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VS 불멸 : 장르 소설 창작과 비평 국유본론 2013

2013/04/23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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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VS 불멸 : 장르 소설 창작과 비평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4/23-2

   

"친구여. 이제 나를 막다른 길로 내친 골목길을 그대가 가고 있는가.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한 자의식의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그대. 그대가 정녕 교묘한 사기꾼이라면 나는 그대의 장난에 나는 한없이 괴롭다네. 그대가 내 허술한 틈을 놓칠 리가 없지. 말끝을 묘하게 내며 아직 시작된 잔치조차 없음을 한탄하는 나를 가만 놔둘 리가 없지. 그래서 그대 말에 저항할 수 없네. 내 자아가 한없이 흩어지고 내 눈이 한층 게슴츠레해지고 내 입이 그대의 입술에 목말라하지만 그대의 눈빛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준비하지 못 하게 하는 사회만을 나는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보물만 탐낸다는 그대 애증이 나를 슬프게 한다네. 짐이 무겁다는 그대를 위해 내 기꺼이 히치하이킹 당하고 싶으나 불행히도 우리들의 신호가 엇갈리니 내가 달리면 그대가 서고 내가 서면 그대는 달리네.

   

그대는 라이프찌히에서 마치 신검을 뽑은 듯이 용솟음치고 있네. 나뿐만 아니라 게시판 식구 모두를 압도하듯 원탁으로 이끄는 그대에게 내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대의 기원 만큼이나 오래된 나의 기원. 나는 그대의 용의주도한 언변에 놀라 빠르게 흥분했다 끝날까 두렵다네. 그러하니 이제 보이지 않은 잉크로 내 여행기를 쓰려 하니 두었다가 후일 약효가 떨어져 글자들이 제 멋대로 인연을 맺을 때 보게나.

   

나는 그대가 간 족적을 따라 역을 간다. 공공칠 가방을 든 회사원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도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호텔에도 갔다. 라운지에 들어서니 친절한 영어로 나를 맞이한다. 혹시 하고 도박장도 갔지만 무료한 자들이 나를 웃으며 대할 뿐. 나는 버스에 앉아 우두커니 운전사를 보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게는 그대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대나 나나 밑바닥의 언어들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불행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고 호기심이 빠르게 일어난 것처럼 시들면 자신만 빠져나와 아무도 모를 번민을 거듭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마르크스가 리바이스 청바지랑 비슷한 것임을 알아차릴 만큼 감수성도 동일하고 숨죽임이 통신에서 오고 가니 소문에 신경쓰는 것까지 일치하는데 왜 나에게는 목 마른 기침이 허용되지 않는가.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네.

   

내 라이프찌히는 텍스트에 불과하다.

   

가보지도 않은 종화가 나보다 더 현실적으로 라이프찌히를 말하는 한, 내게 그것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의 텍스트에 무슨 아우라가 있던가?

   

그러자 라이프찌히가 어둠 속에서 자신의 결벽을 증명하려는 듯 토해놓은 육신을 말끔히 씻어내고 빛나는 속임수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종화는 수많은 도시를 마을버스 정류장 거치듯 통과했다. 그러나 내가 정류장에 서면 나의 마을버스는 오지 않는다. 그러하니 나는 라이프찌히에 갔어도 라이프찌히에 가지 않은 셈이다. 작가인 종화처럼 보고 느낄 수 없으니까. 종화가 만일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버스를 타고 있다면 나는 종화를 만날 수가 없다. 민기의 몸으로는 도저히 인드라를 만날 수 없다. 하여 나는 천신만고 끝에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한 뒤 ID 인드라로 작가 종화를 만난다. 

   

평론가들도 생계수단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료 평론가들치고 평론 일을 계속하리라 보는 이는 없다. 저마다 기획 출판이나 편집장, 혹은 재수 좋으면 교수직을 바라기도 하지만 단지 부질없는 욕망일 뿐. 선생님 소리를 위안삼아 턱없는 원고료를 받아들고 술을 마시면 그만이다. 더구나 삼류라면 이런 위로도 받을 리가 없다. 구멍난 원고 대타로 나설 때에 어디 위신을 차릴 수가 있겠는가. 원하시는 대로 쓰세요,라고 말하는 청탁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이리저리 고려해서 발표한 뒤 행여 사기치고 있다는 말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인드라는 종화가 하는 장난이 인드라인 자신에게 얼마나 공포를 주는 것인지 모르는 체 종화를 옹호한다. 인드라는 기껏 봉원동 산마루에 스모그로 흐릿한 보름달을 도서관에서 쳐다 볼 뿐이므로.

   

"도인은 키도 작달만 하고 꾀죄죄한 데다가 햇볕에 심하게 그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도인의 묘사는 영락없이 인드라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종화가 인드라를 싫어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현재에 서 있기는 그나 나나 마찬가지이나 작가 종화는 미래를 보기에 과거를 돌아 보는 평론가 인드라가 마땅치가 않다. 인드라는 실패한 사례를 열거하고 하루살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인드라는 떨어져 죽거나 불을 향해 뛰어들어 죽거나 하는 양자택일을 주저하지만 종화는 어차피 죽을 것이므로 어느 하나를 과감히 선택해 빠른 성취를 도모한다. 인드라는 끊임없이 분열하다 판단 중지되고는 하지만 종화는 그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단도직입적인 결행을 한다. 그리하여 작가 종화가 세상을 뒤덮는다.

   

"사실 리미는 요즘 나오는 세태소설에 나오는 여성들과 비교하면 거의 다를 바 없는 여성이다. 적당히 폼이 나는 습관을 종교로 가지고 있고, 만만한 위인을 씹어대어 똑똑함을 과시하는 알음병이 있고, 무엇보다 멋진 자살을 꿈꾸는 그저 그런 인물을 약간 덧칠했을 뿐인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하여 삼류일지라도 평론가들끼리 만나 작가를 씹는 무용담을 늘어 놓을 때 삼류 인드라도 작심한 바가 있었다. 내가 너희들보다 못 할까. 그러나 못 했다. 작가들이 별 볼 일 없는 삼류 인드라인지를 대번에 파악하고 일절 대응치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어쩌랴. 따지고 보자면, 세속에 어두운 내 잘못인 것을. 내가 발리에서 아르토와 고갱의 삶을 떠올렸다면, 그는 칼럼니스트의 삶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르토와 고갱보다는 칼럼니스트가 안정적인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얼굴에 철판깔기로 자자한 그도 내 얼굴 보기가 다소 민망했던지,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다.

   

- 너, 만일 청와대에서 너를 부르면 가겠니?"

   

평론가 인드라가  한번도 오르가슴을 못 느낀 여성이라고? 시버럴, 오르가슴을 딱 한번 느낀 인드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 없다. 삼류 평론가도 팔십년대 학번이므로 리얼리즘에 고통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질이 아니어서인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누구처럼 감방에 간 것도 아니고, 투쟁을 주도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과분하게 386이라는 호칭을 받는 나로서는 더더욱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386조차도 비판의 대상이 된 세상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386조차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 내가 감빵에 있을 때, 너는 무엇을 했니?

   

종화는 누구보다 양비론을 경멸했다.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비판하면서 어느 한 쪽에 과감하게 올인하고는 하였다. 하여 내가 만일 조금이라도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일라치면 가차없는 비판을 해대고는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괴로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을까? 이제는 오히려 종화가 조심스럽다. 계획없이 행동이 있을까? 이론없이 실천이 있을까? 조금이나마 내 것이 되었다 여긴 것을 토대로 행동하려는데 종화가 오히려 이런 나를 가로막는다. 내가 언제 청와대에 가겠다고 물었던가? 단지 나는 지금 대안이 있느냐고만 물었을 따름이다. 그런 내게 종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거나 이거나.

   

나 역시 이것이 대안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 것이 왜 기회주의란 말인가? 또한 기회가 오지 않을 때 대기하는 것이 왜 대기주의란 말인가? 허나, 이렇게 종화에게 물으면 그는 말한다.

   

- 그래도 나는 혁명의 자식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현장의 강화다. 작가들의 작품을 지나치게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 활동할 여건이 크게 미흡한 상황에서 작가들 작품만 나무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란 서구 유명 문학인과 작품을 줄줄이 외워대면서 너희는 왜 이것밖에 안 되냐고 할 때 종화는 울분이 솟고는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과연 평론가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을까? 다 좋다. 그래도 나는 가련다. 시대가 작가 종화를 주저케 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네가 가는 길 조금이나마 손쉽게 똟고 갈 수 있도록 하련다. 무엇을 마다하겠느냐.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 그것이 전부이더냐. 그래도 받아들인다. 무슨 소리를 하든 내게 꿈이 여전히 있다면. 하여 조심스럽게 비평이라고 내놓았지만 다들 삼류 비평가 비평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특히 괴로운 것은 명망있는 언론과 문학지의 태도이다. 그 중에 가장 나은 평가가 이러한 것이었다.

   

- 아무리 비평 현실이 타락하여 개나 소나 한다지만 문학 비평의 길만은 시대의 감수성을 정면으로 뚫고 가야 할 것이다. 최근 세태를 보자면 무책임한 언어로 재단하여 '날것'을 양산하여 문학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예가 있어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비평가로서의 최소한의 자질인 경청하는 태도가 있다면 해당되는 자의 자아반성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것이 바로 인드라 비평을 두고 한 것이었다. 포르노는 포르노일 수밖에 없다라는 정언 명제를 곧이 곧대로 밝힌 것이었다. 삼류 평론가 생각으로는 정말 잘 된 비평이라고 여겨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인데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포르노란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평론이 매번 이미 공인받은 소위 일류들만 상대해야 하겠는가? 실베스타 스탤론이, 디아즈 카메론이,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이 포르노 배우였다지 않은가? 발자크도 포르노 작가이지 않았던가? 인드라는 바로 그런 미래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 평론을 쓰고 싶었다. 다른 평론가들이 내팽개친 작가들을 말이다. 포르노가 맨날 다음과 같은 식이어야 하겠는가.

   

"석가모니 생존에 바이살리 성에 유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솜씨가 뛰어났고 마음대로 신통력을 부렸으며, 다라니를 얻었으며, 두려움을 여의었으며, 마와 적대자들을 떨쳐낸 자였다. 유마는 세속에 머물면서도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훌쩍 뛰어넘나들어서 자식과 아내와 고용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항상 몸이 청정했으며 주위에 친족들이 들끓어도 늘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도박이나 주사위 노름을 하는 곳에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노름에 빠진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도하기 위해서였고 출세간적인 주문이나 논서에도 해박했지만 오직 불법이 주는 기쁨만을 누리리라 다짐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애욕의 허망함을 보여주고자 창녀촌도 마다하지 않았고 큰 부자였으며 존경받는 대신 중의 하나였고 궁중의 젊은 여인들을 잘 이끌었기에 최고의 내관이기도 했다. 유마가 병을 가장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문병할 사람을 찾는데 모두가 유마의 고매한 품격에 자격없다고 하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문수가 나서 문병을 했다"

   

인드라는 그들 도식대로 평하자면 위와 같은 글쓰기에 대해 칭찬할 수밖에 없다. 비평가가 좋아하는 글쓰기랑 작가가 좋아하는 글쓰기가 다른 만큼 일류 비평가와 삼류 비평가가 좋아하는 글쓰기도 애초에 다른 것이다. 삼류가 일류가 된다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일류는 계속 일류여야 하고, 삼류는 삼류여야 한다. 다만 아부하면 삼류가 일류가 될 수 있다. 그러하니 인드라가 상기한 저질스런 인용보다 다음과 같은 인용을 좋게 평가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밑창을 맞춰 보았다. 대담하게도 우리는 변비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갖은 인연을 활짝 열고 텍스트를 열어 젖히고 인간성을 훌렁 벗고 교미했다.

   

- 너무 개판이야.

- 너는 어떻고.

- 그러니까 이리와. 나까지 외면하면 안 되잖아."

   

그러나 삼류는 삼류이다. 변화무쌍한 흐름을 판단해내야 하는 비평가야말로 교과서에 기록되는 비평가 자격이 있다면 삼류 평론가는 탈락할 수밖에 없다. 정말 용기있게 자기 소신을 밝혀 매장될 위기에 처해 있는 극히 일부 비평가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삼류로서는 겁이 덜컥 나서 기존 계보를 따를 수밖에 없다. 가령 최근 청소년보호법과 관련한 수법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청탁이 들어오지 않는다.

   

"넌 뭐냐, 넌 뭐냐. 죽었다고? 사기 치지 마. 좆같은 놈, 백수인 주제에, 내 좆이나 빨아라. 네가 뭐라도 돼? 까불지 마. 넌 뭐가 좋다고 무너지는 내 마음을 안다고 소리쳐. 니가 뭔데 날 괴롭게 해. 유치한 새끼. 꺼져 버려. 집어치워. 너 까짓 게. 씨발, 튀는 놈들 많아 좋네. 나쁜 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제발, 사라져 줘. 눈물 나와. 울지 마, 씨발 놈아. 무수한 말들이, 단지 말뿐이지만 어느덧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울러 요즘 잘 뜨고 있는 김현식 비평을 기조로 노마즘이니 차연이니 비트켄쉬타인이니 벤야민이니로 마무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격렬한 분노를 담은 것이 이번에 쓰는 비평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다들 사석에서 인정하지만 다 알고 쓰나? 유행 담론에 묻혀서 다만 분노를 감춘 의도외에는 없다. 작가의 분노와 다만 형식적으로 구별될 뿐인 메마른 분노 말이다. 분노없이 비평이 될까?

   

그러자 작가 종화는 갑자기 라이프찌히 대신 즈므를 들이대었다. 놀라운 반격이었다. 라이프찌히도 벅찬데 이제 즈므라니... 작가 종화는 라이프찌히에서의 절망스런 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라이프찌히는 죽었다고. 허나 내가 가 본 라이프찌히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가 아니었던가. 굿바이, 레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굿바이, 맑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런 나의 집요한 추적에 작가 종화는 난 데 없이 즈므를 내세운 것이다. 즈므. 분명 현실에 그 지명이 있지만 작가 종화가 말하는 즈므와는 다른 것. 이제 사회주의는 없다. 오로지 도로 표지판 같은 책 속에서만 있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날라리 세상을 꿈꾼다는 것인가? 이제 노동 운동 자체가 노동자주의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민주노총이 썩었다 할 지라도, 민주노동당이 가망이 없다 할 지라도, 그것들이 운동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닌 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포기가 곧 운동의 포기일 수는 없다. 운동의 포기라는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아무리 문학판이 위기이고, 모든 작가들이 타락했을 지라도, 문학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쁘고, 새로운 데서 미래가 열리는 것이 아니던가? 만일 사회주의가, 그리고 문학이 저 피안의 세계의 것이라면, 구태여 그것을 굳이 사회주의이고, 문학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작가 종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던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그리고 경험한 것보다 더 실제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하여 모두 가상인 것처럼 말하는 저의가 무엇이던가? 설사 포르노적 해부학으로 우리의 성기를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포르노로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그간 흘린 피와 눈물마저도 가상이란 말인가? 오히려 꿈을 내던진 이는 내가 아니라 작가 종화이지 않던가?

   

작가 종화, 자네의 시도란 추상적 사고와 비교적인 언어 속에서 나타나는 독일적 비현실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네. 그들은 자신들의 과장된 개인주의와 독창성에 대한 병적인 집념을 보편화하려 했다네. 또한 자네가 소설 초반부에 들라크르와 작품을 인용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회화는 죽었다고? 자네는 또 말하지. 영화는 죽었다, 사진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들라크르와는 위대한 19세기 낭만주의자이지. 하지만 질풍노도의 낭만주의자가 아닌 낡고 오래된 반동적 낭만주의자. 이미 낡고 사라지는 것을 애써 붙잡고 있었지. 물론 자네의 의도를 짐작하네. 20세기의 사회주의를 그처럼 붙잡고 싶었던 게지. 하지만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일세. 거짓말로 구름 위의 라퓨타를 노래하는 자네에게 나는 언제나 따뜻한 시선이었네. 누구처럼 만화적 상상력 따위라고 비난하지 않았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비난을 한 자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거짓말로 사회주의를 반동적 낭만주의로 고수하려고 일삼는 자일세. 그렇다면 자네가 그토록 비난하는 민족해방주의자들의 북한 찬양과 자네가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인가? 왜 자네들은 스탈린 앞에 서면 작아지는가? 자네들의 숱한 스탈린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가? 무엇이 죽건, 누가 죽건, 자네는 살아 있다는 것만 말할 셈인가? 자네도 죽었네. 따라서 죽은 개를 되살리는 것은 죽은 개가 아닐세. 다른 이여야 한다는 말일세. 자네가 예수이던가? 그것은 하나의 극복해야 할 신화일 뿐이네.   

   

하여, 나는 작가 종화의 궤적을 지금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가 왜 텍스트 안에 머물면서도 겉으로는 텍스트 바깥에 있는 양, 그리고 자신만이 실천하는 것인양 하는 이유를 캐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텍스트 바깥에 있고자 하는 이는 나인가, 아니면 작가 종화인가? 작가, 종화. 리미처럼 평론만 죽은들 해결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오로지 자신만을 떠받을 뿐인 주체를 누가 견제할 수 있더란 말인가? 중이 제 머리 깎지 못 하듯이 작가 종화, 당신은 그런 꿈을 꾸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영원한 영구기관의 상상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무오류의 화신은 사라져야 한다. 신학에서 내려오라, 작가 종화여.

   

"죽은 자는 말이 많다. 팔십년대는 마르크스에 대한 독점욕 이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구십년대 또한 독점욕이 응고된 정액을 오르가슴이라는 휴지로 닦으려 했을 뿐 사정은 같다. 나는 광장에서 고추가루 같은 마르크스를 시뻘건 눈으로 저주하듯 재채기하며 마셨고, 통신에서 후추가루 같은 마르크스를 너무나 뜨거워 오히려 차가운 침으로 악귀마냥 핥으며 마셨을 뿐이다. 적색 환상에서 잿빛 환상으로. 적색을 넘어 빛을 향한 짝사랑을 잊지 못해 결국 회색이 되다만 잿빛 환상으로. 마르크스가 호이징하에게 길들여져야 하는 사정이 있는 시대에서 '언제'하고 묻는다면 '지금'이라고 '놀이'하듯 나는 마침내 텍스트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작가 종화를 비판하고 나니 나 역시도 비평가로서의 자질 부족을 자인한다. 어떻게 결론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썼는데 쓰고 보니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근본적인 인식차>야말로 참된 작품을 가리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착각에 불과했다. 인드라 이면의 속을 모르는 작가 종화가 통신에서 그간 쓴 글을 읽더니 말했다.

   

- 글을 다 읽은 자들아, 내 짐을 다 가져가라.

   

인드라는 연이어 <엄혹함을 똑바로 봐>라는 결론이 정보화 시대의 문학적 위기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화두이지 않느냐 우겼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의 냉소였다.

   

- 고전 공부 게을리 하지 말고.

   

결국 인드라는 언론에 더 이상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비록 인드라가 아무리 작가 종화와 그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해서 종화의 성과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종화의 인드라에 대한 비판 역시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 종화가 글로만 전위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힐난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피땀을 흘려 이룩한 성과를 인드라 같은 족속들, 즉 학삐리들이 하나씩 챙긴다는 비난 때문이다. 그렇다. 이 문제에 관하여 종화가 옳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작가 종화의 이데올로기까지 옹호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게 작가 종화 때문이다. 갑자기 작가에 대해 욕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비평가이므로 점잖게, 그리고 다른 이들도 다 하는 게시판에서 해야 한다.

   

"아무튼 너를 비판할 거야. 내가 네 글을 읽는 건 내가 유령이 되어서라도 너의 만용을 견제하기 위함이지. 넌 겸손해야 해. 내가 너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면 내가 지는 거야. 넌 겸손해야 해. 그리고 평론가의 말을 경청해야 해."

   

욕으로 끝내면 비평에서조차 작가 종화에게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살 맛이 나지 않았다.

   

"평론가는 감정의 동요가 없어야 해. 편견에서 벗어나 이성을 회복해."

   

그러고도 죽어간다고 엄살피는 종화. 죽긴 누가 죽는다는 말인가. 아무도 죽을 이 없다. 작가 종화가 증오스럽기 짝이 없어 찢어발겨도 시원찮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비평은 비평이다. 팔려야 한다면 인드라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서는 곤란한 일이다. 이럴 때 인드라는 말줄임표로 대신하고는 했다. 이것이 혹 시대적 판단이 아닐까. 그러나 삼류 평론가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

변신 아임 problem

   

   

   

2004/07/19 06:20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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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란 비판과 평가입니다. 대상에 대해 평가절하할수록, 깎아내릴수록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날카로운 창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나, 창작이란 모순입니다. 창과 방패가, 주인공과 악당이 잘 어울려 한 판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인드라는 비평 VS 창작을 유목민 VS 농경민 구도로 봅니다. 유목민은 무엇을 생산하기 보다 남의 것을 약탈하여 생활합니다. 유목민에게는 상생이란 없습니다. 공격, 또 공격 뿐인 것입니다. 헌데,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이들은 유목민일까요? 농경민일까요? 유목민입니다.

   

수메르인, 중동인, 유대인, 아리안인, 몽골인, 노르만인, 유럽인, 영국인, 미국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유목민이지, 농경민이 아닙니다. 심지어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는 유목민들에서 나왔지, 농경민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가령 단군은 유목민이었나요? 농경민이었나요?

   

비평의 근간은 살리에르적 질투심입니다. 신은 비평가에게 예술에 대한 신적인 안목을 주었지만, 불행히도 창작할 능력을 주지 않았습니다.

   

만들지는 못해도 볼 줄은 안다는 것.

   

이것은 유태인의 상술 비밀이 아니겠습니까. 타인보다 진가를 먼저 알아 그 가치를 인정한 뒤 판권을 독점하여 크게 흥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아세요? 발명가나 창작가는 배고프게 살아도 지적재산권과 판권을 구매한 이들은 부자로 산다는 것.  

   

유통입니다.

   

인드라가 강조했습니다. 생산이 아니라 유통입니다. 국유본이 권력을 잡은 것은 생산이 아니라 유통입니다.

   

작가가 인세 먹어봐야 얼마나 먹나요? 3%애서 10% 사이입니다. 가수, 작곡가, 작사가가 곡 만들면 얼마 먹나요? 아무리 많아봐야 합쳐서 10%~20% 사이입니다. 그림 역시도 경매 시장에서 그 아무리 고가에 팔려도 화가가 먹는 돈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유통입니다. 유통이 다 먹는 것입니다. 해서, 비평인 겁니다. 유통 = 비평인 것입니다. 유통 = 비평을 국유본이 장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거나, 사장시키거나, 흥행하게 만드는 힘은 국유본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논문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발동시키려고 해도 그 자금을 국유본에게 빌려야 하므로 어느덧 판권이 국유본에게 속하게 됩니다.

   

비평이란 세금입니다. 너무 가혹하게 세금을 매기면 농경민이 농사를 지을 의욕을 잃을 것입니다. 허나, 세금을 매기지 않으면 농경민이 유목민을 우습게 여기겠지요.

   

해서, 국유본은 쪽발민주당이나 골룸빡 병쉰색희를 동원해서 수시로 세금내라고 언론플레이를 강제하는 것입니다. 쪽발민주당이나 골룸빡 병쉰색희가 인민을 위한다는 생각 이제부터 버리세요. 그 색희들이야말로 인민의 적이요, 철천지 웬수입니다.

   

허나, 사정이 이렇다고 하여 무모하게도 국유본에 대항하는 것도 참 거시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법이 없겠습니까.

지구적 대안이 없겠습니까.

   

해서, 인드라가 궁구한 것은 유목민과 농경민, 비평과 창작 해체를 통한 융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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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의 친절한 가이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남영덕은 "나는 의열단이오.

나는 한일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이다

. 나는 조선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즉

나의  형벌에 대하여는 사형도 좋소이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1923년 8월 13일 의열단 공판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단군이래 최악의 매국노,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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