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한국전쟁, 그리고 장제스 국유본론 2008
2008/08/21 05:06
http://blog.naver.com/miavenus/70034222612
국제유태자본과 한국전쟁, 그리고 장제스
하나, 장제스가 중국을 장악했다면?
장제스가 중국을 장악했다면, 설사 남북이 미국과 소련 의도대로 분단됐다 하더라도 소련은 북한의 남침(시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원을 거절했을 것이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항미 원조'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중심이 되고, 게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미국이 일본을 냉전의 거점으로 육성할 이유가 없었으며, 일본은 아시아 주변국과의 특권 없는 무한경쟁에 노출됐을 것이다. 또 일사불란한 자민당 장기 일당 체제를 보장한 1955년의 보수 합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를 일본에 의존한 지금까지 남한의 동아시아 내 대미·대일 종속적 위상과 유사한 대미·대중 종속적 지위로의 전락을 일본으로선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아시아 정책 거점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그런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일본 우파에겐 사활적인 요소다.
나의 주장이 아니다. 한승동 한겨레 기자의 주장이다. 상기한 글에서 '미국과 소련 의도대로' 대신 '국제유태자본'으로 대치한다면 고스란히 내 주장이 되는 셈이다.
나는 더욱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반도는 분단될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중국이 분단되었을 것이다. 만주에는 소련군이, 중국에는 장제스군이 집권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는 국제유태자본에게 모험이었다. 한국전쟁과 중국전쟁은 그 규모가 다르다. 당대 국제유태자본은 삼차대전이더라도 제한적인 전쟁만을 원했기에, 중국전쟁보다 한국전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한반도 분단과 신탁통치안은 오직 한국전쟁을 위한 전단계였을 뿐이다. 소련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거절하는 형식적 수순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냉엄한 현실은 국제유태자본이 마련한 게임에 소련 스탈린도 동참했다는 것뿐이다. 스탈린은 악역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대신 실속을 챙겼을 뿐이다. 동유럽과 중국의 확보를 통한 소련 안보의 안정화.
둘, 김구와 장제스
장제스는 처음에는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를 불신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거사 사건 뒤로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후 김구-장제스 비밀회담을 통해 전폭적인 김구 지지를 하게 된다.
국제유태자본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은 해방 직전에 조선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파악을 마친 뒤였다. 국제유태자본은 한반도를 분단시켜서 제한적인 삼차대전을 일으켜야 했다. 따라서 친일민주당을 우대하는 반면 김구와 한독당 세력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했다.
당대 장제스의 국제 역량은 얼마나 될까. 연합군의 주요 참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장개석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1943년 초 전세가 확연히 연합군 측으로 기울여졌을 때 열었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제외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제외된다. 다만, 동아시아 처리 문제가 직접적인 의제가 되었을 때는 간접 통보되었다.
셋, 스탈린의 지지를 받았던 장제스는 왜 미국에게 배신당했나?
내가 파악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중국에서 장제스가 패배하고 모택동이 승리한 원인에 대해 80%는 장제스의 부패를 문제 삼으며, 약 20%만이 모택동의 탁월한 지도력을 든다. 과연 그럴까. 나는 장제스의 부패 이전에 미국의 배신이 있었다고 본다. 아울러 미국의 배신은 국제유태자본의 안배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모택동의 탁월한 지도력을 원인으로 두는 주장은 장제스의 부패만을 이슈화할 경우 중국혁명을 수동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기에 등장한 능동적인 역사 분석이라 본다. 문제는 둘 다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모택동이 주도하던 홍군은 1945년 거의 궤멸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국은 이듬해에 장제스만을 선택하지 않고 양측을 화해시키려 했다. 이는 균형적 관점이 아니라 누가 봐도 모택동을 배려한 것이다.
이는 1920년대 코민테른이 중국 문제에 대해 장제스 국민당을 지지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결정인 게다. 코민테른이 1926년 3월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당시의 중국국민당을 '노동자, 농민, 지식인, 도시민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블록'으로 규정한 데에 이어 1926년 12월에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스탈린과 부하린의 지도를 받아 작성된 「중국정세에 대한 제7차 총회의 결의」를 채택했는데, 이 결의는 프롤레타리아트, 농민, 도시 쁘띠부르주아지 및 일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 간의 이른바 '4계급 블록'을 구축해야 하고, 당시의 중국 국민당이 진정한 '혁명적 블록'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 대해 반제동맹을 분열시키지 않기 위해 국민당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에서 스탈린의 주요 관심사는 혁명을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당 정부와 외교적으로 동맹하는 것이었다. 1926년 초 국민당은 제휴 정당으로 코민테른에 가입되었으며 "세계혁명의 총사령부"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손문의 후임인 장제스 장군을 명예회원으로 선출했다! 이로부터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3월 20일에 장개석은 자신의 제 1차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민당의 모든 지도적 직책에서 공산당원들을 축출시켰으며 국민당에 입당한 공산당원들의 명부를 요구했다. 코민테른 대표들의 명령을 받고 공산당 지도부는 이에 동의했다! 1926년 10월 스탈린은 실제로 전보를 보내 중국공산당에게 광동성의 농민 봉기를 취소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라는 황당한 결정을 하였을까. 1946년까지 미국은 독자적인 결정을 하지 못했다. 대체로 영국 정보부에서 오는 지침을 따랐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이다. 보다 실체에 접근한다면, 국제유태자본의 지시를 받았다. 그런 미군이 갑자기 1946년이 되자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넷, 냉전의 판짜기에서 소외된 장제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과 이후 연합국 측에 가담하는 중국의 신세는 참담하였다. 이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초청받은 스탈린과 크게 대비된다. 전세가 확연히 연합군 측으로 기울여졌던 1943년 초 연합국 측은 카사블랑카 회담을 연다. 이때, 스탈린도 초대되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스탈린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코민테른 때문으로 본다.
스탈린은 코민테른 해체 이후 회담에 참여한다. 코민테른 해체 이유에 대해 여러 해석이 많지만, 나로서는 스탈린이 전후 종전처리에서 최대한의 이권을 따내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코민테른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그 아무리 명목상이라도 스탈린은 국제주의 노동자 정신에 입각한 전후 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동유럽과 그 외의 지역에서의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식적이나마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소련인데, 소련 지도자가 연합국 회담에 나섰다면, 이에 대한 보고가 코민테른에게 가야 하는데, 이는 당대 사정을 고려하면 희극적 상황을 연출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한다면, 상관이 하급자에게 보고를 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중국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것이 중국의 안보리 이사국 지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웅변한다. 좌우로 분열되었다고 한다면, 1949년까지 중국내전 당시에도 장제스가 중국 대표로 유엔에서 활약한 바 있다. 또한 북아프리카에 본토의 비시 정권으로부터 독립해서 수립되어 있던 프랑스 정권에는 드골과 지로의 양 지도자가 대립상태에 있어서 이 회담에 양 지도자를 참석시킨 바 있다.
몇 개월 뒤 1943년에 열린 일차 퀘벡회담은 또 어떤가. 이때는 아예 영미 수뇌만 회담을 했다. 두 수뇌는 또 회담을 통해 같은 해 10월과 11월에 각각 열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담'과 '테헤란 정상회담'에 임하는 양국의 의견을 미리 조율했다.
코민테른이 해산할 때까지 세계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코민테른을 통해서 지도한 반면, 코민테른 해산 이후에는 소련이 세계사회주의운동을 직접 지배했다. 이와 관련해 독소전쟁 및 미일전쟁이 개시됨과 더불어 소련은 영-미와 전면적인 협력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소련은 2차 대전을 독일, 일본 중심의 파쇼진영과 소련, 미국, 영국 등의 민주주의진영과의 전쟁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영미와의 협력노선을 전면화한 '국제적 반파쇼민주연합' 구축을 당면한 제1의 과제로서 제출한다. 그리고 이 방침에 따라 1943년 6월 코민테른까지 해산시켰다.
코민테른 해산 이유로 여러 분분한 설이 있으나, 내가 바라보는 가장 유력한 설은 전후처리에 있어서 코민테른을 유지하는 것이 소련 국익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란 소련 지도부의 판단 때문이다.
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의 해산 결정. 1945년 2월 크리미아 3개국 정상회담 국제연합 창설 찬성. 1945년 7월 26일 일본의 항복조건, 일본의 관리 등 전후처리를 위한 포츠담 회담에서는 장개석 동의를 얻어 발표되었다.
코민테른은 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 테제가 채택됨에 따라 통일전선이 전술적 차원이 아닌 전략적 차원이 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나치의 군화발에 짓밟혔다. 스탈린은 1941년 4월에 코민테른 지도자 디미트로프에게 이 문제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완전히 자율적인 것이 되어야 하오. 그들은 노동당, 맑스주의당 같은 다양한 명칭을 가진 공산주의 정당으로 변모해야 하오. 이름은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국의 인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고유한 임무에 집중하는 것이오... 인터내셔널은 맑스시대에 세게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고 만든 것이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민족적 임무가 각 나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소. 어제에 집착해서는 안 되오.]
디미트로프는 사실상 그의 임무가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다섯, 국제유태자본은 스탈린에게 동유럽과 중국을 내주었다
국제유태자본은 냉전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소련 주변에 완충지대를 두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 완충지대란 유럽에서는 동유럽이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었던 셈이다. 왜? 그만큼 소련 국력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국제유태자본과의 외교로만 간신히 운영되는 것이 현실 사회주의의 뼈아픈 현주소였기 때문이다.
국제유태자본은 바로 이 점을 역이용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역량을 늘 과대평가하여 내부 단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를 끝으로 국제유태자본은 한반도에서 제한적인 삼차대전,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불꽃을 당긴 것은 김일성이지만, 그는 단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국유본론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유태자본 극복을 위하여 (0) | 2013.12.01 |
---|---|
대담 : 국제유태자본과 친일민주당 2 (0) | 2013.12.01 |
국제유태자본과 올림픽 (0) | 2013.12.01 |
국제유태자본과 정계 개편 (0) | 2013.12.01 |
국제유태자본과 환율 급등 (0) | 2013.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