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올림픽 국유본론 2008
2008/08/18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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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과 올림픽
올림픽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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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시온의정서의 충고 : 대중을 스포츠에 미치게 하라
참 신기한 일 중 하나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하는 유태인들이 유독 스포츠 분야에서만큼은 조용하다는 점입니다. IOC가 공식적으로 국가별 메달 집계를 하지 않지만, 비공식적인 메달 집계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국 언론들이 국가별 메달 집계를 발표하며 호들갑을 떨지만, 스포츠 분야에서 유태인들이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EPL에서 맨체스터유나이티드나 첼시 구단주가 유태인이라는 것, 퍼거슨이 유태인의 흔한 성씨 중 하나라는 것, 지난 첼시 감독이 유태인이었다는 점 등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내가 기억하는 이스라엘 선수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흔히 운동권에서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3S정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중을 스포츠, 영화, 섹스로 세뇌시켜 현실을 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원조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시온의정서'에 있습니다. 여전히 위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위서 여부를 떠나 그 주장만큼은 오늘날의 현실을 매우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대중을 스포츠, 연예 사업에 미치게 해서 바보로 만들라는 대목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둘, 쿠베르탱 이전의 근대 올림픽 역사
보통 프랑스 쿠베르탱 남작에서부터 근대 올림픽 운동을 기술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쿠베르탱 이전에 이미 각국에서 고대 그리스 올림픽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이미 올림피아라는 이름으로 스포츠 제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근대 올림픽 운동에 대해 유태인과 프리메이슨의 음모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은 과연 사실일까요? 나는 이전 글에서 프리메이슨이란 허구에 불과하며, 국제유태자본의 자기 방어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여, 프리메이슨을 제거하고, 유태인이란 일반을 제거하면, 남은 것은 국제유태자본이라 할 수 있는데, 해서, 과연 히틀러가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였나 추론해보기로 합니다. 물론 현재 자료는 매우 빈궁합니다. 해서, 이 글은 완결이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시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돌발적인 의제 제기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의견들이 오가고,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긍정되어 보다 실체에 접근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로스차일드는 알려진 것과 달리 히틀러에게 탄압받은 사례가 전혀 없습니다. 있다면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가 딱 하루 구금되었을 뿐인데 곧 풀려났을 뿐입니다. 오히려 국제유태자본과 히틀러는 매우 좋은 사이였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히틀러와 유태인 일반과는 안 좋은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셋, 그리스 독립전쟁과 올림피아
그리스 독립전쟁
http://100.naver.com/100.nhn?docid=25835
그리스인들은 1820년대에 당시 오스만투르크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는데, 국제유태자본의 중핵인 로스차일드가 최초로 발칸반도에서 돈놀이를 떠올리며 그리스를 주목하게 됩니다. 15세기 이후로 지중해 무역이 퇴조하여 이태리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몰락한 상황에서 그리스를 노릴만한 이유가 없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로스차일드는 누구보다 수에즈운하와 같은 구상을 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지중해 해상권이 다시금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역사는 결과적으로 뜻대로 되었습니다. 이후 그리스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한반도만큼. 영국 정보부가 미국 정보부를 승인하면서 최초로 넘긴 사안이 그리스 문제 개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 국가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해도 그리스 해운업자들만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국제유태자본과 긴밀히 협조한 유태인 오나시스가 대표적입니다. 국제유태자본이 관심을 기울인다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한 예입니다. 오나시스와 같은 이들만 부자가 될 따름입니다. 오히려 대다수는 더 가난해집니다. 이것이 국제유태자본의 충견, 김대중, 노무현 치하의 대한민국 현주소이었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가 뒷돈을 대서 영국은 오스만투르크를 물리치고, 런던회의에서 그리스를 독립시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공화국 바램과는 달리 군주국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스차일드가 뒷돈을 대면 본전을 뽑아야 하였는데, 방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패전국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국이 그리스를 해방시킨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에게 돈을 내라고 하게 됩니다. 해서, 그리스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빨아서 로스차일드에게 갖다 바칠 김대중, 노무현 같은 충견을 구하다 보니 그리스와 아무 상관이 없는 독일 귀족 오토를 그리스 왕으로 옹립하는 것입니다. 오토는 그리스 왕이 되기 전까지 그리스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여, 오토는 왕에 오른 뒤, 그리스인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국제유태자본, 혹은 로스차일드의 식민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처럼 오토왕은 국제유태자본에게 임명받아 근본적으로 충견일 수밖에 없었기에 그리스인들의 밑으로부터의 독립의식이 워낙 강고하므로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국제유태자본에게 돈을 갖다 바치려면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려 착취해야 하는데 반발이 일어나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친일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쓸 데 없이 민족주의자인양 하는 것이고,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친일민주당 대표가 김구묘역에 참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한국역사에 대한 모독이요, 지하에 있는 김구가 친일민주당 대표에게 침을 뱉을 일입니다. 이처럼 별 것 없는 분야에서는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척하면서 실제로 오토는 오직 국제유태자본의 충견으로 그리스인들을 착취하는 식민기관이었을 뿐입니다.
상기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고대 그리스 영광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올림피아 대회를 적극 고려했던 것입니다. 물론 고유한 스포츠 제전이 아니라 산업박람회 형식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해서, 꾸준히 열립니다.
넷, 쿠베르탱의 야심 : 나폴레옹 시대의 재림?
그러나 상기한 그리스의 노력은 그리스 민족주의를 자칫 고양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는 국제유태자본의 이해를 훼손시키는 일이 틀림없었습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에게 저항하는 그리스 민족주의를 죽이면서 스포츠로 대중을 미혹케 하는 국제적 이벤트를 고려한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쿠베르탱 남작은 이십대에 수차례 영국을 다녀와서 얻은 교훈이 영국 국력의 원인은 체력에 있으며, 그 체력을 키우는 스포츠에 있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영국 국력의 상승에는 국제유태자본이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하였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제유태자본이 영국을 택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장미전쟁과 헨리 7세 덕분으로 젠트리라는 신흥 지방 지주들의 부상입니다. 이들의 결합 하에 영국은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왕정체제를 형성하게 됩니다.
둘, 그 덕분에 로마 카톨릭에서 이탈하여 국교회가 탄생하게 되며, 이후 국교회보다 더 과격한 각종 신교가 범람하게 됩니다. 칼뱅은 여타 다른 종교개혁가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상업, 특히 고리대금업을 용인하였습니다.
셋, 영국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여 이깁니다. 해군 전투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따라서 쿠베르탱이 주목한 것은 해군 전투력이란 소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대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영국 해군의 실상이 어떠했습니까.
나폴레옹 당시의 영국 해군의 생활
http://blog.daum.net/nasica/5512965
당대 보불전쟁 등에서 참패한 프랑스의 귀족으로서는 위대한 나폴레옹시대의 재개를 바라며 이웃 세계제국 영국의 장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당대 프랑스가 허약한 것은 지배계급이 향락에 빠져 몸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쿠베르탱 남작이 주목한 것은 영국 지배계급인 젠트리를 보아 하니 평화시기에도 귀족적인 스포츠로 신체 단련을 거듭하여 전쟁할 때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나 싶은 것입니다.
다섯, 올림픽의 임무 : 유럽을 로마 카톨릭에서 해방시켜라?
흥미롭게도 쿠베르탱은 1896년 최초 올림픽을 아테네, 1900년 파리, 1904년 세인트루이스에 이어 1908년을 런던에서 합니다. 그런데 세계 대전 이전까지 개최된 도시들을 살펴보면, 파리, 베를린, 앤트워프를 제외한 대부분 도시들이 신교 지역입니다.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정교회 지역입니다.
파리야 쿠베르탱이 애초에 염두한 곳이고, 앤트워프는 1차 세계대전 영향이 큽니다. 벨기에가 제1차 대전으로 그 어느 곳보다 피해가 많아 재건 의욕을 북돋게 한다는 뜻에서 제7회 대회를 앤트워프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 이어 2차 대전에도 발지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한반도를 떠올리면 됩니다. 러일 전쟁과 청일 전쟁, 그리고 국제유태자본이 치밀한 각본을 짠 3차 대전으로서의 한국전쟁...
문제는 베를린입니다. 쿠베르탱과 독일 스포츠지도자들과는 사이가 안 좋았던 듯합니다. 독일은 영국 스포츠와 달리 독일 체조에 상당한 관심을 표하다 이후 참여했지만, 독일인이 지금도 그러하듯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시기 란츠크네이크 용병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독일은 지난 역사에서 쉴 사이 없이 전쟁터가 되어 질병과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엄청납니다. 국제유태자본이 형성되기 전에는 왕족들의 용병전쟁으로 인해, 국제유태자본이 형성된 이후에는 돈벌이를 위해 전쟁이 2차 대전까지 계속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독일 특유의 민족주의는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외교력도 상당하여 베를린 개최를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차 대전이 일어나서 1916년 베를린 올림픽이 무산됩니다. 1차 세계대전은 국제유태자본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은 이제 거의 상식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국제유태자본이 베를린 올림픽을 바라지 않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렇다면 국제유태자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왜 승인하였을까. 초기 올림픽을 제외하고 궤도에 올라선 1908년 런던올림픽 이후 당대 올림픽 개최지 결정 등이 당대 외교력의 잣대로 평가받던 것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나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국제유태자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히틀러의 독일 재건사업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말입니다. 나아가 별 볼 일이 없던 히틀러를 일약 독일 스타 정치인으로 만든 것도 국제유태자본이라는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은 1929년 대공황을 일으켜 미국 경제를 완전히 장악합니다. 똘마니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협조가 컸습니다. 이후 이 자본 상당액을 독일에 투자합니다. 독일이 그냥 갑자기 1차 대전 패전국과 공황에서 단지 몇 년 만에 경제성장을 구가한 것은 히틀러의 덕분이 아닙니다. 국제유태자본의 은밀한 지원 때문입니다. 왜? 독일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스포츠 프로모션들은 잘 압니다. 홀로 챔피언은 장미란처럼 고독합니다. 상대가 있어야 재미있습니다. 오늘날 국제유태자본이 소련, 이라크, 이란 등을 상대로 정하기 전에 일단 그들 힘을 키우는 것을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돼지새끼를 배가 통통하게 나오도록 키운 다음에 잡아먹기인 것입니다.
대부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대해 히틀러의 독일민족주의만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고찰입니다. 왜 당대 국제유태자본은 히틀러의 올림픽을 승인하였을까요? 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왜 2008년 올림픽이 북경에서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지진이 자주 일어날까요? 왜 1988년에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을까요?
쿠베르탱에게는 이상한 지점이 있습니다.
<각 지방별로 행해진 '올림픽경기' 중에서 알려진 것으로는 그레노블(Grenoble)의 행사를 들 수 있다.1832년에 그레노블에 소재한 한 가톨릭계통의 학교에서는 역사교사의 제안에 따라서 매 윤년마다 올림픽축제를 열기로 결정하고, 동년 2월 2일을 '새 올림픽 시대의 첫 해 첫 날'로 선언하게 되었다. 이 행사는 개막 및 폐막축하행사, 각종 경기, 시상식 그리고 문학 발표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무려 12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론도올림픽경기'(Jeux Olympiques au Rondeau)라는 명칭을 가졌던 이 행사는 1832년부터 1905년까지는 론도에서, 1906년부터는 몽플뢰리(Montfleury) 소재의 도미니카 계열의 학교에서 행해지다가 1954년에 그 막을 내렸다. 재미있는 것은 현대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이 그가 작성한 여러 글에서 프랑스혁명 기념행사는 언급을 하면서도 정작 이 '론도올림픽경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쿠베르탱이 이 행사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기기 때문이다. 그와 아주 절친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며 나중에 현대올림픽의 구호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던 앙리 디동(Henri Didon)이 바로 론도올림픽경기에서 수차례 우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올림픽 경기
http://ysu.ac.kr/Gboard/bodo/board.asp?seq=2139&page=8#
왜 그는 론도올림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오늘날에야 국제유태자본이 1977년 카터정권을 만들어서 로마교황청을 장악했지만, 과거에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부터 로마교황청 접수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이를 유추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준으로 보자면, 10년 만에 외환위기를 통해 국제유태자본은 한국경제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국제유태자본이 중국 경제를 장악하는데 십년 정도를 잡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웃 중에 진지한 분들이 국제유태자본의 중국 장악 시나리오에 많은 자료를 내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섯,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왜 올림픽은 개최지를 도시로만 받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도시간 대항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 도시들은 도시 대 식민도시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오늘날 영국 연방 국가들과 흡사합니다. 본토 도시는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에게서 농토를 빼앗긴 자들이(노예가 아님) 도시 바깥으로 나가 토착민을 몰아내고 이주민의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상기한 설명에서 낭만적인 성격을 제거하면,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조차도 그리스 제국이 원주민의 땅을 강탈하고 착취한 것을 기념하는 제국 잔치에 불과하였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대다수의 유태인은 대도시나 대도시 인근에서만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태인의 도시란 곧 국가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입니다. 대다수 유태인들이란 역사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도시 주변에 살고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 유태인들과 철저하게 구분되는 자들, 즉 국제유태자본은 도시 안의 도시에서 삽니다. 가령 런던에서는 시티지구요, 뉴욕에서는 월스트리트이며, 서울에서는 여의도와 테헤란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상징적 형태는 게토인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이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요구했던 것은 그리스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당대 유럽에서 장사하는데 방해가 되는 로마 카톨릭 - 중세시대에 끔찍하게 저질렀던 모든 만행에도 불구하고 고리대금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유일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 세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개신교 일부 광신도들처럼 로마 카톨릭을 제거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냉전 시기 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올림픽 메달에 집착하였을까요. 나는 군비경쟁처럼 이 역시 국제유태자본이 만든 게임의 룰에 지배되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즉, 2차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구도는 국제유태자본이 기획한 산물인데, 체제가 매우 불안정하여 한편으로는 삼차대전인 한국전쟁을 일으켜 양극화를 촉진시키는 한편 군비경쟁에 함께 올림픽을 통해서 체제경쟁을 유도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해서, 20세기는 흥미로운 시대가 됩니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당대 계몽되었던 자들은 19세기까지는 거의 대부분 일부 귀족과 지식분자들뿐이었습니다. 19세기에 수많은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민중은 여전히 중세시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운동을 비롯한 각종 대중운동을 통해 민중은 서서히 중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다른 이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류는 영성을 잃었다고나 할까요. 즉, 가장 오래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나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비록 선수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것이 금메달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금메달에서 현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과연 금메달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말인가. 국제유태자본이 인간을 금,은,동과 그밖의 인간들로 분류하여 가축처럼 만들어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내게 묻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을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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