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삼극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 1 국유본론 2013

2013/05/20 06:58

http://blog.naver.com/miavenus/70167935228

   

   

   

   

   

   

   

국제유태자본과 삼극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 1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5/20

   

   

인드라는 지금껏 The Trilateral Commission를 삼각위원회로 번역했는데, 앞으로는 삼극위원회로 합니다. 삼극위원회 공식 홈피에서 삼극위원회로 하기 때문입니다.

   

삼극위원회 

http://www.trilateral.org/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는 그 구성원들이 매 년 세계 모처에 모여 신세계 질서를 향한 비밀 의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70년대 초반 브레진스키가 빌더버그 회의에서 국제 석유산업계의 이해를 증진시킬 삼극위원회를 주창한 것입니다. 빌더버그에서 데이비드 록펠러와 국유본 귀족들이 브레진스키 제안을 후원하여 1973년 삼극위원회를 구성합니다. 

   

1973년은 국유본 귀족들이 빅터 로스차일드 국유본 황제를 축출한 해입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처럼 조용히 유배되었습니다.

   

1973년의 세계사

http://blog.naver.com/miavenus/70045592091 

   

삼극위원회가 내건 명분은 국제 석유업계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삼극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국제유태자본 권력이 삼극위원회로 집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출발은 빌더버그 산하조직으로 출범하였지만, 이내 빌더버그 최상층 집행그룹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빌더버그 역시 300인위원회 산하기구로 출범하였지만, 빅터 로스차일드가 주도하면서 300인위원회를 압도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한 바 있습니다. 

   

국유본 조직이란 항구적이기 보다 국유본 황제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국유본 권력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변화함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해서, 1973년 이후로도 빌더버그와 삼극위원회는 병행하였습니다. 달라진 바가 있다면, 삼극위원회가 빌더버그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직의 조직이 된 셈입니다. 주요 안건은 데이비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 그리고 삼극위원회가 처리하고, 빌더버그가 인준하는 식이었습니다.

   

삼극위원회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만든 금 기반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석유 기반 신자유주의 체제로 이행을 주도합니다. 국유본 귀족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적극 환영합니다.

   

인드라가 데이비드 록펠러가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자꾸 강조하자 2013년 3월자로 데이비드 록펠러 사진을 올려놨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 생존 여부에 대해 인드라가 한발짝 양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인드라는 2015년에 공식적으로 데이비드 록펠러 사망이 발표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키신저, "브레진스키는 창녀 같은 놈";브레진스키, 키신저 모두 삼각위원회 수장을 맡은 데이비드 록펠러 책사. 허나, 키신저는 로스차일드에서 록펠러로 전향한 노비네파이고 공화당 일을 하고, 브레진스키는 뉴라이트로 노예민주당 일을 했다 외교부문에선 공동작전 구사했다

인월리

2012/10/18 17:45 수정 삭제

   

작성자: 인드라(miavenus)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9376339

   

키신저, "브레진스키는 창녀 같은 놈"

| 기사입력 2012-10-18 01:56

   

헨리 키신저(89) 전 미국 국무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오랜 라이벌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84)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창녀 같은 놈"이라고 욕한 사실이 최근 미 국무부가 공개한 외교 사료집을 통해 드러났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7일 전했다.

   

미 국무부는 주요 외교 사안에 대해 당시 어떻게 정책 결정이 이뤄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미국의 외교 관계'(FRUS)라는 책자를 정기적으로 펴내고 있다. 보통 30년이 지난 사안에 대해 공개하기 때문에 정책 관련 업무를 하는 이들이나 역사학자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지난 15일 공개된 제럴드 포드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했던 1976년 3월의 한 회의록은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당시 공화당 대선 경선후보로서 포드 대통령과 경쟁하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등을 가리켜 "그들이 지난 몇 주간 미국의 외교정책을 공격하면서 우리더러 약해빠졌다고 비난한다"고 불평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심지어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터도 공격하고 있다. 브레진스키가 카터와 일하고 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브레진스키는 지미 카터의 외교 분야 멘토로 활동했고 그해 선거에서 카터가 포드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곧바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됐다.

   

그러자 키신저는 "브레진스키는 완전히 창녀 같은 놈(a total whore)이다. 그는 모든 논쟁에 끼어든다. 자기가 책에서 말한 내용대로 우리가 (대부분의 외교정책을) 했는데도 우리보고 약해빠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 내용에 대해 브레진스키는 "헨리는 나와 친구 사이다. 아마 '지루한 녀석(bore)'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게 틀림없다"고 말했으며, 키신저 측의 반응은 들을 수 없었다고 WP가 전했다.

   

[김재곤 기자 truman@chosun.com]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모두 유태인들이며, 삼극위원회 의장을 맡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키신저는 노비네파이고, 브레진스키는 뉴라이트입니다.

   

키신저는 빅터 로스차일드파였습니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들간 잦은 충돌이 일어난 이후 키신저는 국유본 귀족과 데이비드 록펠러간의 가교 역할을 맡습니다. 그 첫번째 미션이 닉슨 대통령 당선과 닉슨 게이트였습니다. 닉슨은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버림을 받은 정치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데이비드 록펠러파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공화당 비주류였기에 국유본 귀족과 데이비드 록펠러가 선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빅터 로스차일드 의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빅터 로스차일드는 그가 핵심으로 삼았던 영국 정보부에서조차 영향력을 잃어가던 때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공화당 비주류 닉슨을 임명한 뒤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였지만, 닉슨이 반발합니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란 야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데이비드 록펠러는 게이트 사건을 일으켜서 닉슨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하고, 공화당 대체 정치인으로 포드와 레이건을 키운 것입니다.

   

1970년대 후반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관계는 그들 직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키신저는 삼극위원회 의장이었고, 브레진스키는 노예민주당 카터 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이었습니다. 이 당시 록펠러 가문은 공화당을 넬슨 록펠러, 노예민주당을 데이비드 록펠러가 담당했었습니다. 게다가 카터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키운 정치인이었기에 카터가 일을 시키는 대로 잘 할 것인지 브레진스키가 감독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브레진스키가 잠시 삼극위원회를 키신저에게 맡게 하고, 미국 행정부로 파견을 나간 것입니다. 파견 근무가 끝나니 브레진스키는 삼극위원회로 돌아와 2009년까지 삼극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였습니다.

   

하면, 키신저가 삼극위원회를 맡았을 때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국유본 권력 교체가 되었습니다. 이때, 데이비드 록펠러는 점령군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국유본 귀족들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거사를 성공하였지만, 국유본 귀족들 눈치가 보였던 시기이니 국유본 귀족들을 안심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이때, 데이비드 록펠러와 국유본 귀족 합의사항은 이후 전개된 양상을 볼 때, 정치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먹고, 경제는 국유본 귀족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귀족의 경제적 이해를 위협했기에 데이비드 록펠러는 국유본 귀족의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해주어 국유본 황제 권력 기반을 다졌던 것입니다. 이에 국유본 귀족들은 빅터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정치 권력을 데이비드 록펠러가 장악하는 것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상징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유태인인 헨리 키신저가 유태인을 비난한 일이 있었습니다. 왜 헨리 키신저는 유태인을 비난했을까요?

   

헨리 키신저가 중동 정책으로 유태인을 비난했다는 건 빅터 로스차일드를 비판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집권당인 중도좌파 마파이당, 오늘날 노동당은 전세계에서 최초로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부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하고, 마파이당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입니다. 박정희는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이었기에 닉슨이 한국에 왔어도 만나주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참고로 이 시기 박정희, 쪽발돼중, 쪽발일성 모두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이었습니다. 헌데, 박정희가 쪽발돼중을 키운 건 쪽발민주당에서 쪽발돼중이 비주류였기 때문입니다. 쪽발민주당에서 쪽발돼중을 키워서 남한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은 통일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박정희와 빅터 로스차일드 기획이었습니다. 허나, 국유본 권력이 교체되자 데이비드 록펠러는 김영삼을 키우면서 박정희와 쪽발돼중, 쪽발일성 영향력을 축소시킵니다.

   

한국 예를 봐도 알 수 있듯, 키신저는 빅터 로스차일드 영향력을 축소시키면서 국유본 귀족들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해서, 키신저는 이후 국유본 분파인 노비네파를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본디 데이비드 록펠러를 추종하던 이들이 뉴라이트라면, 노비네파는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 국유본 귀족들이 쿠테타에 합류하면서 만들어진 분파입니다. 

   

삼극위원회는 유럽, 일본, 북미 세 지역 지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왜 일본을 중시했을까요. 빌더버그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300인 위원회는 구성원 대부분이 영국을 위주로 한 조직입니다. 반면 빌더버그는 여전히 영국을 중심으로 하되 유럽대륙과 미국을 좌우날개로 하여 확대개편한 조직입니다. 해서, 데이비드 록펠러는 과거 로마제국 때의 황제와 원로원, 민회를 본 따서 삼극위원회를 만든 것입니다. 

   

원로원 격인 빌더버그 참가 자격을 완화하고, 쪽수를 늘려 영향력을 축소시킵니다. 동시에 새로운 조직인 삼극위원회를 출범시켜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유럽과 일본을 좌우날개로 하는 삼극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일본 비중이 비약적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삼극위원회는 노벨평화상까지 일본에 선물합니다. 이전에는 국제 농산물시장에서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허나, 록펠러 체제 이후 일본은 국제 농산물시장에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단 농산물시장 뿐만 아니라 원자재시장, 금융시장에서도 지분을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싸구려 상품의 대명사였던 일본제품이 데이비드 록펠러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중저가 제품 강자로 부상하는 것입니다. 제조업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데이비드 록펠러와 삼극위원회가 만든 발명품인 것입니다.  여기에 일본인의 기여도는 1%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1%란 물론 야동입니다.

   

About the Trilateral Commission - The Asia Pacific Group

   

Chairman: Yasuchika Hasegawai

Deputy Chairman: Hong SeokHyun

Deputy Chairman: Jusuf Wanandi

Director: Ken Shibusawa

Secretariat

Japan Center for International Exchange

4-9-17 Minami-Azabu, Minato-ku, Tokyo 106, Japan

telephone: 81-3: 3446-7781

telefax: 81-3: 3443-7580

http://www.jcie.or.jp

  

The former Japanese Group of the Trilateral Commission was widened in 2000 to become the Pacific Asian Group. For the 2009-2012 Triennium, the Pacific Asian Group is composed of over 100 members from Japan, South Korea, Australia, New Zealand, and the five original ASEAN countries (Indonesia, Malaysia, the Philippines, Singapore and Thailand), joined by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India in 2009. Triennium Participants from Taiwan have also participated.

   

Yotaro Kobayashi, former chairman of the Board of Fuji-Xerox, is the fifth person to serve as chairman of this group since the Trilateral Commission was created in 1973. The first Japanese chairman was Takeshi Watanabe, who took up his Trilateral duties shortly after stepping down as president of the Asian Development Bank. The second was Isamu Yamashita, chairman of Mitsui Shipbuilding and Engineering. He was succeeded by Akio Morita, founder and chairman of the SONY Corporation. Kiichi Miyazawa, former prime minister of Japan and a leading figure in the Trilateral Commission from its beginning, became acting Japanese chairman in late 1993. He passed the baton in 1997 to Yotaro Kobayashi, then chairman and CEO of Fuji Xerox Co., Ltd., who served until 2013. He was succeeded by Yasuchika Hasegawa, president and CEO of Takeda Pharmaceutical Company, Ltd., and chairman of the Board of Keizai Doyukai (Japan Association of Corporate Executives).

   

The Japanese deputy chairman for many years was Nobuhiko Ushiba, former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later minister for external economic affairs. He was succeeded by Yoshio Okawara, who had also served as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Shijuro Ogata, former deputy governor of the Bank of Japan for international affairs, succeeded Ambassador Okawara, served as deputy chairman until December 2010, and was succeeded in 2011 by Jusuf Wanandi, co-founder and vice chairman, Board of Trustees, Centre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Indonesia), Jakarta. Han Sung-Joo, former Korean foreign minister, became a deputy chairman of the Pacific Asian Group in 2000. After being appointed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in 2003, he was succeeded by Kim Kyung-Won, president of the Seoul Forum for International Affairs and former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Nations. Professor Han, former president of Korea University and current chairman of of the International Policy Studies Institute of Korea (IPSIKOR), returned to the leadership of the Pacific Asian Group when he succeeded Kim Kyung-Won as deputy chairman in 2006. He stepped down in 2012 and was succeeded by Hong SeokHyun, chairman and CEO of Joong Ang Media Network (JMnet), Seoul, and former Korean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The group's name was changed from Pacific Asian Group to Asia Pacific Group in 2012.

   

Tadashi Yamamoto, founder and president of the Japan Center for International Exchange (JCIE), was the director on the Japanese/Pacific Asian side of the Trilateral Commission from its beginning until his death in April 2012. The JCIE staff served as the Trilateral Commission's secretariat among many other tasks. Tributes to Tadashi's many accomplishments have come from around the world, including these from George Berthoin, Henry Kissinger, David Rockefeller, and Hitoshi Tanaka. More about this remarkable leader may be found on the JCIE Website.

Ken Shibusawa, who is Tadashi Yamamoto's successor as president and CEO of JCIE, has been appointed the Commission's Asia Pacific Group director. A noted entrepreneur, finance professional, and author, he has worked throughout his career to link business and nonprofit successors. Visit the JCIE Website to learn more about him as well as JCIE's multiple involvements.

The Asia Pacific Group held their first regional conference in Seoul, Korea in November, 2000. Subsequent regional meetings were held in Hong Kong (2001), Singapore (2002), Tokyo (2003), Bangkok (2004), Beijing (2005), Bali, Indonesia (2006), Singapore (2007), Shanghai (2008), Seoul (2009), Tokyo (2010), and Bali (2011). The 2012 regional meeting was held in Hong Kong

   

삼극위원회 아시아 지부는 일본에 있습니다. 하고, 아시아 지부 핵심은 아시아 개발은행처럼 일본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일본 지부였는데, 2000년에 확대개편하면서 아시아태평양그룹이 됩니다.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쪽발돼중정권 때인 2000년에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그룹 회의를 개최합니다. 하고, 삼각위원회는 2003년 4월11일에서 16일 서울에서 전체 회의를 가졌습니다. 당시 삼극위원회 회의 기조 발제를 했던 자가 쪽발놈현입니다. 

   

삼극위원회 입장에서는 쪽발놈현이 쪽발민주당에서조차 비주류이기에 이용해먹기가 정말 좋았다고 판단했습니다. 쪽발놈현은 대한민국 이권을 삼극위원회에게 바치는 대신 삼극위원회가 만든 탄핵 사태로 여대야소를 만듭니다.

   

쪽발놈현은 저항보다 노예를 선택합니다. 허나, 쪽발놈현이 지나치게 씨족스럽게 해놔서 이명박 정부 직후 쪽발민주당 존립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삼극위원회는 쪽발민주당을 살리고자 쪽발놈현을 죽입니다. 살아있는 쪽발놈현은 이용가치가 다 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은 국유본에 저항하다가 임기중 암살당하였지만, 쪽발놈현 병쉰색희는 죽는 그날까지 국유본에게 충성하다가 뒈진 겁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국유본이 쪽발놈현 같은 놈을 대통령으로 만든 게 천추의 한이 되는 겁니다. 단군 이래 최악의 매국노, 쪽발놈현입니다. 

   

해외 후원

영문은행명 : kookmin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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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 Hwa Kim

S/C : CZNBKRSEXXX

B/A : 244-3, Yeomchang-Dong, Ganseo-Gu, Seoul, Korea 157-861 

(이 주소는 인드라 집주소가 아니라 은행 주소입니다~!)

국내 후원

국민은행 524902 - 96 - 101910 김종화 

무인도에서의 친절한 가이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남영덕은 "나는 의열단이오.

나는 한일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이다

. 나는 조선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즉

나의  형벌에 대하여는 사형도 좋소이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1923년 8월 13일 의열단 공판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단군이래 최악의 매국노,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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