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VS 칼과피; 국유본 방해인가요? 북핵 관련 부문이 편집기에서 자꾸 삭제되어 다시 올립니다 인드라 VS ?

2013/02/15 21:30

http://blog.naver.com/miavenus/70159388826

   

   

   

   

   

   

 : 인월리 국제유태자본론 중간 결산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2/13-4

   

   

   

   

"칼과피:

이번 글과는 관계없지만, 전 글에서 북한의 미사일 기술과 발사체를 이라크로부터 사다트 정권 때 도입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근거 자료는 있습니까? 인터넷을 뒤져봐도 구소련으로부터 미사일과 기술을 가져왔다고만 나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71402391&code=93040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225010307270260021 

   

INDRA:

글 감사드린다. http://blog.naver.com/zkfrhkvl/64980896 이제 님이 어용언론, 혹은 찌라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로열더치쉘(Royal Dutch/Shell Group of Companies)을 기억해야 한다.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4&dir_id=414&eid=7+Fp3XUMq4WNJD0s7BFGlsclFvRJ7nkV&qb=66Gc7Je0642U7LmY7ImY&enc=utf8&pid=fOBNfloi5TVsschkUu4sss--431297&sid=SdjbKHPH2EkAAHryIvE

   

로열더치쉘하면 빌더버그의 두 주역인 국제유태자본의 황제였던 빅터 로스차일드와 나치(Nazi) 비밀경찰(SS) 출신의 네덜란드 베른하르트를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마커스 새뮤엘을 떠올려야 한다.

   

"He served as chairman of the Agricultural Research Council from 1948 to 1958 and as worldwide head of research at Royal Dutch/Shell from 1963 to 1970."

http://en.wikipedia.org/wiki/Victor_Rothschild,_3rd_Baron_Rothschild

   

"새뮤얼은 만족하지 않고 석유로 눈을 돌렸다. 러시아산 석유를 수입하던 노벨 형제, 금융재벌 로스차일드와 손을 잡았으나 문제는 가격. 스탠더드 오일과 가격경쟁력으로 맞서기 위해 유조선을 현대화하고 중국과 일본ㆍ싱가포르에 정제시설과 저장 기지를 만들었다."

유태인 마커스 새뮤엘의 일본 쉘 성공기?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11/e2007110417350863820.htm

   

예서, 빅터 로스차일드, 킴 필비, 킴 필비의 아버지인 존 필비 이 3인을 중심으로 분석하면, 이차대전 이후 중동 정세의 3할 이상에 대해 이해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정점은 수에즈전쟁이다. 나머지 3할은 록펠러와 브레진스키의 몫이 될 것이며, 나머지 4할이 중동 실권자의 몫이 될 것이다.

   

중동 실권자에 대해서는 사우디의 이븐 사우드와 함께 이집트의 박정희인 나세르를 이해하는 것이 첩경이다.

   

http://blog.naver.com/n1steward?Redirect=Log&logNo=60061294112

   

나세르는 나세르주의까지 나올 정도로 세계 비동맹 진영에서 유고 티토,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인도 네루와 함께 4대 천왕으로 존경받던 인물이다. 나세르는 수에즈 국유화로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아랍의 이익을 수호하는 지도자로 떠오른다. 그러다가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을 잠정적으로 승인한 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후 나세르의 동지인 사다트가 대통령이 된다. 예까지 상식적인 설명이다.

   

이제 국제유태자본론 고유의 설명으로 들어간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오직 인드라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나세르는 국제유태자본의 중동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대 정세에서 국제유태자본은 중동에서 김일성 플러스 박정희를 만들어내어야 했다. 그것이 나세르라는 것이 인드라 주장이다. 왜 이런 의문을 품었는가. 수에즈전쟁 때문이다. 이 전쟁은 전투에서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간섭으로 전쟁에서는 오히려 이집트가 승리한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빅터 로스차일드를 이해하면 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빅터 로스차일드는 왜 나세르라는 인물을 요구하며, 수에즈까지 내놓을 구상을 했던가. 이는 이란 정세 때문이다. 1941년 집권한 팔레비는 아버지를 따라 근대화와 민족주의 노선을 병행하였으나, 국제유태자본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온건파였다. 반면 모사데그는 국제유태자본과의 일전을 결심할 정도의 급진파였고, 이는 석유 국유화로 나아간다. 이는 국제유태자본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팔레비를 1953년에 로마로 망명시킨 뒤, 3일 뒤 장군 자헤디(18901964)의 쿠데타로 모사데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마치 국제유태자본의 정보원이자 이란의 전두환인 호메이니를 내세워 이란의 박정희, 팔레비를 축출하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해 중동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국제유태자본에게는 이 민심을 약화시킬 대안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세르요, 수에즈전쟁이다. 이러한 국제유태자본의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육지책을 이해해야 한다.

   

해서, 이후 나세르는 줄곧 반제, 반미, 반영 노선 이미지로 주가를 높여왔지만, 1970년에 이르러 더 이상 나세르의 쓰임새가 사라졌다. 왜냐하면 국제유태자본 입장에서 볼 때, 나세르에게 한 번 더 업적을 주기도, 그렇다고 그간의 이력을 모두 까먹을 정도로 나세르를 급변신을 시킬 수도 없는 사정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갑자기 반미, 반영, 반이스라엘, 반제 투사가 친미, 친이스라엘이 된다면 얼마나 골 때리겠는가. 국제유태자본론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정도는 쉽게 이해하겠지만, 대다수 인민은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해서, 나세르는 심장마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970년까지 국제유태자본이 기다려준 것은 1960년에 시작한 아스완댐 공사가 1970년에 끝났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10월 26일 ,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국제유태자본에게 암살당했는데, 10월 26일이 팔레비 생일이라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 국제유태자본은 박정희든, 김대중이든, 이명박이든 필요하면 추켜세우다가 가치가 다 하면 휴지통에 버린다.

   

나세르에 이어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서방과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2년에는 이집트에 충분한 군사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집트에 들어와 있던 소련 기술자들과 군사고문단을 추방하기도 했다. 이것이 사다트의 의지가 아닌 국제유태자본의 의지라고 파악한다면 님은 이제 국제유태자본론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은 현명하다. 사다트에게도 업적이 필요했다. 1973년 10월 6일, 시리아와 연합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했다. 물론 전투는 수에즈 전쟁처럼 이스라엘의 승리이지만,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국제유태자본의 지원으로 나세르 시대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은 사람으로 이집트 국내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국제유태자본은 마음껏 사다트를 이용했다. 1976년 이집트는 북한은 물론 중국과도 군사협정을 맺었다. 친미 정권인 사다트가 어쩐 일로 북한과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었을까^^! 이는 당대 국제유태자본의 세계 전략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브레진스키의 모든 저작을 다 읽어보아야 하는데, 그중 추천하는 도서가 있다면, '거대한 체스판'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김일성 정권이 스커드 미사일과 발사대를 이집트로부터 구매하는 것이다. 이 계약을 국제유태자본이 몰랐을까^^! 오히려 방조했던 게다. 필요했으니까. 박정희가 말썽이니까. 아무튼 인드라는 국제유태자본의 한반도가 세계 전략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국제유태자본론을 전개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그리고 경제 발전과 인민의 복지가 목표이다.

   

"데이빗 록펠러가 구상한 삼각위원회는 처음에는 항구적인 성격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약 3년 정도의 한시적 조직이었습니다. 데이빗 록펠러가 삼각위원회를 태동시킨 이유는 원유를 헐값에 사서 폭리를 취하는 록펠러가의 석유 회사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산유국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외교적 결사체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출범하자마자, 그 영향력 때문에, 개별 자본가들의 상충하는 이해를 초월하는 이상적 총자본가로서 기능을 요구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브레진스키는 말합니다.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미국이 극동 지역에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한다.", "중국이 말 그대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리라고 보는 진단은 많은 함정이 있다. 가장 명백한 것은 그러한 진단이 기계적 통계에 의존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이해 관계 또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지리적 요인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고대 중국의 전략가 순자라면 다음과 같이 정식화시켰을 중심 목표의 추구를 촉진할 것이다. 위축된 미국이 지역적 지배국가인 중국을 동맹국으로 필요로 하게 될 정도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으로 강력해진 중국을 자신의 동반자로 필요로 하게 될 정도로 미국의 지역적 힘을 희석화시키는 것." "동북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추축국인 한국 또한 미중 분쟁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한국의 미래는 미일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이 분단되어 있고, 불안정한 북한과 점점 더 부유해지는 남한 사이에 전쟁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한 미군은 반도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재통일 역시 심각한 지정학적 딜레마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와중에 진정한 한일 화해는 어떠한 형태의 한국 통일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더욱 안정적인 지역 구도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둘째 치고, 브레진스키는 극동 아시아의 지정학적 지위를 중시하면서, 주요 파트너로 중국과 일본을 듭니다. 한국은 그 하위의 전술 단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지정학적인 추축국(The Axis Powers)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축국이란 것이 뭡니까. 지난 세계대전에서 연합군과 대립했던 독일, 이태리, 일본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부시의 '악의 축'과 유사한(?) 개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브레진스키, 음모론, 한일연방공화국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467527

   

사다트는 국제유태자본의 지시를 받아 1977년 11월 19일 아랍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에서 평화 계획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78년에는 이스라엘 수상 메나햄 베긴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1979년 3월 26일에는 아랍권 및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집트에는 소련 대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제공되었고, 오늘날 이집트 육군은 M1A1 전차를 비롯한 미국제 무기를 상당히 많이 수입한 국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사다트는 국제유태자본의 말단조직인 이슬람형제단에게 죽음을 당해야 했나. 팔레비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사다트는 팔레비가 축출되면서 팔레비와 강한 연대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을 위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때가 되면 팔레비와 같은 꼴을 당하는구나, 여겼기 때문이다. 망명을 받아준다. 중동사회에서는 거세게 반사다트 움직임이 있었다. 사실은 국제유태자본이 조성한 여론이었을 뿐이다. 호메이니 인기는 이란 혁명 이후가 아니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국제유태자본이 호메이니를 위해 안배한 작품에 불과하다. 사다트가 나름 저항했지만, 결국 나세르처럼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바라크 현 이집트 대통령이 오늘날까지 친미노선을 견지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무바라크가 원자력 정책을 발표하자 부시는 이란 정권에 대한 것과는 달리 쌍수를 들어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중동을 넘어서서 북한이다. 북한이 언제부터 군비 증강을 하기 시작했는가. 1964년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 북한은 예산에 군비를 편성할 여유도 없었다. 다시 말해, 국제유태자본이 김일성 정권의 군사력 증대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64년 이후에 평양 정권이 군사력 강화에 나선다. 1964년은 중요한 해인데, 이 해에 록펠러가 소련으로 간다. 이때 소련은 록펠러와 같은 이를 특명대사로 하는 등 록펠러를 통한 핫라인을 개설해준다면 대환영이라는 극찬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직후 후르시초프는 그가 공언한 소련 농업 경제 성공 대신 실패라는 책임 등을 떠안고 소련 정권에서 제거되었다. 흡사 카터가 북한을 다녀가자 김일성이 제거되는 것과 유사하다. 참고로 1922년 미소 교역위원회의 주된 구성원은 체이스맨해튼은행이었다. 이 은행을 통해 소련의 정유 및 원자재 거래가 이루어졌고, 소련 산업의 상당 부분의 국제 거래는 거의 독점화된 창구를 통해 성사되었다.

   

왜 김일성 정권은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과 발사대를 소련이 아닌 이집트, 그것도 친미정권 사다트에게서 얻어야 했을까. 이 질문을 시작하는 데서 국제유태자본론에 눈을 떠야 한다.

   

오늘날 평양 정권이 반기문 사무총장 일행의 방북마저도 거절하는 마당에서 CIA요원과 스탠포드 교수 일행에 대해서는 방북을 허용하는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서해교전이나 오늘날의 인공위성 발사가 국제유태자본의 지시를 받은 뽀그리 정권의 앵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목적은 MD, PSI, 우주방위구상 등의 군사력 증강이다. 그냥 군사력 증강하면 명분이 서지 않는다. 뽀그리가 나서주어야 한다. 미국, 일본, 한국 언론은 평양 정권을 칭찬해야 한다. 그래야 미국, 일본, 한국 군사력을 키우자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국제유태자본은 신이 난다. 전 세계 무기 교역국으로서 일본, 한국만한 곳이 어디 있던가. 남은 것은 이제 뽀그리에게 주어야할 개평인 게다. 뽀찌인 게다.

   

다만, 이제 한반도에서의 군사 게임은 이것이 끝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이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 햇볕정책을 지지했던 이들은 인민 먹여 살릴 궁리를 하지 않고 무기나 만드나 하면서 김정일에 대한 배신감이 앞선다. 친일파 김대중을 반대했던 이들은 줘봐야 미사일이나 만든다고 비판적이다. 이제 유일한 효과는 오직 친일민주당을 존속시킬 가능성을 조금 높였다는 것뿐이다. 민주노동당이 뽀그리 때문에 입장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민주노동당을 덮어놓고 친북좌파라고 비난할 듯싶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주사파라고 평가받는 지도부도 방북해서 유감을 표명할 정도였다. 시민들은 이를 잘 모른다. 초록이 동색으로만 여길 뿐이다. 물론 이는 국제유태자본과 뽀그리 정권이 노리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은 국제유태자본대로 마지막으로 친일민주당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고, 뽀그리 정권은 한반도 차원에서 자신보다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 출범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이야 친일파 정권이므로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보자면, 하루, 혹은 이틀이면 평양 김정일 침소에 태극기가 휘날릴 수 있다. 5일이면 연합군이 북한 전역을 장악 가능하다. 북한 재래식 무기는 대부분 폐품이다. 국제유태자본의 지원으로 간신히 만든 인공위성일 뿐이다. 해서, 역설적으로 북한 인공위성은 한반도 통일로 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왜? 김정일 업적을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김정일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키는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뇌졸중은 심장마비처럼 중증이다. 5년 이내에 대부분 사망한다고 한다. 뇌졸중 관련 미국 안보 보고서를 중시해야 하는 대목은 물론 국제유태자본 때문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09/04/09 국유본론 2009

2009/04/08 23:14

http://blog.naver.com/miavenus/70045247844

   

   

    

"칼과피:

글 잘 읽었습니다. 질문에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사다트 정권이 친미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배경과 전개보다는 사다트 정권이 북한에 스커드 미사일 기술을 준 증거나 자료가 있냐는 것입니다.

   

   

INDRA:

글 감사드린다.

   

"통일부와 국방백서 등에 따르면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1970년대 중반 중국의 미사일 개발계획에 참여한 시점부터 시작됐다. 1976~81년엔 이집트에서 소련제 스커드-B 미사일 및 발사대를 도입했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6660&yy=2009

   

통일부 사이트(http://www.mnd.go.kr/)에 가서 국방백서를 열람하면 【부록 6】북한의 미사일 개발 경과 및 제원 항목에 "1976.~1981. 소련제 SCUD-B 미사일 및 발사대를 이집트로부터 도입 역설계/개발"이라고 나온다. 국방백서에 북한의 미사일 개발 경과 및 제원 항목이 등장한 것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국방백서부터이며, 이후 격년제로 발간되는 국방백서에 수정 없이 매번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이 정보 소스를 획득한 것은 어디일까.

   

"북한이 탄도미사일개발에서 큰 전환기로 된 것은 1976년 이집트로부터 소련제 스커드미사일을 입수한 때부터였다. 이것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이 군사고문단과 조종사들을 파견해준데 대한 답례로 보내준 것이었다. 그후 1979년부터 1980년 사이에 북한은 이집트와의 미사일개발협력에 합의하고 1981년에는 정식 협정을 맺고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였다. 1983년에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기술협정내용을 경신하였다." (小都元저 "세계의 미사일, 탄도, 순항미사일" 171-173페이지 참조)

http://blog.daum.net/leebywan/15126713

   

현재까지 파악하기로는 재일교포 2세이자 북한군사무기전문가인 김명철 소장이 小都元(오즈 하지메)의 저서를 근거로 국내에 소개한 것이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小都元 저서로 두 권이 검색되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오즈 하지메의 '세계의 미사일, 탄도, 순항미사일'이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313604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313780 

   

김명철의 정치 성향은 '민족주의적 친북'으로 월간 말에도 소개된 바 있다.

   

군사평론가 김명철 서면인터뷰_남-북-미 관계 전망]민족주의적 '친북' 군사평론가 김명철의 동북아 정세 분석 http://ref.daum.net/item/92230

   

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민간에는 민족주의적 친북 입장인 김명철의 소개로 북한 미사일 개발 과정이 알려졌고, 정부 측에는 김대중 정권 때에 국방부가 이 자료에 대한 검증을 한 뒤 국방백서에 공식적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라고 정리가 된다.

   

이보다 더 전문적인 정보가 궁금하다면 국방부나 김명철, 혹은 오즈 하지메에게 직접 문의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아울러 인드라는 일반인이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몇 가지 당대 정세 문제를 국제유태자본론으로 설명한 것이다. 하여, 인드라는 북한 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유태자본론과 전문정보를 결합하면 정확한 정보가 되리라 확신한다.

   

칼과피:

세계를 커튼 뒤에서 조정했고, 빌더버그 등을 조직했으며, 세계대전 중 독일에 투자한 자산을 지키기 위하여 정보부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진 빅터 로스차일드와 그 일파가 70년초 자신의 선조가 미국에 파견했다고 소문난 록펠러의 후손 데이비드 록펠러와 그 일파에게 반항도 못 하고 허무하게 권력을 내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빅터 로스차일드와 그 일파가 기후무기에 심리무기 등도 사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300인 위원회 위에 존재하는 초권력이며, 세계의 정보를 독점하고 배포했던 로스차일드 정보망을 가졌음에도 빅터와 그 일파는 너무도 허무하게 하극상에 패하여 몰락을 하고 마는군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300인 위원회는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싶어했고, 빅터 로스차일드는 거부하고 하극상을 당해야만 했을까요? 또한 소련에선 무슨 변화가 일어났던 것인가요? 아래 링크 글에 보면 70년대 유태 볼셰비키를 반볼셰비키 러시아인이 몰아냈다고 하는데 역시 주장은 있으나 근거가 없군요.

   

시오니스트-볼셰비키-록펠러카르텔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8057&logId=3419167&menuId=43989&from=19000101&to=29991231&listType=2&startPage=1&startLogId=999999999&curPage=0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네요. 인드라님의 견해를 듣고 싶군요.

   

혼란스러운 글....문제의 시국선언문

http://blog.naver.com/arin929?Redirect=Log&logNo=80005743929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북한에 쌀과 비료를 줬습니다만 그 중 비료의 경우는 아래처럼 폭탄제조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하는군요. 당시 정부는 우연인지(?) 비료(식물의 영양의 3대 요소 : 질소, 인, 칼륨) 중 대부분을 질소비료와 복합비료로 북에 보내고 인이나 칼리(칼륨) 비료는 미미하군요. 복합비료는 아래 내용을 보면 외화벌이로 외국에 재판매를 한 듯 보입니다. 게다가 정작 비료를 뿌리면 농작물뿐만 아니라 유해 작물도 같이 번성을 하기에 반드시 농약을 뿌려야 하나 놀랍게도 북한 김정일 정권에 농약은 정부차원에서 간 적이 없군요.

   

요소비료 그 질산암모늄 이야기

http://kr.blog.yahoo.com/peaceinoj/MYBLOG/dist_frame.html?d=http%3A%2F%2Fkr.blog.yahoo.com%2Fpeaceinoj%2F490%3Fm%3Dc%26amp%3Bno%3D490&s=n

   

요소비료 그 잘산암모늄 이야기2

http://kr.blog.yahoo.com/peaceinoj/491

   

南서 지원한 소와 비료, 北 외화벌이로

http://khhong.com/article/view.php?id=khinc_News&no=1317

   

직접 사고원인 질산암모늄이란

http://www.hani.co.kr/section-003100000/2004/04/003100000200404231814257.html

   

                  

   

INDRA:  

칼과피님의 검증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기존의 음모론을 대하는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님이 인용한 글의 출처인 피닉스저널은 이미 음모론계(?)에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피닉스저널을 독특하게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수반아님에 따르면 피닉스저널 자료도 다른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자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인드라 시각이다. 

   

국제유태자본론의 기본 입장은 음모론 역시 그 뿌리가 국제유태자본에서 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유출되었는가. 첫째, 내부 갈등과 권력교체기에 따른 산물이다. 이 경우에는 국제유태자본이 공식적인 통로를 통한다. 가령 베노나 프로젝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나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소련 스파이 혐의 적용이 대표적인 예이다. 둘째, 국제유태자본이 알 수 없는 자신들의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자료를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세상에 유포시키는 것이다. 현재 인드라가 의심하고 있는 자료들은 쑹훙빙의 '화폐전쟁', 시대정신 동영상, 소에지마 다카히코의 '연쇄하는 대폭락' 이다. 인드라가 의심하는 자료들은 이보다 더욱 많지만, 일단 이 세 종류를 국제유태자본이 금융 위기 국면을 더욱 조장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유포시킨 것으로 면밀히 추적중이다. 왜 국제유태자본이 이러한 활동을 펼치는가. 국제유태자본은 지금까지 자신의 적 진영에서도 우두머리가 자기 편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완전한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서, 그를 우두머리에 앉히려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정보를 주어야 하고, 그의 정보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등 고육지책이 필수이다.

   

정리하면, 두 가지 중 어느 경우이건, 세상에 나온 자료를 아무런 의심 없이 전적으로 신뢰할 이유는 없다.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에 전적으로 불신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베노나 프로젝트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베노나 프로젝트와 연결할 수 있는 주장들은 모두 근거가 없었다. 지금까지 근거가 없다 해서 앞으로도 근거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해서, 새로운 자료를 계속 수집하면서, 이를 기존의 자료와 비교, 검토를 통해서 정보를 재구성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응인 게다. 즉, 역정보이든, 무엇이든 정보란 거짓과 사실을 어느 정도의 비율로 섞어야만 정보로 작동하므로 국제유태자본은 어쩔 수 없이 일부 사실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해서, 분석가들은 자료들을 마치 암호 해독처럼 풀어서 사실들만을 추출하여 진실을 밝혀나가야 하는 것이다.

   

피닉스저널은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말까지 십여 년에 걸쳐 각종 음모론을 꾸준히 소개한 저널이다. 그러나'피닉스 저널'은 자료 분류상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것이다. 피닉스 저널이 정부 관련 기관이나 공신력이 있는 저널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자료는 더욱 자료 검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비공식 자료를 검토할 때 어떠한 기준이 요구되는가.

   

첫째, 자료의 출처가 분명한가라는 점이다. 음모론에도 족보가 있기 때문에 이 족보에 대해 검토함이 필요하다. 음모론 족보에 관해서는 운노 히로시의 '음모의 네트워크'가 잘 정리하고 있다. 피닉스저널은 어느 경로로 이 정보를 입수하였는가. 누군가가 먼저 주장한 것인가, 아니면 여러 자료를 모아 피닉스저널이 최초로 발표한 것인가. 피닉스저널 연구가(?)인 수반아님에 따르면 피닉스저널의 하톤은  피닉스에 인용된 모든 사건 및 자료들은 이미 어디선가 다른 출처를 통해 이미 대중에게 공개된 것들을 종합한 것이라고 한다. 가령 피닉스 3권의 절반 이상이 1989년에 나온 빌 쿠퍼의 <비밀정부>를 베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님이 인용한 피닉스저널의 족보는 비터 박사에서 찾아야만 할 듯싶다.

   

"또한 비터 박사의 오디오 테이프 발행은 1982년에 끝났고, 그는 1987년에 죽었으며, 피닉스는 1989년 10월에 첫 권이 나왔읍니다. 첫 권이 나온 것은 1989년이지만 그 몇 년 이전부터 사전 작업이 있었으니, 웬지  비터 박사 바톤을 이어 받아서 피닉스가 나온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별빛달빛님의 게시물에 보면 비터 박사가 크라이스트 마이클 (= 미카엘) 과의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데, 피닉스에서 하톤이 곧 크라이스트 마이클입니다. 나중에 "내가 크라이스트 마이클이다, 놀랐지?" 하고 밝히거든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아웃! http://cafe.naver.com/ijcapital/1653

   

놀랍게도 로스차일드, 록펠러, 시오니스트, 볼세비키와 관련한 구도는 이미 비터박사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당신들은 이제 로스차일드들Rothchilds, 록펠러들Rockefellers, 시오니스트들Zionist/볼쉐비키들Bolsheviks,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러시아 정상에서 그들의 목적 속에 있는 "새로운 기독교 러시아인들new Christian Russians"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http://cafe.naver.com/ijcapital/30

   

그렇다면 비터 박사는 누구인가.

   

"그는 1951년에서 1961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일반 법률사무소를 운영했고, 1952년에는 미 군사 항소 법원의 멤버가 되었으며, 1964년에는 미국 대법원의 멤버가 되었다.  그의 이력의 많은 것이 연방정부에 대항한 것이었고, 그 모두에서 그는 이겼으며 -- 그것은 그를 패배시키기 위한 시도로 기록들을 불태운 다름 아닌 미국 사법부를 포착했던 케이스도 포함한다.  그로 야기된 결정은 새로운 법률을 만들었다(Farley vs U.S., 131 C. Cls. 776 (1955), 127 F. Supp. 562) 1961년, John F. Kennedy는 비터 박사를 서방 세계에서 사장 큰 정부 소유의 은행인 미국 수출입은행의 자문으로 임명했고, 거기서 그는 1967년까지 재임했다.  수출입은행을 떠난 후, 비터 박사는 국제 금융 및 법률 컨설턴트가 되었고, 자이레 공화국에서 민간 국제 사업의 수석 개발자들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사법 사회Judicature Society, 미국의 은행가 클럽the Bankers' Club of America, 런던의 왕실 영연방 사회the Royal Commonwealth society of London, 그리고 미국의 해군 협회의 멤버United States Naval Institute였다.  그는 Who's Who in the East, the Blue Book of London, 그리고 업적을 이룬 2000 인물Men of Achievement(런던)에 이름이 실렸다."

http://cafe.naver.com/ijcapital/30

   

둘째, 당대 사건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위한 것이다. 전주 굉음이 예다. 현상이 있었지만, 이 현상에 대해 기존의 설명으로는 역부족일 때, 음모론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기준으로 음모론은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어떤 현상을 기존의 설명과 부합되거나 일치가 되도록 하고자 보완적 성격이 강조가 되어 혼란을 최소화시키는 데에 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설명을 완전히 부정하여 오히려 혼란을 최대화시키는 데에 있다. 가령 이번 금융위기를 소재로 한 음모론들을 변별한다면, 케인즈주의로 중지를 모아가는 수렴형이 있고, 그 어떤 것으로도 회복 불가능을 말하는 확산 형이 있다.

   

셋째, 극소수만 피상적인 정보를 획득하고 있을 뿐, 대다수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음모론으로 등장하는 경우이다. 가령 냉전체제 당시 소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대중은 거의 없다. 소련에서 살던 일반인도 모르는 일이다. 오직 소련 고위급 관계자와 각국 정보부만이 접근 가능한 정보일 뿐이다. 오늘날 북한 관련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북한 관련 정보는 언제 대중에게 유통이 되는가. 오늘날 북한 관련 정보는 서해교전이 재차 벌어진다거나, 핵무장을 한다거나,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거나 하는 미래에 벌어질 사건에 대한 예측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서, 이러한 음모론이 아무 때나 등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음모론은 대체로 국제유태자본이 일을 벌이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기준으로 검토를 하면, 피닉스저널 글의 원형이 된 비터 박사나 피닉스저널의 글은 국제유태자본 내부권력투쟁인 로스차일드 대 록펠러간의 투쟁에서 록펠러가 승리하고 록펠러 체제로 전환하는 과도기에서 등장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이 록펠러 체제로의 승계 구도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용으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터박사 글을 분석하면 로스차일드 영향력을 볼셰비키로 대체시키고, 록펠러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훌륭한 트릭 장치가 있다. 이는 기존의 냉전체제를 유지시키면서 새로운 체제 전환에 대응하기에는 당대에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인드라 기준에 따르면 대상은 인구의 5% 이내의 층을 대상으로 그들의 체념을 요구할 목적으로 유포시킨다. 이는 헬싱키 프로세스로 냉전체제가 사라진 이후 대립 구도를 미소 대결에서 미국 내부로 돌리려는 기획 하에서 비터 박사와 피닉스저널이 네오콘의 출현을 정당화하는 셈이다.

   

해서, 이러한 변별력을 바탕으로 비터 박사의 주장들과 피닉스저널의 주장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분석해서 재구성하면 보다 진실에 가까운 자료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님의 질문은 상기한 피닉스저널과 북한 미사일을 동시에 하여 둘 간의 관계가 있을까 하는 흥미를 유발한다. 이는 1970년대의 국제정세 변화로 인해 북한이 미사일을 보유한 것이 아닐까 하는 방향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냉전체제와 정통 맑스주의, 혹은 볼세비즘 등 유럽 중심 친소련 구좌파를 고수하려고 했다면, 데이비드 록펠러는 냉전체제 종식과 민족해방운동, 혹은 아나키즘 등 유럽과 아시아를 동등한 관점에서 보려는 반소련 신좌파를 선호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북 주체사상은 신좌파이며, 중국 공산당 노선 역시 신좌파이다. 이집트 역시 나세르까지는 친소련 구좌파 노선이었다면, 사다트, 무바라크에 이르러서는 반소련 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서, 이집트가 1976년에 중국, 북한과 군사협정을 맺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배후에는 국제유태자본의 기획 속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친일파 김대중과 관련한 문건은 오래 전에 보았던 자료이다. 한국에서 이런 자료가 넘치는 사람이 두 명이 있다. 하나는 박정희요, 다른 하나는 김대중이다. 둘 다 인기인이다. 둘 다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드라는 이 자료를 세 가지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국제유태자본이 만든 것, 다른 하나는 친일파 김대중 측의 자작극, 마지막으로는 퇴직 정보요원이 만든 것. 세 번째가 가장 확률이 낮아 1%도 되지 않는다. 정보요원이란 누구보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안다. 이 자료가 등장한 시기가 노무현 탄핵 시기다. 과거 정보요원쯤 했다는 이가 권력이 강성할 때 이러한 자료를 내놓을 리가 없다. 이것이 진짜배기 폭로라면 출처를 문제 삼아 인터넷에서부터 원천봉쇄에 들어갔을 것이다. 첫 번째는 국제유태자본의 작품이다. 그러나 자료가 다소 유치하고 부실한 점이 국제유태자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친일파 김대중 측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역선전 수법이다. 물론 이 수법을 가장 현명하게 쓰고 있는 세력은 국제유태자본으로서 세계의 명작, 시온의정서를 내놓았던 것이다. 친일파 김대중 문건은 시온의정서를 한국 실정에 맞게 모방하려 했으나 그 수준이 매우 열악해서 한심해 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어야 하는 것은 인드라가 볼 때, 노무현 탄핵쇼가 국제유태자본의 작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국제유태자본은 노무현 탄핵쇼가 필요했는데,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대승하기 위해서다. 각 정치세력을 아울러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일개 정파를 넘어서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은 한나라당 내부 일각의 우려를 잠식시키기 위해 이념적인 공세를 준비해야만 했다. 즉, 노무현 탄핵을 주저하는 것은 친일파 김대중에게 포섭되었기 때문이라고 인터넷에서 공격을 펼치면 한나라당 여론 향방이 국제유태자본이 원하는 대로 탄핵으로 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친일파 김대중 측의 자작극이다.

   

이 자료를 인드라가 의심하는 것은 몇 가지 유치한 대목 때문이다. 인드라는 다음과 같은 친일언론 동아의 자료에 더 신빙성을 둔다. 아몰라용님 표현에 따르면, 님이 링크한 기사가 한국적 수준이라면, 친일동아 기사는 헐리웃 워게임 수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링크된 자료도 가공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서, 정보를 파악하는 연습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http://livepoll.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41/200804070500041_6.html

   

이 문건이 유치한 것은 노무현과 정동영 언급 대목이 특히 그렇다. 게다가 통일대통령 김대중 운운은 문건이 자체 모순되고 있음을 알린다. 대남총책이라는 친일파 김대중 지위로 어떻게 감히 김정일보다 격이 높은 통일대통령이 되겠는가^^! 강조하지만, 한국에서 북한 김정일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는 것은 친일파 김대중 때문이 아니라 국제유태자본 때문이다. 그리고 친일파 김대중 영향력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사실은 대부분 국제유태자본의 영향력이다. 노무현 정권 때 친일민주당 인기가 한순간에 5% 이하로 추락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홍업이 망신을 당한 것도 잘 생각을 해보면 된다. 그토록 친일파 김대중이 영향력이 있다면 자기 아들 하나 망신을 당하는 것 막지 못한 데서야 창피한 노릇이 아니던가. 결국 힘은 국제유태자본에게 있다.

   

노무현 임명과 정동영 대선후보 임명은 친일파 김대중 임명처럼 국제유태자본이 한 것이지, 친일파 김대중이 한 것이 아니다. 친일파 김대중은 1970년 대선후보가 될 때부터 이미 국제유태자본이 박정희 이후로 내정한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시기가 문제였을 뿐. 그런 이유로 박정희가 김대중이 대선후보가 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근래 국제유태자본이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부에게 지시하여 한국 어용언론과 친일언론을 동원하여 박정희를 까대는 것은 박정희가 친일파였기 때문이 아니라 로스차일드계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명박 정부와 어용언론 등이 조풍언 무죄사건처럼 친일파 김대중을 적극 보호하고 있다. 해서, 상기한 친일파 김대중 문건은 친일파 김대중이 냉전체제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큰 수혜자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냉전체제가 종식되면 친일파 김대중 영향력이 가장 축소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해진다.

   

끝으로 비료 문제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만 현재까지 북한과 관련한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되는데, 과거 냉전체제에 입각한 음모론은 국제유태자본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가령 인드라는 북한 정권의 달러 위조음모론 이런 것에는 신빙성을 두지 않고 있다. 북한 정권과 대립하는 냉전적 관점은 남북한 지배세력의 기득권을 강화할 뿐이므로, 민주노동당을 죽이고, 한나라당은 물론 친일파 김대중 영향력을 유지시키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인드라는 오바마가 한반도 통일의 주역으로서 노벨평화상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제이 록펠러가 데이비드 록펠러가 하지 못했던 진정한 냉전종식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이 록펠러는 이것만으로도 빅터 로스차일드, 데이비드 록펠러보다 위대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한반도인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이루게 한 국제유태자본에게 영국인보다 더 열정적으로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09/04/19 국유본론 2009

2009/04/19 17:31

http://blog.naver.com/miavenus/70045799023

   

   

   

"칼과피:

'화폐전쟁'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치의 척도이자 등가물로 자리한 금본위 화폐만이 진정한 화폐라 하다가, 미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는 정부 발행 불환지폐인 그린백이 최고라고 합니다. 왜 이런 논리가 가능할까요? 그리고 CDO가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인드라님! 쉽게 설명 좀 부탁합니다.

   

INDRA:

글 고맙습니다. 쑹훙빙이 철학이 결여되어서이다. 철학이 없으면 상황에 치우치고 만다. 화폐가 절대적인 기준일 수가 없다. 해서, 조선에서는 화폐를 유통시키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경제생활에서 근간은 생산과 분업시스템이다. 생산과 분업시스템에 걸맞지 않는다면 그간 아무리 잘 유통이 되어도 화폐 형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 부채담보부증권을 아마 말씀하시는 듯싶다. 일단 부기에서 부채도 자산 항목이라는 정도는 이해하실 듯싶다. 쉬운 설명은 비유가 적당하겠다. 증시에 관리종목이라고 있다. 이 종목 거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위험고수익이다. 대표적인 예가 쌍용차나 하이닉스이다. 이런 것을 거래하는 이유가 부채담보부증권을 하는 이유라고 보시면 된다. 사실 이것이 주식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아시아로 떠나는 배들이 만선이 될 확률이 얼마나 있겠는가. 만선이 되기 전에는 모두 빚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해서, 아홉 실패해도 하나만 성공해도 크게 먹는다는 가정 아래 CDO가 퍼졌다고 보면 된다. 다른 비유로는 금융권간의 보험이라고 봐도 좋다. 위험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해서, 경기가 활황일 경우에는 부도날 일이 드물게 되어 만선이 될 확률이 높아지니 수익률이 높아진다. 반면 근래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처럼 침체할 때는 부도율이 늘고, 침몰될 확률이 높으니 수익률이 극히 저조해지고, 원금을 까먹게 된다. 옵션과 같다. 즉, 장사가 잘 될 때는 열배 장사가 되지만, 장사 안 되면 열배, 백배 손실이 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은 4%이다 국유본론 2009

2009/09/15 04:51 

http://blog.naver.com/miavenus/70069234891

   

   

   

"칼과피:

인드라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계속 됩니다. 님의 설명대로라면 cds와 cdo의 구분이 없습니다. cdo를 통합하면 cds가 된다고 하는데 이걸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쑹훙빙, 위의 이야기를 하다 '화폐전쟁' 결말에 달러 가치 하락이 기정 사실이고 새로운 기축통화가 필요한데 그것이 위안화가 되야한다. 그를 위해 노력하자며 뜬금없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화폐전쟁'? 인터넷에서 떠도는 음모론에 중국을 끼워넣은 것 외에는 별 내용이 없습니다.

   

인드라:

쉽게 가면 된다. 주택 등 자산담보부채권을 증권을 만든 것이 MBS 증권, 이 증권들을 한데 묶은 것이 CDO 부채담보부증권, 이 CDO 중에 악성으로 분류되는 것만을 따로 모아서 만든 게 CDS이다. 비유하면, 전자가 선물이면, 후자가 옵션된다고 보면 되겠다. 더 좋은 비유는 미국 시중은행 부도위험에 처할 때 내놓은 방식 중 하나가 굿뱅크, 배드뱅크를 나누어서 처리한다는 것이 있었다. 이중 배드뱅크를 CDS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방식은 간단하다. 과거 한국에서는 자동차를 할부로 살 때 보증수수료를 물어야했다. 그처럼 신용이 다소 불투명한 대출을 받는 대신 은행은 보증료, 수수료를 챙긴다. 이후 투자은행은 시중은행의 대출채권들을 보증료와 약간의 수수료와 함께 증권을 만들어서 판매한다. 이때 수수료는 시중은행이 수수료 중 상당분을 비용 및 이익으로 제외하였기에 그 크기가 매우 작다. 해서, 대출채권증권들이 매우 많아져야 한다. 더 나아가 JP모건은 이 대출채권증권 중 악성 부문만을 따로 모은다. 아마도 이 경우 시중은행은 돈 떼먹힐 것을 염려해서 수수료 부문을 상당 부분 포기할 것이다. 해서, JP모건은 CDO에 비해 CDS에서 보다 많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 해서, 모건은 수수료를 챙긴 뒤 보증료와 함께 악성증권을 AIG에게 넘긴다. 생명보험회사 유입자금은 국민연금에서 보듯 중단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장기 자금이다. 해서, 생명보험회사는 이 특성을 활용하여 투자에 나선다. 해서, 어지간한 자금 충격에도 견디는 만큼 악성증권이 사고가 날지라도 이를 감당하게 된다. 선순환이 되면 AIG가 떼돈을 벌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나면 AIG 회사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허나, 그만큼 CDS가 CDO에 비해 시장규모가 작다.  해서, 지난 한국 외환 충격 때도 JP모건 측이 한국 측에 CDS 사라고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 CDO가 CDS에 대부분 흡수될 것이라는 설명은 아마 대부분의 모기지 상품이 전부 부실화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말한 것일 게다.

   

쑹훙빙이 위안화 어쩌구 하는 것은 근래 IMF 특별인출권 운운하는 것처럼 그 자신이 국유본 스파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화폐전쟁은 한국에서 유태계열 출판사인 랜덤하우스에서 발간되었다. " 

생필품 3,000개 PPP 지수 VS 기업 3,000개 인드라 지수 국유본론 2009

2009/09/22 17:28

http://blog.naver.com/miavenus/70069960364

   

   

   

"칼과피:

   

안녕하세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 정열도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 글을 보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는 부분이 있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2017년에 도달하면 중국 공산당 일당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이 농후' 주장에 대한 근거. 둘째, '한반도 통일이 2010년대에 이루어질 확률이 높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근거. 셋째, '김정일이 맛이 갔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보다 급진적인 해결 방식을 원하다.' 는 주장 중 '급진적인 해결 방식'이 무엇인지? 암살, 군부 쿠데타, 혹은 북폭을 이야기하는 것인지요. 그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INDRA:

글 감사드린다. 이웃이 아닌 경우에는 덧글이 아닌 메일이나 쪽지로 질문을 주기를 바란다. 하여, 블로그 운영 원칙상 삭제를 했다. 다만, 좋은 질문이므로 특별히 답변을 드린다.

   

첫째, '2017년에 도달하면 중국 공산당 일당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이 농후' 주장에 대한 근거.

   

1. 경제성장 절정기와 함께 찾아올 경제 전망의 부정성은 정치 불안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Doubling time

http://en.wikipedia.org/wiki/Doubling_time

   

중국은 79년 개혁, 개방을 한 뒤 매년 10%대의 성장을 해왔다. 하여, 규모가 두 배가 되는 기간을 구하는 더블 타임 공식에서 보면, 10%일 때 7년이 걸리고, 7%일 때 10년이 걸린다. 그간 중국 경제성장률을 검토하면, 7년짜리 세 번과 10년짜리 한 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중국이 2010년 말, 2011년 초에 조정을 마무리한다고 해도 경제성장률이 7% 이상일 것이며, 그 이후는 다시 10%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이 예상할 수 있다.

   

중국 GDP 그래프 (95~07) 

http://junyeob.egloos.com/41758

   

현재 각종 경기순환 사이클로 봐도, 한국과 중국은 모두 2010년대에 조정기를 마무리한 뒤 주변 여건만 나쁘지 않다면 고성장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며, 2015년경에는 최고조에 이를 전망이다. 그러나 중국 인구 감소는 2030년에나 시작하지만, 2015년 이후로는 생산 활동 인구 둔화로 인하여 중국 내수를 견인할 부동산 경기가 하락할 전망이며, 수출 여건도 2010년 후반에는 세계 경제 전망이 어둡기에 좋지 않을 것이다. 경제성장의 절정기와 함께 찾아올 경제 전망의 하락 전망의 공존은 정치 불안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2. The Economist The World in 2007에 따르면, 중국 1인당 GDP는 2280달러이다.

   

나는 그간 일인당 국민소득이 육천 불 수준이면 중산층이 정치개혁을 요구한다고 주장해 온  바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87년 직선제 시위다.

   

"첫 번째 단계는 1950년 초에서 1957년 말까지로 인구 증가의 첫 번째 절정기이다. 인구가 5억 4167만 명에서 6억 4653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평균 매년 1311만 명이 증가했고, 년 평균 증가율은 22‰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58년 초에서 1961년 말까지로 인구 증가 저조기이다. 인구가 6억4653만 명에서 6억 5850만 명으로 증가했고, 평균 매년 302만 명이 증가했으며, 연평균 증가율은 5‰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62년 초에서 1973년 말까지로 인구 증가의 두 번째 절정기이다. 인구가 6억 5850만 명에서 8억 9143만 명으로 증가했고, 평균 매년 1940만 명이 증가했으며, 연평균 증가율은 26‰에 달했다. 12년간 증가한 인구수는 당시의 소련이나 미국의 인구수에 상당했다. 네 번째 단계는 1974년 초에서 1990년 7월 1일까지로, 인구 증가율 하강기이다. 인구가 8억 9143만 명에서 11억 3368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매년 평균 1300만 명이 증가했고, 연평균 증가율은 13.7‰이었다."

   

중국의 인구변화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13&dir_id=130501&eid=UD1dHSrRvog7Ql9COMFIjp/JLax2xNGM&qb=wd+xuSDAzrG4uq/IrQ==&pid=fe09Xdoi5T8ssscsP%2BNsss--227444&sid=SR0gLyIUHUkAAHH@BFU

   

오늘날 중국은 인구가 13억에 육박하고, 연평균 0.63%인 약 팔백여 만 명이 늘어나는 인구증가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The Economist The World in 2007에 따르면, 중국 1인당 GDP는 2280달러이다. 향후 GDP 성장률이 보수적으로 7%로 잡아도 십년 후에는 중국 1인당 GDP는 4500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한미일 빅맥지수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4&dir_id=41301&eid=lYvbXnJWWQonJYL1pcjSQF45u9pR9zfX&qb=wd+xuSC68rjGwfa89g==&pid=fe0qXdoi5T0ssalCopKsss--252033&sid=SR0gLyIUHUkAAHH@BFU

   

그리고 GDP외에 GNI로 국민 체감 경제 수준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알기 쉽게 구매력평가지수, 특히 빅맥지수만으로 비교한다. 빅맥지수로 보면 한중간에는 두 배 차이다. 그런데 구매력평가지수로는 보통 세배로 친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중국의 1인당 GDP는 현재 한국의 6900달러쯤 된다. 십년 뒤에는 14,000달러쯤 된다는 것이다.

   

한국 소비자물가 기준으로 현 시점에서 1987년과 물가와 비교하면, 대체로 두 배 정도 차이가 있다. 해서, 십년쯤 뒤에는 한국의 1987년과 같은 상황이 중국에서도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3. 중국 정치는 양당제로 변화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향후 십 년 뒤쯤에는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안문 사태 때와는 다르다. 그 때에는 소수의 학생, 지식인만이 개입하였을 뿐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국제유태자본이 개입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위가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향후 십 년 뒤쯤에 정치 소요가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일어났기에 파장이 매우 깊을 것이다.

   

해서, 중국 정치는 선제적으로 정치 안정을 이루기 위해 양당제를 가시화할 수 있다. 즉,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한 쪽이 튀어나와 야당이 되는 것이다. 일본 자민당이 90년대에 실험했던 방식을 고려하면 된다. 

   

참고로 현재에도 북경, 천진, 상해와 같은 도시 경제 수준은 중국 평균보다 약 세 배가 높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이 향후 십년 뒤에 정치적 주역이 될 공산이 크다.

   

둘째, '한반도 통일이 2010년대에 이루어질 확률이 높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근거.

   

1. 각종 경제전망과 지표가 2010년대에 한반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제유태자본:세계경제전망, 김정일 사망,오바마 암살,아웅산 테러,미국 쇠고기

http://blog.naver.com/miavenus/70036998626

   

2. CIA보고서나 여러 보고서가 2010년대의 변화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CIA 보고서

http://jmf.or.kr/jmf/technote/read.cgi?board=mis_nation&y_number=131&nnew=1

   

한미동맹 미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

http://weekly.hankooki.com/lpage/politic/200602/wk2006022213172137050.htm 

   

3. 김정일 건강이상설로 인해 2010년대 변화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후계구도가 정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권력 삼대 계승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해서, 지금 이건희도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김정일이 맛이 갔다. 해서, 국제유태자본은 보다 급진적인 해결 방식을 원하다.' 는 주장 중 '급진적인 해결 방식'이 무엇인지?

   

말한 대로 내가 처음 예상한 것은 오바마와 김정일의 세계적인 이벤트 한 방으로 한반도 문제를 급속히 안정화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몇 년간 개혁, 개방으로 이끌다가 2010년대 중후반에 통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나온 이상 시기가 좀 더 앞당겨 지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시기가 앞당겨진다 함은 그만큼 대책이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짧은 시기 내에 많은 변화를 오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책적인 면을 말한 것이므로 암살 같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 리포트 2008/11/15 국유본론 2008 

2008/11/15 16:33

http://blog.naver.com/miavenus/70037392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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