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동아시아 근대사 : 프리메이슨 토머스 글로버,자딘매디슨,이토 히로부미,사카모토 료마,메이지유신,나비부인 국유본론 2013
2013/11/07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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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과 동아시아 근대사 :
토머스 글로버,자딘매디슨,이토 히로부미,사카모토 료마,메이지유신,나비부인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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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는 1857년에 문을 닫지만, 실질적으로는 1874년에 가서야 문을 닫습니다. 그 이전까지 지리한 청산과정을 밟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두 가지 대안을 마련합니다. 투자은행 격인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와 상업은행 격인 'HSBC 은행'.
현존하는 펀드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펀드는 1868년 런던에서 설립된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The Foreign & Colonial Investment Trust Pic)입니다. 이 회사는 폐업한 동인도회사 이사진들이 동인도회사를 청산하면서 받은 지분으로 투자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입니다. 이 회사가 최초로 투자한 것은 1882년 일본 채권입니다.
동인도회사에 투자했던 프리메이슨 영국귀족들이 만든 신탁회사가 1882년 일본에 투자하면서 일본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은 동아시아 해상길을 황금의 나라로 생각하던 통일신라로 가는 길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 도시였습니다. 이 해상길은 해상왕 왕건 덕분에 고려 벽란도 시대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코리아도 아라비아 상인이 고려를 코리아로 불렀던 데서 유래합니다.
헌데, 몽골 침략 후 몽골군이 해상에서는 취약하여 섬 무인도화하는 공도정책을 취하자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섬들이 주인없는 섬으로 전락합니다. 고려시대 중반까지만 해도 숨죽이면서 살던 쪽바리들이 대륙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없자 살판난 듯 설설 기어나와 고려말에 이르르면 왜구가 됩니다. 이때 왜구는 단지 왜넘 쪽발만 지칭하지 않고 한중일 해변과 섬에 살면서 해적질도 하는 족속들 전체를 지칭하게 됩니다.
서양인이 오기 전까지 동남아시아는 식인을 습성으로 했던 대만 원주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폴리네시아 해적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 폴리네시아인이 호주, 뉴질랜드, 피지, 하와이까지 간 족속들입니다. 이들 동남아시아 해적과 왜구들이 교역을 한 것이 중국 남부 마카오였는데요. 주요 품목은 노예와 향신료 등이었다고 합니다. 동남아시아 해적들이 아이누족 피가 약간 섞여서 희끄무레한 일본 계집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예서, 16세기 중국에 왔던 포르투갈, 스페인 선장들 중에는 왜구와 해적질이든, 무역이든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일본에까지 들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서양이 중국과 교역한 것은 아닙니다. 교역하고 싶어도 팔 물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광산을 발굴 뒤 은이 대거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동서양 무역이 활성화됩니다.
은을 실고 유럽에서 출발한 배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구하고 희망봉을 돌아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흑인노예를 팔고 경비를 충당합니다. 후추 생산지인 인도네시아에 도착해서 후추를 헐값에 구입합니다. 후추 부피가 얼마 안 되니 항로를 더 동쪽으로 움직여 중국 마카오로 가서 중국에 은을 팔고 도자기, 차 등 진귀한 동양 최첨단 고가 상품을 구입합니다. 후일 은이 떨어지니 아편이 대안이 된 것입니다. 이때 마침 중국이 은본위제하는 바람에 은 수요만이 있었습니다. 다른 건 다 중국 안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금이 부족할 때는 류쿠왕국(오키나와)나 쪽발 나가사키에 가서 총 같은 것을 팔고 쪽발 은을 받았습니다. 당시 쪽발에 세계적 규모 은광산이 발견되었고, 조선에서 유출된 은제련 기술로 은이 대량생산되고 있었습니다. 해서, 배는 다시 중국 상품을 매입하고 유럽으로 되돌아옵니다. 되돌아오는 경비는 인도, 아라비아에서 중국 명품을 일부 팔고, 아프리카에서 구한 흑인노예를 유럽에서 팔아 충당합니다. 유럽으로 되돌아오니 수익이 보통 만배 십만배입니다. 말그대로 만선인 겁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국적 배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영국이 사략선을 동원한 전략이 주효하여 제해권을 장악합니다. 1720년대 영국 해군이 해적들을 박멸할 때까지 전세계 해상에는 해적들이 들끓어서 아무나 배타고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영국 해군이 전 세계 해상을 통제해서 근해 이외에는 누구도 허락받지 않고 원양으로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해서, 19세기말까지 동아시아 무역은 중국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영국 상인들의 독무대였던 것입니다. 예서, 특히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출신들이 활약한 것은 일타삼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 장로파 존 녹스의 헌신적 활약으로 스코틀랜드에는 칼뱅파 신앙이 점차 주류화하고 있었습니다. 칼뱅파 신앙은 당대 카톨릭 교리와 달리 상업 활동에 대한 신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이주하면 죽음이라는 미국 초기 이민 때도 프리메이슨 회사를 통해서 수많은 빈민 프리메이슨들이 미국 이주를 했던 것입니다. 감자 파동으로 미국 이주한 아일랜드인처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했던 심정으로 가난하게 살던 이들이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아시아 이주도 스코틀랜드 사람 아니면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대체소설처럼 조선 후기 무렵 한국이 영국과 같은 상황이라면 당시 영국 같은 곳까지 가서 정착해서 무역하려고 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강제로 떠밀기 전에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예외가 딱 하나 있다면 종교죠. 종교적 신념은 가서 죽어라, 하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가잖아요. 오늘날에도 중동,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라니까 통일교건, 기독교건 가서 선교하잖습니까?
둘, 프리메이슨은 지식인, 몰락한 귀족, 상인, 용병 등 당대 사회구조 속에서 신분 차별을 받지 않고 출세를 원하는 이들의 보금자리이자 출세 창구였습니다.
평민이 출세해보겠다고 대항해시대 주역이라는 풍운의 꿈을 품고 아시아로 향하기도 했습니다.
셋, 무엇보다 영국 해군이 부족한 해군 병력을 보충하고자 틈만 나면 스코틀랜드 해안가 마을을 습격해서 남자만 보면 무조건 징병해가는 통에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제화 바람이 엄청났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는 1859년 일본 나가사키로 와서 일어도 익히면서 주변 정세를 파악합니다. 헌데,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애버딘 돈 강을 지키는 해안경비원이었습니다. 특별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토머스 글로버는 머리가 좋아서인지 16세 되던 1854년에 먼 친척뻘 케네스 로스 머켄지의 후원을 받아 애버딘 명문고교에 입학합니다. 케네스는 토머스 글로버가 고교를 졸업하자 1857년 그를 고용해서 상하이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케네스는 자딘매디슨 회사 직원이었습니다.
하고, 토머스 글로버는 1859년 나가사키에 입성합니다. 자신의 의지보다는 프리메이슨 지시였던 것같습니다. 2년 후 1861년 24세 나이에 글로버상회(Glover & Co.)를 설립했습니다. 이때 자딘매디슨 회사가 토머스 글로버에게 자금을 대출해 주었습니다. 1864년 사순가문에 밀려 일본으로 내쫓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회사인 이화양행 혹은 자딘매디슨(Jardin Matheson Co.) 대리인 자격을 취득합니다. 헌데, 그냥 자격을 취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토머스 글로버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글로버는 이 시기에 일본인들과 안면을 익히면서 1863년 나가사키 미나미 야마테 외국인 거류지역에 구라바엔이란 저택을 짓고 일본인들과 안면을 익혔습니다.
1863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페리제독 흑선 공포가 정신적 충격이었다면 1863년 8월 전쟁이라 부르기 창피할 만큼 사쯔마번이 대패했던 사쯔마영국전쟁이 물리적 충격이었습니다. 하여, 이때부터 서양을 배우자고 낭인 사이에서 열풍이 불어 나가사키에 낭인들 유람이 있었고, 그중에 사카모토 료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인이 제일 좋아하고, 손정의도 틈만 나면 이야기하는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샤츄라는 일본 최초 회사를 차리고 무역중계업을 합니다. 주로 한 일이 글로버에게 무기를 받아 번의 군대에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토머스 글로버가 영국에 유학시킨 인물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죠슈번 밀명을 받고 료마 중재하에 글로버에게 소총을 샀는데 이때 글로버 눈에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온 것입니다.
1863년 조슈 번의 사무라이 자제 5명이 프리메이슨 자딘매디슨 회사 선박을 타고 영국으로 밀항 유학길에 올랐을 때, 프리메이슨 자딘매디슨 회사의 나가사키 현지 대리인은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불법밀항이니 잘못하면 도쿠가와 막부에 찍혀서 밥줄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밀항한 사무라이 유학생들은 도쿠가와 막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고 선원으로 가장했습니다. 자딘 매더슨 회사의 현지 나가사키 대리인이 내켜하지 않았음에도 선박밀항이 진행된 것은 프리메이슨 상부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이 일에 소극적인 다른 이들과 달리 가장 적극적인 이가 토머스 글로버였던 것입니다.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자 대리인 자격을 획득한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 유대인에게 밀렸다고 하나 세력이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스차일드와 유대인이 여당이라면 베어링형제와 프리메이슨은 야당이었습니다. 그는 일어가 되는 몇 안 되는 영국인 지위를 활용하여 막부와 번에 선박과 무기를 팔아 많은 돈을 벌며 명성을 획득합니다. 후일 글로버가 일본에 판 배중에는 글로버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홀 럿셀 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조선 침략에 투입되는 운요호도 있었습니다.
조슈 5 인방 밀항 낭인들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맞은 것은 런던대학의 화학자 알렉산더 윌리엄슨(1824~1904) 입니다. 하고, 알렉산더 윌리엄슨 교수를 조슈 5 인방에게 붙여준 것은 자딘매디슨회사 설립자 프리메이슨 제임스 매디슨(1796-1878)입니다.
자딘매디슨회사는 나이어린 낭인들에게 선박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설립자가 나서서 보호자까지 붙여 주었습니다. 조슈 5 인방이 유학자금이 바닥났을 때는 재정지원도 했습니다. 자딘 매더슨 회사 설립자 제임스 매더슨과 런던대학 화학교수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토머스 글로버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입니다.
2년 후 1865년에는 나가사키 대리인으로 승진한 토머스 글로버가 직접 나서서 사쯔마 번 낭인들을 영국으로 밀항 유학시켰습니다. 중간 기착지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주재 영국영사가 낭인들을 직접 마중나왔습니다. 영국에 도착해서는 런던대학 화학교수 알렉산더 윌리엄슨과 더불어 최상류층 하원의원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로렌스 올리펀트(1829~1888)가 유학 낭인들을 접대했습니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로렌스 올리펀트 아버지 앤소니 올리펀트 경(1793~1859)은 빅토리아 여왕의 임명을 받은 실론 총독이었습니다. 실론에서 처음으로 차를 재배했고, 이러한 아버지를 둔 로렌스 올리펀트는 영국 최상류 지도자 및 지식인들과 교류했습니다. 1859년에 제임스 브루스 엘긴 경의 개인비서로 잠시 일본을 방문했었고, 1862년에 일본 초대 영국영사 러더포드 알콕의 비서로 또 일본을 방문했다가 에도의 존왕양이 낭인들에게 공격받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1865년 영국에 온 사쓰마 유학생들에게 대접을 해주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호의가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는 조직적 대응이라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로렌스 울리펀트는 시오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로렌스 올리펀트는 또한 크리스챤이자 시오니스트였습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영토이던 이스라엘 북쪽 지방에 형성되기 시작한 유대인 정착촌을 조사하기 위해서 1878~1881년 동안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다음해 1882년 로스차일드 프랑스 가문의 제임스 로스차일드(1845~1934)가 후원하여 이스라엘 북쪽 Rosh Pinna 지역에 첫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됩니다.
로렌스 올리펀트는 영국 내의 '그리스도아델피안' 신자들에게서 기부금을 거둬 유대인 정착을 도왔고, 강력한 시오니스트 제임스 로스차일드에게 유대인 정착을 위한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아델피안은 기독교의 한 종파로, 당시 영국 그리스도아델피안 회장직을 맡고 있던 로버트 로버츠(1839~1898)는 토머스 글로버, 제임스 매더슨, 알렉산더 윌리엄슨, 로렌스 올리펀트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인입니다. 토머스 글로버와 같은 애버딘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로렌스 울리펀트가 유대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뻗어가는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유대를 위해서 대표적인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으로서 적극 협력했다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로렌스 올리펀트는 Athenaeum Club 회원이었습니다. Athenaeum Club은 영국수상에서부터 철학자 과학자까지 상류지식인들의 모임으로, 적자생존론의 허버트 스펜서가 당시 회원이었습니다, 1865년 사쓰마 유학생 중의 한 명이었던 모리 아리노리(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첫 교육부 장관)은 나중에 영국주재 일본대사가 되어 다시 영국에 왔을 때 Athenaeum Club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인맥을 쌓았습니다. 그가 영국 최상류층에게만 허용되는 Athenaeum Club 회원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스 올리펀트 덕분일 것입니다.
토머스 글로버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기획자가 해리 파크스였다면 연출자는 토머스 글로버였고, 주연이 사카모토 료마와 삿쵸동맹이었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토머스 글로버는 일본 최초의 철도와 조선소, 그리고 최초의 기린맥주를 만들고 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대부분의 사업을 이와사키 야타로라는 오늘날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미쓰비시 창업자에게 공짜로 넘겼다는 데에 있습니다. 쪽발왕으로부터 훈장도 받았습니다.
끝으로 토머스 글로버하면 나비부인입니다.
'나비부인'은 푸치니가 작곡한 2막 3장의 오페라입니다. 일본 기녀 나비부인이 미국 해군 장교 핀커튼(Pinkerton)에게 버림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비극적 이야기로 1904년에 밀라노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헌데, 이 나비부인 모델이 토머스 글로버 부인입니다.
글로버는 1866년 당시 이혼녀이던 야마무라 쓰루와 결혼했습니다. 글로버 부인은 나비가 수놓아져 있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고 하며, 나비부인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푸치니는 글로버와 그의 부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나비부인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나비부인의 실제 주인공인 글로버와 그의 부인 사이에 1남 1녀가 태어났는데, 그 딸이 글로버 하나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인천에 왔습니다.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인천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영국 인천영사관(현 파라다이스 호텔 터)에서 생활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70세의 나이로 사망,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하면, 왜 영국정부와 로스차일드, 하고 프리메이슨은 그토록 일본에 공을 들였던 것일까요? 메이지유신을 일으켜서라도 영일동맹을 맺고 싶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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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것은
누구였을까
무엇이었을까
길이었을까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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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 인드라 창작 뮤지컬 마법천자문 주제가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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