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민주당이 김구선생을 죽였다? 국유본론 2009

2009/02/06 18:40

http://blog.naver.com/miavenus/70041737984

   

   

   

   

친일민주당이 김구선생을 죽였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09/02/06

   

만년학생:

인드라님 예전에 백범 김구선생을 향한 뉴라이트 세력들의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었는데 답변이 없으셔서 다시 여쭙니다(저번에 실수로 삭제하셨다고 하신 것 같은데^^) 또 제주도의 성장가능성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답변이 없으셔서 다시 여쭙니다. (바쁘신 것 아니까 천천히 답변해주세요~^^) 아직도 우리사회는 '술 권하는 사회'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책 권하는 사회'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특히 저와 같은 이십대 청춘을 살펴보면,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과 독서의 즐거움을 알면서도 어떠한 책을 읽을지 몰라 방황하는 청춘들로 가득합니다. 인드라님, 문,사,철,언,예,종을 비롯하여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분야를 막론하여 지성인으로 다가가기위해 반드시 읽어야할 책 100권의 책을 리스트로 만들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인드라님께서 권하시는 백여 권의 책을 읽음으로서 독서의 방향을 잡고 좀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권장도서 100선 목록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INDRA:

글 감사드린다. 글을 정리해서 올리다가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글이 늦어졌음을 양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신 의견들이 많아서 지금에야 글을 올리는 것에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인가,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인드라는 그때그때 자신이 절실히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책에 대해서 읽기를 바라고 있다. 선생이 역할이 있다면 제자에게 커리큘럼을 제시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커리큘럼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 있다고 인드라는 본다. 그럼에도 굳이 인드라가 책 추천을 만일 한다면 육십이 넘어서 하고 싶다. 그때조차도 과연 백 권?이라는 식으로 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읽는다면 백 권으로도 부족하며, 또한 한 권으로도 넘치는 법이기 때문이다. 무협지적으로 말한다면, 구파일방의 무예를 모두 익힌다고 해서 고수가 되는 법은 아니며, 비급이 있어서 평생 익혀도 고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절실히 원하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평범한 데서도 얼마든지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런 점에서 인드라는 아직 '내 인생의 책'으로 어떤 책을 고를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나이 육십을 먹고서는 책을 고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 있을 뿐이다. 만일 그런 책을 결정할 수 있다면, 인드라는 그 책을 매일 매일 읽고, 또 읽을 것이며, 어디를 가든 항상 지니고 다닐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많은 책이 필요하지 않고, 제대로 된 책 한 권이면 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근래 미국, 영국 자료 등으로 해방정국을 국제관계 역학 구도에서 살펴보는 시도들이 있다. 이는 매우 진전된 흐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해방정국 연구는 지나치게 국내에 국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마치 조선왕조 선조의 행적을 국내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지만, 당대 세계 최강국이었던 명의 정치와 겹쳐서 읽으면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서, 진일보했던 것이 만주 및 중국, 미국 활동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흐름이 1980년대를 통과한 386 역사학자들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혁신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그 까닭은 소련 등에서 무더기로 자료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수정주의가 쇠퇴하고, 정통주의와 자유주의가 득세하였다.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현재성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역사학계는 1980년대 중반 『한국민중사』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현대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이 1986년에 완역된 점도 현대사 활성화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한국 역사학계의 소장 학자들 및 사회과학계통의 학자들은 수정주의적 입장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공동연구라는 방식을 통하여 학문에 접근하였으며, 반공 친미를 비판하면서 반외세 자주화 운동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자료보다는 올바른 관점을 중요시 여겼다.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의 몰락, 한국의 민주화의 점진적 실현 등 국내외적인 환경의 변화는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수정주의적 관점을137) 점차적으로 퇴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이후 소련에서 입수된 새로운 자료들은 한국전쟁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컸음을 확인해 주는 등 수정주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통주의 주장 나아가 자유주의적 시각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한국 근 현대사 연구동향과 문제점

http://blog.naver.com/hesbs/120007697692

   

그런데 국제유태자본론은 정통주의 및 자유주의와 수정주의 양측을 모두 비판적으로 보면서 등장한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의 특징은 한마디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가 야합을 했다는 게다.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문제란 일어난 사태를 한쪽만 바라보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는 게다.

   

그렇다면 국제유태자본론이 내세우는 근대사, 현대사의 관점은 무엇인가.

   

첫째, 국제유태자본은 영국 중심적인 세계시장에서 19세기 중후반 세계경제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제유태자본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던 아편 무역에서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청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세계 각지에서의 거센 저항 탓에 영국 혼자서 전 세계를 지배할 여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국제유태자본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는 국제유태자본이 유럽 제국을 부추겨서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 경쟁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를 통해 눈치를 보던 유럽 각국이 19세기 중후반부터 맹렬하게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나아갔다. 해서, 벨기에와 같은 유럽 소국도 레오폴드 2세 시절에 벨기에 땅에 비해 유럽 땅과 비교할만한 콩고를 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 주요 지역에서 파트너를 물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이었다. 국제유태자본이 일본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지정학적인 지위 탓이지, 일본인의 자질이나 일본 내부 사정과는 무관하다. 일본이 근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국제유태자본의 덕분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통해 국제유태자본이 얻고자 했던 것은 청에 대한 압박이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앞잡이 명치 정권을 내세워서 친 중국적인 조선왕조의 멸망을 강제했던 것이다. 아울러 19세기말에 이미 영국 외상이 한반도 분단을 제안할 만큼 한반도를 발칸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친 바 있다. 조선 근대화가 늦은 것 등 모든 사안은 조선왕조와 조선인의 책임이 아니다. 국제유태자본의 세계전략 때문이다.

   

둘째, 국제유태자본은 2차 대전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전후 세계 체제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주도가 되어 정치적으로는 냉전체제가 구성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성립이 되었다. 또한 UN이 등장했다. 해서, 이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의물이 필요했으며, 그 제의물이 사실상의 3차 대전인 한반도 전쟁이었다. 소련은 한국전쟁의 대가로 국제유태자본에게서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고, 마셜플랜 없이도 일본을 태평양 전쟁 이전의 경제 규모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UN은 국제연맹과 달리 능력이 있는 국제기구로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후에 발생하기 마련인 지독한 불황 사태를 해소시킬 수 있었던 게다. 다만 한국인을 제외한 모택동 정권과 중국만이 한국전쟁을 진지하게 여겼다. 국제유태자본의 은밀한 지원이 없었다면 중국 혁명이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자신이 잘 해서 중국에서 혁명을 거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소련 외상 그로미코가 모택동을 만난 뒤 미국 제국주의자보다 위험하다고 여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아무튼 모택동 정권은 아들을 잃을 정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태평양 전쟁 때의 장개석 꼴이 난 셈이다. 국제유태자본은 세계전략상 중국이 가난한 빈국으로 70년대까지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여, 한국전쟁은 불필요하게 3년간 질질 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루한 공방 기간 동안 한반도에 온갖 폭탄이 터져야 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하게 만들어야 헀다. 또한 내전이어야 했다. 세계대전이 아니어야 했다. 그래야 전쟁배상금 문제가 나오지 않아 뒤탈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한국인들만 부모형제들을 적으로 돌리면서 바보처럼 신음하며 죽어갔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인은 한국인들에게 죄의식을 지니고서 한반도 통일과 번영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전쟁 이후 세계인이 호의호식한 것은 한국인이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린 대가이기 때문이다.

   

셋째, 국제유태자본론은 종전의 냉전체제를 그 내용적인 면에서 소련마저도 영향권 하에 둔 체제로 간주한다. 가령 군비경쟁은 국제유태자본이 배후에서 벌인 냉전 고착화 전략 게임이었을 뿐이다. 또한 소련 외무부장관이 소련 최고 권력자보다 수명이 길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만든다. 소련이란 일국적 사회주의 국가는 오직 외교력으로만 먹고 산 국가였을 뿐이다. 국제유태자본의 전후 한반도 고민은 두 가지 딜레마의 해소이다. 하나는 한반도를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는 국제유태자본이 지금까지도 원칙으로 삼는 한반도 정책에서의 우선순위이다. 국제유태자본이 보기에, 한반도는 최소한 500년 이상 중국 식민지하에 있었다. 그와 같은 이유에서 한반도와 중국은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를 종전대로 일본의 영토로 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 장개석 국민당 세력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 중국은 장개석뿐만 아니라 모택동마저도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우선순위는 한반도에서의 중국 역할을 최소화시키는 것이었으므로 명분뿐이지만 연합국 세력인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최우선 원칙을 적용한 결과가 중국의 요구인 한반도에서 일본을 배제하되, 소련군과 미군을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럽의 발칸처럼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 전쟁은 UN이 이전 국제연맹과 다른 역할을 보여주어야 하며, 소련의 불안정한 동유럽 지배를 확고히 해주면서, 일본의 경제력을 종전 수준으로 회복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게 하면서 3년간이나 질질 끌어야 했던 것이다. 하여, 한반도 문제는 구체적으로 1944년 그리스 사태에서 비롯되었다고 인드라는 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한국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장개석을 침묵시켜야 했다. 즉, 중국에서 장개석 대신 모택동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중국 내전을 살펴보면 모택동은 절멸 위기로까지 치닫는데 이때 국제유태자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장개석의 승리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국제유태자본은 모택동을 사실상 도와주었고, 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중국은 한반도 문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되었던 게다.

   

넷째, 국제유태자본이 영일동맹에서 보듯 친일파를 원한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명분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이승만이라는 반일 인사를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국제유태자본이 보다 더 신용한 이들은 친일파였다. 이승만의 정치 소신 등을 볼 때, 반민특위 해체 지시는 이승만이 아니라 국제유태자본의 지시인 게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친일파 정당, 오늘날 친일민주당과 같은 야당을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의 반일 성향이 국제유태자본에게 찍혔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의 방위비 분담 차원에서의 한일 수교를 위해서는 이승만 하야 공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섯째, 한국에서 친일좌파란 중도파를 의미한다. 현재 한국에서 정치세력으로 우파가 존재하지 않는다.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국제유태자본의 지시를 받는 친일파, 혹은 중도파밖에 없다. 좌파가 1980년대에 국제유태자본이 조성한 정세에 따라 자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국제유태자본이 쓰다가 버린 탓에 지금은 정치세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파 역시도 이승만 이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한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우파 정치인이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소련스파이 혐의를 받을 만큼 좌파를 선호했다. 해서, 등장한 것이 친일좌파 인사다. 박정희, 김대중이 대표적이다. 노무현도 친일좌파다. 아울러 이명박은 반일이었으나 친일좌파로 전향했다. 그것이 친일본가인 친일민주당에서 분가한 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운형이 탈락하였는가. 이는 여운형과는 관계가 없다. 국제유태자본은 기본적으로는 친일좌파를 선호했지만, 그리스 문제의 발발로 프린스 이승만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친일민주당 1970년 대통령 후보 선거에서 국제유태자본이 박정희에게 지시하여 김영삼을 탈락시키고 김대중을 돕게 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계속 권력을 잡았었다면, 박정희의 후계자는 김대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빅터 로스차일드는 1970년대에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권력을 내주는 바람에 한반도에서도 큰 정치 변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친일파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친일파 청산 운운했던 것은 사실은 신자유주의를 위해 박정희 체제 때에 만든 빅터 로스차일드적인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친일파가 친일파를 운운하니 지나가던 개도 웃는 세상이 된 셈이다. 아울러 지난 십년간 좌파 지도부들은 대부분 어용인사가 되어 친일파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한국에서 정치세력으로서 좌파나 우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친일파밖에 없다. 해서, 친일파가 친일파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제유태자본론에 따르면, 해방정국하의 김구는 어떠한 존재였던가. 일각에서는 김구가 권력을 잡지 못한 이유를 김구에게서 찾기도 한다. 정치력 부재 등등. 또한 해방정국 하에서 이승만이나 김일성이 정권을 잡은 것은 열강이 한반도 사정에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국제유태자본은 섬뜩할 만큼 한반도 사정에 정통했다. 몰라서 김구를 개인 자격으로 입국시킨 것이 아니라 잘 알아서 개인 자격으로 입국시켰던 것이다. 김구가 권력을 잡지 못한 것은 김구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국제유태자본의 한반도 전략 때문이다.

   

"미국정부는 '임정'의 주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2월 12일 영국주재 미국대사에게 보낸 전문 속에서, 미국무성은 조선의 독립과 전쟁에의 참가에 관심을 갖는 여러 재미 조선인 그룹이 존재하고 있는데, 현시점에서는 어떠한 조선인 조직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중요한 운동으로 인정한다든가, 또는 장래 조선승인에 관해 언급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의 지배를 종결시키기 위한 조선인의 노력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일반적인 성명을 발표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영국정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2월 28일 영국정부의 견해로서 미국정부에 보고된 내용은, 전쟁 발발 후 조소앙과 중경에 있는 다른 조선인 조직의 대표들이 영국대사관에도 접촉을 시도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러나 조선인 세력은 분열되어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 견해도 상당히 다르다고 전했다. 또한 만주지역이나 일본에 의해 점령된 중국에서는 효과적인 항일운동의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이나 일본 국내에서는 그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상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때 적절한 시기의 선언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현재와 같이 일본의 승리가 계속되는 한, 미영 측의 어떠한 종류의 공식적인 선언이나 승인행동도 일본의 지배지역에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효과적인 규모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조선인의 노력에 동정의 뜻을 표하는 정도에서 머물러야 하며, 미국무성이 행하는 조선문제에 관한 어떠한 결정에 대해서도 지지한다는 영국 외무성의 의견이 보고되었다. 즉 통일된 강력한 조선인 항일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전황이 일본 측에 유리한 현시점에서는 조선인 세력에 대한 연합국의 승인이나 지지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미국과 영국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정' 승인이나 전투참가 요청은 연합국에 의해 사실상 부정되었는데, '임정'이 승인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식민지 문제가 연관되어 있었다.1942년 3월 28일 고스는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인도를 포함한 다른 아시아 식민지 민중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른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채, 미국이 조선에 관한 성명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2차대전 중 연합군의 전후 조선 구상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bBx/fBropU8VoGFDSqZ0AW12DaDjL0nM&qb=x9G53bW1IMD8yMSxuLvz&pid=fhYyosoi5TlsscwFUmGsss--423608&sid=SYvK@lqpi0kAAEDbeZU

   

국제유태자본은 임정과 김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어떤 관계였는가. 당시 미국 CIA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당시였다. 그럼에도 유사한 기구가 있었는데, 이는 영국 정보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CIA가 창설된 후 1970년대까지 세계 권력은 현상적으로는 미국이 패권을 쥔 듯했지만, 실제로 세계 권력은 런던에 있었다. 영국 정보부, 즉 빅터 로스차일드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록펠러의 공세에 따라 미국 CIA의 빅터 로스차일드 인맥이 모두 난도질을 당한다. 빅터 로스차일드도 소련 스파이라는 개망신을 당하는 게다. 이후 미국 CIA는 록펠러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상기한 문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영미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게다. 하급자 미국정부가 상급자인 영국정부에게 보고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유태자본의 사령부는 영국 런던에 있었고, 국제유태자본의 주 관심사는 전후 자신들에게 협력한 민족에 대한 독립국가 문제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그리스 문제도 복잡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김구는 남과 북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정치적으로 불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해서, 김구 신화가 발생하였던 게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인드라가 대학생 때 총학생회장 선거를 지원한 일이 있다. 당시 문학회 회장이다 보니 인드라에게 주어진 역할이 후보의 연설문이나 성명서 따위를 작성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는데, 인드라가 속했던 총학 후보가 민족해방파 후보였었다. 상대 후보는 인드라와 함께 지하 서클에서 공부한 후보였지만, 동료를 도와주지 않고 일면식도 없는 후보를 도와주게 된 것은 문학회 선배의 권유 때문이다. 해서, 연설문을 작성해봤는데, 선본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좌파적 색채라는 것이 이유였다. 해서, 인드라 글쓰기는 아군인 선본에서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반면, 상대 진영에서는 오히려 높이 평가받는 기현상이 벌어졌던 게다. 아무튼 선본이 채택한 연설문 내용은 백범 김구 선생에 관한 것이었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라, 라는 것이다. 

   

문제는 선본에서 실은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털끝조차 없었다는 데에 있다. 선본이 진심으로 존경한 이는 김구가 아니라 김일성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김일성 입장에서 김구는 오히려 망상을 지닌 채 조국 통일을 방해한 적대적인 인물에 불과하지만, 통일전선전술로 활용할 재료일 뿐이다. 이는 북한 당국에서 나온 관계 서적 아무 것이나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천 년대 들어서서 주사파라 불렸던 세력은 대부분 친일파로 전향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김일성 대신 김대중, 혹은 노무현, 혹은 히로히토 천황만이 있을 뿐인 게다. 친일파가 된 이들 앞에 놓인 과제는 신자유주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이 신자유주의를 잘 하라고 권력을 준 것이니까. 해서, 예전에 써먹었던 대로 김구를 활용해서 썰을 푸는 것 같다. 하지만 진심이 아닌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세상이 되었던 게다.

   

근래 친일민주당 일부 아해들이 김구 선생을 재료로 뉴라이트를 공격했다는 것을 만년학생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뉴라이트가 백범 김구 선생을 공격하였다는데 사태가 어디서 발단이 된 것일까. 아마도 이 문제는 교과서일 게다, 하고 찾아보니 역시였다. 인드라는 이 사태가 친일파의 전술이라고 본다. 즉, 팔십 년대 일부 주사파처럼 실제로는 백범 김구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는 친일 본색이지만, 겉으로 백범을 지지하는 척하는 작태라고 본다. 왜냐하면 친일파가 존경하는 것은 히로히토 천황이지, 백범 김구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서, 인드라가 볼 때 이것 역시도 친일민주당 아해들의 자뻑으로 보인다.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CMPT_CD=P0000

   

왜 자뻑인가.

   

첫째, 김구 선생 활동을 테러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백범일지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김구 선생 자신도 인정하는 바이다. 게다가 조국을 잃은 상황에서 테러 활동을 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이나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근래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하마스, 그리고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북아일랜드 공화군 등은 모두 테러활동을 벌인 이들이다. 19세기~20세기에 걸쳐 좌우파 아나키스트들은 강력한 적에 맞서서 테러를 주요한 정치 행위로 삼았던 것이다.

   

둘째, 친일민주당 아해들이 내세우는 금성 교과서에서도 이미 먼저 '테러투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임시 정부는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점차 침체되어 갔다. 이에 임시 정부의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인 테러 투쟁을 벌임으로써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무정부주의자들은 민중들의 직접 행동(테러, 폭동, 봉기 등)으로 사회 혁명을 이루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 비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중략-... 일제하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주로 제국주의자 암살과 기관 파괴와 같은 테러행동으로 투쟁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금성 교과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찾아보면 근래 뉴라이트에 비판적인 한홍구도 자신의 주장 어딘가에 테러 운운했을 것으로 본다.

   

http://usinsideworld.com/article/view.php?&ss%5Bfc%5D=1&bbs_id=community&page=&doc_num=20076

   

셋째, 북한 당국의 김구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구로 말하면 지난날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고 테로행위를 서슴지 않고 해온 사람으로서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인 《상해림시정부》를 미래의 《조선정부》로, 자기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 내세우면서 해방이 되자 서울에 돌아와 리승만과 《정권》쟁탈전을 벌려온 완고한 민족주의자였다."

   

넷째, 안병직, 이영훈 등 뉴라이트로 지목되는 학자들을 비판할수록 친일파 본색이 드러난다.

   

http://orumi.egloos.com/3355991

   

상기한 초록불 같은 경우는 이영훈을 변호한다. 그러나 인드라 생각은 초록불과 다르다. 근래 이영훈을 비판하는 이들이란 과거 안병직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의존하여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차이란 먼저 갔느냐, 나중에 갔느냐의 차이 외에는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친일민주당 측 아해들로 보이는 이들이 이를 쟁점화한 것은 학술적 논쟁을 하고자 함이 아닐 게다. 그보다는 그간 보여준 대로 선동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무차별 살상하는 911테러분자와 김구선생이 같다는 말이냐? 뭐 이런 식으로 여론작업을 하고, 잘 모르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유포시키면, 제대로 공부하는 극소수 학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노리기 위함일 것이다. 선동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동이란 거짓일지라도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해서, 일단 선동적인 면에서는 효과적으로 본다. 문제는 선동이란 선전과 달리 인생 행로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만 주게 된다. 역설적으로 선동이 먹힐수록 참여자들은 내면에서 커다란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란 개별 실존에게 일일이 신경을 쓰는 법이 없다. 이용하느냐, 이용당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해서, 비록 개별자에게 혼란을 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친일민주당 측 아해들에 대한 선동을 비판해서는 공허할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전적으로 국제유태자본의 덕분이다. 국제유태자본의 세계 지배 분할과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가 맞아떨어진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은 국제유태자본에게 일시적으로 왕따를 당해 발생한 1920년대 일본 군국주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근대화식민지론은 국제유태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굴복한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위기의 산물에 불과하다."

국제유태자본이란 무엇인가

http://blog.naver.com/miavenus/70041153601

   

"한국에서도 국제주의와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뉴라이트가 출범했다. 이유는 같다. 워낙 김대중, 노무현이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해서, 중도를 표방하는 뉴라이트가 등장했다. 뉴라이트를 알려면 안병직을 보면 된다. 안병직은 과거 자본주의 맹아론자로서 친일민주당 성향이었다. 그런 안병직이 왜 오늘날 뉴라이트가 되었는가. 변절이 아니다. 친일본사인 친일민주당에서 친일계열사인 한나라당으로 주소지를 옮겼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왜 옮겼나? 일본 정부가 시켜서? 아니다. 국제유태자본이다. 국제유태자본이 한나라당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안병직이라는 뉴라이트를 파견한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은 왜 한나라당에 뉴라이트를 파견했는가. 첫째, 한나라당의 올드라이트를 죽이기 위해서다. 온전히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국제유태자본도 예상한다. 하지만, 향후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올드라이트를 잠재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의 이권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이다. 둘, 박정희 파라다임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다. 신자유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박정희 신화를 붕괴시켜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 뉴라이트를 부각시킨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7920964

   

친일민주당 아해들의 뉴라이트 공격은 의도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왜 김구는 권력을 잡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를 국제유태자본론에 입각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선동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 선동이 성공적일지라도 그 이득은 모두 친일파가 가져가는 구도이다. 해서, 친일파끼리의 공방에서 머물면 기존의 구도에 함몰한다. 많은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이 벽을 넘지 못해서 친일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포섭되어 친일파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제유태자본론은 이 좁은 문을 넘어서려 하는 것이다.

   

제주에 관해서는 koemon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인드라 생각을 피력한 바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40009335

   

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준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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