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쪽발왜놈: 파시스트 쪽발지태놈현빠가 개씨발색희 쪽발왕을 우상화하는 이유 국유본론 중간결산

2013/03/02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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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과 쪽발왜놈: 파시스트 쪽발지태놈현빠가 개씨발색희 쪽발왕을 우상화하는 이유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3/02

 

 

참고글 :

국제유태자본과 왜놈 : 인월리 국제유태자본론 중간 결산국유본론 중간결산

2013/02/17 15:20

http://blog.naver.com/miavenus/70159531814

"쪽발 도요타가 병쉰색희 오오우치 가문 어쩌구라고?

 

한국의 삼성 격인 일본의 미쓰이는 노비네파이다. 도요타는 도레이, 도시바처럼 미쓰이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미쓰이 방계 회사로 분류할 수 있다. 전후 해체 후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국유본이 기묘한 소유 분산을 시도해서 알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인데, 향후 한국 재벌도 국유본의 지시에 따라 일본 재벌과 같이 지금처럼 뚜렷한 정체성보다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이행할 것으로 본다.

 

헌데, 도요타와 관련해서는 병쉰 전설이 나온다. 도요타가 오오우치 가문에서 나왔다는 게다. 중세 전국시대 때 가문이 몰락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오오우치 후손이 도요타로 성을 바꾸었다는 게다. 신기한 건, 이런 일이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당장 그것 믿을만한 것이냐, 근거는 뭐냐 하고 나왔을 것인데, 그냥 믿는다는 게다.

 

왜일까. 국유본이 암묵적으로 소문을 확산시키고, 쪽발찌라시들이 기사로까지 취급해서일까. 하긴, 요즘은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도 언론으로 취급하는 웃기는 세상이니까. 아무튼 쪽발왕 계보도 날조하는 판에 귀족 가문 날조야 누워서 떡먹기인데, 뭘 믿고 자시고 할 것이 있냐. 일제 강점 시기에는 자식이 쪽발민통당 국회의원이자 독립군 고문하던 일제 헌병이 쪽발이화를 강요했다면, 요즘은 쪽발찌라시들이 쪽발이화를 기사화하니 이것참 웃기는 세상이 아닐 수 없는 게다.

 

병쉰 쪽발이 색희가 오오우치가 백제계라고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에 가서 돈 기부하고 조상의 예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걸 또 기사화하는 쪽발 찌라시는 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병쉰색희들아, 백제 수도는 경기도랑 충청도에 있었어. 전라도에 수도가 있었던 후백제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자 본관이 충북 황간인 황간 견씨인 견훤이 세운 나라야. 전라도랑 아무 상관이 없어. 캐병쉰색희들아 ㅋ. 한국에 병쉰 쪽발이 색희들 굉장히 많다. 이런 개씨발색희들이 술을 먹으면 꼭 꼬장 부리는 색희들이다. 하는 짓이 젖 같으면서 자기는 뭐, 백제의 후손이라나, 신라의 후손이라나, 가야의 후손이라나, 개씨발 근본이 천하디 천한 노예놈의 쪽바리 색희들! 이런 색희들 정신상태가 썩어빠지니 찾을 것이라고는 개뻥뿐인 국유본 고대사밖에 없는 것이다. 국유본 고대사에 자빠져서 평생 빠져나오지 말아라. 니 애비, 쪽발이가 기뻐하겠다.

 

과거에는 성씨란 명분이었다. 배고파 일어난 천민 진승 오광이 뜬금없이 왕조의 후예를 내세운 예에서 보듯 이는 동서고금에 흔한 일이다. 고려 왕건도 보자. 중국 황제의 후손이라는데, 검증된 바는 전혀 없다.

 

인드라는 이 대목에서 일본 성씨와 귀족 가문이 대부분 막부 시대에 날조한 것임을 강조하겠다.

 

왜? 중국이야 그 허풍이 하늘을 찔러 유태인 아해들과 쌍벽을 이루니 논외로 치자. 서양만 봐도 근대에 이르러서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황제 후손이라고 뻥치는 색희들이나 러시아 황제 후손이라고 헛지랄하는 애색희들이 많았다. 문제는 한국도 그렇거든? 한국 성씨를 보면, 대개 왕의 성씨이다. 헌데, 왕족의 후예가 이리 많다는 게 말이 되나? 안 된다. 해서, 한국 성씨를 보면, 고려 후기, 특히 몽골 침략기와 무신 정권 때 많이 탄생했다. 시조가 아니라 중시조라는 이름 하에! 중시조가 뭐냐. 쇠퇴한 가문을 부활시켜 그 공을 인정받아 새로 가문을 열거나 계파를 형성한 조상을 말한다. 헌데, 왜 하필 몽골 침략기와 무신 정권 때 많이 탄생했냐 이것이다!

 

첫째, 사회 혼란기에는 기득권이 무너지면서 귀족 가문이 많이 몰락하기 마련이다.

둘째, 사회 혼란기여서 성씨 조작이 쉬웠다.

셋째, 몽골 정권이나 무신 정권에서 공을 세웠든, 매관매직했건, 평민이 관리가 되었는데, 간판이 필요했던 게다.

 

마찬가지로 도요타 병쉰 전설이 시작하는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 한국으로 치면 무신 정권 시기이다. 상기한 세 조건이 모두 충족시키는 시기인 게다.

 

한마디로 알 게 뭐냐 되겠다. 쪽발이들 잘 하는 짓 있잖아. 일단 우기고, 관련 자료 없애고, 매수하면서 시간 끌며 끝까지 버티기. 쪽발민통당 애들이 쪽발 애비들 짓거리를 책상머리 교육 잘 받아서 하는 짓거리잖아. 사기치는 것 잘 모르면 원숭이 나라 가서 가르침 받고 오잖아.

 

정리하자. 일단 조작이다. 믿을 게 못 된다. 기록이라는 것이 조선왕조실록 정도되면 믿을만하다. 서기가 목숨을 걸고 썼으니까. 그외에 일본서기라든가 하는 것을 비롯해서 일본 역사책을 믿는다는 건 쪽발이 애들도 속으로 좀 뜨끔할 일인 게다.

 

인드라 생각은 간단하다. 일본이 전통을 중시한다, 어쩐다, 가문이 유럽 가문보다 오래 되었네 하는 짓거리를 한다. 유럽 애들도 예예 하면서 속으로는 웃고 있다. 서구 문화는 기록 문화다. 중간에 조작이 있어도 워낙 여기저기서 기록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이며, 검증도 가능하다. 반면 쪽발이는? 암 것도 없다.

 

"헤이안 시대에 두각을 드러낸 성씨들 중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미나모토(源), 다이라(平)이 있는데 후지와라는 청기(靑旗), 타치바나는 황색(黃旗), 미나모토는 백기(白旗), 다이라는 적기(赤旗)로 이 군기(軍旗)들을 토대로 말하자면 후지와라는 신라계, 타치바나는 백제계, 미나모토는 가야계, 다이라는 고구려계라는 얘기였다. 특히 후지와라는 신라 김씨, 타치바나는 백제 부여씨, 미나모토는 가야 김씨, 다이라는 고구려 고씨."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375853&qb=64+E7L+g6rCA7JmAIOqzoOq1rOugpOqzh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2MKeU5Y7vNssbqlfQKssc--037633&sid=T2Nv73NVY08AAA-YDws

이것 다 구라라는 것이 인드라 생각이다. 저들이 실제 고구려계인지, 신라계인지, 가야계인지, 백제계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저 구라까는 색희들이 하는 이야기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신라계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후발주자인 백제계가 이후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것 무슨 말이냐.

 

인드라 생각은? 오래 전 초기 기마 민족이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북방에서 도래했겠다. 이들을 신라계라 하자. 허나, 이들이 신라계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말 타고 동해안을 달리다 끝을 보니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을 수도 있으니까. 또한, 이들이 왕국을 세운 건 아니다. 기껏해야 마을 몇 개 연합한 부족연맹체 정도였을 뿐이다.

 

중요한 건, 물 건너 왔다니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중국에서 건너오면 와~ 하는 것이 있지 않나. 하여, 원효가 중국 유학가려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어?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물 먹고 오면 한 수 접어주잖아?

 

해서, 신라계라고 하면 폼이 났던 시절이다. 허나, 신라계 호칭하던 호시절이 지나간다. 왜? 신라가 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 볼 일이 없는 망한 왕족, 멸문한 귀족 출신을 대어야 속일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구나 아는 왕족 후예 출신이라고 뻥치다가 탄로나면 무슨 개쪽인가. 해서, 그 다음부터 가야계가 나오고, 백제계가 나오는 것이다.

 

왜? 망했으니까. 망했으니까 속이기 쉬운 게다. 어차피 모르는 일이다. 천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잡고 난 오늘부터 고구려계다 하면 고구려계요, 백제계요 하면 백제계인 게다. 정권 잡았는데 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말에 토달겠나?

 

결국 구라인 게다.

 

마치 청나라 시조가 애신각라 신라 후손이라는 전설과도 같은 재미있는 뻥인 게다.

 

예서, 문제는 무엇인가.

 

청나라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고 믿는 순간, 당신은 청나라가 남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청황실에 애착감이 든다. 나아가 만주 고토 회복에 열을 올리게 된다. 원래 내 땅이니까.

 

그처럼 자신이 백제계요, 가야계요 하던 쪽발이들이 어느 순간, 한반도 고토 회복에 나서는 게다. 정말 한반도를 정복하면 그간 가지고 놀던 한반도 쪽발이 색희들을 멍청하다고 다 숙청하겠지만^^! 죽어라! 캐병쉰 반도 쪽발이 색희들아. 니 애비가 아들딸년이 쪽발민통당 국회의원인 일본 헌병으로 독립군 고문했던 천백배로 고문당하다 원자폭탄에 뒈져라, 나가싸대기들아~

 

인드라는 지난 백 년 동안 일이 병쉰색희에 불과한 쪽발이들 머리에서 나왔다고 보지 않는다. 한반도를 강점하고, 만주 괴뢰국가를 세우고, 한단고기를 조작하고, 애신각라설을 유포하는 짓거리를 백년대계로 거침없이 해낼 수 있는 천재적인 머리를 지닌 부류는 현재까지 국유본이 유일하다. 지난 백 년간 쪽발이 뒤에는 국유본이 있었던 것이다. 쪽발이는 시키는 대로 했던 병쉰색희들이었던 게다.

 

 

예서, 쪽발왕 이야기를 해보자.

 

보통 만세일계 조작 비판하면 백이면 백 고대사 조작 운운이다. 허나, 인드라는 이에 회의적이다. 고대사란 건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해석이 대부분이다. 유물 하나 없이 그저 조작 책에 나온 문구 하나 가지고 소설을 써대는 게 사실 재야 고대사 연구가들의 하나같은 개수작이다. 한국이건, 일본이건, 열 중 아홉은 사기꾼이 아닐까 싶다.

 

인드라 접근 방식은 다르다. 기록이란 상황의 산물. 특히 쪽발왕 왕권이 크게 흔들릴 때 조작도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서, 쪽발 왕권이 크게 흔들린 시기의 쪽발왕 기록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검토하자.

 

막부 시대 쪽발왕 기록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매우 궁핍했다는 것이다. 관혼상제란 가장 기본적인 행사인데 생활이 어려워 행사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즉위식도 연기하고, 장례식도 치루지 못할 지경이다.

 

둘째, 쪽발왕 계보에 특이한 것이 있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습이 있다. 선왕이 제위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지내는 것이다. 여기까지이면 조선 태조 이성계 예가 있고, 서양, 중국에도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인가.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는 선왕이 대부분 권력을 잃었을 때이다. 견훤처럼 자식들이 견훤을 구금한다든가 할 때 발생하는 쿠테타 상황인 게다.

 

헌데, 쪽발왕 기록을 보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선왕이 왕위를 뜬금없이 물려준 후 뒤에서 왕을 배후조종한다는 게다. 이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일어난다. 이게 말이 되나? 그럴 거면, 선왕이 다시 왕에 올라 진두지휘할 일이지 웃기는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헌데, 이런 일이 고려에서 한번 있었다.

 

"고려 제 26대 왕(재위 : 1298 ; 1308~1313). 휘는 장(璋), 초휘는 원(願), 몽골의 휘는 이지르부카[益知禮普化], 자는 중앙(仲), 시호는 충선(忠宣). 충렬왕(忠烈王)의 장남. 어머니는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 공주(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 :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 1277년(충렬왕 3)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다음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원도(원도(元都) : 북경(北京))에서 혼사를 거행하였는데 앞서 서원후 영(西原候瑛)ㆍ홍문계(洪文系)ㆍ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은 내총(內寵)을 투기(妬忌) 하는 자(者)들의 소치(所致)라 하고 당시 부왕(부왕(父王) :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무비(무비(無比) : 백야단(伯也丹))와 그의 관련자인 여러 사람을 귀양, 혹은 죽이거나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 이양의 뜻을 원나라네 전하였다.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자 권문ㆍ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官制)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 공주와 왕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음모사건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ㆍ충선 양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 중상의 결과로 보겠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416

헌데,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쪽발왕에게 비일비재했다는 건, 그만큼 쪽발왕 실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왕위에 오른 왕이 젊은 나이에 하나같이 일찍 뒈지고, 상왕이 왕들을 여러 번 교체시키고, 그때마다 배후조종했다는 것이 이치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해서,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쪽발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는 이야기인 게다.

 

하면, 권력은? 당연히 막부에게 있었던 것이다. 선왕은 이미 뒈졌던 게다. 헌데, 기록에서 보면, 막부는 아무런 힘이 없는 듯이 보이고, 상왕이 일처리를 다 한 것처럼 나온다. 이 정도면 상왕이 정권 잡아서 막부에게도 대들만도 하건만^^! 하면? 무엇? 그렇다. 왕비의 수렴첨정인 게다. 이는 유럽, 중국,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왕비가 당대 막부 가문의 딸이라면!!! 이는 쪽바리가 조선을 강점한 후 조선 왕조에 행했던 것과 수법과 같은 게다. 조선 왕조에 쪽발이 왕비나 공주를 들이고 왕의 후예들을 수족으로 움직이려 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 몽골 역시도 고려 침략 시에 행했던 수법이기도 하다.

 

 

셋, 오늘날에도 여왕 문제가 이슈가 될 정도이다. 헌데, 이 시기에 여왕이 둘이나 등장한다. 대가 끊겨 양자를 들이고, 여왕을 모신다?

 

참고로 인드라는 여왕에 불만이 없다. 오히려 긍정적이다. 영국이나 네덜란드를 보면 여왕 재임 시에 국운이 크게 상승했다. 인드라는 신라 여왕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여왕 즉위시에는 당대 사회가 그만큼 위기라는 반증이다. 허나, 여왕 이후의 시대란 변혁의 시대여서 사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해서, 인드라는 한반도에도 하루바삐 여왕의 시대가 오길 고대하는 편이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 결론적으로 만세일계란 걸 잘 알 도리가 없고, 검증할 방법이 없는 고대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고대사 논란은 조선과 만주 침략을 위한 국유본의 명분 쌓기용이라고 보는 편이다. 국유본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이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사에서 고구려부터 논하기 시작하는 등 국유본 지시를 받아 만주 침략을 역사 조작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인드라는 현재 보고 있다.

 

해서, 고대사보다 무신 정권 시기 쪽발왕 기록을 검토하더라도 만세일계는 허구에 불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반도 쪽바리들이 하나같이 고대사에만 몰입하고 무신 정권 시기에는 침묵하다가 메이지 유신 때부터 쪽발왕을 언급하는 것은, 국유본에게 세뇌당했거나 알아서 기는 행태가 아닌가 보는 것이다.

 

캐병쉰새뀌들아! 잘 들어봐라. 영국왕이 독일에서 건너갔지? 오랜 옛날에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가기도 했지? 헌데, 그것이 지금 독일인과 무슨 상관이냐. 이런 것 좀 생각하면서 살자, 직전까지 쪽바리에게 세뇌될 뻔한 분들아~!

 

왜 반도 쪽바리 사기꾼 자칭 재야 역사가 병쉰색희들은 막부 시대를 건너뛸까?

 

이 대목만 들입다파면 만세일계란 게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 수 있음에도 왜 침묵하는 것일까.

 

결론은, 오늘날 쪽발 정은과 비슷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쪽발 정은 권력이 강한 듯보인다. 중국도, 미국도 쪽발 정은 권력에 농락당하는 듯이 보인다. 허나, 이것이 바로 국유본의 눈속임인 게다. 실제 권력은 국유본이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스위스에 유학보내 국유본 세상을 보게 한 쪽발 정은을 내세우는 쪽바리 프로젝트인 게다. 가면 정권! 쪽발 정은 가면을 벗기면 권력의 실체, 국유본이 나온다.

 

그럼에도 오늘날 쪽바리 색희들, 쪽발민통당, 쪽발통진당, 쪽발찌라시들은 뭐라 하나? 그저 쪽발 정은이 신비롭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처럼 이 쪽바리 색희들은 쪽발 정은과 쪽발왕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왜? 신비로우니까. 씨발 색희들, 네 넘들 꿈 속에서 쪽발민통당 이미경 애비처럼 일제 헌병인 놈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이 네 넘들을 백만 배로 고문할 것이다.

 

- 쪽바리 니 애비가 대대로 대한민국을 망치라고 밥상물림 교육을 시키든? 개쪽바리 색희들아!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허세욱과 박정희의 이름으로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 정은 총살로 2012년을 통일 원년으로!

진달래 혁명 만세!

 

하면, 쪽바리 프로젝트란 국유본의 항상적인 프로그램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국유본이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정책을 결정한 뒤부터 쪽바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해서, 국유본은 러일전쟁 막후에서 일본을 미친 듯이 지원하고, 조선 강점을 획책했던 것이다.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라고 본다. 인드라는 31운동 배후에도 국유본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이 시기부터 국유본이 일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이 시기부터 태평양 전쟁을 위한 떡고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후, 625 전쟁으로 다시 국유본은 일본을 찾는다. 625 전쟁 전까지 일본 경제는 말 그대로 남한 경제와 같았다. 망했던 것이다. 독일처럼 마셜자금도 없었다. 헌데, 쪽발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한 방에 경제 회복의 토대를 닦았으니 일본으로서는 애비가 쪽발이인 김일성이 대를 이어 쪽발왕에게 충성한다고 기특하게 여길 것이다.

 

아, 캐병쉰 색끼, 김일성, 통일되어 네 놈 미이라를 볼 수 있다면, 니 넘 좆을 엿가락처럼 늘여뜨려서 대한민국 시민 모두가 그 좆을 다 가위로 짤라버리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는 행사를 가질 것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저주한다, 쪽발 김일성! 네 놈의 후손이란 남김없이 구족을 멸할 것이니!

 

허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쪽바리 프로젝트는 중단한 듯이 보였다.

 

박정희는 쪽바리를 부를 때 반드시 왜넘이라고 했다. 또한, 한국에 두 혁명이 있었으니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행한 동학 혁명이요, 이것이 정신 혁명이라면, 자신의 혁명, 516 혁명은, 쪽바리에 대항한 경제 혁명이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오늘날 도요타 리콜, 올림푸스 분식회계, 엘피다 파산, 혼다 리콜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 기업들이 선전하는 것을 보면서 국립묘지에 있는 박정희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 같다. 반면, 쪽발 일성과 쪽발 정일, 쪽발 돼중과 쪽발 놈현은 쪽발이들과 동병상련이 되어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지금도 니 애비가 쪽바리인 색희들이 날뛰고 있다.

 

부디 전두환 개색희랑 김영삼 씹색희가 개과천선에서 죽기 전에 사람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두환이나 김영삼 개색희들이 쪽발 돼중이나 쪽발 놈현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나. 개새끼들.

 

중요한 건, 국유본이다. 결국 쪽바리 프로젝트를 중지하는가, 작동하는가는 국유본이지, 쪽발이에게는 권한이 없다. 예서, 아무리 쪽바리 욕한다고 해봐야 감정 해소 차원밖에 안 되는 소모적인 일일 수 있다.

 

해서, 국유본에게 쪽바리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프로젝트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국유본은 국유본 언론을 통해 중국 문제를 연이어 거론하면서 중국이냐, 미워도 쪽발이냐 하는 식으로 여론 몰이를 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중국이든, 쪽바리든, 배후에는 국유본이다. 쪽발 정은 미사일 기술과 자금 누가 대주나? 국유본이다.

 

해서, 국유본이 지금 쪽바리 프로젝트에 많이 공을 들였는데, 이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국유본은 쪽바리를 시켜 동아시아 역사를 재구성하도록 지시했는가.

 

이는 지금까지 인월리를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지금도 쪽바리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있는가.

 

해양을 통해 대륙을 봉쇄하는 전략이다.

 

허나, 실제로는 대륙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중국을 발전시킬 것이다.

 

단, 중국을 지속적으로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는 떡밥이 필요한데, 그것이 한반도인 게다.

 

해서, 길은 네 가지다.

 

하나, 한반도가 이왕 떡밥이라면 보다 큰 떡밥이 되어야 한다는 게다.

 

둘, 한반도가 떡밥에서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이러자면, 일본이 침몰하는 대신 한국이 그간 일본이 맡았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 한국인이 주동하여 능동적으로 아시아 연방에 나서는 길이다.

 

넷, 전략전술 닥치고 그냥 국유본에 들입다 반대하면 된다.

 

인드라는 현재 입장에서 첫번째와 네번째에 부정적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를 한류천하 프로젝트라고 규정한다.

 

 

에이쿄 1년 3월 9일 미나모토노 요시노부는 궁에서 존경받았고 그후 그는 쇼군 아사카가 요시노리라 알려졌다.

에이쿄 5년 6월(1433)중국의 황제가 요시노리에게 중국인들이 쇼군에게 일본왕이라는 직위를 주는 서한을 보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D%95%98%EB%82%98%EC%A1%B0%EB%85%B8_%EC%B2%9C%ED%99%A9

그의 즉위 직후에 오닌의 난이 발발하였다. 사원, 신사, 그리고 왕실 가족들의 저택이 불타 버렸다. 황실의 재정은 말라 버렸고 황궁은 쇠퇴하였다. 전임 천황 고코마쓰 천황이 1433년 죽을 때까지 고하나조노는 다애리의 전직 수장의 직책을 지녔다. 왕궁의 실제 권력은 그의 숙부에의해 전횡되었다. 그는 사원 섭정으로 알려진 관행을 계속하였다. 이후 고하나조노는 천황 직접 통치를 그의 양위 시까지 30년간 즐겼다. 그리고 그후 섭정 천황 간접 통치의 전통적인 형태가 다시 회복되었다. 고쓰치미카도의 치세의 연장된 지속은 36년 2개월간 계속되었고 메이지 천황 이전의 역사적인 기간에 어떤 주권보다 길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황궁의 고대 의식을 회복하려는 열의는 없었다.

1500년 10월 21일 천황이 사망하였다. 그의 계승자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장례식을 위한 자금이 부족하였고 죽은 천황의 시신은 수개월간 황실 창고에 방치되었다가 황궁으로 기부가 있은 후에 장례가 관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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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치세는 아시카가 쇼군 시대의 황실 권위의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다이에이 5년 1월 1일(1525) 왕궁의 모든 기념식이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원할 자금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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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은 매우 빈곤하였기 때문에 기여를 위한 전국적인 호소가 나갔다. 호조씨, 우치씨, 이마가와씨 그리고 센고쿠 시대의 다른 다이묘 씨족으로 부터의 기여 덕분에 천황은 10년후 공식적인 대관식을 수행할 수 있었다. 황실의 가난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천황은 그의 글을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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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일본 천황구게들은 이미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상태로, 오기마치 천황은 센고쿠 다이묘모리 모토나리가 금을 헌상할 때까지 3년 동안 즉위식도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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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 후양성 천황)은 일본의 107대 천황(1571년12월 31일 ~ 1617년9월 25일, 제위 : 1586.12.17~1611.5.9)이었다. 고요제이 천황의 치세기간 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1592) 이때 고요제이는 거의 허수아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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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고요제이 천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611년 (게이초 16년) 아버지에게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중 공가중제법도(1613년 제정), 금중병공가제법도(1615년 제정) 등이 제정되어 조정의 행동 전반이 쿄토에 설치된 쇼시다이(所司代)를 통해서 막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가즈코와의 약혼기간 중 궁녀 요쓰쓰지 요쓰코를 총애하여 남매를 두었던 일이 발각되어, 한때 가즈코의 입궁 취소가 고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쓰코 모자의 출궁 및 관련자 처벌 등으로 사과가 받아들여져 겐나 6년(1620년)에 도쿠가와 가즈코가 입궁, 마사코로 개명하고 후궁이 된다. 1627년자의 사건, 아무런 품계도 없던 가스가노 쓰보네의 천황 배알 등으로 천황의 권위를 실추시킨 막부의 행동을 참지 못한 천황은 1629년11월 8일, 둘째 딸 오키코 내친왕(후의 메이쇼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양위 이후에도 4명의 자식인 메이쇼 천황, 고코묘 천황, 고사이 천황, 레이겐 천황의 섭정을 맡아 실권을 휘둘렀지만, 도후쿠몬인이 천황의 뒤에서 이를 옹호했기 때문에 막부 역시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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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쇼 천황 (明正天皇, 명정 천황, 1624년-1696년)은 일본의 제109대 천황 (재위 1629년-1643년)이다.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외손녀이다.

 

쇼토쿠 천황 이래 859년만의 여성천황으로 7세의 나이로 즉위, 치세중에는 아버지 고미즈노오 천황의 섭정을 받아 조정에서의 실권은 가질 수 없었다. 1643년 {겐나 20년) 이복남동생 고코묘 천황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상황이 되어 출가. 1696년 (겐로쿠 9년)에 사망. 향년 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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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년 (간에이 19년)에 태자로 임명되어, 11세의 나이로 메이쇼 천황의 양위를 받아 천황위에 올랐다. 1654년 (조오 3년), 천연두로 인해 22세에 사망. 갑작스런 사망 때문에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망 전해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대신들과 막내 아우인 아테노미야(高貴宮: 훗날의 레이겐 천황)를 양자로 삼는 것을 상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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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쿠라마치 천황(後町天皇, 후앵정 천황, 1740년-1813년)은 일본의 제117대 천황(재위 1762년-1770년)이다. 현재는 일본의 마지막 여자 천황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조선 통신사(1764년)가 교토를 경유하던 시기의 천황이었다. 제115대 천황인 사쿠라마치 천황의 제2황녀이다. 어머니는 니조 요시타다의 딸로 사쿠라마치 천황의 여어인 니조 이에코이다. 언니는 모리코 내친왕(盛子親王)이며, 어머니가 다른 동생으로 제116대 천황인 모모조노 천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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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모조노 천황(일본어: 後桃園天皇, 후도원 천황, 1758년8월 5일 ~ 1779년12월 16일)은 일본의 제118대 천황(1771년5월 23일 ~ 1779년12월 16일)이다. 이름은 히데히토(英仁)였다. 17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2년 후에 1771년 그의 고모인 고사쿠라마치 천황이 그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몸이 허약했던 탓에 1779년에 2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딸 한명을 낳았을 뿐 아들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여 고카쿠 천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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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카쿠 천황(일본어: 光格天皇 (こうかくてんのう) 고카쿠덴노[*], 광격 천황, 1771년~1817년3월 22일)은 제119대 일본 천황이다. 그는 1780년에서 181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휘(諱)는 처음에는 모로히토(師仁)였고, 후에 도모히토(兼仁)로 고쳤다. 어릴적 명칭은 사치노미야(祐宮)였다. 그는 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閑院宮典仁親王)의 6번째 아들로 히가시야마 천황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오에 이와시로(大江磐代)이다. 안에이 8년 11월 8일(1779년12월 15일)에 위독한 상태였던 고모모조노 천황의 양자가 되어 황태자로 정해졌다. (실제로는 고모모조노 천황은 이미 붕어한 상태였고, 황위가 공석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붕어를 발표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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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천황은 외래의 것을 배척하고 개국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막부쪽에서 미·일 수호 통상조약의 칙허를 요구하였을 때 이를 거절하였고, 훗날 다이로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이를 강제로 추진함으로써 막부와 궁정쪽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이에 황실과 막부를 통합하려는 공무합체 운동이 일어나 로주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및 여러 친막부파 공경들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和宮親子親王)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원래 천황은 이 결혼에 반대했으나 친막부파 공경들의 설득으로 결국 혼인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이에모치의 요절로 4년 만에 종료되었고, 막부와 존왕양이파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하여 황국주의가 자리잡아 독살설은 일본 사회에서 금기가 되었지만 안중근(安重根)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하라구치 기요시가 간호기록 등을 토대로 천연두에 의해 자연사했다고 주장하여 두 주장이 크게 맞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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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7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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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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