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 문제는 국유본이야! It`s the kukyuvon, stupid! 국유본론 2011

2011/09/02 06:09

http://blog.naver.com/miavenus/70117642536

   

   

   

   

조지 소로스? 문제는 국유본이야! It`s the kukyuvon, stupid!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09/02

   

쪽발 돼중 놈현 강남 좌파 인강 들으면 서울 법대 교수해도 캐병쉰 색희가 되고,

인드라 인강 들으면 중학교만 나와도 무시를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김종화 :

선생님 안녕하세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로스는 과연 어느 쪽인가요? 빌더버그인가요? 삼각위원회인가요? CGI인가요?

   

인드라 :

1993년 소로스가 금광을 개발하는 미국의 한 광산업체 주식을 사들였다는 소문이 나자 월스트리트의 펀드 매니저들이 앞 다퉈 관련 주식을 사들였고 전 세계적으로 금값이 폭등했다. 1996년 1월 소로스가 일본 도쿄의 한 국제 투자 세미나장에 나타나서 "일본 주가가 비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마디 하자 닛케이 주가는 폐장을 앞둔 막판 10분 동안 27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소로스는 지난 98년 1월 외환위기 때 쪽발 돼중 초청으로 방한하여 1999년 2월 소로스의 퀀텀펀드는 서울증권을 인수, 최대 주주가 되었다. 말레이시아 수상 마하티르는 아시아 경제 위기 배후에 조지 소로스가 있다고 맹공격한 바 있다.

   

이런 조지 소로스를 일약 스타로 떠오른 사건이 1992년 영국 침공 사건이다. 소로스는 1992년 영란은행을 상대로 파운드화를 놓고 맞대결을 벌여 일주일 만에 1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챙겼으며 당시 파운드화 방어에 나선 영국이 그의 투기 공세를 견디다 못해 통화체제에서 탈퇴했다.

   

하지만 2000년 4월 간판 펀드인 퀀텀펀드가 첨단기술주에 발이 묶여 50억 달러를 순식간에 날리자 그는 "헤지펀드의 시대는 갔다"고 공식 선언했다. 근래에도 그리스 등 남유럽 사태와 중동 재스민 혁명 과정에 조지 소로스가 관여했다는 루머가 끊이질 않는다. 최근 조지 소로스는 미국 당국의 헤지펀드 규제에 반발하여 또 다시 헤지펀드의 시대는 갔다며 자기 재산만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언론플레이는 여전하다.

   

이런 것이 조지 소로스에 대한 이야기다. 허나, 여기에는 사건만 있고, 이 사건들을 연결하는 배경이 빠져 있다. 허나, 이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는 전 세계에 인드라 말고 아무도 없다.

   

이런 문제를 누가 해결해주겠어? 왜 없어?

   

   

인드라 사마 등장~!

   

쪽발 돼중 놈현 강남 좌파 인강 들으면 서울 법대 교수해도 캐병쉰 색희가 되고,

인드라 인강 들으면 중학교만 나와도 무시를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무료 인강 지존' 인드라가 10단계로 정리한다! ㅋ

   

1.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정주영

2.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군의 아프간 철군

3. 빅터 로스차일드는 1990년 3월 20일에 사망한다

4. 독일은 1990년 10월 3일에 통일한다

5. 마거릿 대처는 1990년 11월 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6. 데이비드 록펠러는 1991년 6월 5일 빌더버그 회의 기조연설에서 '세계정부'(world government)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새로운 제국 선포식을 한다

7. 빌 클린턴은 1991년 빌더버그 회의에 명예회원으로 참석한다

8.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한다. 하고, 1992년 1월 1일 러시아 연방이 성립한다.

9. 조지 소로스는 1992년 영국 파운드화 공략에 성공하여 영란은행의 항복을 받아낸다

10. 토니 블레어는 1993년에 빌더버그에 참석힌다. 1994년 노동당 당수가 되고, 1998년 영국 총리가 된다. 토니 블레어 정권이 가장 우선적으로 한 일은 영란은행의 민영화였다.

   

인드라는 원칙적으로 인종주의 반대야. 오케이~? 인드라 인강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세계인들에게 모두 열려 있다. 인드라가 말하는 것은 전 세계 오직 인드라만이 말하는 것이다. 해서, 인드라 인강 덕분에 한국어가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힌디어, 아랍어, 포르투갈어에 이어 세계 10대 언어 반열에 오르기를 바란다.

 http://blog.naver.com/sinixoo/130042297054

   

자, 그럼 요점은 이 정도로 하고, 본격 무료 인강으로 들어가자!

   

쪽발 돼중 놈현 강남 좌파 인강 들으면 서울 법대 교수해도 캐병쉰 색희가 되고,

인드라 인강 들으면 중학교만 나와도 무시를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1.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정주영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놓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1980년 하계 올림픽과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놓고 각각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불참하면서 반쪽짜리 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와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의 참가를 막기 위한 활동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산국가 중에서는 중국이 1984년 7월, 동독이 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당시 소련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공산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1984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측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냈고[4]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공산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라오스·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 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http://ko.wikipedia.org/wiki/1988%EB%85%84_%ED%95%98%EA%B3%84_%EC%98%AC%EB%A6%BC%ED%94%BD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1981년 `바덴바덴의 기적`을 이뤄냈다. 1981년 5월 정주영 당시 회장은 정부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당시 강력한 경쟁 상대는 일본. 한국은 역부족이라는 관측이 팽배해 있었고 정부의 예산 지원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1&no=442753

   

빅터 로스차일드는 1972년 뮌헨 올림픽,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980년 모스크바 대회와 1984년 LA 대회에 이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면서 내 세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를 절실히 느끼며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한국 분단과 한국 전쟁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그런 서울에서 냉전을 극복하고 미국과 소련이 모두 참석한다니 빅터 로스차일드의 냉전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즉, 빅터 로스차일드 자신이 숨은 지도자였던 소련이라는 국가가 붕괴한다는 것을 예감한 것이었다.

   

인드라는 이때 정주영이 열성적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여 데이비드 록펠러 눈에 들은 것으로 본다. 해서, 오늘날 국유본이 한국의 록펠러 가문으로 정주영 가문을 인정한 것으로 본다. 이런 까닭에 정몽준이 누구보다 스포츠 외교에 열성적이었던 것이다. 의외로 국유본 황제들이 특별한 관심을 지니는 영역이 엉뚱한 데에 있는 편임을 안 것이다.

   

국유본을 잘 모르는 이들은, 1972년 뮌헨 참사와 1976년 인종차별에 반대한 아프리카연합 국가 불참 배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프간 침공 사건을 둘러싼 1980년 올림픽과 1984년 올림픽이 반쪽 올림픽이 되어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기는 레이건, 교황 등이 테러를 당하는 등 국유본 정보 요원간 테러가 극심했던 때일 만큼 빅터 로스차일드와 데이비드 록펠러가 한판 대결을 벌였던 시기이다. 이 중심에 삼각위원회를 진두지휘했던 브레진스키와 최근 퇴임한 브레진스키의 심복, 게이츠가 있었다.

   

   

2.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의 아프간 철군

소련은 1989년 아프간에서 철군했다. 빅터 로스차일드의 확실한 패배이다. 이는 데이비드 록펠러 삼각위원회 카터레이건파가 일으킨 아프간 전쟁에서 데이비드 록펠러가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브레진스키가 이 역할을 주도했다. 브레진스키는 공개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소련 침공을 유도하였고, 아프간 전사들을 회유했다고 말이다. 이 전력이 후일 911 테러에 이용된다.

   

아프간 작전은 브레진스키 전략 중 가장 돋보이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성동격서! 동쪽 아프간을 도모하는 척하지만, 브레진스키 실제 목표는 유럽 공략에 이은 소련 붕괴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헬싱키 프로세스'인 것이다.

   

존 콜먼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는 소련 스파이라기 보다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심복이었다.

   

현재까지 역사 정설은 베를린 장벽 문제에 대해 11월 10일에 장벽이 개방된다, 는 호네커 연설을 오해한 동독 인민이 탈출을 시도한 것이 동독 붕괴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허나, 과연 그럴까. 호네커에게 압력을 가하고, 동독 인민이 탈출해도 안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다면 동독 인민은 장벽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은 늘 교문 앞만 사수했다. 교문을 뚫을 수도 있는데 나가지 않았다. 반대로 전경은 교문 안으로 언제든 진격할 수 있었는데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명령이 떨어지면, 운동권은 교문을 넘어 길거리로 나아갔다. 이때, 전경 역시 명령을 받아 서울 시내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

   

   

   

사랑도 명예도 없이 베를린을 걷는다

   

1997년 4월 22일

   

잠이 쏟아졌다. 졸면 안 되는데... 여기서 졸면 또 엉뚱한 곳에 내릴 지도 모르잖아. 졸지 마. 참으라고. 참아. 참을 수가 없다. 베를린에서 라이프니쯔까지 가는 길은 밤이어서 몰랐다. 날이 차츰 밝아지자 등장하는 동독의 풍경이란. 아, 이런 것이었던가. 사회주의의 모범국이라는 동독이...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래, 난 아직 사회주의잖아. 졸립다. 졸리면 안 되잖아. 졸지 마. 졸립다. 

   

라이프니쯔의 새벽 추위는 매서웠다. 밤새 걷다 지쳐 갈 곳 없는 배낭 여행자에게는 더욱 더. 연신 훌쩍거리면서 역 매표소가 열리기를 기다렸고, 표를 사고서는 새벽 첫 기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아무리 배낭여행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해야 하나하는 후회가... 막상 기차가 도착하니 생각과는 달리 몸뚱아리는 신이 난 듯 냉큼 기차에 올라탄다. 아늑하기 그지없다. 집인 듯 앉아마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샤프너역에 도착하여 차를 바꿔 탔다. 목적지는 통독 이전의 서베를린 중앙역이었던 동물원역인 초역이다. 중앙역은 건설중이었다. 중앙역 뿐이랴. 마치 제 3세계 수도를 보는 듯. 아니 전후 복구 작업을 하는 듯. 도시 전체가 공사중. 고생해서 온 베를린을 즉시 떠나고 싶을 만큼  흉하게 치솟은 아파트 사이로 가득한 매연, 또 매연들. 어? 서울인가 잠시 착각할 정도.

   

비가 내린다. 시각은 9시 반. 제길. 제기랄. 젠장할. 유로버스는 9시에 이미 떠났으니 어차피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다. 일일권 지하철 표를 끊었다.

   

초역에 도착하여 유로버스가 추천하는 숙소를 찾아갔다. 36DM. 욕실이 하나밖에 없다. 변기도 라이프니쯔와 똑같이 뚜껑이 없는 이상한 모양의 변기였다. 화장지도 방마다 하나씩 배급. 숙소가 고풍스럽지 않은 모던한 건물이면서 낡아 아무런 감흥도 못 느끼게 만든, 그래서 독일적인 듯싶은 숙소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숙소가 36DM이라니 너무 비싸다. 게다가 주인장이라는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나찌 시대에 아우슈비츠 같은 데서 생체실험을 했을 것 같은 인상이라고나 할까. 숙소 주인답지 않게 하얀 색의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이 사람. 독일적인 억센 억양으로 웃지도 않고 딱딱하게 말하는데 취조 받는 기분이 든다.

   

셈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어젯밤 기억을 모두 꿈으로 간직하려는 듯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어떤 늙은이 하나가 내 락카를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요?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황한 듯싶었다. 도둑으로 오해를 받는다고 여기는지 그 역시 화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지 않던가. 왜 내 락카에 손을 대는가 이 말이다. 서로 씩씩거리면서 말을 한참 동안 하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오해다. 오해.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슨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찾아보니 그렇다는 게다. 그럼, 내가 도둑놈? 뭐, 이런...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말한다. 아닌 것 같다고. 여행자이니... 그는 독일인. 독일인이면서 베를린에 여행을 온 사람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라이프찌히도 갔다 왔다고 했다. 그는 서독 출신이었다. 동독은 열등한 지역이야. 라이프찌히에서 만난 비즈니스맨이 내게 라이프찌히는 죽었어, 동독은 죽었어,라고 말했다고 하니 서독인 왈, 맞는 말하는 것이다. 첫인상부터 기분이 안 좋았지만, 말할수록 더 기분이 나빠지는 서독 촌놈이었다. 마지막 말도 압권이었다. 독일과 베를린에서 오래 묵어라. 돈 많이 써라. 내놓고 말한다.

   

숙소를 나와 은행부터 찾아갔다. 은행에서 독일 돈을 더 바꾼 다음에 에로티카 뮤지엄을 찾아갔다. 베를린 초역(동물원역)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있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릴 만큼 매우 가깝다. 에로티카 뮤지엄은 내가 가본 유럽 포르노 박물관 중 최고 수준이었다. 아마도 주된 고객은 관광객인 듯싶다. 시설 면에서나 수많은 포르노 전시물 면에서나 뮤지엄이라 평가할만하다. 물론 중국, 일본, 인도, 유럽의 그림, 조각, 사진 등은 기본. 마네킹 전시가 볼만했지만, 무엇보다 추천하고픈 것은 고전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이다. 흑백 무성영화였다. 2층 전시장과 달리 1층은 비디오룸과 연결된다. 흥분한 사람들이 동전을 넣고 비디오룸에 들어가 볼 일을 본다. 대개 남자들이 들어가는데 간혹 여자도 들어갔다. 사십대 아줌마였다. 나는? 나는 편집증적인 사람이라, 엄밀하게 말한다면, 정신분열적인 사람이라, 남들과 똑같이 노는 것을 다소 혐오하는 편이다. 물론 성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내려와 박물관 화장실이 무료라 화장실에 소변 좀 보고 가려는데 재미난 일이... 함께 볼 일을 보던 서양 젊은 친구가 연신 내 눈치를 보면서 같이 화장실을 나오다가 마치 뭔가를 잊어먹었다는 듯이 행동을 취하더니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이? 비디오룸은 유료이고, 화장실은 무료다 이거지? 내가 별 취미가 있는 것인지 한동안 화장실 문앞에 있어봤다. 역시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어가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가 볼 일을 잘 보도록 시키지도 않았는데 잠시 망을 봐준 셈치고 웃으면서 박물관을 나섰다.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달렘에 있는 민족학 박물관을 가자. 민족학박물관에는 중동, 오세아니아, 인도, 동아시아, 마야, 아즈텍의 예술품들이 다수 전시되어있다. 이 박물관에 가면 영국 대영박물관과 비견되는 제 3제국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폴리네시아 문화였다. 유럽 박물관도 돌아다녔는데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돌아가려는데 꽃길이 사진빨이 있어보였다. 잘 안 찍는 사진이었지만, 마침 지나치던 독일인에게 부탁. 키일에서 왔다는 빵모자 아저씨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유 노 치즈? 하면서 포즈를 취하란다. 어디서 왔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웃음기는 어디가고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한다. 독일의 경험이 교훈을 줄 것이다. 나는 주사파가 아니지만, 그에게 말했다. 한국에게 통일이란 진정한 독립을 의미합니다. 그가 공감을 표했다. 박물관 본 소감이 어떤가 묻는다. 이그조틱(exotic)한 것이 인상적이다 - 와~ 마침 이 단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훌륭하다. 나머지는 어느 박물관에 가든 똑같은 것 같다. 그랬더니 상당히 만족한 듯 기분이 좋아 보인다. 다음에 어디 갈 예정이냐 해서 브란덴부르크에 간다고 했더니 오! 역시 하면서 가까운 전철역을 가르쳐 준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당신도... 굿바이. 돌아다녀봤지만 한국에 대해 그나마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유럽인은 독일인인 듯싶었다.   

   

전철 풍경은 서울과 다를 바 없다. 아시아계 한 명이 뉴스위크 독일어판을 읽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어떤 아줌마가 노골적으로 훔쳐보니 그는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는지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래도 꿋꿋하게 아줌마 계속 훔쳐본다. 젊은 아가씨들도 조용하게 문고판 책 같은 것을 본다. 그때 거지가 한 명 들어와 마침 있던 빈 좌석에 앉아 술병 째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핀다. 옆 사람들이 불쾌해하며 일어선다. 그러자 그는 드러눕다시피 한다. 그러자 갑자기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가 거지에게 다가가더니 독일어로 뭐라 뭐라 한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거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다. 이런... 아직도 독일에서는 이런 계몽주의가 통하다니... 뭐랄까? 이 기분이라니. 마치 19세기에 온 착각이... 한때 유행했던 독일 성장소설류를 떠올리며...

   

역에 도착하니 온통 공사중이다. 소음과 먼지. 이 사이를 학생들이 바삐 지나가고 있다. 이 혼탁함. 알 수 없는 짜증. 무력감. 그리고 분노... 문득 나는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역사적 과제' 혹은 '근대 기획'.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탈근대주의일 수밖에 없고 독일에서는 근대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갑자기 흥분이 밀려왔다. 한순간에 정리가 된다. 그렇다. 와보면 안다.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차이는 별 게 아닌 것이다. 나는 직관적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만세를 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보거나 말거나.

   

브란덴부르크에 도착. 털썩 주저앉아 빵에 딸기잼을 발라서 먹었다. 브란덴부르크 주변은 온통 터키 행상인들뿐. 마치 독일 통일은 터키인이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관광버스들이 쉴 새없이 관광객들을 쏟아낸다. 관광지에 막상 와서 볼 것이 별로 없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 그런 심드렁한 관광객들 눈에 갑자기 내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길가에 앉아서 빵을 우걱우걱 먹는 모양새가 우스웠는지 그들끼리 나를 보면서 킬킬댄다. 졸지에 내가 관광상품이 되어버린 것일까?

   

사진 한 장 찍어야겠다고 여겨 그냥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는 동베를린인이었다. 그가 사진을 찍어준 후 내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열변을 잠시 토했다. 독일인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통일을 했다. 한국인은 당신들에게 교훈을 얻을 것이다. 나도 자랑스러워지고 싶다. 등등. 콩글리쉬로 마구 떠들었는데 그 동독인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하도 진지하게 웅변을 하니 뭔가 감동된 듯 조용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한동안 브란덴부르크 문을 올려다보고 뒤돌아 나를 한 번 본 뒤 가던 길을 갔다. 그렇지 않은가. 입장을 바꾸어보라.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닌, 일상에 불과한 어떤 풍경을 외국인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면서 그대에게 말을 한다면... 외국인도 이런 열정으로 자신의 문화를 사랑하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가만 보면 나 같은 놈들이 한국에 와서 문화평론이다, 당신들의 조국, 대한민국 이따위 잡설을 푸는 것 같다. 재수 없는 놈들. 상대가 듣건, 말건 썰을 푸는 놈들이라니...

   

나는 맑스 엥겔스 광장으로 걸어갔다.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왜 이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아직도 내게 소명이 있었더란 말인가? 남들이 다 버린 사명. 낡고 쓸모가 없어진 임무. 왜? 왜? 왜? 내가 왜 아직도 이따위에 미련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한없이 걸었다. 하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고, 광장 끝까지 어느새 걸어갔고, 기진맥진했다. 돌아올 때는 너무 지쳐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상관저로 보이는 건물에서 수십 대의 차량이 나와 백차 호위를 받으며 지나간다. 저들은 알까?

   

초역에서 나와 전철역 인근 노상에서 파는 독일 소세지 맛을 본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구운 소세지 냄새가 좋았다. 막상 맛을 보니 소세지는 별로. 소스 맛은 그런대로 일품. 배가 고팠는지 하나 더. 알루미늄으로 된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를 주었는데 괜찮은 듯싶어 가방에 넣었다. 숙소에 오니 첫인상 더러웠던 숙소 주인이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고 싶은지 덱덱거린다. 많이 늦은 것도 아닌데...

   

자, 이제 자는 거다.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내일은 체코 프라하로 가자!  "

http://blog.naver.com/miavenus/70016582768

   

죽음을 각오하고 전두환 정권 때 대학 1학년 때부터 유치장도 다녀오고, 가두투쟁을 했던 인드라의 생생한 경험이다. 토 달지 말자~!

   

헌데, 이것이 우연이라고^^?

   

   

3. 빅터 로스차일드는 1990년 3월 20일에 사망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인드라가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따로 링크도 안 걸겠다. 인드라 블로그에서 검색을 잘 해보시라. 검색만 잘 해도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서 먹고 살 길이 열린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화병에 뒈진 게다. 권력을 휘두르다가 권력을 잃게 되면 심리적 박탈감이 굉장하다. 인기 짱인 연예인이었다가 어느 순간 '병맛' 연예인이 되면 공황 장애를 일으키며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데, 쪽발 놈현 죽기 직전 막장 심리도 이랬는데, 하물며 세계를 주무르던 빅터 로스차일드 정도이면.

   

   

4. 독일은 1990년 10월 3일에 통일한다

독일은 1980년까지 25년간 흑자를 유지해 오다가 상당한 적자를 통일 이후 1990초에 본 것이다. 가장 큰 적자는 동독의 재통일에 다한 수입 급증 때문이다. 독일은 순 채권국에서 순 채무국으로 변하였다.

   

독일은 예나 지금이나 흑자 구도의 제조업 국가다. 헌데, 통일 이후, 동독 인민에 대한 배려랍시고 동독 화폐 대 서독 화폐를 1 : 1 교환을 시켰다. 동독 경제 건설로 인해 엄청난 투자를 해서 수입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통일 독일은 긴축 정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독인에게 통일세를 더 거두었다. 허나, 이런 재정 정책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여러 차례 금리 인상을 했다. 왜? 금리 인상을 했을까?

   

원인은 유럽 준관리통화체제인 ERM에 있었다. 1979년 이후 유럽의 모든 통화를 독일 마르크화에 고정시켜 연동하게 한 '환율조정장치(ERM)'의 범위 안에서 파운드화의 환율을 유지하려 했다. 이 제도에 따라 영국은 1파운드=2.95마르크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통일 독일은 동독 투자로 수입이 급증하니 동독 건설로 인한 호황을 유지하면서도 마르크화 가치가 절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플레이션 방지 명분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한다. 10여 차례나 인상했다. 유럽 각국 통화란 금리가 높은 곳으로 움직이니 통일 독일이 금리 인상하니 독일보다 경제력이 약한 이태리나 스페인 등 유럽 각국 통화 가치는 폭락했다. 해서, 금리 인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웨덴은 자국 통화 가치 보전을 위해 단기금리를 5배나 인상했을 정도였다.

   

예서, 영국은 마르크화나 달러화에 맞서 자국 통화인 파운드화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특히 달러화에 대비하여 1 : 1 기준을 지키려 했는데, 당시 영국 대 미국 경제력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없는 환율이었다. 하면, 이것은 국유본 귀족에게 합리적인 처사일까?

   

빅터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계속 쥐고 있었다면, 영국 국가 입장에서는 이익이었다. 그럼에도 왜 국유본 귀족은 '카이사르' 빅터 로스차일드를 축출했는가. 국유본 귀족이란 어디까지나 영국을 숙주로 해서 이득을 취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유본 귀족이기에 영국과 영국 정부가 '애국'의 이름으로 파운드화의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따름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데이비드 록펠러와 국유본 귀족간 타협이 이루어진 셈이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빅터 로스차일드처럼 축출당할 염려가 사라진다. 국유본 귀족은 통화량을 확대시켜 이윤 추구를 보다 확대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과정이 마거릿 대처의 자진 사임이었다.

   

   

5. 마거릿 대처는 1990년 11월 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왜 사임하나? 마거릿 대처는 유럽연합(EU)과 유럽단일시장에는 찬성하지만 단일통화나 유럽의 정치적 통일에는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어 자진 사임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과연 그럴까.

   

마거릿 대처는 영국 보수당에서도 찬밥 신세였다. 왜? 귀족이 아니었기에. 한마디로 마거릿 대처는 영국 보수당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귀족이 아닌 서민 집안 출신이었다. 여자였다. 빅터 로스차일드에 비한다면 똑똑하지도 않았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마거릿 대처를 눈여겨보고 그녀를 빅터 로스차일드의 대항마로 스카웃을 했다. 1970년대까지 영국은 보수당/노동당 할 것 없이 빅터 로스차일드가 실제 주인이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빅터 로스차일드 주도의 영국 정치체제 변화를 바랬고, 그 변화를 주도할 전사로 마거릿 대처를 선택한 것이다.

   

해서, 마거릿 대처는 데이비드 록펠러 도움을 받아 집권에 성공한다. 이후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를 적극 행한다. 정확히는 시카고학파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이겠다.

   

문제는 바로 통화주의에 있었다. 왜 통화주의가 문제였나?

   

우선 통화주의가 무엇인지 알자.

   

통화주의 [ monetarism , 通貨主義 ]

경제활동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목표로 정책 당국이 사용할 수 있는 정책 수단 중 통화정책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의 주장을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신봉하는 사람을 통화주의자라 한다. 이에 대해 재정정책이 경제활동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재정주의자(fiscalist)라 한다. 재정주의자들의 이론적인 기초는 케인스 경제학의 흐름을 잇는 신경제학(new economics)인데 신경제학과 통화주의는 현재 미국의 양대 경제 사조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통화주의자는 시카고 대학의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8224

   

이게 뭔 말이냐. 잘 모르겠지?

   

이런 건 좀 공부해야 한다. 이건 말이야. 1930년대 공황, 특히 1930년대 미국 공황 전개 과정과 그 해법을 둘러싼 차이란다.

   

거칠게 말하면, 통화주의자(시카고학파, 신자유주의자)란 통화량, 혹은 시중에 풀린 돈을 조절하면 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재정주의자(케인즈학파)란 정부가 돈을 풀어 노인들 공원에서 휴지 줍기 같은 공공 근로를 확대해야 공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가설인 게다.

   

자, 예서, 인드라는? 둘 다 아니잖니? 국유본론의 공황론은 이들과 다르잖아? 해서, 해법도 다르고^^ ㅋㅋㅋ 이래서, 인드라 국유본론이 혁명적이긴 하지.

   

아무튼 왜 말 잘 듣는 마거릿 대처가 보수당 당내 반발에 부딪혀 자진 사임을 한 것이냐고?

이유는 다른 것 없어. 세상에서 오직 인드라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을 한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뒈졌기 때문이다. 하면, 왜 데이비드 록펠러는 빅터 로스차일드라는 맞수가 죽었는데 마거릿 대처를 사임시켰나?

   

데이비드 록펠러가 국유본 귀족 눈치를 본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 체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 체제로 전환한 것은 국유본 귀족이 빅터 로스차일드를 축출했기 때문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신세계 질서'만 고려해서 국유본 귀족 기득권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교훈을 곱씹었다. 해서, 데이비드 록펠러는 마거릿 대처 자진 사임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겉보기에는 유럽 통합에 미온적인 마거릿 대처 자진 사임이다. 허나, 실상은 통화주의에 대한 국유본 귀족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통화주의에 따라 파운드화를 풀지 않으니 국유본 귀족이 사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뭔 말이냐. 한국은행이 돈 안 풀면 시중에서 회사가 회사채 런칭하기 어렵잖은가. 딱 이런 이치인 게다.

   

해서, 마거릿 대처를 사퇴시킨 것이다. 허나, 데이비드 록펠러가 마거릿 대처를 잊은 것이 아니다. 정세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마거릿 대처는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가 1992년 6월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남작)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6. 데이비드 록펠러는 1991년 6월 5일 빌더버그 회의 기조연설에서 '세계정부'(world government)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새로운 제국 선포식을 한다

   

데이비드 록펠러의 새로운 제국 선포식에서 걸림돌이었던 마거릿 대처를 사퇴시킬 수 있었다. 이 결과로 영국 국유본 귀족들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데이비드 록펠러는 1991년 빌더버그 회의에서 전임자 빅터 로스차일드의 숙원이었던 '세계 정부'를 계속 추진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허나, 데이비드 록펠러는 바보가 아니었다. 전임 빅터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귀족한테 축출당한 것은, 지나치게 독단적이었고, 이념적이었고,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국유본 귀족들의 이중성을 간파했다. 한편으로는 세계정부, 신세계 질서에 동의하면서도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조건하에서만 실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여,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후 알파 오메가 작전을 펼친 것이다. 알파 팀이 신세계 질서를 적극 추진한다면, 오메가 팀이 신세계 질서 팀을 적극 저지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 결과, 데이비드 록펠러 권력은 꾸준히 유지가 된다. 이것이 자끄 데리다의 '차연 효과'라고 본다.

정리하자. 당장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국유본 귀족에게 고개를 수그리는 형국이었다. 허나, 뒤로는 호박씨 깠던 것이다.

   

   

7. 빌 클린턴은 1991년 빌더버그 회의에 명예회원으로 참석한다

만일 빅터 로스차일드가 1990년에 죽지 않았다면, 아버지 부시는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재선했을 것이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가 1990년에 죽었다. 이것이 원인이다. 그 아무리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 전으로 인기를 끌어도 국유본 권력투쟁 구도가 우선이었다.

   

로즈 장학생 빌 클린턴이다. 로즈? 달콤한 이름과 달리 남아공 흑인에게는 아주 끔찍한 자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토 히로부미인 게다. 이런 이토 히로부미 장학생, 혹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장학생이 대통령이 된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투트랙 전술을 구사했다. 하나는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투쟁이다. 이 투쟁 때문에 미국에서는 초당적인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이 세력이 노예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간 뉴라이트 레이건이었다. 뉴라이트 레이건은 집권 시 미국 거의 전 지역에서 초당적인 지지를 획득했다. 이를 거의 십여 년간 유지했다.

   

이는 제이 록펠러의 노예민주당 입장에서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만일 빅터 로스차일드가 좀 더 버텼다면, 제이 록펠러는 영국에 핵 폭탄 투하에 버금가는 재앙을 결정할 수도 있을 만큼 긴박했다.

   

다른 하나는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투쟁을 위해 초당적인 투쟁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미국 내부의 정치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언제나 발생하는 반대파를 흡수할 수 있어야 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제이 록펠러를 1980년대에 4세로 임명하면서 노예민주당에서 반대파를 흡수하라는 특명을 맡겼다. 헌데, 빅터 로스차일드가 뒈진 것이다. 하면, 제이 록펠러는 당근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지금까지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투쟁 때문에 노예민주당과 제이 록펠러는 인내해왔습니다. 허나, 지금은 빅터 로스차일드가 없습니다. 이제는 미국 내부를 들여다 볼 때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국은 분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분열의 한 편, 즉 록펠러 가문에 반대하는 세력에 록펠러 가문이 우뚝 서지 않는다면, 향후 록펠러 가문의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선조께서 록펠러 카르텔을 만들 때, 적까지 포용해가며 안티 록펠러 카르텔까지 주도하여 통합한 선례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제이 록펠러의 설득은 통했다. 빅터 로스차일드도 없는 마당에, 데이비드 록펠러는 제이 록펠러가 미는 클린턴으로의 정권 교체를 승인했다.

   

해서, 월마트 본사가 있는 아칸소 주지사 출신 클린턴이 1992년 대선에서 내놓은 구호는 무엇이었나.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 (It`s the economy, stupid!)

   

   

8.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한다 하고, 1992년 1월 1일 러시아 연방이 성립한다

   

존 콜먼에 따르면, 옐친을 비롯한 소련 주요 지도자들은 영국 정보부에서 훈련을 받은 첩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빅터 로스차일드 인맥이었다.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고 소련이 붕괴하자 유럽 좌파 정당은 패닉 상황에 빠진다. 비단, 유럽 좌파 정당뿐일까. 한반도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가 변두리인데, 남북한 할 것 없이 충격이었는데, 유럽은 오죽하겠는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일방 보수는 곤란하다. 오세훈이 자진 사퇴하면, 곽노현도 꺼져주어야 하는 것이 국유본 균형론이다. 물론 국유본 시초부터 오세훈/곽노현을 한 세트로 인식한 듯하다. 어차피 한국 교육감이란 건 국유본이 한국 교육시장을 겨냥한 '알박기'였으니~! 이 대목에서 국유본이 왜 쪽발 전교조와 쪽발 언론노조를 지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한국인을 무뇌아로 만들기 위함이다.

   

   

9. 조지 소로스는 1992년 영국 파운드화 공략에 성공하여 영란은행의 항복을 받아낸다

1992년 9월 조지 소로스를 중심으로 영국의 파운드화가 고평가되었다고 생각한 헤지 펀드들은 파운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조지 소로스는 당시 1 : 1이었던 환율로 오천만 달러를 맡기고 파운드화를 대출을 받았다. 이 돈을 밑천으로 해서 조지 소로스는 약 1조 파운드화를 매도를 쳤다. 영국중앙은행이 방어했지만, 조지 소로스는 2주 만에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소로스는 1992년 유럽 각국의 통화가 불안해진 틈을 타 영국 파운드화를 투매해 일주일 만에 10억 달러(약 1조3천억원)를 벌어들여 신화적 존재로 떠올랐으며, 『우리의 세금을 투기꾼이 가로채갔다』는 영국 국민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97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로부터 동남아 통화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기도 하였다.

   

오천만 파운드로 어떻게 1조 파운드 매도를 때릴 수 있나? 레버리지 덕분이다.

   

레버리지란 뭐냐면, 지닌 돈의 수십 배로 매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여러분이 요즘 카드 사용할 때를 생각하면 된다. 카드사에서 근래 카드 결제대금의 5%만 결제하면, 전액 결제하지 않아도 약간 높은 이율로 이월을 시킨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레버리지다.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5% 결제라면, 자신이 가진 돈을 20배로 뻥튀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1%라면 백 배로 튀길 수 있다. 선수들은 이를 '돌려 막기'라고 부른다. 해본 자들만이 아는 숨 막히는 생존 게임이다.

   

이런 이치에 따라 조지 소로스가 주식 투자로 치면, 신용 미수를 엄청나게 저지른 게다. ㅋㅋㅋ. 인생은 한 방 ?

   

허나, 이것은 조지 소로스 혼자만의 작전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만일 조지 소로스 혼자였다면 반드시 실패했다. 이면으로 조지 소로스를 도와준 세력이 있었다. 조지 소로스가 언론 플레이를 했지만, 이런 언론 플레이에 혹할 인민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95% 이상의 세계 인민은 금융 경제에 무식하다. 지금도 이 글을 읽고 이해할 한국인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한국인의 5% 이내라고 보는 것도 과한 수치라고 본다. 1% 이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본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0.1% 이내이다.

   

조지 소로스를 도와준 세력은 뜻밖에도 영국 은행들이었다. 더 웃긴 건 영국 왕실도 조지 소로스 일부 자금을 지원했다는 게다. ㅋㅋㅋ

   

해서, 조지 소로스의 영국 침공 이후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영란은행의 권위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이차 대전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 명령 하에 국유화되었던 영란은행 권위가 떨어진다는 건 향후 민영화를 잉태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영국만 독야청청하던 시대가 실질적으로 끝이 났음을 세계인이 알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영국은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 대륙과 다른 기준을 늘 적용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이 여전히 세계의 지존임을 시사하는 효과를 누리게 했다.

   

이러한 이치는 간단하다. 모두가 지킬 수 있는 법안을 만들고, 자기만 그 법안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살인면허 007이다.

   

살인면허 007 실제 모델 빅터 로스차일드가 사망했다. 하여, 영국도 정말로 보통 국가가 되었다. 이제까지는 '세상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면, 앞으로는 유럽 국가 중 하나일 뿐이다.

   

   

10. 토니 블레어는 1993년에 빌더버그에 참석힌다. 1994년 노동당 당수가 되고, 1998년 영국 총리가 된다. 토니 블레어 정권이 가장 우선적으로 한 일은 영란은행의 민영화였다.

   

"1997년 5월 영국 총선에서 1918년 이래 노동당이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국유화와 복지국가 정책을 과감히 포기하는 등의 노동당 변화를 이끌며 집권 보수당에 압승, 세계에서 최연소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의 경제철학과 여러 정책을 '블레어노믹스'라고 한다.

   

블레어노믹스의 핵심은 복지보다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것으로 대처리즘과 거의 흡사하다는 이유로 일부에서는 블레어를 '대처의 아들'이라고 비꼬기도 하고, 노동당의 이러한 변화를 '신노동당', '노동당의 우경화'라고 표현하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①국유화 정책 포기, ②노동조합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 ③복지국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금을 대폭 인하, ④정부의 재정지출과 차입의 축소, ⑤고소득층에 대한 조세감면을 함으로써 전통적인 소득재분배 정책의 포기, ⑥인플레이션 억제 등이다. 그 밖에 그 동안 유럽통합에 반대해 왔던 보수당과는 달리 유럽의 경제 및 정치, 통화 통합을 위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가입하는 등 비교적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21세기 정보화 및 세계화 시대에서 경쟁의 승패는 인력의 질로 판가름 난다는 판단하에 인력개발과 교육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클린터노믹스와도 닮았다.

   

이러한 블레어노믹스의 철학적 배경은 '이해관계자 경제학(stakeholders economy)'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민간기업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회시키는 것에만 주력해야 한다는 미국식 '주주경제학(shareholders economy)'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주주뿐만 아니라 경영관리층, 종업원, 고객 등의 이해를 동시에 고려하는 경제라는 점에서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시장경제를 의미한다. 즉, 기업은 종업원들의 기술과 평생능력을 제고할 책임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종업원은 장기적인 고용을 보장받는다."

[출처] 블레어노믹스 [Blairnomics ] | 네이버 백과사전

   

블레어노믹스는 1997년에 잉태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블레어는 이미 1994년 노동당 당수 선거에서 국유본 지시대로 영국 노동당 강령을 뜯어 고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해서, 집권에는 4년 정도 더 지나야 했던 것이다. 왜? 국유본은 영국 노동당 정권을 출범시키기 전에 영국 노동당 내 노조 그룹을 약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 3의 길? 이것은 국유본 각본이다.

   

이후 토니 블레어는 부시의 충실한 애완견이 되었다. 하면, 토니 블레어는 네오콘부시파인가. 그렇다.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JP모건 고문으로 낙하산을 탔으니까~! 지금도 영국계 은행이지만, 데이비드 록펠러 삼각위원회 카터레이건파인 RBS 은행과의 소송에 블레어 측이 나서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

   

끝으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일 때, 영란은행 민영화를 결정한 당시 재무장관이 누구였나.

   

고든 브라운이다. 재무 전문가가 아니다. 스코틀랜드인으로 대학 때 열심히 데모한 경력 밖에 없다. 쪽발 놈현이나 천신정처럼 무식하니까 국유본이 부리기가 쉬웠다.

   

영국은 여러분들이 아는 것과 달리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시절에 회복할 도리없이 완전히 망했다. 현재 캐머런 보수당 정권이 있는데,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과 다를 바 없다. 당만 다를 뿐, 국유본 인맥은 같다. 해서, 캐머런 정권은 설거지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모든 것은, 캐머런이 만든 것이 아니라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정책 실책이 누적된 결과인 게다. 그걸 캐머런이 독박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유본이 지시한 캐머런 몫이다.

   

쪽발 돼중 놈현 강남 좌파 인강 들으면 서울 법대 교수해도 캐병쉰 색희가 되고,

인드라 인강 들으면 중학교만 나와도 무시를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결론삼아 말한다.

   

조지 소로스는 국유본 세력 중 어느 분파인가.

   

조지 소로스 이력을 살펴보면 유추할 수 있지 않은가. 1992년에 스타가 되어서 2000년에 실패를 맛본다. 이 시기는 제이 록펠러와 클린턴이 활약하던 시기였다. 하고, 타켓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마지막 보루라 알려진 영란은행이었다.

   

뉴라이트이다. 데이비드 록펠러 삼각위원회 카터레이건파이다. 다만, 같은 뉴라이트라도 시대가 흐르니 정치적/올드 뉴라이트와 경제적/네오 뉴라이트로 분화하기 마련이다. 뉴라이트 중 젊은 그룹이 바로 제이 록펠러 CGI 오바마파인 것이다.

   

조지 소로스 덕에 명성이 땅에 떨어진 것은 누구인가. 대처, 영란은행, 시카고 학파 프리드먼이다. 이득을 취한 것은 영국 노동당, 제이 록펠러, 케인즈 학파이다.

   

이런 결과로 다카히코 소에지마는 제이 록펠러와 로스차일드가 연합하여 데이비드 록펠러를 공격한다는 음모론을 펼치는데, 인드라 입장에서는 다카히코 소에지마를 비롯한 각종 일본 음모론자들을 국유몬 관계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뭔가 엉뚱한 결론을 내게 하여 국유본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면서 인세 받아 호의호식하는 색희들이라고 본다.

   

해서, 최근 일본 대지진이 일본은행을 타격하기 위한 국유본의 음모라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어? 인드라만 이런 주장하나^^?

   

하면, 지금까지 인드라는 조지 소로스를 과소평가하다가 데이비드 록펠러와 만난 이후로 조지 소로스를 재평가하고 있는데, 단지 만나서 평가하는 것이냐.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고, 인드라의 기존 국유본론이 순진했다고 할 수 있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주요 기관만이 국유본 핵심기관이고, 헤지펀드란 국유본 변방으로만 간주했던 것이다.

   

허나, 이는 국유본 역사에서 잘못된 추정이지 않나 하는 반성을 했던 것이다. 해적 드레이크 경만 봐도 알 수 있고, 해커를 우대하는 미국 IT 산업계를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오히려 헤지펀드야말로 국유본을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이라는 것을 근래 들어서 파악할 수 있었다.

   

헤지펀드를 규제해서 조지 소로스가 은퇴^^? 국유본은 1930년대도 그렇고, 1970년대도 그렇고, 겉으로는 엄청 규제하는 듯하지만, 반드시 개구멍을 판다. 일반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곳에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쪽발 돼중 놈현 강남 좌파 인강 들으면 서울 법대 교수해도 캐병쉰 색희가 되고,

인드라 인강 들으면 중학교만 나와도 무시를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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