 창업한 아디티야비를라그룹, 1958년 디루바니 암바니(Dhirubhai Ambani)가 창업한 릴라이언스그룹과 함께 인도의 3大그룹에 속하며,3大그룹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음 ."

 http://www.kmobile.co.kr/k_mnews/news/ ··· 3D250325

    

하면, 왜 국유본은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가 필요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는 당대 로스차일드의 치밀한 각본 하에서 흑자 부도한 셈이다. 해서, 부를 축적한 주주들을 위한 대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안은 세포이 항쟁이 끝난 후 십년 동안 세밀하게 시나리오가 짜여졌고, 그후에야 비로소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에즈 운하가 영국 소유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 회사가 최초로 투자한 국가가 다름 아닌 일본이다. 일본 근대화는 국유본 덕분이다. 99% 국유본 덕분에 근대화가 되었다. 1% 정도만이 일본인의 야동(AV) 덕분이다.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 ··· 593%259c 

   

   

다섯, 왜 미국인가

   

1907년 금융공황을 일으켜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설립, 장악한 국제유태자본은 오늘날 그들이 중국을 원격조종하듯 미국을 배후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미국 금융시장 판이 커졌다.

   

보스턴은 스스로를 인도 힌두교 최상층인 브라만 계급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브라민스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1850년대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 일찍이 부를 축적한 귀족들이었다. 아버지가 귀족 유태인 계열인 루즈벨트는 어머니 역시 귀족 가문인 델라노 가문인데, 이 델라노 가문 역시 중국과의 아편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이룬 300인 그룹 멤버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마마보이였다. 그의 유태인 엄마 가문인, 델라노 가문은(유태인은 구약에 의거 모계 혈통을 따른다.) 중국과의 아편장사로 떼돈을 벌은 300인 위원회 일원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사교육을 받았고, 학교도 귀족학교를 갔다. 그만큼 그는 노동문제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미국 유태인 그룹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일찌감치 미국에 정착하여 부를 축적한 은행가, 노예주들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터전을 잡은 이들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바로 이 계열이다. 반면 1880년 이후로 쏟아져 들어온 동유럽 유태인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계급이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아일랜드인이나 다름없었다. 국제유태금융가들은 흑인처럼 아일랜드인, 이태리인과 더불어 동유럽 유태인들을 경멸했다. "

국제유태자본과 루즈벨트, 그리고 알 스미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3609062

   

보스턴 브라민스들은 19세기말에 이르러 이미 큰 부를 축적했다. 해서, 이들은 로마시대의 귀족들처럼 금융에 밝은 노예 그리스인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재산 굴리기를 맡길 궁리를 했던 것이다. 해서, 탄생한 것이 관재인이다. 보스턴 관재인은 회사에 고용된 자가 아니라 극소수 자산가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던 것이다.

   

뮤추얼펀드 제국 피델리티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 ··· D2516329 

   

* 원래 이 글을 완성된 형태로 올리려 했다. 허나, 국유본이 인드라와 전쟁을 선포하였으니 인드라도 긴급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마시라. 인드라는 싸움에 임하면 오히려 매우 이성적이다. 이 전쟁은 인드라가 무조건 이긴다. 이미 혁명의 기운은 북조선인민공화국 김정은에서 대한민국 인드라에게로 기울어지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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