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5 : 케네디 암살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1 05:05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61226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5 : 케네디 암살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0

   

1789년에 뉴욕시에서 태머니 협회가 탄생한다. 태머니는 독립전쟁 이후 퇴역군인들이 조직한 공제조합이다. 이때 주목할 점은 퇴역군인이다. 왜인가.

   

   

로스차일드와 관련이 있는 헤센 카셀 용병 때문이다. 헤센 카셀 용병은 7년 전쟁에 이어 미국 독립 전쟁에도 영국을 위해 17,000명이 싸웠다. 이는 헤센 카셀 백작이 영국 조지 2세 딸과 결혼한 이후 자신이 보유한 용병을 주로 영국을 위해 제공했기 때문이다. 1769년, 로스차일드는 헤센카셀 백작 아들 빌헬름공의 궁정 어용상인이 되었지만, 별 영향력이 없었다. 정보 부족으로 2008년에 인월리를 쓸 때에는 이를 근거로 로스차일드가 미국 독립 투쟁에 간여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시기에는 로스차일드가 햇병아리에 불과해서 정책에 아무런 관여도 할 수 없을 지위였다. 게다가 이 시기는 빌헬름 아버지 헤센 카셀 백작의 시대였다.  해서, 로스차일드는 미국 독립은 물론 프랑스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할 지위가 아니었다.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820년대 금융 공황 때부터이다. 이 인위적인 금융 공황을 일으킨 배후가 로스차일드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1785년 헤센 카셀 백작이 죽고, 빌헬름공이 헤센 카셀 백작 작위를 계승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서히 로스차일드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빌헬름 신임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빌헬름공 재정 담당은 칼 프리드리히 부데루스(Karl Friedrich Buderus)였기 때문이다. 부데루스는 빌헬름의 가정교사였다 신임을 받아 수석 재정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헌데, 부데루스의 고민은 권력이 있으나 돈이 없었다. 월급이 맡은 일에 비해 작은 데다 고속 승진한 까닭에 궁정에서 외톨이였다. 로스차일드는 공무원 부데루스의 고민을 간파하고, 그의 충직한 부하가 되었던 것이다. 하여, 1802년, 빌헬름이 숙부인 덴마크 국왕에게 돈을 꾸어주어야 했는데, 친척이라 떼먹힐 가능성이 커서 부데루스와 상의하여 상업차관으로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헌데, 상업차관인 만큼 명의가 빌헬름 이름이어서는 곤란하니, 내세운 대리인이 로스차일드였다. 이 큰 거래에서 부데루스는 부데루스대로,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대로 빌헬름 종자돈으로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빌헬름의 절대 신임을 받은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 빌헬름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나폴레옹이 빌헬름 재산을 장악하려고 했을 때였다. 이때, 부데루스의 명으로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빌헬름 재산을 숨기고 있었는데, 나폴레옹 군대가 아무리 모진 고문을 해도 로스차일드는 죽기를 각오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해서, 성공적으로 돈 관리를 한 덕분에 로스차일드는 빌헬름의 일등 공신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명박이 태국 공사에서 금고를 지켜 정주영 눈에 들었던 스토리와 같은 게다.  

   

   

   

예서, 하센 카셀 용병들은 어떤 이들인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른 시기, 남부 독일은 천육백 만에서 육백 만으로 인구가 격감할 정도로 페스트에 이어 오랜 전쟁 탓에 농지가 황폐화되어 지을 땅이 없어 농민은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귀족도 상속권을 지닌 자만 계승할 뿐, 나머지는 기사가 되어야 했듯, 땅을 나누다가 더 나눌 땅조차 없게 되자 생존을 위해 농민이 택한 방식이 장자상속제였다. 장자는 고향에 남아 농사를 계속 짓되, 나머지 형제는 이농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용병이 되어 스위스 용병과 맞서 싸웠다. 왜냐하면, 스위스 용병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명성을 유지한 유럽 최고의 용병이어서 주로 가톨릭 국가를 위해 싸웠기에, 교황파에 맞선 국왕파들은 대체 용병으로 독일 용병을 택한 것이었다. 이들 독일 용병이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군 삼만 용병 중 절반이 넘는 만 칠천 명이 투입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 측은 이들 용병 실력을 잘 알아 매우 두려워하였다.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스위스 용병과 달리 오갈 데가 없어서 도덕성에서 자유로웠던(?) 란츠크네이트 용병이었기에 두려웠던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은 친영 온건파와 독립 과격파로 분열되어 초기에는 중도파가 친영 온건파에 기울여져서 독립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최대의 자치권을 얻어내는 정도였다. 허나, 영국 왕이 무슨 까닭인지 미국 측에게 일방적으로 왕과 신하간의 관계를 끊어버려 온건파 입지를 최대한 축소시키고, 과격 독립파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는 오늘날 이란 정치와 비교하면 된다. 이란은 개혁온건파가 정권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고, 인기도 있었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미국은 시종일관 이란을 내몰아 강경파가 잡게 만든다.  팔레비를 축출하고 국유본 스파이, 호메이니를 모셔오는 정치공작을 벌여서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게 만드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해서, 강경파가 정권을 잡은 이란은 전쟁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최근에도 이란 - 이스라엘 핵전쟁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기 브레진스키 정치 공작을 떠올린다면, 여기에는 국제유태자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독립 과격파 최대 현안은 용병 대처였으며, 이에 따라 나온 대안이 용병 회유책이었다. 즉, 투항하면 토지를 약속했던 것이다. 당시 용병의 꿈은 토지였다. 해서, 전쟁 중, 혹은 전쟁 직후, 상당수가 미국에 남았던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 보통 말하는 독일 가톨릭계 이주민 주류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전쟁 후 대체로 버지니아 서부, 오늘날 웨스트버지니아 등으로 자작농으로 나갔다. 이들은 내심 전쟁 중립파였거나 친영파였는데, 이유는 당시 영국왕이 독일계 왕이었기 때문에 독립전쟁 가담자는 극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들은 대부분 흑인 노예 없이 자영농을 하였기에 이후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핵심거점이 된 남부 버지니아주 부농과 달리 북부에 정치적으로 기울어져 버지니아주에서 웨스트버지니아주로 분리독립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들이 드라마 '초원의 빛'에 나오는 자작농 이미지와 가장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루터 종교개혁파 신앙이고, 정치적으로는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공화당 지지자들이었다.

   

흑인 노예를 강간해서 클로텔을 낳은 후 나 몰라라 했던 아편농장주 토머스 제퍼슨이 장자상속권을 폐지했다 어쩐다 자랑질을 하는데 까는 소리이다. 농토가 부족해서 생존을 위해 나온 제도가 장자상속권인 만큼 미국에서는 애초에 의미가 없는 제도였다. 오히려 이 당시 여전히 중요한 쟁점은 유럽 이주민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백인 계약노예제가 잠시 활성화되었던 이유가 미국에 가서 조금만 고생하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다느니 하는 쌩구라를 쳤기 때문인데 막상 다들 가서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걸려 대다수가 죽는 등 그 소문이 유럽으로 퍼져서 종교적 이유로 정말 죽을 각오로 가는 것이 아니면 미국행을 다들 기피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1850년대까지 영국 런던 부랑자들을 군에 입대시키거나 아니면 미국에 보내든가 했던 것이다. 해서, 등장한 것이 흑인 노예 활성화 대책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하나하나 까다 보면, 도대체 위대한 자유주의자이니, 가장 강력한 혁명가이니 하는 역겨운 수식어로 칭송하는 제퍼슨을 평가하는 촘스키가 국유본 간첩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촘스키에 관한 3대 의혹은 그의 보잘 것 없는 경력으로 어떻게 교수가 되었고, 하필 군 지원을 받았는가 한다는 점, 존 콜먼의 국제유태자본 하수인 명단으로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 예를 봐도 왜 미국 역사를 이상하게 평가하고,  삼각위원회에 대해 높이 평가하느냐 하는 점이다.  

   

아무튼 퇴역 군인 대책은 로마 제국 군대 이후로 언제나 큰 관심사였다. 로마제국은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군인으로 복무했을 뿐더러 일정 기간 군인으로 일하면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로마 시민권이란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하면 이민자에게 시민권을 주는 제도로 이어진 것이다.  퇴역 군인 대책 핵심은 물론 정착할 수 있는 자금 지원이었다.  

   

   

   

헌데, 세이스 반란에서 보듯 당시 막 독립한 미국 정부는 대책이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 독립으로 인해 그간 영국 정부가 맡아야 했던 식민지 예산을 몽땅 다 미국 신정부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미국 독립으로 인해 속으로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이스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다. 허나, 전쟁 후에 빈농으로 전락한 세이스는 과도한 인두세에 항의하여 농민반란의 선봉에 선다. 하여, 어제의 독립투사, 애덤스 대통령이 철저한 부자의 편이 되어 세이즈를 핍박했던 것이다. 세이즈의 반란은 철저하게 진압당한다. 허나, 세이즈 반란의 영향으로 또 다른 극과 극의 만남으로 역설적으로 연방파의 입김이 우세하여 주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제어하게 하는 미국 헌법이 등장한다.

   

   

   

마치 쪽발 놈현 정권 때 찢어죽일 지주 조병갑의 후손이 고위직을 역임케 하는 등 쪽바리들이 쪽발 놈현 정권 최고위직에 있으면서, 농민, 노동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등 민심을 잃자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처럼 한국 민중이 분노하여 떨쳐 일어난 것처럼 세이스가 나선 것이다. 허나, 국유본 언론은 이를 철저하게 은폐시켰다. 쪽발 놈현이 죽었을 때, 상당수 인민은 쪽발 놈현이 죽었다고 잘 죽었다고 죽을 넘 죽었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허나, 뉴라이트 네이버 등 포털부터 시작해서 공중파 방송, 친일 조중동이 하루 종일 쪽발 놈현 찬양만 보여주니 이삼일만에 한국인 대다수가 세뇌당했던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의 힘인 것이다. 하루 종일 쪽발 찬양에 나서면 인민 모두가 쪽바리가 되고, 자신도 모르게 일본 지진에 성금을 보내기 마련인 것이다. 지진 피해로 터키나 중국에도 사상자가 났는데, 왜 일본에만 유독 지진 성금이었던가. 그것이 국유본 미디어의 힘이라는 아직도 모르는가? 다만, 인드라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국유본은 인드라가 다시 쪽발 노빠들이 나서주기를 원하나? 하고 분석해서 다음 날 뉴스에 쪽발 노빠들, 아직 안 죽었어, 이런 뉴스 내보낼 가능성이 크다^!^ 국유본아, 이거 웃기잖아. 쪽발 노빠 정치인들이 FTA 지지하고 나서는 모양새가 너무 웃기잖아~! 통일은 아직도 멀었건만. 이럴 때, 인드라라도 나서서 씹어주어야 쪽발 노빠 색희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발광할 것 아니겠어? ㅎㅎㅎ.

   

   

   

   

아무튼 태머니 협회의 결성은 언제든 무장이 가능한 퇴역군인에 대한 관리에서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태머니 협회는 퇴역군인의 혁명성과 긍정성을 고취시키려는 목적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퇴역군인의 혁명성과 긍정성을 제거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라는 점이다. 

   

하면, 왜 이름이 태머니인가. 태머니 협회는 17세기 인디언 추장 태머니에서 유래한다. 태머니를 Temane, Tamenand, Taminent, Tameny 등으로 불렀다. 태머니는 윌리암 펜과 인디언과 백인이 공존하는 평화 조약을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해서, 추장 태머니는 서양인에게 '자애롭고 현명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서부개척사란 계속 이주해오는 유럽 이민자들을 인디언이 있는 서부 땅으로 내모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해서, 태머니란 이름을 지었다면, 최소한 태머니 협회는 인디언과의 평화 공존에 힘쓰고, 인디언을 강제 축출하는 정책에는 반대하는 것이어야 했다. 헌데, 실상은 어떠한가. 

   

   

   

체로키족이라고 있었다. 이들은 고종의 대한제국처럼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신문도 만드는 등 서양인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이들과의 계약을 위반한다. 보통 선거권 확대와 연방은행의 사유화를 거부해서 프리메이슨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나오는 잭슨 대통령은 1830년 인디언 강제 이주법을 만들어 인디언을 서부로 추방했다. 인디언들은 이후 버팔로와 함께 약 삼백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매우 우습고도 슬픈 사실은, 태머니파가 이런 잭슨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섰다는 점이다.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어찌 생각하는가. 세계가 과연 도덕적이라고 여기는가. 아니면 철저한 위선과 기만으로 점철된 파렴치한 세계라고 여기는가. 

   

그처럼 겉보기 이름이 진보좌파 단체라고 해서 노동자를 위한다고 농민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국유본 입김이 들어간 진보좌파 단체만 살아남는다. 해서, 국유본이 지시하면 진보좌파 단체 이름으로 얼마든지 노동자 인민을 학살하는 것이 진보좌파의 본질이다. 이는 역사를 보면 금방 확인이 된다.  당장 평양 정권만 봐도 1990년대에 수백 만 인민을 굶어죽이지 않았나? 보수우파 단체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우파이든, 진보좌파이든 두 단체가 존속하는 이유는 국유본의 민중 통제가 목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국유본 세상에는 진보좌파도 없고, 보수우파도 없다. 국유본 민중 통제에서 벗어나면 로스차일드 - 비스마르크 연합이 1871년 파리 콤뮨의 노동자들을 학살한 사건이 반복할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바쿠 유전이나 남아공 다이아몬드 광산처럼 이익이 있을 때에만, 파업 투쟁과 민족해방투쟁, 러일전쟁과 러시아, 쿠바, 중국 혁명을 지원한다.

   

그렇다면, 퇴역군인 단체에 불과한 태머니 협회가 왜 중요한가.

   

   

   

미국 정치사에서 태머니 협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보듯, 뉴욕은 유럽 이주민이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나는 공간이었다. 유럽 이주민이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 중 하나가 태머니 협회 찌라시였다. 하면, 왜 이주민이 중요한가. 이주민 한 표가 태머니 협회의 정치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태머니 협회가 이주민 정착을 지원하면, 이주민은 태머니 협회를 지지하는 것이다. 게다가 서부 개척이 일단락이 되자 태머니 협회는 뉴욕을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즉, 소방 자경대를 만들어서 자기 편이 아닌 지역에 일부러 불을 저지른 뒤 소방대를 출동시켜 물건을 터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또한, 뉴욕시장 등을 맡아 뉴욕의 온갖 비리에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명분으로는 이주민 정착, 인디언과의 평화, 민주화, 노동자 권리 보장을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온갖 이권에 개입해서 비리를 저질렀던 것이다. 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르면, 태머니파는 당대 언론들의 표적이었을 만큼 악명을 떨친다.

   

이때, 뉴욕이 왜 중요한가. 지정학적으로 뉴욕은 북 잉글랜드와 남 버지니아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다. 해서, 미국 독립 전쟁 때도 핵심 전략 거점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뉴욕은 북 잉글랜드 공화당과 남 버지니아 노예민주당의 판세를 결정하는 캐스팅보드 역할을 했다. 뉴욕에서 승리한 당파가 정권을 잡는다는 말이 과한 말이 아니었다. 하면, 이런 뉴욕을 지배한 정파가 누구였나. 태머니파였다. 하고, 노예민주당과 태머니파는 공존공생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케네디가 정권을 잡았던 1960년대까지 아메리카 갱은 미국 정치에서 핵심적인 장치였다. 특히 노예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하려면 루즈벨트, 트루먼, 케네디 할 것없이 선거에서 모두 갱 도움을 받아야만 선거운동이 가능했다. 하위 정당원들 상당수가 갱들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를 모방한 것이 이승만 정권이었던 게다.  헌데, 뉴욕 3대 조폭이 이태리 갱, 아일랜드 갱, 유태인 갱이다.

   

이중 아일랜드 갱(혹은 아일랜드 - 스코틀랜드 연합 갱, 둘 다 구교도 범켈트족이어서.)이 태머니 협회 주류였다. 특히 케네디는 아버지가 아일랜드 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서, 아일랜드인이 유태인, 이태리인처럼 정치적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아일랜드계인 빌 클린턴이 제 2의 케네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예서, 유태인할 때는 루즈벨트 같은 상류층 유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카르타고 유태인이 아니다. 이들 유태인은 동유럽 유태인이다. 국제유태자본과는 별 상관이 없는,  국제유태자본 핵심층이 오히려 경멸하는, 오히려 국제유태자본 때문에 이차대전 때 학살당한 자들이 동유럽 유태인이다. 아무튼 이 시기 태머니 협회는 이태리 갱과 유태인 갱과 경쟁 관계였던 것이다. 그것이 '갱스 오브 뉴욕' 배경 중 하나이다.

   

   

   

   

해서, 루즈벨트가 노예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올 때, 경쟁자가 태머니파 아일랜드 계열 알 스미스였다. 노동법 이야기할 때 나오는 와그너법의 와그너도 태머니파였다. 루즈벨트는 노예민주당 경선 방식 때문에 단일화를 해야 했는데, 이때 루즈벨트는 자신이 유태인이었기에 이태리갱과 단일화를 했던 것이다. 당시 노예민주당이 남부 KKK단과 뉴욕 갱연합을 주요 지지세로 하고 있었기에 루즈벨트는 유태인 로스차일드 후원을 받아 부통령을 남부 백인 깡패들을 대표하는 자로 한 뒤, 뉴욕에서 태머니파를 고립시키는 전술로 이태리 갱과의 연합을 해서 대통령에 당선했던 것이다. 이후, 루즈벨트 보복이 시작한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간 쓸개를 다 내줄 것처럼 하던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경제 공황 물타기를 위한 역점 사업 중 하나로 1930년대, 태머니파 비리를 집중 캐서 태머니파를 쓸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지했던 이태리 갱마저도~! 태머니파야 적이었으니 태머니파는 처분을 감수한 편이었던 반면 계약 위반이다 해서 열 받은 이태리 마피아들이 전면 투쟁에 나서는 바람에 이 시기부터 이태리 마피아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허나, 이때 태머니파가 죽었을까. 죽었다면, 케네디가 대통령에 나설 수 없었다. 케네디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938년에 주영대사로 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 시기 미국 주영대사란 약간 과장해서 말해 미국 대통령과 동격이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차후 케네디 가문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유본 전술은 이런 점에서 놀라운 편이다. 즉, 알 스미스를 철저하게 깨부순 뒤, 같은 아일랜드 계인 다른 자를 대표로 만드는 것이다. 가령 남한에서도 유사했다. 그간 키웠던 이철승을 떡실신시킨 뒤, 쪽발 돼중을 키우는 것이 예다.

   

이때, 케네디가 당선할 수 있었던 배경이 국유본 지지여서 케네디가 유태인 고맙소, 했다. 동시에 케네디 당선에는 마피아도 역할을 했다. 헌데, 케네디도 루즈벨트처럼 입을 싹 닦았다. 역시 또 열 받은 이태리 마피아~!  하면, 여기서 의문을 표할 수 있다.

   

과연 케네디의 재임 중 죽음은 박정희 죽음처럼 계획한 국유본의 기획이었나. 아니면, 재임 중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인가. 인드라가 현재까지 추론한 바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케네디를 죽일 생각이었지 않았나 싶다.

   

예서, 중요한 비교는 재임 중 암살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쪽발 놈현 자살 사건은 쪽발 놈현이 국유본에 대항하려 해서 죽은 건 아니다. 저항하려 했다면, 재임 중 박정희처럼 죽였을 것이다. 허나, 퇴임 후 죽였다는 건, 탄핵 사건처럼 쪽발민주당에 힘을 실어주려는 국유본의 기획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찌라시 한걸레가 국유본 지시를 받았는지 쪽발놈현더러 뒈지라고 칼럼까지 쓰지 않았나? 

   

   

박정희 암살 배후에는 데이비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가 있다면, 케네디 암살 배후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었으리라 본다. 박정희와 케네디는 1917년 동갑내기이다.

   

1973년에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정권 교체했다고 했다. 또한, 정권 교체의 힘은 국유본 귀족이  쿠테타를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이때, 원인은 베트남 전쟁이다.

   

하면, 왜 베트남 전쟁인가.

   

빅터 로스차일드는 미국이든, 소련이든 인기 있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둘 다 강경파여서 강한 힘을 추구하기 바랬다. 그래야 007 제임스 본드 빅터 로스차일드의 가치가 커지는 법이니까. 반면, 국유본 귀족 300인위원회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 때문에 비록 힘이 약화하였지만, 빅터 로스차일드가 무시못할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 한 예로 이차대전 이후 영국 총리의 주요 학력이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 심지어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자손도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이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처럼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서 신세계 질서로의 이행을 재촉했다. 반면, 국유본 귀족 300인위원회는 신세계 질서로의 이행을 지지하지만, 기득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비판적 지지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케네디 때부터 표면화한 것이 아닌가 본다.

   

케네디 재임 기간 중에도 빅터 로스차일드는 미국과 소련을 움직여서 쿠바 위기 등 계속적으로 위기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잘 해결한 셈이지만, 케네디 정권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다시 말해, 케네디 정권은 진보좌파를 지지해주는 척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국유본 귀족과 빅터 로스차일드 합의하에 탄생한 정권이다. 헌데, 빅터 로스차일드는 케네디 정권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체 공화당 정권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이는 케네디 이후 노예민주당 정권이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킨 것과 맥락이 닿아 있다. 이로 인해, 노예민주당 지지율이 굉장히 나빠졌던 것이다.

   

이는 미국에 기반을 두고 노예민주당을 지지해왔던 데이비드 록펠러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300인 위원회 국유본 귀족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국 노동당 페이비언 협회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국유본 귀족인 버트런트 러셀이 1965년 영국 노동당증을 찢어버렸는데,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항의 표시였던 것이다. 우스운 것이 버트런트 러셀이 세습백작 지위를 지니고서 영국 노동당원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 노동당이 얼마나 허구적인 정당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왜인가. 미국과 영국은 이차대전 이후로 양국 정치권이 밀접한 관계이다. 외교적으로는 언제든 협력을 추구했다. 빌더버그 협회 덕분이지만. 해서, 미국 정치권력은 영국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고, 영국 정치권력을 미국 정치권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가령 로즈장학생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 총리가 푸들이란 악명에도 개의치 않고 부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의 대이라크 전쟁을 한결같이 지지한 것이 예다.

   

이런 여건에서 미국 공화당이면 모르되, 영국 노동당처럼 같은 리버럴 성향이라 평가받는 미국 노예민주당 정권이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면, 이는 미국 노예민주당뿐만 아니라 영국 노동당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유본 귀족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나 엘리자베스 시대 모두 국유본 귀족이 겉으로는 영국 보수당을 지지하는 척하나 내심 지지한 것은 영국 보수당이 아니라 영국 자유당이요, 영국 노동당이었다. 정확히는 양당 체제 선호였다. 영국 노동당이 허약하니 영국 노동당을 내심 밀어주어야 간신히 양당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위선 덕분에 국유본이 오늘날 호의호식한다고 본 것이다.  헌데, 영국 노동당마저 무너진다면, 양당 체제가 무너지는 것이요, 이는 국유본 체제의 위기를 도래하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신세계 질서로의 빠른 이행을 위해 양당체제마저 무너뜨릴 작정을 한 듯싶다. 세계가 보다 위기에 놓여야만 세계는 시온의정서가 잘 요약한 국가사회주의체제로 급속히 이행할 것으로 본 것이다.

   

국유본 귀족들은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 역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자들이 오늘날 페이비언 협회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 페이비언 협회와 손잡은 이가 바로 데이비드 록펠러였던 셈이다. 하고, 이들 두 세력이 합작해서 만든 것이 닉슨을 대통령으로 만든 뒤 재임 중 퇴임하게 하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든 뒤 재임 중 암살한 것처럼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당한 것을 그대로 복수한 셈이다.

   

하면, 페이비언 협회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이태리 마피아랑 비슷한 신세인 것 같다^!^ 국유본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냥개에게는 사냥개 취급만 할 따름이다.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동맹이지만,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에는 철저하게 밟아야 하는 것이다.

   

페이비언 협회와 데이비드 록펠러는 한동안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빅터 로스차일드와 싸울 때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 대처를 내세워서 영국 보수당을 엿먹이는 데에 잘 협조한 것 같다.

   

허나, 그 이후는? 페이비언 협회는 두 번 당했다. 한 번은 데이비드 록펠러에 의해서. 부시 정권과 토니 블레어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제이 록펠러에 의해서. 부시 정권 때, 빌 클린턴은 옥스퍼드 대학 총장 후보로 거론한 적이 있었다. 헌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딸을 옥스퍼드에 보낼 정도인데, 왜 이랬을까.

   

한마디로 왜 페이비언협회, 혹은 일부 국유본 귀족들이 록펠러 가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제이 록펠러와 제이콥 로스차일드는 왜 사이가 좋은가?

   

인드라는 그 혐의를 존 콜먼에 둔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존 콜먼의 300인 위원회가 비판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데이비드 록펠러인가, 빅터 로스차일드인가. 둘 다 아니다. 300인위원회요, 옥스퍼드 로즈위원회요, 페이비언 협회인 게다.

   

존 콜먼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그는 과연 어느 세력인가. 그는 누구의 보호를 받길래 암살당하지 않고 여태 살아남을 수 있었나. 하고, 왜 그는 그 누구에게도 고소당하지 않는가~! 비틀즈만 해도 들고 일어날 만큼 엄청난 폭로 사건인데~!

   

용병의 이천년사

http://blog.daum.net/skxogkswhl/12459053

   

백인 노예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94428.html

   

뉴욕시 역사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25900

   

태머니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q=&p=&masterno=154521&contentno=154521

   

Chief Tammany

http://www.freewebs.com/delawarein/delawarechiefs.htm

   

셰이스 반란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08/e2007082817492463820.htm

   

세인트 태머니협회 초기 활동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2081a&top

   

케네디와 마피아 애증 관계

http://blog.joinsmsn.com/nanoda/10362815

   

+ Recent posts