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CJ :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이후락이다 국유본론 2013
2013/06/17 03:42
http://blog.naver.com/miavenus/70169783421
건강과 관련하여 말씀주신 분들 일일이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만, 요즘 인드라가 글쓰기를 하기가 불편하여 다소 성의없이 보이는 방식으로 말씀드리니 송구스럽습니다.
어제도 일이 있었습니다. 일하던 분 아들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해서, 일하던 분이 당분간 일을 하지 못해 하루종일 어수선했습니다. 안 아프던 다리도 일어나니 쥐가 났습니다. 자정을 지나니 다리가 멀쩡하네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인드라는 이런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인드라가 누군가를 칭찬하고 격려하면 그 분 운이 더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액 하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이지요. 반대로 인드라가 어떤 자를 비판, 비난하면 인드라 액을 그 넘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막상 가설을 세워보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여간 요즘 일이 많아서요. 점수제로 환산해보고 싶은 생각에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해서, 사태를 차분하게 풀어보자는 취지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입니다.
국제유태자본과 CJ :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이후락이다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6/17
"1958년 그는 대한민국 국방부 내에 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였다. 79부대, 79호실, 국방부 중앙정보부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이 특수부대는 미국 CIA의 인사가 유재흥, 김정렬에게 미국 CIA 한국지부와의 업무 교류를 목적으로 창설하자고 제의하였고, 1958년 미국 CIA의 한국지부장으로 웨인 넬슨이 부임한 뒤 지부 설치를 독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재흥, 김정렬에 의해 창설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방부 중앙정보부로, 국방부의 지휘를 받았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은 1958년 복구된 CIA 한국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김정렬 국방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 그것이 국방부장관 직속의 79부대였다.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미국 CIA 한국지부장 요청으로 3군 정보요원을 차출해 가칭 중앙정보부 라는 통합부대를 창설항렸다. 김정렬은 이 부대장에 이후락 준장을 앉혔고 이후락 준장은 자신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이름지었다.[5] 김정렬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김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D%9B%84%EB%9D%BD
"1959년 어느 날 미 CIA 주요 간부 한 사람 이 당시 국방 장관인 김정렬에게 미국 기관과는 별도[3]의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며 당시 국방부 장관 김정렬에게 제의해왔다.
그는 미국 기관과 는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될 CIA 지부 를 한국에 설치 하 고 싶다고 제의해왔다. 그는 CIA 지부 가 설치 되면 그 요원 들 에게 외 교관 과 똑같은 치외법권이 보장 되어 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4] 그러나 김정렬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미국 중앙정보부, 즉 CIA 간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넬슨은 CIA서울지부를 창설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김 장관에게 넬슨은 전임 장관인 김용우와 CIA부장 앨런 덜레스가 함께 서명한 협약서를 제시했다.
김정렬은 이 제안 에 대해 CIA 한국 지부 가 독자적인 기관 으로써 설치되는 것은 곤란 하나,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 를 마련하여 활동 하는것이 좋겠다는 의견 을 내놓았다.[4] 한미 두 나라의 정보협력에 대해서 규정한 문서였는데 김정렬은 이런 것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넬슨은 이 협약에 따라 CIA지부를 개설하고 이 기구와 상대할 한국측 정보기관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김정렬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김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양국 간의 합의를 거친 결과 미 대사관에는 미 CIA 한국 지부장 웨인 넬슨이 부임했다. 넬슨은 부임 즉시 김정렬 국방 장관 에게 '전임 김용우 국방 장관 시절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국방 장관 사이에는 양국의 정보를 교환 한다 는 비밀 협정 을 맺은 적이 있는데, 이 협정 을 이행 하려면 한국 측에도 GA 상대역인 정보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김정렬은 3군 에서 정보 요원을 뽑아 국방 장관 휘하의 직속 부대 를 만들고 그 부대장 으로 이후락 준장 을 임명했다.[4]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중앙정보부'였고 대외적으로는 이후락 자신의 군번을 딴 '79부대'라 는 위장호칭을 붙였다.[4]
국방부의 직속 기관으로 국방부 중앙정보부장은 국방부 장관이 겸했다. 그리고 국방부 중앙정보부(79호실)을 운영하는 실질적인 운영자인 실장은 이후락이 맡았다."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B0%A9%EB%B6%80_79%ED%98%B8%EC%8B%A4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이후락입니다.
국정원, 중앙정보부의 전신인 최초 중앙정보부(별칭 79부대)는 CIA 요구에 의하여 이승만 정부 때 탄생합니다. 이 시기 이승만 정부는 정보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CIA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CIA 한국지부에 대응하는 정보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서, 이후락이 흥미롭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국방부 직속 기관으로 국방부 장관이 겸임하였습니다. 허나, 당시 국방부 장관 김정렬은 이후락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이유야 뻔합니다. CIA에서 꼭 찍어서 중앙정보부장 실장이 이후락이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락이 CIA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으니 상전 같은 부하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습니다.
이는 미국 CIA 탄생 과정을 역추적하게 합니다. 영국 정보부에서 미국 정부더러 영국 정보부 미국 지부에 대응하는 미국 정보부 창설을 주장하였습니. 이에 1947년 미국 정부는 CIA를 만듭니다. 해서, 이때, CIA 역할이란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대통령을 감시 견제하고, 영국 정보부 지시 사항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미국은 1973년까지 영국 식민지였고, 빅터 로스차일드의 점령지였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왜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에 비판적이었을까요. 정확히 말한다면, 이승만이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에 비판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이 비판적이었던 것은 이승만이 항일운동가이자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등 외교의 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승만을 감시했던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OSS 대원이었던 유일한이라고 유한양행 사장입니다. 유일한 일제 시대 이력이 심상찮음을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대한민국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은 CIA 요청에 외교가답게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구 조건이 있었겠지요. 한국 국익과 관련된 조건을 내걸었겠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눈치를 보지 않고 독도를 실효적 지배할 만큼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반일 대통령이었습니다. 쪽발과 스포츠 경기를 할 때는 죽을 각오로 이겨라라고 격려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비해 망국적인 한일 어업협정을 한 쪽발돼중, 쪽발놈현을 생각해보세요.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쪽바리 색희를 대통령으로 삼는다는 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창피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청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쪽발 찌라시에 언제까지 세뇌를 당할 것입니까.
이승만 대통령 정도가 되면 통크게 CIA와 협상했을 것입니다. 중앙정보부 만들 터이니 대마도 달라는 식으로 했을 것입니다. 허나, 이는 CIA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CIA는 까다롭기 그지 없는 항일운동가 이승만 대통령 제거 작전을 세웠을 것입니다.
예서, CIA가 그간 요구하지 않다가 왜 1958년에 중앙정보부 창설을 요구했을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베트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국유본 기획이 3차 대전을 한국 전쟁으로, 십 년 뒤에는 베트남 전쟁였던 것입니다. 이후락이 뜬금없이 라오스 반군을 지원하러 라오스에 갔습니다. 중앙정보부 창설은 국내 문제 때문이 아니라 국제 문제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면, 이후락이 왜 라오스에 갔을까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때 적응이 가능한지 사전답사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면, 왜 라오스 파병이 중지된 것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또 통밥을 굴린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인드라는 추정합니다. 국유본은 사전 답사에 이어 라오스에서 한국군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베트남전 투입을 결정하려했을 것입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짜는 없다'는 외교 철학으로 국유본에게 대마도 반환, 남북 통일과 같은 대담한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국유본이 거절합니다. 이후, 국유본은 CIA와 중앙정보부를 통해 419 시위를 배후에서 주동하여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킵니다.
쪽발민주당이 들어섭니다. 대통령은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자에게 빨갱이라고 비난했던 쪽발보선이었고, 국무총리는 쪽발돼중의 스승으로서 일제 때 부역질한 악질 쪽바리 쪽발면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국방부 산하에서 국무총리 산하로 격상합니다. 이후락이 쪽발면 부하가 된 겁니다.
해서, 이후락은 516 혁명이 발발하자 체포됩니다. 허나, CIA 강력 요구로 4일만에 석방됩니다. 뿐만 아니라 1963년 12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CIA에게 보고합니다.
둘, 북 쪽발일성이 박헌영 뿐만 아니라 소련파를 숙청하였습니다. 국유본은 왜 박헌영이나 김두봉 같은 국내 민족공산주의자들을 놔두고 쪽발일성을 주석으로 임명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그리스와 동유럽에 있습니다.
국유본 기획에 따라 스탈린이 동유럽을 먹었습니다. 헌데, 그리스 및 동유럽에서 민족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통치를 거부하면서 티토처럼 독자적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는 국유본이 만든 냉전체제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냉전체제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서 실행한 것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삼차대전인 한국전쟁으로 냉전체제가 안정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김두봉, 박헌영과 같은 민족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하였습니다. 민족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이냐 혁명이냐 묻는다면 혁명일 것입니다. 허나, 쪽발일성만이 민족과 조국을 배반한 천한 피가 흐르는 쪽바리색희답게 쪽발에게 이익을 주고 한반도인에게 재앙뿐인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만식, 김구 같은 민족주의자도 죽였지요. 이때, 쪽발일성이 독립운동가들을 죽인 명분이 뭔 줄 아십니까. 친일파 운운인 것입니다. 애비 색희가 마약 팔다 공산주의자에게 뒈진 쪽발이인 데다가 북 정권 만들 때 좌우합작 독립운동가 출신 내각으로 만든 이승만 내각과 달리 강양욱 등 친인척 쪽바리 색희를 자리에 앉힌 것이 쪽발일성이 아닙니까.
허나, 국유본은 쪽발이에 반감이 없는 쪽발 일성을 임명합니다. 이유는 쪽발이색희들이 태평양 전쟁으로 반미했잖아요. 이용하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민족공산주의자들은 항일운동을 했기에 비록 반쪽뿐인 해방이지만 미국을 적대하는 것이 명분이 없었습니다.
해서, 국유본은 쪽발일성을 절대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한국전쟁 준비하는데 불과 3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지원인 셈입니다. 이뿐입니까. 당시 모택동이 도와달라고 국유본에게 사정사정했는데 국유본이 중국을 안 도와주어서 모택동이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으로 2선으로 후퇴할 정도였음에도 북한 만큼은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북은 남보다 당시 잘 살았습니다. 자력갱생? 자주경제? 자주국방? 시러베 병쉰이나 아는 개그일 뿐입니다.
헌데, 국유본이 스탈린을 숙청하니 쪽발일성이 남로당파와 소련파를 숙청합니다. 이는 국유본에게 혼선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소련파가 국유본 연락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허가이 같은 인물이 이후락, 김종필이었던 것입니다.
국유본이 해방 직후부터 1958년까지는 북한 평양에서 소련파가 북한을 중심으로 남한을 담당하게 하고, 쪽발 동경에서 쪽발을 중심으로 남한 지역을 담당하는 구도였습니다. 헌데, 소련파 숙청으로 변화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쪽발일성에 대한 지원을 끊고, 남한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허나, 이승만, 쪽발민주당 때에는 여건이 맞지 않았고, 박정희 때에 이르러서야 조건이 충족이 되어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쪽발일성은 1964년 이전까지 지원을 받지 못해 주체노선이니 하면서 쌩구라를 까며 초조해하였지만, 1964년에 들어서서 다소 안정화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1964년 소련을 방문한 직후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던 후루시초프가 실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1964년 이후 국유본은 데이비드 록펠러를 통해 북 정권과 연결됩니다. 허나, 병주고 약준다고 할까요? 쪽발일성은 제 2의 한국전쟁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군사력 강화로 나서는데요. 이로 인해 북한 경제가 망쪼로 변합니다. 일각에서는 쪽발정일 때문에 북한경제가 망했다고 하는데요. 쪽발정일 책임도 크지만, 원죄는 쪽발일성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후락 같은 자도 필요했지만 소련파 같은, 박헌영 같은 세력을 국내에서 찾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바로 516 혁명을 주도한 남로당파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셋, 이승만 제거 공작 때문입니다. 당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가 쪽발이 짓을 했는지 다 알 때입니다. 쪽발민주당에서는 그나마 신익희 정도가 쪽발이가 아닌 애국자였는데요. CIA나 중앙정보부 때문인지 죽습니다. 해서, 쪽발민주당은 예나 지금이나 늘 쪽발이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해서, 정권 교체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권 교체를 하려면 419 같은 사건을 CIA가 만들어야했습니다. CIA는 대한민국과 이란, 이집트, 이스라엘 등지에서 선거 조작, 419 시위 조작 같은 사건을 잘 만듭니다.
문제는 이후락은 물론 쪽발민주당 정권이 시원찮았던 것입니다.
국유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독일 재단을 한국에 도입시키는 등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갑니다.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은 국내 문제 때문이 아닌 국제 문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허나, 이후락과 쪽발민주당 정권 하는 짓이 병쉰이다 보니 국유본 내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모든 일을 하나요? 아닐 것입니다. 사장은 주요 안건만 처리하고 대부분 일들을 임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헌데, 임원이 죽을 쑤면 어찌 되나요? 사장이 두고 보았다가 영 안 되겠으면 직접 개입하죠?
국유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문제에 대해 빅터 로스차일드는 516 혁명 전까지 국유본 귀족들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허나, 국유본 귀족 하는 짓이 병쉰이다 보니 빅터 로스차일드가 직접 개입한 것이 516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장기집권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오늘날 노동당 집권당이 세계 최초로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 정부를 승인했던 것입니다.
허나, 국유본 귀족들은 박정희 정부에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해서, 스칼라피노, 훗날 삼극위원회 회원이자 한국전쟁은 내전이다 등을 주장한 자가 박정희 정부를 만나고서는 박정희 정부가 사회주의 정부다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하고, 사사건건 국유본 귀족이 주축인 미국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는 공산주의 정부인가, 왜 화폐 개혁하나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화폐 개혁을 할 때도 화폐를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주조했습니다.
처음부터 이후락이나 김종필이 국유본 귀족파, 빅터 로스차일드파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1960년대 후반 국유본 권력투쟁이 본격화된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후락이나 김종필 모두 국유본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알파, 오메가였습니다. 이때, 1950년대는 이후락이 알파, 김종필이 오메가였습니다. 허나, 1960년대는 김종필이 알파, 이후락이 오메가가 됩니다. 하고, 1970년대는 이후락이 다시 알파가 되고 김종필이 오메가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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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국유본이 사실을 장악한 세상에서
인드라는 언제나 진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남영덕은 "나는 의열단이오.
나는 한일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이다
. 나는 조선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즉
나의 형벌에 대하여는 사형도 좋소이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1923년 8월 13일 의열단 공판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서민 등골 빼먹는,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한국의 야스쿠니, 쪽발놈현 무덤은 한반도에 저주를 내리는 대못이다
쪽발놈현 무덤 철거하고,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하자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인드라 블로그 운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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