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가 아편밀거래한 쪽발이었던 쪽발 김일성(김성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24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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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5 : 애비가 아편밀거래한 쪽발이었던 쪽발 김일성(김성주)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24

   

   

1. 한반도 분단은 스탈린, 루즈벨트, 영국, 국유본, 빅터 로스차일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한반도 분단은 얄타 회담에서 비롯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이 한반도 분단을 시켰다고 생각한다. 허나, 과연 그럴까?

   

"1945년 1월 18일 미 국무부는 「한국의 전후 지위에 관한 정책건의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했는데, 이 건의서에서 "한국의 점령이 분할로서가 아니라 단일구역으로 조직되어야한다"고 역설하면서,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을 배양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한국을 국제 신탁통치나 국제 행정 지배하에 둘 것을 권고했다. 이 건의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 전체의 점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5년 2월 8일,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미소 3국이 위임국으로서 20-30년에 걸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관해서는 대체로 찬성했으나, 신탁기간과 외국군의 주둔에 대해서 이의(異議)를 달았다. 스탈린은 영국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으며 신탁기간이 짧을수록 더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고 혹시 외국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하게 될 것이냐는 것이었다. 외국군 주둔에 대한 스탈린의 질문은 신탁이 결정되면 외군은 철수하게 될지 그 의중을 떠 본 것이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이 같은 이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 의문점은 왜 스탈린은 이런 이의를 제기했나? 하는 점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외국군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몰아내고, 이 땅을 소련의 독점적인 영향권으로 묶어두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의문점은 왜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이의 제기를 수락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의 여건을 생각해 본다면, 한국의 자치능력의 결여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얄타회담은 미국의 동북아시아정책에서 큰 분기점을 이루었는데, 그 이유는 전후 동북아시아에 소련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게 된 계기를 마련한 중요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미 군부 수뇌부에서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사상자 숫자를 줄이고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라도 소련과의 제휴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조지 마셜을 필두로 한 미 육군 수뇌부는 소련군의 대일참전을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을 위시한 미 육군수뇌부의 건의를 받아드려,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비밀회담에서 대일전의 참전을 촉구하였고, 그 대가로 노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중국과 만주에서 상실했던 구영토를 거의 회복시켜줄 것을 보장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루즈벨트의 전후 평화 구상과 대소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즈벨트는 전후 국제질서의 기본 틀은 국제연합(유엔)의 결성을 통해 이루어지겠지만, 국제질서의 주요한 역할은 미소 등 4대강국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할 것으로 구상하였다. 이런 루즈벨트의 원대한 구상은 4대강국이 명실상부하게 전쟁에서 승전국으로 위상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말 아시아에서 전쟁의 상황은 루즈벨트가 기대한 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에 대항해서 싸우기보다는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와 내전상태에 더 몰두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그 해 가을에 일본군이 대규모 공세인 '1호작전'에서 국민당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결국 중국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루즈벨트는 중국전선에서 대일전의 전쟁수행 능력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다. 자연히 그는 소련과의 전시 협력관계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국제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소련과의 협력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약간의 양보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루즈벨트는 더 나아가 자신의 개인외교를 통해서 스탈린을 설득하여 전후 세계평화의 동반자로서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루즈벨트는 국무부의 의견보다는 군부의 조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서 장기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단기적인 군사적 목표들이 복합적으로 한국문제 처리와 나아가서 한국분단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 육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소련의 참전을 권유한 요인이외에도, 루즈벨트 행정부의 핵심부서에서는 이미 친소파내지 친공파의 인맥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29년 대공황의 발생 덕분에 집권에 성공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3년 마침내 소련을 승인했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초기시절 뉴딜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했던 소위 많은 뉴딜러들은 소련의 계획경제가 실업문제나 공황을 겪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해서 호감을 가진 경향이 있었다. 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행정부내의 친소파의 입지가 약화되었지만, 1941년 6월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뒤, 미국, 영국은 소련과 대동맹을 결성하면서 다시 그들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그들은 소련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수뇌부에도 친소파의 인맥을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루즈벨트가 가장 신임한 최측근이며 상공부 장관을 지낸 홉킨스, 국무부내에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앨저 히스, 1936-38년 사이에 주소대사를 지낸 조셉 데이비스, 미 육군에서 대통령직속기관인 '소비에트 의정서 위원회'(PSPC)의 집행장교인 제임스 번즈 장군 등이 대표적인 친소파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막대한 무기대여 원조를 지지했으며, 실제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영국 다음으로 많은 무기대여 원조를 얻는 혜택을 누렸다. 또 그들은 "전후에도 소련과 협력이 세계평화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소유화정책의 형성과정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이주천, 『루즈벨트의 친소정책』).

   

특히 앨저 히스는 정부기관내의 공산주의자 모임인 웨어그룹(Ware Group)의 일원으로서 암약했는데, 챔버스의 고발과 증언으로 위증죄로 구속되었다가, 마침내 90년대이후 베노나 파일과 소련 KGB문서가 공개되면서 반세기만에 소련간첩으로 밝혀진 인물이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 박사가 국무부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앨저 히스를 면담하면서 망명정부의 승인과 무기대여 원조를 촉구하면서 전후 소련이 한반도를 强占할 가능성에 우려를 표명했다. 앨저 히스는 이승만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도 없고 따라서 무기대여 지원도 해 줄 수 없으면 한국문제에 대한 해결은 일본의 패망이후로 미루어야한다고 역설했다(박일영 역, 『건국의 내막』, 상). 그러니 미 행정부내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소련으로 흘러갔는지 능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루즈벨트 행정부가 소련에게 대일전 참전을 권유하였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의 비극적 씨앗이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미군은 이미 오키나와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다(일본군 전사자 24만명, 미군 전사자 1만2,500명). 여기에 미 군부는 얄타회담 직전에 대일전 참전에서 미군사상자의 수치를 50만명에서 100만명까지로 추산했었다. 1944년 필리핀해전에서 처음으로 출격한 일본 항공기들의 가미카제 특공대의 돌격은 미군으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기에 족했다. 소련 참전 권유의 주된 이유는 미군부 지도자들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수행해야 일본이 항복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당시 미군 병력 규모로 보아 일본 본토 상륙작전에 전력 투구해야하므로 한반도에까지 병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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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최근에는 1945년 9월 런던외상회의에서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지중해 진출과 훗카이도 지배를 거부한 까닭에 스탈린이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여 한반도 분단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 소련이 북한을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보급기지와 피신처로 삼았다는 것이다. 해서, 이승만 정읍 발언 이전에 이미 소련이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지역으로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1941년 12월 22일 헐(Cordell Hull) 미국무장관은 주중미국대사 고스(Clarence Gauss)에게 '임정'의 실태와 조직, 무력병력의 수와 활동범위, 조선과 만주에 있는 혁명세력과의 관계, 그리고 '임정'에 대한 중국 국민정부의 태도나 그것과의 관계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7). 이 지시에 대해 고스는 1942년 1월 3일 '임정'의 실태와 조직에 관한 유력한 정보는 현재 입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면서도, 중국인 부대 속에 소규모의 조선인 무장부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외상으로 자칭하는 조소앙(趙素昻)이란 인물이 '임정'을 대표하고 있으며, 혁명적인 조선인 세력과의 관계는 현재 불분명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임정'은 그 세력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온건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Korean Independence Party)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만주의 많은 조선인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좌익적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National Revolutionary Party)이 있다고 들었지만, '임정' 속에는 그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8). 나아가 1942년 2월 12일, 고스는 조소앙과의 비공식 인터뷰 내용을 보고했는데, 조소앙이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요구했으며, 조선인은 독립을 위하여 일치해 있으며 '임정'이 조선독립운동의 유일한 대표기구라고 주장했으나, 주로 급진적이며 친공산주의적인 그룹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주의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여 그로부터는 '임정'과 그러한 외부 그룹과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 하나 명확한 설명을 얻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9).

   

그런데 미국정부는 '임정'의 주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2월 12일 영국주재 미국대사에게 보낸 전문 속에서, 미국무성은 조선의 독립과 전쟁에의 참가에 관심을 갖는 여러 재미 조선인 그룹이 존재하고 있는데, 현시점에서는 어떠한 조선인 조직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중요한 운동으로 인정한다든가, 또는 장래 조선승인에 관해 언급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의 지배를 종결시키기 위한 조선인의 노력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일반적인 성명을 발표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영국정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10).

   

2월 28일 영국정부의 견해로서 미국정부에 보고된 내용은, 전쟁발발후 조소앙과 중경에 있는 다른 조선인 조직의 대표들이 영국대사관에도 접촉을 시도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러나 조선인 세력은 분열되어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 견해도 상당히 다르다고 전했다. 또한 만주지역이나 일본에 의해 점령된 중국에서는 효과적인 항일운동의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이나 일본국내에서는 그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상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때 적절한 시기의 선언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현재와 같이 일본의 승리가 계속되는 한, 미영측의 어떠한 종류의 공식적인 선언이나 승인행동도 일본의 지배지역에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효과적인 규모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조선인의 노력에 동정의 뜻을 표하는 정도에서 머물러야 하며, 미국무성이 행하는 조선문제에 관한 어떠한 결정에 대해서도 지지한다는 영국 외무성의 의견이 보고되었다11). 즉 통일된 강력한 조선인 항일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전황이 일본측에 유리한 현시점에서는 조선인 세력에 대한 연합국의 승인이나 지지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미국과 영국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정' 승인이나 전투참가 요청은 연합국에 의해 사실상 부정되었는데, '임정'이 승인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식민지 문제가 연관되어 있었다. 1942년 3월 28일 고스는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인도를 포함한 다른 아시아 식민지 민중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른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채, 미국이 조선에 관한 성명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12). 이에 대해 미국무성 당국은 4월 7일, 정보는 대단히 유용했으며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조선문제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계속할 것을 격려했다13). "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77501

   

미국은 이차대전 중에 CIA조차 없었다. 영국의 지도, 국유본의 지도, 빅터 로스차일드의 지도를 받아 이차대전을 치루었다. 해서, 국유본론은 미국이 이 당시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또한, 한반도 분단의 궁극적 책임을 미국 루즈벨트나 소련 스탈린에 두는 견해에 부정적이다. 소련과 스탈린이 국유본 지배하에 있다는 이야기는 따로 장을 할애하여 말할 것이다.

   

전후 CIA를 만든 것도, 한반도 분단을 시킨 것도, 모택동이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것도, 냉전이 시작한 것도, 한국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두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국유본의 기획이다.

   

한국전쟁을 우발적인 내전이라고 보는 수정주의자들, 대표적인 인물로 스칼라피노 같은 인물은 빌더버그, 삼각위원회 회원, 즉, 국유본 인물이다. 한마디로 국유본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개발한 한국전쟁 원인 논리가 수정주의 논리인 게다.

   

정통론은 소련에 책임을, 수정론은 미국에 책임을 주장하나, 정통론이나 수정론이나 모두 국유본이 만든 논리에 불과하다. 국유본이 한국 분단과 한국 전쟁의 원흉이다.

   

   

2. 왜 국유본은 애비가 아편 밀거래로 떼돈을 벌다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진 쪽발 김일성을 택했는가

   

   

"국제유태자본이 결국 택한 전략은 냉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택한 수순은 첫째, 자신들을 숨겨 잠수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국 대신 미국을 세계지도국으로 택합니다. 1947년에 CIA가 만들어지고,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며, 케넌 구상이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막강한 힘은 MI6과 같은 영국 첩보부에 있다고 합니다. 가끔 미국 CIA 사업이 폭로되는 이유는 영국 첩보부의 견제로 분석됩니다. CIA에 비해 영국 첩보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셋째, 모겐소 계획 대신 마샬 플랜 등으로 일본과 독일을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이 그리스, 터키에 원조를 하면서 왕당파를 적극 지지하여 그리스에 대한 지정학적 점령을 고착화시킵니다. 이후 그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감히 국제유태자본에게 대든 덕분입니다. 넷째, 영국이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냉전을 지속시킬 희생양을 찾아야 했습니다. 제한적인 전쟁.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국제유태자본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선박왕 오아시스를 탄생시킵니다. 그는 이차대전 중 연합군 물자 수송을 도왔던 유태인입니다. 그리스는 매우 가난하면서도 80여개의 선박가문만이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는데, 그중 유태인 오아시스가 선박왕이 된 것은 국제유태자본 덕분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떼돈을 법니다. 오아시스가 국제유태자본에게 암살당했다고 알려진 케네디 미망인과 결혼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2100543

   

국유본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한 이유는 그리스에 있다. 이차대전 직후 그리스에서는 국유본 반대 민족공산주의파들이 득세했다. 이런 까닭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 정보부가 미국 CIA를 승인하면서 최초로 넘긴 사안이 그리스 문제 처리였다. 왜 그리스 민족공산주의자들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그리스를 비롯한 동구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외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의 냉전체제 기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 분쇄되어야 했기에 그리스 문제가 본보기로 진압되었다. 이후 유화적이었던 각국 민족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유럽, 일본,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3. 쪽발 김일성의 1950년대 경제발전 신화는 전적으로 국유본 덕분이다

   

자력 갱생? 그따위 신화는 없다. 대표적인 예가 소련과 중국 갈등이다. 갈등의 원인은 중국 경제발전계획에 소련이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소련이 지원해주지 않은 데서 발생했다. 해서, 모택동이 그럼 자본없이 노동력으로 경제발전을 일으키자고 했는데, 그것이 대약진운동이다. 결과는 대재앙. 

   

하여, 중국도 하지 못한 경제 발전을 김일성이 이루었다고 주사돌이들이 주장하는데, 실상은 국유본 원조없이 북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

   

허나, 이러한 경제 발전도 1960년대에 이르러 국유본 지시로 군수산업에 집중하면서 북한 경제는 회복할 도리없이 파탄지경에 이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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