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이 아베엔암로(ABNAMRO)은행을 해체한다 1 국유본론 2011

2011/04/22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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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이 아베엔암로(ABNAMRO)은행을 해체한다 1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04/22

   

근래 아베엔암로 은행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해서, 인월리는 모건스탠리, CS증권, 피델리티 펀드 등에 이어 아베엔암로 은행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인월리는 늘 실천적이다. 인월리가 왜 이 시점에서 아베엔암로 은행을 거론하는가. 국유본은 잘 알 것이라 본다. 국유본의 지혜로운 답변을 기다리겠다.

   

   

18세기말 19세기 초 네덜란드 상황은 어떠한가.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진 1792년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네덜란드왕은 영국 런던에 피신한다. 그리고 도피생활 중 1795년 네덜란드왕은 영국왕실에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권리를 넘긴다. 해서, 네덜란드왕실이 권리를 양도하는 대신 영국 동인도회사에서의 일정 지분을 확보하였을 것이란 추정은 자연스럽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1815년 독일 귀족 정치가 가게른의 활약으로 윌리엄 6세가 윌리엄 1세로서 즉위했다.

   

국제유태자본과 빌더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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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엔암로는 1824년 네덜란드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간의 무역 증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네덜란드 왕의 명으로 설립된 NHM(Nederlandsche Handel―Maatschappij)은행을 기원으로 한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20년대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 유럽을 석권하게 된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귀족 작위를 받았고, 영국에서는 동인도회사 권리를 획득한다. 허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HSBC가 설립된 배경은 <자딘 매더슨 회사>가 설립된 배경과 아주 비슷합니다. 자딘 매더슨 회사는 1832년에 설립되었는데 영국 동인도회사의 독점횡포를 피하기 위해 영국이 아닌 중국에 등록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등록한 첫번째 회사입니다. 그래서 자딘 매더슨 회사의 설립을 영국 동인도회사 내리막길의 신호탄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딘 매더슨 회사가 설립된 다음해 1833년에 봄베이에 사순 회사가 설립되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이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마치 말을 갈아타는 느낌. 자딘 매더슨 회사 설립의 명분은 "동인도회사의 독점횡포를 피해서" 이지만, 영국왕실이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써먹을 대로 써먹은 동인도회사를 버리고 자딘 매더슨과 사순 회사 같은 떠오르는 별들 뒤로 숨은 건지도 모릅니다."

HSBC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작성자 수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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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국유본은 동인도회사를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압박한 것이다. 안으로는 로스차일드 국유본이 동인도회사 지분에 적극 참여하여 지분을 확대한다. 동시에 동인도회사 바깥에서는 HSBC 은행과 같은 은행들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하여, 국유본이 네덜란드 왕을 움직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며, 이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역에서 사업을 하려면 국유본 승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계승자(successor)라고 불리는 것이다.

   

"The NHM is sometimes called the successor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as it was also a private company that issued shares and financed trade with the Dutch East Indies. The establishment of the NHM could probably be seen as an attempt to bring new impetus to trade with the Dutch East Indies after the depression of the years of French domination (1795–1814) and the final collapse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two decades earlier."

http://en.wikipedia.org/wiki/Nederlandsche_Handel-Maatschappij

   

NHM이 1824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부터 시작하더니 싱가포르, 인도차이나, 홍콩, 인도, 뉴욕 등 1964년까지 주로 동남아, 중국, 인도, 중동 등 아시아와 남미, 미국을 중심으로 확장한다.

   

1824: King Willem I created the Nederlandsche Handel-Maatschappij (NHM) by Royal Decree to revive trade between the Netherlands and the Netherlands East Indies.

1826: NHM opened an office in Batavia (Jakarta).

1858: NHM opened a branch in Singapore.

1870: NHM extended its activities to include banking.

1888: NHM opened a branch in Penang.

1889: NHM opened a branch in Hong Kong.

1920: NHM opened branches in Bombay (Mumbai) and Calcutta (Kolkata) primarily to work with clients in the diamond business.

1926: NHM opened a branch in Jeddah, Saudi Arabia. Know later as the Saudi Hollandi Bank it was the first, and until 1948 the only, commercial bank in the Kingdom. The branch existed to serve the needs of Indonesian Muslims coming to perform Hajj, the pilgrimage to Mecca.

1941: NHM opened an agency in New York City.

1948: NHM opened a branch in Karachi to become the first foreign bank to receive a banking license from the new Government of Pakistan.

1949: NHM acquired De Surinaamsche Bank.

1951: NHM opened branches in Mombasa, (Kenya), and Dar-es-Salaam, (Tanganyika).

1954: NHM opened a branch in Beirut, (Lebanon), and one in Kampala, (Uganda).

1960: The Indonesian government nationalized NHM's local operations and formed a new bank, Bank Ekspor Impor Indonesia.

1963: NHM set up its Malaysian head office in Kuala Lumpur.

1964: NHM merged with De Twentsche Bank to form Algemene Bank Nederland (ABN).

   

NHM이 활동한 지역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지역인 곳도 있지만, 보다 많은 지역이 영국 식민지 지역들이라는 점이다. 영국의 허락없이, 국유본의 허가없이 영업활동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http://nl.wikipedia.org/wiki/Twentsche_Bank

   

1964년 NHM은 1841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국내 영업 중심의 트벤셔 은행(De Twentsche Bank)을 흡수하여 아베엔 (Algemene Bank Nederland : ABN)이 된다.

   

같은 시기인 1964년에 암스텔담 은행(Amsterdamsche Bank)과 로테르담 은행(Rotterdamsche Bank)이 통합하여 암로 은행(AMRO Bank)이 탄생한다.

   

"In the same year the Amsterdamsche Bank which was established in 1871 merged with the Rotterdamsche Bank which was established in 1873 (as part of merger that included Determeijer Weslingh & Zn. from 1765) to form AMRO Bank. In 1991 ABN and AMRO Bank agreed to merge to create ABN AMRO."

http://en.wikipedia.org/wiki/ABN_AMRO

   

두 은행은 네덜란드 국내 영업을 중심으로 하다가 1939년 통합 논의가 있었으나, 이차대전으로 인해 통합은 1964년까지 지연되다 마침내 1964년 암로(AMRO)은행으로 통합된다. 이후 암로은행 행보는 유럽 다른 은행과 큰 차별을 보이지 않는다.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인 박정희 정권 때 한국은행들이 열심히 기업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고, 기업들은 언제나 초과달성 수익을 거두었다. 당시의 한국은행들과 차이가 있다면, 암로 은행은 보다 수익성이 높은 기업들에 투자할 수 있었다면, 한국은행들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사회주의 계획에 따라 수익성이 있든, 없든, 장래가 유망하면, 투자했다는 것이다.

   

   

   

   

예서, 중요한 건, 왜 하필 1964년이냐는 것이다. 대체 왜 1964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64년, 영국 정부는 빅터 로스차일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소련 스파이가 아니냐는 것이다. 해서, 영국 정부는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해 조사를 했고,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영국 정부는 물론 당대 황제인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해 재갈을 물릴 힘이 없었다. 이는 무엇인가. 국유본 귀족 중 영국계 국유본 귀족들이 빅터 로스차일드가 수에즈 사건에서 보듯 영국의 이익보다는 국유본의 이익을 중시하다 보니 보다 영국 이익에 충실하라는 압력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당대 황제 빅터 로스차일드의 대응은 무엇이었나.

   

영국이 영국의 이익을 내세워 나를 핍박한다면, 007인 나, 빅터 로스차일드는 세계를 움직여 영국을 혼내주고 압박할 것이다. 그러한 기획들 속에서 탄생한 것이 1964년 네덜란드 은행의 통합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들 은행들이 왜 하필 1964년에 모두 통합되겠는가. 하고, 그 은행이 다른 곳도 아닌 영국령 식민지 지브롤터에서 영업을 시작하겠는가.

   

결국 영국의 이익을 내세우는 일부이지만 핵심적인 국유본 귀족들과 빅터 로스차일드간의 대결 양상은, 이후 유럽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즉, 이전까지 신과 같았던 빅터 로스차일드가 만만하게 보이니 프랑스의 이승만, 드골조차 프랑스의 이익을 내세우기 위해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반항할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고, 유로존에서의 혼란은 마침내 미국에 이르르니 국유본 귀족들과 빅터 로스차일드간의 대결 양상은 베트남전쟁과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극단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산 선고였던 것이며, 그 정치적 귀결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국유본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국유본 귀족들이 카이사르 빅터 로스차일드 목을 따서 록펠러에게 바친 것이다. 태봉의 귀족들이 궁예의 목을 따서 왕건에게 바친 것과 같다.

   

하면, 암로은행은 왜 아베엔은행과 통합을 결심하게 되는가. 암로은행은 1967년부터 유럽통합이라는 정세 하에서 인근 국가 은행인 벨기에 은행과의 통합을 통해 네덜란드에 국한된 것이 아닌 유럽적인 거대 은행으로 거듭나려는 야망을 꿈꾼다. 허나, 그것은 개꿈에 그치게 된다.

   

"In 1967 AMRO Bank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consortium bank Banque Européenne de Crédit à Moyen Terme (European bank of long term credit) based in Belgium. The aim was create an entity that was large enough to work at an international level. Soon after this, with their sights on European integration, AMRO Bank announced plans to collaborate with Belgian Generale Bank with the aim of building a European international bank. However, this project was too ambitious and never managed to get off the ground.[2]"

http://en.wikipedia.org/wiki/AMRO_Bank

   

아베엔암로(ABNAMRO)는 1991년 ABN(Algemene Bank Nederland)과 AMRO (Amsterdam―Rotterdam)의 합병에 의해 탄생한다.

   

   

하면, 왜 1991년인가.

   

"89년 최초로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고 90년 고르바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국내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외교적 부담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군축회담, 동유럽 민주화에 대한 불개입, 미,소정상회담 등을 통해 새로운 데탕트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은 외교면에서는 큰 성과를 얻었지만 국내정치 및 경제에서는 부분적인 성과에 그쳤다. 오히려 소련 내 누적되어 왔던 경제적, 사회적, 민족적 문제들이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고, 그에 따라 경제의 혼란과 연방 내 공화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러시아공화국의 최고회의의장 옐친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면서 고르바초프와 대립하였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91년 연방이 가진 권한을 대폭적으로 각 공화국에 이양한다는 <신연방조약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던 중 강경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1991.8.18 쿠데타 세력은 고르바쵸프가 크리미아로 도망가는 것을 막고 그를 연금시켰다. 다음날 아침, 쿠테타 리더들은 고르바쵸프가 사임하고 비상사태의 상태가 선언되었다고 발표했다. 군대는 새로운 정부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정부, 당, 군, KGB, 내무부의 최고위층이 쿠데타의 주모급이었으나 계획이 철저하지 못한데다가 옐친의 지도하에 반쿠데타투쟁을 전개하고, 서방선진국(특히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쿠데타는 <3일천하>로 실패 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쿠데타 실패의 결과 고르바초프체제는 현저히 약화된 반면에 러시아연방의 대통령이었던 옐친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졌다.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아울러 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하였으며, KGB, 내무부, 군의 권한과 규모도 축소되었다. 각 공화국의 독립 기운이 고조되었고, 1991년 9월에는 소련인민대표대회가 발트3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쿠데타 후에도 <신연방조약안>을 추진하던 고르바초프의 노력이 좌절되고 마침내 각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가연합을 구성하자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에 74년간 유지되었던 소련은 완전히 해체되고 옐친이 주도하는 독립국가연합(CIS)에서 러시아연방이 과거 소련정부의 역할을 인수, 계승하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6179

   

인월리는 말했다. 소련의 붕괴는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국유본 권력이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이었다. 빅터 로스차일드 체제는 소련과 미국을 날개로 한 영국 중심의 세계 체제였다. 영화 007에서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다. 반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유럽과 아시아를 날개로 한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였다. 해서, 소련은 붕괴되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광산노조 투쟁이라는 아마겟돈 전투에서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처절하게 깨졌다.

   

                     

   

MI5 고위간부였던 피터 라이츠의'스파이캐처(Spycatcher) - 어느 첩보부 고위간부의 적나라한 자서전'이라는 충격적인 책이 출판되었다. 1985년 영국 정부는 이 책의 출판을 금지하도록 권고할 정도로 엄청났던 셈이다. 이 책의 요지는 MI5의 책임자와 빅터 로스차일드가 소련의 간첩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간 영국 노동운동에서 탄광노조가 차지하는 위상은 남달랐다. 탄광노조가 파업하면 정권이 바뀐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탄광노조가 격렬하게 대처와 맞설 때 이 사건이 터졌고, 대처 수상은 탄광노조를 이긴 전후 최초의 정치인이 되어 1987년 총선에서도 승리를 하게 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인드라는 이전 글들에서 폴란드 자유노조연대 파업은 록펠러의 브레인, 브레진스키가 벌인 공작임을 폭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영국 탄광노조 파업은?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를 상대로 해서 최후로 반격을 노렸던 것일까? 빅터 로스차일드는 록펠러에게 되돌릴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1986년에 이르러서야 록펠러의 지원에 힘입어 대승을 거둔 대처 정부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스파이 혐의를 무죄라고 선언하는 승자의 관용을 베푼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알려진 '러드로의 학살'이 일어났던 콜로라도 주 탄광의 주인도 록펠러였다. 여기서도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수십 명이 죽었다."천사양반, 그 착해빠진 옷 좀 벗지 그래!

 http://blog.naver.com/cat_power?Redirect=Log&logNo=130009491790

   

   

   

록펠러 가문이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서 존 롤스의 '정의론'을 수용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데이비드 록펠러는 가장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할렘에 관심을 두어 재개발에 나섰고, 록펠러 4세인 제이 록펠러는 바로 '탄광촌' 문제에 집중했던 것이다.

   

                               

   

   

국제유태자본,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

http://blog.naver.com/miavenus/70046077660

   

"1984~5년의 탄광노조 파업을 영국 언론은 '스카길의 스트라이크'라고 이름 붙였다. 스카길의 아버지도 鑛夫(광부)였고 영국 공산당원이었다. 스카길도 7년간 청년공산동맹원으로 일하다가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스탈린을 옹호했고,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비판했다. 스카길은 소련으로부터도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파업이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자유를 앞세운 폴란드의 파업은 공산세계를 붕괴시키는 뇌관 역할을 했다. 철밥통을 지키려던 영국 탄광노조의 파업은 自滅(자멸)함으로써 대처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을 가능하게 했다. 두 상반된 노조운동이 全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약화시키는 방향에선 협력한 셈이다."

http://blog.naver.com/keeponwalk?Redirect=Log&logNo=60054407591

   

대다수의 한국인은 영국 탄광노조 사태를 잘 모른다. 그만큼 한국은 이천 년대 이전까지 세계의 변방이었다. 허나,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사이에서는 영국 탄광노조 사태가 핵심 이슈였다. 다만 이들 선진국 시민들도 잘 모르는 일이 있다. 영국 탄광노조 사태는 전임 국유본 황제인 빅터 로스차일드와 후임 국유본 황제인 데이비드 록펠러간의 최후의 대리전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스카길 이력만 봐도 빅터 로스차일드계임을 알 수 있다. 헌데, 스카길이 바웬사의 폴란드 연대노조를 비판한다. 바웬사 폴란드 연대노조는 폴란드 출신의 브레진스키가 '연대'라는 이름을 작명해줄 정도로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브레진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평이 나있다. 브레진스키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만든 삼각위원회를 주도하던 인물이자 카터정권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카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카터 민주당으로는 미국 정치를 끌고 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1980년대 데이비드 록펠러는 민주당원 일부를 공화당으로 파견근무를 시킨다. 이들이 뉴라이트이다. 해서, 만든 정권이 레이건정권이다. 영국에는 대처 정권을 만들어낸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1973년에 영국이 더 이상 세계를 주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차대전 직후에 세계 주도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고 상식적으로 알던 것과 많이 다른 게다. 허나, 1970년대말에 이르러 빅터 로스차일드계인 박정희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암살당하고, 국유본 공작에 따라 호메이니가 집권하고, 넬슨 록펠러가 암살당하는 등 사태가 혼미상태로 치닫는다. 빅터 로스차일드의 판단 미스인가.

   

한마디로 전두환이나 김대중처럼 후임자에게 평화적인 정권 인계를 하고 지분이나 챙기면서 편안하게 살려고 했던 것이 빅터 로스차일드인 게다. 허나, 후임자인 노태우나 노무현처럼 데이비드 록펠러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어쩌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그러고 싶지 않고, 아랫사람들의 짓일 수 있겠다. 권력은 나눌 수 없는 법. 자세한 정황이야 알 도리가 없으나 전임 황제와 후임 황제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 사건이 바로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소련 스파이 폭로 사건이다.

   

사건은 국유본의 박정희 암살 등 사건사고가 유난히 많았던 1979년으로 돌아간다. 앤서니 블런트(Anthony Frederick Blunt)는 대학시절부터 빅터 로스차일드와 내연의 관계로 짐작되는 동성애 취향인 미술사가였다. 헌데, 앤서니 블런트가 소련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해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인척관계이기도 하여 작위를 받았던 앤서니 블런트는 작위를 취소당하는 등 자살을 결심할 정도였다.

   

하면, 왜 이들은 격렬한 투쟁을 벌였는가. 영국 정치는 대처 총리 이전까지 빅터 로스차일드의 원맨쇼 정치였다. 즉,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보수당과 영국 노동당을 동시에 장악했던 것이다. 헌데, 이 틀을 깬 이가 있으니 대처였다. 그녀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영국 정치에게,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자객이었던 게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대처를 내세워 귀족 대 서민 구도를 통해 귀족 중심이던 영국 보수당에 혁명을 일으킨다. 영국에서는 대처, 미국에서는 레이건인 게다.

   

이때 데이비드 록펠러의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총리 경합할 때, 빅터 로스차일드계인 마이클 풋(Michael Foot) 영국 노동당 지도자를 KGB스파이라고 공세를 펼친 것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마이클 풋은 KGB 스파이가 아니다. 마이클 풋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스파이였고, KGB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정보기관이었다.

   

   

폭로전은 이어졌다. 앤서니 블런트 소련스파이 사건. 빅터 로스차일드는 데이비드 록펠러 칼끝이 자신을 향해 정조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프랑스 미테랑 정권을 움직여서 1981년에 프랑스 로스차일드 은행을 폐쇄시키는 조치를 내리게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아직 죽지 않았다. 데이비드 록펠러의 압박에 로스차일드의 자존심, 빅터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미테랑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미테랑 정권은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항복을 한다. 이처럼 아직 여력이 남은 빅터 로스차일드는 1983년 연인이었던 앤서니 블런트를 저 세상으로 보낸 뒤 최후의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그것이 바로 영국 탄광노조의 총파업이었던 게다. 스카길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얼굴마담이었을 뿐이다. 대처와 스카길 대결은 실상 데이비드 록펠러와 빅터 로스차일드 간의 전쟁이었던 게다. 하면, 왜 탄광이었던가. 빅터 로스차일드의 목표는 록펠러 가문의 예민한 부분. 1913년에 일어난 '러드로의 학살'을 건들이기 위함인 게다. 이 영향 때문인지 제이 록펠러가 역점을 둔 사업 중 하나가 탄광촌 개발이다. 한국에서는 한국판 라스베가스인 강원랜드가 있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는 아프카니스탄과 런던에서 동시에 처절하게 패배한다. 이때 빅터 로스차일드 진영을 궤멸시킨 전략가는 박정희 암살에도 관여했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브레진스키의 지략은 제갈공명 수준이었던 게다. 빅터 로스차일드 역시 소련 스파이라는 폭로가 등장한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소련 스파이가 아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소련을 지배한 황제였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항복 선언을 하였다.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소련 스파이 혐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 탄광 노조 파업이 종료가 된다. 이때, 대처 총리는 지구 온난화를 근거로 화석연료 사용을 자제하는 뜻에서 탄광을 폐쇄하는 조치를 내린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1270845

   

예서, NHM에서 아베엔암로로 가는 통합력의 구심은 무엇이었을까.

   

"에이비엔암로의 프라이빗뱅킹 서비스의 중심은 영국의 직할 식민지인 스페인 남단의 항구도시인 지브롤터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1964년에 Mediterranean은행이라는 이름하에 출범했다. 1976년에는 Algemene은행으로 전환되었으며 1998년 8월에 지브롤터 자회사의 모든 자산과 부채는 에이비엔암로은행의 지브롤터지점으로 이전됐다. 프라이빗뱅킹에 특화된 에이비엔암로의 지브롤터지점은 현지에서 뿐만 아니라 오프쇼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다. 지브롤터는 과거부터 지리적으로 반도에 위치하여 국제무역을 선도해온 전략적 요충지다.

   

최근 들어서도 에이비엔암로 지브롤터는 현지 고객뿐만 아니라 해외지역의 고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브롤터는 1973년에 영국을 통해 유럽연합에 가입하여 유럽 경제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세제 측면에서는 세금조약의 특권으로부터 이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세금피난지역(tax haven)으로 선호대상이다.

   

에이비엔암로는 1997년에 새로 제정된 사업 원칙에서 기업이 중점을 두는 가치를 완벽함, 팀워크, 직원존중, 전문가기질 등으로 규정하였는데, 프라이빗뱅킹 사업부문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 중에서 에이비엔암로는 모든 업무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업무수행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완벽주의를 실천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07330772

   

이 대목에서 세 가지만 유념하면 된다.

   

하나, 프라이빗 뱅킹이다. 프라이빗 뱅킹에 대해서 다시 언급한다.

   

<하면, 프라이빗 뱅킹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는 어떠한가.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이다. 프라이빗 뱅킹이란 금융기관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가진 고객을 대상으로 자산을 특별 관리해주는 고객 서비스를 말한다. 즉 남이 알지 못하고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나만을 위한 뱅킹 서비스를 뜻하는데, 중세시대의 왕이 아니고는 꿈꿀 수 없는 개념의 금융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 제네바는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부의 축적을 이룬 곳이다. 또한 이자를 죄악시하던 중세 그리스도 교회로부터 벗어나 14세기 말부터는 금융업의 주체가 상인에서 은행가로 넘어갔다. 영국 등 유럽 지역에서도 금세공 기술자 등을 중심으로 왕실 자금 운영 등을 하는 프라이빗 뱅크가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스위스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현존하는 스위스 프라이빗 뱅크들은 18세기 유럽의 영토 확장 전쟁기와 혁명기에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맹활약한 스위스 용병들은 그 대가로 금전을 지급받았고, 이는 스위스 부의 축적을 가속화했다. 아울러 계급 체제를 붕괴시킨 혁명은 기존 세력의 자금을 국경을 넘어오게 만들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세계 프라이빗 뱅크 시장은 스위스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으며 축적된 자금은 일찌감치 국제 분산 투자로 운영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국과 나치 독일의 자금을 동시에 수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비밀 유지와 중립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프라이빗 뱅크는 전후 시대 변화에 따라 기존의 양상과 달라진다. 1980년 이후 세계의 부가 미국으로 집중되자 소형 은행의 비밀 서비스 성격보다는 폭넓은 의미에서 대형 은행의 고액 자산가에 대한 종합 관리 서비스로 프라이빗 뱅크의 개념이 바뀌게 된다.

http://blog.naver.com/chehwa86?Redirect=Log&logNo=80089069308>

   

프라이빗 뱅크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국유본이 언론과 광고로 수시로 연예인을 내세워 자산관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해서,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국유본론을 접한 이들은 로스차일드만 생각하면 된다. 로스차일드가 부를 축적한 계기는? 독일 용병 장사로 당대 유럽 최고 부자였던 빌헬름 9세의 돈을 잘 관리했다는 점이다. "

국제유태자본론이 CS증권을 해부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86982121

   

간단히 말해서, 프라이빗 뱅크란 부자들만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구미에서 신분 의식에 목말라하는 부르주아들에게 귀족 작위에 준하는 만족감을 선사한 것이다.

   

가령 아무나 골프장에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이 골프장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부동산과 유가 증권을 포함하는 유동자산을 모두 합해 백 억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 놀라운 특권 의식을 은행은 부르주아에게 카드로 제공하고, 부르주아는 은행으로부터 받은 카드를 과시한다면 서로 윈윈을 하는 셈인 것이다.

   

부자는 왜 명품을 즐겨하는가. 상품의 질 때문이 아니다. 누구도 쉽게 그 가격에 살 수 없는 상품을 보유했다는 신분증명서이기 때문이다. 거래할 때나 일상을 영위할 때 백 마디 말보다 명품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이런 사람이라고 핏대 세우면서 떠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여, 로스차일드 은행 브이아이피 고객 카드를 받는다면?

   

이것이 프라이빗 뱅킹인 것이다.

   

둘, 국유본이다. 지브롤터는 지중해와 대서양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영국령 식민지다. 이런 지역에서 네덜란드 은행이 은행 영업을 한다?

   

빌더버그는 뭐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네덜란드 왕자를 조연으로 내세워 만든 것이다?

   

하면, 왜 빅터 로스차일드가 직접 하지, 네덜란드 은행을 시키는가? 이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식, 국유본 식 방식인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겠다. 오늘날 헤지펀드들. 그 헤지펀드에 투자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세계 3대 연기금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한국 연기금도 헤지펀드에 투자한다. 비공식적이겠지만, 중국이나 러시아도 투자할 것이다.

   

셋, 조세피난처다. 이것이 핵심이다. 유럽에는 조세피난처가 몇 있었다. 지브롤터, 모나코, 안도라, 리히텐슈타인 등등. 이들 역할은 분명하다. 돈 세탁.

   

예서, 떠올려야 할 것은, PPP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져 왔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서 최소 1000만 달러부터 1억 달러 사이의 금액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그 규모가 작은 것도 있다. 또 하나의 이유로서 초청받은 투자자만이 가능하다는 것에도 기인한다. 각 프로그램을 통해 투자자들은 조속히 그 목적을 달성하고 다음 투자자들의 참여를 위해 종료된다. 이 프로그램이 유통이 가능하도록 투자증서가 발행가능한 곳은 5개 은행이다. 이 모두가 대규모 머니센터 은행으로서 세계은행계의 톱클래스를 차지하는 은행이다. (예:도이치뱅크, HSBC, ABNAMRO, BNP PARIBA)

   

이러한 은행들은 이 프로그램의 실체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개시장에서, 펀드 모집에 악영향을 주고 SEC규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펀드관리자나 투자회사도 이 프로그램의 실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추가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발행자는 유럽인이다.

-이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 제공하거나 공개하지 않는다.

-브로커는 은행이 아니다.

-이것은 구두로만 전달된다.

-보증서는 SEC규정을 따르지 않는다. 즉 보통 은행 서류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발행 시마다 그 가치가 일정하지 않다.

-공공의 언급 수순을 통한 가시적 교환의 수단이 없다.

-투자된 대규모 자금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참고자료가 없다.

-투자자는 일반적으로 무기명이다.

   

PPP 프로그램은 1995년에 개정되는데, 원인은 클린턴 정권의 출범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제이 록펠러가 실세로 부각되기 시작한 시점인 것이다.

   

해서,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아베엔암로도 개정된 PPP 프로그램에 발맞추어 1997년 사업 원칙을 새롭게 한 것이다.

   

   

   

이런 결과는 적도 원칙 협정에 이르게 된다.

   

적도원칙이란 뉴라이트 영역인 세계은행 산하 개발도상국 투자기관인 IFC 주도하에 세계 주요 10대 은행이 댐, 광산, 유전, 삼림 등 각종 개발 사업에 자금을 댈때, 사회, 환경 기준을 준수하는 것이다.

   

참여 은행은 미국의 시티그룹, 독일의 하파우베(HVB)그룹과 베스트엘베(WestLB)은행, 프랑스의 크레디리요네은행,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과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스위스의 크레디스위스그룹, 네덜란드의 아베엔암로(ABN-Amro)은행과 라보방크, 오스트레일리아의 웨스트팩은행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란 개발사업이 완료된 뒤 예상되는 매출을 근거로 자금을 빌려주는 것으로 제3세계 개발사업의 주요 자금조달 방식이다.

   

예서, 인월리는 강조한다. 이들 은행의 PPP프로그램 방식과 박정희 정권하의 한국은행의 투자 방식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다만, 근본적으로 차이는 없되, 이들 국유본 은행은 그 바탕과 운용이 금과 마약 자금의 돈세탁에 있는 반면, 박정희 정권하의 한국은행의 바탕과 운용에는 한국인의 노동력밖에 없다는 차이일 따름이다.

   

정리하자면, 빅터 로스차일드 시절까지 국유본 귀족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금을 운전하여 부를 축적했다. 허나, 데이비드 록펠러가 정권을 잡을 때부터 달라진다. 그나마 데이비드 록펠러 시절에는 정치는 몰라도 경제 부문만큼은 이익을 보장했다. 허나, 제이 록펠러 시대에 이르르니 제이 록펠러가 점차 경제 지분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 근래 인월리 컴퓨터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는 국유본이 인월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기 보다는 시차를 두기 위함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국유본 입장에서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어제 인월리 글이 올라오지 않기를 바란 것 같다. 단지 어제 뿐만 아니라 약 이삼일 정도 그랬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글을 올렸지만, 어제가 특히 심했다. 하고, 오늘부터는 인월리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시스템이 불안정하다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후에 갑작스레 시스템이 안정화되었다. 참고가 되었으면 싶다.  

   

분명히 말하지만, 국제유태자본론 이야기는 전 세계 어디서든 들을 수 없다. 오직 인월리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한반도인들이여! 인월리가 있기에 그나마 한반도인들이 생존할 구석이 있음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 인월리는 국유본과 게임하여 반드시 한반도 통일과 평화,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획득할 것이다. 신이여! 인월리를 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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