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9 07:18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447659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9

   

대개 음모론자들은 페이비언 협회의 애니 베산트(Annie Besant)의 뉴에이지 성향, 버나드 쇼와 윌리엄 모리스의 진보 좌파 성향, 영국 노동당과의 관련을 언급하면서 페이비언 협회를 비판한다. 허나, 여기에는 뭔가 빠져 있는 것이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것은 페이비언 협회가 영국의 이익, 구체적으로 후기 제국주의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예서, 자타가 공인하는 고대사 전문  김태식 기자의 기사를 보자.

   

 "김태식 기자 =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라는 말에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엇보다 '페이비언'은 도대체 뭐냐는 물음이 앞선다. 'Fabian'이라는 말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유래했다. 이는 그 자체가 일반명사이기도 해서 라틴어로 '지연자'(delayer)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되, 일단 때가 되면 사정없이 내리치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에 주목해 버나드 쇼를 비롯한 잉글랜드 일부 지식인이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를 창립한 것이 1884년.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협회의 위상은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회원 7천명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협회는 영국 노동당과는 별개의 단체이면서도 노동당의 단체회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국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이비언 협회'의 강령을 돌아보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침 여기에 이 협회가 표방한 사회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1급 자료가 우리 앞에 섰다. 협회 창립 5년 뒤인 1889년 협회 주요 멤버 7명이 필진으로 참여해 발간한 'Fabian Essays in Socialism'이 그것이다. 최근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가 '페이비언 사회주의'(아카넷)라는 제목을 달아 '대우학술총서' 중 하나로 선보인 이 논설집 집필자는 쇼를 필두로 시드니 웨브, 윌리엄 클라크, 시드니 올리비에, 그레이엄 월러스, 애니 베즌트, 허버트 블랜드. 각각 1편씩 썼으나 쇼만 2편을 기고했다. 여기에 나타난 사회주의는 마르크시즘과는 판이하다. 예컨대 낭만적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는 윌리엄 모리스가 "노동자에게 혁명 외엔 희망이 없다"고 하자, 쇼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자에게는 진정 희망이 없다"고 맞받아 쳤다. 때려 부수고 뒤엎어버리는 파국주의(catastrophism)를 페이비언주의는 거부했다. 대신 이들은 철저한 합헌주의(constitutionalism)와 점진성의 불가피성(inevitablity)을 강조했다.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그러나 기회가 되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달성하겠다는 사회주의론을 주창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쇼의 표현을 빌리면 "바리케이드에 등을 돌리고 영웅적인 패배를 맛보기보다 지루한 성공을 택하기로 결정"한 페이비언주의자들은 그 일환으로 침투(permeation) 전략을 채택했다. 독자적 정당을 창당하는 것보다 기존 정당이나 단체에 침투해 그들을 설득해 사회주의자로 전향시킴으로써 그들의 개혁정책을 실현시켜 나간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페이비언주의는 노동계급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다. 가뜩이나 독설로 이름 높은 쇼는 노동계급에 대해 "늘 티격태격하는 도둑떼와 다름 없이 방약무도하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파벌과 당파로 분산돼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페이비언주의는 거의 필연적으로 중산층과 국가 혹은 제국주의의 이익을 중시하고 옹호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쇼가 페이비언들이 주창하는 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주의를 제창하면서도 '무정부주의, 폭력, 혼돈'을 혐오한 페이비언주의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역자인 고 교수에 의하면 영국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 구출했다고 평가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sid1=&oid=001&aid=0001276456

   

책을 안 읽어도 좋다. 인드라도 읽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다. 기회가 오면 읽을 것이다. 이처럼 읽으면 좋지만 바쁜 생활인이라면 인월리만 읽자~!

   

페이비언 협회를 처음 들어본 이들이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본 이들은 지금까지의 설명과는 좀 다른 페이비언 협회에 대한 접근법에 의아해할 것이다. 그것이 인월리이다. 인월리가 기존 이론이나 기존 음모론대로 이야기하던가. 길없는 길을 가는 것이 인월리를 읽는 맛이겠다.

   

페이비언 협회가 왜 이 시기에 등장하였는가.

   

첫째,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를 원했다.

   

   

   

세실 로즈이다.

   

세실 로즈는 누구인가.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이 로즈 장학생인데, 그 로즈가 남아공의 학살자요 제국주의자였던 세실 로즈이다. 세실 로즈는 1853년에 태어나 평범하게 살았는데, 영국 공기가 산업화의 결과로 악취를 풍겨 폐가 썩어갔다. 해서, 요양할 생각으로 17세에 남아공에 갔는데, 그때 마침 남아공에서 다이아몬드 광산 붐이 일어나 삼촌에게 돈을 빌려 사업한 결과 대박이 난 것이다. 이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세실 로즈는 돌연 영국으로 돌아와 옥스퍼드에서 두 학기를 듣는데, 그때 운명의 남자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존 러스킨이다. 로스차일드 투자를 받는 조건이 존 러스킨 과목 수강이었던 것일까. 그는 존 러스킨에게 큰 감명을 받는다. 하고, 본래의 목적이었던 로스차일드 투자를 받아서 남아공 다이아몬드 사업을 90% 이상 석권했던 것이다. 37세에 케이프 총독까지 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짐바브웨)라는 나라까지 만들었다.

   

이때, 영국인에게 쫓겨 남아공 내륙으로 들어간 네덜란드계 이민자인 농사꾼 보어인들이 세운 여러 공화국 중 하나인 트랜스발 공화국에서 초대형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 것이다. 이에 가만 있을 세실 로즈인가. 역시 강도 도둑넘다웠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강탈할 작정으로 존 러스킨 사상을 바탕으로 한 로스차일드 방식을 써먹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로스차일드가 수에즈 운하를 어떻게 해처먹었나. 자신이 장악한 영국 언론을 동원해서 연일 수에즈 운하 공사장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선전을 해댄 그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수에즈 운하 공사를 질질 끌게 해서 이집트와 프랑스 사업자들을 빚더미에 오르게 한 뒤에 먹은 것이다.

   

하면, 왜 존 러스킨 사상인가. 다음 단락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간단 요약하면, 영국인은 미개인들을 문명화시키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세실 로즈는 다이아몬드 광산 노동자들을 선동해서 파업을 일으킨 뒤, 혼란에 빠진 다이아몬드 광산을 강탈하려 했는데,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1차 보어 전쟁이다. 1차 보어전쟁은 1880년 12월 16일부터 1881년 3월 23일까지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헌데, 놀랍게도 보어인이 승리했다. 그 결과,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 독립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에 로스차일드가 세실 로즈더러 한심하다고 질책을 하면서도 워낙 큰 건이니 후일 일으킨 것이 2차 보어전쟁인 것이다. 역사에는 로스차일드가 세실 로즈의 무리한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보어전쟁을 만류했다고 나온다 ㅋㅋㅋ 그런 로스차일드와 오펜하이머 가문이 드비어스 다이아몬드 회사를 날름 삼킨 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예서, 로스차일드가 중심인 국유본은 왜 영국군이 패하는가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영국군은 패했는가.

   

영국군이 처음 패한 것이 아니다. 미국과의 독립 전쟁과 그 이후 미영 전쟁에서도 패했다. 또한, 1830년대에 있었던 아프간 전쟁에서도 패했다. 무엇보다 아편 전쟁에서도 영국군이 패한 것은 아니지만, 광저우 삼원리 투쟁이 영국군을 당혹시켰다. 영국군은 승승장구하며 광저우로 진격하였다. 헌데, 갑자기 비가 엄청 내리는 바람에 총을 못 쓰게 되었다. 사정을 눈치챈 광저우 삼원리 농민 수만 명이 원시적인 전쟁 도구인 낫과 망치를 들고서 포위하니 영국군은 졸지에 전멸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영국군은 청나라에 긴급하게 제안을 하고, 이에 청은 수락한다. 해서, 영국군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청이 무장한 인민의 게릴라전이 두려워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 청을 장악한 관료들이 문제였다. 전투 결과로 인해 자신들이 문책을 받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가령 바쿠 유전지대에서 로스차일드 회사에서 알바를 하는 등 국유본의 스파이로 동료 혁명가들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받았던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직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대패했는데, 이로 인해 스탈린이 트로츠키 비판을 받아 스탈린 최대 정치 위기에 빠졌었다. 이때, 국유본이 지원해서인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탈린은 이후 카틴 숲의 학살을 자행하면서 보복을 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책임있는 영국 정보부 자리에 있으면서 이 사건을 덮었다. 이때 얼마나 스탈린이 잔혹하게 폴란드인들을 죽였는지 그 사진들이 공산주의의 만행이라면서 지금도 인터넷 사진으로 돌아다닌다. 정말 잔인하게 죽였다. 스탈린의 예처럼 전투 실패는 정치 생명을 크게 위협받게 되는 사건이다. 해서, 청나라 관료는 영국군 화평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국군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영국군이 당대 청나라 실정을 소상히 알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을 자극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의 고든 장군이라고 불린 영국의 고든 장군은

19세기에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무렵 영국의 제국주의 팽창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알마흐디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싸운

수단의 민족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군 포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찰스 죠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1833-1885)은

열아홉 살 때부터 공병대 장교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하고 영국이 싸운 크리미아 전쟁에서

무모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용감성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고든은 이후로 영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고든의 주활동 무대는 바로 중국이었어요.

이 무렵 중국은 아편 전쟁 이후로 영국의 침탈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태였고,

중국 남부에서는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세워서 중국의

지배세력과 외국의 침략 세력에 맞서고 있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 1856년 애로우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중국 관리들이 중국인 해적을 체포하기 위해 애로우호(the Arrow)라는 배에 올라간 일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관리들이 배에 게양되어 있던

영국 국기 유니온 잭을 끌어내렸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트집잡아서 배상금과 사과문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서 1860년에는 중국에 군대를 보내서 북경을 점령했어요.

때로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애로우호 전쟁에

고든은 자원해서 참전했어요.

북경 점령에 참가한 고든은 중국 황제의 여름 궁전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중국 남쪽에서는 청조와 외세에 맞서 일어난

태평청국군이 상해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고든은 태평천국군으로부터 상해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고든은 Ever-Victory Army,

다시 말해서 상승군(常勝軍) 사령관이 됩니다.

상승군은 제국주의 세력과 청조 관리들이 만든

반란진압 부대인데, 고위장교는

외국인이고 병사들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상승군의 병력은 3만 5천명 정도였지만,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가 증기선으로

이동해 다녀서 커다란 기동성을 발휘했습니다.

고든은 이 상승군을 이끌고 1년 반 동안

중국 대륙을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태평천국군을 용감하게 무찌르죠.

태평천국을 분쇄하는 데 상승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청나라 황제는 태평천국 반란군을 처치해준

고든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벼슬을 내렸어요.

   

고든은 얼마 뒤에 영국에 귀환했는데,

곧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언론은 고든에게

"중국의 고든"(Chinese Gordon)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영웅시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고든 장군은

이집트 지배층의 부탁으로 나일강 하류

지방으로 가서 노예 무역을 근절하는 데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수단에서 몇 년간 총독 자리에 있었던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럴 즈음 수단에서는 알마흐디(Al-Mahdi)라는

인물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알마흐디는 원래 무하마드 아흐마드(Muhammad Ahmad, 1840-1885)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흐디는 "신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는데,

원래는 현세의 타락을 끝장내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를 받는 종교지도자에게

붙여지던 칭호였습니다.

전통적인 봉건 지배층과 새로 진출한 영국인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수단의 민초들이

마흐디가 와서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전설에 한 가닥 희망을 품는

상황이 충분히 상상 가능하죠.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알마흐디"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나타나게 됩니다.

아랍어에서 알(Al)이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Al-Mahdi다'고 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그 마흐디다'가 되는 것이었더랬습니다.

이런 마흐디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1881년에 스스로를 마흐디로

칭한 무하마드 아흐마드였습니다.

아흐마드는 성전(聖戰)을 벌여서 외국 침략자들을

쫓아버리자고 호소했고, 이 아흐마드를 중심으로 뭉쳐봉기를

한 반란군은 꽤 큰 세력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조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아흐메디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이슬람 신학자가 되어서 가난한 농민과

어부들과 어울리면서

이슬람교를 전도하다가,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보게 되었고

어떻게든 영국인들을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흐디가 이끄는 반란군은 처음에는 300명을 조금 넘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초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은 마흐디군을 진압하려고 만 명이 넘는

최정예 부대를 파견했지만, 이미 4만 명을 헤아리게 된

마흐디군은 게릴라전과 정면 대결을 적절히 구사했고,

오히려 1883년에는 힉스(Hicks)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기까지 했습니다.

마흐디군이 승리한 배후에는 수단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작용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기세가 오른 마흐디군은 1885년에 수단의 서울인 하르툼(Khartoum)

까지 포위했습니다.

이 때 하르툼에는 고든 장군이 있었죠.

고든은 마흐디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마흐디는

고든에게 수도승이 입는 두루마기 옷을 보냈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그만두고 수도승처럼 선행을 쌓으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고든은 항복을 하지 않았고,

마흐디군은 드디어 하르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고든은 한 달 동안 근근히 버티면서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1885년 1월에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 마흐디군이 하르툼을 점령하게 됩니다.

고든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마흐디군 병사에게 잡혀

창에 찔려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맙니다.

"중국의 고든"도 수단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마흐디는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던 도중에 병에 걸려

고든이 죽은 그 해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 후계자들이 마흐디의 뜻을 이어받아

제국주의 세력과 싸웠습니다만,

14년 뒤에 수단은 결국 다시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고든과 마흐디의 대결은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습니다.

챨튼 헤스턴(Chalton Heston)이 고든 장군 역을 맡았었죠.

지금 헤스턴은 미국 총기협회 회장으로 있고,

미국 우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팽창의 전성기였던

19세기 후반기 동시대를 살았던 고든과 알마흐디는

각각 제국주의 세력과 그에 맞선 식민지의 저항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http://kr.blog.yahoo.com/zetleeplus/280

   

영국의 적은, 국유본의 적은 장교와 병사 할 것없이 함께 목숨을 바쳐 투쟁했다. 반면, 국유본은 영국에서 돈놀이하고, 국유본의 하수인인 장교만 열심히 싸울 뿐이다.

   

이 시기 영국군 사정은 어떠한가.

   

육군이야 말할 필요없이 장교만 영국인이고, 병사들은 대개 현지에서 뽑은 자들이거나 용병이었다. 미국 독립 전쟁이나 이후 미영 전쟁에서도 동원한 보병 병사들은 대개 독일 용병들이었다. 동인도회사 병력 대부분은 인도인이었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인이다. 앞선 전략 전술과 보급, 무기 체계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군은 아니었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국 해군 병사들 생활이란 끔찍했다. 오늘날 새우잡이 배를 생각하면 된다. 해서, 워낙 지원자가 없다 보니 영국 해군이 만든 계책이 무엇이었나. 첫째, 미국 상선을 공격해서 상선 선원을 항해 조례 위반죄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포로 취급한 뒤 노예로 부리는 것이었다. 둘째, 스코틀랜드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길거리를 다니는 스코틀랜드 청년들을 무작정 끌어다가 배에 실어서 선원으로 만들었다. 셋째, 이것이 압권인데, 대영제국 수도 런던은 1850년대 인구 250만을 자랑하던 초대형 도시였다. 하여, 늘 과잉 인구가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가 부랑자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서 군에 보내는 것이다~!

   

문제는 명확하다.

   

왜 영국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던가.

   

용병이다.

하면, 왜 영국군은 용병에 의존해야 하는가.

   

영국 제국주의는 국유본만 잘 사는 이념이기 때문이기에.

   

대안은 없는가.

   

존 러스킨이다.

페이비언 협회이다.

   

파비언 막시무스와 당대 영국 사정은 정반대인데 왜 페이비언 막시무스 이름을 따서 페이비언 협회인가?  당대 영국군이 처한 상황은 한니발이 이끌던 카르타고군과 똑같았다.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에 맞서 막시무스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한니발 보급선을 끊으면서 게릴라 전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대목을 생생하게 보려면, 로마군 위주여서 비판을 받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쪽발귀족학교 학습원 출신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 좋다. 쪽발 학습원 출신이기에 읽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적을 알아야 하니까. 인류 특급 전범 개쪽발왕에 대한 단호한 척결 의지를 가슴에 품고, 적의 책을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

   

영국군이 아프간에서, 광저우 삼원리에서, 남아공 트랜스발에서, 수단 하르툼에서 패배한 것은, 상대가 모두 파비우스 막시무스처럼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해서, 페이비언 협회인 것이다.

   

왜? 국유본은 대중적 제국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후기 제국주의이다. 국유본만 제국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국가와 미국과 러시아와 일본도 제국주의를 할 뿐만 아니라 영국 시민도, 노동자도, 농민도, 빈민도 제국주의를 하자는 것이 페이비언 협회의 진정한 목표였던 것이다.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

   

국유본은 민족해방투쟁마저도 국유본을 위한 도구로 삼은 것이다.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국유본은

유태인 프로이트가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을 존경하듯

카르타고인을 자신들의 진정한 조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2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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