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인드라 10대 뉴스 6:

국제유태자본과 국정원 : 노비네파 김종필 VS 뉴라이트 쪽발후락

국정원장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

 

인드라가 CJ문제를 계기로 국유본과 국정원, 국정원 내부 김종필그룹과 쪽발후락그룹을 파헤쳐 현대사를 재조명하고자 하였습니다. 해서, 뉴라이트 전두환이 쪽발후락과 손잡고 왜 노비네파 김종필을 탄압했나, 뉴라이트 전두환정권이 박근혜를 핍박하고, 박근혜정부가 쪽발돼중, 쪽발놈현도 하지 못한 전두환 잡기에 나선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했는데요. 사정이 생겨서 이후로 넘겼습니다. 때가 되면 가령 한국의 체게바라, 김종필을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새롭게 밝히는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러분이 교과서에서 알던 건 사실이 아니라 허구가 많다는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과 CJ :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이후락이다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6/17

 

"1958년 그는 대한민국 국방부 내에 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였다. 79부대, 79호실, 국방부 중앙정보부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이 특수부대는 미국 CIA의 인사가 유재흥, 김정렬에게 미국 CIA 한국지부와의 업무 교류를 목적으로 창설하자고 제의하였고, 1958년 미국 CIA의 한국지부장으로 웨인 넬슨이 부임한 뒤 지부 설치를 독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재흥, 김정렬에 의해 창설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방부 중앙정보부로, 국방부의 지휘를 받았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은 1958년 복구된 CIA 한국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김정렬 국방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 그것이 국방부장관 직속의 79부대였다.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미국 CIA 한국지부장 요청으로 3군 정보요원을 차출해 가칭 중앙정보부 라는 통합부대를 창설항렸다. 김정렬은 이 부대장에 이후락 준장을 앉혔고 이후락 준장은 자신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이름지었다.[5] 김정렬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김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D%9B%84%EB%9D%BD

 

"1959년 어느 날 미 CIA 주요 간부 한 사람 이 당시 국방 장관인 김정렬에게 미국 기관과는 별도[3]의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며 당시 국방부 장관 김정렬에게 제의해왔다.

 

그는 미국 기관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될 CIA 지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싶다고 제의해왔다. 그는 CIA 지부 가 설치되면 그 요원들 에게 외 교관 과 똑같은 치외법권이 보장되어 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4] 그러나 김정렬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미국 중앙정보부, 즉 CIA 간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넬슨은 CIA서울지부를 창설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김 장관에게 넬슨은 전임 장관인 김용우와 CIA부장 앨런 덜레스가 함께 서명한 협약서를 제시했다.

 

김정렬은 이 제안에 대해 CIA 한국 지부가 독자적인 기관으로써 설치되는 것은 곤란 하나,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하여 활동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4] 한미 두 나라의 정보협력에 대해서 규정한 문서였는데 김정렬은 이런 것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넬슨은 이 협약에 따라 CIA지부를 개설하고 이 기구와 상대할 한국측 정보기관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김정렬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김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양국 간의 합의를 거친 결과 미 대사관에는 미 CIA 한국 지부장 웨인 넬슨이 부임했다. 넬슨은 부임 즉시 김정렬 국방 장관 에게 '전임 김용우 국방 장관 시절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국방 장관 사이에는 양국의 정보를 교환 한다 는 비밀 협정 을 맺은 적이 있는데, 이 협정 을 이행 하려면 한국 측에도 GA 상대역인 정보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김정렬은 3군 에서 정보 요원을 뽑아 국방 장관 휘하의 직속 부대를 만들고 그 부대장으로 이후락 준장을 임명했다.[4]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중앙정보부'였고 대외적으로는 이후락 자신의 군번을 딴 '79부대'라는 위장호칭을 붙였다.[4]

 

국방부의 직속 기관으로 국방부 중앙정보부장은 국방부 장관이 겸했다. 그리고 국방부 중앙정보부(79호실)을 운영하는 실질적인 운영자인 실장은 이후락이 맡았다."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B0%A9%EB%B6%80_79%ED%98%B8%EC%8B%A4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이후락입니다.

 

국정원, 중앙정보부의 전신인 최초 중앙정보부(별칭 79부대)는 CIA 요구에 의하여 이승만 정부 때 탄생합니다. 이 시기 이승만 정부는 정보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CIA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CIA 한국지부에 대응하는 정보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서, 이후락이 흥미롭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국방부 직속 기관으로 국방부 장관이 겸임하였습니다. 허나, 당시 국방부 장관 김정렬은 이후락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이유야 뻔합니다. CIA에서 꼭 찍어서 중앙정보부장 실장이 이후락이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락이 CIA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으니 상전 같은 부하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습니다.

 

이는 미국 CIA 탄생 과정을 역추적하게 합니다. 영국 정보부에서 미국 정부더러 영국 정보부 미국 지부에 대응하는 미국 정보부 창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1947년 미국 정부는 CIA를 만듭니다. 해서, 이때, CIA 역할이란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대통령을 감시 견제하고, 영국 정보부 지시 사항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미국은 1973년까지 영국 식민지였고, 빅터 로스차일드의 점령지였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왜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에 비판적이었을까요. 정확히 말한다면, 이승만이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에 비판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이 비판적이었던 것은 이승만이 항일운동가이자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등 외교의 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승만을 감시했던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OSS 대원이었던 유일한이라고 유한양행 사장입니다. 유일한 일제 시대 이력이 심상찮음을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대한민국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은 CIA 요청에 외교가답게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구 조건이 있었겠지요. 한국 국익과 관련된 조건을 내걸었겠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눈치를 보지 않고 독도를 실효적 지배할 만큼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반일 대통령이었습니다. 쪽발과 스포츠 경기를 할 때는 죽을 각오로 이겨라라고 격려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비해 망국적인 한일 어업협정을 한 쪽발돼중, 쪽발놈현을 생각해보세요.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쪽바리 색희를 대통령으로 삼는다는 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창피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청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쪽발 찌라시에 언제까지 세뇌를 당할 것입니까. 

 

이승만 대통령 정도가 되면 통크게 CIA와 협상했을 것입니다. 중앙정보부 만들 터이니 대마도 달라는 식으로 했을 것입니다. 허나, 이는 CIA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CIA는 까다롭기 그지 없는 항일운동가 이승만 대통령 제거 작전을 세웠을 것입니다.  

 

예서, CIA가 그간 요구하지 않다가 왜 1958년에 중앙정보부 창설을 요구했을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베트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국유본 기획이 3차 대전을 한국 전쟁으로, 십 년 뒤에는 베트남 전쟁였던 것입니다. 이후락이 뜬금없이 라오스 반군을 지원하러 라오스에 갔습니다. 중앙정보부 창설은 국내 문제 때문이 아니라 국제 문제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면, 이후락이 왜 라오스에 갔을까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때 적응이 가능한지 사전답사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면, 왜 라오스 파병이 중지된 것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또 통밥을 굴린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인드라는 추정합니다. 국유본은 사전 답사에 이어 라오스에서 한국군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베트남전 투입을 결정하려했을 것입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짜는 없다'는 외교 철학으로 국유본에게 대마도 반환, 남북 통일과 같은 대담한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국유본이 거절합니다. 이후, 국유본은 CIA와 중앙정보부를 통해 419 시위를 배후에서 주동하여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킵니다.  

 

쪽발민주당이 들어섭니다. 대통령은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자에게 빨갱이라고 비난했던 쪽발보선이었고, 국무총리는 쪽발돼중의 스승으로서 일제 때 부역질한 악질 쪽바리 쪽발면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국방부 산하에서 국무총리 산하로 격상합니다. 이후락이 쪽발면 부하가 된 겁니다.

 

해서, 이후락은 516 혁명이 발발하자 체포됩니다. 허나, CIA 강력 요구로 4일만에 석방됩니다. 뿐만 아니라 1963년 12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CIA에게 보고합니다.

 

둘, 북 쪽발일성이 박헌영 뿐만 아니라 소련파를 숙청하였습니다. 국유본은 왜 박헌영이나 김두봉 같은 국내 민족공산주의자들을 놔두고 쪽발일성을 주석으로 임명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그리스와 동유럽에 있습니다.

 

국유본 기획에 따라 스탈린이 동유럽을 먹었습니다. 헌데, 그리스 및 동유럽에서 민족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통치를 거부하면서 티토처럼 독자적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는 국유본이 만든 냉전체제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냉전체제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서 실행한 것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삼차대전인 한국전쟁으로 냉전체제가 안정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김두봉, 박헌영과 같은 민족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하였습니다. 민족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이냐 혁명이냐 묻는다면 혁명일 것입니다. 허나, 쪽발일성만이 민족과 조국을 배반한 천한 피가 흐르는 쪽바리색희답게 쪽발에게 이익을 주고 한반도인에게 재앙뿐인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만식, 김구 같은 민족주의자도 죽였지요. 이때, 쪽발일성이 독립운동가들을 죽인 명분이 뭔 줄 아십니까. 친일파 운운인 것입니다. 애비 색희가 마약 팔다 공산주의자에게 뒈진 쪽발이인 데다가 북 정권 만들 때 좌우합작 독립운동가 출신 내각으로 만든 이승만 내각과 달리 강양욱 등 친인척 쪽바리 색희를 자리에 앉힌 것이 쪽발일성이 아닙니까.

 

허나, 국유본은 쪽발이에 반감이 없는 쪽발 일성을 임명합니다. 이유는 쪽발이색희들이 태평양 전쟁으로 반미했잖아요. 이용하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민족공산주의자들은 항일운동을 했기에 비록 반쪽뿐인 해방이지만 미국을 적대하는 것이 명분이 없었습니다.

 

해서, 국유본은 쪽발일성을 절대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한국전쟁 준비하는데 불과 3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지원인 셈입니다. 이뿐입니까. 당시 모택동이 도와달라고 국유본에게 사정사정했는데 국유본이 중국을 안 도와주어서 모택동이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으로 2선으로 후퇴할 정도였음에도 북한 만큼은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북은 남보다 당시 잘 살았습니다. 자력갱생? 자주경제? 자주국방? 시러베 병쉰이나 아는 개그일 뿐입니다.

 

헌데, 국유본이 스탈린을 숙청하니 쪽발일성이 남로당파와 소련파를 숙청합니다. 이는 국유본에게 혼선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소련파가 국유본 연락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허가이 같은 인물이 이후락, 김종필이었던 것입니다.

 

국유본이 해방 직후부터 1958년까지는 북한 평양에서 소련파 중심으로 북한을 담당하게 하고, 쪽발 동경에서 쪽발을 중심으로 남한 지역을 담당하는 구도였습니다. 헌데, 소련파 숙청으로 변화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쪽발일성에 대한 지원을 끊고, 남한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허나, 이승만, 쪽발민주당 때에는 여건이 맞지 않았고, 박정희 때에 이르러서야 조건이 충족이 되어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쪽발일성은 1964년 이전까지 지원을 받지 못해 주체노선이니 하면서 쌩구라를 까며 초조해하였지만, 1964년에 들어서서 다소 안정화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1964년 소련을 방문한 직후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던 후루시초프가 실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1964년 이후 국유본은 데이비드 록펠러를 통해 북 정권과 연결됩니다. 허나, 병주고 약준다고 할까요? 쪽발일성은 제 2의 한국전쟁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군사력 강화로 나서는데요. 이로 인해 북한 경제가 망쪼로 변합니다. 일각에서는 쪽발정일 때문에 북한경제가 망했다고 하는데요. 쪽발정일 책임도 크지만, 원죄는 쪽발일성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후락 같은 자도 필요했지만 소련파 같은, 박헌영 같은 세력을 국내에서 찾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바로 516 혁명을 주도한 남로당파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셋, 이승만 제거 공작 때문입니다. 당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가 쪽발이 짓을 했는지 다 알 때입니다. 쪽발민주당에서는 그나마 신익희 정도가 쪽발이가 아닌 애국자였는데요. CIA나 중앙정보부 때문인지 죽습니다. 해서, 쪽발민주당은 예나 지금이나 늘 쪽발이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해서, 정권 교체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권 교체를 하려면 419 같은 사건을 CIA가 만들어야했습니다. CIA는 대한민국과 이란, 이집트, 이스라엘 등지에서 선거 조작, 419 시위 조작 같은 사건을 잘 만듭니다.

 

문제는 이후락은 물론 쪽발민주당 정권이 시원찮았던 것입니다.

 

국유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독일 재단을 한국에 도입시키는 등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갑니다.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은 국내 문제 때문이 아닌 국제 문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허나, 이후락과 쪽발민주당 정권 하는 짓이 병쉰이다 보니 국유본 내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모든 일을 하나요? 아닐 것입니다. 사장은 주요 안건만 처리하고 대부분 일들을 임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헌데, 임원이 죽을 쑤면 어찌 되나요? 사장이 두고 보았다가 영 안 되겠으면 직접 개입하죠?

 

국유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문제에 대해 빅터 로스차일드는 516 혁명 전까지 국유본 귀족들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허나, 국유본 귀족 하는 짓이 병쉰이다 보니 빅터 로스차일드가 직접 개입한 것이 516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장기집권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오늘날 노동당 집권당이 세계 최초로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 정부를 승인했던 것입니다.

 

허나, 국유본 귀족들은 박정희 정부에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해서, 스칼라피노, 훗날 삼극위원회 회원이자 한국전쟁은 내전이다 등을 주장한 자가 박정희 정부를 만나고서는 박정희 정부가 사회주의 정부다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하고, 사사건건 국유본 귀족이 주축인 미국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는 공산주의 정부인가, 왜 화폐 개혁하나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화폐 개혁을 할 때도 화폐를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주조했습니다.

 

처음부터 이후락이나 김종필이 국유본 귀족파, 빅터 로스차일드파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1960년대 후반 국유본 권력투쟁이 본격화된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후락이나 김종필 모두 국유본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알파, 오메가였습니다. 이때, 1950년대는 이후락이 알파, 김종필이 오메가였습니다. 허나, 1960년대는 김종필이 알파, 이후락이 오메가가 됩니다. 하고, 1970년대는 이후락이 다시 알파가 되고 김종필이 오메가가 되는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과 CJ :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파 김종필과 국유본 귀족파 이후락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6/1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8 : 빅터 로스차일드, 펜타곤 문서, 베트남, 케네디, 데이비드 록펠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7 01:43

복사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101773

 

 

 

 

 

 

 

 

 

빅터 로스차일드 전성기는 빌더버그를 창설한 1954년부터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임명한 뒤에 암살한 1963년까지인 약 10년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직후 데이비드 록펠러가 1964년에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열띤 환영을 받습니다. 방문 직후 후르시쵸프가 실각합니다. 빅터 로스차일드 애정을 잔뜩 받던 쪽발 일성이 박정희 정부 출범 후 버림을 받았는데, 쪽발일성이 자주국방노선으로 남보다 앞섰던 북 경제를 말아먹기 시작한 것도 1964년입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던 시기인 1964년에 영국에서 소련 스파이 혐의로 조사를 받습니다. 물론 무혐의입니다. 빽이 튼튼하면 씨족스런 골룸빡 아들넘처럼 무죄인 거죠. 병무청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면제 만들 수 있답니다. 허나, 국회의원, 장관 명함으로도 요즘은 면제 힘들다고 합니다. 이번에 삼극위원회 회원된 롯데 사돈, 골룸빡 정도가 되어야 한다네요. 골룸빡은 한반도 쪽발화를 목표로 하는 쪽발교류재단과 도요타로부터 돈 먹은 씹색희 아닙니까. 한국군으로 입대하면 쪽발 순혈을 망치기 때문일까요? 골룸빡이 쪽발에서 태어났다면 자신은 물론 아들도 자위대에 자원 입대헸겠죠? 세상 참 씨족(足)스럽죠?

 

영국 정보부 MI5는 미국 FBI이고, 영국 MI6은 미국 CIA입니다.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 줄여서 딕 화이트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MI5에서 근무했다가 1956년부터 1968년까지 MI6을 책임집니다. 당대 미국 CIA는 MI6 지도를 받는, 사실상 MI6 미국 지부였습니다. 헌데, 이런 MI6 수장 딕 화이트가 빅터 로스차일드의 심복이었습니다.

예서, 중요한 건 심복이던 딕 화이트가 1968년 MI6에서 물러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빅터 로스차일드의 케임브리지 친구 킴 필비는 1968년에 '조용한 혁명'을 발표하며 자신이 소련 스파이로 20년간 활동한 이중간첩이었다고 커밍아웃했습니다. 영국 정보부 서열 3위까지 오른 킴 필비는 3차대전인 한국전쟁 때 영국 정보부 미국 현지 책임자로 주요 정보들을 스탈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 다른 케임브리지 친구들이 나란히 소련에 망명을 하였고, 후에 킴 필비도 정체가 탄로가 나자 소련에 망명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고, 영국 정보부와 미국 CIA는 상하관계가 명확했습니다. 여기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스라엘을 건국시킨 것이나 다름없으니 모사드야 말할 나위없겠지요? 

 

하고, 베트남 전쟁 등으로 노예민주당 위상이 영국 자유당처럼 몰락 위기에 처하자  1968년 시기에 CFR에서 처음으로 국유본 황제파와 국유본 귀족파로 분열하여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영향력을 벗어난 대통령이 처음으로 1968년에 미국에서 탄생합니다. 닉슨 대통령인 것입니다.

 

국유본 황제 빅터 로스차일드는 1964년부터 영국에서 최초 위기를 겪기 시작합니다. 이후 1968년 사건들로 빅터 권위가 땅에 추락하고 맙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난 1966년부터 청와대 투서 사건이 있었던 1969년까지 기간은 빅터 로스차일드 국유본 황제파와 국유본 귀족파간의 묘한 균형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 대통령은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파여서 빅터 로스차일드가 물먹을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케네디에게 패했던 공화당 닉슨이 대통령되기 직전에 한국에 왔어도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헌데, 닉슨이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국유본 귀족들이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파에 대항하여 승리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1968년부터 1973년까지는 빅터 로스차일드도, 데이비드 록펠러도 국유본 내부에서 그 어느 쪽도 섣불리 우세를 말할 수 없던 시기입니다. 허나, 데이비드 록펠러가 점차 국유본 귀족 대표로 부상하면서 갑과 을 지위를 바꾸는 준비기였습니다.

 

1960년~1964년 :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파 절대 우세/ 김종필 절대 우세

1964년~1968년 : 국유본 황제파 VS 귀족파 박빙/ 김종필 VS 이후락 박빙

1969년~1973년 : 국유본 귀족파 우세/ 이후락 우세

 

국제유태자본과 CJ:

역대 최장수 정보부장 김형욱이 김종필 VS 이후락 구도에서 왜 깍두기였나?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6/20

 

국가정보원은 이승만 정부 때 정보부(79부대), 쪽발장면 정권 때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 박정희 정부 때는 중앙정보부, 뉴라이트 정권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까지는 안기부, 쪽발돼중 정권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정보원이었습니다.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부에서 국정원장, 비서실장, 경호실장을 3대 실세로 불렀는데, 이중 국정원장이 으뜸이었습니다. 김종필이 민족공산주의자로 대구 폭동 때 남로당원으로 활약하다 돌아가신 박정희 형 박상희 딸과 결혼한 박정희 인척이었습니다. 게다가 김종필이 박정희 정부 초기 경제개발 계획, 증권 시장 창설, 화폐 개혁,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하였습니다. 김종필이 자타공인 2인자였습니다. 

 

 

역대 국정원장 임기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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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이 임기가 짧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요? 병약하거나 사고로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왕들이 연이어 임기가 짧다면, 다시 말해, 30년을 기준으로  왕권 교체가 잦았다면 왕권이 약함을 의미할 것입니다.

 

오늘날 UN부터 정부나 정당, 기업과 시민사회단체, 심지어 축구감독까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역대 국정원장 임기를 보니 어떠합니까. 박정희 정부 초반 때에 잦은 교체가 있었습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직후, 한국 최초 신자유주의 정권인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쪽발돼중 정권, 쪽발놈현 정권 때 설사해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듯 국정원장을 갈아치웠습니다. 

 

하고, 박정희 정부 중후반, 김영삼 정권, 이명박 정권 때는 국정원장들이 비교적 오랜 기간 맡아 일했습니다. 오래도록 직무를 수행했다면 최고권력자에게 그만큼 신임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는 권력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헌데, 이후락부터 원세훈까지 역대 국정원장(79부대, 정보위원회,  중정, 안기부, 국정원 모두 포함) 중에 김형욱이 가장 오래 하였습니다.

 

 

역대 국정원장 중에서 최장수 국정원장이었고, 박정희 정부 때 3대 실세인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에 으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형욱은 사카린 밀수 사건과 청와대 투서 사건 때 왜 김종필 VS 이후락 구도에서 깍두기 신세여야했나요?

 

삼성 이병철도, 삼성 측과 만난 미국 측도 김종필 VS 이후락 구도를 팩트라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는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는 또 다른 증거인 것입니다.

 

김종필과 이후락이 박정희보다 더 권력이 있었다면, 실세라면, 박정희 정부에서 김종필과 이후락 정권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고려 무신정권들처럼 말입니다. 헌데, 여전히 박정희 정부가 유지되면서 김종필과 이후락이 실세라면 김종필과 이후락 배경, 즉 국유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북에서도 쪽발일성이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1950년대 박헌영, 남로당파, 소련파를 숙청하기 전까지 사실상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한 이유도 국유본이 진정한 실세였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정부 79부대나 쪽발면 정권 정보위원회나 실권을 이후락이 맡았습니다. 김정렴이나 쪽발면이나 얼굴마담에 불과했습니다. 그처럼 김형욱 역시 김종필의 얼굴마담이었던 것입니다.

 

하고, 김종필과 이후락은 그 지위에 상관없이 국유본(CIA)이 박정희와 동급인 국유본 스파이 활동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감시하면서, 국유본이 지시한 대로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2대 중앙정보부장 김용순과 3대 중앙정보부장 김재춘 교체를 봅니다.

 

기존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cyworld.com/qwertykey/7409227

 

요약하면, 516 혁명세력이 민정이양한 후 군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는데, 김종필이 공화당 창당을 비밀리에 하다 방첩대장 김재춘에게 발각이 됩니다. 서북세력이 주축인 육사 5기 김재춘이 박정희 정부를 몰아붙여서 박정희 정부가 수습책으로 김종필을 물러나게 하고, 육사 3기 김용순을 내세웁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재춘이 들고 일어나 육사 5기 김재춘이 3대 중앙정보부장이 됩니다. 헌데, 김재춘이 육사 11기 전두환과 함께 김종필과 육사 8기를 모두 제거하는 76 쿠테타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물러나고 육사 8기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허나, 기존 설명들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육사 5기 김재춘이 방첩대장에 불과하였는데, 김종필 공화당 창당을 어찌 눈치 챌 수 있었을까요? 설령 감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면 감히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항할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방첩대장이 중앙정보부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면, 그는 누구일까요?

 

 

이후락입니다. 이후락은 미국에서 간첩 교육을 받은 뒤 58년부터 61년까지 CIA 지령을 받고 중앙정보부에서 인맥을 형성하였습니다. 516 혁명 후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어다가 4일만에  CIA 덕분에 풀려났습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관련 인물이 3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인물을 김종필 혼자 통제하도록 CIA가 허락했을까요? 아니죠.

 

이후락 라인은 본디 자신들이 갑이다, 알파다 하고 여겼을 것입니다. 허나, 쪽발민주당이 너무나 무능하여 국유본 황제 빅터 로스차일드 분노를 삽니다. 해서,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가 직접 챙겨서 탄생한 것이 김종필 라인입니다.

 

이후락 라인과 달리 황제 직계 라인이니 이후락 라인은 순식간에 을, 오메가로 전락합니다.

 

예서, 국유본과 빅토 로스차일드의 정보 관리 기법이 어떠합니까.

 

http://blog.naver.com/maria1483?Redirect=Log&logNo=90144916379

 

영국 정보부 예를 들면, 영국 정보부는 알파오메가팀을 두었습니다. 가령 시온주의 팀이 있으면, 반시온주의 팀이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각 팀이 오직 그 팀만을 위해서 활동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영국 국익에 중대한 사유가 발생하였을 때는 특정 팀을 근소하게 우세하게 만듭니다. 정반합 헤겔 변증법입니다.

 

그처럼 김종필 라인을 만들었다고 하여 이후락 라인을 홀대한 것이 아닙니다.

 

김형욱이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으로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후락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이후락 라인 태클에 박정희 정부는 이후락을 1963년 12월 권력 핵심부인 비서실장으로 임명합니다.

 

박정희를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김종필-김형욱 라인과 이후락 라인을 통해 박정희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했습니다. 해서, 박정희는 경호실장 박종규에 많이 의존하였지만, 박종규 후임격인 전두환도 역시 국유본 CIA가 키우던 인물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이중삼중으로 감시당했던 것입니다.

 

국정원 고위직 인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청와대라도 중요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청와대 감시 자료를 청와대와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형욱이 삼선개헌 지지율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1969년 12월에 물러날 때 같은 날 이후락도 비서실장에서 물러나 주일대사로 영전됩니다.

 

기존 설명으로는 주일대사로 영전된 것을 좌천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국유본은 국정원장 임명권 뿐만 아니라 퇴임 결정권도 있습니다. 박정희 마음대로 국정원장 퇴임을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정희가 아울러 쿠테타 모의한 전두환을 키워주었다구요? 박정희가 전두환 키워주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을 키운 건 국유본입니다. 기회되면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CIA를 제외하고 전두환 정체를 잘 아는 오늘날 유일한 역사적 인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마자세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천지인

 하늘 天

 땅 地

 사람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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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처럼 자유롭게

 인식론 :

물처럼 유연하게

 실천론 :

바위처럼 든든하게

 육하원칙 인간형

 When 시간

 Where 장소

 What 사물

 육하원칙 인간형

 why 이유

 How 방법

 Who 사람

 2014 인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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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by 인드라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길을 간다고 생각했었다 

 

뒤돌아보니  

우연히 누구를 만났고 

낯설은 무엇이 있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니 반갑고 

낯설게 대하니 좋았다 

 

내가 사랑한 것은 

누구였을까 

무엇이었을까 

길이었을까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바리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 인드라 창작 뮤지컬 마법천자문 주제가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1961년 5·16을 결행한 박정희는 10일 만인 5월 25일 우리나라 농가의 80%가 해당되는 농가고리채 정리를 혁명적으로 단행했다. 이는 해마다 찾아오는 춘궁기의 절량농가(絶糧農家) 발생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보릿고개를 추방하고 수백 년 숙명처럼 이어져온 농촌의 악순환을 단절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였다. 흔히 박 대통령은 농업을 등한시하고 그 희생 위에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고 하는 비판이 많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5·16 직후부터 농토의 지력 향상과 농업용수 개발, 경지정리를 역설하고 이를 농촌 근대화를 위한 주요사업으로 추진했다. 지력 향상을 위해 퇴비 증산, 흙 섞어 넣기(객토), 깊이 파기(심경), 가뭄에 대비하여 논 우물 파기(관정)와 영농 기계화를 위해 경지정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식량증산의 토대를 튼튼히 해 나아갔다. 다수확 통일벼를 1967년부터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되었고 영농의 과학화와 경지정리 및 영농기계화의 확대로 쌀 수확이 연차적으로 증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리·잡곡 혼식, 분식 등의 계도와 권장이 시행되었으며 청와대도 이에 솔선수범하여 보리·잡곡밥, 국수, 짜장면 등으로 메뉴가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분식이 대부분이었는데 김정염 비서실장과 나는 점심으로 청와대 식당에서 급식해 주는 국수를 수년 동안 먹었다.

박 대통령은 1973년 다수확 볍씨 개발과 영농기술 지도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애쓴 농어촌진흥공사 직원 7000명 전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에 해당하는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해마다 열리는 모내기 행사 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고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와 점심을 들었던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정부는 매년 다수확왕을 뽑아 시상하는 등 농민들의 증산 의욕과 경쟁심을 북돋아 주었다. 그 결과 쌀 수확이 해마다 늘어나 1977년에는 수확량 4170만 섬을 넘어서면서 쌀 자급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쌀 자급은 자주경제의 기반이며 식량 무기화에 비추어 자주적인 안보의 또 다른 대들보를 구축한 것이다.  

 

전국의 수리안전답 비율은 87%에 이르러 하늘만 쳐다보고 짓던 영농방식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5000년 동안 자연에만 의지했던 홍수와 한발을 극복하고 물을 관리하는 치수의 위업을 그 시대에 이룩한 것이다. 1973년 10월 15일 소양강댐이 준공되던 날 박 대통령은 즉석치사 첫머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응전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는 바위산을 헐고 돌과 흙을 쌓아서 태산을 만들고 강줄기를 막아서 아시아 최대의 사력댐을 건설한 역사적 장거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간 의지의 승리를 보여준 것이다.” 

박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있어서도 선 건설, 후 보완의 고속도로 건설원리를 적용하여 사태방지를 위한 속성수 식목을 우선하되 장기적인 경제림 식재와 밤나무 등 유실수 재배를 병행하여 산림녹화와 소득증대를 기하도록 했다. 밤나무단지에서 대량생산된 밤 소비를 위해 밤과자와 밤통조림을 개발토록 했으며 밤과자 시식회를 청와대에서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내가 보통학교 다녔던 일제 때에는 집에 간식거리가 없었는데 이제 밤, 대추, 감 등 유실수 재배로 농촌소득 증대뿐만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의 간식거리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 결과 1970년대 하반기에는 전국의 산림이 울창해졌다.

http://ilyo.co.kr/detail.php?number=70407&thread=11r04

 

 

 

 

쪽발돼중(도요타 다이쥬)은 새벽에 몰래 가서 쪽발왕 조문하다 들킨 것

손광호 기자가 김대중을 우연히 포착하여 찍어서 단독 특종한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김대중이 새벽에 몰래 가서 조문하다 들킨 것이라서 당시 독립운동단체에서 들고 일어날 정도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헌데, 국유본이 김대중이 쓸모가 있는 것인지 묻어가기로 해서 조용하게 끝난 사안이다^^! 당 차원에서 김대중을 보낸다? 평민당인데? 평민당 보스가 김대중인데, 김대중이 김대중을 보냈다? 아니면 평민당 주인이 국유본이거나 일본 일왕이어서 김대중을 보낸 것이거나! 참고로 인드라는 김대중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국유본은 친일파 대신 인드라를 지지하라!

오늘 경찰이 두번이나 다녀갔다. 보통 경찰이 아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전두환 정권 때 인드라는 데모하다 감옥에 갔다. 군대에서는 보안사에서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아 큰일날 뻔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노동해방을 부르짖는 문건 때문에 요시찰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정권 때는 수시로 정보과 형사가 찾아왔다. 노무현 정권은 인드라에게 고소한다 어쩐다 식으로 간접적인 협박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경찰을 보냈다. 허나, 이런 국유본 경고에 인드라가 두려워했다면 어디 인드라일까?

 

한국에서 출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친일파 뿌리인가부터 따져야 한다. 같이 운동권을 하더라도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안 된다? 그건 무능하기 때문이거나, 똑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친일파 출신이 아니거나, 친일파 출신 똥구녕을 빨아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분 중에 혹 능력이 있다면, 한국사회에서 즉각 친일파 세력이 달라붙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친일파 세력 배후에는 국유본이 있다. 그 친일파 세력은 늘 자신을 진보나 좌파로 포장한다. 혹은 독립군, 민족주의 세력으로 포장한다. 허나, 그들 뿌리를 캐면, 99% 친일매국노들이다.

 

여러분 중에는 의아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남쪽에서 행세한다는 넘들이 왜 북한에만 가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지를 말이다. 일각에서는 그만큼 김일성이 항일운동 정통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아니다. 정말 아니다. 김일성이야말로 원조 친일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한에서 무슨 행적을 보였는데? 이승만 내각을 문제삼아 항일운동가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했는데?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금지한 것이 마치 이승만 의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아니다. 국유본 지시이다. 동시에 김일성 내각에서는 친일파가 없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역시 오해이다. 심지어 김일성이 중용한 인척도 친일파였으며, 김일성이 존경하는 김일성 아버지도 일제와 마약거래를 한 혐의가 있다. 그 때문에 만주 공산주의자가 김일성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세 가지 친일파가 있다.

 

하나, 가짜 친일파

박정희처럼 국유본과 친일파 공작으로 친일파 누명을 쓰고 쌩고생을 하는 이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친일파가 아니다. 오히려 친일파들이 가장 증오하는 이가 박정희이다.

 

박정희 아버지는 무관 출신으로 김구와 같다. 구한말 동학에 가담하여 혁명운동을 하나 실패하자 산골에 은거한다. 해서, 박정희 형제들은 한편으로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핏줄 탓인지 혁명운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가 가장 따르던 박상희는 남로당 핵심당원으로 대구폭동 주역이었다. 해서, 죽음을 당했다. 박정희 자신도 여수반란 사건 주동자 중 하나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만 확인해도 된다. 박정희가 교사로 있다가 일본인 교장 휭포에 격분하여 때려치고 만주로 간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힘이 진리임을 여러 애국지사들 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힘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나폴레옹 길을 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 박정희는 가짜 친일파이다. 진짜 친일파에 의해 모함을 받는 자다.

 

둘, 부역 친일파  

이들은 친일파가 아니다. 그 뿌리가 박정희처럼 친일파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역 친일파가 된다. 왜? 한반도 지배권은 국유본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유본은 남북에서 독립군들을 제거하고 친일파를 은밀히 앞세웠기 때문이다.

 

해서, 이들이 살려면 부역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일을 이야기하고, 독립군을 말해도, 국유본 뜻을 따르지 않으면, 김구처럼 파시스트가 되고마는 것이다. 허나, 한반도에서 파시스트가 누가 있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만큼 타인종, 타민족에 개방적인 족속들이 없다.

 

셋, 정통 친일파

보통 조중동을 정통 친일파로 보는데, 김대중과 노무현도 정통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을 해먹을 수 없다. 여러분은 오해를 한다. 조중동의 숨은 실력이 드러낸 것에 있다고? 아니다. 잘 생각해보라. 조선일보를 읽다 보면 이상한 대목이 있다. 정치 사회면에서는 누구보다 반공, 보수, 우파적인데, 문화면, 종교면에만 가면 좌파 찬양, 진보 찬미에 나서는 조선일보를 만난다. 이것이 단지 상업성 때문일까. 아니다. 조선일보와 창작과비평사 등으로 연계하는 한국사회 친일파 인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는 숨은 친일파들이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진보인 척, 좌파인 척, 인민의 대변자인 척한다. 사회 곳곳에 있다. 그들이 왜 친일조중동은 물론 친일매국수구찌라시 한경오프엠에서 환영받는가. 국유본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저 실험체라고 여기면 된다. 어느날 갑자기 동해 지도가 발견된다. 또 어느날은 일본해 지도가 발견된다. 이런 것 당신은 모른다. 수백년 전에 무슨 일이 한반도에서, 동북아에서 일어났는지 여러분은 모른다. 그저 세뇌된 이야기만을 접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강조한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 99%는 친일파에게 담보잡힌 넘들이다. 이력이 투명할수록 의심해야 한다. 똥구멍이 제 자리에 박혀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 길을 걷는데 똥구멍 쪽이 엉거주춤하면 의심해야 한다. 이런 넘들이 대통령이 되면 노무현처럼 나라를 망친다.

 

그들은 인민의 적이다.

 

여러분은 공개한 남북한 역사를 지나치게 신뢰할 필요도 없고, 인드라 이야기를 무작정 신봉할 이유도 없다. 인드라 문제제기가 지나치다 여기면 지금부터 공부해보시라.

 

인드라가 강조한다. 지금 강남좌파들과 길거리좌파들과는 종자가 다른 사람들이다. 강남좌파는 한나라당 정두언이나 열린우리당 노무현처럼 그 뿌리를 캐면 친일파다. 강남좌파란 강남우파와 혈연관계이며, 친일파의 후손일 뿐이다. 반면 길거리 좌파이든, 우파이든 그야말로 부화뇌동인 게다, 인드라처럼- 

 

그간 국유본이 한반도에서 친일파를 지원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국유본 만큼은 이런 인드라 이야기가 한치 거짓이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이제 친일파의 역사적 임무는 끝났다. 이제 인드라가 나서겠다. 국유본은 여전히 친일파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여기는 것같다. 인식을 바꾸게 해줄 것이다. 

 

인드라는 국유본에게 제안한다.

국유본은 친일파 대신 인드라를 지지하라.

더 나은 시나리오를 제공하겠다." 

 

 

 

 

동학혁명 한글날 그린벨트 산별노조 의료사회주의 교육평준화 새마을운동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서민 등골 빼먹는 협찬인생, 일인 복마전, 롯데 사돈, 쪽바리에게 후원받는 유일정치인 골룸빡 처단

한국의 야스쿠니, 쪽발놈현 무덤은 한반도에 저주를 내리는 대못이다

쪽발놈현 무덤 철거하고,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하자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4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타도해방투쟁으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놈현 정권이 다른 부문에서도 대한민국을 철저하게 짓밟았지만 경제 부문에서 특히 죄악상이 심합니다. 쪽발놈현정권이 경제부문에서 저지른 죄악들이 굉장히 많지만, 정리하면 다섯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 경유세 인상 등 간접세 인상으로 서민 등골 빼먹기,

 

둘, 그린벨트 해제로 골프장 난개발과 저축은행 프로젝트 파이낸싱 비리로 저축은행 대규모 부실사태와 지방 미분양 아파트 폭증,

 

셋, 거래세 인하를 막고 기존 보유세를 놔두고 종부세를 만들어 수도권 집값을 폭등시키는 등 한국 부동산 대혼란을 가져온 것,

 

넷, 골목상권을 지켜야할 타이밍에 쪽발석현과 니나노하면서 재벌들의 골목 상권 침투를 방치한 것,

 

다섯,1997년 외환위기 교훈이 단기차입금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단기차입금 증가함에도 방관하여 제 2의 외환위기를 초래할 뻔했다는 것. 

 

FTA나 비정규직 문제, 농촌문제, 중소기업 문제, 경기부양 문제 등을 뺐습니다. 딱히 쪽발놈현 정권만 문제가 아니니까요. 허나, 상기한 문제들은 쪽발놈현 정권의 패악질입니다. 예서, 가장 큰 패악은 외환위기 방관입니다.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무인도에서의 처세술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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